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머나먼 이국의 코발트 빛, 그러면서도 따뜻한 바다. 그 바다를 그리워하는 작가. 오랫동안 주고받은 편지 뭉치를 건넨 여인. 느슨한 여행기의 형식을 빌린 스토리라인의 밑바닥에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긴장감이 깔려서 독자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이 작품은 향후 본격적으로 집필할 장편소설의 프롤로그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해마다 겨울이 다가오면 나는 화렌을 떠올린다. 형편이 허락한다면 남국 따뜻한 바닷가 소도시에서 이 겨울을 보낼 수는 없는가 하고.
나이 들수록 아파트 옆 모퉁이에서 불어오는 겨울 찬 바람이 살갗에 칼날처럼 아프게 느껴진다. 겨울 한동안은 타이완 동부 해안도시 화렌에서 어슬렁거리며 지내다가 봄이 되면 서울로 돌아온다. 왜 하필 화렌인가? 나는 화렌의 바다에 잔뜩 매료되어 있다. 그곳 해안 언덕에 서서 남태평양의 코발트 색깔의 푸르른 물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온갖 시름이 스르르 사라지고 아늑한 꿈결 속에 숨을 쉬고 있는 듯한 평온함을 느낀다.
그렇지만 이런 사치를 한 번도 실현해 본 적은 없다. 지난 겨울에도 화렌의 푸른 물결을 떠올렸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으로 그치고 말았다.
겨울로 들어선지 한 달쯤 되었을까. 늦은 첫 눈이 푸석푸석 내리고 있었다. 첫 눈은 무턱대고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타이페이에서 온 장숙영이 창 밖에서 내리고 있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말했다.
"지금 저 눈이 서울에서 제가 보는 마지막 눈이 될 거에요."
김과 나는 처음 그 말을 무심결에 흘려들었다. 그날은 김과 내가 내일 떠나는 장교수를 위해 저녁식사를 대접하는 자리였다. 강남의 조그만 일식집 한적한 방에 자리를 잡고 뜨거운 국물이 있는 요리를 시켜놓고 기다리는 참이었다.
장교수는 타이페이 소재 문화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는데 부지런한 그녀는 이번 겨울에도 자료수집과 관련 학계의 인사 면담 등을 위해 서울에 왔고 이제 그 일정이 대충 끝나 내일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교수님. 방금 마지막 눈이라고 하셨죠? 그게 무슨 뜻이죠?"
평소 반응이 굼뜬 김이 뒤늦게 물었다. 김은 사십대의 촉망받는 작가로 문학계간지와 출판사를 직접 운영하며 사업가 기질도 보여주고 있다. 장교수는 김의 단편 두어편을 중국어로 번역했는데 내가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해줬기 때문에 이런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질문을 받은 장교수는 망설이지도 않고 분명하게 말했다.
"아, 저 이제 다시 한국에는 오지 않을 거에요. 이번이 마지막 서울여행이랍니다."
평소에도 장숙영의 표정은 차가운 편이고 좀처럼 헤픈 웃음 따위를 보이지 않는, 조금은 냉정한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이날 표정은 유독 싸늘했다.
'이번 여행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라고 있었을까?' 나는 그녀의 단호한 표현에 속으로 놀라며 장교수의 선이 고운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중국여성이지만 참하고 고즈넉한 여성다움을 지닌 장숙영의 눈두덩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다.
김과 내가 서로 눈길이 마주쳤다. 이런 때 꼬치꼬치 사연을 캐물을 수도 없는 곤혹스런 기분을 둘이 서로 교환한 것이다.
즐거워야 할 그 식사 자리는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그리고 장숙영은 자기 말 대로라면 마지막 한국여행을 마치고 다음날 예정대로 타이페이로 돌아갔다.
85년도 12월, 그때도 서울은 겨울이었다. 속칭 신군부의 서슬이 시퍼렇던 때라 정치적으로도 한겨울이었던 셈이다. 일단의 한국 작가들이 타이완 문화부와 관련 단체 초청으로 타이페이를 방문했다. 거창한 세미나 주제를 내걸고 떠난 여행이지만 실상은 싼값으로 품질 좋은 남국여행을 할 수 있다는 유혹에 끌려 합류한 여행이었다. 모두가 그 이전까지 해외여행에 굶주려 있던 시절이다.
그때 타이페이 공항에 내리자 말자, 서울의 여름과도 비교할 수 없는 후끈한 남국의 열기에 온 몸이 되레 떨리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공항 밖으로 나가자, 바로 마주친 거대한 야자수 행렬들이 마치 우리를 환영한다는 듯 큰 잎새들을 하늘거리며 도로 양켠에 즐비해 있던 광경들도 떠오른다.
아, 내가 남국에 왔구나. 나는 그 기분을 실감했다.
이튿날부터 타이페이에서 공식 일정이 시작되었다. 그때만 해도 대만, 즉 자유중국과 한국은 형제의 나라로 소소한 이해관계를 초월할 만큼 다정다감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연인으로 치면 한창 뜨겁게 열정이 불타오르던 시기였다. 덕분에 우리는 자국민도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던 금문도를 관람했고 타이페이에서는 매일저녁 환영만찬이 이어졌다.
낮에는 그쪽 문인, 문학관련 학자들과 세미나 시간을 가졌는데 나도 그렇지만 동료들도 이삼일 지나자, 그런 공식행사에 넌더리를 내기 시작했다. 세미나의 주제라는 것이 명분은 그럴 듯하나 개개인에겐 공허하기 이를 데 없어 흥미도 못 느끼고 지루했고 기분도 언짢았다. 염가여행이란 유혹에 끌려 허례 뿐인 국제행사에 도우미로 이용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몇몇 작가들은 아예 세미나장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때웠다.
그러나 금문도를 방문했던 경험은 특별한 것이었다. 세미나 행사가 대충 끝났을 때 우리는 군에서 제공된 소형 비행기에 탑승하고 금문도로 건너갔다. 그곳 수비사령관이 직접 우리를 마중했다. 그는 그날 저녁 환영만찬도 베풀었다. 금문도 요새에 설치된 망원경을 통해 지척에 있는 대륙의 복건성을 바라보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처럼 중국 본토와 왕래가 빈번하던 시기가 아니다. 대륙 땅 해안에서 걸어다니는 주민들 모습까지 선명하게 보여서 우리는 탄성을 터트렸다. 지하에 설치된 대규모 방공 설비들도 군인들이 친절하게 안내해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섬에서 내게 큰 감동을 준 것은 그곳이 대규모 포인세티아의 군락지라는 것이었다. 크리스마스 장식물로 우리는 화분에서나 그 화사한 식물을 구경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금문도는 섬 자체가 온통 붉고 푸른 포인세티아의 물결로 덮여 있다. 색채도 한국에서 본 것 보다는 훨씬 강렬했다. 나는 포인세티아의 물결에 도취되어 가능하면 그 섬에 며칠이고 더 머물고 싶었다.
십일에 걸친 여행일정이 대충 끝나갈 때였다. 당시 인기작가로 이름을 날리던 H가 내게 다가오더니 무슨 큰 비밀이라도 알려주듯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속삭였다.
"형, 낼 모래 일정 끝나면 다들 떠날 건데 그냥 이대로 돌아갈 거야?"
