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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감상]

낯선 도시 모스크바에서 주인공은 추상 속의 지명 콘스탄찌노보로 자신을 데려다 줄 사람을 기다린다. 언어 장벽 때문에 마음 놓고 음식점에 들어가 주문을 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철저한 이방인의 일상 속으로 나름대로 온갖 삶의 역정과 무게를 짊어진 군상들이 스쳐 지나간다. 부모와 자신의 삶을 다 바친 음악적 가능성에서 절망을 발견하는 소녀, 찰라적인 만남 외에 어떤 교류도 불가능한 유학생. 짧은 자전적 스토리 속에서만 만나본 고려인 출신 유명작가 K는 과연 돌아올까? 그들은 그곳에 갈 수 있을까?

 

 


 

비브리오체카 이미나레니나 역. 이 지하철역 이름을 제대로 발음할 때쯤 되면 모스크바 지하철 이용법을 완전하게 터득하게 될 거다. 몇 번 들어도 번번이 철자 하나를 빼 먹거나 발음을 틀리게 한다. 역 근처에 시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레닌도서관이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인데 이곳에 올 때마다 나는 역 이름을 다시 기억에 새겨 두곤 했다. 시내 도심부를 횡단하는 깔조라는 이름의 환상선(環狀線) 중심부에 역이 자리 잡고 있어서 낮에는 언제나 플랫폼은 서로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사람들로 붐빈다.

 

객차 밖으로 나온 나는 직사각형 기둥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청바지에 검은색 재킷을 입은 아가씨가 맞은편에서 내게 손짓했다. 에스컬레이터 앞에 서 있는 걸 보면 그녀도 방금 도착한 모양이다. 나는 명진을 겨우 두 번째 만나는데 벌써 오래 사귄 친구처럼 낯이 익었다. 백인들 틈새에서 드물게 피부 빛이 같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일까. 

 

“빨리 오셨네요. 제가 조금 기다릴 줄 알았는데.” 

 

“오 분 정도 빨리 나온 거야. 집에서.” 

 

우리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왔다. 늦은 오후의 나른한 햇빛이 얼굴로 쏟아졌다. 

 

“시끄럽긴 해도 속도는 참 빠르군.” 

 

“뭐가요?” 

 

“지하철이 그렇다는 얘기야.” 

 

후훗 하고 명진이 갑자기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전 또 누구 피아노 연주가 그렇대는 줄 알았죠. 어제 구한 그 여자 거 들어 보셨어요? 쇼팽 연주했다는 것.” 

 

“이딜 비레. 그 여자 터어키 태생인데 괜찮더군. 헛돈 쓴 것 같지는 않아.” 

 

모든 걸 연주와 관련지어 생각하는 걸 보면 이 아가씨는 피아노 연주에 어지간히 몰두하고 있다. 늘 혼자 다니고 좀처럼 웃을 일이 없는 탓인지 하치않은 일에도 그녀는 헤프게 웃는다. 그 밝은 성품이 내 기분을 가볍게 해 주었다. 

 

“저녁 식사를 하실래요? 점심 식사를 하실래요?” 

 

이것이 함께 식사해 주는 것이,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한 끼 식사를 무난히 해결할 수 있게 돕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임무이다. 문 군이 그렇게 철저하게 부탁을 해놓았을 것이다. 그녀는 잊지 않고 자기 임무부터 이행했다. 

 

“그 두 가지 모두. 나는 아직 점심 전이거든.” 

 

시간은 오후 다섯 시를 가리켰다. 

 

“문 선생 연락 오지 않았나요?” 

 

“응. 그 친구는 내게 전화하는 법을 잊었나 봐.” 

 

“그 분은 그런 분이 아니래요. 아마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거예요.” 

 

“K 말인가?” 

 

“네. K 선생님.” 

 

“K가 내게 빚이 있는 것도 아냐. 끝내 오지 않아도 하는 수 없는 거지 뭐.” 

 

“언젠가 교민들 모임에서 그 분을 한번 뵌 적 있어요. 잠시 나타나서 농담 한 마디 슬쩍 던지고 곧 가셨는데 재미있는 분 같았어요. 아마 잘 될 거라 믿어요.” 

 

“뭐가 잘 된다는 거지?” 

 

K 얘기만 나오면 나는 공연히 짜증난 말투가 된다. 

 

“K 선생님하고 선생님, 두 분의 만남이 말예요. 그 분 다차로 함께 가시면 틀림없이 두 분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거라 믿어요.” 

 

언제나 한 끼 식사 해결하는 것이 문제다. 조반은 숙소에서 식빵과 커피 한 잔으로 때우는데 그 정도는 숙소 주방에서 스스로 해결이 된다. 문 군이 안내역을 맡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데 문 군은 이런저런 이유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아파트 밖으로 나서면 나는 완전한 벙어리가 된다. 혼자서는 식당으로 들어가서 메뉴를 시킬 수도 없다. 식당으로 들어가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갖가지 손짓으로 자기가 먹고자 하는 음식을 요구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 끔찍하다.

 

아파트에서 백 미터만 걸어가면 지하에 서민들이 드나드는 조그만 식당이 하나 있다. 내게 아파트를 빌려 주고 방학 기간 동안 서울로 돌아간 학생이 알려 준 곳인데 값도 비싸지 않고 음식 맛도 괜찮은 곳이다. 특히 소스를 곁들인 그 집 연어 스테이크는 맛이 훌륭했다. 그 학생과 처음 한 번 가서 그 음식을 맛봤다. 그러나 그 뒤로는 그 지하 식당으로 한 차례도 내려가지 못했다. 몇 번 시도는 해 봤다. 그 식당 앞길을 오가면서 자기의 용기를 부추기고 입구 앞까지 다가 서 보기도 했으나 어두컴컴한 지하 계단 입구로 차마 발길을 옮기지는 못했다. 

 


 

식당을 찾는 동안 명진은 며칠 전 처음 만났을 때 내게 건넸던 음반에 관해 서둘러 묻지 않았다. 말은 없지만 거기에 마음을 크게 쓰고 있다는 증거다. 

 

‘시간 때우기 힘드실 때 들어 보세요.’ 

