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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송영의 대표작 중 하나로, 묘하게 연극 무대에서 벌어지는 사건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주인공과 여주인공 성애의 만남은 러브라인이라고 부르기도 쑥스러울 정도로 밋밋한 줄거리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의외로 연극 <환타스틱>이 보여주는 것 같은 몽환적인 색깔이 풍겨난다. 이 작품은 또한 한국 문학에서 언제부터인가 자취를 감춘, 개인의 자아와 외부 세계의 해소 불가능한 갈등과 모순 때문에 고민하는 주인공의 내면을 그린 실존주의적 분위기도 풍긴다.

 

하지만 연극적 분위기와 실존주의적 흐름 어느 것도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도적인 힘은 아니다.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뒤쳐져 살아가는 인간들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가 있고, 그 시대의 흐름과 거기에서 소외된 인간군상의 불화를 신음하는 듯한 북소리가 있다. 예배당과 목사는 그러한 불화의 해소를 위해 어떠한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주인공은 "이 동네 사람들은 모두 가난뱅이"라는 성애의 단정이 의외로 현실과 괴리된 진단일 수 있다는 것을 엉뚱하게 끌려간 파출소에서 맞은 신선한 아침, 길거리를 가득 메운 여고생들의 교복 칼라의 눈부신 하얀색에서 발견한다.

 

인공이 과연 진정으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논골의 소외와 낙후였을까? 주인공이 결국 발견한 것은 이제 북소리조차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다. 논골이나 거기 사는 인간들의 처절한 목소리 따위는 손가락 하나 정도로 짓눌러버리는 근대화의 물결이 과연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는지, 이 작품은 미해결의 질문으로 남겨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차도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좁은 골목길이 나서는데, 골목 좌우에는 나지막한 가옥들이 마치 벌집처럼 밀집해있다. 어느 집에서나 뒷길로 열린 창을 밀면 이웃집 마당이나 담벼락이 눈앞으로 바짝 다가온다. 나는 좁은 골목길을 이십여 미터쯤 걸어가다 오른쪽으로 꺾어 돌아갔다.

 

회색 철대문이 곧 나타났다. 성인의 큰 키만큼 높은 이 대문으로 말하자면 이 일대에서 거의 유일하게 품격을 갖춘 대문이며, 꼭대기에 붙어 있는 편지함이라든가 초인종 단추, 안쪽의 빗장 따위가 제법 세밀한 안목으로 제작되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그 회색빛 대문을 보면 이 집 주인 영감(아마도 지금쯤 고인이 되었을지 모르겠다)의 취향이라든가 깐깐한 성품이 금방 떠오를 지경이다. 나는 손을 높이 뻗어 초인종 단추를 눌렀다.

 

두어 번 초인종 단추를 눌렀을 때 귀에 익은 뚱보 할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누굴 찾으시죠?”

 

할매는 안방에서 문만 살짝 열고 소리치고 있다.

 

“할머니, 문 좀 열어 주세요. 그런 다음 제가 누구라는 걸 아시게 될 겁니다.”

 

그녀가 뭐라고 투덜거리며 신발을 끌고 마당으로 나왔다. 본래 할매는 성질이 급한 편이라 초인종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뛰어나와 문을 열고 상대방 낯짝을 직접 확인하곤 했는데 오늘은 이상하다.

 

대문이 열리자 양쪽 볼에 유난히 군살이 많은 특유의 그 얼굴이 놀란 표정으로 눈앞에 서 있다.

 

“저예요. 아시겠어요?”

 

“누구더라….”

 

시력이 갑자기 악화된 노인처럼 그녀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내 모양을 살핀다. 그러더니 금방 손바닥을 딱 마주쳤다.

 

“오오라, 이씨로군. 아니, 이씨가 웬일인고? 내 정신 좀 봐, 이씨를 몰라보다니. 자, 들어오우. 난 또 누구라고. 하마터면 몰라 보고 그냥 돌려보낼 뻔했네. 들어와요. 우리 집은 그 전처럼 늘 쓸쓸하고 조용하지 않수?”

 

“그렇군요.”

 

마당의 조그만 정원 주변에는 화분들이 이십여 개 늘어서 있다. 제각기 종류가 다른 화초들이 그 화분들 속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죄다 금방 말라 비틀어질 것처럼 시들해 보인다. 나는 내가 기거하던 마당가의 별채 앞으로 다가섰다. 별채라지만 방 하나, 부엌 하나만 단조롭게 서 있는 작은 건물이다. 손님을 두기 위해 따로 세워진 이 건물에서 나는 일 년을 생활했다. 헌 구두 한 켤레가 방문 앞에 놓여 있었다.

 

“누가 있군요.”

 

내가 말하자 뚱보 할매가 계면쩍다는 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있어요. 세무서에 나가는 사람이라오. 지금은 방에 없어요. 지난달에 들어왔다오.”

 

방의 옛 주인, 옛날 손님이 그 방에 다시 나타났을 때는 현재의 점유자에 대한 기묘한 반감을 품게 되는 모양이다. 할매도 그 기분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사오 년 동안 이 방이 비어 있으리라고 기대한 건 아니다. 많은 손님이 이 방을 거쳐 갔을 것이다.

 

나는 불현듯 방문을 열어보고 싶었다. 물론 부도덕한 행위였다. 그 방 안에 내가 감춰둔 것이 있을까? 유형의 어떤 물질이 있을까? 홉사 그 속에 내가 쓰던 재떨이나 앉은뱅이 책상, 그런 것이 뒹굴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할매가 안채의 마루로 가서 털씩 주저앉으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우. 내가 뭐 마실 거라도 갖다 드릴까?”

 

“아닙니다. 그냥 앉아 계세요.”

 

나는 그녀 앞으로 돌아왔다.

 

“할아버지, 지금 외출하셨나요?”

 

“아니, 우리 집 영감을 만나러 왔수?”

 

마치 감정이 말라버린 박제의 표면처럼 그 얼굴 표정은 건조했다. 그녀는 본래 강건한 여자였다.

 

“뵙게 되면 더욱 좋지요.”

 

“미안하우. 작년에 가셨답니다.”

 

“돌아가셨다구요?”

 

“그렇다오. 이씨는 우리 집 영감이 위암을 앓고 있었다는 걸 몰랐소?”

 

“그건 금시초문인데요. 제가 있을 때만 해도 아저씨는 아무런 탈이 없었죠. 위병을 앓았던 건 아저씨가 아니라 저였어요. 커피를 좋아하셔서 저녁때마다 저쪽 길 건너 지하실 다방으로 커피를 마시러 다니시곤 했는데.”

 

“참 그렇네요. 그땐 몰랐던 일이로군. 그러니까 이씨가 나간 뒤 이태나 지나서 병이 알려졌던가 그랬을 거요. 이씨, 요즘은 거기 안 아파요?”

 

“전 다 나았습니다. 술도 마시고 뭐든지 다 먹어요.”

 

“아이구, 다행이오. 젊은 사람이 뭣보다 건강해야지. 지금 생각나는데, 그땐 상을 방에 들여보내면 이씨는 밥 한 술도 뜨지 않고 상을 고스란히 내줄 때가 많았지. 정말 답답해서 볼 수가 없었다오. 근데 이젠 다 나았군. 병이 있던 이씨는 이렇게 건강한데 병이 없던 우리 영감은 벌써 떠나 버리다니.”

 


 

할매는 치마폭으로 눈을 훔친다. 내 앞에서 처음으로 슬픔을 보인 셈인데, 나는 웬일인지 그녀가 한번 슬픈 척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유생 노인이 고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이곳으로 찾아오면서 이미 그 가능성을 십분 예감했던 것 이다. 그렇다곤 하지만 막상 그의 자취마저 이 집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자 집안이 더욱 적막하고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저 건너편 방은 누가 쓰고 있죠?”

 

나는 담장 옆에 바짝 붙어있는 방을 손으로 가리켰다. 담벽에서 흘러내린 담장이 덩굴이 그 방문 앞까지 뻗어나와 이마를 맞대고 있다. 이십여 가지 화초를 가꾼 것도 담벽의 담장이 덩굴을 무성하게 살린 것도 모두 김유생 노인의 꼼꼼한 성품이었다.

 

“건넌방엔 여학생이 묵고 있다오. 대학생이라는데, 학교에 나가는 날이 며칠 안 되니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애랍니다.”

 

할매는 금방 하숙집 아줌마의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가 그 방을 흘겨봤다.

 

“따님은 여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나요?”

 

“아니, 성애를 어떻게 알지? 이씨가 우리 딸자식을 만나봤던가?”

 

“알고 있죠. 그때도 집을 나가 있었지만 가끔씩 나타나곤 했죠. 하지만 이젠 어머님을 혼자 사시게 버려둘 수는 없을 텐데, 왜 돌아오지 않을까요?”

 

“아이구, 그년 얘길랑 하지도 마슈. 내 오장육부까지 다 뒤집어지고 쓰리고 아프기만 하니깐 말이우.”

 

“가끔 집에는 나타납니까?”

 

“오긴 와요. 그런데 내 말은 듣지 않아요. 돌아와서 이젠 에미하고 함께 살자고 해도 막무가내예요. 이걸 어떡하면 좋수?”

 

“따님이 어디 사는지 아십니까?”

 

“왜, 한번 만나 보실래유? 내가 집 주소를 가르쳐 드릴까?”

 

“가르쳐 주세요.”

 

“만나서 무슨 얘길 하려구?”

 

“어머님 옆으로 돌아와서 살라고 말하죠.”

 

“아이구, 이씨가 그렇게만 해 준다면 이런 고마울 데가 또 어디 있겠수. 자, 내가 들어가서 쪽지를 가져 오리다.”

 

할매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제안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할매가 곧 나타나서 종이쪽지 하나를 내 앞에서 펴 보였는데, 거기엔 연필로 몇 개의 숫자와 동네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염리동 439의 245, 장봉래 씨 방 그뿐이다. 그밖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따님이 이걸 적어 드렸나요?”

 

“아니오. 내가 훔쳤소. 그년이 잠깐 자릴 비운 사이에 가방 속에서 내가 빼돌렸지. 에미에겐 절대로 저 있는 곳을 가리켜 주지 않으니깐.”

 

“그럼, 이게 따님 주소가 아닐 수도 있지요. 어떤 친구나 물건을 맡긴 가게 주소일지도 몰라요.”

 

“그게 그년 주소일 거요. 거기 가면 틀림없이 그년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믿는데.”

 

“알았습니다. 그럼 제가 한번 찾아보도록 하죠. 참고로 알고 싶은데 따님은 지금 무얼 합니까?”

 

“내가 무얼 하는지 알고 있다면 이러고 있겠소? 난 그 애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벌써 나타나지 않은 지가 반년이 넘었소. 그러니 난들 그 애가 무얼하는지 알 택이 없지.”

 

“반년씩이나?”

 

“그래요, 반년. 이 늙은이가 뭘 해먹고 사는지 그 애는 관심도 없다오.”

 

“알았어요. 그럼 다시 찾아뵙지요.”

 


 

나는 그 집 마당을 빠져나왔다. 뚱보 할매가 대문 밖까지 나와서 나를 전송했다.

