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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열 봉지와 50 달러-

 

우리나라 근대문학에 깊은 영감과 영향을 주었던 러시아 문학. 주요 작가들에게 끼쳤던 러시아 문학의 영향은 지금도 우리나라 문학 작품 전반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러시아 현지의 문화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 러시아 문화의 숨결을 찾아내는 작가의 모색을 보여준다. 국내에서 박노자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러시아 지식청년과의 만남이 이 스토리 전개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이 글은 92년 내가 러시아를 처음 방문했던 얘기가 주내용이 된다. 몇 사람 지명인사가 등장할 수도 있는데 종이 잡지에서 하듯 실명을 쓸 것이며 거기에 대한 배려는 필자의 몫이므로 미리 양해를 구해둔다.

 

전두환 이전만 해도 일반시민은 물론 작가들도 해외여행을 한다는 것은 바늘구명이었다. 문인 중에도 부유층이거나 재간이 좋은 사람이면 몰라도 보통 사람은 김포공항과는 아예 담을 쌓고 살아왔다. 잘 알려지지 않은 단체로 소설가협회라는 것이 있다. 평소에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도 두지 않고 지내는데 이곳에서 이따금 염가 해외여행의 프로그램을 마련해서 사람을 불러 모은다. 행선지가 러시아로 밝혀지자,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바로 참여 신청을 했다. 이렇게 해서 삼십명 가까운 남과 여 문인들-그 가운데 영화감독, 무슨 평론가, 시인 너댓명이 끼었다-이 모두 비행기를 타고 난생 처음 철의 장막이 이제 막 걷혔다는 러시아를 향해 날아갔다.

 

한국의 문인들 치고 러시아 문학의 신세를 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특히 소설가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요즘 신세대 작가들은 조금 다른 것 같지만 60~70년대 작가들은 도도한 러시아 산문의 세례를 누구나 다 받아왔다. 조금 심한 경우는 도스또에프스끼의 도박벽을 흉내 내느라고 밤에 어느 아지트에 몇 사람이 모여서 푼돈을 늘어놓고 눈이 벌개지는 새벽녘까지 포커게임에 몰두하는 장면도 목격한 바가 있다. 이제 얘기지만 70~80년대 광풍처럼 불어온 이른바 민중문학이란 것도 그 흐름을 보면 다분히 러시아의 고골, 고리끼, 에세닌과 맥이 통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행 모두 첫 러시아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몹시 들떠 있었다. 일행 가운데 작고한 유현목 영화감독이 최고령자로 참여했던 것이 떠오른다. 

 

일행이 처음 묵게 된 숙소는 모스크바 중심가에 있는 이류급 호텔, 아니 삼류급인 인투어리스트 호텔로 규모는 큰 편이나 시설은 아주 낡았고 로비나 복도 분위기는 마치 시장어귀처럼 어수선 했다. 서로 몸이 부딪힐 정도로 정체 모를 사람들이 그곳에 북적거렸다. 호텔이 대로변에 있었는데 거리에는 크고 작은 휴지조각들이 널부러져 있고 낡은 승용차들이 이따금 생각난 듯 한 두 대씩 빠른 속도로 지나다녔다.

 

인투어리스트 호텔이 3류라는 것은 그 호텔 로비에 북적거리는 모스크바의 그 이름난 유녀들 때문이다. 일급이나 이류 정도 호텔이라면 아무리 경제가 불황이고 치안상태가 엉망이더라도 그 유녀들이 호텔 안팎을 자유롭게 넘나들게 방치하진 않았을 것이다. 여자들은 로비에서 마주치기만 하면 아무나 소매를 붙잡고 거래를 시도하곤 했다. 그 바람에 점잖은(?) 한국의 작가들은 그녀들을 피해 방과 로비를 오가느라고 곤욕을 치러야 했다.

 

도착 첫날 저녁 시간에 호텔 대식당에는 그럴듯한 만찬 자리가 준비되고 있었다. 인솔 주무의 말을 들어보니 그날 저녁 러시아 작가협회 회원들과 그곳에서 상견례의 만찬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는 가슴을 설레며 이 소식을 반겼고 큰 기대감을 갖고 그 시간을 기다렸다. 사실 얼떨결에 러시아로 날아오긴 했지만 그곳 대표 작가들과 서로 만나 우의를 다진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도 하지 않았던 멋진 기획이었다.

 


 

 

러시아 작가들과의 상견례 만찬, 왠지 첨부터 반신반의하긴 했다. 출발 전 그런 얘긴 듣도보도 못했고 그 협회라는 곳이 그런 프로를 준비해낼 만큼 힘이 있는 곳도 아니다. 그래도 곧 현지 작가들이 찾아온다니 일행들은 방과 만찬장을 왔다갔다 하면서 초조한 마음으로 귀한 손님들을 기다렸다. 아마 오후 7시부터 9시가 넘어 반에 이를 때까지 배가 고픈데 저녁도 먹지 않고 진객들을 기다렸을 것이다.

 

서울이라면 이름께나 알아주는 작가들이 수두룩했다. 최인훈도 있고 <무진기행>으로 나중에 영화의 메가폰까지 잡던 김승옥도 있고 충청도 사투리의 도사라고 할 이문구도 있고 젊은이들에게 한창 인기를 끌던 박범신도 있고 그밖에도 이름 있는 중견시인, 도도한 자존심의 여류작가 등 면면들이 결코 만만치 않았으나 넓으나 넓은 러시아 땅에 초면으로 와서는 마치 비맞은 장닭들처럼 초라하고 초췌한 얼굴로 고명하신 러시아 작가들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들은 오지 않았다. 아홉시 반을 지나 작가들을 대신해서 러시아작가 협회에서 나이 지긋한 장년 남자 한사람이 만찬장에 오긴 했는데 그의 말인즉

 

“작가들이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해서 올 수 없다는 말을 대신 전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 남자는 아마 작가협회 수위를 보거나 혹은 말단 사무직에 종사하는 사람인 듯했다. 그 사람은 우리가 함께 식사라도 하고 가라고 붙들어도 자기도 바쁘다며 작별인사도 변변히 하지 못하고 황급히 자리를 떠버렸다.

 

우리는 누굴 원망하고 비난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 일보다는 당장 허기를 채워주는 일이 더 급했던 것이다.

 

왜 그런 황당한 일이 벌어진 걸까. 첨부터 그 협회에 큰 기대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일행들은 그걸 꼬치꼬치 따져볼 흥미조차 갖지 않았다.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 내가 고려인 작가 아나톨리 김에게 그 얘길 들려줬더니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뭔가 중간에 착오가 있었던 거지, 러시아 작가들이 카레이스키 작가들을 경시해서 그런 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첫날부터 어처구니 없는 해프닝을 겪고 나서 우리는 침울한 기분으로 모스크바의 첫 밤을 보냈다.

 

첫날 러시아 작가들을 기다리느라 로비에서 서성이고 있을 때 뜻밖의 얼굴이 그곳에 나타났었다. 국회의원 장00씨다. 평화민주당인가 소속 의원으로 전두환 청문회 때의 활약으로 낯이 많이 익었다. 내가 보기에 당시에는 이인제 씨 못지않게 유망해 보이던 국회의원인데 무슨 이유인지 지금은 정계에서 볼 수가 없다. 그와 따로 안면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객지에서 아는 얼굴을 보니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 나는 반가워서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여기 언제 오셨지요?"

 

"아, 저희는 하루 전에 왔습니다. 저는 총재님을 모시고 왔는데 작가님들이 오셨다기에 거리도 가깝고 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장 의원은 인상 좋은 얼굴에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DJ가 지금 여기 와 계시다고요?"

 

"여기서 가까운 메트로폴 호텔에 지금 묵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찾아뵙고 인사라도 드려야 할 텐데."

 

"저와 함께 가십시다. 잘 아시죠? 무척 반가워하실 겁니다."

 

장 의원은 당장이라도 나를 메트로폴 호텔로 안내할 기세였다. 그러나 일행이 있는데 첫날부터 혼자 표가 나게 행동하는 건 적절치가 않았다. 나는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장 의원과 헤어졌다.

 

DJ가 묵고 있다는 메트로폴 호텔은 문자 그대로 일급호텔이다. DJ는 본래 다독가에다 박학한 분이지만 북방개척에 관심이 많기 때문인지 러시아 쪽 외교에 많은 열정을 쏟은 것은 알려진 그대로다. 당시 아마 그는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강연을 하고 학위를 받는 일로 러시아를 찾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에서 DJ를 상면할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그때 얘기를 했더니 DJ는 그 특유의 전라도 억양으로

 

"그때 오지 그랬어? 왔더라면 용돈이라도 줬을 텐데" 이런 말을 하며 웃었다.

 

나도 그 말을 듣고 보니 좀 아쉽긴 했다. DJ는 손이 커서 용돈이라도 나 같은 사람에겐 거금(?)을 주셨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구차한 얘기지만 러시아 여행 당시 내가 휴대한 외화는 아마 정식으로 납부한 여행경비 외에 기껏해야 4백~5백 달러 미만이었을 것이다. 나는 여행할 때 물건을 마구 사서 짐을 늘리거나 하다못해 사진을 찍어대는 그런 취미조차 없기 때문에 따로 큰돈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모스크바에서는 여러 가지로 일진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다음날 오전 현지에서는 관습대로 가이드란 남자가 나왔는데 이십대 후반쯤 보이는 이 남자는 옷차림도 후줄근하고 머리도 빗질조차 하지 않았는지 잠자리에서 막 튀어나온 사람처럼 머릿결이 헝클어져 있었다. 그 남자는 잠바 주머니에 손을 꾸욱 집어넣고 무슨 말을 묻기만 하면 아주 서툰 한국말로 무조건 "모른다"만 되풀이했다. 그는 성의도 없지만 한국말도 가이드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 남자와 부딪쳤다.

 

"당신, 빠스테르나크를 알지요? 보리스 빠스테르나크."

 

그 남자는 흠칫 놀라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무슨 귀찮은 요청을 하려고 그러느냐는 표정이다.

 

'페레델키노, 여기서 차로 얼마나 걸리나요?"

 

그는 무조건 머리를 흔들었다.

 

그곳은 아주 멀리 있고 가봐야 볼 것도 없다고 손짓 발짓 섞어가며 말했다. 그러나 한동안 승강이 끝에 차로 한 시간 거리 이내에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래도 아무도 거기 안 갈 거요."

 

가이드가 주위에 서있는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후에 크레물린 광장에 가서 레닌 영묘도 보고 크레물린 궁 전시실로 들어가 제정시대 마차라던가 여왕의 장신구 등을 구경할 계획 때문에 시간도 없다는 것이다. 주변 동료들도 가이드의 말에 동조하는 분위기를 보였다. 그렇다면 혼자 택시를 타고 페레델키노에 가겠다고 나는 말했다. 크레물린보다 레닌의 영묘보다 내게는 페레델키노가 더욱 찾고싶은 곳이었다. 한 사람 두 사람 마음이 움직여 나와 동행하겠다는 희망자가 점점 불어났다. 결국 버스 전체가 크레물린이 아닌 페레델키노로 향해 달리기로 방향을 바꿔버렸다. 페레델키노를 서둘러 둘러보고 남은 시간에 크레물린에 간다는 것으로 일정을 바꾼 것이다.

 

내가 빠스테르나크를 읽은 것은 대학 신입생이던 1959년 가을이었다. 이딸리아를 통해 지하출판물이 흘러나와 서구에서 유행이 되고 그해 서울에서도 양장본으로 <의사 지바고>가 출간되었다. 책을 살 돈이 없어 친척집에 갔더니 그 책이 있어 염치불고하고 책을 빌려다가 한동안 돌려주지도 않고 두번 세번 그 러시아 리얼리즘의 마지막 기념비가 되는 소설을 읽었다.

