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과 황태자(先生과 皇太子)
[감상] 1970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발표된 송영의 대표작. 작가 자신이 해병대 장교 교육을 받던 중 무단이탈, 7년간이나 사회의 밑바닥을 떠돌다가 군 감옥에 수감되었던 체험을 소설화한 작품이다. 상황의 덫에 치이게 된 내향적인 지식인이 절망감과 비관적인 세계 인식, 어둠에 물든 자의식과 좌절감에 시달린다. 특히 지식인에 대한 증오로 그를 노려보는 황태자는 현실적인 위협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선생은 인간의 실존적 한계 상황에 대한 동류의식을 통해 회복된다. 그의 울음은 그를 둘러싼 모든 비참과 절망을 해소하는 원초적인 공감대에 가 닿고 있다.
나는 어느덧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어쩌면 환자가 아닐까 하는 자각 증상에 사로잡히고 만 것입니다. 혹시 어디 아픈 데라도 없을까. 그때까지 몸에 이상이 있거나 이렇다 할 만큼 치료를 받아본 일이 없는데도 공연한 남들의 인사말,
요즘 어디 아프냐?
혹은.
자넨 밤낮 무슨 걱정거리가 그다지도 많은가?
이따위 인사말 때문에 자기는 정말 환자가 아닐까 하고 자꾸 자문해보다가 나중에는 자기 몸 어느 한 부분이, 아니면 거의 전체가 병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근거도 없는 의구심에 사로잡혀버렸지요.
게다가 자기가 남달리 걱정거리가 많은 사내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공연히 시달림을 받고 있는 사나이다, 하고 느끼는 증상은 더욱 심했죠. 웬만하면 표면에까지 드러내지 않아도 될 텐데, 자기 고민을 표면에까지 드러내는 건 어느 모로 보나 유쾌하달 수 없는 일인데 오죽하면 그걸 상대방이 금방 깨닫게 될까, 내 표정에서 그것을 감추고 지낼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했죠.
이 증상은 가속되어 이윽고는.
나는 병든 사나이다.
혹은.
나는 남달리 걱정거리가 많고 그리고 그것을 감출 수 없으리만큼 거기에 몹시 시달리고 있는 사나이다.
라고 스스로 규정지어놓고는 매사에 자신을 잃게 되었습니다.
여보. 그게 연애 이야기요?
맞은편 벽에 기대앉은 하사 하나가 이때 퉁명스레 물었다. 순열씨는 깜짝 놀란 듯 눈을 들어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그의 이야기를 가로막은 하사는 변소 바로 곁에 앉아 있었다. 그는 나는 너에게 기대고 있다, 기댈 만큼 기댈 테니 양해하라는 듯이 변소 옆 벽에 잔뜩 기댄 채 얼굴 윤곽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머리를 수그리고 있었다. 그래서 순열씨에게는 하사의 이마밖엔 보이지 않았고 그의 이마는 온통 굵다랗고 깊이 패인 주름투성이여서 순열씨의 시야에는 그 뚜렷한 주름살이 더욱 크게 부풀어올랐다.
저 사나이는 지금 왜 변소 곁에 앉아 있을까. 순열씨는 그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저곳은 그의 자리가 아니다. 순열씨를 중심으로 모여 앉아 있는 사람들로부터 그는 유독 혼자 몇자만큼 떨어져 앉아 있었고, 아주 편한 자세로 벽에 기댄 채로 머리를 잔뜩 수그리고 있는 걸 보면 하사가 지금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는 것은 물론 방금 질문을 던져온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도 질문의 목소리는 분명히 그의 것이었다.
그런데 왜 그는 저만큼 혼자 떨어져 앉아 있을까. 그는 혼자서 잠을 자고 있었거나 혹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왜 저기 변소 바로 옆에 앉아 있을까. 저곳은 그의 자리가 아니다.
순열씨는 입을 닫은 잠깐 사이에 맞은편에 앉아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하사에게 이렇게 머리를 썼다. 그는 약간 불안하기까지 했고 눈을 들어 다시 그 부풀어오르는 굵다란 주름살을 보았을 때 까닭 없는 불안은 더 심해졌다.
계속해요. 그냥.
이때 이 중사가 손으로 순열씨의 잔등을 가볍게 치면서 재촉했다. 그가 구태여 잔등까지 치는 걸 보면 이 중사는 벌써 순열씨의 마음에 스쳐가는 한 가닥의 불안을 읽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고참자답게 눈치가 매우 빠른 사나이였다.
비록 늘 눈을 가늘게 치뜨고 입을 지랄병자처럼 약간 헤 벌리고 있어서 이자가 잠자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느낌을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지만 그것은 중사의 얼굴에 밴 습관에 불과한 것이고 그는 잠을 자고 있거나 혹은 어떤 잡념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게 반수에 빠진 듯한 그의 눈과 그리고 여타 촉각은 실내의 구석구석까지, 또는 실내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 구석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눈치가 빠르다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 되지 못했고 중사의 눈치는 이미 귀기(鬼氣)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리라.
만약에 이때 중사가 손으로 자기의 잔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재촉하지 않았다면 순열씨는 맞은편 하사의 이마에 너무나도 뚜렷하게 혹은 사나우리만큼 굵다란 선으로 그어져 있는 주름살로부터 그의 멍청스런 시선을 거두지 못했을 게다. 그는 확실히 한 가닥의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 불안의 정체가 무엇인지 잘 잡히지 않아 한동안 멍청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데 중사의 가벼운 손길에는,
그 따위에 개의치 마시오.
라는 뜻이 분명 담겨져 있어서 그는 겨우 하사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중사는 순열씨를 껴안기라도 할 듯이 한쪽 무릎은 그의 무릎 밑에 밀어넣고 한쪽 무릎은 세워서 그의 잔등을 받쳐주고 있었다. 무엇을 받아먹기라도 하려는 듯이 앞으로 내어민 중사의 뾰족한 턱은 곧 그의 턱과 마주칠 것처럼 가까이 있었고 중사의 입에서 훅훅 내어뿜는 뜨거운 숨결에서는 고약스런 냄새가 자꾸 스며나와 그의 후각을 괴롭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여남은 명이나 되는 한방의 동료들도 순열씨와 중사를 둘러싸고 덩어리지어 앉아 있었다. 그들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도 한결 같이 뜨거운 숨결이 내뿜어졌고 그리고 그 숨결에는 모두 순열씨의 후각을 괴롭히는 고약스런 냄새가 스며나왔다. 그들의 냄새는 한결같이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개고기를 구운 것 같은 약간 노린내에다 썩은 푸성귀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가 섞여 있는 냄새, 그러니까 그것은 거리의 싸구려 음식점 주변의 하수구에서 맡을 수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냄새였다.
순열씨는 그 특유한 고약스런 냄새들로 자기가 겹겹이 에워싸여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고 그들의 눈이 자기의 입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으며 그들의 가쁜 숨결이 그들이 지금 매우 초조하게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믿어졌으므로 이야기를 계속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실은 이게 그 이야기의 전제로서 필요했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그냥 이걸 생략해버리고 연애 이야기로 들어간다면 다음 이야기에서 내가 왜 그렇게 했을까, 왜 일을 그렇게 처리했을까에 대해서 당신들이 이해하지 못할까봐 그러는 겁니다.
그는 방금,
그게 연애 이야기요?
라고 사뭇 퉁명스레 질문을 던진 하사의 존재를 계산하고부터 이렇게 부연했다. 그렇지만 그가 지금 자기의 이야기를 과연 듣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지금 변소 옆에 바싹 붙어앉아 있고 그곳은 무리지어 앉아 있는 이쪽에서 몇자 떨어진 곳이었다. 그곳은 그의 자리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순열씨는 그의 질문에 한마디도 부연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지는 못했다.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순열씨는 곁에 있는 중사의 얼굴을 향해 다시금 말했다. 중사는 입을 비틀고 비쭉 웃어보였다. 두터운 아랫입술을 삐뚜름히 내밀고 그가 소리 없이 웃을 때는 귀여운 느낌마저 주었다. 하여튼 그의 얼굴이 평온한 채로 있을 때는 얼굴에서 이따금 어린애의 얼굴을 발견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감방장의 권위를 찾기 위해 표정을 일단 딱딱하게 만들거나 또는 누구에겐가 고함을 지르거나 발작적으로 주먹 혹은 발길을 휘두를 때는 그 귀여운 웃음이나 어린애의 얼굴은 찾을 길이 없는 것이다. 그 무서운 얼굴이 저토록 귀엽게 표변하는 데 대해 순열씨는 내심 몹시 감탄하고 있었다. 빨리 하슈라는 듯이 중사는 지금 그 귀여운 웃음을 보내주고 있었다.
바로 이런 까닭 때문에 어느 날 나는 한강 백사장을 찾았지요. 아마도 여름 휴가였을 거요. 굉장히 뜨겁고 무더운 날이었으니까. 한강 백사장은 끝없을 만큼 넓어요. 한남동에서 철로가 있는 둑으로 올라가보면 거기 사장이 얼마나 넓어 뵈나 단숨에 알지요. 옳지 되었다, 하고 우리집 마루에 앉았을 때 생각한 겁니다.
뭘 말요?
참지 못해 중사가 물었다.
들어보슈.
순열씨는 귀여운 고참자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한 장소에 오래 서서 살을 태운다는 것은 일종의 형벌 아니겠소? 그러니까 좀처럼 그짓을 감행한다는 건 어려웠단 말이죠. 그런데 이 넓은 백사장을 걸어간다면, 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백사장을 끝없이 하염없이 걸어간다면, 너무 빨리 걷지 않고 조금 천천히 걸어간다면, 물론 하늘을 보고, 그러면 멋들어진 산보와 살 그을리는 일을 동시에 할 수가 있다는 생각이 우리 집 마루에 앉았을 때 떠오른 겁니다. 나는 그길로 한강 백사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백사장에서 산보했다는 얘기는 생략하죠. 내가 멋들어진 산보를 했건 말건, 혹은 거기서 진짜로 살을 태울 수 있었건 역시 태우지 못했건 그건 별로 관련이 없으니깐.
하여튼 두 시간쯤 사장에서 보내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시간은 오후 두세 시 무렵, 해가 제일 뜨거운 때였죠. K동의 언덕배기를 걸어 올라와 한숨 돌리고 비교적 평평한 한길을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누군가 걸어왔소. 주위는 주택가였는데 모두 새로 들어선 집들이어서 비교적 집들이 깨끗했지요. 그래서 난 그 마을을 신흥촌이라 불렀지요.
그러니까 그 신흥촌 입구를 막 들어선 참에 맞은편에서 누가 온 겁니다. 흰 옷을 입어서 햇빛의 반사 때문에 처음엔 사람이 잘 보이지 않다가 점점 가까워지니까 윤곽이 드러납니다. 나는 햇빛 때문인지 또는 다른 무엇 때문인지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이 내 앞에 바싹 다가올 때까지 그게 그토록 예쁜 처녀라는 걸 느끼지 못했지요. 아니 그게 그토록 예쁜 여자였기에 내 눈이 어릿어릿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녀가 바싹 내 앞에 다가왔을 때에야 나는 그 여자가 참말 예쁜 여자라는 것, 마치 숲에서 나온 요정처럼 예쁜 여자라는 것, 당신들 영화에서 요정을 보았겠지만 팔등신이 아니면 얼굴이 제아무리 예뻤댔자 요정으로 보이지는 않는 법이요. 그 여자는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곱고 늘씬했소.
내가 그걸 깨닫고 너무 충격이 커서, 하필이면 백사장의 산보에서 돌아오는 길에 행인 하나 없는 한길에서 딱 둘이서 마주쳤다는 사실에 너무 충격이 커서 머리 한구석이 찌르르 울렸을 때는 때가 이미 늦어버렸소. 그녀는 잽싼 걸음으로 나를 지나쳐간 거요. 물론 때가 늦지 않았던들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곧 뒤로 돌아섰는데 그녀가 계속 걸어가면 미행할 참이었죠. 우선 할 수 있는 일은 미행해서 그녀가 어디 사는 누구라는 걸 알아두는 것뿐이었으니까. 일단 그걸 알고 난 뒤에 차츰 방법을 생각해야 되니까.
그런데 이 여자는 몇 걸음 더 걷지 않아서 바로 길가에 있는 어떤 집의 대문 앞에 서는 것이었소. 나도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소. 그렇지만 그녀는 나를 느끼지 못했는지 뒤쪽의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을 들어 대문의 벨을 눌렀소. 참 하얗고 포동포동 살찐 손이었죠. 찌이 찌이 벨소리가 울리고 이어서 집안에서 누군가 신발 끌고 나오는 소리가 들렸고,
인제 오니?
응.
하는 콧노래 같은 가벼운 문답이 들린 뒤에 문이 열렸소. 거기까지밖에는 기억이 안 나요. 문이 언제 열렸는지 그녀가 언제 집안으로 들어가버렸는지 얼떨떨한 기분이라 도무지 느끼질 못했거든요. 하여튼 그 여자가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거요. 그러니까 처음 눈앞에 나타나서 사라질 때까지 불과 몇초 걸린 셈이죠.
그래서 어떻게 된 거요?
중사가 성급하게 재촉했다. 그는 거의 입이라도 맞출 듯이 순열씨의 얼굴에 그의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그런 뒤에!
하고 순열씨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때 관망대에서 귀찮아 내뱉는 듯한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다.
정좌.
관망대의 난간에 어깨를 기대고 졸고 있던 근무자는 몸을 일으키고 드높은 천정을 향해 한바탕 기지개를 켠 뒤에 방금 내린 자기의 지시가 제대로 이행되었나 보느라고 눈으로 한 바퀴 반원을 그렸다. 새하얀 파이버 밑에 가려진 그의 눈은 표범 눈처럼 반짝거렸다. 그리고 독기마저 내뿜고 있었다. 방금 조느라고 게슴츠레했던 눈이 어느 사이 그렇게 빛과 독기를 한꺼번에 뿜어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순열씨는 이야기를 더 계속하지 못했다. 근무자의 작은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순열씨를 둘러싸고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허둥허둥 제자리를 찾아 순식간에 흩어져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순열씨의 곁에 남은 사람은 겨우 이 중사 한 사람뿐이었다. 그곳은 그의 자리였던 것이다.
본의 아니게 이야기를 중단한 순열씨는 그의 얘기에 귀기울여주고 있던 2호 감방의 동료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했다. 그가 조금 이야기의 템포를 빨리했더라면 근무자의 지시가 내리기 전에 이야기를 끝마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야기가 늦어진 것은 그가 이야기를 충실하게 끌어가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편히쉬어 자세가 아니라면 이야기는 도무지 불가능했다. 그나마도 맨 앞에 앉아서 참새잡는 당번이 끊임없이 근무자의 거동을 지켜보아야 했고 거기다가 어느 정도까지는 재소자의 수칙이나 근무자의 권위로부터 이탈해보겠다는 이 중사의 대담한 배짱이 밑받침하고 있었다.
순열씨는 계면쩍은 표정이 되어 꼼짝도 하지 않는 동료들의 중머리 뒤통수들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는 이 중사와 나란히 맨 뒤에 앉아 있었으므로 이 위치에서는 삼열 횡대로 정좌하고 앉아 있는 동료들의 중머리 뒤통수들이 모두 한눈에 바라다보였다. 그들의 중머리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으므로 뒤쪽에서 보면 마치 여러개의 같은 석불상이나 목불상들을 나란히 앉혀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불상들은 실은 생명이 전혀 없어 뵈는 것이다. 정좌할 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뒷모양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않는 듯이 보였고, 꼼짝도 하지 않는 삼열 횡대의 뒤통수들에서는 정말 생명의 자취라곤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이렇게 느껴질 때 순열씨는 어쩐지 소름이 끼쳤다.
내 얘긴 그년을 어떻게 조졌느냐 이거요.
이때 이 중사가 2호실 안에서만 들릴 만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순열씨를 슬쩍 돌아보면서 말했으나 그 귀여운 웃음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의 표정은 정좌할 때 그가 늘 그러듯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렇게 굳은 표정으로 중사가 말하는 것은 그가 참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 중사의 참말에 대해 실내에서는 아무도 웃는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은 웃을 만한 시간이 아닌 데다가 그보다도 이 중사의 참말은 그들에게도 역시 참말이었던 것이다.
근무자는 관망대에서 내려와 동물원의 우리처럼 반원으로 늘어선 감방 앞을 천천히 걸어다녔다. 복도의 시멘트 바닥에 군화가 부딪치는 발자국 소리는 마치 초를 헤아리는 시계추 소리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또렷하게 들려왔다.
하여튼 박씨의 구라는 삼삼해. 놀랐어.
마침 발자국 소리가 7호, 8호 쪽으로 멀어져간 사이에 중사가 말했다. 그러자 중사의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정 하사가 불쑥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게 삼삼하다구요? 난 통 싱거워서 못 듣겠는데.
