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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어떤 엄격성을 갖고 따지자면 송영의 작품은 리얼리즘의 분위기에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편이다. 사실상 극도로 정밀한 의도와 계획을 갖고 설계한 가상 공간과 상황이라는 느낌을 줄 때가 많다. 이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마치 연극무대를 마주하는 것 같다는 기분에 자주 젖어드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의도와 계획이 거의 드러내지 않고, 그냥 갑자기 들이닥친 상황 속에서 주인공의 느낌을 거의 일차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만큼 이 작품이 묘사하는 상황이 어떤 압도적인 무게와 절박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상 생활 속에 예고없이 끼어드는 어떤 의외성을 가졌다는 것, 작가의 주관적 내면이 여전히 그 상황을 낯설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작가의 대표작인 <선생과 황태자>의 전주곡(prelude)의 성격을 갖는 작품이기도 하다.

 

 


 

수업이 끝나자, 학생들이 복도로 우루루 몰려나갔다. 중학교 일학년 아이들은 휴식시간만 되면 마치 고삐에서 풀려난 놈들처럼 유달리 소란을 피워댔다. 녀석들이 거의 자리를 떠난 다음에야 기요는 책과 백묵통을 들고 천천히 교단에서 내려왔다.

 

그는 방금 수업시간중에 많이 떠들었고 유독 많은 판서를 했기 때문에 목이 칼칼하게 메말랐고 바른쪽 팔이 찌뿌듯이 저려왔다. 그렇지만 교무실로 들어가서 사환아이에게서 한 잔의 보리차를 얻어마시고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나면 이까짓 증세는 곧 사라질 것이다. 그는 다음 시간에도 수업이 있었는데 역시 유독 많이 떠들 수밖에 없는 일학년 학급의 수업이었다.

 

다음 시간에 수업이 있는 사람에게는 오분의 휴식시간이 아주 짧게 느껴졌다. 기요는 부리나케 교무실로 돌아와 먼저 사환아이에게서 보리차를 얻어마신 다음에 곧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는 다음 수업의 교재 준비를 제쳐놓고 우선 책상의 서랍 속에서 담배와 성냥을 꺼냈다. 교재를 간추리는 일은 천천히 담배를 피워가면서 하여도 늦지 않은 것이다.

 

기요는 늘 그렇게 해왔다. 그가 담배를 입에 물고 마악 성냥을 켜려고 했을 때 두 명의 남자가 교무실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앞에 선 사람은 서른댓 살쯤 되어보였고 뒤에 따라오는 사람은 스물댓 살쯤 되어보였다. 성냥을 켜려다 말고 기요는 낯이 선 그 두 사람을 넌지시 지켜보았다. 이때 앞에 선 사람의 눈길과 기요의 눈길이 잠깐 서로 마주쳤다.

 

그 사람은 손님치고는 다소 무례할 만큼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기요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기요는 별로 개의치 않고 한동안 그 사람을 마주 쳐다보았다. 교무실에는 각종의 직업에 종사하는 부형들의 낯선 얼굴들이 하루에도 몇차례나 나타난다. 따라서 교사들은 이런 풍경에는 비교적 익숙했다.

 

어느 분이 김기요 선생입니까?

 

앞에 선 사람이 여전히 기요의 얼굴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마치 자기 아이의 담임선생을 찾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제가 김입니다.

 

기요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얼른 책상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흔히 그렇게 해왔듯이 선 자리에서 허리를 약간 굽히면서 매우 부드러운 어조로 그사람에게 물었다.

 

실례지만 누구의 부형 되십니까?

 

앞에 선 사람은 기요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다시 기요에게 물어왔다.

 

당신이 김기요입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그렇다면 이쪽으로 좀 나와주십시오.

 

기요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교무실 바깥을 손으로 가리키며 재빨리 말했다. 기요는 무심코 그 사람의 말에 따랐다. 교무실로 처음 찾아온 부형들 중에는 성격이 몹시 괴스런 사람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부하를 다루듯시 자기 아이의 선생을 다루었고 어떤 사람은 질이 나쁜 세리 를 바라보듯이 아주 불쾌한 표정으로 선생을 보았다. 그들이 복도로 나왔을 때 복도에는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아이들이 한참 붐비고 있었다. 세 사람은 한동안 거기에 멈춰서서 머뭇거렸다.

 

여기서 제일 조용한 방이 어딥니까?