여행 떠나면 평소 친하지 않던 사이도 대개 형과 아우가 된다. H는 흥이 나면 소년 같은 치기를 곧 잘 보여주곤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어쩔 건데. 비행기 티켓 날자도 정해 있고."
"이건 꼭 형만 알아둬. 누구에게도 알리면 안 되는 거야. 방금 문화대학 여자 교수님이 내게 연락을 했어. 장숙영이라고. 그 교수는 이번 세미나에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고. 그쪽 세미나에 나온 인물들이 친정부 쪽 삼류들이라는 거야. 자부심이 대단한 여성이야."
"그게 어떻다는 거야? 우리도 삼류가 되는 건가?"
"형, 이 H를 믿지?"
"그야 뭐..."
"장교수가 작가 세 사람 정도가 남게 되면 자기가 화렌 구경도 안내해주고 얘기도 좀 나누고 싶다는 거야. 조금 전 제자를 시켜 나한테 이걸 전해 왔다고. 장교수는 이화여대, 고려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한국 사정을 우리보다 더 잘 알아. 이걸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절대 안돼."
"흠, 괜찮은 제안이군."
"헤헤헤, 형도 이럴 줄 내 알았다고. 절대 비밀이야."
우리는 이십여 명이나 되는 다른 동료들에게 순식간에 배반자가 되어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처럼 찾아온 남국 나들이인데 알맹이 없는 세미나로 시간을 다 보내고 이대로 떠나기는 정말 너무 억울했다. 그러던 참에 H의 제안, 아니 장교수의 제안은 가뭄의 단비 같았다.
이틀 뒤 동료들이 모두 서울로 돌아간 뒤 나와 H, 그리고 신문사 문학기자로 참여한 P, 세사람은 타이페이의 조용한 찻집에서 그제서야 비로소 얼굴을 내민 문화대학의 여교수와 첫 인사를 나누었다.
장교수는 훤칠하게 생긴 남학생 한명을 대동하고 나왔다. 처음 보는 여교수의 모습은 무척 조용하고 차분한 인상을 주었는데 그렇더라도 내면에는 누구에게도 쉽게 굽히지 않겠다는 강한 고집과 자부심 같은 것이 깊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그 흔들림 없는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가령 일 주일씩이나 계속되던 세미나 행사장에 타이페이의 중요한 한국문학 관계자 입장에서 그 행사를 완전히 외면해버린 것만 봐도 그녀의 성격 일단을 엿볼 수 있었다.
"타이완에 오셨으니 화렌을 한번 보셔야죠."
장숙영은 보일듯 말듯 희미한 미소를 흘리며 우리에게 말횄다.
"명준아! 네가 이 선생님들을 화렌으로 잘 안내해드려. 할 수 있지?"
데리고 온 잘생긴 남학생이 두 말 할 수 있냐는 듯 벌떡 일어서더니 우리에게 꾸벅 절을 했다.
"저는 문화대학 3학년생 진명준이라고 합니다. 훌륭하신 분들을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화렌은 제가 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진명준이 바로 화렌 출신 학생이었다. 장교수는 미리 화렌 여행을 안내할 적격자까지 물색해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장교수 자신은 타이페이에 볼 일이 있어서 우리가 화렌에서 돌아오면 그때 따로 시간을 갖겠다고 말했다. 장교수와 간단한 점심을 함께 들고 정오 조금 지나서 우리는 화렌행 가치를 타기 위해 타이페이 역으로 향했는데 장숙영은 역까지 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차츰 알게 된 일이지만 장숙영은 당시 갓 출범해서 타이완 본성인(本省人)들 사이에 인기몰이를 하던 민진당(民進黨)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요즘 조금 기세가 꺾였지만 민진당은 대륙으로부터 타이완의 독립을 제1강령으로 주장한 세력이기도 하다.
장숙영의 문학 취향은 한 마디로 민중주의, 현실 비판을 담은 저항주의로 요약된다. 단순하게 말해 문학도 현실개혁 투쟁의 수단으로 효용성이 있을 때 그 가치가 인정된다고 보는 것이다. 겉으로는 부드럽고 여성적인 고즈넉한 분위기를 지닌 그녀가 왜 이런 과격한(?) 견해를 갖게 된 걸까? 정확하게 진단하긴 어렵지만 타이완 원적자(原籍者)-고산족 혹은 산지족(山地族)으로 불리우는 원주민과는 구별된다-라는 그녀의 신분에 큰 원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극우독재인 국민당 세력이 타이완에 입성하던 초기에 타이완 주민들을 수만 명 학살했다는 2.28사건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대륙과 직접 인연이 없는 장교수 입장에서 지배세력인 국민당 정부에 원한을 갖는 것은 지식인으로 도리어 자연스런 일이다.
화렌은 이미 타이완의 손꼽히는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대리석과 옥돌의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무엇보다 화렌의 첫째로 꼽히는 명물은 험준한 산악지역에 자동차 전용도로를 뚫어놓은 타이루거 협곡의 장관일 것이다. 이 불가능한 역사를 강행하는 과정에서 수천 명의 인명을 바쳤다는 기록이 그곳 석비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화렌 출신 진명준은 여러모로 모범생의 여건을 두루 갗춘, 훌륭한 학생이었다. 잘 생겼고 예의가 바르고 한국말을 비교적 자유롭게 구사하는 걸 보면 성적도 우수하다고 볼 수 있었다. 장숙영은 이 기특한 제자를 끔직히 아끼는 눈치였다.
몇 해 뒤 진명준이 학업을 마치고 타이완 외교부 직원이 되어 신혼여행을 서울로 왔을 때 나의 집에서 하루밤을 묵은 일이 있는데 진명준은 장교수가 자기 결혼 상대방이 마땅치 않다고 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큰 곤경을 치렀노라고 내게 실토한 바도 있다. 결혼 이후에도 그 일로 장교수님과 아주 뜨악한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면서 진명준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작가 H와 나, 그리고 기자인 P, 세사람은 화렌에 도착해서 첫날은 진명준의 부모님이 계시는 화렌 인근 농촌의 농가에서 묵었다. 시골 농민이 자기 집에 우리를 초대한 것은 대단한 배려이고 호의였다. 덕분에 예상치도 못했던 타이완 농가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묵은 집은 새로 지어진 개량형 농가주택인데 ㄱ자 혹은 ㄷ자 형의 이층 건물로 침실과 거실 위주의 이층, 취사실과 농기구 등 자잘한 세간이 배치된 일층 등으로 규모는 작지만 스위스나 스칸디나비아 농가처럼 매우 효율적인 구조를 갗추고 있었다. H와 P는 그 효율적 구조에 몇 차례나 탄성을 터트렸다.
진명준은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에 딱 어울리는 그런 청년이었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어디로 일을 나갔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고 성격이 무척 쾌활한 그 어머니가 우리를 주로 접대했다. 명준의 어머니는 키가 작달막하고 가슴과 어깨가 떡 벌어진, 전형적인 타이완 농촌여성의 모습인데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녀가 시장에서 가게를 운영한다는 말을 명준에게서 들었는데 무슨 가게인지 그건 말해주지 않았다. 명준의 어머니는 오토바이의 명수였다.
