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2호선 2억 Km 달성.’
어느 지하철역에 걸려있던 플래카드에 쓰인 문장이다. 저 문장 아래에는 ‘서울메트로’라는, 플래카드 작성기관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 문장 자체만 놓고 보자면 서울 지하철 2호선의 전체 연장이 2억 Km에 이르렀다는 것인지, 아니면 지하철 2호선 건설 이후 지금까지 전동차가 운행한 전체 거리가 2억 Km라는 이야기인지 불분명하다.
물론 저 문장의 의미가 전자일 리는 없다. 지하철 2호선의 연장이 특별히 늘어난 일도 없거니와 설혹 늘어났다 해도 무려 2억 Km에 이르는, 우주적인(?) 규모의 지하철이 서울에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은하철도 999’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서울지하철 2호선 전동차의 누적 운행 거리가 2억 Km에 이르렀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이런 ‘자잘한’ 표현의 문제 가지고 미주알고주알 따지는 것 자체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정서가 있다. 속된 표현대로 ‘콩떡 같이 말하면 팥떡 같이 알아먹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발달할수록 가급적 오해의 여지가 있는, 사람에 따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저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표현은 피하는 게 좋다. 변화 발전의 속도가 빠른 세상에서 오해의 여지를 최소화하는 것이 비효율과 그에 따른 피해를 사전에 예방하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특히 저런 애매한 표현이 산업 현장의 ‘적당주의’와 같은 뿌리를 갖는 것이라면 보다 심각하게, 철저하게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생산력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그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이 정교해진다. 정교하다는 것은 ‘정확도’가 전제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사회에서 두루뭉실한 것은 통하기 어렵다. 두루뭉실한 것이 통한다는 것은 그 사회가 어딘가 정교하지 못하고, 정확하지 못하며 사실상 생산력의 발달을 가로막는 요인이 존재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어느 통신회사의 사옥 벽에는 ‘내 마음대로 즐겨라’는 카피의 인터넷TV 서비스 광고가 걸려 있다. 이 카피 문구는 서울 시내를 달리는 시내버스나 기타 광고 미디어에도 대거 사용된 것으로 안다. 그러니 당연히 눈에 자주 띌 수밖에. 그렇게 자주 저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도무지 ‘독해’가 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저 문구를 지켜봤을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 ‘잘못된 표현’이라고 지적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내 마음대로 즐긴다’ 또는 ‘네 마음대로 즐겨라’라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즐겨라’라니…, 이 표현이 왜 말이 되지 않는지 설명하려고 생각하면 갑자기 절망감이 몰려온다.
언어란 기본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존재이다. 현대 언어학의 절대자(?)인 N.촘스키에 의하면 어떤 문장이 옳은 문장인지 틀린 문장인지 판별하는 객관적인 기준은 존재할 수 없고, 오직 그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력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의 언어 감각으로 봤을 때 분명히 틀린 저 문장을 나머지 국민들은 아무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아닌가? 이래서야 어떻게 소통이 가능할까?
‘염두에 둔다’는 맞는 표현이지만 ‘염두하다’는 표현은 말이 안 된다. ‘염두(念頭)’라는 단어는 동사로 쓰일 수 없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최고 신문이란 곳에서 버젓이 ‘염두하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기야 ‘세월을 헛되이 보낸다’는 의미의 ‘허송세월’이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허송세월을 보낸다’고 표현하는 자칭타칭 지식인들이 넘쳐나는 시대이니 누가 누구를 탓해야 할까?
최근에는 ‘~에 대하여’ 또는 ‘~에 대한’이란 표현의 남발 현상이 두드러진다. 우리말 소유격 ‘의’를 대신하는 표현으로 완전히 자리 잡은 느낌이다. ‘그 내용에 대한 장단점을 소개하고…’는 ‘그 내용의 장단점을 소개하고…’로 쓰는 게 맞다. 심지어 ‘미국에 대한 북한의 정책’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제로는 ‘미국의 북한 정책’을 소개하는 내용인 경우도 있었다.
컨텐츠가 정확하지 않으면 소통은 불가능하다. 논술과 영어 교육의 광풍이 몰아치는 대한민국의 21세기가 오히려 가장 기본적인 소통조차 불가능해진 시대가 되고 말았다는 불안감이 밀려온다.
<2006.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