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한국의 원로작가가 러시아를 찾는다. 방문 목적은 니나 그리고르브나를 만나는 것이다. 하지만 니나는 이미 고인이 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여성이다. 젊은 시절의 불타는 로맨스를 함께 나누었던 사이도 아니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는 이미 청춘의 설레임은 머나먼 추억으로만 남는 그런 연배였다. 하지만 이 작가는 그 여인의 무덤을 찾아서 수만 리 길을 날아왔다. 그가 날아온 그 거리보다, 러시아에 도착해서 니나의 무덤까지 찾아가는 길이 훨씬 더 멀고 험하다. 그 거리는 바로 작가가 니나를 만나고자 하는 이유와 거기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이해 사이에 놓인 거리이다. 러시아의 유명한 작가조차 그 빈 공간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오히려 냉랭함의 벽을 높일 뿐이다. 독자가 작가의 이 여정을 따라가는 길은 이정표도 나침반도 없다. 그냥 함께 러시아 초원의 무성한 풀들을 헤치고 나아가고 머나먼 고국의 기억이 이따금 교차할 뿐이다. 단지, 이 여행에는 목적지가 있다는 것, 그 여행의 목적지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이 작가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이 작가와 독자를 외롭게 이어주는 끈이다. 하지만 그 끈은 결코 작가와 독자를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기대가 작품의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에 머나먼 새벽별처럼 빛나고 있다.
통관절차를 마치고 승객 환송실로 나가자, 작은 팻말을 치켜든 잘생긴 동양청년이 금방 눈에 띠었다. 그런데 팻말에 한글로 적힌 내 이름이 ‘ㅕ’를 ‘ㅑ’로 잘 못 적혀있다. 한글을 처음 써본 사람 글씨처럼 글씨도 서툴렀다. 그래도 식별에는 지장이 없다. 나는 청년에게 다가가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도 웃어 보이며 얼른 내가 끌고 있는 크지 않은 여행 가방을 내게서 받아갔다. 나는 그때에야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서울-모스크바 간 9시간 5분의 비행, 적지 않게 지루했다. 귀국 시 비행시간은 한 시간 이상 단축되는데 지구의 자전으로 비행 방향이 서로 엇갈려 그런 차이가 난다는 걸 뒤에 민박집 어느 손님에게서 들었다. 다섯 번째 방문인데 처음부터 모르는 민박집에 묵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체류일정을 짤 때 그것은 내가 원한 것이고 나는 초기 며칠 동안만 민박집에 묵기로 했다.
5일이 지나면 A가 나를 데리러 차를 몰고 민박집으로 찾아올 것이다. 그 뒤에는 A와 함께 A의 다차가 있는 랴잔의 가브리노로 가서 일 주일 가량 묵게 된다. 그곳에 니나가 잠들어있는 그녀의 유택도 있다. 가브리노 다차의 체류가 끝나면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와 근교의 페레델키노 작가촌으로 가서 거기 있는 A의 집에서 며칠 보내고 9월 6일부터 시작되는 러시아 작가 미팅에 참여하기 위해 A와 함께 야스나야 팔리아나로 떠난다. 3주 여행인데 대충 이런 일정이었다.
러시아 작가미팅-주최 측은 세계작가 미팅이란 걸개를 걸어놓고 있으나 참가자 대부분이 러시아인으로 실질적으로는 국내행사-은 2005년에도 러시아 여행 중에 우연찮게 참석했고 좋은 경험을 한 바 있으나 이번에는 나 개인으로는 반드시 참석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일정은 A의 희망이고 A가 미리 정한 것이다.
7년만의 러시아 방문이다. 감회도 새롭지만 낯설기는 초행이나 마찬가지다. 먼저 민박집을 찾은 것은 A와 어울리기 전에 거리를 어슬렁거리면서 이곳 공기와 분위기에 조금이라도 익숙해지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혼자 낯 선 거리를 지향 없이 어슬렁거리는 것은 내가 아주 즐기는 취향이기도 했다.
그러나 첫 걸음부터 나는 암초에 부딪혔다. 공항 밖으로 나가자, 바깥은 완전 초겨울 날씨다. 쌩 ㅡ하고 칼날 같은 찬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반팔 셔츠를 입은 나는 몸을 잔뜩 움추린채 움직일줄 모르고 서있다. 서울의 여름은 얼마나 더웠는가.
<사진> 니나 아니스코바의 무덤. 1934년~2008년.
여름에서 겨울로 갑자기 이동한 셈이다. 경험상 러시아의 8월 하순이 이렇게 추울 수도 있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무거운 짐 휴대를 극도로 꺼리는 나는 가방 속에 겨우 봄 양복 한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내복도 털외투 같은 것도 없다.
여행을 너무 서둘렀나? 좀 더 침착하게 현지 날씨를 확인하고 세심하게 준비를 했어야 하는데 마치 뭔가에 쫓기듯이 여행을 서두른 건 아닌가. 마중 나온 청년을 따라 차를 세워둔 곳까지 백여 미터 가는 중에도 나는 감기의 악신을 피하기 위해 잔뜩 몸을 움츠렸다. 차에 오르자, 그제야 깊은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노브이 체르무쉬끼' -지하철 황색선의 정거장 이름이다. 민박집은 그 부근에 있다. 차를 모는 청년은 별로 말이 없었다. 그는 중국 가요를 계속 듣고 있었다.
“유 차이니즈?“
“예스“
그래. 예감이 그렇더라니. 담배를 피워도 좋은가 하고 물었더니 중국 청년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비행시간 9시간 내내 참던 흡연 욕구다. 그런데 라이터가 없다. 차오(중국 청년)가 도중에 차를 세우고 길가에 있는 끼오스끄로 가서 라이터를 사왔다. 차가 거리에 홍수처럼 밀려오고 밀려간다. 정체도 만만치 않았다. 한 시간 이상 달린 끝에 큰 아파트 촌에 있는 민박집에 도착했다.
지하철 회색선 정거장으로 툴스카야(Tulscaya)가 있다. 깔쪼에서 밖으로 두 번째 정거장으로 기억한다. 그만큼 중심가와 가깝다는 얘기다.
깔쪼는 서울의 4대문 안 같은 시내 핵심지역을 둘러싼 지하철 환상선(環狀線)인데 모스크바 지하철 약도를 보면 이 환상선을 중심으로 사방 외곽지역으로 지하철이 뻗어나간 그림을 선명하게 볼 수가 있다. 툴스카야에서 지하철을 타면 불과 십분 만에 이르바트나 트베르스카야 같은 시내 중심지역에 도달할 수가 있다.
그러나 교통이 좋은데 비하면 툴스카야 역 부근 일대는 그다지 번화하지도 않고 후르시초프 시절에 날림으로 지었다는 저층의 낡은 소형 아파트들이 여기저기 두서없이 늘어서 있고 그럴듯한 상점 하나도 찾아보기 어렵다. 서민 주거난을 단숨에 해결하기 위해 날림으로 지었다는 이 상자 같은 소형 아파트에는 후르쇼프까란 불명예스런 별칭이 붙어있다.
2005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석 달 동안 나는 툴스카야의 후르쇼프까를 잠시 빌려 혼자 지냈던 경험이 있다. 그 아파트는 바이올린을 공부하는 학생이 하기 휴가로 서울에 머무는 동안 내가 아주 싼 임대료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방에는 피아노와 오디오 컴포넌트, 그리고 그 학생이 닮고 싶다고 내게 말했던 바딤 레핀의 음반을 위시해서 하이페츠, 그루미오 등 많은 명인들의 CD 음반들이 그득 쌓여 있었다.
방도 비좁고 4층으로 오르는 구식 엘리베이터는 늘 덜커덩거려서 금방 추락할 것 같았지만 그곳에서 지낸 시간은 내가 정말 오랜만에 누려보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는 날마다 툴스카야 역 부근, 그리고 서민들의 아파트 촌 부근을 실컷 어슬렁거렸고 오랜만에 바이올린 연주도 실컷 들었다. 그날 이후 툴스카야의 기억들은 내게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툴스카야로 다시 찾아가보자. 7년 전 그 거리 모습이 그 사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고, 그 거리 사람들, 1층의 구둣가게 주인장인 젊은 여성, 옆집 할머니, 그리고 과일 노점상을 하던 대머리 아저씨 등 그들이 여전히 그 거리를 지키고 있는지 살펴보자. 무엇보다 유명한 툴스카야의 비둘기들과 만나는 일이 중요했다.
툴스카야에 비둘기가 많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지하철 역 부근 피자가게 앞마당에는 언제나 수십마리 비둘기들이 떼지어 몰려와서 손님들이 먹다 흘린 피자 조각, 빵조각 등을 부지런히 쪼아 먹는다. 비둘기들은 사람을 전혀 꺼리지 않는다. 인도에도 비둘기들이 사람과 뒤섞여 뒤뚱거리며 걷는 것을 자주 볼 수가 있다. 비둘기는 허공의 전선에도, 나뭇가지에도 진을 치고 앉아 있으며 가끔 나의 초라한 처소에 찾아들기도 했다.
아침에 조반을 마련하러 주방으로 가면 주방 창턱에 비둘기 한마리가 조용히 앉아 쉬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나는 이방인을 찾아준 비둘기에게 너무 고마워서 비둘기와 대화를 몇 차례 시도한 바도 있었다. 국적이 없는 비둘기는 한국말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엉뚱한 기대감을 품었었다.
그러나 대화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인기척을 느낀 비둘기가 허공으로 멀리 날아가 버리곤 했던 것이다.
여행계획을 세울 때 툴스카야 방문은 당연히 중요한 일정이 되었다. 남쪽의 노브이 체르므쉬끼 역 부근에 민박집을 잡은 것도 그곳이 툴스카야와 가깝다는 게 첫째 이유였다.
<사진> 5층 창에서 바라보는 아파트 주변 풍경. 맞은편 2층 건물은 종합미용실?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이십대 후반 쯤 되어 보이는 젊은 여성이 현관에서 나를 맞았다.
“저희 집에 오셨으니 이제부터 편히 모실게요.”
“당신이 이진 씨?”
“네. 제가 이진입니다.”
서울에서 통화할 때 나는 그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민박집의 이 젊은 주인은 조선족 출신 여성이다. 조선족?
처음 그 점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이진의 활달한 성격과 싹싹한 말투가 곧 그런 우려를 씻어주었다.
안내 받은 방으로 가서 나는 짐을 내려놓고 차를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나갔다. 주방에는 이미 세 사람의 남자 손님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가 나를 보자, 모두 일어나서 가볍게 인사를 했다. 연장자에 대한 한국식 예의였다. 이 사람들은 벌써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자기네끼리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는 참이었다. 초면의 낯선 사람끼리도 식탁에서 머리를 맞대고 함께 식사도 하고 얘기도 나누는 게 민박집의 풍속이다.
“저희는 여기 르노 자동차 회사에 나가고 있습니다.”
셋 중 가운데 앉아있는 사십대 남자가 내게 자기들 직업을 소개했다.
“세 분이 같은가요?”
“네. 분야는 달라도 회사는 같답니다.”
“한국에 있는 르노 차가 여기에도 옵니까?”
“아니, 아직은 안 옵니다. 오더라도 완성차는 안 올 거에요. 그러니까 한국에서 부품을 여기로 보내면 여기서 조립과정을 거쳐 차를 출시하게 되겠지요. 저희는 지금 조립공정을 세우느라고 파견 나와 있는 겁니다.”
이 세 사람은 장기 숙박 손님들이다. 자연스럽게 사람들 시선이 새 손님인 나에게 쏠렸다. 주인 이 진도 조금 떨어진 자리에 의자를 놓고 앉아 나를 물끄러미 지켜봤다. 나이가 마흔은 훌쩍 넘어 보이는, 조금 깐깐한 인상을 주는 르노 차 직원이 내게 불쑥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무슨 일로 여기 러시아에 오셨는지요?”
“아, 저는...”
이런 질문을 예상 못한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적당히 꾸며 대답하면 그만인데 구태여 거짓말을 한다는 것도 우스웠다.
나의 여행 목적을 정직하게 말한다면 첫째가 니나를 찾아가는 일이다. 그런데 내가 가브리노 북망산에 잠들어 있는 니나를 찾아 이 바쁜 세월에 여기까지 왔다고 하면 르노 자동차 회사의 이 엔지니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왠지 그 말을 꺼내는 게 내키지 않았다. 무엇보다 장황한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 마치 개인의 기호에 따라 불필요한 사치를 감행한 사람처럼 변명해야 한다.
“아, 이곳에 친구가 있어요. 그를 만나 의논할 일도 있고, 그리고 전에 한동안 지내던 마을도 다시 찾아가 보고 싶어서요. 툴스카야라고.”
나는 아주 간명한 답변을 쉽게 찾아냈다.
“추억 여행인가요?”
셋 가운데 가장 젊어 보이는 르노차 직원이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맞습니다. 결국 그런 셈이 되겠네요.”
세 사람의 엔지니어들은 대충 이해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일찍 잠자리에 들기 위해 모두 일어서서 각자 자기 방으로 갔다. 그들은 현지 시간으로 새벽 여섯시가 되면 출근해야 하는 바쁜 사람들이었다.
<사진> 가브리노의 호수 - 건너편에 니나가 살던 마을이 있다.
여행지의 첫 밤을 잘 쉬고 나는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오늘은 지하철을 타고 툴스카야로 가야 한다. 그 거리와 드디어 재회한다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지하철 약도를 책상 위에 펼쳐놓고 황색선에서 회색선으로 갈아타는 지점의 역 이름을 눈여겨 봐두었다. 노브이 체르므쉬끼 역에서 툴스카야 역까지는 이십분, 좀 여유 있게 잡아도 삼십 분이면 갈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 오늘 날씨 아주 춥습니다. 저어기 바깥을 보세요. 사람들이 두꺼운 옷들을 입고 나온 걸요.”
조반을 먹으려고 주방으로 나갔는데 주방 아주머니가 몹시 걱정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주방에 붙은 베란다 창을 통해 거리를 내려다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출근길을 서두르는 행인들이 모두 두터운 겨울 외투를 입고 있었다.
“아주머니. 어디서 내복을 구할 수 없을까요? 러시아 사람들 내복 입지 않는 걸 알지만.”
“근처에는 없을 거에요. 중국시장에나 가면 모를까. 근데 거긴 멀어요. 가 봐도 내복을 살 수 있을지 장담 못해요.”
북국의 변덕스런 날씨는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법 따뜻했는데 갑자기 이리 추워진 거랍니다.”
마음씨 착해 보이는 주방 여인이 커피와 식빵 두 조각을 식탁 위에 가져다 놓으며 말했다. 커피와 식빵은 내가 주문한 아침 식단이었다.
“아주머니는 러시아 말을 아주 잘하시네요.”
주방여인이 아침부터 스마트폰을 들고 러시아 말로 누구와 대화하는 걸 들었다.
“아이, 그냥 필요한 말은 조금 해요. 어려운 말은 못하고요.”
“아이구, 부럽습니다. 여기 오신지 몇 해나 되었는데요?”
“벌써 십년이네요.”
“처음부터 모스크바에?”
“아니에요. 연변에서 나와서 처음 볼가그라드에서 옷장사를 했어요. 여기 온 건 이제 삼년, 그쯤 되네요.”
“아, 볼가그라드... 이차대전 때 격전지로 유명하던 곳이죠. 한때 스탈린그라드로 불리기도 했고.”
“거기서 옷 장사를 오래 하다 장사가 잘 안 되어 그만두고 이곳으로 왔지 뭐에요. 장사를 하다 보니 말이 조금씩 늘데요.”
조반을 마치고 나는 가을 양복을 꺼내 입고 외출을 서둘렀다. 주방여인이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지켜봤다. 그녀는 아래층 입구의 출입문을 드나들 때 필요한 절차를 내게 꼼꼼하게 가르쳤다. 출입문에는 비밀 숫자가 있고 별도의 문자표시가 부착되어 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때 그것을 차례대로 입력하지 않으면 육중한 문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 이건 한국과 다를 것이 없다.
내가 현관을 나서는데 늦잠에서 방금 깨어난 집 주인 이진이 놀란 얼굴로 뛰어나왔다.
“선생님, 날씨가 너무 추워 안 돼요. 툴스카야는 날씨 좀 풀리면 제가 차로 모실게요. 감기 드시면 여기서는 약 구하기도 어렵다구요.”
나를 걱정해주는 이 조선족 젊은 여성의 마음이 고맙지만 그렇다고 첫날부터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나갔다가 너무 추우면 금방 돌아오겠소. 그래도 여기 땅은 밟아봐야지.”