 


 

 

애착과, 집념과, 아름다움의 절정.......

이 9월의 바람결에 우리는 연기처럼 흩어지자.

소중한 사람이여, 이 가을 속삭임 속에 너를 모두 지워버리고

기절을 하거나 반쯤 미치려무나! 

*유리 지바고 시집 <가을>의 일부

 

 

열매는 하나도 없이 앙상한 가지와 잎사귀만 내민

무화과나무가 저만치 앞에 솟았다.

주님은 그 나무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무엇이더냐?

거기 맥빠져 서있는 네게서 나는 어떤 기쁨을 얻겠느냐?

* 유리 지바고 시집 <기적>의 일부

 

시들이 너무 길어 일부만 발췌했고 일부 번역은 필자 취향으로 약간 수정했다. 이밖에도 <의사 지바고> 말미에는 많은 시들이 지바고 시집이란 표제로 수록되어 있다. 앞에 인용한 시들은 특히 내가 좋아하고 암송하던 시편들이다. 다음은 1997년 월간 <말>지 3월호에 필자가 썼던 글 일부를 옮겨본 것이다.

 

-내가 특히 매료된 것은 책 말미에 나와 있는 '지바고 시편'들이었다. 빠스테르나크는 그의 경력에 나와 있듯 본래 일급의 서정시인이었다. 그는 한때 혁명시인 마야꼽스끼 등과 함께 시작활동을 했으며 세익스피어 등 서구의 고전을 번역하는 일에 오래 종사했었다. <의사 지바고>는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장편소설인 것이다. <지바고의 시편>은 소설의 에필로그 형식으로 나와 있고 여주인공 라라에 대한 애정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이 시들은 서정시로 일류의 품격과 짜임새를 뽐내고 있다.

 

이미 주인공 유리 지바고가 작가의 분신이라는 추정이 정설로 되어 있지만 이 시들을 읽어보면 그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받게 된다. 이 서정시들은 인간과 자연의 융화를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으며 인간 감정을 고귀하게 정화시켜 주는 어떤 힘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 시들 속에서 한층 높은 품성과 생명력을 가지고 되살아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시편들의 세계는 소설 <의사 지바고>의 세계와 연결되고 소설의 또 다른 압축된 모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20세의 젊은 나는 금호동 산동네 언덕배기, 코스모스가 한창 피어있던 곳에 파묻혀 앉아서 이 소설을 읽느라고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한동안은 이 소설과 지바고의 시편들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오죽했으면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네 어느 아가씨에 보낸 장문의 연서에다가 ‘라리사 표도로브나에게’라고 썼을까. 그 편지를 써서 보내놓고 보니 내 이름도 빠트리고 보낸 것을 알았다. 결국 그쪽 이름도 이쪽 이름도 빠진, 그야말로 누구 말처럼 ‘주어가 없는’ 연서가 되어버렸으니 실패를 한 것은 너무 당연한 귀결이었다.

 

잠시 얘기가 옆길로 빠졌는데 오후 두시 경에 우리를 태운 버스는 숲이 우거진 페레델키노 마을에 도착했다. 가이드의 말대로 그곳에 특별한 볼거리가 있는 건 아니었고 겉으로 보면 넓은 농토에 고작 십여 채 주택들이 서로 거리를 두고 흩어져있는 한적한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지바고 기념관은 미니 이층 목조건물인데 최근에 만들어 붙인 듯한 빠스테르나크 얼굴 동판과 이름을 새긴 표지판이 눈길을 끌었다. 이 건물에서 빠스테르나크는 말년 한때를 보냈고 1960년 5월 30일 여기서 다난했던 삶을 마감했다.

 

하필이면 관리인도 출타중이라고 해서 내부 구경도 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일행들은 바깥에서 집 주변만 빙빙 돌면서 주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사진들을 찍었다. 그런데 페레델키노에 가자고 했을 때 그렇게도 시큰둥해 하던 동료들이 막상 그곳에 와서는 사진을 찍어대느라고 여념이 없는 걸 보고 나는 한동안 실소를 머금었다. 이른바 증명사진을 찍어대는 것이다.

 

모스크바나 다른 도시를 보면 푸시킨 기념관은 한 두 곳이 아니고 규모도 크고 관리도 아주 잘되고 있다. 내가 두세 번씩 찾아갔던 모스크바 톨스토이 기념관도 비교적 관리가 잘되고 있었으며 볼거리도 많이 있었다. 톨스토이의 경우 물론 그의 영지인 야스나야 팔리아나는 거대한 궁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구역이 넓고 건물들도 여러 채가 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나는 1995년도에 혼자 야스나야 팔리아나에 찾아간 적도 있고 2005년 러시아 여행시에는 그곳에서 열린 규모가 큰 작가 미팅에 참여하느라고 두 번째로 그곳에 갔었다.

 

작고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솔제니친 기념관은 내가 알기로는 모스크바 중심가에 제법 큰 빌딩으로 지어져 있다. 그곳이 건축 중일 때 그 앞을 지난 적이 있는데 큰 이변이 없었다면 솔제니친 기념관은 도심에 현대식 건물로 세워졌을 것이다. 그런 것에 비하면 빠스테르나크 기념관은 그의 삶 자체가 그랬듯이 장소도 외진 곳이고 규모도 초라하다고 볼 수 있다. 

 

모스크바의 일정은 일반 패키지 여행객들 일정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게으르고 심통쟁이인 가이드는 되도록 일정을 단순화시키고 빨리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높이가 537미터가 된다는 오스탄키노 TV 송전탑에 갔던 일,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고 설비도 시원치 않은 어느 한식 식당으로 끌려가서 한국 음식을 먹은 일 정도이다.

 

이 송전탑은 남산의 <서울 타워> 와 성격이 비슷해서 360도로 회전하는 전망대에 올라가면 드넓은 모스크바 시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었다. 그런데 당시 워낙 기분이 저조했던 탓인지 전망대에서 바라본 모스크바 전경이 지금 조금도 떠오르지가 않는다.

 

한식 식당은 북한 쪽에서 운영하던 곳이라고 기억된다. 개방 초기라면 당연히 그쪽 운영일 수밖에 없다. 지금은 남측 교민이 운영하는 식당이 여남은 곳이나 성업하고 있는데 그때 그 식당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스타니스라프스키 연극학교로 일찍 유학 와서 연극을 배운다는 삼십대의 연극학도가 찾아와서 우리를 집시들의 이상야릇한 춤판이 벌어진 호텔로 데려가 자기 돈으로 보드카와 캐비어를 곁들인 보리빵을 대접해주던 일이 그나마 모스크바의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동포라는 연대감과 작가에 대한 호의로 그 젊은 연극학도는 거금을 투척했으리라.

 

모스크바라는 도시를 며칠 사이에 둘러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생각이다. 그렇긴 하나 짧은 일정이라도 푸쉬킨 기념관이나 발쇼이 극장, 국립 모스크바 대학 캠퍼스 방문 같은 것이 작가 일행의 스케줄에 포함되었더라면 보다 뜻있는 여행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푸쉬킨 기념관은 제명과 달리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그곳에는 칸딘스키, 샤갈, 세잔느, 피카소의 그림들이 있고 특히 샤갈의 경우는 마치 그의 모든 작품을 독점하고 있지 않나 의심이 갈 정도로 많은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뒷날 세잔느의 그림 앞에 섰을 때 받았던 감명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림에 평소 눈이 어둡다고 자인하던 내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자, 이제 ‘핀란드역으로!’가 아니고 그 역과 가까운 도시인 페테르부르그를 향해 모스크바의 ‘레닌 역으로!’ 갈 차례이다.

 

모스크바에는 페테르부르그로 가는 레닌 역이 있고 페테르부르그에는 모스크바로 가는 모스크바 역이 있다. 서로 그렇게 해서 라이벌 관계에 있는 두 도시가 우의를 다지게 하는지도 모른다. 알다시피 페테르부르그는 이름을 우리네 정당처럼 자주 바꿔서 초기에는 혼란스웠다. 비행기로는 한 시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인데 열차로는 밤을 새워 달려야 겨우 이틑날 아침 페테르부르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은 속도가 개선되었겠으나 밤 시간에 느리게 달려가는 열차 시간이 무척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라스꼬리니코프의 도시, 네바강의 도시인 페테르부르그는 모스크바처럼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았다.

 

사람들은 신기한 경관이나 이름난 명승지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나는 여행을 갈 때, 특히 외국여행의 경우 현지에서 새로운 친구나 인물과 만나고 사귀는 것을 여행의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다른 땅에서 다른 언어와 풍속으로 살아온 인간과 만나 서로 대화하고 생각을 교환하는 것, 그것이 '여행의 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원한다고 늘 그게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모스크바는 경황없이 스쳐갔고 페테르부르그에서는 어떻게 될런지...

 


 

 

당시만 해도 라면을 나는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사용되는 재료가 신통치 않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도 들려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라면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런 라면 열 봉지를 김포공항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페테르부르그에 이를 때까지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손에 들고 다녔으니 그 고지식하고 바보스런 행위를 변명할 길이 없다. 평소 나는 책 한 권도 들고 다니는 걸 싫어해 누가 밖에서 자기 저서를 사인해 주는 걸 제일 싫어한다. 그나마 라면은 무게가 적어서 다행이었다.

 

러시아를 가는데 웬 라면? 그 사연은 이렇다. 열 봉지의 라면은 나의 비상식량이었다. 내가 러시아 여행을 떠난다고 하자, 말 많은 아파트의 이웃 아주머니들이 앞 다투어 경고와 조언을 쏟아냈다.

 

"00아빠 러시아 가신대며? 아유 그런데를 지금 왜 가실까? 우리 애 아빠가 그러는데 거긴 지금 식당에 먹을 것도 없고 거리에 굶은 거지들이 우글우글한데요. 쫄쫄 굶으며 여행하지 않으려면 라면이라도 가져가셔야지."

 

"여기 라면 가져가면 거기서는 금값이야. 귀찮더라도 라면 한 상자 꼭 가져가시라고요."

 

러시아를 가면 굶게 된다는 것이 정설처럼 굳어졌다. 집에서도 이왕 갈 거면 구급식량만큼은 반드시 휴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는 수 없이 라면 한 상자를 열 봉지로 타협해서 휴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나는 빵 귀신이다. 모스크바에서 검은 보리빵에 캐비어를 발라서 먹으니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았다. 보리빵은 호텔이고 거리고 먹고 남을 만큼 흔했고 캐비어는 아직 폭등하기 전이라 원하면 충분히 제공되었다. 나의 식성으로 볼 때 휴대한 라면 따위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냥 습관이 되어 그 라면 열 봉지를 버리지도 못하고 페테르부르그까지 들고 갔던 것이다.

 

기차는 페테르부르그의 모스크바역에 아침 일곱 시쯤 도착했다. 허름한 버스 한 대가 역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날씨는 이른 오전이라 조금 쌀쌀했으나 햇빛이 비치는 걸로 보아 그닥 불쾌하지는 않았다. 유난히 요동치는 밤기차에 시달린데다가 수면부족으로 일행들은 몹시 지쳐 있었다. 각자 짐을 들고 버스에 오르자, 사람들은 잠시라도 부족한 수면을 채워보려고 눈을 붙였다.

 

그러나 오래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 누군가가 버스에 올라와서 그날 하루 일정에 관해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었는데 그의 한국말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았던 것이다. 예사롭지 않다는 말보다 차라리 경이로웠다고 하는 게 적절하겠다. 뒤에 나는 이 러시아인의 한국말 어휘가 작가인 나보다도 더 풍부한 것 같다는 농담을 동료들에게 했던 것 같다.

