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소개]
이 작품은 작가가 아직까지 국내외 어떤 매체에도 발표하지 않은 것으로 아이브러리에 처음 소개하는 것이다. 작가가 대학에 진학했을 때 실제로 겪었던 경험을 중심으로 그린, 우울하고 드러내기 싫은 상처같은 청춘의 일상을 그려낸 스케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회색의 하늘 아래 짓눌린 것 같은 삶의 단면에도 청춘의 발랄함은 숨길 수 없이 드러난다. 미래의 작가를 낳게 된 관조와 삶에 대한 치열한 시선이 번뜩인다.
내가 형준이를 안 것은 입학초기였다. 그를 그렇게 빨리 알게 된 까닭은 우리가 지닌 미묘한 공통점 때문이다. 독일어라곤 문자도 모르고 독일어과에 입학한 나는 초기에 몹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전공이긴 해도 신입생에겐 문자부터 친절하게 가르칠 줄 알았는데 어떤 교수는 첫 시간부터 대뜸 토마스 만의 저 유명한 소설 <토니오 크뢰거>를 들고 와서 강독을 하는 것이었다.
용케도 다른 학생들은 고등학교에서 이미 독일어를 배운 탓인지 독일말로 된 그 소설을 잘도 읽어냈다. 촌뜨기인 나는 너무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처음부터 강의실의 앞자리를 피해 맨 뒷자리를 단골삼아 차지하곤 했다. 앞자리에 앉았다가 교수님 눈에 띄어 질문을 받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앞자리에 앉는 것은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대체로 앞자리는 새침떼기 여학생들과 공부를 못해서 열병이라도 난 것처럼 언제나 원서와 사전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학구파 남학생들 차지였다.
물론 뒷자리를 단골로 삼는 학생이 나뿐만 아니었다. 형준이도 이른바 두더지에 속했다. 그는 키가 크고 얼굴이 호남형인데 너무 과묵해서 나이가 실제보다 몇 살쯤 많아 보였다. 우리는 늘 뒷구석에 서로 가까이 앉아 있었기 때문에 말을 트기 전부터 상대방에게 서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녀석도 과묵하고 나는 또한 촌뜨기답게 어눌하고 소심해서 한동안은 서로 말을 건네지 못했다.
내가 녀석에게 유독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따로 있었다. 녀석은 언제 봐도 책이나 노트 따위를 들고다니지 않았다. 강의실에 들어오면서 빈손을 건들거리며 들어서는 녀석을 볼 때마다 나는 몹시 녀석에게 흥미를 느꼈다. 학교를 다 뒤져봐도 마치 소풍이나 오는 놈처럼 맨날 빈손으로 다니는 사람은 그 녀석 한사람뿐이었던 것이다. 공부시간에는 녀석은 당연히 딴전을 피웠다. 교수님 얼굴 따위는 한번도 응시하는 법이 없고 멍하니 창밖을 보거나 호주머니 속에서 오징어나 땅콩을 꺼내서 줄곧 입을 쉬지 않고 우물거렸다.
그날도 나로서는 골치 아픈 <토니오 크뢰거> 시간이었다. 이미 수업이 시작된 지 십분이나 지났는데 키가 멀대 같이 큰 녀석이 어슬렁어슬렁 뒷구석 자리로 와서 앉았다. 그는 시간이 늦어 뛰어왔는지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런 뒤 내쪽을 자꾸 흘끔거렸다. 한참 뒤에 내 필기대 위에 구운 오징어 한 조각이 툭 떨어졌다.
“그거 자네 먹어.”
걸걸한 남자 목소리가 곁에서 들렸다. 나는 너무 갑작스런 선물에 놀라 옆을 돌아봤다. 형준은 모른 척하고 오징어를 우물우물 씹으면서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저 녀석도 내가 공부시간에 심심해하는 걸 알고 있나 보군. 우린 동병상련일까. 형준에 대해 나는 갑자기 친밀감을 느꼈다. 수업이 끝나자, 이번엔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오징어 고마웠어. 자넨 오형준이지?”
“그래. 자넨 김덕수 아냐?”
