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usbubengeschichten
[소개]
10대 소년인 루드비히의 눈을 통해 바라본 어른들의 허위와 모순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청소년들이 어른들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은 어느 나라나 비슷한 것 같다. 문화적 자부심이 높고, 독일에 대해 감정이 좋을 리 없는 프랑스 청소년들도 "악동 일기는 다른 나라의 작품 같지가 않다"고 대답한다는 조사도 있다. 청소년들과, 그 시절을 기억하는 어른들 모두 유쾌하게, 때론 배꼽을 잡아가며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작가 소개]
루드비히 토마(Ludwig Thoma, 1867-1921) : 독일의 소설가, 극작가. 뮌헨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변호사 개업을 하는 한편 유머에 가득찬 작품을 많이 썼으나 요양지 테게른 호반에서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자연주의적 기풍에 선, 순수한 바이에른 향토 작가이며 거칠고 유머러스한 바이에른 농민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아이러니칼한 필치로 그려냈다. 민화풍의 단편을 모은 <아그리코라>나 <악동 일기>가 특히 잘 알려져 있으나, 시민적 속물성을 비꼬는 희곡 <도덕>도 나중에 관심을 끌었다.
여름철로 접어들자 세크 네 농장에 손님들이 찾아왔다. 큰 도시에 사는 잘 사는 집 가족들이 여름을 보내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역에서 나올 때, 나는 마침 역 앞 빈터에서 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별로 유심히 살펴보지는 않았다. 역에서 일하는 짐꾼이 그들의 가방을 부산을 떨며 옮기는 것을 무심코 바라보았을 뿐이다.
짐꾼은 그들 가족의 짐을 마차에 실어 보내고 나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루드비히, 너도 보았지? 저 사람들의 그 가죽 가방 말이야. 그거 모두 러시아제 가죽으로 만든 것이야. 틀림없이 돈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일 거야."
집으로 돌아오자 우리 어머니도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셨다.
"루드비히야, 그 사람들은 큰 도시에서 온 훌륭한 사람들이고 돈도 무척 많다더구나. 그러니 길에서 그 집 사람들을 만나면 꼬박꼬박 인사를 하거라."
그 날은 가는 곳마다 큰 도시에서 왔다는 세크 네 농장 손님들 이야기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들이 뭐가 그리 대단해서 야단들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무슨 고문관이라는 그 집 아버지 비숍 씨의 생김새를 놓고 이야기하는 거라면 나도 이해할 수 있다. 그 사람의 생김새며 하고 다니는 꼬락서니가 아주 유난스러우니까 말이다.
비숍 씨는 장화를 신고 다닌다. 러시아제 가죽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번쩍번쩍하는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가죽 휘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은 또 어떤가. 가느다란 다리 위에 뚱뚱한 몸뚱아리가 놓여 있다. 그 꼴이 영락없이 샴페인 술잔을 닮았다. 이 사람에겐 허리라는 것이 없다. 사방으로 둥글게 퍼진, 살찐 배 뿐이다.
단추로 억지로 채워놓은 셔츠나 조끼, 양복 저고리들은 배를 가리고 있는 게 아니고 떠받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단추들이 배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툭 떨어져 나가기라도 하면 그 사람의 배는 마치 폭포처럼 쏟아져 내릴 것 같다. 그러면 그 사람은 무너진 배와 함께 완전히 끝장이 나겠지.
비숍씨 스스로도 자기의 배에 꽤 신경을 쓰는 모양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배를 바라보는 시선을 좀 위쪽으로 끌어올리고 싶은 생각인지, 양쪽 볼에 마치 토끼 꼬리처럼 생긴 하얗고 둥그스름한 구레나룻을 기르는 것이다. 이 수염은 바람만 살짝 불어도 하늘하늘 나부끼곤 한다.
그런데 비숍 씨의 이런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하다못해 그의 부인이 촐싹거리는 꼬락서니에 대해 뭐라고 하는 사람조차 없다. 비숍 씨 부인은 지금이 어느 철이라고 손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질퍽한 땅바닥만 보면 비명을 지르며 치맛자락을 치켜올리곤 했다.
이들 가족은 도착한 첫날 저녁부터 동네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아마 동네 구경을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작고 보잘 것 없는 집이라도 보게 되면 그 집 앞에서 으레 오랫동안 서 있곤 했다. 그것이 동네 구경을 하는 데 있어서 꼭 지켜야 할 원칙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들이 우리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을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나는 비숍 씨의 그 요란한 가죽 장화 소리가 우리 집 앞에서 멎고, 그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뭘 먹고 사는지 좀 보고 싶군."
그때 마침 우리는 저녁 식사를 막 끝낸 참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것이 무척 다행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이봐요, 뭐든 당신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거요'하고 소리쳐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러나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가 그들을 집안으로 안내한 것이다. 어머니는 그리고 비숍 씨가 묻는 대로 저녁 식사로 순대와 쇠간을 먹었다고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우리가 언제나 그렇게 먹느냐고 물었다. 그의 부인은 그러는 동안 우리 가족이 마치 이상한 동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경 너머로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 안경이란 것도 제대로 생겨먹은 안경이 아니었다. 안경에 조그마한 손잡이가 달려 있어서 여느 때는 손에 들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 눈에 갖다 대는 안경이었다. 나는 그 안경을 후딱 잡아채서 오그라뜨려 개천에라도 내던지고 싶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를 불러 그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루드비히야, 일어나서 어른들께 인사를 드려야지."
나는 일어나서 고개를 꾸벅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나를 라틴어 학교(Gymnasium, 당시 독일의 인문계 중고등학교. 대학에 진학하여 학문을 연구할 학생들이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진학한다. 교육 기간은 9년) 학생이라고 소개했다.
"이제 1학년이지요. 진급할 수 있을 정도 실력은 된답니다. 라틴어 성적은 우를 맞았으니까요."
그러자 비숍 씨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똑똑하다기보다는 아주 튼튼하게 생겼구나. 우리가 있는 농장에 한 번 놀러 오려무나. 와서 우리 아들 아르투어하고 함께 놀아라. 너하고는 동갑내기란다."
그리고 그는 우리 어머니에게 한 달 수입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얼굴을 붉히면서, 110 마르크쯤 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놀라운 듯이 자기 아내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여보, 에밀리. 이 사람들은 한 달에 200 마르크도 안 되는 수입으로 생활을 한다는군."
"어쩜, 그럴 수가..."
비숍 씨 아내는 코걸이 안경을 눈에 갖다 대고서 우리집 식구들을 다시 한 번 살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가 버렸다. 그러나 우리 집을 나서면서 비숍 씨는 한 마디 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뭘 가지고 사는지 알 수 없단 말이야. 그걸 연구해서 논문을 쓰면 아마 박사 학위 따는 건 문제도 없을 거야."
다음 날 나는 비숍 씨의 아들 아르투어를 만났다. 나하고 동갑내기라고 했지만, 키는 나보다 훨씬 작았다. 머리를 길게 길러 거의 어깨에 닿을 정도로 치렁치렁했다. 다리는 마치 새 다리처럼 가늘고 거기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마 그것이 도회지 부자 집 아이들이 잘 입는 세일러복이라는 것인 모양이다. 그러나 그런 겉모습은 도대체 이 녀석이 사내아이인지 계집아이인지 구별하기 힘들었다.
아르투어 옆에는 안경을 걸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아르투어의 가정교사였다. 그들은 라펜아우어네 집 앞에서 사람들이 건초를 쌓아 올리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선생님, 저 사람들 지금 뭘 하는 거예요?"
아르투어가 건초 말리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음, 지금 건초를 말리는 거다. 저렇게 여러 번 뒤집어서 잘 말렸다가 겨울에 짐승들을 먹이는 거야."
가정교사의 말이었다. 그러자 아르투어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되물었다.
"짐승이요? 무슨 짐승 말이죠?"
그 때 내 옆에는 세크 로렌즈가 같이 서 있었다. 우리는 너무 웃어서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아르투어는 짐승이라니까 아마 사자나 코끼리쯤 기르는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 따위가 우리하고 동갑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점심을 먹으러 집에 들어갔더니 어머니가 점심을 차려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고문관 비숍 씨가 오늘 우리 집에 또 오셨다. 너 보고 오후에 와서 그 분 아드님하고 같이 놀아달라고 하시더구나."
나는 오후에 친구 렌쯔하고 낚시질하러 가기로 약속을 해 놓았다. 그래서 나는 그 집에 가기 싫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안나 누나가 당장 덤벼들 듯이 나섰다. 겨우 농사꾼 아이들하고 어울려 낚시질이나 다녀야 되겠느냐고 마구 야단을 쳐대는 것이다.
나는 내 친구하고 낚시질을 하는 것이 훨씬 재미도 있고, 집에도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와 누나는, 내가 건초가 뭔지도 모르는 도시 아이와 노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루드비히야, 넌 점잖은 사람들과 어울려 예의범절도 익히고 견문도 넓혀야 한다. 넌 우리 집에서 하나뿐인 남자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넌 라틴어 학교 학생 아니냐."
어머니가 이렇게 나오는 데는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머니 말씀을 듣지 않아서 한없이 설교를 듣는 것보다는 하라는 대로 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별 수 없이 손발을 깨끗이 씻고, 어머니가 내주시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었다. 그리고 나서 세크 네 농장을 향해 집을 나섰다.
내가 거기 도착했을 때, 비숍 씨 가족은 마침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비숍 씨와 그의 아내, 아르투어의 누나처럼 보이는 처녀도 같이 있었다. 그 처녀는 내 누나 안나와 나이가 비슷한 것 같았다. 그러나 안나에 비해 옷을 훨씬 잘 입고 있었다. 그리고 안나에 비해 갑절이나 뚱뚱했다.
"아르투어야, 얘가 내가 말했던 너의 이 곳 친구란다."
비숍 씨는 나를 자기 아들에게 소개했다. 그러면서도 자기 아들을 나에게 소개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 아들을 소개하는 대신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희는 오늘도 순대에다 쇠간을 먹었겠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럼 뭘 먹었단 말이냐?"
"뭘 먹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납니다. 하지만 순대와 쇠간을 먹지 않은 건 사실입니다."
"뭘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그렇다면, 틀림없이 순대와 쇠간을 먹었을테지. 다른 걸 먹었다면 기억이 안 날 까닭이 없단 말이야."
그는 우리 식구들이 순대와 쇠간만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한 번 도둑질한 사람은 다음에도 계속 도둑질을 한다고 믿는 법원의 판사님들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지금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그들도 매일 커피만 마시는 족속이란 말인가. 그들은 나에게도 커피 한 잔을 내주었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먹어 본 커피 중에서 가장 맛없는 커피였다. 그런 커피를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마시다니... 그들은 입맛을 몰라도 정말 한참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남의 집 음식 걱정을 하고 있다니...
아르투어는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가정 교사가 말없이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비숍 씨는 가정 교사에게 아르투어가 그 날 숙제를 다 했느냐고 물었다. 가정 교사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한 문제가 틀리기는 했지만 그만하면 벌써 상당히 많이 좋아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비숍 씨가 말했다.
"좋소, 그렇다면 오늘은 당신 혼자 산보도 하고, 남은 시간을 보내도록 하시오. 아르투어는 이 튼튼한 라틴어 학교 학생과 놀 테니까."
가정 교사는 마치 검불처럼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숍 씨는 그에게 담배를 한 대 권했다. 아주 고급 담배이니 천천히 음미하면서 피우라는 것이다. 그가 나가 버리자, 비숍 씨는 자기 식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가 저 친구를 데리고 온 건 저 친구에게는 큰 행운인 셈이야. 우리 아니라면 저 친구가 어떻게 이런 전원 풍경을 구경하겠어. 사람은 이렇게 남에게 은덕을 베풀 줄 알아야 하는 거다."
그러자 아르투어의 뚱뚱한 누나가 입을 뾰로통해 가지고 쫑알거렸다.
"난 저 사람 징그러워 죽겠어요. 계속 나만 멍하게 쳐다보잖아요. 이러다가는 저 사람도 요전 그 가정 교사처럼 시를 쓰지나 않을까 무서워요."
아르투어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투어는 나에게 자기 장난감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아르투어는 장난감 기선을 가지고 있었다. 태엽을 감아주면 스크루가 돌아서 진짜 기선처럼 앞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갑판 위에는 납으로 만든 병정 인형들과 뱃사람들이 여러 개 꽂혀 있었다. 아르투어는 그것이 '프로이센 호'라는 군함이라고 말했다.
세크네 농장에는 그 배를 띄울만한 개울이나 연못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라펜아우어 네 근처 양어장으로 가서 그 배를 띄우자고 말했다.
"그러면 아주 재미있을 거야."
아르투어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무거운 배를 어떻게 거기까지 들고 가느냐 하는 것이 걱정이었다. 나는 내가 배를 들고 가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뛸 듯이 좋아했다.
"넌 그렇게 힘이 세단 말이야?"
"이런 것쯤이야..."
우리가 아르투어의 방에서 나오자 거실에 앉아 있던 비숍 씨가 우리더러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라펜아우어네 집 근처 양어장으로 배를 띄우러 간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르투어의 어머니가 질색을 했다.
"아르투어야, 그 무거운 걸 들고 다녀선 안 돼. 그건 너무 무겁단다."
그래서 나는 내가 그것을 들고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비숍 씨는 껄걸 웃으면서 말했다.
"저 녀석은 기운이 센 바이에른 놈이야. 매일 순대와 쇠간을 먹기 때문에 무거운 걸 들고 다녀도 괜찮을 거야, 하하하."
우리는 세크 네 농장을 나와 넓은 풀밭으로 들어섰다. 아르투어는 빈손으로 내 뒤를 쫓아오며 물었다.
"얘, 너 기운이 그렇게 세니?"
"시험해보고 싶다면 해보렴. 너 하나쯤은 덤불 숲에다 저만큼 집어 던져버릴 수도 있어."
나는 그를 힐끗 돌아보며 대꾸했다. 그러자 아르투어는 자기도 기운이 세져서 누나에게 꼼짝 못하고 짓눌려 지내지 않아도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누나가 너를 때리느냐고 물었다.
"때리지는 않아. 하지만 항상 너무 뻐기는 게 문제야. 내 성적이 떨어지면 자기가 엄마 아빠라도 되는 것처럼 날 붙잡고 쏘아댄단 말이야. 내가 힘이 좀 세다면 그럴 때 한 번 단단히 혼을 내주고 싶은데..."
"그건 그래. 누나들이란... 정말 누나만 아니라면 반쯤 죽이고 싶도록 얄밉게 굴지."
"그래. 어떤 땐 나를 툭툭 밀면서 몰아세워서 뒤로 넘어질 뻔한 적도 있다니까."