 

눈을 떠봤더니 뜻밖에도 겨우 스무 살 안팎의 홍안의 러시아 청년이 정장을 단정하게 갗춰입고 우리 앞에 서 있었다.

 

페테르부르그 대학 동양어과 2년생인 블라지미르 티호노프가 이 도시 안내자로 우리 앞에 첫 선을 보인 순간이었다.

 

아마 그에게도 한국의 작가 집단과의 이 우연찮은 상면은 대망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는 여름 휴가기간을 이용해 잠시 여행사 일을 돌봐주고 있었다. 그는 훤칠한 키에 깨끗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첫눈에도 그가 착하고 성실한 청년인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일행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유창한 한국말 구사 능력은 보통 외국인이 학습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한계치를 우리가 보기에 훨씬 초과한 것이다. 지나치는 건물, 지형에 대한 그의 해설은 보통 가이드의 해설이라기보다 도시의 역사를 전공한 교수님이 등장해서 한바탕 현장강의를 베푸는 것만큼 자상하고 정확하고 세밀했다. 우리 모두는 이 경이로운 이방의 청년에게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호텔로 찾아가기 위해 버스가 네바강을 지나갈 때 저 멀리 바라보이는 페트로 파블로스크 요새에 대한 설명, 그리고 네바강 한켠에 아직도 떠있는 순양함 오로라 호의 유래와 역사적 의미에 대한 해설을 통해 블라지미르 티호노프의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증명되었다. 그렇다고 본인이 으쓱해지거나 자만하는 것 같은 기색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여행의 혼돈에 잠시 취해있던 우리는 그의 학술적(?)인 해설을 듣고 볼세비키 혁명의 개막을 알리는 오로라호의 축포소리가 당장 환청으로 들리는 것 같아 정신이 번쩍 깨어났다.

 

정말 이 가이드는 모스크바의 그 심통쟁이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르구나.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가이드 한사람이 바뀌었는데 여행의 격조가 이렇게도 달라질 수 있다니! 국가 지도자라는 것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신참 가이드에 너무 정신이 팔린 탓인지 그날 묵게 된 호텔엔 관심도 없었고 지금도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다. 필경 페테르부르그의 3류 호텔일 텐데 다만 모스크바 경우처럼 유녀들이 밤낮으로 출몰하지 않았던 것만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다.

 

블라지미르는 당연히 일행들 사이에서 인기의 중심이 되었다.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 그 경향이 더욱 심했다. 이때부터 일행들은 페테르부르그의 명소나 유적의 유래에 관한 질문보다 엉뚱하게 블라지미르 개인에 대한 질문을 더 많이 퍼부었다.

 

한국말은 어떻게 배웠느냐?

 

대학에서 뭘 전공하느냐?

 

순수 슬라브가 아니면 어떤 계통?

 

서울에 한번 오고 싶지 않은가? 오겠다면 언제쯤?

 

애인은 따로 있는가?

 

이런 질문은 그 도시 일정이 끝날 때까지 멈춰지지 않았다.

 

이 신참 가이드의 입장에서는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게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를 번거롭게 하는 또 다른 일도 있었다. 인기를 끈다는 게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란 걸 알 수 있는 사례다. 그와 함께 사진을 찍겠다는 지망자가 너무 많아서 그는 네바강 다리에서나 여름궁전의 분수에서는 누구와 먼저 사진을 찍어줘야 할지 몰라 몹시 곤혹스런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도 물론 이 멋진 이방의 청년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행동이 굼뜨고 비위가 약한 나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이 청년과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런 기회는 더더욱 포착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여류 작가님들이 항상 그를 독차지하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성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나는 페테르부르그의 그 일정이 다 끝나갈 때까지 블라지미르 티호노프와 다만 십분, 아니 오분이라도 이야기를 나눌만한 시간을 끝내 포착하지 못했다.

 

엉뚱하게 가이드 이야기로 지면을 많이 소모했으나 페테르부르그란 도시에 관해 말을 하자면 사실 끝이 없을 것이다.

 

이 도시 자체가 역사와 문화의 박람회장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인 것이다. 그래도 네브스키 대로의 끝자락 한 모퉁이에 있는 네브스키 사원 얘기는 빠트릴 수가 없다. 네브스키 대로는 도시의 중심도로이고 큰 건물과 여러 가지 상점들, 그리고 푸쉬킨이 결투하러 가기 직전에 들러 마지막 차를 마셨다는 푸쉬킨 카페 건물이 여기에 있다.

 

네브스키 사원은 서울의 파고다 공원 보다 약간 넓은 지역에 조성된 문화예술인들의 유택공원이다. 여기에 도스또에프스끼, 보로딘, 차이꼽스끼, 무소르그스끼, 우화작가인 끄롤로프 등 수많은 예술인들의 유택과 기념비가 모여 있다. 그리고 그 입구에서는 요즘은 모르겠으나 당시에는 주로 러시아 음악을 담은 CD를 파는 노점상인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도스또에프스끼 기념상이 단연 작가들에겐 제일 인기가 있었고 너나없이 증명사진(?)을 찍었다. 나는 장미 한 송이를 사서 따로 차이꼽스끼의 기념비 앞에 바쳤다. 그의 <피아노 삼중주>곡을 비롯, 러시아 풍경을 담은 그의 피아노 소품들 등 그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페테르부르그를 말하면 세계3대 미술관인 에르미따주 미술관, 지상의 천국이라는 여름궁전,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이라는 성 이삭 성당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에르미따주에는 렘브란트와 루벤스의 그림, 피카소와 야수파인 마티스의 그림이 있고 여름궁전은 도심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별천지인데 규모나 짜임새가 프랑스의 베르사이유와 비견해도 못하지 않으며 그것을 모방한 것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모습이 닮아 있었다.

 

거대한 돌기둥 수십 개가 받치고 있는 성 이삭 성당을 보면 대체 이 거대한 돌기둥을 어떻게 세웠는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랍기만 했다. 옆에 서있기만 해도 가슴이 떨릴 정도로 그 돌기둥의 위용은 대단했다.

 

그러나 페테르부르그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간은 역사박물관의 밀랍인형들과 만났던 시간이었다. 그곳에는 러시아 현대사의 주요 인물들의 실물 크기 밀랍인형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는데 실제 인물로 착각할 정도로 제조 기술이 뛰어났다. 블라지미르는 레닌과 트로쯔끼와 지노비에프의 실물대 인형을 앞에 두고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의 초기와 후기 진행과 갈등사에 관해 한차례 강좌를 펼쳤는데 그 시간 자체만으로도 우리가 이 도시에 온 보람은 충분했다 싶을만큼 강좌 내용이 탁월했다. 밀랍인형 전시실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 일행들은 조금 전 들었던 러시아 현대사를 재음미하느라고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었다.

 

 


 

 

북방의 베네치아! 페테르부르그의 매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듯하다. 블라지미르는 네바강의 물빛이 계절 따라 바뀐다고 말했는데 이 말에는 그의 페테르부르그에 대한 남다른 애착심과 자부심이 스며있었다. 페테르부르그는 물론 거저 생긴 도시는 아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운하 사이에 100여 개 섬으로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365개의 다리가 섬과 섬을 연결한다 하니 이 도시 건설에 얼마나 막대한 인력이-더구나 지금처럼 건설장비가 발전되지도 않은 때에-소모되었는지 알만하다. 앞서 얘기한 성 이삭 성당만 하더라도 건축 기간이 40년에 이른다고 한다.

 

페테르부르그에서는 저녁 빈 시간을 이용, 두 차례의 공연 관람을 했다. 한번은 발레 공연장에 가서 갈라 공연을 봤고 한번은 무소르그스키 극장이란 데 가서 가극 <리골레토>를 관람했다. 그런데 내용은 별무신통이었다. 아마 몇 달 전, 적어도 몇 주 전에 좋은 공연을 예약하고 관람을 해야 하는데 갑자가 뜨내기들이 몰려와서 공연을 보겠다고 하니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발레 공연장은 우리들 말고 몰려든 도시 서민들로 어수선했다. 그들은 입장료가 1달러도 되지 않은 반 공짜 손님인데 그들이 이 공연장의 주인들이었다. 정확한 액수가 기억나지 않지만 외국인은 현지인의 오십 배 가량 입장료를 지불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게 러시아 당국의 정책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등 잘 알려진 레퍼토리의 하일라이트를 짜깁기한 이 갈라 공연은 그런대로 러시아 발레의 수준을 보여주긴 했으나 공연장의 소란스런 분위기 탓인지 집중이 되지 않아 별다른 감흥은 느끼지 못했다.

 

오페라가 공연된 무소르그스키 극장은 너무 낡았고 규모도 크지 않았다. 가수들의 가창력도 서울에서 듣던 노래들보다 되레 수준이 떨어질 만큼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러시아의 성악은 남성 저음을 제외하면 의외로 수준이 높지 않다고 늘 느껴왔는데 그걸 현지에서 재확인한 셈이었다.

 

도스또에프스끼, 마지막 날 우리는 페테르부르그의 이 기인에게 하직인사 겸해서 그가 빚에 쪼들리며 말년에 글을 쓰고 살았다는 그의 기념관으로 찾아갔다. 그곳은 주택가의 좁은 골목 사이에 끼어있는 평범한 벽돌 이층 가옥이었다. 입구에 작가의 얼굴을 새긴 동판이 부착되어 있지 않았다면 지금도 주민이 거주하는 평범한 주택으로 보고 지나쳤을 것 같다. 내부라고 별다를 것은 없었다. 모스크바 톨스토이 기념관과는 정말 여러 가지로 대조적이었다. 한번 가난뱅이는 영원한 가난뱅이인가?

 

좁은 계단을 올라가니 그가 사용한 서재 겸 집필실이 나타났는데 세 평, 네 평, 뭐 그쯤 되는 규모였다. 책상과 의자, 밀폐형의 크지 않은 서가가 한개, 주홍색 천이 씌워진 3인형 소파 한개,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방이 막혀있어 그 방은 전망 없는 방이었다. 방의 주인은 글을 쓰다 잠시 쉬면서 바깥을 내어다보고 싶어도 사방이 감옥처럼 벽이어서 한숨만 쉬고 주저앉았으리라. 빚 때문에 전망이 있는 방으로 옮기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니!

 

그 방 책상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나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두개의 촛대와 수십 장의 빈 원고지들, 그리고 한쪽 켠에 놓여있는 몇 권의 낡은 책들을 한동안 바라보며 기인의 체취라도 느껴보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그냥 작가의 궁색한 모습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도스또에프스끼 기념관 밖으로 나와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아주 재미있는 사단이 벌어졌다. 시장바구니를 들고 지나가던 어떤 중년 여성이 갑자기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나와 팔짱을 터억 끼고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하는 것이었다. 때마침 다른 동료들은 카메라를 들고 건물도 찍고 동료들 사진도 찍어주느라고 분주했기 때문에 여인이 나와 포즈를 취하는 순간 누군가가 재빨리 다가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다.

 

그 부근에 거주하는 걸로 생각되는, 밉지 않게 생긴 그 러시아 주부는 한차례 스냅을 찍고 나서 내게 상긋 웃어보이고 자기가 가던 길을 서둘러 걸어갔다. 보면 볼수록 그 사진은 재미있고 드문 장면을 담은 것인데 어느 문학지에서 빌려간 뒤 분실했다면서 돌려주지 않았다. 그 쾌활한 여성은 페테르부르그의 주민들이 인접한 서구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의 다른 지역보다 분방한 사고의 소유자들이란 걸 내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페테르부르그의 일정이 모두 끝나고 모스크바로 돌아갈 때는 다시 밤기차를 이용했다. 블라지미르는 기차역 플랫폼까지 나와서 우리를 전송했다. 이미 주위가 깜깜해졌고 일행들이 객차로 먼저 들어가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둘렀기 때문에 분위기가 몹시 어수선했다. 대부분 짐들이 많아서 각자 짐을 객차로 옮기느라고 다른 데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젊은 여행 안내자와 품위 있는 작별이 이뤄질 상황이 아니었다. 블라지미르는 혼자 플랫폼에 서서 이미 객차 속으로 사라진 얼굴들을 차창을 통해서나마 찾아보려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제 겨우 내가 그의 옆으로 다가갈 틈이 생긴 것이다. 나는 이 청년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며칠간의 성실한 봉사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봐요, 블라지미르. 다음에 내가 이 도시에 왔을 때 그때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오세요. 물론 만날 수 있고말고요. 저는 환영합니다."

