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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blinde Geronimo und sein Bruder

아르투어 슈니츨러


[소개]

어릴 때 잘못해 동생의 눈을 멀게 만든 형. 그리고 이제 장님이 되어 형의 도움을 받아 노래를 불러 구걸을 하는 동생. 이 형제는 국경의 한 여관에서 처량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남의 동정에 의지해 스산하게 살아가는 운명이다. 그런데 어느날 짖궂은 손님이 던진 한 마디의 말이 이 형제의 그나마 작은 평화마저 깨뜨리고야 만다. '개구리에게 던지는 돌은...' 이라는 이솝우화의 잔인한 실제 사례를 보는 기분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비극에 숨통을 틔우는 것 같은 일말의 희망을 남겨두고 있다.

[작가 소개]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1862-1931) :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수도 비인에서 태어나 원래 의사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섬세하고 예리한 심리 관찰을 통해, 부드러운 정감을 엮어 비인 시민들의 우아한 생활과 퇴폐상을 묘사했다. 독일의 자연주의에 대하여 호프만스탈과 더불어 '젊은 비인'이라 불리는 도회적, 감각적인 문학 경향을 수립했다. 대표작으로 <아나톨> <연애 삼매경> <윤무> 등의 희곡과 <죽음> <푸른 앵무새> <남작의 운명> 등의 소설이 있다.


장님 제로니모는 벤치에서 일어나 식탁 위 술잔 옆에 준비돼 있는 기타를 손에 잡았다. 첫 마차가 멀리서 달려오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익숙한 길을 더듬어 열리진 문으로 나아갔다. 문을 나서자 거칠 것 없이 가느다란 나무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그 나무 계단은 지붕이 씌워져 가운데 뜰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의 형이 제로니모 뒤를 따라갔다. 둘은 계단 바로 옆에 서서 차갑고 눅눅한 바람을 피해 벽에 등을 기댔다. 바람은 대문으로 들어와 더럽고 질퍽질퍽한 땅 위를 스쳐 불어왔다.

슈틸후저 고개를 넘어가는 여행 마차는 모두 이곳 낡은 호텔의 우중충한 아치 아래를 지나지 않으면 안된다. 이태리에서 티롤로 가는 여행객들에게 이 여관은 슈틸후저 고개를 앞둔 마지막 휴게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호텔은 오래 머물 만한 곳은 아니다. 전망도 보잘 것 없고, 헐벗은 언덕 사이로 평범한 길이 나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장님 이태리 사람, 제로니모와 그의 형 까를로는 여름 몇 달 동안을 여기를 집 삼아 지내곤 했다.

우편 마차가 들어오고 곧 그 뒤를 따라 다른 마차도 도착했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두터운 숄과 외투로 몸을 휘감고 자리에 그냥 앉아 있었다. 그 가운데 몇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호텔 문 근처를 초조하게 이리저리 거닐고 있었다. 날씨는 점점 더 나빠진다. 차가운 빗방울이 소리를 내며 땅에 쏟아졌다. 그 동안 맑은 날씨가 꽤 오래 계속됐으나 가을이 느닷없이, 그리고 너무 일찍 닥쳐온 모양이다.

장님 사나이가 기타 반주를 곁들여 노래를 불렀다. 그는 술을 마시면 음을 제대로 다듬지도 않고 고함을 치는 듯한 음성으로 노래하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따금 그는 머리를 위쪽으로 쳐들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는 듯한 몸짓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수염을 깎은 자리가 거무스레하고 입술이 파랗게 얼어붙은 듯한 그의 표정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의 형은 옆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누가 지폐를 한 장 그의 모자에 던져 넣어주면 그는 고맙다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돈을 준 사람의 얼굴을 잽싸게, 그러나 당혹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그러다 곧 뭔가 근심하는 표정으로 시선을 옮겨 동생이 바라보는 그 곳, 허공을 응시했다. 그런 모습은 마치 그의 두 눈만이 빛을 볼 수 있고, 그의 눈먼 동생에게는 한 줄기 빛도 나누어 줄 수 없다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것 같았다.

"포도주를 좀 갖다 줘." 제로니모가 말했다. 까를로는 항상 그런 것처럼 순순히 그 말을 따라 포도주를 가지러 갔다. 그가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이미 자신의 노래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제로니모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젊은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이 뭔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이 두 사람이 얼마나 자주 이 길을 왕래했을 것인지 생각해 봤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는데다 취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똑 같은 사람들이 날이면 날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갔다가 곧 또다시 남쪽에서 북쪽으로 고개를 넘어오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리하여 이 젊은 한 쌍의 남녀도 마치 오래 전부터 알아왔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까를로가 포도주 한 잔을 들고 내려와 제로니모에게 주었다. 눈먼 사나이는 그 잔을 손에 들고 젊은 남녀 한 쌍에게 흔들며 말했다. "여러분의 건강을 위하여!" "고맙소." 젊은 사나이가 말했다. 그러나 젊은 여자는 남자를 끌고 가 버렸다. 여자는 이 장님이 징그럽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때 떠들썩하게 떠드는 일행이 또 한 대 마차를 타고 들이닥쳤다. 아버지와 어머니, 세 명의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의 보모가 일행이었다.

"독일 사람 가족이군."

제로니모는 나지막한 소리로 까를로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금화를 하나씩 주었다. 각자 받은 금화를 장님의 모자에 던져 넣으라고 하는 것이다. 제로니모는 아이들이 돈을 넣을 때마다 고맙다며 머리를 숙였다. 제일 나이가 많은 소년이 걱정스럽다는 듯,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장님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까를로는 그 소년을 쳐다 보았다. 그런 또래 아이들을 볼 때면 언제나, 그 생각이 났다. 그 불행한 사고, 제로니모가 장님이 됐던 그 불행이 닥쳐온 것이 바로 저만한 나이 때 아니었던가. 그는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사건이 일어났던 그 날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지금도 그의 귓속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 어린 제로니모는 비명을 지르며 잔디밭에 주저앉았다. 그 정원의 하얀 담벼락 위에서 햇빛이 마치 놀리기라도 하듯이 휘감아 돌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멀리서 교회의 일요일 종소리가 울려왔었다.

까를로는 그날도 방안에 서서 화살을 담 옆 물푸레나무 쪽으로 쏘고 있었다. 그는 그 전에도 가끔 그렇게 놀곤 했다. 비명소리를 듣자 그는 마침 거기를 지나가던 동생이 화살에 맞아 다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손에서 활을 떨어뜨리고 창문을 통해 밖으로 뛰어나갔다. 어린 동생은 풀 위에 누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신음하고 있었다. 오른 쪽 볼과 목으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때 아버지가 들로 통하는 정원의 조그만 문으로 들어왔다. 아버지와 까를로는 둘 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누워서 신음하고 있는 어린아이 옆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웃 사람들이 부랴부랴 달려왔다. 바네티 할머니가 간신히 어린아이를 달래 얼굴에서 손을 떼도록 했다. 까를로가 당시 견습공으로 일하던 대장간의 대장장이도 왔다. 그는 치료법을 약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제로니모는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고 말았다. 그날 저녁 포시아브에서 온 의사도 더 이상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의사는 자칫하면 하나 남은 왼쪽 눈마저도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은 넌지시 암시했다. 그리고 그의 말이 옳았다. 일 년 후 제로니모에겐 온 세상이 어두움 속에 가라앉아 버렸던 것이다.

처음에는 가족들도 그에게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려고 했다. 그리고 제로니모 역시 그런 말들을 믿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던 까를로는 그 당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여기 저기 방황했다. 길거리와 포도밭, 숲속을 거는 헤매고 돌아다녔다. 죄책감 때문에 심지어 자살하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그가 괴로운 심정을 목사에게 고백했을 때, 그 목사는 까를로에게 살아 남아서 그 생명을 동생을 위해 바치는 것이 그의 의무가 아니겠느냐고 타일렀다. 까를로는 그것을 깨달았다.

