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성(聖)과 속(俗)의 대립은 유사 이래 문학과 예술, 철학 등 인간의 정신세계 전반을 관통해오는 핵심 주제의 하나이다. 본질적으로 그 대립은 항상 비극성을 띨 수밖에 없다. 이렇게 짧은 단편에 이렇게 날카롭고 처절하게 그 비극성을 드러낸 작품은 드물 것이다. 성직에 종사하는 거룩한 사제의 집안을 자임해온 어느 가족이 잔인한 세월의 연마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전락했는지 이 작품은 소름 끼칠만큼 정확한 삶의 단면을 통해서 묘사한다. 마지막 장면은 그러한 전락이 어느 지점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라리 일종의 카타르시스의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열두어 살쯤 되어 뵈는 계집아이가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채소를 다듬고 있다가, 우리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놀란 눈초리로 민섭씨와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우리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설 때까지 일손을 놓고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여기가 내 집이오.
민섭씨가 가리키는 집은 마치 토인의 움막처럼 낮게 내려앉아 있는 흙벽집이었다. 민섭씨는 그게 자기 집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 조금 부끄러운지 슬쩍 고개를 돌리고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잡목이 무성한 야산을 등지고 언덕의 비탈에 자리잡고 있는 이 가옥은 양일(陽日) 부락에 와서 내가 보았던 어떤 가옥보다 더 초라했고 더 적적해 보이는 집이었다.
지붕을 덮은 볏짚은 이미 몇해째나 되었는지 삭을 대로 삭아서 풀썩 주저앉아버렸고, 투박한 흙벽 주변에는 산에서 굴러내린 잡석 조각들이 멋대로 뒹굴었다. 거기에다 저녁나절의 산 그림자가 언덕바지 일대에 드리워져 이 외딴 가옥의 풍경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이렇게 찾아주시리라고는 꿈에도 몰랐거든요.
민섭씨는 방금 언덕바지 아래서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을 다시 되풀이했다. 그제서야 나는 민섭씨의 눈언저리에 술기운이 번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약간 뚱뚱한 그의 몸에서도 술 냄새가 확 끼쳐왔다. 그는 마당 가운데 엉거주춤 서서 초점이 흐린 눈으로 한동안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제 또 생각나는데요. 그 당시 큰 부채를 만들어가지고 부친께서 점심 자실 때 부쳐드리던 아드님이죠. 이제 누군지 확실히 알겠군. 그 사실은 작고하신 댁의 부친께서 늘 자랑하셨으니까 알지,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몰라요. 서로 이웃간이었지만 댁은 얼굴 보기가 힘들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곳으로 옮기셨지요?
나는 아까부터 내심 몹시 궁금했던 사실을 불현듯 물었다. 그의 집을 찾느라고 나는 한참동안 부락을 헤매고 다녔는데, 부락사람들 중에서 민섭씨가 옮겨간 곳을 알고 있는 사람을 좀처럼 만날 수가 없었다.
이 마을 공소(公所)가 어디로 옮겼습니까?
부락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다짜고짜 이렇게 묻곤 했다.
공소라니, 그런 건 처음 듣는 소리요.
어떤 사람은 도리어 묻고 있는 내 얼굴을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기도 했다. 염전에서 돌아오는 민섭씨와 부락의 입구에서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길로 양일부락을 떠났을는지도 몰랐다. 민섭씨는 내가 묻는 말에 얼핏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진 채 잠시 고개를 떨구고 있더니 전혀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벌써 팔 년째 넘기고 있지요.
우리가 서 있는 언덕바지에는 염산(鹽山) 해안의 전모가 한눈에 들어왔다. 왼편으로는 야산의 발목 근처에 타원형의 봉남리(奉南里) 저수지가 길게 누워 있고 저수지의 제방을 경계로 바른쪽에는 널따란 개간지가 펼치어 있다.
개간지를 지나면 염전이 있고 염전 건너편에 해안지대의 뾰쪽산들이 멀리 바라다보였다. 해안이라고 말했지만 여기서는 칠산 바다의 넓은 수면이 해안에 밀립한 그 뾰쪽산들로 가리워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범선 한척 구경하기도 어려웠다. 그렇지만 겨울 해풍은 이 언덕바지 쪽으로 쉬지 않고 불어오고 있었다.
그만 들어갑시다. 이 바람은 몸에 해로워요.