그 어머니가 새벽에 우리에게 대접할 신선한 오리고기를 구하려고 오토바이를 타고 시장으로 달려가던 모습을 마침 아들과 산책길에 나섰던 우리는 보게 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어머니는 시장에 들러 오리고기 등 요리재료를 잔뜩 구해 오토바이에 싣고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우리가 여전히 산책 중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어머니가 한 손으로 오토바이 핸들을 잡고 한손은 높이 들어올려 아들과 손님을 향해 흔들면서 전속력으로 달려오던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그렇겠지만 명준의 그 키가 작은 어머니가 아들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는지는 그녀의 눈길이 잠시도 아들에게서 떠날 줄 모르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날 아침에 우리는 세숫대야만큼이나 큰 양푼에 가득 담아온 오리고기 요리를 먹느라고 무척 애를 먹어야 했다.
"선생님들, 우리 명준이를 잘 가르쳐주세요."
어머니는 이런 말을 서른 번도 더 했다. 나중에는 아들이 엄마에게 버럭 화를 냈다.
"어머니, 그런 말 또 하시면 나는 다시는 집에 오지 않을 거에요. 정말이요."
그러자, 어머니는 펄쩍 뛰며 자기 입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이 몹쓸 주둥이, 아들아, 다시는 그런 말을 안 하마."
그 키 작은 엄마는 정말 두 번 다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적어도 아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는. 그러나 우리와 마지막 헤어질 때는 아들 몰래 슬쩍 우리에게 다가와 입을 한손으로 가리고 "훌륭하신 선생님들, 우리 명준이를 잘 돌봐주세요."하고 속삭이는 걸 잊지 않았다.
오전에는 차를 빌려 타고 타이루거 협곡을 대강 일순하고 점심 후에 유명한 화렌 우롱차(烏龍茶) 거리로 나가서 우롱차를 한 상자씩 구입했다. 일본인들이 즐겨 찾는다는 그 거리는 제법 번화하고 즐비한 차 가게들도 경기가 좋아 보였다. 포장지가 그럴싸해서 덩달아 한 상자를 구입했는데 이 우롱차 때문에 엉뚱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귀국해서 모처럼 서재에서 품위 있게 차를 시음한답시고 며칠을 줄곧 마셔댔는데 그만 불면증에 걸려 보름 가까이 생고생을 했던 것이다.
이 우롱차가 내포한 카페인이 커피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강한 것을 느꼈다. 중국인들은 오리고기, 돼지고기를 상식하고 그 기름기를 씻어내기 위해 우롱차를 마시지만 씻어낼 기름기가 없는 나 같은 체질의 사람은 우롱차 시음 흉내를 함부로 낼 일이 아니었다.
오후 느지막이 명준은 우리를 화렌 해안가로 안내했다. 안내했다기보다 특별히 갈만한 곳이 없어서 그쪽으로 발길을 향했던 것 같다.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그 푸르른 코발트 빛깔의 바다를 보게 된 것이다.
한없이 조용하고 한없이 푸르른 그 아늑한 바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서서 그 바다를 봤을 때 머리가 뻥 뚫린 듯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 바다는 기기묘묘한 온갖 장관을 연출하는 타이루거 협곡보다, 이상야릇한 몸치장을 하고 코맹맹이 노래로 관객의 흥미를 끄는 산지족(山地族)의 빈약한 공연보다 훨씬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날 이후 나는 화렌 하면 으레 그 짙푸른 바다를 연상하게 되었다.
보통 그림에서 보는 남국 바다라면 물의 색채가 물감을 풀어놓은 듯 짙푸르고 작열하는 태양으로 마치 강한 조명으로 연출된 화면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그것대로 매력이 있다. 그러나 그 바다는 너무 뜨거워서 숨이 가쁘다. 화렌의 바다는 빛이 강하거나 눈이 부시지도 않고 마치 구도가 잘 짜여진 정원처럼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을 갖게 한다.
타이페이로 돌아와 장숙영을 다시 만났을 때 그녀가 물었다.
"구경 잘 하셨습니까?"
"바다가 참 좋더군요. 꼭 다시 한번 찾아보고 싶은 바다였어요."
장교수는 좀 의외라는 듯 잠시 말을 잇지 않고 애매한 표정을 지었으나 더 캐묻지는 않았다. 타이페이로 돌아온 우리는 하루를 더 묵은 뒤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일년인가 일년 반인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이번에는 장숙영이 서울에 나타나서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 전화는 좀 뜻밖이었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약간 낮게 가라앉은 장숙영의 목소리를 듣자, 나는 대뜸 화렌의 그 푸른 바다가 생각났다. 나는 그 바다를 내게 보여준 여교수에게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었다. 장교수의 전화가 뜻밖이라고 하는 것은 그녀에게 나 말고도 잘 아는 서울의 작가, 이를테면 인기작가 H 같은 인물이 몇 사람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늦가을쯤으로 기억된다. 강남 어느 찻집에서 장숙영 교수를 만났다. 일년여 시간이 지났지만 그 모습은 그때 그대로였다.
장숙영은 재색 재킷과 역시 재색 바지를 즐겨 입는다. 아마 언제나 재색 옷을 입었던 것 같다. 목둘레에는 별다른 장식도 없이 소박한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얼핏 보면 꾸밈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지만 은근히 차분한 자기 분위기를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었다.
장교수는 첫 마디로 작가 H가 전화도 잘 받지 않고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내게 불평했다.
설마 H가 그럴 리가...? 그는 다정다감하고 심성이 아주 착한 사람인데.....곡마단을 소재로 한 소설로 혜성처럼 등장하여 수년째 인기 절정에 있던 H는 바쁘기도 했겠지만 필경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시기가 정확하게 맞는지 확신이 가지 않지만 당시 신군부 치하에서 H는 신문연재의 필화사건으로 아주 큰 곤욕을 치렀다. 그와 친한 어느 시인은 그 사건 연루자로 끌려가 지옥을 경험하고 그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그 P 시인의 시집 한권을 나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H가 그 일로 그렇게까지 심한 곤욕을 치렀다는 걸 나는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장숙영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지 못한 이유가 그 사건 때문이 아닐까,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장숙영은 내게 원로작가 東里 선생과 진보문학계에서 명성이 높던 중견작가 T를 소개시켜 달라고 단도직입으로 부탁했다. 두 사람의 작가, 원로와 중견을 소개시켜 달라는 장교수의 부탁을 나는 쉽게 받아들였다. 그건 내가 시간만 조금 할애하면 되는 일로 전혀 어려운 부탁이 아니었다. 가령 장숙영의 부탁이 내가 감내하기 어려운 것이었더라도 나는 즉시 그걸 받아들였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화렌의 바다를 구경시켜 준 장교수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고 그게 아니라도 국제관계 사업인데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도와야 하는 것이었다.
이방의 지적인 여성에 대한 나의 감정? 그때 나는 장교수가 기혼인지 미혼인지도 알지 못했다. 구태여 알 필요도 없었다. 사십대 초반이니 응당 기혼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지만 장숙영은 가정 얘기 같은 건 입에 떠올리지 않았다. 장숙영에게서는 늦게까지 결혼을 미뤘거나 한창 가정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여성에게서 느껴지는 쓸쓸한 분위기 같은 것이 감지되긴 했다. 그러나 이것도 분명한 근거가 없는 나만의 생각일 뿐이다. 이런 느낌을 제외하면 차분하고 여성적이며 도도한 자부심까지 지닌 이 이방의 여성에게 내가 얼마간 호감을 갖고 있던 것은 분명했다.