“그러세요, 그럼. 절대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5층에서 엘리베이타를 타고 내려와서 나는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날씨가 어제보다 더 추웠다. 이런 날씨라면 툴스카야에 가더라도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아파트 구역을 벗어나 행길로 나가서 지하철 역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이 내 옆을 분주하게 스쳐 지나갔다. 모두들 두터운 외투를 입고 있다. 외출 한번 하는데 이처럼 비장한 마음을 갖게 된 건 처음이다.
길 한편에 작은 규모의 끼오스끄가 있고 그 건너편에 여러가지 과일을 잔뜩 쌓아놓고 손님을 부르는 과일 노점상이 있다. 어느 곳이나 변두리 마을의 풍경은 비슷하다. 여기에도 비둘기가 있었다. 비둘기들과 참새들이 나무숲에서 자리를 옮겨다니며 풀씨를 쪼아 먹고 있었다. 참새들조차 사람이 다가가도 놀라거나 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나는 잔디밭에서 풀씨를 쪼아 먹고 있는 참새들을 아주 가까이 서서 오래도록 지켜봤다.
지하철 역 부근은 언제나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로 붐빈다. 지하철로 들어가는 지하도 양켠에는 작고 볼품없는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모스크바 서민들은 이 지하도 가게들을 유난히 애용하는 것 같다. 값이 싸기 때문일까? 큰 시장까지 가는 게 번거롭기 때문일까? 이 가게에는 손수건과 양말, 머플러와 질이 낮은 스웨터, 역시 질이 낮은 선글라스와 손톱깎이와 머리빗 등의 잡동사니들이 진열되어 있다. 주로 많은 여성 고객들이 가게 앞에 진을 치고 서서 물건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나는 일단 지하도를 지나 맞은편 넓은 광장으로 건너갔다. 지하철을 타더라도 현금이 있어야 한다. 광장에는 큰 상가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 2층 한쪽 모퉁이에 환전소가 있었다. 환전소는 어느 곳이나 구조가 비슷하다. 전당포 창구처럼 고객과 주인 사이에 볼펜 굵기의 쇠창살이 가로막고 있으며 돈 거래는 창살 아래쪽에 터널처럼 뚫려 있는 좁은 공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러시아 남쪽 회교권 출신으로 보이는 두 젊은 남자가 창구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잠시 후 그들이 환전을 끝내고 자리를 떠나자, 나는 창구 앞으로 가서 백 달러 지폐 몇 장을 내밀었다. 사십대 중년 여인이 내 얼굴을 힐긋 한번 쳐다보고 달러를 받아 그 중 한 장을 책상 위에 펼쳐놓고 현미경으로 꼼꼼하게 살펴봤다. 아마도 그들 나름으로 위폐 여부를 쉽게 식별하는 기준이 있을 것이다. 100달러는 대충 3,200 루블, 루블의 가치가 한때 폭등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공교롭게도 7년 전과 환율이 크게 다르지 않다. 루블을 건네준 여인은 나를 향해 알 듯 모를 듯한 눈인사를 건넨다.
광장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지만 여전히 싸늘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냉기를 실은 바람도 멈추지 않고 불었다. 바람을 피해 나는 건물 모퉁이로 가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 추운 날씨에 툴스카야엘 가야 할까? 그 해답을 얻는데 십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나는 툴스카야 행을 단념하고 지하도를 다시 건넜다. 민박집 주인 이진의 충고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
추운 날씨 때문에 며칠 동안 나는 민박집 근처에서 맴돌았다. 하루 한차례 외출이라고 했지만 고작해야 첫날 나갔던 지하철역까지 다녀오는 게 전부였다. 만나는 사람도 대화를 나눌 상대도 없다. 구지 대화 상대라면 풀밭에서 풀씨를 쪼아 먹는 비둘기나 참새들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방의 새들과 이른바 '무언의 대화'를 나눈 셈이다.
하긴 서로 몇 마디 얘기를 나눈 유일한 인물이 있다. 조그만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데 마흔 안팎으로 뵈는 어떤 사내가 맞은편 벤치로 와서 앉아 나를 흘끔흘끔 쳐다봤다. 나쁜 인상은 아닌데 옷차림이 허술하고 얼굴은 술기운으로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서툴지만 영어를 조금 할 줄 알았다.
나는 그 남자와 날씨와 로스트로포비치에 관해 짧은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왜 갑자기 로스트로포비치가 등장했느냐 하면 그 주정꾼은 나와 자꾸만 대화를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고 나는 별로 꺼낼 얘깃거리도 없어서 내가 갑자기 몇 해 전 작고한 첼리스트에 관해 아느냐고 그에게 뚱딴지처럼 물었던 것이다.
러시아 국민 첼리스트인 그 이름을 이 주정꾼도 물론 알고 있었다. 이어서 투르게네프와 체홉의 이름도 나왔고 그는 물론 그 이름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작품에 대해 그가 러시아 말로 뭐라고 한참 설명을 했는데 무슨 얘기인지 대충 추측만 할뿐이었다. 주정꾼과의 대화는 십 여 분에 그쳤고 나는 곧 공원을 떠났다.
민박집 방에는 책들이 몇 권 꽂힌 서가가 있다. 그 서가의 책을 통해 나는 방 안에 갇혀있는 무료한 시간을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
몇 해 전 국내에서 출간된 아나톨리 리바코프의 <아르바트 아이들>이란 소설은 이름만 들었지, 읽지는 않았다. 제목만 보면 러시아 젊은이들의 가벼운 연애담 정도로 생각하기 쉬운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사회주의 당시의 러시아 젊은 세대들의 수난사를 아주 정밀하게 그려낸 수작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로운 희망을 위하여>라는 에세이집도 그 방에서 읽었다. 이 책은 92년 그가 대선에 실패하고 영국 체류 기간에 정치에서 손을 뗀 입장에서 쓰인 책이란 특징이 있다. 근엄한 정객이라는 입장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소박하게 자기 삶을 성찰한 내용들이 흥미를 끌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도 이 방에서 읽었다. 평소에는 이런 책에 손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방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책을 세 권쯤 읽고 나자, A를 만날 시간이 다가왔다.
A는 모스크바 근교의 작가촌인 페레델키노에 머물고 있다. 그가 차를 가지고 내게 오기로 되어 있었다. 민박집 여주인 이진이 최신 스마트폰으로 내게서 건네받은 A의 연락처에 신호를 보냈다. A의 까칠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나보다 한살 많은 이른바 원로급 러시아 작가이다. 이진과 그가 러시아 말로 잠시 통화를 한 뒤 이진이 스마트폰을 내게 건넸다.
“반갑소.”
“네. 오랜만이군요. 반갑습니다.”
'내일 만납시다. 오늘은 못 가요.”
“?....”
“그럼, 내일.”
“알겠습니다. 내일 만나죠.”
통화는 간단하게 끝났다.
“왜 오늘 못 온다는 거죠?”
내가 이진에게 물었다.
“부인이 팔을 다쳐 병원에 있답니다. 형편이 썩 좋지 않은가 본데요.”
“엘레오노라가?”
카자흐 고려인 출신 부인을 나는 잘 알고 있다. 7년 전 가브리노 다차에 머물 때 그녀는 갖은 음식을 만들어 낯선 손님인 나를 융숭하게 대접했었다. 이후 그들 부부가 서울에 왔을 때 나는 그 보답으로 후배 사업체인 수입화장품 회사에서 독일제 유기농 화장품 세트를 가져다가 부인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A의 한국말은 다섯 살 혹은 여섯 살 정도 유아 수준이다. 그걸 감안해도 그의 싸늘한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이때부터 사실상 A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감이 꿈틀대기 시작해서 내가 러시아를 떠나는 시간까지 줄곧 나를 괴롭혔다.
오후에 다시 A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전의 약속을 바꾸어 오늘 내가 자기 처소로 찾아와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전화는 이진이 받았다. 페레델키노 작가촌이라면 90년대 초 러시아 첫 여행 때 빠스테르나크 기념관을 찾느라고 일단의 동료작가들과 함께 그곳에 갔던 경험이 있다. 그렇지만 그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그곳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 내가 알 길이 없다. 손님인 내가, 더구나 말도 통하지 않는 내가 그곳으로 찾아와야 한다는 요청은 친구의 예의가 아니지 않나.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진을 바라봤다.
“다섯 시까지 모시고 오랍니다. 걱정 마세요. 차오하고 제가 모시고 갈 테니.”
이진에게 그런 의무 같은 건 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여전히 친절하고 싹싹했다.
“러시아 오시면 꼭 페레델키노로 오세요. 제가 며칠이고 편히 묵으시도록 해드릴게요.”
서울에서 엘레오노라가 내게 들려줬던 말이다. 그들이 서울을 다녀간 게 삼년 쯤 전인가? 기억이 분명치 않았다. 본래 계획에는 민박집 체류가 끝나는 즉시 리아잔의 가브리노로 떠나야 한다. 페레델키노는 가브리노 이후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순서를 바꿔버린 A의 처사가 미심쩍었지만 그가 하자는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즉시 방으로 가서 꺼내 놓은 몇 가지 의복들을 작은 여행가방 속에 꾸겨 넣고 책상 위에 펼쳐놓은 메모지들을 정리했다. 다시 이 방으로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며칠 묵었던 방과의 작별! 이런 때는 언제나 그곳에 자기의 지극히 작은 일부나마 남겨두는 것처럼 허전하다.
“그 할머니의 무덤에 가면 뭐가 있나요?”
“있긴 뭐가 있어요. 아무 것도 없지요.”
“그렇다면 왜 거기까지... 구태여, 거기 유족이 있다면 그냥 여기서 전화나 한통 해주시면 될 걸.”
그 당돌한 청년은 거침없이 내게 자기 생각을 제시했다.
차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오후 세시쯤 페레델키노로 가는 동안에 문득 회현동 지하상가 <크림트>에서 만났던 자칭 도서 수집가인 청년의 말이 떠올랐다. <크림트>는 본래 LP 전문점인데 최근 경기가 좋지 않은지 주인이 자기가 그동안 모아두었던 책들을 집에서 가져다가 가게 한쪽에 늘어놓고 묵은 희귀본(稀貴本)을 찾는 손님을 끌고 있었다. 이 가게 주인 김 씨야말로 숨은 도서수집가이다. 나는 전에 한번 동대문 밖 회기동 그의 집에 들렀다가 그의 집 거실과 그가 기거하는 방이 온통 책으로 가득 차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는 또 엄청난 독서광이기도 했다.
“아, 이 선생님 생각은 우리가 알 수가 없죠. 사람마다 생각하는 가치가 다르니까요.”
내가 고객인 청년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자, 가게 주인이 적당한 말로 그 장면을 얼버무렸다.
“그런가요...? 그렇군요.”
내 반응을 기다리던 호기심 많은 도서수집가가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페레델키노는 생각보다 시내에서 멀지 않았다. 페레델키노란 푯말이 여기저기서 눈에 띠기 시작했다. 그런데 구역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도시 외곽지대는 어디나 숲으로 덮여있는데 페레텔키노는 특히 구역 자체가 거대한 숲이었다.
차오는 네비게이션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종이에 적힌 주소지를 찾느라고 애를 먹었다. 차가 숲속으로 들어온 지 이십여 분이 되었지만 그 주소지를 찾지 못했다. 한 중년남자가 울타리 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진이 차를 세우게 하고 그 남자에게 A의 집이 어딘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 남자는 길을 두 번 돌아가면 바로 지척에 A의 집이 있다는 걸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A의 집 둘레를 한참동안 빙빙 돌고 있었던 셈이다.
페레델키노 마을은 러시아 작가촌이다. 언제부터 조성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빠스테르나크가 말년을 여기서 지낸 걸 보면 사회주의 초창기부터 작가촌이 있었지 않나 생각된다. 이곳은 러시아 작가동맹에서 관리하는데 이곳 주택을 배정받으려면 일정한 작가 이력과 작품성을 인정받아야 하는 걸로 알고 있다. A는 이미 충분한 입주 자격을 갖추었지만 그곳에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내다가 몇 해 전 입주신청을 하고 일 년쯤 전에 겨우 주택을 배정받았다.
A의 집 앞에 도착해서 이진이 A와 통화를 했고 곧 A가 나와서 차가 진입할 수 있도록 대문을 열어주었다. 허름한 외투를 걸친 A는 수염도 깍지 않고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는 차에서 내리는 나를 가볍게 두 팔로 안으며 빙긋이 웃는 걸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서울에서 작별한 뒤 3년만인가? 우리는 요란한 인사치레 말은 하지 않았다.
이곳 주택은 아주 특이하고 재미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층인데 네 가구가 각기 독립 출입문을 갖고 있는데 단층에 있는 A의 집 앞에서는 다른 세 가구의 출입문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기분 상으로는 한 건물에 여러 가구가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며 실내에서도 다른 가구에서 전해오는 소음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집 내부 구조도 별로 넓지 않은 공간을 아주 쓸모 있게 잘 구획을 지어 배치해 놓았다. 침실은 두 칸, 거실과 주방과 화장실이 있는데 소가족이 살기에 적당한 구조였다.
A는 나를 데려온 이진과 차오에게 아주 친절하게 굴었다. 두 사람에게 자기 책을 가져와서 사인을 해서 한권씩 선물했다. 함께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일정이 바쁜 이진과 차오는 반시간쯤 거기 머물다가 차를 타고 시내로 돌아갔고 넓지 않은 거실에는 주인인 A와 손님인 나, 둘만 남았다.
“엘레오노라 지금 병실에 있소. 그래서 선생 접대를 못하오. 팔이 몹시 아파 내일 수술할 거요. 내일 엘레오노라 수술 때문에 내일 거기 못가요.”
A가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거기'란 니나가 있는 가브리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럼 언제 가브리노에 갈 수 있느냐? 묻고 싶지만 나는 잠자코 있었다. 지금은 그의 결정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
“가브리노, 모래 갑시다. 나도 허리를 다쳐 운전하기 어렵소. 병원에 가봐야 하오.”
“어떻게 다쳤지요?”
“며칠 전 욕실에서 넘어졌소.”
A는 얼굴을 찡그리며 한 손으로 허리 뒤를 몇 번 주물렀다.
“A선생, 무리하실 것 없어요. 내가 꼭 거기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니나는 고맙게 생각할 겁니다. 가브리노 가는 걸 서두르지 마시고 치료나 잘하세요.”
나는 진심으로 A에게 말했다. 살아있는 사람의 건강이 우선 중요하다. 그러나 A는 이 말이 내 진심이라고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기 갈 거요. 내일 수술 끝나고.”
A는 탁자 위에 있는 물병을 들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말했다.
“니나 만나는 것 중요해요. 나도 정신의 가치가 뭣보다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소. 그걸 아니까 내가 운전하고 같이 갈려고 하는 거요.”
작가니까 체면치레로 그냥 하는 말이 아닐까? 나도 A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A의 이 말에서 도리어 A가 나의 가브리노 행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브리노는 모스크바에서 가까운 곳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 하루 종일 차를 몰고 가야 한다. 날씨도 춥고 자기 몸도 불편한데 나를 차에 태우고 그곳으로 나를 안내한다는 일이 A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다.
나의 가브리노 방문에 대한 A의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걸 읽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진> 파클론 아드반치쿠 - 러시아의 민들레. 독성이 강해 정신착란을 일으킨다고 한다. 다차 뒷뜰에 서식
-니나는 본래 나의 오랜 친구이고 당신이 니나를 만난 것은 그때 며칠 사이 두세 차례 뿐인데 니나가 당신에게 그렇게 소중한 존재라는 게 맞아? 언제부터였지? 나 아니면 당신은 니나란 존재조차 몰랐던 것 아냐.
A가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나는 그 표정에서 읽었다. 그러나 노련한 원로작가는 자기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말했다.
“니나가 선생을 참 좋아했던 건 기억이 나오. 아주 좋게 보았던 거지. 본래 마음이 큰 사람이지만 그때만큼 처음 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걸 본 일이 없소. 좋은 땅을 거저 주겠으니 이곳이 맘에 들면 여기 집 짓고 와서 살라고 했지. 기억나오?”
“물론 기억하지요. 그 땅들, 돈 많은 도시 사람들이 욕심낸다던 그 땅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나요?”
“니나 죽고 나자, 동생 발로자가 술 마시느라고 죄다 팔아치워 버렸어. 집도 팔아치우고. 남은 게 하나도 없어.”
