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나의 동경 나의 위안] 3인의 이단아
이단아의 출현은 당대의 부패나 부조리 영향이 크다. 부패 사회나 정의에 반하는 사회가 온상이 되는 것이다. 정치 쪽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술 세계에도 같은 이치가 적용된다. 다만 지나치게 극단의 이단은 도태되기 마련이고 살아남는 경우 사회나 당대 예술의 진전에 크게 이바지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현대음악에서 두각을 보이는 이단아는 누구일까? 내가 아는 한 러시아의 젊은 괴짜 유리 한인(Yuri Khanon.1965~)이 먼저 떠오른다. 1998년, 그때 막 한국에 온 박노자 교수를 통해 그의 이름을 알았다. 그와 친구를 자처하는 박노자는 한인의 주요 작품 녹음 테이프를 전했고, 뒤에 작곡자 사인이 곁든 음반과 700여 쪽에 달하는 그의 저서도 가져왔다. 유리 한인은 알렉산드르 스크랴빈과 에릭 사티가 자기의 둘뿐인 스승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이 두꺼운 저서는 그보다 앞 세대로 또 하나의 이단아인 스크랴빈과 자신이 영매(靈媒)를 통해 교감한다는 소설 형식의 특이한 저술인데 유감스럽게도 러시아어 원문 해독이 불가능해 서가에 꽂혀만 있을 뿐이다. 그때 테이프로 들어본 유리 한인의 ‘다섯 개의 작은 오르가슴들’과 ‘미들 심포니’는 너무 특이하고 생소해서 감상담을 기대하는 작곡가와 그 친구에게 미처 응답을 못하고 지나친 게 아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는 지금쯤 굶어 죽었을지 몰라요.” 이단적 행동과 작품 때문에 러시아 음악계에서 배척 받아 그가 생계조차 막막하다고 그의 친구는 내게 하소연했다. 유리 한인의 작품이 무시 못할 파괴력과 전망을 지닌 걸 감지하면서도 당장 뾰쪽한 대책은 없었다. 스크랴빈의 대표작 ‘법열의 시’에 직접 응답하는, 범상치 않은 ‘다섯 개의 오르가슴들’을 작곡한 유리 한인은 지금 살아 있을까? 살아 있다면 어떤 작업에 매달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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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스크랴빈(Aleksandr Skryabin, 1872~1915)은 이단아 시대를 지나 이제 고전의 단계에 진입한 지 오래다. 초기 쇼팽과 드뷔시 등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지만 그 경계를 뛰어넘어 존재의 신비와 인간 의지의 한계를 초극하는 독특한 세계를 열어 보인 그는 이웃 일본이나 한국에도 그 지지자들이 날로 늘고 있다. 복잡한 리듬에도 불구하고 독창적 화성과 다채로운 음색 창출이 그의 이단적 도전을 연착륙시킨 거름으로 작용한 셈이다. 하긴 바흐조차 당대에는 단조롭고 시끄러운 소음만 만들어내는 괴짜로 배척 받은 걸 생각하면 이단의 존재는 예술에서 도리어 필연의 구원이란 생각마저 하게 된다.
스크랴빈은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주관적 발상, 복잡한 음계 구조로 거의 잊혀질 뻔했으나 주변의 탁월한 이해자들에 의해 부활하는 행운아가 되었다. 그 부활에는 호로비츠의 공로가 무엇보다 컸다. 그가 주요 연주회 목록마다-주로 1950년대 이후- 스크랴빈 작품을 끼워 넣지 않았다면 그 이름이 지금처럼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유명한 ‘호로비츠 모스크바 귀국연주회’ 서두에서도 호로비츠는 스크랴빈의 연습곡 두 곡(Etude op.8 no12, op2 no.1)을 연주하고 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스크랴빈의 피아노가 보존된 그의 집을 찾아 피아노를 직접 연주하고 그의 유족과 담소도 나눴다. 노인이 된 스크랴빈의 장녀 엘레나(Elena)의 모습이 잠시 비치는 이 장면은 이 연주회 스케치에서 가장 인상적 장면의 하나였다. 엘레나의 남편이자 스크랴빈 해석과 연주의 으뜸으로 명성을 갖는 소프로니츠키(Vladimir Sofronitsky 1901~1961)의 모습이 엘레나의 얼굴에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스탈린 치하에서 살다 알코올 중독증으로 사망한 이 피아노의 명장은 은둔자적 각종 기행들로 인해 그 역시 또 한 사람의 연주계의 이단적 존재였다. 그는 녹음을 극도로 싫어해 지금 존재하는 그의 연주 음반들은 대개가 몰래 한 녹음의 산물이라고 한다. 장인의 음악에 유다른 애착을 느꼈던 그는 페달을 길게 끌지 않고 복잡한 음들을 단순명료하게 처리해 현대의 감각에 잘 맞춰내고 있다.
재미없고 복잡하기만 하던 스크랴빈의 음악-주로 대표작 격인 교향곡에 해당하지만-이 신세대들에게 새롭게 환영 받는 현상이 이채롭다. 뜨거운 반응은 일단 전주곡을 비롯, 그의 다양한 소품들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낯선 음악도 자주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고 좋아진다는 물리학자들의 실험 결과도 있다. 반드시 이 이치 때문은 아니겠지만 스크랴빈의 전주곡·즉흥곡 등을 듣다 보면 감성의 속박으로부터 어느 순간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끼고 스스로 놀란다. 이것은 역설이며 무아의 경지와도 통하는 기분이다. 영감이 가득한 연주로 평가되는 소프로니츠키 연주를 들을 때 어느 순간 스크랴빈 특유의 상반된 음상이 정적과 교차하는 사이 뜻밖에 황홀감에 젖기도 한다. 이 일탈의 해방감과 뒤따르는 황홀감은 작곡자 특유의 신비 추구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는 일정한 신의 형상을 추구하지는 않으나 무당의 접신 비슷한 동양적 영매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엑스터시라는 것은 사실 동양 쪽이 더 실감 있게 느끼는 개념이다. 소프로니츠키는 연주 순간에 영매를 통해 작곡자의 현신(顯身)으로 등장하는 건 아닌가. 스크랴빈 자신도 동급생 라흐마니노프와 솜씨를 겨룰 정도로 피아노 연주에 탁월했다.
유리 한인, 모방에 안주하고 흥행에 몰두하는 패거리 음악사회를 조롱하고 인간의 인식 차원을 높이겠다는 이단아, 그의 도전은 어떤 결과로 이어질까? 아니, 그것보다 그는 아직 살아 있기나 할까?
Horowitz Scriabin Etude Op 8 No 12
https://www.youtube.com/watch?v=gHKRuxiIKiU
Yuri Khanon - "Middle Symphony" 1/3
https://www.youtube.com/watch?v=2DeBdgNpCe8
업데이트 - 이정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