 

헤어질 때 그녀는 불쑥 내게 그 음반을 건넸다. 나는 무심코 그것을 받았지만 돌아갈 때 생각해 봤더니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만약 연주가 신통치 않으면 어쩌나 하고. 명진은 십이 년째 피아노에 매달려 이 먼 나라의 도시에서 머물고 있다. 초등학교 오학년 때 와서 지금은 대학원 마지막 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사춘기와 젊은 나이의 태반을 이곳에서 보낸 것이다. 피아노는 그녀에게 목숨과 같다. 차도를 몇 번 건넌 끝에 겨우 명진이 식당을 찾아냈다. 지하에 있는 조그만 식당인데 인도에서 계단으로 내려가는 입구에 작은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이 집이 값이 싸고 음식을 잘 해요. 점심때는 반값에도 먹는데 지금은 안 되겠어요.” 

 

좁은 홀로 내려가서 겨우 구석에 두 사람이 끼어들 자리를 찾아냈다. 

 

“날마다 메뉴가 바뀌는데 마침 오늘 연어 스테이크가 나오네요. 연어 스테이크 말고 이 집에 생선 수프도 맛이 있는데.” 

 

“그럼 수프로 하자. 검은 빵에 생선 수프.” 

 

지하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후식으로 커피를 마셨다. 이쯤에서 아무래도 그 음반 얘기를 꺼내야 할 것 같았다. 잠자코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무심해서 듣지도 않았다는 오해를 받게 된다. 성격이 무척 밝은 이 아가씨의 심정이 지금 그다지 편하지 않다는 걸 나는 첫날부터 알았다. 그녀는 아파트를 빌려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있으며 자영업을 한다는 아버지는 홀로 서울에서 지내고 있다. 한국의 어머니가 흔히 그렇듯 명진의 어머니도 딸의 음악 수업을 위해 이 추운 나라에서 십이 년째 보내고 있다. 그 어머니는 삶의 맛이 가장 무르녹은 자신의 황금시절을 딸의 피아노에 몽땅 바쳐 버린 것이다. 

 

첫날 얼굴을 마주치자, 나는 아주 상투적인 질문부터 했다. 

 

“콩쿠르에는 나갔겠지? 그런 기회가 참 많았을 텐데” 

 

내가 무심코 던진 말에 명진이 화들짝 놀랐다.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몇 번 나갔지만 잘 안 되었어요.” 

 

“괜찮아. 기회는 얼마든지 또 있지.” 

 

“이젠 기회도 없어요. 괜찮지도 않고요.” 

 

잠시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지난 겨울에 엄마가 뭐라 하신 줄 아세요? ……새해에도 아무런 결과물이 없으면 모녀가 모스크바 강으로 뛰어들재요. 우리 동네 스포르찌나 역에서 한 정거장만 나가면 강 위로 철교가 지나가요.” 

 

“그래서 뭐라고 했지?” 

 

“그런다고 했죠.” 

 

“뭐가 그리 심각한가?” 

 

“당사자가 아니면 잘 모르죠. 앞이 캄캄해요. 돈 많은 부자가 뒤에서 밀어 주는 것도 아니고 서울에 가도 발붙일 데가 없어요. 그래서 요즘은 다 잊고 살아요.” 

 

괜히 콩쿠르 얘기를 꺼냈다가 첫날은 끝까지 우울한 분위기를 지워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날 건네받은 가제음반을 아주 신중하게 들어 봤을 것이다. 아파트에는 방의 주인이 사용하는 미니 컴포넌트가 있었다. 우리는 식당에서 나와서 거기서 가까운 레닌도서관 광장으로 갔다. 광장에는 실물보다 몇 갑절은 커 보이는 레닌 동상이 아직 남아 있고 동상 주위에는 시민의 휴식을 위해 여러 개의 벤치들이 놓여 있었다. 자리를 옮기고 잠시 숨을 고른 뒤에 나는 겨우 그 음반 얘기를 꺼냈다. 

 

“발라키레프가 편곡한 〈종달새〉는 들을 만하더라.” 

 

“곡이 마음에 드세요?” 

 

“곡도 좋고 연주도 훌륭했어. 내가 열 번도 더 들었을 걸.” 

 

명진이 준 음반에는 주로 러시아 곡들만 여럿 있었는데 그링카의 노래를 편곡한 이 짧은 피아노 소품이 가장 돋보였다. 

 

“호호, 영광이네요. 시끄러운 데서 녹음해서 걱정했는데.” 

 

명진의 얼굴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녀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우리 엄마가 이런 평가를 직접 들었어야 하는데.” 

 

“다음에 그런 기회가 오면 내가 직접 말할게. 넌 러시아 민속 분위기를 썩 잘 그려내더라. 여기 오래 살아서 그런가. 하긴 오래 산다고 누구나 그렇게 할 수는 없지.” 

 

“그렇잖아도 러시아 곡만으로 음반 한 장을 꾸며 보고 싶었어요.” 

 

“좋은 생각이야. 내가 음반 제작자라면 당장 계약하겠는데. 그런데 쇼팽은 치지 않나?” 

 

“왜요? 자주 치는데요.” 

 

“알고 있겠지만 서울에서는 쇼팽을 쳐야 인기를 얻어. 다음에는 네가 친 쇼팽을 한번 듣고 싶어. 네가 쇼팽을 발라키레프 곡만큼만 친다면 모스크바 강에 뛰어들지 않아도 되겠더라.” 

 

“선생님이 다차에서 돌아오신 다음에도 시간이 주어진다면 꼭 들려 드리죠. 거기가 어디라고 하셨죠? 랴잔의…….” 

 

“콘스탄찌노보.” 

 


 

 

 

“아아 콘스탄찌노보는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저는 러시아에서 십사 년째 살아오지만 그렇게 풍광이 좋은 곳은 처음 봤어요. 직접 가서 보시면 선생님도 감탄이 절로 나올 겁니다.” 

 

문 군은 몇 달 전 K가 그를 그곳으로 데려가서 하루 동안 머물다가 돌아왔다고 말했다. 논문 준비로 시간에 쫓기지만 않았다면 며칠 더 묵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게 아쉽다는 말도 했다. 

