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usbubengeschichten
루드비히 토마
[소개]
10대 소년인 루드비히의 눈을 통해 바라본 어른들의 허위와 모순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청소년들이 어른들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은 어느 나라나 비슷한 것 같다. 문화적 자부심이 높고, 독일에 대해 감정이 좋을 리 없는 프랑스 청소년들도 "악동 일기는 다른 나라의 작품 같지가 않다"고 대답한다는 조사도 있다. 청소년들과, 그 시절을 기억하는 어른들 모두 유쾌하게, 때론 배꼽을 잡아가며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작가 소개]
루드비히 토마(Ludwig Thoma, 1867-1921) : 독일의 소설가, 극작가. 뮌헨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변호사 개업을 하는 한편 유머에 가득찬 작품을 많이 썼으나 요양지 테게른 호반에서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자연주의적 기풍에 선, 순수한 바이에른 향토 작가이며 거칠고 유머러스한 바이에른 농민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아이러니칼한 필치로 그려냈다. 민화풍의 단편을 모은 <아그리코라>나 <악동 일기>가 특히 잘 알려져 있으나, 시민적 속물성을 비꼬는 희곡 <도덕>도 나중에 관심을 끌었다.
집에서 방학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가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어머니의 얼굴은 마치 내가 어디서 무슨 못된 짓을 저질렀다는 얘기를 들으셨을 때의 그런 표정이었다. 나는 요즘 들어 특별히 문제가 될만한 일을 저지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그런 얼굴을 대하게 되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이번만은 나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프리다 고모 때문이었다.
"얘들아, 큰일났구나. 프리다 고모님이 내일 모레 우리 집에 오신다고 연락을 해 오셨다."
안나도 그 소식을 듣고 얼굴빛이 싹 변했다.
"그 고모가 이리 오시게 되면, 이제 우리 집안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거야. 판사님도 그 고모에게서 싫은 소리를 듣게 되면 우리 집에 발을 끊고 말 거야. 도대체 엄마는 왜 그 고모를 오라고 하셨어요?"
"내가 오시라고 하지는 않았다. 자기가 오겠다고 하고서는 자기 발로 오는 거지. 지금까지 다른 친척들은 초대한 적이 있지만 그 고모는 단 한 번도 오시라고 한 적이 없었어. 언제나 자기 마음대로 오시곤 한 것이지."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렇다면 내가 고모를 쫓아내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했다.
"루드비히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버릇없이 굴어서는 안 된다. 어쨌든 그 분은 돌아가신 너희 아버지의 동생 아니냐? 그리고 너는 아직 그런 집안 일에 나설 나이가 아니란다."
"그렇지만 상대가 프리다 고모라면 얘기가 다르지 않아요? 세상에서 그 고모 좋다는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거에요."
내가 말했다. 안나도 이번에는 나의 말에 찬성했다. 안나는 프리다 고모가 싫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더욱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누나가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오게 하려고 이 문제를 지적했다.
"프리다 고모는 아마 얼씨구나 하고 그 총각 판사를 모욕하려고 들 거야. 그래서 총각 판사가 누나하고 결혼할 마음이 싹 가시게 하려는 거지. 그렇게 되면 아마 고모는 너무 좋아서 신바람이 날걸. 그것만으로도 우리 집에 왔던 보람을 느낄 거야. 고모는 판사를 보면 대뜸 눈이 왜 그러느냐는 둥, 사팔뜨기라는 둥 그런 말을 꺼낼 거야. 그 사람이 기분 나빠할 말부터 꺼내놓을 거라는 얘기야."
그러자 안나가 나에게 소리쳤다.
"그 사람은 전혀 사팔뜨기가 아니야. 이 뻔뻔스러운 망나니 녀석아! 저 녀석은 내가 그 사람하고 결혼하고 싶어한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 뭐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그 얘기를 놓고 수근거리고 있어. 난 몰라. 난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집을 나가서 어디 취직이라도 하고 말 테야."
그러고서는 안나는 엉엉 울었다.
"얘, 안나야, 울지 말아. 하나님의 도움으로 모든 게 다 잘 될 거다. 고모는 그저 잠깐 다녀가시는 건지도 몰라."
고모 이야기를 주고받은 건 월요일이었다. 그리고 수요일에는 드디어 고모가 왔다. 우리 집 세 식구는 역까지 고모를 마중 나갔다. 어머니는 그 때까지도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누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안나야, 제발 겉으로라도 좀 반가운 얼굴을 하고 있어라. 그런 얼굴로 있다간 필경 오늘 중으로 무슨 싸움이 대판 벌어질 것 같구나."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기차가 멈춰 서자 프리다 고모가 맨 먼저 내리면서 소리쳤다.
"어머나 이것 좀 봐. 온 식구가 다 마중을 나와 주었군. 참 반가워요. 나 좀 거들어 주겠니? 내 짐을 좀 내려야겠구나."
고모는 기차 안을 들여다보면서, 거기 서 있는 어떤 사람에게 그 상자가 자기 것이라고 손짓을 했다. 또 좌석 밑에 있는 트렁크와 그 위의 손가방, 그 뒤에 있는 앵무새 새장도 자기 것이라면서, 그걸 좀 꺼내달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은 물건들을 아무 소리 없이 모두 밖으로 내주었다. 고모는 그것을 받아서 모두 내게 떠안겼다. 나는 트렁크가 너무 무거워서 들고 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고모는 이렇게 말했다.
"안나가 너를 거들어 주면 되지 않니? 젊고 튼튼한 것들이 그런 것도 들지 못한다면 말이 안돼. 앵무새 로르는 내가 꼭 들고 가겠다."
그러고 나서 프리다 고모는 우리 어머니에게 키스를 하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형님이 건강한 걸 보니 반가워요. 형님 심장병 때문에 나는 늘 걱정이었다우. 그런데 막상 이렇게 보니까 내가 공연히 걱정을 한 셈이네. 아주 씨름꾼처럼 튼튼해 보이는데요. 형님, 안 그래요? 아이구, 죽겠다... 얘들아, 제발 이 새장 가까이에는 오지 마라. 우리 로르란 놈이 워낙 낯을 가려서 말이야, 낯선 사람이 오는 건 아주 딱 질색이란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받아서 내려놓은 커다란 트렁크를 보더니, 역의 일꾼을 시켜서 운반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프리다 고모는 금방 반대했다.
"아니에요. 형님이 괜한 비용을 쓰시게 할 수는 없어요. 아이들이 잘 나를 텐데 왜 아깝게 돈을 버려요."
안나가 들어보려고 했지만, 그 트렁크는 너무 무거워서 도저히 운반할 수가 없었다. 그 때 역의 일꾼 알로이스가 와서 트렁크를 짊어졌다. 그러자 프리다 고모는 우리가 돈을 너무나 헤프게 쓴다고 나무랐다. 그리고 안나가 그렇게 약할 줄은 미처 몰랐다고 소리를 질렀다. 겉보기에만 멀쩡하지 어렸을 때부터 골골하더니 커서도 이렇게 약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무래도 어머니로부터 심장병을 물려받은 게 아니냐고 떠들었다.
"난 사실 형님이 앞으로 얼마나 더 살수 있을지 그게 걱정이에요. 형님도 허우대만 좋았지, 속은 다 망가진 거나 마찬가지지 뭐에요."
그러자 어머니가 대꾸했다.
"고모도 그런 걱정일랑 마세요. 나는 아주 건강해요. 의사가 진찰해도 나는 아무런 병도 없다고 그런답니다."
"어머나, 그 따위 의사들 말은 하지도 말아요. 의사들은 우리 영감이 죽을 때까지도 아무 탈도 없다고 그랬다구요. 형님도 이제 다 사신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유령이 걸어 다니는 셈이라고 해야 할 거에요."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도중에 안나는 내 귀에 입을 대고 소근거렸다.
"얘, 아직은 좀 더 내버려 두자. 아무래도 고모가 방학 동안 내내 우리 집에 머물러 있을 모양이다. 두고 봐."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곧 떠나시겠지."
"애개개, 배짱 편한 소리 마, 얘."
"곧 떠나지 않는다면 다른 방도를 찾아야지 뭐."
"어떻게?"
"어떻게든지."
누나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믿음직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여느 때는 내 얼굴만 보면 얼굴을 찌푸리던 누나였는데...
"루드비히야, 난 너만 믿고 있을게."
"좋아."
"그래, 어떻게 할 거니?"
"지금은 나도 알 수 없어. 앵무새한테 침이나 자꾸 뱉어줄까? 아니면 그 자식의 털을 다 뽑아서 아주 벌거숭이를 만들어 주던지. 하지만 정작 일을 벌이기 전에는 꼭 집어서 뭘 할 것인지 나도 알 수 없어. 여하튼 고모님이 최고로 약이 오르도록 하는 방법을 연구해 봐야지."
"고모님이 빨리만 떠나가게 무슨 수든 써 다오. 만약 성공한다면 내가 너한테 2마르크 줄게."
누나는 여전히 귓속말로 말했다.
"그거 좋지. 하지만 우선 1마르크 정도 선금으로 주면 좋겠어. 아무래도 비용이 좀 들 것 같으니 말이야."
누나는 집에 도착하는 대로 선금으로 1마르크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집에 도착했다. 빨리 걷지 못하는 어머니는 프리다 고모와 함께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프리다 고모는 현관에 척 들어서자마자 또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이구, 결국 내가 여길 또 왔구나! 지난번에 떠날 땐 이 집에 두 번 다시 발도 들여놓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면 나는 너무 마음도 약해서 탈이야. 그런데 이게 웬일이냐? 웬일로 집안이 이렇게 호사스럽지? 아이구머니나, 세상에 형님, 마루에다 양탄자를 새로 깔았구려!"
어머니는 겨울에 바닥이 너무 차서, 식구들 건강을 위해 양탄자를 깔았다고 했다.
"저걸 깔려면 적어도 1미터에 4마르크는 들지. 1마르크 50페니히만 주어도 좋은 것을 살 수 있는데, 아무튼 형님은 도무지 돈 아까운 줄을 몰라요. 저 비싼 걸 마루에다 온통 깔다니...! 난 가슴이 다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아요. 형님이 무슨 돈이 그렇게 많다고 저렇게까지...!"
프리다 고모의 듣기 싫은 소리는 끝이 없었다. 어머니는 안나나 내가 뭐라고 말대꾸를 해서 싸움이라도 벌어질까 봐, 고모를 얼른 손님 방으로 안내했다. 나는 고모의 짐을 그리로 들고 들어갔다.
고모는 새장을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앵무새를 보면서 말했다.
"자 이젠 다 왔단다. 이 집은 비싼 코크스 양탄자로 마루를 온통 덮을 만큼 부잣집이란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내는 것도 괜찮을 거다."
그러더니 입술을 뾰족하게 만들어서 새장 창살 사이로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 새를 꼬이는 것이었다.
"자, 우리 예쁜 로르, 아줌마하고 뽀뽀를 해야지?"
앵무새는 횃대 위에서 고모의 입술 쪽으로 아장아장 걸어왔다. 그러더니, 부리로 고모의 입술을 콕콕 찍었다. 그 꼴을 보고서 나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결정했다. 하지만 만약 프리다 고모가 사과 상자나, 아니면 최소한 값싼 선물용 과자 상자라도 하나 들고 왔다면 나도 생각이 달라졌을 것이다. 최소한 그런 짓까지 즉각 할 생각은 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고맙게도 프리다 고모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여태까지 한 번도 그래 본 적은 없었다.
항상 맨 손으로 와서는 우리집 식구들만 못살게 신경을 벅벅 긁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또 나는 앵무새란 놈이 도대체 보기 싫었다. 그 커다란 부리며, 요란스러운 목소리가 나는 딱 질색이었다. 나는 앵무새의 털을 두어 개 잡아 뽑으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다. 또 새장 안에다 화약을 넣고 터뜨리면 놈이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해 봤다.
프리다 고모는 내가 뒤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를 챈 모양이다. 고모는 나를 돌아다보면서 말했다.
"이 망나니야, 우리 로르에게는 제발 좀 얌전하게 해다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는 나도 새장 앞으로 걸어가서 입술을 새장 틈에 갖다 댔다. 그러면서 고모처럼 앵무새를 꼬드겨 보았다.
"자, 우리 로르, 나하고 뽀뽀를 한 번 해야지?"
그러나 앵무새는 얼른 뒷걸음질로 달아나더니 한쪽 발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 두 눈을 치켜 떴다. 마치 내가 머지 않아 화약을 그 안에 집어 넣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동작이다.
"얘, 얘, 넌 어서 저리 비켜라. 네 악마 같은 얼굴을 보면 우리 로르가 기절할지도 몰라."
나는 킬킬 웃으면서 내 방으로 갔다. 그리고 고모는 어머니가 있는 거실로 나갔다. 나는 이 때다 하고 얼른 고모 방으로 들어갔다. 가서, 주전자에서 물을 한 입 담아 물었다. 그리고 새장 앞으로 갔다. 앵무새는 또다시 뒤로 멀찍이 물러갔다. 그러나 그래 보았자 같은 새장 안이다. 나는 놈에게 물을 뿜어 흠뻑 젖도록 만들어 주었다. 앵무새는 머리를 흔들며 날개만 퍼득거릴 뿐, 소리도 못 질렀다.
그러고 나서 나는 재빨리 거실로 건너갔다. 어머니는 고모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고, 요즘 지내기가 어떠냐며 이야기하시는 중이었다.
"그저 죽지 못해 사는 거지 어떻게 지내겠어요."
고모는 돈도 없고, 연금 수당도 얼마 되지 않아 절약을 하지 않으면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고모부 요제프가 살았을 때 저축을 좀 해 두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요제프 고모부는 수입이 적은데도 그 돈으로 담배를 사 피우고, 1주일에 두 번씩이나 술집에 드나들어 한 푼도 저축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면 친정 집이라도 넉넉해서 도움을 받아야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우리 집 돈은 얘들 아버지가 공부를 한답시고 모두 날려 버렸지 뭐에요. 그러니, 뭐 어디 가서 기대볼 수나 있나요?"
이 말에 어머니는 펄쩍 뛰었다.
"아니, 얘 아버지가 공부하느라고 돈을 다 썼다니요?"
"그럼 다 썼지요. 우리집 그 많던 재산을 다 날린 게 우리 오라버니, 얘들 아버지에 누구겠어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공부하면서 집에서 돈을 가져다 쓴 것은 한 푼도 없었다고 말했다.
"아니, 우리 오라버니 총각 때 일을 형님이 어떻게 그리 잘 아신다고 그러세요?"
"그 이가 자기 공부하던 때 얘기를 가끔 했으니까 잘 알지요. 그이는 라틴어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장학생이었어요. 그리고 나머지 학비와 하숙비는 가정 교사를 하면서 벌었어요. 대학에 가서도 그랬구요. 대학에 다닐 때는 어떤 남작을 가르쳤다는 얘기도 해주셨어요."
"흥, 오라버니가 꽤나 허튼 소리를 했나 보군. 집에서 학비를 한푼도 가져다 쓰지 않았다구요?"
"그래요. 오히려 가정 교사 노릇을 해서 집에다 매달 얼마씩은 보냈다고 그러시더군요."
"허허,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요! 오라버니도 어쩌면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형님한테 뻥뻥 했을까."
프리다 고모는 음식을 입에다 꾸역꾸역 처넣으면서 그 사이사이에 대꾸를 하곤 했다. 어머니는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졌다. 고모가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해 대는 것이 너무 불쾌했던 것이다.
"프리다 고모, 돌아가신 분을 그렇게 중상모략하는 게 아니에요! 그이는 평생 거짓말이나 허튼 소리는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다구요!"
프리다 고모는 입으로 순대를 씹느라고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음식을 목구멍으로 씹어 삼키자마자 코를 한 번 비비고 나더니 또다시 험담을 시작했다.
"좋아요, 그건 그렇다고 칩시다, 형님. 오라버니가 가정 교사를 하면서 대학까지 다녔다고 그럽시다. 그렇다면 그 많던 우리 집 재산은 다 어디로 간 거에요? 그건 형님보다 내가 훨씬 잘 알아요. 형님은 그 때 우리 오라버닐 알지도 못했잖아요. 하지만 나는 그 양반 동기간이잖아요. 누가 더 잘 알겠어요? 우리 여자 형제 셋은 오라버니 뒤치닥거리 하느라고 재산 한 푼 나누어 받지 못했다구요!"
"세상에, 고모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아니에요. 고모네들 시집갈 때 집 한 채씩 사고도 남게 지참금을 가지고 간 것은 왜 생각하지 않아요?"
"집 한 채 사고도 남을 지참금이라고요? 아이고 맙소사. 아이고 하나님! 이건 어처구니가 없어서 도대체 말도 안 나오는군. 내가 그렇게 지참금을 가진 처녀였다면 왜 그때 판사 시보로 있던 뢰머 씨와 결혼을 못했겠어요? 그 양반은 지금 안스바하 시에서 참사관을 지내고 있다구요. 정말 남부러울 것 하나도 없이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어요.
집 한 채 값은커녕, 나한테 재산이 요만큼만 있었어도 그이는 나하고 결혼했을 거에요. 그런데 그 결과가 어때요? 내가 그이하고 결혼을 했어요? 겨우 우체국 화물계원하고 결혼을 했지 않아요."
"세상에 어쩌면! 그래 고모는 죽은 남편을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 사람과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지 않아요?"
"내가 지금 죽은 남편한테 뭐라고 그러는 건 아니에요. 그저 우리 형제들이 우리집 재산을 그렇게 모두 써버리지만 않았다면 난 지금 참사관 부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라구요."
나는 프리다 고모가 우리 아버지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마구 해대는 것을 듣고 몹시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당장 앵무새 새장에다 불꽃놀이를 해대던가 물이라도 한 바가지 더 부어줄까 생각했다. 그러나 마침 그 때 어머니가 밖으로 나가셨기 때문에 기회가 좋지 못했다. 어머니가 자리를 뜨자 프리다 고모도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구석구석 살피기 시작했다.
벽에 걸린 사슴 트로피 밑에는 아버지의 대학 시절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버지는 대학 교모를 쓰고, 허리에 칼을 차고 가죽 장화를 신은 차림이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처음 보았을 때의 모습이 바로 그 사진과 같았다고 한다. 사진 속 아버지는 카니발 행사의 횃불 행진을 하는 모습이었다. 프리다 고모는 그 사진을 보더니 또 입을 비쭉거리기 시작했다.
"이것 봐라, 루드비히야! 저게 너희 아버지란다. 저 사진만 보아도 너희 아버지가 대학생 때 돈을 얼마나 함부로 뿌리고 다녔는지 알 수 있지 않니."
나는 속으로 다시 한 번 복수를 다짐했다. 그 때 프리다 고모는 아버지 사진 밑 벽난로 선반 위에 놓여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요즘 우리 누나와 친하게 지내는 총각 판사 시타인베르거의 사진이었다. 고모는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우리집에 자주 놀러 오는 총각 판사라고 말했다.
"너희 집에 자주 놀러 오는 총각 판사라구?"
그러면서 고모는 한참 동안 눈을 깜박거렸다.
"그 사람이 너희 집에 왜 자주 오는 거니?"
"커피도 마시고 뭐 그러려고 오는 거죠 뭐. 우리 엄마랑 아주 친해요."
그러자 프리다 고모는 알겠다는 듯이 심술궂은 얼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에?"
고모는 사진을 집어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머리가 너무 많이 벗겨졌고, 엄청난 사팔뜨기에다, 술꾼처럼 살이 쪘다며 흉을 보는 것이었다.
"원, 세상에... 젊은 사람치고 이처럼 볼품없는 사람도 드물겠다. 안 그러냐?"
나 역시 시타인베르거가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 작자가 무척 힘이 세게 생기고 덩치가 큰데다가 나더러 누나에게 착하게 굴지 않으면 개울에 던져 버리겠다고, 재미없이 으르렁거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작자 생긴 것을 보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으로 생겨먹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누나 앞에서 그 자의 사팔뜨기 눈을 흉내내곤 했다. 그러면 누나는 악을 쓰곤 했다. 하지만 프리다 고모가 이렇게 그 작자를 헐뜯는 것을 들으니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어머니와 누나에게 고모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두 사람이 다 소리소리 지르고 눈물을 뿌리게 될 것이 뻔하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일부러 망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잠시 후 어머니가 다시 방으로 들어오셨다. 어머니는 고모의 손을 잡으면서 화해를 부탁했다.
"아까는 내가 화를 내서 미안해요. 다 내 잘못이니 이제 그만두자구요."
프리다 고모는 또 코를 비볐다. 프리다 고모가 코를 비빈 다음에 그 아래에 붙은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언제나 향기롭지 못한 것들 뿐이다. 아니나다를까, 자기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 것 뿐이라고 우겼다. 그러면서 우리 아버지야말로 누이동생들이 제대로 시집도 가지 못하게 만든, 비난 받아서 마땅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먼저 화해하자고 말을 꺼내셨는데도 다시 그런 험담을 들고 나오는 것은 정말 비열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나는 곧장 거실에서 나왔다.
"루드비히야, 곧 식사를 할 텐데 어딜 가는 거니?"
어머니가 등 뒤에서 큰 소리로 물었다.
"불규칙 동사 변화를 얼른 좀 들여다보아야겠어요. 배웠던 게 있는데, 딱 하나가 생각나지 않아서 그래요."
그러자 어머니는 즐거운 듯 미소를 지으며 좋아했다.