민섭씨는 취기가 점점 더 오르는지 뚱뚱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우리들은 돌아서서 다시 흙벽집 앞으로 갔다.
아빠, 미란이가 배탈 났어요. 배가 아파서 죽을려고 그래.
우리가 장지문 앞으로 다가서자, 여태까지 땅바닥에 앉아 있던 계집애가 갑자기 쇳소리로 말했다.
그년 죽을려나 보다 끌끌. 너, 애가 땅바닥에서 무얼 집어먹는 걸 못 봤어?
민섭씨가 몹시 화난 어조로 묻자, 계집애는 고개만 몇 번 가로저었다. 민섭씨는 허리를 굽히고 낮게 내려앉은 장지문의 손잡이를 잡고서 다시 투덜거렸다.
그래, 영자 너는 애기가 땅바닥을 멋대로 기어다니게 버려뒀다는 말이지? 에끼, 망할 것. 끌끌.
나는 민섭씨를 뒤따라 곧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몹시도 깜깜해서 민섭씨도 미란이라는 애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다만 방 한편 구석에서 애기의 칭얼대는 소리만 들려왔다.
왜 불을 켜지 않고 자빠져 있는 거냐?
민섭씨는 별안간 누구에겐지 꽥 고함을 쳤다. 그러자 잠깐 동안 부시럭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심지를 돋운 램프가 방안을 밝혀놓았다. 민섭씨는 어느덧 방 아랫목에 앉아서 무릎 위에 애기를 앉혀놓고 손바닥으로 애기의 뱃가죽을 연달아 문지르고 있었고 그의 맞은편에는 서로 한두어 살 터울로 보이는 두 명의 사내아이와 두 명의 계집아이가 벽을 등지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방금 마당에서 채소를 다듬던 아이도 어느 틈에 방으로 들어와 거기 끼어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벙어리처럼 입을 꾸욱 다물고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난 낯선 사람을 놀란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나를 향한 채 움직일 줄 모르는 그들의 눈길에는 무엇보다 상대방을 경계하는 기색이 역연했다.
한동안 나는 아이들의 강한 시선에 사로잡혀 어쩔 바를 몰랐다. 그들은 마치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놓여져 있는 미이라들처럼 그렇게 꼼짝하지 않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낡은 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광대뼈가 드러나 보일 만큼 말라붙어 그만한 나이 때의 활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아이들은 모르실 거요. 모두 그 이후로 태어난 애들이죠.
미란이의 뱃가죽을 문지르면서 민섭씨가 나에게 말했다.
이 애들아, 손님에게 인사드려. 이분은 고마운 아저씨라구. 이분이 우리를 일부러 찾아주셨어.
나를 지켜보던 아이들의 얼굴에 잠깐 영문 모를 감동의 기색이 스쳐갔다. 그들의 시선도 약간 부드러워졌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마저 떠올랐다. 두 명의 사내아이와 두 명의 계집아이는 미리 연습이라도 해두었던 것처럼 일제히 무릎을 꿇고 방바닥에 성급하게 이마를 부딪쳤다.
그건 그렇고, 손님이 시장하실 텐데. 이애, 영자야. 빨리 저녁 준비를 해야지.
민섭씨는 이때 아주 난처한 표정으로 영자를 바라보았다.
언니가 와야 돼요.
영자는 간단하게 대꾸할 뿐,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무가 없냐?
민섭씨가 기어드는 소리로 또 물었으나 영자는 이번에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그녀의 대답은 충분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약주라도 한 되 받아와. 손님을 이렇게 앉혀둘 수야 있냐.
아닙니다. 술 같은 건 전혀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자꾸만 사양했으나 막무가내였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벽장 속에서 커다란 약주병을 꺼내들고 영자를 재촉했다.
빨리 약주 한 되 받아와. 꾸물대지 말고 빨리.
아저씨는 벌써 술을 하셨군요. 저는 정말 술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귀한 손님인데. 나는 물론 전작이 있지요. 저녁나절에는 약주 한잔 마시지 않고는 염판에서 돌아오기 힘들지요. 그놈의 바람이 귀를 따갈 것 같은걸.
영자는 술병을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영자가 나간 사이에 청년 하나가 장지문을 열고 방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는 방안에 앉아 있는 낯선 얼굴을 발견하고는 적이 놀란 듯 눈을 두리번거렸다. 겨우 스무 살을 넘겼을 듯한 청년인데 오랫동안 병을 앓은 사람처럼 얼굴빛이 창백했다.