복도로 걸어나오면서 우린 자연스럽게 통성명을 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도시락을 가져왔거나 주머니에 돈이 있는 학생들은 뒷동산 기슭에 있는 식당으로 부지런히 몰려갔다. 나도 형준도 식당파가 아니었다. 무슨 얘기냐 하면 고지식하게 도시락을 챙겨오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식당에 가서 돈을 내고 돈까스나 오무라이스를 사먹을 형편도 아니란 말이다.
점심을 안 먹는 학생들은 그 시간에 뒷동산에 올라가서 혼자 사색에 잠기거나 운동장 가에 앉아서 운동부 아이들이 농구나 야구경기 하는 걸 물끄러미 구경하곤 했다. 나는 뒷동산을 즐겨 올라갔고 형준은 아마 주로 운동장에서 어슬렁거렸던 것 같다. 교실에서 나온 우리는 약속이나 한듯 뒷산으로 올라가서 풀밭에 나란히 주저앉았다.
“난 독일어에 취미가 없어서 말야.”
앉자마자, 형준이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자기가 책도 없이 다니고 늘 뒷자리에 앉는 걸 내게 변명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도 그래. 독일어가 처음이거든”
나 역시 내 처지를 변명하고 싶긴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때 안 배웠어? 난 배웠는데.”
형준이 내게 물었다.
“고등학교를 걸렀거든.”
“그래? 따라가려면 한참 고생해야겠는데.”
이때 같은 반 여학생 두 사람이 본관건물에서 나와서 식당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둘 가운데 반에서 제일 미인이라는 ‘올빼미 눈’이 있었다. 나는 그 여학생 이름도 제대로 몰랐다.
‘올빼미 눈’이란 별명은 눈이 유난히 크다고 해서 남학생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어찌되었건 그녀는 남자들 사이에 인기가 좋았다. 그녀는 아직도 여고생처럼 머리를 두갈래로 땋아내리고 다녔고 옷차림은 언제나 단정하게 주름이 잘 잡힌 투피스를 입고 다녔다. 형준이 피식 웃으면서 내게 엉뚱한 말을 했다.
“자네도 저 올빼미에게 관심 있어?”
“나 같은 촌뜨기가 관심 있으면 뭘해? 내가 자기와 한 반이란 것도 모를 텐데.”
“그럴지도 모르지. 강명혜 저 기집애 아주 새침떼기라고. 자기가 인기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자네도 좋아해?”
형준은 내 물음에 펄쩍 뛰었다.
“난 아니야. 난 친구란 놈 때문에 괜히 저 기집애에 관심을 갖게 됐지. 난 저런 타입 좋아 안해. 내가 좋아해봤자, 강명혜가 나 따위를 좋아할 리도 없지만. 난 저 기집애 머리털을 몇개 뽑아 본 일이 있었지.”
“뭐야? 머리털을 뽑다니. 뭣 때문에 그런 짓을 하지?”
나는 형준의 말에 적지 않게 놀랐다.
“놀랄 것 없네. 자네 니체 알어?”
“알지. 요즘 며칠 안보이더군.”
“몸이 약해서 며칠 쉬는 모양이야. 자기 어머니가 그 친구 걱정을 굉장히 하고 있다네.”
니체란 어떤 학생의 별명이었다. 그는 키가 작고 안색이 파리한 학생인데 보통 괴짜는 넘는 수준의 괴짜였다. 언제나 철학책을 끼고 다니고 특히 니체의 철학에 통달해 있다고 알려졌다. 니체는 복도를 걸을 때나 운동장을 지날 때도 늘 혼자 머리를 숙이고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곤 했다. 물론 좀처럼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고 누가 말을 걸어도 모른 척하고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다. 반에서 니체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형준이 말했다.
“니체 그 새끼가 나하고 고등학교 동창이야. 고등학교 땐 친했지. 그땐 그렇게 심하진 않았는데 대학교 와서 아주 달라졌어. 그런데 그 새끼가 하루는 나를 찾아와서 사정하는 거야. 자긴 올빼미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금방 미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용기가 없으니 강명혜에게 직접 고백할 수도 없다 이거야. 그러면서 강명혜 머리털을 몇 개만 뽑아줄 수 없겠냐는 거야. 그거나마 갖고 있으면서 위안을 삼겠다는 거겠지. 친구가 죽겠다는데 모른 척할수 있어? 그래서 교양철학 시간에 그 기집애 뒷자리에 앉았다가 시침 뚝 따고 몇개 슬쩍했지. 의외에도 둔한지 반응이 전혀 없던데.”