"그렇지만 누나라고 해서 대책 없이 언제까지나 당할 수는 없잖아. 까짓 것, 그런 버릇을 고쳐주는 건 어렵지 않아."
"어렵지 않다니? 어떻게 하는 건데?"
"뭐 방법이야 아주 많지. 지렁이를 한 주먹 잡아다가 침대에 넣어줄 수도 있고, 도마뱀을 몇 마리 잡아다가 넣어줄 수도 있고... 여자들은 침대에 들어갈 때 그런 선뜩한 것이 몸에 닿으면 놀라서 자지러지게 소리를 지르는 거야. 그러고 나면 다시는 그렇게 잘난 체하지는 못한단 말이야."
그러나 아르투어는 그랬다가는 매를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매 맞는 것을 두려워하면 사내 구실을 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사내라면 모험을 할 줄 알아야지. 제까짓 게 때리면 얼마나 때리겠어. 맞을 때 맞더라도 그렇게 길을 들여놓으면 훨씬 지내기 편해지지. 고것들을 그냥 내버려두면, 자기들이 잘나서 우리가 꼼짝 못하는 줄 안단 말이야. 그래서 점점 더 고약하게 구는 거야."
"맞아, 내가 지난번 성적표를 받아 왔을 땐 내 볼을 꼬집으며 막 흔들어대지 뭐야."
"그래서 너 울었니?"
"울지 않을 수 있어? 정말 볼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여선 안되겠다. 오늘 당장이라도 무슨 수를 써야지. 지렁이는 내가 잡아주마."
나는 그 잘난 체하는 뚱보를 보는 순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 처녀를 혼내주는 일이라면 적극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다.
"지렁이는 어디 있는데?"
"아무 곳이나 질퍽한 땅을 파면 얼마든지 있어."
"물지는 않니?"
"이런 바보... 야 임마, 지렁이는 물지 않아."
"도마뱀은?"
"도마뱀도 마찬가지야."
"그럼 네가 지렁이 좀 잡아 줄래?"
"그래,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잡아주지."
"도마뱀도?"
"그래, 도마뱀도 잡아줄께."
나는 도마뱀 굴이 어디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동네 제재소 뒷산 양지바른 언덕에는 도마뱀 굴이 많이 있었다. 봄철에 거길 가 보면 땅에 온통 도마뱀들이 득실거렸다.
"약속하는 거다?"
"그래, 걱정 마. 난 얼마든지 잡아줄 수 있으니까."
"고마워. 네 덕분에 내가 드디어 복수를 하나 보다."
"남자는 친구의 일에 발벗고 나설 줄 알아야 하는 거야. 신세 진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어."
나는 또 그 가정 교사에게도 그런 걸 좀 넣어 주면 어떻겠느냐고 말하였다. 아르투어는 손뼉을 치며 그것 참 좋은 생각이라면서 자기가 꼭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가정 교사는 누나들보다 훨씬 더 성가신 존재인 것이다.
아르투어는 나에게도 가정 교사가 있느냐고 물었다.
"없어, 우리 어머니는 월급을 주면서 누구를 부릴 만큼 부자가 아니거든."
"넌 좋겠다. 사실 가정 교사는 돈만 많이 들고 귀찮기만 한 거야. 그 녀석들은 말로만 번지르르하게 내 실력이 올라가고 있다고 그런단 말이야. 하지만, 난 성적이 올라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전번에 있었던 가정교사는 항상 우리 누나에게 시만 쓰고 있었어. 그래서 그 시를 누나 커피 잔 밑에다 슬그머니 밀어넣었지.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내쫓아 버린 거야."
나는 그 가정교사가 왜 시를 썼는지, 또 그 녀석이 시를 쓴 것이 뭐가 그리 나쁜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넌 그런 건 영 숙맥이구나. 그 자식이 우리 누나한테 반했단 말이야."
"너희 누나한테?"
"그래."
"세상에 그럴 수가!"
"그래도 그게 사실이란 말이야."
"믿어지지 않아."
"나도 그래. 그런데도 반했단 말이야. 그 자식은 틈만 나면 우리 누나를 멍하니 바라보곤 했지."
"어쩜 저렇게 못생겼을까 하고 바라본 게 아니고?"
"시를 썼으니까 분명 그런 건 아닐 거야."
"야, 그거 참 모를 일이다. 그치?"
"응, 어쨌든 그래서 그 자식은 쫓겨났어."
세상에 그렇게 뚱뚱하고 보기 싫은 처녀를 짝사랑해서 속을 태우는 사람도 있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 세상에는 정말 내가 모를 일도 많은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는 라펜아우어 네 집 근처의 양어장에 도착했다. 우리는 장난감 군함을 양어장에 띄웠다. 스크루는 잘 돌았고 배는 물살을 멋지게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도 바지 가랑이를 걷어올리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손에는 기다란 막대기를 하나씩 들었다. 배가 너무 깊은 곳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아르투어는 배를 몰면서 신이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적군을 향해 돌격! 포병들은 각자 제 위치! 준비, 발사! 가운데 대포는 포구를 좀더 위쪽으로 해서 발사! 꽝! 박살이다! 이겼다, 만세!"
아르투어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큰 소리로 외쳐댔다. 나는 그게 뭐하는 소리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해전을 지휘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는 처음에 대위에 불과했지만 전투에서 계속 이겼기 때문에 이제 프러시아의 해군 제독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서 태엽을 감아. 그리고 배를 왼쪽으로 몰아! 적군의 군함은 지금 그 쪽에 몰려 있다!"
나는 아르투어가 시키는 대로 태엽을 감았다. 그러나 입으로만 싸우는 것은 어쩐지 별로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말했다.
"야, 해전이 벌어졌다면 뭔가 진짜로 터지는 소리도 나고, 그래야 재미있을 것 아냐? 군함 속에 화약을 집어 넣고 터뜨리자. 그러면 훨씬 더 재미날 거야."
"화약을 가지고 노는 건 위험해. 그랬다간 혼나. 그리고 우리 쾰른에서는 애들이 그런 걸 갖고 놀지 않는단 말이야."
"야, 하지만 입으로만 대포 소리를 내는 게 무슨 대장이냐?"
나는 낄낄 웃어 버렸다. 그러고 그가 화약을 다룰 줄 모른다면, 내가 대신 터뜨려 줄 테니까 명령만 내리라고 하였다.
"난 네 밑에서 대위 정도로 만족할 테니까 말이야."
그러자 그는 아주 좋아하면서, 명령만 내리는 거라면 자기도 얼마든지 화약을 터뜨리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또 해군 제독이 직접 대포를 쏜다는 것도 우습지 않아? 그러니까 난 명령만 내릴 거야. 넌 내 부하니까, 내가 명령을 내리면 대포를 쏘는 거야. 알았지?"
"그렇지."
나는 호주머니에 화약을 한 갑 넣고 있었다. 난 화약 한 갑 정도는 늘 가지고 다녔다. 나는 언제나 불꽃놀이를 좋아했으니까. 그리고 당연히 화약 심지도 몇 개씩 잊지 않고 넣어 가지고 다녔다.
우리는 장난감 기선을 물에서 끌어냈다. 그리고 화약을 장치할 곳을 찾아보았다. 배 위에는 대포들이 있었지만, 그 대포에는 구멍이 뚫려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갑판을 들어올리고 그 밑에다 화약을 장치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갑판 사이로 연기가 새어 나와 마치 대포를 터뜨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했다. 연기가 보다 멋있게 피어 오르게 하기 위해서 화약 한 봉지를 전부 쏟아 넣어 버렸다. 그리고 갑판을 다시 덮고 벌어진 틈으로 심지를 꽂아 넣었다. 아르투어가 제대로 발사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틀림없이 멋있는 광경이 벌어질 거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그는 근처의 나무 뒤로 뛰어가 숨더니, 전투를 시작하라고 소리쳤다. 그러고는 계속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때려부숴라! 때려 부숴, 용감한 대위야!"
나는 기선의 태엽을 감고, 화약 심지에 불을 붙였다. 심지에 불이 제대로 옮아 붙을 때까지 기선을 꽉 잡고 있다가 앞으로 힘껏 밀어 보냈다. 스크루가 돌아가고 심지에서는 연기가 피어 올랐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이었다. 아르투어는 미칠 듯 환호성을 질러대면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무 뒤에선 나오지 않은 채였다. 고함을 질러대던 그는, 왜 터지는 소리가 나지 않느냐고 초조하게 물었다. 나는 심지에 댕겨진 불이 화약 있는 데까지 타 들어가면 곧 소리가 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나무 뒤에서 머리를 내밀며 소리를 질렀다.
"앞 갑판 대포 발사!"
그 순간이었다. '꽝!' 하고 무시무시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 때 나는 무언가 내 귀 밑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날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아르투어가 무섭게 비명을 지르면서 머리를 얼싸안은 것은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잇달아 '치지직' 불 꺼지는 소리와 함께 자욱한 연기가 양어장의 수면 위를 가득 채웠다.
아르투어의 상처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무엇에 스쳤는지 이마의 살갗이 약간 찢겨서 피가 조금 내비친 정도였다. 아마 화약이 폭발할 때 납 병정이 튀어 나가 그의 이마를 스친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이마에 내비친 피를 닦아 주었다.
그는 자기 기선이 어디 갔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물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부서지고 남은, 기선 앞 부분의 일부가 아직 가라앉지 않고 물 위에 둥둥 떠 있을 뿐이었다. 나머지 부분은 폭발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서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아르투어는 그 모습을 보자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배가 없어지면 아버지에게 야단을 맞게 된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나는 스크루가 갑자기 빨리 돌아서 배가 손 닿지 않는 깊은 데로 흘러가 버려서 그만 잃어버렸다고 둘러대라고 말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어두워진 다음에 집으로 들어가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였다. 어쩌면 배 같은 것에 대해선 아무도 묻지 않을지도 모른다고도 하였다.
"그리고 누가 배가 어디 있느냐고 묻거든, 저 안에 그냥 있다고 그러란 말이야. 이제 그건 별로 갖고 놀고 싶지 않다고 그러는 거야. 그랬다가 한 2주일쯤 지나거든 갑자기 기선이 없어졌다고 말하는 거지. 누가 훔쳐간 모양이라고 하면서..."
아르투어는 그러겠다고 했다.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에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벼락 치는 것 같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양어장 주인 털보 아저씨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달려오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요 사고뭉치 녀석들! 꼼짝 말고 게 섰거라!"
나는 사태를 금방 깨달았다. 그래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라펜아우어 네 건초 창고까지 한숨에 내달렸다. 그리고 그곳에 숨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르투어는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 양어장 주인 털보 아저씨는 아르투어에게 덤벼들어 이 뺨 저 뺨 번갈아가며 사정없이 후려갈기고 있었다. 그 큰 손을 풍차의 날개처럼 휘두르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요 못된 사고뭉치 자식아! 그래 우리집 양어장 고기를 씨를 말릴 셈이냐, 이 자식아! 낚시질로 고기를 훔쳐가는 걸로도 모자라서 그래 이젠 다이너마이트까지 터뜨려! 이러다간 아주 사람까지 잡겠구나, 요 나쁜 자식!"
그는 말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아르투어의 뺨을 철썩철썩 소리도 요란하게 후려갈겼다. 사실 양어장 주인은 나를 혼내주려고 오래 전부터 벼르고 있었다. 나도 그걸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나와 렌쯔가 그 양어장에서 종종 낚시질을 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도 붙잡힌 적이 없었다. 양어장 털보는 벼르고 벼르다가 이제 겨우 한 놈을 붙잡은 것이다. 그런데 그만 재수없게도 아르투어가 거기 걸린 것이다. 그리고 아르투어는 지금 나와 렌쯔 두 사람 몫의 매를 대신 맞아 주는 셈이었다.
털보 아저씨는 실컷 때리고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뒤돌아서다 말고 다시 아르투어를 향하더니 '요 생쥐 같은 녀석아!'하고 다시 한 번 냅다 소리를 지르면서 아르투어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아르투어는 동네가 떠나가도록 울었다. 그러면서 연방 자기 아버지에게 이른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그렇게 해봐야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매는 이미 맞아 놓고서... 나처럼 잽싸게 도망치는 게 훨씬 현명하지 않은가.
털보 아저씨는 몸이 무거워서 조금만 달리면 숨이 차서 제대로 쫓아올 수가 없다. 그래서 재빨리 도망만 치면 도저히 우릴 붙잡을 수가 없다. 멀리 달아날 것도 없이 나무를 가운데 끼고 뺑뺑 돌기만 해도 그는 속수무책이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방법을 여러 번 실험해 보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우리를 붙잡는 것을 이내 포기해버리고 "요 쥐새끼 같은 놈들! 족제비 같은 녀석들! 요 다음엔 꼭 붙잡아서 톡톡히 맛을 보여 주고야 말 테다!"하고, 고래고래 고함만 질렀다.
이런 사정을 나와 렌쯔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즐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르투어는 '날 잡아 잡수' 하는 식으로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곤욕을 치른 것이다.
나는 아르투어가 너무 울어대자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양어장의 털보 주인이 멀리 가 버렸을 때, 아르투어에게 슬슬 다가가서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일도 당하는 것이고, 이런 경험을 살려 앞으로 일을 처리해 나가면 오히려 큰 화를 면할 수 있는 전화위복이 되는 거라고 달래주었다. 그러나 아르투어는 더욱 크게 소리쳐 울면서 이렇게 소리지르는 것이었다.
"이게 모두 너 때문이야! 우리 아버지한테 안 이르나 봐라!"
이 말을 듣자 나도 화가 났다. 그래서 나는 네가 그렇게 계속 못나게 굴면,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아르투어는 내가 기선을 부순 거라고 했다. 내가 화약을 터뜨렸기 때문에 양어장 주인이 소리를 듣고 달려왔고, 그리고 자기가 내 대신 매를 맞은 것이라고 하였다.
알기는 제대로 아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걸 뒤늦게 깨닫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미 양쪽 뺨은 갓 구워 낸 빵처럼 크게 부풀어 올라 있는데... 그는 자기가 뒤늦게 깨달은 바를 그렇게 소리쳐 외치고는, 울면서 냅다 달려갔다. 그 울음 소리는 아마 10리 밖에서도 들렸을 것이다.
나 같으면 아무리 아프고 억울해도 창피해서라도 그렇게 울고불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자식은 자기가 해군 제독이라는 것이다. 참 웃기는 이야기다. 나는 그 길로 곧장 집으로 가는 것보다는, 좀 늦게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들판에 있는 덤불 밑에서 새집도 뒤지고, 딸기도 따 먹고 하면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완전히 어두워진 다음에 집으로 돌아갔다. 세크 네 농장 앞을 지날 때는 발소리를 죽였다. 그래서 아무도 나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비숍 씨는 뜰 안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아내와 뚱보 처녀도 그 앞에 있었고, 세크도 한 옆에 서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에는 불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들은 환한 곳에 있었기 때문에 어두운 곳에 있는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들이 하는 말을 잠시 엿들었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비숍 씨는 한참 머리만 내젓고 있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원 세상에, 그 녀석이 그런 사고뭉치인 줄 누가 알았겠나?"