동생에 대한, 사무치는 연민의 정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가 눈먼 소년의 곁에 있을 때,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의 이마에 입 맞출 때, 또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집 뒤의 들과 포도나무 시렁 사이로 제로니모의 산책 길을 안내할 때, 그럴 때에만 까를로는 마음의 고통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었다.

까를로는 처음에 동생에게서 전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장간에서 자기가 배워야 할 수업을 소홀히 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거듭 걱정을 하고 경고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그리고 자기의 장래 직업을 다시 시작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어느날 까를로는 제로니모가 이제 더 이상 자기의 불행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이상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눈먼 소년은 결국 모든 것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자기는 앞으로 하늘과 언덕과 길거리, 사람들의 모습과 빛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까를로 역시 자기가 일부러 동생을 이렇게 만든 것은 아니라는 사실로 자기를 위안하려 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질 않았다. 이전보다 한결 더 마음이 괴로웠던 것이다. 때때로 이른 아침에 일어나 옆에서 포근히 잠든 동생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오히려 동생이 잠에서 깨어날 것이 두려워졌다. 동생은 깨어나 무의식적으로 빛을, 자기 눈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린 그 빛을 새삼스럽게 찾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그는 정원으로 뛰어나가곤 했다.

그 당시 까를로는 목소리가 좋은 제로니모에게 음악 공부를 시키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요일이면 가끔 이곳을 지나가는 톨라의 학교 선생이 그에게 기타 연주를 가르쳐 주었다. 그때만 해도 이 눈먼 소년은 자기가 새로 배운 이 기술이 언젠가 자기의 호구 수단이 되리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슬픈 여름날의 사건과 더불어 불행이란 놈은 이 늙은 라가르디의 집안에 영원히 자리를 잡고 앉은 것 같았다. 농사는 해마다 흉작이었으며 노인이 그나마 모아두었던 약간의 돈마저 어느 친척에게 사기를 당해 날리고 말았다. 그리고 노인은 어느 여름 무더운 8월 어느날 넓은 들판에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었을 때 빗 외에는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았다. 약간의 땅과 집마저 다 팔리고 두 형제는 집도 없이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 마을을 떠나야 했다.

그때 까를로는 스무 살, 제로니모는 열 다섯 살이었다. 그때부터 구걸과 방랑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생활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처음에 까를로는 자기와 동생이 함께 먹고 살 수 있는 벌이가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 시도는 좀처럼 이루어지지 못했다. 제로니모 역시 아무데서도 안정을 얻지 못했다. 그는 결국 여기저기 항상 떠돌아다니는 것을 원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탈리아 북쪽 지방과 남부 티롤 지방을 떠돌아 다녔다. 여행자들이 주로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거리와 오솔길을 따라 떠돌아다닌 것이다. 그런 세월이 어언 20년이었다.

이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까를로는 옛날에 느꼈던 그 고통, 타는 듯한 마음의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다. 찬란한 태양 빛, 가는 곳마다 펼쳐지는 정다운 풍경들... 이런 것들을 볼 때마다 그는 그러한 고통을 느꼈던 것이다.

이제 그는 그런 고통을 직접 느끼지는 않았으나 그의 마음 속 한구석에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물어뜯는 듯한 연민의 정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의 심장 고동이나 호흡이나 마찬가지로 그의 무의식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는 제로니모가 술에 취한 것을 보는 것이 기뻤다.

독일인 가족을 태운 마차는 떠나갔다. 까를로는 좋아하는 버릇대로 계단의 제일 아래 층계에 걸터앉았다. 그러나 제로니모는 자기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팔을 맥없이 축 늘어뜨리고, 머리를 치켜들고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여관 집 하녀 마리아가 객실에서 나왔다.

"오늘은 좀 많이 벌었어요?" 마리아가 아래를 내려다 보며 소리쳤다.

까를로는 그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눈먼 사나이는 몸을 굽혀 땅바닥에서 자기 잔을 집어들고는 그걸로 마리아를 향해 건배했다. 마리아는 저녁 나절이면 종종 객실에서 그의 가까이에 앉아 있곤 했다. 그는 마리아가 아름답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까를로는 몸을 앞으로 내밀어 거리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빗방울 뿌리는 요란한 소리에 파묻혀 가까이 다가오는 마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까를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생의 앞 자기 자리에 다시 자리잡고 앉았다.

마차가 들어오자 제로니모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마차에는 단 한 사람의 여행객밖에 없었다. 마부는 마차에서 내려 급히 말들의 멍에를 푼 다음 객실로 서둘러 올라갔다.

여행객은 회색 비옷을 온 몸에 두른 채 마차 구석 자리에 파묻혀 잠시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전혀 노래를 듣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마차에서 뛰어 내려왔다. 그리고는 마차에서 그다지 멀리 가지 않고 그 주위를 초조한 듯이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그는 두 손을 녹이려는 듯 쉴 새 없이 서로 부벼댔다.

그는 그때서야 거기서 노래하는 두 걸인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는 그들의 맞은편에 서서 한참 동안 마치 탐색하듯이 그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까를로는 인사 삼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 여행객은 무척 잘생긴 젊은 청년으로, 얼굴에는 수염이 없었다. 두 눈은 불안스럽게 번뜩였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그들 걸인 형제 앞에 서 있더니 마차가 지나가게 될 대문 쪽으로 급하게 걸어갔다. 그리고 비와 안개에 잠겨 있는 우울한 풍경을 쳐다보고는, 화가 치민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어때?" 제로니모가 형에게 물었다.

"아직 아무것도..." 까를로가 대답했다. "아마 떠날 때쯤 주겠지."

여행객은 다시 되돌아와서 마차 문에 몸을 기댔다. 눈먼 사나이는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젊은 사나이는 갑자기 무척 흥미를 느끼며 듯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마부가 돌아와 말에게 멍에를 다시 얹었다.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는 듯 그 잘생긴 젊은이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까를로에게 1프랑을 주었다.

"아이구,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까를로가 말했다.

여행객은 마차 속에 앉아 다시 비옷을 온몸에 휘감았다. 까를로는 땅바닥에서 잔을 집어들고 나무 층계를 걸어 올라갔다. 제로니모는 노래를 계속했다. 여행객은 몸을 마차 밖으로 내밀고 우월감과 동시에 애처로운 감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별안간 무슨 생각이 머리를 스친 모양이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서 겨우 그에게서 두어 발짝쯤 떨어져 길 거리에 서 있는 눈먼 사나이를 불렀다. "자네 이름이 뭐지?"

"예, 제로니모입니다."

"그럼 제로니모, 제발 속지는 말게!" 그 순간 마부가 계단 맨 위 층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리, 속다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네 친구에게 20프랑짜리 지폐를 주었단 말이야."

"아이구 나리,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래, 그럼 조심하라구!"

"그 사람은 제 형이에요, 나리. 그 사람은 저를 속이지 않습니다."

젊은이는 잠시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그가 아직 곰곰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마부가 운전대에 올라 말을 몰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마치 "운명이야! 될대로 되려므나" 이렇게 말하려는 듯 머리를 흔들며 몸을 의자 뒤에 기댔다. 그리고 마차는 떠나버렸다.

눈먼 사나이는 감사하다는 표시로 두 손을 마차 뒤를 향해 부지런히 흔들었다. 그때 그는 까를로가 객실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까를로는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제로니모, 이리 와. 여기가 따뜻해. 마리아가 불을 피워줬어!"

제로니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팔 밑에 기타를 끼고 난간을 더듬어 계단을 올라갔다. 그는 계단을 다 올라가자 말자 큰 소리로 외쳤다. "나도 한 번 만져보고 싶어! 금화를 만져본 지가 도대체 얼마 만이야?"