“설마 몰랐겠나. 창피해서 가만히 있었겠지. 니체는 좋아하던가?”
“나 정말 미치겠어. 이 새끼가 그 머리털을 들고 눈물이 글썽해서 어쩔 줄 모르는 거야. 그 정도가 되면 그건 사랑이 아니야. 미친 거지. 요즘 니체가 학교 며칠 안나오니까 마음이 아주 편해. 그 새끼가 나오면 꼭 무슨 일 저지를 것만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하다구.”
“그럴 게 아니라 친구를 위해 강명혜에게 자네가 사정을 솔직하게 말하면 어떨가? 도움이 되지 않겠어?”
“자넨 장님인가 본데. 소식이 깡통이야. 올빼미가 요즘 누굴 좋아하는지 눈치도 못챘나?”
“누구야? 상대가.”
“물론 자네도 나도 아니지. 우리 같은 두더지는 여학생들의 관심 밖이니까. 거 수업시간에 늘 여학생 꽁무니에 붙어 앉고 독일어 공부는 저 혼자 하는 것처럼 질문을 도맡아 하는 놈 있잖아? 기골도 좋고 목소리가 요란한 놈 말이야. 한정섭이 그 새끼 말야. 그 새끼랑 강명혜랑 비원 뒷담길을 오붓하게 걸어가는 걸 본 사람이 있다는 거야. 그 얘길 듣고 두 사람 눈치를 봤더니 틀림없더군. 강명혜 그 기집애 우리 앞에서는 새침떼기 노릇을 하지만 알고 보면 보통내기가 아니야.”
한정섭은 체격이나 용모가 사내답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었다. 뭘로 봐도 니체는 한정섭의 적수가 아니었다. 니체는 키도 작고 안색도 병자처럼 파리하고 게다가 용기도 없다. 나는 니체가 갑자기 불쌍하게 여겨졌다.
오징어를 나누어 먹은 그날부터 형준과 나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교실에서는 우리는 매일 붙어 살다시피했다. 나는 독일어를 못해서 수업시간에 딴전을 피웠고 형준은 공부에 아예 관심이 없어서 딴전을 피웠다. 교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영락없이 불량학생들이었다. 수업 시간에 우리는 뒷자리를 독차지하고 앉아서 계속해서 잡담을 했다.
앞줄에 앉아 있는 여학생들의 용모에 대한 평가, 행동 평가, 그리고 맘에 썩 안드는 모범생들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곤 했다. 교수님들 험담도 즐겨 지껄였다. 키가 작은 교수가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다던가 멋쟁이로 자부하는 어떤 교수가 얼굴에 화장을 하고 다니는 것 같다는 등의 험담이었다. 모범생이나 멋쟁이 교수에 대한 험담을 유난히 즐긴 건 그들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여학생들의 관심을 독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형준이나 나는 여러 가지로 불리했다. 우선 학구파가 못되어서 수업시간만 되면 쥐구멍에 숨은 듯 쪽을 못펴고 옷차림도 반에서 제일 처지는 편에 속했다. 형준은 늘 검게 물들인 군대 작업복을 입고 다녔고 나는 고물 옷 시장에서 불과 몇 푼 주고 구한 싸구려 헌옷만 입고 다녔다. 그래도 형준에게서 가난뱅이 냄새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그건 아마 녀석이 의젓하고 좀처럼 비굴한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웃지 못할 사건이 일어난 것은 여름방학을 며칠 앞두었을 때였다. 모두들 시험을 끝내고 식당 앞마당에서 한가롭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 올빼미를 비롯한 여나문 명의 여학생들은 저희들끼리 한쪽 잔디밭에 앉아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남학생들도 끼리끼리 모여앉아 여름 방학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학교 근처에 사는 어떤 아주머니가 큰 바구니 하나를 들고 우리 앞을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학교를 돌아서 가자면 너무 멀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흔히 운동장을 가로질러 지름길로 다니곤 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얼굴이 창백한 니체가 본관 건물 복도에서 불쑥 튀어나와 아주머니 앞으로 빨리 다가갔다.