 

역시 나이가 많은 남자가 기요를 돌아다보며 물었다.

 

교장실이지요.

 

기요는 무심코 대답했다.

 

마침 잘되었군. 우리는 그분도 만나뵈어야 하니까.

 

 


 

 

그 남자는 교장실로 자기들을 안내하라는 듯이 기요를 쳐다보았다. 기요는 잠깐 망설였으나 이내 그들을 교장실로 데리고 갔다. 기요는 그 남자가 하필이면 <가장 조용한 방>을 찾는 것이 얼핏 의아스러웠지만 왜 그런 곳을 찾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교장실에는 마침 방의 임자가 잠깐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기요는 우선 그들에게 소파의 자리를 권했다.

 

괜찮아요. 우리는.

 

나이가 많은 남자가 손을 휘저으며 사양했고 한편으로는 안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조그만 수첩을 꺼냈다. 그는 수첩을 펼치며 기요의 코밑으로 바짝 내어밀면서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왔습니다.

 

기요는 그 남자가 내미는 수첩을 얼핏 보았으나 졸지간에 눈이 어찔어찔해서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내지 못했다. 젊은 남자는 자기 선임자의 뒤켠에 우두커니 서서 기요의 일거일동을 자세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알겠소?

 

나이가 많은 남자가 수첩을 거둬들이면서 넌지시 물었다. 기요는 그의 수첩을 분명하게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동안 꼿꼿하게 서서 창 바깥을 바라보았다.

 

교장실 창 바깥에는 조그만 화단이 있었고 그 화단에는 지금 초여름 오후의 뜨거운 햇살이 한참 내려쬐고 있었다. 작은 완상목들과 꽃나무들은 요즈음 자라는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이맘때에는 누구든지 자기의 일을 새롭게 시작하려는 의욕을 느끼는 것이라고 기요는 문득 생각했다. 벌써 수업이 시작되었는지 교사 의 주위가 조용했다. 그는 얼떨결에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수업이 시작되었다면 서둘러서 담당한 교실로 돌아가야지. 버릇처럼 이런 조바심이 고개를 쳐들었지만 기요는 서 있는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김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

 

사환아이가 서무실로 들어와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어디로 가셨지?

 

대답소리가 없자 답답한 듯 이렇게 혼자서 중얼거렸다.

 

제가 나가서 말해주고 오겠어요.

 

선임자를 향해 이렇게 말하면서 기요가 마악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뒤에 서 있던 젊은 남자가 갑자기 기요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그의 선임자보다 한층 긴장된 표정으로 기요를 쏘아보며 몹시 거칠게 말했다.

 

지금부터 당신은 우리 허락없이 꼼짝도 하면 안된다구.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라도 수업에 들여보내야 할 게 아닙니까?

 

기요는 억지로 웃어보이며 나이가 많은 남자에게 말했다. 그 남자는 기요의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않고 자기 동료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역시 이 기관의 책임자에게 얘기는 하고 가야겠지?

 

교장이 지금 없는데 어떻게 기다리죠? 상사님, 까짓거 그냥 갑시다요. 아냐. 얘기는 해두는 게 뒤에 탈이 없다구. 교장선생은 어디가셨수? 상사라고 불린 남자가 기요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모르겠는데요. 그러나 바쁘시다면 서무과에 얘길 해도 괜찮겠지요. 그럼 내가 서무과에 갔다오겠으니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상사는 젊은이에게 당부하고 교장실과 이웃하여 있는 서무실로 갔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두 사람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묵묵히 서 있었다. 이분쯤 지난 뒤에야 상사가 서무계 서기와 함께 다시 나타났다. 서무계 서기는 매우 마땅치 않은 듯한 표정으로 기요에게 대뜸 물었다.

 

 


 

아니, 이분들이 왜 김 선생님을 데리고 가는 겁니까?

 

이분이 방금 말씀하지 않았는가요?

 

상사를 눈으로 가리키며 기요가 말했다.

 

이분 이야기는 데리고 가야겠다, 단지 그말뿐인데요.

 

그럼 선생이 간단히 말해주시오.

 

상사가 기요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기요는 그러나 아무런 얘기도 할 수가 없다. 그는 갑자기 벙어리가 되어버린 사람처럼 멍청한 표정으로 늙은 서무계 서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기요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배어났다. 그는 서무계 서기를 속일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으나 장소가 장소이고 그리고 이 늙은 서기가 이 상태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돌연하게 그 얘기를 꺼내기가 어려웠다.