"그래야지, 식사를 뒤로 미루면 미뤘지 공부는 뒤로 미루는 게 아니야. 어서 가서 공부해라. 너 올 때까지 우리도 식사하지 않고 기다릴 테니까."
"아니에요. 식사 들어오기 전에 금방 끝나요."
나는 요란하게 발소리를 내면서 내 방으로 가서 방문을 일부러 큰 소리 나게 열었다 닫았다. 그러고는 발끝으로 가만가만 걸어서 고모의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서는 내가 정말 정신을 차려가는지, 요즘 제법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어머니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새장 안 횃대에 올라 앉아 있던 앵무새는 나를 보더니 부리나케 뛰어내려 한 구석으로 피해 몸을 사렸다. 나는 주전자째 들고 가서 새의 머리통에다 물을 부어 주었다. 앵무새는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놀랄 만큼 큰 소리로 휘파람 같은, 휙! 휙! 하는 소리를 냈다. 마치 내가 손가락 두 개를 입에 넣어 휘파람을 불 때와 비슷한 소리다. 그러더니 앵무새는 다시 소리쳤다.
"로르 - !"
나는 그 순간 잽싸게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펴 들었다. 그때 앵무새가 다시 한 번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거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모가 급히 달려오면서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아이구머니나! 도대체 우리 로르가 왜 나를 부를까?"
그리고 한참 동안은 조용했다. 그러더니 곧 프리다 고모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세상에 이게 무슨 몹쓸 짓이야, 이 가엾은 새를!"
프리다 고모는 큰 소리로 어머니를 부르더니 로르가 흠뻑 젖은 꼴을 좀 보라고 소리쳤다. 그러면서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개망나니 외에는 이런 짓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것은 물론 나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내 방 앞으로 오시더니 문을 열고 나를 들여다보았다. 나는 정말 불규칙동사를 외우는 것처럼 혼자서 입 속으로 뭔가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시더니 혹시나 해서 물었다.
"루드비히야, 네가 앵무새에게 물을 끼얹어서 흠뻑 젖게 만들었니?"
나는 공부에 정신이 팔린 체하면서, 고개를 건성으로 들어 보였다. 물론 어머니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앵무새 말이에요?"
"고모님이 갖고 오신 앵무새 말이다."
"그게 도대체 어떻게 됐는데요?"
"갑자기 물벼락을 맞아 함빡 젖지 않았니. 그래서 혹시 네가 그러지 않았나 해서 지금 물어보는 거야."
나는 그 소리에 기분이 몹시 상한 체하면서 이렇게 대꾸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무슨 일만 생겼다 하면 모두 다 내가 했다고 그러는 거에요? 난 지금까지 내 방에서 불규칙 동사를 공부하고 있었어요. 이제 간신히 외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놈이 어떻게 또 동시에 그 방에 나타나서 앵무새에게 물을 끼얹을 수 있겠어요?"
그러나 어머니 뒤에 서 있던 프리다 고모는 내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소리소리 질러댔다.
"네가 아니면 그래 누구란 말이냐! 누가 그랬단 말이야?"
"글쎄요. 알 수 있나요? 하지만, 아마 이 근처에 사는 다른 개구장이들이겠지요. 요즘 그 녀석들 한창 물총 장난을 하고 다니거든요. 아주 멀리까지 물을 쏘아댈 수가 있어요."
"그렇다면 어디 같이 가보자! 가서 조사를 해 보잔 말이다!"
프리다 고모는 악을 썼다. 그래서 나는 프리다 고모 방으로 함께 들어 갔다. 내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앵무새는 금방 머리를 날개 밑에 처박으며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면서 나를 겁먹은 눈초리로 두리번두리번 쳐다봤다.
"자, 저것 좀 봐요, 형님! 이 녀석이 여기 왔던 거지 뭐에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로르가 이 녀석을 보고 저렇게 겁을 내겠어요? 우리 로르란 놈은 아주 영리해서 자기를 해친 녀석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구요!"
프리다 고모는 앵무새와 어머니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어머니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나를 믿어주셨다.
"글쎄, 앵무새가 우리 루드비히를 보고 그러는 것 같기는 한데요... 하지만 우리 루드비히는 제 방에서 불규칙 동사 공부를 하고 있었잖아요?"
"아이고, 형님은 그저 언제나 아이들 말만 믿는구려. 그래 놓으니 아이들이 모두 그 모양 그 꼴이 되는 거에요."
나는 창문을 살폈다. 다행히도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보세요, 고모님. 창문이 열려있잖아요. 이렇게 창문이 열려 있는 것으로 봐서 아이들이 지나가다가 울타리 너머로 물총을 쏜 것이 틀림없어요."
"이 녀석아, 허튼 수작 하지도 마라!"
프리다 고모는 아이들이 물총을 쏴서 맞히기에는 울타리가 높고 멀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창문이 전혀 젖지 않은 것을 보면, 내가 한 일이 뻔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고모가 보기는 제대로 본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러지 않았다고 버티는 데야 별 재주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프리다 고모가 심술궂다고 해도 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물총을 아주 잘 쏜다구요. 아무리 목표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한 번 겨냥을 했다 하면, 어김없이 맞힌단 말이에요. 그리고 나는 절대 이 방엔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어른들도 안 계신데 제가 이 방에 무엇 때문에 들어오겠어요?"
"뭣하러 오기는 뭣하러 와? 우리 로르한테 물벼락을 주려고 온 거야!"
"아니, 왜요? 제가 왜 고모님 앵무새에게 물벼락을 꼭 준다는 거에요? 전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고모님이 저한테 뭐 그렇게 미운 털이라도 박히셨다는 건가요? 전 도대체 잘 모르겠어요."
문 있는 곳에서 들여다보고 있던 누나는 좋아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 때 테레즈 할멈이 수프를 식탁에 올려 놓았으니 모두 식사하러 오라고 불렀다. 그래서 앵무새의 물벼락 사건은 그걸로 일단 끝이 난 셈이었다. 우리는 모두 식탁으로 가야 했고, 식탁에서는 식탁에서의 이야기가 나올 것이었으니까.
앵무새는 우리가 그 방에서 나갈 때까지도 몸을 부르르 떨며 날개털을 추스리고 있었다.
"우리 불쌍한 로르, 이젠 겁낼 것 없다. 내가 다시는 물벼락을 맞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프리다 고모의 말이었다. 물론 그러시겠지. 프리다 고모는 앵무새를 얼러주더니, 이번에는 나를 무섭게 쏘아 보았다. 앵무새란 놈도 나를 아니꼽게 노려보았다. 그렇지만 이제 두고 봐라. 내가 이제 화약을 터뜨리는 날에는 감히 날 쳐다보지도 못할 테니까. 왕창 겁을 먹게 만들어주마...
프리다 고모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고모의 코끝이 아주 하얗게 변한 걸 보면 그걸 알 수 있다. 고모는 숟가락으로 신경질적으로 수프를 저었다. 어머니는 프리다 고모에게, 무사히 도착한 즐거운 기분을 망치지 마라고 말했다. 그러자 프리다 고모는 자기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어머니가 먼저 화를 냈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짐승을 못 살게 구는 집에서는 기쁠 일이 전혀 없다고 대답했다.
"이봐요, 고모. 앵무새 몸이 물에 좀 젖은 것 뿐인데 뭘 그러세요."
어머니의 말이었다. 누나도 목욕을 좀 하는 것은 새에게 별로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자 프리다 고모는 우리가 자기를 그렇게 적대시해도 별로 놀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자기는 이미 그런 데 만성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는 것처럼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물론 그 눈에서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옆에서 똑바로 지켜보았기 때문에 잘 안다. 프리다 고모는 남을 울릴 줄만 알았지, 자기가 울 줄은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프리다 고모의 연극에 속아넘어갔다. 그리고 고모를 가엾게 여겼다. 어머니는 우리 집 식구들이 아버지와 남매 간인 고모를 모두 좋아한다, 그러니까 고모 집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편하게 지내시라고 말했다.
그러자 프리다 고모는 이번만은 우리들을 용서해 주겠다고 말했다. 우리 가족이 그 동안 자기에게 한 일들은 이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더니 프리다 고모는 갑자기 명랑해졌다. 그것은 그 때 마침 구운 고기가 들어와서, 이빨로 물어뜯을 것이 생긴 까닭만은 아니었다. 고모는 벽난로 위에 있는 총각 판사 시타인베르거의 사진이 생각났던 것이다. 고모는 그 사진을 포크로 가리키면서 말문을 열었다.
"저기 저 사람은 어쩌면 저렇게 못생겼다죠? 사람이 저렇게 못생기기도 쉽지 않은 노릇일거에요."
"어디 누구 말이에요, 고모?"
어머니는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아 저기 저 벽난로 위 사진 속 남자 말이에요. 원 끔찍스럽게 못생긴 남자더군요. 눈은 사팔뜨기고, 이마는 툭 불거져 훌렁 까졌고, 볼때기에는 살이 뒤룩뒤룩 하잖아요. 꼭 무슨 벌레 같아요. 그게 어디 사람 얼굴이에요? 저런 사진을 집에다 뭣 때문에 걸어 뒀어요?"
어머니는 얼굴이 빨개졌다. 안나 누나는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뛰어 달아났다. 방문을 통해 안나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는 옷깃을 가다듬더니, 시타인베르거는 우리 집에 자주 오는 손님으로, 결코 남보다 못생긴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지만 툭 불거져 나온 이마가 훌렁 까진데다가, 눈은 사팔뜨기고, 살은 돼지 배때기처럼 흐늘흐늘하지 않아요?"
"그 사람은 사팔뜨기가 아니에요, 고모. 사진이 잘 안 나와서 그렇게 보이는 거에요. 그리고 그 사람과 사귀는 것 자체가 명예스러운 일이라구요. 그 사람은 젊은 나이에 법원 판사가 된데다, 법학 박사에요. 아주 유능한 사람이랍니다."
프리다 고모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 때문에 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외모로 보아서는 어디까지나 추물인 것이 사실이고, 조금도 유능하거나 훌륭해 보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람이라는 건 그래요. 겉을 보면 속도 알 수 있는 거에요. 난 내가 본 것만 믿지, 남의 소리는 누가 뭐라고 그래도 믿질 않아요. 저 사람 생긴 걸로 봐서 술깨나 좋아하는 주정뱅이 같군요.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해도, 얼마 안 가서 그 못 생긴 얼굴을 시궁창에다 처박고 말 거에요. 그 얼굴에 그러면 제격이겠지."
그러자 어머니도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문턱 있는 데서 이렇게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고모가 오랜만에 오셨으니, 고모가 우리 집에 머무는 동안만은 싸우지 않고 잘 지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하지만, 그게 이렇게도 어려울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러고 나서 복도에서 어머니와 안나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는 뭐라고 달래고 있었지만, 안나는 여전히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그러나 프리다 고모는 그제서야 기분이 유쾌해진 것 같았다. 고모는 식사를 계속하면서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연방 갸웃거렸다.
"얘, 루드비히야. 네 누나 안나가 벌써부터 저런 병이 있는 모양이구나."
"무슨 병 말이에요?"
"글쎄, 걸핏하면 우는 그런 병 말이다."
"아뇨, 누나는 전혀 아프지 않아요."
"네가 모르는 소리다. 네 누이는 신경이 너무 허약해. 그러니까 저렇게 별안간 울어대곤 하지. 나는 항상 그 애가 너무 약질이라고 생각해왔어. 정말 사람 구실 하기는 힘든 아이지. 제 구실을 할 아이라면 그래 내 트렁크조차 들지 못할 리가 없지 않니."
그 때였다. 어머니가 당황한 얼굴로 허둥지둥 들어오셨다. 그러더니 프리다 고모 보고, 지금 시타인베르거 판사가 커피를 마시러 오셨다면서, 제발 이 때만은 좀 점잖게 행동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자 프리다 고모는 모욕을 당했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형님, 형님은 내가 우체국 화물계원하고 결혼했다고 해서 날 점잖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하지만, 나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쯤은 잘 아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판사다, 박사다 하는 것들 한 꺼풀 벗기고 보면 우체국 화물계원이나 별다를 것도 하나도 없다구요."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맸다. 고모를 이대로 버려 두고 손님을 맞으러 나가야 할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 해서든 고모의 심술을 이 자리에서 아주 막아 놓아야 할 것인지 알 수 없어 엉거주춤한 채, 고모에게 그만 떠들라고 자꾸 손짓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모는 한층 더 신이 나서 보통 때보다 더 큰 소리로 계속 떠들었다.
"한 꺼풀 벗기고 보면 사실이 그렇다구요. 게다가 대머리에다 사팔뜨기면, 우체국 화물계원 자격도 안 되는 추남이지 뭐야."
어머니는 절망적인 눈길로 프리다 고모를 건너다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 시타인베르거가 누나의 안내를 받으며 거실로 들어왔다. 누나의 눈은 아직도 눈물이 마르지 않은 채였다. 눈 가장자리도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머니는 이제 울 수도 없어서, 할 수 없이 유쾌한 것처럼 웃어 보이면서 시타인베르거를 맞이했다.
"시타인베르거 판사님, 이렇게 찾아주셔서 반갑습니다. 우리 시누이 프리다를 소개하죠. 전에도 말씀 드린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시타인베르거는 프리다 고모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시타인베르거입니다. 전에 말씀은 들었지만, 오늘 처음 뵙는군요. 영광입니다."
프리다 고모는 마치 시타인베르거의 옷 치수라도 재는 것처럼 그를 아래위로 깐깐하게 뜯어보았다. 시타인베르거는 고모를 알게 되어서 매우 기쁘며, 이 곳이 고모의 마음에 드시기를 바란다고, 깎듯이 인사를 드렸다. 프리다 고모는 자기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면서, 자기 앵무새가 피해를 입지만 않으면 자기도 이곳이 마음에 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시타인베르거는 프리다 고모의 말을 끝까지 듣지는 않았다. 안나의 눈이 빨갛게 된 것을 본 것이다. 그는 안나의 눈이 왜 그렇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안나는 부엌에서 연기가 나서 그렇다고 했다. 그러자 프리다 고모는 대번에 안나의 신경을 들고 나왔다. 저렇게 신경이 약해서 걸핏하면 울어대서야 결혼을 해서 남편을 섬기기는커녕, 오히려 남편이 안나를 섬겨야 겨우 살까말까 하다는 얘기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프리다 고모를 화난 눈으로 쏘아보면서 말했다.
"고모, 고모가 도대체 우리 안나 신경에 대해서 뭘 한다고 그러세요? 안나는 몸도 건강하고, 신경도 건강한 아이에요. 우리 집안 일을 안나가 모두 도맡아 하지만, 지금까지 안나가 힘들어 하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어요."
프리다 고모는 그러나 사실을 자기가 잘 안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 때 안나는 커피를 끓여 오겠다면서 부엌으로 나갔다.
시타인베르거는 프리다 고모에게 어디 사시느냐고 정중하게 물었다. 프리다 고모는 에르딩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그곳이 물가가 싸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우린 정부에서 받는 연금이 몇 푼 되질 않거든요. 그런데 젊은 판사님께서는 혹시 안스바하에 가 보신 적이 있으세요?"
시타인베르거는 그 곳을 한 번 지나간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혹시 뢰머 씨를 아시는지 모르겠군요?"
"뢰머 씨요?"
"그래요. 오스카 뢰머. 지금 그곳에서 참사관으로 있는 분 말이에요."
"전 잘 모르는 분인데요."
"그렇게 유명한 분을 댁이 모르신다니 이상하군요. 더구나 관리로 일하시는 분이 그 분을 모르신다니, 그건 말도 안 된다구요."
"저는 그 고장을 그저 한 번 스쳐 지나친 적밖에 없어서요."
"그래도 그래요. 누구나 한 자리 하는 관리라면 그 분을 다 잘 알 텐데."
"저야 이제 겨우 올챙이 판사에 불과합니다. 어디 한 자리 하는 관리라고 할 수야 있나요. 저 같은 놈이야 그런 높은 분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요."
시타인베르거는 어느 때보다도 늠름하게 말을 잘 받는 것처럼 보였다. 프리다 고모는 자기가 바로 그 뢰머 씨의 부인이 될 뻔했던 여자라는 말을 기어코 시타인베르거에게까지 하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은 모두 오빠들 때문이라우. 내 위로 오빠가 둘 있었는데, 그 둘이 공부를 한답시고 우리집 재산을 탕진해 버린 탓이지요."
시타인베르거는 그러시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평소 시타인베르거가 집에 오면 안나가 그와 함께 있도록 하고, 손수 나가서 커피를 끓였다. 그러나, 오늘은 도중에 한 번도 부엌에 나가 보려 하지도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프리다 고모를 도무지 믿을 수 없기 때문인 것 같았다. 프리다 고모가 또 무슨 말을 해서 실례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프리다 고모 쪽으로 의자를 바싹 당겨놓고 앉아 고모에게 연달아 질문을 해댔다. 산림 감독 마이어 씨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그의 부인은 건강한가, 애들은 어떤 학교에 아니는가, 또 지금도 좋은 포인터 개를 기르고 있는가 등등...
프리다 고모는 그래서 계속해서 그 말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프리다 고모는 대답을 마치는 즉시 시타인베르거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그럴 여유를 주지 않고 즉시 또 다른 걸 묻곤 했다. 그러는 동안 멀거니 앉아 있던 시타인베르거는 부엌에 가서 연기 나는 것을 살펴보고 싶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기분 좋게 웃으며 어서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그가 나가자, 어머니는 그가 이렇게 사람이 침착하고 참하다고 칭찬을 했다. 그러나 고모는 여전히 밉살스러운 말만 꺼냈다.
"난 또 사진이 잘못 나온 거라고 해서 실물이 사진보다 나은 줄 알았지 뭐유. 이제 보니 그 반대구려. 실물이 오히려 훨씬 더 사팔뜨기가 심하지 뭐야."
그러나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화도 내지 않았다. 고모에게 산림 감독 마이어 씨나 그의 개나 그의 아이들에 대해서 묻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고모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조차도 싹 무시한다는 듯, 혼자서 뜨개질만 열심히 했다. 프리다 고모는 몇 번 더 말을 내뱉어 보았지만, 어머니가 전혀 상대를 해주지 않자 머쓱해지는 모양이었다.
그 때 안나가 쟁반에 커피 주전자와 커피 잔을 받쳐들고 왔다. 시타인베르거는 그 뒤에 따라 들어오면서 자기가 뭐 거들어 줄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모두 자리에 앉자 우리는 커피를 마셨다. 어머니는 프리다 고모와 나 셋이서만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사람이 된 듯, 시타인베르거가 무슨 소리만 하면 즐겁게 웃었다. 안나도 웃었다. 그러나 프리다 고모만은 웃지 않았다. 웃는 대신 무슨 고약한 계획을 세우는지 코만 비벼댔다.
어머니는 프리다 고모에게 커피 맛이 어떠냐고 물어 보았다. 고모는 맛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자기네가 받는 연금으로는 커피를 사 마실 수가 없어서, 그런 것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시타인베르거가 입을 열었다.
"그것 참 안 됐군요. 이 집 커피는 세상에서 제일 맛이 좋은 커피인데, 그걸 모르시다니요. 특히 안나 양이 끓였을 때는 그 맛이 더욱 좋지요."
프리다 고모는 시타인베르거에게 언제나 그렇게 커피를 즐기느냐고 몰었다. 시타인베르거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프리다 고모는 깔깔 웃으면서 남자들은 커피는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는 시타인베르거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특히 대학을 나온 남자들은 대학 시절에 맥주를 퍼 마시던 버릇 때문에 맥주나 좋아하지, 커피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시타인베르거도 웃으면서, 자기는 부자가 아니어서 맥주는 못 마시고, 커피만 마시면서 대학을 다녔다고 말했다. 그러나 프리다 고모는 그 말을 전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왜 믿을 수 없다는 거죠, 고모? 술을 좋아하고 안하고는 체질에 따라 다른 거에요. 다른 사람들이 다 좋아해도 내가 싫으면 그만인 거에요, 고모."
어머니의 말이었다. 그러나 프리다 고모는 고개를 저었다.
"시타인베르거 씨, 당신이 우리 형님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 눈은 못 속여요. 판사님이 아무리 그런 소리를 해도, 그게 거짓말이라는 건 판사님 이마에 다 씌어 있어요. 술 퍼 마시고 나쁜 짓 안 한 사람이 그렇게 머리가 벗겨졌을 리 있나요. 판사님의 머리를 보니 어지간히 마시고 놀았겠소."
"어머나, 고모!"
안나는 비명을 질렀다. 어머니도 목소리를 높였다.
"이봐요, 프리다!"
그러나 프리다 고모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왜들 그래요? 농담 한 번 한 걸 가지고. 그리고 또 술 마시고 바람 피우기 좋아하면 머리털이 빠지는 것은 사실이에요."
나는 시타인베르거가 골을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껄걸 웃으면서, 자기는 그렇지 않아도 그런 의심을 자주 받는데, 머리가 빠진 것은 학생 때 장티푸스를 앓아서 그렇지 다른 이유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가 봐야겠다면서 일어났다. 그는 우리 어머니 손에 키스를 했고, 프리다 고모에게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를 데리고 현관까지 나가더니 이렇게 말했다.
"너도 힘들겠다. 손님이 저 정도면 얌전하게 참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 안 그러냐, 이 사고뭉치야?"
안나는 그를 현관 밖까지 배웅했다. 나는 먼저 거실로 돌아갔다. 어머니가 프리다 고모를 나무라고 있었다.