너 어디 있다가 오는 거냐?
청년을 보자, 민섭씨가 버럭 역정을 냈다.
뒷방에서 자고 있었어요.
자고 있었다고? 이 녀석아. 잠으로 끝장을 볼 참이냐?
민섭씨는 다시 나를 향해 이아이가 누군지 알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테오를 모르시던가요?
민섭씨는 사뭇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되물었다.
아아, 마테오.
나는 불현듯 소리치면서 벌떡 일어서서 청년의 굵다란 팔목을 힘껏 붙잡았다. 엉겁결에 내게 팔목을 붙잡힌 녀석은 더욱 어리둥절해진 눈초리로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었다.
영애는 어디 있어요? 영애가 여기 있나요?
그제서야 나는 마테오의 누이인 영애가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있어요. 산에 나무하러 갔어요.
이번에는 마테오가 대답했다.
벌써 바깥이 캄캄해졌을 텐데, 이렇게 늦게까지 산에 있다고?
이미 밤이 되었고 더구나 지금은 겨울인데 산에서 땔감을 구한다는 일이 나는 얼핏 믿어지지 않았다.
낮에는 산림 감시원 때문에 산에 갈 수 없지요.
마테오가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네가 마테오냐?
여전히 녀석의 팔목을 붙잡은 채 내가 물었다. 녀석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머리만 몇 번 끄덕거렸다. 마테오의 표정이 너무 굳어 있는 것을 보고 이때 민섭씨가 옆에서 거들었다.
너는 이분을 몰라보겠냐?
마테오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민섭씨는 다시 이분이 누구라는 것을 간단히 설명하고는 끝으로 이분이 일부러 우리를 찾아주셨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테오의 표정에도 역시 손님을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기색이 역연했다.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녀석의 얼굴은 전혀 입을 열려고 하지 않고 손님인 나를 싸늘한 눈초리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는 몹시도 답답했다. 하지만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는 마테오의 말은 도리어 당연했다. 나는 마테오의 팔목을 놓고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이 아이가 그때 몇 살이나 되었을까요?
민섭씨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한참동안 생각한 다음에 대답했다.
아직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지요.
그렇다면 여섯 살이나 일곱 살이었겠군. 이애는 워낙 여기서만 주욱 갇혀 살고 있으니까 사교성이 도무지 없어요. 그러나 영애는 기억하고 있을 거요. 그 애는 마테오보다 다섯 살이나 위니까.
약주를 마시면서 민섭씨는 취기가 오름에 따라 말이 더욱 많아졌다. 그는 여태 감춰오던 아주 구차스런 얘기까지 서슴지 않고 꺼내놓았다. 민섭씨는 지금 자기 마누라가 부재중이라서 오늘 저녁식사 대접이 여의치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어머니는 육년 동안 척추결핵을 앓아오다가 방금 치료를 받으려고 광주의 병원으로 갔다는 것이다.
육년이나 되었는데 이제야 치료를 받으러 갑니까?
내가 이렇게 묻자, 민섭씨의 표정이 병자처럼 일그러졌다.
보다시피 무어 가진 게 있어야 말이지요.
그는 두 손바닥을 활짝 펴보였다. 그는 자기가 사실은 염전의 전주가 아니고 이제는 염판의 일개 품팔이꾼이 되었노라고 털어놓았다. 염판에서는 일당 삼백 원씩 받는데 그것도 날씨가 궂은 날은 일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민섭씨가 염전의 전주라고만 생각되었다. 그의 풍채나 말씨는 아직도 전주다왔다. 그렇게 생각되는 민섭씨가 품삯이 너무나도 박하다고 투덜거릴 때 나는 적이 당황했다. 어떻게 하여서 염판의 품팔이꾼이 되었느냐는 따위의 말은 나는 묻지 않았다. 민섭씨가 틈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떠들었다.
이 아이들은 소학교도 미처 마쳐주지 못하게 되어다오. 작년에 자진퇴학을 시켰거든요. 저놈만은 간신히 중학을 마쳤는데, 그러나 지금 중학 졸업장이 무엇에 소용됩니까?