아르투어의 뚱보 누나는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으로 계속 내 욕을 쫑알거리고 있었다.
"그 녀석은 글쎄 아르투어를 시켜서 내 침대에다 지렁이와 도마뱀을 넣으려고 했대요. 생전 들어 보지도 못한 끔찍한 아이에요!"
그 후 나는 비숍 씨네 집에 다시는 초대 받지 못했다. 설사 초대를 받았다 해도 어정어정 찾아갈 내가 아니다. 그 뒤로 비숍 씨는 언제나 나만 만나면 단장을 번쩍 치켜 들면서 소리를 지르곤 하였다.
"요 말썽꾸러기 자식 같으니라고. 붙잡기만 해 봐라. 그냥 안 둘 테다."
그러나 나는 그 양반의 아들 아르투어처럼 어리석게 날 잡아 잡수 하고 가만히 서 있지는 않았다.
긴 여름 방학이 계속되고 있다. 방학이 시작된 지 벌써 4주일이 지났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너무 오래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린다고 한탄하곤 했다. 그것은 물론 내가 날이면 날마다 사고를 치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누나도 나 때문에 집안 평판이 나빠진다고 덩달아 야단이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초등학교 선생 바그너 씨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 그는 우리 집에 자주 오는 편이었다. 그는 학교 정원에다 과일 나무를 꽤 많이 심어놓고 있었고, 우리 어머니는 과일 나무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환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어머니의 말대로 했더니 복숭아를 아주 많이 땄다고 치하하면서, 잘 익은 복숭아를 한 상자나 가지고 왔다. 어머니는 바그너 선생과 과일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이야기를 꺼냈다. 앞으로도 여름 방학이 많이 남아 있는데, 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걱정이라는 얘기였다.
"맞습니다. 라틴어 학교 학생이 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이랑 똑 같은 나이 아닙니까. 그런 아이들에게 이렇게 긴 여름 방학을 준다는 것은 사실 곤란한 일이죠. 한창 개구쟁이 짓을 할 나이 아닙니까. 망아지가 우리를 벗어난 꼴이죠. 그러나 그런 걱정은 뭐 이 댁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를 라틴어 학교에 보낸 집은 어디라 할 것 없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라틴어 학교는 방학을 왜 이렇게 길게 주는지 모르겠어요. 초등학교는 이제 방학이 거의 끝나 가지요?"
"이번 주일까지입니다. 다음주에는 벌써 개학입니다."
"실업학교에 가는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6년씩 다니는데... 그런 집 부모들은 얼마나 좋을까?"
어머니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바그너 선생은 웃으면서 일어났다.
"아무리 라틴어 학교 여름 방학이 길다고 해도 올 여름 안으로야 어떻게든 끝나겠지요. 너무 걱정 마십시오. 루드비히도 이제 철이 들기 시작하면 곧 점잖아질 겁니다."
"저 녀석이 점잖아진다구요? 그런 날은 아마 내 생전에는 오지 않을 거에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루드비히야, 너도 이제 학문을 전공할 라틴어 학교 학생이다. 그러니 어머님 속 좀 태우지 말아라. 알겠니?"
그러고 나서 바그너 선생은 가 버렸다. 나는 바그너 선생 말대로, 되도록 엄마 마음을 괴롭히지 말자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나는 바로 그 날로 사고를 또 한 번 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 날 어머니 심부름으로 장터에 나갔던 나는 빵집 앞을 지나다가 진열장 앞 창문턱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를 보았다. 나는 잽싸게 돌멩이를 하나 집어 들고 고양이를 겨냥해 힘껏 던졌다. 그러나 내 손을 떠난 돌은 어이없게도 진열장의 커다란 유리창을 와장창 깨뜨리고 말았다. 나는 잽싸게 몸을 숨겼지만 소용이 없었다.
빵집 주인은 범인이 나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곧장 우리 집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깨진 유리창 값으로 5마르크나 받아 갔다. 나는 일이 이렇게 되자 야단을 덜 맞기 위하여 평소 내가 쓰던 수법대로 집에 늦게 들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지독하게 꾸지람을 들었다. 옆에서 내가 야단 맞는 것을 지켜보던 누나까지 어머니에게 합세해 나를 몰아세웠다.
"아무리 야단을 쳐봤자 소용 없어요. 저 애는 내일이면 또다시 다른 사고를 저지를걸요 뭐. 저 애 때문에 앞으론 아무도 우리 집하고 왕래를 하지 않으려고 할 거에요. 어제는 길에서 법원의 그 총각 판사님을 만났는데, 아주 쌀쌀하게 굴지 뭐에요. 여느 때는 언제나 걸음을 멈추고 한참씩 웃는 얼굴로 집안 안부를 묻곤 했었는데... 어제는 글쎄 아무 말도 않고 고개만 까딱 숙이고는 그냥 가 버리지 뭐에요."
어머니는 이제 무슨 결단을 내려야지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무슨 결단을 내려야 할지는 어머니도 누나도 뾰족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어머니와 누나는 밤새도록 머리를 맞대고 뭔가 궁리를 하였다. 그 결과, 너무나 끔찍한 방안을 내놓고 말았다.
그것은 다음주부터 개학하는 초등학교의 바그너 선생 반에 나를 집어 넣는다는 것이었다. 라틴어 학교가 개학할 때까지 나를 거기 맡긴다는 얘기인 것이다. 바그너 선생은 그 방법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테지만, 어머니 부탁이라면 들어 줄 것이다. 그런데 바그너 선생은 4학년 담임이었다. 5학년이라면 거기에 내 초등학교 친구들도 아직 남아있을 텐데 말이다.
나는 어머니와 누나에게 사정사정하였다. 초등학교 4학년 과정을 마치고 상급학교인 라틴어 학교에 진학한 내가 다시 초등학교 4학년 반에 들어간다는 것은 나를 평생 동안 망신시킬 일이라고 몇 번씩 강조해서 얘기했다. 게다가 내가 라틴어 학교에 갔다고 부러워하던, 초등학교에 남아 지금은 5학년인 내 동창생들 앞에 내 얼굴은 뭐가 되느냐고 사정도 해 보았다.
나는 또 앞으로 남은 방학 동안 아무 사고도 저지르지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할 테니,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온갖 일을 가리지 않고 사고를 저질러왔다. 하지만 어머니와 누나 앞에 그렇게 싹싹 용서해달라고 빌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전혀 소용이 없었다. 특히 누나는 막무가내로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저 애 말을 믿었다간 우리 집은 이제 동네에서 외톨이가 되고 만단 말이에요!"
그래도 어머니는 달랐다. 내 편이 되어 주었다.
"얘야, 너도 들었지? 루드비히가 이제 딴 사람이 되겠다는구나. 초등학교 4학년 교실에 들어가는 것이 저 애한테는 그렇게 창피한 일이라니, 한 번만 더 기다려 보자꾸나."
어머니 덕분에 나는 당장의 창피는 면하게 되었다. 그나마 사태가 그 정도로 끝나 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그래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 이튿날 하루는 침착하게 공부에만 매달렸다. 비록 라틴어 동사의 격변화를 순전히 엉터리로 외우고 쓰고 그랬지만, 라틴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어머니는 기뻐하는 눈치였다. 누나도 라틴어라면 어머니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나는 이렇게 엉터리로 공부를 하면서도 한껏 뽐내고 점잔을 떨었다. 그렇게 하루는 잘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수요일인 그 이튿날까지 그 짓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우리 이웃인 세크 네 농장에는 아직도 고문관 비숍 씨가 계속 손님으로 머물면서 피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 부인은 나만 보면 잔뜩 긴장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내가 그 집 생나무 울타리 앞을 지나가기만 해도 벌써 부엌일 하는 하인 아이를 불러 대면서 경보를 울리곤 하였다.
"앨리스야, 조심해라. 저 사고뭉치가 또 왔구나."
비숍 씨 부인은 앙고라 고양이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마당에서 커피를 마실 때면 그 고양이도 언제나 그들과 함께 옆에 있었다. 비숍 씨 부인은 그 고양이한테는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었다.
"나비야, 우유 좀 마시겠니? 꿀이라도 좀 줄까?"
비숍 씨 부인은 마치 그 고양이가 자기 어린애나 되는 것처럼 살갑게 굴었다.
수요일 아침에 나는 라틴어 책을 옆구리에 낀 채 무심히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때, 비숍 씨 부인의 그 고양이가 울타리를 넘어 우리 집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녀석은 우리 집 순대를 한 번 몰래 훔쳐 먹고는 그 맛을 잊지 못해 걸핏하면 우리 집으로 넘어오곤 하였다.
나는 얼른 달려나가 그 놈을 냉큼 붙잡았다. 그리고 전에 산토끼 두 마리를 잡아다 기르던 토끼장에 가두었다. 나는 그러고 나서 다시 얼른 방 안으로 돌아와서, 그들이 커피를 마시러 뜰로 나오는 것을 창 밖으로 지켜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비숍 씨의 부인은 고양이가 보이지 않자 찾고 부르고 야단이었다.
"나비야! 나비야, 어디 갔니? 얘들아, 너희들 오늘 나비 못 봤니? 못 봤어? 여보, 당신도 못 봤어요?"
"글쎄, 난 못 봤는데."
"저두요."
"저도 못 봤어요."
"그렇다면 나비가 도대체 어딜 갔을까?"
"여보, 나비가 커피를 마실 건 아니지 않소? 어서 마실 사람한테나 주시오."
비숍 씨는 신문을 펴 들고 자리에 앉으면서 말하였다. 그러나 비숍 씨 부인은 커피를 따라 줄 경황이 없었다.
"우리 나비가 어딜 갔을까? 아무래도 모르겠어. 시골 고양이들처럼 쥐를 잡으러 나갔을 리도 없고..."
나는 거기까지 구경을 하다가 방에서 나왔다. 토끼장으로 가서 고양이란 놈을 끄집어냈다. 그러고는 꼬리에다 화약을 한 봉지 붙잡아 맸다. 그리고 세크 네 객실 쪽 울타리로 살금살금 기어갔다. 나는 생울타리 밑에서 몸을 구부리고, 고양이 꼬리에 잡아맨 화약 봉지에다 불을 붙인 다음 고양이를 놓아 주었다. 고양이는 놓아 주기가 무섭게 울타리를 뛰어넘어 비숍 씨 가족이 아침 커피를 마시고 있는 안마당으로 달려갔다.
고양이가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부엌에서 일하는 하인 아이가 소리를 질렀다.
"아주머니, 나비가 와요. 우리 나비요!"
그리고 이어서 비숍 씨 부인이 호들갑을 떠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우리 나비야! 어딜 가 있었니? 도대체 어디에 있었어?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알어? 그런데 너 꼬리에 그게 뭐니? 뭘 달고 왔지?"
그때였다. '확!' 불이 퍼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 커피 잔이 땅바닥에 내던져져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숍 씨 가족이 커피를 마시던 자리는 삽시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잠시 후 그 소리들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비숍 씨가 으르렁대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또 그 사고뭉치 녀석 짓이다!"
나는 내가 나갔던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다시 내 방으로 조용히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어머니와 안나 누나는 식당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어머니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얘, 안나야. 루드비히도 그리 못된 짓만 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잘 대해주기만 하면 그 애도 차츰 괜찮아질 거야. 어저께는 하루 종일 공부만 하더라. 우리가 그 애를 초등학교에 보내 그 애 친구들 앞에서 창피를 주지 않은 건 참 잘한 것 같구나."
"제가 알고 싶은 것은 그 총각 판사님이 그때 왜 걸음을 멈추고 제게 인사를 하지 않았는가 하는 거에요. 제가 알고 싶은 건 그것 뿐이에요."
안나는 야멸차게 대꾸하였다.
비숍 씨와 그 부인이 우리 집 마당으로 쳐들어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안나야, 혹시 내 옷이 구겨지지는 않았니? 고문관 내외분이 저렇게 느닷없이 우리 집엘 찾아오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구나."
어머니는 일어나서 그들을 맞이하러 나갔다.
"어머나, 이게 웬일이세요? 두 분께서 이렇게 찾아 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그러나 고문관 비숍 씨의 얼굴은 마치 장례식에라도 가는 사람 같았다. 그 부인은 얼굴이 사과처럼 시뻘겋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두 손에는 다 타 버린 화약 봉지와 깨어진 찻잔이 들려 있었다.
"이걸 보세요, 아주머니! 이게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아시겠어요?"
"찻잔을 떨어뜨리셨나 보군요."
"떨어뜨리기야 떨어뜨렸지."
비숍 씨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우리가 찻잔을 왜 떨어뜨렸는지가 문제에요!"
비숍 씨 부인은 내가 화약을 가지고 장난을 쳤기 때문에 자기네 고양이가 미쳐 버렸다고 떠들었다. 그리고 찻잔이 세 개나 깨졌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런 못된 짓을 할 사람은 이 세상에 나 밖에는 없다고 주장했다. 우리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졌다. 고문관은 베를린 사투리로 우리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아주머니, 참 안 됐습니다. 그런 못된 아들을 두시다니... 진심으로 위로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우리 어머니에게 찻잔 값을 내라고 요구하였다. 그 찻잔은 무척 좋은 사기 그릇이기 때문에, 하나의 값이 자그마치 2마르크씩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나이 많은 우리 어머니가 조그마한 낡은 지갑에서 떨리는 손으로 돈을 한 장 한 장 꺼내는 것을 보고 울화통이 치밀었다.
비숍 씨 부인은 그 돈을 얼른 받아 챙기더니, 고양이가 미쳐 버린 것은 말할 수 없이 화가 나지만, 우리 집 사정을 봐서 고소는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돌아섰다. 그러나 비숍 씨는 돌아서면서 다시 한 마디 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당신 아들로 하여금 당신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 모든 광경을 방 안에서 내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돌아간 뒤 어머니는 식탁 앞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있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끔 손수건을 들어 눈물을 닦았지만, 그래도 눈물은 계속 흘러내렸다. 안나도 마찬가지였다. 식탁 위 접시에 잼을 바른 비스킷이 담겨 있었지만 어머니와 누나는 그것을 먹으려 하지도 않았다.