 

김유생 씨는 생전에 대담을 즐겨하였다. 그 밖에도 끽연과 커피와 산책 따위를 즐겨했다. 산책을 할 때는 언제나 지팡이를 휴대했다. 그리고 그의 일과 중에서 이따금 내 방을 찾아오는 것도 그가 즐기는 일 중의 하나였다. 그는 늘 담배를 충분히 휴대하고 내 방을 찾아왔다. 내가 궐련에 매우 궁핍을 느끼고 있다는 걸 노인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 밖에서 노인은 으레 기침 소리를 한차례 들려 줬다. 그러면 나는 미리 알고서 문을 열고 그를 맞이했다.

 

노인은 방에 앉자마자 안주머니 속에서 담배갑을 꺼내어 내 앞에 던져 놓았다. 피우고 싶거든 마음대로 피우라는 뜻이다. 나는 무례하게도 담배 한 개비를 노인의 담배갑에서 거침없이 꺼내어서 피워 물었다. 노인은 구식 라이터를 꺼내어 불을 켜준다. 그리고 말했다.

 

“일 잘 되어가요?”

 

그는 질문과 동시에 방의 웃목에 놓여 있는 앉은뱅이 책상 위를 넌지시 바라본다. 나는 버릇처럼 대답 대신 피식 웃고 손바닥으로 목 언저리를 한번 어루만진다. 그래도 노인은 모든 걸 이해하겠다는 표정으로 더 묻지 않았다. 가난뱅이 식객, 식비가 두 달치나 밀려있는 인간에게 공짜 궐련을 제공하고 그의 방을 이따금씩 찾아와서 그에게 사람 대접을 하는 것도 모두 노인의 드높은 식견 때문이다.

 

또 하나 이유가 있었다. 김유생 씨 자신도 사실은 나와 비슷한 한때를 보냈고, 지금도 아내의 하숙업에 생활을 의탁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는 담배값, 커피값, 그리고 이따금 외출할 때 필요한 교통비와 기타 잡비 일체를 뚱보 할매로부터 타서 쓴다. 그래서 수입 없는 사람의 처지를 노인도 잘 알고 있다.

 

그날은 몹시 속상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노인 말을 들으니 성애가 아비에게 한 약속을 어기고 다시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시월 십사일. 그녀는 건넌방을 비우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나타났는데 노인이 무단가출을 엄격히 견책하자 사흘 뒤에 귀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사흘만에 나타난 그녀는 불평만 잔뜩 늘어놓고 다시 나가버렸다. 아내는 단호하게 건넌방에도 손님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고, 이튿날 진짜로 직업 여성 하나로부터 계약금 을 받아서 노인에게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방금 그 계약금 때문에 아내와 다툰 것이다.

 

“돈이 좋긴 하지만 방을 비워 두는 게 부모의 도리가 아닌가.”

 

노인이 아내의 소행에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본다.

 

“따님이 돌아오리라고 믿나요?”

 

“돌아오긴, 나도 믿지 않아. 바라지도 않고. 그년은 내 자식이 아니야.”

 

“그럼 누구의 자식인가요?”

 

“아내가 데려왔지. 저게 내겐 후처란 말을 언제 내가 했던가?”

 

“아니오. 처음 듣는데요. 왜 후처를 맞아들였죠?”

 

“전처가 죽었다네. 십 년만에 재혼했지.”

 

“그래서 따님이 불평인가요?”

 

“그런 건 아니야. 난 제 친애비보다 제 에미보다 더 잘해줬어. 지금도 내 자식이 아니라곤 생각지 않고 있고.”

 

“따님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시나요?”

 

“몰라요. 알고 있다면 내가 내버려두겠소? 당장 쫓아가서 다리를 분질러 놓더라도 데려오고 말지. 지금은 내가 무능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걸 애가 알고 있지.”

 

며칠 뒤에 내가 개비 담배를 사러 큰길로 나갔을 때 나는 뜻밖에도 성애를 만났다. 골목길을 빠져나가 계단을 올라가면 큰길이 나오고 바로 라디오 수선가게 옆자리에 두 명의 아줌마가 벙거지를 뒤집어쓰고 앉아 있다. 그들이 나의 단골 거래처다.

 

한 사람은 군고구마 화덕을 안고 있고, 한 사람은 삶은 옥수수가 주된 업종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성냥, 개비 담배, 껌 따위를 부업으로 취급하고 있다. 나는 아줌마들로부터 외상거래도 할 수 있을 만큼 얼굴이 익은 처지지만 개비 담배는 언제나 있는 게 아니다. 두 번에 한번은 허탕치게 마련이다.

 

십 원짜리 동전 네 개를 내고 담배 다섯 개비를 받아 쥔 나는 우선 한 개비를 피워 물고 연기를 뿜어내며 큰길을 걸어갔다. 그때 십여 미터 전방에 있는 쌀가게 옆골목으로 웬 여자가 몸을 감췄다. 초록색 스웨터의 빚깔이 선명하게 시야에 남았다.

 


 

누굴까? 나는 쌀가게 앞으로 걸어갔다. 골목 속에서 성애가 벽에 찰싹 몸을 기대고 겁먹은 눈초리로 이쪽을 보고 있다. 그녀는 내가 아줌마로부터 거래하는 광경을 죄다 훔쳐보았음이 틀림없다.

 

나는 멋쩍어서 행길 바닥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성애와는 여태까지 제대로 말을 주고받은 일이 없다. 몇 달 정도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았지만, 나는 언제나 방 안에 있었고 성애는 언제나 집 밖으로 돌아 다녔다. 그녀가 내가 누군지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그녀는 내가 자기 부친에게 그녀의 출현을 밀고할까 봐 겁먹은 모양이었다. 잠시 후에 그녀는 약간 마음이 놓였는지 골목에서 천천히 나왔다.

 

“아저씨, 일루 좀 와 봐요.”

 

전부터 친했던 사이처럼 과장된 표정으로 그녀가 내게 손짓했다. 내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서자 성애가 물었다.

 

“아버지 집에 있죠, 지금?”

 

“계실 거요.”

 

“그럼 어쩌나, 시간이 없는데, 그냥 돌아갈 수도 없고,”

 

미간을 찌푸리며 별다른 수치심도 없이 내게 우는 얼굴을 내민다.

 

“왜 그러오? 뭐 곤란한 일이라도 생겼나요?”

 

“그래요. 요전번 왔을 때 가방을 찾아간다고 했는데, 깜박 잊어 먹었거든요. 그래서 그걸 찾으러 왔어요. 하지만….”

 

나는 얼른 눈치를 채고 말았다.

 

“가방을 어디다 두었소?”

 

“내 방 다락에 있어요. 아저씨가 좀 갖다 주시겠어요?”

 

“그건 곤란해. 내가 아가씨 방을 어떻게 들어가겠소? 까딱하면 난 도둑으로 몰릴 위험이 있다구.”

 

“호호호, 설마 그러기야 할라구요. 눈 딱 감고 한번만 수고를 해주세요. 아저씨, 커피 마시고 싶죠? 내가 커피 사 드릴께요. 딱 한번만 수고해 주셔요.”

 

“어디서 기다리겠소?”

 

“저기 비탈길 이충 백조 다방에 있겠어요. 갖다 주시는 거죠?”

 

“기다려 봐요.”

 

그녀는 이상야릇한 웃음을 내게 흘려보내고 재빨리 돌아서서 비탈길로 껑충껑충 뛰어올라갔다. 나는 어째서 공모자가 되었을까? 이건 노인에 대한 공공연한 배신이다. 성애의 새하얀 살결 위에 피어오르는 갑작스런 웃음의 매력에 끌린 탓일까? 하지만 약속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그 집 마당으로 돌아와서 인기척을 살폈다. 노인 내외는 바깥 날씨가 차가운 탓인지 안방에 내내 갇혀 있다.

 

성애의 방으로 들어가서 노오란 비닐 가방을 끌어내는 데 그닥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발소리를 죽여 마당을 지나 나는 용케도 흔적 없이 대문을 빠져나왔다. 백조 다방의 실내는 어둡고 담배 연기로 자욱하였다. 동네의 건달들과 그날 작업을 맡지 못한 일꾼들이 여기저기 의자에 푹 파묻혀서 큰소리로 떠들거나 눈을 감고 졸고 있었다.

 

성애는 마담과 구면인지 카운터 옆자리에 앉아서 마담과 얘기를 하고 있다가 내가 들어서자 벌떡 일어섰다.

 


 

“아저씨, 정말 고마워요. 내가 이 은혜는 틀림없이 갚을께요.”

 

그녀의 말이 뭘 뜻하는지 나는 알 도리가 없었다. 나는 잠자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기 커피 한 잔 쥐요.”

 

그녀가 큰소리로 마담에게 말했다.

 

“용케 들키지 않고 다녀오셨네요. 아저씨를 만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허탕칠 뻔했지 뭐예요. 자, 커피 드세요.”

 

실내의 조명에 점점 익숙해지자 내 앞에 앉아 있는 여자의 얼굴 윤곽이 처음으로 분명하게 드러났다. 미인은 아니지만 어딘지 백치의 청결함 같은 것이 엿보여서 누구나 쉽게 탐낼 것 같은 여자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성애의 옷차림은 이 동네에서 공장에 출근하는 여자들의 의상과 그저 비슷비슷하였다. 커피를 맛있게 마신 뒤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영감님이 몹시 화내고 있어요. 왜 집을 나가려고 하는 게죠?”

 

“왜냐구요? 참 답답한 질문을 하시네요. 집이 싫으니까 나가죠. 집도 싫고 영감 할매 모두 싫다구요?”

 

“영감님은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옛날엔 글씨도 쓰시고 그림도 그리셨다죠?”

 

“그런 게 나와 무슨 상관예요? 내가 바라는 건 하루 빨리 영감이 죽어버리는 거예요. 영감이 죽고 나면 집을 팔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나도 가게 하나 차리겠어요. 지금은 영감 때문에 집을 못 팔아요.”

 

“할머니도 반대하실 걸”

 

“할머니는 내가 구워삶을 수 있어요.”

 

“아버지를 증오하나?”

 

“증오라구요? 난 그런 건 몰라요.”

 

“그렇다면 아버님 생각이 옳다는 것도 알 수 있을 텐데, 아버님은 따님이 옳게 살기를 바랄 뿐 뭐 다른 생각이 있겠어요?”

 

“옳게 사는 게 뭔데요? 참 딱한 말씀만 하시네. 영감님은 그게 뭐 옳게 사는 건가요. 그 양반은 평생 한 푼도 벌지 않았다오. 난 엄마한테서 들었어요.”

 

“설마, 그럼 이 집은 어떻게 생겼소?”

 

“사실예요. 엄마가 뭐 거짓말을 했을까봐. 집은 모르겠어요. 아마 물려받은 유산 찌꺼기, 그쯤 되겠죠. 아니, 엄마가 손님 밥 해주고 모은 돈으로 마련했을지도 몰라요. 영감은 한푼도 가져오는 걸 못 봤으니까. 나 바빠서 갈래요. 그럼 또 봐요.”

 

성애는 갑자기 일어나서 가방을 들고 다방을 나가 버렸다. 변변하게 작별 인사도 나눌 겨를이 없었다.

 

 


 

 

뚱보 할매는 딸의 방에서 가방이 없어졌던 사실을 발견하고 노발대발했다. 그녀는 매일 딸의 빈 방을 점검했기 때문에 그 사실은 다음날 즉각 발견되었다.

 

“이씨, 그년이 혹시 나 없는 사이에 다녀가는 걸 봤수? 당신은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내니까다 알 것 아니우?”