당시 東里선생은 내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거주했다. 본래 나는 이 분과 별다른 인연이 없는데 집이 가까운 관계로 이분이 자택에서 자주 벌이는 술 파티에 몇 번 불려다녔고 그 이후부터 내막적으로는 조금은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이 작단의 거물은 당신의 추종자도 제자도 아닌, 요즘 말로 듣보잡 뜨내기에 지나지 않는 내게 과분한 친절을 베풀었던 것이다.
장숙영과 원로작가의 면담은 청담동 작가의 자택에서 쉽게 이루어졌다. 나는 시작부터 면담이 끝날 때까지 동석해서 장교수가 외로움을 타지 않도록 옆에서 분위기를 돋우었고 이야기가 끝날 때 쯤 선생께서 베푸신 정종 두어 잔씩을 기분 좋게 얻어마시고 그 집에서 물러났다.
그 이후에도 장교수의 부탁으로 타이완에서 온 여성비평가 한사람을 東里선생 댁에 데려간 일도 있다. 쉬엔메이던가-이름이 정확하지 않음-하는 이 여성 비평가는 자기 책까지 여러 권 가져와서 만나는 사람마다 사인을 해서 건네주고 자기 홍보를 했다. 쉬엔메이는 장숙영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이었다. 가까운 친구라는데 그렇게 다를 수가 없었다. 쉬엔메이는 말수가 많고 무척 활달하며 조금 잘난 척하는 기미도 언뜻언뜻 보였다. 장교수 말에 의하면 타이페이에서 꽤 알려진 여성 비평가라는데 문학에 대한 견해도 장숙영과는 많이 다른 것 같았다.
東里선생은 뒤에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쉬엔메이가 장보다는 샤프해. 장은 착하긴 해도 샤프한 맛은 없더구만."
나는 이 말에 일면 수긍이 가는 점도 있었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할 수도 없을 것 같다는 이율배반적 생각에 잠겼다. 東里선생은 알다시피 해방 이후 우익 문단을 주도하던 인물이고 군사정권 치하에서도 자기가 누릴 것은 모두 누렸던 인물이다. 극우에 치를 떠는 장숙영의 문학적 견해가 그의 마음에 들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작가 T는 그 무렵에 연희동 노태우 전 대통령 집 인근에서 살았다. 그가 북행하기 얼마 전이니까 노태우 정권시절이 끝나갈 무렵이다. 그를 잘 알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장숙영을 그의 집으로 안내하고 원고청탁이나 번역관계 등, 장교수의 일이 차질 없이 잘 성사되도록 도왔다. 그 후에 일이 잘 진행되어 T가 타이페이 여행을 아주 재미있게 다녀왔노라고 내게 자랑했던 일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앞서 얘기한 작가 김도 장교수의 부탁으로 내가 다리를 놓았고 그의 단편 몇편이 장교수를 통해 중국어로 번역이 되었다. 작가 김으로 말하면 지금은 시대상황이 많이 바뀌고 그의 활약도 주춤하지만 군사정권 말기나 YS 정권 초기 때만 해도 김은 이른바 진보 문학계의 새 가능성으로 높이 평가되곤 했었다.
김은 처음 시로 시작했다가 뒤에 소설 쪽에 더 열정을 쏟게 되었는데 그의 작품들을 한 마디로 민중. 저항 등의 말로 단정짓기 어려운 면도 있지만 그가 범 운동권 출신이고 그의 문학 밑바탕이 넓은 의미에서 민중에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일면식도 없던 김의 작품이 장숙영의 선택을 받았을 턱이 없는 것이다.
90년대 초, 서울이 막 겨울로 접어들려고 하던 어느 날 타이페이에서 내게 팩스가 한 장 날아왔다. 그곳 문화대학 교수 장숙영이 보낸 건데 나와 김을 타이페이로 초청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메일이 사용되던 때가 아니어서 팩스가 첨단의 통신수단이었다. 며칠 동안 서울과 타이페이 사이에 타이완 여행 문제로 연락이 오고 간 끝에 나와 작가 김 두 사람은 타이페이 행 비행기에 올랐다. 여행기간은 약 십일이고 초청 측에서 체재기간 동안 숙박과 기타 경비를 제공한다는 조건이었다.
이 타이페이 두 번째 여행을 떠날 때 나는 숙고 끝에 대륙의 상하이에서 번역 발표된 내 작품 자료를 복사해서 장교수에게 보이려고 휴대했다. 공교롭게 그 얼마 전에 상하이에서 번역자가 내 작품 중편 두 편을 문학지에 번역 게재한 사실을 알릴 겸 또 다른 경장편 번역과 출간의 동의를 구하려고 서울에 왔는데 그가 가져온 잡지를 보니 우연찮게도 東里선생 초기작 한 편도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원로급인 번역자에게 작품 정보를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었더니 놀랍게도 김일성 선집 중국어판 감수를 위해 북에 갔다가 거기서 소개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 잡지 수록 작품 말미에는 북의 비평가의 언급도 간단히 소개되고 있다. 이런 일은 내 상상을 한참 벗어난 일로 나는 지금도 그 일을 해독불가의 일로 여기고 있다.
2009년엔가 우연찮은 기회에 잠시 방북했을 때 묘향산 가는 길에 옆에 앉은 청우당 간부로부터 "북에서 문학을 외부(주로 남쪽)에서 생각하듯 그렇게 단순한 잣대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실상을 더 자세히 확인할 기회는 없었다.
그런 점은 중국도 비슷해서 요즘엔 대륙 쪽이 도리어 문학, 예술을 보는 관점이 더 융통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내가 구태여 그런 자료를 장교수에게 가져간 것은 그간 장교수가 가끔씩 "언젠가 선생님 작품도 번역할 거에요."라고 말하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른 작가 안내를 부탁하고 내게 번거로운 심부름만 시킨 걸 좀 미안하게 생각하고 립서비스 삼아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나는 장교수더러 '이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그걸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봐라, 대륙에서도 이렇게 번역되어 나오지 않느냐?' 이렇게 뻐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면 그도 거짓일 것이다.
타이완에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서울서 타이페이까지는 세 시간 남짓 소요된다. 나는 그 정도 시간을 흔히 '담배 두어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비행기 안 객석에 앉아 담배를 피워댄다는 말은 아니다. 요즘에 그랬다간 비행기 창밖으로 쫓겨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후배 작가 김과 처음으로 함께 여행하면서 나는 아주 놀라운 그의 특징 한 가지를 발견했다. 그는 한 마디로 내가 아는 한 '이 지상 최고의 애처가'였다.
그는 김포공항에서부터 오 분 간격으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시각각으로 자기의 동선과 일정을 보고하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핸드폰은 특수층만 사용하던 고가품이었기 때문에 그는 하는 수 없이 공중전화 신세를 져야만 했다. 그는 공중전화를 이용하기 위해 동전 한웅큼을 늘 손바닥 안에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동전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그가 동전을 빌려달라고 내게 손을 내밀기 시작했고 나는 여행기간 내내 그의 동전구걸에 시달렸다.