"프리다 고모, 고모는 너무했어요. 그 사람이 화가 나서 가 버린 거라면 나는 이제 고모하고는 영영 잘 지낼 수 없어요."
그 때 안나가 들어오더니 소파 위에 쓰러져 엉엉 울었다. 그리고 시타인베르거가 이제 다시는 우리 집에 커피 마시러 오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오늘은 평소 때보다 일찍 서둘러 가 버린 것을 보면 자기는 잘 안다고 했다.
프리다 고모는 자기 손으로 커피를 한 잔 더 가득 따르더니, 자기는 이렇게 신경이 약한 가정을 아직 본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이 어디 있든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고모의 그 질긴 신경을 따끔하게 해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얼른 밖으로 나왔다. 나는 방으로 가서 화약을 꺼냈다. 나는 심지도 가지고 있었다. 숲 속에서 불개미 집을 터뜨려 공중에 날릴 때가 가끔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화약을 종이로 말고, 그 속에 심지를 끼워 넣었다. 그러고 나서 프리다 고모의 방에 들어가 새장 안에다 그걸 집어 넣었다. 심지는 너무 길어서 새장 밖으로 늘어졌다. 적어도 5분 동안은 탈 것 같았다. 내가 화약을 장치하는 동안 앵무새는 새장 꼭대기로 기어 올라가 주둥이를 딱 벌리고 고양이처럼 헉헉거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복도로 나가서 누가 오지 않나 귀를 기울였다. 아무 기척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 성냥불을 당겨 심지에다 갖다 댔다. 심지에 즉시 불이 붙어 연기를 뿜기 시작했다.
앵무새는 이제 횃대 위에 내려와 있었다. 놈은 고개를 삐딱하게 돌린 채 나를 주의해서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가 심지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자 높은 곳으로 가서 머리를 새장 밖으로 내밀고, 연기를 내려다보았다. 앵무새란 놈도 오래지 않아서 연기가 나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얼른 방에서 나왔다.
나는 거실로 가만히 들어갔다. 안나는 아직 울고 있었고, 어머니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프리다 고모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잠시 나갔다가 들어온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고모는 그 때 무슨 말을 하다가 중단했는지, 그 말을 다시 잇고 있었다.
"이 집에서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다 누구 탓이겠어요? 오라버니 탓이라구요. 공부한다고 돈을 다 써 버리고 나서는, 누이동생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은 게 우리 오빠에요. 그래서 나는 이 모양 이 꼴로 이 집에서 천대나 받게 된 거구요."
어머니는 우리 아버지가 고모 때문에 이만저만 걱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고모는 입버릇이 고약해서 아무 데나 가서 있을 수 없는 여자라고 가끔 한탄하곤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더니 프리다 고모는 커피 스푼을 식탁 위에 내던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자기가 어떻게 생겨먹었건, 자기 동생을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야비하기 짝이 없으며, 염치 없는 사람이라고 거품을 물었다.
"처음에는 돈을 다 써 버리고, 그래서 좋은 자리에 시집도 못 가게 해 놓더니, 나중에는 내가 어떻다고? 그런 소리를 하면서도 자기가 사람이라고 생각했나!"
바로 그 때였다. 무언가 둔하게 터지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퍽, 퍼퍽, 퍼퍼퍽...'
그때 테레즈 할멈이 소리를 지르면서 들어왔다. 그리고 열린 방문으로 화약 냄새가 지독하게 풍겼다. 복도를 내다보니 연기가 가득했다. 내가 프리다 고모의 방문 닫는 것을 잊은 탓이었다. 테레즈 할멈은 뭔가 폭발했다고 소리를 질렀다. 불이 난 모양이라고 했다.
"어디요, 어디에 불이 났어요?"
울고 있던 안나도 후닥닥 뛰어 일어났고, 식구들은 모두 복도로 뛰쳐나갔다.
"어머나 이걸 어쩌나! 소화기, 소화기는 어디 있니, 애들아!"
그러나 나는 연기가 프리다 고모의 방에서 나오는 것임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프리다 고모는 그것을 보더니 창에라도 찔린 듯 비명을 지르면서 그 방으로 뛰어들었다.
"아이구머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어머니는 이렇게 외치면서 자리에 주저앉으려 했다. 나는 어머니를 얼른 부축했다. 안나가 프리다 고모의 뒤를 따라 그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안나는 곧 다시 달려 나오면서 소리 질렀다.
"엄마, 안심하세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다친 건 앵무새 뿐이야!"
그러자 프리다 고모가 달려 나오며 고함을 질렀다.
"아니, 뭐라고? 앵무새 뿐이라고? 이 못돼 먹은 것들아, 이 망할 것들아!"
"엄마를 안심시켜 드리려고 불이 난 게 아니라고 말했을 뿐이에요."
안나가 대답했다.
"듣기 싫다! 그래, 어린 짐승이 거의 불고기가 다 돼서 새장에 자빠져 있는데 앵무새 뿐이라고? 이 돼먹지 못한 것아!"
그러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소리쳤다.
"좀 조용히 해요. 대단치도 않은 일인데 뭘 그래요?"
"오호라, 이젠 식구들이 한데 똘똘 뭉쳐 덤빌 셈이네?"
프리다 고모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내 앞으로 달려 오더니 더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네 놈이 앵무새를 죽였어, 이 망나니 같은 놈아!"
"그 아이보고 욕하지 말아요.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 애는 방안에 같이 있었잖아요."
어머니도 소리쳤다. 나도 버텼다.
"고모님이 언제나 저한테 죄를 뒤집어 씌우는 데는 저도 만성이 되었어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무 말 않겠어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전 아무 것도 모릅니다."
"네가 왜 몰라, 네가 했으면서! 너 아니면 누가 했단 말이냐? 나는 너희 어머니가 무릎 꿇고 빈다 해도 널 용서 못해!"
고모는 빽빽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가 대꾸했다.
"아이고, 난 고모에게 떠들지 말라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빌지 않아요. 제발 소리 좀 지르지 말아요."
우리는 프리다 고모의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제 연기는 창문으로 다 나가 버렸다. 그러나 아직 화약 냄새와 새털 탄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앵무새는 새장 밑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나 새는 이제 더 이상 파랗고 빨갛지 않았다. 온 몸이 시커멀 뿐이었다. 꼬리 깃털이며 날개 깃털이 모두 불에 그슬리고 타서 엉클어지고 흐트러져 있었다. 머리는 새까맸다. 눈은 부엉이 눈처럼 쾡했다. 그런 모양새로 그 놈은 얼이 빠진 듯, 나를 멀거니 내다보고 있었다. 얼이 빠질 만도 했으리라.
"새는 아직 살아 있구려. 살아 있으니 곧 건강해지겠지요."
어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고모는 여전히 고함을 질렀다.
"이 놈의 집, 이 더러운 놈의 집에는 단 하루도 어린 새를 놓아두지 않을 테야. 오늘 중으로 떠나고 말겠어."
프리다 고모는 사실 그 날로 떠나갔다. 그러나 우리 식구들은 아무도 고모를 진정으로 붙잡지 않았다.
그 무렵 우리 어머니는 퇴역 소령인 프란쯔 아저씨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는 아저씨가 나를 맡아 틀림없이 훌륭한 인물이 되게 공부를 시킬 생각이라고 쓰여 있었다. 어머니는 이 편지를 보고 무척 기뻐했다.
그러나 그 편지에는 매달 80마르크의 경비가 들어야 한다는 말도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아저씨가 살고 있는 곳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누가 뭐래도 재수 없게 걸린 일이었다.
아저씨는 5층에 살았고, 주위는 모두 높은 집들뿐이었다. 뜰 하나 제대로 가진 집이 없었다. 어쨌든 나는 마음대로 놀지 못하게 되었다. 사실 마땅히 같이 놀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 집에는 프란쯔 아저씨와 안나 아주머니 둘뿐이었다. 둘이서 온종일 집 안을 돌아보며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르지나 않았는지 살피는 것이 일이었다. 게다가 아저씨는 또 여간 엄하게 굴지 않았다. 나만 보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이, 입버릇처럼 이렇게 뇌까리는 것이었다.
"두고 봐라, 이 망나니 녀석아. 이제 단단히 버릇을 고쳐놓고야 말 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창문에서 머리를 내밀고 길거리에 침을 뱉는 장난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명중시키지 못하면 길바닥에 침 떨어지는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울렸다. 다행히 명중을 하면 그 행인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서 펄펄 뛰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악을 쓰고 욕지거리를 해대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킬킬거리며 심심한 것을 달랠 수가 있었지만, 그 외엔 아무 재미도 없었다.
우리 담임 선생님은 나 때문에 학급 성적이 떨어진다며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내 성적이 좋지 않았던 것은 내가 교장 부인의 내실 변기에 카바이드를 처넣어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게 한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 오래 전의 일인데 그렇게까지 나올 건 또 뭐란 말인가. 그런데 프란쯔 아저씨는 내 담임 선생과 잘 아는 사이어서 종종 찾아가 만나곤 했다.
둘이 만나면 어떻게든 내 약점을 잡아 나를 옭아맬 궁리를 하는 것이 일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금방 책상 앞에 앉아 숙제를 해야 했다. 아저씨는 나하고 마주치기만 하면 노려보면서 이렇게 떠들어대곤 했다.
"요 못된 녀석아! 또 무슨 못된 짓을 할 속셈이냐? 요 망나니야! 조금만 더 기다려 봐라, 이제 곧 경을 치게 만들어주고 말 테다!"
어느 날인가, 나는 산수 숙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을 제대로 찾을 수가 없었다. 아저씨가 어머니한테 내 공부를 봐 주겠다는 말을 한 적도 있고, 또 아주머니까지도 아저씨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서 그에게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자랑하던 일이 생각나기도 해서 나는 아저씨에게 물어 보기로 했다. 그래서 도움을 청했더니 아저씨는 쭉 한 번 훑어보고 나서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망나니 녀석 같으니라구. 넌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세상에 도대체 이보다 쉬운 문제도 풀지 못하다니?"
그는 책상 앞에 앉아 그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문제는 금방 풀리지 않았다. 그는 오후 내내 그것과 씨름을 했다. 내가 아직 끝나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아저씨는 내게 지독하게 욕을 해대며 핏대를 세우는 것이었다. 겨우 저녁 식사 직전에야 그는 나에게 숙제를 가지고 와 돌려주면서 으스댔다.
"자, 이젠 베끼기만 하면 된다. 뭐 이 따위 푸는 거야 식은 죽 먹기지만, 뭐 좀 다른 일을 해야 할 게 있어서 이렇게 늦은 거야. 알겠니, 이 돌대가리야."
나는 그것을 그대로 베껴서 담임 선생한테 제출했다. 그리고 목요일에 숙제장을 돌려받았다. 나는 이번에는 최고 점수를 받았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정작 나온 성적은 최하점이었다. 종이 전체가 빨갛게 고쳐져 있는데다, 나는 선생한테 이런 말까지 들어야 했다.
"이따위로 엉터리 계산을 하는 놈은 세상에서 첫째 가는 바보 천치놈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건 제가 푼 게 아니에요. 이건 우리 아저씨가 풀어주신 거니까요. 전 아저씨가 계산해서 풀어 준 걸 그대로 베껴왔을 뿐이에요."
반 아이들은 모두 다 웃었지만, 담임 선생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소리쳤다.
"네 놈은 비열한 거짓말쟁이야. 나중에 형무소에서 죽어 자빠질 놈이야!"
담임 선생은 그리고 2시간이나 나만 따로 남겨서 벌을 세웠다. 집에서는 아저씨가 신이 나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늦는 건 학교에서 벌을 서기 때문이라는 건 뻔한 일이다. 그래서 나를 괴롭힐 꼬투리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모든 일을 마구 떠들어댔다. 내가 늦게 돌아온 것은 아저씨 때문이라는 것, 그가 계산을 엉망으로 해 줬기 때문이라는 것, 그런 엉터리 계산은 세상에서 제일 바보 천치가 아니면 안 할 거라고 선생이 그랬다는 사실 등을 모두 말해버렸다.
그러자 그는 나를 정말 있는 힘껏 후려갈겼다. 그렇게 세게 얻어맞은 적은 아직 없었다. 그는 그러고는 휙 나가 버렸다. 나중에 내 친구 하인리히 그라이터에게 들었더니 그는 곧바로 우리 담임 선생을 찾아가 만난 모양이다. 둘이 거리를 함께 걸으면서 몇 번씩 멈춰 서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속삭였다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하인리히가 마침 보게 된 것이다.
이튿날, 선생은 나를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네 계산을 다시 한 번 검토해 봤다. 그건 제대로 맞히기는 했는데 좀 옛날 방법으로 푼 거야. 요즘은 그런 방법을 안 쓰지. 그리고 네가 벌 받은 건 전혀 억울할 게 없어. 넌 언제나 벌 받을 짓을 하고 다니니까 말이야. 또 베껴 쓸 때도 네는 잘못 베꼈고, 그래서 틀렸던 말이야."
그러나 그것은 그 둘이 짜고서 하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너희 선생하고 만나서 얘길 나눠 봤는데, 그 계산은 제대로 맞은 거야. 네가 베낄 때 주의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어 버렸던 것이지, 이 망나니 녀석아."
나는 틀림없이 주의해서 베꼈다. 그가 틀렸고, 잘못은 거기에 있었던 것뿐이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아저씨가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나의 공부를 어떻게 돌봐 주기는 이미 틀려 버렸다는 얘기였다고 한다. 나는 아주 간단한 계산을 베끼는 것조차 못하는 놈이어서 덕분에 자기가 곤란한 입장에 서게 됐다고 썼다는 것이다.
이 작자, 이거 얼마나 비겁한 짓이란 말인가.
하인리히 베르너스가 나와 사귀는 것을 그 애 어머니가 금지시켰다고 한다. 이건 그 녀석이 내게 말해준 것이다. 내가 하는 짓거리가 너무 상스러운데다, 내가 머지 않아 퇴학 처분까지 받게 되리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나는 하인리히 베르너스에게, 난 너희 어머니 따위는 우습게 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야말로 그 지저분한 네 녀석 방에 들어갈 필요가 없어져서 듣던 중 반가운 얘기라고 대꾸해 주었다.
그랬더니 그 자식이 나보고 '나쁜 자식'이라고 욕을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녀석의 귓싸대기를 한 대 호되게 후려갈겼다. 그리고 녀석을 난로 쪽으로 밀어붙여 뒤로 나자빠지게 만들어 주었다. 그 바람에 하인리히는 이빨 하나가 부러지고 값비싼 바지 무릎에 구멍이 뚫렸다.
그 날 점심 시간이 지나고 학교 수위가 우리 교실로 찾아왔다. 교장 선생이 나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교실에서 나갔다. 그리고 교실 문간에서 얼굴을 찡그려 보여 모두들 웃음을 터뜨리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내가 그랬다고 고자질하는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하면 내 복수를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인리히 베르너스 그 자식은 이가 빠져 집으로 가고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했다. 녀석이 있었다면 아마 녀석은 곧장 고자질을 했을 것이다.
나는 곧장 교장실로 갔다. 교장 선생은 초록빛 눈으로 나를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이 말썽꾸러기 녀석아, 네 놈이 또 걸려 들었구나!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네 놈의 꼴을 보지 않게 된다는 말이냐?"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 구역질 나는 위인을 더 이상 보지 않게 된다면 뛸듯이 기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교장이 날 보자고 한 것이지, 내가 그를 보자고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도대체 네 녀석은 장차 뭐가 되려고 그 꼬락서니냐, 이 개망나니야! 그러고도 너는 라틴어 학교 과정을 제대로 끝마칠 수 있을 줄 알어?"
나는 끝마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교장은 소리소리 지르며 고함을 질러댔다. 하도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밖에 서 있던 수위 아저씨까지 그 소리를 다 듣고 나중에 흉내를 낼 정도였다.
교장은 나에겐 범죄 습성이 있으며, 위험 인물이라고 떠들어댔다. 나는 앞으로 기껏 공장 노동자나 해 먹을 녀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옛날부터 밑바닥에서 굴러먹는 놈들은 모두 다 하는 짓거리가 나와 똑 같았다고 말했다.
"아까 베르너스 참사관께서 학교에 오셨다. 그래서 네가 폭력을 휘두른 그 분 아드님의 그 끔찍한 상태에 대해서 자세히 들려 주고 가셨단 말이다, 이 자식아!"
이렇게 고함을 지르더니 교장은 나에게 폭행에 대한 벌로 6시간의 구류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그 참사관 나리로부터 계산서를 받아, 바지 값으로 무려 18마르크나 지불해야 했다.
어머니는 이 일 때문에 몹시 울었다.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집에 돈도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어머니가 운 것은 내가 여전히 몹쓸 짓만 하고 다닌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슬퍼하는 걸 보고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래서 하인리히 베르너스네 집을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 참사관은 새 바지를 사 내라고 돈을 받아갔으면서도 그 찢어진 바지를 우리에게 주지는 않았다. 이런 작자들이 하는 짓거리는 어쩌면 그리도 한결같은지...
다음 주일날, 나는 예배가 끝나는 그 즉시 교장네 집으로 붙들려갔다. 이거야말로 정말 쓸모없는 일인데도 말이다.
방 안에는 교장 선생의 아들 녀석 둘이 있었다. 한 녀석은 번역 숙제를 하는 모양이었다. 책상 위에는 녀석이 참고로 삼을 두꺼운 책이 몇 권 놓여 있었다. 녀석은 제 아버지가 들어올 때마다 책장을 잽싸게 뒤적거리며, 고개를 양 옆으로 흔들어댔다. 마치 공부에 열중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수작이다.
"얘야, 지금 무슨 단어를 찾고 있니?"
교장이 이렇게 물어 보았다.
녀석은 마침 입에다 빵을 한 입 물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녀석은 재주도 좋게 그 빵을 금방 삼켜버린 모양이다. 녀석은 지금 그리스 어 단어를 좀 찾고 있는데, 잘 찾을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녀석은 주머니에서 빵을 꺼내서 씹어먹느라고 바빴기 때문에 무얼 찾아보고 말고 할 여지가 없었다. 그건 내가 쭉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교장은 녀석을 칭찬하면서, 하나님은 애써 땀 흘리는 것을 재능보다 높게 보신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격언까지 곁들였다. 그리고 나서 교장은 다른 아들에게 갔다. 그 녀석은 이젤을 앞에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은 거의 다 완성되는 단계였다.
그것은 호수 위에 많은 배가 떠 있는 풍경화였다. 교장 부인도 들어와서 함께 그림을 감상했다. 그래서 교장은 기분이 한껏 느긋한 모양이었다. 그는 그 그림이 아들의 학교 졸업식 때 진열될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감상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아름다운 예술이 널리 장려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교장 부부와 아들 둘은 나가 버렸다. 점심 식사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작자들은 나만 혼자 덩그러니 남겨놓고는 먹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주머니 속에 살라미 소시지를 한 개 준비해 왔기 때문에 별로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그러나 당연히 그 비쩍 마른 교장의 아들놈들이 먹을 것이 푸짐한 식탁 앞에 느긋이 앉아 음식을 먹는 모습이 머리 속에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교장의 큰 아들 녀석이 그림을 들고 나가 옆방 창문 쪽에 세워 두고 나가는 것을 자세히 보아 두었다. 그리고 모두 다 방에서 나가 버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몰래 가지고 왔던 <검은 아파치 이리의 이야기>라는 소년 소설을 계속해서 읽었다.
4시가 되어서야 나는 학교 수위에 의해 석방될 수 있었다.
"허, 이번에는 네가 그 안에서 꼼짝 않고 용케도 견뎌냈구나!"
수위는 감탄한 모양이었다.
"이쯤이야 뭐 보통이죠."
나는 그렇게 대꾸해주었다. 그러나 사실은 견디지 못할 정도로 답답했다. 결코 보통 견딜 만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월요일 오후. 교장 선생이 얼굴이 시뻘개져서 우리 교실로 쳐들어왔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고함을 질렀다.
"토마 그 놈 어디 있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이 또 터진 것이었다. 그는 내가 우리 학교에서 지금까지 없었던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내가 한 일이 유명해지기 위해 다이아나 신전에 화재를 일으킨 그 범죄 행위와 맞먹는 것이라고 핏대를 세웠다. 그러면서 내가 잘못을 뉘우치고 모든 것을 고백해야 그나마 죄가 가벼워질 수 있다고 떠들어댔다.
그는 지껄이면서 윗입술을 잔뜩 치켜 올려 보기 흉하게 생긴 이빨이 다 드러나 보였다. 입에서는 침이 거칠게 튀어 나왔다. 그러고는 눈알을 이리저리 사납게 굴려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딱 부러지게 말해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저는 잘못을 저지른 게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러자 그는 나를 보고 하나님도 화를 내실 흉악한 거짓말쟁이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나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대꾸해 주었다.
"도대체 전 지금 무슨 영문인지조차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그는 학급 전체에 대고 누가 나의 말에 반대 증언을 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무도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자 교장 선생은 스스로 우리 담임 선생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자세히 밝혔다. 그의 집 거실 옆 방 유리창이 돌에 맞아 산산조각이 난 것을 아침에 발견했다는 것이다. 범행에 사용된 커다란 돌이 마룻바닥에 굴러 떨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그 돌은 그의 아들이 그린 그림을 맞혀 구멍을 뚫었다는 것이다. 그림은 완전히 망가져 마룻바닥에 뒹굴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담임 선생은 괜히 겁을 집어먹고 머리칼이며 수염을 바싹 곤두세웠다. 그리고 나한테 달려오더니 마구 다그쳤다.
