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소개]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또는 중동의 어느 원주민들이 낯선 백인을 만나서 마음을 열고 친해질 때 손을 들어 상대방의 가슴을 가리키고 이어서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말한다.
"우리는 이제 친구다. 그러니 당신을 믿는다."
헐리우드 영화 같은 곳에서 드물지 않게 보는 장면이다. 이런 장면에서 우리가 새삼 느끼는 것은 우리나라 문화에서 통용되는 '친구'의 개념과 저들 원주민들의 그것은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다. 저들 원주민이 말하는 친구의 개념은 원래 잘 알지 못했던, 멀리 떨어져 다르게 살아왔던 타인들이 일정한 계기를 통해서 서로 신뢰를 쌓아 더 이상 경계의 절차가 필요없게 되는 관계를 말한다. 하지만 우리 문화에서 말하는 친구는 '원래부터 같이 살아서 별로 경계할 필요가 없는 관계'라는 개념이 더 강하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가족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편한 사이 정도인 것이다.
이 작품은 이렇게 이질적인 존재와의 교류라는 경험이나 노하우가 무척 빈약한 한국 사회에서 혼혈인이라는 존재가 던지는 불편함을 다룬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런 유형의 작품이 흔히 빠지기 쉬운 소재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 작가의 시선이 향하는 지점이 혼혈인이나 그들이 처한 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존재를 담아내고 소화해내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 있다는 점에서 그 점이 분명해진다.
이 작품이 드러내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예민한 상처와 쉽게 인정하기 힘든 굴절들로 이어진다. 마치 한 뿌리를 건드리면 불가피하게 다른 줄기의 처리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구근(球根) 식물 같다고나 할까. 한국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일 수밖에 없는 혼혈인인 도일이 다시 그 한국 사회를 소외시키는 강자인 미국과 혈연으로 이어지는 관계에서 겪는 이중적인 자아와 자기 위상의 혼란도 그 중 하나다. 작가가 시간과 여유를 갖고 이 주제를 계속 천착했으면 이 작품은 이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또 하나의 주목할만한 산줄기로 이어지는 이정표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현동에 있는 그린하우스라는 가게는 한때 내가 매우 자주 출입하던 가게다. 우리말로 하면 초록의 집이란 뜻이겠는데 그야 어떻든 나는 그 조그만 가게의 몇가지 메뉴들을 지극히 애용했었다. 거기서 주로 취급하는 건 국수 종류의 음식과 아이스크림으로 대별되는데 국수류에도 비빔국수, 남비국수, 그리고 냉채국수가 있고 아이스크림에는 소프트와 하드의 두 종류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좋아했던 건 남비국수와 소프트 아이스크림이었는데 남비국수는 특히 그 고소한 국물이 일품이었고 아이스크림으로 말한다면 이 그린하우스에서만 맛볼 수 있는 독특한 담백함이 있었다.
이 가게에서는 아이스크림을 주문하면 즉석에서 최신형 크림 제조기를 손님이 보는 앞에서 가동시켜 금방 만들어진 크림을 손님에게 가져온다. 좌석에 앉아서 이윽고 하얀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조그만 출구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나에겐 적지 않은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이런 얘기보다 정작 내가 그집을 자주 가지 않을 수 없었던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때 나는 하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대현동의 하숙방들에 공통되는 특징의 하나는 방이 형편없이 좁다는 것과 하나는 거의 대부분의 방들이 채광 상태가 말이 아니어서 대낮에도 마치 동굴속에 갇혀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낮에 마음대로 전등을 켤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그런 때는 공연히 비참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자연히 낮에는 그 방을 피해서 어딘가 앉아 있을 만한 장소를 찾게 되었다.
갈 곳을 미리 정하지 않고 무작정 밖으로 나왔을 때 어딘가 찾아갈 장소가 전혀 떠오르지 않는 인간의 막막한 심정이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심정에 내가 빠져 있을 때 나를 구해준 곳이 그린하우스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곳에 나가 앉아 있어도 내가 당장 만날 사람이나 기다릴 사람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하나 들고 그것을 혀로 핥는다기보다 표면에서 녹아내리는 액체를 거두어 들이는 정도로 야금야금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가능하면 시간을 오래 끌었다. 나는 가게에 드나드는 손님들의 행색이나 용모를 감상하기도 하고 최신형 크림 제조기에서 뿌연 아이스크림이 홀러 나오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나는 그 가게의 손님들 가운데서 나이가 많은 축에 끼었다. 그곳의 주된 손님은 고등학교 학생이나 대학의 초급생 정도가 고작이었으니 이미 서른을 넘긴 어른인 나는 좀 별난 손님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에는 종업원 아가씨들이나 다른 손님들이 내가 그곳에 한가롭게 앉아 있는 모습이 매우 신기한 듯 흘끔흘끔 내 얼굴을 쳐다보기도 했으나 내가 어떤 때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곳에 나타났기 때문에 결국 누구나 내가 거기 앉아있는 걸 아주 당연하게 보게 되었다. 나 자신도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람의 눈길을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느날 나는 그린하우스에서 아주 낯선 얼굴을 발견하고 무척 흥미를 느낀 일이 있었다. 그 얼굴은 그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주 무더운 대낮이었는데 내가 그곳으로 들어가 언제나 내가 앉아 있던 안쪽 구석자리로 다가갔을 때 이미 그곳에 세 사람의 고등학교 학생 쯤으로 보이는 손님들이 앉아있었다.
할 수 없이나는 소프트 아이스크림 하나를 시켰다. 그리고 내 지정석을 미리 차지하고 있는 손님들 쪽을 힐끗 쳐다봤다. 그때 그들 중의 한 사람과 눈길이 마주쳤다. 그 순간 전류에 감전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나는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눈빛이 내가 늘 보아오던 몽골리언의 까맣고 다소 음침해 보이는 눈빛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눈빛은 옅은 갈색이었는데 굉장히 맑고 시원해 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석의 표정에도 전혀 망설임 같은 건 없고 의젓하고 태연했다.
알고보니 그는 백색 혼혈아였다. 물론 그의 머리칼도 열은 갈색이었고 피부빛도 옆에 앉아 있는 그의 친구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될 만큼 허여멀쑥했다.