 

하여튼 제가 갔다와서 말씀드리죠.

 

기요가 간신히 이렇게 말하자, 눈치가 빠른 서기는 금방 기요의 심중을 알아차렸다.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제가 교장선생께도 말씀드리지요.

 

서기는 일에 쫓기고 있다는 듯 곧 서무실로 돌아가버렸다.

 

상사님, 이제 갑시다.

 

젊은 남자가 뒷호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내면서 서둘러댔다. 그가 들고 있는 수갑은 유리창을 통해 비껴드는 햇살에 비치어 허옇게 번쩍거렸다. 그 강철의 수갑을 쳐다보면서 기요가 떠듬떠듬 말했다.

 

절대로 도주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냥 이대로 가십시다.

 

상사가 화가 난 얼굴로 기요를 쏘아보았다.

 

누구 맘대로 그렇게 하겠다는 거야? 오년이나 도주하고 다닌 사람 말에 우리가 속을 줄 알고?

 

그는 큰웃음을 치면서 빨리 수갑을 채우라고 눈짓했다.

 

우리가 이 정도로 대우하는 것을 고맙게 아쇼, 응. 우리는 선생에게 신사적으로 하고 있는 거요.

 

젊은이가 기요의 앞으로 다가와서 수갑을 내밀며 말했다. 기요는 순식간에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이들 앞에서 내 꼴이 뭐가 됩니까? 학교를 벗어난 다음에 채워주시오.

 

기요는 두 남자를 바라보며 부르짖듯이 말했다.

 

흥, 체면은 알고 있는 친구로구먼. 그러니까 제자들 앞에서는 곤란하다 이말씀인가.

 

상사가 몹시 당황하고 있는 기요를 쳐다보며 빈정거렸다.

 

우리가 특별히 당신에게 가혹하게 구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누구라도 마찬가지요. 절대 당신 편할 대로 해줄 수 없어요.

 

젊은이가 수갑을 쳐들어보이며 완고하게 말했다.

 

절대 도주하지 않을 거요. 나는 전부터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구요. 오년 동안 도주하고 다녔다고 말하지만, 나는 한번도 스스로 피해본 일은 없어요. 당신들이 나를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지.

 

기요는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면 우리가 당신 사정을 특별히 봐주겠소. 일단 학교를 벗어날 때까지는 수갑을 채우지 않겠소. 그러나 혹 엉뚱한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마쇼.

 

 


 

 

상사가 이렇게 말하고 먼저 교장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세 사람이 복도로 나왔을 때 복도에는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긴 복도를 지나서 현관으로 나왔다. 그들이 현관 바깥으로 마악 나오려고 했을 때 뒤에서 수업계 담당교사가 헐떡이며 쫓아나왔다.

 

김 선생, 오후에 두 시간이 더 있는데 어떻게 하시겠소? 금방 돌아오신다면 그대로 두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대책을 세워야 하니까요.

 

오늘은 수업하기 어렵겠는데요.

 

기요는 웃어보이며 수업계 담당교사에게 말했다.

 

졸지간에 손님이 오셨기 때문에 딱하게 되었군요.

 

그러나 한 시간 정도면 돌아오실 수 있지 않겠어요? 무슨 그렇게 긴 얘기가 있습니까?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있는 수업계 담당교사가 옆에 서 있는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

 

하여튼 제가 가급적 빨리 돌아오도록 노력하지요. 그럼 수고 좀 하십시오.

 

기요는 서둘러서 말끝을 맺었다.

 

교문을 빠져나오자, 기요는 한층 흥분이 가라앉았다. 길을 걸을 때는 상사와 젊은이가 기요의 양편에 나란히 서서 걸었다. 그들은 한발자국도 앞서거나 뒤로 처지지 않고 매우 신중하게 기요의 옆에 붙어서 걸어갔다.

 

버스로 갈까요? 상사님.

 

젊은이가 상사에게 물었다.

 

가만있어. 우선 어디서 수갑을 채우고 가야지.

 

상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들은 이미 번잡한 거리로 나와 있었기 때문에 수갑을 채우는 데 마땅한 장소가 얼핏 눈에 뜨이지 않았다.

 

이 근처에 파출소가 있으면 좋겠는데.