 

“따님이 다녀갔다구요? 난 그런 사실은 전혀 모르는데요”

 

시치미를 떼고 나는 할매로부터 외면했다.

 

“이상하다. 이년이 날개가 있어 날아다녔을 턱도 없는데 말이지. 어느 사이에 다녀갔을까?”

 

“그 가방 속에 무슨 귀중품이라도 들었나요?”

 

“귀중품? 그런 건 없소. 하지만 쓸 만한 겨울옷 몇 가지가 들어있다우. 그대로 있다면 나도 꺼내어 입을 옷이 그 속에 들어 있어. 하긴 그까짓 옷가지보다도 딸년이 그걸 가지러 나타날 테니까 그땐 꼭 붙잡아 두려고 했는데 이젠 영 나타나지 않을 것 아니우?”

 

나를 바라보는 할매의 눈초리가 왠지 매섭다. 설마 나를 의심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몹시 속이 거북했다. 고백해 버릴까? 커피 한 잔에 매수되어 노인 내외를 배신했다고 고백해 버릴까? 그렇게 되면 할매는 나를 당장 쫓아낼 것이다. 식비도 몇 달치씩 밀린 주제에 그런 배신 행위까지 저지른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김유생 노인이라면 어떨까? 그 노인 역시 딸에 관한 일이라면 매우 완강하다. 안 됐지만 나가달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그래서 입을 꼭 닫기로 했다.

 

내가 성애와 좀더 친하게 된 것은 나의 위장병이 더욱 악화된 뒤의 일이다. 말하자면 그때 내 위장은 결정적으로 악화되어 있었다. 이건 물론 엑스레이 전문의사의 결론이지 내 결론은 아니다. 나는 한 달 가까이 거의 음식을 먹지 못하고 물이나 우유만 마시고 지내다가 어느 날 엑스레이 전문의를 찾아갔다.

 

음식을 먹지 못하는 생활에도 편리한 점은 있었다. 식비를 몇 달치씩 밀린 뚱보 할매에 대한 죄의식에서 약간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한 달 동안 거의 그 집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에 뚱보 할매는 식비 재촉을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녀가 그 무렵에 기껏 내게 하는 얘기란

 

“어때, 간밤에 먹은 약효험이 좀 있수?”

 

라든가

 

“속이 어지간하면 계란죽이라도 좀 쑤어 드릴까?”

 

기껏해야 이런 정도였다. 뼈다귀만 남은 등신으로 힘겹게 마당을 어슬렁 어슬렁거리는 사내에게 어떻게 식비 재촉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튼 나는 결단을 내리고 병원으로 찾아가서 의사의 지시대로 상반신을 온통 벗어젖히고 엑스선 촬영기 위에 납짝 엎드렸다. 기계는 비정하고 딱딱했다. 나는 그 기계 위에서 의사의 지시에 따라 여러 가지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거의 삼십 분이나 기계와 씨름한 끝에 촬영기 위에서 내려왔다. 이틀 뒤 내가 병원에 나라났을 때 의사는 부재중이었고, 담당 간호원이 내게 엑스레이 필름과 촬영 기록부가 담긴 큰 봉투를 주었다.

 

“술을 많이 하셨군요? 그렇지요?”

 

나이 지긋한 늙은 간호원이 매우 동정어린 눈초리로 환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뇨. 술 같은 거 많이 마신 일이 없는데요.”

 

“아무튼 위장을 지독히 혹사시킨 것만은 분명해요.”

 

그녀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뭔가 이상한 위험 신호를 직감하고 내가 물었다.

 

“아니, 결과가 아주 나쁜가요?”

 

“난 자세히는 몰라요. 선생님이 거기 써놓았을 거예요. 참, 이것, 선생님이 외과의사에게 소개장을 써 놓았군요. 찾아가 보시래요.”

 

그녀가 명함 한 장을 내게 준다.

 

“찾아가서 뭘 합니까?”

 

명함을 손에 받아들고 엉거주춤 서서 내가 반문했다.

 

“수술 받아야죠.”

 

“수술? 어떤 수술인데요?”

 

“위장 제거, 그 비슷한 수술이겠죠. 빠를수록 좋아요. 거기 보시면 알겠지만 손님은 위장, 십이지장, 모두 최악예요. 그러니 빠를수록 좋지요.”

 

“그럴 리가 없어요. 이 기계가 엉터리든가 다른 사람과 착오를 하셨든가.”

 

“이거 봐요. 기계는 거짓말을 할 줄 몰라요. 착오도 일으키지 않구요. 괜히 망설이구 의심하다 더 큰 걸 잃을 수도 있어요.”

 


 

간호원은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할 수 없이 계단을 내려왔다. 명함에는 모 대학병원 외과 의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가 배를 갈라내고 창자를 도려내는 명수인 모양이었다. 나는 명함을 찢어서 길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논골로 돌아왔다.

 

“병원에서 뭐라고 합디까?”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화초에 물을 뿌리고 있던 김유생 노인이 달려와서 물었다. 그도 내가 엑스레이를 찍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답니다. 그저 음식만 조심하면 곧 나을 거래요.”

 

“그럼 그렇겠지. 그건 신경성이야. 당신 병은 위장에 있지 않고 머리에 있어.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오.”

 

노인은 다시 화초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노인은 아주 건강체였다. 사실은 이미 그때 암을 자신의 배 속에 기르고 있었던 게 틀림없지만 그는 끽연과 커피를 제한 없이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저녁나절이 되자 논골 특유의 정적이 나는 갑자기 무서웠다. 지형상 이 마을은 하나의 독립된 분지였다. 높은 고개를 넘어야만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으며, 좀처럼 자동차는 여기까지 넘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 무렵의 논골은 마치 시골의 산골처럼 적막하다. 나는 의사의 선고나 충고를 묵살했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 자체가 지워지는 건 아니었다. 사실을 표면으로 나타내지 않을수록 나 자신 속에서 더욱 그것이 명료하게 살아 있었다.

 

논골의 교회당은 고개마루 턱에 있었다. 블럭으로 세운 이 엉터리 건물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늘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을 연상했다. 그곳은 언제나 사람이 별로 없었다. 드나드는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논골의 주민들은 생계유지에 너무 바빠서 신을 찾아갈 짬도 없을 것이다.

 

비어 있는 집에는 동시에 신이 머물지도 않을 것이다. 그 집이 내 눈에 비어 있는 폐가처럼 보인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고개로 올라가서 그 을씨년스런 교회당의 마당으로 들어갔다. 병든 자가 신을 찾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정한 이치다.

 

나는 당돌하게도 그 교회당의 마룻바닥에 앉아서 그날 의사로부터 받은 촬영 기록부에 관해서 얘기할 생각이었다. 마룻바닥은 냉돌처럼 차가왔고, 실내에는 난방 기구 하나 비치되어 있지 않았다. 겨우 여남은 명의 교인들이 띄엄띄엄 앉아서 소리 내어 성경을 읽고 있거나 눈을 감고 기도하고 있었다.

 

저녁 예배는 예상보다 단조롭고 싱거웠다. 목사인 듯한 중년 여자가 강단 위에서 오랫동안 이 교회당의 부흥에 관해서 설교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교회당에 신도들이 모이지 않는 첫째 이유가 거기 모인 사람들의 믿음이 부실하기 때문이라고 공박했다. 여남은 명의 신도들이 마치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리고 그녀의 질책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진짜 신의 노여움은 나중에 나타났다. 예배가 다 끝났을 때 나는 어슬렁거리며 바깥으로 나왔다. 그때 내 구두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신발장을 아무리 뒤져봐도 내 구두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교회와 마당을 맨발로 한 바퀴 돌아보았다. 신도들은 모두 떠나고 신발의 행방은 막연하였다. 내가 거기서 그렇게 서성거리고 있을 때 여자 목사가 천천히 현관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로 그러세요?”

 

하얀 안경을 쓰고 있는 목사의 얼굴이 내 눈앞에 가까이 있었다.

 

“구두가 없어졌소.”

 

“뭐라구요? 신발장을 다 찾아봤나요?”

 

“찾아봤어요.”

 

“그럴 이유가 없지. 여기서 도난사고 같은 건 일어난 일이 없는데 마당을 한번 샅샅이 찾아봐요.”

 

“마당에도 없어요.”

 

“그거 이상하군. 다른 신발도 보이지 않소?”

 

“하얀 고무신 한 켤레가 여기 있어요. 이 사람이 교회당에 남아 있는가 알아봐 주세요.”

 

“모두 나갔소. 이 신발 임자는 없어요. 이게 당신 신발 아니오?”

 

“아니오. 내 신발은 검정색 구둡니다. 이 친구가 자기 신발 대신 내 구두를 신고 갔군요. 어떡하죠?”

 

“안됐소. 오늘 여기 처음 나오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그러자 여자 목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것 보세요.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댁이 다시 여기 나오나 안 나오나 그걸 시험하는 거예요. 우선 이 고무신올 신고 가세요. 그리고 다음번에 나오시면 구두를 찾아드릴 수 있을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에요.”

 

고무신은 내 발보다 다소 컸다. 그걸 끌고 교회당을 빠져 나왔다. 하나님의 시험? 그러니까 하나님은 내 위장에 대한 촬영 기록부 따위는 아직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말인가? 나는 적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교회당을 빠져 나오다가 나는 고개를 넘어오는 성애와 마주쳤다. 그녀는 보따리 하나를 옆에 끼고 허둥지둥 걸어오다 나와 마주치자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어머, 어디서 나오시는 거죠?”

 

“교회당에서.”

 

“거긴 뭘 하러 가셨어요?”

 

“저녁 예배에 참석하려구요.”

 

“전부터 다녔어요?”

 

“아니오. 오늘 처음이오. 그리고 마지막일지도 모르오.”

 

“호호호, 기왕 다니면 계속 다니시지 왜 마지막이예요?”

 

“구두를 잃어버렸어요. 이 교회당엔 도둑놈이 많아서 안 되겠어요. 이거 보시오. 남의 고무신을 신고 나왔소.”

 

“저런! 구두 한 켤레 마련하려면 또 몇 달을 기다려야겠네요. 그까짓 예배당엔 가지 마세요. 몸이 무척 수척해진 것 같군요. 더 많이 아팠어요?”

 

“그만저만 했어요.”

 

“갈 곳이 없어서요. 방을 뺏겼어요. 날씨는 추워지고 돈은 없구 할 수 없이 기어 들어오는 거죠. 하지만 곧 다시 갈 건데요, 뭐. 참 영감 할매 다 건재하죠?”

 

“네, 들어가면 좋아하실 거요.”

 

“아니에요. 다시 쫓아내지나 않았으면 다행이지요. 내 방은 비어 있는 거죠?”

 

“손님이 있어요. 그 얘길 내가 미처 못했군. 그러니까 성애 씨가 나간 지 일 주일만에 할머니가 손님을 넣었어요. 살림은 어렵고 방을 비워둘 이유가 없지요.”

 

“아니, 그렇다고 일 주일만에… 너무 하군요. 손님이란 누구예요? 여자? 남자?”

 

“여자예요. 낮에는 잠을 자고 저녁때면 직장에 나가더군요.”

 

“갈보를 넣었군요. 하긴 비어 있는 방에 누군들 못 들어올까? 다시 돌아가야 할까 봐요.”

 

“어디로 갈 건데요?”