그는 유창하게 서울의 표준말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게 당연한 일이건만 내 귀에는 그게 신기하게 들렸다. 그 녀석은 좌중에서 유난히 말을 많이 했고 그리고 그 태도가 유난히 쾌활했다. 그런 태도가 몹시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건 그 녀석의 잘 생긴 용모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 얼굴이야말로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걸작에 해당하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이 말은 결코 비아냥거리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조화와 균형이란 측면에서 엄밀하게 따져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보통의 서양인은 코가 지나치게 돌출해서 균형미는 고사하고 위태위태하게 보인다. 눈은 또 어떤가? 너무 심연 깊숙이 들어가 버려서 자칫하면 괴물 같은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 물론 우리 같은 몽골리언은 그와 정반대의 미적 결함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 녀석은 내가 자기 용모에 감탄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내 쪽엔 더 관심을 주지 않고 계속 쾌활하게 떠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손님이 한꺼번에 무더기로 몰려들었다. 다소 한적했던 가게 안의 좌석들이 손님으로 모두 점령되었다. 그때부터 이상한 광경이 벌어진 것이다. 손님들의 시선이 모두 그 녀석에게 쓸렸다.
그 까닭은 그 녀석이 지나치게 큰 목소리로 지나치게 쾌활하게 떠든 탓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역시 녀석의 용모가 다른 사람들과는 근본부터 다르다는 게 더 큰 이유였다. 녀석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기를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고 갑자기 하던 말을 중단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녀석은 계속 떠들었다. 그러자,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녀석의 태도가 흥미를 돋귀준 것이다.
어디, 어떻게 하나 보자. 계속해서 네가 유창한 서울말로 떠들 수 있나 보자,사람들이 모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 우리 앞에서 바야흐로 벌어지는 원숭이의 재롱을 기다리는 구경꾼들의 표정과 홉사한 표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웬일인지 몸이 오싹 얼어붙는 듯한 긴장 속에서 다음 시간을 기다렸다.
그 녀석은 점점 얼굴이 빨개졌다. 피부빛 때문에 그의 얼굴에 나타난 홍조가 더욱 선명했다. 녀석은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천천히 나가 버렸다. 그 뒤를 따라 그의 두 친구들이 어색한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어슬렁어슬렁 밖으로 나갔다. 군중이란 때로는 잔인한 것이다. 그때 나는 내 피부가 황색이란 점에 대해 처음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하나님의 가장 걸출한 피조물인 그 녀석은 다시는 그린하우스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녀석과 나 사이에는 둘을 연결하는 눈에 안 보이는 끈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해 겨울 나는 갑자기 하숙방을 옮겨야 할 처지가 되었다. 길에는 눈이 내려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보료 위를 걷는 것처럼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게 되는 그런 날씨였다. 오십대의 과부인 하숙집 아줌마는 그날 아침 결단을 내리고 나더러 방을 비워달라고 말했다.
본래 내가 쓰던 방은 두 사람의 합숙용이었고 따라서 나는 합숙에 해당하는 돈만 지불해왔다. 그런데 나와 방을 함께 쓸 동숙자가 아무래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주인 여자는 몇 달씩이나 손해를 감수하고 있었다. 사실은 동숙자가 나타나지 않은 게 아니라 그 사이에 세 사람씩이나 나타났었다.
그러나 내가 대낮에 새까만 이불을 뒤집어쓰고 마치 만성 결핵환자 같은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걸 보고는 모두 질겁하고 달아나버렸다. 처음에는 나는 방을 혼자 쓰기 위해 거짓으로 환자 같은 모습으로 위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인 아줌마에게 차츰 미안한 생각이 들어 다음에는 내딴엔 방을 깨끗하게 치우기도 하고 내 자신의 외모를 단정하게 가꿔 보기도 했다.
이건 마치 술집색시가 갑자기 없는 모양을 내고 손님을 기다리는 것처럼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현명한 손님은 이번에도 나에게 속지 않았다. 아줌마는 내가 그 방에 있는 한 결코 동숙자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눈 내린 겨울 아침에 갑자기 나를 쫓아내기로 한 것이다. 나는 사정이 급했으므로 새 방을 구하기 위해 정오에 행길로 나왔다.
대현동에는 도처에 빈 하숙방이 널려 있었다. 만약 단독으로 쓸 방을 구하기로 했다면 나는 집을 나서기가 무섭게 은신처를 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합숙방을 그것도 한 사람은 이미 들어 있고 나 머지 빈 자리의 한 사람만을 기다리는 합숙방을 구했기 때문에 그런 방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단 한번 그런 방을 찾아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먼저 그 방에 들어있는 기득권자가 노골적으로 나를 배척했다. 그 녀석은 나보다 대여섯 살이나 어려 보였는데 내가 나이가 많고 또 행색조차 그다지 단정치 않다는 게 맘에 걸린 모양이었다. 복덕방 영감님과 함께 그 집에서 물러나왔을 때는 이미 저녁 어스름이 허공에 깔리고 있었다. 나는 약간 지쳤고 방을 구한다는 희망도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에 잠겼다. 그러나 마지막 기회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내 하숙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이번에는 그날의 내 운세를 시험하는 기분으로(이미 자포자기 상태였기 때문에 내게 그런 여유가 생겼다), 문득 길가의 허름한 복덕방으로 들어갔다. 노인 두 사람과 오십이 조금 지난 듯한 남자 하나가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구체적으로 구하는 방을 설명하자, 노인 두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머리를 옆으로 흔들었다.
그러자, 나는 두말 없이 돌아섰다. 그때 오십대의 남자가 나를 불러세웠다. 그는 머리를 나이에 안 어울리게 병정처럼 짧게 깎아올렸고 얼굴이나 몸에 살이라곤 붙어 있지 않아서 무척 인색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가 내게 처음 한 말은 자기는 복덕방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잠시 놀러온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이었고 두번째로 그는 합숙비용으로 독방을 줄 수 있는데 그대신 방이 깝깝해도 좋겠는가를 내게 물었다.
그는 방이 깝깝해서 그 방은 일부러 지금까지 비워두었으며 만약 내가 입주한다면 특별히 종일 전기를 켤 수 있도록 허용하겠고 전기값은 받지 않겠다는 말도 결들였다.
“김씨, 잘 생각했어. 공연히 방을 비워두면 될 해?’’
노인 한 사람이 오십대 남자에게 말했고 다른 노인 한 사람이 내게 말했다.
“운이 좋으시구려. 아주 잘만났어.”