본래 니체는 몸을 약간 옆으로 기우뚱하게 기울고 걷기 때문에 걷는 모습 자체가 아주 특이했다. 그렇지 않아도 니체만 나타나면 사람들 눈길이 그에게 쏠렸는데 그가 이상한 걸음걸이로 갑자기 동네 아주머니에게 다가가니까 그때 마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니체에게 쏠릴 건 당연했다. 니체도 분명 그걸 노렸을 것이다.
잔디밭에 앉아 재잘거리던 여학생들도 얘기를 멈추고 일제히 이 고독한 철학가를 쳐다보았다. 드디어 아주머니 앞으로 다가선 니체는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아주머니의 길을 막아서더니 아주머니의 바구니 안을 들여다봤다. 바구니에는 떡과 과자가 들어 있었다. 니체는 태연하고 당당하게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나 배가 고파서 그러는데 그 떡 좀 내게 주시오. 내가 먹을 만큼 집어갈까요?”
그러고는 저쪽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손을 바구니 안에 밀어넣었다. 불의에 습격당한 여인이 니체에게 분노에 가득찬 고함을 질렀다.
“이런 미친 놈 봤나. 손 치우지 못해?”
그 바람에 니체는 질겁을 하고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아주머니는 이미 한풀 꺾인 니체에게 다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별 거지같은 자식 다 보겠네. 에이, 재수 없어.”
그런 뒤 아주머니는 서둘러 갈 길을 가버렸다. 문제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철학가였다. 주위 사람들은 일시에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은 그치고 조용해졌다. 모멸에 가득찬 욕설을 뒤집어쓴 니체는 얼굴빛이 더욱 창백해진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아마 갑자기 생각을 멈춰버린 사람 같았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사고체계가 무너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형준이 바람같이 니체 옆으로 달려왔다. 그는 니체를 부축하고 학교건물 안으로 니체를 데려갔다.
잠시 후 나는 뒷동산에 혼자 앉아 있었는데 형준이 어슬렁어슬렁 올라왔다.
“내가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 에이, 바보자식 같으니.”
형준은 앉자마자 투덜거렸다.
“니체 어디로 데려갔지?”
“도서관에 앉혀놓고 나왔어. 좀 진정이 됐을걸.”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정말 배가 고파서 그랬다면 아주머니가 너무 야박하지 않아.”
“덕수 자넨 그것도 몰라? 올빼미 앞에서 한번 사나이다운 호기를 보여주겠다는 거지. 니체 그 자식은 주머니에 항상 돈은 가지고 다녀. 자기 어머니가 니체 걱정을 얼마나 하는데. 날마다 용돈 없을까봐 주머니에 돈을 넣어준다고. 그때 머리털을 보고 울 때부터 이런 짓을 할 줄 알았어. 자식이 자기도 한정섭이 못지않게 사내답다는 걸 보여준답시고 그런 짓을 한 거야. 그러니 그 기집애가 그 꼴을 보고 어떻게 생각했겠어. 니체 그 자식 자살이나 안할까 걱정인데.”
“설마 그럴라구. 올빼미에 관한 니체의 감정은 환상에 불과해. 환상 때문에 자살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걸. 자살은 아주 실제적인 동기에서 행해지지.”
형준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말했다.
“가끔 자넨 아주 근사한 말을 잘한단 말야. 굉장한 어른처럼. 환상적 사랑을 이미 겪었다는 얘기 아냐, 자넨.”
“그럴지도 모르지. 지금도 환상을 가지고 있어.”
“그래? 뭔데. 얘기해 줄 수 있어?”
“일년 전 동네 아가씨를 버스 속에서 만났지. 여자대학의 같은 학년이야. 그렇지만 말도 못붙여 봤어. 왠지 겁나고 두려웠다구. 편지를 보낼까 생각했지만 그것도 용기가 안 나서 그만두기로 했어. 이게 환상 아니야.”
