날이 가물어서 동리마다 소동이 대단하다.
정월 대보름날은 하루종일 진눈깨비가 휘뿌려서 송아지 한 마리를 태우는 윷놀이판에 헤살을 놀았었고, 모처럼 풍물을 차리고 나선 두레꾼들을 찬비맞은 족제비 꼴을 만들더니, 그 뒤로 석 달째 접어든 오늘까지 비 한 방울 구경을 못하였다.
“허어 이 날, 사람을 잡으려구 이렇게 가무는 게여.”
바싹 마른 흙이 먼지처럼 피어올라, 풀석풀석 나는 보리밭에 북을 주던 박첨지는 기신 없이 괭이질을 하던 손을 쉬고 허리를 펴며 혼잣말로 탄식을 한다.
그는 검버섯이 돋은 이마에 주름살을 잡으며 머리 위를 우러러본다. 그러나 가을날처럼 새파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찾아낼 수가 없다. 바닷가의 메마른 농촌에 바람만 진종일 씽씽 불어서 콧구멍이 막히고 목의 침이 말라드는 것 같다.
“이런 제에기, 보리싹이 연골에 말라 배틀어지니 올 여름엔 냉수만 마시구 산담메.”
늙은이는 다시 한번 말과 한숨을 뒤섞어 내뿜고는 이제야 겨우 강아지풀 잎사귀 만하게 꼬리를 흔드는 보리 싹을 짚신발로 걷어찬다. 그러다가, 화풀이로 쌈지를 긁어 희연 부스러기 한대를 피워물고 뻐끔뻐끔 빨다가 괭이자루에 탁탁 털어버린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섰다가, 그래도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멍에같이 굽은 허리를 주먹으로 두어 번 두드린 뒤에 손바닥에다 침을 튀튀 뱉더니 다시 괭이를 잡는다.
“참 정말 큰일났구료. 참죽에 순이 나는걸 보니깐 못자리 할 때두 지났는데 비 한 방울이나 구경을 해야 하지 않소.”
곁두리 때가 훨씬 지나도록 바닷가에서 갯줄 나물을 캐어 가지고 들어온 마누라가 영감의 등 뒤에서 반 남아 기운 광주리를 던지고, 기운 없이 밭 두덕에 가 주저앉으며 하는 말이다. 앞니가 몽땅 함몰을 해서, 동리 계집애들은 그를 합죽 할머니라고 놀린다.
“그러게 말이요. 이대루 가물다간 기미년처럼 기우제를 지낸다구 떠들겠는 걸.”
박 첨지는 마누라를 흘깃 돌아다보고 중얼중얼 군소리하듯 한다.
“너구리 굴 보구 피물돈버텀 내쓴다구 동혁이 월급 탈 때만 바라구서 조합 돈꺼정 써 놨으니, 참 정말 입맛이 소태 갔구려.”
영감의 말을 한숨으로 회답하던 마누라는,
“그래두 동혁이가 어떡하든지 우리 양주 배야 곯리겠수?”
“명색이라두 학교 졸업이나 했으면 모를까, 지금 와서 전들 무슨 뾰죽한 수가 있나베. 양식이라구 이젠 묵은 보리 여나뭇 말이 달랑달랑하는데…”
“아뭏든 그 자식이 우리 집 기둥인데 조석 때마다 동리 일만 한다구 몰아세질랑 마슈. 그렇게 성화를 한다구 말을 들을 듯싶우? 제가 하구 싶어서 하는 노릇을. 목이 말러두 주막에 가서 탁배기 한 잔 입에 대지 않는 자식을 가지구서…”
“글쎄, 오늘두 여태 안 들어오는 걸 좀 보우. 아비가 올버텀은 일이 힘에 부쳐서 당최 꿈지럭거리질 못하는 줄 뻔히 알면서 나댕기기만 하니 말이지.”
“그래두 제딴엔 동네에 유조한 일을 한답시구, 밥두 제때에 못 먹구 돌아댕기는 게 난 가엾어 못보겠습디다.”
“아무튼 그놈의 농우횐가 강습횐가 하는 것버텀 없애버려야 해. 동혁이 초사에 동리 젊은 녀석들은 한 놈이나 집에 붙어 있어야지. 밤낮 몰려 댕기며 역적모의하듯 쑥덕공론만 하니, 밥이 생기나 옷이 생기나.”
박 첨지는 혀를 끌끌 차며 젊은 사람들을 꾸짖고 마누라는 아들의 두둔을 하느라고 어느덧 땅거미 지는 줄을 모른다.
맷방석만한 시뻘건 해는 맞은편 잿배기를 타고 넘는다.
“저 해를 좀 보슈. 가물지 않겠나.”
한 쪽을 찌긋한 마누라의 눈에는 흉년이 들 조짐이 보이는 듯하다. 그는 유심히 서녘 하늘을 바라다보다가,
“아, 저어기 동혁이가 오는구료!”
하고 아들의 그림자를 몇 해 만에야 발견한 듯 가벼이 부르짖으며 무릎을 짚고 일어선다.
박 첨지 양주의 눈이 부시도록 넘어가는 석양을 등뒤에 받으면서 잿배기를 넘어오는 동혁의 윤곽은 점점 뚜렷이 나타났다. 회색 저고리 바지에 검정 조끼를 입고 삽을 둘러멘 동혁이는 역광선에 원체 건강한 체격이 더한층 걸대가 커 보인다.
아들이 가까이 오자,
“점심두 안 들어와 먹구 여태 어디서 뭣들을 했니?”
하고 묻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아까 꾸짖던 때와는 딴판으로 부드럽다.
“공동답(共同畓) 못자릴 하려구 물을 푸는데 쌈들이 나서 입때꺼정 뜯어 말리구 왔에요.”
“넌 집의 못자린 할 생각두 않구, 공동답에만 매달리면 어떡하잔 말이냐?”
아버지의 나무라는 말에 동혁은,
“차차 하지요. 물 푸는 게 서투르니까, 어떻게 힘이 드는지…두렁 밑을 파는데두 논바닥이 바싹 말라서 세상 가래를 받아야지요.”
하고 집으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발을 씻고 제 방으로 들어가더니, 기직자리 위에 가 턱 눕는다. 누웠다느니보다도 진종일 지친 팔다리를 쭈욱 뻗고 지쳐 늘어진 것이다. 산울 밖에서 걸귀가 꿀꿀 거리는 소리가 들리건만, 꼼짝도 할 수가 없어서 누워 있노라니,
“저녁 먹어라.”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함께 된장찌개 냄새가 허기가 지도록 시장하던 동혁의 코에 맡혔다. 장물을 찔끔 친 갯줄 나물과 짠지쪽이 반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