 

"그렇지만 내 얼굴도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텐데. 그런 사람 모른다고 하면 어쩌지요?"

 

"아이, 그럴 리가 있겠어요. 분명히 기억합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나하고 친구가 되는 거요. 지금 이 시간부터. 그렇게 하면 적어도 잊어버릴 걱정은 없겠지."

 

"좋아요. 친구가 되는 건 영광입니다."

 

뜬금없는 언약을 맺고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이 정도로 작별인사는 한 셈이었다. 그러나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그때 나는 속물적인 나쁜 습관의 유혹을 받았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져 손에 잡히는 지폐를 꺼냈다. 50달러짜리였다.

 

누가 볼까봐 등을 돌리고 서서 나는 그 미화 50달러를 블라지미르에게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왜 저에게..."

 

"받아둬요. 그냥 떠나기가 서운해서..."

 

"받지 않겠어요. 방금 친구라고 하셨는데 이러시면 안됩니다."

 

블라지미르는 다소 쌀쌀맞게 나를 꾸짖었다. 온건하고 예의바른 말투였으나 사실상 나를 꾸짖은 것이다.

 

50달러라면 당시 내가 소지한 금액에 비추어 적은 돈은 아니다. 이태 뒤에 내가 페테르부르그를 다시 찾았을 때 그때 페테르부르그의 일급호텔인 쁘리발티가 호텔 한국식당의 러시아 종업원 월급이 50불이었다. 하긴 뭐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월급도 그 무렵에는 100달러가 채 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비록 속물근성이긴 하지만 나로서는 큰 맘 먹고 지폐를 건넸는데 그만 퇴짜를 맞았다는 얘기다.

 

하는 수 없이 지폐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은 나는 그렇다고 그대로 돌아설 수도 없어서 얼떨결에 내가 여전히 한 손에 굳건하게 들고 있던 라면 열 봉지 꾸러미를 블라지미르에게 내밀었다. 나는 이건 내가 비상식량으로 가져온 한국 라면이라고 밝혔다. 

 

천만다행히도 블라지미르가 이번에는 선뜻 라면 꾸러미를 받았다.

 

"저도 한국 라면을 좋아합니다."

 

싸늘하게 식을 뻔했던 둘 사이가 금방 복구되었다. 기차가 경적을 울렸기 때문에 나는 블라지미르에게 손을 흔들고 황급히 객차로 뛰어 들어갔다.

 

그때 밤 기차역에서 어설프게 맺은 친구의 언약은 결과적으로 나보다는 블라지미르 티호노프에게 더욱 큰 의미로 작용하게 된 것 같다. 열흘 동안 줄기차게 들고 다니던 라면 열 봉지가 비로소 제 주인을 찾았다는 것도 무척 다행스런 일이었다. 때로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사람도 마음만 먹으면 남을 크게 돕게 된다. 신이 그를 도와주기 때문이다. 어떤 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나톨리 김은 사람의 만남도 신의 섭리가 작용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좀 다른 얘기지만 내가 가브리노의 그의 다차에 머물 때 그는 내게 종교를 물었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 신자이다.

 

내가 종교가 없다고 말하자, 조금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그러면 당신과 내가 이리 만난 게 누구의 조화라고 생각하오?"

 

그 말에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내가 라면 열 봉지를 끝까지 들고 다니다가 마지막 순간에 서로 친구가 되자고 약속한 블라지미르에게 그것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신의 힘이 작용한 게 아닐까. 그게 없이 그냥 50달러 거절로만 끝났다면 서로 기분이 상해서 방금 맺은 '친구' 언약은 없던 일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거절당하는 순간 수치심으로 내 등골이 오싹했으니까.

 

블라지미르가 서울에 나타난 것은 작가 일행의 러시아 여행 이후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다. 그의 서울 출현은 뜻밖이었다. 이른 여름 저녁 나는 그의 전화를 받았는데 처음 페테르부르그에서 걸려온 전화인줄 알았다.

 

 


 

 

'블라지미르가 설마 서울에? 이렇게도 빨리?'

 

"거기 어디요? 페테르부르그?"

 

"아닙니다. 서울에 왔어요. 지금 제기동의 A아파트에 있어요."

 

블라지미르는 한국을 찾는 페테르부르그 지역 기업인들과 연결이 되어 통역 겸 안내자로 갑자기 서울에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실은 3일 전 서울에 왔는데요. 그동안 동행자들 일을 돕느라고 바빴어요. 겨우 오늘에야 시간이 났습니다."

 

"서울에서 언제 떠나지요?"

 

"내일 갑니다. 여기 일정 모두 끝났어요."

 

"그럼 어떡하지? 친구 얼굴은 봐야 할 텐데. 시간이 조금 늦었지만"

 

"저도 뵙고 싶어요. 선생님 댁으로 지금 찾아가면 안될까요?"

 

"그거야 환영이죠. 근데 여길 찾아올 수 있겠소?"

 

"저는 찾아갈 수 있습니다. 위치만 가르쳐주세요."

 

블라지미르에게 집 위치를 가르쳐 주고 전화를 끊었다. 마치 오랜만에 연인과 통화한 사람처럼 가슴이 쿵당쿵당 뛰었다.

 

어수선한 밤 기차역에서 스쳐가듯 겨우 말 몇 마디 나눈 사람을 잊지 않고 찾아주는 그가 고마웠다. 그가 올 때쯤 나는 미리 아파트 마당으로 나가서 그를 기다렸다. 낮에는 무더웠으나 저녁이 되어 제법 선선했다. 밤 기차역에서 문득 던진 한마디 말이 씨앗이 되어 이방의 청년이 나의 처소까지 찾아온다는 것이 신기했다. 친구로 사귀자는 제안을 내가 했지만 그 여행 이후 나는 약속에 뒤따르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전화 한번 걸지 않았고 엽서 한 장 보내지도 않았다.

 

키가 큰 남자가 아파트 정문 쪽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데 나는 블라지미르를 첫눈에 알아봤다. 몹시 반가웠다. 그를 집으로 안내해서 미리 준비해둔 저녁식탁에 마주 앉았다. 며칠 동안 과로한 탓인지 얼굴은 조금 수척했지만 페테르부르그에서 보던 때보다 표정은 쾌활하고 밝았다. 그는 시간이 많지 않아 식사만 끝나면 바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식탁에 특별히 마련된 메뉴는 없고 평소 식단 그대로였다. 블라지미르는 된장국과 김치를 맛있게 먹었는데 한국음식을 먹는 모습이 그다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그를 처음 본 아내가 어떻게 한국말을 그렇게 잘 할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블라지미르가 재미있는 답변을 했다.

 

"우리 교수님께서 외국어를 잘하고 싶으면 그 나라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하셨어요."

 

그는 웃지도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나! 좋아하는 한국 여성이 있겠네요."

 

"있어요."

 

"그 여성 어디 있죠?"

 

"피앙세는 이번에 저와 함께 와서 지금 언니 집에 머물고 있어요. 내일 함께 떠납니다."

 

러시아는 이십 세 전후가 되면 결혼들을 한다. 한국에 비하면 대단한 조혼인 셈이나 그들은 성인이 되었으니 결혼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블라지미르의 피앙세가 페테르부르그 컨서바토리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는 한국 여성인 것을 그때 알았다. 시간이 없어 식사가 끝나자 말자, 블라지미르는 일어섰다. 나는 그를 버스정류장까지 나가서 배웅했다. 버스가 도착했고 그가 버스에 오를 때 나는 제법 큰 소리로 말했다.

 

"다음에는 페테르부르그에서 만납시다."

 

이때만 해도 내게 러시아 여행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떠나는 블라지미르를 향해 그렇게 말한 것은 '막연한 희망사항'을 피력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운이 좋았다 할까. 블라지미르가 다녀간 뒤 이년 쯤 지나 동창모임에 나갔다가 러시아정치 전공인 박 교수로부터 아주 반가운 제안을 받았다.

 

"방학 기간에 제가 러시아에 다녀올까 하는데요. 선배님도 생각이 있으시다면 저와 함께 가시죠. 모스크바 체재 기간에는 상사 주재원으로 있는 제자 집에 머물기로 되어 따로 체재 비용은 필요 없습니다만."

 

물실호기라는 게 바로 이런 경우다. 나는 박 교수 일정에 맞추어 당장 여행수속을 밟았다.

 

1995년도에 있었던 이 러시아 여행은 여러 가지로 내게는 홀가분하고 즐거운 여행이었다.

 

꾼쩨바(꾼쩹스까야)는 모스크바 시내에서 삼십분 쯤 지하철을 타고 가면 나타나는 전원풍의 마을이다. 여기에 박 교수의 제자인 정 사장(기업 지사장을 이렇게 불렀다)의 그 풍치 좋은 아파트가 있었다. 중산층이 거주하는 타워형의 독립 아파트인데 2층에서 보면 앵두만한 빨간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라비냐 나무 가지들이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창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저녁에 전등을 켜면 불빛에 비친 그 열매들은 루비처럼 황홀하게 빛을 뿜었다.

 

하루 일과를 끝내면 집주인과 박 교수와 나, 세 사람은 거실 탁자에 보드카 잔을 놓고 그날 있었던 일을 소재삼아 담소를 나누곤 했다. 정 사장은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박 교수는 주로 무슨 학회를 찾아가서 만났던 저명한 석학 얘기, 유난히 퉁명스럽게 자기를 대했다는 그곳 여직원 얘기 등을 늘어놓았다. 나는 하루는 박 교수와 동행하고 하루는 혼자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는 식으로 며칠을 소일했다.

 

꾼쩨바에서는 모스크바 강이 가까왔다. 마을 사람들이 오후에는 그 강기슭으로 산책들을 나갔는데 집에서 숲길을 십오 분쯤 부지런히 걸어가면 강기슭이 나타났다. 한번은 용기를 내어 혼자 그곳으로 산책을 나갔는데 개와 인간과 관련된 아주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하고 오랫동안 그 문제에 관해 골돌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동양이건 서구이건 사람들이 개와 친한 건 공통사항이지만 러시아인들만큼 개와 가까이 지내는 국민이 이 지구위에 또 있을까? 산책을 나가보면 한 사람이건, 혹은 가족 세 사람이 짝을 이루었건 사람만 산책 나온 경우는 볼 수가 없었다. 누구나 개와 함께 동행인 것이다. 그런데 그 개들이 주인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빼닮았던 것이다. 하나의 예외도 없이.

