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소개]
루신(魯迅, 1881-1936) : 중국의 소설가. 중국 근대문학의 창시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본명은 주수인(周樹人)으로 루신은 필명이다. 절강성에서 태어나 일본 센다이(仙台)의학교로 유학을 갔으나 중퇴하고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광인일기> <아Q정전>으로 작가의 지위를 확립했으며, 평생 군벌정치와 일본 군국주의와의 투쟁이라는 기조를 유지했다. 사회주의 활동에 참여했으며, 지금까지도 중국에서 국민작가적인 위치를 갖고 있다. 단편집 <눌함(訥喊)> <방황> 등이 있다.
[작품 소개]
루신의 대표작으로, 평범한 중국 민중 가운데 한 사람의 숨김없는 삶의 모습과 혁명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희생당하는 모습을 그려낸 역작이다. 작가가 민중에 대한 애정과 혁명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갖고 있음에도 이렇게 남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모습마저도 감추지 않고 형상화한 것은 진실에 대한 고발정신과 리얼리즘의 승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아큐(阿Q)의 전기를 써야겠다고 작정한 것은 한두 해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망설였던 것은, 나 자신이 후세에 오래 전해줄 만한 글을 쓸 인물이 못 되는 까닭도 있지만 그 밖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가 그 문장의 제목이다. 열전(列傳), 자전(自傳), 별전(別傳), 가전(家傳), 본전(本傳) 등 전기에는 많은 종류가 있지만, 아쉽게도 아큐에게 적합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큐가 역사에 기록될 만한 위인은 아니었으니 분명 열전은 아니다. 내가 아큐 자신이 아니니 자전도 아니다. 내가 아큐하고 종씨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그의 자손에게서 부탁받지도 않았으니 가전도 아니다.
결국 이 문장은 ‘본전’으로 분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 문장 수준을 생각해보면 손수레꾼이나 장돌뱅이 따위가 쓰는 비천한 말투여서 본전이랍시고 내세우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소설가들이 흔히 쓰는 ‘잡담은 그만두고 정전(正傳)으로 돌아가서(본론으로 들어가서)’라는 말에서 ‘정전’ 두 글자를 빌려다가 제목으로 삼는 게 어떨까?
둘째, 전기를 쓰자면 대개 첫머리에 이름은 무엇이며 어느 지방 사람이라는 내용이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나는 아큐의 성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셋째로, 나는 아큐의 이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른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아큐’라고 불렀다. 하지만, 죽은 다음에는 두 번 다시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전에 자오 영감의 아들인 수재(秀才, 과거 시험 과목의 하나인 과학의 명칭. 여기서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의미) 선생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그렇게 박학다식한 사람조차 그의 진짜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아큐의 이름을 쓸 때 서양 글자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유행하는 철자법을 따라 ‘아Quei’라 하고, 쓸 때는 줄여서 아Q로 하려는 것이다.
넷째로, 아큐의 고향을 알 수 없다. 그가 비록 웨이좡에서 오래 살았다고는 하지만, 이따금 다른 곳에서도 살았으니 반드시 웨이좡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아큐는 이름이나 고향만 애매한 게 아니라, 웨이좡에 오기 전에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았는지도 알 수 없다. 마을 사람들도 일손이 필요하거나 골려줄 때만 아큐를 생각할 뿐 다른 때는 그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큐는 집도 절도 없이 마을에 있는 투구츠(土谷祠, 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에서 살았다. 고정된 일자리도 없어서, 남의 집에서 하루하루 품팔이를 하며 근근히 살아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 바쁠 때면 아큐를 생각하지만, 한가해지면 까맣게 잊어버리곤 하였다.
아큐는 자존심이 무척 강해서 웨이좡 사람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심지어 웨이좡에 딱 두 사람밖에 없는 문동(文童, 과거 공부를 하고 있지만 아직 수재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조차도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아큐의 말대로 하면, 옛날에 그는 떵떵거리며 잘 살았고 학식도 많았고 못 하는 게 없는 거의 완벽한 인간이었다고 한다.
과거야 그렇다 쳐도, 그에게는 체질적으로 상당한 약점이 있었다. 머리 몇 군데가 부스럼 자국으로 벗겨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벗겨진다’는 표현을 몹시 싫어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런 심리가 점차 확대되더니 나중에는 ‘빛나다’라는 말이나 ‘환하다’라는 말도 싫어하게 되었다.
급기야는 등불이나 촛불 같은 낱말까지도 금기시하게 되었다. 누군가 그 금기를 거스리는 자가 있으면, 아큐는 그 부스럼 자국이 벌개지도록 화를 냈다. 상대에게 욕을 퍼부으며 때리려고 덤비기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아큐는 혼을 내주려고 덤벼들었다가 오히려 자기가 호되게 당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그래서 아큐는 대응 방법을 바꾸기로 하였다.