"바른대로 말해, 이 흉악한 놈아! 바로 네 놈이 그런 비열한 짓을 했겠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런 사건이 생기면 무엇이든지 꼭 내가 했다고 다들 말하는 것은 정말 서운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교장이 다시 한 번 고함을 질렀다.
"좋다, 이 놈아! 네 놈이 그렇게까지 나오면 기어코 그 몇 배의 보답을 받도록 해주마! 증거만 찾아내면 널 그냥 두지 않겠어! 기어코 밝혀내고야 말겠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나가 버렸다. 한 시간 후에 수위가 나를 교장한테 데리고 갔다. 그 자리에는 종교 선생 팔켄베르크도 벌써 와 있었고 교장도 있었다. 문제의 그 그림이 의자 위에 놓여 있었고, 옆에는 돌멩이도 놓여 있었다. 그 앞에는 검은 보자기로 덮인 자그마한 탁자가 하나 있었다. 그 위에는 촛대 두 개에 불을 밝혀 놓았고, 가운데에 십자가 상이 놓여 있었다.
종교 선생 팔켄베르크는 손을 내 머리 위에 얹었다. 그는 평소 나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게 굴었다.
"눈이 어두워진 이 가련한 아이야. 이제 마음을 열고 모든 것을 고백해라. 그러면 너에게도 이롭고 네 양심도 가벼워질 것이다."
교장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렇지. 그리고 네 입장도 훨씬 더 좋아지겠지."
"하지만 저는 전혀 그런 짓을 하지 않은 걸 어떡하란 말씀입니까. 전 정말 그 유리창에 돌멩이를 던진 적이 없어요."
내가 이렇게 나오자 종교 선생 '어린 양'은 몹시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교장 선생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이제 곧 모든 게 밝혀질 겁니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틀림이 없거든요."
그는 나를 탁자의 촛불 앞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목소리를 엄숙하게 짜내어 말했다.
"이제 너에게 성상 앞의 타오르는 촛불 앞에서 묻겠다. 너는 교리강론을 배운 적이 있지? 그러니 거짓으로 맹세했을 경우의 무서운 결과를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묻노니, 너는 창문에 돌을 던졌느뇨, 아니 던졌느뇨?"
"저는 결코 창문에 돌멩이질을 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팔켄베르크는 계속했다.
"모든 성자의 이름에 맹세코 네, 아니오로 대답하라!"
"아닙니다!"
그러자 종교 선생 팔켄베르크는 어깨를 흠칫 추켜 보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 아이는 아닌 모양입니다. 겉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교장은 나를 별 볼일 없이 내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거짓말을 해서 아무것도 고백하지 않은 것이 무척 유쾌했다. 그 창문에 돌멩이질은 한 것은 역시 나의 행동이었다. 바로 어제 일요일 밤에... 나는 그 그림이 그 창문 뒤에 놓여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걸 고백해서 내 입장이 나아지기는 뭐가 나아진다는 말이냐? 기껏해야 퇴학이나 당하겠지. 교장은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렸지만, 나는 그렇게 멍청한 녀석이 아니다.
나는 일요일마다 루푸 씨의 집에 가곤 했다. 그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하게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 아버지의 옛날 사냥 친구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집에다 사슴을 여러 마리 잡아다 주기도 했다.
그와 함께 일요일 한나절을 지낸다는 것은 아주 멋진 일이었다. 그는 나를 거의 어른처럼 대접해 주었다. 그래서 식사가 끝나면 언제나 여송연을 내주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도 이제 이 정도는 이미 피워도 상관 없겠지. 너희 아버지는 담배를 기차 화통처럼 피워대던 사람이니, 너도 골초가 될 것은 틀림없다."
아버지 친구로부터 이렇게 인정을 받고 보니 나는 내 자신이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친구와 맞담배를 피우는 그 멋진 맛이란,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도리가 없을 것이다.
루푸 씨 부인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상한 분이었다. 부인은 말을 할 때면 표준 독일어를 쓰기 때문에 입술이 뾰죽해지곤 했지만, 그러는 입 모양조차도 아주 고상해 보였다. 부인은 나 보고 항상 손톱 물어뜯는 버릇을 고치고, 말할 때는 정확한 발음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주의를 주곤 했다.
그 집에는 딸이 하나 있었다. 아주 예뻤고, 향수를 사용하는지 항상 좋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내가 겨우 1살세밖에 되지 않기 때문인지, 그 딸은 나에게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저 무도회며 음악회, 그리고 뛰어나게 훌륭한 일류 가수들 이야기만 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가끔 사관학교 이야기가 나오곤 했다. 그것은 그 여자를 찾아오는 사관학교 학생들로부터 들은 것이었다.
사관학교 학생들이 그 집에 찾아올 때면 발소리보다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이 철그럭거리는 소리가 더 요란했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면 특히 더했다. 나는 나도 현재 사관학교 학생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내가 사관학교 학생이라면 나도 그 여자의 마음에 들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어떠한가? 그 여자는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그래서 상대도 안 되는 코흘리개 정도로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자기 아버지하고 여송연을 맞담배하면서 피워대는 것을 볼 때마다, 정말 가소로운 꼴을 본다는 듯 기분 나쁘게 웃곤 했다.
그런 점이 나를 종종 기분 나쁘게 했기 때문에, 나는 그 여자에게 향하는 내 애정을 깔아 뭉개 버리곤 했다. 그러면서 마음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앞으로 나는 장교가 되어 가지고 전쟁에 나가 혁혁한 공을 세워 영웅이 되어 돌아오리라. 그렇게 되면 그 여자는 나에게 완전히 반해버릴 거야. 하지만 그 때 가선 난 저 여자를 본 체도 하지 않을 거야.
그 딸의 일만 빼놓으면 루푸 씨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참으로 기분이 좋고 유쾌했다. 나는 매주 일요일을 기쁘게 맞이했고, 그 집에서 나누는 점심 식사와 여송연을 즐겨 기다렸다.
루푸 씨는 교장 선생을 알고 있었다. 자주 만나서 이야기도 하는 사이였다. 루푸 씨는 교장에게 나를 일요일마다 초대해서 자기 식구들과 같이 지낸다는 것, 내가 장차 틀림없이 우리 아버지처럼 사냥도 잘 하는 사내다운 사내가 될 것이라는 생각 등을 얘기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교장 선생이 나를 좋게 말할 리가 없었다. 그것은 루푸 씨가 나에게 가끔 이런 말을 하는 걸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 낮도깨비 같은 작자는 네가 하는 짓을 모두 알고 있다. 너는 아마 대단한 말썽꾸러기인 모양이야. 그러니까 그 작자가 그렇게 욕을 해대는 거야. 하지만 그 작자들도 사람이니까 너무 그렇게 속을 썩혀줄 필요는 없다."
이렇게 말하니 내가 어찌 일요일에 그의 집에 가는 것을 기다리지 않겠는가. 루푸 씨는 그 누구보다도 나와 잘 통하는 어른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그만 마가 끼고 말았다. 그렇게 된 까닭은 이러했다. 나는 아침 8시에 학교에 갈 때마다, 양재 학원에 나가는 우리 하숙 뒷집의 딸과 골목 어귀에서 만나게 되곤 했다.
그 처녀는 아주 예쁜 얼굴이었다. 머리를 두 갈래로 길게 땋아 내리고, 그 끝에 빨간 리본을 잡아매었다. 젖가슴도 벌써 도톰하게 솟아 있었다. 내 친구 라이텔은 그 애가 벌써 다 자란 처녀이며, 다만 새침을 떼고 있는 거라고 늘 말하곤 했다.
나는 처음엔 그 애한테 감히 아는 체하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고개를 꾸벅하고 인사를 했더니 그 아이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었다. 그 후부터 나는 그 아이가 아침마다 골목 어귀에서 나와 마주치는 것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좀 늦는 날이면 그 아이는 거기 서서 기다리기까지 했으니까. 그 아이는 내가 나올 때까지 제본소 상점을 들여다보며 서 있었다. 그러다가 나와 눈길이 마주치면 반갑게 웃어 보이고 총총걸음으로 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 번 말을 걸어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가슴이 마구 두근거려서 말은 한 번도 걸어 보지 못했다. 한 번은 그 아이 곁으로 아주 가까이 다가간 적도 있었지만 기침을 한 번 했을 뿐, 목이 칵 막혀서 말은 한 마디도 못 하고 말았다. 라이텔은 그까짓 계집아이를 상대하는 것쯤은 조금도 어려울 게 없다고 했다. 자기는 그럴 생각만 있으면 날마다 계집아이 세 명에게 말을 걸 수도 있지만, 모두 너무 시시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너도 여자 애들한테 말을 못 걸어봤다는 거 아니냐?"
"못 걸어본 게 아니라 안 건 거지."
"결국 그게 그거지 뭐야."
"아니지, 차이가 있지. 이를테면..."
"허튼 소리 하지도 마. 난 지금 심각한 얘기를 하는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하는 소리 아니냐. 얘기를 걸고 싶으면 그냥 거는 거야. 그게 뭐가 어려워서 그러니? 여자 애들도 사람이라고. 우리하고 똑 같은 거야.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말을 쓰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별 것 아니라고. 난 정말이지 말 걸고 싶은 애가 있으면 하루에 세 명 정도에겐 얼마든지 걸 수 있다."
나는 내가 할 말을 여러 가지 생각했다. 그 애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그 모두가 무척 손쉬운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 여자 애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빵집 딸인데다 겨우 양재 학원에나 다니는 여자 애가 아닌가. 나는 라틴어 학교의 3학년 학생이다.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낙제는 아직 한 번도 안 했고, 앞으로도 낙제는 안 할 것이다. 그리고 대학에도 갈 것이고...
그런데도 정작 그 여자 애를 보면 기분이 아주 이상해져서 마음먹었던 것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 여자 앞에서 말을 꺼낸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다.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그래서 나는 묘안을 생각해냈다. 편지로 말을 대신하자는 생각이었다. 그건 과연 묘안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편지를 쓴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쓸 낱말을 고르는 것이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쓰고야 말았다. 무려 1주일 이상 끙끙대며 편지에 매달린 끝에...
나는 편지에다 이렇게 썼다... 나는 당신을 좋아한다. 그러나 내가 말을 걸어, 그런 사실을 고백하면 그 쪽에서 무안하게 생각할지 몰라 걱정이다. 그래서 이렇게 편지로 고백한다. 그러니 그 쪽에서도 내가 싫지 않다면 나를 만날 때 손에 손수건을 들고 있다가 입에 갖다 대 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안심하고 당신에게 말을 걸겠다... 대개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그 편지를 학교에서 배우는 시저의 <갈리아 원정기> 속에다 꽂아 두었다. 아침에 그 여자 애를 보면 그걸 꺼내 주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일도 생각했던 것과 달리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첫날에는 엄두도 못 내고 지나쳐 버렸다. 다음 날은 미리 단단히 벼르고 편지를 손에 쥐고 있었지만, 그 여자 애가 보이자 나는 편지를 얼른 주머니 속에다 집어넣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나를 라이텔은 매일 같이 성가시게 독촉했다.
여느 때는 용감한 네가 이런 일에는 왜 그렇게 형편없는 겁쟁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냐, 그러다가는 그 편지가 네 주머니 속에서 낡아서 아주 걸레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면 너는 또 편지를 쓰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러는 동안 그 여자 애는 그 사이에 어디론가 시집을 가서 애 어멈이 되어 있을 거다... 이러면서 내일 당장 편지를 전해 주라고 성화였다.
나도 역시 그렇게 하려고 굳게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 다음 날은 그 여자 아이가 자기 동무와 함께 있었다. 그래서 또 주지 못했다. 나는 속이 상해서 편지를 라틴어 책 속에 꽂아 두었다. 나는 내가 너무 겁을 집어먹은 것에 대해 스스로 벌을 가하기로 했다. 그 여자에게 말을 걸어 모든 것을 고백한 뒤에 편지를 주겠다고 스스로 맹세를 한 것이다.
라이텔도 나서서 지금 그렇게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못난이로 남을 거라고 했다. 나도 그 점을 인정하고 마음을 단단히 다졌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것은 공부 시간 중이었다. 마침 라틴어 시간이었다. 나는 선생에게 지명을 당하여, 먼저 읽던 아이의 뒷 부분을 읽어야 했다. 나는 그 여자 아이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아이가 어디까지 읽었는지, 그리고 지금 몇 과를 배우는지조차 몰랐다. 창피스러워서 얼굴을 붉힐 수밖에... 그런데 선생은 나를 늘 미심쩍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벌써 뭔가 눈치를 채고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얼른 책장을 넘기면서 옆의 아이를 툭 걷어차며 물었다.
"이런 빌어먹을... 야, 어디 읽을 참이냐?"
그러나 그 바보 같은 놈이 너무 작은 소리로 말을 했기 때문에 나는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선생은 벌써 내 자리 바로 옆에 와서 서 있었다. 그 때 갑자기 편지가 책갈피 속에서 빠져 나와 마룻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봉투의 색깔은 분홍색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대뜸 들킬 수밖에...
나는 얼른 편지를 발로 밟으려고 했지만, 선생이 먼저 허리를 굽혀 주워올리고 말았다. 더구나 편지엔 프란쯔가 가져온 향수도 몇 방울 뿌렸기 때문에 냄새까지 요란했다. 그것을 집어든 선생의 두 눈이 쑥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마치 가위로 잘라낼 수 있을 만큼... 선생은 우선 냄새부터 맡아 보았다. 그가 맡으라고 뿌린 향수가 결코 아닌데도 말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천천히 봉투를 뜯고, 편지를 끄집어냈다. 그런 후 다시 한 번 나를 훑어보았다. 꼬투리를 잡았다고 좋아하는 그 꼴이라니...!
그는 큰 소리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충심으로 친애하는 아가씨, 저는 진작부터 아가씨와 친하게 사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을 걸면 아가씨를 괴롭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이렇게 먼저 글월로 제 마음을 전합니다..."
손수건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 이르자 그는 입안에서 웅얼거리는 식으로 편지를 읽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은 그게 무슨 얘기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 것을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는 편지를 다 읽고 나더니 한동안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 한심한 자식아, 이제 집으로 돌아가 기다려라. 자세한 이야기는 앞으로 듣게 될 테니."
나는 그때 책을 벽에다 집어 던지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 나는 그만큼 바보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편지에는 내가 그저 어떤 아가씨에게 반했다는 것 외에 다른 나쁜 내용은 전혀 씌어있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내가 누구에게 반했든 말든 그건 선생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 아닌가.
그러나 사태는 점점 고약하게 흘러갔다.
다음 날, 나는 즉시 교장 선생에게 불려갔다. 그는 커다란 장부를 펼치더니 내가 말하는 것을 거기에다 빠짐없이 적어 넣었다. 그는 우선 그 편지를 누구에게 쓴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 편지가 누구를 대상으로 정하고 쓴 것이 아니라, 그저 장난 삼아 한 번 써본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다행히 나는 받는 사람의 이름은 편지 어느 구석에도 써 넣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교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내가 아주 몹쓸 놈일 뿐만 아니라 비겁하기도 한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도대체 그 편지에 씌어 있는 어느 부분이 그렇게 몹쓸 내용이냐고 대들었다. 교장은 못된 처녀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부터가 망나니 짓이라고 떠들었다.
여기서 그만 나는 덫에 걸리고 말았다. 상대방 처녀는 결코 못된 처녀가 아니고, 얌전한 처녀라고, 그만 내 입으로 비밀을 폭로하고 만 것이다. 그러자 교장은 히죽 웃었다. 그러면서, 그 참한 처녀 아이가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꾸 처녀의 이름을 캐물었다. 그래서 나는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은 자신의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는 법이 결코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강요하는 것은 결코 교육자답지 못한 행동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교장은 표정이 험악해지면서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좋다. 그 동안 나는 늘 온정을 지니고 네 놈을 대해 왔지만, 이젠 참을 수 없다. 너는 우리 꽃밭에 난 독버섯 같은 놈이야. 나는 이제 너를 뿌리째 뽑아 버리고야 말겠다, 아주 송두리째 말이야! 네 놈이 아무리 버텨도, 난 네 녀석이 누구에게 이 편지를 쓴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이 새끼야!"
나는 교실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오후에는 내 문제로 교직원 회의가 열렸다. 교장 선생과 종교 선생은 나를 퇴학시키려고 날뛰었다. 학교 급사가 그 이야기를 전해 주어서 나는 그 내용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선생들이 나서서 나를 구원해 주었다. 나는 8시간 감금 당하는 징벌을 받게 됐다. 나는 그것으로 일단 일이 끝난 줄 알았다. 그 정도라면 큰 피해를 본 것도 아니기 때문에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며칠 후 나는 루푸 씨의 편지와 함께 어머니의 편지를 받은 것이다. 루푸 씨의 편지에는 매우 섭섭한 일이지만, 이제 나를 초대할 수 없다고 씌어 있었다. 교장 선생이 내가 그 어리석은 연애 편지를 그의 딸에게 썼다고 알려 왔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런 일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내가 나이만 좀더 먹었다면 딸을 내줄 수도 있지만, 딸애가 창피스럽다고 길길이 날뛰기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교장의 비열한 행위에 너무 화가 났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울어버렸다. 그러고는 그를 찾아가 따지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다시 발길을 돌려 루푸 씨네 집을 찾아갔다. 루푸 씨는 마침 집에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있는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는 다 듣고 나서도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너는 형편없는 말썽꾸러기야. 나는 그걸 잘 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문제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 너희 아버지도 그랬고, 나 역시 그랬으니까. 하지만 너는 내 딸을 데려가기엔 나이가 좀 어리지 않으냐?"
그러면서 그는 여송연을 한 주먹 집어 주면서 이제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하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두 번 다시 나를 초대하지도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교장 선생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거짓말은 항상 학생들이나 하는 것으로 믿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질 나쁜 거짓말은 교장 선생 같은 사람들이 더 잘 하는 것을 난 알고 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는 날에는, 이 비열한 악당을 반쯤 죽을 만큼 두들겨 주겠다고 맹세했다.
이 일로 나는 오랫동안 불쾌했다.
그 뒤 한 번은 길거리에서 루푸 씨의 딸을 만났다. 그 처녀는 그 때 두세 명의 자기 친구들과 함께 있었다. 그 때 그 처녀들은 팔꿈치로 서로 쿡쿡 찌르면서 킬킬거렸다. 그리고 뒤돌아보면서 계속 웃어댔다. 나는 대학에 가서 멋진 청년이 되어 저들에게 복수하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학생회장이라도 되어서 무도회를 열면 저 바보 같은 처녀들은 나와 춤을 추고 싶어서 몸이 달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저 바보같은 것들을 본 체도 않으리라.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상상해도 내가 그 즐거운 일요일을 뺏긴 손해는 만회할 수가 없었다.
신문에 젬멜마이어 대위와 그의 부인이 불량 소년을 옳은 길로 인도하고 좋은 학생으로 만든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는 장교였고, 그의 부인은 보모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끌려가게 되었다. 사실 우리 어머니는 원래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이며 나를 올바른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젬멜마이어 대위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지 직접 물어 봐야겠다고 마음먹고 나를 그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시내에 있는 건물 5층에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층계를 오르면서 숨이 가빠 중간중간 멈추어 서서 숨을 헐떡이며 심호흡을 했다. 그러면서 당신이 나를 데리고 이렇게 여기저기 헤매고 다닐 줄을 생각도 해 보지 못했다고 얘기하셨다.
우리는 5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내가 초인종을 눌렀다. 하녀가 문을 열더니 마치 경찰관이 누군가 잡아 오면 사람들이 쳐다보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녀는 우리들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조금 있다가 갑자기 문이 열리고 한 남자와 부인이 들어왔다. 그 남자는 키가 크고, 허리 둘레가 커다랗고 수염은 배 위에까지 늘어져 있었다. 말할 때면 동그란 두 눈이 괴상하게 번쩍거렸다. 슬픈 이야기를 할 때면 그는 눈꺼풀을 내리 깔았다.
그는 아주 천천히 말을 했다.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그것은 말이 콧구멍을 통해서 새어 나왔기 때문이다. 그의 코는 유달리 컸다. 그는 전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부인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부인은 아주 조그맣고 비쩍 마른 여자였다. 코가 노랗고 눈을 아주 재빨리 굴렸다. 말을 할 때에는 입을 조금만 열고, 마치 휘파람을 불 때 같은 시늉을 하면서 말을 했다.
그 남자는 우리 어머니에게 말했다.
"산림 감독원 토마 씨 부인이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진정으로 영광입니다."
그러자 우리 어머니는 이렇게 얘기했다.
"고맙습니다. 대위님의 교육 방법이 하도 유명하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오기 전에 이미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만..."
그 남자는 잘 안다고 말하면서, 자기 손을 내 머리 위에 올려 놓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제 이 소년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꼭 그렇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제발 좀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 남자는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말했다. 또 그 부인은 이제까지 자기들이 150명이나 되는 소년들의 마음을 바로잡아 주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이런 말도 했다.
"희망이 전혀 없었던 소년이 훌륭한 사람으로 변한 경우도 많았어요. 예를 들어 판사나 장교 또는 대학생이 된 사람들도 많지요."
그 때 그 남자가 이렇게 말을 받았다.
"그 사람들이 마음을 바로잡고 나면 저에 대해서 무척 열광적으로 되어 버립니다. 그건 참 이상한 노릇이지요. 어저께도 중위 한 사람이 저를 찾아 왔습니다. 그는 지금 기마병 부대에 근무하고 있지요. 그렇게 된 것이 모두 저의 덕분이라고 감사 인사를 하고 갔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보더니 이렇게 얘기했다.