 

“아무 데나 가야죠. “

 

“아무 데라니, 그러지 말고 집으로 가요. 가서 엄마와 의논해서…”

 


 

 

“할매하고 의논 따위 해서 뭘해요. 나 들어가고 싶은 맘 싹 없어졌어요. 어차피 며칠 신세지려고 했더랬는데, 방마저 없다면 가야죠.”

 

“할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나를 가만 두지 않을 거요. 끌고 오지 않았다고 화내실 거라구요. 당장 들어가기 싫으면 나하고 산보나 하다가 들어가죠.”

 

“어디루요?”

 

“답답할 때 내가 가는 곳이 있어요. 난 한 달째 음식을 못 먹었답니다. 말할 힘도 없지만 산보는 할 수 있어요.”

 

“저런! 뭣 땜에 그렇게 아픈가요? 고민이 많은가요?”

 

“그런 건 없어요. 신경성인 것 같은데 의사는 그게 아니라고 해요.”

 

“의사가 뭐라고 했는데요?”

 

“성애 씨가 알 필요 없어요. 자, 갑시다.”

 

우리는 논골의 중심지에 있는 큰 길을 따라가다가 마을 한쪽에 있는 거대한 야산의 비탈길 입구까지 다다랐다. 야산에도 가옥들은 있었다. 비탈길이 야산을 기어 올라갔으며, 그 비탈길로부터 수많은 골목들이 뻗어있어 야산 위의 가옥들과 연결되고 있었다. 밤하늘의 별빛, 그 야산 위의 가옥들을 논골의 큰길에서 올려다보면 틀림없이 그런 표현이 어울릴 것 같았다. 그만큼 야산의 가옥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어디까지 가실 건데요?”

 

비탈 입구에서 성애가 약간 두려운 듯 말했다.

 

“천당으로.”

 

“천당이라구요? 천당이 어디 있는데요?”

 

“저 꼭대기에 있어요. 나만 따라가면 알 수 있어요.”

 

“거기도 교회당이 있나 보죠? 그런 데로 가실 거예요?”

 

“교회당 같은 건 없어요. 천당이란 뭐 꼭 하늘에만 있는 건 아니잖소? 지상에도 있을 수 있다구요?”

 

“배가 고프니까 헛소리가 나오시는가본데, 뭘 좀 먹는 게 좋잖아요?”

 

“난 먹을 수가 없어요.”

 

“그럼 우유라도 마시세요. 내게 우유값은 있어요.”

 

“싫소.”

 

나는 먼저 비탈길로 올라갔다. 보따리를 옆구리에 끼고 있는 성애가 멈칫거리며 따라 올라왔다. 비탈길 좌우에는 싸전, 잡화점, 라디오 가게, 세탁소 따위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대개 날씨가 차기 때문에 일찍부터 문을 닫은 곳이 많았다. 올라갈수록 점점 경사는 심해지고 바람은 기세가 등등했다.

 

산의 중턱에 다다라서 성애는 숨을 몹시 헐떡거렸다. 거기서 우리는 잠깐 쉬기로 했다. 지나가는 산의 주민들이 우리를 흘끔흘끔 바라보곤 했다. 아마 그들은 젊은 내외 한 쌍이 가까스로 얻은 꼭대기의 방, 자기네의 새 보금자리를 향해 올라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몰랐다.

 

사실 나도 그런 상상을 해봤다. 만약 저 꼭대기 어느 곳에 우리들의 방이 있고 그리고 성애와 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면 그런 운명도 별로 싫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보았다. 찬바람이 나의 그런 생각을 씻어가 버렸다.

 


 

 

“이씨가 말하는 천당이란 뭔데요?”

 

못내 궁금한 듯 성애가 내게 다시 물었다.

 

“북소리를 들어 봤소?”

 

나는 그녀에게 엉뚱한 질문을 했다.

 

“물론 들어 봤어요. 북소리가 어디서 들린단 말예요?”

 

“아니, 내 귀에 자꾸 들리는 것 같아 묻는 거요. 난 잠자다가도, 우두커니 방 안에 앉아 있다가도 문득 북소리를 듣거든. 어디 먼 데서 들려오는 것 같았소. 지금도 북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서 물어본 거요.”

 

“그게 천당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천당이란 뭐예요?”

 

“그건 가서 봅시다. 난 이 마을로 와서 아프기만 하고 돈벌이도 안되고 그래서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었죠. 말하자면 이 마을로 들어오면 누구나 무기력해지고 가난에 젖어 버린다고. 그래서 나도 곧 여길 떠나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아요.”

 

“그건 처음부터 가난한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살기 때문이죠. 사방을 둘러봐요. 부자는 하나도 없어요. 한 푼도 벌지 않는 우리 집 영감도 이 동네에서는 가난뱅이가 아니에요. 논골을 나가 보면 세상은 만판이에요.”

 

“성애 씨도 그래서 집을 나갔었소? 아니면 애인을 사귀었나요?”

 

“애인? 호호호, 애인 있는 년이 밤길에 이렇게 돌아오겠어요? 그런 말은 하지도 마세요.”

 

“영감님이나 할머니도 그런 의심을 하더구먼. 나도 그렇게 믿어왔고 젊은 여자가 집을 나가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지 않다는 확실한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는.”

 

“나더러 증거를 보이라는 거예요?”

 

“아니, 내게 보일 필요는 없소. 난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하지만 부모님에겐 안심시켜 드리는 게 도리일 거요.”

 

“난 그럴 수는 없어요. 그치들이 안심하건 말건 내겐 상관없으니까. 그래서 나가라면 하루도 신세지고 싶지 않아요.’,

 

“여긴 아가씨 집이오. 결국 아가씨의 집이 될 곳인데 신세지다니, 신세는 내가 지고 있지요.”

 

“내가 어디 있다 왔는지 그게 궁금하지요?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렇게 자랑할 만한 곳이 아니니까. 올라가지 않을래요? 더 가기 싫다면 그만 내려가죠.”

 

“아니오, 갑시다.”

 

나는 얼른 걷기 시작했다. 중턱에서부터 길은 아주 좁아지고 비탈은 더욱 가파로왔다. 골목 양쪽 날림 가옥들의 벽이 우리 몸을 가둘 듯이 가깝게 다가왔다. 성애는 보따리를 꼭 끼고 헐레벌떡 따라왔다.

 

높은 지점으로 갈수록 지상의 소리는 멀어졌다. 그 대신 시야는 점점 넓어졌다. 나는 이 길을 비교적 자주 다녔지만 올 때마다 항상 처음 밟는 땅 같았다. 골목에 바짝 붙어 있는 가옥들로부터는 거주인들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바람 때문이었다. 거센 고지대의 바람이 모든 소리를 삼켜 버리고 휩쓸어 가 버렸다.

 

“천당에 다 왔나요?”

 

성애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물었다.

 

“네, 이제 다 왔어요. 너무 서둘지 말고 천천히 올라와요.”




 

 

나는 이미 정상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꼭대기에는 주민들의 물탱크가 있다. 백색의 거대한 물탱크가 정상의 표지였다. 그것은 밑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 그 주변에는 철조망이 가설되어 있고 약간의 공지도 있었다.

 

빈터를 나는 오락가락 하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때 북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바람결에 휩쓸려서 그 소리는 매우 약했지만 점점 박자가 빨라지면서 소리도 크게 들렸다. 그것은 근처의 어느 무당집에서 들려오는 북소리였다. 그 무당은 언제나 북을 두드렸다. 그녀는 잠시도 쉬지 않고 겨울이나 봄이나 낮이나 밤이나 아주 끈기 있게 맹렬하게 북을 두드렸다.

 

“이 쪽으로 와 봐요. 북소리가 들려요.”

 

성애는 내 옆으로 뛰어왔다.

 

“어마나! 정말 들리네요. 이것이 아까 아저씨가 말했던 북소리군요. 하지만 이상해. 여기서 치는 북소리가 어떻게 그곳까지 들릴까요? 아저씨는 방금 아저씨 방에서도 북소릴 들었다고 했지 않아요. 그게 참말예요?”

 

“정말이오. 멀리서도 들리는 것 같았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건 거짓말이에요. 그럴 수가 없어요.”

 

“아니오. 북소리는 멀리까지 울려요, 때때로.”

 

“바람을 타고 멀리까지 울린다? 그건 그럴 듯해요. 이씨는 여기 자주 왔었나 보군요. 그래서 북소리를 자주 들었지요?”

 

“맞아요.”

 

“왜 이런 곳에 자주 왔나요?”

 

“나도 모르겠어요. 배가 고플 때 음식을 먹을 수 없으면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어요. 그리고 저 북소리, 저걸 듣고 싶기도 하구요.”

 

북소리는 맹렬하게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다.

 

“북소리를 들으면 힘이 나곤 해요. 뭔가 미지의 세계로 달려가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죠. 미지의 세계, 멋진 세계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해요. 여길 올라오면 그걸 느끼죠. 난 언젠가 여길 떠나서 멋진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어머나, 이씨는 어린애 같은 말도 곧잘 하네요. 저건 무당의 북소린데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된다는 거예요? 난 무섭기만 한 걸요. 깜깜한 데서 저 소릴 들으니까 갑자기 무서워요. 빨리 내려가요, 우리.”

 

“집으로 들어갈 거죠?”

 

“할 수 없죠 뭐. 쫓겨날 때 쫓겨나더라도. 그러니까 천당은 가짜로군요.”

 

“아니오. 여기서 추위를 참고 오래 기다릴 수 있어야만 천당을 보게 됩니다.”

 

“호호호, 당신 거짓말장이, 대단한 사기꾼이로군요. 어째서 이씨가 돈벌이도 못하고 여기서 썩고 있는지 그 이유를 이체야 알겠어요. 이제부터 이씨를 상대하지 않기로 했어요. 지독한 거짓말쟁이.”

 

“좋아요. 날 사기꾼 취급해도 좋아요. 나도 곧 당신네 집에서 나갈 거니까.”

 

우리는 비탈길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도중에 성애는 화가 났는지 한마디도 지껄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기분이 약간 밝아진 것도 사실이었다. 의사의 기록부 따위는 이제 머릿속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하나님의 냉대조차 나는 까마득히 잊어 먹었다.

 


 

 

성애는 집으로 돌아와서 우선 할매와 같은 방을 사용했다. 그녀가 돌아왔던 첫날 김유생 노인이 딸을 불러놓고 비교적 온건한 말씨로 그간의 행적을 캐물었지만 성애가 끝내 묵비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그 문제도 그냥 덮어둔 채 지나가 버렸다.

 

어느덧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식사를 하지 못하는 나의 불편은 여전했다. 그러나 나는 저녁때면 자주 산을 올라갔고 산의 정상에 서서 무당의 집에서 들려오는 북소리를 듣곤 했다. 성애는 그날 이후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영감의 단속이 심한 탓일까? 아니면 그녀 스스로 어떤 결심을 했단 말인가?

 

아무튼 며칠 뒤면 다시 나가 버리겠다고 그녀가 처음 말했던 것과는 달리 보름 동안이나 그녀는 집안에 꼭 숨어 지냈다. 그런데 내가 아주 뜻밖의 장면을 목격해 버렸다.

 

저녁나절 내가 모처럼 푼돈이 생겨서 한 잔의 커피를 마시려고 고갯마루 백조 다방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뜻밖에도 성애가 웬 사내와 나란히 앉아 있었던 것이다. 사내와 그녀는 출구로부터 돌아앉아 있었기 때문에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갑자기 겁이 더럭 났지만 호기심에 못 이겨 그들의 뒷좌석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사내가 말했다.