그는 턱으로 마테오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부지중에 어성을 높여 그렇다면 아직 어린아이들을 언제까지 방안에 가둬둘 참이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민섭씨는 대답 대신으로 한번 길게 한숨을 쉬고 나서, 아주 비장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비록 막일을 하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가 돼버렸지만 새로 일할 만한 곳을 찾아 어디든지 가볼 작정이라고 말했다.
아직 나이 젊었을 때 일찍 이곳을 떠났어야 하는 건데. 그는 이렇게 탄식하였다. 그러나 한편 이 염산을 떠나기가 몹시 겁이 난다고도 말했다. 굶어죽기는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웬일인지 염산을 떠나기가 두렵다는 것이다.
지금 나의 생각으론 인천이나 군산 쪽으로 가볼까 해요. 그쪽 염전에 찾아가 보면 설마 나 한 사람 일할 자리야 없을라구요.
그는 떠날 것을 확실히 작정하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약주병 바닥이 거의 드러났을 때 부엌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영자가 먼저 발딱 일어서더니 부엌 쪽에 달린 조그만 장지문을 열어젖혔다.
언니야? 캄캄한 부엌을 향해 그녀가 소리쳤다. 응. 부엌에서 여자의 대답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왔어, 언니. 영자가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누군데? 부엌에서 여자가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영자가 잠깐 동안 뭐라고 대답할 바를 모르고 머뭇거리다가 그냥 어떤 남자라고만 말했다. 미란이 자냐? 여자는 이렇게 묻고 미란이를 자기에게 데리고 오라고 영자에게 말했다. 영자가 벌써 방바닥에서 잠자고 있는 미란이를 안아 일으키려고 하자 민섭씨가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영애야, 너도 알 만한 손님인데 들어와도 괜찮다.
그러나 영애는 들어오지도 않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테오가 다시 자기 누이더러 추운데 그만 들어오라고 말했으나 역시 부엌 쪽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마테오가 일어서더니 부엌으로 갔다. 그런 뒤에 한참동안 부엌에서 마테오가 누이에게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필경 손님인 나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영애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마테오가 나에 관해서 설명해준 뒤에도 그녀가 방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마테오가 혼자서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는 벌떡 일어서서 부엌으로 통하는 조그만 장지문 앞으로 갔다. 이미 약간의 취기가 전신에 오른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영애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내가 장지문을 열어젖히자, 부엌 바닥에서 미란이를 안고서 쭈그리고 앉아 있던 그녀는 화들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캄캄해서 영애의 얼굴은 물론 알아볼 수 없었다. 영애야! 내가 소리를 낮추어 부르자, 영애는 엉겁결에 부엌문을 박차고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맨발로 부엌바닥에 뛰어내려 그녀가 방금 열고 나간 부엌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
짓궂게도 뒤쫓아오는 나의 발소리를 듣고 영애는 집 뒤란으로 마구 달아났다. 이미 밤이 되어버린 야산의 언덕바지 위에로 매운 바닷바람이 쉬익쉬익 소리 내며 불어왔다. 영애는 몸을 감추려고 뒤란의 헛간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한달음에 헛간까지 뛰어가서 헛간 입구에 멈춰섰다.
깜깜한 헛간 속을 기웃거리면서 나는 마치 매일 만나는 사람을 부르듯이 소리를 낮추어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때 잠을 깬 미란이가 헛간 구석에서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나는 취기에서 퍼뜩 깨어나 헛간 입구에 선 채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맸다.
그만 들어가시지요.
어느새 다가온 마테오가 나를 돌려세웠다.
그날 밤 영애는 끝내 내 앞에 나타나주지 않았다. 나는 가슴이 갑갑해서 방안에 갇혀만 있을 수는 없었다. 밤바람이 몸에 해롭다고 민섭씨가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테오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우리들은 가파른 언덕 비탈을 조심조심 내려와 부락 입구에서 시작되는 저수지의 제방 위로 올라섰다. 이 제방 길은 일 킬로 가량이나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데, 그 끝에는 저수지의 수문이 있고 수문에서 다시 왼편으로 꺾어져 일 킬로쯤 더 나아가면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가 있었다. 양일부락 사람들은 이 제방 길을 읍내로 나가는 통로로 이용하고 있었다. 길을 걷기에는 주위가 너무 어두웠고 해안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어디까지 가실 건가요?
외투도 입지 않고 마테오가 벌써부터 몸을 와들와들 떨면서 물어 왔다.