“자네도 그런 데가 있었군. 그런데 나하곤 영 다른데. 나 같으면 관심 있는 여자가 있다면 가만히 있지 않아. 쫓아가서 만나던지 하지. 그건 그렇고 나 자네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네. 전부터 알고 싶었지. 자넨 정체가 뭐야? 아무리 생각해도 정체를 알 수 없다구.”
“무슨 얘기지? 나에 관해 알고 싶은 게 뭔가?”
“독일어과엔 왜 들어왔나?”
“별다른 뜻은 없어. 대학은 가야겠고 그러니 외국어 하나라도 해두자는 생각을 했었지. 돈을 버는데 지금 세상은 외국어가 유리하지 않을까.”
“그냥 돈 벌겠다는 이유 하나뿐인가?”
“그뿐이야. 이건 정말이네. 자넨 왜 여기 왔지?”
“난 아무런 이유가 없어. 돈 벌겠다는 생각조차 없다네. 법학과엘 가라고 식구들이 그랬는데 내가 그냥 여기 들어왔어. 내가 공부에 흥미 없어 한다는 걸 자네도 알지?”
“그래. 형준이 자네 장래 지망이 뭘까 하고 생각한 일이 있었어.”
“난 장사나 하고 살 생각이야. 뭐 할 게 있어. 고등학교 땐 판검사니 외교관이니 꿈도 꿨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도 없다구. 왜 그런지 알아? 아냐, 알 필요가 없지. 자네 희망이나 말해봐.”
“난 선생이나 할까? 아냐. 우리 아버지가 시골서 선생노릇 오래 했으니 난 관두겠어. 그러고 보니 할 게 없군. 뭘 하겠다고 해서 그대로 되는 것도 아니잖아.”
내 답변은 부분적으로 맞기도 했고 그렇지 않은 점도 있었다. 어쨌든 완전히 정직한 대답은 아니었다. 형준 역시 내게 정직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걸 나는 알았다. 우리는 서로가 그 부분에서 뭔가 감추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까닭은 뭘까? 불확실한 미래와 불확실한 사회상황 때문이었을까? 사회에서 우리를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장래에 관해 정직한 답변을 할 수 없었던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을 나는 그해 겨울에야 알게 되었다.
그해 겨울 나는 난생 처음 단편소설 한 편을 완성했다. 정말 처음 써본 소설이었다. 막상 써놓고 보니 이게 소설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이 가득했다. 스승도 없고 조언을 들려줄 친구도 없었던 것이다. 문득 <토니오 크뢰거>를 강의하던 멋쟁이 교수가 떠올랐다. 그분은 학교 부근의 관사에서 자기 아내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그 교수에게 작품을 보여보자고 생각했다. 어느 날 교수실로 작품을 들고 나는 들어갔다. 교수는 작품을 받아들고 내게 말했다.
“자네가 독일어과 학생인가?”
“그렇습니다.”
“나는 자넬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동안 학교에는 자주 안 나왔나 보군.”
“그게 아니라 제가 공불 못해서 항상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교수님께서 저를 못보셨을 겁니다.”
교수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그렇군. 하여간 내가 이걸 읽으려면 시간이 걸리니까 다음 주에나 내게 들러주게.”
나는 인사를 하고 교수실에서 나왔다. 일주일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토니오 크뢰거>시간이 다가왔다. 이윽고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멋쟁이 교수님이 책을 펼치기 전에 뒷구석 자리를 열심히 찾아봤다. 물론 풋나기 작가가 거기 앉아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교수님은 빙긋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는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늘 그렇듯이 내 옆에는 형준이 앉아 있었다. 교수님이 입을 열었는데 전혀 엉뚱한 얘기를 꺼내는 게 아닌가.
“이 교실에 앉아 있는 김덕수란 학생이 지난주에 내게 가져온 소설을 읽어봤는데 난 아주 재미있게 봤습니다. 정말 특출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말을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것은 우리가 외국 문학작품을 공부하는 것도 결국은 우리 문화, 나아가서 우리 문학을 살찌우게 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섭니다. 자, 책을 펼치고 공부 시작합시다.”