 

“일단 너를 찾았으니 놓아줄 수 없다. 내가 호락호락 놓아줄 것 같애? 그렇다면 여기까지 널 찾아오지도 않았게?”

 

“닷새 있다 틀림없이 돌아갈께요. 몸이 아파서 할 수없이 왔다니까요. 내가 약속을 어기는 것 봤어요, 김씨? 어긴다면 그땐 김씨 맘대로예요. 닷새 뒤에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땐 여기 와서 뭐라고 해도 난 할 말 없죠 뭐. 그렇게 해요, 김씨. 내가 뭐 누구 속이는 것 봤어요? 한 번만 봐달라니까 그러네.”

 

성애가 사내의 팔을 잡고 있었다. 사내는 묵묵부답이었다. 그 녀석은 고수머리에 상체가 잘 발달된 서른 살 남짓의 사내였다. 오랜 만에 사내가 말했다.

 

“그럼 좋다. 닷새 뒤에 네가 올 것 없이 여기서 우리 만나자. 내가 데리러 오겠다. 여섯 시에 이 다방으로 나와. 알겠어?”

 

“알구 말구요, 김씨. 고마와요. 정말, 여섯 시에 틀림없이 여기로 나올께요.”

 

“약속 어기면 그땐 알지? 내 성질 잘 알 거야.”

 

“아이구, 잘 알고 있대두 그러네. 자, 나가요.”

 

둘이 일어나서 바깥으로 나갔다. 이번에도 그녀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워낙 백조 다방의 실내가 어둡고 담배 연기가 자욱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곧 뒤따라 나왔다. 계단을 내려와서 행길로 나서자 성애가 금방 사내와 작별하고 비탈 아래로 깡충깡충 뛰어갔다. 그녀가 아래 골목으로 숨어 버리기 전에 나는 그녀를 따라 잡았다.

 

“김씨가 누구요? 그 녀석 수상하던데.”

 

“아이구, 깜짝이야? 난 그 새끼가 다시 쫓아온 줄 알았다구. 혼줄이 달아났네. 이씨 엿들었군요. 언제 다방에 들어왔어요?”

 

“커피 한 잔 사지 않겠소?”

 

“돈 없어요. 커피 금방 마시지 않았나요?”

 

“들어갔다 그냥 나왔어요. 내가 커피 살께 백조 다방으로 다시 갑시다.”

 

“싫어요. 그 새끼 또 나타날까봐 무서워.”

 

“그럼, 저기 지하실 여왕 다방으로 가요.”

 

“거긴 영감이 잘 다니지요.”

 

“노인은 벌써 다녀갔어요. 저녁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걸 아가씨도 알지 않나?”

 

“그래요, 그럼.”

 

여왕 다방은 큰길 맞은편 지하실에 있는 다방이다. 백조 다방이 건달과 깡패와 일당 노동자들의 안식처라면 여왕 다방은 논골 유지와 관리와 노인네들 사랑방이다. 성애는 누가 볼까 봐 잔뜩 웅크리고 다방 구석에 앉았다.

 


 

“김씨가 누구요?”

 

내가 다시 물었다.

 

“그 새끼 악질이에요. 난 닷새가 되기 전에 달아나야 해요.”

 

“아니, 어디로 달아난다는 게요? 그 녀석 오지 못하게 하면 될 거 아니오?”

 

“어림없어요. 한번 집을 알았으니 약속을 어기면 이번엔 찾아와서 날 죽일 거예요. 죽이고 말 거예요.”

 

“사람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누구일까? 대단한 무법자로군. 그 녀석의 애인이오?”

 

“미쳤어요? 그 따위 놈하고 애인하게.”

 

“그럼 뭐란 말이오? 그 녀석의 돈이라도 잔뜩 빌려 썼나요?”

 

“돈은 약간 썼어요.”

 

“얼마나?”

 

“조금. 기만 원밖에 안 돼요. 그래도 놈에게는 몇 백만 원보다 큰 돈이죠. 그만한 대가를 놈에게 해야 돼요. 난 달아날 거예요.”

 

“어디로?”

 

“천당으로. 호호호, 이씨가 가르쳐 줬지 않아요, 천당 있는 곳을? 설마 천당까지야 찾아올라구요. 그런데 난 그날 깜깜해서 미처 천당 있는 곳을 보지 못했어요. 다시 잘 가르쳐 줘요. 그래야 내가 안전하게 숨을 수가 있죠.”

 

“아가씨, 날 놀리는군. 사기꾼이니까 놀림을 받아도 좋지만 말이지. 아무튼 달아날 생각은 버려요. 내가 좋은 방법을 궁리해 보겠소.”

 

“이씨가 어떻게? 돈 있어요? 돈 있으면 방을 얻을 수도 있지만.”

 

“방을 얻으면 거기 가서 있겠소?”

 

“방만 있다면 있구 말구요. 지금 숨어 있을 데라곤 한 군데도 없어요.”

 

“내가 돈을 구해 보겠소.”

 

“어머머, 할매는 식비를 석 달치나 밀렸다고 죽는 소리 치던데. 돈을 어떻게 구해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물을 거 없어요. 그런데 김씨가 누구요?”

 

“말하지 않겠어요. 말하고 싶지도 않아요. 닷새 안에 돈을 구할 수 있어요?”

 

“구하도록 해야죠.”

 


 

나는 벌떡 일어섰다. 자신감에 찬 내 얼굴을 성애가 존경어린 눈초리로 우러러 보았다. 그녀가 그런 눈초리로 나를 쳐다본 건 처음이다. 돈을 구하겠노라는 그 한마디로 사기꾼인 나를 달리 보게 된 것일까? 이번에는 성애가 내 말을 믿는 것일까?

 

그렇지만 내가 무슨 뚜렷한 마련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종의 허세였다. 순간적으로 격분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동정한 나머지 부려본 허세였다. 아니, 그보다도 성애가 평소 나를 우습게 보는 데 대한 반발로 그래봤을 뿐이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뿌린 씨앗은 거둬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돈을 구하나. 하긴 궁리해볼 건덕지조차 없다. 갑자기 어디 가서 방 하나 얻을 돈을 구한단 말인가. 그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아예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삼일 뒤에 기막힌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내 뒤통수를 때렸다. 그렇다. 여태 그걸 잊어 먹고 있었다. 그거라면 아직 몇 푼 더 뜯어낼 수 있을 것이다. 고개마루턱을 지나 시내로 나가는 길목에는 전당포가 하나 있었다. 몇 달 전에 나는 시계를 그 집에 맡겨둔 일이 있다. 아직 팔아넘기진 않았으니까 그때 빌려 쓴 돈을 공제하고도 그 시계는 상당액을 내게 보장하고 있을 게다. 그걸 팔아넘기는 경우에 말이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바깥으로 나갔다.

 

승리사 전당포 간판은 몇 달이 지난 뒤에도 의연하게 그 자리에 걸려 있었다. 가게는 삼층 건물의 이층에 있었는데 가게 규모에 비해 간판이 유난히 거대했기 때문에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공연히 위압감을 주곤 했다.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건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특히 이 논골 주민들에게는 무슨 위대한 거물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해가 기울었지만 아직까지 문을 닫으려면 반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나는 승리사 전당포의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서둘러 올라갔다. 마침 영감이 접수창구에 앉아서 확대경을 손에 들고 뭔가를 열심히 관찰하고 있다가 손님이 나타나자 얼른 그 물건을 신문지로 덮어버리고 아무 일도없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손님을 쳐다봤다.

 

“무슨 일로 오셨소?”

 

영감이 은밀한 즐거움을 발각 당했다는 듯 불쾌한 표정으로 쌀쌀하게 말했다. 순간 나는 그가 신문지 밑에 감추고 있는 게 대단히 값비싼 보석이거나 어떤 희귀한 기념품일 거라고 단정했다. 동시에 어울리지 않게도 매우 대담한 상상을 해보았다. 지금 내게 무기가 있다면 이 영감을 협박해서 그 보물을 탈취해 가지고 귀신도 모르는 곳으로 잠적해 버릴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며칠 뒤에는 엄청난 값으로 그걸 처분한 뒤 성애를 데리고 멀리 아주 멀리 달아난다. 물론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내게 현금만 있다면 성애는 두말 없이 나를 따라올 것이다. 그러나 내 손엔 무기도 없고 그리고 나는 자신의 그런 상상에 지레 겁을 먹고 움찔했다.

 

“무슨 일로 왔냐구?”

 

영감이 기다리다 못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꽥 질렀다. 그제서야 나는 바지 호주머니를 뒤져 내 시계의 전당표를 겨우 끄집어냈다.

 

“이거 좀 봐 주세요.”

 

나는 꼬깃꼬깃한 전당표를 창구 안으로 디밀었다. 그 종이쪽지에는 내가 방금 상상을 통해 그려봤던 금액과는 엄청나게 거리가 먼 소액이, 단지 삼천 원이 적혀 있었다. 나는 기분이 위축될 대로 위축되었다.

 

“이건 넉 달치 이자가 고스란히 밀려 있군. 물건을 찾아가려고? 벌써 무효가 된 거지만 특별히 물건을 반환해주지. 아자까지 포함해서 사천 이백 원 내슈.”

 

빨리 끝내고 나가 달라는 듯 영감이 서둘렀다.

 

“아닙니다. 찾으려고 온 게 아니에요.”

 

“그럼 뭐요?”

 

“그걸 팔 수 없을까요?”

 

“여기 보관했던 당신 시계를 팔겠다구? 우린 그런 물건 안 사요”

 

“사주세요. 보시다시피 병원에 갈 돈이 필요하다구요. 그렇지 않으면 팔고 싶지 않은 시계예요.”

 

“그게 얼마나 나갈 것 같소?”

 

“값은 영감님이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내가 알아서 하라구? 그렇다면 내가 봐주는 셈치고 말해보지. 이천 원 얹어 주면 어떠오? 사천 이백 원과 이천 원, 벌써 육천 원을 초과했소. 육천 원 가지고 요새 시장에 나가면 새 것도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죠?”

 

“이천 원은 너무 하십니다. 지난번 처음 여기 왔을 때 이런 건 새 거라면 십만 원은 넉넉히 호가한다고 영감님이 분명히 말씀했죠? 한데 어떻게 이천 원입니까?”

 

“내가 그런 말을 했을 까닭이 없는데. 여보, 젊은이, 가령 내가 그런 말을 했더라도 그건 새 거라면 그렇다는 얘기 아니오? 새 거라면 그렇게도 하겠지. 싫소? 그럼 관둡시다.”

 

“아닙니다. 조금 더 생각해 보십쇼. 오늘 그걸 팔지 않으면 곤란한 일이 있어요.”

 

“나더러 알아서 달라고 해놓고 그렇게 투정하면 난 못 사요. 남의 헌 물건 사놓고 욕먹기도 싫고.”

 

“이천 원 더 올려주지 않겠습니까?”

 

“하하, 배포가 대단한 사람이군. 천 원이라면 혹 몰라도 그렇게 갑절이나 한꺼번에….”

 

“좋아요. 천원 더 주십쇼.”

 

“이거 내 가게 생긴 뒤로 처음 있는 일인 줄이나 아쇼. 그리고 여기 매도증서에다 도장이나 찍어요. 도장이 없으면 손도장을 찍고.”