"무슨 말이야?" 까를로가 물었다. "너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제로니모는 이미 계단을 다 올라와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형의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것은 그가 기쁠 때, 그리고 상대방에게 정다운 기분을 표시할 때 항상 하는 몸짓이었다. "까를로, 우리 형... 형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래." 까를로가 말했다. "오늘 번 돈이 2리라 화고 30쎈티시모야. 그리고 여기 또 오스트리아 돈도 있고... 아마 반 리라쯤 될 거야."

"그리고 그 20프랑은...? 그 20프랑 말이야!" 제로니모가 외쳤다. "나도 알고 있단 말이야!" 그는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벤치 위에 무겁게 걸터앉았다.

"뭘 안다는 거야?" 까를로가 물었다.

"제발 농담은 그만 해! 그걸 내 손에 쥐어 달란 말이야! 나는 그 동안 너무 오래 금화는 만져보지 못했어!"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내가 어디서 금화를 받았다는 거야? 기껏 2리라나 3리라 정도란 말이야!"

장님은 탁자를 손으로 탁 내리쳤다. "좋아, 좋다구! 이제 알겠어! 형은 지금 그걸 내게서 감추고 있는 거야!"

까를로는 놀라고 걱정스러워서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는 동생 곁에 다가가 가까이 붙어 앉았다. 그리고 달래듯이 동생의 팔을 붙잡았다. "나는 너에게 무엇 하나 숨기지 않아. 어떻게 해야 그걸 믿겠니? 내게 금화를 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하지만 내게 말해줬단 말이야!"

"누가?"

"저, 그 사람... 아까 이 앞에서 왔다 갔다 하던 그 젊은 사람 말이야."

"뭐라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 사람이 그랬단 말이야. '이름이 뭐지?' 그리고선 '조심해! 속지 말라구!' 이랬단 말이야!"

"너 혹시 꿈이라도 꾼 것 아니냐? 제로니모야,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야."

"말도 안 된다구? 나는 그 소리를 똑똑히 들었어. 나는 귀는 좋아. '속지 마! 내가 금화를 하나...' 아니, 이렇게 말했어. '내가 네 친구에게 20프랑짜리 지폐를 주었단 말이야' 이렇게 말했어!"

여관 주인이 들어왔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일은 안 할 건가? 지금 막 말 네 마리가 끄는 마차가 들어왔단 말일세."

"자, 가자!" 까를로가 소리쳤다. "자, 얼른 가자!"

제로니모는 움직이지 않았다. "도대체 내가 왜 가야 해? 도대체 왜? 내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형은 정말 내 곁에 서서..."

까를로가 그의 팔을 건드렸다. "조용히 해라. 이제 내려가자!"

제로니모는 입을 다물고 형을 따라갔다. 그러나 다시 계단 위에서 말했다. "우리는 더 얘기해야 해. 얘기를 더 해야 한단 말이야!"

까를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로니모가 갑자기 미쳐버린 것일까? 그 동안 제로니모가 화를 내는 일이 있기는 했어도 오늘처럼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막 도착한 마차에는 영국인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까를로는 그들 앞에서 모자에 손을 대며 인사를 하고 장님은 노래를 불렀다. 한 영국 사람이 내려와 까를로의 모자에 지폐를 몇 장 넣어 주었다. 까를로는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러고 나서 혼잣말처럼 말했다. "20쎈티시모야." 제로니모는 여전히 얼굴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새 노래를 시작했다. 영국인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떠나갔다.

형제는 말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제로니모는 벤치 위에 앉았다. 까를로는 난간 옆에 그대로 서 있었다.

"왜 말을 하지 않는 거야?" 제로니모가 물었다.

"그래..." 까를로가 대답했다. "내가 너에게 말한 그대로야." 그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뭐라고 그랬는데?" 제로니모가 물었다.

"너에게 그 말을 한 사람은 아마 정신병자일 거야."

"정신병자라고? 그것 참 그럴싸한 말씀이구만. 누가 '내가 네 친구에게 20프랑 주었어'하고 말하면 그건 미친 거란 얘기지...! 응, 그래 알겠어. 그런데 그 사람은 왜 나에게 '속지 말라'고 그랬을까, 응?"

"그 사람이 미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 같은 가난뱅이를 놀려먹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는 있단 말이야..."

"아하!" 제로니모가 소리쳤다. "놀려먹는다고? 그렇지, 형은 드디어 그런 말까지 하는군... 나도 그럴 줄 알았어!" 그는 앞에 놓여 있던 포도주 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렸다.

"제발, 제로니모!" 까를로가 외쳤다. 그는 당혹스럽고 낭패해서 거의 말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내가... 왜, 어떻게 해야 네가 내 말을 믿겠니... ?"

"형 목소리가 왜 그리 떨리지? 허허... 왜... 그러냐구?"

"제로니모야 너에게 맹세할 수도 있어, 내가..."

"응, 그런데 난 형을 믿지 않아! 지금 형은 웃고 있겠지... 형이 지금 웃고 있다는 걸 난 알고 있어!"

여관 하인이 아래에서 그들을 불렀다. "이봐! 장님! 손님이 왔단 말이야!"

두 형제는 마치 기계처럼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마차 두 대가 동시에 와 있었다. 한 대에는 세 명의 신사가, 다른 한 대에는 늙은 부부가 타고 있었다. 제로니모는 노래를 불렀다. 까를로는 낭패스럽게 그 옆에 서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동생은 나를 믿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는 제로니모를 옆에서 걱정스럽게 지켜봤다. 이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 어두운 그림자 - 죽음을 연상시키는 그림자가 동생의 이마 위를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마차는 벌써 떠났다. 그러나 제로니모는 계속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까를로는 감히 나서서 노래를 그만 하게 할 수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 목소리가 또다시 떨리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때 이층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리아가 제로니모를 불렀다. "도대체 왜 아직도 노래를 부르고 그래? 나는 노래를 들어도 한 푼도 못 줘!"

제로니모는 멜로디 중간에서 노래를 그쳤다. 마치 그의 목소리와 기타 줄이 동시에 끊긴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까를로가 그 뒤를 따라갔다. 객실에서 그는 동생의 옆에 앉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다시 한 번 동생에게 사실을 알려주려고 애를 쓸 수밖에 없었다.

"제로니모야." 그는 말했다. "너에게 맹세할게... 생각해 보란 말이야. 제로니모야,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믿을 수 있니? 내가... 그렇게..."

제로니모는 말이 없었다. 그의 죽은 눈이 창을 통해 잿빛 안개 속을 내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까를로는 계속 이야기했다. "자, 그래. 그가 미치지 않았다고 해도 좋아. 하지만 그는 뭔가 잘못 알았을 거야. 그래, 그 사람은 뭔가 잘못 생각한 거야." 그러나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면서도 스스로 자기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그걸 느끼고 있었다.

제로니모는 초조하게 몸을 앞으로 움직였다. 까를로는 갑자기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도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그러겠니? 내가 너와 똑같이 먹고 마신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거야. 내가 새 옷이라도 사면 너도 그걸 잘 알고 있잖아. 내가 무엇 때문에, 도대체 뭘 하려고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겠어? 도대체 그 돈으로 내가 뭘 한단 말이야?"

그러자 제로니모가 이빨 사이로 씹어뱉듯이 말했다. "거짓말 하지 마! 나는 형이 거짓말하는 걸 잘 알고 있어!"

"거짓말이 아니야! 제로니모야, 지금 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까를로는 놀라서 말했다.

"에이, 벌써 그 여자에게 돈을 준 거야. 그렇지? 아니면 그 여자가 나중에 그 돈을 받겠지. 그렇지 않아?" 제로니모가 소리쳤다.

"마리아 말이야?"

"마리아가 아니고 누구겠어? 에이, 거짓말쟁이, 도둑놈!"

제로니모는 탁자에서 그의 옆에 앉아 있고 싶지도 않다는 듯 팔꿈치로 형을 밀쳤다.

까를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처음엔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방을 나와 계단을 지나 가운데 뜰로 걸어갔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눈앞에 푸르스름한 안개에 잠겨 있는 길거리를 내다보았다. 비는 이미 그쳤다. 까를로는 손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고 밖으로 나갔다. 마치 동생에게 쫓겨난 것 같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는 아직까지도 알 수 없었다.