강 하사는 순열씨의 구라 솜씨를 칭찬하는 이 중사의 말에 화가 나서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버럭 소리쳤다. 그는 뒤쪽의 두 사람을 부릅뜬 눈으로 한바탕 흘겨보고는 곧 다시 얼굴을 앞으로 돌렸다.
뭐라구? 이 새끼가 갑자기 미쳤어.
이 중사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의 큰 주먹이 하사의 뒤통수를 맹렬하게 갈겼다. 하사의 머리에서 퍽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방금 자기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곧 깨달은 듯 꼼짝도 안했다.
이 새끼.
중사는 노기로 숨가쁜 소리를 내면서 자기 말을 부정한 인간에게 같은 주먹질 몇번인가 되풀이했다.
이 새끼, 그 소리 다시 한번 해봐.
근무자의 발소리가 멀어졌을 때 중사가 나지막한 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의 어조에는 어느덧 노기가 사라졌고 비양거리는 투의 장난기마저 섞여 있었다.
한차례 주먹 세례를 받은 정 하사는 여전히 꼼짝 않고 등을 보인 채 앉아 있었다. 그렇게 참아내는 그는 누구보다 중사의 발작적인 노여움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중사의 주먹질이 몇 번으로 그친 것을 도리어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넌 선생에게 모욕을 주었어. 이 새끼야, 날 따라 말해. 선생의 구라는, 아니 선생님의 구라는 삼삼합니다.
그래요. 선생님의 구라는 삼삼합니다.
마지못해 모기소리처럼 작은 소리로 정 하사가 복창했다.
이 새끼, 한 대 더 맞아야 알겠어? 기합이 빠져 있어 이 새끼야, 다시. 선생님의 구라는 삼삼합니다.
이번에는 감방 밖에까지 소리가 들릴 만큼 큰소리로 복창했다.
뭐야? 뭐라고 했어?
이때 2호 앞으로 걸어오던 근무자가 철창 안을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아니오. 아무것도 아닙니다.
맨 뒤쪽에서 이 중사가 황급히 대답했다. 그는 엉겁결에 몸을 반쯤 일으켰고 그의 얼굴은 어느덧 그 귀여운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는 중사와 눈이 마주치자 장 수병님은 하는 수 없이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곧 웃음을 거두고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두꺼운 입술은 굳게 닫혀버렸고 눈을 가릴 듯이 깊이 내려쓴 새하얀 파이버 안쪽에서 표범의 눈 같은 장 수병님의 눈은 지극히 조용한 거동으로 철창 안을 한 바퀴 휘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눈이 나이 먹어 뵈는 맨 뒤쪽의 신참자에서 잠시 정지했다. 그는 한마디도 건네지 않고 몇초 동안 신참자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흥 저놈은 턱수염이 쭈뼛쭈뼛 나고 움폭 팬 눈이 피로하게 뵈는 게 꽤 나이가 많은 게로군. 그런데 저놈의 눈과 마주치면 어쩐지 기분이 거슬린단 말야. 그는 내심 이렇게 생각했으나 정작 그가 이상스레 여기는 건 그 사나이의 그런 외양이 아니었다.
그는 며칠 전부터 2호 앞을 지날 때마다 이 신참자가 두번째 상좌라고 할 수 있는 이 중사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걸 보고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순서로 따진다면 그 녀석은 제가 아무리 나이가 많든 또는 사회에서 쓰여먹는 무슨 대단한 재간을 지녔건 앞자리에 바로 창살과 마주앉아서 참새잡이나 전령 노릇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저놈은 자기보다 고참인 여남은 명의 동료들을 죄다 제쳐놓고 두번째 상좌에 앉게 되었을까. 물론 그렇게 결정한 것은 2호 감방장인 이 중사이겠지만 그렇지만 장 수병님은 이 중사로 하여금 감방 질서를 깨뜨리게 만든 이 사나이에게 약간의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튼 2호는 재미있어.
그는 무슨 뜻인지 2호 사람들이 잘 알 수 없는 말을 혼자 지껄이고는 1호 쪽으로 걸어갔다.
작살날 뻔했어. 이 새꺄.
2호 앞에서 장 수병님의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이 중사가 정 하사의 뒷덜미를 향해 말했다.
그래요. 중사님.
여전히 앞을 향한 채 정 하사가 대꾸했다. 그가 구태여 대꾸하는 것은 이 중사의 임기웅변이 위기를 모면케 해주었다는 것을 덩달아 표시해주기 위해서였다.
아까 두 번째 복창은 좋았어.
이번에는 정 하사에게만 들릴 만큼 속삭이듯 이 중사가 말했다.
이따가 취침 전에 선생님께 강아지 한 마리 드려.
네. 드리겠습니다.
정 하사의 대답이 끝나자, 중사는 옆자리의 순열씨를 힐끗 돌아다보았다. 순열씨가 그를 마주보았을 때 그는 그 귀여운 웃음을 보내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순열씨는 딱딱한 표정으로 그의 미소를 받았다. 그러고는 얼른 정면으로 머리를 돌리고 부동자세를 취했다. 적어도 아직 이 중사의 흉내를 낼 수는 없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다. 이 중사의 미소나 고개 움직임, 손짓 발짓, 혹은 기분 내킬 때 한 두어 마디 내뱉는 따위의 여유를 그는 도저히 흉내 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비록 두 번째 상좌에 앉아 있지만 그는 매우 조심했다. 왜냐하면 이 중사가 상좌를 차지한 것과 자기가 두 번째 상좌를 차지한 것은 그만큼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그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좌 시간에 부주의한 행동을 하면 그것은 곧 같은 호의 동료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부주의는 모두가 용납하지 않았다. 단지 이 중사만이 호 자체의 그러한 규제 밖에 있었다.
순열씨의 상체는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무릎을 꿇고 있는 그의 다리 근육은 이따금 생각난 듯이 꿈틀거렸다. 그는 무릎을 꿇은 지 삼십 분도 채 못 가서 발과 다리의 마디 사이에 힘줄이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그 통증을 한참 견디어내자 이번에는 허벅지에 무겁게 짓눌리고 있는 다리 근육에서 쥐가 나기 시작했다. 그는 이 통증에 반항하듯 시멘트 바닥에 깔려 있는 다리를 향해 상체의 압력을 더욱 가중했다. 유월 초순, 아직 여름 무더위는 아니지만 사방이 차단된 실내는 몹시 무덥기만 했다.
이렇게 힘을 주어보면 발과 다리 사이 마디의 힘줄이 늘어나고 말겠지. 그리고 다리 근육도 한층 딴딴해질 게다.
그것은 꼭 그렇게 될는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고통을 참아내는 별다른 길도 없었다.
오태봉, 넌 감실에 갔다온 게 며칠째야?
예, 보름 조금 덜됐습니다.
이 새꺄, 보름이면 보름이고 한 달이면 한 달이지 좀 덜됐다는 게 뭐야?
이 중사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철창 가까이 벽에 기대앉았던 오태봉은 얼른 상체를 바로 세우고 평좌로 고쳐 앉았다.
예, 만 십삼 일 열두 시간 되었습니다.
좋았어, 오태봉.
중사는 빙그레 웃는 얼굴로 좌중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러자 오태봉은 아주 날렵한 동작으로 평좌를 흐트리고는 다시 벽에 기대앉아 싱글싱글 웃기 시작했다. 그는 특별한 긴장이 없을 때는 늘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넌 며칠이면 공판이 붙겠다. 씨팔 놈, 좋아라 날뛰지 마, 삼년은 썩어야 하니까.
그렇지 않아요. 난 이년 잡구 있어요.
온통 주근깨로 덮여 있는 오 하사의 조그만 얼굴은 상대방의 약을 올리려는 듯이 여전히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그의 밝은 표정에는 이년은 견딜만하다. 이년을 때린다면 즐겁게 살아주겠다라고 씌어 있는 것 같았다.
뭐라구 이 새꺄, 이년이라구. 새씹 같은 소리 작작해다구 이 새꺄, 넌 기름칠 이년 아냐? 기름칠 이년이면 갈데없는 석삼자라구, 그렇지 않나, 정철훈?
중사가 옆에 다리를 세우고 앉아 있는 정 하사에게 동의를 구하자 하사는 얼른 자세를 바로잡고 평좌로 고쳐 앉았다.
네, 그렇습죠.
그봐, 이 새꺄, 오태봉, 너 똑똑히 들었지?
중사님, 악담 좀 그만하세요. 그래 삼년이라구 해두죠.
오태봉은 마지못해 감방장의 구형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이 중사는 오태봉이 방금 악담 운운했기 때문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 녀석에게 당장 게걸음을 시킬까 하고 생각했다. 그의 앞으로 게걸음걸이로 오태봉이 다가오면 바른쪽 다리를 들어 발바닥으로 놈의 얼굴을 한번 씻겨주는 순서였다. 그러나 그의 찌푸린 얼굴에 개의치 않고 연방 싱글거리는 오태봉의 주근깨투성이 얼굴을 보자 그는 그 순서를 지워버렸다.
아아 씨팔 미치겠구나 선생, 난 이제 이십 일만 참아내면 나가는 거요.
그래요?
하고 순열씨는 다소 놀란 듯 중사를 바라보았다.
여태 몰랐죠? 이십 일만 있으면 이심 공판이 있으니까 그때 붙으면 나가는 거요.
거기에 확실히 붙는다는 걸 알고 있소?
알구 말구요, 흥 이번에는 진짜 08을 쓴 거요. 08을 썼으니까 틀림없다는 걸 알지요. 이년 육 개월이나 08을 쓰지 않고 버티다가 이번에는 정말 쓴 거요. 엣다 먹어라 하고 일심에서 난 3년이었는데, 씨팔 이년 육 개월이나 살았지만 정말 이제 육 개월은 더 못 견디겠소. 꼭 미칠 것 같은 거요, 선생.
하고 중사는 점점 어조를 낮추어가며 말했다. 나중에는 순열씨만 들릴 만큼 작은 소리로,
선생, 정말 이제 육 개월을 살라면 어디로든 도망가겠소. 죽고 말지 못 견딜 판요. 전에 삼년 형기가 다 끝나 내일이면 출감할 놈이 그만 하루를 못 참아 탈옥한 일이 있다우. 저 변소 말요. 변소 천정으로 올라가 굴뚝으로 빠졌다우. 지독한 놈이지만 삼일 뒤에 다시 체포되어 여기로 돌아왔죠. 그래서 특수도주 죄명으로 사년을 또 받은 거요.
흐흐 우습죠. 그놈을 욕했지만 이제야 그놈의 심정을 알 것 같아요. …그래서 2심에 항소해놓고 내가 아버지에게 편지한 거요. 쓰라구. 내가 쓰라구 했으니까 꼭 썼을 겁니다. 전에는 아버지가 쓰겠다구 해두 내가 못쓰게 했으니까.
어쨌든 다행이요. 이십 일은 눈깜짝할 사이 아뇨? 당신은 이제 괴로울 것 하나도 없겠소.
그게 아니오, 선생. 바로 이 좆같은 이십 일이 문제라니까. 하루가 꼭 일년 같다니까.
중사는 금방 사나운 눈초리로 철창을 노려보았다.
노오랗게 변색된 얼굴이 일단 흥분되자 옆에 앉은 순열씨에게는 그가 한 마리의 늑대같이 보였다. 중사는 굳게 잠겨 있는 철창의 문과 높다란 삼면의 벽을, 거의 세 해 동안이나 묵묵히 자기를 감금하고 압박해온 삼면의 벽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에이 더럽다 씨팔, 모든 게 개씹 같단 말야. 야 천 하사, 나 외출하겠어.
말이 떨어지자 오른편 3열에 앉아 있던 천 하사가 벌떡 일어섰다. 그는 2호에서 제일 당당한 체격을 가졌고 제일 말이 적은 사나이였다. 그는 잘 길들여진 소처럼 벌써부터 등을 약간 구부리고 후면 벽 쪽으로 어정어정 걸어갔다. 이 중사는 외출하기 위해 일어섰고 순열씨도 천 하사가 설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일어섰다.
천명오는 고릴라의 손같이 큰 손으로 깍지를 끼고 후면의 통풍구에 각도를 맞추어 자리잡고 섰다.
니기미, 오랜만의 외출인가 부다.
힘을 내기 위해 기합을 준 듯 중사는 말하고 천명오의 큰 손깍지에 오른발을 얹었다. 동시에 그는 손으로 천명오의 어깨를 짚고 훌쩍 올라섰고 다시 같은 동작을 거듭하자 어느덧 중사는 천명오의 어깨를 밟고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솜씨가 체조선수같이 민활한 데 순열씨는 놀랐다.
두 손으로 통풍구의 창틀을 꽉 붙잡고 선 중사는 밑에 서 있는 순열씨를 내려다보고 한번 씨익 웃었다. 아래서 보니까 웃을 때 드러나는 중사의 왼쪽 뻐드렁니가 순열씨에게는 유난히 크게 보였고 그 노오란 이빨은 언젠가 그가 화면에서 본 일이 있는 어떤 야수의 그것과 흡사해 보여 순열씨는 흠칫 놀랐다. 저 귀여운 웃음 속에 저토록 사나운 이빨이 숨어 있었구나.
중사는 자기가 선 기반이 튼튼한가를 시험 하느라고 두세 번 발을 굴렀다. 중사의 발은 비록 혈색이 깡그리 바래져 얼핏 죽은 자의 발처럼 싯누렇게 떠보였으나 골격은 매우 넓적하고 굵어서 우람하기 짝이 없었다. 그 사나운 발이 자기의 어깨를 밟고 거침없이 두세 번 굴렀건만 하사는 얼굴을 찌푸리거나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고 그냥 표정 없는 얼굴로 묵묵히 서 있었다.
선생, 해가 보인다니까.
중사는 어린애처럼 한쪽 팔을 휘두르면서 즐겁게 소리쳤다. 2호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소리에 갑자기 깨어난 듯 통풍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양쪽 벽을 따라 늘어앉아 있는 그들은 무언가를 체념한 듯 이내 시선을 거두고 말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굳게 닫고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다.
지금 버스가 스톱했다. 이제 곧 떠날 게다. 암 으흥, 벌써 떠나는구나.
중사는 변사처럼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혼자서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그러다가 문득 천명오의 곁에 엉거주춤 서 있는 순열씨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선생, 거기서 저 나무가 보여요?
그가 통풍구 바깥을 손으로 가리켰으나 순열씨의 위치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 보이는데요.
참, 혼자 보기 아깝구나. 저 잎사귀들 좀 봐. 푸릇푸릇한 잎사귀들, 한창이구나. 며칠 사이에 저렇게 됐어.
중사는 자못 감상적인 투로 혼자 지껄이고는 통풍구의 창틀에 턱을 괸 채 한참동안 말없이 바깥만을 향하고 서 있었다. 이윽고 그가 외출을 끝내고 천명오의 어깨 위에서 시멘트 바닥으로 훌쩍 뛰어내렸을 때는 중사의 얼굴에선 장난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2호의 동료들은 그가 자기의 집을, 자기의 마누라를, 그리고 그의 재소 중에 태어났다는 자기의 딸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얼른 알아차렸다.
여보, 박형, 박형도 외출 한번 하고 싶소?
땅에 내려선 중사가 말하자, 순열씨는 얼핏 대답을 못하고 주춤거렸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방금 그 푸릇푸릇한 잎사귀들이 맴을 돌고 있었다. 그는 중사가 떠들어대는 소리로 해서 비로소 자기는 금년의 유월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깨닫자 갑자기 그 유월이 보고 싶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중사의 제의에 놀라는 동료들의 시선과 마주쳤을 때 그는 곧 자기의 충동이 사라지는 걸 깨달았다. 그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중사는 자기 쪽에서 선뜻 결정을 내렸다.
이봐, 천 하사, 선생님을 위해서 한번 더 수고를 해야겠어.
이미 제자리에 돌아가 평좌로 앉아 있던 천명오는 다시 벌떡 일어나 뒤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하긴 나도 일 년이 넘도록 외출은 꿈도 못 꿨지.
중사는 불만을 감추고 묵묵히 앉아 있는 동료들의 굳어버린 얼굴들을 어루만지듯 말하고는 이렇게 감방의 질서를 깨뜨려보는 것도 일견 재미있는 일이라는 듯이 한참 혼자서 껄껄대고 웃었다. 천명오는 기계와 같은 동작으로 금방 아까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
벽에 등을 딱 붙이고 두 손에 힘을 모아 깍지를 끼운 그의 표정은 뜻밖의 사나이를 모신다는 데 대한 불쾌감마저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다만 중사를 위해서만 봉사해왔었다. 그렇지만 이제 중사의 지시라면 상대가 누구이건 즐겁게 손깍지를 끼울 수 있다는 듯이 다만 그 큰 눈을 껌벅거리며 순열씨가 오르기만을 기다렸다.