앞줄의 모범생들이 뒤를 힐끗힐끗 돌아보았다. 나는 불량학생에서 갑자기 공부를 제일 보람있게 한 모범생으로 탈바꿈한 셈이었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 고개를 떨구고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형준이 잠자코 앉아 있을 턱이 없었다.
“저건 자네 얘길 하는 거지? 맞지?”
나는 고객만 끄덕였다.
“대단한데. 자넨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구. 저 멋쟁이가 어지간해선 칭찬하는 법이 없는데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까 굉장히 놀랐던 모양이군. 나한텐 왜 그런 걸 감췄어?”
친구 입장에서 섭섭하다는 표정이었다.
“감추긴. 뭐가 대단해서 떠벌리겠어. 처음 쓴 거야.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저 써본 거라구. 난 칭찬이 믿어지지 않아. 멋쟁이가 반대로 얘기했을지도 모르지.”
“아냐. 학생을 놓고 농담하는 교수가 어디 있어. 축하해 아뭏든.”
수업이 끝났을 때 교수님이 나를 불렀다. 그는 내게 악수까지 청하며 말했다.
“아주 재미있더군. 훌륭한 솜씨야. 그래서 내가 대학신문에 추천을 했어. 신문에 발표해 보라구. 찾아가서 원고료를 받아오면 될 거야. 내가 괜한 짓을 했나?”
“아닙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보게. 자넨 재능이 있어.”
교수는 복도 저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형준과 학보사로 찾아갔다. 돈을 준다는 건 눈이 번쩍 뜨이는 얘기였다. 나는 언제나 돈이 없었다. 돈이 없어서 학교식당에 들어간 게 손가락을 꼽아볼 지경이었다. 그나마 남을 따라 들어가서 얻어먹은 기억뿐이었다. 형준으로부터도 물론 몇 차례 얻어먹었다.
학보사에서 기자 하나가 이름을 확인하더니 돈이 든 봉투를 내게 줬다. 뜯어봤더니 학교 식당에서 돈까스 스무 그릇은 사먹을 수 있는 액수였다. 나는 형준을 데리고 기세 좋게 학교식당으로 들어가서 돈까스를 시켜 먹었다. 밥을 먹고 나오는데 니체가 책을 끼고 걸어오다가 나와 마주치자,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는 내게 말을 걸까 말까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맘을 정한 듯 돌아서서 내게 다가오더니 정중하게 말했다.
“학보에 자네 글이 나오면 내가 읽어보겠다. 자넨 죽음과 신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뭐 별로 말할 게 없는데. 신이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도 현재로는 알 수가 없고 말이야.”
옆에서는 형준이 웃고 있었다. 니체가 그래도 정색하며 말했다.
“언제 시간이 있을 때 우리 둘이 조용히 얘기하고 싶다. 네가 쓴 글을 읽고 나서 얘기해도 좋아. 자, 그럼 안녕.”
니체는 식당 저쪽으로 멀리 가버렸다.
“벌써 집에 갈 건가?”
니체가 내게 안녕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내가 형준에게 물었다.
“미친 자식. 대꾸 말게. 복도에서 지나칠 때도 금방 다시 볼 건데 안녕이라고 하는 놈이야. 아무래도 저 녀석 병원에 입원하게 될 것 같은데. 보라구. 가장 친하다는 내겐 지금 모른 척하지 않아.”
“그렇군. 난 또 내게 어찌나 정중하게 말하던지 깜빡 속았지.”
“자네 오늘 우리집에 안갈 거야?”
갑자기 형준이 말했다. 그런 말은 처음이었다. 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은 형준이 어떤 집에 사는지, 그리고 가족들은 어떤 사람인지 몹시 궁금했던 것이다. 수업을 끝내고 우리는 일단 시내로 나가서 어떤 음악 감상실에 들렀다. 종로에 있는 감상실인데 재즈음악과 컨트리송을 주로 들려주는 감상실이었다. 나는 그런 곳엔 처음 가봤다.
“고등학교 때부터 자주 오던 곳이야. 어때 분위기가?”
“좋군. 난 여태 다방 구경도 못했다구. 이런 곳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어.”
그러고 보니 더벅머리 고등학생들도 책가방을 옆에 끼고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조숙한 학생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형준도 조숙한 학생인 셈이었다.