 

이 근처에 파출소가 없습니까?

 

여기서 이백 미터쯤 걸어가면 있지요.

 

기요가 행길 저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갑시다, 거기로.

 

상사가 말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여전히 기요의 양쪽에 꼭 붙어서 걸었다. 그들은 이렇게 신중한 동작이 이미 몸에 배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동안 쭈욱 어디에 숨어 있었소?

 

상사가 약간 부드러운 말투로 기요에게 물었다.

 

나는 특별히 내가 숨어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당신들이 나를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지요.

 

하하, 이친구 뱃심이 보기와는 다르구먼. 그러니까 내가 떳떳하게 돌아다녀도 너희들이 감히 나를 찾아내겠냐 이말이군. 이거 보쇼, 우리가 오년 동안 당신을 줄곧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기요는 묵묵히 걷고만 있다가 한참만에 힘없이 말했다.

 

그 기간은 내게도 아주 지루했지요. 언제쯤 이런 때가 올 줄은 알고 있었지요. 이제 그때가 왔으니까 차라리 마음이 편하군요.

 

당신은 왜 군대를 걷어차고 나가버렸소? 더구나 장교 신분을 가졌던 사람이. 군인이 싫어졌소? 싫어졌다면 정당하게 나가는 길도 있었지 않소.

 

그때 상황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죠. 군인이 싫다거나 좋다는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면 정당하게 빠져나올 기회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때 내가 튀어나오게 된 것은, 아니,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관두겠소.

 

그럼 그 이야기는 두었다가 검찰관 앞에 가서 하쇼. 우리는 당신을 데리고 가는 것이 임무이니까.

 

파출소 앞에까지 와서 그들은 멈춰섰다. 상사가 먼저 파출소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갔다. 경관 한 사람이 사무실 입구에 앉아서 무엇인가 끄적이고 있다가 머리를 들고 상사를 쳐다보았다. 상사는 안호주머니에서 조금 전에 기요에게 보여줬던 수첩을 꺼내서 경관에게 살짝 보여주며 뭐라고 간략하게 말했다. 경관은 잘 알겠다는 듯이 곧 머리를 끄덕였다.

 

상사가 뒤를 돌아다보며 파출소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이때 젊은 남자가 갑자기 기요의 한쪽 팔을 붙잡고 파출소 안으로 떠밀고 갔다. 혼자서 파출소를 지키고 있던 경관은 별다른 흥미도 없다는 듯이 매우 덤덤한 눈길로 그들의 거동을 지켜보았다.

 

기요는 얼떨결에 두손을 모아서 앞으로 내밀었는데 젊은 남자가 기요에게 바른쪽 팔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젊은 남자는 뒷호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내더니 한쪽은 기요의 왼쪽 팔에 채우고 한쪽은 자기의 오른쪽 팔에 채웠다. 그때 기요는 자기의 왼쪽 손가락에 아직까지 백묵가루가 허옇게 묻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미처 손을 씻고 나올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훈장은 역시 별수가 없군.

 

 


 

 

백묵가루가 묻어 있는 그 손을 보고 상사가 말했다. 젊은 남자도 기요의 왼쪽 손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 다시 기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기요에게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곧 입을 닫아버렸다. 그들은 파출소에서 나와서 다시 행길을 천천히 걸었다.

 

이제 상사는 기요의 옆에 바짝 붙어서 걸을 필요가 없었다. 상사는 두어 발자국 앞서 걸어갔고 젊은 남자만이 어쩌는 도리 없이 기요와 나란히 걸어갔다. 그남자는 행인들의 시선으로부터 두 사람의 팔목에 채워진 수갑을 감추느라고 기요에게 더욱 가깝게 붙어서 걸었다.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보지 않는다면 그들 두 사람이 사슬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남자라면 이런 경험도 한번쯤 있어야지요.

 

바짝 옆에 붙어서 걷고 있는 젊은이가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말했다. 그는 이제 상대방이 도주할 염려가 없어졌기 때문에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기요는 그가 위로삼아 하는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교원 생활을 오래 했소?

 

젊은이가 나지막한 소리로 다시 기요에게 물었다.

 

몇년 되지요.

 

기요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표정이 몹시 딱딱하던 그 젊은 남자는 한결 부드러운 눈초리로 기요를 돌아다보았다.

 

아까는 사실 나도 혼났수다. 이 생활이 벌써 몇년째지만 그런 경우는 처음이었다구요.