동네 건달들은 아큐를 볼 때마다 “야아, 이거 반짝반짝하네! 그러고 보니 등잔이 여기 있었네그려!”하고, 아큐의 머리를 툭툭 쥐어박곤 했다. 그들은 아큐를 단단히 혼내줬다고 즐거워 했지만, 오히려 승리감으로 의기양양해진 것은 건달들이 아니라 아큐 자신이었다. 그는 건달들이 그럴 때마다 자신을 그냥 벌레처럼 하찮은 존재로 생각해 버리곤 했다. 그렇게 되면 건달들은 기껏해야 벌레를 상대해서 씨름한 꼴이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네놈들이 그래봐야 아무 소용도 없어. 나는 기껏해야 버러지, 버러지니까 말이야.”
아큐는 자신을 경멸할 수 있는 최고의 자격을 가진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서 자신을 경멸한다는 말을 빼버리면 남는 것은 ‘최고의 자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이다. 어쨌든 ‘최고’라는 것은 좋은 것 아닌가? 이렇게 기묘한 수법으로 정신 승리를 하고 나면 아큐는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어느 봄날, 아큐는 술에 취해 건들거리며 길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길거리 담장 밑에서 왕털보가 벌거벗고 이를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왕털보는 부스럼으로 머리가 벗겨진데다 털북숭이여서 모두들 그를 ‘왕대머리 털보’라고 불렀다. 왕털보는 이를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계속 잡아서 입에다 넣고 툭툭 소리를 내며 깨물었다.
아큐는 왕털보가 이 잡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온몸이 근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왕털보 옆으로 가서 앉아 자신의 다 떨어진 겹저고리를 벗어 들춰보았다. 새로 빨아서 그런지, 아니면 재주가 없어서 그런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이를 서너 마리 잡을 수 있었다. 아큐는 처음에는 실망했지만 나중에는 울화가 치밀었다.
자기가 깔보는 왕털보는 저렇게 이를 많이 잡고 있는데 나는 겨우 이것밖에 못 잡다니! 이것은 얼마나 체면이 깎이는 일인가. 아큐는 잡은 이를 입에 넣고 힘을 꽉 주고 깨물었다. 그러자 픽 하는 소리가 났다. 깨무는 소리조차 왕털보에게 못 미치지 못하고 말았다. 아큐의 부스럼 자국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큐는 옷을 땅바닥에 냅다 팽개치고 길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이 털버러지 같은 놈아!”
“이 개 같은 자식이 누구한테 욕이야!”
왕털보가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이런 털북숭이가 감히 지껄여? 아큐는 자신을 항상 두들겨패는 건달패들이라면 겁을 먹었겠지만, 왕털보쯤이야 못 당할까 싶어 용감하게 대들었다.
“누구긴? 바로 네놈한테 욕하는 거지.”
“이 자식, 몸뚱이가 근질거리나 보네?”
왕털보가 일어나 옷을 주워 입으면서 말했다. 아큐는 그가 도망친다고만 생각하고 잽싸게 달려들어 한 대 갈기려고 했다. 하지만 아큐의 주먹이 왕털보에게 닿기도 전에 오히려 그에게 손을 잡혀 버리고 말았다. 왕털보는 아큐의 변발을 낚아채더니 채 담장 앞으로 끌고가 호되게 머리를 쳐박고 말았다.
아큐로서는 아마 이것이 평생에서 가장 굴욕적인 일로 기억되었을 것 같다. 자신은 왕털보 따위는 털북숭이라고 늘 비웃어 주었는데, 오히려 그에게 손찌검을 당했으니 말이다. 아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청하게 있었다.
그 때 멀리서 아큐가 이 마을에서 제일 미워하는 첸 영감의 큰아들이 걸어왔다. 그는 도시에 있는 서양 학교에 들어갔다가 반 년만에 돌아왔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걸음걸이도 변하고 변발도 없어져 버렸다. 그 일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열 번도 넘게 통곡을 했고, 그의 여편네는 세 번이나 우물에 뛰어들었다. 그를 볼 때마다 아큐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변발이 없으니 사람 노릇할 자격도 없으며, 그의 여편네도 역시 네 번째로 우물에 뛰어들지 않았으니 정숙한 여자는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중대가리 새끼, 나귀….”
아큐는 그 동안은 속으로만 이렇게 욕을 했지 감히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말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울화가 치밀어 누구라도 붙들고 분풀이를 해야 할 판이라 자기도 모르게 그 소리를 입밖에 내어 지껄이고 말았다. 그러자 중대가리가 노랗게 칠한 지팡이를 손에 쥔 채 아큐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더니 아큐는 딱 하는 소리가 자기 머리에서 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저 애한테 말했는데!”
아큐는 곁에 있던 한 아이를 가리키며 변명했다. 아큐의 평생에서 이것은 두 번째로 큰 굴욕이었다. 아큐는 천천히 걸었다. 선술집 문턱에 도착할 즈음에는 망각이라는 보물이 효력을 발휘하여 그래도 제법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앞쪽에 이 마을 근처 정수암에 있는 젊은 여승이 걸어왔다. 평소에도 아큐는 여승만 보면 욕을 해댔는데, 하물며 굴욕을 당한 지금이야 새삼 말할 필요가 있으랴! 그는 아까 겪은 굴욕을 기억하고 적개심이 끓어올랐다.
‘오늘 왜 이리 재수가 없나 했더니 너를 보려고 그랬던 것이구나!’