나는 몹시 우울해져서 밖으로 나갔다. 아무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비숍 씨 네가 우리 집에서 돈을 받은 것은 비열한 짓이다. 그것도 찻잔 하나에 자그마치 2마르크씩이나 받아내다니...! 세상에 그렇게 비싼 찻잔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단단히 복수를 해줘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아무도 모르게 그 고양이란 놈을 때려잡아 그 놈의 꼬리를 잘라야지. 그걸 가지고 있다가, 비숍 씨 부인이 '우리 나비가 대체 어딜 갔지?'하고 애타게 찾을 때, 울타리 너머로 꼬리를 던져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 장본인이 나라는 것을 감쪽같이 모르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연구를 더 해야 한다.
나는 풀밭에 누워서 골똘히 그 방법을 궁리했다. 그러나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비숍 씨 부인이 고양이 꼬리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랄 모습만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그러는 사이에 점심 나절이 되었다. 나는 한 끼쯤 굶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도 이로울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누나는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나더러 내 방에서 혼자 점심을 먹으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다음주 월요일부터는 매일 초등학교 4학년 교실에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바그너 선생의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바그너 선생은 또 나를 매우 엄격하게 다루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나는 울화통이 터졌다. 누나에게 마구 대들고 싶었다. 라틴어 학교 학생이 유치하게 초등학교 4학년 교실에 들어가다니, 이게 무슨 창피란 말인가! 이 소문이 내가 다니는 라틴어 학교에 퍼지기라도 하면 난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나는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라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월요일이 되어 나는 초등학교로 갔다. 한 쪽에는 남자 아이들, 또 다른 쪽 자리에는 여자 아이들이 자리잡고 앉아 있는 그 유치한 교실에 들어서려니 마음이 착잡하였다. 이 길로 그냥 달아나서 영영 집에 돌아가지 말아버릴까? 그러나 어머니의 울던 모습이 다시 떠올라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교실에 들어서자 바그너 선생은 나를 맨 앞줄에 앉혔다. 그러고 나서 아이들에게 나를 익살맞게 소개하였다.
"오늘부터는 라틴어를 아는 대학자님이 너희들과 한 반에서 같이 있게 되었다. 대학자님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너희들은 앞으로 보다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할 거다."
아이들은 '와아' 웃었다. 나는 화가 났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는 수밖에 없었다.
첫째 시간은 국어 수업이었다. 한 아이가 그 날 배울 부분을 읽었다. 그것은 <저녁>이라는 제목의 산문으로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것이었다.
'태양은 잠을 자러 들어가고, 하늘에는 저녁 별들이 나온다. 참새들은 사랑스러운 노래를 멈추고, 덤불 밑에서는 귀뚜라미들이 합창을 시작한다. 하루 종일 밭에서 부지런히 일하던 농부가 집으로 돌아오면, 강아지가 좋아라고 짖어 대면서 마중을 나온다. 그 뒤로 아이들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달려 나온다. 농부의 아내는 그 뒤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남편을 맞이한다.'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다. 초등학교의 국어 교과서에 실린 글은 어쩌면 이렇게도 유치하단 말인가. 그런데 이 따위를 라틴어 학교 학생이 공부해야 하다니, 이게 무슨 얄궂은 운명이란 말인가!
바그너 선생은 아이들더러 그 문장을 열 번씩 써서 외울 수 있도록 하라고 말하고, 교무실에 볼 일을 보러 갔다. 그러나 나는 차마 그 짓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선생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에는 반장을 맡은 푸르트너 마리라는 여자 아이가 감독을 하는 모양이다. 그 아이는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농부의 딸이었다.
나는 계집아이에게까지 감독을 받게 된 것에 또다시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어쩐단 말인가! 그저 한숨만 푹푹 쉬고 있을 수밖에... 그러자 옆에 앉은 라이트너가, 이따 오후에 물고기를 잡으러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아주 조용한 소리로 물었다. 나는 큰 목소리로 좋다고 대답했다.
"루드비히 토마, 조용히 해! 또 한 번 떠들면 네 이름도 여기에 적을 거야."
"용서하십시오, 여반장 나리. 앞으로는 좀더 조심하도록 합지요."
나는 대꾸하고 나서 주머니 속을 뒤적여 보았다. 주머니에서 시계 태엽을 감는 열쇠가 나왔다. 나는 그 열쇠에 뚫려있는 구멍을 들여다보다 그걸로 호루라기를 불 수 있나 시험해 보았다. 소리가 제법 크게 났다.
그러자 푸르트너 마리가 앞으로 나가더니 칠판에 이렇게 적었다.
'루드비히 토마, 호루라기를 불었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합니다, 여반장 아가씨. 당신이 내 이름을 적지 않으려면 도대체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까요?"
그 계집애는 나더러 <저녁>을 쓰라고 하였다. 그것은 너무나 유치해서 나로서는 도저히 쓸 수 없다고 대답했더니, 그 계집아이는 그럼 유치하지 않은 라틴어 학교 학생은 얼마나 글을 잘 쓰는지, 같은 제목을 가지고 글짓기를 한 번 해 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얼른 글짓기를 해 가지고 일어나서, 그것을 발표해도 되느냐고 큰 소리로 물었다.
"여반장 나리, 내가 이 글을 낭독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러면 이게 잘 되었는지, 못 되었는지 나리께서 지적하실 수 있을 텐데요."
어리석은 이 계집애는 자기가 라틴어 학교 학생의 작문을 심사하게 된 것이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나더러 큰 소리로 낭독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계집애의 주문대로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태양은 잠을 자러 가고 저녁 별들이 나온다. 주막집 앞은 조용하다. 그 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주막집 머슴이 농부 한 사람을 끌어내 내동댕이친다. 그는 너무 술이 취해 일어나지도 못한다. 그래서 개처럼 기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는 바로 푸르트너 마리의 아버지이다.'
낭독을 마치자 아이들은 하나같이 배꼽을 잡았다. 푸르트너 마리는 악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칠판으로 달려가더니 '루드비히 토마, 무례하였음.'하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그 밑에다 밑줄을 세 번씩이나 좍좍 그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칠판 앞으로 나갔다. 그리곤 지우개를 집어 그 계집애가 쓴 것을 깨끗이 지워버렸다. 푸르트너 마리는 너무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나는 그러는 그 애의 땋은 머리를 움켜쥐고 치켜 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칠판 지우개로 양쪽 따귀를 한 대씩 갈겨 주었다. 라틴어 학교 학생의 이름을 함부로 적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 계집애가 똑똑히 알도록 해 준 것이다.
잠시 후 바그너 선생이 돌아왔다. 선생은 이야기를 듣고 나더니 몹시 화를 냈다. 우리 어머니를 생각해서 당장 쫓아내지는 않겠지만, 학교가 끝나고 밤이 될 때까지 벌을 세우겠다고 하였다.
아이들이 가 버리자, 바그너 선생은 나만 교실에 남기고 교실 문을 밖에서 잠가 버렸다. 벌써 점심 때가 지나서, 나는 무척 배가 고팠다. 그러나 배 고픈 것보다도, 초등학교에까지 와서 교실에 갇힌 내 신세를 생각하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오후 3시가 되자 학교 안에는 인기척이 딱 끊어졌다. 이 선생이 정말 나를 어두워질 때까지 여기 가두어 둘 셈인가?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나는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시작하였다. 교실 창 밖 바닥에는 돌이 깔려 있어서 뛰어내리기는 아무래도 위험하다. 좀더 주위를 살펴 보았더니 한쪽 유리창 앞에 배가 주렁주렁 열린 배나무가 서 있었다. 나는 얼른 그 유리창 앞으로 달려갔다. 배나무 가지에는 손이 닿지 않았다. 그러나, 유리창턱에 올라서서 조금 멀리 뛰면 손으로 가지를 움켜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유리창턱에 조심스럽게 올라서서 배나무 가지를 향하여 힘껏 뛰었다. 성공이었다. 그러나 이런! 나뭇가지는 내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찌직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줄기 쪽 부분이 찢어지며 밑으로 축 처지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땅바닥에 안전하게 내려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배나무의 가장 큰 가지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그 바람에 거의 다 익은 배가 수십 알이나 땅에 후두둑 떨어지고 말았다.
나는 이 돌연한 사태에 눈앞이 아찔하였다. 그러나 이미 저질러진 일, 이제 와서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나는 집으로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초등학교에서 편지가 왔다. 바그너 선생이 보낸 것이었다. 나더러 자기네 학교에 두 번 다시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내가 분명 단언하지만, 평생에 그렇게 시원한 편지를 나는 두 번 다시 받아보지 못하였다.
우리 라틴어 학교의 종교 선생 이름은 팔켄베르크이다. 작은 키에 엄청나게 뚱뚱한 몸매, 그리고 금테 안경을 쓰고 있다. 그런데 그 금테 안경만 보일 뿐, 눈은 보이지 않는다. 눈이 아주 없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보고 놀라는 것은, 뚱뚱한 몸매나 작은 눈 때문이 아니다. 우리들이 놀라는 것은 그의 목소리 때문이다. 여자보다도 더 여자 같은 목소리, 그것은 차라리 유치원에 다니는 계집아이의 목소리와 비슷하다. 남자가, 그것도 그렇게 괴물같이 뚱뚱하고, 볼품없이 생긴 그 모습에서 그런 목소리가 나오다니, 그것은 신기하다기보다 소름 끼치는 일이다. 생각이 제대로 박힌 아이 치고 팔켄베르크를 좋아하는 학생은 하나도 없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그것도 아주 싫어하는 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성경에 관한 이야기나 성인들의 이야기를 할 때면, 입을 뼈족하게 내민다. 그리고 그나마 작은 눈을 아예 감아 버리거나 해서, 그 모습이 아주 없어져버리곤 한다. 손은 거대한 배 앞에 얌전히 모으고 있다. 그는 우리를 부를 때, 그 아이 같은 목소리로 언제나 '나의 어린 양들'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도 그를 덩달아 '어린 양'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조금도 어린 양답지 않다. 누굴 봐 주는 법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다. 그가 만약 판사가 되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법을 어긴 사람은 모두 극형을 받았을 것이다. 그것도 교수형이나 매질 같은 시원시원한 것이 아니라, 바늘로 콕콕 찌르거나, 꼬집는 따위 째째한 형벌을 내렸을 것 같다.
이 선생은 자기 시간에 누가 조금이라도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면 고양이처럼 눈을 새파랗게 만들어서 달려든다. 그리고 우리 담임 선생보다도 더 오래 벌을 세우곤 했다. 웬만한 선생이라면 자기가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에게나 엄하지, 다른 반 아이들한테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이 '어린 양'은 그렇지 않다.
우리 담임 선생은 지독하게 욕을 많이 한다. 걸핏하면 우리더러 '빌어먹을 놈들'이라고 욕하곤 했다. 나보고도 그랬다. 언제든 한 번 내 대가리로 벽에 큼직한 구멍을 뚫어놓고 말겠다고도 말했다. 그는 내 아버지를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와 같은 시골 출신으로, 아버지와 같이 사냥도 여러 번 같이 다녔다고 한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그가 나를 잘 봐주고, 웬만한 일이면 그저 모르는 체 한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생김새나 체구로 보아 우리 학교에서 제일 사나운 선생이 바로 우리 담임이다.
언젠가 한 번은 메르켈이 코피가 터져 가지고 그걸 닦지도 않은 채, 내가 저를 때려서 그렇게 되었다고 고자질을 했다. 담임 선생은 나를 밤새도록 벌을 세우겠다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 버리자 그는 곧장 교실로 돌아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집에 보내 주마, 이 망나니야. 안 보내 주면 저녁상 수프가 다 식어버릴 테니까."
성격이 이렇다 보니, 그가 아무리 험한 욕을 해도 아이들은 그를 욕하지 않았다. 그저 구르바라는 이름 앞에 욕장이라는 말을 붙여서 '욕장이 구르바'라고 부를 뿐이다.
그러나 이 종교 선생 팔켄베르크는 전혀 욕은 하지 않는다. 언젠가 한 번은 내가 그의 검은 사제복 등에 분필 가루를 하얗게 뿌려놓은 적이 있었다. 아이들이 몇몇 소리를 내어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는 그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의 어린 양들아, 너희들 왜 웃는 거니?"
아무도 대답할 리가 없다. 그러자 그는 메르켈을 붙잡고 늘어졌다. 메르켈이야말로 자기를 가장 많이 닮은 치사한 녀석이라는 걸 그 자신도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지극한 아이다. 그러니까 거짓말을 싫어할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른 대로 나에게 말해라."
메르켈이란 녀석은 이런 때 순진한 척할 놈이 아니다. 그는 팔켄베르크에게 등에 분필 가루가 하얗게 끼얹어져 있다고, 그리고 그것을 뿌린 것은 나라고 일러 주었다.
팔켄베르크의 퉁퉁 부은 얼굴이 하얘지더니 나를 향해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제 얻어맞는 모양이라고, 마음을 도사려 먹었다. 내 앞으로 다가온 그는 걸음을 딱 멈추었다. 보다 지독한 벌을 내리려고 잠시 참으며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손톱 자국 같은 눈을 깜박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이 가련하고 못된 어린 양아, 나는 항상 너에게 너그러웠건만, 그리고 너그럽게 대하고 싶건만 어쩔 수 없구나.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통 연못 물을 흐리도록 버려 둘 수는 없다. 자, 그리 알고 책가방을 싸라."
그러고 나서 그는 교장에게 갔다. 나는 6시간 동안이나 받았다. 학교 수위 영감의 말에 따르면, 담임 선생 구르바가 옆에서 나서서 역성을 들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영락 없이 퇴학 처분을 당했을 것이라고 했다. 팔켄베르크는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사제복을 더럽혔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의 믿음을 위해서도 마땅히 퇴학 처분을 받아야 한다고, 1시간 이상 주장했다는 것이다.
구르바는 내 장난이 좀 지나쳤을 뿐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자기가 우리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나를 좀 때려 주겠다는 허락을 받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매로 다스릴 터이니, 처벌은 그쯤으로 끝내는 것이 좋다고 우겼다는 것이다. 다른 선생들도 구르바 선생의 편을 들어서 일은 그 정도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팔켄베르크는 그 일 때문에 나에게 더욱 앙심을 품게 됐다. 나 역시 이 선생에게 복수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렇지 있다면, 그것은 내가 바보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그 후 팔켄베르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나를 지명하지 않았다. 내 옆을 지나갈 때면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듯, 그래서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굴었다. 그는 프리쯔도 못마땅하게 보고 있었다. 프리쯔가 나와 가장 친한 사이인데다, 그가 '나의 어린 양'을 찾을 때마다 웃었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프리쯔는 두 번이나 독방에 갇히는 벌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프리쯔 역시 이 '어린 양'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겠다는 것에 나와 뜻을 같이 하고 있었다.
프리쯔는 뱀을 한 마리 잡아서 분필 통에 넣어 두자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가 어려워 곤란했다. 그래서 우리는 교탁 앞 교사가 앉는 의자에 끈끈이를 발라 두었다.