“발로자는 거기 있나요?”
“아직 마을에 있는데 오두막 같은 데 거처하오. 보기가 딱할 정도로 망했어.”
바깥이 점점 어두워졌다. A는 엘레오노라 대신 자기가 저녁을 마련해야 한다며 주방으로 건너갔다. 그 사이 나는 흡연을 위해 좁은 현관을 지나 바깥으로 나왔다. 입구의 계단에 서있는데 바로 지척에 있는 큰 소나무 쪽에서 까악까악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크기로 볼 때 굉장히 몸집이 큰 새가 분명했다.
새는 나무기둥에 붙어서 소나무 껍질을 쉬지 않고 쪼아대고 있다. 드디어 나무기둥에서 분리된 큰 나무껍질이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딱따구리일까? 까마귀일까? 러시아 숲에는 까마귀들이 서식하고 있는 모습을 가끔 보았다. 그러나 숲의 가지들에 가려 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피우던 담뱃불을 끄기 위해 땅으로 내려왔다. A는 벌써 두 차례나 불조심을 내게 강조했다. 숲속에서는 더욱 화재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정도는 나도 알았다.
나는 손에 든 담배를 땅바닥에 버리고 무심코 그걸 밟아 끄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담배가 버려진 곳 주변에서 쉬지 않고 움직이는 생명체가 눈에 띠었다. 수많은 생명체였다. 작은 개미떼들이 모래성을 쌓느라고 행렬을 지어 저녁이 다가오는 이 시간에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하마터면 나는 담뱃불을 끄려다가 나와 아무런 인연이 없는 그 러시아의 작은 개미떼들을 지옥으로 보낼 뻔했다. 7년만에 어렵게 찾아온 러시아 땅에서 비록 하치않은 개미의 생명이지만 나의 러시아 여행이 이들에게 끔찍한 불행으로 연결되는 우연의 도미노를 나는 결코 원하지 않았다.
A는 그 연배의 남자치고 요리솜씨가 좋은 편이었다. 식탁에는 밥과 국, 술 안주로 샐러드와 러시아 소시지 등이 차려져 있고 어디서 선물 받았다는 붉은 색 과일주도 한 병 놓여 있었다. 우리는 오랜만의 해후를 자축하며 건배를 했다. 술은 보드카보다 더 독해서 몇 잔 마시자, 금방 취기가 올라왔다. 두 사람 모두 애주가는 아니어서 술병을 서둘러 닫았다.
기분이 고조된 순간에 A와 마주 앉아 있을 때는 언어의 벽이 둘 사이를 더욱 완강하게 가로막고 있는 것을 느낀다. 7년 전 A를 처음 만났을 때 보다 이번에는 단절감이 더 심했다. 나는 러시아 말에 먹통이고-러시아를 여행할 때마다 이점이 늘 너무나 아쉬웠다-고려인 2세인 A는 한국말에 유아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이야기가 조금만 미묘하게 발전해도 거기서 막혀버린다. 7년 전 A를 따라 가브리노에 갔을 때는 그런 점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 자잘한 데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친분이 쌓여진 지금은 대화가 막힐 때마다 짜증이 생긴다.
이쯤에서 7년 전 내가 A를 처음 만나던 시간으로 되돌아가보자.
나는 3개월의 체재를 계획하고 러시아로 떠났다. 남들에겐 이런저런 러시아 일정을 부풀려 말했지만 실제는 일종의 도피 여행이었다,
서른 살 무렵에 잠시 몸 담았던 교직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나섰을 때 초기에 생활 자체가 어려웠고 전망도 뚜렷하지 않았다. 갑자기 벽에 부닥친 것이다. 나는 괴로운 청소년기를 보냈던 남쪽 고향 바닷가로 며칠 여행을 떠났다. 도피 여행이었다. 그 이후에도 어떤 딜레머와 마주칠 때마다 고향의 그 바닷가를 찾았다. 작가 생활의 이력도 쌓일 만큼 쌓이고 장년기를 훌쩍 지난 지금 그 방향이 고향의 바닷가에서 러시아로 바뀐 것뿐이다.
그 무렵에 좋지 않은 일 몇 가지가 내 신변에 일어났다. 현실에 환멸을 느끼거나 실망감을 느끼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누군가가 공개지면에 나에 관한 모함성 글을 게재했는데 흔치 않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 지면은 내가 수년 전 연재 작품을 쓰던 지면이고 그 글 게재자는 소싯적부터 나와 가장 가깝다고 알려진 동료 작가였다. 작가에게는 이름 몇 자, 그게 자산의 전부이다. 분노로 입술이 부르텄지만 마땅한 대응책도 없었다. 이것이 도피를 충동한 직접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로 가자. 몇 차례 다녀온 인연으로 그나마 조금 낯이 익은 땅이다. 러시아문학 전공자인 K 교수가 이때 고려인 작가인 A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A는 당시 카자흐스탄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가 모스크바로 돌아오면 나를 데리고 자기 다차가 있는 가브리노로 가는 걸로 일정이 짜여졌다. 대학 후배이기도 한 K 교수가 애써준 결과였다.
툴스카야의 허름한 소형 아파트에 자리를 잡고 나는 무료한 나날을 보내며 A가 카자흐스탄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A는 예정된 날자가 지나도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A는 어떤 사람일까? 그가 과연 일면식도 없는 나를 맞기 위해 나를 찾아줄까?
K 교수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나는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때까지 A에 관해 내가 아는 거라곤 오래 전 국내 문학지에 개제된 그의 자전 성격의 글을 몇 페이지 읽은 것뿐이다. 거기에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나온다.
-아직 작가로 입신하기 전, 청년기에 A는 모스크바 아파트 공사장에서 인부로 일한다. 처음 잡부로 일하다가 뒤에 타워크레인 기사가 되었는데 저녁이 되면 인부들이 모두 퇴근하고 사방이 고요할 때, A는 공중의 크레인 조종석에 홀로 앉아 거기서 바라보이는 모스크바 중산층 아파트의 내실 생활을 몰래 훔쳐보는 취미에 빠졌다. 고독한 이방인 청년인 그는 여인이 옷을 갈아입는 은밀한 장면을 자주 훔쳐보곤 했는데 그는 젊은 날의 이런 자기 행위에 대해 도덕적 자괴감을 느낀다고 자전에 쓰고 있다.-
이 장면을 읽고 나는 A라는 인물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사방이 어두워진 때 타워크레인의 조종석에 홀로 앉아 중산층 생활을 훔쳐보며 신분 상승의 열망을 끊임없이 키웠을 것이다. A에 대한 관심은 그러나 그 때뿐으로 그 이후 그를 까맣게 잊고 지냈다.
K 교수 말에 의하면 A는 고려인이지만 그의 러시아어 문체는 매우 정교하며 특히 러시아 중부 농촌지역 토속어 구사에도 능하다고 한다. 이런 미덕 때문에 그가 러시아 문단의 인정을 받았을 것이다. 러시아에는 톨스토이, 체홉 등 전통적 리얼리즘 소설이 주류로 되어있긴 하나 독자적 실험을 추구하는 전위(아방가르드) 계열의 작가들도 적지 않다.
어수선한 정치적 변환기이던 20세기 초에도 공상과 현실이 뒤섞인 환상적 작풍을 구사했던 에프게니 자먀찐(1884-1937) 같은 작가가 상당한 활동을 벌인 걸 보면 역시 이 나라의 문학적 잠재력이 큰 것을 알 수 있다. A도 전위작가 계열의 작품을 주로 써낸 걸로 알고 있다. 나는 A를 알게 된 이후 최근에 우리말로 번역된 그의 단편 두 편을 겨우 읽었을 뿐이다. 한편은 실험적 수법의 소설이고 한편은 평이한 스토리 소설인데 번역상 전달의 난점도 있겠지만 그다지 큰 인상은 받지 못했다.
툴스카야에서 동네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며 거의 한 달 가까이 지났을 때 드디어 A가 카자흐스탄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왔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이틀 뒤 A가 차를 가지고 내가 머물고 있는 툴스카야의 아파트 앞에 나타났다. A를 안내한 사람은 K 교수 제자인 현지 유학생으로 그는 그동안 A와 나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었다. 연락을 받고 나는 부랴부랴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브리노 다차에서 열흘 정도 보낼 거라면 거기 따른 준비물을 챙겨 넣어야 한다. 양말, 내의, 칫솔과 치약, 그리고 무엇보다 환전해둔 루블화, 읽을 만한 책 한두 권, 한 사람이 움직이는 데 참으로 여러 종류의 물건들이 뒤를 따른다.
“다차가 있는 랴잔의 가브리노는 경관이 뛰어납니다. 모스크바에서 십 년 거주한 사람도 지방의 그런 경관을 구경할 기회가 없어요. 선생님은 운이 좋으십니다.”
K 교수 제자가 내게 했던 말이다. 그는 한마디 더 보탰다.
“여기 한국 대사님도 초대받아 가브리노를 다녀오셨는데 A 선생과 함께 버섯도 따고 굉장히 좋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A는 아무나 거기 데려가지 않는다. 당신은 선택받은 것이다.’ 이런 뜻을 그 말은 은근히 암시했다. 물론 A는 내가 아니라 K 교수 체면을 봐서 나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는 이것저것 챙겨 넣어 꽤 무거워진 가방을 끌고 4층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일층의 구둣가게 앞에 지프 차 형태를 닮은 아주 낡은 ‘라다’ 한 대가 정차해 있었다. 라다는 오랜 기간 러시아의 보급형 국민차로 그 이름에는 ‘행운의 여신’이란 뜻이 있다.
몸집이 좋은 유학생이 달려와서 내 가방을 받아 차의 트렁크에 실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그가 천천히 운전석에서 나와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키가 좀 작은 편이나 몸집은 단단했고 코밑에는 수염을 기른, 나와 거의 비슷한 또래의 남자였다. 그 얼굴은 전에 사진에서 본 적이 있는데 아주 야무지고 고집이 세 보이는 인상을 풍겼다.
그는 웃지도 않고 한마디 말도 없이 내 앞에 와서 손을 내밀었다. 그는 드물게도 초면인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린 채 나와 악수를 했다. 이런 경우 보통 거만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는 분명히 조금 거만한 태도를 취했다. 고려인 신분으로 대러시아의 일급작가가 된 자부심을 그가 한순간도 잊지 않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A와 나는 함께 차에 올랐고 밖에서 제자가 손을 흔들었다. 차는 곧 구두 가게 앞에서 떠났다.
나는 뒷날 이 순간을 떠올리면서 ‘두 사람의 벙어리가 낙원을 향해 출발했다.’는 타이틀을 생각해냈다. A는 한국말은 겨우 유아 수준을 벗어난 상태이고 나는 러시아 말에 완전 먹통이다. 손짓 발짓, 거기에 약간의 초보적 한국말을 보조로 사용하면 그럭저럭 공동생활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명색이 작가인 두 사람이 만나서 열흘 동안이나 기초생활 유지에 머문다면 이 만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처음 K 교수는 박사과정인 자기 제자를 통역으로 동행시킨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제자는 논문 마감이 임박해서 시간을 낼 수 없다고 말했다. 예비박사님은 도리어 내게 반문했다.
“두 분 사이에 꼭 대화가 필요할까요? 아마 걱정 안하셔도 될 거라고 저는 생각하는데요.”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거의 한 시간이 지났으나 당연히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았다. 아마 상대에 대한 일정한 신뢰감이 내게 있었던 것 같다. 아파트 공사장의 타워크레인 조종석에 앉아 모스크바 중산층의 내밀한 생활을 훔쳐보던 청년을 나는 기억했다. A를 처음 본 순간 그 장면을 떠올린 것이다. 그 자전을 보면 자기 성찰의 솔직하고 진지한 고백들과 자주 마주친다. 그런 기억들이 처음 만난 A와 나 사이의 거리감을 지워버린 것이다.
두 시간쯤 차가 달린 뒤에 차는 어느 한적한 교외 주택가로 진입했다. 비교적 잘 지어진 큰 규모의 주택들이 모여있는 부촌이었다. 어느 2층 저택 대문 앞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건축업으로 재산을 모은 A의 새 처남의 주택인데 이곳에서 A의 새 아내가 된 엘레오노라가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레오노라는 오십대? 실제는 그보다 젊어 보이는 여성인데 본래 우즈벡에서 성장했고 근래에는 카자흐스탄에서 생활해온 인텔리 여성이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았을 때 엘레오노라가 처음 얼굴을 내밀고 나에게 인사를 했다. 역시 고려인 출신인 엘레오노라는 남편보다 약간 높은 수준의 한국말을 구사했다.
A의 새 아내를 만난 뒤에 나는 비로소 A가 왜 카자흐스탄에서 그렇게 오래 머물 수밖에 없었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러시아 여행을 계획하던 초기만 해도 그의 아내는 젊은 러시아 여성이었다. 그 사이에 그는 러시아 여성과 이혼하고 카자흐스탄으로 가서 고려인 출신의 엘레오노라를 만난 것이다.
이혼과 재혼, A의 경우는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결혼이 된다. 내가 만난 러시아 작가들은 대체로 두 번 세 번 결혼의 전력자들이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혼을 우리만큼 큰 사건으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작가나 예술가들 경우는 더 그런 경향이 강하다. 처음에는 약간 당황스러웠으나 곰곰 생각해보니 이혼을 죽음처럼 생각하는 우리 풍속보다는 도리어 그쪽이 더 합리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A의 처남 집에서 잠시 휴식을 가진 우리가 다시 출발할 때는 일행은 세 사람이 되었다. 엘레오노라가 동행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엘레오노라가 조수석에 앉고 나는 뒷자리로 물러났다. 가브리노는 모스크바에서 결코 가까운 곳이 아니었다. 중간에 조금씩 휴식을 취하고 가다 보면 어느덧 밤이 되어버린다. 다차는 국도에서 벗어나 숲의 사잇길을 한참 달린 뒤에 겨우 나타났다. 그런데 차가 국도를 벗어날 즈음에는 이미 주위가 어두운 밤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다차로 가는 숲 속 사잇길은 마치 풍랑을 일으킨 물결처럼 노면의 굴곡상태가 극심했다.
굴곡이 심한 숲 사이 길을 차가 마치 널뛰듯 요동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이런 험한 길은 난생 처음이었다. 몸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나는 손잡이에 매달렸다.
‘낙원으로 가는 길은 역시 쉽지가 않구나.’
나는 혼자 생각했다. A도 좀 민망했던지 뒤를 흘깃 보며 중얼거렸다.
“당신 이젠 집에 못 가요.”
엘레오노라가 웃었다. 그 말은 지옥길에 한번 빠졌으니 나는 서울 집에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농담이지만 내겐 진담처럼 들렸다.
차는 2~3킬로의 지옥길을 겨우 벗어나 조금 평탄한 숲길로 나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차의 속도가 점점 줄더니 몇 걸음 더 나가지 못하고 차가 그 자리에 서버렸다. 골골거리던 엔진 소리마저 뚝 멎었다. 19년 된 고물 라다 승용차가 지옥길을 통과하느라고 가진 힘을 모두 소진해버린 것이다. A가 혀를 끌끌 차며 차 밖으로 나갔다. 바깥을 흘깃 보니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차창으로 드리워진 긴 소나무 가지의 형체만 보였다.
엘레오노라가 차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A는 니나에게 갔어요. 나오세요. 곧 올 거에요.”
나는 그녀 말대로 차 밖으로 나가서 심호흡을 했다. 니나가 누군가? 그걸 묻고 싶었으나 묻지 않았다. 하늘에 먹구름이 끼어있는데 그 구름 사이로 달이 움직이고 있었다. 구름이 엷어지면서 잠시 시야가 조금 밝아졌다. 큰 호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저기 이층 집 보이세요?“
엘레오노라가 호수 건너편을 손으로 가리켰다. 건물의 희미한 형체가 바라다보였다. 어두워서 실제 거리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A의 다차에요. 수세식 화장실도 있어요. A가 니나에게 맡겨둔 열쇠를 찾으러 갔어요.”
차가 멈췄는데 다차까지 갈 수가 있을까? 차를 버려두고 짐을 들고 걸어서 가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호수는 또 어떻게 건너지? 나는 호수를 우회하는 지름길이 있는 걸 몰랐다. 구름이 달을 가리자, 희미한 형체나마 보이던 건너편 다차 건물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나는 자신이 찾아온 성 주변에서 끝없이 배회하는 어느 소설의 주인공을 떠올렸다. ‘역시 낙원에 이르는 건 쉽지 않구나.’