그건 도대체 무슨 인간이었을까? 1프랑을 주고는 20프랑이라고 말하다니! 그 사람은 필경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까를로는 자기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일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그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보내 원수를 갚으려고 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는 한 번도 누구를 모욕하거나 진심으로 누구와 다툰 적이 없었다. 그는 정말 지난 20년 동안 손에 모자를 들고 길거리나 뜰에 서 있었던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었다. 혹시 누가 여자 때문에 그에게 앙심이라도 품었을까?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여자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 라 로자에서 만난 웨이트리스가 마지막이었다. 과거의 어느 봄이었지!

그러나 그 여자 때문에 그에게 앙심을 품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알지 못하는 저 바깥 세상에서는 도대체 어떤 인간들이 살고 있단 말인가? 그들은... 온갖 곳에서 몰려온다.

나는 그들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단 말인가...? 제로니모에게 '내가 네 형에게 20프랑 주었다'라고 말한 것은 그 낯선 사람 나름대로 분명 무슨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 그렇다. 그러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갑자기 제로니모가 자기를 의심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나는 그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무슨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까를로는 서둘러 호텔로 돌아갔다.

그는 다시 객실로 들어섰다. 제로니모는 벤치 위에 쭉 뻗고 누워 있었다. 까를로가 들어온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마리아가 두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져왔다. 그들은 식사 중에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마리아가 접시를 치울 때 제로니모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마리아에게 말했다. "그걸로 도대체 뭘 사려는 거야?"

"대관절 뭘 산다는 거에요?"

"그래, 뭘 사는 거야? 새 치마? 아니면 귀걸이?"

"도대체 저 사람이 나더러 무슨 얘길 하는 거에요?" 마리아가 까를로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는 동안 아래 뜰에서 화물 마차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큰 소리가 들리자 마리아는 서둘러 내려갔다. 2,3분 뒤 마부 세 사람이 오더니 식탁에 자리잡고 앉았다. 주인이 그들에게 가서 인사를 했다. 그들은 날씨가 좋지 않다며 투덜댔다.

"오늘 밤에는 아마 눈이 올 거야." 한 사람이 말했다.

두 번째 마부가 자기는 10년 전 8월 중순에 고개 위에서 눈에 덮여 하마터면 얼어죽을 뻔했다는 얘기를 꺼냈다. 마리아는 그들 있는 곳에 가서 앉았다. 하인도 곁에 와서 산 아래 보르미오에 사는 자기의 부모들의 소식을 물었다.

그때 여행객을 태운 마차가 한 대 또 들어왔다. 제로니모는 노래를 불렀다. 까를로는 모자를 내밀었다. 여행객들은 그들에게 적선하는 돈을 던져 주었다. 제로니모는 이제 아주 침착해 보였다. 그는 이따금 "얼마야?" 하고 묻고는 까를로의 대답을 듣고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 까를로는 뭔가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는 뭔가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자기는 그걸 막을 방법이 전혀 없다는 느낌이 계속 들어 답답했다.

형제는 다시 계단을 올라왔다. 이층에서는 마부들이 뒤섞여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웃고 있었다. 제일 젊은 마부가 제로니모에게 소리쳤다. "우리 앞에서도 뭐 좀 좋은 걸 노래해봐! 돈을 줄 테야! 안 그래?" 그는 이렇게 말하며 다른 마부들을 돌아 보았다.

그때 마침 붉은 포도주를 한 병 들고 온 마리아가 말했다. "오늘은 저 사람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마세요. 지금 기분이 무척 좋지 않으니까요."

대답 대신 제로니모는 방 한가운데 서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자 마부들은 다들 박수를 쳤다.

"이리 오게, 까를로!" 한 사람이 불렀다. "우리도 아래 손님들처럼 모자에다 돈을 던져 주겠어!" 그는 잔돈을 꺼내 까를로가 내밀고 있는 모자 속에 떨어뜨리려는 듯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자 장님이 그 마부의 팔을 꼭 붙잡고 말했다. "저에게 주세요! 차라리 저에게요! 옆으로 떨어지잖아요! 옆으로 떨어진단 말이에요..."

"어떻게 옆으로 말인가?"

"에이 참! 마리아 다리 사이로 말이죠!"

모두들 웃었다. 주인과 마리아도 웃었다. 까를로만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동안 제로니모는 한 번도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없었는데...

"이리 와서 앉게나!" 마부들이 외쳤다. "이 친구 재미있구먼!" 그들은 제로니모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려고 서로 다가 앉았다. 대화가 뒤섞이면서 자꾸 요란해지고 또 문란해졌다. 제로니모는 이전보다 한결 더 소리를 높이고 유쾌하게 떠들어댔다. 그리고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마리아가 다시 방으로 들어오자 그는 마리아를 자기에게 끌어당기려 했다. 마부 한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 이 여자애가 예쁜 것 같은가? 실은 늙어빠진 못난 할망구란 말일세!"

그러나 장님은 마리아를 끌어당겨 자기 무릎에 앉혔다. "당신들은 모두 바보요."  제로니모가 말했다. "내가 눈이 없다고 해서 보지 못하는 줄 아시오? 나는 지금 까를로가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어요. 저... 저기 난로가에 서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웃고 있구먼!" 모두 까를로를 쳐다봤다. 까를로는 입을 딱 벌리고 놀라서 난로에 기대고 있었다. 이제 동생의 거짓말을 나무랄 수도 없다. 그는 동생의 말을 따라서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히죽 웃었다.

하인이 들어왔다. 어둡기 전에 보르미오에 도착하려면 마부들은 이제 서둘러야 한다. 그들은 일어나서 떠들석하게 작별 인사를 했다. 객실 안에는 이제 다시 두 형제만 달랑 남게 되었다. 보통 때 같으면 두 형제는 지금 잠잘 시간이다. 이 때쯤이면 호텔 전체도 항상 조용해지고,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제로니모는 머리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잠자는 것 같았다.

까를로는 잠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몹시 피곤했다. 마치 심각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온갖 일들을 머리 속에 떠올렸다. 어제와 그제, 그리고 그 이전의 모든 날들... 특히 무더운 여름날 동생과 함께 하염없이 떠돌았던 하얀 도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것들이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는 이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후 늦게 티롤에서 우편 마차가 왔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그들이 쉬고 있을 때 남쪽으로 가는 마차가 또 왔다. 형제는 네 번이나 더 뜰로 내려가야 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노래를 마치고 계단을 올라올 때에는 이미 황혼이 깃들이고 있었다. 기름 램프가 나무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지직거리며 타고 있었다.

가까운 채석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왔다. 그들은 호텔 아래쪽으로 3백 걸음쯤 내려간 곳에 있는 오두막에서 살고 있었다. 제로니모는 그들에게 가서 같이 앉았다. 까를로는 혼자서 식탁에 남아 있었다. 이 고독이 무척 오래 계속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제로니모가 노동자들에게 자기의 어린 시절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소리를 높여, 마치 비명이라도 지르는 것 같았다.

제로니모는 자기가 눈으로 본 것, 사람이나 물건 등 온갖 것을 남김없이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들에서 일하던 아버지, 담 가까이 물푸레나무가 서 있던 조그만 정원, 조그만 우리집, 구두쟁이의 어린 두 딸, 교회 뒤쪽 포도원, 그리고 특히 거울에 비쳤던 자기의 어린 시절 얼굴까지도... 얼마나 자주 까를로는 이 얘기를 들었던가?

그러나 그는 이제 그걸 참을 수 없었다. 그 이야기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들렸던 것이다. 제로니모가 하는 말이 이제와는 달리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말들은 모두 까를로에게 대고 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까를로는 슬며시 밖으로 나가 이제 완전히 어두워진 국도를 걸어갔다. 비는 이제 멎었다. 공기가 무척 차가웠다.