 

“아름다운 호수도 있고 중부 러시아의 멋진 전원 풍경을 볼 수 있어요. 그런 곳에 가 볼 수 있다는 건 행운이죠. 러시아에서 몇 해씩 생활해도 그런 곳에 가 볼 기회가 좀처럼 없거든요.” 

 

내게 K를 연결해 준 서울의 L 교수도 랴잔 주의 다차에 관해 문 군과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그런 얘기를 듣고 콘스탄찌노보에 대한 내 기대감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모스크바에 와서 K를 기다리는 동안, 기대감은 조금씩 식어 갔다. K가 약속된 날짜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콘스탄찌노보는 실재하는 땅이 아닌, 소재지도 확인되지 않은 추상적인 지명으로 차츰 변했다. 

 

K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를 기다린 지 벌써 달포가 지났다. K와 나를 연결해 주는 문 군도 그가 언제 모스크바로 돌아올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문 군은 그와 통화가 가능하긴 해도 저쪽에서 전화기를 자주 꺼 놓고 있거나 통신 상태가 좋지 않아서 K의 목소리 듣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도리어 내게 하소연한다. 통화하기 어렵기는 문 군 쪽도 녹록치 않다. 그는 시내에 있지만 너무 바빠서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 그는 학위 논문 최종 심사가 바로 코앞에 닥쳐서 끼니 찾아 먹는 것도 잊고 지낼 만큼 바쁘다는 것이다. 

 

문 군은 낮에 도서관이나 논문 지도교수 댁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숙소에는 늦은 밤에 돌아간다. 문 군의 휴대폰도 먹통 상태일 때가 잦다. 그는 문체가 매우 까다롭기로 소문난 제정시대 작가 자미아찐의 작품을 논문 주제로 삼았는데 그의 문장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어떤 때는 휴대폰 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게다가 지도교수라는 노인은 성격이 까다롭고 엄격한 인물로 그의 옆에 있는 동안 어쩌다 문 군의 휴대폰 벨소리라도 울리면 당장 하던 일을 멈추고 무서운 눈초리로 문 군을 노려본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나와 콘스탄찌노보 사이에는 첫 목적지인 짙은 안개가 첩첩이 쌓여 있는 것이다. 

 

K는 모스크바에서 수천 킬로나 떨어진 카자흐스탄의 알마타에 머물고 있다. 러시아 시민인 그가 생활 근거가 그곳이고 이 여름에 왜 그곳에 머무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K는 정말 그곳에 있는 것인가?’ 혹 그는 지금 모스크바 거리를 활보하면서 입장이 난처해서 나를 외면하느라고 엉뚱한 속임수를 쓰는 건 아닐까?’ 

 

가끔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들 때도 있다. K가 어떤 인물인지 전혀 모르는 나는 그런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K가 거기서 하는 일이 뭐요?” 

 

“저야 알 수 없죠. 워낙 바쁜 분이니까. 거기서 정리할 일이 있나 본데 내용은 모릅니다. 어른에게 무슨 일이냐고 꼬치꼬치 캐묻기도 곤란하고요.” 

 

가끔 가뭄에 콩 나듯 나는 문 군과 통화 기회를 갖는다. 도서관이나 지도교수 댁에서 용무를 다 마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불쑥 내게 전화를 걸어온다. 그는 어두운 어느 골목 모퉁이에서 전화를 하는지도 모른다. 음악도인 명진을 자기 대역으로 내게 소개시킨 것도 이런 전화를 통해서였다. 

 

‘음악 얘길 나눌 수 있을 거라고 했더니 기꺼이 선생님을 위해 시간을 내겠대요. 그 학생에게 아파트 전화번호를 알려줬어요.’ 바로 다음날 레닌도서관 광장으로 나가서 나는 명진을 만났다. 

 

“계시는 아파트는 어떻습니까? 역시 오래된 아파트라 불편한 점이 많으실 텐데요.” 

 

“잠자고 쉬는 데는 불편은 없소. 요즘은 비둘기가 내 친구요. 비둘기랑 얘기하다 보면 하루해가 그냥 저물어 가요.” 

 

“툴스카야 역 근처에 비둘기가 엄청나게 많다는 얘긴 들었습니다. 제가 시간 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내가 임시 숙소로 이용하는 곳은 아주 낡은 방 두 칸짜리 소형 아파트다. 실제는 거실 겸 침실로 쓰는 방 하나와 주방과 독립 화장실로 되어 있다. 후루시초프 시절에 열악한 서민 주택의 보급책으로 시 외곽에 성냥갑 형태의 소형 아파트를 대량 건설했는데 업적 홍보를 위해 건축을 조급하게 서두르는 바람에 날림 공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 아파트도 문 군이 서둘러 빌려 준 것인데 방의 진짜 주인은 서울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고 있다. 

 

K에 관해 나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오래 전 그의 몇 작품들이 국내에서 출간되어 그의 이름과 함께 알려졌으나 나는 하나도 읽지 못했다. 아마 고려인 출신 작가라는 꼬리표에 큰 관심을 갖지 못했던 것 같다. 러시아문학 전공인 L 교수 말에 의하면 그의 작품은 전위성이 강한데 러시아 말로는 아름답고 정교한 문체이나 우리말로 서툴게 옮겨 놓으면 내용이 모호해지는 경향이 있어서 당시 출간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K의 작품을 읽었다거나 그의 작품에 관해 말하는 사람을 나는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K의 이름이 알려지고 한두 해가 지났을 무렵에 나는 어느 잡지에 실린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것도 고작 한두 페이지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거기서 묘사된 어떤 한 장면은 내 흥미를 끌었고 지금까지 나는 그 짧은 장면만 기억하고 있다. 

 

K는 군에서 막 제대한 뒤 건설 현장에서 크레인 기중기 운전기사로 일했다. 몸을 부리는 노동이 처음은 아니고 입대 전에도 그는 건설 현장에서 갖가지 막일을 했었다. 

 

‘기중기 운전기사는 노동판에서 내가 얻은 가장 근사한 직종이었다.’ 