노인의 그 말이 나를 기분 좋게 했다. 깜깜하면 얼마나 깜깜하랴 - 설마 지옥보다 더할라구. 지옥이 깜깜한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더구나 나는 어지간히 어두운 곳에서는 잘 견딜 만큼 단련이 되어 있다. 나는 즉시 김씨를 따라 나섰다.
그의 집은 지척에 있었다. 조그만 기와집인데 대문 - 옆에는 세탁소를 차려 놓고 있었다. 그러니까 김씨는 직접 세탁소 일은 하지 않고 사람을 고용해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하숙생을 여럿 씩 두고 있는 알부자인 셈이었다.
나는 주인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가서 방을 구경했다. 그 방은 마당에서 복도로 들어가면 복도 끝에 있었다. 방은 겨우 한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작은 방이었다. 그 방이 그렇게 작다는 것도 전등을 켜놓고 나서야 알았다. 출입문의 반대쪽에 제법 큰 유리창이 있어서 다가가 보았더니 창밖이 이웃집의 담벽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 방에는 일 년 열두 달 동안 햇빛이 찾아올 수가 없는 셈이다. 그날 밤에 나는 리어카에 이불 보따리와 약간의 가재도구를 싣고 김씨의 그 방으로 옮겨갔다.
다음날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나는 세수를 하려고 아침 일찍 마당의 세면장으로 나갔다. 이 집의 하숙생은 나를 제외하고 네 사람이 있었는데 둘은 직장에 나가고 둘은 학생이었다. 김씨가 전날 저녁에 집안의 그런 실정을 내게 알려 주었었다. 그들은 휴일의 늦잠을 즐기는지 마당에는 아직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수도에서 흘러나오는 냉수에 얼굴을 씻고 마악 돌아서려는데 밖에서 파란 운동복을 입은 남자가 헐레벌떡 마당으로 뛰어들어왔다. 그 순간 나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미끄러운 마당의 얼음 바닥 위로 넘어질 뻔했다.
방금 마당으로 들어온 사람이 바로 내가 신의 가장 걸출한 피조물이라고 생각했던 그 백색혼혈아였던 것이다. 나를 발견한 그녀석도 매우 놀란 듯했다. 그는 마당 한 쪽에 갑자기 멈춰서서 한동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둘 사이에 말은 없었다. 그렇다고 피차 무슨 적의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녀석이 이 집의 가족의 한 사람일까? 아니면 하숙생에 불과한 것일까? 이런 의문이 재빨리 머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맙게도 곧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이 나왔다. 안방에서 김씨의 목소리가 때마침 들렸던 것이다.
“얘, 도일이 왔니? 빨리 들어와 아침을 먹어야지.”
그건 자상하고 부드러운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그 말소리가 들리자,마당가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던 녀석이 황급히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새로운 의문에 사로잡혔다. 아버지 쪽일까? 어머니 쪽일까? 그건 아주 고약스런 상상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녀석과 닮은 데라곤 없었다.
김씨는 얼굴이 주먹 만큼 작고 얼굴 빛깔도 구리색이다. 그의 아내는 반대로 머리통이 크고 용모는 에스키모 여인처럼 코도 눈도 입술도 모두 넙적넙적하다. 게다가 난장이를 겨우 모면했을 정도로 키가 작았다. 만약 그녀가 정말 녀석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정도에서 상상을 그쳤다. 아직 정리하지 않은 책보따리가 세 개씩이나 방바닥에 뒹굴고 었있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에 정말 뜻밖의 일이 생겼다. 도일이란 녀석이 내 방에 찾아온 것이다. 나는 마음 속으로 세상에는 귀빈의 방문이란 말이 있지만 이거야말로 진짜 귀빈의 방문이라고 생각했다. 신의 가장 절묘한 피조물인 녀석이 제 발로 나를 찾아오다니!
그건 내가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고 그런 일이 있을 만한 개연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내 방은 마당에서도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다. 그런 곳에 처박혀 있는 인간을 못 본 척 무시하고 지난들 이상할 게 없을 것이다. 나는 정말 황송스럽고 고마운 심정으로 녀석을 맞이했다.
“방이 너무어두워요.’’
방 안에 들어온 도일이 약간 장난기 섞인 어조로 말했다. 그게 내 입장을 위로하는 뜻이란 걸 나는 알았다. 도일은 스스럼없이 방바닥에 털씩 주저앉았다. 가까이서 봐도 역시 녀석의 용모는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가 없을 만큼 수려하고 단정했다.
“아버님에게서 아저씨 얘길 들었어요. 글을 쓰신다더군요.”
“아니, 뭘. 할일 없으니까 끄적이고 있을 뿐인 걸.”
“앞으로 책도 좀 얻어보고 좋은 말씀도 듣고 싶어요. 제가 가끔 놀러와도 괜찮을까요?”
“그야 물론이지. 나도 말벗이 없어서 무료할 때가 많다구.”
“고마와요. 그런데 저는 전에 아저씨를 본 기억이 있어요.”
“나를 봤다구? 어디서야.”
“그린하우스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걸 봤어요. 그 집엔 아저씨 같은 어른은 없어요. 그래서 특별히 기억하고 있나봐요.”
“오, 그랬었군. 내가 우습게 보이지 않았어? 어른이 아이들 속에 섞여 앉아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는 모습이 말야. 마치 자신도 아이나 소년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았을 걸.”
“아닙니다. 조금도 우습지 않았어요. 누가 그걸 보고 우습다고 생각합니까? 어른도 아이스크림은 좋아할 수 있는 거에요. 안 그런가요?”
도일은 완고하게 내 말을 부인했다. 그의 고지식한 말투가 내 맘에 들었다. 말투는 완고했지만 생각은 아주 자유롭고 대범한 것 같았다. 나는 녀석이 잘 자라온, 아주 좋은 소년이란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물론 나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그래서 그린하우스에 자주 가는 거야.”
“남이 생각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자기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거죠.”
“나하고 의견이 맞는 걸 보니까 우린 친구가 되겠구나. 그렇지?”
‘‘그럼요,나도 아저씨와 친구가 되고 싶은 걸요.”
“사실은 나도 너를 그때 봤어. 그래서 아침에 마당에서 너와 마주쳤을 때 조금 놀랐었지.”
“왜 놀라셨죠?”