"너도 정신 바짝 차리고 열심히 공부하여라. 그리고 마음 속으로 언젠가는 다시 대위님을 찾아와서 감사 인사를 하겠노라고 다짐하고 있으려무나."
그 남자는 자신에 찬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도 언젠가 꼭 다시 옵니다. 언제 쯤일지, 한 번은 필경 우리 집 현관 문이 열리고 훌륭한 장교가 들어와서 '제가 바로 루드비히 토마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이 늙은 젬멜마이어에게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할 겁니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제발 좀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머니는 또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장교이셨지요? 그래서 당신의 말을 더욱 믿게 됩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수염을 손으로 붙잡더니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가슴에 단 훈장이 보였다. 그는 그 훈장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훈장을 국왕 폐하로부터 직접 받았습니다. 바로 도나우 강 근처의 뵈르트 전투에서 공을 세워 얻은 것입니다."
그는 다시 수염을 내려뜨리더니 말했다.
"벤트하임 백작이 저를 기다리고 있어서 이제 그만 가 봐야겠습니다."
그의 말로는 그 백작도 자기가 바로잡아준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말했다.
"대위님께서 이렇게 여러 가지로 저에게 희망을 북돋워 주셔서 저의 마음이 정말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그 남자는 다시 눈꺼풀을 내리깔고는 이렇게 말했다.
"저도 이 아이를 저의 아들처럼 여기고 교육하겠습니다."
그러더니 그는 또 손을 내 머리 위에 올려 놓으면서 말했다.
"언젠가 이 소년이 이 늙은 젬멜마이어를 다시 찾아오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겁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나가 버렸다. 어머니는 그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제야 올바른 곳을 찾아온 것 같습니다. 앞으로 여러 가지 좋은 본보기를 보게 될 것 같습니다."
그 부인이 이렇게 말했다.
"서로 신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제가 저 아이를 돌볼 때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 어떠한 점인지 부인께서 말씀해 주시지요."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우리 아이는 마음씨는 좋아요. 그런데 좀 껄렁껄렁하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오히려 항상 딴 짓만 하려고 해서 골치에요. 언제나 좋은 계획을 세우기만 하고 실행은 전혀 하질 않아요."
그 부인이 말했다.
"그런 것은 다만 성격의 결함에 불과할 뿐입니다. 저의 남편이 그런 건 충분히 교정할 수 있습니다."
자기 남편은 강철 같은 의무감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이 가르치는 소년들의 마음 속에도 그러한 의무감을 불어 넣어 준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우리 아이는 무척 고집이 세답니다. 엄격하게만 대하는 것보다는 온정으로 대해 주는 게 훨씬 더 좋은 효과를 얻을 것 같습니다."
그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의 남편은 친절하게 대할 수도 있습니다. 제 남편은 아주 마음씨가 고와서 어린 아이들이 저절로 아주 유순해진답니다. 모두들 자기 아버지로 삼고 싶다고 말할 정도이지요."
어머니는 그 부인과 악수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부인께서도 우리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 부인은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꺼이..." 하면서 내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차디차고 축축해서 기분이 나빴다.
그러고 나서 우리들은 집 안을 돌아다녀 보았다. 그 부인은 우리 어머니에게 내 방을 보여주었다. 그 방은 깨끗하였으며 책장과 책상, 옷장 그리고 침대가 있었다. 창문이 큼직해서 여러 집들이 내려다보였다. 어머니가 말했다.
"이 방은 무척 밝고 깨끗하구나. 네가 공부만 열심히 할 수가 있을 것 같구나. 옷장이나 책상은 네 손으로 잘 정돈해야 한다. 그리고 창문 밖을 너무 자주 내다봐서는 안 된다. 네가 앞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면 곧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거야."
나는 곧바로 마음을 바로잡은 것처럼 행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난 벌써부터 집 생각이 나고, 이 부인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 대위 부인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 댁에 다른 소년들도 있습니까?"
그 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남작이 두 사람 있고, 다른 사람도 세 명 더 있어요. 아마 백작이 한 명 또 올 겁니다. 그 가운데 두 사람은 지금 3년째 여기 있답니다. 다른 세 사람은 이제 1년째 공부를 하고 있는데 상당히 자세를 바로잡은 눈치가 보여요. 다만 한 사람만은 아주 말을 듣지 않아서 저의 남편이 가끔 한밤중에 감시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답니다. 어떻게 하면 그의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인지 연구하고 있답니다."
그 부인이 나를 보면서 말했다.
"그 아이와 사귀면 안 된다."
그 아이 이름은 막스라고 했다. 아버지는 중위였는데, 전쟁 중에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그 부인과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세히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넌 이 분들 말씀 잘 듣고 정직한 사람들하고만 사귀어야 한다."
그러고서 어머니는 그 부인에게 오늘은 나를 집에 데리고 갔다가 다음 날 아침에 짐을 꾸려서 다시 데리고 오겠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집을 나왔다. 층계 위에서 어머니가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이제야 네가 젬멜마이어 대위의 가르침을 받아 딴 사람으로 변하리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 그 분이 그렇게 많이 다른 사람을 바로잡아 주었는데도 너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나도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어머니와 같이 시내를 돌아다녔다. 어머니가 몇 가지 물건을 살 게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길거리에서 대학생이 지나가는 것을 보기만 하면 어머니는 나더러 이렇게 말했다.
"너도 꼭 대학생이 되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악대와 함께 사병들이 행진을 해왔다. 악대 뒤에는 손에 칼을 든 장교가 뒤따랐다. 그 때 어머니는 또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젬멜마이어 씨 말을 잘 들으면 언젠가는 저렇게 악대와 같이 행군을 할 수가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오후에 어머니는 산림 감독관 하이스 씨를 방문했다. 그는 시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그의 집 주위를 넓은 정원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 곳은 우리 집 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작은 삽살개가 짖고 있었다. 현관에서부터 벌써 담배 냄새가 풍겨 나왔다.
방안에는 사슴 뿔이 많이 걸려 있었다. 하이스 씨는 우리가 찾아가자 아주 반가워했다. 하이스 부인은 커피와 과자를 내왔다. 하이스 씨 부부는 우리 어머니와 함께 앉아 예전에 우리 아버지가 살아있었을 때의 이야기를 하였다. 하이스 씨는 우리 아버지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는 것, 언제나 둘이 함께 다니곤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하이스 씨는 파이프로 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너도 산림 감독원 집 출신이니까 역시 숲에서 살아야 한다. 그래 너도 그럴 생각이 있니?"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역시 그렇게 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런데 이 애는 공부하기를 싫어한답니다."
하이스 씨는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것 봐. 내가 산림감이 되려고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했는지 아니? 그렇게 해도 모자라!"
그러면서 하이스 씨는 내가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내가 집에서 라틴어 학교에 다닌다는 것, 그러나 공부라고는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 등을 말했다. 사람들이 그게 모두 자기가 아들에게 엄하게 하지 않는 탓이라고 말해서 이번에는 나를 젬멜마이어 대위한테 데리고 갔다는 얘기도 했다. 그는 학생들을 잘 다룬다는 것, 그래서 내가 내일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 등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자 하이스 씨는 껄껄 웃더니 말했다.
"나는 그 젬멜마이어 대위가 그렇게 훌륭한 선생이라는 얘기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선생이 아니라 다만 소년들에게 굳은 의무감을 주는 겁니다. 또 그의 부인은 보모이므로 그 부인으로부터 예의 범절을 배우는 것이랍니다."
하이스 씨는 파이프를 물더니 담배 연기를 엄청나게 많이 내뿜었다. 그러면서 그는 물었다.
"혹시 그 대위 이름을 어떻게 쓰는지 아세요? 그 이름의 철자가 어떻게 되는지 언뜻 잘 떠오르지가 않는군요."
어머니가 대위의 이름 철자를 말했다.
하이스 씨는 그걸 듣고 나서 입에서 파이프를 빼더니 "젬멜마이어, 젬멜마이어...'"라고 여러 번 되뇌었다. 어머니가 하이스 씨에게 말했다.
"혹시 그 사람을 잘 아세요?"
하이스 씨는 그가 바로 같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전쟁 때 자기 부대에 요셉 젬멜마이어라는 중위가 한 사람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을 들려 주었다.
"그 자는 너무 멍청해서 사병들까지 모두 그 녀석을 '달팽이 페피'라고 불렀지요. 또 그 녀석은 총 소리가 났다 하면 어디론가 얼른 기어들어가서 숨곤 했습니다. 그러나 아마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은 아니겠지요."
어머니도 그 말을 듣고 말했다.
"젬멜마이어 대위는 아주 똑똑한데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찬하는 것으로 봐서 전쟁 중에 만나셨던 그 사람은 아닐 거에요. 저는 그 사람을 찾아가게 된 것과 우리 아이가 그 사람을 어렵게 여기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답니다."
하이스 씨도 말했다.
"아마 그 사람이 옛날 그 달팽이 페피는 아닐 겁니다."
커피를 마신 후 우리들은 그 집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그 분은 사냥꾼이라서 가끔 그렇게 어린 아이들에게는 적당하지 않은 농담을 잘 한단다."
나는 젬멜마이어 대위가 눈을 둥글게 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틀림없이 그가 그 달팽이 페피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머니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우리는 다시 젬멜마이어의 집으로 갔다. 어머니가 그 부인에게 다시 말했다.
"이제 이 아이를 부인의 손에 맡기겠어요. 빨래는 꼭꼭 모았다가 저희 집으로 보내 주세요."
젬멜마이어에게는 또 이렇게 말했다.
"저는 대위님 덕분에 여러 가지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젬멜마이어는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고 천장을 한 번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인간의 힘이 자라는 데까지는 노력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어머니는 그 집을 떠나갈 때 울었다. 어머니는 내게 키스를 해주고서 층계로 나갔다. 그러더니 다시 돌아서서 젬멜마이어에게 말했다.
"저는 이 아이가 마음을 바로잡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 때에 나는 집 생각이 간절해졌다. 내가 그 동안 집에서 열심히 공부하였더라면, 지금 이렇게 남의 집에 있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내가 혼자 남아 있게 되자 그 부인은 갑자기 태도가 거칠어졌다. 그 여자는 나를 어느 방으로 안내하였다. 그 방은 창문이 복도 쪽으로 단 하나 나 있을 뿐이어서 그 전날 본 방처럼 밝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제 우리가 본 방에 있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부인이 말했다.
"그 방은 앞으로 오는 백작이 쓰게 될 거야. 그러니까 너는 지금 이 방에 있어야 한단다. 나중에 다른 방을 쓰도록 해 줄 거야."
나는 너무 속이 상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짐을 풀고 내가 항상 입고 다니던 옷을 바라보았다. 그 옷들이 갑자기 너무나 아름답게 보여서 나는 식사를 하러 갈 때까지 방 안에서 마냥 울었다. 식사를 같이 하는 아이들은 셋이었고, 젬멜마이어 부부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젬멜마이어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이 음식에 복을 내려 주시도록 다들 일어나서 기도하자."
그러나 그 음식이란 것이 기껏 우유에 쌀을 섞어 끓인 죽이었다. 나는 그런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도대체 다른 아이들 꼴은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져서 그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 아이들 중 하나는 빨간 머리에 주근깨가 있었고,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아이 이름은 벤더린이라고 했다. 또 다른 아이는 머리카락이 찰싹 늘어붙어 있었고 마룻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아이는 알폰스였다. 그 아이도 역시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다른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는 재미있다는 듯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아이가 막스였다.
나는 내 힘으로 그 아이들을 붙잡아 내동댕이칠 수 있을 것인지 마음 속으로 저울질해 보았다. 벤더린이나 알폰스 따위를 땅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것쯤은 별로 어렵지 않으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막스는 나만큼이나 덩치도 크고 힘도 세어 보였다.
젬멜마이어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이제 이 훈육소의 신입생이니까 다른 아이들에게도 소개하겠다. 다른 아이들은 이 아이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도록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너는 새로 왔으니까 좋은 본보기만 잘 보고 따라야 한다."
그 부인도 나서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쌀 죽을 휘젓기만 하지 말고 잘 먹어야 한단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편식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게 될 거야."
그래서 나는 말했다.
"저는 쌀을 전혀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자 그 부인이 이렇게 대답했다.
"음식을 두고 좋다 나쁘다 말해선 안 된단다. 아이들은 어른이 주는 것을 가리지 않고 잘 받아먹어야 해."
그러자 젬멜마이어도 말을 받았다.
"쌀은 영양분이 무척 많은 음식이다. 아시아에서는 어느 나라에서나 사람들이 모두 쌀을 먹고 산다. 고기를 먹는 백성은 쌀을 먹는 나라 백성들처럼 훌륭한 병사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자는 구운 고기에다 감자를 곁들여 먹고 있었다.
식사 후에 그는 또다시 하나님께 이런 음식을 내려 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를 드렸다. 그러고 나서 그는 방을 나갔다. 그래서 우리들도 잠시 동안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층계에서 막스가 날 보더니 자기와 함께 가자고 말했다. 그래서 나도 그 아이를 따라갔다. 우리는 풀밭으로 함께 걸어가서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막스는 나에게 너희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전에는 산림 감독관이었어."
막스도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우리 아버지는 군대에서 중위였는데 프랑스군과 싸우다 죽었어."
그 아이가 나를 보고 자기 팔을 굽힐 수 있나 시험해 보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해봤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막스도 역시 내 팔을 굽히지는 못했다. 그러자 막스는 앉아 있던 벤치를 뛰어넘더니 나보고 그렇게 흉내를 내 보라고 했다. 나는 그 정도는 쉽사리 뛰어넘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물구나무 서서 걸어가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수레 바퀴처럼 빙빙 돌아서 앞으로 가는 몸짓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막스는 내가 마음에 든다고 말하면서 자기를 좀 도와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네가 마음에 든다. 사실 나는 곧 이렇게 될 것을 짐작했어. 왜냐하면 젬멜마이어 부인이 너하고는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그랬거든."
막스는 내 말에 듣더니 말했다.
"그 여자는 아주 인색하고 야비한 사람이야. 먹을 것이라고는 변변한 것은 하나도 주지 않으면서 오히려 우리들이 먹을 것을 뜯어서 절약을 하려 든단 말이야."
나는 또 이렇게 물었다.
"그 젬멜마이어라는 사람은 좀 어떠니?"
막스가 대답했다.
"젬멜마이어는 정말 바보야. 실상 아이들 걱정이나 돌보는 일은 전혀 하지도 않아. 그러면서도 부모들이 찾아올 때만 마치 자기가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처럼 꾸며댄단 말이야."
그래서 나는 말했다.
"그 사람이 어제 우리 어머니에게 그러던데... 자기 밑에서 교육 받은 사람들이 나중에 장교가 되어 자기를 찾아와서 인사를 한다고 말이야."
막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 작자는 언제나 그런 말을 해서 부모들이 그 말에 속아 넘어가는 거야. 하지만 앞으로 2,3 주일만 더 있어 보면 아마 누구나 현기증밖에 안 난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래서 나는 하이스 씨에게서 들은 달팽이 페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막스는 배꼽이 빠지도록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 이름이 바로 요셉 젬멜마이어야. 그 사람이 바로 달팽이 페피일 거야. 틀림없어. 그리고 너 알폰스나 벤더린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돼. 그 애들은 들은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젬멜마이어에게 모두 고자질한단 말이야. 그래서 우리 둘은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구. 그걸 알아야 해.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겨서 매우 기뻐."
그 곳에서 한 달쯤 지나고 나자 나는 젬멜마이어 집에서 지내는 것이 나에게는 정말 견디지 못할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부인은 먹을 것을 아주 조금밖에 주지 않았다. 내가 배고프다는 말이라도 할라치면 젬멜마이어는 이런저런 말을 훈계랍시고 길게 늘어놓곤 했다.
즉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먹을 욕심부터 앞세우면 장차 우리 도이칠란트는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이다. 자기는 전쟁에 나가 사흘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버틴 적도 있다. 나흘째에 기껏 나온 음식이라는 것이 고기는 전혀 없고, 다만 수프 조금하고 곡식 가루를 받았을 뿐이지만 그때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는 말하기를, 그렇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조국을 사랑하는 정신이 투철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고서 그는 젊은 사람들이 언제나 먹을 것만을 생각하면 도이칠란트는 장차 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런 얘기를 하고 난 후에 그는 언제나 술집에 가서 맥주를 사 마시곤 했다. 그가 그렇게 술을 사 마시는 돈이 우리 부모에게서 긁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말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그 자가 그리고 우리들에게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공부를 하는지 안 하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다만 데리고 있는 학생들 가운데 누군가 학교에서 벌을 받고 와서, 자기가 그 처벌 쪽지에 서명을 할 때에만 우리들을 걱정하는 체했다. 받아온 처벌 쪽지에 그 학생이 무례한 짓을 해서 2시간 동안 벌을 받았다고 써 있으면 그는 무슨 무례한 짓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러고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공부할 때에는 그런 짓을 전혀 하지 않아서 나는 그런 것을 전혀 모른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단 말이야. 사람은 그런 무례한 짓을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거야."
그는 그럴 때면 아주 오랫동안 설교랍시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막스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자는 그렇게 우리에게 잔소리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일 거야. 그 작자는 자기 마누라한테는 끽소리도 못하고 조용히 듣고 있어야 하거든."
목요일에는 우리들은 언제나 멀건 수프를 먹어야 했다. 그럴 때 젬멜마이어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정말 스파르타 사람답게 될 수 있는지 인내를 시험해 보는 것이야."
물론 우리는 스파르타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배가 고팠다. 그래서 집에 이런 내용을 적은 편지를 보냈다. 어머니는 곧 나에게 답장을 써 보냈다. 우리 어머니는 무슨 일을 비밀로 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당연히 젬멜마이어에게도 나의 불만을 그대로 써 보냈다. 어머니는 그 편지에 젬멜마이어가 나의 식욕이 왕성하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한 모양이라고 쓰셨다. 젬멜마이어도 어머니의 편지를 받았다.
아침 일찍 그는 나를 불렀다. 그는 방 안에 서 있었고 그의 부인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 부인은 나를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야단을 쳤다.
"왜 배가 고프다고 그런 거짓말을 써서 편지를 보낸 거냐?"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저는 정말 배가 고파요. 멀건 수프만 얻어 먹어서는 배가 고프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러자 부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는 버르장머리가 없어. 네 생김새부터가 버르장머리 없게 생겼지. 오자마자 막스 같은 녀석과 친해진 것을 봐도 얼마든지 그걸 알 수 있어. 너는 마치 아이들이 다 굶주리고 있는 것같이 네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 보내서 우리 부부를 의심하게 만들었어."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배고픈 것은 누가 뭐래도 사실입니다. 그런 이야기쯤이야 얼마든지 어머니에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그 부인이 자기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다.
"우리 부부를 의심하는 이 나쁜 놈에게 뭐라고 따끔하게 말 좀 해요."
그러자 젬멜마이어가 내 앞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를 한 번 쳐다봐라!"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수염을 번쩍 쳐들고 손가락을 훈장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이게 도대체 뭐냐?"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것은 놋쇠입니다."
그는 눈을 무섭게 부릅뜨더니 소리를 질러댔다.
"이건 최고 무공 훈장이란 것이야. 만약 편지에 남몰래 멀건 수프 얘기나 쓰고 있었으면 내가 어떻게 이런 것을 받을 수 있었겠니?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스파르타 사람을 본받아야 해. 배고픈 것도 참고, 땀을 흘리고, 추위에 떨기도 하고, 친한 사람이 죽는 것도 눈앞에서 보는 경험을 해야지. 그래야 이런 훈장을 받을 수 있는 거다. 그것은 내가 천성이 스파르타 사람이니까 그런 거야. 나는 젊은 사람들이 다들 이런 훈장을 받을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켜야 해. 전쟁이 일어날 것에 대비해서 예비 훈련으로 목요일에는 너희는 멀건 수프를 먹어야 한단 말이다."
그는 계속해서 떠들었다. 자기도 매일같이 우리들에게 맛있는 고기를 구워 주고 그래서 우리가 양껏 먹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러면 자기 마음도 무척 기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우리들이 스파르타 청년이 되지 못하고 향락에 빠져 사는 나약한 청년이 될까 봐 그게 걱정이 되어서 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에 네가 구운 고기나 먹으려고 든다면 나는 너의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어. 그러니 너의 어머님께 이런 편지를 다시 써 보내야겠어."
그 마누라도 내가 거짓말을 했으며, 자기들을 의심하는 버릇없는 아이라고 편지를 써 보내야겠다고 했다. 나는 밖으로 나갔다. 문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젬멜마이어가 다시 나를 부르더니 말했다.
"내가 이렇게 너희를 교육시키는 이유는 너희들이 무공훈장을 받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한 거야. 이런 사실을 너도 좀 생각해야 해."
나는 화가 나서 막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 막스도 덩달아 젬멜마이어에게 화를 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어머니로부터 다시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대위님이 모든 사실을 잘 설명해주셨다. 너희들이 멀건 수프를 먹는다 해도 그것은 결코 돈을 아끼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교육이라는 점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너는 그런 것을 고통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오히려 너를 스파르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분 밑에서 교육 받고 있다는 사실을 기쁘게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네가 정말 그렇게 배가 고프다니 용돈을 보내마. 가끔 다른 가게에서 음식을 사 먹어도 괜찮지만 과자 따위를 사서 먹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항상 젬멜마이어 씨 같은 용감한 장교가 되겠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편지에는 3마르크가 말아져 들어 있었다. 막스도 그 편지를 읽었다. 막스는 편지를 읽고 나서 말했다.