올라가시우, 나중엔 뒈지게 하고 싶어도 못할 때가 있으니까.
순열씨는 가까스로 자기의 오른쪽 발을 하사의 손깍지에 올렸다. 몸을 올리느라 그의 손을 힘껏 밟으면서 그는 이 사나이가 별안간 그의 몸뚱이를 저 시멘트 바닥으로 동댕이질치지 않을까 하고 겁을 냈다. 하사의 새까맣고 우락부락한 얼굴은 언제고 그럴 수 있는 폭력을 감추고 있는 듯이 보였던 것이다.
중사가 곁에서 엉덩이를 힘껏 밀어올리는 바람에 순열씨는 단숨에 하사의 어깨 위에 올라섰다. 그가 허리를 길게 펴자 천정 밑에 있던 통풍구가 그의 얼굴 앞에 다가왔다. 그는 통풍구의 창틀을 두 손으로 힘껏 부여잡고 얼굴을 바깥으로 내어밀었다.
뭐가 보입니까?
이때 밑에서 중사가 다시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으나 순열씨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비록 천 하사가 아주 튼튼하게 믿음직스럽게 밑에서 받들어 주고 있다고는 해도 우선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고 그런 연유로 그의 시야도 몹시 불안했다.
푸릇푸릇한 잎사귀를 찾아보자라고 그는 먼저 생각했다. 그의 코로 스며드는 유월의 공기는 확실히 상쾌했다. 그는 이윽고 푸릇푸릇한 포플라 나무의 잎사귀들이 유월 저녁나절의 햇빛에 반사되어 그 무수한 배때기들을 번쩍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게 바로 벽을 사이에 두고 지척에 있었구나. 그는 혼자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얼른 시야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포플라 나무들이 서 있는 부근에는 사령부 영내를 구분하는 철조망 바리케이드가 커다란 구렁이의 허물처럼 길게 펼쳐져 있었다. 그 바리케이드 건너에는 미군부대의 거대한 조달창들이 눈앞을 가로막을 듯이 널따란 지역을 차지하고 늘어서 있었다. 그는 얼른 조달창의 뾰족한 지붕 건너편으로 시선을 들어 그가 마지막으로 보고자 했던 대상을 찾았다.
선생, 무어 재미있는 게 있소?
중사가 밑에서 다시 물었지만 역시 순열씨는 대답하지 못했다. 막상 그가 멀리 빨갛고 검은 기와지붕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마을을 보았을 때 그는 더럭 겁이 났던 것이다. 그것은 어렸을 때 남의 집 담장을 기어올라가 몰래 뒤란을 훔쳐보고 있을 때 느끼던 불안과 흡사한 것이었다.
그는 이 불안 때문에 좀더 오래 그 마을의 정경을 지켜보지 못했다. 여전히 다리가 덜덜 떨렸고 그 떨림은 지금 철창 밖의 복도에서 근무자 중의 누군가가 그의 하반신을 노려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리고 그런 가능성 때문에 2호의 동료들이 불안하게 그의 거동을 지켜보리라는 생각을 새삼 불러일으켰다. 그는 어떤 힘에 이끌리듯 곧 바닥으로 내려서고 말았다.
그보쇼. 외출하고 나면 항상 그 모양이라니까.
순열씨가 말없이 뒷구석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자 중사가 말했다. 그는 방금 바닥에 내려온 순열씨의 얼굴에서 역시 어두운 그늘을 발견한 것이다.
우린 말요. 보지 않고 지내는 게 건강에 이롭단 말요. 내가 저 녀석들의 외출을 허락지 않는 것도 다 까닭이 있는 거요.
2호의 동료들은 그의 말을 수긍하는지 아니면 부정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들은 벽에 기대어본다든가 허리를 펴고 평좌로 앉아 본다든가 그 어느 것에도 싫증이 난 듯 무릎을 세우고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있었다.
저 새끼들은 되게 참지 못하는군.
중사는 혼자서 지껄이고는 벌떡 일어나 철창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철창 문 바로 위에 꽂혀 있는 휴지통에서 <새 시대에 맞는 성경> 두 페이지를 꺼내들고,
2호 일명 소변.
하고 가볍게 소리쳤다. 그가 돌아서서 변소 앞으로 다가설 때 정철훈 하사는 얼른 자기 다리를 두 손으로 만지면서,
드릴까요?
하고 말했다.
있어?
네.
몇 마리나……?
두 마리뿐입니다.
겨우 고거야?
네.
애연가가 늘어나니까 조달이 큰 문제로군. 가만있어. 이따 1호로 연락해보자. 이번엔 난 참겠어.
그는 빈손으로 그냥 변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소변을 보러 가면서도 휴지를 들고 가는 짓은 하나의 습관이었다. 변소에는 흡연자의 부주의로 담뱃재나 필터의 가닥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치우기 위해서였다. 만약 그것을 미처 치우지 못한 사이에 갑자기 변소 검열을 받게 되면 그야말로 2호는 볼장 다 보기 때문이다.
중사가 변소 문을 열고 나오자 이번에는 순열씨가 철창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휴지통에서 <새로운 시대의 성경> 두 페이지를 꺼내들었다. <새로운 시대의 성경>이란 성경을 아주 간명하게 요약한 조그만 책자로 매우 열성적인 신흥교파의 선교부로부터 배부 받은 것이었다. 그것을 그들은 읽기도 했지만 그 기간은 배부를 받은 뒤의 이삼 일에 불과했다. 이삼 일이 지나면 감방장은 휴지를 마련하기 위해 그 작은 책자들을 모두 뜯어서 네 겹으로 접으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휴지를 꺼내던 순열씨는 철창 앞에 잠시 부동으로 섰다. 이런 때에는 반드시 근무자의 눈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그는 언젠가 배운 일이 있었다. 근무자가 지켜보는 순간에 바로 신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고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열심히 근무자의 눈을 찾았으나 장 수병님과 교대한 이광일 수병님은 지금 7호 앞에서 7호의 누군가와 얘기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주목을 도무지 받을 수가 없었다.
2호 일명 변소.
그는 얼떨결에 이렇게 소리치고 뒤로 돌아섰다. 그러자 그와 눈이 마주친 2호의 동료들이 모두 소리를 내지 않고 웃고 있었다. 단지 정철훈 하사만이 무언지 화가 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여보, 변소가 뭐요?
잔뜩 부르튼 얼굴로 정 하사가 묻자, 순열씨는 선 자리에서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정 하사는 이제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마음껏 눈을 부라려 그의 앞에 서 있는 마르고 나이든 사나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의 커다란 눈이 일단 상대를 노려보자, 이렇게 흉악하고 위압적인 얼굴이 된다는 걸 순열씨도 처음 알았다. 그의 주름진 이마, 까만 눈썹 밑에 상대를 그만 태워버릴 듯이 타고 있는 커다란 눈, 그리고 노기로 부르튼 위아랫 입술, 이것들이 만들어내는 얼굴은 분명 호랑이의 상을 본뜬 것이었다.
왜요? 변소가 잘못되었나요?
순열씨는 자지러드는 목소리로 가까스로 반문했다.
이 새꺄, 가르쳐드려. 소변이라고. 여보 그렇죠, 소변이죠?
이때 중사가 가로막고 나서서 정 하사의 다음 폭언을 제지했다.
몇 번이나 가르쳐줬어요. 그런데도……
또 가르쳐드려, 이 새꺄.
2호 일명 소변, 아니면 대변 마음 꼴리는 대로 골라 하슈.
하사는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이 혹은 못 참을 것을 참는다는 듯이 여전히 열기로 불을 뿜는 눈으로 사방을 한바탕 휘둘러보고는 이내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때서야 순열씨는 돌아서서 철창 앞으로 다시 걸어갔다. 그는 하사에 대한 까닭 모를 두려움에 소변과 변소의 어휘마저 구분하지 못한 자기 의식에 대한 수치심이 겹치어 관자놀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2호 일명 소변.
그는 기어나오는 목소리로 다시금 신고하고 천천히 변소로 들어갔다. 그의 뒷전에서 웃음과 조소를 참았던 자들이 쪼다, 무엇이라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그는 들었다.
만일 엉터리 신고가 들키면 우리 모두 작살납니다.
그가 변소에서 나오자 중사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선생은 그 가장 쉬운 걸 잊어먹나요?
글쎄요. 나도 모르겠군요.
아무튼 저놈에겐 조금 주의해두쇼.
중사는 순열씨의 바싹 곁으로 다가앉으면서 정철훈 하사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들은 제일 상좌에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늘 가까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열을 지어 정좌나 평좌를 하는 때를 제외하고는 정철훈 하사는 늘 세 번째 상좌를 사양했다.
그는 서열로 본다면 당연히 지금 순열씨가 앉아 있는 중사의 옆자리에 앉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그가 편히쉬어나, 열을 짓지 않는 평좌시간에는 세 번째 상좌마저 사양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는 거의 말석에 가까운 변소 문 바로 옆자리에 묵묵히 앉아 계속 머리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저놈은 내 후계자가 될 게요. 그래서 지금부터 훈련을 조금씩 시키고 있죠.
그가 훈련을 시킨다는 것은 2호의 동료들이 정 하사에게 공포감을 느끼게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뜻하는 것이었다. 중사는 자주 자체 징벌의 하수를 정 하사에게 떠넘겼고, 때로는 정 하사 스스로 신참을 벌하는 일도 많았다.
내가 걱정하는 건 그거요. 이십 일 이후면 나는 나가는데 그때부터가 걱정이란 말요. 물론 내가 저놈에게 선생을 잘 보살피라고 이르고 나가겠지만.
이때만은 중사도 정 하사가 듣지 않도록 적당히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가 그답지 않게 정 하사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까닭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자 순열씨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여튼 나는 중사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하지만 내가 겁장일까봐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또 견디어갈 겁니다.
물론 그러셔야지요. 그렇고말고.
그는 너스레를 떨고 나서 다시 하던 말을 이어갔다.
내가 저놈을 지금 매우 학대하는 것 같지만, 그건 일부러 그러는 거죠. 나는 사실 저놈을 매우 좋아하거든요. 저놈하곤 이년 가까이 함께 지냈으니까 정이 들었죠. 생각해보슈. 우린 모포 한 장 없이 이 바닥에서 한겨울을 함께 지냈거든요. 지금은 호텔입니다. 작년 겨울만 해도 우린 서로 가랑이를 끼고 서로의 체온으로 밤을 지샜거든요. 그래 난 저놈을 못내 사랑하죠. 저놈은 틀림없이 일류 감방장이 될 게요.
중사의 목소리는 자기도 모르는 새 점점 커져서 2호의 누구나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정철훈 하사는 중사가 자기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닫자 세운 무릎 사이로 잔뜩 숙였던 머리를 치켜들고 중사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듣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는 말하는 중사의 표정이며 손짓 발짓까지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순열씨는 그가 이따금 얘기를 듣고 있는 자기 쪽도 흘끔흘끔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의 눈길을 느낄 때마가 순열씨는 왠지 자기 몸이 자꾸 움츠러드는 듯한 기분에 빠졌다. 저 사나이는 중사의 후계자이다. 이제 중사가 그걸 공언했고 그리고 지금 저 사나이를 보면 확실히 후계자다운 기상이 엿보이는 것이다. 그는 마치 미구에 먹이 사냥을 나서기 위해 덩굴 속에 숨어서 잔뜩 움츠리고 기다리고 있는 맹수처럼 변소 문 옆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노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선생, 당신은 저놈의 죄명을 들은 일 있소?
없어요.
그럴 게요. 저놈은 자기 신상에 관해서 아무에게나 말하지 않는 놈이죠. 지금까지 저놈하고 속을 털어놓고 얘기한 건 나뿐일 게요. 난 저놈의 항고 이유서까지 써주었으니까. 그런데 저놈이 말요. 전도사에게 침을 뱉은 놈이요. 그 왜 있지 않소. 일요일이면 할렐루야! 하고 소리치면서 히틀러처럼 손을 번쩍 쳐들고 들어오는 복음 교회의 앤경 낀 전도사 말요.
그 새끼가 저놈에게 다가와서, 당신과 얘기하구 싶소. 하느님은 당신의 죄 따위는 죄라고 여기지도 않으니까 이 세상에는 당신 말고도 정말 큰 죄인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당신의 괴로움을 하느님께 얘기만 하면 당신은 죄에서 구원될 수 있다. 하느님은 여하한 범죄 자체보다도 속죄 않느냐, 그가 속죄 하느냐 이걸 중히 여기신다.
하고 따라붙이며 유혹해왔을 때 저놈이 그 앤경 낀 새끼에게,
이 새꺄, 칵.
하고 침을 뱉고는,
너두 결국은 도둑놈일 게고, 그러니까 도둑놈과는 말도 하기 싫다, 라고 쏘아붙이고 만 거죠. 흐흐흐. 그러니까 저 놈은 그 새끼가 이 세상에는 더 큰 죄인이, 진정한 죄인이 있다고 속임수를 쓰고 따라붙이려고 할 적에 거게 넘어가지 않은 거죠. 아무튼 저놈은 묘한 놈이 돼나서 아무에게도 자기 신상에 관한 얘기는 안해요.
이때 오른편 3호 쪽에서 쿵쿵 이쪽 벽을 치는 소리가 들려와 중사는 얘기를 멈췄다. 맨 앞에서 전령을 보던 오태봉이 잽싸게 철창 앞으로 나아갔고, 그는 이내 3호에서 건너오는 메시지를 받아들고 이 중사 앞으로 다가왔다.
근무자가 보지 않았어?
예, 광일이는 지금 6호에서 타작하고 있습니다.
오태봉은 두 손으로 방금 3호에서 전달되어온 쪽지를 중사에게 내어밀고는 부동자세로 서서 대답하고 있었다.
누가 맞나?
어제 온 신참입니다. 그 새끼 되게 작살나고 있습니다. 그 새끼가 이 수병에게 말대꾸를 한 거 같애요.
그 새끼가 뭐라구 했어!
이 새끼 기름칠이구만.
오태봉은 결코 6호에서 벌어진 광경을 보았을 까닭은 없는데 단지 자기의 상상을 적당히 각색해서 이광일 수병님과 그의 주먹에 작살났다는 신참의 흉내를 열심히 내고 있었다.
그래 기름칠이요. 그러니까 어떻다는 거요?
오태봉은 뻣뻣하게 서서 중사에게 대어드는 시늉을 했다. 하, 이랬다는데요. 기름칠이라구 괄세 마라 이거지요.
그 새끼 배짱 한번 좋았어.
변소 문 옆에 앉아 있던 정철훈 하사가 여전히 머리를 숙인 채 말했다.
그 새끼 맞아야 되겠구만.
중사는 간단히 결론을 내렸고. 오태봉은 철창 쪽으로 돌아갔다. 이때 어이쿠! 어이쿠! 하는 비명소리와 철창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연거푸 들려왔고 이 새꺄, 뭐라구? 이 씨팔새끼 뭐라구? 하는 이광일 수병님의 노성도 들려왔다. 이 수병님은 말이 적은 대신 펀치가 비길 데 없이 세고, 그리고 일단 손을 대면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으므로 6호 쪽에서 어이쿠! 어이쿠! 소리가 계속 들려와도 재소자들은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한쪽에서 방금 3호에서 전달되어온 메시지를 읽고 난 이 중사는 주먹으로 턱을 괴고 아주 난감한 표정으로 정철훈 하사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지?
뭔데요?
정 하사가 묻자, 중사는 대답 대신 메시지를 하사에게 던졌다. 하사는 그것을 빠르게 읽고 역시 난감한 표정으로 중사를 건너다보았다.
결정하시죠.
두 마리뿐이라고 그랬지?
네 딱 두 마리.
대가리는 있나?
대가리도 세 개뿐입죠.
하사는 강아지와 대가리가 감추어져 있는 자기의 바른쪽 발목을 손으로 탁 쳐보였다.
무어라고 썼어요?
순열씨는 중사의 난처한 표정을 향해 말했다.
그거 좀 보여드려. 그리고 볼펜과 종이를 내놔.
이윽고 결정을 내린 듯 중사는 하사에게 지시하고는 정 하사가 던져주는 메시지를 받아 읽고 있는 순열씨의 거동을 넌지시 지켜보았다.
-2호에게-
이 중사님.
생략하옵고 국방부 고등군법회의는 이십일 경 있을 예정이라고 함. 본건 어제 감실에 다녀온 배 하사의 전달 사항임. 중사님의 행운을, 그리고 지난번 문의 사항에 대해서 우선 2호의 선생님은 죄명이 무엇이며 사회에서 하신 일은 무엇인지요? 죄명을 좀더 구체적으로 적어보낼 것.