염전까지 나가보자. 한 시간이면 돌아올 수 있겠지.
나는 되도록이면 멀리까지 나가보고 싶었다. 나의 말에 마테오는 깜짝 놀랐다. 녀석은 추위도 추위지만 해안을 경비하는 초소들 때문에 밤에는 해안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 몹시 위험한 노릇이라고 말했다. 마테오는 다시 오늘밤 공소에서 모임이 있기 때문에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들은 제방 길을 몇 번이나 오락가락했다. 제방 길에는 인적이 전혀 없었고, 다만 왼쪽 저수지의 수면 위에서 여태껏 이곳을 떠나가지 않은 철늦은 물오리 몇 마리가 날개로 수면을 찰싹찰싹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테오는 목을 잔뜩 움츠리고 끌려오듯이 어슬렁어슬렁 내 뒤를 따라왔다.
아직도 신자들이 오냐?
나는 마테오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이 부락의 공소가 마테오네 가족들에 의해서 여태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주 신기하게 느껴졌다. 마테오는 그 동안에 하나둘씩 떨어져나가고, 지금은 몇 사람 남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어떤 때는 우리 집 식구들만 모여서 기도할 때도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여기를 떠날 때까지는 공소를 포기할 수 없지요.
마테오는 아주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공소의 지도자냐?
어머니가 하던 일을 제가 떠맡았어요.
어머니는 언제쯤 오시지?
나는 무심코 이렇게 물었다. 마테오는 이 물음에 한동안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저수지의 수면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녀석은 어머니가 치료를 받으려고 광주로 나갔다는 민섭씨의 얘기는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마테오는 손님께서는 우리 어머니에 관해서도 잘 기억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물론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마테오가 묻지도 않았건만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의 어머니에 관한 기억을 몇 가지 얘기해주었다.
너의 어머니는 어디 계시냐? 어디 계시냐구?
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
마테오는 나직한 소리로 대답했다.
결핵이 온몸에 번지어 결국 돌아가셨죠. 그게 재작년 이맘 때군요. 만약에 돌아가시기 반년 전에만 수술을 받았더라면 당신 생명은 구할 수 있었다고 나중에 의사가 말했지요.
그럼 생전에 한 번도 치료를 받지 않았다는 말이냐?
읍내 보건소에서 한번 진찰을 받은 일이 있지요.
나는 저수지의 수문이 있는 곳을 향해 제방 길을 부리나케 걸어갔다. 뒤따라오는 마테오가 그만 돌아가자고 재촉했으나 나는 돌아서지 않았다. 수문 근처는 바람이 더욱 차갑고 거세어서 바람과 마주설 때는 숨이 헉헉 막힐 것 같았다. 거기서 더 나갈 수는 없었다. 나는 돌아서서 마침 가까이 오는 마테오의 두팔을 꽉 붙잡았다. 녀석은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갑자기 마테오에게 미란이가 틀림없이 영애의 딸이냐고 물었다. 어째서 하필 수문까지 마테오를 끌고 와서 그 얘기를 꺼냈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마테오는 너무 엉뚱한 질문이어서인지, 혹은 바람결에 미처 듣지 못한 탓인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이번에는 말을 바꾸어 영애의 남편이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제서야 마테오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누나가 아주 불행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남편이 죽었냐?
아니오. 그런 게 아니고, 그 남자는 알고 봤더니 본처가 있는 남자였죠. 그자에게 누나가 속았어요.
그다지 쉽게 속을 수가 있어?
마치 나는 피해자가 되는 것처럼 버럭 역정을 냈다. 마테오는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그자가 한동안 식량과 땔감까지 구해주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업조합에 근무하고 있던 남자는 서둘러서 전출해간 뒤로, 소식을 끊었다는 것이었다.
공소에는 몇 사람의 교우들이 미리 와서 마테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하얀 옷을 입은 부녀들이었는데 모두 십리나 시오리쯤 되는 밤길을 걸어왔다는 것이었다.
마테오는 조그만 마루방을 공소의 강당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마루방은 그들의 흙벽 집에서는 제일 큰 방이었다. 강당의 제단에는 세 개의 촛불이 이미 켜져 있었고 제단 앞에는 마테오의 동생들이 줄을 지어 앉아 있었다. 영애도 거기 있었다. 그녀는 부녀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있다가 강당의 입구에 서 있는 나를 보고는 뒤로 훔칠 물러나 앉았다.