 

그는 자전에서 이렇게 썼다. 저녁 무렵에 기중기의 높은 운전석에 앉아 있으면 도심지 아파트의 내부가 환히 들여다보인다. 살을 드러내고 옷을 갈아입는 여인도 보이고 주방에서 맛있는 저녁 식탁을 마련하느라고 분주한 주부도 보이고 한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며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어느 중산층 가정의 풍경도 볼 수 있다. 혹은 대상이 상류사회 가정일 수도 있다. 가진 거라곤 젊음밖에 없는, 건설 공사 판을 전전하는 고려인 청년이 도심의 높은 허공에 떠 있는 기중기 운전석에 앉아 그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K는 거기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는 싱겁게도 젊음의 충동에 이끌려 벗은 여인의 몸을 훔쳐본 행동에 관해 훗날 도덕적 자괴감을 느꼈다는 고백을 끝으로 그 얘기를 끝냈다. 

 

K는 공백으로 남겨 뒀지만 나는 이 장면에서 그가 당시 느꼈을 복잡한 심사와 갈등을 유추해 봤다. 공사판 인부로 전전하는 고려인 청년이 모스크바의 상류사회로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회주의 사회에도 출신 인종에 대한 차별은 존재한다. 그것은 단순히 돈을 좀 모았다거나 한 가지 특출한 재주를 지녔다고 해서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두려움 없이 몽상을 즐기는 이 고려인 청년은 그때 높이 떠 있는 기중기의 운전석에 앉아 미래에 자신이 그 상류사회 복판으로 진출해서 인정을 받고 활동하는 꿈을 꾸지 않았을까? 

 

오랜 세월이 지나 K는 당시 불가능해 보이던 그 꿈을 이루어냈다. 그는 상류사회 복판으로 진출했다. 사회주의가 한창이던 시기에 K는 이미 저명인사로 명성을 누렸고 상당한 재정적 기반도 닦았다. 이곳 교민들은 K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누구나 감탄과 존경의 말을 쏟아냈다. 그들은 K가 이루어낸 일들을 기적이라고 말했다. L 교수가 K는 러시아인보다 더 정교하고 아름다운 러시아 문체를 구사한다고 말했을 때 나도 그 ‘기적론’에 동의했다. 

 

그러나 내가 흥미를 느낀 것은 현재의 K라기보다 까마득한 과거의 K의 모습이다. 늦은 저녁 무렵 공사장 기중기 운전석에 앉아 상류사회의 내밀한 풍경을 호시탐탐 엿보면서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다짐하는 소수민족 출신의 가난뱅이 몽상가, 내 뇌리에는 K는 여전히 이런 모습으로 남아 있다. 

 


 

 

아파트에서 툴스카야 지하철역까지는 걸어서 불과 삼 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툴스카야 역은 도심의 환상선(環狀線) 깔쪼에서 고작 두 정거장 바깥으로 나오는 위치에 있다. 아파트는 아주 낡았고 주로 하층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지만 교통 사정은 좋은 편이다. 도심까지 불과 십 분이면 달려갈 수 있다. 하나뿐인 방에는 피아노와 미니 컴포넌트가 있고 이름 난 바이올린 연주가들의 각종 음반이 수 십 장 진열되어 있다. 음악도인 방의 주인이 남겨둔 물건들인데 덕분에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나는 자주 음악 감상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아파트는 사 층인데 나는 공기 순환을 위해 뒤쪽 베란다 창을 종일 열어 두고 지냈다. 뒤편에는 으슥한 골목길이 있고 그 길 저쪽에는 큰 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는 볼품없는 숲이 있다. 골목길에는 가끔 행인들이 지나가고 쓰레기를 거두어 가는 1톤 트럭이 들어와서 잠시 머물기도 했다. 해가 밝은 오전에는 유모차를 끌고 한가롭게 걷고 있는 근처 단지의 젊은 주부들도 눈에 띄었다.

 

해질녘이 되면 술을 거나하게 마신 행인이 혼자 무슨 말을 중얼거리며 비틀걸음으로 걸어가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주정꾼도 손에는 그날 구입한 식료품을 담은 손가방을 으레 하나씩 들고 있었다. 이 골목길 허공에는 전선 몇 가닥이 지나가고 있는데 낮에는 언제나 비둘기들이 네댓 마리, 때로는 수십 마리씩 전선 위에 떼 지어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끔 아파트 주방 창턱으로 날아와 앉아 있는 비둘기를 발견할 때도 있었다. 비둘기가 주방 창턱까지 날아온 이유가 음식 냄새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바로 눈앞에 나타난 새가 언제나 반가웠다. 이방의 새들이 낯선 이방인을 낯가림하지 않고 찾아 준 사실이 고마운 것이다. 그런 새를 발견하면 나는 비둘기와 몇 마디 얘기라도 주고받을 것 같은 기대감에 설레면서 창턱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서서 손님의 동태를 살핀다. 만약 새와 대화가 가능하다면 러시아 말이 아니라도 서로 뜻이 통하지 않을까? 새들은 국적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기척을 느낀 비둘기는 내게 한 마디 인사말도 건넬 틈을 주지 않고 자기 친구들이 있는 전선 쪽으로 잽싸게 날아가 버리곤 했다. 

 

‘먹을 걸 조금 마련해 두고 손님을 기다려야 할까?’ 

 

다음에는 새의 먹거리를 창턱에 놓아두고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조반으로 먹다 남긴 식빵 부스러기를 주방 창턱에 놓아두고 새를 기다렸다. 지하철역 부근에 있는 종합상가 건물 앞마당에는 정말 많은 비둘기들이 떼 지어 놀고 있다. 아마 수백 마리쯤 될 것이다. 그 부근에 먹거리가 풍부한 탓인지 새들은 살이 통통 올라 있다. 너무 살이 쪄서 뒤뚱거리며 걷는 새도 있다.