 

어떤 경우 말인가요?

 

나도 고등학교 나온 지 몇년 안되거든요. 아까 복도에서 수업 끝나기를 기다릴 때는 참 난처했지요. 그것 참 못할 짓이던데요.

 

앞서 가던 상사가 뒤돌아보며 젊은 남자에게 물었다.

 

야, 김 병장. 너 여기서 파견대까지 몇 킬로쯤 되는지 알어?

 

글쎄요. 직코스로 가면 십 킬로쯤 되겠지요.

 

그럼 택시로 가자.

 

상사는 마침 그들의 옆에 와서 손님을 내려놓고, 곧 떠나려고 하던 택시를 잡아세웠다. 김 병장과 기요가 먼저 뒷좌석으로 올랐다. 기요는 가운데에 앉았고 상사와 병장이 기요의 양쪽에 각각 앉았다.

 

운전사 양반. 대방동까지 직코스로 가는데 말이지, 한번 최고 속도로 뽑아보쇼.

 

상사가 마치 부하에게 지시하는 사람처럼 운전사에게 말했다.

 

속도 위반에 걸리면 댁에서 책임지실 거요?

 

운전사는 돌아다보지도 않고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러면 우리가 시방 드라이브나 하는 사람들같이 보이우?

 

상사가 짓궂게 다시 말했으나 운전사는 더 대꾸하지 않고 차를 몰았다. 택시는 수색 정거장 광장을 지나서 새로 포장된 널따란 도로로 들어섰다. 이 도로는 신촌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시가지를 벗어나면서부터 차의 속도가 빨라지자 반쯤 열어둔 차창을 통해 시원한 바람이 비껴 들어왔다. 그들은 잠깐 동안 도로 주변에 새로 조성되는 주택지구를 바라보느라고 말이 없었으나 병장이 곧 그 침묵을 깨뜨렸다.

 

학교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을 텐데 어떻게 할 참이요?

 

그는 정말 딱하다는 표정으로 기요를 돌아다봤다.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만약 돌아갈 수가 있다면 꼭 돌아가고 싶은데요.

 

기요는 똑바로 앞을 보면서 헛소리처럼 중얼거렸다.

 

당신 얘길 듣고 보니까 우리들이 영락없이 악당들이 되었는데.

 

상사가 한숨을 쉬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하기야 우리들이 찾아내지 못했다면 당신은 당분간 무사하게 교육자 노릇을 할 수가 있었겠지.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직업이고 잘못은 우리보다 당신에게 더 많은 거요. 당신은 좌우간 군대의 법을 어겼으니까.

 

꼭 불가능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죠.

 

병장이 다시 기요에게 말했다.

 

나중에 재판받을 때 검찰관이나 심판관에게 잘 말해보쇼. 혹시 아우? 정상 참작이란 것도 있으니까.

 

야, 임마 금년부터는 군기가 더 엄해져서 그런 것 없다구.

 

상사가 병장의 억측을 한마디로 부정했다.

 

오랫동안 무사했지만 결론적으로 당신은 운수가 좋지 않은 사람이라구. 하필이면 금년에 와서 붙잡힐 건 또 뭐야. 정말 금년부터 군기가 훨씬 엄해졌다 이 말이오. 작년에만 붙잡혔더라도 혹 모를 텐데. 거기가보면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곧 알 거요.

 

 


 

 

상사는 몇번이나 혀를 차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사실은 나도 입대했던 첫해에 도망친 일이 있었죠. 두 번씩이나 부대에서 이탈했다가 붙잡혀가지고 되게 혼이 났죠.

 

병장이 무슨 자랑처럼 그의 경험담을 털어놓닸다.

 

정말 그때는 선임자들 등쌀에 하루도 배겨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구요. 에라 될 대로 되어라. 어디 가서 술이나 잔뜩 마셔버릴까부다. 하루에도 수십 번 이런 생각이 솟구쳤지 뭐요.

 

야, 임마. 말도 말아. 네 따위는 인제 겨우 시작이야. 나는 이 생활이 십년째야. 입에서 썩은 냄새가 풀풀 나오는 지경이라구.

 

상사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병장으로 건너다보았다.

 

누구나 좋아서 하는 놈은 없다 이거야. 너나 나나 그리고 이양반까지도. 이 양반은 싫다고 걷어차고 나가버렸지만 그러나 이 양반도 비록 본의는 아니겠지만 다시 돌아오고 있으니까 마찬가지 입장이지.