그런데 우리의 이 '어린 양'은 수업 중 한 번도 거기 앉지 않았다. 오히려 그 다음 시간에 미술 선생 보구나 씨가 거기 앉았다가 쩔거덕 들어 붙었다. 그것도 재미있는 일이기는 했지만 '어린 양'이 그랬더라면 우린 훨씬 더 신이 났을 것이다.
프리쯔는 물감 장수네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교탁 색깔과 똑같은 녹색 물감 가루를 얻어다 교탁 위에 뿌려 놓았다. 선생 치고 수업 중에 교탁 위에다 팔을 걸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이 어린 양은 특히 그 짓을 잘 했다. 까만 사제복의 양쪽 소매가 녹색으로 물들 것을 생각하며 우리는 그를 무척이나 기다렸다.
그런데 우리의 그 '어린 양'은 하필 그 시간에 몸이 불편해서 수업에 들어오지 못하고 말았다. 대신 들어온 지리 선생만이 애매하게 팔 소매를 녹색으로 물들이고 말았다. 그러나 지리 선생 울리히 씨는 학교 청소부를 불러 무섭게 야단을 쳤을 뿐, 물감을 뿌려 놓은 범인을 잡아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 양'의 병이 더욱 원망스러웠다. 우리는 거사가 거듭해 실패로 돌아갈수록 그를 혼내 놓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그렇게 결의를 다지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어린 양의 수업이 있는 날도 아니었는데, 그가 교장과 함께 우리 교실로 불쑥 들어왔다. 우리는 점심 시간이 끝나고, 우리가 좋아하는 부르크너 역사 선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부르크너 선생 대신 '어린 양'이 교장과 함께 들어서자, 우리들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치들이 왜 나타났지? 너 혹시 걸릴만한 일이라도 저질렀니?"
나는 프리쯔에게 소근거렸다. 프리쯔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생각에 잠겼다.
"글쎄... 아주 없다고야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눈에 띄게 처벌 받을 일은 없는데. 너는 어때?"
"나?"
"응, 너 말이야."
"난 없어."
"나도 없는데."
"하지만 저 두 작자가 같이 나타난 것은 틀림없이 또 누굴 혼내주려는 속셈일 거야."
우리는 불안한 눈으로 그들을 지켜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짐작했던 그런 일 때문에 온 것이 아니었다. 교장을 한 옆에 세우고 교탁 앞으로 나선 '어린 양'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어린애다운 천진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나의 '어린 양'들아, 내가 너희들에게 너무나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으니 모두 기뻐하여라. 너희들의 목자인 이 팔켄베르크는 그 동안 푼푼이 절약한 돈으로 나의 여러 '어린 양'들을 휘해 성(聖) 알로이시우스의 서 있는 모습을 조각한 조각상을 하나 샀다. 성 알로이시우스는 학문을 탐구하는 젊은이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단다.
이 성자의 모습은 이제 우리 여러 '어린 양'들이 조회도 하고, 미사도 드리는 우리 학교 강당 안에 세워질 것이다. 그래서 이 성자님은 거기 거룩한 받침대 위에서 우리 여러 '어린 양'들을 내려다보게 되는 것이야. 그러니 우리 여러 '어린 양'들은 아래에서 성자님을 우러러보면서, 모쪼록 건전하고 두터운 신앙심을 기르도록 하여라."
그러고 나서 교장 선생이 팔켄베르크와 자리를 바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팔켄베르크 선생님이 그 조각상을 사신 것은 매우 숭고한 일이며, 우리 학교 전체가 기뻐해야 할 일이다. 토요일에는 그 성인의 조각상이 이리 오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 같이 시외까지 나가서 그 조각상을 모셔와야 한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학교에서 뜻 깊은 제막식이 거행된다. 물론 이 뜻 깊은 이틀간의 행사에는 단 한 사람도 빠져서는 안 된다. 이상."
그들은 다른 교실에도 가서 그 말을 전하기 위해 부랴부랴 나가 버렸다. 나와 프리쯔는 수업이 끝나 교문을 나서면서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어린 양은 일부러 토요일을 골라 그걸 운반해 오게 했을 거야. 그 작자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편안해지는 꼴은 죽어도 못 보니까."
"그래 맞아. 그리고 일요일에 제막식을 한다는 것은 교장의 머리에서 짜낸 생각이겠지. 그 자도 야비한 것으로 따지자면 '어린 양'에 뒤지지 않을 거야."
우리는 두 사람의 욕을 한바탕 하고 나서, 그 조각품을 실어 오는 마차를 뒤집던지, 아니면 다른 조처를 해야겠다고 뜻을 모았다. 그래서 일단 프리쯔의 하숙집으로 가서 상의하기로 했다. 프리쯔의 하숙집 주인도 벌써 그 조각품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 지방 신문에 이미 그 기사가 나와 있었던 것이다.
"토요일에 그걸 들여오고, 일요일에는 제막식을 한다고? 그거 참 안 됐구나."
그는 우리를 많이 이해해 주었다. 우리와 이야기도 나누고, 또 이야기를 할 때면 우리에게 담배를 권하기도 했다. 그도 팔켄베르크를 욕했다. 그의 아들 페피가 우리 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이웃에 사는 팔켄베르크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페피의 머리가 나쁜 탓이다.
프리쯔의 하숙집 주인은 신문에 실린 성인의 조각상에 대해 코웃음을 쳤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흥, 그 작자가 학교에 뭐 대단한 것이나 바치는 것처럼 요란하게 광고했지만, 그건 사실 그런 게 아냐. 결코 동네방네에 잘했답시고 떠들게 못 된다는 걸 난 잘 알고 있지. 그 조각상은 대리석도 아니고, 구리로 만든 것도 아니야. 그냥 석고를 부어 만든 거야. 그것도 훌륭한 조각가가 만든 게 아니라, 석회 공장 직공이 한 번 빚어본 거야. 쓰다 버리게 된 본이 있어서 말이야. 거기다 반죽을 부어서 구어 낸 것인데, 솜씨가 하도 거칠어서 도저히 팔 수 없는 물건이었지.
그래서 공장 마당 한 구석에 그냥 버려둔 채 2,3년 동안이나 눈, 비를 맞았던 물건이야. 그런 걸 팔켄베르크란 작자가 어떻게 발견해서 공짜로 얻은 거겠지. 그러고는 많은 돈이나 주고 산 것처럼 생색을 내는 셈이란 말이야. 그 작자는 능히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야. 그 작자는 지금도 내 이웃이지만, 고향에서도 나와 같이 자랐어. 그래서 나는 그 자식이 얼마나 위선자고, 옹졸하고, 간교한 줄을 잘 알고 있지."
그렇게 우리 셋은 '어린 양' 욕을 실컷 했다. 세 사람이 이렇게 한 마음으로 누굴 욕한다는 것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그 자는 어린 양이 아니라 강아지야."
"맞아, 파렴치한이지."
"세상의 법은 엉뚱한 사람들만 족치고 있는 거야. 상대를 잘못 고른 거지. 그래서 그런 작자가 설치고 있는 거란 말이지. 살인 강도보다도 실은 우선 그런 작자를 잡아 족쳐야 하는 건데."
"맞아요."
"지옥의 왕이 그 녀석을 본다면 시뻘겋게 단 인두로 다림질을 해버릴 거야."
"살이 너무 쪄서 다림질도 하려고 해도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걸."
"암, 적어도 2,3일은 족히 걸릴 거야."
토요일이 되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줄을 지어 거리를 지나 행진하게 되었다. 맨 앞에는 교장 선생이 팔켄베르크와 함께 걸어갔고, 그 뒤를 다른 선생들이 따라갔다. 우리 담임 선생 구르바는 신교도인 까닭에 이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거리를 빠져 나가 한참 걸어가면 언덕길이 나타난다.. 우린 그 언덕 위에 멈춰 서서 조각상이 오기를 기다렸다. 거기서는 멀리 석회 공장이 있는 마을이 내려다 보였다.
우리가 그 마을까지 가지 않고 언덕에서 기다리게 된 것도, 그 성인 조각상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될까 봐 겁이 나서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학교 수위 영감님이 석회 공장 마을 쪽에서 헐레벌떡 달려와, 성인상이 오고 있다고 보고를 하기까지 그곳에서 30분 동안이나 서 있어야 했다.
이윽고 언덕 아래쪽에 마차가 나타났다. 마차 위에는 큼직한 상자가 놓여 있었다. 팔켄베르크는 마차 앞으로 뛰어가서 마부에게 성 알로이시우스 조각상을 운반해오는 마차냐고 물었다. 마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상자 안에 조각상이 들어 있었다. 팔켄베르크는 마차가 너무 초라하게 보인다면서 화를 냈다. 상자에다 전나무 장식이라도 좀 해 오면 좋지 않느냐는 얘기였다. 마부는 자기는 그런 것은 아무것도 모르며, 자기는 다만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아무리 팔켄베르크라도 이런 때 마부에게 무어라고 대꾸를 하겠는가. 그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마차 뒤를 따라 걸어갔다. 학교 강당에서는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종이 울렸다. 마부는 강당 앞에 마차를 세우고 상자를 끌어 내리려 했다. 그러자 팔켄베르크가 말리고 나섰다. 팔켄베르크는 상급반 중에서 제일 몸집이 큰 학생 네 명을 시켜 상자를 내리도록 했다. 그리고 상자를 강당 안으로 운반시켰다. 네 명 가운데 두 명은 포인트나 하고 라이헨베르거였다. 나머지 두 명은 내가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우리들은 이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종 소리도 그쳤다. 상급반 학생 네 명만이 남아 일을 거들면 되는 것이다. 제막식과 헌납식은 내일 하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은 학교에 더 이상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 조각상이 어디쯤 세워지는지 보아 두었다. 오른쪽에서 세 번 째 창문가였다. 그 곳에 받침대가 차려지고, 꽃들이 장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었다.
프리쯔와 함께 나는 교문을 나섰다. 그때 모범생인 프리데만이 우리를 따라왔다. 그가 옆으로 붙자 프리쯔는 동사 변화를 아직 공부하지 않아서 빨리 집에 돌아가 벼락 공부라도 해야겠다고 능청을 떨었다.
"동사 변화? 그런 숙제도 있었어?"
프리데만이 물었다.
"숙제가 있다는 게 아니구, 월요일에 시험을 보잖아."
"월요일에 시험을 봐? 난 처음 듣는 얘긴데?"
"구르바 선생이 며칠 전에 분명히 그랬어. 월요일에 동사 변화 시험이 있으니까 단단히 준비해 오라고 그랬잖아. 루드비히, 너도 들었지?"
"글쎄, 난..."
프리쯔는 프리데만 모르게 내게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그래서 나도 그런 것 같다고, 아니 분명히 그렇다고 대꾸해 주었다. 그러자 겁이 많은 모범생 프리데만은 시험 칠 일이 걱정이 되어 곧장 우리를 떠났다.
"이제야 둘이만 남았구나."
"그런데 그 녀석은 왜 따돌린 거야? 월요일에 시험 본다는 소린 없었잖아?"
"물론 없었지. 하지만 그 녀석이 옆에 있으면 속 시원한 일을 꾸밀 수 없단 말이야."
그러고 나서 그는 이제 '어린 양'이 폭삭 주저앉을 지경으로 멋지게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났다고 소곤거렸다. 성 알로이시우스의 조각상에 돌을 던져서 그걸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버리자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 프리쯔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진심이었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자기 혼자서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같이 하겠다고 했지만, 속으로 좀 겁이 났다. 들키는 날에는 퇴학 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리쯔는 가볍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게 감쪽같이 하면 될 것 아냐? 그리고 말야, 그 일을 해치운 뒤에도 '어린 양' 그 자식이 눈치채지 않도록 엄청 행동을 조심해야지."
우리는 8시 정각에 교문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나는 저녁을 먹고 나서 프리쯔와 함께 동사 변화를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내가 학교 교문 앞까지 갔을 때는 벌써 주위가 캄캄했다. 나는 여기 오면서 아는 사람을 하나도 만나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웠다. 프리쯔는 벌써 와 있었다. 우리는 교정의 너도밤나무 숲 그늘로 들어가 더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사방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때 학교 울타리 밖 길에서 발자국 소리가 다가왔다. 나무 밑에 숨어있는 우리가 길에서 보일 까닭이 없지만, 우리는 몸을 더 오므렸다. 울타리 밖의 길을 걸어온 사람은 공증인이었다. 산책하는 것과 지방 주간 신문에 시를 투고하는 것이 그의 취미였다. 그의 시가 신문에 몇 번 실린 적도 있었다. 만약 그가 우리를 발견하고 너희들 거기서 뭐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우린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냥 지나갔다. 우리는 그의 발자국 소리가 멀리 사라져 잘 들리지 않게 되자 강당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강당은 교정 제일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그 근처는 인적이 드물었다. 하물며 토요일 저녁, 주위가 어두워진 지금은 오죽하겠는가. 지금 학교에는 학교 수위 내외밖에 없을 시간이다. 모르긴 해도 수위는 지금쯤 학교에 있질 않고, 스타 양조장에 가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술을 아주 싸게 사 마실 수 있었다.
우리는 강당 가까이서 주먹만한 돌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목표 지점인 창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토마야, 겨냥을 잘 해야 한다. 넌 창문 절반 정도에다 던져. 나는 조금 더 높이 던질 테니까. 잘만 하면 알로이시우스의 얼굴은 엉망이 될 거야."
프리쯔가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겨냥을 했다. 몇 번 연습을 한 후에 우리는 힘껏 돌을 던졌다. 유리창 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곧 알로이시우스의 얼굴 부분이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났다. 성공이었다.
우리는 얼른 강당 뒤쪽 덤불 숲 속에 뛰어들어 몸을 감추었다. 그리고 인기척이 나지 않는지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사방은 아주 고요했다.
"잘 된 것 같지?"
"그래. 이젠 우리가 누구 눈에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그러니 교문으로 나갈 게 아니라 학교 담을 뛰어넘자."
"그게 좋겠다."
우리는 학교 뒷담을 넘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우리는 프리쯔의 하숙집으로 갈 때도 어두운 곳을 골라 걸었다. 우리를 알아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프리쯔의 하숙집에서도 현관으로 들어가지 않고, 뒷문으로 슬쩍 들어가 계단을 소리 없이 올라갔다. 프리쯔는 자기가 집에 있는 줄로 알게 하려고 일부러 방에 불을 켜 놓았다.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이마에 배어 나온 땀을 닦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계단을 올라와 문을 두드렸다. 나는 아직도 땀이 마르지 않아 창문가로 물러섰다. 프리쯔는 책상 앞에 앉아 손에 머리를 기대고 공부하는 체했다. 찾아온 사람은 프리데만 네 가정부였다. 그 여자는 월요일에 시험이 없다는 프리데만의 전갈을 가지고 온 것이었다. 프리데만은 라이텔과 칸쓰라에게도 물어 보고, 다른 학생 몇 명에게도 물어서 시험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는 것이다.