 

이 새들은 사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빵부스러기나 과자 조각을 던져 주면 새들은 사람의 턱 밑까지 다가와 먹거리를 말끔히 먹어 치우고 천천히 물러난다. 새는 내가 먹이를 창턱에 놓고 주방에 머무는 동안에는 한 차례도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잠시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창턱에 놓아둔 먹이는 어느새 치워지고 없었다. 비둘기가 와서 먹고 돌아간 것이다. 나는 비둘기와 서로 말을 트는 데 한 차례도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러시아 말을 거의 한 마디도 입 밖으로 꺼낼 줄 모른다. 오래 전 간단한 인사말 몇 마디를 익혔으나 정확한 발음은 잊어 버렸고 그런 서툰 발음으로 지껄일 용기가 나지 않아 아예 입을 굳게 닫아 버렸다.

 

언어 때문에 나는 이 도시에서 벙어리이고 귀머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치 자폐증에 빠진 소년처럼 혼자 문 밖으로 나가기가 겁났다. 엉뚱하게 먼 나라까지 와서 수인처럼 갇혀 살고 있다고 문 군에게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길을 걷다가 아담한 카페를 발견하면 그곳에서 잠시 쉬고 싶어도 나는 그냥 지나쳐 버린다. 이런 때 명진이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피아노 연습에 바쁜 그녀를 아무 때나 불러낼 수는 없었다.

 

내가 유일하게 마음 놓고 찾아가는 식당이 하나 있다. 종합상가 건물 일층에 있는 피자 코너인데 나는 대체로 하루 한 차례는 그 가게 바깥에 임시로 마련된 야외 식탁에 앉아 있곤 했다. 그 가게 메뉴가 식성에는 맞지 않아도 거기서는 러시아 말을 한 마디 하지 않아도 간단하게 한 끼 해결이 되었다.

 

피자 코너는 모든 메뉴를 큰 유리 진열장 속에 진열해 두기 때문에 내가 손짓과 함께 한국말로 ‘이것!’ 혹은 ‘저것!’이라고 외치면 종업원은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초기에는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한국말의 이 지시대명사를 듣고 식당의 젊은 아가씨들이 자기네끼리 눈을 마주치며 야릇한 웃음을 입가에 흘리곤 했으나 같은 일을 몇 번 경험하자, 그들도 나의 독특한 주문 방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한 마디 말 때문에 가장 당혹스런 순간이 있었다. 가장 가까운 이웃 남자와 하루 한 번 꼴로 나는 계단이나 집 앞 행길에서 얼굴을 마주쳤다. 이 아파트는 두 가구가 하나의 중간 출입문을 이용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심한 대머리인 이웃집 남자는 마흔 전후로 보이는 중년인데 표정이 늘 밝은 호인풍의 사내이다. 그는 일정한 직업이 없는지, 혹은 임시로 직장을 쉬고 있는지 종일 집이나 집 앞 거리에서 빈둥거렸다.

 

그는 바깥 큰 문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나와 마주치면 손을 번쩍 치켜들고 크고 굵은 목소리로 인사말을 내게 건넨다. 얼굴에는 이웃에 대한 친밀감을 드러내는 웃음이 넘친다. 나도 러시아의 가장 보편적인 인사말인 한 마디, ‘드라스비체!’는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사내는 마주칠 때마다 그 보편적인 인사말 대신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말로 인사를 했다. 그 뜻은 추측컨대 ‘드라스비체!’보다 더욱 각별한 내용일 것이다. 호의와 친밀감이 듬뿍 담긴 이 사내의 인사를 받은 나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계단에서 잠시 쩔쩔매고 있다. 나는 숨을 수 있다면 숨고만 싶었다. 

 

그런데 사실은 나도 이 친절한 이웃남자와 그의 아내에게 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속마음으로는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부부는 거의 매일 밤 부부싸움을 벌였고 나는 이들의 부부싸움을 거의 놓치지 않고 엿듣고 있기 때문이다. 벽은 방음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들이 다투는 소리는 가감 없이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주로 얘기를 길게 늘어놓는 쪽은 여자 쪽이고 남자는 이따금 타악기의 폭발음 같은 고함을 짧게 지른다. 싸움은 한 시간, 때로는 자정에서 새벽까지 이어진다. 물론 나는 그들의 말을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싸움이 이 지구 위에 사는 인종이라면 누구나 경험하게 마련인 흔한 부부 싸움이란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하는 싸움의 내용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인종들의 모든 부부 싸움이란 대체로 같은 주제와 내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언젠가 담배와 간식용 과자를 사 가지고 들어오다가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옆집 부인과 마주쳤다. 여자는 개를 산책시키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몸집이 송아지만큼 크고 두 귀가 축 늘어진 갈색 개의 목을 여자는 한쪽 팔로 껴안고 서 있었는데 그녀가 마치 개를 친자식처럼 애지중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에 대한 정성은 남자도 지지 않았다. 그가 아파트 앞길 건너편 공원에서 개와 함께 산책하는 장면을 나는 여러 차례 목격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개는 세상 이치를 모두 훤히 알고 있는 성숙한 영물처럼 점잖고 의젓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부가 한결같이 개에게 지극한 정성을 기울이는 걸 보면 이 개야말로 이 가정을 지탱시켜 주고 부부 사이를 연결해 주는 이 집의 기둥이란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화장을 거의 하지 않은 여자의 얼굴에는 잔주름이 많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여자는 의젓하고 품위 있는 웃음으로 내게 인사했다. 그녀는 내게 엘리베이터 차례를 사양했다. 이방인 이웃에 대한 너그러운 배려였다. 구식이고 소형인 엘리베이터는 큰 개와 사람 둘이 함께 들어갈 수 없었다. 이 부인의 표정에서 밤을 새워 가며 부부 싸움을 벌이는 그악스런 여인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대머리인 남편에 비하면 여자는 적어도 십년 이상 나이 많은 여인처럼 보였다. 

 

“여자가 훨씬 늙어 보이대요. 밖에서 보면 누가 부부라고 믿겠어요?” 

 

처음 이곳으로 옮겨온 날 계단에서 부부를 만났다는 문 군도 이런 말을 했다. 

 

“러시아는 여자들이 결혼 이후 빨리 늙어 버립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걸 여러 차례 봤어요.” 

 


 

 

밤이 이슥한데 전화가 걸려왔다. 좀처럼 듣지 못하던 문 군 목소리다. 