 

어때, 교원 생활은 재미가 좋았소?

 

상사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나서 기요에게도 담배를 권했다. 기요가 한 대의 궐련을 받아 입에 물자, 그가 라이터를 꺼내어 불을 붙여주었다. 기요는 담배를 한모금 태우고 난 뒤에 말했다.

 

사실은 가르치는 일도 매일 되풀이하다보면 지독한 고역이죠. 그러나 지금 생각은 그렇지만은 않은데요.

 

알 만하겠소.

 

상사가 기요의 얼굴을 힐끗 돌아다봤다.

 

나도 중학교 다니는 놈이 하나 있다우. 선생은 담당과목이 뭣이었소?

 

영어요.

 

영어? 우리집 그놈은 그런데 영어를 지독하게 못한단 말야. 이놈이 수학은 어지간히 하는데 말이지. 영어 공부는 어떻게 시키면 되우?

 

특별한 방법이 없지요. 집에서 보게시리 좋은 참고서나 한 권 사주시오.

 

아이구, 말 마쇼. 내가 사준 책이 열 권도 더 될 거라구. 하여튼 난 사달라는 대로 죄다 사줬으니까.

 

그렇게 많이 사주면 더 공부를 안하게 되죠. 참고서는 딱 한 권이면 충분합니다.

 

그런가요? 무얼 알아야 면장을 해먹지.

 

택시가 합정동 로터리에서 강변도로로 접어들자, 차창을 통해 마포 강변이 펼쳐졌고 강변 저쪽 건너편으로 영등포 공장지대의 우뚝우뚝 솟아오른 굴뚝들이 멀리 바라다보였다. 그들은 목적지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닫고 갑자기 부질없는 사담을 뚝 그쳤다. 특히 기요의 양쪽에 앉아 있는 상사와 병장은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과 그들 자신과의 관계를 새삼스럽게 깨닫고 금방 표정이 굳어져버렸다.

 

이때 기요는 팔목의 시계를 보았다. 벌써 오후의 두번째 수업이 끝났을 시간이었다. 누가 나의 대리로 수업에 들어갔을까? 내가 돌연 수업에 나오지 않은 것을 알게 된 아이들의 반응이 어땠을까? 그는 비로소 그 학교의 교실과 아이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난 뒤에도 그 아이들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 알려질 필요는 없다. 기요는 이렇게 생각했다.

 

대방동 어디라고 하셨죠?

 

제이한강교를 지나면서 운전사가 물어왔다.

 

파견대가 있는 곳을 아오?

 

병장이 운전사에게 다시 물었다.

 

네. 압니다.

 

그럼 됐소. 목적지는 거기요.

 

병장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상사의 지시에 따라 택시는 파견대의 정문이 멀리 바라다보이는 지점에서 정차했다. 차에서 내린 그들은 그길로 곧장 파견대로 향하지 않고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여태 점심도 거른 채 돌아다녔지 뭐요. 이 직업이 원래 그런 직업이라구. 맨 먼저 식당 안으로 들어서던 상사가 기요를 돌아다보며 이렇게 투덜거렸다. 그들은 이 식당에서 제일 조용한 방이라고 생각되는 맨 구석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 두 사람은 간단하게 우동으로 하겠는데 댁은 뭘 드실라우?

 

상사가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기요를 보면서 물었다. 기요가 머리를 옆으로 흔들자, 상사가 다시 말했다.

 

먹기 싫어도 무어든 시키쇼. 이거는 사회에서 마지막 식사가 될 테니까 무어든 기름기 있는 걸로 시키쇼. 사실 우리는 구내 식당에 가면 더 싸게 먹을 수 있지만 일부러 여기 온 거요. 내 말뜻 알겠소? 그러나 요금은 각자 부담이니까 그런 줄 아쇼.

 

기요는 상사의 권유를 따르기로 했다. 그가 상사에게 말했다.

 

 


 

 

그러면 나는 곰탕으로 시키겠소. 두 분도 기왕이면 기름기 있는 걸로 시키십시오. 요금은 내가 지불하죠.

 

이번에는 상사가 기요의 제의를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 꺼는 우리가 지불할 거니까.