 

늘씬한 각선미와 미모를 뽐내는 아가씨가 개를 끌고 앞에서 다가오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길을 가다 가끔 정신이 아뜩할 정도로 귀신처럼 아름다운 여성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그 멋장이 아가씨가 동반한 개는 족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하이얀 털에 귀와 코, 목 언저리에만 마치 일부러 몸치장을 위해 꾸민 듯이 약간의 갈색 털이 돋아난 대단한 미모(?)의 견공이었다. 키도 컸고 체형도 늘씬했으며 내가 그렇게 봐서 그런지 제 주인만큼이나 도도하고 의젓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개의 목줄을 잡고 미친 듯이 뛰어오는 장년의 사내가 있었다. 후줄근한 셔츠의 앞가슴이 열려있는데 가슴팍 털이 짐승의 그것처럼 무성했다. 그는 얼굴이 시뻘겋고 아직도 술에서 덜 깨어난 사람처럼 무거운 체중을 옮기느라고 기우뚱거렸다. 그렇지만 개의 목줄만은 굳건하게 손에 쥐고 놓치지 않았다. 그 사내보다 한 두어 걸음 앞에서 뛰고 있는 개는 주인의 큰 체격을 닮아 송아지만큼 몸집이 컸다. 색깔도 황소색깔이었다. 그 개의 귀는 바나나 나무 잎새처럼 크고 널찍했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제 주인의 눈을 덮어버려서 개가 앞으로 다가올 때는 흡사 가면을 쓴 괴물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세 번째 마주친 견공은 한마디로 노신사였다. 적당한 몸집을 지녔는데 눈빛에는 사나운 기색 따위는 찾아볼 수 없고 온화하고 품위 있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움직였다. 물론 이 견공을 이끌고 있는 주인 역시 온화하고 인품이 있어 뵈는 노신사였다. 그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주변 풍경을 십분 음미해가면서 숲길을 걸어갔다.

 

"꼭 거길 가셔야겠습니까? 웬만하면 저희 집에 눌러 계시지요. 페테르부르그는 지금 치안도 엉망입니다."

 

주인 정 사장은 내가 페테르부르그로 혼자 가겠다고 하자, 극구 반대했다.

 

"혹 저희 집이 불편해 자리를 옮기고 싶어 그러시는지요? 제가 신경쓰려고 노력은 하지만 아무래도 집사람이 없으니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이 집의 주부는 방학을 맞아 애들을 데리고 서울로 가서 친정에 머물고 있었다.

 

"불편이라니, 그건 말도 안 돼요. 내가 여기서 얼마나 즐겁게 지냈는지 박 교수도 알지 않소."

 

나는 손사래를 쳤다.

 

"다만 여기까지 온 김에 친구를 만나보겠다는 생각뿐이라오. 이해해주시오."

 

자기의 내일 일정을 메모지에 적고 있던 박교수가 메모지에서 눈을 떼고 두 사람을 바라봤다.

 

"선배님이 자넬 매일 칭찬한 건 사실이야. 꾼쩨바도 무척 맘에 들어하시고. 그런데 그 친구 아직 학생이죠? 졸업했다고 하셨나요? 그거야 어쨌건 아직 새파란 청년인데 선배님 친구라고 할 수 있나요? 뭣하시면 여기서 전화라도 한통 걸어주시죠. 모스끄바에 와서 잘 지내신다고. 만나는 건 다음 기회로 미루시고."

 

"친구의 개념에 관해 새삼 논쟁할 생각은 없소. 전화나 하려고 했으면 벌써 내가 했지. 여행을 자주 다니는 박 교수와 나는 처지가 달라요. 내게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다오."

 

보드카를 몇 잔째 기울이며 세 사람이 실랑이를 했지만 나는 끝내 고집을 꺽지 않았다.

 

"할 수 없군요. 기왕에 가시기로 결정하셨다면 안전에나 신경을 써드릴 수밖에요."

 

내가 꿈쩍도 하지 않자, 드디어 정 사장이 먼저 손을 들었다. 박 교수도 말리기를 단념했는지 더 말이 없었다.

 

"발로자, 아니, 블라지미르라고 하셨나요? 그쪽 전화번호 갖고 계십니까? 갖고 계시면 저를 주십시오."

 

정 사장이 전화기를 앞으로 끌어당기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뭐하게요?"

 

“아니, 참 선배님도. 본인이 거기 있는지 없는지 확인도 안 해보시고 그냥 무작정 가실 겁니까? 지금 그 친구가 거기 있다는 보장도 없지 않나요?"

 

박 교수가 내게 핀잔을 주었다. 나는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꺼내 정 사장에게 건넸다.

 

 


 

 

정 사장은 한참 동안 저쪽과 러시아말로 통화를 했는데 상대가 블라지미르 본인은 아닌듯 했다. 전화에 시간이 꽤 걸렸다.

 

"아버지인데 지금 아들은 다른 곳에 있답니다. 페테르부르그에 있긴 있군요. 아들 연락처를 첨에 가르쳐주지 않으려고 해서 설명하느라고 애먹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연락처로 정 사장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그가 한국말로 통화를 했는데 전화는 금방 끝났다.

 

"웬 한국 여성이 전화를 받네요. 아주 젊은 여성인 것 같은데. 어찌된 겁니까? 그 친구는 저녁 먹고 산책 나갔는데 곧 들어온답니다."

 

"그 친구 피앙세일 거요. 집을 나와 거기서 생활하나 봅니다."

 

피앙세란 블라지미르가 자기 연인을 말할 때 쓴 말인데 얼떨결에 내 입에서도 그런 호칭이 튀어나왔다.

 

"국내선 비행기로 가셔야지요. 그게 안전하고 편합니다."

 

정 사장이 공항까지 나를 자기 차로 배웅하겠다고 말했다.

 

"지난번에 기차는 탔으니 이번엔 비행기를 타볼까."

 

"그게 몇 년도였죠?"

 

"92년도. 쿠데타가 일어나서 의사당에 대포를 쏘고 옐친이 탱크 위에서 연설했던 직후였소. 미처 수리하지 못한 의사당의 깨진 유리창도 봤으니까."

 

"아이쿠, 그때라면 혼자 밤기차를 타는 건 완전히 몸을 도둑에게 내맡기는 거나 같았을 텐데요. 혼자가 아니었겠죠?"

 

"단체여행이었소."

 

이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블라지미르가 산책에서 돌아온 모양이었다. 정 사장이 송수화기를 내게 건네며 "끊지 마시고 제게 돌리세요."라고 말했다.

 

“정말 반갑습니다. 너무 반갑습니다."

 

귀에 익은 블라지미르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나도 발로자 목소리 들으니 기뻐요. 우리 내일 만납시다."

 

"저도 빨리 뵙고 싶어요. 내일 몇 시에 오십니까?"

 

"시간은 모르겠고, 내 옆에 있는 분이 알려줄 거요. 이년만인가? 그렇지요?"

 

"맞습니다. 정확하게는 이년반이 됩니다."

 

나는 안부조차 생략하고 송수화기를 정 사장에게 돌렸다. 정 사장은 세밀하고 꼼꼼했다. 블라지미르와 의논해서 금방 호텔을 정하고 비행기 출발시간과 도착시간을 그쪽에 알려줬다.

 

"쁘리발찌스까 호텔에 예약해 놓으라고 말해뒀어요. 미리 예약하지 않았다가 큰 낭패 당할 경우도 있거든요."

 

"그 호텔 안전한 곳인가?"

 

박 교수가 제자에게 물었다.

 

"그 친구가 추천했으니 걱정없을 겁니다. 저도 두어 번 묵었던 곳이에요.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발틱 해가 바로 앞에 보이죠. 이 친구 숙소에서 아주 가깝다니 잘 된 거지요. 그런데 블라지미르라는 이 젊은 친구, 한국말을 어디서 배웠죠? 아주 정확한 우리말을 구사하는데요."

 

정 사장이 무척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2년 만에 다시 찾은 페테르부르그는 모스크바와는 달리 전보다 더 도시 분위기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블라지미르도 얼굴이 마르고 표정도 밝지 못했으며 조금 지친 듯 보였다. 느지막한 오후 내가 뿔까보 공항에 도착해서 밖으로 나갔을 때 블라지미르는 출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혼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석양을 등지고 서있는 그 모습이 왠지 몹시 쓸쓸해 보였다. 내가 다가가자, 그제서야 그가 활짝 웃었다. 우리는 반갑게 손을 맞잡았다.

 

호텔까지 길이 멀었다.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해서 우리는 호텔에 도착했다.

 

한적한 바닷가에 자리 잡은 호텔은 마음에 들었다. 방은 6층인데 후면의 창을 통해 발틱해가 눈앞에 전개되는 전망이 좋은 방이었다. 벌써 밤이 되어 바닷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개를 끌고 바닷가를 산책하는 근처 주민들과 호텔에서 그쪽으로 산책나간 외국인들 모습이 드문드문 보였다.

 

"참 저녁 식사를 어떻게 하시죠?"

 

깜박 잊고 있었던 듯 블라지미르가 낭패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경기가 안 좋아서 호텔 식당도 지금쯤 문을 닫았을 겁니다. 8층에 한국식당이 새로 문을 열었다는 얘긴 들었는데 제가 프런트에 알아보죠."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본 블라지미르가 고개를 흔들었다.

 

"문을 열긴 했는데 지금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군요. 지하에 나이트 바가 한 곳 있는데 거기라도 가보시죠."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어두운 복도를 돌아가자, 큰 홀이 나타났다. 홀에는 객석이 있고 무대가 있었다. 객석은 텅 비어있고 무대 위에서 남자 몇 사람이 전기 기타와 콘트라베이스와 색소폰을 각자 들고 의자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 영업시간 전이었다. 이런 곳에서 술이라면 모를까, 저녁식사를 찾는다는 것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졌다. 내가 그만 돌아가자고 말했으나 블라지미르는 무대 위로 혼자 올라갔다. 그들과 잠시 얘기한 뒤 그가 돌아와서 말했다.

 

"여기서 부족하나마 간단하게 식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식 식사는 안 되고 자기네 먹는 음식을 조금 나눠주겠다는데요."

 

"아는 친구들이오?"

 

"오늘 처음 봤습니다."

 

"뭐라고 말했기에 그런 호의를 베풀지요?"

 

"사실대로 얘기했어요. 멀리서 친구가 찾아왔다고요."

 

잠시 후 젊은 남자가 빵과 샐러드와 약간의 캐비아를 담은 접시 하나를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들 덕에 뜻밖의 장소에서 제법 그럴싸한 저녁을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 내가 값을 치르겠다고 하자, 색소폰을 들고 있는 남자가 손을 저으며 블라지미르에게 "당신 친구를 우리도 환영한다."고 말했다. 물론 블라지미르가 즉석 통역을 해줘서 나도 그 친절한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호텔은 독일인 여행자들로 북적거렸다. 대부분 단체로 온 사람들인데 일정을 끝내고 떠나려고 짐을 끌어내는 사람들과 어제 막 도착해서 하루 일정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한데 뒤섞여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독일말 발음은 억양의 강세가 심해서 두 세 사람만 모여 얘길 해도 로비 전체가 찌렁찌렁 울렸다.

 

이 호텔에 독일 여행자들이 많이 몰려오는 이유가 있었다. 블라지미르의 설명에 의하면 이 독일인들은 대부분 전에 이 지방에서 대를 이어 거주하던 사람들로 사회주의 기간 중 본의 아니게 본국으로 추방되었다가 이제 문이 열리자, 그리던 옛 고향을 찾아오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행자 대부분이 노년층 일색이었다.

 

나는 로비에서 아침에 오기로 한 블라지미르를 기다렸다. 그가 좀 늦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호텔 정문 밖에서 옥신각신 다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가보니 블라지미르가 현관을 지키는 경비원과 얼굴을 붉히며 다투고 있었다.

 

현관에는 무전기를 든 경비원 두셋이 언제나 지키고 있는데 그들은 주로 러시아인들의 출입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제야 경비원이 옆으로 물러났다.

 

"무슨 일로 그러죠?"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어제도 왔고 친구가 있다고 말해도 막무가내에요. 친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겁니다."

 

블라지미르가 몹시 기분이 상했는지 분노어린 눈길로 경비원을 쏘아봤다. 그는 어제와 달리 말쑥한 정장 차림이었다.