아큐는 이렇게 생각하고 앞으로 나서며 큰 소리로 침을 뱉었다. 하지만 젊은 여승은 아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이고 걷기만 했다. 아큐는 여승에게 다가가서 새로 깎은 여승의 머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헤벌레하게 웃었다.
“아이고, 이런 망나니가….”
여승은 얼굴이 빨개져서 발걸음을 서둘렀다. 선술집 안에서 사람들이 와 웃어댔다. 아큐는 그 소리에 더욱 신이 난데다 구경꾼들을 더 만족시키고 싶어서 이번에는 힘을 주어 여승의 머리를 꼬집어 버렸다. 이 승리로 아큐는 왕털보 일도, 가짜 양놈 일도 깨끗이 잊어버렸다. 오늘 있었던 재수 없는 일들을 이 일로 모두 만회한 기분이었다.
“이 씨도 못 받을 더러운 아큐 자식아!”
멀리서 젊은 여승이 울먹이며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큐는 금방 하늘이라도 날 것 같은 기분으로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투구츠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날 밤, 아큐는 밤새도록 눈을 붙이지 못했다.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던 것이다. 왠지 보통 때보다 훨씬 매끄러운 것 같았다. 젊은 여승의 머리 피부에서 느꼈던 그 매끄러운 감촉이 손가락에 달라붙은 것 같았다.
“씨도 못 받을 더러운 아큐 자식!”
젊은 여승의 목소리가 아큐의 귓전에 울렸다. 아큐는 생각했다.
“그래, 여자가 있어야지. 자식이 없으면 늙어서 밥 한 그릇도 공양받지 못할 것 아닌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것은 가장 큰 슬픔이다. 여자, 여자, 여자!”
그는 낮에 보았던 젊은 여승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이 달아올랐다. 그 누가 알았으랴! 바야흐로 이립(而立, 30세)의 나이에 기껏 젊은 여승 때문에 마음이 이렇게 달아오르다니. 그는 평소에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 즉 자신에게 말을 거는 여자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여승은 자기를 보고 웃지도 않았고, 이상한 수작을 걸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아큐는 여승에게 유혹당했다. 이것 역시 여자들이 나쁜 종자라는 증거 중 하나였다.
다음날 아큐는 자오 영감 집에서 하루 종일 방아를 찧은 뒤 저녁 밥을 먹고 부엌에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워물었다. 이 때, 설거지를 마친 자오 영감 네 하녀 우 아줌마가 아큐에게 말을 걸어왔다.
“마님이 이틀째 아무것도 안 먹네? 이게 다 영감님이 첩을 사 오신 때문이지 뭐야….”
“여자…, 우 아줌마…, 과부…, 여자들….”
아큐는 느닷없이 담뱃대를 팽개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느닷없이 우 아줌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줌마, 나하고 자자! 나하고 자자니깐!”
우 아줌마는
“어머나!”
질색하고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어갔다. 아큐는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넋을 잃고 꿇어앉아 있었다. 갑자기 딱 소리가 나더니 머리가 어찔해졌다. 돌아보니, 수재가 굵은 대나무 막대기를 들고 서 있었다.
“이 못된 자식! 지금 무슨 수작을 한 거야?”
수재는 굵은 대나무 막대기로 아큐의 머리를 인정사정 없이 내리쳤다. 아큐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문 밖으로 뛰어 달아났다.
“부끄러움도 모르는 자식!”
수재가 뒤에서 욕을 했다. 아큐는 방앗간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몹시 쑤셨다.
‘부끄러움도 모르는 자식’이라던 수재의 말이 귓가에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아큐는 마음이 찜찜했지만 곧 쌀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그런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왔다. 아큐는 그 소리를 좇아 밖으로 나갔다. 소리는 안뜰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 곳에는 자오 영감 네 식구들이 모여 있었고, 이틀 동안이나 끼니도 걸렀다는 안방 마님까지 함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웃의 쩌우치 댁과 자오바이옌, 자오쓰천도 있었다. 작은 마님이 우 아줌마를 끌고 나오면서 말했다.
“이리 나와. 네가 품행이 바르다는 걸 누가 모르겠니? 바보 같은 짓을 하면 절대 안 돼.”
우 아줌마는 손을 붙잡힌 채 밖으로 끌려나와 울기만 했다.
“흠, 이거 재미있군. 이 과부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다는 걸까?”
아큐는 이런 생각을 하며 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수재가 아까처럼 대나무 막대기를 들고 그에게 달려왔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아큐와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아큐는 몸을 돌려 잽싸게 도망쳤다.
그리고 자오 영감 네 뒷문으로 빠져 나와 한 걸음에 투구츠로 돌아왔다. 잠시 앉아 있으려니 온 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들었다. 봄이라 해도 밤에는 아직 상당히 쌀쌀했다. 그제야 윗도리를 자오 영감 네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걸 가지러 가자니 수재의 대나무 막대기가 무서웠다.
그 때 자오 영감 네 하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큐, 이 개자식아! 자오 영감 네 하녀에게 찝적대는 바람에 나까지 잠을 못 자게 했잖아.”