프리쯔도 아직 땀을 채 닦아내지 못한 형편이었다. 그래서 프리쯔는 머리도 들지 못하고 자기는 분명히 그렇게 들었고, 그래서 여태까지 동사 변화를 공부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프리데만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기도 이제 한숨 돌릴 수 있겠다고 말했다.
프리데만의 가정부는 말을 전하고 나서 곧 내려갔다. 아래층에서 하숙집 아주머니와 그 여자가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렸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학교에서 공부를 너무 시키는 것 같다며, 프리쯔가 토요일 저녁인데도 저렇게 공부만 하는 걸 보니 가엾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다음날은 조각상 제막식이 있는 일요일이었다. 8시에 강당에서 미사가 있고, 곧 이어 제막식을 겸한 알로이시우스 조각상의 헌납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나는 지난밤 수고한 피로가 깨끗이 풀려 발걸음도 가볍게 학교에 나갔다. 강당 앞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그리고 학교 수위가 사람들 가운데 서 있었다. 수위 옆에는 교장과 팔켄베르크가 서 있었다.
그들은 강당의 깨어진 유리창을 올려다보면서 손가락질을 하고, 뭐라고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창문에는 아래위로 구멍이 두 개나 뚫려 있었다. 나는 옆에 서 있는 라이텔을 보고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물었다.
"알로이시우스의 코와 입이 떨어져 나갔어."
"왜? 세울 때 잘못해 넘어뜨렸나?"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창문으로 돌이 날아 들어온 거야."
"돌?"
"응, 주먹만한 돌 말이야. 그것도 두 개씩이나."
"어떻게 돌이 거기까지 들어왔을까?"
"그거야 모르지."
"혹시 운석이 아닐까?"
"운석?"
"응, 별똥 말이야."
"그렇진 않을 거야. 별똥이라면 곧장 밑으로 떨어지지 왜 옆으로 날아들었겠어."
"하긴 그래."
훼케라와 프리데만, 그리고 칸쓰라가 우리 옆으로 다가왔다. 훼케라는 언제나 똑똑한 체 하는 녀석이다. 그는 자기가 이번 사고의 내용을 제일 먼저 들었다며 신바람이 나서 떠들었다.
"팔켄베르크와 내가 교문에 같이 들어섰거든. 나는 오늘 아침 집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어서 좀 일찍 나왔단 말이야. 그래서 덕분에 이 사건의 맨 처음 목격자가 되었지만 말이야."
"수다는 빼고, 본론부터 얘기해. 답답하잖아."
별 뾰족한 내용이 있을 리 없는 얘기다. 하지만, 나는 호기심이 잔뜩 생긴 것처럼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래 그래, 알았어. 얘기엔 다 순서가 있는 거라고. 좀 기다려."
"글쎄, 어서 하라니까."
"잠자코 좀 있어라. 그래야 얘가 마저 얘길하지."
훼케라의 이야기로는 그들이 교문으로 들어서자 수위가 달려와서 그들을 강당으로 안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광경은 정말 볼 만했다는 것이다.
"물론 창문에 구멍이 두 개 뚫려 있는 것은 이미 봤지만, 그 창문을 뚫은 돌 두개가 알로이시우스의 얼굴을 그렇게 정통으로 맞힐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어? 코 언저리하고 입 부분이 몽땅 떨어져 나갔더군. 마룻바닥은 석고 부스러기가 떨어져서 온통 하얀 가루로 범벅이고... 창문에서 날아 들어온 돌에도 석고가 많이 묻어 있더구만. 그 때 난 팔켄베르크가 기절하는 줄 알았어. 얼굴이 온통 하얘지는 거야. 그러더니 또 목에서부터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아마 그런 광경은 돈 주고도 못 볼 거야."
그는 또 누가 돌멩이질을 했는지 밝혀지기만 하면 그 자는 목이 달아날 것이라고 말했다.
"팔켄베르크가 반드시 그러고야 말겠다고 맹세까지 했거든. 두 주먹을 꽉 쥐고는 부들부들 떨면서 하나님께 맹세했단 말이야. '하나님, 당신의 어린 양으로 하여금 저 흉악한 범인을 벌줄 수 있게 하소서!' 이렇게 말이야. 그러니 범인이 잡히면 퇴학을 당할 게 뻔하지."
"퇴학이라니?"
"퇴학이지 그럼. 그 놈은 걸렸다 하면 퇴학이야."
"그럼, 돌을 던진 게 우리 학교 학생이란 말이야?"
"우리 학교 학생 아니라면 누가 일부러 그런 짓을 했겠니?"
"흠."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알로이시우스의 얼굴이 깨져서 신난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나와 프리쯔는 그저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프리쯔는 프리데만 옆으로 가더니, 이제 자기는 동사 변화는 완전히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사실 공부라는 것은 하기 전이나 막상 하려고 할 때는 끔찍하지. 하지만 공부하고 난 후에는 정말 유쾌한 거야. 그렇지 않으냐, 토마야?"
프리쯔와 나는 그 날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점잖게 굴었다. 우리는 아이들 틈새를 뚫고 현관 앞으로 갔다. 거기에는 선생들과 상급반 아이들이 서 있었다. 그 가운데서 수위가 여전히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되풀이해서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는 대충 다음과 같았다.
그는 범행이 저질러지던 그 시간에 집에 있었다. 맥주를 한 잔 마실까 생각하는 중인데, 그의 부인이 어디서 뭔가 깨지는 '쨍그렁' 소리가 났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어디서 창문이 깨진 것일까?"
두 사람은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그런 소리가 났다고 그러니 가만 있을 수가 있나요? 그래서 저는 엽총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지요."
그는 강당까지 갔을 때 무슨 인기척 같은 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저는 누구냐고 소릴 질렀죠. 군대 시절에 그렇게 배웠거든요. 군대 시절에 전 특무상사였어요. 보초 설 때 인기척이 있으면 그렇게 소릴 지르게 되어 있죠. 대답이 없으면 그냥 쏘는 거에요. 전 어제 세 번이나 소리쳤어요. 누구냐구요. 하지만 아무 대답도 없고 인기척도 없더군요. 그래서 저는 운동장이랑 학교 주위를 두세 바퀴 돌아보고 스타 양조장으로 갔습죠. 딱 한잔만... 맥주 생각이 간절하더구만요."
물론 그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는 그 시간에 이미 스타 양조장에 가 있었다. 나중에 얼큰하게 취해 가지고 돌아와서 운동장을 돌아보았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쨍그렁' 소리를 듣고 달려 나왔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교장 선생은 그에게 혹시 의심이 가는 사람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수위는 한 사람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아직 확증을 못 잡아서 지금 당장 그게 누구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저는 장담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손으로 반드시 그 범인을 잡아낼 겁니다. 범인들이란 나중에 범죄 현장에 다시 와서 돌아보게 마련이거든요. 소설에서 봤습니다. 그러니 전 오늘 밤부터 현장에 숨어서 지킬 겁니다. 단 한 번 누구냐고 물어보고는 곧바로 총을 쏘아버릴 거에요."
팔켄베르크는 범인이 잡히도록 기도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늘은 알로이시우스 조각상을 치워야 하기 때문에 미사도 드릴 수 없다면서 우리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면서 우리도 돌아가서 이 사건의 범인이 잡히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두들 돌아갔으나 나는 프리데만, 라이텔과 함께 좀더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수위가 우리들 옆으로 와서 '쨍그렁' 소리가 났다는 둥, 자기 부인이 먼저 그 소리를 들었다는 둥 또다시 그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범인을 1주일 안에 붙잡던지, 쏘아 죽이던지, 아니면 최소한 발목이라도 쏠 것이라고 우겨댔다. 나는 프리쯔에게 가서 그런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배꼽을 붙잡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일제히 범인을 찾는 조사가 있었다. 학급마다 범인을 아는 사람이 있는지 조사한 것이다. '어린 양' 씨는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밝혀지기 전에는 우리에게 알로이시우스 조각상을 선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게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종교 수업이 시작되기 전이면 언제나, 이 몸서리쳐지는 신앙 모독 행위가 발각되도록 우리 모두 입을 모아 기도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짓은 물론 아무 소용도 없었다. 아무도 단서를 잡지 못했고 오직 나와 프리쯔만이 그 범인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 둘은 범인을 밀고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는 갑자기 무척 착해졌다. 종교 선생 팔켄베르크는 우리에게 3주일 동안이나 영성체 준비를 시켰다. 그래서 나도 프리쯔에게 말했다.
"야, 이젠 우리도 좀 달라져야겠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지."
프리쯔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한 번 팔켄베르크에게 몹시 충격을 받았다. 팔켄베르크가 흐느껴 울면서, 자신이 이렇게 타락한 아이들을 하나님의 제단 앞으로 도저히 안내하지 못하겠다고 호소하며 기도하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도는 그 때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 누가 문 손잡이에다가 겨자를 발라놓은 것을 팔켄베르크가 봤기 때문이었다. 팔켄베르크는 보고 똥으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
나는 프리쯔가 그렇게 한 것을 알고 있었다. 또 그 때 팔켄베르크가 그걸 잡고 들어온 것을 무척 기뻐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 때문에 우리를 데리고 그런 나쁜 장난이 없어지도록 반 시간 동안이나 우리를 붙잡고 기도를 드렸다. 그 시간이 끝나자 프리쯔는 우리가 함께 기도 드린 것이 효과가 있는 것 같으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고 말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지 않았다면 팔켄베르크는 아직도 기도를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말도 해 주었다.
"프리쯔, 이젠 너도 달라져야 해. 마음만 먹으면 그건 무척 쉬운 일이야."
프리쯔는 내가 이미 사람이 바뀐 거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래, 난 이제 마음이 아주 경건해졌어. 내가 기도책을 읽고 있으면 우리 파니 아주머니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날 살펴보지. 몇 번 그러더니 페피 아저씨한테 가서 내가 아주 딴 사람이 되었다고 그러는 거야. 파니 아주머니는 내가 이제 철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생각해보니까 나 역시 그런 것 같아. 난 이제 혼자서도 기도를 할 수 있어. 그것도 10분, 15분씩 말이야. 그리고 파니 아주머니에게 골탕을 먹일 생각도 더 이상 하지 않아."
"그렇구나. 그렇다면 그건 확실히 변한 거야.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변할 수 있지?"
"아주 쉬워. 하려고 마음 먹으니까 그렇게 되더라구. 그러니까 너도 노력해 봐."
프리쯔는 내일부터 그렇게 해 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오늘은 구두장이 레텐베르거 집 창문에 돌을 던져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레텐베르거?"
"응, 난 오늘 그 자식 집 유리창에 돌을 던져야 해."
그 작자가 학교 수위한테 프리쯔가 담배 피우는 것을 보았다고 고자질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나도 함께 할 테니, 영성체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나 프리쯔는 그 작자의 창문을 부수기 전에는 화가 나서 기도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레텐베르거는 프리쯔만 보면 언제나 웃어댔다. 어제도 프리쯔를 보더니 뒤에서 웃어대며 고함을 질렀다.
"옳지 네 놈이구나. 내가 다 봤다, 네가 하는 짓을! 요 사고뭉치, 못된 놈아!"
사태가 이렇게 험악하다 보니 나로서도 프리쯔가 옳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도 함께 행동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벌써 1주일 동안이나 영성체 준비를 해왔다. 그래서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부터 준비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라틴어 학교에 다니느라 묵고 있는 파니 아주머니 네 집은 결코 지내기 편한 곳이 아니다. 무엇보다 나는 배가 고팠다. 파니 아주머니는 우리 어머니에게서 하숙비를 충분히 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배가 부르면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서 내게 음식을 늘 조금씩만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 아주머니가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는 사람이라곤 한 번도 믿은 적이 없다. 나 하나에게서 하숙생 두 사람만큼의 이익을 남기려고 그러는 것 뿐이다.
파니 아주머니는 내가 기도하는 것도 빠짐없이 감시했다. 잠자기 전에 나는 묵상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위인들의 고해록을 대충 중얼중얼 읽는 것으로 그걸 대신했다. 밖에서 그걸 들은 파니 아주머니와 페피 아저씨는 이제 내가 믿음이 두터워지고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페피 아저씨는 신앙심이 아주 대단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금 재판소의 서기지만, 원래는 신부가 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신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그는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러나 나는 페피 아저씨와 파니 아주머니가 대판 부부 싸움을 할 때 그 진상을 들어서 잘 알고 있다.
페피 아저씨는 머리가 나빠서 신학교 시험에 떨어진 것이다. 돈이 없어서 가지 못한 것이 아니다. 신학교 입학 시험을 무려 다섯 번이나 보았다면 이건 알쪼 아닌가. 그런데 이 페피 아저씨를 팔켄베르크가 좋아했다. 아저씨가 거의 매일 성당에 나가서, 사람들이 술집이며 거리에서 팔켄베르크 험담을 한 것을 모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이 집에서 하숙을 하도록 한 것도 이 아저씨의 그 알량한 신앙심 때문이었다. 이 아저씨네 집에 가서 지내면서, 아저씨처럼 신앙심이 두터워지도록 배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너무 힘든 일이다. 아무리 신앙심에 보탬이 된다고 해도 고자질하는 것 따위는 배울 생각도, 취미도 없다.
어머니는 얼마 전 이 아저씨에게 나의 영성체 받는 일을 좀 도와 주라고 편지를 보냈다. 페피 아저씨는 얼씨구나 하고 나섰다. 매일 저녁 저녁을 먹은 뒤 9시까지 내 앞에 버티고 앉아서 설교를 하곤 했다.
도대체 감동이라는 것은 느낄 수 없는, 지루하고 짜증나고 사람 미치게 하는 설교를 페피 아저씨는 자그마치 2시간 이상씩 끌었다. 그러고 나서는 술집으로 갔다. 이 세상에 술집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가 졸음이 올 때까지 꼬박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며칠 전에는 이 페피 아저씨가 어느 영성체 준비책에 씌어 있는 구절을 낭독했다.
'사람들은 날마다 자기 양심을 되살펴야 한다. 성자 이그나티우스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이 구절을 낭독하며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좋아했다. 그러면서 나더러 너도 성자 이그나티우스처럼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이그나티우스는 자기의 모든 잘못을 조그마한 공책에다 적어 그것을 베개 속에 넣고 잤다고 한다. 그렇게 잠을 자면서까지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다는 것이다.