 

수염도 깨끗이 밀었고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찾아온 친구의 기분을 위해 특별히 자기를 꾸미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햇빛이 밝았고 산책하기에 아주 좋은 날씨였다. 블라지미르는 내가 못 본 명소를 안내하겠다고 말했으나 나는 그보다 페테르부르그에 왔으니 네브스키 사원에 가서 방문인사를 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장미 두 송이를 사서 하나는 도스또에프스끼에게, 하나는 차이꼽스끼 앞에 바쳤다. 페테르부르그에 왔다는 인사를 치른 셈이었다. 공원 안을 천천히 거닐다가 어떤 조그만 반신 석상 앞에서 블라지미르가 걸음을 멈췄다.

 

"이 사람은 우화작가 끄롤로프인데요. 어릴 때 학교에서 끄롤로프의 <양과 늑대>라는 우화를 배웠던 생각이 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 우화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에요."

 

"어떤 얘긴데요?"

 

"간단히 말하면 힘있는 자는 죄가 없고 힘없는 자는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긴 조금씩 차이가 날 뿐 어떤 나라에나 있겠지만 우리 러시아에는 아주 적절한 얘기입니다. 양과 늑대가 어느 날 물을 마시러 냇가로 나갔어요. 늑대는 위에서, 양은 아래에서 물을 마시는데 늑대는 사실 양을 잡아먹고 싶었어요. 그래서 늑대가 양에게 말했어요.

 

-너 때문에 내가 마실 물이 흐려졌다. 그러니 나는 너를 잡아먹겠다.-

 

양이 말하기를

 

-나는 아래에 있는데 어떻게 물을 흐릴 수가 있는가? - 이렇게 항변했죠.

 

그랬더니 늑대가 뭐라 한줄 아십니까?

 

-너의 죄는 나만큼 힘이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당시나 지금이나 이 우화는 우리 러시아 사회에서 진실로 통하고 있어요."

 

블라지미르는 기회 있을 때마다 폭력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끄롤로프 반신상 앞에서 걸음을 멈춘 것도 다만 우연이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네브스키 사원을 나와 골목을 조금 걷다가 사람들 왕래가 잦은 큰 길이 나왔는데 그다지 넓지 않은 광장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우리는 그들 옆으로 다가갔다. 광장 가운데 레닌의 자그마한 흉상이 서있고 사람들은 그 흉상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그들은 붉은 바탕에 검정색과 흰색으로 글씨를 쓴 플래카드를 흉상 주변에 걸어놓기도 했고 비슷한 깃발을 손에 들고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붉은색 완장을 팔에 두르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노인들이었고 차림새도 초라했다.

 

 


 

 

한 남자가 레닌 동상 앞에 서서 핸드마이크를 들고 연설하고 있었는데 분위기는 조용하고 차분한 편이었다.

 

"이 사람이 지금 뭐라고 하나요?'

 

블라지미르는 들어줄 가치도 없다는 듯 비웃는 표정으로 그 남자를 바라봤다.

 

"물가가 살인적으로 상승했기 때문에 옐찐은 책임을 지고 안나 까레니나처럼 열차 앞으로 달려가서 자살하라는 겁니다. 옐찐은 지난번 선거할 때 만약 물가를 못 잡으면 열차와 충돌해서 자살하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저 플래카드엔 뭐라고 씌어있죠?"

 

"형편없는 깡패 옐찐을 재판에 부치자, 미국놈들은 러시아에서 손을 떼라, 사회주의는 최고의 가치다, 뭐 이런 내용들이죠. 이 사람들은 대부분 연금으로 살아가는 노인들인데 살기가 어려워지니까 소련시절에 향수를 갖고 있죠."

 

"공산당 시절 좋은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많겠군."

 

"대부분 그렇습니다. 옛날에 영화를 누렸던 사람들이죠."

 

"늙고 가난해지니 공산당원도 아주 무기력해 보이는군. 내가 어릴 때 한국에서는 공산당원이 아주 무서운 존재였소."

 

"그땐 러시아도 마찬가지죠. 지금은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레닌 동상 앞을 떠나 여러 개의 붉은 벽돌 건물이 모여 있는 지역을 거쳐서 다시 큰길로 나갔는데 그 붉은 벽돌건물들이 전에 대포를 만들던 공장이었다고 블라지미르가 알려줬다. 큰길에서는 뜻밖에도 자유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많은 여인들이 길가 인도에 수백 미터나 될 정도로 길게 줄지어 서서 물건을 팔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전문 장사꾼이 아니고 가정주부나 그들의 자녀들인데 파는 상품은 집에서 사용하던 중고품으로 털 스웨터, 행주치마, 구두, 탁상시계, 집에서 손으로 만든 여러 가지 수예품 등 가짓수가 다양했다. 그들 가운데 공장에서 생산한 값싼 생활용품을 좌판에 늘어놓고 파는 진짜 장사치도 섞여 있었다.

 

우리는 겨우 한 사람이 지날 수 있는 비좁은 틈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그때 겨우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인형 하나를 내 앞에 불쑥 내미는 바람에 나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것은 고양이였는데 재료가 썩 좋지 않았고 형태도 조잡해서 고양이인지 강아지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내가 얼마냐고 묻자, 소녀가 손가락 두 개를 펴서 보여줬다. 나는 누가 볼까봐 재빨리 2달러를 아이에게 건네주고 고양이를 냉큼 건네받았다. 블라지미르는 저만치 앞에서 걷고 있었다. 인파 속에서 거의 빠져나왔을 때 나는 블라지미르에게 말했다.

 

"발로자, 내가 방금 이걸 샀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용도가 떠오르지를 않는군.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고. 어떻게 하면 좋지요?"

 

"저 주세요. 피앙세에게 가져다주겠어요. 좋아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요."

 

블라지미르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내 손에서 고양이 인형을 받아갔다.

 

벌써 한낮이 되어 우리는 뒷골목 싸구려 식당을 찾아갔다. 러시아식으로 간단한 점심식사가 나왔는데 보리빵과 여러 가지 야채를 넣은 붉은 국이 주요 메뉴였다. 보르시라는 이 국은 국물이 빨간 게 특징인데 보기에 맛있을 것 같았지만 매우 짜고 내 식성에는 맞지 않았다. 블라지미르는 보르시와 보리빵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 바람에 덩달아 나도 내 몫을 먹느라고 무진 애를 먹었다.

 

점심 뒤 우리는 네브스끼 대로로 나가서 옷가게나 악기점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책을 쌓아놓고 파는 거리 행상 앞에서 잠시 책을 뒤적여보기도 했다. 거리 한쪽 모퉁이에 터를 잡고 야외전시장처럼 그림을 전시하는 곳이 있었다. 여러 명의 화가들이 무리로 한곳에 모여 빠리의 몽마르뜨르처럼 행인들을 상대로 그림을 그려주거나 전시된 그림을 파는 곳이었다. 그림들은 분방하고 자유로운 추상화부터 극사실화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웠다.

 

내가 잠시 그림을 살펴보는 사이 블라지미르는 화가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더니 머리가 더부룩하고 턱수염을 기른 어떤 남자의 어깨를 손으로 가볍게 쳤다. 그 남자는 순수 슬라브 혈통이 아닌, 따따르 계통이거나 터어키 계통의 소수민족 출신이었다. 술병을 가운데 놓고 동료들과 맨바닥에 둘러앉아 얘기하고 있던 그 남자가 뒤돌아보더니 싱긋 웃으며 블라지미르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그 남자의 티 없는 웃음이 인상적이었다. 친구 사이인가? 나는 화가와 블라지미르가 다정하게 얘기 나누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잠시 후 블라지미르가 내게 와서 말했다.

 

"빠샤(바실리의 애칭)는 옛날 친척입니다. 한동안 볼 수 없었는데 몇 달만에 만났어요. 그동안 몸이 아파서 나오지 못했다고 하는군요."

 

"옛날 친척이면 지금은 친척이 아니란 얘기요?"

 

"빠샤는 제 누이동생 남편이었는데 지금은 헤어졌으니까 친척이 아니죠."

 

"그렇게 큰 누이가 있었나요?"

 

"우리는 남매 둘입니다. 누이동생은 열여덟 살에 결혼했어요. 지금은 부모님과 함께 있는데 곧 핀란드 사람하고 결혼할 겁니다."

 

누이와 헤어진 남자와 여전히 다정한 친구처럼 재회하는 블라지미르의 스스럼없는 태도가 부러웠다. 그는 지금도 빠샤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빠샤는 술을 너무 좋아하는 게 흠이지만 페테르부르그 미술학교에서는 천재로 알려졌던 재주꾼이었다고 한다.

 

빠샤가 그린 그림 두 점을 봤는데 하나는 무슨 벌레 같은 것들이 난무하는 요란한 추상화였고 하나는 작은 화폭에 마늘과 사과를 대비시켜 그려놓은 극사실화였다. 두 그림이 너무 대조적이어서 한 사람의 그림으로 믿어지지 않았다.

 

"빠샤가 선생님 얼굴을 그려주겠대요. 물론 돈은 받지 않습니다."

 

빠샤가 호의가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블라지미르의 친구니까 그 정도 호의는 베풀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갑작스런 제안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나는 블라지미르에게 고맙지만 사양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거리에 저녁 어둠이 덮이기 시작했다. 블라지미르는 대리석으로 지은 어느 현대식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일층에 넓은 홀이 있고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드나들었다. 블라지미르가 안내창구로 가서 어떤 중년여자 직원과 얘기하는 동안 나는 대기석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블라지미르는 꽤 오래 그 여성 직원과 얘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그 건물에서 나올 때쯤 나는 겨우 그곳이 여행사 사무소란 걸 알았다. 나는 블라지미르에게 외국으로 나갈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고 그는 사실은 며칠 뒤 영국으로 떠날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영국에는 무슨 일로?"

 

"그쪽 대학에 아는 분이 있어서 전부터 연락을 해왔어요. 거기서 일자리를 얻어볼까 하구요."

 

"너무 성급하게 서두르는 건 아닌가요?"

 

"시간이 많지 않아요. 군대에 가게 될지 몰라요. 러시아 군대, 지금 입대하는 건 자살 행위나 같습니다. 불과 몇 주 훈련 마치고 체쩬으로 보내질 거에요. 저는 그런 미친 전쟁에 나가서 개죽음 당하고 싶지 않아요. 요행히 체쩬에서 빠진다고 해도 군대 폭력 때문에 복무기간을 무사히 마치고 나온다고 장담 못해요."

 

"외국에 나가면 문제가 해결되나요?"

 

"외국에서 직업 얻으면 일단 소집은 미룰 수 있습니다. 여기 청년들이 다 군대 나가는 줄 아십니까? 군대 가는 사람들은 시골 청년들, 돈도 없고 힘도 없는 사람들뿐이에요. 돈이 있거나 조금 그럴듯한 배경만 있으면 모두 빠져요."

 

“나는 블라지미르가 여기 대학에 남아 있기를 기대했는데. 그래야 내가 다음에 또 페테르부르그에 올 수 있지.”

 

"저도 그러길 바라죠. 그런데 소집영장 아니어도 당분간 그걸 기대할 수 없을 겁니다. 교수님이 저를 환영하지 않아요."

 

"왜요? 전에 학과 여교수님이 발로자를 수제자로 키운다고 말하지 않았소?"

 

"상황이 바뀌었어요. 저에게 배반감을 느끼나 봐요."

 

"배반감이라니, 이해가 안되는데요."

 

"외국 사람과 결혼하려고 하는 것 때문이죠."