불빛이 흐릿해서 이번에도 그녀의 얼굴이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영애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사벨라야. 왜 그래? 그녀가 놀라는 걸 보고 옆에 앉아 있던 부인이 이렇게 묻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강당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오늘밤에 사순절 첫 번 주일 기도가 있어요. 손님께선 피곤하실 텐데 일찍 주무세요.
강당에서 다시 밖으로 나온 마테오가 이렇게 말하고 나를 뒤란으로 데리고 갔다. 내가 인도된 방은 강당 뒤켠에 붙어 있는 골방인데 겨우 두 사람이 잘 수 있을 만큼 좁다란 방이었다. 이부자리는 이미 방바닥에 펼쳐져 있었다. 내가 옷을 벗고 자리에 눕는 것을 보고 나서야 마테오는 강당으로 돌아갔다.
방바닥이 얼음장처럼 차가웠으나 나는 피곤해서 곧 잠을 청하려고 하였다. 이때 문득 옆에 붙어 있는 강당 쪽에서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와 나는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기도소리는 아주 똑똑하게 들려왔다.
사랑하는 예수여, 우리를 위하여 온갖 수난을 감수 인내하신 주의 사랑을 보답하며….
마테오가 먼저 기도문의 한 구절을 읽고 나면 부녀들과 녀석의 동생들이 그것을 따라 암송했다.
…성모 마리아의 공은을 힘입어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려 하오니, 죄를 뉘우치는 마음과 그의 수난을 함께 나눌 마음을 우리에게 박아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주를 사랑하게 하시며 성직자들의 성화와 모든 죄인들의 개과천선을 은혜로이 허락하소서.
기도문을 인도해가는 마테오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의젓했다. 그를 따라서 암송하는 부녀들이나 마테오의 동생들도 결코 목청을 높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오랫동안 찬 마룻바닥 위에 앉아서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고 있었다.
그들이 십사처(十四處)에 이를 때까지 나는 종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물론 나는 예수의 수난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단지 그와 같은 기도소리를 예전에도 잠자코 듣고 있었던 기억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때에는 마테오의 어머니가 교우들을 인도하고 있었다. 마테오 어머니의 목소리는 유난히 날카로워서 그녀가 기도문을 암송할 때면 이웃집까지도 그녀의 소리가 똑똑하게 들려왔다. 그런데 그때 마테오 어머니가 자주 암송하던 기도문을 지금 나는 다시 듣고 있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 또한 복되시도다! 천주의 성모마리아여,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 아멘.
새벽녘에 나는 누가 큰소리로 떠드는 바람에 잠을 깼다. 마테오야. 손님을 깨워라. 빨리 가서 손님을 깨우란 말여. 건넌방에서 민섭씨가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이내 마테오가 내가 있는 골방으로 들어오더니 관할 지서에서 경관이 나를 찾아왔다고 말했다.
나는 옷을 주워 입고 경관이 기다리고 있다는 앞마당으로 나왔다. 경관은 자전거를 마당 한쪽에 세워놓고 민섭씨를 상대로 무엇인가 연달아 묻고 있었다. 민섭씨는 흡사 죄를 지은 사람처럼 몹시 불안한 표정으로 나와 경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경관은 나의 신상에 관해서 몇 가지 형식적인 질문을 해왔다. 그런 뒤에 그는 매우 실례가 되는 질문일는지 모르겠으나 손님은 이곳에 무슨 용무로 왔느냐고 물었다. 이곳은 교통사정도 퍽 좋지 않고 숙박시설도 전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곳이라고 경관은 덧붙여 말했다.
막상 경관이 이렇게 물어오자, 나는 얼른 마땅한 대답이 나와지지 않았다. 그의 질문은 확실히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경관은 미처 답변을 못하고 머뭇거리는 나의 얼굴을 더욱 미심쩍다는 눈초리로 빤히 쳐다봤다. 나는 내가 거기에 대해서 반드시 답변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냐고 경관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경관이 말했다.
손님께선 우리들의 임무 수행에 가급적 협조해주십쇼. 그리고 여기는 특히 해안지구가 돼놔서 좀 까다롭습니다.
나는 경관에게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역시 여기에 온 용건이 무엇이냐는 경관의 질문에는 얼핏 답변이 나와지지 않았다. 경관은 그렇다면 손님께서 지서까지만 동행해주셨으면 고맙겠다고 말했다.