이십 분 쯤 지난 뒤 A가 돌아왔다. 니나네 마을이 근처에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우선 필요한 짐만 챙겨들고 니나네 집으로 가서 하룻밤 묵는 걸로 결론이 났다. 다차에는 내일 가기로 했다.
니나네 집은 차가 멎은 곳에서 아주 가까웠다. 짐을 들고 밭고랑 사이를 잠시 걸어가자, 통나무 울타리로 바람막이를 한 단층 목조주택이 나타났다. 경위야 어떻든 러시아 중남부 농가에서 뜻밖에 하룻밤을 묵게 된 건 행운이었다. 고물차 라다 덕분이었다.
좁은 마당 안으로 우리가 들어서자, 마당 한켠의 닭장에서 닭들이 웬 손님들이 찾아왔다고 자기네 끼리 쑤근거렸다. 집 주인 니나가 마루로 나와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니나는 칠순에 이른 노인이지만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아온 농촌 여성답게 얼굴이 구릿빛으로 그을렸으며 내 손을 맞잡은 손에서도 사내 같은 힘이 느껴졌다. 그때 니나가 처음 보는 내 손을 맞잡으며 마치 오랜 친구를 맞아주듯 살갑게 웃어주던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니나네 집에 들어설 때 나는 이미 솔제니친의 소설 <마뜨료나네 집>을 떠올렸다. 그 무대가 아까강 근처 농촌인데 니나네 집이 있는 가브리노 마을 역시 근처에 아까 강이 흐르고 있다.
우리는 농가의 거실에 앉아 주인이 내온 빵조각과 우리가 가져온 음료수로 급한 대로 간단한 저녁을 먹었다. 니나는 남동생 발로자 부부와 셋이 함께 살았는데 발로자가 집을 나가버린 아내를 찾으러 인근 소도시로 나갔기 때문에 지금은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러시아 농가의 거실 풍경을 흥미롭게 둘러봤다. 거실 안쪽 벽에 성모의 사진 액자와 예수의 사진 액자가 나란히 걸려있고 그 아래 제단에는 십자가 목걸이와 예수와 성모의 인형상 등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반대편 거실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말로만 듣던 농가의 뻬치카가 버티고 있는데 장방형의 이 뻬치카는 일인용 침대만큼 덩치가 커서 그 위에서 사람이 잠을 잘 수도 있다고 A가 말해줬다.
밤이 깊었고 먼 길 오느라고 지쳤기 때문에 나는 발로자의 빈 침대-사실은 침대라기보다 벽에 붙여놓은 널빤지-에서 잠을 잤다.
잠을 자다가 누군가가 모포 한 장을 내 몸 위에 덮어주는 바람에 잠시 잠에서 깨어났는데 아침에 내가 그 얘길 꺼내자, 니나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수집은 웃음을 웃으며 자기가 한 짓이라고 고백했다. 니나는 새벽 같이 일어나 손님들의 아침 준비를 했다.
식탁에는 검은 빵은 물론, 우유와 삶은 계란, 야채 샐러드가 나왔는데 이때 맛본 삶은 계란의 구수한 맛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았다. 그 맛이란 내가 어릴 때 고향에서 맛보던 그 계란 맛이었다. 수천마리 닭들을 닭장에 가둬놓고 집단 사육하는 양계장에서 나오는 계란에는 그런 맛이 없다. 내가 삶은 계란을 맛있게 먹는 걸 곁에서 지켜보던 니나가 주방으로 가더니 삶은 계란 몇 알을 더 가져왔다. 니나는 마치 정 깊은 누나처럼 흐뭇한 표정으로 A와 내가 맛있게 식사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니나 남편이 전쟁에서 폭탄 파편을 맞고 거길 다쳐 아이를 못 낳았지. 남편은 일찍 죽었어.”
식사 뒤 잠깐 문 밖 배추밭 언저리를 산책할 때 A가 들려준 말이다. ‘거기’란 생식과 관련된 남자의 신체 기관일 것이다.
A와 니나는 마치 오랜 소꿉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웃고 떠들었다. 두 사람이 즐겁게 얘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A의 신부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엘레오노라가 질투할까봐 마음이 쓰일 정도였다.
니나네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우리는 아침 일찍 차를 놓아두고 걸어서 A의 다차로 갔다. 가브리노는 과연 듣던 대로 풍광이 좋은 마을이었다. 다차가 넓은 호수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있어서 다차의 앞뜰에서 보면 마치 넓은 호수가 정원 안에 있는 것 같다. 호수 건너편으로는 니나네 마을이 아련히 바라다 보인다.
A의 다차는 그다지 호화 건물은 아니지만 아방가르드 작가답게 적어도 외관만은 주변의 다른 다차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는 건물이었다. 나는 아래층에 배정받은 방에 짐을 풀어놓고 먼저 앞뜰로 나가서 그곳에 있는 나무 벤치에 앉았다. 마침 햇빛이 밝게 일대를 비추고 있고 사방은 고요했다. 그곳에서 방금 떠나온 니나네 마을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온갖 시름이 다 사라지고 모처럼, 정말 오랜만에 평온한 마음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런 기분을 맛보려고 낙원을 찾아 헤맬 것이다.
내가 앉아있는 벤치의 바로 옆 자리에 딱 한 그루의 그 민들레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무릎 높이까지 자란 그 민들레가 키가 너무 커서 처음에는 어떤 종류의 식물인지도 몰랐다. 키도 그렇지만 이파리와 꽃수술이 한국에서 보던 보통 흔한 민들레와는 너무 달랐다. A가 이름과 함께 사람이 먹을 경우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독성을 가졌다는 걸 알려줬다. 나는 틈만 나면 앞뜰의 벤치로 나가서 시간을 보냈고 그때마다 파클론 아드반치쿠를 만나고 이 민들레와 대화를 나눴다.
‘다른 민들레는 보통 무리지어 서식하는데 너는 왜 혼자 여기 서있나?’
내가 물으면 민들레는 내게 되묻는다.
‘당신도 여기 혼자 있지 않나요?’
‘그렇군. 그런데 넌 어디서 여기까지 흘러온 거지? 고향이 어디야?’
‘고향 같은 건 없어. 여기저기 흘러다니다가 혼자 씨앗으로 여기 떨어진 거지.’
‘하긴 나도 너랑 비슷해. 몇 달 전까지 상상도 못하던 곳에 지금 와서 있는 거야.’
집 밖에 나오면 나는 언제나 이 민들레를 먼저 찾아봤다. 버섯을 따러 A와 숲으로 들어갈 때나 약숫물을 길러 약수터로 나갈 때도 파클론 아드반치쿠가 잘 있나 반드시 눈여겨보곤 했다. 열흘 가량 그곳에서 머물고 모스크바로 돌아가려고 다차를 떠날 때 나는 그 한 그루의 민들레와 작별하는 게 무척 아쉬웠다.
“잘 있어. 파클론 아드반치쿠!”
가브리노 다차에 머무는 동안 시간은 즐겁게 흘러갔다.
과거의 우울한 기억들에 늘 시달리던 나도 이때만은 그것들을 모두 잊고 가벼운 기분으로 즐겁게 지냈다.
가족들은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을까? 나와 단짝처럼 늘 붙어 지내던 강아지는 여전히 건강하게 뛰놀고 있을까?
문득문득 이런 걱정이 스쳐갔으나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었다. 내 신상 문제와 관련된 무거운 주제들은 되도록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날이 새면 잇달아 흥미로운 일들이 발생했기 때문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런 골치 아픈 생각들은 출몰하지 않았다.
내가 즐겁게 지낼 수 있던 것은 물론 전적으로 A의 거의 헌신적인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다. 하루의 모든 일정은 손님인 나를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A의 신부인 엘레오노라도 손님이 식사에 불편을 겪거나 부족함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갖은 정성을 다 기울였다.
우즈벡 출신인 엘레오노라 덕에 나는 우즈벡 식의 스프와 크고 딱딱한 빵도 처음 맛볼 수 있었다. 가장 즐겁고 상쾌한 일과는 숲으로 가서 버섯 따는 일이었다. 일대의 숲에는 각종 버섯들이 널려있다. 버섯들이 겉모양은 비슷하지만 어떤 것은 식용이 가능하고 어떤 것은 독성이 강해서 잘 못 채취했다가는 크게 낭패 볼 수가 있다. A가 몇 차례나 그 식별법을 가르쳐줬지만 모양이 서로 너무 비슷해서 나는 독버섯을 A에게 내밀다가 몇 차례나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날 채취한 작고 깨끗한 흰 버섯은 스프의 재료가 되어 식탁에 올랐는데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요리로 쳐줘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모스크바와 가브리노 사이를 오가는 길목에는 산에서 채취한 흰 버섯을 쌓아놓고 파는 인근 마을의 여인들을 쉽게 볼 수가 있다. 그 버섯들은 품질이 뛰어난 것들이 있는데 값도 만만치가 않았다.
A는 버섯을 따는 동안 자주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소리는 신통치 않았지만 본인은 매우 흥에 겨워 노래를 불렀다. 그가 부른 노래 가운데 <레비니슈까>란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래는 강을 사이에 두고 서있는 레비냐 나무와 참나무가 서로 사랑하지만 강이 가로막고 있어서 두 나무는 영원히 이별상태로 지낸다는 그런 내용이다.
레비냐는 앵두 같은 빨간 열매가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로 러시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몇 해 전 모스크바 외곽지역인 꾼쩨바에서 며칠 묵을 때 큰 레비냐 나무의 가지가 아파트 창에 스칠 듯이 가까이 뻗어있는 걸 봤기 때문에 나도 이 나무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노래 외에 A는 <하늘은 매우 넓어요>라는 러시아 동요도 흥얼거렸다. 다차의 뒷뜰에서 바라보면 확실히 러시아 하늘이 한국 하늘보다 넓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광활한 평야지대인 이곳에는 시야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차의 형태도 주인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전위작가이자, 한때 화가 지망생이던 A의 다차는 그의 취향대로 호수를 바라보는 전망 위주로 지어졌고 이웃 마을에 다차를 가진 작가 리추찐은 평범한 농부 같은 그 사람의 인상 그대로 전형적인 농가식 다차이다.
햇빛이 아주 밝은 날 정오쯤에 A와 나는 버섯을 따러 숲으로 갔다. 우리는 이 날 따라 벌에 쏘이는 걸 막기 위해 얼굴에 방충망을 썼다. 날씨가 화창하면 숲에 벌들의 활동이 활발해진다. 그런데 희고 깨끗한 버섯들이 전날 내린 비로 모두 망가져서 수확이 신통치 않았다. A가 혀를 끌끌 차더니 갑자기 버섯 따기를 중단하고 이웃 마을 누구네 집에 마실을 간다고 예고했다.
나는 찾아가는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다. 숲에서 벗어나 샛길을 한참 걷다 보니 무릎까지 자란 갈대밭이 나타났고 갈대밭을 지나자, 십여 호의 농가들이 사이좋게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그제서야 우리는 그때까지 얼굴에 쓰고 있던 방충망을 벗겨내 각자 손에 들었다.
하얀 머리에 얼굴에도 흰 수염이 더부룩이 자란 평범한 농부 같은 인상의 남자가 울타리 안에서 우리에게 손짓했다. 나는 그가 진짜 농부인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모스크바에서 역사를 소재로 삼은 작품으로 명성이 높은 작가 리추찐이었다. 그는 휴가철에 아내와 아이 둘을 데리고 다차로 와서 잠시 지내고 있는 것이다. 리추찐의 다차는 에덴이었다. 마당 입구의 사과나무에는 맛이 좋은 푸른 사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마당의 밭에서는 각종 채소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몸집이 큰 개 한마리가 집을 지키고 있고 마당 끝에는 작은 찜질방 비슷한 목욕시설도 설치되어 있었다.
그림을 그린다는 리추찐의 아내가 즉시 보드카와 검은 빵과 스마로지나(불루베리) 열매로 만든 잼을 탁자 위에 늘어놓고 손님을 청했다. 나는 첫 만남이라 집주인이 권하는 보드카도 한잔 마셨다.
“참, 이곳은 진짜 낙원이네요. 여기에 이런 낙원이 있을 줄이야.”
내가 집주인 내외에게 진심으로 했던 말이다. 리추찐 내외가 무슨 말인지 몰라 궁금한 표정으로 A의 해명을 기다렸다. A가 자신은 마치 내가 한 말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러시아 말로 뭐라고 짦게 말했다. 그러자, 리추찐과 여주인이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A의 한국말이 유아 수준이지만 그는 내가 하는 말을 용케도 잘 이해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밖에 없다는 걸 A는 직감으로 알았을 것이다.
리추찐은 다차에 와서 머무는 동안에도 노트북을 앞에 놓고 쉬지 않고 작품을 쓰고 있었다. A와 비슷한 연배인데도 여전히 왕성하게 글을 쓰는 그의 근면성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내게 서가에 진열된 자기의 저서들과 사진첩을 보여줬고 그의 매력 있는 아내는 거실과 현관에 걸려있는 자기의 그림 몇 점을 자랑 삼아 보여주기도 했다. 취미삼아 그린 그림인지 풍경을 사실적으로 옮겨놓은 그림들은 그다지 기억에 남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리추찐의 아내, 세 번째일 걸.”
돌아오는 길에 A가 묻지도 않은 말을 흉보듯 중얼거렸다. 자기의 세 번째 결혼이 뭐 특별할 건 없다는 말로 내겐 들렸다.
다차에서 차를 타고 삼십분 정도 달려가면 아까 강을 끼고 있는 유서 깊은 소도시 카시모프에 이른다. 별다른 산업체가 없어서 지금은 잠자는 도시처럼 조용한 곳이지만 여기에는 타타르와 몽골의 침공이 남긴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터키식 회교사원과 터키풍의 오래된 건물들이 여기저기 눈에 뜨이며 오래된 정교회 건물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아리따운 자매 둘이 시중드는 러시아식당도 있어서 그곳에 갈 때마다 그 식당을 찾았다. 아까 강은 강폭은 그다지 넓지 않으나 수량이 많고 강 양안에 우거진 숲들이 늘어서 있어서 경관이 좋은 편이었다. 가끔 낚시꾼도 잉어를 낚기 위해 아까 강을 찾는다고 한다. <아까 강을 지나며>라는 솔제니친의 엽편소설, 사회주의 몰락기의 농촌 풍경을 적절하게 그려낸 그 작품을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카시모프에서는 그 지방의 작가 시인들을 몇 사람 만나고 그들과 조촐한 보드카 잔치도 가졌다. 무엇보다 사냥꾼 이바노프가 재미있는 인물이었다. 체격이 건장하고 성격이 활달한 남성인데 그는 카시모프의 명물 같은 존재라고 A가 내게 귀띔해줬다. 이바노프는 사회주의 당시에 당의 고위층이 곰 사냥을 나올 때 전문사냥꾼 자격으로 그들을 자주 안내해준 인연으로 한때는 카시모프의 세도가로 행세했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이바노프는 놀기 좋아하고 처음 보는 이방의 손님에게 친절을 베풀 줄도 아는 멋진 사내였다. 그는 자청해서 카시모프 도시 안내를 내게 해주었고 몇 가지 짓궂은 농담-이를테면 카시모프가 맘에 들고 여기 오래 머물기를 원한다면 상냥하고 건강한 카시모프 여인을 내게 짝지어줄 수도 있다는-으로 내게 친밀감을 보여주기도 했다. 헤어질 때도 이바노프는 ‘우리는 이곳에서 반드시 재회해야 한다’는 말을 강조했다. 그는 카시모프를 사랑하는 사내였다.
니나네 집에는 틈이 나면 들르곤 했다. 어느 날 마침 집에 있는 남동생 발로자도 만났다. 그도 중년은 훌쩍 지난 사람인데 술만 마시지 않으면 색시처럼 수줍어하는, 아주 순박하고 착한 농사꾼의 전형이었다. 그런 사람이 술에 취하면 사나운 짐승처럼 돌변한다고 니나가 탄식했다. 오죽하면 아내가 집을 뛰쳐나갔으랴. 그 아내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누나의 탄식과 질책을 들으며 발로자는 부끄러운 듯 눈길을 내리깔고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러나 누나가 자리를 피하자, 금방 명랑하고 쾌활한 사나이로 변해서 A와 껄껄대며 갖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봐요. 니나가 당신 좋아하는 것 같아.”
거실에서 차를 마시는데 A가 눈웃음을 보이며 불쑥 내게 말했다. A는 장소 가리지 않고 농담을 잘한다. 니나도 맞은편에 앉아 차를 마시다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눈을 크게 뜨고 친구인 A의 표정을 살핀다.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앉자, A가 다시 말했다.