 

"그 분은 나이가 아주 많으시다고 들었는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분이 여성이라 그러는 게 아니고 페테르부르그 분위기, 특히 대학이나 여기 남아있는 지식인들은 외국으로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을 굉장히 미워합니다. 외국인과 사귀는 것조차 싫어해요. 그동안 무척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갔으니까요. 교수님은 저 녀석도 결국 나갈 녀석이고 키워봤자, 헛수고라고 생각하신 겁니다. 그런데 교수님이 저를 배척하기 전까지 저는 한 번도 페테르부르그를 떠난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어요. 피앙세랑 결혼하더라도 우리는 여기 남아 살려고 했고 피앙세도 이곳을 좋아하고 사랑하니까 그러겠다고 맹세했어요. 교수님의 오해를 풀어드리려고 피앙세랑 몇 번이나 교수님을 찾아갔는데 만나주지 않았어요. 정말 지독하게 완고하신 분입니다."

 

결국 블라지미르도 이방인과의 결혼의 댓가를 치르는 셈인가. 그건 내게 매우 뜻밖의 사태였다. 러시아 같은 다민족 사회에서, 그것도 대학에서 이런 일이 있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것도 슬라브 정신의 정통성을 고집하는 페테르부르그의 자존심의 표현일지 모른다. 블라지미르는 대학 동양학부에서 가장 촉망받는 인재였다. 그는 당연히 그 대학에서 뿌리를 내릴 줄만 알았다. 블라지미르도 거기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가 대학에서 사실상 거부되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 가장 아픈 치명상이었다.

 

뿔까보 공항에서 몇 해만에 블라지미르를 만났을 때 나는 막연히 그의 신변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 거라는 예감을 가졌다. 그 예감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블라지미르는 지금 페테르부르그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가 전처럼 침착하지 못하고 어딘지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이유를 나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호텔로 돌아와 헤어질 때 나는 불라지미르에게 내일은 와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자기 문제로 심사가 복잡한 그가 잠시나마 내게 얽매이는 걸 나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굳이 오겠다고 고집하다가 내가 혼자 있는 시간도 좋을 것 같다고 말하자, 고집을 꺽었다.

 

"그렇지만 방으로 전화는 자주 걸 께요."

 

"그야 물론. 서로 연락은 해야지요."

 

블라지미르는 돌아서서 피앙세가 기다리는 아파트 쪽으로 빨리 걸어갔다. 이미 밤이 되었는데 그가 가고 있는 아파트 부근에는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호텔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저녁에는 새로 문을 열었다는 8층의 한국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젊은 러시아인 남녀 종업원들이 손님들 시중을 드느라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발음이 서툴지만 간단한 인사말도 한국말로 할 줄 알았다. 사십대 한국 남성이 카운터에 앉아 러시아인 종업원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있었는데 내가 계산대로 가자, 사장으로 보이는 그가 내게 말을 걸었다.

 

"혼자 오셨나요?"

 

"그렇습니다."

 

"그러시면 안내자도 필요하실 텐데요. 이곳 지리도 잘 알고 말도 잘 통하는 아르바이트 학생을 소개시켜드릴 수 있습니다."

 

"한국 학생인가요?"

 

"물론이죠."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블라지미르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은 것이다. 식당주인과 학생을 소개받기로 약속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금방 블라지미르의 전화가 걸려왔다. 내일 일찍 호텔로 오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학생을 소개받기로 한 걸 알려주고 그의 안내 제안을 사양했다.

 

다음날 오전 호텔 로비에 앉아있는데 대학 초급생 또래의 한국 여학생이 내게 와서 인사를 했다. 그녀는 방금 식당 주인의 연락을 받고 허둥지둥 달려왔노라고 말했다. 그 학생과 함께 호텔 밖으로 나와서 지나가는 택시를 세웠다. 러시아에서는 허가받은 택시를 이용하기보다 지나가는 자가용을 세워 요금을 흥정하고 이용하는 것이 상례화되어 있다.

 

나는 또 네브스키 대로 쪽으로 나가볼 예정이었다. 그 학생이 우리가 가려는 방향과 요금을 놓고 운전기사와 흥정을 시도했는데 결론이 쉽게 나지 않았다. 러시아인 차주가 여학생의 더듬거리는 서툰 러시아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게 이유였다. 차는 곧 자기 갈 길로 떠나버렸다. 그 여학생은 자기는 러시아에 온지 6개월이 조금 지났는데 아직 러시아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없고 지리도 어둡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럼 네가 아는 곳이 한군데도 없겠구나. 정말 그래?"

 

"있어요. 스파케티 좋아하세요? 멋있는 이딸리아 식당 한군데를 알아요. 여기서 걸어갈 수 있는 곳이거든요."

 

"잘 됐다. 어차피 점심은 먹어야 하니까."

 

여학생은 싱긋 웃었다. 호텔 앞 광장에서 십오 분쯤 걸어가자, 주택가 골목에 <이딸리안 레스토랑>이란 간판을 붙인 하얀 단층 건물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그날 처음 만난 여학생과 스파게티로 점심을 먹었다. 그 여학생의 이름도 소속된 학교도 나는 묻지 않았다. 그녀가 그런 질문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딸리아 식당에서 나오자, 따로 갈 곳도 할 일도 없었다. 그 여학생에게 하루치 수고비를 지불하고 이제 가도 좋다고 말했다.

 

그녀는 맛있는 점심만 얻어먹고 돈까지 받는 것이 미안하다고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런 뒤 그녀는 금방 어디론가 가버렸다.

 

오후에 나는 호텔 앞 대리석 계단에 앉아 있었다. 날씨가 푸근했고 밝은 햇빛이 부근을 비쳐주고 있었다. 오후 네 시쯤 되었을 때 블라지미르가 자기 숙소 쪽에서 혼자 호텔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걱정이 되어 그는 호텔로 찾아오는 것이다. 그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고개를 잔뜩 숙이고 걸었다. 계단 앞까지 온 그는 거기 혼자 앉아있는 나를 보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여기 이러고 계십니까? 어디 구경 가시지 않았어요?"

 

나는 그 여학생과 이딸리아 식당에 다녀온 얘기를 들려줬다. 그는 여학생을 보내놓고 내가 자기에게 연락하지 않은 것을 원망했다. 자기는 언제라도 달려오려고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밝지 않았다.

 

"발로자, 무슨 일이 있었소? 표정이 어두운데."

 

블라지미르는 잠시 망설이다 피앙세가 지금 잔뜩 화가 나 있다고 말했다. 피앙세가 누구랑 전화로 언쟁을 벌였는데 발단이 자기 문제였기 때문에 무척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상대가 러시아 사람이오?"

 

"아닙니다. 한국 사람입니다."

 

"한국 사람, 누굴까?" 

 

블라지미르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듯 또 머뭇거렸다.

 

"사실은 제가 이 호텔 8층에 있는 한국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어볼까 하고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주인이 저와 얘기해보고 좋다고 했어요. 그런데 임금 때문에 결국 어긋났어요. 주인이 제시한 금액과 제 요구가 너무 차이가 났기 때문입니다."

 

"얼마를 준다고 했는데요?"

 

"그것 참. 저는 한국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 근무하는 다른 한국 사람과 아주 같지는 않더라도 이분의 일, 아니면 삼분의 일도 좋다고 말했어요. 저는 그 식당에서 일하는 한국 사람이 얼마 받는지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 주인남자가 뭐라 한줄 아세요? 어린 러시아 놈이 건방지고 되어먹지 않았다는 거에요. 그는 다른 러시아 종업원이 받는 50달러에서 한 푼도 더 줄 수 없다고 했어요. 피앙세가 그 얘길 듣고 분개해서 식당 주인과 전화로 막 싸웠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 어제 나도 그 사람 잠시 봤는데 그렇게 폭언할 사람 같지는 않던데."

 

"제 말은 그가 나쁜 사람이란 뜻이 아닙니다. 식당 같은 데서 일하는 러시아 사람 임금이 보통 그 정도니까요. 돈을 벌려고 한국에서 여기까지 온 사람이 자선사업을 할 이유는 없지 않겠어요? 저는 이해해요. 다만 저는 50 달러 받고 거기서 일하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피앙세가 요즘 신경이 좀 날카로워요. 많이 힘들어서 그런가 봅니다."

 

블라지미르가 왜 식당 근무를 자청했을까? 이틀 전만 해도 그는 영국으로 떠날 계획을 말하지 않았는가. 잠시 머릿속에 혼란이 생겼으나 곧 해답이 나왔다. 일정한 수입이 없는 그는 생활하기에도 벅차서 외국에 가자면 따로 경비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50 달러 받아가지고는 언제 비행기를 타게 될지 기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 참 미안하게 되었어요."

 

"뭐가요?"

 

"사실은 피앙세가 선생님을 위해 오늘 저녁식사에 초대하려고 준비까지 했는데 지금 마음이 아파서 힘들 것 같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충분히 이해해요. 나도 조금 전 이딸리아 식당에 있을 때 발로자와 피앙세를 거기 불러내서 함께 식사라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더랬소. "

 

"거긴 좋은 식당입니다. 하지만 서민에겐 매우 비싼 곳이죠. 피앙세가 지금 마음이 아파 나올 수 없을 겁니다. 준비는 부족하지만 마땅히 저희가 선생님을 초대해야죠."

 

“아직 여기 머물 시간 있으니 급할 것 없어요.”

 

블라지미르와 나는 차를 타고 네브스키 대로로 나가서 이틀 전 봤던 빠샤의 그림 한 점을 100달러를 주고 구입했다. 마늘과 사과를 극사실로 그린 우표 두 장 크기의 작은 그림이었다. 빠샤는 또 술병이 나서 못 나오고 그의 친구가 그림을 대신 포장해주었다. 이 그림이 이번 페테르부르그 여행의 좋은 기념이 될 거라고 생각되었다. 오는 길에 블라지미르는 또 여행사에 들러 꽤 오랜 시간 그 중년 여직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여행사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그가 부모님의 이스라엘 귀환 얘기를 잠시 들려줬다.

 

"이번엔 부모님 심부름이었어요. 이스라엘 정부가 제공하는 무료 항공 티켓에 관해 그 직원이 다시 알아보고 해답을 주기로 했거든요."

 

"부모님께서 그쪽으로 가십니까?"

 

"아마 가실 것 같아요. 지금껏 귀환을 하지 않고 버틴 거죠. 부모님도 이곳을 무척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더 이상 연금만 가지고 생활하기 어려워요. 작년까지만 해도 부모님이 여길 떠나는 건 상상도 못해 봤어요.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게 슬퍼요. 제가 여길 떠나야 하는 것도 그렇구요. 이곳은 제 고향이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입니다. 저는 이곳 바람과 네바강 햇빛을 무엇보다 좋아합니다. 이 지구에서 이곳보다 아름다운 곳은 없다고 늘 생각해 왔어요. 저는 발틱해의 소금기가 묻어있는 이곳 바람을 맞으며 어릴 때부터 자라왔어요. 네바강에 비치는 햇빛은 계절마다 색깔이 달라집니다."

 

"떠나더라도 발로자는 상황이 개선되면 다시 돌아와야지요."

 

"물론입니다."

 

그날 이후 블라지미르와 나는 한 차례 더 시내 나들이를 했다. 내가 그곳을 떠나기 전날이었다. 우리는 네브스끼 사원에 다시 들렀고 네바강의 궁전대교까지 걸어가서 다리 복판에서 강의 양안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산책은 첫날처럼 즐겁지는 않았고 두 사람 모두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했다. 불과 며칠 뒤 떠나기로 작정한 블라지미르에게도 이 산책은 이 도시와의 작별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다리 위 그 지점에서는 푸른 벽돌로 지어진 대학 건물들이 원경으로 바라다 보였는데 블라지미르는 오랫동안 모교인 대학건물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블라지미르는 그때까지 저녁 초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나도 조금은 아쉬웠다. 무엇보다 바이올린을 전공한다는 그의 연인을 만나보고 싶었다. 미래가 불확실한 블라지미르 같은 이방 남자를 목숨 걸고 사랑하는 한국 아가씨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그의 피앙세는 저녁 초대 대신 내가 떠나는 날 아침 블라지미르를 통해 내게 작은 선물 꾸러미를 보내왔다. 아침 일찍 호텔 방으로 찾아온 블라지미르는 작은 비닐봉지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피앙세가 선생님께 드리라고 주었어요. 비행기 속에서 드시라고. 피앙세는 저녁초대를 못해 아주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구요. 정말 미안합니다."