처음에 나는 그의 그런 행동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으나 차츰 익숙해지자, 이 후배 작가를 이렇게 이해하게 되었다.
'이 친구는 정말 아내를 사랑하는구나. 그래서 아내 목소리를 오 분 동안만 못 들어도 온통 이 세상이 깜깜해지는 모양이구나.'
물론 타이페이에 가서도 비싼 국제통화료 따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줄곧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만 국내에서 오분 간격이던 것이 십분 간격 정도로 바뀐 것뿐이었다. 보다 못해 내가 가끔 핀잔을 주어도 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런 친구를 지켜보며 나는 스스로 자괴감에 빠졌다. 나라는 인간은 남편으로 아버지로 완전 실격이었다. 나는 열흘의 여행기간 동안 한 차례도 집에 통화를 시도하지 않았고 귀국해서 공항 밖으로 나온 다음에 겨우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것도 집이 혹 비어있다면 아파트 현관문 열어줄 사람이 없을까봐 걱정이 되어 걸었던 전화였다.
오후 늦게 비행기가 타이페이 공항에 도착했는데 장교수는 제자 몇 명을 데리고 공항으로 마중 나왔다. 우리를 태울 승합차가 밖에 대기하고 있었다. 막상 현지에서 장숙영과 얼굴을 마주치자, 전에 못 느끼던 미묘한 친애감이랄까, 정감을 느꼈다. 장교수도 과거와는 달리 우리를 좀 더 살갑게 대해주었다. 그녀는 여름 양복을 입은 나를 보더니 타이페이 날씨가 예상보다 춥다면서 내 뒤로 다가와 내 외투 깃을 세워주기도 했다.
나는 장교수에게 대뜸 말했다.
"화렌 바다를 빨리 보고 싶은데요."
"아이구, 참 성급하시네요. 그러실 줄 알고 타이페이에서 하루만 묵으시고 내일 그리로 가시도록 조처해 놓았어요. 타이페이 일정은 뒤로 미뤘거든요."
우리에게 제공된 타이페이 숙소는 무슨 청년회관의 기숙사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 큰 규모의 식당도 있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오전에 고궁박물관과 장개석 사당, 그리고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댐인지 호수인지 그런 것을 둘러보고 오후에 우리는 화렌행 기차에 올랐다. 장숙영은 타이페이에 남았고 화렌에서는 교수의 여자 제자들이 역에서 우리를 맞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둘만 남은 기차의 객석에 앉아 김이 아주 엉뚱한 소리를 했다.
"선생님, 장숙영이 왜 우리를 초대했다 생각하세요?"
"그야 자네 작품도 번역했고 자네 문화대학에서 학생들과 미팅도 잡혀있지 않은가. 나야 뭐 서울에서 조금 도와줬다 해서 끼워준 거겠고."
"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는데요."
"어떤 각도로 보는데?"
"장숙영이 선생님을 매우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낮에 댐 구경할 때 선생님이 추워하니까 안절부절 못해요. 표정은 속이지 못해요. 저는 사실 이번에 덤으로 따라온 겁니다."
"에끼! 이 친구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어. 덤은 자네가 아니고 나야. 장숙영은 민중문학 쪽이 아니면 인정하지도 않는다고. 자네도 잘 알지 않나. 자네 지루하면 기차에서 국제전화 할 수 있나 알아봐. 음, 저기 전화실이 있군. 빨리 서울로 전화해야지."
김은 깜빡 잊었다는 듯 벌떡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화 부스가 있는 쪽으로 부지런히 걸어갔다.
타이완의 작가 가운데 황춘밍(黃春明)이란 인물이 있는데 그는 70년대 초반 일본인들의 타이완 엽색관광(獵色觀光)을 신랄하게 고발한 <사요나라 짜이젠>이란 소설로 인기작가로 급부상해서 서울에서도 잠시 화제가 되었었다. 그 작품 말고도 창녀(娼女)의 꿈을 다룬 <항구의 꽃>과 <주머니 칼>이란 작품도 있다. 지금은 다소 먼 얘기가 되었지만 70년대 초라면 서울의 유흥거리에서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일인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던 시절이다. 그래서 한국 독자들도 그 소설 주제에 공감이 컸을 것이다.
황춘밍의 이름이 난데없이 등장한 것은 작가 김이 서울에서 장숙영을 만났을 때 불쑥 그의 근황을 물었기 때문이다. 김은 학창시절에 자신이 황춘밍의 애독자였다고 고백했다. 사회 부조리를 질타하던 한창 때의 운동권 학생으로 밑바닥의 궁핍과 고난으로 얼룩진 삶을 다룬 황의 소설이 ,비록 크게 주목받기 힘든 타이완의 문학이긴 하지만, 김의 눈길을 끌었다는 것은 쉽게 수긍이 된다. 김의 고백을 듣고 장숙영은 반색했다. 그 작가와 매우 친하며 자기도 좋아하는 타이완의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란 것이다.
"그분 나이도 꽤 되었을텐데요. 지금도 글을 쓰시나요?"
"생활 때문에 소설에 전념하지 못해요. 이란(宜蘭)이란 곳에서 방송국 일을 하면서 짬짬이 글을 쓰나 봐요. 언제 타이완에 오시면 황선생을 한번 만나보시죠. 제가 주선해드릴 테니."
"좋지요. 저야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그런데 타이완에 언제 가게 될까?"
그때만 해도 김이나 나나 타이완 여행 계획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타이페이에 도착했을 때 이번엔 장숙영이 그 얘길 먼저 꺼냈다.
"황춘밍씨에게 김선생 얘길 했더니 아주 좋아라 하며 언제 꼭 만나고 싶답니다. 이번에 만나보시겠어요?"
김이 마치 좋아하는 배우라도 만나게 된 소년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읏으며 기뻐했다.
"깜빡 했는데 잘 되었군요. 저는 언제라도 좋습니다."
장숙영이 나를 돌아보며 눈을 껌벅거렸다. 내 생각을 묻는 것이다. 나는 김이 좋다면 나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그럼, 화렌에서 돌아오실 때 이란(宜蘭)에 잠시 들러 황선생을 만나도록 하지요. 이란이 화렌과 타이페이 딱 중간이거든요. 제가 황선생께 미리 연락을 해놓겠어요."
이것으로 황춘밍과의 만남은 예약이 된 셈이었다.
우리가 화렌역에 도착했을 때 그곳 출신 여학생 두 명이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그들은 휴가기간이라 고향에 와서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머물게 된 숙소가 해안가 언덕에 있다는데 아무래도 차를 타고 가야 할 것 같았다. 택시를 잡으려고 두리번거리는데 검정색 양복을 입은 웬 중년 남자가 다가와서 자기 차로 우리를 모시겠다고 말했다. 그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 은색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저희 아빠에요."
수즙음을 몹시 타는 여학생이 그제야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그 사람 좋아 보이는 학생의 아버지와 악수를 하고 뒤늦게 인사를 나눴다. 부모라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다. 자녀를 위한 일이라면 어떤 수고라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다. 돼지사육 농장을 운영하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그 아버지는 우리 두 사람을 역에서 숙소까지 태워주기 위해 차를 몰고 그곳까지 나온 것이다. 학생들과 아버지는 우리를 해안의 숙소 앞에 내려놓고 내일 오전 돼지농장에 안내하러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 곧 농장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도 숙소는 청년회관 기숙사 같은 곳이었다. 장숙영이 심한 구두쇠란 말을 나는 제자인 진명준으로부터 들었었다.