“니나 땅이 아주 많다. 여기 땅 모스크바 부자들 갖고싶어 하지. 그래도 니나 팔지 않았어. 당신이 여기 와서 살 거라면 니나 당신에게 땅을 줄 거래. 니나, 내 말이 맞았지?“
A가 궁금해 하는 니나에게 다시 러시아말로 방금 내게 한 말을 그대로 옮긴다. 니나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얼굴이 불그레해지면서 수긍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니나, 이 친구에게 땅 준다 했잖아.”
니나가 뭐라고 A에게 말해주고 A가 내게 그 말을 옮겨준다.
“그렇다고 했소. 당신 여기 살 거면 땅을 주겠다고 했소.”
니나가 스스로 어색한지 부엌으로 나가버렸다. 물론 니나 말은 다른 뜻은 아니고 잠깐 사귄 친구지만 친구로서 이곳이 정말 맘에 들면 땅을 줄 수도 있다는 단순한 친애감의 표시일 것이다.
상상이나 공상으론 가능하지 않은 일이 없다. 러시아 중남부 가브리노에 다차를 짓고 조용한 이국생활을 즐기는 것도 상상에선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지만 현실성은 하나도 없다. 상상 자체만으로도 잠시 즐거웠을 뿐이다. 무엇보다 니나의 우정을 얻었다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이었다.
가브리노 체재를 끝내고 모스크바 툴스카야 숙소로 돌아온 나는 맨 먼저 전자상가에 가서 우랄 합창단이 부른 <레비냐의 노래> 음반을 구했다. 전자상가에는 서울에서 온 B교수도 동행했다. B 교수는 얼마 뒤 야스나야 팔리아나에서 열리는 작가 미팅에 참여할 목적으로 날짜에 맟춰 러시아에 온 것이다.
가브리노에 가기 전 툴스카야에 머물 때 B 교수가 메일을 보내왔다. 내가 작가 미팅에서 낭독할 내용을 작성해 보내주면 러시아 말로 번역해서 가져오겠다는 것이다. 그 미팅 참가는 본래 내 예정에는 없던 것인데 가브리노에서 A도 내게 참가를 권했다. 여행지에서는 현지인이 권하는대로 따르는 게 상식이다. 나는 교수의 제안대로 십 여 매 정도 원고를 써서 메일로 보냈다. 노트북 컴퓨터를 앞에 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마치 친구에게 문안편지 쓰듯 원고를 금방 작성했다. 글 제목은 <나의 톨스토이>인데 이것도 B 교수 제안이었다.
이 일 때문에 미팅 현장에 갔을 때 나는 한바탕 큰 곤욕을 치렀는데 원고를 보낼 때는 전혀 상상도 못하던 일이었다.
전자상가에서 나는 우랄합창단이 부른 <레비냐의 노래> 외에 트럼펫의 명인인 티모페이 독시처(Timofei Dokshitser)의 음반 한 장을 샀다. 어느 도시나 그렇지만 대형 전자상가라는 곳은 소음과 북적대는 인파로 잠시 한숨 돌리기도 쉽지 않다. 가만히 서있으면 자꾸 떠밀려서 엉뚱한 장소에 서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그 바람에 나는 이 트럼펫 음반의 내용도 미처 살피지 않고 다만 독시처라는 연주자 이름반 보고 음반을 구입한 것이다. 명성이 높은 우크라이나 태생의 이 트럼펫 연주가를 나는 조금 일찍 알게 되었다. 90년대 초, 페테르부르그의 네브스키 사원 앞에 진을 치고있는 음반 노점상에게서 <로라의 추억>이란 부제에 끌려 우연히 그의 음반을 구입한 것이다.
숙소로 돌아와 뒤늦게 트럼펫 음반을 살펴본 나는 그 제명에 적지 않게 실망했다.
<JAPANESE MELODIES>. 이 제명을 그제서야 발견한 것이다. 만약 상가에서 그걸 보았다면 아마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이유보다 좋은 트럼펫 곡이나 다른 기악곡 연주를 기대하고 음반을 구입한 것이다. 동양의 민속적 가락을 구태여 트럼펫으로 듣고싶은 생각은 없었다. 독시쳐는 일본 연주를 왔다가 일본적 서정이 물씬 드러나는 이 노래들에 끌려 음반을 낸 것 같다. 나는 흥미를 잃고 음반을 한 구석에 치워놓았다.
며칠 뒤 좀 한가할 때 슬며시 호기심이 생겼다. 어떤 노래들일까? 독시처가 음반까지 낼 정도라면 뭔가 있지 않을까? 나는 그 음반을 컴포넌트에 올리고 볼륨을 작게 조절한 뒤 듣기 시작했다. 여나문 곡의 일본 노래들인데 작곡가가 각기 다르고 <사쿠라>처럼 작곡가 없는 전래 민속곡도 있다. 첫곡 <꽃들>을 듣고 두 번째 곡이 시작될 때 나는 갑자기 몸이 얼어붙은 듯 긴장했다.
<이른 봄의 노래>. 이 노래 선율은 내가 알고 기억하는 선율이었다. 나는 그 노래의 가사까지도 한 줄 빠트리지 않고 잘 기억해냈다.
봄이란 이름 뿐
바람은 차고 차다.
산골에 꾀꼬리는
옛 노래 생각나도
때 아닌 노래라고
부르지도 않고
때 아닌 하얀 눈만
쓸쓸이 내리네.
약간 쓸쓸하고 처연한 느낌을 주는 멜로디가 트럼펫의 금속성 음향에 실려 좁은 거실 안을 가득 채웠다. 노랫말까지 기억하는 걸 보면 한때 나는 이 노래를 무던히도 열심히 불렀던 것 같다. 나는 광복 이듬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이런 노래를 배우지는 않았다.
이 노래를 내게 가르쳐준 사람은 나와 일곱 살 터울인 나의 셋째 형이었다. 형은 오르간도 잘 치고 피아노도 다룰 줄 알았던 음악 지향의 소년이었다. 그런데 재능이 출중하면 질투의 악신이 따르는지 그는 열일곱 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것도 병사나 단순 사고사가 아닌 참혹한 학살의 희생물로 짧은 생을 끝냈다. 내 기억으로는 그가 떠난 이후 나는 <이른 봄>을 한 차례도 불러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거의 60년 만에 모스크바 변두리의 허름한 아파트 거실에서 그 노래와 다시 만난 셈이다.
우연이 겹친 것은 내가 러시아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 형의 죽음을 다룬 작품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작품은 조급증으로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부실한 점이 많이 드러나 일단 출간을 보류하고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육이오가 나기 바로 한해 전에 그 불행한 사건은 발생했다. 내가 열 살 때, 초등학교 4학년 때다. 7월 여름 한낮인데 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홀로 옆 뜰 배추밭 사이 고랑에서 서성이며 뭐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계셨다.
표정이 불안으로 가득했다.
무슨 일이야? 어머니.
네 형이 타고 가던 버스가 고갯길에서 공비(빨치산으로도 불렸다)에게 습격당해 몇 사람이 산으로 끌려갔단다.
이것 밖에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는다. 형은 연습하던 바이올린 줄이 끊어져 그걸 사기 위해 아침 일찍 광주행 버스에 올랐다.
열일곱 살 소년이 시골 작은 읍에서 처음으로 읍의 경계선을 벗어나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형이 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조반을 서둘러 먹고 깨끗이 세탁된 옷으로 갈아입고 있을 때 나는 형 옆에 붙어 앉아 나도 형을 따라 광주라는 도시에 가겠다고 마구 떼를 썼다. 다른 동생들도 있는데 유독 나만 형에게 매달렸다. 옳지 않은 행동에는 불 같이 화를 내는 형이지만 이유가 정당하면 늘 관대하고 너그럽던 형이었다.
-네가 광주에 가려는 이유가 뭐야?
-좋은 공책(노트)도 사고 연필도 살려고 그래. 여긴 그런 게 없어.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네 공책이랑 연필이랑 아주 좋은 걸로 사다 주기로 하면 어떠냐? 약속할게.”
-정말이야? 형.
-약속한다니까. 이렇게.
형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우리는 서로 손가락을 걸고 굳게 약속했다.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불안한 표정, 몇 마디 말에서 나는 이미 뭔가 크고 무거운 쇠망치 같은 것이 가족과 나의 정수리를 세게 내려친 듯한 절망의 기운을 느꼈다. 세상에 대한 전망, 이웃들에 대한 친애감이 내 머리와 가슴에서 그때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작품을 쓰기 전 취재를 위해 당시 버스에 동승했던 형의 동기생을 수소문 끝에 광주에서 만났다. 은퇴를 앞둔 은행의 임원으로 있던 그를 찻집에서 만나자 말자, 나는 대뜸 물었다.
“같은 또래인데 00 님은 살아남고 형은 그렇게 되었는데 그 기준이 뭐라 생각하십니까?”
“나도 일단 버스 바깥으로 끌려나갔다가 대장 지시로 풀려났네. 자네 형제 중에 잠시지만 경찰관 옷을 입은 형이 있지. 원인은 그거라고 봐. 자네 부친은 덕망 있는 교육자인데 이유가 될 수가 없지.”
은행 임원은 마치 오래 전 우화를 설명하듯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한마디 더 보탰다.
“참, 그 사람들이 내 숙부님이 진짜 고참 경찰관이었던 걸 알았다면 어땠을까? 가끔 그 생각하면 머리끝이 오싹하지. “
내 위로 형들이 몇 사람 더 있다. 우리 집엔 형제들이 누이 셋을 포함하면 축구팀 하나를 만들 정도로 많았다. 그 형들 가운데에는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의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가 다 있었다. 모두 그 배역에 썩 잘 어울리는 인물들이다. 성격상 다소 미약하고 애매한 배역이지만 스멜쟈코프도 있다. 알료샤는 세째 형이고 그는 비록 소년으로 삶을 끝냈지만 누구보다 이 배역에 걸맞는 인물로 기억된다.
둘째인 이반은 목포에서 가족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당시로는 도시 유학에 해당되는 학창 생활을 보냈지만 이렇다 내세울 취미도 지향점도 없는 무성격의 인물로 성장했다. 그는 향리에서 부친의 도움으로 잠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 그만 두고 드미트리가 있는 서울로 갔다. 서울에서 초등교사로 있던 드미트리 옆에서 식객으로 머물던 그는 어느 날 경찰 간부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전시가 되어 진급이 빠르고 출세의 지름길이 될 거라는 것이다.
가족들이, 내 기억으로는 특히 부친과 알료샤가, 맹렬히 반대했지만 이반은 육 개월의 경찰 간부 교육을 마치고 어느 날 금빛 견장이 번쩍이는 제복을 입고 가족 앞에 나타났다. 그는 장성의 지서장으로 부임했으나 산 손님들의 출몰이 빈번했던 당시 상황을 더 버텨내지 못하고 불과 삼 개월만에 사표를 내던지고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이반은 그 이후 다시는 경찰 근처에도 얼씬대지 않았다.
이반은 알료샤의 죽음에 어떤 자책감을 갖고 있었을까? 누구도 그에게 그것을 따져 묻거나 그를 탓하지 않았다. 망각이라는 좋은 치료제가 없다면, 비록 완전한 치료제는 아니지만, 우리 모두는 미쳐버렸을 것이다. 성격이 쾌활하고 특히 사교성이 좋은 이반은 친척들로부터 언제나 가장 좋은 평판을 받았다. 형제인 나조차 광주에서 셋째 형의 친구였던 그 은행 임원을 만나보기 전까지 그 오랜 기간 동안 알료샤의 비극의 직접 원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일조차 없었다.
톨스토이 영지인 야스나야 팔리아나는 모스크바에서 차로 네다섯 시간 걸리는 꽤 먼 거리에 있다. 웬만큼 지극한 열정이 없다면 외국 여행자가 일부러 찾아가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가는 길목 끝무렵에 큰 도시인 뚤라가 있는데 이곳에 톨스토이 재단 사무국과 출판국이 자리잡고 있다. 작가 미팅이 시작되는 하루 전 날 영지로 가기 위해 A와 엘레오노라, 그리고 나와 B교수는 모스크바에서 합류해 전세버스가 출발하는 교외지역으로 갔다.
뚤라의 재단사무국에서 일행들은 점심을 제공받았다. 햄버거 종류의 간단한 요깃거리였다. 참가자가 목에 걸고 다니는 등록명찰도 거기서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백 여 명이 조금 넘을까? 혹은 그에 못 미칠까? 버스를 타지 않고 개인 차편으로 현지로 찾아오는 사람도 적지 않을 거란 말을 들었다. 그날 오후 늦게 야스나야 팔리아나 영지에 도착한 뒤 각자 숙소를 배정받았는데 나는 B 교수와 같은 방을 배정받았고 A 부부는 다른 층의 방을 배정받았다.
그 숲 속에 그처럼 아담한 호텔시설이 설비되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영지 바깥의 러시아 식당에서 그날 저녁을 먹었는데 아주 푸짐하고도 맛이 있는 성찬이었던 것 같다. 식사 후에 카페 같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 보드카도 한잔씩 마셨는데 어디나 그렇듯 끼리끼리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였다. A 와 B 교수가 다른 곳에 가 있어서 잠시 나는 혼자 그들 사이에 끼어있었는데 아무도 카레이에서 온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그들끼리만 대화를 나눴다. 물론 내게 말을 걸어봤자, 내가 러시아 말을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외톨이의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왔을 때 A 가 이르쿠츠크에서 온 부일로프 라는 동년배 작가를 우리 방으로 데려왔다. 러시아는 땅이 넓어서 작가들의 거주 지역, 출신지역도 아주 다양했다. 참가자 가운데는 이르쿠츠크 말고 우랄 기슭의 카프카스 지역에서 혼자 외롭게 글을 쓴다는 부일로프라는 작가도 있었다. A가 유독 부일로프를 우리에게 데려온 것은 그가 흥미만점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베리아 호랑이 사냥꾼이었다. 그는 호랑이 사냥을 소재 삼은 장편소설 책을 몇 권 가져와서 우리에게 선물했고 사냥에 직접 참여한 자기의 생생한 사진도 몇 장 가져와서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호랑이 사냥꾼의 작가라니!
아무리 드넓은 러시아 땅이고 수많은 종족들이 거주하는 땅이지만 내겐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얼굴이 길쭉하고 몸이 건장해서 매우 정력적 인물로 보이는 부일로프의 놀라운 점은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시베리아 자연보호 운동가이며 현지의 풍광을 렌즈에 담아 외부에 알리는 사진작가이며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을 직접 지어낸 건축기사이며 카자크 기병대의 퇴직 대령이고 시베리아 소수민족 보호운동 단체의 리더였다. 부일로프는 시베리아 자연풍광을 찍은 사진들을 우리에게 선물하기도 했는데 그 솜씨가 만만치 않았다. A에 의하면 부일로프의 호랑이 소설은 수십만 권이 팔려나간 화제작이었다 한다. 한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능력과 재능을 주어도 되는 것인지, 부일로프란 인물을 보면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는 걸 느끼게 된다.
이 작가 미팅 참여자는 대부분 러시아 작가 시인들이지만 해외 참가자도 '세계대회'라는 걸개의 명칭에 그런대로 구색을 맞추고 있었다. 스페인에서 온 한 원로시인은 전문통역사까지 대동하고 있는데 그쪽에서 명성이 높은지 그 위세가 당당했다. 멀리 멕시코에서 건너온 평론가란 사람, 북경사범대학장이라는 러시아 문학 전공자, 이탈리아에서 온 작가 한사람, 그리고 까레이에서 온 B 교수와 나, 대충 이런 면면이 떠오른다.
몇 가지 행사가 있지만 핵심은 매일 오전 오후로 나뉘어 개최되는 세션이었다. 실내에서 거행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바깥 잔디밭에서 세션을 갖는데 참가자들 누구나 차례로 나와서 문학에 관해, 혹은 사회에 관해 자기 생각과 의견을 활발하게 개진하는 시간이었다. 특별히 사양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참여자 거의 대부분이 자기 차례를 활용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여기에 시간이 제일 많이 소요되었다.
시간 제한 같은 것이 엄격하게 적용 되는 것 같지 않고 어떤 사람은 좀 지루할 정도로 혼자 오랜 시간 동안 마이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신진이나 원로나 차별 없이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내세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일주일씩 계속되는 이 지루한 세션에 싫증을 내지 않고 끝까지 진지하고 열정적인 자세로 참여하는 모습도 내게 적지 않은 교훈을 주었다.