나도 그 말이 그럴싸하게 들렸다. 그래서 나는 그 동안 나의 잘못을 수첩에다 적어서 베갯잇 속에 끼워 두었다. 그런데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분명 베갯잇 속에 끼워 두었던 그 수첩이 온데 간데 없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런데 그 날, 내가 학교에서 오자마자 페피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야 이 자식아, 너 지난 여름에 내 바지주머니에서 2마르크 훔쳐갔지? 내가 다 안다."
나는 비로소 이 작자가 내 수첩을 훔쳐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내가 이 작자의 주머니에서 훔친 것은 60페니히 뿐이었다. 수첩에다 돈 훔친 적이 있다고만 써 놓았지, 얼마나 훔쳤는지를 써 놓지 않은 것이 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설마 그걸 훔쳐 볼 놈이 있으리라고는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피니 아주머니는 고해성사는 비밀이므로 그 사실을 우리 어머니에게 써 보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겨우 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그들이라면 정말 무슨 짓인들 못하랴 싶었다.
식사 후 페피 아저씨는 '영혼의 목욕'이라는 글을 읽었다. 그것은 성 안토니우스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떤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성자에게 와서 고해성사를 하려고 했다. 성자는 그 사람에게 그 동안 지은 죄를 종이에 적으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고 나서 성 안토니우스는 그가 자기 죄를 한 가지씩 읽을 때마다 그 죄가 씻겨지게 해 주었다.
아저씨는 그 이야기를 두 번 읽었다. 그리고 아주머니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봐요 파니, 이 얘기에서 우린 교훈을 찾아볼 수 있어. 성자가 죄 많은 사람의 죄를 하나씩 용서해준 것처럼, 우리도 이 애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겠어요. 이 애가 그 동안 자기가 저지른 죄를 남김없이 고백하기만 한다면 말이오."
나는 수첩에다 내 잘못을 두세 가지밖에 적지 않은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이 자는 지금 내 약점을 캐내 그걸 이용해 먹으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당한 것도 억울한데, 두 번씩 당할 바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정말 사람을 우습게 보는 작자다. 그런 점에서는 파니 아주머니도 여간 아니다. 한다는 말이 걸작이다.
"여보, 저 아이를 용서해주는 건 좋지만, 그전에 저 아이가 훔친 돈은 저 애 어머니가 물어내야 해요."
"당연하지. 그거야 모든 걸 정직하게 하기 위해서도 꼭 말씀 드려야지. 그래야 저 애도 마음이 홀가분해질 테니까."
"하지만 여보, 당신도 바지 주머니에 그렇게 돈을 많이 넣어 다니지 마세요. 술집에 한 잔 하러 가면서 무엇 때문에 돈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가는 거에요? 맥주 세 잔이면 36 페니히밖에 더해요? 거기 있는 웨이트리스에게 팁을 주려고 그러는 것이죠? 마치 월급 받아서 풍성풍성 돈을 쓰는 사람들처럼... 하지만 당신 월급은 정말 그냥 빠듯하게 사는 데도 부족할 지경이라는 걸 알아야 해요... 우리가 저 애라도 맡지 않았더라면..."
"쓸데없는 소리 말라구! 저 녀석이 들었다가 또 무슨 생각을 할지 어떻게 알고..."
"당신이 바지 주머니에다 돈을 많이 넣어 다니는 걸 알면 보나마나 또 훔치려고 하겠지요, 뭐... 벌써 얼마나 훔쳐냈는지 어떻게 알아요. 물론 당신은 알 리가 없죠. 당신은 마치 자기가 장관이라도 된 것처럼 전혀 조심을 하지 않는다니까."
"저는 딱 한 번 60페니히를 꺼냈을 뿐이에요."
나는 듣다 못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내 말을 믿어줄 그들이 아니었다.
"적어도 2마르크는 있었다. 그러나 네가 정말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겠다면 너를 용서하마. 이제부터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며, 유혹을 피할 것이며, 내 바지 주머니를 뒤지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해라."
나는 무척 화가 났지만 그런 눈치를 보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영성체가 끝나기만 하면 이 두 부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도록 혼내 주고야 말겠다... 페피 아저씨의 금붕어를 잡나서 버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딴 것이라도 찾아서 아주 망쳐놓고 말 테다.
그 뒤로 닷새가 지났다.
프리다 고모의 딸 안나도 올해 처음으로 영성체를 받을 예정이었다. 그 날은 프리다 고모가 안나를 데리고 페피 아저씨 집으로 와서 법석을 떨었다. 나는 속으로 욕지기가 날 지경이었다. 프리다 고모의 딸 안나는 못생긴, 꼴불견 변덕쟁이다. 난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프리다 고모는 그 아이 칭찬에 침이 마를 지경이다. 워낙 떠벌이는 바람에 나는 눈꼴 사나워서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프리다 고모는 파니 아주머니와 제일 가까운 사이다. 둘은 마주 앉기만 하면 늘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를 했다.
프리다 고모는 저녁이면 자주 놀러왔다. 프리다 고모는 지난번에 왔을 때 나도 첫 영성체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더니 페피 아저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페피 아저씨가 참 좋은 일을 하십니다. 다만 그게 별 소용이 없는 일이 아닐까 싶어서 걱정은 됩니다만."
그러더니 나더러 제대로 준비를 하고 있느냐고 심술궂게 물었다. 나는 벌써 2주일 전부터 영성체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2주일 전부터?"
"그래요."
그러자 파니 아주머니가 안나는 언제부터 준비를 해오고 있느냐고 물었다. 프리다 고모는 안나도 2주일 전부터 해왔다고 말하면서 덧붙였다.
"똑같이 준비를 한다지만 실제 하는 건 천양지차야. 나는 아무래도 우리 안나 때문에 걱정이야. 첫 영성체라고 해서 어찌나 정성을 드리고 경건해졌는지, 몸마저 아주 약해졌다니까. 이 아이가 글쎄 뭐라고 했는지 들어보세요. 지난 금요일에는 애가 너무 약해진 것 같기에 고기 수프를 좀 끓였지 뭐유. 그런데 애가 통 먹으려 들어야지. 영성체 때문에 그러는 거에요...
그래서 '조금 먹는 건 건강을 위해 그러는 거니까 하나님께서도 용서해주실 일'이라고 하면서 달랬죠. 그랬더니, 이것 좀 봐요. 우리 안나가 뭐라는지 아시겠어요? '엄마, 안 돼요. 그게 아주 조금일지라도 그만큼 하나님을 괴롭히는 것 아니겠어요? 전 안 먹겠어요' 아, 이러면서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하지 않겠어요? 내가 보기엔 우리 애는 아무래도 너무 경건하고 착해요. 글쎄, 그게 조금일지라도, 하나님을 그만큼 괴롭히는 일이 된다고 하더라니까요, 글쎄..."
이 수다에 파니 아주머니는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페피 아저씨는 가슴이 벅차서 눈에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그러더니 나를 돌아다보면서 나무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너도 들었지, 안나 얘기를? 정신차려야 한다. 영성체는 공짜로 받는 것이 아니야."
나는 안나 이야기를 잘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나의 이야기는 어느 성인의 이야기에 나와 있는 것이고, 교과서에도 실려 있어서 벌써 읽고 배웠다고 해 주었다.
프리다 고모는 자기가 수다를 떤 것이 내 말 한 마디로 무너져 버리자 잔뜩 화가 났다. 그러더니 나는 거짓말만 하는 아이니까 내 말을 믿을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또 내 말이 사실이라 해도 자기 딸 안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가득하다는 걸 누구나 잘 알고 있어서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했다. 지난 밤에는 안나가 침대 위에 앉아 잠도 자지 않고 울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빵 껍질을 한 조각 먹어서 그것 때문에 그런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 물어보았죠. 네가 빵 껍질을 먹으면 먹은 거지 그게 도대체 네가 우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요. 그랬더니 얘가 하는 말 좀 들어 보세요. 식사 시간이 지난 다음에 그걸 먹었기 때문에 그건 군것질이라는 거에요. 또 그 빵 껍질이 자기 몫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을 슬프게 해 드리는 일이란 거에요. 그래서 그렇게 울면서 다시는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거지 뭐에요. 이 아이는 글쎄 이렇다니까요. 그저 속세를 떠난 아이 같기만 해요."
이 이야기도 나는 책에서 본 기억이 있다. 책에서 읽을 때도 감동을 못 받았는데 프리다 고모의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왔으니 내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또 그 말을 끄집어내면 쓸데없이 여러 가지 말을 주고받게 될까 봐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페피 아저씨 부부는 너무 감동을 받은 모양이었다. 페피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세상에 안나 같은 아이가 있는가 하면, 남의 바지 주머니에서 돈을 2,3 마르크나 훔치고도 전혀 뉘우치지 않는 녀석도 있답니다. 세상 참... "
프리다 고모도 파니 아주머니에게 그 얘기를 벌써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게 모두 교육을 잘못 시킨 탓이지 뭐유."
나는 그럼에도 잠자코 참고 듣기만 했다. 그래서 영성체 받는 날이 왔을 때는 마음이 무척 즐거웠다. 그만큼 참았으면 나도 고행을 할 만큼은 한 셈이 되는 것 아닌가.
어머니는 내가 영성체 받는 날을 위해 검은 예복과 커다란 초를 보내주었다. 또 편지에는 참석하지 못해서 섭섭하다는 것, 그러나 내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는 뜻을 세워 항상 어머니를 즐겁게 해 달라고 적혀 있었다. 나도 물론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었다.
우리 학교에서 첫 영성체를 받는 아이는 모두 14명이었다. 학교 수위 부인은 우리들이 아주 훌륭해보이고, 정말 천사 같이 보여서 눈물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한 줄로 서서 성당으로 갔다. 성당 안에는 시내의 여학교 학생들도 와서 줄지어 앉아 있었다. 안나도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흰 옷을 입고, 머리는 고수머리로 지졌다.
안나는 제의실로 들어가기 전에 내 곁으로 왔다. 그리고는 내가 아주 착한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열심히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그때는 나도 마음이 아주 순한 상태여서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 날, 성당 안에서 내 모습은 평소의 내 모습과는 달랐을 것이다. 나는 영성체에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린 것조차도 의식하지 못했으니까. 나는 앞으로 개구쟁이 짓은 그만두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져야 한다... 영성체가 끝나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나는 파니 아주머니와 페피 아저씨 옆으로 갔다. 그 옆에는 프리다 고모도 서 있었다. 프리다 고모는 나를 보더니 대뜸 시비조로 나왔다.
"네 초가 제일 굵구나. 너만큼 굵은 초를 가진 애는 아무도 없다. 그 초는 우리 안나에게 사 준 것보다는 두 배 이상 비싸겠다. 네 어머니는 어쩌자고 그리 눈만 높은지..."
그러자 파니 아주머니가 입을 열었다.
"그야 고급 관리하고 결혼했으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죠. 과부가 되려면 하급 관리나, 없는 사람의 과부가 되어야 분수를 알 텐데..."
나는 방금까지 착한 아이가 되겠다고 결심했지만,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항상 우리 어머니 덕을 보면서도 우리 어머니를 좋지 않게 헐뜯는 이들을 도저히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프리쯔와 이야기를 좀 나누었다.
프리쯔의 하숙방에서는 길 건너의 프리다 고모네 집 안이 환히 들여다 보인다. 창문을 통해 거울이 달린 옷장이 정면으로 보였다. 마침 프리쯔는 새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잘 저녁, 프리다 고모 네 유리창과 옷장 거울은 박살이 났다.
부활절 휴가철이 왔다. 나는 집으로 가려고 페피 아저씨네 집을 나섰다. 그 때, 파니 아주머니가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네 어머니를 찾아 뵐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꼭 한 번 오라고 간곡히 초대하셨는데도, 여지껏 가지 못했지 뭐니.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어머니를 섭섭하게 해 드릴 순 없을 것 같구나."
아주머니는, 페피 아저씨는 일이 많아서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방문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것을 아저씨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가면 페피 아저씨도 아마 같이 오게 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오히려 여름에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지 않아요? 지금은 날씨도 춥고, 또 언제 눈이 내릴지도 모르잖아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우리가 이번에도 찾아 뵙지 못하면 아마 너희 어머님이 무척 화를 내실 거야. 우린 벌써 여러 번이나 찾아 뵙겠다고 약속을 드렸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들이 굳이 우리 집에 오려는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부활절이면 우리 집에서는 햄이며, 케이크, 과일 등을 푸짐하게 장만한다. 페피 아저씨는 먹성이 무척 좋아서 이렇게 푸짐한 음식을 맘껏 먹고 싶은 것이다.
페피 아저씨 집에서는 그렇게 많이 먹을 수 없다. 앞으로 태어날 아기 생각은 하지도 않느냐고 파니 아주머니가 당장 바가지를 긁어대기 때문이다. 그들이 앞으로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 여러 가지로 절약을 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들은 나를 우편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페피 아저씨는 나를 데려다 주면서 내내 살갑게 굴었다. 자기가 우리 집에 오면 나에게 더 좋을 것이라는 얘기도 했다. 내 성적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화가 난 것을 진정시켜 드릴 수가 있을 거라는 얘기였다.
내 성적이 형편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아저씨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저씨가 오면 나에게 손해가 되면 됐지, 유리할 것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기차로 갈아 탄 후 담배를 피울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우편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해주는 것이 오히려 귀찮았다. 담배를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프리쯔는 벌써 버스 안에 들어가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담배를 사지 못했다고 그랬더니, 그는 자기가 넉넉히 가지고 있다면서 걱정 말라고 했다. 그것도 모자라면 방앗간이 있는 마을 정거장에서 더 사면 된다는 것이다.
우편버스 안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가 없었다. 법원의 수석 판사인 씨른기블 씨가 자기 아들 하인리히와 같이 차 안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교장 선생의 친구라는 것, 학생들의 잘못을 낱낱이 일러 바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인리히는 즉시 자기 아버지에게 우리가 누구라고 일러 바쳤다. 녀석은 자기 아버지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지만, 나는 녀석이 내 이름을 말하는 것을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쟤가 우리 반에서 꼴찌에요. 종교 과목도 겨우 낙제점을 면했구요."
수석 판사가 나를 쳐다 보았다. 마치 내가 동물원에서 기어 나온 구경거리인 것 같은 눈초리였다. 그는 우리를 그렇게 쭉 훑어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판사는 우리 옆으로 와서 프리쯔를 보고 말했다.
"얘들아, 너희들 성적표 좀 보여 주련? 내가 우리 아들 하인리히 성적표하고 비교 좀 해 보고 싶구나."
나는 성적표가 가방 속에 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행 가방은 지금 버스 지붕 위에 올려놓아 성적표를 꺼낼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껄걸 웃었다. 그리곤 자기도 그걸 잘 안다, 하지만 좋은 성적표는 언제나 주머니에다 넣고 다니는 법이라고 말했다. 버스 안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나와 프리쯔는 방앗간 마을 정거장에서 버스를 내릴 때까지 화가 나서 죽을 뻔했다.