나는 잠시 멈칫했다. 막상 그렇게 물어오니까 할 말이 안 떠올랐다. 도일의 눈빛은 맑으면서도 지혜로 가득했다. 섣불리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기와집에서, 더구나 김씨가 주인인 이 집 마당에서 너를 만난 건 뜻밖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건 그날 그린하우스에서 네 모습이 그만큼 인상적이었기 때문일 거야. 넌 그때 굉장히 쾌활했었지. 그게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야. 언제쯤 너하고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어.”
“아주 잘 되었군요, 이렇게 만나서.”
도일은 내가 거짓말을 한 걸 알고 있었으나 더 따지지는 않았다. 사실은 이 점이 녀석의 큰 미덕이었다. 남의 약점을 건드리지 않을 만큼, 너그러운 성격을 그는 갖고 있었다. 그 대신 다른 사람이 자기 약점을 파고드는 걸 허용하지 않을 만큼 그는 빈틈없이 행동했다. 그건 이제 겨우 고등학교 이학년의 소년에겐 걸맞지 않는 것이지만 결점일 수는 없었다.
녀석의 그 빈틈없는 태도 때문에 나는 몇 가지 궁금한 사실을 하나도 묻지 못했다. 감히 물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너는 아버지 쪽이냐? 어머니 쪽이냐? 둘 모두 아니라면 언제부터 김씨의 아들이 되었느냐? 그밖에도 궁금한 일이 많았다. 도일과 김씨와의 그 다정한 부자관계에 관해서도 나는 알고 싶었다. 사실은 무엇보다 여기에 홍미가 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감히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그린하우스에는 자주 안 가는 편이지?”
“가끔 가고 싶지만 어찐지 싫어요. 그집 우동 참 맛있던데요.”
“그렇다면 싫을 것도 없잖니?”
도일이 그렇게 말하는 까닭을 알면서도 나는 짐짓 이런 말을 했다. 도일은 말이 없었다.
“다음번에 나랑 같이 거기 안 갈 거야?”
“생각해 보죠.”
잠시 후 도일은 일어섰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다 돌아서서 그가 말했다.
“저기 건넌방이 제 방이에요. 저녁식사 하시고 시간 있을 때 놀러 오세요.”
나는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의 초대가 사실은 반가왔다. 어떤 이유로 그러는지는 몰라도 도일이 내게 특별한 호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그 한마디로 입증되었던 것이다.
종일 전등을 켜놓고 있다고 해도 그 방에 앉아 있으면 동굴 속에 갇혀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떻게든 구실을 붙여서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런 심정인데 도일의 초대가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저녁식사 후에 나는 십 분쯤 시간을 끌다가 도일의 방을 찾아갔다. 그 방은 안방과 마루를 사이에 두고 마주 있는 방인데 이를테면 이 집에서 두번째로 좋은 방이었다. 그만큼 도일의 양친이 아들을 소중하게 다루고 있다는 중거였다. 막상 도일의 방에 들어간 나는 그들 양친의 아들에 대한 정성에 더욱 놀랐다.
내가 방에 들어 갔을 때 도일은 책상 앞의 의자에 앉아 기타를 치고 있었다. 녀석의 기타 솜씨는 그저 그런 정도였지만 그가 들고 있는 기타는 아주 값 나가는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도일은 기타를 벽에 걸어놓고 방바닥에 내려앉았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제때에 와주셨군요.”
“어디 나갈 생각이었나?”
“아뇨, 문간방에 있는 사람이 자꾸 자기 방에 와달라고 아까부터 성화예요. 은행에 나가는데 지난달에 들어왔죠.”
“와달라면 가면 되지 않나?”
“그런 초대는 괴로와요. 단순한 호기심, 그런 거 있잖아요.”
도일은 정말 귀찮다는 표정을지었다.
“야아, 이 방은 정말 호화판인데. 눈이 부시구나.”
내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방은 넓고 깨끗했다. 책상과 서가 등이 모두 상급품이고 한쪽 벽을 모두 점령한 책장에는 동서고금의 양서들이 잔뜩 꽂혀 있었다. 그중에는 물론 소설책도 많이 있었고 시집도 있었다. 나는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녀석이 내 방에 들어왔을 때 나의 빈약한 서가를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생각했을까?
책상 옆자리에는 오디오 세트가 있었는데 그것도 단순한 장난감의 수준은 넘는 물건이었다. 무엇보다 내 눈을 끈 건 커다란 옷장이었다. 나는 하숙방을 전전하면서도 옷장이란 걸 가져본 경험이 없다. 그런데 녀석은 커다란 옷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저 옷장에는 계절마다 바꿔 입을 수 있는 많은 종류의 옷들이 들어 있을 것이다.
“정말 부럽군.’’
내가 다시 말했다.
“그러실 줄 알았죠. 모두 부모님들 덕분이죠. 뭐. 내가 필요하다는 건 뭐든 마련해 주시려고 해요. 그런데 하나 말씀드릴 게 있어요. 이 방에는 부모님을 빼놓곤 아저씨가 처음 들어오신 겁니다. 아시겠어요?’’
도일은 자기 말이 우스운지 빙그레 웃었다.
“그래? 정말 영광이로군. 그런데 난 네게 줄 게 없으니 어떡하지?”
“그냥 친구가 되어 주신 걸로 충분해요.”
책상 위의 액자로 문득 내 사선이 향했다. 그건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인데 놓여 있는 위치로 봐서 매우 소중한 사진 같았다,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일어서서 책상으로 다가갔다. 사진은 오래된 사진이었다. 도일이 가운데 서있고 김씨 내외가 양쪽에 서 있었는데 도일은 겨우 다섯 살 정도로 어렸다. 물론 김씨 내외도 지금보다는 십년 이상 젊어보였다. 도일은 꼬마 신사복을 말쑥하게 입고 있었고 나비넥타이도 매고 있었다. 그때도 역시 녀석은 인형처럼 예쁜 얼굴이었다.
“몇 살 때였지?”
“여섯 살. 내가 유치원에 들어간 날이었어요.”
김씨가 도일의 아버지가 된 건 내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그 사진을 보는 동안 김씨 내외 가운데 한쪽이 도일과 혈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다시 머리를 들었다. 그 사진의 정겨운 풍경이나 세 사람의 얼굴 표정이 그런 상상을 강하게 심어 주었다. 그만큼 인물들의 표정이 자연스럽고 의젓했다. 나는 사진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다시 방바닥에 앉았다. 그때 도일이 뜻밖의 말을 내게 던졌다.