직무상 일단 자세한 기록을 남겨둬야 하니까요. 별달리 오해는 마십시오.
그는 정말 나를 끌고 갈 작정인지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나에게 동행을 재촉했다. 이때 잔뜩 겁을 먹은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서 있던 민섭씨가 경관 앞으로 불쑥 다가섰다.
이분은 일부러 우리를 찾아주신 분이오. 먼 길을 일부러 예까지 찾아주셨다는 말이오.
민섭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러니까 방금 내가 어떤 용건으로 왔느냐고 묻지 않았소?
경관이 이번에는 민섭씨를 향해 말했다. 그러나 민섭씨의 증언이 효험을 얻었는지 경관의 표정이나 어조는 처음처럼 그다지 딱딱하지는 않았다. 그 기미를 놓치지 않고 민섭씨가 다시 말했다.
이분은 우리를 만나보고는 곧 떠나실 거요. 용건이 무어 따로 있겠소? 이분은 정말 오늘 떠날 거니까.
민섭씨의 우직스런 주장에 경관은 하는 수 없다는 듯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러면 박 주사가 이 손님의 신분에 대해서 이후라도 책임을 지겠소?
민섭씨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경관은 마지막으로 나에게 당신은 어제부터 이 부락에서 취한 행동은 혐의를 받기에 똑 알맞은 것이었다, 따라서 앞으로는 그 점을 잘 알고 행동하라고 주의를 시키고는 돌아갔다.
경관이 돌아가고 불과 몇 분이 지났을 때 마테오의 사내동생이 언덕바지 위에로 허겁지겁 뛰어 올라왔다. 집 앞에 이르자, 녀석은 몹시 숨이 가빠하며 두 눈을 자꾸만 두리번거렸다. 마침 민섭씨와 마테오와 나는 아직까지 마당에 그대로 서 있던 참이었다.
병규야! 너 새벽부터 어딜 갔다 오냐?
그 녀석을 보고 마테오가 불쑥 물었다. 그러자 병규는 당황하여 얼굴빛이 빨개졌다. 녀석은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이 놈아! 새벽부터 어딜 갔었느냐고 네 형이 묻지 않아?
방금 경관에게 경을 치른 탓인지 민섭씨의 표정은 한층 험악했다. 병규는 흥분하고 있는 제 아버지의 앞을 떠나려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마테오가 녀석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병규의 팔목을 얼른 붙잡았다.
네가 지서에 갔었지? 바른대로 말해봐.
마테오가 아우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타이르듯이 말했다. 병규는 나를 힐끗 쳐다봤을 뿐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옆에서 그 모양을 지켜보던 민섭씨의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이놈이 한 짓입니다. 이걸 어떻게 한다? 손님에게 미안해서 이걸 어떻게 하냐고?
민섭씨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혼자서 쩔쩔매고 있었다. 위장이 약한 아이처럼 비쩍 마른 마테오의 동생은 허기져 보이는 눈으로 나의 반응을 열심히 지켜보았다. 그 아이의 눈빛은 방안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손님을 경계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네가 그러지 않았지? 그럼 그렇다고 형에게 말해.
나는 병규의 한쪽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나는 다시 민섭씨를 향해 가령 이 아이가 제보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나쁜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민섭씨의 노여움은 풀리지 않았다.
이놈아! 누가 널더러 그런 짓을….
그는 더 참지 못하고 거의 울먹일 듯한 목소리로 버럭 소리치며 마당가에 뒹구는 막대기를 주워들고 병규에게로 다가섰다. 나는 얼른 민섭씨의 소매를 붙잡았다. 바로 이때 뒤란 쪽에서 영애가 앞마당으로 나왔다.
이미 동이 훤히 터 있었으므로 그녀의 얼굴을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영애는 미란이를 안고서 약간 멈칫멈칫 하면서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모기소리만한 목소리로 다짜고짜 용서해달라고 나에게 말했다. 물론 병규에 관한 얘기겠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엇이라고? 무엇이라고 했어?
뜻밖에도 나는 퉁명스럽게 그녀에게 반문했다. 나는 뒤늦게 화가 난 사람처럼 그녀를 한동안 노려보다가 영애로부터 미란이를 거칠게 빼앗아서 두 팔로 꼭 끼어안았다.
그날 아침 나는 양일부락을 떠났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