"너희 어머니도 젬멜마이어의 그럴듯한 말에 그대로 넘어가고 말았구나. 어쩔 수가 없겠어. 너희 어머니도 우리들 말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야."
그 뒤 3 주일이 지났을 때 사고가 났다. 그 사고의 원인은 어머니가 내게 부쳐주신 바로 그 돈이었다.
나와 막스는 가끔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돌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젬멜마이어 집에 감자가 있을 때에는 그것도 이용했다. 우리들은 감자를 호주머니에 몰래 집어 넣고, 학교 가는 길에 그것을 자동차에 던지거나 어깨로 짐을 운반하는 일꾼들에게도 던졌다. 그러면 감자가 부서지고 사람들은 화가 나서 날뛴다.
그들은 감자가 날아왔는지를 모른다. 알아차렸다 해도 그 때쯤이면 우리는 벌써 멀리 달아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막스가 내게 달걀을 사자고 했다. 내게 어머니가 보내주신 돈이 있으니까 그랬던 것이다. 달걀을 던지면 껍질이 깨지면서 노른자위가 흘러 떨어지므로 더 재미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도 그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학교에서 돌아올 때 언제나 달걀을 샀다. 우리들은 유리창에 달걀을 던지면 제대로 맞아도 유리창이 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달걀이 깨져 유리창에 노랗게 묻은 것을 보면 보던 사람들이 다들 웃어댔다. 건물 위층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욕을 했다.
자동차 뒤에다 달걀을 던지면 운전수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달려간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자기 차를 보고 자꾸 웃어대면 그제서야 무슨 일인가 하고 주위를 살펴보게 된다. 그러고는 차에서 내려 차에 달걀이 흘러내린 것을 보게 된다. 차 안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그 사람도 내려서 그 모습을 보고 놀란다. 그러나 어깨에 짐을 메고 가는 사람에게 맞추면 소리를 금방 알아 듣고 걸음을 멈춘다. 짐꾼은 짐짝을 내려놓고 지독하게 욕을 퍼부어 댄다.
달걀을 던지는 것은 아주 재미가 있었다. 그러다가 그만 우리는 붙잡히고 말았다. 사실은 우리가 붙잡혔다기 보다 알폰스 자식이 고자질을 한 것이다. 우리들은 학교가 끝나고 신문 매점에 가서 신문을 사 와야 했다. 그것은 젬멜마이어가 시킨 심부름이었다. 그때 매점에는 주인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 자는 아이들에게 아주 불친절했다.
누가 문을 조금만 세게 두드려도 그는 버릇없는 놈이라는 둥, 개망나니라는 둥, 빌어먹을 자식이라는 둥 욕을 했다. 그것이야말로 야비한 짓이었다. 매점에는 문이 뒤에 있어서 그는 금방 달려 나오기가 힘들었다.
나는 그 때 그 자를 약 오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올라서 막스보고 그 생각을 얘기했다. 우리들은 매점으로 다가갔다. 나는 손에 달걀을 쥐고 뒷문 옆에 가서 섰다. 막스는 신문을 달라고 하려는 것처럼 매점 앞으로 갔다. 막스는 주먹으로 창문을 세게 두드렸다. 그러자 그 자가 화가 나서 창문을 열었다. 그 때 막스가 침을 뱉어 그 남자 얼굴이 침으로 범벅을 만들어 버렸다. 주인 남자는 재빨리 일어나서 막스를 붙잡으려고 뒷문으로 나왔다. 그 때 기다리고 있던 내가 달걀을 그의 얼굴에 던져 터뜨렸다.
그는 달걀에 얻어맞고서 나를 붙잡으러 따라올 것인지 막스를 붙잡으러 쫓아갈 것인지 결정을 하지 못했다. 그가 생각을 정했을 때는 우리들은 이미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우리들은 계속 더 멀리 달아났다. 그리고 나서 신문은 다른 곳에 가서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식사 후에 막스는 잠을 자러 갔다. 나도 침대에 누웠다. 알폰스는 방 안에 남아 있었다. 나는 그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젬멜마이어와 그의 마누라가 들어왔다. 그때 나는 아직 잠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자는 체하고 있었다. 젬멜마이어가 촛불로 내 얼굴을 비춰도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불을 비춰보더니 중얼거렸다.
"이런 개망나니 같은 자식!"
그러더니 그는 돌아서서 그냥 나갔다. 문턱에 서서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저 자식은 정말 가련한 놈이로군."
그의 마누라도 말했다.
"저 자식은 우리 달걀을 훔쳐간 거야. 나는 알 수 있어. 달걀이 왜 그 동안 없어졌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
다음 날 아침 일찍 그들은 나를 자기네 방으로 불렀다. 젬멜마이어는 나더러 모든 것을 고백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이제는 더 이상 나를 동정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사실대로 고백하라고 다그쳤다.
나는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무엇을 고백하란 말입니까?"
그 마누라가 소파에 앉아 있다가 고함을 질렀다.
"이 거짓말쟁이 자식아!"
그러자 젬멜마이어가 소리쳤다.
"너 도대체 달걀을 얼마나 훔쳤느냐?"
내가 다시 물었다.
"어디에 있는 달걀 말입니까?"
그 때 그 마누라가 또다시 고함을 쳤다.
"부엌 바구니 안에 들어 있었던 그 달걀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달걀을 하나도 훔치지 않았습니다. 저더러 무얼 훔쳤다고 말하면 저도 참을 수 없습니다."
그 때 젬멜마이어가 떠들었다.
"그럼 도대체 달걀이 어디서 나서 신문 장수에게 던졌단 말이냐?"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신문 장수라니요? 저는 그런 사람은 알지도 못합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기록해놓아야겠다면서 수첩을 가지고 와서 뭔가 적더니 소리를 내어 읽었다.
'그는 신문 장수를 모른다.'
그러고 나서 다시 나에게 물었다.
"그럼 어느 닭장에서 집어온 거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결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내 말을 또다시 적어넣더니 이제는 증인을 세워야겠다고 말했다. 그 때 그 마누라가 소리를 질렀다.
"알폰스!"
그러자 알폰스가 방으로 들어왔다. 젬멜마이어가 알폰스에게 말했다.
"너는 거짓말이라곤 하지 않는 진짜 도이칠란트 소년이다. 그러니까 네가 본 대로 솔직히 말해 봐라."
알폰스는 마룻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나와 막스가 그 신문 장수 집에 가 있었다는 것, 나는 뒤에 있었고 막스는 앞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남자가 나오자 내가 갑자기 달걀을 던졌다는 것 따위를 이야기했다. 젬멜마이어는 연필을 혓바닥에 대고 침을 묻히더니, 증인도 거짓말을 했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그 사람에게 달걀을 던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달걀은 제 돈으로 산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저에게 3마르크를 보내주셔서 그 돈으로 산 것입니다."
젬멜마이어는 '하하!' 큰 소리로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절반은 알아냈다."
나는 막스도 같이 있었으니까 내가 달걀을 산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마누라가 가서 막스를 데리고 왔다. 젬멜마이어가 막스에게 말했다.
"막스, 너는 장교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거짓말을 하면 총살을 당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게다. 달걀을 던진 것에 대해 아는 대로 다 말해라."
막스는 즉시 알폰스가 우리를 고자질했다는 것을 알아차폈다. 그래서 자기 역시 달걀을 던진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젬멜마이어는 그 말을 받아쓰더니 달걀을 어디서 얻었느냐고 물었다. 막스가 대답했다.
"그 달걀은 우유 가게에서 산 것입니다."
나는 막스에게 말했다.
"젬멜마이어 씨는 내가 그 달걀을 훔쳤다는 거야."
그러자 막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둘이 함께 달걀을 샀습니다."
그러자 그 마누라가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너희들이 우리 집 달걀을 30개나 훔쳐간 것을 내가 다 알고 있다."
그러자 젬멜마이어가 나서서 말했다.
"판결은 내가 내릴 테니까 당신은 가만히 있어요."
그러면서 다시 수첩에다 뭐라고 적어 넣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 동안 적은 것을 소리를 내어 읽었다. 즉 그는 우리들을 다시 한 번 용서해주며 학교에도 알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막스도 그 자리에 같이 있었고, 막스는 전쟁터의 이슬로 사라진 장교의 아들이므로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달걀 30개의 값을 지불해야 한다고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말을 자세히 써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젬멜마이어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을 좀더 엄격하게 다루고 무섭게 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젬멜마이어는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나는 전사한 옛 전우를 생각해서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어."
그러고 나서 우리들은 그 방에서 쫓겨 나왔다. 나는 우리 어머니가 억울하게 그 달걀 30개의 값을 지불할 것을 생각하니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울었다. 나는 알폰스란 놈을 내가 힘이 빠져서 더 이상 때리지 못할 때까지 죽도록 두들겨 패 주어야겠다고 막스에게 말했다.
막스가 나를 말리면서 말했다.
"그러면 그 자식은 또 학교에 가서 우리들을 고자질할 테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돼."
우리들은 불꽃 폭약을 샀다. 밤중에 그것을 젬멜마이어 방 안으로 쏠 생각이었던 것이다. 만약 로켓이 방 안에서 빙빙 돌면서 나오지 않고, 마치 적이 쏘는 것같이 불꽃을 뿜어대면 참 재미있을 것이다. 그리고 젬멜마이어 그 작자가 정말 자신의 말처럼 진짜 얼마나 용감한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집은 드디어 내가 다니는 학교가 있는 읍내로 이사를 왔다. 이사를 오자 내 담임 선생 빈딩거가 가정 방문차 우리 집에 찾아왔다. 그러더니 빈딩거는 그 후부터 줄곧 우리 집을 찾아왔다. 아마 여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와 있는 우리 큰누나 마리를 노리는 모양이다. 그러나 집에서는 내가 모르게 하려고 쉬쉬하였다.
마리 누나는 평소에 나만 보면 언제나 욕을 퍼부었다. 어머니가 왜 그러느냐고 나무라도, 내가 아무 짝에도 못 쓸 망나니라고 하면서 조금도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러던 마리가 느닷없이 나에게 무척 상냥해졌다. 내가 학교에 갈 때면 현관까지 따라 나와, 과자를 가지고 가서 먹으라는 둥, 옷깃이 구겨졌다며 바로잡아 주는 둥, 이만저만 곰살 맞게 구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인가는 나에게 새 넥타이를 사 주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내 옷차림을 보고 욕이나 퍼부었지, 한 번도 뭔가 사 주었던 적이 없는 누나였다. 나는 그런 행동이 뭔가 의심스러웠지만, 좋은 게 좋다고 그리 꼬치꼬치 캐려 들지 않았다. 마리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자주 이렇게 묻곤 했다.
"담임 선생님이 공부 시간에 너를 불러 세워서 대답하라고 시키지 않던? 그 선생님이 너에게 친절하게 구니?"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이렇게 냉정하게 쏘아주곤 했다.
"누나 따위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나서고 그래? 괜히 몇 살 더 먹었다고 나한테 어른 행세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난 누나 같은 사람은 상대도 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마리 누나는 갑자기 옷차림마저 달라졌다. 나는 그저 마리 누나가 또 새 옷을 또 사 입었구나 하면서 건성으로 지나치곤 했다. 처녀들은 남들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려고 언제나 새 옷을 사 입으려고 안달을 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결국 시간이 좀 지나면서 나도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우리 담임 선생 빈딩거는 나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고, 나도 그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작자는 하고 다니는 꼴도 지저분했다. 그 모습을 보면 아마 아침마다 계란 프라이만 해 먹는 모양이었다. 콧수염에 언제나 달걀 노른자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말을 할 때면 작자의 입에선 언제나 침이 튀어 나왔다.
빈딩거의 눈은 고양이 눈처럼 파랬다. 대개 학교 선생이란 작자들은 못생긴 경우가 많지만 이 작자는 특히 더 심했다. 머리를 자주 감지 않아서 지저분했고, 비듬도 많았다.
빈딩거가 맡고 있는 과목은 역사였다. 그는 수업 시간에 고대 도이칠란트 사람들의 생활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언제나 수염을 쓰다듬으며 목소리에 무게를 넣곤 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자기를 마치 고대 도이칠란트 사람으로 착각할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조상들이 빈딩거처럼 배가 뚱뚱하고, 그렇게 신발을 질질 끌며 걸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다른 아이들이 잘못하면 그냥 야단만 치고 말았지만, 내가 잘못하면 아예 교실에 잡아 가두곤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의 장래를 생각해서 각별히 배려한 때문은 결코 아니다. 그는 나에게 그런 벌을 줄 때마다 이런 악담을 결코 빼놓지 않았다.
"네 따위 인간은 결코 이 사회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그러나 빈딩거 말처럼 과연 그렇게 될 것인지는 앞으로 좀 더 두고 보야야 알 노릇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최소한 우리 조상을 볼품없이 보이게 하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마침 마을의 합창단이 주최한 무도회가 열리게 되었다. 마리 누나는 그 무도회에 입고 가기 위해 연분홍색 옷을 맞춰 입었다. 그런데 바느질하는 여자가 일을 좀 늦게 마치는 바람에 마리는 안달을 하며 화를 냈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와 마리 누나는 모양을 한껏 낸 채 무도회장으로 득달같이 달려가 버렸다.
다음날 아침 식사 때 어제 저녁 무도회 이야기가 나왔다. 마리 누나가 나에게 말했다.
"얘, 루드비히야, 너희 빈딩거 선생님도 오셨더라. 아이 참, 그 분은 너무 매력이 넘치는 분이야!"
이 소리에 나는 약이 바짝 올랐다. 세상에 매력 있을 인간이 따로 있지, 세상에 그게 빈딩거라니...! 그래서 나는 마리 누나에게 그 고운 분홍빛 옷에다 그 작자가 달걀 노른자나 침을 잔뜩 묻히지는 않더냐고 쏘아붙여 주었다. 그러자 마리 누나는 얼굴이 갑자기 새빨개졌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자리에서 펄쩍 뛰어 일어나 문 밖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나서 문 밖에서 마리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마리 누나가 정신이 이상해진 것으로 밖에는 보이질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머니까지 마리 누나의 편을 들고 나서는 데는 나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 그 선생님 얘기를 그렇게 버릇없이 하는 게 아니다. 마리 누나가 그런 얘기를 듣고 어떻게 참을 수가 있겠니!"
"도대체 그게 누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에요. 그 자가 항상 지저분한 건 사실이라구요. 있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말한다고 해서 울다니! 그건 누나가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거지 뭐에요."
그러나 어머니는 이 일로 더 이상 소란을 피우기 싫은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이렇게 달랬다.
"하지만 마리 누나는 마음이 착하단다. 네가 공부라고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선생님에게 버릇없이 굴고 하는 걸 보고 내가 속이 상하리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렇지만 우리 담임 선생 빈딩거는 항상 수염에 달걀 노른자를 묻히고 다닌다구요. 그건 누가 뭐래도 사실이에요."
"루드비히야, 빈딩거 선생은 아주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이더라. 장래가 아주 유망한 그런 사람이야. 그리고 마리한테도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지. 그 사람이 마리한테 너 때문에 얼마나 걱정이 많으냐고 그러더래. 그러니까 너는 아무 말 않고 잠자코 있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나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누나한테 나를 고자질하다니, 그 작자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녀석일까? 나는 그 빈딩거라는 자가 도무지 정상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날 수업 시간에 빈딩거가 또 나를 지명해 문제를 풀라고 시켰다. 나는 그 날도 역시 예습을 해 가지 않았기 때문에 빈딩거가 묻는 것에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야, 이 자식아, 너는 왜 또 예습을 안 해온 거냐?"
나는 처음에 빈딩거에게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지 잘 알 수가 없어서 어물어물했다. 그러다가 결국 이렇게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어제는 집안에 사정이 생겨서 도저히 예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집안 사정 때문에 예습을 못했다니?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수작이냐!"
"어제는 읍내 무도회 때문에 하루 종일 집안이 온통 떠들썩했거든요. 옷을 가져와야 할 재봉사는 시간이 다 되도록 오지를 않지, 그 옷을 입을 사람은 옷이 안 온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고... 결국은 제가 부랴부랴 그 옷을 찾으러 옷가게에까지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옷을 찾아 가지고 뛰어오다가 넘어져서 발목까지 다쳤어요. 그래서 그걸 치료하느라고 예습은 엄두도 낼 수가 없었어요."
그는 당연히 내 말을 믿지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내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나에게 아무 욕도 하지 않고 그냥 놓아 주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나서였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마리 누나가 나를 보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나는 처음엔 마리 누나가 도대체 뭐라고 고함을 지르는지조차 알아 들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옆에서 누나를 뜯어 말렸다.
"이제 그만해 두어라, 마리야. 좀 조용히 하렴."
"저 개망나니 자식은 기를 쓰고 나를 불행하게 만들려고 저렇게 난리잖아요!"
나는 아직도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동네방네 떠나가도록 소리를 지르고 야단이야 응, 누나? 도대체 뭐 못 먹을 거라도 먹은 거야?"
그러자 이번에는 어머니까지도 몹시 화를 냈다. 나는 이제까지 어머니가 그렇게 무섭게 화를 내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 녀석아! 네가 도대체 뭘 잘했다고 그렇게 입을 놀리는 거야? 네가 그 동안 누나한테 한 짓은 무엇으로도 변명할 수가 없어! 이 녀석아! 공부 안 한 것만 가지고도 부족해서 거기에다 누나 핑계를 대? 뭐, 어째? 누나 옷 심부름 때문에 재봉사한테 가다가 미끄러져서 발을 삐었다고? 이 녀석아, 그래 놓았으니 빈딩거 선생님이 우리 집을 도대체 무어라고 생각하겠니? 무도회 때문에 온 집안이 발칵 뒤집히고 온통 벌집 쑤셔 놓는, 그런 지체 없는 집으로 밖에 더 생각하겠니? 이 망나니 같은 녀석아!"
"그 사람은 우리 집 식구들이 모두 거짓말만 한다고 생각할 거에요. 나까지도 집어넣어서 말이에요!"
마리 누나는 또 한 번 이렇게 찢어지라고 소리를 지르더니 젖은 손수건으로 눈을 눌렀다. 그렇게 해야 울어도 눈이 붓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들 사이에 끼어 있으면 도무지 그들의 화가 가라앉지 않을 것을 나는 잘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즉각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저녁 식사도 내 방에서 먹었다. 이 일이 있었던 것은 금요일이었다. 그런데 다음 일요일에 어머니가 갑자기 내 방으로 건너오셨다. 그러더니 아주 정다운 목소리로 내게 함께 거실로 나가자고 했다. 나는 무슨 일인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어머니를 따라서 거실로 갔다.
거실에는 빈딩거가 서 있었다. 마리가 그에게 기댄 체 다소곳이 서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들어가자 곁눈으로 무섭게 흘겨 보았다. 어머니는 나를 그들 앞으로 끌고 가시더니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루드비히야, 이제 네 누나 마리가 너의 담임 선생님 부인이 되게 되었단다."
그러더니 어머니는 갑자기 손수건을 꺼내 들고 울었다. 마리도 따라서 울었다. 빈딩거는 내 앞으로 와서 손을 내 머리에 얹더니 말했다.
"이제 우리 다 같이 힘을 모아서 이 아이가 사회에 유용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 목소리는 그가 학교에서 역사 시간에 우리들의 옛 선조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끄집어 내는 그 굵은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를 이젠 우리 집에서까지 들어야 하다니! 이런 엿 같은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내 방에서는 폴벡 씨네 집 정원이 내려다보인다. 우리 집 뒷마당이 코른 골목 쪽으로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오후에 내 방에서 학교 숙제를 하고 있으려면, 고문관인 폴벡 씨가 그의 부인과 함께 다정하게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나누는 얘기 소리도 거의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 내용은 언제나 하나같이 정해져 있었다.
"우리 공주님 그레트헨은 도대체 무얼 하기에 이렇게 오랫동안 보이질 않는 거요?"
이렇게 폴벡 씨가 물어보면, 그 부인은 또 언제나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어머나, 당신도 참. 그 착한 애가 공부를 하지 또 뭘하고 있겠어요."
나는 그 당시 생각으로(몰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사람이 공부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지도 못하고, 그밖에 다른 일을 못할 정도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 역시 그런 면에서 그레트헨에게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애처럼 그렇게 해 보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우리 학교에서도 그레트헨 폴벡에 관한 이야기는 자주 들렸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아이를 보고 '똑똑한 체하기만 하는 메스꺼운 못난이'라고 단정을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집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때문에 받은 인상 탓인지 무작정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애들이 이야기할 때 그 아이를 변호하고 나서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 번은 우리 집에서도 그 아이 이야기가 나왔다. 그 아이와 비교하는 바람에 내가 궁지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니 나 역시 이제는 그 아이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계집애는 양말도 뜰 줄 모르고, 머리 속에 필요도 없는 허접쓰레기나 잔뜩 채워넣고 있는 못된 계집애라고 퍼부어주고 말았다. 그러자 어머니는 나를 나무라면서 내 말을 가로막았다.
"얘, 루드비히야, 네가 저 재주 있는 처녀만큼만 열심히 공부한다면 난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거야. 그 아이는 부모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을 뿐, 너처럼 그렇게 내놓기도 창피한 그런 성적표를 가져오진 않을 거야."