 

별다른 뜻은 없으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다만 내 호주머니에 지금 몇푼 있는데, 이것은 앞으로 별로 필요하지도 않을 것 같고, 그리고 동기야 무엇이든 두 분이 오늘 나 때문에 수고하셨으니까.

 

기요의 옆에 앉아 있던 병장이 기요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쇼. 우리는 오늘 실적으로 우동값 정도는 보상을 받으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났고 또 헤어질 텐데 야박하게도 음식값을 지불하는 문제로 왈가왈부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거는 이 양반 얘기가 옳다. 그럼 우리도 곰탕을 시키자구.

 

상사가 수월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식사를 끝낸 뒤에 각각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이번에도 상사가 기요가 물고 있는 궐련에 불을 붙여주었다.

 

부인은 있소?

 

병장이 갑자기 생각난 듯 기요에게 물었다.

 

만약에 나에게 부인이 있다면 내일쯤이면 아주 비극적인 장면이 벌어지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미혼입니다.

 

그거 다행이로군.

 

상사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애인은 있을 거 아니오? 애인도 없소?

 

젊은 병장이 호기심이 가득찬 눈초리로 기요를 쳐다보았다.

 

애인이 있다면 더욱 비극적이게요?

 

기요가 빙긋이 웃어보이며 병장에게 반란했다.

 

애인이 없다는 사람은 나는 또 처음 보는데?

 

병장은 기요의 말이 쉽사리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때 상사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나더니 자못 엄숙한 표정으로 기요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만약에 우리가 임의대로 하려고 한다면 여기서 당신을 돌려보낼 수도 있소. 아직 신고를 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하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지요. 하필 지금 와서 내가 왜 그 이야기를 꺼내는지, 그 이유를 나 자신도 모르겠으나 나는 처음부터 주욱 그런 충동을 느껴왔던 게 사실이오. 택시 안에서도 나는 줄창 그 생각만 하고 있었소.

 

당신을 우리 임의대로 돌려보낸다면 물론 우리는 군법을 어기는 것이지만 그거야 저놈하고 나하고 두 사람의 입만 꾸욱 다물고 있으면 무사하게 넘어갈 수도 있지요. 택시 안에서 내가 생각한 것은 이거요. 당신은 교사로서 국가에 훌륭하게 봉사하고 있다. 이 말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을 붙잡아다놓으면 군기는 약간 세워지겠지만 결과적으로 국가에 이득이 있는 일이냐? 이점을 생각했던 것이오. 그러나 나의 결론은 내가 그런 것을 생각하고 결정할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오. 나는 어디까지나 호송인이니까.

 

상사님, 너무 늦었지 않습니까?

 

병장이 팔목의 시계를 들여다보며 상사에게 말했다.

 

음, 알았어. 덕분에 잘 먹었수다. 이 다음에 언제 좋은 때가 오면 그때는 내가 한턱 내겠수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상사가 기요에게 말했다.

 

파견대의 정문을 지키고 있던 위병은 세 사람이 정문을 통과할 때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물론 두 사람에 관해서는 낯이 익었겠지만 위병은 새 손님에게조차 전혀 흥미가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일행이 들어간 방은 녹색 단층 건물의 어둑어둑한 방이었다. 대위 한 사람이 방 가운데에 놓여 있는 책상 앞에 앉아서 옆자리의 사병과 큰소리로 잡담을 나누고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상사가 그 대위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거수경례를 붙이고 절도 있는 어조로 말했다.

 

 


 

 

한 놈 붙잡아왔습니다.

 

누구 말이야? 이리 데리고 와봐.

 

대위가 매우 번거롭다는 듯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상사가 다시 뒤로 돌아와서 병장더러 잠깐 기요의 팔목에서 수갑을 풀라고 말했다. 수갑에서 풀려난 기요는 대위 앞으로 끌려갔다.

 

이름이 뭐지?

 

기요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대위가 물었다.

 

김기요입니다.

 

이자가 우리 기록으로 넘어온 게 언제부터지?

 

대위가 이번에는 상사에게 물었다.

 

오년쯤 되었습니다.

 

오년이라구? 그럼 징역을 오년은 살아야겠군. 데리고 가라.

 

대위는 더 묻기가 귀찮은지 다시 옆자리의 잡담 상대자 쪽으로 돌아앉아버렸다. 신고는 이렇게 간단하게 끝났다. 왼편 팔목에 다시 수갑이 채워진 기요는 그 어둑어둑한 파견대장실에서 곧 바깥으로 끌려나왔다. 현관 앞에서 한 대의 군용 스리쿼터가 시동을 걸어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차야말로 기요를 마지막 지점으로 데려다줄 호송차였다.