프리쯔는 누구에게 자기 증명서를 내보여주는 사람은 전과자들 뿐이라고 말해주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나 역시 형사 따위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에게 그런 무례한 요구는 하지 않는 법이라고 말해 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것 아닌가.
우리는 방앗간 마을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맥주를 마셨다. 그랬더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가 기차에 올랐을 때는 맥주를 꽤 마신 뒤였다.
우리는 차장에게 흡연실이 어디 있는지 물어 거기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벌써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창가에 앉아 있는 사람은 몸이 어지간히 뚱뚱했다. 조끼에 늘어뜨린 시계줄에는 은으로 만든 커다란 말이 매달려 있었다. 그래서 기침을 할 때마다 은으로 만든 말이 그의 배 위에서 춤을 추며 잘그랑거렸다. 다른 자리에는 안경을 낀 조그마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뚱보에게 꼭 군수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뚱보는 그 조그마한 사람을 선생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그 체구가 작은 사람이 선생이라는 것을 대뜸 알아차렸다. 그가 머리를 깎지 않은 것만 봐도 그런 것은 금방 알 수 있다.
기차가 출발하자 프리쯔는 여송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뚱보를 향해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나도 따라서 그렇게 했다.
내 옆에는 어떤 부인이 앉아 있었다. 그 여자는 몸을 뒤로 멀찍이 젖히면서 나를 째려보았다. 다른 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일어나서 우리를 넘겨다 보았다. 사람들이 놀래는 것을 보고 우리는 기분이 무척 유쾌했다. 프리쯔는 여송연 맛이 아주 기가 막히다고 말하면서, 몇 갑 더 사야겠다고 떠들었다. 뚱보 사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혀를 끌끌 찼다.
"잘 한다, 잘 해. 새파란 자식들이 꼴 좋구나. 싹수가 노란 녀석들이야."
이번엔 조그마한 선생이 뚱보의 말을 받았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을 보면 신문에 나는 기사도 조금도 이상할 게 없어요. 이런 녀석들은 앞으로 신문에 날 사건을 저질러 교도소로 직행하는 겁니다. 그밖에 다른 길이 뭐가 있겠어요?"
그러나 우리는 그 두 사람의 이야기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행세했다. 옆자리의 부인은 내가 계속해서 연기를 내뿜자 자꾸만 뒤로 물러앉았다. 초등학교 선생 같은 그 작은 사내가 우리를 너무 험상궂게 째려봐서, 우리는 모르는 척하고 버티기가 힘들었다. 마침내 프리쯔가 그들에게 한 마디 하기 시작했다.
"이봐 토마 군, 자네는 우리 라틴어 학교의 신입생 녀석들이 왜 갈수록 질이 떨어지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나?"
"글세, 도대체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뻔해요. 보나마나 요즘 초등학교 교사들의 질이 워낙 형편 없기 때문일세. 날이 갈수록 질이 떨어지는 게 바로 그들이거든."
그러자 체구가 작은 선생이 기침을 했다. 뚱보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씩씩거렸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개망나니들에 대해 요새는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는 겁니까?"
선생은 한숨을 내쉬었다.
"엉터리 인도주의 때문에 아무 대책도 세울 수가 없습니다. 머리를 조금만 때려도 처벌을 당하니까요."
찻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그게 사실이라고 지껄여댔다. 내 옆의 부인은, 만약 누가 그런 놈을 엎어놓고 볼기짝을 죽도록 때려주어야 한다고 떠들었다. 그렇게 해준 사람에게 못된 망나니들의 부모들은 오히려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모두들 또 그 말이 맞다고 떠들어댔다.
뒤쪽 자리에 앉아 있던 몸집 큰 사나이 하나가 벌떡 일어서더니 사투리 섞인 굵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림도 없어요. 세상에 그렇게 이해심 많은 부모가 있겠습니까."
프리쯔는 아무 대꾸도 않고 나를 발로 찼다. 자기처럼 나도 유쾌한 체하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프리쯔는 주머니에서 파란색 코걸이 안경을 꺼내어 코에 걸치고 사람들을 쓱 한 번 흝어보았다. 그는 또 콧구멍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우리는 다음 정거장에 도착해서 맥주 두 병을 더 사서 기분 좋게 나눠 마셨다. 그러고 나서 창 밖의 전봇대를 겨냥해 빈 병을 힘껏 내던졌다. 그러자 키 큰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자식들을 혼줄을 내주어야겠다!"
그러자 키 작은 선생도 덩달아 소리를 질렀다.
"이 자식들 가만히 있지 못하겠나? 말을 안 들으면 따귀를 후려갈겨 줄 테다!"
그러나 프리쯔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대꾸했다.
"그렇게 해 볼 용기가 있으시거든 어디 한 번 해 보시지요. 나도 가만히 앉아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 선생은 감히 달려들지 못했다. 그저 한탄만 했을 뿐이다.
"요즘 애 녀석들은 함부로 때리지도 못해. 때렸다가는 오히려 때린 쪽이 처벌을 당하니까."
그러자 키 큰 남자가 나섰다.
"가만 계시오. 요 녀석들을 내가 혼줄을 내줄 테니."
그러고 나서 키 큰 남자는 큰 소리로 차장을 불렀다.
"차장, 차장...!"
차장은 불이라도 난 줄 알고 부랴부랴 달려왔다. 그리고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키 큰 남자가 대답했다.
"저 녀석들이 창문 밖으로 맥주병을 내던졌소. 저 놈들을 잡아 가두시오."
차장은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고 뛰어 왔다가 그 정도 사건이라는 것을 알자 오히려 부른 사람에게 화풀이를 했다.
"이런 일 때문에 소동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차장을 함부로 부르는 게 아니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한결 부드러운 말로 타일렀다.
"학생들도 창 밖으로 병 같은 걸 던져서는 안 돼!"
나는 기분이 매우 좋아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차장님. 빈 병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몰라서요. 이제 다시는 빈 병은 밖으로 내던지지 않겠습니다."
프리쯔는 차장에게 여송연을 한 대 권했다. 그러나 차장은 그렇게 독한 것은 피우지 못한다면서 가 버렸다. 키 큰 군수는 자리에 앉아서 차장이 돼지 같은 프러시아 놈인가 보다고 욕을 했다. 어른들 역시 모두 같은 생각이었는지, 다시 투덜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선생은 여전히 군수를 붙잡고 똑같은 말을 되풀이 지껄였다.
"군수님, 우리 선생들은 무척 참지 않으면 안 됩니다. 머리통을 좀 때려도 안 되거든요."
기차는 계속 달렸다. 우리는 다음 정거장에서도 맥주를 사 마셨다. 맥주를 마실 때 나는 몹시 어지러웠다. 그러더니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빙빙 돌기 시작했다. 뱃속도 심상치가 않았다. 소화를 거꾸로 시키는 것일까? 그 동안 마시고 삼켰던 것들이 입으로 올라 오려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창문 밖으로 내밀어 보았다. 그렇게 하면 혹시 좀 나아질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의 효과가 없었다. 뱃속은 한층 더 부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자칫 잘못하면 내가 담배를 피우고 맥주 마신 것 때문에 그걸 이겨내지 못하고 이런다고 여기 사람들이 생각할 것이 아닌가.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온 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러나 결국 소용이 없었다. 나는 후닥닥 모자를 집어 들었다. 내 옆에 앉아있던 부인이 비명을 지르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꼬라지 좀 보라구. 내 저럴 줄 알았다니까."
"저게 바로 저 놈들 본색이 드러난 거야. 저 자식들이 개울에다 코를 박고 죽지 않는지 어디 한 번 보고 싶구만."
"잘 논다. 잘들 놀아."
입 가진 사람들은 모두 한 마디씩 했다. 그러나 나는 몸이 너무나 괴로워서 한 마디도 대꾸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아예 저들이 떠드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 이 고통이, 이 괴로움이 가셔 주기만 한다면 두 번 다시 술 담배 따위는 입에 대지도 않을 텐데... 그 뿐만 아니라 어머니 말씀에 순종하고, 어머니를 노엽게 하고 슬프게 하는 짓거리는 다시는 하지 않을 텐데...'
나는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이토록 괴롭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모자 속에 이 따위 배속에서 토해 낸 것을 담고 있는 것보다는 주머니 속에 좋은 성적표를 넣어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프리쯔는 내가 순대를 먹고 체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평소에도 술 담배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우겼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우습게 보게 하기 않으려고 애를 쓴 것이다. 하지만 나는 프리쯔의 거짓말이 못마땅했다. 나는 고통 때문에 갑자기 정직한 아들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프리쯔의 거짓말이 싫어졌던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지금 나를 낫게 해 주신다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마음 속으로 맹세했다. 그러나 옆에 앉은 부인은 나의 이런 마음은 전혀 알아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도대체 언제까지 이 냄새를 참아야 하느냐고 여전히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러자 프리쯔가 내 손에서 모자를 낚아채 기차 창문 밖으로 내밀어 털었다. 그러나 토한 것은 바람에 날려 대부분 창틀로 흘러내렸다.
기차가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자 기차 화물계원이 올라와서 소리를 질렀다.
"이런 빌어먹을! 도대체 어떤 자식이 저렇게 지저분하게 만들어 놨어? 이봐, 차장. 기차가 어디 돼지 우리야?"
차장이 곧 달려와서 더러워진 창틀 근처를 살폈다.
"누가 이렇게 쏟아 놓았소?"
"아까 맥주병을 내던졌던 그 어르신네지. 당신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해주지 않았소? 바로 그 양반이 이렇게 만들었단 말이오."
군수가 소리쳤다. 그러자 화물계원이 물었다.
"맥주병은 또 뭐요? 그게 어떻게 됐다는 거요?"
"맥주병이야 맥주병이지 뭐긴 뭐겠소? 빈 맥주병이지."
"내가 맥주병을 내던지도록 허락했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당신은 정말 비열한 사람이군!"
이번에는 차장이 뚱보 군수를 향해 소리질렀다. 그러자 뚱보 군수도 지지 않고 차장에게 대들었다.
"내가 뭐라고?"
"당신은 비열한 거짓말쟁이란 말이야! 나는 그렇게 하라고 허락한 적이 없단 말이오!"
화물계원이 둘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지, 사이로 끼어 들어 중재에 나섰다.
"자, 그렇게 고함을 칠 필요는 없습니다. 다들 조용히 해결하셔야죠."
그러나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와글와글 떠들면서 나섰다. 프리쯔와 내가 형편 없는 개망나니들이라는 것이다.
"저 녀석들을 잡아 가둬야 합니다. 맛을 보여야 해요."
"맞습니다. 감옥에 집어 넣어야 한다구요."
제일 큰 소리로 고함을 치는 사람은 초등학교 선생이었다. 그는 자기가 교육자라고 몇 번씩이나 되풀이해서 말했다. 나는 너무 몸이 불편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프리쯔가 나를 대신해서 화물계원을 상대하고 나섰다.
"기차역에서 상한 순대를 사 먹고 탈이 났다면, 그건 상한 순대를 먹은 사람이 잘못입니까, 아니면 그런 걸 판 쪽이 잘못한 겁니까? 어느 쪽이 감옥에 가야 하는 겁니까?"
화물계원은 아무도 구속 당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창틀을 청소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돈은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 비용은 1마르크라는 것이다.
우리는 1마르크를 화물계원에게 주었다. 그리고 창틀은 다시 깨끗하게 치워졌다. 기차는 다시 출발했다. 나는 바람을 쐬려고 머리를 창문 밖으로 내놓았다.
프리쯔는 엔돌프에서 내렸다. 그리고 얼마쯤 더 가서 기차는 내 고향 역에 도착했다. 어머니와 누나가 나를 역에까지 마중을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때까지도 몸이 좋지 않았다. 머리도 계속 아팠다.
밤이어서 얼굴이 창백한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 나는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에게 키스를 해주더니 당장 물어보았다.
"아니, 이게 무슨 냄새냐, 루드비히야?"
안나도 옆에서 물었다.
"루드비히, 너 모자는 어쨌니?"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말하면 어머니가 얼마나 슬퍼하실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방앗간 마을에서 상한 순대를 먹고 혼이 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뜨거운 차를 좀 마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집에 도착하니 식당에 불이 밝혀져 있었고, 식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 집 가정부인 테레즈 할멈이 달려 나와 나를 보더니 소리를 질렀다.
"하나님 맙소사, 우리 도련님 얼굴이 저게 뭐람! 두 분이서 우리 도련님을 너무 공부만 시켜서 저렇게 가엾게 됐지 뭐에요!"
어머니는 내가 좋지 못한 것을 먹어 그렇다면서 빨리 차를 끓여 오라고 말했다. 테레즈는 부엌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그리고 나는 안락의자에 편안하게 앉았다.
우리 집 삽살개는 나에게 계속 뛰어오르면서 혀로 핥으려고 했다. 내가 돌아온 것을 모두들 기뻐하고 있다. 나는 마음이 아주 부드러워졌다. 어머니가 그 동안 착실히 지냈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늘 착실하게 지냈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대답하면서, 나는 앞으로는 정말 착실해져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나는 상한 순대를 먹었을 때 당장 자빠져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것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고 위로해 주더라고 거짓말을 했다.
나는 그 때, 이제부터는 아주 딴 사람이 되어 어머니가 기뻐할 일이면 무슨 일이든지 다하려고 마음 먹었다고 말했다. 앞으로 공부도 열심히 하고, 벌을 받았다는 따위 소식은 두 번 다시 집에 전해지지 않도록 하겠노라고, 식구들이 나를 모두 자랑스럽게 여기게 하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안나 누나가 그러는 나를 가만히 들여다 보더니 말했다.
"너 가만히 보니 성적표가 형편 없는 모양이구나, 그렇지 않니?"
누나가 또 다시 날 붙잡고 꼬치꼬치 심문하려는 것을 어머니가 막아 주었다.
"안나야, 그런 얘긴 꺼내지 마라. 루드비히는 몸도 성치 않고, 이미 새 사람이 되려고 결심하고 있지 않니. 우린 그것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단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그만 울지 않을 수 없었다. 테레즈 할멈도 내가 거의 죽을 상이 되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는, 집안이 떠나가라고 크게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
"도련님이 너무 공부를 해서 그래요. 두 분이 우리 도련님을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거라구요."
할멈이 울음을 그치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어머니는 할멈을 달래야 했다.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리에 누우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편안했다. 어머니는 내 방의 불을 꺼 주시면서 어서 몸이 낫기를 빌어 주셨다. 나는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리에 가만히 누워서 어떻게 하면 새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