줄곧 걸어가, 자꾸만 어둠 속 깊이 들어가고 싶다. 마지막에는 어디든 거리의 웅덩이 같은 곳에 기어들어가 잠이 드는 거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깨어나지 말았으면좋으련만... 이런 생각이 까를로를 유혹했다. 그는 갑자기 마차가 굴러오는 소리를 들었다. 두 개의 희미한 등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까를로의 옆을 지나가는 마차에는 두 명의 신사가 타고 있었다. 그 중의 한 명, 얼굴이 갸름하고 수염이 없는 신사가 까를로의 모습을 어둠 속 등불 빛에 언뜻 보고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까를로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모자에 손을 대고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마차와 불빛은 금방 멀어져 갔다. 까를로는 다시 깊은 어둠 속에 혼자 서 있었다.

갑자기 까를로는 겁을 먹고 놀라서 몸이 움츠러들었다. 평생 처음, 어둠이 무섭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는 1분도 더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혼란한 마음 속에서 자신의 그 오싹한 느낌과 눈먼 동생에 대한 고통스러운 안쓰러움이 겹친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는 호텔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객실에 들어서자 아까 그의 옆을 지나갔던 여행객 두 사람이 식탁에 붉은 포도주 병을 놓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뭔가 굉장히 중요하고 급한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들어서도 그들은 얼굴을 들지 않았다.

다른 식탁에는 제로니모가 아까처럼 노동자들 사이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도대체 어디에 틀어박혀 있었나, 까를로?" 문간에서 호텔 주인이 물었다. "왜 동생을 혼자 둔 거야?"

"무슨 일이 있었나요?" 까를로가 놀라서 물었다.

"제로니모가 한턱 냈다네.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이제 곧 장사가 잘 안 되는 때가 온단 말일세. 자네들은 그런 걸 생각해 둬야지."

까를로는 서둘러 동생에게 걸어가서 팔을 붙잡고 말했다. "이리 좀 와라."

"이거 왜 이래?" 제로니모가 소리쳤다.

"저리 좀 가자." 까를로가 말했다.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난 돈을 벌고 있어. 내가 하고 싶은 건 내 돈으로 할 거야. 흥! 형이 전부 챙길 수는 없을걸? 사람들은 형이 돈을 내게 준다고 생각하겠지? 천만에! 나는 장님이야! 하지만 손님들이 있어! 그래서 나에게 '네 형에게 20프랑 주었다'고 친절하게 일러준단 말이야!"

노동자들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 해." 까를로가 말했다. "자, 이리 와라!" 그는 동생을 잡아당겨 계단으로 데리고 갔다. 전혀 장식이 없는, 지붕 밑 방 자기들 잠자리로 간신히 끌다시피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제로니모는 그렇게 끌려가면서도 도중에 계속 소리쳤다. "그래 이제 다 폭로가 된 거야. 이젠 다 알아! 아, 잠간만 기다려! 그 여자 어디 있지? 마리아 말이야. 형은 그 돈을 그 여자 저금통에 넣어 두었지? 흥! 나는 형을 위해 노래하고 기타를 켜고, 형은 내 것을 먹으며 살고 있어. 그런데 형은 내 걸 훔치고 있단 말이야!" 제로니모는 짚을 채운 시트 위에 쓰러졌다.

불빛이 복도에서 희미하게 방으로 새어들었다. 저쪽 손님방이 하나 문이 열려 있었다. 마리아가 거기서 손님들의 잠자리를 펴고 있었다. 까를로는 침대 옆에 서서 동생이 쓰러져 누운 것을 내려다 보았다. 제로니모는 얼굴이 부어오르고 입술이 파리했다. 축축한 머리카락이 이마에 늘어붙은 그 얼굴은 실제보다 몇 년이나 더 늙어 보였다.

이제 점점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눈먼 동생의 의심은 오늘 비로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틀림없이 이미 오래 전부터 제로니모의 마음 속에 잠자고 있던 그런 의심인 것이다. 그 동안에는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낼만한 어떤 계기, 감히 그런 사실을 직접 말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

까를로가 지금까지 그를 위해 해온 모든 일은 허사였다. 가슴을 후비는 회한이나 자기 인생을 내던진 희생도 소용이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그래도 계속해서 날이면 날마다, 그를 돌봐주고, 그를 위해 구걸을 해야 할까? 영원한 암흑 속을 함께 걸으며 돌봐주고 그 대가로 의심과 욕을 얻어먹어야만 한단 말인가? 이런 일을 앞으로 얼마나 계속해야 한다는 말인가?

동생이 나를 도둑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는 나는 동생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이라도 똑 같은 일을 동생에게 해줄 수 있다. 아니 오히려 더 잘해 줄지도 모른다. 정말 이젠 동생을 혼자 내버려두고 영원히 그와 헤어지는 것이 제일 현명한 일일 것이다. 그러면 제로니모는 결국 자기의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때 가서야 제로니모는 비로소 기만 당한다는 것, 도둑을 맞는다는 것, 또 외롭고 비참하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때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그래, 나는 아직 늙지 않았다. 나 혼자뿐이라면 나는 아직도 무슨 일이든 시작할 수 있다. 최소한 하인 일자리라도 어디서든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눈앞에 동생의 다른 모습이 떠올랐다. 해가 비치는 길거리에서 보이지 않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눈이 부시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며 하늘을 멍하게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언제나, 영원히 그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 속을 두 손으로 휘저으며 돌 위에 앉아 있는 동생의 모습이었다.

까를로는 이 눈먼 동생에겐 이 세상에서 오직 자기밖에 없으며, 역시 마찬가지로 자기에게도 이 동생밖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동생에 대한 사람이 자기 인생의 전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주 분명히, 눈먼 동생이 자기의 이 사랑에 보답하고 자기를 용서해 주었다는 믿음, 이 믿음만이 그에게 모든 불행을 이겨내게 해 주었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그는 이 희망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동생에게 자기가 필요한 만큼, 자기에게도 동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동생을 버릴 수도 없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이 의심을 참고 견디거나, 아니면 동생에게 그 의심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설득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금화를 마련할 수만 있다면... 내일 아침이라도 동생에게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네가 그 노동자들과 다 마셔버리지 않도록... 사람들이 그걸 훔쳐가지 않도록 내가 그걸 잘 간직해 두었다고"고 말이다. 혹은 그밖에 무슨 다른 말이 있겠지...

발걸음이 나무 계단 위로 가까워졌다. 여행객들은 이제 잠을 자러 갔다. 갑자기 그의 머리 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갔다. 저쪽 방에 가서 문을 노크하고, 손님들에게 오늘 일어난 일을 사실 그대로 설명하는 거다. 그래서 그들에게 20프랑을 도와달라고 간청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쳐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런 생각이 전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그의 이야기를 아예 믿어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문득 자기가 어두운 길에 서 있을 때 마차에 타고 있던 창백한 사나이가 깜짝 놀라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시트 위에 몸을 눕혔다. 방안은 무척 어두웠다. 노동자들이 뭐라고 목소리를 높여 떠들면서 무겁게 나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양쪽 문이 닫혔다. 하인이 다시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는 완전히 조용해졌다. 까를로는 다만 제로니모가 코를 고는 소리밖에 들을 수 없었다.

어지러운 꿈 속에서 그의 생각은 두서없이 혼란스러웠다. 눈을 뜨자 주위는 아직도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는 창문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눈에 신경을 집중시키자 꿰뚫어 볼 수 없는 어두움 가운데서도 짙은 회색 사각형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제로니모는 여전히 술에 취해 무거운 잠에 시달리고 있었다. 까를로는 내일 낮을 생각했다. 소름이 끼쳤다.