하인은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았으나 아큐는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었다. 결국은 밤에 폐를 끼쳤다는 이유로 하인에게 술값까지 줘야 했다. 아큐에게는 현금이 없었으므로 털모자를 전당포에 잡혔다. 그것 뿐만이 아니라 다섯 가지 조항에 서약까지 했다.
1. 내일 붉은 초 한 쌍, 향 한 봉을 가지고 자오 영감 네에 가서 사죄해야 한다.
2. 자오 영감 네에서 무당을 불러, 목을 매어 죽게 하는 귀신을 쫓는 굿을 하는데 그 비용은 아큐가 부담한다.
3. 이후로 아큐는 자오 영감 네 문턱도 밟을 수 없다.
4. 이후 우 아줌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책임을 아큐에게 묻는다.
5. 아큐는 품삯과 윗도리를 찾아갈 수 없다.
아큐는 사죄 절차를 끝낸 뒤, 그냥 평소처럼 거리를 쏘다녔다. 하지만 마을 여자들은 그때부터 아큐를 보기만 하면 집안으로 숨어들기 바빴다. 심지어는 나이가 쉰 살이 다 되는 쩌우치 네 마누라까지도 남들 따라 숨는 게 아닌가? 게다가 겨우 열한 살밖에 안 된 계집애들까지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아큐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변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을 선술집에서도 이제 외상으로 술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더우기 며칠 동안 와서 일을 해달라는 사람들조차 사라졌다. 외상 술을 주지 않는 것이야 술 마시고 싶은 것을 참으면 그만이지만, 일해달라는 사람조차 없어지면 아큐는 그대로 굶주려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결정적으로 개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오 영감 네에서는 샤오디를 데려다가 일을 시키고 있었다. 이 샤오디란 놈은 바짝 말라빠진 체격고 힘이 없어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놈이 와서 아큐 자기의 밥줄을 끊는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며칠 후, 아큐는 첸 영감 네 집 담벼락 근처에서 우연히 샤오디를 만났다. 아큐는 다짜고짜 샤오디에게 덤벼들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이 개 같은 자식아!”
아큐는 두 눈을 부릅뜨고 으르렁거렸다. 입에서 저절로 침이 튀어나왔다.
“그래, 나는 버러지야. 이제 됐지?”
샤오디가 말했다. 아큐는 샤오디의 겸손이 오히려 기분이 나빴다. 그대로 덤벼들어 샤오디의 변발을 낚아챘다. 샤오디는 한 손으로 자기 머리채 뿌리를 감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큐의 변발을 잡아챘다. 옛날 아큐라면 샤오디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큐가 요즘 들어 계속 굶주린 상태여서 샤오디 못지않게 말라빠진데다 힘도 약해진 상태였다.
삼십 분쯤 흘렀을까. 아큐와 샤오디 둘 다 머리에서 김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아큐의 손이 늦추어지자 샤오디도 손에서 힘을 뺐다.
“어디 두고 보자, 개새끼….”
싸움은 그냥 이렇게 무승부로 끝났지만, 아큐에게는 여전히 일을 시키는 사람이 없었다.
날이 이제 상당히 따뜻해졌다. 하지만 아큐는 불어오는 산들바람마저도 따뜻한 바람이 아닌, 싸늘한 가을 바람처럼 느껴졌다. 바람이야 그냥 견딘다고 해도, 배가 고픈 것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아큐는 별 수 없이 밖으로 나가 아무 것이나 먹을 것을 구해보기로 했다.
새로 모를 낸 논들이 연푸른 색으로 눈부셨다. 드문드문 밭을 가는 농부들의 모습도 보였다. 먹을 것을 찾아서 무작정 걷다 보니, 아큐는 어느덧 정수암까지 와 있었다. 야트막한 담벼락 너머로 드넓은 무밭이 펼쳐져 있었다. 아큐는 망설이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큐는 담을 기어 올라갔다. 담벼락의 흙덩이가 부스스스 굴러떨어졌다. 아큐는 다리가 덜덜 떨렸지만 간신히 뽕나무 가지를 붙잡고 뜰 안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무밭에 쪼그리고 앉아 무를 뽑기 시작했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둥그런 머리가 나타났다. 정수암의 늙은 여승이었다. 아큐는 잽싸게 무 네 뿌리를 뽑아 품 속에 집어넣었다.
“나무아미타불. 아큐, 왜 남의 채소밭에서 무를 훔치는 거냐?”
“내가 언제 당신 채소밭에서 무를 훔쳤다는 거야?”
아큐는 도망치면서 뒤를 흘낏거렸다. 늙은 여승이 소리쳤다.
“당신 품 속의 그건 뭐야?”
“이게 당신 거야? 무한테 이게 당신 거라고 말을 시켜봐. 시켜보라고.”
아큐는 곧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커다란 검정개 한 마리가 쫓아와 아큐의 다리를 물어뜯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다행히 품에서 무뿌리 하나가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검정개는 놀라 멈칫하였다. 그 틈에 아큐는 담장 위로 기어 올라가 밖으로 뛰어내렸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아큐가 웨이좡에 다시 나타난 것은 그 해 추석이 막 지났을 즈음이었다. 날이 어스름해질 무렵, 아큐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마을 선술집에 나타났다. 아큐는 주인에게 다가가더니 허리춤에서 은전과 동전을 한 주먹 꺼내 계산대에 늘어놓았다.