 

“지금 뭘 하고 계세요? 밤이라 비둘기도 오지 않았을 텐데요.”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소. 그런데 이 시간에 어떻게……?” 

 

“논문 작성을 겨우 끝내 교수님께 전하고 교수님 댁에서 방금 나오는 길입니다.” 

 

“그것 잘 되었군. 축하하오.” 

 

여러 차례 지적을 받고 논문을 수정하고 보완하느라고 애를 먹는다는 소리를 그에게서 들었다. 까다로운 교수가 드디어 두 손을 든 모양이다. 

 

“제가 지금 그쪽으로 가도 될까요?” 

 

무슨 일일까? 좋은 소식을 전하려는 것일까? 

 

“그럼 뵌 지도 오래 되었으니까 잠깐 들르겠습니다.” 

 

문 군이 무척 서두르는 기색이다. K로부터 드디어 소식이 온 것인가? 그게 아니면 논문이 끝났으니 이제부터 박물관과 미술관과 볼쇼이 극장 안내를 시작하겠다는 것인가? 그것은 처음 만났을 때 약속이었다. 문 군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십오 분쯤 지나 중간 출입문 쪽에서 종달새 울음소리가 짧게 들렸다. 손님이 온 신호다. 문 군은 방수복을 입었는데 거실로 들어서는 문 군의 옷깃에서 빗물이 몇 방울 흘러내렸다. 그는 씨름선수처럼 탄탄한 몸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건강체가 아니라면 주머니 사정도 넉넉지 않은데 십 년째 객지 생활을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비가 오고 있소?” 

 

“소나기가 잠시 왔다 그쳤어요.” 

 

“밖에 나가지 않으니까 비가 오는 것도 모르겠네.” 

 

“저는 내일 페테르부르그로 떠납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그가 말했다. 

 

“서울에서 오신 교수님 두 분을 모시고 갑니다. 모교 은사님들인데 저 말고 안내해 드릴 사람이 없네요. 두 분도 저를 원하시고. 한 분은 금년 정년인데 마지막 러시아 여행을 오신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잠시 가졌던 박물관과 미술관과 볼쇼이 극장에 대한 기대감마저 와르르 무너졌다. 다만 내게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하려고 이 늦은 밤에 찾아온 것인가? 문 군이 원망스럽지만 내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논문 끝내느라고 잔뜩 지쳤을 텐데 쉬지도 못하게 되었군. 당신 지금 무척 피곤해 보여.” 

 

“피아노 치는 아가씨는 자주 연락 오나요?” 

 

내 기분을 헤아린 문 군이 슬쩍 말머리를 돌린다. 

 

“필요하면 내 쪽에서 연락하기로 했는데 너무 염치가 없어서 자주 연락 못해요.”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그녀도 선생님께 많이 배운다고 좋아하던데요.” 

 

“그거야 으레 하는 인사치레지.” 

 

“좌우간 K 선생께서 빨리 오셔야 하는데. 그래야 저도 안심이 되지요.” 

 

“K가 올 것 같소? 그는 아주 그쪽에 눌러앉을 생각을 하는 게 아니요?” 

 

“약속을 그런 식으로 흘려버릴 분이 아닙니다. 늦어졌지만 틀림없이 K 선생은 돌아와서 선생님을 콘스탄찌노보로 데려가실 겁니다.” 

 

‘콘스탄치노보’―한동안 잊고 있던 그 지역 이름이 문 군의 입을 통해 다시 기억에서 되살아났다. 그 이름은 여전히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지명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두 분이 거길 가시더라도 저는 아마도 콘스탄치노보에 동행은 못할 것 같습니다.” 

 

문 군의 이 말은 내게 충격으로 들렸다. 

 

“그럼 말도 통하지 않은 K와 나 두 사람만 가는가?” 

 

문 군은 잠자코 있다가 다시 말했다. 

 

“교수님들 여행 일정이 길어질 것 같고요. 제가 끼어들면 K 선생께 부담만 지워 드립니다.” 

 

그는 이미 마음을 분명히 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언어라는 매개물이 제거된 두 사람의 만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문 군의 동행을 굳게 믿었던 나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L 교수도 당연히 문 군이 그곳에 동행할 거라고 말했다. 

 

"K는 한국말이 아주 불가능하오?” 

 

“가벼운 인사말 정도라고 할까요. 무슨 담론 같은 것은 기대 못하죠. 그런데 두 분 사이에 반드시 언어가 필요할까요?” 

 

“……?” 

 

문 군이 기묘한 말을 했다. 그가 말하는 의도를 알 것 같기도 했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 물음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문 군이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치면서 말했다. 

 

“아, 참 그 새 부인이 알마타에서 우리말 교사를 하셨답니다. 어느 수준인지 몰라도 만약 부인과 함께 오시면 도움이 되겠는데요.” 

 

“새 부인이라뇨?” 

 

“제가 말씀 안 드렸나요? 참 그렇군. 전 당연히 아실 줄만 알고. K 선생께서 바로 얼마 전 이혼하셨어요. 이혼하고 바로 카자흐스탄으로 가신 겁니다.” 

 

“러시아 부인은 젊고 미인이란 소문이 있던데요.” 

 

“나이 차이가 컸지요. K 선생께서 무척 사랑하신 걸로 아는데요. 아무튼 그곳에 가자마자, 새 부인을 만난 것은 다행이지요. 한국 말 교사란 걸 보면 이번에는 고려인 출신인가 봐요.” 

 

“그다지 사랑했다면 왜 헤어졌을까? K가 참 안됐네.” 

 

“저는 깊은 내용은 모릅니다. 여기서는 이혼하는 문제가 한국처럼 그렇게 중대사건이 아닙니다. 두 번 세 번 결혼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예술가들이 특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이혼한 사이끼리 친구처럼 지내기도 하고. 다른 건 불합리한 것 투성이지만 결혼이나 성 문제 같은 것은 러시아 사람들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K 선생만 해도 이번에 헤어진 러시아 부인이 처음은 아니죠. 첫 부인은 고려인이라고 들었는데 그 부인과 사이에 따님도 두 명 있고.” 