그렇지 않으면 형량을 추측키 곤란함. 2호의 선생님께 본인의 존경과 또한 만수무강의 기원을 아울러 전함. 소생 미흡하와 선생님의 존함은 일찌기 뵙지 못했으나 아침에 세수하실 때 선생님의 존안을 여러 차례 뵈온 일이 있음. 그리고 이 중사에게 우리들의 변함없는 의리와 우정을 위해 축배를 듭시다. 물론 소금 국물을 포도주로 알고 말입니다.
2호에는 지금 강아지의 여분이 있는가요? 지난번 면회 때 08을 잡지 못한 죄의 대가로 오늘은 종일 굶었습니다. 여분이 있으시다면 우리들의 변함없는 우정을 위해 3호에게도 한 모금을 베풀어주시기를. 즉각 회신 바람.
신종술 배상
-3호에서-
순열씨는 3호의 데빡이 자기를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기에게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데 우선 놀랐다.
흐흐히 놀랐죠?
이때 고개를 든 순열씨의 곁으로 중사의 얼굴이 바싹 다가왔다.
그 녀석은 나와 절친해요. 이 중사로 말할 것 같으면 사령부 교도소의 최고 고참이죠. 내가 이놈에게 지난번 메시지를 통해 선생의 형량이 어떻게 되겠나 물었죠. 이놈의 구형은 거의 하루도 틀리지 않으니까요. 그건 그렇구 의리니 만수무강이니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요점은 강아지 좀 달라 이거요. 흐흐 씨팔 놈들. 여기서는 의리 찾다가 굶어뒈지기 딱 알맞죠. 하여튼.
하고 중사는 정철훈 하사를 바라보았다.
강아지 한 마리와 대가리 한 개 꺼내 보내시겠어요?
할 수 없지. 우리도 아쉴 때 얻어 피웠으니까.
그는 정 하사가 마련해준 종이와 볼펜을 가지고 엎드려서 3호에게 보낼 회신을 쓰기 시작했다. 정 하사는 철창 쪽에 등을 보이고 돌아앉아 바른쪽 발목의 목이 긴 군용 양말을 까내리고 있었다. 긴 양말을 신고 있는 그의 바른쪽 다리의 발목은 2호의 강아지와 대가리 조달창인 것이다.
이때 물론 철창 근처에서는 참새잡이와 전령이 철창 바깥 복도를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선생, 당신은 이탈 죄에다 항명죄까지 겹친다구 했죠?
쓰다 말고 중사가 물었다. 순열씨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때만은 중사의 호의가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는 중사가 자기가 받을 형량에 대해 열심히 물어주고 그리고 비록 벽 하나 사이로 지척에 있지만 아직 자기와는 일면식도 없는 3호의 데빡까지 거기에 관심을 표시해왔지만 막상 그 자신은 이상하게도 자기의 형량을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 형량이 결코 짧지 않으리라는 정도는 예측이 되었지만 그것이 짧든 길든 지금으로서는 그냥 미궁에 덮어두고 싶었다. 그러므로 그는 중사나 3호의 데빡이 자기의 형량에 관해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자주 표면에 드러내는 일이 그닥 달갑지 않았다.
이탈 기간이 정확히 얼마입니까?
이때 중사가 다시 물어왔으므로 그는 내뱉듯이 대답했다.
만 칠년이요.
중사는 순열씨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메시지를 열심히 써내려갔다. 서신용의 용지가 귀하기 때문에 겨우 손바닥만한 종이에 작은 글씨를 빽빽이 채우느라고 그는 펜을 쥔 손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3호에게-
신종술 중사님.
보내주신 글월 잘 받았음. 국방부 고등군재 소식은 본인이 가장 고대하던 소식이었음. 기다리자니 미치겠습니다. 신형, 정말 이십 일만 있으면 나가게 될 텐데 이렇게 미칠 것 같군요. 이십일에 공판이 열린다는 것은 누구의 말인지, 감실에서 누구에게 들었는지 배 하사에게 다시 물어서 회신 바람.
신형, 이해하쇼. 말하자면 기다리다 미친놈이 된 격입니다. 불안해서, 여러 가지 불안에 시달려 미칠 지경임. 우선 이십일에 공판이 꼭 열릴 것인지 그리고 공판이 열린다 해도 그게 꼭 붙게 될 것인지. 그리고 붙는다고 해도 그 까마귀들이 나를 풀어 줄 것인지. 그리고 풀어준대도 공판 당일에 풀어주는 것인지. 아니면 장관 결재가 날 때까지 석 달 여섯 달 무작정 썩일 판인지. 이하 약함.
우리 선생님은 군무이탈 만 7년에 항명죄가 포함되어 있음. 항명 건에 관해서는 본인이 발설을 고수하므로 더 밝혀드릴 수 없음. 만약 신형이 2호에 함께 있다면 우리 선생님의 삼삼하신 구라를 함께 누릴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하는 게 신형을 위해 천추의 한이라고 생각됨.
우리들의 변함없는 의리와 사나이의 우정을 위해 건배하겠음. 불란서의 코냑은 방금 바닥이 났고 아쉰 대로 캔맥주라도 터뜨리겠소. A레이션에 있던 건포도로 안주를 삼고 말요. 참 그 지아이새끼들 전쟁터에 술안주까지 가지구 다니는 놈들 나 손들었소.
신형. 다낭의 메디슨 클럽인가 맨손 클럽인가에서 실컷 마시던 밤이 생각남. 그게 마지막이었으니까. 그날로 난 찌그러진 거요. 2호에도 강아지가 바닥날 참이요. 두 마리 중에서 한 마리 보내드림. 우리들의 변함없는 우정을 강아지 한 마리로 보내드리는 괴로움, 이루 말할 수 없소.
추신. 총장이 아까부터 7호와 5호에만 자꾸 따라붙이는데, 총장이 강아지 한 섬을 수입 잡았다는 정보를 방금 입수했소. 우리도 나누어 피우자고 하슈. 2호는 몰라도 3호는 외면하지 못할 게요. 사령부 호텔 최고 고참을 외면했다면 총장 그 새끼도 내 손에 작살날게요. 모레는 우리도 08을 칠 거라구 하슈. 우리도 나누어 피자구.
이창달 배상
-2호에서-
메시지를 쓰느라고 한참이나 땀 흘리며 엎드려 끙끙거리던 중사는 가까스로 끝을 맺고는 허리를 폈다.
이거 전해라.
그는 종이를 정철훈 하사에게 건네주었고 하사는 그것을 받아서 그것으로 방금 자기의 양말 섶에서 꺼낸 한 대의 강아지와 한 개의 대가리를 조심스레 쌌다. 정 하사는 메시지를 손수 전할 참인지 일어서서 3호 쪽의 벽가로 비켜섰다.
주십쇼. 일루.
전령을 보고 있던 오태봉이 손을 내밀었으나 하사는 손을 저었다.
비켜.
정철훈 하사는 주먹으로 3호 쪽 벽을 두어 번 두드렸다. 두꺼운 콘크리트 벽은 하사의 주먹이 아무리 세다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으나 다만 쿵쿵 하고 낮은 소리로 울렸다. 그것은 간다, 받아라 하는 신호였다.
오태봉이 비켜선 자리로 정 하사는 조심조심 다가섰다. 전령을 제쳐 놓고 손수 벽을 따라 철창 쪽으로 조심조심 다가가는 하사의 이 태도는 나는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 위험한 일은 이제부터 내가 도맡겠다라고 그가 웅변이라도 하는 것처럼 매우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하사의 재빠른 솜씨로 메시지는 순식간에 전달되었다. 그는 일을 마치고 돌아서면서 그 두꺼운 입술에 싱그레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은 그가 근무자에게 발각되지 않고 메시지를 무사히 전달했다는 증거였다. 그는 쉽사리 해치웠다라고 뽐내는 듯 벌쭉벌쭉 웃으면서 느긋한 걸음으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 새꺄, 웃지 마.
이때 능글맞게 웃으며 다가오는 정 하사에게 중사는 화를 벌컥 냈다. 하사는 흠칫 놀라 그자리에 멈춰섰고 사나운 얼굴에서 재롱을 떠는 듯한 웃음은 싹 가시었다.
넌 이 새꺄 썩었어.
중사는 다시 영문 모를 욕지거리를 정철훈에게 내뱉었다. 정철훈은 금방 자기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그가 자기의 능글맞은 웃음을 중사에게 보였고, 또 중사가 보는 앞에서 여유작작하게 걸어왔던 것은 확실히 그의 실수였다. 2호에서 다른 놈은 그따위 웃음이나 걸음새를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요사이 와서 그는 가끔 착각을 일으킬 때가 있었다.
이를테면 적어도 2호에서는 자기 거동을 지켜보는 눈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중사의 일갈로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아직도 2호에는 그 눈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시무룩한 얼굴로 변소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 변소 문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저 새끼도 이제 돌았다구.
이 중사는 아직도 화가 덜 풀린 듯 잔뜩 찌푸린 얼굴로 혼자서 지껄였다. 그는 예의 그 늑대의 옆눈길로 잠시 동안 정철훈을 노려보더니 이내 히히 흐흐 하고 웃기 시작했다.
하긴 미친 척하고 사는기라, 하지만 저 새끼 웃는 거는 불쾌하단 말야. 뭐이 좋다구. 쓸개 빠진 새끼. 난 너 이 새끼 웃는 까닭을 알구 있다구. 내 나가면 왕이 된다 이거지?
중사의 늑대 눈이 그를 노려보았지만 정철훈은 세운 다리 사이에 머리를 깊이 처박은 채 잠자코 있었다.
선생.
중사는 시선을 갑자기 순열씨에게 돌리고 가만히 말했다.
저놈의 형기를 아우? 모르죠? 저놈은 원래 무기징역이었죠.
무기징역이 뭐요?
하고 순열씨는 자기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는 순간 하사의 형기가 무기라는 사실보다도 그 어휘가 주는 엄청난 파문에 놀라 어리둥절하고 말았다.
그러면 무기징역이란 말이요.
그렇죠. 무기였죠. 하지만 지금은 무기는 아니죠. 원래 무기였다, 이겁니다.
그럼 지금은 어떻게 됐죠?
월남 현지 재판에서 무기를 받았지만 여기 압송된 뒤에 이심에서 십사 년으로 감형된 거요. 지금 또 상고중이지만 벌써 기각된 일이 있으니까 이번에도 결과는 뻔하죠. 씨팔 십사 년이면 말이 십사 년이지, 좆도 완전히 찌그러진 거요.
저 사람 죄명이 무언데요?
양민 학살입니다. 저 새낀 사람 많이 죽였다우. 3호의 배 하사 새끼도 사람을 죽이고 들어온 놈이지만 그건 그래도 다섯이고, 이놈은 수백 명을 무더기로 깐 거요. 저놈 눈을 보면 핏발이 서 있는 게 조금 다른 데가 있어요. 사람 죽인 놈 눈은 확실히 다릅니다. 이따가 선생도 저놈 눈을 자세히 보슈. 저놈이 쏘아보면 나도 섬뜩할 때가 있다니까. 씨팔놈.
정철훈은 중사가 자기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섣불리 말참견을 하지 않았다. 물론 한마디 무어라고 반론을 제기한다 해도 이 중사에게서는 본전도 찾지 못한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다만 기다린다, 무엇인가 눈에 뵈지 않고 쉽사리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 무엇을 기다린다는 태도로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는 세운 다리 사이에 얼굴을 깊이 처박고 쭈그리고 앉아 있으므로 이쪽에서는 그의 사나운 이마 굵다란 주름투성이 이마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일단 정철훈이 침묵으로 들어갔을 때 그 주름투성이 이마는 더욱 포악하고 완고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때 순열씨는 약간 놀란 눈길로 하사의 완고한 이마를 바라보았다. 저 사나이가 무기수였다고? 저 튼튼하고 배짱 좋은 사나이가. 그는 그게 쉽사리 믿어지지 않아 속으로 혼자서 반문했다. 그는 마치 이 중사에게, 아니 그보다는 정철훈에게 단단히 속아넘어간 기분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저어도 정철훈은 튼튼하고 즐거운 사나이였다. 그는 하치않은 일로도 자주 혼자서 벌쭉벌쭉 웃기를 잘했고, 이따금 신바람이 나서 춤추는 듯한 걸음걸이로 걸어다녔다. 그 때문에 이 중사에게 자주 쿠사리를 당했었지만.
그런데 그 만만한 배짱이나 패기는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순열씨는 그의 형기에 놀라고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가 일단 무기수였다는 것을 알고 난 지금 남을 조롱하고 싶은 충동이 없이는 그럴 수 없는 그의 느긋한 걸음걸이, 능글맞은 웃음 따위에 놀라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 저놈 얘기가 웃기는 겁니다.
중사는 혼자서 헤헤거리며 웃다가 갑자기 순열씨에게 다가들었다. 웃느라고 마음껏 크게 벌려진 중사의 입이 순열씨의 코앞으로 다가들자 하마의 이빨처럼 길고 꼴사나운 중사의 뻐드렁니가 훤히 드러났고, 그의 입에서는 노리끼한 악취가 물씬 풍겨나왔다.
저놈은 말요, 글쎄 월남에서 재판받을 때 얘긴데, 저놈 말이 재판 받기 전에 굉장히 혼났다 이거요. 왜 그랬느냐 하면 자기는 갈데없이 사형인 줄 알았다, 이겁니다. 월남 민간인들이 떠들고 월남 정부에서도 업저버가 나와서 압력을 가하는 판이니까 이건 사형이구나, 난 죽었다. 하하 난 틀림없이 죽었구나 하고 눈 딱 감아버렸다 이거요.
그러고는 막상 땅 하고 판결 떨어지는데 이건 웬 떡이냐? 무기더라 이거요. 그래서 정말 무기일까. 정말 살아난 것일까. 믿어지지 않아서 지 허벅다리 살을 꼬집어보고는 사실이길래 벌떡 일어나서 만세 했다 이겁니다. 하하, 좆새끼, 만세는 무에가 만세냐, 무슨 갈보년 거기 썩어문드러진 만세냐, 내 말은 이겁니다. 그랬더니 저놈 말이 무기였으니까 만세 했다 이겁니다. 흐흐흐 히히 선생. 이게 말이 되는가요? 무기니까 만세했다. 무기니까 만세.
글쎄요. 그럴 수도 있겠죠.
순열씨는 정철훈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요? 그러니까 똥치보다는 갈보가 낫다 이건가요? 저 새끼 배짱 한번 좋았어.
멀어져갔던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2호에서는 여기저기 힘쓰는 소리가 들렸다. 군화 발자국 소리는 시계추 소리처럼 아주 규칙적으로 들렸기 때문에 그들은 조 수병님이 지금 몇 호 앞을 가고 있다. 자기 호에 얼마쯤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듯 빤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또 조 수병님의 걸음걸이가 그 육중한 체중 때문에 매우 느리고 그의 입이 무거운 대신 그의 펀치가 매우 폭발적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근무자들은 누구나 자기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특징이 없는 자는 특징이 없는 근무자로서 위신이나 권위가 전혀 서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죄수새끼들이 전혀 알아주지를 않기 때문에 자기 특징을 만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인데 조 수병님의 특징은 바로 이 느린 걸음과 무거운 입, 그리고 무엇보다 그 폭발적인 펀치에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완만한 평소의 동작이나 무거운 입은 다만 그 강력한 펀치라는 특징을 한층 두드러지게 해주는 부차적인 특징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않는 한 1호에서 7호까지의 반원형의 복도를 계속해서 걸어다녔다. 매우 느린 걸음걸이로. 이것이 그가 근무 시간에 하는 일의 전부였다. 그는 특별한 반역이 눈에 뜨이지 않는 한 한마디도 지껄이지 않는다.
조 수병님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자, 뻗어 뻗어.
라고 중사가 말했다. 그의 말소리는 여느 때와는 달리 숨이 차고 기운 없게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중사도 지금 벽에 의지해서 거꾸로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사의 지시가 떨어지기 전에 2호 동료들은 이미 가까워오는 군화소리를 들었고, 다리를 뻗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벽에 기댄 다리는 자꾸만 비틀거렸고 다리를 반듯이 세우기 위해 다리에 힘을 쓰면 쓸수록 다리는 점점 더 무거워만 갔다. 그렇지만 조 수병님이 2호 앞에 다가섰을 때는 그들은 용케도 흔들리지 않고 잘 버티어냈다. 이 순간만 버티자, 조 수병님이 2호를 지나 1호 쪽으로 건너갈 때까지만 잘 버티자, 그들은 모두 조 수병님의 그 강력한 펀치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조 수병님이 2호 앞을 일단 지나가버리자 2호 사람들은 다리에 힘을 빼고 편한 자세로 바꾸었다. 그들은 다리를 적당히 구부리고 벽에 최대한으로 의지해서 자기들의 힘을 덜 소모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때 순열씨는 자기 체중을 지탱하고 있는 팔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눈앞에는 지금 단조로운 시멘트 바닥과 시멘트의 벽이 팔랑개비 모양으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벼찌 붙어, 벼찌 붙어는 내게는 벅차구나. 그는 그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확실히 아직 거꾸로 서는 자세에는 숙달되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몹시도 경련하는 자기 팔이 매우 부끄러웠다. 이 팔은 지금 자기의 체중을 지탱하지 못하고 있다. 그게 그는 매우 부끄러웠다. 그는 이런 자세가 이렇게 벽을 향해 거꾸로 서서 버티는 자세가 어떤 시대에 어떤 경우에 반드시 필요한 자세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만 지금 자기 체중을 지탱하지 못하는 자기 팔이 매우 부끄러울 뿐이었다.