“현금 줄 테니 술 가져와!”
아큐가 입고 있는 옷은 새로 맞춘 겹옷이었다. 아큐는 허리에 큰 전대를 차고 있었다. 전대는 묵직하게 늘어져서 허리띠를 바짝 졸라 매고 있었다. 심부름꾼, 주인, 손님들,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가 의아한 눈길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벌써부터 마음속에서 아큐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는 사람도 있었다.
“아큐 아닌가! 이제 돌아왔군. 어디서 돈을 많이 벌었나 보구만.”
“응, 이제 돌아왔어. 나도 문 안에 갔다 왔지.”
아큐의 소문은 당장 온 마을에 퍼졌다. 사람들은 새 옷을 입고 나타난 아큐가 그 동안 어떻게 돈을 모았는지 궁금해 했다. 주막과 찻집, 사당의 처마 밑 등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은 아큐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큐는 어느 틈엔가 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아큐의 말에 의하면 그 동안 문 안 거인(擧人, 과거에 급제한 선비) 영감 댁에서 일을 거들었다고 했다. 이것만으로도 듣는 사람들은 모두 숙연해졌다. 이 마을 사방 일백 리를 통틀어서 거인은 오직 그 분뿐이었다. 그 댁에서 일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존경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큐는 거인 영감이 실제로는 개 같은 자식이라며, 다시는 그 집에서 일을 하고싶지 않다고 했다.
사람들은 아큐의 말을 들으며 일변 통쾌해 하고 일변 탄식하기도 했다. 아큐 같은 인간이 거인 영감 같은 분의 집에서 일을 거든다는 것이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 집에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뭔가 아까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봐 자네들, 사람 목 자르는 것 본 적 있나? 야 정말 볼 만해. 혁명당 놈들을 죽이는데, 정말 굉장했다고!”
아큐의 말을 듣던 사람들은 모두 몸을 흠칫했다. 아큐는 느닷없이 왕털보의 뒷덜미를 손으로 내려치며
“싹둑!”
큰 소리로 외쳤다. 왕털보는 깜짝 놀라 얼른 목을 움츠렸다.
얼마 안 가서 아큐의 명성은 안방에 있는 여자들에게도 쫙 퍼져나갔다.
“쩌우치 네는 아큐에게 남색 비단 치마를 샀대.”
“자오바이옌 엄마도 애들 빨간 모슬린 저고리를 아큐에게서 샀다는군. 단돈 30전밖에 안하더래.”
여자들은 모여 앉아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아큐가 나타나기를 간절하게 기다렸다. 아큐에게서 마음에 드는 비단 치마를 산 쩌우치 댁은 기뻐하며 자오 마님에게 들고 가서 자랑을 하였다. 자오 마님은 싸고 좋은 털배자를 사고 싶다며, 쩌우치 댁에게 당장 아큐를 찾아서 자기 앞으로 데려오라고 하였다. 자오 씨 댁 식구들은 마음을 졸이며 아큐를 기다렸다. 한참 기다린 뒤에야 아큐가 쩌우치 댁을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아큐, 그 동안 문 안에 가서 돈을 많이 벌었다지? 실은 나도 좀 필요한 것이 있어 그러는데 말야….”
“지금은 다 팔고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요.”
“벌써 다 팔았다고? 그럼 다음에라도 물건을 받으면 제일 먼저 우리 집으로 가져오거라.”
하지만 아큐는 별로 내키지 않다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자오 영감과 수재는 아큐의 이렇게 불손한 태도에 몹시 화가 났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마을에서 당장 쫓아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너무 심한 것 같아 그만두었다.
한편 웨이좡 마을 건달패들은 아큐에게 돈을 벌게 된 내막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아큐는 숨기려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우쭐거리며 자기가 겪은 일들을 털어놓았다. 듣고 보니 사실 아큐는 거인 영감 댁에서 일을 한 게 아니라 도둑질을 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아큐가 직접 담을 넘은 것은 아니고, 단지 밖에서 훔친 물건만 받기만 했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아큐가 결국 좀도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두 알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역시 아큐는 별 볼 일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였다.
아큐가 전대를 자오바이옌에게 팔아 넘긴 날, 커다란 배 한 척이 자오 영감 네 나루터에 도착했다. 바로 거인 영감의 배였다. 그 배가 나타나자 웨이좡 사람에 엄청난 불안감을 느꼈다. 그날 정오가 되기도 전에 온 마을이 술렁거렸다. 혁명당 때문에 거인 영감이 마을로 피난 왔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나갔던 것이다.
아큐는 문 안에 있을 때 혁명당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자기 눈으로 혁명 당원이 참수 당하는 것을 직접 보기도 했다. 아큐는 혁명당은 역적들이며, 역적질을 하는 놈들은 항상 벌을 받는다는 말을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을 막연하마나 증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뜻밖에도 그들이 이 근처 백 리 사방으로 이름을 떨치는 거인 영감까지 두렵게 하는 것이었다. 아큐로서는 신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이란 것도 괜찮은데…. 개 같은 세상을 뒤집어 엎는다는 거잖아. 에이 빌어먹을…, 나도 혁명당이나 되어볼까? 혁명이다, 혁명! 좋았어! 내가 갖고 싶은 건 모두 내 것이라는 거야. 계집이든 뭐든 말이야!”