참, 그 진명준은 학교를 마치고 타이완 외교부에 들어가서 오오사까에서 근무한다는 소식을 이태 전에 들었다. 진명준이 말하길 장숙영은 근검절약이 지나쳐서 절대로 비싼 식당에는 출입하지 않으며 옷도 그럴싸한 싸롱에서 구하는 게 아니라 시장에서 천을 사다가 자기 단골 가게에서 실비로 맞춰 입는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하면서 명준은 심하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장교수와 함께 다니면서 어찌나 싸구려 음식들만 먹어서 이젠 같이 식사하자는 말을 할까봐 겁부터 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근검하는 장숙영이 우리를 초대했으니 이건 예삿일은 아니다. 장교수가 호텔 숙박 대신 타이페이나 화렌에서 청년회관 기숙사를 우리 숙소로 미리 정해놓은 걸 보면 아마 이런 곳은 국제교류라는 명분을 붙여 거의 공짜로 이용이 가능한 곳일 것이다. 그렇다고 크게 불편한 점은 없었다.
숙소에서 배정받은 3층의 방으로 들어가서 창문을 열어젖히자, 거짓말처럼 화렌의 그 바다가 손에 잡힐듯 지척에 펼쳐져 있다. 몇 해만에 다시 보게 된 화렌의 바다인가? 매년 겨울이 올 때마다 나는 이 따뜻한 바다를 떠올렸었다. 마치 안식의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가슴이 후련했다. 이번만은 호텔이 아닌 곳에 숙소를 잡아준 장교수가 되레 고마왔다. 각자의 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김과 나는 근처 마을 식당에서 완탕이라는 중국식 만두국으로 가벼운 저녁을 들고 늦게까지 해안을 거닐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오전에 어제의 그 아버지와 학생 둘이 차를 가지고 어김없이 나타났다. 돼지사육 농장은 시내에서 차로 반시간 가량 걸리는 교외 한적한 지대에 있었는데 규모가 엄청나게 큰 데 놀랐다. 끝없이 늘어선 축사를 바라보며 돼지를 몇 마리나 키우느냐고 학생에게 물었더니 얼굴이 발개지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기만 했다. 그 학생도 자기네 농장에서 키우는 돼지 숫자를 모르는 게 분명했다.
중국인들은 돼지고기 소비가 많아서 화렌만 해도 인근에 비슷한 규모의 사육농장이 몇 개 더 있다고 그 아버지가 알려주었다. 사육농장을 대충 한 바퀴 둘러본 뒤 우리는 푸짐한 점심대접을 받았는데 돼지사육농장에서 베푸는 점심 식단에 돼지고기는 나오지 않았다. 주로 생선요리와 야채요리가 식탁을 가득 채웠다.
작가 김은 철학과 출신이고 나는 서양언어를 배우는 학교에 다녔는데 중국말은 당연히 한마디도 못한다. 그러나 한문 실력이 출중한 김은 볼펜과 종이만 있으면 중국인과 소통하는 데 크게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김은 물론 어깨에 메고 다니는 작은 가방에 필기구와 시험지를 잔뜩 가지고 다닌다. 그의 놀라운 필담(筆談) 능력에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돼지사육 농장에 다녀온 뒤 김과 나는 화렌 시내 뒷골목을 지향 없이 어슬렁거렸는데 이 뒷골목 산책은 내 취향이기도 하다. 로마나 빠리나 모스크바나 도쿄나 중심가 대로의 풍경은 서로 닮아있다. 글로벌 시대를 맞아 서울의 중심가 풍경도 별 특색 없이 세계의 다른 도시들과 닮아가고 있다. 그러나 어느 도시나 뒷골목에 가면 자기네 고유한 표정을 읽을 수가 있다.
화렌 시내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다가 우리는 어느 수석(水石)가게 앞을 지나게 되었다. 넓은 마당에 기묘한 형태의 수석 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분재식물(盆栽植物)을 잔뜩 늘어놓았는데 그 마당에서 바둑판을 중심으로 몇 사람이 바둑 구경을 하고 있었다. 김이 앞서 불쑥 안으로 들어갔고 내가 뒤를 따랐다. 이미 해가 기울어 가스 불을 마당에 여럿 켜놓았는데 우리는 그 불빛의 도움으로 수석과 분재식물을 구경했다.
바둑게임이 끝났을 때 중국 무술고수 같은 복장을 하고 역시 그 비슷한 풍모를 지닌 마흔 안팎의 남자가 우리에게 비로소 말을 걸어왔다. 그가 그 가게 주인장이었다. 김은 재빨리 가방에서 시험지와 볼펜을 꺼내들고 주인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 두 사람은 아마 반시간 가까이 필담을 나누었을 것이다. 김도 오랜만에 적자를 만난 셈이다. 필담을 겨우 끝낸 김이 내게 말했다.
"왕이란 사람인데 화렌 유지급은 되는 것 같습니다. 아는 것도 많고요. 한국과 대만 외교단절 문제로 논쟁을 했는데 그래도 대인배 기질이라 한국 처지를 이해한답니다. 그리고 참, 우리 숙소 가까운 해안에 카페도 운영한다는데 그곳으로 우릴 초대하겠답니다."
"자네 필담 실력이 놀랍군. 나는 한자가 어두워서 한마디도 모르겠던걸."
이 필담 사건으로 나는 후배 작가인 김을 전보다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김은 바다에 별로 감흥을 못 느꼈고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는데도 금방 싫증을 냈다. 차를 빌려 타이루거 협곡을 한차례 돌아보고 도장포에 들러 화렌의 유명한 옥돌로 도장 하나씩을 새기고 나자, 김이 화렌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듯 이란으로 가는 기차시간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마침 그 때 타이페이의 장숙영이 자기는 주말이 시작되는 내일 이란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나는 화렌에 남은 미련을 훌훌 털어버리고 다음날 오후 김과 함께 이란행 기차에 올랐다.
나는 계속 감기 몸살 기운에 시달렸다. 한겨울의 서울에서 갑자기 열대지대로 날아간 후유증이었다. 게다가 타이완 날씨가 변덕스러워 옷을 제대로 갗춰입지 않은 탓에 체온유지에 실패한 것이다. 장숙영은 무리하게 강행군 하는 걸 피해 이란에서도 우리가 하루 묵도록 조처해주었다. 이번에는 기숙사가 아니고 한적한 곳에 있는 아담한 호텔이었다.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치고 황춘밍이 일하는 스투디오 근처로 가서 손님이 없는 허름한 카페 이층에서 황춘밍과 만났다. 황춘밍은 나이가 들었다고 하나 여전히 액션영화 배우처럼 당당한 체구에 잘생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화렌에는 왜?..."
우리가 화렌에 머물다 온다는 얘길 듣고 황춘밍이 대뜸 물었다.
"이 선생님이 그쪽 바다를 좋아하세요."
나를 대신해 장숙영이 대답했다.
"바다라면 그쪽보다 이란(宜蘭)의 해안선이 훨씬 유명하지. 리조트와 좋은 호텔들도 많고. 언제 이란에 한번 와보세요."