그는 자기 시야에서 빙글빙글 맴돌고 있는 바닥과 벽을 똑바로 붙잡으려고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시야의 사물들은 그의 시선에 쉽게 붙잡히지 않고 여전히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는 마치 그 표정 없는 바닥과 벽에게 우롱당하는 기분이었다. 그것들은 지금 그의 거꾸로 선 자세를 비웃고 그의 충혈된 눈을 우롱하는지도 몰랐다. 그는 현기증이 일어났고 몸의 중심을 잡기가 더욱 힘들었다. 그는 눈을 감아버렸다.
씨팔 이십 일이다. 이십 일.
갑자기 중사가 침묵을 깨고 내뱉었다. 그가 이십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십일만 기다리면 자기는 출감하게 되고 따라서 이 벼찌 붙어라는 고역도 면하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매우 헐떡거리고 있었지만 그의 소리는 힘껏 부르짖는 절규였다.
그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시멘트 바닥을 노려보며 절규했고, 그리고는 다시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이때만은 데빡도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할 수 없는 처지였다. 다만 그가 지금 원망하는 것은 시간인 것이다. 그가 원망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시간뿐이었다.
조 수병님은 너그럽게도 시간을 잘 지켰다. 그는 삼십 분이 경과하자 곧 자기 근무 시간의 첫번째 메뉴를 거둬들였다. 정좌, 평좌, 열중쉬어 따위의 몇 단계를 거쳐 편히 쉬어로 들어가자 2호 사람들은 모두 벽으로 기어들었다. 그들은 벽이 그립고 미더웠으며 그것이 방금 그들을 괴롭히는 형틀 노릇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듯 거기에 마음껏 등을 기대고 편한 자세를 취했다.
선생, 그래서 어떻게 된 거요?
뭐가 말요?
순열씨는 돌연한 중사의 질문에 어리둥절해져 반문했다. 그는 아직 숙달되지 않은 고역을 치르고 나서 피로에 지쳐 있었다.
그 대문을 열고 들어간 여자 말요. 그년을 결국 조졌소?
아, 아니오, 조진 게 아닙니다.
그럼 뭐요? 재미없게 됐구만.
중사는 실망했는지 잠시 시무룩한 표정으로 양쪽 벽을 따라 늘어앉은 동료들을 휘둘러 보았다. 잠시 후에 그는 뭔가 떠오른 듯 눈을 깜짝거리면서 순열씨를 보았다.
그거는 고상한 얘긴가 본데, 나는 압니다. 선생이 얘기하는 걸 물론 나는 알죠. 나는 이래봬도 고등학교 출신이고, 이래봬도 나는 음악이라든지 문학, 거 왜 괴테의 로미오와 줄리에트 있지요?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지금 틀리고 있죠? 그건 누가 썼죠? 그래 맞았다. 셰익스피어, 그 새끼 거물이야, 하여튼 학교 때는 그것도 읽었으니까, 난 선생의 얘길 알죠. 하지만 저 새끼들은 그렇게 얘기하면 김 팍 새는 거요. 그러니까 선생, 년을 조졌다고 얘기하슈. 조지지 않았더라두 조졌다고 하란 말요.
중사는 신이 나서 지껄인 뒤 순열씨의 반응이 어떤가 하고 짓궂은 눈초리로 순열씨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중사의 그 짓궂은 눈초리를 보자, 순열씨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는 잠시 혼자서 생각한 뒤 중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중사가 낮은 어조로 말했지만 그의 제의는 지금 거의 강요에 가깝다는 것을 순열씨는 이해했던 것이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 중사는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띠고 그의 넓적한 손바닥으로 순열씨의 무르팍을 탁 쳤다.
당신은 센스가 있단 말야. 당신은 우리들을 이해하고 있어. 그래서 나도 당신이 좋다 이거야. 그가 말하지 않았지만 그가 순열씨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순열씨는 중사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됐어 그럼 됐다구. 히히 흐흐.
그는 천하리만큼 멋대로 웃고는 손을 저어 동료들을 불렀다.
이 새끼들아, 그렇게 찌그러져 있지 말고 이쪽으로 오라구. 우리 선생님이 얘기를 하신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오태봉과 천명우 그리고 중대가리 신참들이 서로 눈치를 살펴가며 앉은뱅이 걸음으로 슬슬 뒤쪽으로 모여들었다. 다가오는 그들의 표정은 무슨 비밀의 절도에나 가담하는 것처럼 하나같이 의미심장했는데 그것은 변소 문 옆에 앉아 있는 정철훈이 아직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정철훈이 순열씨의 이야기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리고 지금 정철훈의 노여움을 사둔다는 게 자신을 위해 별로 이롭지 못한 짓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정철훈을 제외한 전원이 순열씨와 중사를 에워싸고 모여앉았다.
그런 뒤에 그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지요. 나는 그러니까 닭 쫓던 개 모양으로 맥이 풀린 거죠.
씨팔, 내 같았으면 담을 뛰어넘는 거라.
이때 오태봉이 몹시 답답한 듯 거들고 나섰다. 그는 눈치코치 보지 않고 기분에 들떠서 팔을 휘둘러댔다.
이 새꺄, 잠자코 듣지 못해? 괜히 무드 깨지 말라구.
중사의 일갈에 오태봉은 쑥 들어가버렸다.
그래서 난 한참을 거기서 서성거린 거요. 신흥촌이라 마침 그 집 맞은편에 축대를 쌓아올린 공지가 있었는데, 나는 이 공지의 축대 난간에 서서 행여 그 집 대문이 열리나 하고 기다렸죠. 그녀가 어쩌면 한번쯤 다시 나올까 하고. 그때 그녀가 나와본들 내게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아직 순진했으니까.
그런데 그날 해가 질 때까지 축대 난간에서 기다렸지만 그녀는 얼씬도 안했죠. 그래서 그날은 허탕을 치고 그냥 돌아왔어요. 그 뒤로 내가 얼마 동안 그 공지의 축대 난간에서 배회한 줄 알아요? 반년을 매일 쫓아 다녔어요. 저녁나절이면 으레껏 출근하듯이 그 신흥촌 언덕배기로 올라가서 그 공지에서 서성거렸던 말요.
왜 거기 가서 서성거렸느냐, 왜 매일 그랬느냐 하면 그 공지의 축대 난간에서는 그 집의 안뜰이 건너다 뵈었거든요. 이층집인데 앞마당에 나무가 너무 많아서 저녁 무렵 그 집 사람들이 마당에서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려고 해도 나무 잎사귀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도 나는 그 나무 사이로 그녀가 행여 어느 때나 보일까, 그녀의 모습이 보일까 하고 열심히 기다리면서 눈을 두리번거렸죠.
그런데도 그녀는 내 시야에는 얼씬도 안했소. 그러니까 혹 그 집 마당에 그녀가 나타났다구 해도 그놈의 빌어먹을 나무 잎사귀에 가리어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아마 그랬겠죠. 그러니까 그놈의 나무들이 나를 얼마나 초조하게 만들었는지 몰라요. 하여튼 나는 반년 동안 그 공지에서 서성거렸지만 그녀를 한 번도 볼 수 없었어요.
순열씨는 잠깐 이야기를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동료들은 귀가 좋지 않은 탓인지 혹은 순열씨의 목소리가 작기 때문인지 어느덧 서로 무르팍이 겹치도록 가깝게 좁혀들었기 때문에 순열씨는 약간 갑갑증을 느꼈다. 그들의 입에서는 역시 그 특유하게 노리끼한 악취가 새어나왔고 그들의 호흡이 가빠지자 그 악취는 더욱 순열씨의 후각을 괴롭혔다.
그는 또 그의 주변에서 느껴지는 다소의 불안 때문에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데 매우 불편을 느꼈다. 그는 빠른 눈길로 철창 바깥 복도의 동정을 살폈고, 건너편에 앉아 있는 정철훈의 동정을 살폈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 그보다도 2호는 지금 난데없는 만담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 근무자에게 발견된다면 작살이 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게다가 지금 근무자는 입이 무거운 대신 폭발적인 펀치를 가진 조 수병이었다. 그는 반역이 발견되면 서슴지 않고 키를 따고 감방 안으로 들어온다.
정철훈은 벽 쪽으로 비스듬히 돌아앉아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고 이따금 그쪽에서는 코고는 소리까지 들렸다. 하지만 순열씨는 그가 결코 자고 있지 않다는 것, 그의 태도는 자기 이야기를 거부하는 일종의 시위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이 중사는 눈치가 빠른 사나이였고 그는 아직 2호의 데빡이었다. 순열씨는 그가 주먹으로 자기 허벅다리를 한바탕 문지르자, 방금 스쳐간 한가닥 불안을 곧 잊어버렸다.
그런데 이 반년 동안에 그녀의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딱 한번 그 여자의 소리, 말소리, 그게 그 여자의 말소리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그 여자 소리였겠죠. 그 소릴 들은 일이 있어요. 어느날 저녁, 그러니까 여름밤의 아홉시 무렵인데 이미 주위가 어두워져 눈앞으로 십 미터도 잘 보이지 않을 때죠.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는데 그날 나는 유독 늦게까지 그 공지에 서 있었죠. 이제는 기다리는 데 만성이 되어서 이미 내 마음에서는 그 여자를, 여름 대낮에 잠깐 스쳐본, 그것도 반년 전에 딱 한번 본 그 여자 얼굴을 잊어버리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난 그 여잘 기다리는 게 아니고 이제는 그 여자를 기다리는 내 마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르죠. 그러니까 그 여자 자체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겁니다.
그러니 어두운 공지에 서서 그냥 우두커니 역시 어두운 건너편 집 정원을 지켜보는 참이었죠.. 그건 누가 나타나기를 기다린 게 아니고 그냥 습관이었다 이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마당 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어요.
아주 부드러운 처녀 목소리로,
아줌마, 비가 와요, 빨래를 걷어야죠.
그리고는 조금 걸걸한 여자 목소리로,
어마, 나 좀 봐. 깜박 잊어버리고 있었네.
그리고는 두 사람의 신발 끄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어서 그 처녀의 목소리가 다시,
내 수건은 어디 있어요? 어디?
그리고는 바쁘게 신발 끄는 소리가 나더니 곧 조용해져버렸어요.
어두운데다 그 나무들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귀를 바짝 기울이고 그 소리를 들었고, 그리고는 있구나! 거기 있었구나 하고 속으로 부르짖었죠. 왜냐하면 내가 잊어버렸던 것이 하두 오래 나타나지 않으니까 거기 없을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 여자는 거기 살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하고 거의 잊어버린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으니까 그렇게 부르짖은 거죠.
일단 그 여자가 그 집에 있다. 그동안에도 있었다. 내가 비록 볼 수는 없었지만 틀림없이 거기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자, 그 목소리가 그 여자 목소리라는 걸 어떻게 믿느냐고요?
나는 육감으로 알았죠. 우유빛 소리, 소리에 빛깔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테면 희뿌연 우유빛 소리인데다 보통 듣기 힘든 맑고 수줍어하는 것 같은 한마디 한마디가 가락에 맞추듯 조심조심 울려나오는 걸로 보아, 그 여자의 살빛이 희뿌연 우유빛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여자는 처녀였고, 그 집에서 그렇게 곱다란 말소릴 가진 처녀란 그녀밖에는 없을 것이므로 그 목소리는 틀림없이 그 여자의 것이라고 믿은 거죠. 나는 육감으로 알았어요.
하여튼 그 여자가 이때까지 그 집에 있었던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자 나는 공지에서 하릴없이 서성거리며 보내버린 반년의 시간이 허망스럽기 짝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의 태도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죠. 그렇게 거기 서서 시간을 보내며 기다린다.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은 바로 지척에 있으나 그것은 저절로 다가오거나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닌데 한 번도 거게 손을 뻗어보지 않고 그냥 기다린다.
그냥 망연히 기다린다는 것은 대관절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냐. 나는 존재란 획득하는 과정이라는 걸 일찍부터 알고는 있었죠. 다시 말하면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탐내고 그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 계획하고 노력하는 그런 과정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이거죠. 하지만 나는 탐을 낸 일은 있지만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았던 겁니다. 말하자면 우두커니 서서 막연히 기다린 나머지 이윽고는 일찌기 탐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그게 한번 본 일은 있지만 어떻게 생겼던가조차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참이죠.
그런데 문제는 이겁니다. 노력해야 얻을 수 있다. 이 정도는 알고 있던 내가 왜 노력하지 않았던가, 왜 서서 기다리고만 있었던가 이겁니다.
솔직이 말해서 나는 자신이 없었죠. 어떤 대상이 자기가 갖고 싶은 대상이 막상 나타나도 거기에 접근하기가 두렵고 겁만 앞선 겁니다. 왜냐하면 접근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방법을 모색하고 노력해봐도 결국은 별 수 없다. 결코 되지는 않을 거다. 왜 되지 않는가, 어째서 좌절되고 말 것인가. 그렇게 될 만한 무슨 필연적인 곡절이라도 내게는 있는가를 따져볼 겨를도 없이 그냥 지레 겁을 먹고 그 대상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있기만 하는 겁니다.
이윽고 나는 자기에게는 결코 성취되지 않는, 또는 획득되어지지 않는 어떤 필연적인 곡절이 정말 있을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확실히 곡절이, 필연적인 곡절이 있기는 있었는데 그것은 터무니없는 자각증세에 있었다 이겁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병들어 있다. 그렇다고 몸에 별다른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틀림없이 어느 곳에 병이 들어 있다는 생각과 또 나는 누구보다 걱정이 많은 사나이다. 누구보다 불안하고 걱정이 많아 몹시도 거기에 시달리는 사나이다.
걱정이 많다는 것도 따져보면 자기가 그만큼 무능하고 자기 내부에 그만큼 불가항력적인 요소가 잠재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증거이기 때문에 결국 병들었다는 거나 같은 얘기죠. 이따위 생각들 때문에 자신을 잃고 있었다 이겁니다. 그런데 이따위 증상이라는 게 어디서 연유했죠? 순전히 다른 사람들의 겉치레 인사말에서 그것도 막연한 추측으로 우연히 내게 던진 몇 마디 말.
요즘 어디 아프냐?
혹은,
자넨 밤낮 무슨 걱정거리가 그다지도 많은가?
이따위 몇 마디 말에서 연유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의 단순한 몇 마디가 이윽고 나의 고정관념으로, 어쩔 수 없는 고정관념으로 되어버리는 무서운 과정을 깨달았죠. 그것은 뭐냐 하면 그들이 너무도 끊임없이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같은 말을 끊임없이 내 귀에 대고 지껄였기 때문이었죠. 나는 결국 그 고정관념을 깨뜨렸습니다.
제기랄 그러니까 그 고정관념은 조진다는 거요? 조지지 않겠다는 거요? 난 지금 똥창이 뻐근하다 이거요. 내가 그걸 꽉 막고 있으니 망정이니 살짝 열기만 하면 당신도 질식하고 말 거요.
중사의 말에 주위에서는 키들거리며 웃었다. 한바탕 웃어댄 그들은 퍼뜩 정신이 들어 철창 밖을 바라보았다. 조 수병님의 발자국 소리가 7호 근처에서 들려왔지만 그들은 여태 그 발자국 소리를 잊고 있었다. 그들은 오늘은 시간이 빨리 흘러갔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그들이 시간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시간이 빨리 흘러갔다고 생각하자 아주 기분이 유쾌했다.
순열씨는 잠깐 입을 닫고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그의 닫혀 있는 입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지금 기다린다는 것, 그리고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도 알았다. 그들의 눈길은 또 빨리 끝을 내라, 얘기가 너무 길어지면 재미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순열씨는 그 여자를 조지는 장소를 찾고 있었다. 그는 곧 그것을 찾아냈다.
나는 말하자면 용기를 얻은 거죠. 나는 병들지도 않았다. 또 나는 특별히 걱정이 많은 사나이도 아닌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고, 그리고 그 생각을 믿은 거죠. 나는 그래서 남자가 여자를 탐하고 그걸 갖기 위해 노력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을 그제서야 지극히 당연하다고 인정하고 어느날 그 오래 닫혀 있던 대문을 두드렸죠.
그는 잠깐 숨을 몰아쉬고 얘기를 계속했다.