까를로는 이 날이 지나고 그 다음날, 그 다음날이 지나고 또 그 다음날... 자기 앞에 다가올 미래를 생각했다. 그러자 자기 앞에 놓인 절박한 고독에 대한 전율이 그를 휩쌌다. 왜 어제 저녁에는 그리도 용기가 없었을까? 왜 그 낯선 손님들에게 가서 20프랑만 도와달라고 부탁해보지 않았을까? 그들은 분명 그를 동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왜 말하지 않은 것이 더 좋았을까? 그는 느닷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기의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는 왜 말하지 않은 것이 더 좋은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만약 부탁을 거절했다면... 하여간 자기는 그들에게 의심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회색 점을 응시했다. 그것은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자신의 의지와 반대되는, 방금 머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은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저쪽 방의 문은 모두 잠겨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잠에서 깰지도 모른다. 그렇다, 저기 어두움 한복판에 있는 반짝이는 회색 점은 벌써 새로운 날이 시작되고 있지 않은가!

까를로는 마치 그곳으로 끌리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마를 차가운 유리에 갖다 댔다. 도대체 나는 왜 일어났을까? 도대체 뭘 하려고... 그것은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범죄인 것이다! 하지만 재미로 수백 마일씩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20프랑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들은 실상 그 돈이 없어진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맞은 편 문으로 걸어가서 살그머니 열었다. 두 발자국 거리밖에 되지 않는 다른 문은 닫혀 있었다. 기둥의 못에 옷들이 걸려 있었다. 까를로는 손으로 그 위를 더듬었다. 그렇다, 손님들이 지갑을 호주머니에 넣어 두었다면 일은 매우 간단하다. 더 이상 구걸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호주머니는 비어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우리 방 시트 위로 돌아갈 것인가.

그러나 20프랑을 마련하는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위험하지 않고, 그리고 보다 정당한 방법 말이다. 3,4 쎈티시모씩 적선 받은 돈에서 조금씩 모아 20프랑이 모일 때까지 남겨두고, 그리고 나서 그걸 금화로 바꾼다면?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몇 달, 아마도 일 년은 걸릴 것이다. 아 나에게 용기가 있다면 좋으련만! 아직도 그는 복도에 서 있었다. 그는 문쪽을 넘겨다 보았다. 위에서 바닥으로 똑바로 드리워진 줄은 무엇일까?

그럴 수가 있을까? 문이 그냥 닫혀 있을 뿐, 잠겨 있지 않단 말인가? 그런데 나는 도대체 그걸 보고 왜 이리 놀라는 것일까? 지난 몇 달 동안 그 문은 계속 잠겨있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 때문에 잠그겠는가? 지난 여름 내내 이 방에서는 단 세 번밖에 손님이 묵지 않았다. 두 번은 견습공들이었고, 한 번은 발을 다친 관광객이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다. 이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다. 그리고 행운이 있기를!

최악의 경우는 두 사람이 눈을 뜨는 것이다. 그런데 그 때에는 또 나름대로 변명할 구실이 있을 것이다. 그는 문틈으로 방안을 엿보았다. 방이 캄캄해서 당장은 침대 위에 누워있는 두 사람의 희미한 윤곽 밖에는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손님들은 조용히, 규칙적으로 숨을 쉬고 있다. 까를로는 문을 살짝 열고 맨발로, 소리없이 방안에 들어섰다.

두 침대는 머리를 나란히 벽으로 향하고 발을 문 쪽으로 두고 있었다. 방의 한가운데데 탁자가 하나 놓여 있다. 까를로는 살금살금 거기까지 걸어갔다. 손으로 탁자의 표면을 만져보자 열쇠 뭉치와 잉크를 지우는 칼, 조그만 책이 느껴진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 물론이지! 그들이 탁자에 돈을 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다니! 아, 이제라도 곧 돌아가면 된다! 들키지 않고 돌아 나간다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괜찮다...

그는 문 옆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거기 안락의자 위에 뭔가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더듬었다. 권총이었다... 까를로는 몸을 움츠렸다. 차라리 이걸 내가 집어넣는 게 좋지 않을까? 왜 이 사람은 권총을 여기 놓았을까? 이 사람이 눈을 뜨고 나를 알아본다면?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나는 물론 이렇게 말해야지... 벌써 세 시입니다. 나리 일어나셔야죠!...

그는 권총을 놓았다. 그리고 살금살금 방안으로 더 들어갔다. 여기 다른 안락의자 위 속옷들 밑에... 이것 봐라! 고맙기도 하지! 여기 있구나... 이것이 지갑이다. 그는 그것을 손에 쥐었다! 그 순간 그는 나지막하게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재빠르게 그는 침대 아래에 길게 몸을 뻗었다. 다시 한 번 쿵 하는 소리. 무거운, 편안한 한숨 소리. 기침 소리. 그리고 다시금 깊은 정적...

까를로는 지갑을 손에 쥐고 방바닥에 엎드린 채 기다렸다. 더 이상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벌써 새벽빛이 창백하게 방안에 스며든다. 그는 감히 일어서지 못하고 방바닥을 기어 문까지 갔다. 문은 그가 지나갈 만큼 열려 있었다. 복도까지 그는 계속 기었다. 그리고 거기서 깊은 숨을 내쉬며 비로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갑을 열자 그것은 세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왼쪽과 오른쪽에는 단지 잔돈 은화가 있을 뿐이다.

까를로는 닫혀 있는 가운데 부분을 딸깍 열었다. 20프랑 금화가 세 개 있는 것을 감촉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그 가운데 두 개를 가질까 생각했다. 그러나 한 개만 꺼내고 지갑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무릎을 꿇고 아주 조용한 방안을 문틈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지갑이 두 번째 침대 밑까지 미끌어져 닿도록 한 번 쭉 밀었다.

손님이 잠에서 깨면 지갑이 안락의자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까를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 방바닥이 가볍게 삐걱거리고 동시에 방안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까를로는 숨을 죽이고 서둘러 두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조용히 미끌어져 들어갔다. 이제 안전하다. 그는 밖을 엿들었다. 다시 한 번 저쪽 방에서 침대가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그는 손가락 사이에 금화를 끼고 있다. 성공했다. 성공한 것이다! 그는 이제 20프랑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동생에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이다. "자, 봐라, 나는 도둑이 아니란 말이야!" 이렇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둘이 함께 오늘 안에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는 것이다.

남쪽 보르미오를 향해서, 그리고 계속 벨트린을 지나고... 그리고 티라노로... 에돌레로... 브레노로... 작년처럼 이세오의 호수로... 그렇게 하면 전혀 의심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제 저녁에 주인에게 이미 말해두었기 때문이다. "2,3일 안으로 내려갈 겁니다"하고 말해두었던 것이다.

날은 계속 밝아졌다. 온 방이 잿빛 새벽빛 가운데서 어슴프레 밝아온다. 아, 제로니모가 깨어나면 좋을 텐데! 새벽에 길을 걷는 건 참 기분이 좋다! 우리들은 아직 해가 뜨기 전에 길을 떠나는 것이다. 주인과 하인에게 아침 인사를 하고, 마리아에게도 인사를 해야지. 그리고 나서 떠나는 것이다. 두 시간 동안 걸은 다음에 계곡 가까이 가서야 제로니모에게 이야기를 해야지. 제로니모가 몸을 길게 뻗치며 기지개를 켰다. 까를로가 그를 불렀다.

"제로니모!"

"왜, 무슨 일이야?" 제로니모는 두 손을 짚고 일어났다.

"제로니모, 우리 이제 일어나자."

"왜?" 그는 멀어버린 눈을 형에게 돌렸다. 까를로는 제로니모가 어제 일을 아직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동생이 또다시 술에 취하기 전에는 그 일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날씨가 추워, 제로니모. 우리 떠나자. 올해 여기서는 이제 다한 거야. 이제 떠났으면 좋겠어. 점심 때에는 볼라도레까지 갈 수 있을 거야."

제로니모는 몸을 일으켰다. 집 여기저기서 잠을 깨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래 뜰에서 주인이 하인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까를로는 일어나서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항상 일찍 일어나 새벽 어스름 속에서 길거리로 나가곤 했다. 그는 주인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제 작별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아, 그래? 오늘 벌써 떠나나?" 주인이 물었다.