이야기는 이 작가의 절대 지지자인 김과 황춘밍 둘이서 주로 했다. 화제작이던 <사요나라 짜이젠>이 대화의 중심 소재였다. 곁에 유능한 통역자가 있기 때문에 김은 이번에는 그 출중한 필담실력을 꺼낼 필요가 없었다. 성격이 활달한 이 남국의 동년배 작가에게 나도 좋은 느낌을 받긴 했지만 나는 별로 할 얘깃거리가 없었다. 면담을 대강 끝내고 우리는 황춘밍과 다음을 기약한 뒤 세 사람이 숙소로 돌아왔다.
장숙영은 이란의 자기 친구 집에서 하루를 묵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숙소인 호텔 근처에 왔을 때 장숙영이 내게 와서 말했다.
"몸이 좀 어떠세요? 너무 무리하셨나 보죠."
"머 견딜 만합니다. 지금은 어제보다 조금 나았군요."
"그러시면 호텔 뒷쪽 정원에 작은 연못 하나 있고 벤치도 하나 있던데요. 그곳에 잠깐 나오실 수 있겠어요?"
"그러죠. 김도 함께 나오나요?"
"아뇨."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김에게 가서 그 얘길 그대로 전했다. 그러자, 김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서울 떠날 때부터 이런 일을 어렴풋이 예상했어요. 예감은 절대 못 속여요."
"나도 예감은 있지만 얘긴 하지 않겠네. 그건 그렇고 자넨 뭘 하고 지내지?"
"마침 아내에게 전화 하려던 참이었어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김은 자기 방으로 올라갔고 나는 호텔 정문 근처에서 잠시 머물다가 뒤뜰 쪽으로 걸어갔다.
85년도 타이완에 처음 여행했을 때 나는 한국 교포가 운영하는 잡화점에서 <대만추상곡>(臺灣追想曲)이란 음반 하나를 구입했었다. 그럴싸한 제목에 끌린 것이다. 타이완의 가요, 쉽게 말해 유행가 중 인기곡을 모은 것이라 기대감을 갖고 귀국해서 들어봤는데 전혀 감흥에 와 닿는 것이 없어 실망했었다.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구입한 그쪽 인기가요 음반의 경우도 비슷했다. 전혀 감흥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인도의 민속 음악이나 중국식 해금인 얼후로 연주되는 중국 남방 전래곡들은 나 같은 이방인이 처음 들어도 금방 빨려 들어가는 흡인력이 있다.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타이완이나 베트남의 가요에서도 일정한 감흥을 기대했던 것인데 이 노래들은 마치 우리 미각에 전혀 맞지 않는 남방 음식처럼 내게 낯이 설었다.
<여행길의 밤 바람>(旅途夜風), <정거장의 아쉬운 이별>(車點惜別>,<눈물 같은 이슬비>(淚的小雨), 이런 노래 제목들을 보면 영락없는 우리 가요들이다. 그러나 그 음율은 북방계열인 나 같은 사람의 감흥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타이페이에서 문구점에 들렀다가 현지 제작된 멘델스죤의 <무언가> 음반을 발견하고 신기해서 하나를 구입해 장숙영에게 선물했다. 그녀가 가오슝(高雄)에서 고교에 다니는 아들이 요즘 음악 감상에 한창 빠져 있다고 자랑삼아 말한 게 생각나서 아들에게 가져다주라고 건넨 것이다. 장숙영이 가족 얘기를 한 건 그때 딱 한번 뿐이었다.
장숙영의 남편은 산업도시인 가오슝의 무슨 회사에서 기사(技士)로 일한다는데 이 얘기도 타이페이에서 댐 구경을 하고 있을 때 동행했던 그녀 친구에게서 얻어들었다. 장숙영 자신은 결코 남편 얘기를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가오슝은 타이페이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중서부 해안 도시이다. 장숙영은 가족과 떨어져 타이페이에서 독립생활을 오래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호텔 뒷뜰에는 조그만 연못이 있고 연못을 중심으로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조명등 하나가 벤치 옆에 설치되어 있는데 불빛이 너무 희미해서 사람 얼굴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웠다. 장숙영은 이미 거기 나와 벤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로부터 약간 거리를 두고 벤치에 앉았다. 처음 화렌에 관한 몇 마디 얘길 주고 받았다.
바다가 좋았느냐? 음식은 크게 불편하지 않은가? 감기몸살 기운은 좀 나아졌는가?
나는 해변 카페의 왕씨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덕분에 화렌의 며칠이 즐거웠노라고 말했다. 대충 그런 얘기들이 오간 뒤에 장숙영이 가방에서 무슨 비닐봉투 큰 걸 하나 꺼내더니 말도 없이 내게 슬며시 내밀었다. 비닐 봉투 속에는 책 반권 분량의 서류 같은 게 들어 있었다.
"이게 뭐지요?"
얼떨결에 봉투를 받아들고 내가 물었다.
"편지에요. 아주 오래 전에 받은 거랍니다. 뭐 별로 좋은 것도 아닌데 선생님께 불쑥 드려서 미안해요. 그렇지만 저로서는 여러 가지 생각한 끝에 선생님께 드리는 게 좋을 듯하다고 판단했어요. 궁금하시면 서울 가셔서 열어보세요."
그 비닐 봉투를 내게 건네고 장숙영이 한 말은 이것뿐이었다. 다른 설명도 해명도 없었다. 이상한 건 나도 거기에 관해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 감기몸살 기운이 남아서 몸 상태가 좋지 못했다. 그 때문에 두뇌회전이 원활하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나는 겨우 한마디를 혼잣소리로 했을 뿐이다.
"이게 모두 그 사람이 보낸 거로군요."
그러자, 장숙영이 놀라서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 사람을 어떻게 아셨지요? 저는 말씀 드린 적 없는데요."
"아, 저도 몰라요. 그러나 누군가 이걸 쓴 사람이 있을 거고 그러니 그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그냥 막연하게 나와 국적이 같은 사람이 아닌가 정도, 그것도 지금 생각한 겁니다."
"그거야 속을 열어보시면 금방 누군지 아실 텐데요."
장숙영은 늘 하던 것처럼 조용히 웃기만 했다.
내가 장숙영에게 그가 누군지 모른다고 말한 것은 정직한 답변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만약 내가 이미 그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면 나는 독심술의 대가이거나 영험한 예견력을 가진 인물로 자처하는 꼴이 된다. 김이 확신했던 예감이 틀렸듯이 어쩌면 내 예감도 슬쩍 어긋날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예감은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의식해오지 않았지만 장숙영을 처음 만났던 시기부터 무의식 가운데 이 예감은 조금씩 조금씩 뚜렷한 모습으로 형태를 갖춰온 것이다. 장숙영의 표정과 말씨, 작은 무수한 몸짓에서 나는 내 예감의 씨앗들을 얻어낸 것이다. 그것은 상대에게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누구나 가지게 되는 평범한 예감이었다.
- 지금 저 눈이 서울에서 제가 보는 마지막 눈이 될 거에요 -
그때 강남 일식집에서 이런 말을 하고 쓸쓸하게 웃음짓던 장숙영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 편지묶음 전달로 그때의 그 말의 의미가 좀 더 선명해졌다. '한국과의 사랑은 이것으로 끝이에요.' 내게는 이렇게 들렸다. 사랑이 격렬했을수록 그 마감은 비장감을 띠게 된다.