알구 보니 그 여자는 바걸이었어요. 놀라운 일이죠. 그녀는 내가 자기에게 반해서 자기를 찾아온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겼죠. 그녀는 참 순진한 양반도 다 보겠네. 아무튼 놀러 와요. 나 M동의 홍접(紅蝶)에 나가요. 여섯시부터 2번을 찾으면 돼요.
이렇게 내게 말했어요. 그러니까 내가 공지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때는 그녀는 바의 어두운 박스 속에서 술과 웃음과 간지러움을 파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이겁니다. 다소 김이 샜지만 나는 결국 여기저기서 돈을 꾸어서 목돈을 만들어가지고 <홍접>의 2번을 찾아갔죠. 나는 그날 밤 그녀를 돈으로 산 겁니다.
끝난 거요?
순열씨는 뒤로 조금 물러 앉으면서 중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여앉았던 동료들은 라스트 신이 싱겁게 된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처럼 씁쓰레한 얼굴로 주춤주춤 제자리로 돌아갔다.
당신은 그년의 맛이 좋았다든지 나빴다든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는구먼. 너희들 상상에 맡긴다 이거지? 좋았어. 아무튼 선생, 수고했수다. 야 정철훈.
중사는 한바탕 지껄이고는 갑자기 성이 난 사람처럼 언성을 높여 정철훈을 불렀다. 그는 자기 말마따나 지금 똥창이 터질 것 같아 초조한 데다 정철훈이 아직도 잠자는 시늉을 하고 있었으므로 더욱 다급했는지도 몰랐다.
중사의 부름에 정 철운은 퍼뜩 눈을 뜨고 중사를 향해 돌아앉았다. 그는 손등으로 연방 눈을 비벼댔으나 그의 커다란 눈은 방금 자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선생에게 강아지 한 마리 드리라구.
중사의 지시에 정철훈은 깜짝 놀라 중사와 순열씨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놀란 것은 정철훈만이 아니었다. 벽을 따라 앉아 있던 오태봉이나 천명오 그밖의 신참들도 모두 놀란 얼굴로 중사를 바라보았다.
한 마리밖에 없습니다, 중사님.
정철훈은 매우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중사에게 말했다.
알구 있다구. 이 새꺄, 드리라면 드리는 거야. 말이 많아.
정철훈은 하는 수 없이 철창 쪽에 등을 대고 돌아앉아 그의 바른쪽 다리의 발목 근처를 더듬기 시작했다. 그는 하얗고 목이 긴 군용 양말을 훌렁 까내리고 뚤뚤 말아진 조그만 종이 꾸러미를 양말 속에서 꺼냈다.
순열씨는 중사의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기가 몹시 거북했다. 그는 물론 오래 참고 견디었으므로 생각은 간절했지만 한 마리의 강아지를 맨 먼저 태운다는 것은 서열로 보아 너무나 무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정철훈이 반발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중사님 먼저 들어가시죠.
그는 중사를 돌아보며 계면쩍은 표정으로 첫번째 차례를 사양했다.
선생, 먼저 들어가쇼.
중사는 그의 사양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난 말요, 2호 일명 똥 싸러 갑니다 이거요. 알겠어요? 쭈그리고 앉아서 꽁초나 먹겠다 이겁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순열씨에게 재빨리 눈짓을 보냈다. 그것은 어물거리지 말고 빨리 들어가라. 여기서는 사양은 미덕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순열씨는 엉거주춤 일어나서 정철훈에게 다가가 강아지와 대가리를 받아들었다. 그는 그것을 얼른 손아귀에 감추고 철창 앞으로 나아가 신고를 마친 다음 변소 문을 열고 변소로 들어갔다.
조그만 문은 그 외양과는 달리 매우 두껍고 무거웠다. 그 문이 일단 닫히자 바깥에서 일어나는 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물론 바깥이라야 여기서는 기껏 2호의 감방이나 철창 밖 복도 따위를 두고 하는 말이다.
변소 안에 들어간 순열씨는 갑자기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는 군화 발자국 소리, 욕지거리, 미친 듯이 킬킬대는 웃음소리, 취사당번들의 그릇 씻는 소리, 구타당하는 신음소리, 근무자의 위협하는 소리 따위의 소음으로부터 그의 청각을 보호해준 조그만 문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는 불과 반 평도 못되는 좁은 면적에서 가까스로 자리를 잡고 서서 벽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었다. 그는 쪼그라진 아리랑 한 개비를 조심스럽게 입에 물고 단 하나의 성냥알을 그어서 궐련 끝에 불을 붙였다.
이것은 2호에 남은 마지막 강아지였다라고 느끼자, 그는 새삼 그 첫번째 한 모금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더구나 이것은 노란띠였고 노란띠가 수입되는 것은 그다지 흔한 일은 아닌 것이다. 보통 총장이 수입해 주는 것은 필터가 없는 저질의 담배뿐이어서 노란티나 흰띠를 구경하기는 힘들었다.
총장은 이따금 특히 08을 많이 잡아준 호에 보너스 격으로 노란띠나 흰띠를 한두 마리 섞어서 수입해 주는데 그것은 데빡이나 대단한 고참이 아니고서는 입에 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순열씨는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여다가 그것을 천정을 향해 천천히 내어 뿜었다. 연기는 넓고 얄따랗게 벽 위로 펼쳐지면서 천천히 어두컴컴한 천정으로 빨려 올라갔다. 그는 궐련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그것을 빨아들이고 연기를 다시 뿜어내는 일련의 동작을 통해서 비록 잠시나마 자기가 감금에서 해방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토록 겹겹이 사슬로 묶인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잠시나마 이런 느낌을 갖는 것은 아주 야릇한 일이었다.
당신은 시를 쓰느냐고 중사는 말했고, 난 시를 쓸 줄 몰라요, 하고 순열씨는 대답했다. 난 당신이 시를 쓸 줄 알았다구. 어쩐지 그렇게 보였어 하고 중사는 덧불였다.
하지만 써보슈. 당신은 쓰면 될 거야. 우린 생각은 많지만 대가리가 워낙 썩어놔서 어림없다구. 종이하고 연필을 줄 테니까 한번 써보슈. 심심풀이로.
난 시를 써본 일이 없어요. 시는 여기도 많이 써 있는데요.
순열씨는 손으로 시멘트 바닥과 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쇠붙이 조각으로 시멘트를 파서 새긴 크고 작은 글자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삶
1965. 3. 2. 대구 이길남.
삶
1967. 8. 11. 포항 박우범.
눈물의 3년
1968. 5. 30. 광주시 학동 이성우.
삶
제주시 김봉래.
배고파 미치겠다. 영자야.
1965. 9. 17. 삼천포 이건길.
이게 낙서지 시는 무슨 시요?
중사가 반문했다.
이거는 훌륭한 시죠. 이거 봐요, 삶, 이 한 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압축한 것입니까? 이건 참 훌륭한 시입니다.
선생, 내 얘긴 이따위 시 얘기가 아니고 선생이 그 말한 거 있지 않소? 변소에서 생각났다는 거 말요. 그걸 쓰면 진짜 시가 되겠다 이거요. 한번 써보슈.
아, 알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시를 쓸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 하고 말했었죠. 내가 변소에서 느낀 것은 여기가 낙원이구나 하는 거죠, 변소 문은 말요, 우리에게 출입이 허용된 유일한 문이고, 그리고 그 속에 들어가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죠.
그렇긴 해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거든. 그러니까 내가 시를 쓸 줄 알았다면 <여기는 낙원>이란 제목으로 하나 쓰겠다 이겁니다. 그렇지만, 히히, 당신은 재밌는 사람이야, 이 속에서 시는 무슨 시야? 하지만 재미있다구, 그 제목도 참 재미있고, 제목까지 잡아놓았으면, 그러지 말고 써보슈. 야. 정철훈, 선생께 편지 종이 한 장하고 연필을 갖다 드려.
그는 순열씨의 의견을 듣지도 않고 멋대로 지시를 내렸다.
정철훈은 갑자기 중사가 미쳤나 하고 휘둥그래진 눈으로 중사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거역하지 못하고 침구 곁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편지지나 연필 따위는 평소에 침구 속에 감춰놓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동안 침구 속을 뒤지고 있던 정철훈은 그냥 빈손으로 다시 돌아섰다.
종이는 있지만 연필은 총장이 가져갔습니다.
그 새낀 왜 자꾸 남의 것을 가져가지? 그 새끼더러 연필 돌려달라구 해.
총장이 취침 전에 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정철훈은 몹시 딱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총장이 그렇게 말했다면 총장이 돌려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이 중사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씨팔 모처럼 시 구경 좀 할까 했더니!
그는 순열씨에게 이따 쓰시오. 이따. 여기가 낙원이라구? 히히 그 제목 재미있구먼 하고 말했다.
순열씨는 절반쯤 타들어가는 궐련의 매듭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 허용된 자기만의 시간은 바로 그 매듭까지였다. 그는 머릿속에 떠돌았던 잡념을 뿌리치듯 지워버리고 한바탕 심호흡을 했다. 그는 다음 차례인 중사를 위해 불을 끄지 않은 채 남은 궐련조각을 높은 벽에 파인 홈에 꽂아놓고 변소를 나왔다.
난 이 새끼들이 요즘 발랑 까졌다는 걸 알고 있어. 오태봉 이 새꺄.
이죽거리며 웃고 있던 중사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방금 변소에서 흡연을 하고 나온 오태봉은 영문을 몰라 중사 앞에서 머뭇거리고 서 있었다.
천 하사 들어가.
그는 변소에서 타고 있을 담배를 생각하고 얼른 지시를 내린 다음 다시 오태봉을 노려보았다.
넌 이새꺄 변소에서 뭘 꾸물거리는 거야, 너 공주를 범했지?
아닙니다.
오태봉은 황급하게 부인했다.
이 새끼, 범했으면 범했다고 해. 너 변소에서 지금 공주를 범했지?
아닙니다. 거긴 보지두 않았어요.
뭐야 이 새끼, 그렇다면 박어.
오태봉은 하는 수 없이 머리를 바닥에 꽂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었다. 그는 몇 번 꼬꾸라질 듯 비틀거렸지만 곧 두 팔을 허리에 두르고 똑바로 박아 자세를 취했다.
이 새끼들은 내가 인심을 써도 몰라준다구.
그는 아침에 총장이 백양 다섯 개비를 새로 구입해 주었기 때문에 오래 차례를 거른 동료들에게 고참순으로 인심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오태봉은 변소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
이 새끼 얼굴이 요즘 자꾸 노오래지는 게 수상쩍지? 그지?
하고 중사는 정철훈에게 동의를 구했다. 정철훈은 빙그레 마주보고 웃고는 끙끙거리는 오태봉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이 새꺄 어따 대고 용두질야, 아직 피도 안 마른 새끼가 감히 데빡님의 애첩을 범해?
중사는 정철훈의 아첨에 마음이 흡족한 듯 금방 키들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 새꺄, 난 공주님을 범했습니다. 죽여주십쇼, 라고 해.
중사님, 정말 범하지 않았습니다.
끙끙거리면서도 오태봉은 완강히 부인했다.
뭐야, 이 새끼.
갑자기 화가 치민 이 중사는 그의 널따란 발바닥으로 오태봉의 머리통을 냅다 질렀다. 오태봉은 바닥으로 벌렁 넘어졌으나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곧 똑바로 박아 자세를 취했다.
이 새꺄, 난 공주님을 범했습니다. 죽여주십쇼, 라고 해.
난 공주님을… 범했습니다. 죽여… 주십쇼.
끙끙거리면서 오태봉은 간신히 복창했다. 그의 주근깨투성이인 얼굴은 충혈로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좋았어. 이번만은 내 용서한다, 오태봉 네 자리로 돌아가.
오태봉은 이 정도로 끝이 난 게 다행이라는 듯이 얼른 몸을 일으키고 헤죽헤죽 웃으며 벽가로 비켜났다.
선생, 변소에 있는 내 마누라 보았수?
순열씨에겐 얼핏 떠오르는 여자의 얼굴이 있었다. 그는 그녀가 비록 젊고 예쁘기는 하지만 창부처럼 천박하게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녀가 하필이면 변소 문의 안쪽에서 괴로운 사나이들을 유혹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온몸을 발가벗고 꽃이 만개한 모밀밭을 헤치면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순열씨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흥, 망측하게 생각 마슈, 그 왜 마누라와 오래 떨어져 있으면 현지 조달이라는 게 있지 않소? 말하자면 그런 거요.
중사님은 참 예쁜 <이것>을 가지고 있군요.
순열씨는 바른손의 새끼손가락을 세워 보이면서 웃었다.
히히히, 예쁘긴 확실히 예쁘죠? 내 본 마누라는 거게 비하면 똥치감밖에 안 돼요, 아차 실수, 난 몹쓸 놈이죠. 내 딸의 엄마에게 이게 무슨 말버릇이야.
이 중사는 자기 주먹을 들어 자기 입을 퍽 소리가 나도록 쳤다. 그는 어이쿠!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그 자리에 엎어져 한참동안 죽은 듯이 있었다. 중사가 머리를 다시 들었을 때 그의 눈초리는 다시 사납게 돌변해 있었다.
넌 잡았어?
이때 마침 흡연을 마치고 나오는 신참에게 중사는 사나운 어조로 물었다. 유난히 머리통이 큰 이 신참은 불과 며칠 전에 투숙한 가장 신참이었다. 그는 맨 마지막 차례로 변소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뭡니까? 중사님.
신참은 영문을 몰라 몹시 난처한 얼굴로 반문했다.
뭐야, 이 새끼 이만큼 다가와 봐.
신참은 길들인 짐승처럼 순순히 중사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중사는 앉은 채 오른쪽 다리를 들어 이 건강한 짐승의 가슴을 힘껏 걷어찼다.
어이쿠 비명을 지르며 신참은 뒤로 벌렁 넘어졌고 중사는 무슨 대단히 화난 일이라도 있다는 듯 숨을 헐떡거리며 다시 일어서는 신참을 노려보았다.
뭡니까, 라구? 이 새끼 그 말버릇 한번 좋았어. 이 새꺄 잡는 것도 몰라. 너 잡는 것을 깨우칠 때까지 거기 정좌하구 있어. 천명오 너 가서 잡고 와.
천명오는 벌떡 일어나서 휴지를 찾아들고 강아지를 잡기 위해 변소로 들어갔다.
정철훈 넌 이 새꺄. 어떻게 돼먹은 새끼가 감방 질서를 이 모양으로 해놓았어? 넌 신참 교육을 시킨 거야? 난 너를 믿고 네게 일임했는데.
데빡님, 죄송합니다.
정철훈은 얼른 대답하고 일행을 한바탕 노려보았다.
이 새끼들, 난 한방이면 없어. 난 중사님처럼 인정은 두지 않는다구.
그는 굳게 쥔 주먹을 허공에서 한번 휘둘러 보였다. 그의 주먹은 그의 머리통만큼이나 커 보였고 그의 동작은 번개처럼 빨랐다.
이 새꺄, 허풍 좀 작작 떨라구.
중사는 이렇게 말했지만 순열씨는 정철훈이 결코 허풍을 떨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며칠 전 정철훈이 신참 교육을 시키느라고 신참을 다루는 광경을 보았다. 정철훈은 앉은 채로 주먹과 다리를 능숙하게 휘둘렀고 그 솜씨는 오히려 중사보다 한층 흉포하고 잔인했다.
정철훈, 요즘 같아서는 내가 나간 뒤에 네놈이 잘할까 걱정이야.
정색을 하고 중사가 말하자, 정철훈은 소리내지 않고 능글맞게 웃었다.
중사님, 염려 마십쇼. 사실 난 이 새끼들 숨통을 꽉 눌러놀 자신이 있죠. 삐딱하는 놈은 벌써 황천으로 날으는 겁니다.
정철훈은 중사의 염려가 한낱 기우에 불과하다는 듯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때 순열씨는 정철훈이 즉위를 눈앞에 둔 황태자 같이만 보였다. 그는 확실히 데빡의 출감을 어떤 면에서는 데빡 자신보다 더욱 고대하고 있었고 또 즉위에 대비해서 무엇인가 끊임없이 준비하고 벼르고 있었다.
당신은 이를테면 지금 황태자의 신분이군요.
순열씨는 정철훈을 향해 그가 몹시도 부럽다는 어조로 말했다. 정철훈은 순열씨를 힐끗 보았지만 별로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새꺄, 넌 출세했어. 네 따위 주제에 황태자가 다 뭐야? 넌 여기 와서 출세했다구. 히히 흐 선생, 이 새끼가 황태자라면, 그럼 난 뭐요?
중사는 재미있어 못 견디겠다는 듯이 주먹으로 순열씨의 허벅다리를 발작하듯이 문질러댔다.
당신 이름은 따로 있어요. 당신은 네로야.
뭐라구? 네로? 흐흐 히.