"네. 이제 뜰에 서 있으면 지독하게 추워요. 바람도 불구요."

"그래, 보르미오에 가거든 발데티한테 내 안부를 전해주게. 그리고 그 사람한테 잊지 말고 석유 보내달라고 그러게."

"네. 그 분께 안부 전해드릴께요. 그런데 참... 지난밤 숙박료가..." 그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냥 두게, 까를로." 주인이 말했다. "그 20쎈티시모는 자네 동생에게 그냥 줄게. 나도 그 친구 노래를 들은 거니까. 잘 가게."

"고맙습니다." 까를로가 말했다. "그런데, 저희들은 그렇게 서두를 건 없거든요. 주인 어르신이 오두막에 다녀 오시면 또 만나 뵐 거에요. 보르미오는 언제나 똑 같은 곳에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아요?" 그는 소리 내어 웃고 계단을 올라갔다.

제로니모는 방 한가운데 서서 말했다. "난 이제 떠날 준비 다했어." "그래 곧 떠나자." 까를로가 말했다.

까를로는 방 구석에 있는 작은 장롱에서 자기들의 소지품을 꺼내 짐을 꾸렸다. 그리고 말했다. "날씨는 좋아. 무척 춥기는 하지만."

"나도 알아." 제로니모가 말했다. 두 사람은 방을 나왔다.

"조용히 걸어가자." 까를로가 말했다. "어제 저녁에 온 손님 두 사람이 옆 방에서 자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들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주인이 네게 인사 전해달라더라." 까를로가 말했다. "어제 밤 숙박비 20쎈티시모를 우리에게 주었어. 지금 바깥 오두막에 가 있는데 두 시간 후에나 돌아올 거야. 물론 내년에는 다시 만나게 되겠지." 제로니모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침 햇살이 비치는 가운데 그들 앞에 펼쳐진 국도를 걸어갔다. 까를로는 동생의 왼팔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계곡 쪽으로 걸어갔다. 얼마 동안 걸은 후 둘은 길이 길게 굽이치며 멀리 뻗어나가는 모습이 훤히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안개가 위로 솟아오르며 그들에게 몰려왔다. 위에 펼쳐진 산들을 구름이 삼켜버린 것 같았다. 까를로는 그 때 생각했다. 이제 동생에게 그 얘기를 해주어야 하겠다...

까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금화를 호주머니에서 끄집어 내어 동생에게 쥐어주었다. 동생은 그것을 오른손 손가락 사이에 끼고 볼에 대 보고 이마에 대 보고 하더니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도 그런 줄 알았어." 제로니모가 말했다.

"응, 그래?" 까를로는 대답하면서 의아스럽게 동생을 쳐다보았다.

"그 낯선 손님이 내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어도 난 다 알게 됐을 거야."

"그래?"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모르고 까를로는 말했다. "하지만 넌 알 거야. 왜 내가 저 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난 네가 몽땅 써 버릴까 그게 두려웠던 거야. 그리고 이것 봐, 제로니모... 이제 네 윗도리와 내복, 구두를 새로 살 때가 됐어. 그래서 난..."

장님은 사납게 머리를 흔들었다. "뭐 하려고?" 그는 한 손으로 자기 윗도리를 만졌다. "이 옷은 아직 좋아. 또 따뜻하기도 하고. 그리고 우린 이제 남쪽으로 가잖아."

까를로는 제로니모가 전혀 기뻐하지도 않고, 자기에게 사과도 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말을 계속했다.

"제로니모야, 내 말이 옳았지 않아? 너는 왜 기뻐하지 않는 거야? 지금 우린 그걸 갖고 있단 말이야, 그렇지 않아? 지금 우리는 그걸 완전히 손에 쥐고 있단 말이야. 내가 저 위에서 네게 이미 말했더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정말 내가 너에게 말 안 하기를 잘했지, 생각해 봐..."

그때 제로니모가 소리쳤다. "거짓말 좀 그만 해!... 형은 항상 거짓말만 해! 벌써 백 번은 거짓말을 했을 거야! 그것도 실은 형이 가지려고 했던 거야. 그러다가 겁이 난 거지... 겁이 났던 거라구!"

까를로는 머리를 떨어뜨리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눈먼 동생의 팔을 붙잡고 계속해서 그를 데리고 길을 걸어갔다. 제로니모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그는 정말 슬펐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제보다 더 슬프지는 않았다. 자기의 그런 마음이 그로서도 놀라웠다.

안개가 걷혔다. 오래 침묵을 지킨 끝에 제로니모가 말했다. "이제 좀 따뜻해지는군." 이 말은 무관심하고, 당연한, 벌써 몇 백번이나 한 말이 아닌가. 까를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제로니모의 생각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제로니모에게 까를로는 영영 도둑이 되고 만 것이다.

"배 고프지 않아?" 까를로가 물었다.

제로니모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저고리 주머니에서 치즈와 빵을 꺼내 입에 넣고 먹기 시작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길을 걸어갔다.

그들은 보르미오에서 오는 우편 마차와 만났다. 마부가 그들을 보고 소리쳤다. "벌써 내려가나?" 그리고 또 다른 마차들도 왔다. 마차들은 모두 위로 올라갔다.

"계곡에서 바람이 불어와." 제로니모가 말했다. 급하게 휘어진 커브를 돌아가자 그들의 눈 아래에 벨트린이 나타났다.

정말...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군... 까를로는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동생을 위해 도둑질까지 했다. 그런데 그것조차 이제 허사가 된 것이다.

그들 아래에 펼쳐져 있던 안개는 자꾸 엷어졌다. 햇빛이 여기저기 구멍을 뚫고 비쳐 들어왔다. 까를로는 생각했다. "이렇게 서둘러서 여관을 떠난 것이 잘못한 것 아닐까? 침대 밑에 지갑이 놓여 있고... 하여간 의심을 받을 만한 일이니까 말이야..."

그러나 이제 아무래도 좋다. 더 이상 무슨 나쁜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동생의 눈을 멀게 만들었고, 동생은 나에게 돈을 도둑 맞았다고 생각한다... 벌써 몇 년 동안이나 그렇게 생각해온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두고두고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나쁜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들의 발 아래 커다란 하얀 호텔이 마치 아침 햇살에 목욕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더 아래로 깊숙이 내려가면 계곡이 넓어지면서 마을이 기다랗게 뻗쳐 있다. 그들은 둘 다 아무 말도 없이 길을 걸었다. 까를로의 손은 여전히 장님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그들의 호텔의 정원을 지나갔다. 테라스 위에서 손님들이 밝은 여름옷을 입고 앉아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 어디서 쉴까?" 까를로가 물었다.

"그래, 항상 독수리장에서 쉬었으니까, 이번에도..."

그들은 마을 끝에 있는 조그만 호텔에 도착했다. 그들은 바에 앉아 포도주를 주문했다.

"오늘은 왠일로 이렇게 일찍 우리 집에 왔나?" 주인이 물었다.

까를로는 이 질문에 약간 놀랐다. "지금이 철이 이른 건가요? 9월 10일 아니면 11일텐데... 그렇지 않나요?"

"작년에는 지금보다 훨씬 늦게 온 것 같은데..."

"저 위는 지금 무척 추워요." 까를로가 말했다. "어제 밤에는 정말 춥더라구요. 참, 그렇지... 잊지 말고 석유를 보내 주시라고 그러더군요."

바의 공기는 탁하고 무더웠다. 이상스러운 불안감이 까를로를 휩쌌다. 그는 다시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티라노, 에돌레, 이세오의 호수, 어디든지 무조건 멀리 가는 길로 나가고 싶었다.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가려고?" 제로니모가 물었다.

"오늘 점심 때까지는 볼라도레에 가야 해. '사슴장 호텔'에서 점심 때 마차들이 쉬니까... 거긴 벌이가 좋아." 그들은 거기를 떠났다. 이발사 베노치가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면서 가게 앞에 서 있었다. "안녕." 이발사가 소리쳤다. "저 위는 좀 어때? 지난밤에 눈이라도 오지 않았나?"