친절한 B 교수가 중요한 의견이 나올 때마다 내게 간명한 통역을 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토론의 대강의 흐름 정도는 파악할 수가 있었다. 어떤 원로작가는 근래 러시아 서점가를 점령하다시피 한 일본 유행소설, 특히 판타지 소설 범람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현했고 어떤 신예작가는 최근 중견이나 원로급 작가들이 러시아 사회 정치현실을 외면하고 비판의 붓을 꺾어버린 바람에 러시아 문학의 오랜 전통을 배반하고 있다고 아주 신랄하게 선배들을 비판했다. 그 신예작가의 주장과 패기가 무척 인상이 깊었다. 원로들도 별다른 불쾌한 반응 없이 이 젊은 작가의 열띤 주장을 끝까지 주의 깊게 들었다.
세션이 끝나기 하루 전엔가, 거의 끝 무렵에 드디어 내 차례가 다가왔다. 오후 두시쯤, 발표가 진행 중인데 A가 다가와서 곧 내 차례가 된다고 귀띔을 해줬다. 너무 오래 세션이 진행되었고 또 너무 지루했기 때문에 나는 내게까지 그런 기회가 올 거란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A가 잊지 않고 내 차례를 체크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도 내가 어떻게 대처할지 걱정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이때 내가 전혀 상상조차 못했던 신체적 이상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패닉이란 걸 처음 경험한 것이다. 머리는 하얗게 비어버리고 가슴은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쿵쾅거리며 마구 뛰었다.
나는 까레이에서 온 촌뜨기이다. 까레이의 문학적 위상이야 모스크바의 몇 군데 주요서점에 가서 보면 단박에 알 수가 있다. 아예 존재감이란 게 없는 것이다. 처음 와서 시내 몇 군데 서점구경을 했는데 일본 작가들, 유행작가, 문제 작가 할 거 없이 그들의 번역 저서들이 러시아 작가들과 거의 비슷한 비중으로 진열장을 장식하고 있는데 충격을 받았다.
까레이 책은 한 권도 발견하지 못했다. 미팅에 참여한 러시아 작가들과 해외 작가들 역시 까레이에 관해 아는 게 거의 없을 것이다. 까레이의 문학은 국내에서야 분파도 있고 몇몇 유명작가들의 위세도 있지만 외국에서 보면 현재로는 거의 존재감이 없는 게 현실이다.
게다가 나는 또 까레이를 대표할 입장도 아니고 자격도 없다. 분파의 멤버로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어 본 경험도 없고 국내에서도 남 앞에서 자기 일가견을 피력해본 경험조차 전혀 없다. 나는 외톨이이고 어느 젊은 평가의 글을 보니 초기부터 낯선 작품으로 일관한, 주류 밖의 인물로 그려놓고 있다. 러시아까지 와서 엉뚱한 일로 자기의 초라한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이곳 작가들이 내게 보인 그간의 무관심도 나의 패닉을 조장하는 데 한몫 거들었다.
패닉에 시달리던 나는 어이없게도 도망갈 궁리를 했다. 잠시 현장을 피해버린다면 나를 찾다가 곧 다음 순서로 넘어갈 것이다. 초등학생 수준의 단순한 작문을 발표라고 해놓고 웃음꺼리가 되느니 차라리 현장을 피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잔디밭 아래쪽으로 한참 내려갔다. 가다가 생각해보니 서울에서 본문 번역을 해서 여기까지 가져온 B 교수와 그리고 내 차례를 확인해준 A, 그의 신부 엘레오노라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들 모두 세션 현장에서 기대와 호기심, 약간의 우려감을 갖고 나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B 교수에게 돌아와서 넌지시 말했다.
“B 교수. 이걸 생략하면 안 될까요? 처음 예정에 없던 것이고 별로 내키지도 않는데요.”
“무슨 말씀이세요? 하셔야죠. 주최측도 기대하고 있는데.”
B 교수는 단호했다.
결국 나와 통역자인 B 교수는 호명을 받고 마이크가 있는 연단으로 나갔다. 나는 먼저 우리말로 '러시아 여행 중에 이 미팅에 참가하게 된 간단한 내역, 그리고 내가 발표할 내용은 친구인 프로페서가 러시아말로 여러분에게 전할 거란 사실 등을 인사말 대신 말했고 그 내용을 B 교수가 즉석 통역했다.
B교수는 미국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는데-당시 러시아는 아직 개방 전이고 우리와 교류가 없던 시절이었다-자기에게 러시아 말을 가르친 교수가 망명 러시아인으로 매우 고급스런 러시아 표준어를 구사하던 분이었고 그 바람에 아주 품질 좋은 러시아 말과 발음을 습득하게 되었노라고 내게 말했던 일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내 작문을 읽어 내려가는 B 교수의 러시아말이 옆에서 내가 듣기에도 아주 그럴싸하게 들렸다.
다음은 당시 발표 전문으로 처음 공개하는 셈이다.
<나의 톨스토이>
이번에 나는 두 번째 이곳에 왔다. 꼭 십년 전인 1995년 이맘때쯤 나는 모스크바에 왔던 길에 스승에게 첫인사를 드리기 위해 이곳에 찾아왔었다. 오는 길에 스승의 유택에 꽃을 바치기 위해 투라에서 장미 한 송이를 샀는데 꽃값이 아주 비싸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내가 톨스토이를 스승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의아스런 눈길로 나를 쳐다본다. 그래서 이런 말을 나는 쉽게 하지 않으며 아주 은밀한 장소에서 가끔 이 말을 한다. 이제 내가 그를 감히 스승으로 부르는 이유를 간략하게 말하겠다.
대학 일학년 때 나는 거리를 지나다가 우연히 노점에서 싸구려 책 한 권을 샀다. 책값이 일 달라도 되지 않는 이 책은 출처도 분명하지 않았고 종이 질이나 활자도 엉망이었다. 그 때문인지 지금 그 책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참회록>이나 <인생독본>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결국 이 책은 내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나는 강의실 뒤 구석에 앉아 이 책을 읽으며 너무나 많은 눈물을 흘렸다. 손수건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다가 그것으로 안 되어 소매 끝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또 옆 친구의 손수건을 빌려 눈물을 닦아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한꺼번에 많은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 왜 나는 그때 그토록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그 일이 생생히 기억된다. 나는 그때 글쓰기와 손을 잡는 언약의 의식을 치르고 있었던 것 같다.
전쟁, 가난, 폭력으로 죽어간 형제 등 이십 세 청년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스런 기억에 허덕이던 나를 그 글은 구해주었다.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인간의 위엄과 고결한 정신을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가를 그 글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그 글은 마치 활자 하나하나가 강철로 만든 화살촉이 되어 내 심장에 박히는 것처럼 내게 충격과 감동을 안겨줬다. 기독교에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듯 나도 그때 고결한 정신을 담은 글의 힘이 주는 성령을 받은 셈이다. 몇 달 동안 길을 걸을 때나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눌 때도 오직 나는 그 글의 성령에 넋을 빼앗겨 그 글만을 되뇌었다. 그의 몇 줄의 글은 마치 뇌성처럼 내 청각을 울렸다.
삶에 대해 진지하고 또 진지한 성찰을 가능케 하는 이 글의 힘이란 어디서 오는가? 그때 이전에 나는 글을 쓴다는 건 다만 재능으로 흥미로운 얘기를 전개하거나 자기 경험담을 멋지게 펼쳐놓는 일로만 생각했지, 그것이 삶의 자세를 성찰하고 의미를 규명하는 아주 심각한 작업이 될 수도 있다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것을 그 책은 내게 명백하게 일깨워준 것이다.
당시 아직 경제개발이 시작되기 이전의 한국에서 글쓰기에 투신하는 것은 밥을 굶는 것을 의미했다. 그때 내 희망은 외국어를 잘 공부해서 장차 경제개발 시기에 유능한 활동가가 되는 것이었고 가족들의 기대감도 컸었다. 나는 자신이나 가족의 이 기대감을 저버렸다.
-그렇다. 만약 이런 글을 몇 줄이라도 쓸 수만 있다면 한번 생을 걸어보는 것도 좋다- 한번 세례를 받은 나는 ‘굶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지금까지 굶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사실 그의 많은 소설작품들 가운데 내가 읽은 것은 몇 편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로부터 소설 기법이나 스타일을 배운 것이 아니고 백지 위에 글을 쓰는 행위의 엄숙한 의미와 가치를 배운 것이다.
처음에는 소설을 쓰지 않고 그 글과 유사한, 산문을 흉내 내다가 결국 특정한 장르가 필요해서 소설쓰기로 글의 형식을 바꿨다. 그는 분명히 나를 글 쓰는 사람으로 이끈 단 한 사람의 스승이다. 마치 마술사가 최면을 걸어 비록 잠시지만 한 사람의 사고를 바꾸어놓듯이 그는 높은 덕성, 강렬한 호소력으로 나를 이쪽으로 잡아 끌어준 것이다.
나는 오랜 전 무슨 이유로 잠시 감옥 생활을 경험한 일이 있는데 그때 옆에는 사형수나 이른바 흉악범도 있었다. 나는 그들과 가깝게 지내려고 애썼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이런 일은 작가의 본질적 기능은 아니지만 상대가 사기꾼이건 악인이건 그와 벗이 되겠다는 욕구와 충동이 내게 있다. 사람들이 모두 겁내는 그들에게 내가 자연스럽게 다가간 것을 보면 이런 충동을 지식인의 가벼운 허영이라고 볼 수는 없으며 나의 이런 기질은 톨스토이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다. 그 죄수들 얘기를 실제로 몇 편 쓰기도 했다.
최근에 나는 오래 전 살해된 형과 살해자의 얘기를 쓰기 위해 가해자가 태어나고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마을을 몇 차례 찾은 일이 있다. 그도 오래 전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의 행적을 뒤지고 그 사람 옆으로 다가갈수록 그의 체온이 느껴지고 호흡소리까지 들렸다. 나는 살해자 이전의 인간으로 그의 혼을 껴안아야 하는가, 이 문제로 갈등을 겪었고 지금도 이 갈등은 진행 중이다.
톨스토이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대응할까? 그것을 상정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나는 역시 쉽게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끊임없이 그가 간섭하고 내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것을 느낀다. 때로는 불편하고 귀찮고 고통스럽기도 하다.
이번 경우는 좀 특수 상황이긴 하지만 작가에겐 이것과 비슷한 상황이 드물지 않게 생긴다. 물론 작품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개인적 감정을 억제해야 하는 것이지만 증오의 대상인 인물의 영혼을 껴안는다는 것은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기독교도도 불교도도 아닌 보통 인간인 내가 그에 대한 증오와 연민이 교차하는 갈등에 시달린다는 것은 내 안에 톨스토이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 가장 고결한 인간정신의 길이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위대한 스승에게 이런 자리에서 경의를 표할 수 있게 해준 데 대해 감사한다.
2005. 9
B 교수가 글을 낭독하는 동안 청중석이 뜻밖에도 아주 조용했다. 평소에는 연사가 나와서 열변을 토해도 한쪽에서는 사담을 나누는 웅성거림이 으레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교수 옆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나는 이런저런 복잡한 상념에 얽혀 있느라고 분위기가 그렇게 조용하고 차분했다는 것도 낭독이 끝난 뒤에 알았다. 드디어 낭독이 끝났는데 어떤 여성 참가자가 사회를 보던 집사장에게 자기가 방금 뭔가 질문을 했는데 왜 대답이 없느냐고 투덜거렸다. 그러자, 콧수염에 풍채가 좋은 집사장이 여성에게 말했다.
“내가 지금 낭독에 정신이 팔려 당신 질문을 미처 못 들었소.”
그 집사장은 다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까레이가 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는지 그 이유를 이제 알았소.”
까레이를 선진국으로 비유한 것은 좀 과장된 느낌이 들었으나 집사장이 낭독 내용에 대해 아주 후한 평가를 내린 것은 분명했다. 집사장은 세션은 물론 모든 행사를 주관했으며 재단 내에서 실질적 권한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뒤에 A가 내게 다가와 내 글이 재단 공식 자료로 등재되었다고 알려줬다. 러시아 작가들의 반응은 겁을 집어먹던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어떤 원로 작가는 내게 다가와 나를 가볍게 포옹하고 한 손으로 자기 가슴과 내 가슴을 잇달아 짚어보이며
“당신 가슴에도 톨스토이, 내 가슴에도 톨스토이, 그러니까 우리는 같은 스승을 둔 친구요.”라고 말했다. 참가자 가운데 제일 젊어 보이는 작가가 내게 다가와 의자에 앉아있던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꺾고 앉더니 자기 작품이 게재된 잡지에 사인을 해서 내게 선물한 뒤 물었다.
“모스크바 서점에 가면 당신 작품을 볼 수가 있나요?”
이런 때는 정말 곤혹스러웠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지금이라면 러시아어로 된 단편 한편 정도는 알려줄 수가 있다. 박노자 교수가 이태 전 페테르부르그의 문학지 <네바>에 한.러 수교 이십주년 기념 한국작품 특집란에 번역 소개한 단편이다. 그나마 내가 선택한 게 아니고 박노자가 자기 취향대로 '군대 감방' 소재 작품을 고른 것이다).
이 신예작가에게 그가 기대한 답변을 주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안톤이란 이름의 이 신예작가는 지금 한창 촉망받는 신예라고 누군가가 곁에서 일러줬다. 조촐한 낭독 글에 대한 호평은 이어졌다. 중년 여성 시인이 내게 일부러 다가와 한마디 던지고 지나갔다.
“당신이 이 세션에서 가장 멋진 내용을 가장 멋진 형식으로 발표했어요.”
B 교수가 방금 그 말을 한 여성이 작가동맹의 사무총장이라고 알려줬다. 북경에서 온 중국인 러시아문학 연구자도 내게 다가와 동양의 이웃으로서 친밀감을 표시했다. 그밖에도 내게 다가와 손을 내민 사람이 몇 사람 더 있었다.
그 시간 이후 나는 무명에서 지명인사가 되었다.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오다가다 마주치면 웃으며 아는 체했고 식사 시간에 잔을 권하는 손들도 늘어났다.
“아, 나는 아무래도 러시아 체질인가? 이 사람들과 코드가 맞는 것 같지 않나요?”
잠시 우쭐해서 B 교수에게 이런 농담까지 했다. 러시아 작가들은 이방인이 거만하다고 여길 정도로 자부심들이 대단하다. 그들이 문학에 관해서는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 대신 자기 감정이나 생각을 솔직하게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그것도 자신감에서 나오는 행동일 것이다.
기분전환이 된 나는 그 행사가 끝날 때까지 거기 묵고 싶었다. 그런데 B교수 귀국 일정이 당겨져서 그와 나는 행사 종료를 며칠 앞두고 먼저 야스나야 팔리아나에서 나와야 했다. 내가 작가들이 모인 자리로 가서 먼저 떠나게 되었다는 하직인사를 했을 때 어떤 작가가 내게 말했다.
“당신이 가버리면 여기가 재미없어질 텐데.”
물론 짓궂은 농담이지만 그런 농담조차 싫지는 않았다. 나는 작가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나눈 뒤 맨 마지막으로 스승에게 하직인사를 하기 위해 어디서 꽃 한 송이를 구해 들고 가까운 스승의 유택으로 갔다. 건물들이 모여있는 데서 아주 가까운 자시에카 숲 속에 그의 유택이 있는데 그것은 사연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아기무덤이나 작은 동물의 무덤으로 볼 정도로 평지에 볼록 솟아있는 작은 규모의 무덤이었다. 이 무덤 곁에 있는 나무에는 다음 글이 새겨진 팻말이 걸려 있다.
-내 무덤을 만들기 위해 인부들(농노들)에게 어떤 사역도 시키지 말라-
물론 이건 이곳에 묻힌 사람이 남긴 유언이다. 그 팻말은 여전히 거기 걸려 있었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오게 될까? 나는 그의 유택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뒤에서 재촉하는 B 교수와 함께 버스가 대기하는 영지 입구로 나왔다.
모스크바로 가는 귀로는 이번에는 철도를 이용하기로 했다. 재단에서 내어준 버스는 영지에서 가까운 간이역까지만 우리를 데려다주었다. 간이역은 영지에서 차로 이십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이 역은 러시아 정부에서 톨스토이 영지를 위해 새로 만들어준 역이라는 말을 들었다. 역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데 그렇다면 이 역은 톨스토이가 만년에 부인 소피아 안드레예브나를 피해서 지향점이 모호한 방랑의 길을 떠날 때 출발 지점이던 야센키 역은 아닌 것이다. 아마 야센키 역도 이 신설된 간이역 부근에 있을 것이다.