그건 그렇고 장숙영은 빛나는 청춘시대의 유산인 이 은밀한 서신들을 왜 하필 내게 맡기려고 하는 것일까? 태워버리기엔 애달프고 바다에 던져버리기엔 무참해서 친구가 된 내게 물려주려는 것일까? 그가 당신 모국 사람이니 당신에게도 한 가닥 책임이 있는 것 아니냐? 그러니 그 나라 작가인 당신이 이걸 가져가는 것도 얼마간 의미 있는 일 아니냐?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녀는 이걸로 한편의 소설을 써보라고 내게 권유하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의도가 무엇이던 나는 일단 장숙영의 선물 아닌 선물을 적어도 당시에는 소중하게 받아들였다. 한마디 묻지도 않은 채.
그는 동양고전, 특히 공맹(公孟)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인이다. 최근에는 영상매체를 통한 그 활약이 더욱 두드려져서 공맹에 관심 없는 일반인들까지 그의 이름, 얼굴과 목소리를 알아볼 정도가 되었다.
그에 관한 평가는 극단으로 갈린다. 그가 국민의 의식을 한 단계 높여준 ‘국민스승’이라고 칭송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나르시스트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극단의 평가들은 주로 정치적 입장에 따라 엇갈리는 평가들이라 사실 그리 믿을만한 게 못된다. 최근에도 나는 기록으로 남아있는 그의 강의나 강연록을 살펴본 적이 있다. 그는 지식인으로는 드물게 용감한 인물이다.
사회 부조리나 부도덕한 정치풍토에 관한 그의 비판은 거칠 것이 없다. 그 용기와 기개는 아주 오래 전 독재자 시절의 함석헌 옹과도 비견될 정도이다. 몇 해 전 금강산에 갔을 때 그 관광을 가능케 만든 어느 기업인의 유덕비에 새겨놓은 그의 글을 봤던 적이 있다. 잘 쓴 미문은 아니지만 분단에 대한 한 지식인의 탄식과 갈망이 그 짧은 글에 녹아나 있었다. 그의 과장된 제스처, 자신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화법 등이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나는 사회나 정치현실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그의 목소리에 대체로 공감하는 편이다.
그 편지묶음을 받아 서울로 돌아온 뒤 십 오륙 년이 흘러갔다. 그런데 앞서도 말했지만 그 서신의 주인공을 알기 위해 비닐봉투를 열어볼 필요는 없었다. 나는 십 오륙 년 동안 단 한 차례도 그것을 열어보지 않고 고스란히 그대로 보관해왔을 뿐이다. 젊은 시절 열정을 담아 써서 보낸 편지란 그 사람의 심장의 떨림을 기록한 것과도 같다. 적어도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면.
나는 남의 은밀한 심장의 떨림을 혼자 몰래 훔쳐보는 그런 악취미는 갖고 있지 않다. 참지 못할 만큼 호기심이나 궁금증이 발동하지도 않았다. 여기에는 사신도 하나의 인격처럼 그것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생각도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비닐봉투는 잊혀진 상태로 내 서재의 어느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가끔 서가나 서랍을 정리할 때 그게 눈에 띠었으나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장숙영이 내게 던져준 숙제를 너무 오래 묵혀두고 게으름을 피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어느 날 문득 들었다. 원망의 목소리가 멀리 타이완으로부터 환청으로 들리는 것 같았다.
장숙영은 그때 내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소설이 될런지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작품으로 만들어보세요. 선생님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장숙영은 본래 말수가 적고 말을 극도로 아끼는 사람이다. 대개의 경우 그녀는 씁쓸한 웃음으로 말을 대신해버린다. 편지 묶음을 내게 전할 때도 희미한 웃음만 지을 뿐, 다른 설명 따위는 하려고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장숙영이 연문을 내게 전해준 의도를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최근에 번거로운 어떤 일로부터 풀려나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되찾게 된 것도 그 편지에 내가 새삼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게 한편의 소설로 가능할까? 그걸 판단하자면 불가불 그 편지묶음을 열어보는 길 밖에 없다. 나는 십육 년 만에 그 비닐봉투를 뜯고 그 편지들을 열람했다. 반 정도는 한글로 되어있고 반 정도는 영문으로 되어있는 이 서간들은 너무 오래되어 종이는 누렇게 변색되었고 글자들은 퇴색해서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야 겨우 한 자 한 자 해독이 가능할 정도였다.
중국 고전 연구를 평생의 업으로 삼은 한 젊은 학자와 한국의 문학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온 중국의 묘령의 여성, 이 둘의 결합은 개인적 취향을 떠나 일단은 아주 이상적인 구도라고 볼 수 있다. 그 좋은 구도의 그림이 완성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쪽이 모국어인 중국어로 도움을 주고 한쪽은 자기나라 현대문학 개요와 한국말의 미묘한 뉘앙스에 관해 세밀한 조언을 해준다면 두 사람의 학업은 날개를 단 마차처럼 날렵하게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실제로 둘이 사귀던 일정 시간 동안 그런 쌍방의 도움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걸 서신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 지탱하지는 못했다.
나는 장숙영이 일방적 희생자일 거라고 오랫동안 믿고 있었다. 한국 가정의 엄격한 유교적 가풍에 의해 거부된 것이라고 쉽게 생각한 것이다. 지금은 많이 개방되었지만 70년대만 하더라도 국경을 건너뛰는 결혼은 아주 특이한 사례였다. 이런 경우 누구나 이처럼 상투적으로 생각하고 결론을 내려버린다.
그런데 서신을 열람하고 이 판단이 완전히 바뀌었다. 둘 사이에는 그런 외부의 개입이 없더라도 둘만의 극복하기 쉽지 않은 갈등요인이 얼마든지 있었다.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하는 한 괴짜 청년과 결코 녹록치 않은 타이완의 후진적 환경 속에서 여성 학자로 자기 입지를 다져나가야 하는 젊은 여성 사이에는 둘을 가르는 국경 말고도 극복해야 할 갈등요인들이 거미줄처럼 무수히 개재되어 있다. 목숨을 건 절박함이 편지지의 면면에서 묻어나지만 그럴수록 장애의 벽은 점점 높아진다.
이것은 초기의 생각보다 한편의 소설의 자료로는 훨씬 진일보한 내용이다. 만약 <화렌의 연인>을 진정한 픽션으로 작품으로 써야한다면 이제부터 새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써온 것은 소설 <화렌의 연인>의 프롤로그에 지나지 않는다. 이 프롤로그 이후 이 얘기의 본편을 써야 하는지, 장숙영의 사려 깊은 배려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십년 가까이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결심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문제들이 남아있다. 개인적으로는 소재를 바깥에서 얻어오는 소재주의를 그다지 탐탁찮게 생각하는 점도 있다. 그러나 이번에 쓴 이 글이 전환점이 되어 가을의 어느 시점이나 혹은 멀지 않아 다가올 어느 계절에 <화렌>의 본편을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완성된 그 책을 들고 화렌의 바다를 찾아간다면, 그리고 지금은 은퇴해서 지방도시에서 가족과 함께 지낸다는 장숙영을 만나 그 책을 전하게 된다면 그건 아주 즐거운 세 번째 타이완 여행이 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