“아저씨는 왜 내게 묻지 않으세요? 가령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에는 어디 있었느냐? 이런 것 말예요. 또 있죠. 아버지 쪽이냐? 어머니 쪽이냐? 이런게 궁금하지 않으세요?”
“내가 그런걸 묻길 원하니?”
“그건 제 사정이구요.”
나는 잠시 도일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특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나와 같은 인간으로 생각해. 그렇지 않으면 친구가 될 수 없지. 너도 그걸 원하고 있지?”
“물론 그렇죠. 그렇지만 사람들은 나를 마치 옷가게의 마네킨 정도로 생각하거든요. 생각도 없고 고민도 없는 인간 말예요. 나 자신은 그런 데 무관심하려고 애쓰지만 이따금 그런 시선을 느낄 때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요.”
“그건 잘못된 생각에서 나온 거니까 신경 쓸 가치가 없는 문제야. 이 지구상에는 수백 수천의 다른 종족이 있어. 인간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구. 같은 종족도 성격과 용모가 제각각 다르지. 과테말라나 필리핀은 국민의 태반이 혼혈족이야. 그걸 보면 나같은 사람도 혼혈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는 없을 거야. 수천 년전,혹은 수백 년 전에 그런 일이 없었다고 누가 장담하겠니? 결국 너는 혼자고 다수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일 뿐 그밖에는 전혀 문제될 게 없다구. 나나 너나 모두 이 지구상의 한 인간일 뿐이야.”
“그렇게 간단하다면 좋겠는데. 사실 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됐어. 네 생각은 모두 옳다.”
“아저씨는 진정한 내 친구니까 내가 자신의 얘기를 해도 괜찮겠죠. 사실 난 자신의 이력을 부끄럽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 뿐이죠. 이건 나도 최근에야 아버님으로부터 들 어서 알게 된 사실이에요. 그 이전까지는 지금 부모님께서 나를 낳아 주신 걸로만 알고 있었죠.
아버님은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그제서야 진실을 말씀해 주셨어요. 지금 부모님은 나를 낳지 않으셨어요. 나는 다섯 살 때 고아원에서 지금의 부모를 따라 나왔었죠. 정작 나를 낳은 양친에 관해선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답니다. 다만 아버지 쪽이 백인이고 어머니 쪽이 황색인이라는 것밖에는 아는 게 없어요.
그들이 뭣 때문에 나를 낳아 놓고 달아났는지 그것도 모르고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라요. 아마 죽었을 가능성도 많다고 봐야겠죠. 지금 아버님은 당시 미군부대에서 세탁부로 일을 하고 계셨나봐요. 아시다시피 어머니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으니까 나를 데려다 기른 거죠.”
“그렇지만 네 아버지는 어느 아버지보다 너를 사랑하고 계시지? 어머니도 그렇고.”
“정말이에요. 그래서 지금도 어떤 때는 나 자신이 착각할 때가 있어요. 그러다가 깜짝 놀라죠. 그런 때가 제일 견디기 힘들기도 하지만, 착각에서 깨어날 때 말입니다. 난 아버지를 존경하고 있어요. 어렸을 때 기억을 더듬어봐도 아버지께서 내게 잘못하신 일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정말 완벽하신 분이지요. 아마 세상에서 우리 아버지만큼 훌륭한 사람은 몇 사람 안 될 거예요. 그렇긴 하지만….”
“그렇지만 뭐니?”
“아, 내가 이런 얘기 하면 누구나 나를 욕할 거예요. 나쁜 놈이라구 하겠죠. 관두겠어요.”
“뭔데 그러니? 하긴 싫으면 그만두는 게 좋아.”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미 제 이력은 아저씨가 다 알고 있는 걸요.”
도일은 벌떡 일어서더니 벽에 걸린 기타를 내려 들고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내 눈에는 녀석이 어떤 상념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갑자기 기타를 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이후 나는 도일의 방을 자주 드나들었다. 어떤 날은 녀석의 방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낼 때도 있었다. 도일도 가끔 내 방에 왔는데 내가 다섯 번 그의 방에 가면 그가 한번쯤 오는 꼴이었다. 우리는 그린하우스에 함께 가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사먹거나 남비우동을 먹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다지 자주 그곳에 함께 가지는 않았다.
가능하면 그 가게에 손님이 붐비지 않는 저녁때나 일요일 오전 같은 때만 그곳에 갔던 것이다. 사람이 많을 때 우리가 그곳에 앉아 있었던 때도 있었다. 그런 때는 나는 정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정작 도일 자신은 태연하게 앉아서 여전히 큰소리로 우스꽝스런 이야기를 계속하곤 했다. 녀석은 말솜씨가 제법이어서 그가 우스개소리를 할 때는 나도 이따금 소리내어 웃기도 했다.
“아저씨하고 함께 있을 때는 왠지 마음이 든든해요. 혼자라면 아마 그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떠들 배짱이 없었을 거예요.”
그린하우스에서 나왔을 때 언젠가 도일이 한 말이다. 단순한 인사치레인지 진심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여전히 도일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녀석은 아직도 뭔가 내게 비밀이 많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 도일이 조금이라도 거짓으로 나를 대했다는 건 아니다.
그는 정직했고 거짓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과장된 말투를 쓴다든가 실없는 소리 따위도 지껄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을 지내고 아침에 녀석을 새로 만날 때마다 도일에겐 어딘지 낯선 구석이 있었다. 나는 그 낯선 느낌이 그의 피부빛 때문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나와 접촉이 그렇게 잦았고 어느 의미에선 거의 함께 살다시피 하면서도 도일의 화제는 늘 일정한 범위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농담도 잘하고 학교에서 일어났던 우스꽝스런 일이라든가 그가 읽은 책, 흑은 구경한 영화에 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극도로 말하기를 꺼리거나 화제에 인색했다.
내가 도일의 그런 점을 깨닫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왜냐하면 녀석이 늘 화제를 앞장서서 엉뚱한 방향으로 교묘하게 이끌어갔기 때문에 미처 그걸 깨달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도일은 대학의 경영학과나 경제학과에 진학해서 장차 경제분야에 종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테니스를 새로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테니스 라켓은 이미 구입해서 그의 방 한쪽 벽에 걸어 두고 있었다.