당신 연기는 기가 막혀요. 중사님 쿠오바디스란 영화를 봤소?
보았죠. 그건 옛날 영화죠? 내가 중학교 때 본 것 같으니까.
그래요. 난 그 영화를 보면서 네로의 연기에 몹시 감탄했죠. 그런데 지금 당신 연기는 그놈을 능가해요.
순열씨의 말에 중사는 또다시 발작하듯 웃기 시작했다. 그는 웃을 뿐만 아니라 주먹으로 순열씨의 허벅다리를 문지르고 두 다리를 발광하듯 흔들어댔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그 발광을 딱 멈추고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선생, 사실 미친 척하구 사는 거요. 그렇지 않으면 벌써 진짜로 미쳤을 거요. …사실 그 새끼가 권총만 빼지 않았대두 그 씨팔 새파란 소위 새끼가.
중사의 음성은 저절로 커지고 있었다.
누구 말인가요?
순열씨는 그의 흥분되어 가는 얼굴을 향해 나지막히 물었다.
내가 그 새끼 땜에 씨팔 2년 반을 지금 여기서 썩는 거요. 씨팔 새끼가, 새파란 소위 새끼가 상관이라구 나 더러워서.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날 저녁때였죠. 다낭의 클럽에서 지금 5호에 있는 박 중사허구 꽁까이 하나씩 옆에 끼고 거나하게 마시는 참인데 그 새끼가 들어왔죠.
그 새낀 벌써 어디서 진탕 처마시고 오는 참이었다구. 이 새끼가 들어오더니 술도 안 마시고 다짜고짜 까이를 내놓으라구 하지 않소? 주인이 여자는 지금 없다. 여자는 지금 모두 손님에게 가 있다 하니까, 이 새끼가 다짜고짜 우리에게 와서 박 중사의 까이 어깨를 잡아당기는 거요.
하 씨팔 새끼. 쫄병 새끼들이 함부로 누구 앞에서 기분 내느냐고 호통 치면서 말요. 그래 박 중사가 한 대 친 거요. 그런데 그게 설맞았다 이거요. 박 중사 새낀 성질만 급했지 주먹은 약하거든. 이 새끼가 설맞아노니까 길길이 날뛰지 뭐요. 씨팔 쫄병 뭐라고 연방 씨부렁거리면서. 술이 확 깨버렸죠.
내가 뭐 그때 경거망동한 줄 아슈? 난 그래도 참으면서 박 중사가 붙으려는 걸 말렸다 이거요. 그런데 싸움 말리는 참인데 어퍼컷이 훅 날아왔죠. 눈에서 불이 번쩍하는데 정신 있을 게 뭐요? 참아서 남 주나 하지만 그때 참는 새낀 쌍말로 개 뭣에서 나온 새끼지, 에이 씨팔 나도 모르겠다 하고 한 방 보냈죠.
그걸 맞고 안 쓰러지고 배겨요? 그 새끼가, 그 새끼가 픽 나가 쓰러지는데 이건 뭐요? 보니까 권총을 빼들었지 않아요? 이 새낀 누운 채 몇 번 버르적거리더니 팡팡 하고 공포 몇 방을 쏜 거요. 그러니까 그 소리 듣고 엠피가 와서 챈 거죠. 그 씨팔 권총만 쏘지 않았대도 끄떡없는 건데.
야 정철훈, 강아지 하나두 없냐?
그는 강아지가 없는 줄 알면서도 입버릇처럼 물었다.
어제 저녁 다 떨어졌지 않습니까?
벽에 기대앉았던 정철훈이 얼른 몸을 세우고 대답했다.
이 새꺄, 말 안해도 알고 있다구. 이 새끼들 주지 않는군. 3호에서도 소식이 없고… 아무튼 이제 찌그러졌으니까 할 말은 없다구.
정철훈은 몸을 반쯤 일으키고 안절부절이었다. 그는 강아지가 없는 게 자기 책임이나 되는 것처럼 몹시 괴로운 눈초리로 데빡을 바라보았다.
3호로 연락을 해볼까요?
관둬. 신종술은 있으면서 보내지 않을 놈은 아냐. 난 그놈 의리를 알아. 3호는 지금 2호에 없다는 걸 알지?
그렇죠.
그럼 기다려보는 거야. 3호 아니면 총장이라도 한두 마리쯤 갖다주겠지. 총장 그 새끼도 양심이 있지. 08을 며칠 걸렀다구 설마 싹 씻겠나 이거야.
중사는 침구 곁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더니 벌렁 자빠져서 팔베개를 했다.
우리 선생, 목이 타도 좀 참으슈.
그는 그 귀여운 웃음을 보내면서 순열씨에게 말했다.
당신 그런데 고생하려구 강아지 귀신이구먼그래. 당신 도대체 사회에 있을 때 하루에 강아지 몇 섬씩이나 태웠수?
두 섬 정도 태웠죠.
허, 두 섬? 내 그럴 것 같았어요. 난 당신이 2호에 처음 들어올 때, 흥 강아지 귀신이 들어오는군 이랬다구. 난 누가 새로 투숙해오면 맨 첨 그것 먼저 보죠. 이 사람 강아지를 얼마나 태우나 하고 관상을 본다 이거요. 당신이 처음 들어올 땐 참 멋있었어. 머리 스타일이나 인상이 꼭 불란서 배우 같았다구. 지금은 찌그러졌지만.
야, 정철훈, 넌 이 새꺄 널 출세시켜준 선생님께 고맙다구 인사나 드려. 만약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넌 네 신분도 모르고 지냈을 거 아냐?
정철훈은 잠시 동안 정색을 하고 묵묵히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그는 방금 명명을 받은 것과 그리고 거기에 따른 절대 권력을 곧 자기 손아귀에 쥐게 된다는 데 자못 감동한 것 같았다. 그는 이내 싱글벙글 웃기 시작했고 그가 그렇게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는 것을 순열씨는 처음 보았다.
중사님 말씀이 맞아요. 난 출세했죠. 난 월남에서 C레이션을 까먹고 지낼 때를 빼놓고는 지금이 제일 좋아요.
순열씨는 깜짝 놀라 말하고 있는 정철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사나이는 지금 무어라고 말했는가. 그는 정철훈이 농담을 하지 않나 생각했지만 정철훈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군대 나가기 전엔 시장에서 구루마를 끌고 채소를 운반했죠. 그런데 하루 종일 좆빠지게 왕십리에서 동대문까지, 동대문에서 청량리까지 뛰어다녔지만 돈벌이는커녕 굶고 지낼 때가 많았다 이겁니다. 그래서 월남으로 지원했죠. 씨팔 월남서는 한때 좋았죠. 한바탕 뛰고 나면 먹을 것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하사님 그럼 당신은 먹기 위해서 월남에 갔다 이거요?
순열씨는 부지중에 이렇게 물었다.
그래요. 배불리 좀 먹을까 하고 간 거요.
정철훈은 외치듯이 갑자기 사나워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먹고살려고 죽음의 곁으로 간 겁니까?
뭐요? 뭐 잘못된 게 있소? 그런 거는 얼마든지 있다구. 화장장이도 있고 묘지기도 있고, 난 비겁한 새끼들처럼 죽는 것은 무서워 않는다구.
정철훈은 눈을 부릅뜨고 순열씨를 노려보았다.
이거 봐요, 당신은 전쟁에 나가본 일 있소?
그가 퉁명스럽게 묻자, 순열씨는 다소 당황했다. 그는 하사가 이렇게 묻는 의도를 알았다. 아니 하사는 벌써부터 순열씨가 적을 죽여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었고 그것은 하사가 순열씨를 경원하는 이유 중의 가장 큰 것이란 것을 순열씨는 어렴풋이 느껴왔던 것이다.
난 싸워보지 않았소.
그렇다면 당신은 나에게 말할 자격도 없다구. 당신은 무어라고 떠들지만 내 귀엔 들어오지 않아, 난 까다로운 건 질색이야.
그는 자못 경멸조로 말하고 혼자서 느긋해진 표정으로 중사를 보았다.
중사님, 내 삼십 명 죽였단 얘기 할까요?
그는 신이 나서 중사의 대답도 듣지 않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난 총 들고 싸우러 나가면 재미가 나요. 질질 매고 꽁무니 빼는 새끼들은 이해가 안 간다 이거요. 그날 우리는 베트콩 포로를 무더기로 잡았죠. 소대장이 야 정철훈, 네가 처리해 이러잖아요, 소대장님 상부지시를 받았습니까? 하니까 이 새꺄 급한데 상부고 나발이고가 어딨어 이러잖아요.
하긴 우린 곧 다음 작전지역으로 이동하는 참이었고 포로 호송할 병력도 모자라는 판이었죠. 이 새끼들 삐딱하면 뺀다 이겁니다. 그래 내 분대를 데리고 그 새끼들을 구덩이 속에 넣어 놓고 수류탄을 몇 개 넣어줬죠. 꽝 하더니 어깻죽지, 손가락, 대가리, 뭐가 뭔지 모르게 조그만 쪼가리들이 하늘로 막 날습디다.
그런데 구덩이에 안 들어가겠다고 앙탈한 여자 하나가 있었죠. 난 그걸 따로 떼어놓았죠. 부하 어떤 놈에게 그건 네가 해치워 하니까 이 쪼다새끼가 분대장님 전 못해요, 이러잖아요. 쪼다 같은 새끼, 하는 수 없이 내가 나섰죠. M16 참 무서워요, 그때 막 지급받은 참이었죠. 내가 이년을 겨누고 쏘는데 한 발 쏘았더니, 대가리가 이마 위쪽만 칼로 등글게 쪼갠 듯이 날아가버렸죠.
나는 M16을 처음 쓰던 때라 놀랐죠. 저러는 수도 있나 하고, 그래 그만 돌아설까 했죠. 그런데 이 여자가 눈만 남아가지고 날 무섭게 노려보잖아요, 날 무섭게 증오하는 눈초리로. 난 자기를 미워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래서 그 눈을 겨누고 한 방 더 쏘았죠. 이번엔 모가지까지 휙 날아버렸죠.
이 새꺄 난 그 얘기 벌써 두 번째 듣는 거야.
아니 갑자기 그 여자 눈이 생각나서 그랬죠, 난 미운 생각은 없는데 그 여자는 날 지독하게 쏘아보더라니까요.
그래 이 새꺄 넌 그 귀신들에게 맞아 죽을 거야 이제.
하하, 귀신이 주먹이 어딨어요? 귀신이 어딨어.
정철훈은 어처구니없는 듯 낄낄대고 웃었다.
난 이렇게 끄덕없이 살만 찌고 잘 지내는 걸요.
이때 3호 쪽에서 쿵쿵 벽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던 중사는 용수철에 튕기듯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중사의 지시가 떨어지기 전에 오태봉은 벌써 3호와 맞붙은 철창가의 벽 모서리에 찰싹 붙어 있었다. 오태봉은 이내 종이로 싼 조그만 꾸러미를 손아귀에 감춰들고 중사 앞으로 다가왔다.
있구나 있어.
중사는 갑자기 활기를 띤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마치 수혈을 받은 환자처럼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는 꾸러미를 자기가 받지 않고 정철훈에게 받으라고 손짓을 했다. 이때 그의 밝은 표정이 갑자기 경련하는 것을 순열씨는 얼핏 보았다.
펴봐, 펴봐.
하고 중사는 조급한 소리로 정철훈에게 재촉했다.
꾸러미 속에서는 강아지 두 마리 대가리 두 개가 나왔다. 정철훈은 얼른 철창 쪽에 등을 대고 돌아앉아 그것을 자기 양말 속에 집어넣은 다음 메시지를 읽기 시작했다.
-2호에게
이 중사님.
방금 배 하사가 감실에 다녀왔기에 소식 전함. 국방부 공판은 또 연기될 것 같소. 날짜는 확실히 모르나 다만 이십일경 열리지 않는 건 확실함. 이상 감실 조 상사 얘기니 틀림없는 듯. 2호의 선생님은 아마 2년 6개월이 될 거요. 항명죄의 내용을 모르니까 거기에 얼마나 더 추가될지는 알 수 없음. 아마도 잘될 거요. 잘되시기를 빈다고 선생님께 전해주시기 바람.
강아지 두 마리 보냅니다. 총장에게 한 섬 요구했는데 08만 마시고 배신했소. 다섯 마리 갖다준 거요. 총장 이 새끼 내 사회에 나가면 갈아마실 결심임. 당분간 두 마리로 참고 견디시오. 내일 3호는 한 섬 수입할 계획이 짜졌음. 그건 비밀임. 기대하시라, 지난번 강아지 한 마리 보내주신 이 중사의 의리와 우정 뼛골에 사무침. 건투 앙망.
신종술 배상
3호에서-
메시지를 읽고 난 정철훈은 벽에 기댄 채 반쯤 누워 있는 중사를 보았다. 중사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정철훈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이 새꺄, 뭐라고 썼어?
중사님, 또 미끄러지셨는데요.
뭐? 또 연기됐다구?
중사는 벌떡 일어나 앉더니 정철훈의 손에서 거칠게 메시지를 나꾸어챘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메시지를 보고 또 보았다.
이 새끼들, 사람 미치게 노는군, 이 새끼들은 바둑 한 판 더 두려구 자꾸 공판을 연기한다구.
맥이 풀리는 듯 중사는 멍청한 눈으로 철창을 바라보았다. 2호의 동료들은 숨을 죽이고 중사의 거동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들은 지금 잠자코 중사가 비록 우두커니 앉아 있지만 그의 머리는 실망과 분노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 분노의 화살이 이번에는 누구에게 날아올까 하고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중사의 화살은 이번에는 그들을 겨냥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부르쥔 주먹을 높이 들어올리더니 퍽 소리가 나도록 시멘트 바닥을 힘껏 두드렸다.
좋다구, 내 또 먹어주겠어. 가만히 앉혀놓고 멕여주겠다는 데야 할 말 있나, 야, 오태봉 너 이 새꺄, 이번 토요일엔 내 국에 꽁치 큰 거 넣어달라구 식사당번에게 말해.
그는 마치 공판이 연기된 사실을 그것도 언제 열릴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즐겁게 키들거리며 떠들어댔다.
야 정철훈, 미안하지만 난 너를 좀더 들볶고 나가야겠어.
좋습니다, 중사님.
정철훈은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그는 이미 그것쯤은 각오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공판이 연기되고 또 연기된다는 사실과 설사 공판이 쉽게 열린다 하더라도 막상 이 중사의 형 집행 정지가 결정될는지도 의문이므로 거기에 따라 자기의 즉위도 늦어진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다는 듯이 느긋한 눈길로 중사를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았다. 그는 십사 년의 여유를 가진 것이다.
이봐요, 당신은 2년 6개월이야.
중사는 구겨서 쥐고 있던 메시지를 순열씨에게 내밀었다. 순열씨는 덤덤한 눈길로 중사를 바라볼 뿐 그가 내미는 메시지는 받지 않았다. 그는 3호로부터 강아지가 수입된 뒤부터 갑자기 목이 타오르기 시작했고 중사가 그의 욕구를 빨리 간파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태우고 싶소?
중사는 메시지를 건네다 말고 순열씨의 멍청한 얼굴을 향해 말했다.
당신은 내 말을 믿지 않는군. 하지만 종술이의 구형은 어김없다구.
당신은 2년 6개월이야.
순열씨는 역시 멍청하니 앉아 있었다. 그는 중사의 얘기라든가 또는 3호 데빡의 구형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2라든가 6이라든가 혹은 그보다 훨씬 더 큰 수자라 할지라도 그런 수자에 별달리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야. 그 점에서 보면 정철훈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그는 중사의 말마따나 얼마든지 먹어줄 수 있다. 길고긴 세월을 먹어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쉽사리 그것을 말하지는 못했다.
태우려거든 태워요. 반쯤 태우고 거기 꽂아두쇼.
순열씨로부터 별다른 반응이 없자, 그가 지금 강아지 생각 때문에 여념이 없다고 판단한 중사는 이윽고 끽연을 권했다. 순열씨는 계면쩍은 표정으로 엉거주춤 일어서려다 그만 제물에 주저앉고 말았다. 강아지를 꺼내줄 정철훈이 이때 꼼짝도 않고 앉아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사나운 눈초리가 막 일어서려는 순열씨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던 것이다.
중사님, 오늘은 강아지 수입이 더 없을 겁니다.
정철훈은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이따 저녁식사 때와 취침 전에는 어떻게 하죠?
중사는 정철훈의 주장을 수긍하는 듯 몹시 딱한 얼굴로 순열씨를 돌아보았다.
저 새끼 말이 맞아요. 당신도 식사 때와 취침 전에는 더 못 참을 거요. 참읍시다.
그들은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정말 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참지 않고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순열씨는 그만 무안해져 슬그머니 벽 곁으로 물러앉았다.
그런데 선생, 당신 구라 좀 들어봅시다.