 

L 교수는 왜 K의 이혼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K와 교신이 잦은 그가 K의 신변에 생긴 가장 중요한 변화를 모를 리가 없다. 아마 K는 자기 사생활의 변화를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했을 터이고 L 교수도 그 문제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러시아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니까.

 

그런데 엉뚱하게 K의 이혼은 내 마음에 마치 자기의 젊은 날의 실연의 기억처럼 잔잔한 아픔의 파문을 일으켰다. 그 얘길 듣는 순간 아마 허공에 높이 떠 있는 기중기의 운전석에 앉아 모스크바 중산층의 저녁 식탁을 훔쳐보는 이방인 청년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K의 글이 실린 잡지에서 그가 그린 스케치 몇 점을 본 일이 있다. 인물 스케치인데 대부분 젊은 여성의 전신상이나 반신상이었고 노파나 남자를 그린 것도 한두 점 있었다.

 

K는 화가로 친다면 매우 탐미적 경향이 짙은 인물이다. K가 한때 화가 지망생이었다는 얘기는 그의 자전에도 나와 있다. 그의 선은 세련되고 무척 대담했다. 젊은 여성들은 갸름한 턱, 날카로운 콧날, 꿈을 꾸는 듯한 아련한 눈빛 등 모두가 미인인데 K가 그린 여성들의 매력적인 모습에서 나는 한동안 눈길을 떼지 못했다. 

 

도심의 거리나 지하철에서는 이따금 그 스케치에서 방금 걸어 나온 것 같은 매력적인 젊은 여성들을 볼 수가 있다. 문 군이 K와 이혼한 전처가 젊고 아름다운 러시아 여성이란 말을 했을 때 나는 K가 그린 그 여성들을 떠올렸다. K는 분명 자기 취향에 어울리는 여성상을 그렸을 것이다. 화가들은 대체로 자기가 꿈꾸는 여성상을 그려낸다는 글을 어디서 읽은 기억이 있다. 

 

‘나이 차이가 컸지요. K 선생께서 무척 사랑하신 걸로 아는데요.’ 

 

문 군의 이 말이 쉽게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저건 뭐지? 저 그림 괜찮은데.” 

 

작고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가 귀를 쫑긋 세우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앙증맞은 모습에 나는 움찔했다. 

 

“저 책 제목이 뭔가? 동화 같기도 한데.” 

 

서점에서 나오다가 행길 쪽 진열장에 놓인 책의 표지를 발견하고 나는 명진에게 물었다. 나는 좀 더 가까이 다가서서 표지 그림을 들여다봤다. 

 

“네. <넌 언제 외롭니?>라는 제목이네요.” 

 

‘넌 언제 외롭니?’ 나는 명진의 소리를 흉내 냈다. 

 

“그 제목 재미있네. 무슨 책일까?” 

 

명진이 재빨리 서점 안으로 다시 들어가서 책을 대강 살펴보고 밖으로 나왔다. 

 

“동화책이 아니에요. 애완동물, 그러니까 강아지 말고도 고양이, 다람쥐, 거북이 등을 잘 기르고 먹이는 사육 가이드예요.” 

 

“저 책 한 권 사 볼까?” 나는 그림에 끌려 가벼운 유혹을 느꼈다. 

 

“애완동물 사육가이드가 필요하세요?” 

 

“아니, 그냥 제목과 그림이 맘에 들어.” 

 

“제목만 보고 책을 사세요? 호호, 그림이 아니고 사진인데요.” 

 

명진이 웃는 바람에 책을 사겠다는 충동이 금방 사라졌다. 명진과 함께 행인들이 붐비는 인도를 다시 걷고 있는데 방금 본 책 표지에 나온 강아지 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내가 묵고 있는 아파트 거실 피아노 위에는 명함 크기만 한 강아지 사진 한 장이 놓여 있다. 나는 집을 떠날 때 그 사진을 특별히 마련해 가지고 왔다.

 

사진은 여름 풀밭에서 신나게 뛰어놀다가 잠시 멈춰 서서 제 주인을 바라보는 그리미의 모습이다. 내가 방금 책 표지의 사진을 보고 움찔 놀란 건 그 사진이 그리미의 얼굴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리미는 그림처럼 예쁘다고 아내가 붙여준 이름이다. 그리미는 이웃집 젊은 부부가 집을 옮겨 가면서 우리에게 억지로 떠맡긴 강아지이다. 이 조그만 개는 처음부터 크게 환영받지는 못했지만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아 자기의 노력으로 완전한 우리 집 가족이 되었다.

 

집에 있을 때 나는 그리미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많은 대화도 나눈다. 물론 나 혼자 개를 향해 일방적으로 떠드는 소리지만 이건 혼자 벽을 향해 지껄이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개는 아마 내가 던지는 말들 가운데서 적어도 몇 마디는 이해할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나는 어쩌다 찾아온 손님에게 그리미가 음악도 듣는다고 허풍을 친 적도 있었다. 

 

“이 강아지가 바흐를 듣는다고요?” 

 

내 농담에 손님은 정색을 하고 묻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농담이라고 웃어넘겼지만 속으로는 ‘반드시 농담이라고 할 수도 없을 걸’ 하고 중얼거린다. 그리미는 주인이 음악을 들을 때 주인의 무릎에 턱을 괴고 앉아 음악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침묵을 지켜 준다. 이처럼 그 시간에 걸맞게 행동하는 그리미가 음악을 전혀 듣지 않는다고 단언할 근거가 내게는 없다. 

 

‘넌 언제 외롭지?’ 나는 아마 그리미와 아파트 단지 안을 산책하는 동안 이 물음을 수차례 그리미에게 던졌을 것이다. 내가 많은 시간을 녀석과 함께 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사실 그리미는 늘 외롭다. 친구도 피를 나눈 가족도 그리미에게는 없다. 가족이 누군지도 모른다. 아마 녀석이 가장 두렵고 겁내는 건 외로움일 것이다.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녀석은 필사적으로 주인의 바지 자락에 매달리고 주인의 이부자리 속으로 기어 들어온다. 

 


 

 

“너는 언제 제일 외롭지?” 