나는 사람을 누구와 비교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그런 것이 교육적으로 가치가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그 기분 나쁜 얘기를 계속 꺼내시는 것이다. 물론 그 결론이야 항상 뻔하다. 나더러 그 그레트헨 폴벡을 열심히 본받으라는 것이 요지였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 아이를 본받을 수 없었다. 부활절 휴가 때에도 과거나 마찬가지로 형편없는 성적표를 집에 가지고 왔던 것이다. 물론 그 성적표는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고 해도 보여줄 만한 것이 못됐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그런 것을 사람들에게 감추는 법이 없는 분이었다.
그래서 친척들은 모두들 좋아라고 손뼉을 쳤다. 그러면서 입을 모아 다음달부터는 어디 가까운 구둣방에 직공으로라도 들여보내야 한다고 아우성들을 쳐댔다. 그러나 나는 내가 손으로 하는 이 훌륭한 직업을 전혀 조금도 싫어한다는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또 벌떼처럼 나서서 나를 수치도 모르는 녀석이라고 열심히 씹어댔다.
그 해 부활절 휴가는 정말 재미없는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집안 친척들은 모두 짜기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합세하여 내가 방학 동안 조금도 재미있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드디어 나를 좋은 길로 인도하는 방법을 알아 냈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를 그레트헨과 사귀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 처녀가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서 나도 그 아이처럼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고문관 폴벡 씨도 이런 생각에 대해 동의한다는 뜻을 비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날 오후부터 그 처녀와 함께 시간을 보낼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당연한 것이지만 이런 일은 도무지 영 내 기분에 맞지 않았다.
당시 라틴어 학교 학생들은 다른 처녀와 사귀는 것을 지금 중고등학교 학생들처럼 당연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밖에도 그 처녀와 사귀는 것이 두려웠다. 거기에는 내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제 앞으로 나보다도 그 처녀가 나를 사귀는 것을 끔찍하게 여길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그러나 물론 이런 나의 그런 걱정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나는 점심을 먹자마자 바로 어머니와 함께 그 집으로 가야 했다. 우리가 그 집에 들어갔을 때 폴벡 씨 부부는 탁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그레트헨은 그 자리에 없었다.
"야, 이것 좀 보라구. 우리 그 애는 그 사이에도 또 공부를 하러 간 모양이야."
폴벡 씨가 말했다. 그러자 그 부인이 나서서 거들었다.
"그 애는 아마 지금 지리학 공부를 하고 있을 거에요. 어제 저녁에 그러는데, 오늘은 지리학을 좀 연구해야 한다고 그러더라구요."
우리 어머니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자 내 가슴이 정말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쿡 찔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도 착하기만 한 우리 어머니를 정말 한 번쯤은 기쁘게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고문관 폴벡 씨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장단 맞추듯 두드렸다. 그러면서 눈썹을 있는 대로 치켜올리더니 묘한 베를린 억양으로 말했다.
"으흠, 그래... 지리학이라. 그렇지, 지리학도 공부를 하고 연구해야지. 인간은 결국 모두 다 이 지구 위에서 살고 있는 존재니까 말이야."
우리 어머니는 이 때 나를 화제에 끌어들이려고 나에게 물으셨다.
"얘, 루드비히야. 너희 학년에서도 지리학 과목을 배우니?"
고문관 부인은 다른 집 아이들도 자기 딸과 똑같은 것을 배우리라고 기대하는 우리 어머니를 비웃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 남편은 몹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애초에는 나도 별로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사람들이 하는 꼴을 보니, 나도 모르게 한 대 먹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비꼬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그건 뭐 굳이 지리학이라고까지 할 것도 없어요. 그냥 지리라고만 해도 충분한 거니까요. 그리고 그런 건 우리 라틴어 학교에서는 아예 취급을 하지 않아요. 학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과목이니까요. 아마 사립 여학교 같은 데서는 그런 것도 가르쳐줄 겁니다."
나는 이 바보같은 위인들을 납작하게 만들어주고 싶어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내 생각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내 말에 오히려 낭패스러워 하는 것은 우리 어머니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내 말보다는 그 집 사람들 생각이 옳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보다는 그 사람들이 훨씬 더 아는 게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마치 내 말 때문에 큰 무안이라도 당한 듯 낭패스러워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폴벡 고문관이란 작자는 내 말을 듣고 우리 어머니를 아주 딱하다는 눈길로 쳐다보기까지 했다. 우리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까지 고였다. 너무나 창피했던 것이다.
어머니를 그렇게 무안하게 만든 그 바보 같은 늙은이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더니 눈을 나에게 돌렸다. 그 찌푸린 이맛살 하나하나가 무얼 말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즉 나의 장래가 영 글러먹었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표시를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너는 배움이라는 것의 필요를 부인하는 모양이구나. 그러니 네가 부활절 방학 때 받아온 성적표가 제대로 나올 리가 없지. 너의 딱한 어머님도 이렇게 실망하시게 만들고... 너는 지리라고 말하는 것이 지리학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세련된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어떤 분야든지 그걸 깊이 파 들어가게 되면, 그건 학문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는 거다. 그렇게 되면 그런 사람은 그냥 지리라고 하진 않아. 지리학이라고 하는 거지."
작자가 그런 식의 설교를 했다고 나는 그 자가 예상했던 만큼 기분이 상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물론 그 따위 엉터리 설교를 참고 들어야 하는 쪽에선, 하는 쪽보다 기분이 훨씬 더 상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작자의 거드름에는 정말 입맛이 썼다.
그랬기 때문에 그레트헨이 우리 있는 곳으로 나왔을 때 나는 속으로 무척 기뻤다. 그레트헨이 등장하자 고문관 부부는 떠들석하게 그 아이를 맞았다. 내가 창문에서 내다보던 모습과도 또 딴판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이 모범생 아이를 얼마나 기쁘게 여기고 있는지를 우리 어머니에게 보여 주고 싶어서 안달이었던 것이다.
부모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대우를 낯 간지러워 하지도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그 아이는 또 어떻게 되어 먹은 셈인가! 다리가 껑충하고 비쩍 말라 몸매가 엉성한 못생긴 계집애가 말이다! 이제 겨우 16살 먹었을 뿐인 이 계집애는 생전 단 한 번도 인형 따위를 가지고 놀았던 적도 없다는 듯, 아주 점잔을 빼면서 코끝을 치켜들고 자리에 앉았다.
"그래, 이제 지리학 공부는 다 끝냈니?"
그 아이의 어머니가 곰살맞게 딸에게 물었다. 그러면서 그 여자는 나를 도전하는 듯한 눈초리로 건너다 봤다. 감히 내가 폴벡 집안의 똑똑한 가족들과 학문적인 논쟁을 계속할 것인지 따지는 듯한 눈초리였다. 그러자 그레트헨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대답했다.
"아뇨, 아직 끝내지는 못했어요. 오늘 저녁에 몇 가지 더 조사하고 정리해야 할 게 남아 있어요. 지금 잡은 주제가 저한테는 너무 흥미진진하거든요."
그 계집애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는 모습은 마치 자기가 유명한 대학 교수나 되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자 폴벡 씨는 자랑스럽게, 자 어떠냐는 듯이 다시 한 번 나를 쳐다보았다.
"토마 군, 그래 자네는 이런 얘기를 듣고도 지리가 제대로 된 학문이 못 된다고 얘기를 할 수 있는가?"
나는 그냥 얼굴을 돌려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폴벡 씨는 다시 자기 딸에게 물었다.
"너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그러나 그 때 마침 그레트헨은 주먹 크기만한 빵을 입에 통째로 집어넣었기 때문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아무렇게나 고개만 끄덕거렸을 뿐이다. 그래서 그 폴벡 씨의 질문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그런 모습들을 그저 감탄과 존경에 찬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저 신통하기 짝이 없는 이 처녀를 쳐다봤다가, 다음에는 금방 또 근심에 휩싸여서 나를 돌아다보기도 했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폴벡 씨 부인은 아마 우리가 그 집을 방문한 원래 목적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얘, 그레트헨. 이 토마 씨 부인이 아드님인 루드비히 군을 데리고 오신 건 말이야, 루드비히 군을 너와 사귀게 하시려는 거야. 그렇게 하면, 루드비히 군의 공부도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시란다."
폴벡 씨 부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이번에는 우리 어머니도 거들었다.
"그레트헨 양이 공부를 열심히 잘한다는 사실은 우리 동네에 다 알려져 있답니다. 저도 그레트헨 양을 칭찬하는 소리를 주위에서 많이 듣지요. 그래서 우리 아이가 그레트헨 양과 함께 사귀면서 가까이 지내게 되면, 우리 아이도 배우는 것이 많아지지 않을까, 공부가 좀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답니다. 물론 우리 아이 성적이 좀 나쁜 편이긴 하지만 말이에요."
그러자 고문관 폴벡 씨가 어머니 말을 가로채고 나섰다.
"토마 씨 부인, 이 아이는 성적이 조금 나쁜 게 아니라 아주 많이 나쁜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나를 넌지시 노려보았다.
"예, 사실 그래요. 좀 많이 떨어진답니다. 그래서 제가 속이 상하지요. 하지만 그레트헨 양의 도움을 받고, 또 저 아이 스스로 어머니를 위해 지금보다 노력을 한다면 꼭 나아질 거라고 봅니다. 저한테도 그렇게 하기로 단단히 약속을 했답니다. 그렇지 않니, 루드비히?"
물론 나는 어머니와 약속을 했다. 그러나 나는 폴벡 씨 집에서는 그 약속을 되풀이해서 말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폴벡 씨 집안 사람들 앞에서 나의 훌륭한 계획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코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이 모범적인 가족은 사실 내가 타락하는 걸 더 좋아한다는 것을,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나는 마음 속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씨 좋고 악의 없는 우리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지만, 나는 어머니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그걸 느끼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우리끼리 주고받는 동안 공부를 많이 하는 이 집 따님은 먹던 버터 빵을 마저 꿀꺽 삼키고 드디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것도 제멋대로 반말 투였다.
"얘, 너 도대체 지금 몇 학년이니?"
물론 내 성적표는 그 아이에 비교하면 훨씬 못할 것이다. 학년으로 따져도 나는 한 학년 밑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온 경험이랄까, 그런 것은 내가 훨씬 더 경험이 많고 노숙한 어른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감히 그런 나를 보고 반말이라니... 그러나 지금 그런 걸 따지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난 지금 4학년이다."
나는 대답했다.
"그러면 너희들은 지금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코르넬리우스가 나오는 부분쯤 배우고 있겠구나?"
그레트헨의 말투는 자기가 마치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나한테 그런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내가 뭐라고 대꾸를 하기도 전에 그 아이 어머니가 먼저 끼어 들었다.
"너는 물론 진작 그걸 읽었겠지, 그레트헨?"
"저는 이미 3년 전에 플루타르크 영웅전은 다 읽었어요. 하지만 그 책은 너무나 내용이 좋아서 지금도 가끔 펴 보고는 하지요. 어제도 에파메이논다스의 전기를 다시 읽었어요."
"흠, 에파메이논다스라고? 그래, 그래. 그는 대단히 흥미 있는 인물인 것에 틀림이 없어."
이번엔 그 아버지가 끼어 들었다.
"물론 학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저 친구한테는 그렇지도 않을 테지만 말이야."
나는 그래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저 침묵을 지키는 것이 이들을 경멸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그들의 그런 수작을 견디지 못한 모양이다.
"그래, 루드비히야. 너도 그 책을 집에 가지고 있지 않니? 배웠어? 배웠다면 그레트헨 양하고 그 책에 관한 얘기를 좀 해 보려므나. 그래야 네가 얼마나 공부를 했는지 그레트헨 양도 알 수 있지 않겠니?"
"우린 아직 에파메이논다스는 배우지 않았어요."
나는 마지못해 대꾸했다.
"그러면 알키비아데스는 배웠을 테지. 그 책에서 코르넬리우스 부분까지는 아주 쉬워. 하지만 5학년으로 올라가게 되면 그 때부터는 정말 어려운 내용을 배우기 시작한단다."
나는 무작정 사람을 우선 한풀 접어놓고 제 멋대로 지껄여대는 이 건방진 계집애를 아주 코가 납작하도록 혼을 내 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아무리 약이 올라도 그저 아무 말 않고 잠자코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 그 수밖에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었다. 그 계집아이는 내가 미처 뭐라고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저 혼자서 쉬지 않고 지껄여댔기 때문이다.
그레트헨은 마치 태엽 감은 것이 다 풀릴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계속 지껄여대야 하는 자동 인형 같았다. 이 처녀는 우리 어머니 앞에서 계속해서 낯선 라틴어 이름들을 늘어놓았다. 불쌍한 우리 어머니는 그래서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었다. 이 계집애가 다 지껄이고 나면 아마 머리 속이 텅 빈 것처럼 되어 버릴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데에는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폴벡 씨 부부는 계속해서 딸에게 뭔가 그럴싸한 말을 시켜 보려 했지만, 그 아이 머리 속에는 이제 더 이상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더니 그 계집애는 지리학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재빨리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우리 어머니는 그 뒤에도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앉아 있었다. 한껏 만족한 폴벡 씨 부부는 자기네 딸이 우리 어머니에게 미친 충격을 살펴보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들은 자기 딸의 실력에 우리 어머니가 완전히 납작해져 버린 것을 확인하고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완전히 야코가 죽어서 폴벡 씨 부부에게 작별을 하고 나와 함께 그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그리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아무 말씀도 없었다. 어머니는 집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그래도 내 머리를 사랑스러운 듯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으셨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딱한 녀석 같으니라구. 너는 아무리 해도 그 아이처럼 되지는 못할 거야."
나는 온갖 약속으로 상심한 어머니를 위로하려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저 슬픈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면서 이렇게 되풀이할 뿐이었다.
"아니, 아니야... 아무래도 그 아이처럼 그렇게 될 수는 없을 거야."
그리고 사실 어머니 말이 맞았다. 나는 그 아이처럼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서 나는 다행스럽게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했지만, 그 전 해에 한 번 시험에 떨어져서 다시 나와 같이 시험을 보았던 폴벡 씨의 딸은 그 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합격을 못 하고 말았으니까. 물론 이것은 후일담에 속한 이야기라서 여기서 구구이 밝힐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 누나 마리와 빈딩거 선생의 결혼식에 관해서도 아무래도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두 사람의 결혼식 날은 목요일이었다. 그 날은 나도 학교에 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새 옷까지 받아 입었고 여느 때보다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다. 집안은 온통 야단법석이었다. 현관문은 끊임없이 열렸다 닫혔다 하며 조금도 쉴 새가 없었다. 초인종이 울리기만 하면 어머니는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곤 했다.
"카티야, 이번엔 또 뭐냐?"
카티는 우리 집에 1년 전부터 와 있는 가정부였다. 누나도 마찬가지로 카티를 바쁘게 불러댔다. 카티도 "네, 네 여기 갑니다" 하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고 나서 현관문을 열어보면 무슨 선물 상자나 축하 전보 같은 것을 가지고 온 남자가 그 앞에 서 있곤 했다. 그러면 여자들은 다들 비명을 지르며 문을 닫아걸곤 했다. 다들 옷을 갈아입는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나를 결혼식장까지 태워 갈 첫 마차가 집으로 왔다. 그러자 또 한 번 소동이 벌어졌다.
"루드비히야, 너 이제 준비를 다 한 거니?"
"저 녀석 또 넥타이가 비뚤어졌어요! 저 녀석 언제쯤이나 넥타이라도 제대로 매게 되려나!"
"제발 좀 빨리빨리 서둘러라!"
드디어 집 밖으로 밀려 나가 마차를 타게 되었을 때 나는 속이 다 후련했다. 그 시끄러운 소동에서 벗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차 안에는 프리다 고모가 벌써 두 딸 안나와 앨리스를 데리고 앉아 있었다. 그 딸들은 마치 견진성사(가톨릭의 7가지 성사 가운데 하나)를 받을 때처럼 눈부시게 하얀 옷을 입고, 머리까지 곱슬곱슬하게 퍼머를 하고 있었다. 프리다 고모는 내가 마차에 오르자 곧 마차를 출발시켰다.
"이제 마리는 행복하겠지... 그만하면 그 애는 남편을 잘 고른 셈이야. 게다가 그 사람이 또 네 선생님일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겠니?"
이 까다로운 마나님은 항상 우리 집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 어머니를 괴롭히려고 안달을 하곤 했다. 나는 벌써부터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거기에 맞춰 고모를 적절하게 골탕을 먹였던 것은 지난번에도 이미 밝혔다. 그런데 이 고모는 우리 누나가 결혼하는 그 날까지도 그 버릇을 못 고치고 우리 집안을 열심히 헐뜯었다.
그래서 나는 또 한 방 먹여주기로 했다. 고모의 딸 중에서도 그래도 좀 나은 편인 안나에게 어째서 얼굴에 주근깨가 자꾸 심해져 가느냐고 이죽댔던 것이다. 심통 사나운 고모는 당연히 내 수법에 걸려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식장인 성당에 도착할 때까지 안나 얼굴의 주근깨 얘기로 계속 입씨름을 했다. 하지만 성당에 도착하고부터는 굳이 이 심술쟁이 고모와 같이 움직일 필요가 없어져서 실랑이는 저절로 끝나고 말았다.
우리는 성당 안으로 들어가 주례를 맡아 볼 신부를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조금 있다가 마차가 또 한 대 왔다. 프란쯔 아저씨와 구스티 아주머니, 그리고 그들의 아들인 막스가 마차에서 내렸다. 나는 막스란 녀석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자식은 나와 나이가 동갑이면서도 나만 만나면 자기가 어른처럼 굴려고 들었던 것이다.
프란쯔 아저씨는 우리 친척들 가운데 가장 부자였다. 인쇄소를 가지고 있었던데다, 신앙심이 두텁다고 남들이 다들 인정하는 탓인지 성당에서 필요한 인쇄물은 모두 도맡아서 수입이 무척 좋았던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 집에 가면 성인들 그림을 인쇄한 종이쪼가리 외에는 돈이나 먹을 것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는 또 자기가 라틴어를 잘 아는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은 초등학교 밖에 다니지 못한 처지였다. 구스티 아주머니도 신앙심이 무척 좋았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만 만나면, 우리 가족들이 미사에 잘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내가 사고를 치는 것이라고 씹어대곤 했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우선 신부에게 인사부터 했다. 그러고 나더니 구스티 아주머니는 프리다 고모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인사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프리다 고모의 눈은 구스티 아주머니의 왼쪽 손가락에 끼여 있는 반지를 발견했다. 그러더니 고모는 말했다.
"자네는 오늘 아주 그럴싸한 보석을 달고 왔네 그려.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야 백날 살아도 어디 그런 것 구경이나 할 수 있겠나."
한스 아저씨와 안나 아주머니가 그날 함께 온 것이 나로서는 가장 기뻤다. 그는 산림 감독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전 방학 때 나는 한스 아저씨 댁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그 때 아저씨는 나와 무척 재미있게 지냈다. 내가 프리다 고모의 흉내를 내며 흉을 보면 아저씨는 언제나 기분 좋게 웃었고, 프리다 고모를 꼴도 보기 싫은 살쾡이라고 씹어댔다.
평소에는 넥타이 같은 것을 매지 않고 항상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 있던 한스 아저씨가 오늘은 높은 칼라를 단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졸라매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차람이 어색하고 불편한지, 아저씨는 자꾸만 목 있는 곳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자 어쩔 줄을 모르며 자꾸만 구석진 곳으로 피했다.
성당 안 결혼식장은 차츰 사람으로 가득찼다. 우리 라틴어 학교에서는 수학 선생과 습자 선생이 왔고, 빈딩거의 친척으로는 그의 누이동생 둘과 남동생 하나가 찾아왔다. 남동생은 어느 학교의 체육 선생이라는데, 가슴을 앞으로 쑥 내밀고 있었다. 마차를 타고 오는 처녀들은 빠짐없이 남자를 하나씩 거느리고 있었다.
나는 그 처녀들을 잘 알지 못했으나 그 중 단 한 명, 바인베르거 로사만은 안면이 있었다. 그 처녀는 마리의 친한 친구였다. 그 처녀들은 모두 꽃다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것으로 얼굴을 가리며 바보같이 키득키득 웃어댔다. 멍청이들... 별로 우스울 것도 없는데 왜 웃는담!
이번에는 우리 어머니와 페피 아저씨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페피 아저씨는 세무 공무원이다. 그리고 곧 이어서 빈딩거와 마리, 그리고 아버지 대신 신부를 인도할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퇴직한 육군 대위로 빈딩거의 먼 친척이었다. 그는 제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고, 가슴엔 훈장을 달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프리다 고모는 구스티 아주머니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여보게, 그래도 무척 잘한 일이지 뭐야. 저 사람들이 저렇게 장교까지 모셔왔으니 말이야."
식장의 문이 열리고, 우리는 모두 한 줄로 서서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빈딩거와 마리는 제단 앞 중앙에 가서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신부가 나와서 설교를 하고 신랑 신부에게 두 사람은 이제 결혼할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다. 마리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빈딩거는 엄청나게 크고 굵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 나더니 미사가 시작됐다. 미사가 너무 오래 계속되어서 나는 지루해 죽을 지경이었다.