 

자, 나는 여기서 작별이오. 그쪽에 가면 우선 답변을 잘해야 됩니다.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는 기요의 잔등을 상사가 손바닥으로 두어 번 두드려주며 말했다. 기요는 상사에게 웃어보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상사는 차가 출발하기도 전에 돌아서서 금방 건물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병장과 기요, 단지 두 사람만을 적재함 위에 태운 스리쿼터는 파견대의 정문을 빠져나와 행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기요는 팔목의 시계를 다시 보았다. 이미 그 학교의 아이들은 오후의 수업마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미결감에 있는 동안이 제일 어렵다오. 건강에 제일 힘써야 할 거요.

 

기요와 나란히 앉아 있던 병장이 말했다. 그는 기요와 서로 수갑을 나누어차고 있었으므로 얼핏 보면 병장 자신도 흡시 호송되어가는 죄수처럼 보였다.

 

여기서 그곳까지 얼마나 걸립니까?

 

기요가 병장에게 물었다.

 

십오 분 뒤면 거기 도착할 거요.

 

그러면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소?

 

무어요? 무어든 말해보슈.

 

당신이 보았다시피 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와버렸소. 나의 어머니하고 친구 몇사람에게 연락 좀 해주겠소?

 

그것은 사실 금지사항인데 그러나 내가 연락해드리겠소.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주소를 적어주쇼. 이것뿐이오? 애인이 있으면 말하쇼. 나중에는 기회가 없다구요. 지금 말해 주면 죄다 전해주리다.

 

쪽지를 받아들고 병장이 빙긋이 웃어보이면서 말했다.

 

내가 애인이 없다고 아까 말하지 않았소? 만약에 애인이 있다고 해도 나는 지금 그 여자에게 연락하지 않을 거요.

 

하하, 이양반은 그 여자가 변심할까봐 겁이 나는 모양이군. 그렇지만 사실이 그렇다면 그건 잘못 생각하는 거라구요. 내가 작년 여름에 잡아온 놈 이야기를 할까요. 그 녀석이 지독하게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이 여자가 평소에는 그 녀석을 지독하게 싫어하다가 막상 그녀석이 덜컥 수감되니까 교도소 문턱이 닳아지게 면회를 왔다구요.

 

그러니까 애인이 있다면 서슴지 말고 얘기하쇼. 나는 어디까지나 형씨에게 좋은 일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요. 나도 이제 석 달만 있으면 제대할 텐데 그때는 이 생활도 끝이지요. 우리 상사님은 이 생활에 취미가 붙어버린 모양이지만 난 그렇지가 못해요.

 

그렇다면 내가 한 가지 더 부탁하겠는데 들어주겠소?

 

무어요? 뭐 별로 어렵지 않은 부탁이라면 힘써보지요.

 

기요는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식당에서 그 상사가 왜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하였는지 당신은 그 이유를 내게 말해줄 수 있소?

 

그게 지금 말한 부탁이라는 거요?

 

병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기요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것 참 어려운 부탁이군. 그러나 내가 일단 약속을 했으니까 대답을 하지요. 상사님은 언제나 신고하기 직전에 그 비슷한 얘기를 상대방에게 한다구요. 어떤 때는 정말 곧 돌려보낼 듯이 말하는 바람에 옆에 앉아 있는 나까지도 깜짝 놀랄 때가 있죠. 하지만 나도 이젠 상사님 얘기에는 면역이 되었다구요. 어때, 이만하면 대답이 되겠소?

 

기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 사람을 태운 호송차는 계속해서 차도 위를 달려갔다. 이미 저녁나절이 되어 자리에는 귀성객들의 행렬이 잔뜩 붐비고 있었다. 인도로 걸어가는 행인들이나 혹은 지나가는 버스 안의 승객들이 이낡은 군용차의 적재함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을 자주 쳐다보았다. 그들은 두 사람이 무엇인가 얘기를 주고받는 모습에 더욱 흥미를 느꼈으며 특히 두 사람이 수갑을 서로 나누어차고 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마치 흉악범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은 사람처럼 두 사람의 얼굴을 몇차례나 거듭거듭 쳐다보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