 

뒷골목 노천카페에서 잠시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명진에게 물었다. 우리는 방금 도심 거리인 트베르스카야 대로를 지나 이곳으로 왔다. 

 

“푸훗!” 너무 엉뚱한 질문에 명진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조금 전 비브리오첵카 이미나레니나 역 플랫폼에서 미리 와서 나를 기다리던 명진의 모습을 나는 떠올렸다. 자기를 찾기 쉽게 하려고 그녀는 언제나 에스컬레이터 앞에 오뚜기처럼 서서 나를 기다린다. 그렇게 봤기 때문일까? 표정 없는 얼굴로 곁을 스쳐 가는 수많은 백인들 사이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무척 쓸쓸하게 보였다. 

 

“저는 외로운 걸 못 느껴요. 너무 바빠서요.” 

 

웃음이 담긴 눈으로 명진이 나를 바라본다. 정직한 답변일까? 

 

“설마 그럴까? 이 먼 나라에 와서 친구도 없이 십 년 넘게 지내는데 외로움을 못 느껴?” 

 

“친구가 왜 없어요? 저 친구 많아요. 한국 애들보다 러시아 친구가 많거든요. 교회 가면 물론 한국 애들도 많이 만나지만. 그런데 그 애들과 깊은 얘기는 못해요. 도리어 러시아 애들하곤 깊은 얘길 자주 하죠.” 

 

“넌 러시아 말을 잘 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러시아 말을 잘 해서가 아니고요. 하긴 잘 못하는 편도 아니지만. 아무튼 저는 러시아 애들과 대화가 잘 통해요. 

 

“왜 그럴까? 한국 친구들에겐 감추고 싶은 게 많아서 그럴까?” 

 

명진은 눈을 굴리며 잠자코 있다. 나는 그녀가 정직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선생님은 언제 외로움을 느끼세요? 외로우세요?” 

 

잠시 어둡던 명진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왜? 그런 걸 묻지? 이번에는 내가 기습받은 기분이다. 

 

“자꾸 그 말씀을 되풀이하시는 게 수상쩍어서요. 결국 외로워서 러시아도 오신 거군요.” 

 

“외로워서 러시아까지 왔다.” 나는 그 말을 흉내 냈다. 

 

“나는 미처 못 느꼈는데 듣고 보니 그럴듯하군.” 

 

“친구를 찾아서요. 제가 맞췄죠?” 

 

그녀에게 내 맘 속 깊은 곳을 발각당한 기분이 드는 건 무슨 까닭일까? 역시 그것이 진실인가. 

 

“친구라니, 누가 내 친구야?” 

 

“K 선생과 좋은 친구가 될지 누가 알아요?” 

 

“나는 그 사람에 관해 아는 게 조금도 없어. 더구나 말도 통하지 않는데.” 

 

“그래도 지금 그 분을 기다리고 있지 않아요? 친구끼리 구태여 말이 필요 없는 때도 있어요. 진실된 관계는 말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문 군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러나 가상의 세계에서나 있을 법한 그런 말이 내겐 조금도 실감이 되지 않았다. 

 


 

 

명진을 만나고 들어온 날 밤 늦게 문 군이 전화를 걸어왔다. 목소리는 아주 가깝게 들렸는데 사실은 아주 먼 데서 걸어온 전화였다. 

 

“저는 지금 니즈니노보고로드에 와서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전부터 한번 와 보고 싶었던 곳인데 기회가 없었답니다. 이번이 마지막 여행이 될지 모르니 꼭 오시고 싶다고 해서 모시고 왔어요.” 

 

“당분간 당신 얼굴 보기 힘들겠네.” 

 

기대감을 잃은 나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드디어 K 선생께서 오신답니다. 이틀 뒤에 모스크바에 도착하실 거래요. 저도 그때에 맞춰 갈 거구요. 그러니 다차로 떠날 준비를 미리 해 두세요.” 

 

옆에서 누가 재촉을 하는지 문 군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콘스탄치노보―나는 잊고 있던 그 지명을 혼자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그곳에 간다는 게 어쩐지 실감이 되지 않았다. 

 

문 군이 전한 대로 약속한 날 K는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신혼인 부인은 이번에는 동행하지 않았다. 문 군도 여행 일정을 잠시 중단하고 두 사람을 연결시켜 주기 위해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한낮인데 나는 짐을 꾸린 큰 여행 가방을 끌고 어둑어둑한 계단을 지나 바깥 거리로 나갔다. 방을 떠나기 전 피아노 위에 놓인 그리미의 사진과는 열흘 뒤에 만나자는 간단한 작별인사를 했다.

 

바깥 거리에는 미리 차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나타난 문 군이 내게 달려와서 큰 가방을 받아 들고 차의 트렁크로 옮겼다. 차는 조그만 라다 승용차인데 차령이 이십 년도 넘어 보일 만큼 낡을 대로 낡은 차였다. 요즘 거리에서는 이런 차를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K는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차에서 밖으로 나왔다. 그는 공사장 인부처럼 투박한 작업복을 입었는데 짧은 코밑수염과 치켜 올라간 눈 꼬리가 선뜻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나이에 비해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K는 말 한마디 없이 눈으로만 웃으며 내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 눈웃음이 나를 반긴다는 유일한 표시였다. 그는 나와 비슷한 세대다. 기껏해야 한두 살 터울일 거다. 그가 말을 아끼려고 입을 닫고 있는 게 아니고 간단한 한국어 인사말도 그의 입에서는 선뜻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걸 곧 나는 알았다.

 

K와 내가 차의 앞좌석에 올라앉자, 문 군이 밖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는 한 사람의 귀찮은 짐을 덜게 되었으니 기분이 가뿐할 것이다. 차가 시동을 걸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콘스탄치노보를 향해서. 나도 벙어리이고 K 역시 벙어리이다. 두 사람의 벙어리가 난생 처음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함께 열흘 동안을 지낼 낙원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둘만 남게 되자, 지금까지 언어소통의 불능에 대해 걱정했던 일들이 씻은 듯 사라지고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이 슬며시 피어올랐다. 나도 자기의 그런 기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문장 웹진/2007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