자오 영감 네 두 나으리와 자오바이옌도 대문간에 나와 혁명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아큐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노래를 부르며 그 앞을 지나갔다. 자오 영감이 아큐를 불러 세웠다.
“이봐 아큐 군! 아큐 군, 저어… 요새 돈은 잘 버나?”
“돈이라고? 물론, 갖고 싶은 건 모두….”
“아…큐 형, 우리 같은 가난뱅이야 뭐 상관없겠지?”
자오바이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짐짓 혁명당의 속셈을 떠보려는 것이었다.
“가난뱅이라고? 너야 나보다 부자잖아.”
아큐는 그렇게 말하고 계속 길을 걸어갔다. 그는 마음이 들떠서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다가 밤이 이슥해서야 투구츠로 돌아왔다.
“혁명이라? 이거 재미있는데…. 웨이좡 촌놈들이야 앞으로 아마 볼 만할 거야. 다들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걸하겠지. 아큐, 제발 목숨만 살려 줘 이렇게 말이야. 하지만 내가 콧방귀나 뀔 줄 아나? 첫 번째로 죽일 놈은 자오 영감, 수재, 또 가짜 양놈…. 그런 다음에는 우선 수재 여편네의 침대를 투구츠로 옮겨 놓고, 그리고 나서 첸 가(哥)네 탁자와 의자를 늘어놓고…. 그 다음엔 여자를 데려와야지. 쩌우치네 딸년은 아직 애송이고, 가짜 양놈 여편네는 변발도 없는 녀석과 잤으니, 흥 제대로 된 여자라고 할 수는 없지.”
아큐는 이런저런 공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 거리로 나가 보니 이상하게도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배가 고픈 것도 마찬가지였다. 아큐는 천천히 걷다가 어느덧 정수암에 이르렀다.
암자는 지난 번처럼 조용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을 두드렸다. 검은색 대문에 흠집이 날 만큼 두드린 뒤에야 누군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늙은 여승이 문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너는 뭐하러 또 온 거냐?”
“혁명이다, 혁명! 너도 알고 있지?”
“혁명이라고? 혁명은 벌써 했단다. 도대체 네놈들이 혁명한다고 해서 우리더러 어쩌란 말이냐”?
늙은 여승은 핏대를 올리며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그것도 몰랐단 말잉댜? 그놈들이 벌써 혁명을 다해버렸어.”
“누구 말이야?”
“수재하고 양놈?”
너무나 뜻밖이었으므로 아큐는 어리둥절했다. 늙은 여승은 아큐가 말문이 막히는 모습을 보자 재빨리 문을 잠가 버렸다.
자오 영감 네의 수재는 혁명당이 지난밤에 마을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잽싸게 변발을 머리 꼭대기에 틀어올렸다. 그리고 여태껏 상대도 하지 않았던 가짜 양놈 첸 가를 아침 일찍 방문했다. 그들은 곧 동지가 되어 함께 혁명에 나서기로 약속했다.
그들은 머리를 짜낸 끝에 정수암에 ‘황제 만세 만만세’라고 새긴 용패가 있다는 걸 생각했다. 그들은 곧바로 암자로 달려가 혁명을 했다. 늙은 여승이 막아서서 잔소리를 했으나, 그들은 여승을 만주 정부와 한 패로 몰아 몽둥이질을 했다. 그들이 간 뒤에야 여승이 정신을 차려 보니, 용패는 이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아큐는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오늘 아침에 늦잠을 잔 것이 무척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정작 괘씸한 일은 그들이 그렇게 중요한 일에 자기를 부르러 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웨이좡의 인심은 그래도 조금씩 진정되어 갔다. 그래도 변발을 머리 꼭대기에 틀어 얹은 사람들은 점차 늘어갔다. 여름이라면 변발을 머리 꼭대기에 틀어 얹거나 잡아매는 일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늦가을이었다.
그렇게 뒤통수를 허전하게 비운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은
“야, 혁명당이 온다.”
이렇게 소리 쳤다. 아큐는 그 소리가 한없이 부러웠다. 게다가 수재가 머리를 그렇게 틀어 얹었다는 말을 듣고서는 아큐 자신도 그대로 흉내를 내고 싶었다. 아큐는 대나무 젓가락으로 변발을 머리 꼭대기에 틀어 얹었다. 그리고 나서도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거리로 나섰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도 전혀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아큐는 기분이 나빠 아무나 붙잡고 신경질을 냈다.
수재는 가짜 양놈에게 부탁하여 자유당에 가입하더니 복숭아 모양의 은배지를 달고 다녔다. 자오 영감은 이것 때문에 갑자기 더 훌륭한 체하고, 아들이 처음 수재가 되었을 때보다도 더 오만방자해졌다. 아큐를 봐도 전혀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아큐는 이것이 매우 못마땅하였다. 혁명을 하려면 그저 변발만 틀어 얹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일단 혁명당과 연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아큐는 그래서 가짜 양놈을 찾아가 이 문제로 이야기를 해 보기로 했다.