 


 

 

나는 영감이 써준 매도증서에 지장을 찍고 일금 삼천 원을 받았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자꾸 속았다는 생각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올라가서 물릴 용기도 나지 않았다.

 

논골의 저녁나절은 유난히도 어두컴컴하다. 가로등이 한 군데도 설치되지 않았고 가게들도 전기를 아끼느라고 창 바깥까지 조명 시설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녁 여섯시만 지나면 논골의 큰길조차 어느 산간 오솔길처럼 쓸쓸하고 어둑어둑해서 눈앞으로 다가오는 인간의 얼굴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날 나는 운수가 매우 사나왔다. 시계를 예상보다 헐값에 팔아치웠을 때부터 어쩐지 예감이 불길하더니 급기야 논골의 저녁나절을 지배하는 그 어둠 때문에 엉뚱한 피해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사건은 또한 성애와 나 사이를 더욱 가깝게 밀착시킨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다.

 

오랜만에 거금을 호주머니 속에 넣고 나는 약간 마음이 느긋해졌다. 그래서 호주머니 속에 손을 찌르고 고개의 오르막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이 거액을 한꺼번에 성애를 위해 써 버릴까, 아니면 조금 분배해서 자신의 개비 담뱃값과 커피 값으로 예비해둘까, 그런 문제를 궁리하고 있었는데 사진관 옆 골목에서 문득 남자들의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진관은 백조다 방 아랫충에 있었고 그 옆 골목은 시장 부지로 정해 놓은 공터로 들어가는 입구였는데 사람들이 이 부근에 모여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어두워서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누가 싸움꾼이고 누가 구경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한 결과 한 사내를 셋이나 되는 놈팡이들이 합세해서 공격하고 있었다. 당하는 녀석은 맹렬하게 저항했다. 그럴수록 그가 받는 피해는 더 심한 것 같았다.

 

누구의 입에선지 비명이 들렸고 그때마다 구경꾼들이 이쪽으로 저쪽으로 휩쓸렸다. 과연 이날 밤의 소동은 고요한 논골의 저녁나절에서는 흔치 않은 구경거리였으며, 그래서 사람들은 몰염치스럽게 싸움을 말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몇 분 동안 격렬한 싸움이 진행되고 있을 때 갑자기 호각소리가 등 뒤로부터 귀청을 찢을 듯이 크게 들렸다. 고개 너머 파출소에서 경관들이 급거 출동했던 것이다. 구경꾼들이 순식간에 홀어졌다. 싸우던 놈들도 혼비백산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때 별안간 누군가가 내 팔을 왁살스럽게 붙잡았다. 돌아다봤더니 경관이었다.

 

“따라와”

 

내 팔을 붙잡고 손을 놓지 않은 채 경관이 말했다.

 

“왜 그러오?”

 

“잔말 말고 따라와!”

 

경관은 생각보다 힘이 셌다. 그는 내 항변 같은 것은 귀담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완강하고 사나운 완력으로 나를 잡아끌고 갔다. 나중에 봤더니 현장에서 파출소까지 끌려온 놈은 매를 맞고 있던 놈과 나 둘뿐이었다. 집단폭행을 가하던 놈들은 재빨리 도주해버렸던 것이다.

 

“이거 봐요. 난 구경꾼이었어요. 구경꾼도 잡아다 가두는 법이 있나요?”

 

나를 끌고 왔던 경관에게 나는 큰소리로 대들었다.

 

“야, 임마, 누굴 장님 취급할 생각이냐? 난 네 녀석이 주먹을 휘두르는 걸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한 번만 그 따위 수작 다시 부려봐. 그땐 하수구멍에다 대가릴 처박아 줄 테니깐.”

 

머리가 커다란 경관이 눈을 부라리며 불호령을 내렸다. 그래도 난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저 친구에게 물어보슈. 내가 그 패거리 중의 한 놈이냐고.”

 

경관이 매맞은 놈에게 농담하듯 물었다.

 

“이 녀석이 널 때린 놈 중의 하나지? 틀림없지?”

 

“맞아요. 저놈도 합세해서 날 때린 놈 중의 하나예요.”

 

그 미련한 녀석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거봐, 이놈아, 누굴 속이려고 그래? 네놈은 적게 잡아도 징역 일 년이야. 따귀라도 한대 맞고 싶지 않거든 잔말 말고 그 의자 위에 앉아 있어.”

 

경관이 긴 나무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이번엔 경관에게 애원했다.

 

“나를 좀 보세요. 내가 누구와 싸움질을 할 수 있을 것 같소? 난 걸어다닐 힘도 없는 환자예요.”

 

그러나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한 경관이 경멸하는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저놈 말하는 거 보니깐 상당한 악질이군. 남을 실컷 때려 놓고 저런 소릴 하다니. 이봐, 김순경, 저 자식 신원 좀 샅샅이 조사해 보라구. 전과가 있나 없나.”

 

“그러죠. 일단 오늘밤 지내고 난 뒤 내일 본서로 넘길 테니까 내일 아침에 조사하기로 하죠.”

 

나를 끌고 왔던 경관이 대답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긴 나무 의자에 걸터앉았다. 무릎이 시려오고 상반신이 오들오들 떨리기 시작했다. 왜 저 바보 자식은 자기를 구타한 놈들의 얼굴을 구별해내지 못할까? 저놈은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빤히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것일까? 본래 구타당한 놈은 구경꾼에 대해서도 피해 의식을 품게 마련이다. 더구나 논골의 구경꾼들은 그가 맞는 걸 말리지도 않았으니까.

 

나무의자 위에 앉아서 나는 꼬박 밤을 새웠다. 피의자를 이런 식으로 잠재워도 무방한지 알 수 없었지만 다행히 나는 별탈은 없었다. 새벽 공기는 어디서나 맑고 신선했다. 조금 있자, 논골에서 아침 일찍 등교하는 학생들과 일터로 나가는 일당 노동자들의 행렬이 파출소 앞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모두 표정들이 밝고 걸음걸이에 활기가 넘쳤으며 특히 여학생들의 빳빳하게 풀 먹인 하얀 칼라의 청결한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논골에 부자라곤 하나도 없어요. 처음부터 가난한 사람들만 들어와서 살거든요.”

 

성애는 이런 말을 했지만 적어도 아침 일찍 이 길을 지나가는 행렬을 보노라면 그런 생각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경관이 숙직실에서 하품을 하며 나타났다. 그는 수건을 목에 걸고 세면장으로 나가더니 세수를 하고 돌아와서 나에게도 생각이 있으면 세면장을 사용해도 좋다고 말했다. 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자네 연고자가 있나? 있으면 연락을 취해 주지.”

 

경관이 말쑥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서 내게 첫 질문을 했다.

 

“없어요.”

 

“한 사람도 없어?”

 

“네, 없어요.”

 

“그럼 거주지는 어디야?”

 

“없어요.”

 

“자네 묵비권을 행사할 건가? 내가 어젯밤에 끌고 왔다는 게 그렇게도 화가 나나? 그렇다면 처음부터 나쁜 일을 하지 말았어야지. 자네 연고자도 거주지도 없는걸 보니까 여태 어디 있었는지 그 점이 아주 수상하군. 본서에 연락해 보면 지난달의 출감자 명단을 금방 알아낼 수 있어. 그러니까 언제 출감했는지 사실대로 말해 봐.”

 

“사람을 모욕하지 마쇼. 흑백은 곧 가려질 테니까. 거듭 말하지만 난 구경꾼이었소.”

 

“하하하, 이 친구가 배가 고픈 모양이군. 헛소리를 하게. 뭐 먹을 걸 좀 시켜다 주랴?”

 

“난 먹지 못하오.”

 

“왜 먹지 못해? 언제까지 먹지 않고 버틸 수 있어?”

 

“버틸 수 있어요.”

 
“단식 항의로군. 이봐, 그러지 말고 서로 사이좋게 일을 해결하자구. 본서로 넘어가면 더욱 가혹해져. 여기서 서류를 끝내놓는 게 좋아. 피의자에게 유리해.”

 

그때 간밤에 내게 악질이라고 욕하던 경관이 나타났다. 그가 자리를 지키고 있던 동료에게 물었다.

 

“이 친구 뭐 좀 알아냈소?”

 

“아뇨. 묵비권에다 단식까지 할 모양인데요. 연고자도 없다, 주거도 없다, 식사도 안 하겠다, 그런 식예요.”

 

“왜 식사를 안 하지? 식사는 하고 봐야 될 게 아닌가? 이봐, 친구, 단식 경험이 있어? 공연히 도사님들 흉내 냈다간 큰 코 다친다구. 먹으라고 할 때 먹는 게 몸에 좋을 텐데.”

 

“고맙지만 난 먹을 수가 없어요. 몇 달 동안 위장 장애 때문에 먹지 못해요. 거짓말 아니오.”

 

나는 고참 경찰관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들은 둘이서 서로 눈짓하더니 어깨를 으쓱 추켜올렸다. 먹지 않겠다면 관두라는 태도였다.

 

“민주 국가에선 음식을 먹을 자유도 있지만 먹지 않을 자유도 있다네. 굶고 버티겠다면 우린들 뾰족한 수가 없지.”

 


 

고참 경찰관이 자기 자리로 가서 털썩 주저앉으며 혼잣말로 중얼 거렸다, 그리고 곧 경관 두어 명이 새로 출근했는데 모두 간밤에 못 보았던 얼굴들이었다. 나를 본서로 연행할 시간이 다가온 것 같았다.

 

당직 경관이 전화통을 붙잡고 오랫동안 본서와 통화를 했는데 대화 내용이 어제 사건의 전말과 피의자의 이상야릇한 반항적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통화를 끝내자 파출소 실내는 조용해졌다. 나는 매우 초조했다. 중인도 보호자도 없는 무기력한 피의자, 그래서 도리 없이 집단폭행 사건의 주모자가 감수해야 할 가시밭길을 혼자 걸어가야 한단 말인가?

 

바로 그 순간에 내게 연고자가 나타났다는 건 천우신조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파출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웬 아가씨가 몹시 성난 얼굴로 뛰어 들어왔는데, 그녀는 다른 사람 아닌 성애였다.

 

나는 우선 그녀의 옷차림에 놀랐다. 파란 바지에다 베이지색 멋장이 스웨터를 입고 있었는데 그녀가 그렇게 세련된 의상으로 내 앞에 나타나긴 처음이었던 것이다. 성애는 저런 옷을 가방이나 보따리 속에 감춰 갖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만 입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옷도 입을 줄 모르는 촌뜨기라고 생각한 건 나의 오해였다. 성애는 완전히 다른 여자로 보였으며 특히 파출소 안으로 들어와서 그녀가 취한 행동은 안하무인이라고 하는 게 옳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옆에 앉아있는 경관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구석 의자에 앉아 있는 내게 다가와서 그녀가 물었다.

 

“어떻게 되긴. 난 싸움 구경하다 깡패로 몰려 이렇게 끌려왔을 뿐이오.”

 

“내 참 우스워서. 그래, 한마디 항변도 못하고 벙어리처럼 여기서 밤을 지샜단 말예요?”

 

“항변해도 소용없어요. 증인이 없으니까.”

 

“피해자는 누구예요? 어디 있어요? 피해자가 알 거 아네요?”

 

“그 녀석은 내보냈소. 그 녀석이 내가 자기를 때린 패거리 가운데 하나라더군. 뭐가 뭔지 나도 모르겠어요.”