음악실에서 재즈를 실컷 듣고 저녁이 되자, 우리는 형준의 집으로 향했다. 형준의 집은 돈암동 언덕배기에 있었다. 이전까지 나는 막연하게 형준이 어쩌면 부잣집 아들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부잣집 아들이 반드시 사치를 하고 돈을 마구 뿌린다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형준은 얼마간 거만하고 당당했다. 꾸민 것이 아니라 그의 태도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형준이 거의 틀림없는 부잣집 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형준이 나를 데리고 들어간 집은 울타리도 없는 판잣집이었다. 그의 방은 퀴퀴한 냄새가 났고 가구라곤 볼품없는 책상 하나뿐이었다. 그의 저녁밥을 둘이서 사이좋게 나눠먹었다. 형준은 어디서 소주 두병, 오징어 한 마리, 날계란 두 개를 구해왔다. 술을 한잔 마시더니 형준이 내게 말했다.
“이봐. 나도 왕년에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네. 이걸 좀 읽어 보겠나?”
그는 책상 서랍 속에서 두툼한 노트묶음 하나를 꺼내 내 앞에 던졌다.
“이게 뭔데?”
“그냥 읽어 봐. 다 볼 수는 없고 대충 서두만 보라구. 자넨 서두만 봐도 무슨 글인지 금방 알 거야.”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그걸 읽느라고 새벽까지 꼼짝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 내용은 감동적인 데가 있었다. 그건 형준이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보낸 장문의 연서였다. 그 여학생은 첼로를 켜는 학생이었고 편지 속에 형준이 그녀의 첼로연주장에 들어갔던 얘기도 자세히 나와 있었다.
“이게 주인한테 있지 않고 왜 여기 있는 거지?”
드디어 편지를 다 읽은 뒤 내가 형준에게 물었다.
“돌려보냈더군. 그 망할 계집애가 뜯어보지도 않고 속달로 보냈어.”
“아깝군. 정말 명문인데. 지금 그 여자 어디 있나?”
“여기 없어. 고등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가버렸지.”
“그러니까 자넨 고등학생 때 이런 편지를 썼단 말인가?”
“그래. 고등학교 때야. 고등학교 때 사랑을 졸업한 셈이랄까? 그 뒤론 여자에게 관심을 안 갖기로 했어. 모두가 허위고 감정 유희야.”
“그건 좋은데 그렇다고 장래 희망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네가 뭐라고 해도 이것 역시 환상적 사랑에 지나지 않아. 자네가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한 까닭을 이제 알았어. 그러나 이건 실제적 사랑은 아니야. 환상 때문에 자포자기하는 자넨 니체를 나무랄 자격이 없어. 그렇지 않은가?”
형준은 화가 난 얼굴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괜히 자네에게 그걸 보였군. 자네 말이 정확해. 그게 내가 아파하는 점이구. 환상이지 실제는 아냐. 가난뱅이가 신데렐라를 꿈꾸는 환상이었지. 그래서 요즘 고민이라네. 학교를 당분간 쉬고 군대에나 나갈까 생각중이야. 갔다오면 생각이 조금 달라질지 모르지.”
“자네랑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자네 가버리면 뒷자리엔 나만 남지 않나.”
“그렇군. 그래도 자넨 혼자 잘 버틸 거야. 나도 자네랑 헤어지고 싶진 않다구.”
“일찍 군에 다녀오는 것도 자네에겐 현명한 생각이야. 환상이 아닌 현실을 배워 올 수 있을 거야.”
겨울방학이 끝났을 때 형준은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니체 역시 보이지 않았는데 그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개학한 며칠 뒤 형준은 내게 엽서 한 장을 보내왔다. 전방에서 보낸 엽서였다. 그 무렵에 학보에 내 글도 발표되었다. 나는 두 장의 학보를 따로 구해서 하나는 병원의 니체에게 보냈고 하나는 전방의 형준에게 보내줬다. 나는 그 친구들이 내겐 스승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그때 했었다. 왜냐하면 환상의 유혹이 그 나이엔 얼마나 무섭다는 걸 그들은 내게 생생하게 가르쳐줬기 때문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