"네, 네." 까를로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마을을 벗어나자 목장과 포도원 사이로 뽀얗게 비치는 길이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하늘은 푸르고 고요했다. "왜 나는 그런 짓을 했을까?" 까를로는 생각했다. 그는 눈먼 동생을 옆에서 쳐다보았다. 지금 저 애 얼굴이 전과 달라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실상 동생은 계속 까를로가 도둑질을 한다고 믿어 왔던 것 아닌가?

까를로는 실상 언제나 혼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동생은 언제나 나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는 결코 벗어 던질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매고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햇볕이 모든 길 위를 눈부시게 비추고 있다. 그러나 제로니모는 어두운 밤 속을 걸어가고 있다. 까를로는 자기도 그 어두운 밤이 보이는 듯했다.

그들은 계속 걸어갔다. 몇 시간이고 걷고 또 걸었다. 가끔 제로니모는 이정표 위에 앉아 쉬었다. 어떤 때는 둘 다 다리 난간에 기대 숨을 돌리기도 했다. 그들은 다시 마을을 지나갔다. 호텔 앞에 마차가 서 있었다. 여행객들은 마차에서 내려 이리저리 다니고 있다. 그러나 두 구걸꾼은 거기서 지체하지 않고 다시 툭 트인 거리로 나왔다. 해는 자꾸만 높이 솟았다. 점심 때가 가까워진 모양이다. 그날도 다른 수천 개의 날과 똑 같은 하루였다.

"볼라도레의 탑이군." 제로니모가 말했다. 까를로는 눈을 들었다. 그는 제로니모가 얼마나 정확하게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볼라도레의 탑이 지평선 너머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때 누군가 멀리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까를로에겐 마치 그 사람이 길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일어선 것처럼 느껴졌다. 그 사람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까를로는 그 사람이 국도에서 자주 만나곤 하던 헌병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까를로는 좀 놀랐다. 그 헌병이 가까이 왔을 때에야 그가 삐에르 테넬리라는 것을 알아보고 안심했다.

과거 어느 오월에 두 형제는 모리니요네의 라가찌 호텔에서 그와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헌병은 자기가 옛날에 하마터면 어느 부랑인한테 칼로 찔려죽을 뻔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실감나게 들려주었다.

"어떤 사람이 길에 멈춰 섰어." 제로니모가 말했다.

"헌병 테넬리야." 까를로가 말했다.

그들은 헌병에게 가까이 갔다.

"안녕하세요? 테넬리 씨." 까를로는 말하고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어쩔 수 없게 됐다." 헌병이 말했다. "너희 둘을 우선 볼라도레의 지서까지 연행을 해야겠다." "예?" 장님이 외쳤다.

까를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일은 아닐 거야. 여기 아래쪽에서 벌써 그 일을 알 리가 없으니까...'

"어차피 너희들 가는 길하고 같은 방향이니까..." 헌병이 웃으면서 말했다. "함께 가도 너희들 별 일은 없을 거야."

"왜 아무 말도 안 해, 형?" 제로니모가 물었다.

"응, 그래. 이야기할게. 제발, 헌병 나리... 대관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도대체 저희들이 무얼... 제가 혹시 무슨... 정말이지 전 아무것도 모르겠는데요."

"어쩔 수 없어. 아마 넌 무죄일지도 몰라. 내가 뭘 알겠어. 하여간 너희들은 저 위에서 손님들 돈을 훔쳤다는 혐의야. 그래서 우리는 너희들을 붙잡아 가두라는 전보를 받았단 말이야. 그래, 너희들은 죄가 없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어쨌든 함께 가자!"

"왜 아무 말도 없어, 형?" 제로니모가 물었다.

"내가 이야기할게. 응 그래, 내가 이야기할 거야."

"자, 이젠 가자! 거리에 이렇게 서 있으면 뭐할 거야? 햇볕이 따갑잖아. 한 시간 안으로 목적지까지 가야 해. 자, 어서 가자!"

까를로는 이제까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제로니모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들은 천천히 걸어갔다. 헌병이 그들의 뒤를 따르고...

"형, 왜 말이 없어?" 제로니모가 다시 물었다.

"하지만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제로니모,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모든 것이 밝혀지겠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 때 이런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법정에 서기 전에 동생에게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할까? 안될 일이다. 헌병이 우리가 하는 얘기를 다 들을 테니까.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인가? 법정에서 나는 말해야지... 재판장님... 이렇게 말해야지... 다른 도둑질과는 다릅니다, 그러니까 설명을 드리자면...

그는 머릿속으로 법정에서 이 사건을 분명하고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을 찾느라고 애를 썼다. '어제 어떤 신사분이 마차를 타고 고개를 넘어가다가... 그 사람은 미치광이였는데... 혹은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은데요... 그래서 그 사람이...'

도대체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란 말이냐! 누가 그런 말을 믿어줄 것인가?... 그가 이렇게 주절주절 지껄이게 내버려두지도 않을 것이다. 이 따위 어리석은 이야기를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로니모조차도 그걸 믿어주지 않는다. 그는 옆에 있는 동생을 쳐다보았다. 장님의 머리는 오랜 습관대로 발걸음에 따라 박자를 맞춰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러나 그 얼굴 표정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공허한 시선은 멍하게 위를 향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까를로는 갑자기 동생의 이마 뒤에서 어떤 생각이 오가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역시 그랬어...' 제로니모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형은 나한테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것도 훔쳤던 거야. 형은 그래도 괜찮겠지... 눈이 멀쩡하니까. 그래서 형은 그 눈을 잘 써먹고 있는 거라구...'

그렇다. 제로니모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틀림없다... 내게서 돈이 발견되지 않는다 해도 그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법정에서나 제로니모 앞에서나 마찬가지다. 나는 감옥에 갇힐 것이다. 그리고 동생도... 그렇다. 나와 마찬가지로 동생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동생은 금화를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는 더 이상 생각을 계속할 수 없었다. 마음이 몹시 어지러웠다.

그는 자기가 이 사건 전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지 나는 한 가지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난 일년 동안이라도 기꺼이 감옥에 들어갈 것이다... 만일 제로니모가, 형이 자기를 위해 도둑질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만 한다면... 10년이라도 좋다.

그때 제로니모가 갑자기 멈춰섰다. 그래서 까를로도 따라서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헌병이 화를 내며 물었다. "자 빨리 가자!" 그때 헌병은 장님이 갑자기 기타를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두 손으로 형의 볼을 더듬는 것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장님은 그리고 나서 입술을 까를로의 입에 가까이 대고 형에게 입을 맞추었다. 까를로는 처음에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너희 자식들 지금 미친 거야?" 헌병이 물었다. "얼른 가잔 말이야! 너희 때문에 햇볕에 타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제로니모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땅바닥에서 기타를 집어들었다. 까를로는 길게 한숨을 쉬고 손으로 다시 제로니모의 팔을 붙잡았다. 도대체 그럴 수가 있을까? 동생이 더 이상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니! 마침내 제로니모가 모든 걸 알아차렸단 말인가? 그는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옆의 동생을 바라보았다.

"가!" 헌병이 소리쳤다. "이 자식들, 아무래도 맛을 봐야겠군!" 그리고 헌병은 까를로의 옆구리를 한 대 갈겼다.

까를로는 눈먼 동생의 팔을 꼭 부여잡고 앞으로 이끌며 다시 걸어갔다. 그는 전보다  훤씬 더 빨리 걸었다. 제로니모가 어린 시절 이래 두 번 다시 보여주지 않았던, 부드럽고 복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까를로도 역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제 자기에게 더 이상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법정에서나 또 이 세상 다른 어느 곳일지라도. 그는 다시 동생을 얻은 것이다... 아니, 그는 처음으로 동생을 얻은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