나는 한스 아저씨나 어떻게 하고 있나 궁금해서 그 쪽을 돌아다보았다. 그는 한 쪽 발을 괴고 서서 모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기침을 쿨럭쿨럭하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더가 내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한스 아저씨는 눈을 꿈벅거리면서 엄지 손가락으로 프리다 고모를 몰래 가리켰다. 그러면서 또 프리다 고모가 항상 하는 버릇대로, 이빨을 쑥 내밀고 있는 흉내를 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킥킥 웃었다. 그러자 빈딩거의 남동생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좀 얌전하게 있으라고 점잖게 나무랐다. 구스티 아주머니도 프리다 고모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면서 그 두 여자는 나를 돌아다보았다. 그리고는 몹시 실망했다는 듯 천장을 쳐다보며 머리를 흔들어댔다.
드디어 결혼식이 끝났다. 우리는 모두 제의실로 들어갔다. 거기서 다들 축하 인사를 나눴다. 남자들은 빈딩거와 악수를 하였고, 아주머니들과 처녀들은 마리에게 다들 다가가 누나의 뺨에 키스를 했다. 구스티 아주머니와 프리다 고모는, 옆에 서서 울고 있는 우리 어머니에게 오늘은 우리 어머니나 다른 모든 가족들에게도 축복 받은 날이니 울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들 역시 우리 어머니를 껴안고 키스했다.
그러자 내 옆에 서 있던 한스 아저씨는 모자로 입을 슬쩍 가리면서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야, 엄마를 조심해서 잘 지켜야 한다. 저 두 여자는 남의 눈만 없다면 너희 엄마를 당장에라도 물어뜯을 게다."
나도 빈딩거에게 가서 축하를 해야 했다. 빈딩거는 내 인사를 받더니 의미심장하게 이렇게 말했다.
"고맙다. 나는 이제 네가 이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어 주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마리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게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키스를 해 주었다. 우리 어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눈물을 흘렸다.
"얘 루드비히야, 너는 이제부터 정말 다른 사람이 되겠다고 나한테 약속하지 않겠니?"
나 역시 눈물이 나오고 울 뻔했다. 그러나 프리다 고모가 옆에서 그 얄미운 파란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울음을 참았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으로 이제부터는 두 번 다시 우리 어머니를 속상하게 하지 않겠다고 그 어느 때보다도 굳게 마음먹었다.
결혼식 피로연은 '양의 집'이라는 이름의 음식점에서 열렸다. 나는 막스와 프리다 고모의 딸 안나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 자리에서 나는 마리와 빈딩거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커다란 꽃다발에 모습이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지가 않았다.
식사는 제일 먼저 맛있는 수프가 나오고 그 다음에 커다란 생선 요리가 나왔다. 거기에다 백포도주까지 곁들여져 있었다. 나는 막스와 내가 누가 먼저 백포도주를 빨리 마실 수 있나 시험해 보자고 했다. 막스도 그러자고 했다. 하지만 이긴 것은 나였다. 내가 훨씬 더 빨리 마셔 버린 것이다. 웨이터가 와서 우리 앞에 백포도주를 또 한 잔씩 따라 주었다. 그 때 페피 아저씨가 자기 잔을 두드리면서 일어나 한 마디 연설을 했다.
"곱게 키운 딸이 이제 훌륭한 신랑을 만나 백년가약을 맺고 출가하게 되니, 앞날에 하나님이 주신 복이 풍성할 것이고, 이 가정에는 큰 경사입니다."
그러고 나서 페피 아저씨는 빈딩거와 마리의 건강을 위해 축배를 들자고 했다. 나도 거기 따라 큰 소리로 축하하고 막스와 또다시 먼저 마시기 시합을 했다. 막스는 이번에도 또 졌다. 막스는 완전히 술에 취한 것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그 다음에는 구운 고기와 샐러드 요리가 식탁에 나왔다. 갑자기 또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프란쯔 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성당에서 신부의 주례로 이루어진 혼례는 더 없이 거룩한 것이며, 그래서 그 어린아이들이 가톨릭으로 교육을 받게 된다면 그 부모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크나큰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프란쯔 아저씨는 신부를 저렇게 잘 키워 주신 우리 어머니를 위해 축배를 들자고 말했다.
나는 미친 듯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큰 소리로 환성을 지르며 포도주 잔을 가지고 어머니 옆으로 갔다. 어머니는 일어나서 여러 사람들과 술잔을 마주 부딪쳤다. 그러더니 어머니는 또 이렇게 말했다.
"오늘 같은 날 얘들 아버지가 살아 있어서 이 모습을 보았어야 하는 건데..."
그러자 한스 아저씨가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대답했다.
"아무렴, 그렇지요. 하지만 그 사람도 이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알고 말구요."
막스는 이제 시험 삼아 포도주를 홀짝거리더니 한 잔 더 마셨다. 그리고 나서는 술잔을 계속 기울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렇게 하지 않고 한스 아저씨 옆으로 가서 앉았다. 모두들 즐거워했고, 특히 젊은 처녀들은 큰 소리로 웃어대고 연거푸 술잔을 마주 댔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프리다 고모는 사방을 열심히 돌아다녔고, 구스티 아주머니와 함께 뭐라고 계속 쑥덕거렸다. 자기가 결혼했을 무렵에는 사람들이 결혼식에서 이렇게 마음대로 놀아나지를 못했다고 하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려왔다.
구스티 아주머니는 도대체 결혼식에서 너무 낭비가 많고, 우리 어머니는 언제나 아이들한테 돈을 너무 헤프게 쓴다고 흉을 보고 있었다. 그 때 또다시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프란쯔 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기 아들 막스가 존경하는 빈딩거 선생, 즉 오늘의 행복한 신랑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축시를 낭독할 것이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박수가 한 차례 터져 나오고 자리는 조용해졌다. 막스는 축시가 적혀 있는 종이를 주머니에서 꺼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걸 읽으려고 입을 벌렸다. 그러나 그는 다리가 자꾸만 휘청거리더니 결국은 그 시를 읽지 못하고 그만 자리에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모두들 놀라서 '와' 하고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스티 아주머니는 우리 아들 막스가 도대체 이게 웬일이냐고, 소리를 꽥꽥 질러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 아이가 술에 취해서 그렇다는 것을 대뜸 알았기 때문에 모두들 큰 소리로 웃을 뿐이었다. 나는 프리다 고모와 구스티 아주머니를 도와서 막스를 옆방으로 들어서 옮겼다. 그 녀석을 소파 위로 들어서 눕히는 순간 막스는 그만 술과 먹은 것 따위를 욱 토하고 말았다. 그것도 프리다 고모에게...
집에 돌아오려고 할 때 프리다 고모는 또 다시 나를 닥달하면서 야단을 쳤다. 자기 딸 안나에게 들어봤더니 막스가 그렇게 된 것은 모두가 내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막 신랑 신부가 신혼 여행을 떠날 판이어서 아무도 프리다 고모가 떠드는 소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리는 갑자기 울면서 자꾸 어머니의 목에 매달렸다. 빈딩거는 옆에서 마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같은 엄숙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마리의 등을 두드려 주면서 이렇게 말하고 계셨다.
"마리야, 이제 너는 아주 행복할 거다. 너는 아주 좋은 신랑을 만났어."
그리고 나서 어머니는 빈딩거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자네, 우리 아이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나한테 약속할 수 있겠나?"
빈딩거는 선선히 약속했다.
"네, 장모님. 제 힘껏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마리는 친척 아주머니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자 이미 나이가 마흔인데도 아직 시집을 못 간 노처녀인 우리 사촌누이 롯데가 집안이 떠나가라고 큰 소리로 울었다.
드디어 신혼 부부가 떠나게 되었다. 빈딩거는 이미 앞서 갔고 마리는 눈물을 거두며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골목 어귀에서 다시 한 번 손을 흔들었다.
"이제 저 아이가 떠나는구나."
어머니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롯데가 그 말을 받아 소리쳤다.
"네, 가는군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말이에요."
부활절 휴가가 되자 빈딩거와 마리가 집으로 왔다. 그는 이미 2년 전부터 헤겐스부르크로 가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어서, 나와 만나는 것도 무척 오랜만이었다.
누나 부부는 두 살 먹은 어린 계집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아이 이름도 마리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 누나는 그 아이를 꼭 미미라고 불렀고, 우리 어머니는 또 미밀리라고 불렀다. 빈딩거는 무어라고 불렀는지 잘 모르겠다. 그는 가끔 그 아이를 '우리 공주님'이라고 부르거나 '우리 쭈쭈 두두' 라고 부르곤 했다. 그 계집아이는 저희 아버지를 닮아 머리통이 굉장히 컸고, 코도 저희 아버지 모양으로 들창코였다. 그리고 내내 손가락을 입에다 넣은 채 눈앞에 있는 것을 멍청하게 바라보곤 했다.
어머니는 역에까지 마중을 나가서 그들을 껴안았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그때부터 집에까지 똑 같은 얘기를 계속 되풀이하셨다.
"이제 정말 너희들이 왔구나! 아니 우리 미밀리가 어쩜 이렇게 많이 컸을까? 나는 이렇게 자랐을 줄은 상상도 못했단다."
"네, 그렇지요, 어머니? 어머니 보시기에도 그렇죠? 다른 사람들도 다들 우리 미미 보고는 그래요. 우리 집 의사 선생님인 슈타이니거 박사도 아주 신기하다는 거예요. 발육이 너무너무 좋다는 거예요. 여보,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하고 지금 우리 집 주치의 선생님 얘기를 하는 중이에요."
그러자 빈딩거는 여기는 학교 교실이 아닌데도 교실에서 늘상 하는 그 말투, 이상하게 억눌러서 뽑아대는 그 굵직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그래요, 어머님. 저 녀석은 쑥쑥 자라는 게 눈에 보일 정도라니깐요."
"참 신통도 하지... 어쩜 이렇게도 신통할까!"
어머니는 연신 감탄하느라 입이 닳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린애가 조금도 신통하거나 감탄스럽지 않았다. 아마 빈딩거는 나의 그런 태도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빈딩거는 이렇게 빈정거렸다.
"아, 우리 학상님은 여기 점잖게 앉아 계시는군. 그래 너한테는 아직도 시이저의 갈리아 원정기가 너무 어렵겠지?"
그러더니 그는 라틴어로 '"갈리아는 세 개로 나뉘었도다"고 읊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나더러 그 다음 구절을 라틴어로 읊어보라는 뜻이었다. 빈딩거는 나를 보자마자 실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가 만나자마자 빈딩거에게 너무 곤욕을 치른다 싶었던지 중간에서 끼어들었다.
"얘 루드비히야, 너 아직 미밀리한테 인사 안 받았지. 어서 이리 와서 네 조카 좀 보려므나! 이것 좀 보라니까! 요것이 어쩌면 요렇게도 예쁘냐. 아이고 예뻐 죽겠어."
내가 보기에는 그 아이는 조금도 예쁘지 않았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보통 다른 아이들보다 오히려 못생긴 편이었다. 그러나 일단 나도 그 아이가 아주 마음에 드는 것처럼 정답게 웃어 주었다. 마음씨 좋은 우리 어머니는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기뻐서 마리에게 말했다.
"얘, 네 동생이 우리 미밀리를 예뻐하는 것 좀 보려므나. 우리 미밀리가 삼촌 마음에 쏙 들 줄 알았다. 요것, 요 귀여운 것!"
거실에 아침 식사를 차려놓았다. 우리 집 하녀인 카티도 오랜만에 바쁘게 움직였다. 소시지를 굽고, 도수가 높은 맥주도 식탁으로 날라 왔다.
나는 그저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된 것이 기뻤을 뿐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어린아이를 둘러싸고 쳐다보느라고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아이는 누나가 아무리 입에서 손가락을 뽑아 주어도 다시 갖다가 집어넣곤 했다. 그 짓은 아무리 반복해 보았자 소용이 없을 듯 싶었다. 누나도 나중에야 그걸 깨달았던지 그 짓을 포기하고 아이의 모자를 벗겼다. 그러자 숱이 적은, 곱슬 금발 머리가 드러났다. 어머니는 마치 엄청나게 신기한 것이나 발견한 것처럼 커다랗게 소리를 질러댔다.
"아이구, 내 손녀딸이 저렇게 금발이구나, 금발이야!"
우리 어머니는 손녀의 머리에다 키스를 했다. 마리는 연방 그 아이에게 이렇게 어르고 있었다.
"미미야, 외할머니란다, 외할머니. 할머니 안녕하셨어요 이렇게 인사해야지."
그러나 그것은 누가 보기에도 말도 안 되는, 무리한 주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부모들 생각에는 그게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기네들의 기술이나 정성이 부족해서 문제일 뿐이지, 그 어린아이는 충분히 그런 인사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빈딩거도 그 아이에게 허리를 굽히고는 '쭈쭈 두두' 하고 소리를 지르며 얼러댔다.
그러자 두 살 짜리 아기는 으왕 하고 울어댔다. 뿐만 아니라 뭔가 토하려는지 캑캑거렸다. 마리는 어머니 귀에 무어라고 한 마디 하더니 아기를 안고 휭 하니 밖으로 나갔다. 빈딩거는 자리에 남아 있었으나 식사를 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불안한지 방 안을 오락가락 거닐었다. 그러더니 걸음을 멈추고 밖에다 귀를 기울이며 물었다.
"여보, 별로 대단한 건 아니겠지?"
"네, 아무렇지도 않아요."
마리는 그러고서도 한참 더 밖에 있다가 아기를 데리고 들어왔다. 어머니가 그 뒤를 따라 들어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무 오래 기차를 타고 온데다 갑자기 낯선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 그런 모양일세. 얘가 너무 흥분해서 그런 게 한꺼번에 탈이 난 것 같구먼."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을 때는 소시지 구운 것은 물론 수프까지 싸늘하게 식은 뒤였다. 우리는 그제서야 모두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부활절을 축하하며 술잔을 마주쳤다. 어머니는 이렇게 즐거운 일은 정말 오래간만이라고 이야기하셨다. 우리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앉은데다, 마리가 얼굴이 썩 좋아보이고, 또 이렇게 어여쁜 미밀리가 함께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게다가 나도 평소보다는 성적이 좀더 나아졌다는 말씀도 하셨다.
그러나 빈딩거 앞에서 내 성적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어머니의 완전한 실수였다. 그는 내 성적표 때문에 어머니가 기뻐한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그에게 성적표를 가져다 보여주어야 했다. 그는 성적표의 교사 평가란에 적혀 있는 글을 일부러 소리 내어 읽었다.
"이 학생은 재능은 평범한 편이나, 줄기찬 노력을 하고 있어서 성적이 점차 좋아질 것으로 사료됨."
그리고 나서 그는 과목마다 하나하나 점수를 소리 내어 읽었다.
"라틴어 65점, 흠 이건 내가 예상했던 바로다. 그리고 산수는 72점, 그리스어는 기껏 63점, 너는 이 과목 성적이 왜 이렇게 엉터리냐?"
그는 나를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는 얼굴로 바라보면서 따지듯이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루드비히는 가끔 그리스어 과목 때문에 비명을 올리곤 한다네. 아마 그 과목이 무척 어려운 모양이지?"
어머니가 나를 변호해주지 않은 편이 훨씬 더 나았을 것이다. 어머니나 나를 감싸고 도는 태도야말로 나를 씹어대고 싶은 빈딩거의 의욕에 불을 지르는 격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이제 아주 정색을 하고 나섰다. 마치 자기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문제아의 부모를 면담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지 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답니다. 노상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수 있다니, 정말 이건 어리석은 수작입니다. 그리스어야말로 너무너무 쉬운 과목입니다. 마음껏 놀면서 대충대충 해도 쉽게 배울 수 있는 게 그리스어에요."
그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그런데 너는 왜 점수가 63점밖에 나오지 않은 거냐? 모르는 게 있으면 이제 매형도 오셨으니 자세히 물어 보려므나, 루드비히야."
그러나 빈딩거는 내가 말하는 것을 기다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하긴 그 점 하나만은 나로서도 고마운 일이었다. 그는 한 다리를 다른 다리 위에 꼬아 얹었다. 그리고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저 혼자서 큰 소리로 지껄여댔다.
"하하하, 그리스어가 어렵다니! 그런 사람이야말로 그리스의 도리아 지방 사람들의 사투리를 한 번 들어 보아야 할 텐데! 그러면 지금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그리스 표준어가 어렵다는 소리는 결코 나올 수 없을 텐데... 아무리 낯가죽이 두꺼운 철면피 같은 작자라도 말이야... 또 아티카의 방언은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지. 말 그대로 이오니아의 표준 그리스어는 그 구조가 얼마나 기가 막히게 되어 있는데 그 따위 소리를 하다니, 저로서는 금시초문입니다.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결국 형편없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걸 잘 몰라서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고, 루드비히가 하는 말이..."
우리 어머니는 빈딩거의 공박을 받고 어쩔 줄 모르며 쩔쩔맸다. 그러자 마리 누나가 나서서 어머니를 거들었다. 누나는 한없이 잘난 척 뻐기고 있는 빈딩거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이 참 여보, 생각 좀 해 보세요. 우리 어머니가 그리스어에 대해서 무슨 편견을 갖고 계신다고 지금 그런 요상한 얘기를 늘어 놓는 거예요?"
그때서야 그 이야기는 비로소 끝이 났다. 내가 보기에는 빈딩거는 장가를 들었어도 멍청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거기에다 대면 마리 쪽이 훨씬 영리한 편이었다. 사태를 수습하면서도 남편을 이렇게 또 두둔할 줄도 알았으니까 말이다.
"저이는 자기 직업에는 너무 열심이에요. 다른 때는 그저 사람이 턱없이 좋다가도, 자기 분야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금방 저렇게 융통성 없이 열을 올린답니다."
"암, 그래야지. 사람은 그렇게 자기 직업을 소중히 여기고 열심히 해야지. 루드비히야, 너 이제 알았겠지? 그리스어가 무척 쉽다는 걸 말이야! 저런, 저 꼬마 미밀리 좀 보게나. 저렇게 점잖게 저기 앉아서... 너무 순하게 노는구나!"
어머니는 이렇게 모두가 기분 상하지 않게끔 적당히 분위기를 바꿔놓고는, 그 멍청한 녀석이 또 우둔한 짓거리를 할까 겁이 나셨던지, 갓난 아이에게 관심을 돌려 버렸다. 그러자 갓난 아이는 우리 어머니를 쳐다보고 웃더니, 별안간 입을 벌리고 '구구 다다'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발장구를 치고 손을 내밀었다. 물론 그 정도 행동이야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온 집안 식구들 모두 마치 무슨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었다.
"너희들 들었니? 저 아이가 '구구 다다' 하고 외치는 소리 말이야!"
우리 어머니는 그 소리가 그렇게도 듣기가 좋은지 정신이 없었다. 그 소리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들려주는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누군가 그 소리를 번역한답시고 나섰다.
"저 아이는 그게 우리 아빠라고 한 거에요. 그렇지, 미미야? 그리고 또 할머니라고 말한 거야, 그렇지 미미?"
"아이고, 어쩌면 이 아인 이렇게 똑똑할까. 저 나이에 저런 아이는 나는 여태까지 보지를 못했다. 아이고, 귀여운 내 새끼!"
어머니는 갓난 아이의 뺨에다 입을 쪽쪽 맞춰 주면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빈딩거는 무척 흡족한지 히죽 웃었다. 그래서 그의 커다란 이빨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그는 식탁 너머로 허리를 굽히고 집게 손가락으로 어린아이의 배를 쿡쿡 찌르면서 말했다.
"이 아이는 무척 머리가 좋아요. 그래서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주위를 유심히 살펴봅니다. 앞으로 이런 방향으로 계속 발전시켜야겠어요."
우리 어머니는 나도 그 아이를 봐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는 빈딩거에게 무척 감정이 상해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저 아이가 무슨 말을 했다고 다들 그래요?"
그러자 우리 어머니는 펄쩍 뛰고 질색을 하면서 내 말에 끼여들었다.
"루드비히야, 너 방금 저 아이가 '구구 다다' 하고 말하는 소리 못 들었니?"
"그게 무슨 소린데요? 그거야말로 정말 아무 말도 아니잖아요."
"얘는 지금 아빠라고 말하는 거란다. 너는 꼭 그렇게 쌀쌀맞게 굴어야 하겠니, 루드비히야?"
누나는 거의 울상이 되어 말했다. 여자들은 역시 그런 분위기를 알아채는 데는 감각이 예민한 모양이었다.
"너는 어째서 그런 것도 알아듣질 못하니. 누구나 다 알아듣는데 말이야."
어머니도 화가 나신 얼굴로 누나를 거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는 져 주고 싶지 않았다.
"난 그 따위 소리는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 들을 수가 없어요."
"도대체 네가 아는 게 도대체 뭐가 있단 말이냐, 이 엉터리야. 네가 언제인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우게 되면, 우리 아이가 하는 말이 의성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그것은 음성을 흉내내서 하는 말이란 말이야."
빈딩거는 학교에서처럼 으르렁거리며 두 눈을 부라렸다. 그 통에 그 바보 같은 어린애까지 덩달아 울기 시작했다. 마리는 부랴부랴 아이를 껴안고 자리에서 일어나 왔다갔다 했고, 우리 어머니도 그 곁을 따라다니면서 아이를 얼렀다.
"우리 아기가 또 이쁜 짓을 할 거야. 우리 아기 '구구 다다' 라는 말 한 번 더 해보렴..."
그러자 멍청한 빈딩거가 그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
"안 돼. 말하지 마라. 여기서는 한 마디도 더 할 필요가 없어. 저 자식은 네가 아무리 대단한 걸 보여줘도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으니깐 말이야."
그제서야 나는 기분을 풀고 실컷 웃을 수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