아마 도일이 자신의 장래나 희망에 관해 말한 건 고작 이 정도일 것이다. 보통 그 또래의 다른 학생이라면 으레 이성에 관한 홍미, 혹은 신앙에 관한 다소의 갈등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정상적 가족관계에서도 부모나 형제에 관한 갈등은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절대의 사랑은 가능한 것인가? 하나님은 교회에 나가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저절로 화제로 삼게 마련이다.
도일은 이성문제 같은 건 입에 담지도 않았고 신앙문제나 가족간의 문제도 녀석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아무래도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이 녀석에겐 대체 고민이란 전혀 없는 것인가? 녀석은 오직 나날이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것일까? 어떤 때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도 있었다.
우리 앞에 그 아가씨가 나타난 건 따라서 내겐 아주 놀라운 일이었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도일과 나는 한가한 낮시간에 그린하우스에 앉아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그때 고등학교 학생 또래의 사내 아이들과 아가씨 하나가 가게로 들어와서 함께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들어오면서부터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그들의 좌석이 우리와 꽤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토록 떠들어대지만 않았던들 우리는 좀더 오래 그곳에 즐겁게 앉아 있었을 것이다. 녀석들은 마치 사 람들의 시선이 자기들에게 모이기를 열망하는 것처럼 계속 이상야릇한 억양으로 떠들어댔다.
“뭐야, 이건. 내가 너희들을 먹여살려야 하니?”
“새끼, 숙녀 앞에서 좀 점잖게 사면 안돼? 형님들 체면도 살려 주고 말야.”
뒤이어 아주 밝고 낭랑한 웃음소리가 가게 안을 진동했다. 옆에 있는 아가씨의 웃음소리였다. 그 웃음소리에 이끌려 나는 그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그녀의 눈빛과 머리칼이 갈색이고 피부빛이 하얗기 때문이었다. 그녀 역시 백색혼혈아였고 매우 매력적인 용모를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용모에 비해 그녀가 너무 경솔하고 우스꽝스럽게 처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느낌을 받은 것도 그녀가 그만큼 아름다왔기 때문이었다. 이런 때는 연민과 함께 공연한 불쾌감까지 느끼게 마련이다. 아름다움이란 제값에 어울리는 자리에 있어야 하고 어울리는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세상의 보석들이 그렇듯이.
다행히 도일은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 쪽을 아직 못 보고 있었다. 그러나 녀석들의 해괴한 말 소리와 아가씨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되풀이되자, 이윽고 도일이 뒤를 힐끗 돌아다봤다. 그 순간 도일의 얼굴이 빨개졌다. 녀석은 곧 눈길을 이쪽으로 돌리고 짐짓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빨개진 얻굴의 홍조는 지울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도일은 어딘지 긴장하는 기색이 역연했다.
“아는 아이야?”
나는 가볍게 물었다.
“아뇨, 몰라요.”
도일의 대답이 약간 퉁명스럽게 들렸다. 그는 입을 굳게 닫고 굳어진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나가자고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길 기다렸다는 듯 도일이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빨리 걸어나갔다. 그때 그 아가씨가 도일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가 갑자기 긴장된 표정으로 움츠리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밖으로 나와서 도일과 나는 집 쪽으로 걸었는데 그때 도일이 말했다.
“저런 계집아이를 두고 바로 마네킨이라고 하지요. 바보 같은 계집애 . 사내애 들이 호기심으로 꼬여드니까 마치 자기가 공주가 된 기분인 모양이지.”
그는 화가 몹시 나 있었고 한심하다는 듯 몇 번이나 혀를 찼다. 그런데 우리가 불과 몇 발자국 옮기지 않았을 때였다. 뒤에서 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고,
“얘, 얘,거기 좀 서 있어.”
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다보니 바로 그 아가씨였다. 그녀는 가게에서 키들거릴 때와는 딴판으로 긴장으로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돌아선 도일은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얼굴로 아가씨를 노려보았다.
“창피라는 걸 넌 모르니? 왜 길 가는 사람을 부르고 야단이야.”
나는 도일이 그런 거친 말투를 쓰는 걸 처음 들었다. 녀석이 아가씨를 모른다고 내게 말한 건 거짓이었다. 녀석이 내게 거짓을 말했다는 것도 아마 이게 처음일 것이다. 우리 앞에 와서 선 아가씨의 얼굴이 긴장에서 약간 풀리고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녀가 도일에게 한. 싹싹하게 말했다.
“너 편지 받아봤지? 세 번씩이나 보냈는데 어떻게 된 거야?”
“편지 따원 받은 일 없어. 아버지께 내게 오는 것 중 불필요한 건 버리고 달라고 말했어. 알겠니? 쓸데없는 짓 그만두라구.”
“그럼 네 아빠가 그걸 갖고 있단 말이구나. 아이 참, 이걸 어떡하지?”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내가 그곳에 없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나는 도일에게 먼저 가겠다고 말하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도일에게 자기가 보낸 편지의 수신을 확인하는 그 아가씨의 모습이 이번에는 다른 의미에서 내게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그 편지에서 그녀는 도일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었을까? 그게 몹시 궁금했다. 가게에서 사내녀석들 속에 섞여 앉아 다소 천박하게 호들갑을 떨 때와 도일에게 달려온 그 아가씨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금방 그렇게 변모시키는 것일까? 그 점도 궁금한 일 이었다.
예상보다 도일은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가 분명 그녀에게 몇마디 욕지거리를 해주고 도망쳐 왔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얼굴이었다.
“좀더 잘 대해 주지 그러니? 그쪽은 널 잔뜩 좋아하고 있는 것 같던데.”
도일은 순간 사납게 나를 흘겨봤다.
“정신없이 사내들 속에서 놀다가 자기 혼자란 걸 문득 깨달으면 덮어놓고 내게 달려오는 걸요. 좋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죠. 난 그 계집애가 가까이 오면 소름이 끼친다구요.”
“예쁘던데. 굉장한 미인이야.”
“정신없는 계집애죠. 차라리 못생겼다면 그애를 위해 좋았을 텐데.”
“어떻게 알게 되었지?”
“양연회에 갔을 때 만났죠. 오래 됐어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만난 일도 없고 만날 생각도 없어요. 잘하면 곧 미국에 가게 될 거예요. 거기 양부모가 초청했다니까.”