 

“그런 바보자식, 내 앞에 있다면 내가 그런 놈을 가만둘까봐!”

 

성애는 당직 경관 앞으로 기세 좋게 다가섰다.

 

“이거 봐요. 당신네들, 이 사람 증거를 확보하고 붙잡아두는 거예요?”

 

그녀는 마치 고관대작이나 백만장자의 규수처럼 거만하고 당당하게 굴었다.

 

“어, 아가씨 누구요? 저자하고 어떻게 되는 사이죠?”

 

“우리 오빠예요., ’

 

“오빠라구? 방금 이 친구는 연고자가 없다고 말했는데. 정말 아가씨가 이 친구 여동생이란 말이지?”

 

“그렇대두요. 남의 말 함부로 의심 말아요.”

 

“그럼, 우리가 연락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고 왔지?”

 

“동네 사람들이 알려줬어요. 우리 오빠가 죄없이 끌려갔다구. 우리 집은 저기 라디오 가게 아랫골목에 있어요. 의심나면 나하구 같이 가봅시다.”

 

“이 친구도 거기 산단 말이지?”

 

“그래요.”

 

“아까는 주거지도 없다고 했어. 뭔가 수상한데!”

 

“오빠, 왜 잠자코 있어요? 지금 집에 함께 가자고 하면 될 거 아니에요?”

 

성애가 나를 흘겨보았다. 경관이 말했다.

 

“아가씨 말이 사실일지라도 저자는 남을 때렸어. 풀어줄 수 없다구!”

 

“어떻게 때렸어요? 때리는 걸 틀림없이 봤나요?”

 

“봤지. 주먹으로 마구 패더군.”

 

“호호호호, 오빠는 환자예요. 그만한 힘이 없다구요. 거짓말도 썩 잘 하시네요. 의사에게 가봅시다. 오빠가 치료받는 병원이 있으니까 지금 나랑 같이 가봐요. 만약 사실이 아니라는 게 밝혀지면 당신을 고발하겠어요.”

 


 

성애는 아주 대담하게 나왔다. 경관이 그녀에게 쩔쩔 매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성애는 경관더러 빨리 그녀와 동행해서 의사에게 가보자고 재촉했다. 십 분쯤 실랑이가 벌어진 끝에 고참 경관이 당직 경관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지껄였다. 그런 다음 나는 곧 거기서 풀려 나왔다.

 

고갯길에는 출근하거나 등교하는 행렬이 어느덧 자취를 감춰 버린 뒤였다. 겨울 햇빛이 부옇게 논골의 분지를 비쳐 주고 있었다. 나는 성애의 수완에 몹시 놀랐으며 감탄의 말이 입에서 저절로 나왔다. 사실 이 근처의 다른 아가씨들 가운데 경관을 그만큼 만만하게 다룰 줄 아는 아가씨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대개 뚜렷한 죄목이 없는 경우에도 경관 앞에서 오들오들 떨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성애의 그런 배짱과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그녀는 가출해서 바깥을 떠도는 동안에 세상살이의 요령을 그만큼 터득한 것일까? 그리고 일단 논골로 돌아와서 지낼 동안은 자기 본색을 감쪽같이 감추고 다시 어수룩한 촌뜨기 행세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의상에까지 분명 신경을 쓰고 있었다. 방금 파출소에 나타날 때 입고 있던 멋장이 스웨터와 바지는 성애가 여기서는 한 번도 입지 않던 옷이었다.

 

나는 변신한 성애가 갑자기 두려웠다. 그녀도 나의 그런 기분을 눈치 챘는지 파출소를 나와서 고개를 넘어오는 동안 좀처럼 먼저 말을 붙여오지 않았다. 흡사 나는 성애 아닌 다른 여자와 함께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사진관 앞까지 다가왔을 때 아무래도 둘 사이의 침묵이 쑥스러웠던지 성애가 돌연 내 앞으로 뛰어와서 얼굴 을 붉히며 말했다.

 

“배가 고플 텐데 뭘 먹고 싶지 않아요?”

 

“별로 생각이 없는데요.”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성애가 얼굴에 가벼운 화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전보다 좀더 예뻐 보였다. 파출소에서 처음 그녀를 봤을 때부터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안 돼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으면 더 나빠진다구요. 우유하고 카스테라 조각이라도 우선 먹어뒤요.”

 

그녀는 진짜 누이처럼 내 의사도 듣지 않고 근처의 구멍가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우유 한 병, 어린이 간식용의 작은 카스테라 한 조각을 들고 내게 돌아왔다.

 

“데워달라고 했더니 불이 없대요. 내가 다방 언니에게 가서 데워달랄 테니 백조 다방으로 올라와서 잠깐만 앉아계셔요.”

 

이맘때는 다방이 텅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나도 망설이지 않고 백조 다방으로 성애를 따라 올라갔다. 그녀는 주방으로 손수 들어가서 한참 동안 머물러 있더니 잠시 후 데운 우유와 카스테라 조각을 얹은 쟁반을 들고 내가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왜 그 녀석들의 의심을 받게 됐어요? 어젯밤 술 마셨어요?”

 

“술 마실 돈이 어디 있소? 지금 난 마시고 싶어도 못 마셔요?”

 

“아 참, 그러네요. 그런데 왜 의심을 받았을까. 생각할수록 우습고 이상해요. 우습지 않아요? 환자가 갑자기 깡패로 둔갑했으니.”

 

“난 우습지 않소. 이 동네는 뭔가 이상해. 사람들이 모두 백지처럼 멍청하구 무관심하다구. 멀쩡한 사람이 끌려가도 누구하나 증인이 되어 줄 생각도 않고 멍청하게 구경한다구요. 게다가 그 매맞은 녀석이나 경관은 또 어떻구? 마치 난폭한 장님들처럼 위험한 놈들이야. 난 논골이 싫어졌어요. 겁나고 왠지 무서워. 여기 머물러 있다간 잘못되어서 살인혐의를 뒤집어쓰고 끌려갈지 누가 아나요? 어제처럼 운이 나쁘면 그렇게 될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구요.”

 

“여길 떠나고 싶어요?”

 

“떠나고 싶고 말구요.”

 

“그래서 떠나기로 했나요?”

 

“아니, 아직. 하지만 곧 떠날 거요. 내가 여기 오래 있을 수 없다는 건 어젯밤에 알았어요.”

 

“어디로 가실 건데요?”

 

“나야 갈 곳이 있어요. 아무 때나 떠날 거요, 어느날 갑작스럽게- 아무도 모르게시리 꺼져 버리겠소.”

 

“천당으로 갈 거예요? 이씨는 그곳을 알고 있다고 했죠? 알고 있다면 내게도 좀 가르쳐줘요. 나도 내일은 어디로 달아나야 하니까.”

 

“참, 내일 그녀석이 오는 날이오?”

 

“모레예요. 하지만 하루 먼저 떠나는 게 안전해요. 만약 모레 나 가다가 그녀석과 부닥쳐 봐요. 난 끝장이에요.”

 


 

나는 성애에게 방을 얻어 주겠다고 장담한 사실이 있다. 그렇지만 성애는 그 일을 추궁하지 않았다. 나는 결코 농담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닌데, 처음부터 그녀는 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내 바지 호주머니에는 현금 삼천 원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지만, 이건 성애와의 약속을 이행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돈이었다. 나는 그 돈을 그 자리에서 그녀에게 줘 버릴까하다가 그녀가 필경 거절할 것 같아서 그냥 다방을 나와버렸다.

 

하루가 재빨리 지나갔다. 나는 성애가 언제 대문을 몰래 빠져 나갈지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저녁 어스름이 다가올 때까지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김씨라는 사내가 두렵다고 내게 말한 건 그녀의 속임수였을까. 아니면 차마 노인 내외 옆을 떠나기가 괴로워서 작별의 시간을 자꾸만 유예하고 있을까? 나는 그녀의 속셈을 몰랐다.

 

밤이 다가오자 공연히 내 마음이 불안하고 조바심쳤다. 그래서 나는 문 밖으로 뛰쳐나와 논골의 큰길을 천천히 오락가락하였다. 이맘때면 일당 노동자들이 드문드문 이 길을 지나가곤 했다. 어떤 때는 만취해서 큰소리로 가요를 열창하며 걸어갔고 어떤 자는 집에서 기다리는 아녀자에게 가져다 줄 선물을 흥정하려고 과일 가게, 빵가게 그리고 노점 따위를 기웃거리며 거리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거리는 여전히 어둑어둑해서 다가오는 사람의 얼굴을 분간하는 건 전혀 불가능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어두운 길목에서 나는 어떤 사내의 얼굴을 알아봤던 것이다. 아니,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판단이고 사실은 내가 허깨비를 봤거나 엉뚱한 사람을 그 사내로 오해했을지도 몰랐다. 그 사내는 쌀가게 앞에 서서 담뱃불을 붙이고 난 뒤 곧장 내 앞으로 걸어왔는데, 공교롭게도 쌀가게의 불빛이 잠깐 그의 얼굴을 비쳤던 것이다.

 

“바로 그 자다!”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외치고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짧은 고수머리, 검붉은 피부빛깔, 뭔가 증오하고 있는 듯한 고약한 눈초리, 내가 기억하고 보았던 건 그런 몇 가지 특징이었지만 나는 그가 바로 성애가 말하는 김씨라고 단정해 버렸다. 그 사내는 무심히 나와 엇갈려 지나갔다.

 

하루 먼저 이 거리에 그가 나타났다는 건 놀랄 일이 아니었다. 성애도 하루 먼저 행동하는 걸 생각해냈기 때문이다. 나는 곧장 집으로 달려왔다. 성애가 때마침 마루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내가 손짓으로 부르자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마당으로 나왔다.

 

“그 녀석이 나타났어.”

 

나는 숨올 죽이고 재빨리 속삭였다.

 

“그 녀석이 누구예요?”

 

“그 녀석, 김씨 말이오.”

 

“어디 있어요?”

 

“길거리에 있어.”

 

“틀림없어요? 그 녀석 얼굴을 어떻게 기억하죠?”

 

나는 답변이 궁했다. 내가 그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는 건 내 생각이라기보다 내 육감에 더 많이 의존했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겨를이 없었다.

 

“틀림없소. 다방에서 봤지 않소?”

 

“그렇군요. 알았어요.”

 

성애는 내 말에 재빨리 승복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가 그다지 쉽게 승복한 건 두려움 탓이었을 것이다. 불과 사오 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성애가 다시 마당으로 나왔다. 이번에는 손에 조그만 보따리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 지난번 고개를 넘어올 때 들고 왔던 그 보따리였다.

 

“부모님은 알고 계시오?”

 

“몰래 나왔어요. 영감은 자고 있고 할매는 부엌에 있어요. 그런데 어떡하죠? 그 녀석이 행길에 버티고 있다면 어디로 빠져나가죠?”

 

“내가 길을 알고 있소. 감쪽같이 빠지는 길을 알고 있다구요. 나를 따라와요.”

 

나는 벌써 문 밖으로 나섰다.

 

“어느 쪽이에요?”

 

뒤따라 나오며 성애가 겁먹은 소리로 물었다.

 

“저 쪽이오.”

 

나는 판자집들이 밀집해 있는 야산 꼭대기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 곳은 내가 천당이 있노라고 그녀에게 거짓말했던 바로 그 방향이었다. 나는 앞장서서 두더지처럼 상반신을 엎드리고 골목을 기어가다가 계단이 있는 지점에서 바로 왼편으로 꺾어서 다시 기어갔다.