간이역은 외부와 따로 경계선을 그어놓지도 않은, 열린 공간에 사무실로 보이는 작은 벽돌 건물 하나만 세워진 초라한 모습이었다. 철도직원 복장을 한 사람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평소에는 관리를 하지 않고 영지에서 필요할 때만 열차를 보내주는 그런 사설 역(?) 정도로 보였다.
9월이면 러시아는 벌써 겨울 찬 공기가 느껴지는데 이 날 따라 날씨는 따뜻하고 쾌청했다. 버스를 타고 온 일행들이 삼삼오오 짝지어 둘러서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사이 나는 플랫폼에 마련된 나무 벤치에 혼자 앉아 오랜만에 담배를 꺼내 피웠다. 영지에서는 숲이 많아서 불조심 하느라고 참여자들이 스스로 끽연을 자제했던 것 같다.
“당신은 감옥생활을 했다는데 죄목이 무엇이었소?”
영지에서 간이역으로 오는 도중 버스 바로 뒷좌석에 앉아있던 러시아 작가, 사십대, 많아도 쉰 살 이전으로 보이는 작가가 불쑥 내게 물었다. 내가 뭐라 하기 전에 옆에 있던 B 교수가 간명하게 대답했다.
“군대에서 군법을 어겨 잠시 군의 감옥 생활을 한 겁니다.”
그러자, 질문을 했던 작가가 조금 실망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 사람은 내가 대단한 정치범이나 사상범으로 오랜 기간 감옥생활을 했다는 답변을 기대한 것 같다. 사회주의 때나 제정시대 때나 러시아에는 유독 그런 인물들이 많다. 그 사십대 작가의 얄궂은 질문은 잠시 내 수치심을 유발했다. 언제 어디서나 나는 그 문제가 화제에 등장하는 걸 애써 피해왔다.
도망병? 도망 장교? 엄밀히 말하면 도망 장교후보생이다. 한국에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도망병은 아주 저급의 파렴치범으로 취급한다. 나는 장교후보로 입대한 뒤 훈련과정에서 무단이탈하여 다시 그곳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7년 만에 체포되어 특수군대인 그곳 사령부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 7년은 내 삶의 가장 어두운 부분이기도 하다.
대학 졸업 직후 시작된 긴 도피생활은 내 삶의 설계도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다. 나는 한때 이탈리아의 시인 살바토레 과시모도나 프랑스 시인 생 종 페르스처럼 글을 쓰는 외교관을 꿈꾸기도 했다. 그런 꿈이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슴푸레한 겨울 새벽 진해의 경화정거장에서 기차를 타는 순간, 모든 꿈은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그때는 그런 줄도 몰랐다. 왜냐하면 장교후보생은 주마다 치르는 영어, 논문 시험에서 낙제점만 받아도 그날로 퇴소시키곤 했던 것이다. 낙제점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동료 후보들도 많이 보았다. 만약 내가 특수 군대의 장교가 되는 걸 원치 않는다면 주마다 치르는 시험지를 백지로 제출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이 특수 군대의 오랜 전통인 폭력과 구타에 대해 상급자들에게 항의하고 심지어 별을 단 부대의 최고지휘자 방에 뛰어들어가 훈련과정의 구타를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했다. 나의 무모한 행동은 곧 집단체벌과 구타의 응답으로 돌아왔다. 나는 모두가 잠든 시간에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다 쪽에 제방이 설치되어 있어서 수심이 그다지 깊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있었다. 그러나 막상 바다로 뛰어들었을 때 물이 목에까지 차올랐다. 헤엄도 칠 줄 모르는 내가 어떻게 그 제방을 건너서 서치라이트를 피해 육지에 다달았는지 그 과정을 나는 세밀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거기서 십리 길을 걸어서 경화 정거장에 도착한 뒤 나는 새벽 상경열차에 오를 수 있었다.
대전에 공군에 근무하는 남편을 둔 누이가 살고 있었다. 물에 젖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잠시 누이 집에 들렀는데 내가 옷을 갈아입을 때 얼핏 내 엉덩이와 허벅지를 엿본 누이가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몸의 하반신이 온통 시커멓게 멍들어 있었던 것이다. 강군 육성을 구실로 매일 밤 자행되는 몽둥이 찜질의 흔적이었다.
흔히 ‘빠따’라고 하는 이 체벌은 이차대전 때 일본군이 남겨준 관행으로 보여진다. 나에게는 이 맹목의 체벌이 물리적 고통보다 정신이 파괴되는 것 같은, 인간으로 최소한의 자존감조차 유지하기 힘든 모욕감을 안겨주는 고통이 더 컸다. 절박한 위기감이 나를 엄습했다.
뒷날 대령으로 예편한 당시의 동료가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우리 동기들은 모두 자네를 만나보길 원해. 자네가 가고 난 뒤 확실히 체벌은 많이 줄었거든. 그들도 충격을 받은 것 같았어.”
대령 예편자는 동기들 모임에 나를 몇 차례나 초대했다. 그러나 낙오자인 나는 거기에 나가지 않았다.
순응하라. 잠시의 굴욕을 견디고 순응하면 복이 돌아올 것이다.
저항하라. 굴욕을 뿌리치고 저항하면 크고 무거운 재앙이 다가올 것이다.
7년의 어이없는 도피생활에서 내가 배운 교훈이다. 이 7년 동안 나와 대학동기이자, 사관후보 동기였던 한 친구는 대위로 의무연한을 무사히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학위를 받고 돌아와서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대학은 다르지만 어떤 친구는 비슷한 과정을 밟고 뒷날 국내 굴지의 대학의 총장도 되었다. 총장이 된 그 친구는 나와 신장이 비슷해서 훈련 받을 때 언제나 내 곁에 있었기 때문에 얼굴도 목소리도 잘 기억할 수 있었다.
그 7년 동안 나는 여관의 조바, 짜장면 한 그릇 값의 시급을 받는 변두리 아동미술원의 동화 강사, 역시 변두리 아이들 몇을 모아 가르치는 싸구려 가정교사 등을 전전했다. 그나마 할 일이 있으면 다행이었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할 일 없이 거리를 배회했다.
복개공사가 시행되기 이전의 청계천 6가, 영미교가 있던 부근의 바라크-물 위에 기둥을 세우고 거기에 방을 만든 수상(水上)의 집-에서 한 해 봄과 여름, 가을을 살았던 경험도 있다. 거기서는 굶주리는 날이 많았다. 결국 길가에서 파는 싸구려 음식을 허겁지겁 과식하다 급성위염에 걸려 반년 가까이 고생을 했다.
마지막 직업이 고양의 신설 공립중학의 영어교사였다. 시급제 동화강사에 비하면 크게 출세한 셈이다. 그러나 주민등록제가 시행되면서 신분이 탄로나서 수업중인 교실에서 체포되었다. 헌병대가 소재를 알고 학교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날로 동물원 우리를 닮은 사령부 교도소의 독방 하나가 내 차지가 되었다. 만원사례였던 그곳에서 다만 초기 며칠 동안만 나는 독방에 격리 수용되었다가 며칠 뒤 동료들이 가득 찬 일반 감방으로 옮겨졌다.
독방에 있는 동안 나는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밤인데 환청으로 바흐의 <첼로 무반주 모음곡 6번> 전곡을, Prelude 에서 Gigue까지 멈추지 않고 들었다. 처음엔 환청인줄 모르고 구내 천정 같은데 매달린 라디오에서 들리는 소리인줄 알았다. 관망대 위에 감시 헌병이 앉아 졸고 있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라디오 같은 건 없었다.
전곡은 23~24분이나 걸리는 곡인데 시작부터 종료까지 완벽하게 들었다고 볼 수는 없고, 아마 곡의 흐름을 따라 대충의 윤곽을 들었을 것이다. 그때 내가 아는 것은 이 모음곡의 6번뿐이었다. 그나마 단 한 차례, 그것도 음악실의 문 밖에 서서 들은 것이다.
구금되기 바로 며칠 전 나는 명동성당 입구에 있는 작은 음악실 <크로이첼>에 갔다가 미처 입장하기 전에 문 밖으로 흘러나오는 그 음악을 들었다. 카잘스 연주인데 난생 처음 듣는 음악이었다. 그 음악실에도 오직 6번만을 수록한 낡은 음반 한 장이 있을 뿐이었다.
그 음악을 듣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나는 음악실에 입장하지 않고 거리로 나와서 한동안 길을 걸으며 방금 들은 음악을 한없이 반추하고 또 반추했다. 그런데 한 차례 들었을 뿐인 이 음악이 독방에 앉아있는 시간에 거의 전체의 윤곽으로 환청을 통해 나를 다시 찾아온 것이다.
음악적 감수성과 기억력이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스스로 보통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일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두 번 다시 발생하지 않았다. 이유는 다른 데 있을 것이다. 자신이 절실하게 원하고 갈구하면 그것을 누군가가 슬쩍 손에 쥐어준다. 그게 신의 소행이라고 할 수도 있고 사람의 뇌파가 지닌 특수능력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순간에 왜 그 음악을 갈구했나? 나는 위안과, 비참한 자기 존재의 고양(高揚)을 간절하게 원했을 게 틀림없다. 위안과 자기 존재의 고양은 그 음악의 으뜸가는 미덕들이다.
그곳, 동물원의 우리를 닮은 그 사령부 교도소에 갇혀있는 동안 나는 두 가지 소망을 품고 있었다. 첫째는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에게 돌아가 내가 파렴치범이 아닌 걸 입증하는 것, 두 번째는 가급적 가까운 장래에 <크로이첼>로 찾아가서 이번에는 돈을 낸 당당한 손님으로 실내에 입장하여 느긋하게 그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소망을 완전하게 이루었다. 그것은 7년의 고행 끝에 내가 얻어낸 적지 않은 행운이었다.
A는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적어도 7년 전 내가 만났던 그 사람은 아니다. 그 사이 A가 서울에 두어 차례 다녀갔지만 손님으로 왔기에 그런 내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변화무쌍한 것은 예술가의 특권인가? 나는 작가가 예술가 범주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A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기도 하니까 다소 변덕을 부려도 용인되는 것일까.
“나와 엘레오노라, 곧 헤어질 거요. 우리가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거요.”
식사를 끝낸 뒤 거실에서 차를 마실 때 A 가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는 서울에서도 들은 바가 있다. 엘레오노라는 카자흐에 근거가 있고 전 남편과 사이에 낳은 자녀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카자흐로 돌아가 살기를 원한다. 친구들도 모두 그곳에 있을 것이다. 엘레오노라에겐 러시아가 낯선 외국이다.
“두 분이서 카자흐를 자주 방문하면 엘레오노라에게 위안이 되지 않을까요?“
“흠, 엘레오노라, 여기도 싫다 하고 가브리노 다차도 관심 없어. 우린 같이 살 수 없어. 나는 가브리노에서 살 생각인데 엘레오노라는 거기 아주 싫어해.”
가브리노를 싫어하는 엘레오노라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다. A에게 그곳은 한 시절 칩거하며 러시아 중남부 지방의 토속어를 익히고 창작의 꿈을 키우던 추억의 땅이지만 엘레오노라에겐 벗할 만한 친구 하나 없는 황량한 촌락일 뿐이다. 서로 눈이 맞아 열정이 뜨겁게 달아오를 때는 각자 지역에 매어있는 자기의 기반을 따져볼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인데 처음부터 너무 무모한 결합이 아니었나. 내가 그 점을 지적하자, A 도 할 말이 없다는 듯 히죽거리며 웃기만 했다.
다음날 엘레오노라가 A 혼자 나를 접대하는 일이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입원해 있는 병원을 나와 잠시 집에 들렀다. 그녀 입장에서는 내게 인사라도 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수술을 할 정도로 한쪽 팔을 많이 다쳤다는데 겉으로는 크게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제가 수술 마치고 내일, 아니 모래는 집에 옵니다. 그때 잘 모실 게요. 여기 파스테르나크 기념관, 아주 가까워요. 에푸뚜셍코 기념관은 더 가깝고요. 제가 천천히 안내해 드릴게요. 여기 머무시는 동안 마음 푸욱 놓으세요.”
“가브리노에 먼저 갈 건데...?”
A가 쌀쌀맞은 눈길로 아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가브리노 가셔야죠. 그럼 가브리노 다녀오신 다음에 여기로 또 오세요. 참, 니나! 니나가 선생님 많이 기다리겠어요. 저는 선생님 이해합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엘레오노라가 상대를 배려하는 너그러운 웃음을 입가에 흘렸다.
“아, 저는 아무래도 괜찮아요. 팔부터 먼저 치료하셔야죠. A가 요리를 잘 해서 아주 잘 먹고 있습니다.”
“낼 모래 수술 끝내고 퇴원하면 더 잘 해드릴 수 있어요.”
엘레오노라는 내게 미안한 감정을 표현하느라고 애썼다. A는 약간 화난 듯한 생뚱한 표정으로 엘레오노라와 나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엘레오노라는 국수를 삶고 새로 가져온 야채로 그날 점심 식탁을 마련해주고 병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엘레오노라가 내게 큰 빚을 진 듯, 유독 잘 대해줄려고 애쓰는 데는 이유가 있다. 2008년 그들 부부가 서울에 왔을 때 나는 가브리노에서 그들 부부가 내게 베풀어준 친절에 다소나마 보답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나 자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른 능력이 없다. 나는 마침 정치적으로 딜레마에 빠져 곤욕을 치르고 있던 M에게 도움을 청했고 M은 기꺼이 내 청에 응했다. 07년 대선에 나와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M은 비록 대선에는 실패했지만 당시 아직 현역 의원 신분은 유지하고 있었다.
M은 A 부부를 저녁 만찬에 초대했다. 그 자리에는 수입화장품 회사를 운영하는 후배작가 J도 엘레오노라에게 선물로 전할 독일 유기농 화장품 한 세트를 휴대하고 참석했다. 대학시절 시를 써서 상을 받기도 했다는 M은 A 부부를 극진히 예우했다. 이 자리가 계기가 되어 M은 한국의 자연을 화폭에 담아보고 싶다고 늘 말하던 A가 천리포 수목원에 한 달여 머물며 주변 바다풍경을 스케치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기도 했다.
이때 그린 그림들을 가지고 A는 지난해 화집도 내고 모스크바에서 전시회도 개최했다. 페레델키노 A의 서재에서 나는 A가 보여주는 전시회 관련 사진들을 여러 장 구경하기도 했다.
이렇게 따져보면 정작 내게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엘레오노라가 아니라 A 자신이다. 그런데 A의 얼굴에서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남편의 변덕을 잘 아는 엘레오노라는 그게 몹시 불안한 것이다.
페레델키노 작가촌에서 이틀을 묵었지만 A는 좀처럼 가브리노에 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말자, 그는 냉랭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오늘 가브리노 못 간다. 허리가 아파서...”
A는 소파에 앉은 채 자기 허리를 손으로 잇달아 주물렀다.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봐야겠어.”
나는 여러 가지로 운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손님으로 왔는데 주부는 팔을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고 A는 허리가 아프고 갈비뼈가 이상해서 숨쉬기조차 힘들다고 말하고 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도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가브리노는 경우에 따라 종일 달려가야 하는 먼 길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가브리노에 갈 수가 있을까?
그러나 한편으로 A의 증상에는 뭔가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A는 기분에 따라 아주 건강하고 활달한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갑자기 병약한 노인으로 변해서 신음소릴 토해내기도 한다. 나를 대하는 표정이나 말씨에도 변화가 잦았다. 기분이 좋을 때 그는 말했다.
“고리끼 문학대학 제자 한 사람 내일 오라고 했어. 내가 운전 힘드니까 그가 운전하고 가브리노 함께 갈 거요.”
A는 젊을 때 미술대학을 그만두고 고리끼 문학대학에 다녔고 훗날 거기서 강의를 맡기도 했다.
“그 친구 감각이 예민해. 나중에 당신 작품 러시아어로 번역할 때 그 친구 도움이 될 거요.”
그러나 몇 분 지나지 않아 A는 말을 바꾸었다. 그는 호흡이 어렵다는 듯 가쁜 숨을 몇 차례 몰아쉰 뒤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 친구 내일 오지 말라고 그랬어. 아무래도 내가 병원에 먼저 가봐야겠어.”