“양연회란 양부모를 찾아주는 곳이지.”
“뭐, 그런 곳이죠. 하지만 난 최근에는 가본 일도 없어요.”
녀석은 양연희 이야기를 몹시 꺼리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는 더 묻지는 않았지만 그곳에서 도일이 또 하나의 양부모를 만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났다. 도일도 그 얘기가 나올까봐 말머리를 돌리는지도 몰랐다.
도일의 입에서 양연회 얘기가 나온 건 나를 얼마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얼마간 나를 실망시킨 것도 사실이었다. 녀석도 그걸 눈 치채고 재빨리 자기는 최근에는 그곳에 가본 일도 없다는 말을 강조하긴 했다.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도일이 그동안 내 앞에서 위선적인 행동울 해왔다는 혐의는 지울 수 없었다.
양연회라는 곳은 말 그대로 미국의 양부모와 결연을 추진하는 단체이다. 그런 곳에 한때나마 찾아갔다는 건 지금까지 도일이 보여온 행동과는 몹시 대치되는 일이다. 그가 원하는 건 뭐든 구입해주는 아버지,어릴 적의 기억을 더듬어봐도 아버지로서 조그만 과실도 저지르지 않았던 아버지, 그래서 도일도 세상에서 누구보다 존경하고 있다는 그런 아버지를 두고 또 다른 아버지를 구할 이유가 있었을까?
김씨가 자상하고 완벽한 아버지란 건 도일이 내게 기회있을 때마다 강조했던 사실이다. 녀석은 은근히 자신이 누구보다 원만한 가정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는 걸 뽐내 왔었다. 녀석의 그런 점이 나는 또 마음에 들었다. 감사할 줄 안다는 것, 그리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보다 더 좋은 미덕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도일은 양연회라는 곳에 왜 갔을까? 도일이 위선적인 행동을 했다고 말하는 데는 또 다른이유가 있었다. 도일은 평소에 미국을 싫어했다. 그렇다고 미국인과 미국에 대해 노골적인 저주의 말이나 혐오의 말을 퍼부었다는 건 아니다. 녀석은 나이에 비해 감정의 절제를 잘하는 편이어서 그런 식의 서툰 짓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은 미국이란 나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고 그쪽에다 아무런 희망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걸의식적으로 나타내려고 애썼다. 그는 누가 미국을 가고 싶다고 말하면 대뜸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 이따금 거리에서 미국인과 마주쳤을 때 도일은 한번 힐끗 쳐다볼 뿐, 두번 다시 그쪽으로 시선을 보내지는 않았다. 그런 때의 녀석의 표정은 싸늘하고 엄숙하기까지 했다.
마치 미국인과 녀석은 잠시나마 같은 길을 걷거나 같은 실내에 함께 앉아 있을 수 없는, 그런 숙명적인 타인의 관계 같다는 느낌을 줄 정도였다. 도일은 영어를 씩 잘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는 발 음도 무척 좋았고 어휘도 굉장히 풍부했다. 학과 성적 중에서 영어가 제일 높다는 걸 그 자신이 말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 앞에서 허튼소리라도 영어를 입에 올리는 걸 나는 들은 일이 없었다. 언젠가 나는 그의 뛰어난 영어 실력을 염두에 두고 도일에게 말했다.
“대학을 졸업하면 미국에 가서 더 공부할 생각이 있겠지?”
도일은 대뜸 코웃음쳤다.
“미쳤어요? 그런 돈 있으면 여기서도 책을 갖다가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는데 뒷 땜에 그런 델 갑니까?”
“그래도 누구나 미국에 가고 싶어하지 않아?”
“난 안 그래요. 흥미없어요. 가고 싶은 사람들 실컷 가라지요.”
그는 여기서도 공부는 얼마든지 할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 자기는 어학만은 철저히 공부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녀석의 말이 전혀 엉터리는 아니라고 해도 다소 무려가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 무리한 논법에는 녀석이 어떻게든 미국이란 나라를 회피하려고 하는 흔적이 엿보이는 것이다. 마치 녀석은 앞으로의 자기 삶의 과정에 그 나라가 관련되는 걸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라도 한 듯 보였다. 그랬던 도일이 비록 오래 전 일이라고 하지만 양연회에 찾아갔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울이 지나가면서 도일은 학업 때문에 점점 더 바빠졌다. 학교 수업을 끝낸 다음에도 그는 다시 학원에 나가 공부했다. 어떤 때는 종일 집에서 녀석을 못 만날 때도 있었다. 그가 없을 때도 나는 그의 방에 이따금 들어가서 라디오를 듣거나 전축을 돌리곤 했는데 그건 물론 방주인이 그걸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나는 깝깜한 방에 앉아 있기가 지루해서 라디오나 들을까 하고 도일의 방을 찾아 갔다. 그 방은 이 집 가정부에 의해 언제나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다 - 나는 주인이 없는 빈 방에 들어가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의 목록을 하나하나 읽어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생활의 발견>이란 책에 눈길이 갔다. 그건 임어당 선생의 수상록이었다. 나는 무심코 그 책을 서가에서 뽑아들었다. 그때 사진 한 장이 책갈피 속에서 방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뭘까? 가벼운 호기심에서 나는 그걸 주워들었다. 그건 무척 낡은 흑백사진이었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와 역시 그 또래의 계집아이 둘이서 서로 손을 잡고 나란히 서 있었다.
아이들은 영양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먼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배경에 ‘천혜원’이라고 쓰인 입갑판이 보였는데 그들이 서 있는 자리가 어느 고아원의 입구쯤 되는 것 같았다. 두 아이 모두 옷차림이 남루했는데 사내아이보다 계집애 쪽이 더 측은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두 아이는 마치 떨어질 수 없는 오누이처럼 서로 손을 굳게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 었다. 나는 사진 속의 사내아이가 누군가를 금방 알아냈다. 비쩍 마른 얼굴로 슬프게 허공을 보고 있는 그 아이가 바로 도일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누가 이 비참하게 일그러진 얼굴의 꼬마애를 지금의 도일이라고 쉽게 믿겠는가? 그건 너무나 엄청난 변화였다.