 

다른 때 같으면 계단을 올라가서 큰길로 나가겠지만 지금 큰길에는 성애가 지상에서 가장 기피하는 인간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그 길로 갈 수가 없었다. 골목으로 한참 기어가던 우리는 이윽고 야산의 발 목 근처까지 와서 행길을 훌쩍 건너뛰었다. 그 짧은 시간에 그 녀석이 우리를 발견한다는 건 그야말로 천우신조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 이제부턴 산이니까 맘을 폭 놓아요. 악마라도 이 코스는 알아내지 못할 거요.”

 

비탈을 천천히 올라가며 나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천당으로 가는군요.”

 

성애도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꼭대기로 올라가서 다음에는 어디로 빠지죠? 다시 내려와야 한다면 공연히 헛수고하는 거 아니에요?”

 

“다시 내려오지 않아도 돼요. 이 길로는 말이오.”

 

“그럼 어느 길로?”

 

“꼭대기로 올라가서 내가 가르쳐줄 거요.”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야산 중턱을 지나자 길이 더욱 좁아지고 비탈의 경사가 심해갔다. 중턱을 지나면서부터는 가게의 불빛도 사라졌기 때문에 눈앞이 완전히 캄캄했다. 그래도 우리가 방향을 잃지 않은 건 이 길을 자주 지나갔던 나의 육감 덕분이었다.

 

고지로 오를수록 바람이 더욱 심해졌고 숨이 가빠 걸음을 빨리 옮길 수가 없었다. 성애는 거의 필사적으로 내 뒤에 바싹 붙어서 따라왔다. 우리는 거의 산의 정상에 다가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내가 예상했듯이 북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 오를 때마다 북소리를 듣지 않은 때가 없고 보면, 그 무당은 밤낮없이 이십사 시간 동안 북을 두드리고 있음에 틀림없다. 북소리는 일정하고 빠른 박자로 맹렬하게 울렸으며, 우리가 산꼭대기에 접근할수록 점점 가까이서 크게 들렸다.

 

“지독한 무당이네. 이렇게 추운 밤에 무슨 청승일까? 귀신 부르느라고 저러는 걸까요? 그렇지 않아도 여긴 귀신 나오게 생겼는데.”

 

성애가 옆으로 바싹 다가서며 투덜거렸다.

 

“종일 북을 치나 보죠? 저 소리가 그칠 때는 언젤까요?”

 

“무당이 죽을 때겠죠. 살아있는 동안은 북치는 게 자기 사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지 몰라요.”

 

“무당은 잠도 안 자나? 미친 사람이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뭣보다 이 논골에는 저 북소리만큼 어울리는 소리가 없어요. 예배당 종소리나 술꾼들의 노래 소리보다 백 곱절 더 어울려요. 왜냐구요?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봐요. 뭔가 독에 빠진 인간들의 신음소리 같기도 하고, 반대로 진짜 미친 사람들의 혼을 달래는 소리 같기도 하죠. 그렇게 들리지 않아요?”

 

“아저씨도 미친 거로군요. 난 무섭기만 해요. 캄캄한 데서 들으니 까 더욱 무섭네요. 북소리가 저렇게 겁주는 소린 줄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거 봐요. 아가씨도 북소리에 떨고 있는 걸 좀 보라구. 내 말이 맞았나 틀렸나.”

 

“그보다 난 어디로 갈까요? 우리가 왔던 길로는 다시 내려가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내가 깜박 길을 가르쳐 준다는 걸 잊었군. 이쪽으로 와 봐요.”

 

나는 성애를 우리가 올라왔던 반대쪽으로 데리고 갔다. 눈앞은 어두웠지만 멀리 발 아래 불빛이 보였다.

 

“여기 길이 있어요. 전에 내가 두어 차례 내려가 본 일이 있다구요. 이쪽으로 곧장 내려가면 큰길이 나올 거요. 알겠소?”

 

“아이, 캄캄해라. 여기서 돌아가시겠어요?”

 

“난 돌아가야죠. 그까짓 김가 녀석 마주쳐도 난 겁날 것 없으니까요. 혼자 갈 수 있겠소?”

 

“걱정 없어요. 그럼 빨리 건강을 회복하세요. 그리고 논골에서도 떠나시구.”

 

“고맙소. 잘 가요.”

 

그러나 나는 돌아서다 말고 다시 그녀 쪽으로 다가섰다. 성애에게 주기 위해 마련했던 돈이 아직 고스란히 내 바지 주머니에 들어있다는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거 받아요. 삼천 원일 거요.”

 

성애는 내 손을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이게 무슨 돈이에요? 내가 아저씨께 꾸어준 돈이 있나요?”

 

“그날 파출소에 끌려갔던 날 전당포에 맡겼던 시계를 아주 팔아넘겼소. 내 딴엔 약속을 지키려고 말이오.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받아 두시오.”

 

“싫어요. 나 비상금은 있다구요. 빚을 지면 두고두고 괴로와요. 아저씨 약값이나 하세요.”

 

“받지 않으면 여기다 버리겠소. 내가 아가씨 빚을 썼다고 생각하면 그만 아니오?”

 

나는 돈을 그녀의 손아귀에 억지로 쥐어주고 재빨리 그녀로부터 달아났다. 정신없이 비탈길을 나는 달려 내려왔다. 북소리도 이젠 들리지 않았다. 물론 성애는 하는 수 없이 돈을 받아들고 나와는 반대로 비탈을 내려갔을 것이었다.

 

성애가 떠난 뒤 이튿날부터 나는 예기치 못했던 고민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날 김씨라는 작자는 거리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논골에 나타났다면 성애네 집 대문을 두드리지 않았을 까닭이 없었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놈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일단 논골에 와서 녀석이 이 집을 찾아낼 생각만 있다면 그건 시간 문제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가란 놈은 종일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성애가 떠난 날 내가 행길에서 목격한 인간이 가짜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 가 허깨비를 보았거나 가짜를 보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나의 작은 실수 때문에 성애는 가출을 서둘러 단행했다는 얘기가 된다. 나야말로 그녀 말마따나 미친 녀석이 아닌가.

 


 

“천당이 어딨어요? 천당을 가르쳐 줘요.”

 

“그래. 곧 가르쳐 주겠소. 걱정 말아요.”

 

나는 집을 떠나기 싫어하는 그녀에게 그 헤픈 농담을 정말 실행해버린 거나 다름 없었다. 그것이 성애에게 마지막 가출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몇 해 뒤의 일이다.

 

김유생 노인이 사무실로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처음 그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몇해 사이에 그만큼 쇠약해 있었다. 노인은 회색 두루마기를 입고 지팡이에 의지하며 사무실에 나타났는데, 콧물이 계속 흘러내려 잠깐 서 있는 사이에도 손수건으로 그걸 닦아내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여길 어떻게 아시고 찾아 오셨습니까?”

 

의자를 권한 뒤 내가 묻자 그는 손수건을 꺼내어 흐르는 콧물을 다시 한번 닦아낸 뒤 천천히 대답했다.

 

“전에 당신의 건강이 회복되면 이 빌딩에서 일할 거라고 말한 일이 있었소. 빌딩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여기저기 여남은 군데 빌딩을 찾아 다녔더랬소. 오늘에야 이 앞을 지나가다 빌딩 이름이 생각났지 뭐요.”

 

“아, 그랬었군요. 그래서 빌딩에 들어오셔서 이 방 저 방을 찾아보셨나요?’,

 

“그런 셈이지. 하지만 쉽게 찾아냈지. 여긴 뭘 하는 곳이오?”

 

“집을 짓는 회삽니다. 큰 건물, 작은 건물 할 것 없이 청부를 맡아서 집을 지어 주죠. 커피 한 잔 드시겠습니까?”

 

“아니, 관두시오. 요즘 커피도 담배도 못하고 있다오. 의사가 말렸다니까.”

 

노인은 자신이 암을 앓고 있다는 사실만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당신은 건강이 참 좋아 보이네. 그래, 여기서 이씨가 하는 일은 뭐지?”

 

“설계 도면을 그리지요. 집을 짓는 데는 도면이 꼭 있어야 하니까요.”

 

“그래, 그때 우리 집에 있을 때도 도면을 그리고 있었소? 난 전혀 몰랐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끝내 한 장도 완성하지 못했어요. 참 따님은 돌아왔겠죠?”

 

그제서야 나는 성애의 일을 물어 봤다. 그 순간 노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가 콧물을 다시 한 차례 닦아낸 뒤 아주 음산한 표정으로 천천히 말했다.

 

“실은 내가 당신을 만나려고 애쓴 이유가 그 애 때문이었소. 그 앤 돌아오지 않았소. 몇 해 될 거요. 이젠 내가 떠날 날이 가까워 오니까 그 애를 집에 찾아다 놓아야겠단 생각이 들어요. 어떻소? 성애 있는 데를 이씨도 모르오?”

 

눈자위에 검은 그림자가 깊게 드리운 무서운 눈초리로 노인이 나를 쏘아보았다. 그 눈빛은 혐의자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나는 몸이 오싹했다. 등시에 노인의 심중을 재빨리 간파했다. 이 노인은 나를 의심하고 있다.

 

내가 그 방에 있을 때 성애가 가출했고, 그런 뒤 불과 몇 달 뒤에 내가 그곳을 떠났기 때문에 그 두 개의 근접된 사건 사이의 시간에 어떤 의미를 두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노인의 기억 속에 떠오르는 유일한 젊은 남자가 나 한 사람뿐일 수도 있다. 설마 북소리가 들리던 그 야산 꼭대기의 정경을 노인이 알고야 있을라구. 어떤 경우나 노인의 착각이 빚어낸 혐의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 모든 걸 이해한 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저는 따님이 벌써 돌아왔을 줄만 알았지요. 따님 있는 곳을 만약 제가 알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만사 제쳐 두고 따님을 찾아다 드리고 싶군요.”

 

“그게 진심에서 하는 말이오?”

 

“진심이구말구요. 있는 곳만 알 수 있다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아버님께 데려다 드리죠.”

 

“이걸 어떡한다?”

 

노인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난 이씨만 만나 보면 그 애가 있는 곳을 알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더랬소. 이젠 믿을 거라곤 하나도 없다오.”

 

그는 지팡이에 의지하며 일어섰다. 바깥 행길에는 간밤에 내린 눈이 보료처럼 깔려 있었다. 나는 빌딩 현관까지 노인을 배웅했다. 그 때 내가 노인을 위로할 수 있는 말을 한 마디나마 찾아낼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불행히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뚱보 할매와 헤어진 뒤 논골 거리를 한참 헤매고 걸어다녔다. 백조 다방으로 올라가서 커피도 시켜 마셨고, 개비 담배를 파는 아줌마들의 노점에도 들러서 담배 몇 개비를 사 피우기도 했다. 그리고 저녁 어스름이 되자 판잣집들이 밀집해 있는 야산의 비탈길을 기어 올라갔다.

 

꼭대기에 다다르자 웬일인지 북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부근은 진짜 무덤처럼 을씨년스럽고 적막하기만 했다. 그 사이 무당이 죽어 버렸을까? 정말 스스로 목숨이 다하기 전에는 좀처럼 북소리를 그쳐 주지 않을 것 같던 무당이 아니었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