이때 중사가 다시 침묵을 깨뜨렸다.
난 알고 싶은 게 있다구. 당신 항명죄 얘기 좀 해보슈. 내일은 3호에서 강아지 대여섯 마리 올 거요. 그러니까 내일은 안심 폭 놓고 태우슈.
그 얘긴 재미없어요.
순열씨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렇지만 그는 아픈 데를 찔린 듯이 속으로 움찔 놀랐다. 그는 그곳이 자기의 치부라고 생각해왔고 지금도 그 생각은 마찬가지였다.
뭘 그래, 당신 구라는 아무튼 재미있다구. 빼지 말아요.
중사는 쉽사리 단념하지 않았다.
순열씨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난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가지려고 한 것뿐이요. 이게 항명이라는 거요.
그 여자 말요?
말하자면 그렇죠.
순열씨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뭐가 그리 간단해요. 당신은 자꾸 빼는군.
아니에요. 이게 전부예요.
그는 중사의 찌푸린 얼굴을 향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것은 가질 수가 없다. 그것은 여기에 없다고 믿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그것을 가지려고 욕심을 낸 거죠. 말하자면 나는 선택을 해보려다 실패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선택의 결과가 이거였다 이겁니다.
순열씨는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해보였다.
난 당신 수작을 알 만해.
이때 갑자기 정철훈이 거들고 나섰다. 나는 죄가 없다. 억울하다 이거지. 너희들은 다 죄가 있지만 나만은 죄가 없다 이거지. 하지만 그따위 좆같은 수작은 귀가 시리도록 들었다 이거야. 사령부 교도소에 억울하지 않은 놈 하나 있는 줄 알어?
개기름이 흐르는 정철훈의 커다란 얼굴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난 죄가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난 죄가 있으니까 지금 여기 있는 거요.
그럼 그렇게 말하면 됐지 왜 선택이니 고정관념이니 어려운 얘기로 개수작 떠느냐 이거야. 난 하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 이거지? 그거 쪼다들이 하는 얘기라구. 난 내 맘 꼴리는 대로 했는데 뭘, 당신이 말하는 그 선택을 했다 이거야.
그는 의기양양하게 말하고는 자못 위압적인 눈초리로 순열씨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과 마주치자 순열씨는 약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내부에서는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경련이 일어났고 그것은 지금 그의 치부를 가렸던 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당신이 선택했다고?
순열씨는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그래, 십사 년도 당신이 선택한 거요? 그렇지는 않겠지. 한마디로 당신은 쫓겨다녔을 뿐이요. 당신은 마치 옛날 왕십리에서 동대문까지, 동대문에서 청량리까지 구루마를 끌고 쫓겨다녔듯이 그 이후로도 계속 쫓겨다녔단 말요.
당신은 흡사 궁지에 몰린 쥐새끼처럼 이리저리 쫓겨다니다가 이윽고는 함정에 빠졌다 이거요. 당신이 선택한 건 하나도 없다구. 당신은 이렇게 말했지? 나는 그 여자를 미워하지 않았는데 그 여자가 나를 증오하는 눈초리로 쏘아보길래 한 방 더 갈겼다구, 그것 봐요, 그건 충동에서 나온 행동이지 선택이 아니다 이거요. 당신은 실컷 쫓겨다니다가 함정에 빠진 거 아니오?
정철훈은 약간 질린 듯 한동안 말을 잃고 묵묵히 순열씨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무서운 인간이라는 것, 자기는 적의 빗발치는 탄환 앞에서도 별로 겁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순간 그는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인간을 다짜고짜 패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주먹을 부르쥐었다. 이때 그는 중사의 날카로운 늑대 눈이 그의 거동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가까스로 이 충동을 억눌렀다.
지금 뭐라고 했지? 당신 선생이면 단 줄 알어? 좆같은 소리로 사람 겁주려고 하는데, 난 지금은 당신이… 멋대로 지껄이게 내버려두겠어.
그는 낮은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했지만 그의 눈빛은 도끼를 든 백정의 그것처럼 살벌하고 험악했다.
난 함정에 빠진 쥐가 어떻게 군다는 걸 알고 있어요.
순열씨는 정철훈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조용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구태여 날 위협하지 않아도 된다 이거요. 당신이 무섭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까.
그는 말을 끝내자 이내 벽가로 물러나 벽을 향해 돌아앉았다. 그리고는 자기가 방금 지껄였던 행동을 곧 후회했다. 나는 빗나갔어. 나는 지금도 중사의 말마따나 술이 취해 있는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나는 하사를 미워하지 않았는데 그는 나를 증오하는 눈초리로 보았기 때문이야. 그는 정철훈의 말을 흉내내어 보고는 속으로 공연한 너털웃음을 웃고 있었다.
0시 30분에 불침번 교대를 한 순열씨는 벽에 기대고 서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이따금 근무자의 발자국 소리가 2호 앞을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는 똑바로 서는 부동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불침번이 벽에 기대는 게 근무자에게 발각되면 작살이 난다는 경고를 데빡으로부터 받은 일이 있지만 순열씨도 이제 감방 질서에 조금씩 도전해보는 데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바로 감방에 적응해가는 과정이라는 걸 빨리 이해한 것이다.
밤 시간은 낮보다 한층 빠르게 지나간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또 이 벽은 자기가 기대기에 충분할 만큼 견고하다고도 생각했다. 그는 졸음에 시달리면서 동료들의 몹시도 코고는 소리를 들었고 이따금 그들의 다리가 옆 사람의 가랑이 사이로 파고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들이 비좁은 잠자리에서 서로 껴안기도 하고 어떤 놈은 팔을 벌리고 다가오는 상대방의 가슴패기를 힘껏 밀어버리기도 하는 모양을 자녀가 많은 어느 가난한 부친처럼 한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때 정철훈이 안쪽 잠자리에서 부스스 털고 일어났다. 그는 눈을 가렸던 수건을 걷어치우고는 잠자는 동료들을 건너뛰어 변소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변소에서 나온 정철훈이 이번에는 철창 옆에 서 있는 순열씨에게 다가왔다.
선생, 태우고 싶지 않소?
곁에 바싹 다가온 정철훈의 소리를 듣자, 순열씨는 졸음이 한꺼번에 달아난 듯 깜짝 놀란 눈으로 정철훈을 바라보았다.
지금 거기다가 강아지하고 대가리를 꽂아놓고 나왔소. 내가 대신 여기 서 있을 테니까 근무자 눈치 채지 않게 들어가서 태우고 나와요.
반신반의하는 순열씨의 태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철훈은 덤덤하게 말했다.
강아지는 아까 취침 전에 바닥나지 않았소?
이건 내가 데빡 몰래 비상용으로 감춰둔 거요. 난 변소 천정에 개인 조달창이 따루 있어요. 가서 실컷 태우고 나오슈, 한 마리 다.
순열씨는 변소로 들어가 노란 띠의 필터가 탈 때까지 미친 듯이 연기를 빨아댔다. 그는 자기에게 베풀어진 호의를 가늠할 겨를도 없이 흡연의 즐거움에 취해버렸고 이윽고는 현기증이 일어나 변소의 벽에 머리를 기대고 오랫동안 취기가 가시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불침번의 자리로 돌아왔다.
이젠 풀코스는 뛰기 힘들군요.
그가 말하자, 정철훈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선생은 아직 센 편이요. 데빡도 풀 코스를 뛰고 나면 비틀거린다구요.
정철훈은 자기가 깨어 있는 걸 근무자가 볼까봐 순열씨의 곁에 바짝 붙어섰다.
그런데 선생, 아까 일은 잊읍시다.
그는 근무자가 들을까봐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난 잊어버렸어요, 벌써.
그는 키가 작은 하사를 돌아다보며 역시 작은 소리로 대꾸했다.
그런데 선생, 내 상고 이유서를 못 보았죠?
그게 어딨어요?
저기 휴지통 안쪽에 끼워놓았어요.
그건 누가 쓴 거요? 당신이 쓴 거요?
아니오, 데빡이 써준 거요. 난 국졸이라 말할 줄도 모른다구요. 쓰는 것은 더구나 절벽이라구요… 내가 지금 상고중이라는 건 알지요? 난 이걸 써놓았지만 이번에도 보나마나 기각될 거니까 포기 상태였죠.
하지만 생각할수록 뭔가 이상하게 된 것 같다 이거요. 난 정말 억울하단 생각이 들어요. 난 14년 아니라 14일도 억울하단 생각이죠. 난 훈장을 다섯 개나 탔어요. 그 속에는 월남정부 것도 있죠. 내가 훈장을 많이 탔대서가 아니라 이 새끼들이 훈장을 줄 때는 언제고 여기 처넣을 때는 언제냐 이거요. 난 똑같은 적을 죽였을 뿐인데.
그렇지만 당신이 죽인 사람들이 적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겠소?
하, 그게 바루 까마귀들이 하는 소리라구요. 씨팔 내가 뒈져서 썩어버린 놈을 이거다 저거다 어떻게 증명해요?
하지만 선생은 내 애길 들어보면 알 거요.
그는 한숨을 폭 쉬고 나서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날 나는 작전에 앞서 수색대를 이끌고 작전지구로 나갔죠. 그런데 적이 점령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마을이 텅 비어 있었어요. 적은 벌써 우리 작전을 예측하고 마을에서 개울 하나 건너 있는 고노이 성으로 철수해버린 거죠.
난 분대를 이끌고 무인지경인 마을로 들어가 집, 돼지우리 할 것 없이 마구 뒤지고 다녔다 이겁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집 뒤뜰을 지나가는데 이상한 예감이, 수군수군 말하는 소리 같은 게 들려서 난 벌써 거기 뒤뜰 절벽에 뭐가 있다 즉각 안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 절벽에 가마니로 교묘하게 은폐된 굴이 있었다 이거요. 나와, 이 새끼들아 하고 내가 월남어로 소리치자 수군수군하는 소리가 딱 그쳤죠. 나와, 이 새끼들아 하고 그래서 다시 소리쳤죠. 그래도 안 나와요.
그래서 수류탄의 안전핀을 까들고 가마니를 휙 젖히고 굴로 들어갔죠. 이 새끼들 안 나오면 수류탄을 집어넣겠어, 하고 굴속에서 소리치니까 손을 들고 나오는데 보니까 쉰 넘어 뵈는 남자 하나 여자 하나 이렇게 둘이었죠. 또 하나는 돼지우리 속에서 잡았어요.
이 치가 몸에 돼지 똥을 잔뜩 바르고 돼지를 꼭 껴안고 있더라 이겁니다. 참 별놈 다 봤어요. 이 새낄 내가 뒷덜미를 잡아끌어냈죠. 이 새끼가 끌어내려고 하니까 돼지를 꽉 껴안고 안 나오려고 하는 게 나는 돼지다 난 보다시피 돼지다. 돼지니까 그냥 돼지로 알고 지나가거라. 이런 식이죠, 흐흐흐, 참 별놈 다 봤어요.
난 셋을 잡아다 길가에 앉혀놨어요. 이걸 죽일 생각은 물론 없었죠. 소대가 도착하면 곧 후송시킬 참이었다구요. 잠시 후에 곧 소대가 도착했어요. 그런데 엠병할, 소대가 도착하자마자, 여태 잠잠하던 고노이 성 쪽에서 일제 사격이 시작되는 거요.
고노이는 적의 아성인데다 워낙 숲이 많아서 새끼들이 어디서 쏘는지 도무지 뵈질 않아요. 그날은 또 유독 안개가 자욱했죠. 우리 소대는 그러니까 미처 포진이고 나발이고 할 겨를도 없이 마구 고노이 쪽에 대고 갈긴 겁니다. 정신없이 갈기는데 이 새끼들이 도망친다 이겁니다. 나이 먹은 치들이 어떻게 번개같이 도망치는지 난 놀랐죠.
돌아오지 않으면 쏜다, 하고 나는 몇 번이나 소리쳤어요. 이 새끼들은 한번 빼면 그런데 절대로 돌아다보거나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죠. 그래도 처음엔 쏘지 않고 공포 몇 발 쏘고 돌아오라고 불렀죠. 이 새끼들이 돌아옵니까. 그런데 이 새끼들 도망치는 방향이 고노이 쪽이다 이거요. 작전중인데 더 생각할 게 있어요? 그냥 쏘아버렸지요.
그러니까 당신은 그들이 틀림없이 베트콩이다 하고 확신한 거군요.
그렇죠. 그 새끼들 고노이 쪽으로 간 것만 봐도 틀림없어요. 또 우리 대대 방침은 작전지구에서는 지뢰를 매설할 수 있는 놈은 모두 적으로 보아라, 그러니까 제 발로 걷는 놈은 모두 적으로 보아라 이겁니다.
정철훈은 말을 마치고 제물에 지친 듯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선생, 어떻게 생각하시우? 난 십사 년이면 마흔 살이 돼요.
정철훈의 목소리는 갑자기 아주 맥이 풀린 것처럼 들렸다.
난 당신 이야기가 충분히 수긍이 가요. 당신 말마따나 십사 년은 고사하고 십사일도 억울할는지 모르죠. 그렇지만 나는 까마귀가 아니니까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따위는 지금 아무런 쓸모도 없죠.
그게 아닙니다.
정철훈은 순열씨의 말에 생기를 얻은 듯 힘을 주어 말했다.
난 선생께 부탁 하나 있어요. 선생, 그걸 좀 써주시오. 내 상고 이유서 말요. 데빡이 써준 게 있지만 선생이 새로 하나 써주시오.
정철훈은 순열씨를 올려다보면서 마치 어린애처럼 연거푸 간청했다.
그걸 쓰는 거야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써달라면 써드리죠. 하지만 종이 한 장에 무슨 기대를 걸 수는 없을 거요. 까마귀들은 특히 그런 종류의 호소나 애원에는 강하니까요.
하지만 해보는 데까지 해보기루 작정했어요. 해볼 때까지. 내일, 아니 벌써 오늘이군요. 날이 새면 종이하구 연필을 준비해드릴 테니까 초안을 잡아봐요.
정철훈은 벌떡 일어나 잠자는 동료들을 건너뛰어 다시 그의 잠자리로 돌아갔다.
순열씨는 돌아가는 정철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오늘따라 마치 병약한 사내처럼 어두운 그늘로 덮여 있었고 그의 숨소리는 고통스런 신음소리로 변해 있었다. 순열씨는 이때 정철훈의 상고 이유서에 어쩐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쓸 것 같은 기우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말하자면 정철훈의 가사를 빌어 자기의 곡조를 노래하는 격이었다. 그는 이 기우가 기우로 끝나기만을 바랐다. 왜냐하면 그것은 취한의 노래처럼 들릴 것이고 그 결과는 분명히 정철훈에게 역효과를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2시에 5번 교대를 하려고 눈을 뜬 천명오는 철창 앞 불침번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순열씨가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탈진한 사람처럼 얼이 빠진 얼굴 위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훌쩍거리고 있었다.
천명오는 너무 놀라 발이 묶인 듯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순열씨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천명오가 놀란 것은 단지 순열씨의 울음 때문이 아니라 그가 아무것도 거리끼지 않고 천연스럽게 울고 있는 태도였다. 이때 순열씨의 울음소리는 갑자기 폭발하듯 더욱 격렬해졌다.
그 바람에 2호 동료들이 하나 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 중사, 정철훈, 오태봉 그리고 그밖의 신참들은 자다가 놀라 깨어나 눈을 비비고 그들의 수면을 방해한 울음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울음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울음소리의 주인공이 순열씨라는 것을 알자, 이번에는 더욱 놀랐다.
저 친구가 갑자기 미쳤나? 가서 울지 말라고 해.
중사가 이렇게 말했지만 아무도 순열씨에게 다가가 그가 우는 것을 제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선 이 조용하고 침착한 사나이가 저토록 어깨를 들먹이며 짐승처럼 끼륵끼륵 괴이한 소리로 마구 울고 있는 모양이 흥미롭기도 했지만 그들의 힘으로는 어쩐지 선생의 울음을 제지할 수 없으리라는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누구야. 우는 게?
이때 울음소리를 듣고 어느새 2호 앞에 다가선 근무자가 물어왔다. 그는 펀치의 위력을 특징으로 하는 이광일 수병님이었다.
2호의 동료들은 질겁을 하고 눈을 가리듯 깊이 내려쓴 근무자의 하얀 파이버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제 드디어 선생이 근무자에게 작살이 나는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는 가슴을 졸이며 기다렸다.
이광일 수병님은 근무자가 다가와도 여전히 격렬한 울음을 멈추지 않는 순열씨를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한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과 거동에는 2호의 동료들이 예측했던 그런 변화는 오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이 초라한 사나이가 어깨를 들먹이며 거리낌 없이 마구 울고 있는 매우 우습고도 삭막한 풍경을 2호 사람들과 더불어 오랫동안 구경하고 서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