가짜 양놈네 집 대문은 활짝 열려 있고, 가짜 양놈은 뜰 한가운데 서 있었다. 새까만 서양 옷에다 복숭아 모양 은배지를 달고 있었다. 가짜 양놈 바로 옆에는 자오바이옌과 건달패 세 놈이 공손한 자세로 그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아큐는 슬그머니 다가가 자오바이옌 옆에 섰다. 가짜 양놈은 그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온통 연설에 열을 올리느라 누가 옆에 왔는지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아큐는 가짜 양놈이 잠시 말을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아… 저기 저, 그러니까….”
“넌 뭐야?”
“저도 그러니까….”
“나가!”
“저도 그 혁명을….”
“저리 꺼져!”
가짜 양놈은 다짜고짜 지팡이를 쳐들었다. 자오바이옌과 건달패들도 덩달아 소리쳤다.
“선생님이 하시는 말 안들려? 너더러 꺼지라시잖아!”
아큐는 하는 수 없이 대문 밖으로 물러나와야 했다. 길거리로 나오자 서글픈 마음이 사무쳤다. 아큐는 살아오면서 이렇게 사무치게쓸쓸한 심정을 맛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모욕감까지 느꼈다. 앙갚음이라도 하는 심정에 당장 변발을 풀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한밤중까지 여기저기 쏘다니다가 선술집이 문을 닫을 때쯤 해서야 터덜터덜 투구츠로 걸어 돌아왔다.
쿵! 펑!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쓸데없이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아큐는 곧 뛰쳐나와 어둠 속을 내달렸다. 그러자 맞은편에서 사람 하나가 이리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큐는 그 모습을 보고 덩달아 급하게 몸을 돌려 그 사람을 따라 도망쳤다. 그 사람이 골목을 돌면 자기도 돌고, 그 사람이 서면 자기도 섰다. 그러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 그 사람은 샤오디였다.
“자… 자오 씨 댁을 사람들이 털고 있어!”
샤오디는 헐떡거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아큐는 살금살금 길 모퉁이를 돌아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살펴 보니, 흰 투구에 흰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궤짝과 가구를 메고 나오는 것 아닌가. 아큐는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 장면을 싫증이 나도록 지켜 본 뒤 투구츠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아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웨이좡에 드디어 흰 투구에 흰 갑옷을 입은 친구들이 들이닥쳤다. 그런데도 이 친구들은 자기를 부르러 오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좋은 물건을 무수히 뺏었는데 거기에 내 몫은 없었다. 이건 모두가 그 빌어먹을 가짜 양놈 탓이다. 내가 혁명하는 것을 그놈이 막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일에 내 몫이 없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큐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밀었다.
“고약한 놈이 내가 혁명하는 것을 막다니, 네놈만 혁명하냐? 웃기지 마라! 그래 좋아, 혁명해라. 혁명하는 놈들은 목이 잘리는 죄라니까. 내가 나서서 고발한다. 네놈이 문 안에 끌려가 목이 잘리는 꼬라지를 꼭 보고야 말겠다. 싹둑, 싹둑, 이렇게 말이다!”
자오 영감 네가 약탈당하자 웨이좡 사람들은 속으로 그지없이 통쾌해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무서워했다. 아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약탈 사건이 일어난 지 나흘만에 아큐는 한밤중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람들에게 붙잡혀 문 안으로 끌려갔다.
아큐는 목책이 빙 둘러쳐진 어느 집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넓은 대청에는 머리를 빡빡 민 늙은이가 앉아 있었다. 그 아래에는 병정들이 늘어서 있었다. 양옆에는 또 두루마기를 걸친 사람들이 십여 명 서 있었다. 그들도 늙은이처럼 머리를 빡빡 깎은 생김새였고, 등 뒤로는 가짜 양놈처럼 한 자쯤 자란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모두가 험악한 얼굴로 아큐를 노려보았다. 아큐는 무릎에서 힘이 빠져 바닥에 털썩 꿇어앉고 말았다.
“일어서서 말해! 꿇어앉지 마!”
두루마기를 입은 어떤 사람이 소리 쳤다. 하지만 아큐는 몸이 자기도 모르게 오그라들어서 그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이 자식 노예 근성이구만!”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경멸하듯 소리쳤다.
“사실대로 말해라.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바른 대로 말한다면 그냥 풀어줄 수도 있다.”
“저는 원래… 그냥… 혁명을 하려고….”
아큐는 넋을 놓고 앉아 있다가 겨우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럼 그동안 어째서 여기에 나타나지 않은 거냐?”
“가짜 양놈 때문에 그렇게 못했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라!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해봐야 소용 없다. 너놈의 다른 패거리들은 어디 있지?”
“누구라굽쇼?”
“그 날 밤, 자오 씨네 집을 턴 패거리들 말이다.”
“그놈들은 저를 부르러 오지도 않았습니다. 지들끼리만 물건을 챙겨서 가 버렸습니다요.”
“그놈들 어디로 갔지? 말하면 놓아주마.”
“저는 전혀 모릅니다. 그놈들은 저를 부르러 오지도 않았다니까요.”