크세니아 카스파로바(Ksenia Kasparova)- 멋진 이름을 가진 이 젊은 아가씨는 자기 이름이 주는 느낌 만큼이나 마음이 순수하고 용모도 단정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던가. 대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 러시아 규수의 눈빛은 맑고 은근했다. 신장은 170 정도, 거기에 알맞는 체형을 가진 여성이었다. 페레델키노에 머물던 며칠의 기억 가운데 유일하게 즐거웠던 시간을 내게 베풀어준 이름이다. 둘째 날 아침부터 A는 서재를 정리하고 현관을 청소하느라고 부산을 떨었다.
코 밑의 수염도 가지런히 정리하고 셔츠도 새 걸로 갈아입었다. 예술계통의 잡지사 여기자가 얼마 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한국 풍경 스케치 전시회와 관련된 인터뷰를 하려고 이곳을 방문한다는 것이다. A는 새로 구입한 일본제 지프형 승용차를 타고 기차역으로 여기자를 데리러 갔다.
잠시 후 키가 늘씬하고 인상이 깨끗한 여기자와 함께 그가 돌아왔는데 A의 밝은 표정과 활달한 동작을 보면 그는 호흡곤란을 느낄 정도로 아픈 사람 같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서재에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나는 A의 권유에 따라 바깥 차도로 나가서 혼자 산책을 했다. 두 시간 가까이 걷던 길을 다시 걷고 또 걸으며 시간을 때운 뒤 처소로 돌아왔는데 인터뷰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거실에 앉아 있는데 A의 말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A는 자기 작업에 관해서는 무섭도록 철저한 집념을 보여줬는데 그런 점은 배울 점이라고 생각되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두 사람이 거실로 나왔고 A가 여기자를 내게 소개했다. 탁자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잠시 차를 마시는데 여기자가 조그만 카메라로 갑자기 나를 몇 컷트 찍었다. 크세니아는 양해를 구하는 대신 호의가 담긴 밝은 미소를 내게 보냈다. 받은 명함을 보니 크세니아의 능력이 만만치 않았다. 미술비평가, 사진작가, 패션 디자이너, 이 세 가지 명칭이 나란히 표시되어 있다. 크세니아는 틈만 나면 나를 여러 각도에서 카메라에 담았다. 이런 때는 당황스럽긴 하지만 기분이 언짢지는 않았다. 도리어 신경이 날카로운 A가 기분을 상하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선생님 작품, 러시아어로 번역된 걸 구할 수 있을까요?“
여기자가 짧은 영어로 내게 물었다.
“아, <네바>, 페테르부르그에서 나오는 <네바>라는 문학지에 짧은 단편 하나 소개된 것 있습니다.”
나는 이 답변을 하면서 조금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번역된 그 단편이 썩 내세우고 싶은 작품이 아닌 것이다. 리얼리즘이라는, 낡고 퇴색된 용어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감방 소설'을 좋아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단편은 07년 미국에서 출간된 내 단편집에는 끼지도 못했다. 번역자가 아예 제쳐놓은 것이다. 이 번역자는 이 번역으로 04년 미국 펜클럽에서 우수번역상을 받은, 문학적 안목으로도, 번역능력으로도 출중한 인물이었다.
“이메일로 그 작품이 게재된 잡지 호수를 저에게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아, 가능합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가면 이메일로 곧 보내드리죠.”
“꼭 보고 싶군요. 그 작품.”
크세니아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녀는 나와 더 많은 대화를 하고 싶어하는 표정이었다. 그 눈이 계속 나를 관찰했다.
그런데 이 여기자는 뜨내기인 내게 왜 그런 관심을 보였을까. 아마 A가 내가 없는 사이에 니나 얘기를 들려줬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다.
“글쎄 저 까레이 작가가 니나를 찾아서 이 바쁜 세월에 서울에서 여기까지 왔지 뭡니까?”
A의 이 한마디에 크세니아는 기자 본능으로 이방인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부쩍 솟구쳤을 것이다. 그녀는 내게 관심을 보이면서도 A를 충분히 배려했다. 만약 A가 없는 자리라면 그녀는 이렇게 묻지 않았을까?
“선생님에게 니나는 어떤 존재였죠?”
혹은
“이 먼 길을 니나의 무덤을 찾아오신 이유가 뭐지요?”
보기에 따라 무례한 질문이지만 기자라면 가능할 수 있다.
그런데 이날 인터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A이기 때문에 차마 거기까지 나가지 못한 것이다. 크세니아의 조심성과 밝은 품성이 그런 무례를 억제한 것이다. 크세니아는 앞뜰로 나와 헤어질 때까지 계속 내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A는 그녀를 다시 차에 태우고 기차역까지 데려다주었다.
크세니아가 내 프로필을 여러 차례 카메라에 담은 것, 그리고 러시아말로 옮겨진 유일한 단편 하나를 꼭 봐야겠다고 하는 것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와 용도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A로부터 니나 얘길 듣는 순간 예술잡지 기자인 그녀 머리에 내가 미처 생각도 못한 기발한 발상이 떠올랐을 수도 있다. 아무튼 크세니아와 마주했던 길지 않은 그 시간은 잠시 가브리노 행에 대한 시름을 잊고 유쾌하게 지냈던 시간이었다.
오후에 A는 자기 몸 상태를 진단받기 위해 나와 함께 차를 타고 가까운 병원을 찾아갔다. A는 갈비뼈 상태를 보기 위해 아무래도 엑스레이를 찍어봐야겠다고 말했다. 병원은 엘레오노라가 입원해 있는 곳과는 다른 곳으로 한국의 지방 보건소를 연상시키는 작고 허름한 단층 건물이었다.
그래도 마당이나 건물 복도는 진료를 위해 찾아온 환자들로 북적거렸다. 옷차림이나 행색이 대부분 변두리 빈곤층으로 보였다. 병원 복도는 사람이 많은데다 휠체어에 앉아 길을 막고 있는 환자도 있어서 통행이 불편할 정도였다.
A가 현관 접수구에서 표를 받고 어떤 방으로 들어간 뒤 나는 건물 밖으로 나와서 기다렸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비를 피할만한 마땅한 장소도 없었다. 마당에는 벤치 하나도 없었다. 나는 비를 조금씩 맞으면서 처마 밑에 웅크리고 서서 A를 기다렸다. 한 시간이 지났는데 A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제발 A의 가슴뼈에 이상이 없어야 할 텐데.’
지루한 기다림 끝에 A가 현관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의 입을 쳐다봤다. 그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차례가 오자면 저녁까지 기다려야겠어. 오늘은 안 돼.”
‘그럼 내일 다시 이곳에 와야 되나?’ 이런 말이 저절로 떠올랐으나 나는 A에게 묻지는 않았다. 우리는 차를 타고 시내 쪽으로 나갔다. 가는 길목에 아주 큰 정교회 건물이 있었다. 그 교회당을 지나칠 때 A는 재빨리 오른손으로 성호를 그었다. 처소에서 차를 타고 출발할 때도 A는 잊지 않고 성호를 그었다. 2005년 내가 A를 처음 만났을 때는 하지 않던 몸짓이다.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그때 다차에서 내게 신앙을 물었다. 내가 무종교라고 말하자, 그는 매우 실망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럼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게 누구 조화라고 생각하오?”
그 말에 나는 웃음만 지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마치 알기라도 한듯 정교회 건물을 지나 100미터쯤 달렸을 때 A가 자기의 신앙 자세가 근래 더욱 돈독하게 변했다는 취지의 얘길 들려줬다. 교회의 기도회나 강습회 같은 데 최근 참여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얘기였다.
서울에서 누군가가 '자기 믿음이 더욱 굳어졌다.'고 말하면 나는 그 사람과 나 사이의 벽이 더욱 높아졌다고 본능적으로 느낀다. A의 얘길 듣고 난 기분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숨을 쉬고 생명을 유지해도 믿음이 없는 존재는 돌멩이와 같다.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구원 받은 영혼.
강아지는 영혼이 없다고, 전에 어느 친구가 하던 말이 떠오른다. 영화감독인 그 친구는 열렬한 기독신자로 마주칠 때마다 내게 신앙을 권했다. 내가 농담으로 ‘우리 집 강아지와 함께 교회당에 가도 되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그 말을 했었다. 신앙인들이 보통 드러내는 불신자에 대한 강한 배타적 태도는 상대방을 영혼 없는 돌멩이로 보기 때문이 아닌가.
강아지와 함께 오래 살아온 나는 강아지와 인간이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강아지도 생각하고 맛이 좋은 먹을거리를 탐하고 즐거운 놀이를 시시때때로 시도한다.
나무나 풀은 어떤가? 그들도 숨을 쉬는? 생명이다. 다만 움직임이 없을 뿐.
가브리노의 다차 뒤뜰에서 자생하고 있던 러시아 민들레, 파클론 아드반치쿠와 거기 머무는 동안 나는 친구처럼 지냈다.
따로 일정이 없을 때 나는 그 옆에 앉아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대화가 없어도 친밀감을 느끼는 데는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하긴 그때 한국말이 서투른 A와 나 사이에도 대화는 거의 없었다. 다차에서 떠날 때가 되어 뒤뜰의 파클론 아드반치쿠에게 달려가 작별인사를 할 때 그 한그루 식물이 정말 그동안 나의 다정한 친구였다는 걸 절감했다. 그 작별이 그만큼 아쉬웠던 것이다.
A는 많이 변해버렸다. 내가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다. 나를 대하는 그의 표정과 말씨는 나를 자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그의 더욱 독실해진 신앙과 관련 있지 않을까? 그는 나를 먼 조상의 땅에서 힘들게 찾아온 친구라기보다 단순히 영혼 없는 한 개 돌멩이로 보는 건 아닌가. 조상의 땅이니 친구니 하는 건 믿음의 관점에서 보면 별다른 의미 없는 현세적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내게 친절과 예의를 베풀어야 할 이유를 상실한 것이다. 이런 생각이 나의 아둔한 망상이길 나는 바란다.
병원에서 나온 우리는 시내 변두리에 있는 일본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온 건장한 젊은이가 요란한 일본식 기모노를 입고 호텔의 도어맨처럼 요란한 제스처를 하면서 입구에서 손님을 맞았다.
그가 키르기스스탄 출신이란 건 A가 일부러 다가가서 그와 몇 마디 얘길 주고받은 뒤 내게 알려줘서 알게 되었다. 일본 식당은 러시아 시민들 구미에 맞게 음식을 기름지고 달콤하게 만들어 손님을 끌고 있었다. 초밥과 몇 가지 생선요리로 그런대로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A는 우리가 먹은 음식 1인분을 따로 포장해달라고 종업원에게 부탁했다.
“엘레오노라가 이 집 음식 좋아하오. 우리 이 집에 자주 왔었지.”
맛있는 음식을 보고 아내를 잊지 않는 걸 보면 A는 자상하고 충실한 보통 남편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아내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들러 그 음식을 전했다.
이른 저녁을 먹은 탓으로 그날 저녁 늦은 시간에 주방에서 가벼운 간식 시간을 가졌는데 보드카를 한잔 마신 A가 내게 불쑥 물었다.
“서울에 친구 몇 명 있소? 친구가 누구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친구라면...”
나는 질문의 의도를 몰라 뒷말을 잇지 못했다.
“아, 그냥 만나는 친구 말이오.”
“아, 저는 친구 없어요. 친구 서울에 한 사람도 없어요.”
나는 그 질문이 거슬려서 민감하게 반응했다. 왜 갑자기 A는 나를 만난 지 7년 만에 이런 엉뚱한 질문을 던진 걸까?
‘넌 친구도 없는 외톨이 아니냐. 그래서 여기까지 나를 찾아온 것 아닌가.’
A가 이런 생각을 했다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친구는 사방에 널려 있다. 그러나 근래에는 거의 혼자 외톨이로 지낸다. A는 혹시 유명인 작가 친구를 말한 것인가? 그런 친구들도 한 둘은 아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친교가 거의 없다.
작가들 사이의 우정이란 부질없는 것이다. 상대방에 관대하지 못한 내 성격에도 문제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A 당신은 친구 있소? 정말로 가까운 친구 말입니다.”
“아, 나도 친구 없소. 친구 갖기가 어렵지. 별 뜻 없이 물은 거요.”
친구 논쟁은 여기서 싱겁게 끝났지만 서로 얼굴을 붉힌 건 처음이었다. A가 엉뚱한 질문을 던진 진짜 의도는 여전히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오늘 가브리노 못 가오. 내가 너무 아파서.”
넷째 날 아침 조금 늦게 침실에서 나온 A의 첫마디였다. 그는 가슴이 몹시 아픈 듯 손으로 옆 가슴을 어루만지며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그의 얼굴 표정에서 그가 나를 지금은 몹시 귀찮은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에게 나를 가브리노로 데려갈 책임 같은 건 조금도 없다. 그런데 내가 마치 빚쟁이처럼 그에게 굴고 있다고 그는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저, 가브리노 가지 않을 겁니다.”
나는 빨리 생각을 정리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니나도 내 마음은 알아주겠지요. 체르무쉬끼 민박집으로 일단 가겠어요.”
A가 흠칫 놀라 나를 흘깃 한번 쳐다보고 말없이 자기 침실로 들어갔다. 그도 자기 생각을 정리하려는 것 같았다.
잠시 후 A가 나와서 말했다.
“그럼, 아침 식사 하고 내가 체르무쉬끼까지 차로 데려다주겠소.”
결론은 빨리 나왔다. A의 표정은 담담했다. A 입장에서는 차라리 후련했을지 모른다. A가 나를 극구 만류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환자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A는 내가 왜 니나를 찾아왔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그에게 그 문제에 관해 한마디도 해명하지 않았다. 사실 해명할 내용도 자신도 없었다. 적어도 거기 머물던 시간에는 나 자신도 자기에게 명확하게 해명할 수가 없었다. 내가 왜 만사 젖혀놓고 서울에서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그렇게 하고 싶었고 해야겠다는 필연의 욕구는 자제하기 어려울 만큼 강했다. 그러나 무슨 비즈니스처럼 뚜렷한 명목은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정신의 가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나도 알고 있소. A가 수차례 이런 말을 했으나 그건 겉치레 인사말에 불과했다. 그가 그런 말을 하면 나는 수긍하는 듯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나의 성묘 여행에 정말 심각한 동기가 있고 거기에 두 사람의 합의가 있었다면 가브리노 행을 이렇게 가볍게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A를 충분히 설득하지 못한 내게 책임이 더 있다. 충분한 소통이 어려운 언어문제도 있었다.
늦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서 잠시 휴식을 가진 뒤 A와 나는 차를 타고 체르무쉬끼로 향했다. 페레델키노에서는 사흘을 묵은 셈인데 다시 그곳에 돌아가지는 않았다. 작가의 기념관을 보겠다던 계획도 없던 일이 되었다. 작가촌을 떠나기 전 A가 내게 물었다.
“야스나야 팔리아나는 어찌 하오?
며칠 뒤 개막한다는 작기미팅 참여를 묻는 말이었다. 나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짧게 대답했고 그 문제는 그걸로 끝이었다. 7년전 야스나야 팔리아나 작가 미팅의 기억은 유쾌하고 즐거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 머리 속이 가브리노의 니나로만 가득 찼다.
민박집의 주인 이진과 주방 아줌마는 되돌아온 나를 가까운 친척처럼 반갑게 맞아주었다. 주방 아줌마는 새로 김치를 맛있게 담갔다면서 서둘러 점심 식탁을 마련했다. 그 식탁에 A도 자리를 함께 했다. A는 민박집 여인들과 아주 쾌활하게 얘기를 나누고 표정도 둘이 있을 때보다 훨씬 밝았다.
“아, 이 맛있는 김치. A선생에게 조금 드릴 수 있을까요?”
A가 김치를 맛있게 먹는 걸 보고 내가 주방아줌마에게 말했다. 주방 아줌마가 내 제안을 기꺼이 받아주었다.
그녀는 비닐봉지에 따로 김치를 재빨리 포장했다. A가 만족스런 얼굴로 말했다.
“엘레오노라가 아주 좋아하겠어.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이오.”
식사를 마치고 나는 A를 배웅하기 위해 그와 함께 아래층 현관으로 내려왔다. 현관문을 막 열려고 하는데 A가 돌연 팔 하나로 내 허리를 감싸안으며-한 손에 김치 포장을 들고 있었다-마치 톨스토이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처럼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용서하오...”
얼떨결에 나도 그의 허리를 팔로 감싸안고 더듬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난 A 당신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일단 이렇게 헤어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