 

'이게 뭘까?' 봉지를 열어보니 김치와 밀가루를 버무려 만든 김치부침개 두 장이었다. 있는 재료를 다 뒤져 내 식성에 맞추려고 애써 만든 그 선물을 나는 휴대용 가방 속에 소중하게 챙겨 넣었다. 나는 비행기 속에서 꼭 이걸 먹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저희도 며칠 뒤 여길 떠날 겁니다. 오늘 아파트로 새로 오겠다는 사람이 집을 보러 오기로 했어요."

 

"준비도 없이 그렇게 빨리 떠나요?"

 

"준비할 것도 없어요. 짐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만약 내가 다음에 여기 또 와도 그땐 발로자가 없겠군."

 

"당분간 그럴 겁니다. 그렇지만 저는 다시 돌아올 겁니다. 제가 여기 있게 되었을 때 또 오세요."

블라지미르는 공항까지 나를 배웅해 주었다.

 

 


 

 

내가 페테르부르그를 다녀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블라지미르는 피앙세와 함께 호주로 건너갔다. 시드니의 대학에서 한번 와보라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그건 채용 전에 치르는 일종의 면접이었다. 그는 일단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소식은 그가 그곳에서 보낸 엽서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는 피앙세가 그곳에서 음악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어 더욱 다행이라고 엽서에 적었다. 그리고 한달쯤 뒤에 드디어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둘이 함께 한국으로 왔다. 그때만 해도 이제 먹구름은 흘러가버린 듯 보였다.

 

결혼식은 신부 고향인 남쪽 항구도시에서 치러졌는데 주례 부탁을 받은 나는 여나믄 명의 동료 작가들과 그리고 건국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가르치던 페테르부르그 출신 쯔베또프 교수와 함께 남쪽 항구도시로 내려갔다. 아파트 마당에 눈이 무릎까지 쌓였던 한겨울이었다고 기억된다. 쯔베또프 교수는 솔제니친, 푸쉬킨 등의 연구서적을 대학에서 출간하기도 한 원로 문학교수로 그가 계약기간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 블라지미르를 통해 두어 차례 더 만나기도 했다.

 

그 항구도시에 도착해서 시간이 조금 남아 시내 산책을 했는데 그때 나는 블라지미르가 한국 고대사, 특히 가야사에 유독 많은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그의 피앙세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 항구도시가 가야 역사의 중심 무대와 지척에 있었던 것이다.

 

그날 식장에서 나는 신부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아담한 체구에 선이 갸름한 전형적인 한국의 미인형이었다. 식장은 지방도시의 유지들과 신부의 가족 및 친지들로 가득 메워졌다. 블라지미르는 예식에서는 양복을 입었지만 식이 끝나기 바쁘게 한복 저고리와 바지로 갈아입었는데 한복이 무척 잘 어울렸다. 그는 초혼의 신랑답지 않게 기쁜 마음을 노골적으로 얼굴에 드러냈다. 얼굴에서는 싱글벙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나는 결혼식장에서 그렇게 좋아하는 신랑을 처음 봤다.

 

재미있는 것은 블라지미르의 장인 어른이 그 지역에서 예식장을 오래 운영해온 분이라는 점이다. 당연히 결혼식은 자기네 예식장에서 치렀다. 또 하나 특기할 것은 내가 식을 마치고 그 장인어른으로부터 직접 건네받은 '주례사례비'가 상당한 고액(?)이었다는 점이다. 사례비를 담은 그 흰 봉투에는 붓으로 다음 같은 치사의 말이 적혀 있었다.

 

-주옥 같은 주례의 말씀, 너무나 감명 깊었습니다.

 

하긴 식장에서 주례를 서고 있을 때 거기 모인 유지들의 반응을 보더라도 블라지미르 장인 어른의 이 치사는 허언이 결코 아니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동행했던 동료 작가들마저 새삼 놀랐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내가 그때 신랑신부를 앞에 두고 무슨 얘길 했는지 지금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나의 블라지미르를 향한 진실한 우정이 그런 좋은 반응을 얻게 만든 게 아닐까 생각될 뿐이다.

 

고액의 사례비는 동행했던 동료들과 바닷가 횟집에서 우리끼리 한바탕 '러시아 여행 회고' 잔치를 하는 데 요긴하게 사용했다.

 

결혼식을 마친 블라지미르 내외는 다시 호주로 날아갔다. 그런데 그 뒤 웬일인지 일 년 가까이 소식이 끊어졌다. 나는 호주 생활이 너무나 즐거운가보다고 멋대로 생각했다.

 

일 년쯤 지났을 때 어느날 밤 갑자기 모스크바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기를 집어들자, 뜻밖에 블라지미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호주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거기 있느냐고 묻자, 그는 풀 죽은 목소리로 호주에서는 일주일을 못 넘기고 금방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가 결혼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경력이 풍부한 다른 러시아 교수가 와서 그의 자리를 차지해버린 것이다.

 

갈 곳이 없어진 블라지미르 내외는 모스크바로 가서 방 한 칸을 빌려 그곳에 신혼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블라지미르는 그동안 모스크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그 대학에서 한 달에 50달러를 받는 임시강사로 근무해왔다. 지금 그 자리마저 계약기간이 끝나가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그는 아직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블라지미르가 그동안 소식을 끊고 지낼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그때부터 블라지미르는 내게 타이프로 친 영문이력서를 몇 차례 보내오기도 했고 전화로 곤궁한 상황을 하소연하기도 했다. 그는 내게 보낸 것과 같은 영문이력서를 끊임없이 타이프로 작성해서 영국으로, 호주로 계속 보내고 있었다. 그의 전화를 통해 간간이 페테르부르그의 소식도 전해 들었다. 블라지미르 자신도 최근 일년 동안 그곳에 찾아가지 못했고 겨우 전화로 페테르부르그 소식을 듣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가 전한 소식에 의하면 그의 부모님은 이스라엘로 귀환하기 위해 살던 아파트도 처분하고 한때 짐까지 꾸려놓았는데 아무래도 페테르부르그를 떠날 수가 없어서 출국을 미루다가 지금은 귀환 자체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핀란드의 트럭운전사와 재혼한 누이는 남편이 무뚝뚝하긴 해도 착한 남자여서 그런대로 잘 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림쟁이 빠샤, 그는 지금도 술병을 허리에 차고 다니며 하루걸러 네프스끼 대로에 나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블라지미르의 전화를 받는 일이 내겐 전처럼 반갑거나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방 한 칸에 한 달 50달러로 살아야 하는 생활이 대충 어떤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대학과 별로 인연이 없는 나는 겨우 얼굴 정도 아는 교수 몇 사람을 만나 블라지미르가 보낸 영문이력서를 보여주고 그의 취업 문제를 의논했다. 알다시피 한국 대학에 자리를 얻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그들은 이력서를 자세히 보려고 하지도 않고 머리부터 흔들었다. 제일 큰 약점이 경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요즘 표현대로 하자면 검증이 전혀 안 된 외국인을 대학에서 받아주는 사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궁리 끝에 차선으로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학원 몇 군데를 찾아갔는데 두어 곳은 경영자를 만나지도 못했고 겨우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러시아어 수강생이 점점 줄어들어 과목을 폐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나는 온 몸에서 기운이 쭈욱 빠졌다.

 

지금껏 붓 한 자루에 의지해서 살아온 백면서생인 내가 누구를 취업시킨다는 건 처음부터 아주 무모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은 이 무모한 의도를 외면하지 않았다. 신앙이 따로 없는 나는 그 신이 어떤 신인지는 모르지만. 그 신은 평소에는 내가 하는 일에 티끌만한 관심조차 주지 않던 아내로 현신(顯身)했다. 내가 며칠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서울 나들이를 하고 귀가할 때마다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어대는 나를 보다 못한 아내가 어느 날 문득 물었다.

 

"당신, 요즘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쏘다니세요? 얼굴이 말이 아니에요."

 

".......?"

 

나는 한참만에 겨우 ‘그때 외국어를 잘하려면 그 나라 여성과 사랑에 빠져야 한다.’고 말하던 그 러시아 청년 얘기를 들려줬다. 단순한 성격의 아내는 짧게 한마디만 했다.

 

"그럼 우리 엄마에게 한번 부탁해 봐요."

 

나이가 많아도 막내인 아내는 친정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

 

'장모님에게 취업을 부탁?'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나는 처가에 무슨 부탁 같은 걸 해본 적이 없다. 다른 사위들처럼 장모님과 평소 살갑게 지내지도 못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장모님에게 난생 처음 부탁을 하긴 했다.

 

마침 그 무렵 블라지미르는 서울의 K대학에 이력서를 보냈다고 내게 알려왔다. 그 K대학의 최고경영자의 장모님(이 부분은 참 쓰고 있는 나도 좀 그렇긴 하다. 그러나 신이 하시는 일이란 언제나 인간의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조금 어색해도 사실대로 기술해서 신의 오묘한 조화를 그대로 보여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과 나의 장모님이 막역지우였다. 나의 장모님은 사위가 처음 부탁한 일을 일초도 지체하지 않고 즉시 실행으로 옮겼고 매우 긍정적인 해답을 얻어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K대학 해당 계열의 교수들이 검증되지 않은 젊은이를 거부하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때는 최고경영자라도 일방적으로 결정하기가 어려워진다. 마침 그 대학 문과계열에 동료작가 C가 있는데 그는 고참 교수일 뿐 아니라 캠퍼스 안에서 신망도 두터운 인물이었다. 마침 서울에 와 있던 블라지미르를 대동하고 서초동 찻집에서 C를 만났다. C가 즉석에서 그 문제라면 자기가 총대를 메겠다고 내게 약속했다. 교수들을 설득하겠다는 얘기였다. 이렇게 해서 블라지미르는 K대학 교수로 무난히 취업을 했다.

 

대학에서는 경력자가 우선한다. 그가 오슬로대학으로 갈 수 있었던 것도 서울에서의 경력이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서울에서는 처음에 사당동의 반지하 방을 얻어 살기도 했고 잠원동인가 어디에서 빈 집 이층을 잠시 빌려 살기도 했다. 낮에는 대학에 나가고 오후 늦은 시간에는 건국대로 가서 취업 외국인 근로자를 상대로 한국어와 한국역사 강의 봉사를 거르지 않고 했었다. 가끔 우리 집에 들르기도 했는데 항상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정상 강의와 무료봉사 강의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했으니 땀이 멈출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일년치 수입을 모아 아내의 귀국연주회를 예술의 전당 리사이틀 홀에서 열어주기도 했다. 그만큼 아내에게도 지극정성이었다. 서울에서는 주거가 그렇게 초라했는데 몇 해 전엔가 나더러 오슬로에 오시면 이제 자기 집에 묵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방이 서너 개인 큰 단독주택을 구입했다는 것이다.

 

본래 블라지미르가 내게 약속한 것은 러시아 동남 쪽 고도인 노보고로드를 나와 함께 여행하며 나를 안내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곳에 러시아 역사의 모든 유물이 고스란히 살아있다고 그는 말했었다. 그러나 아직 그 약속은 서로의 상황이 맞지 않아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그 밤 정거장에서 라면 열 봉지를 매개삼아서 서로 '친구'가 되자고 했던 약속은 때로 신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잘 지켜온 셈이며 나는 이 우정의 경험을 결코 작지 않은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