그런데 이 계집아이는 누굴까? 나는 어찐지 그녀가 낯이 익었다. 결국 나는 알아내고 말았다. 얼굴의 몇 가지 특징을 유심히 관찰하자,내가 그린하우스에서 보았던 그 아가씨의 화사한 얼굴이 쉽게 떠올랐다. 이름이 순영이라고 했던가?
이 사진을 찍은 건 아마 도일아 김씨를 따라 고아원을 나오기 직 전일 것이다. 어쩌면 그곳을 나오면서, 그러니까 그녀와의 작별을 기념삼아 이 사진을 찍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도일은 양연회에 갔다가 우연히 그녀를 만났을 뿐이라고 내게 거짓말을 했었다.
순영이는 도일이 떠나고 얼마 뒤에 그녀 역시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고아원에서 나온다. 그녀는 그날 이후 줄곧 도일의 소재를 찾았고 이윽고는 찾아낸다. 그녀에겐 도일이 연인이자 오빠이며 유일한 혈육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은 혈연관계 같은 건 있을 턱이 없지만 순영으로서는 도일이 말고 혈육의 감정을 느낄 대상이 따로 없다. 그래서 그녀는 한사코 도일에게 가까와지려고 애쓴다. 사실 두 사람은 얼굴이 많이 닮기도 했다.
그러나 도일은 순영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녀와 공유했던 세계, 거기서 그는 이미 멀리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혼혈아가 아닌 것이다.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자신은 얼마나 자기를 채찍질했던가? 순영을 받아들인다는 건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혼혈아의 세계로 말이다.
이건 내가 순영과 도일의 관계를 두고 한번 멋대로 상상해본 줄 거리다. 내 생각은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도일로부터 직접 고백을 듣지 못하는 한 그밖에 달리 생각할 길은 없었다.
나는 사진에 관해서는 도일에게 침묵을 지켰다. 다만 마음 속으로 그 가엾은 아가씨에게 도일이 좀더 따뜻하게 대할 날이 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진으로 해서 그날의 그 아가씨의 맹랑한 행동을 얼마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도일이 변한다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도일은 냉정한 녀석이며 자기가 옳다고 믿는 건 절대로 양보할 줄 모르는 녀석이었다. 그처럼 지독히도 냉정한 녀석이지만 한 번 내게 거의 자제력을 잃고 무례할 정도로 화를 낸 일이 있었다.
그때는 정말 녀석의 표정이 어찌나 불 같던지 나도 더럭 겁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그때 도일이 돌아왔다는 걸 알고 그의 방에 찾아갔다. 토요일 오후여서 녀석에게도 모처럼 시간이 난 듯했다. 그런데 방에 있는 줄 알았던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때 아버지가 갑자기 불러내는 바람에 안방으로 건너가 있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서 녀석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책상 위에 쓰다 만 편지 한 장이 뒹굴고 있었 다. 그건 영문편지였는데 그걸 쓰다가 바쁘게 뛰어나갔는지 아직 채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편지의 서두는 영문으로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양친께서는 그동안 안녕하신지요? 저는 양친의 도움으로 이곳 한국에서 잘 생활하고 있으며 매일매일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답니다. 메어리 누이동생도 공부 잘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난번 보내주신 돈과 사진은 잘 받았어요.
내가 여기까지 읽어 내려갔을 때였다. 뒤에서 도일이 다가와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비굴하게 뭘 훔쳐보는 겁니까?”
나는 질겁하고 책상 앞에서 물러났다. 도일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상기된 채 책상 위의 편지와 내 얼굴을 번갈아 노려봤다. 나는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미안하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만.”
“관두세요, 교양인이라고 자처하면서 남의 사신을 함부로 봐도 되는 거예요?”
도일은 의자에 가서 등을 돌리고 털썩 주저앉았다. 오랫동안 녀석은 말이 없었다. 그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은 듯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도일은 갑자기 돌아앉더니 그 편지를 내게 불쑥 내밀었다.
“자,보십시오. 이미 다 알고 계시겠지만 끝까지 봐두시는 게 좋겠죠.”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아니, 그게 뭔데 그러니? 그렇게까지 큰 비밀이 거기 있는건가?”
“하긴 아무것도 아니죠. 비밀도 아무것도 아니죠.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 이 말을 쓸 때마다 난 목구멍에서 뭐가 넘어오는 걸 참는다구요. 아버지와 어머니께, 제기랄, 난 대체 아버지가 몇이나 되고 어머니가 몇이나 되는 겁니까? 이 세상 어른들이 모두 내겐 아버지가 될 수도 있는 문제라구요. 난 고아니까 말이죠.”
“왜 그런 이상한 말을 하는 거지? 도일이답지 않게. 그런 편지 안 쓰면 되는 거 아냐?”
“안 쓴다구요? 이 편지로 난 매달 오백 불씩이나 벌어서 부모님께 바치고 있는 걸요. 만약 내가 이 편지를 안 쓴다고 가정하면 먹고 입고 학교 다니고 하는 데 누가 돈을 대줍니까?”
“아니,그거야 네 아버님께서.”
“아버님께서 이 편지를 쓰라고 하니까 쓰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뒤통수도 못 본 미국인에게 미쳤다고 사랑하는 양친 어쩌고 하겠어요? 이 편지는 사실 어제까지 양연회에 가져다줘야 하는 건데 난 써지지가 않아 이러고 있는 거예요. 방금 아버지에게 불려가서 이것 때문에 야단맞았어요.”
“내가 괜히 왔나보다. 나갈 테니 편지를 쓰렴.”
“아니에요,그냥 계세요. 오늘 아무래도 이걸 쓰고 싶지 않은 걸요. 이 집에서 쫓겨나도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리고 그동안 아저씨를 속인 것 정말 미안해요. 난 아주 나쁜 놈이에요.”
도일이 방바닥에 내려와서 한쪽 벽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더니 갑자기 얼굴을 무를 사이에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녀석은 소리를 죽여 어깨를 들먹이며 울고 있었다. 그 순간 녀석이 지금껏 쌓아왔던 그토록 견고해 보이던 행복의 성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내 눈에는 그 방에 있는 커다란 옷장이며 번쩍거리는 오디오 세트며 벽에 걸린 테니스 라켓 따위가 모두 한낱 무대를 꾸미는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한 가지 위안은 있었다. 도일이 눈물을 보인 순간 나는 이제야 우리가 흉허물 없는 친구가 되었다는 걸 알았다. 그건 이제 우리 사이에 더이상 거짓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