“그래, 다른 할 말은 없나?”
위에 앉아있던 늙은이가 부드럽게 물었다. 아큐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다른 할 말이 없었다.
“없습니다.”
두루마기 입은 사람 하나가 종이 한 장과 붓 한 자루를 아큐에게 가져오더니 손에 붓을 쥐어주려고 하였다. 아큐는 깜짝 놀랐다. 그는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손에 붓을 쥐어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아큐가 어쩔 줄 모르고 머뭇거리자 그는 손가락으로 한 군데를 가리키며 서명하라고 하였다.
“저…, 저는… 글자를 모릅니다.”
아큐는 붓을 꽉 움켜잡은 채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그냥 너 편한 대로 아무 동그라미나 그려 넣어!”
아큐는 동그라미를 그리려고 했지만 손이 와들와들 떨려서 잘 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아큐를 위해 종이를 땅바닥에 고르게 펴 주었다. 아큐는 엎드려서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런데도 망할 놈의 붓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와들와들 떨면서 간신히 동그라미 모양을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붓이 자꾸 손에서 빠져나갔다. 겨우 그려 놓고 보니 동그라미라기보다 수박씨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집 모퉁이에 있는 작은 방에 데려가 가두었다.
아큐는 그래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살다 보면 어떤 때는 끌려가기도 하고 끌려 나오기도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다 보면 동그라미를 그려야 할 때도 생기는 것이라고 쉽게 생각했다. 그래도 동그라미를 제대로 그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하나의 찜찜함으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다음날 아큐는 다시 대청으로 끌려 나왔다. 그 늙은이는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할 말이 없는가?”
“없습니다.”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과 짧은 웃옷을 입은 사람들이 갑자기 아큐에게 달려들어 까만 글씨가 쓰인 흰 무명 등거리를 입혔다. 아큐는 아주 기분이 나빠졌다. 모양이 마치 상복 같은데, 상복을 입으면 재수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들은 옷을 입힐 뿐만이 아니라 아큐의 두 손을 등뒤로 묶어 목책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들은 아큐를 포장이 없는 수레에 태웠다. 수레는 금방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에는 총을 멘 병정과 자위 대원이 있었고, 길거리 양 옆에는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수근거리고 있었다. 아큐는 그제서야 문득 깨달았다. 이거 나는 지금 목 잘리는 것 아닌가. 눈앞이 캄캄해지고 귀가 윙하고 울렸다. 그러나 정신을 아주 잃지는 않았다. 살다 보면 목이 잘리는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아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왜 형장 쪽으로 가지 않을까? 죄인을 처형하기 전에 이렇게 조리돌린다는 사실을 아큐는 모르고 있었다. 사실 알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살다 보면, 어느 때는 조리돌리는 일도 있으려니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큐는 휘휘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마치 개미떼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길 옆 구경꾼 속에 생각치도 못한 우 씨 아줌마가 있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아큐는 자신이 배짱 두둑하게 노래도 한 마디 부르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머릿속에 할 줄 아는 노래 제목들이 바람개비처럼 빙빙 돌았다. 그래 좋다! ‘쇠채찍으로 네녀석을 후려갈기마’를 부르자. 그는 손을 들어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곧바로 자신의 두 손이 묶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나마 노래 부르기도 포기해야 했다.
무리들 속에서 마치 승냥이 떼가 울부짖는 듯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수레는 잠시도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아큐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구경꾼들을 둘러보았다. 4년 전 산기슭에서 만났던 굶주린 이리 한 마리가 떠올랐다. 그때 아큐는 얼마나 무서웠던지 거의 기절해 죽을 지경이었다. 다행히 손에 든 도끼 한 자루를 믿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무사히 웨이좡까지 돌올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때 이리의 눈은 잊을 수가 없었다.
사납고도 무서운 이리의 두 눈은 도깨비불처럼 번쩍거렸다. 멀리서부터 쫓아와 자기 몸을 꿰뚫을 것 같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지금 아큐는 이제 다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무서운 눈길들을 보았다. 그 눈알들은 이미 자기 살을 씹어 삼켜 버렸고, 뿐만 아니라 아큐의 살 말고 다른 것들까지 씹어 삼키려고 한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뒤를 따라오면서, 이 눈알들은 하나로 합쳐져 벌써 그의 영혼을 물어뜯고 있다.
“사람 살려!”
그러나 아큐는 어떤 소리도 입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이미 눈앞이 캄캄해진 것이다. 귀가 윙하고 울렸다. 온 몸이 먼지처럼 풀썩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 뒤 여론을 들어 보면, 웨이좡에서는 아큐의 사형에 대해 별로 이의가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아큐가 나쁜 놈이라고 말했다. 그가 총살당한 것은 그 증거라는 것이었다. 나쁘지 않았다면 왜 총살을 당했겠는가? 그러나 또 한편 문 안에서는 대부분 불만이었다. 확실히 총살은 목 자르는 것만큼 볼 만한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사형수 치고는 얼마나 시시한 모습이란 말인가. 그렇게 오래 조리를 돌렸는데도 노래 한 마디 하지 못하다니! 그들은 기껏 헛걸음만 했다고 불만이었던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