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r blonde Eckbert
[소 개]
어느 가을 밤, 고독하게 생활하는 에크벨트와 그 아내 베르타, 그리고 오랜 친구 발터가 한 데 모여 베르타의 기이한 소녀 시절 이야기를 듣는다. 환상적인 이야기가 끝난 뒤, 그 환상은 현실 속에서...
이 이야기를 그냥 동화로 고쳐 쓴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여기 담긴 메시지와 분위기는 공포스럽다. 에크벨트와 베르타, 발터 등 세 사람이 등장하는 첫 무대는 단조롭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그 현실은 환상의 세계에 의해 점령 당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숲의 적막이 나를 기쁘게 한다..." 귓전에 울리는 노래 소리와 함께 환상은 압도적으로 독자를 지배하는, 현실보다 더 실제적인 실존이 된다.
[작가 소개]
루드비히 티이크(Ludwig Tieck, 1773-1853) : 독일 초기 낭만파 작가, 시인, 극작가. 베를린에서 태어나 신학과 문학을 공부했다. 낭만적 아이러니에 뛰어나고 창작 동화 장르를 시도했으며 고대 영국 희곡의 번역에도 크게 기여했다.
모험소설 <윌리엄 로벨 씨의 이야기>에 이어 <민족동화>를 펴냈다. <금발의 에크벨트>와 유명한 3막 동화극 <장화 신은 고양이>가 거기 실린 작품들이다. 미완성 소설 <프란츠 슈테른발트의 방랑>은 낭만파 작가로서의 그의 작풍을 잘 나타내는 작품이다. 만년에는 낭만파의 성향을 벗어나 사실적인 경향을 보이는 단편을 많이 썼다.
하르츠 산골의 어느 지방에 '금발의 에크벨트'라고 불리던 기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나이가 마흔 살쯤 된, 중키 정도의 사나이였다. 얼굴이 창백하고 훌쭉했으며 짤고 연한 색을 띤 금발이 머리에 부드럽게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아주 조용히 살고 있어서 이웃 사람들과의 다툼에 휩쓸려드는 일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작은 저택의 담 밖으로 나오는 일조차도 아주 드물었다.
그의 아내도 그와 마찬가지로 고독을 좋아하는 여인이었다. 취향이 비슷한 두 사람은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하나님은 그들 부부 사이에 어린애가 생기는 축복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만이 그들 부부의 한탄스러운 점이었다.
에크벨트에게는 찾아오는 손님도 거의 없었다. 혹시 손님이 찾아오는 일이 생겨도 그 때문에 그들의 일상이 달라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생활에 절제가 있었고, 검소 그 자체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원칙처럼 보였다. 에크벨트는 명랑하고 쾌활했지만, 혼자 있을 때는 무언가 숨기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조용하고 내성적이고 우울한 데가 있었다.
필립 발터는 조용한 이 집을 가장 자주 찾아오는 손님이었다. 에크벨트는 이 사람의 사고방식이 자기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크벨트가 필립 발터와 가까이 지내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빌립 발터는 원래 프랑켄 사람이었지만, 가끔 반년 이상씩 에크벭트의 집 부근에 머물면서 약초와 광석을 채집하고 그것을 정리하는 일에 몰두하곤 했다. 그 역시 얼마 되지 않는 재산으로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살았다. 에크벨트는 종종 산보길에 그와 동행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 사이에는 진정한 우정이 은연중 싹트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비밀을 주의깊게 숨겨왔다 해도 가까운 친구 앞에서는 그 비밀을 유지하기 어려운 경우가 생긴다. 그럴 경우 인간은 그 친구와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속마음을 활짝 열어 보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낀다. 이럴 때 다정다감한 사람들은 대개 서로 본심을 털어놓지만 때로는 상대방이 자기의 정체를 알아챌까 두려워 꽁무니를 빼는 경우도 생기곤 한다.
안개 낀 어느 늦가을 밤에 에크벨트는 친구 그리고 아내 베르타와 함께 벽난로 앞에 둘러앉아 있었다. 불꽃은 방안을 환하게 비치면서, 천장 위에 너울거리는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창 밖은 캄캄했고, 나무들은 습기와 추위로 몸을 떨고 있었다. 발터가 돌아갈 길이 멀다고 투덜거리자, 에크벨트는 그에게 그대로 눌러앉아 밤이 깊도록 다정한 이야기나 나누다가 자기 집 아무 방에서나 자고 다음날 아침에 돌아가라고 제의했다. 발터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포도주와 저녁 식사가 들어오고 나무를 더 집어넣어 불을 크게 지폈다. 친구 사이의 대화는 더욱 명랑하고 친밀해졌다.
저녁상을 치우고 하인들이 물러가자 에크벨트는 발터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봐, 내 아내의 소녀 시절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게나. 아주 재미있고 기묘한 이야기라네."
"그러지." 발터가 그렇게 말하자, 그들은 다시 벽난로 가에 둘러앉았다.
때는 바로 한밤중이었다. 달은 매끄럽게 흘러가는 구름 사이에서 숨바꼭질하고 있었다.
"저를 넉살 좋은 여자라고 보시지 않을까 두렵군요." 베르타는 말문을 열었다.
"저의 남편은, 선생님이 훌륭한 생각을 가진 분이기 때문에, 선생님에게는 무언가 숨길 필요가 없다고 그러시더군요. 지금부터 하는 얘기가 아무리 이상하게 들린다 할지라도, 절대로 동화라고는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나는 어느 시골에서 가난한 양치기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우리집은 너무 가난해서 부모님은 양식을 구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배고픈 것보다 제게 훨씬 더 괴로웠던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종종 가난 때문에 다투다가 서로 지독한 욕을 퍼부으며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애라고 늘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나는 지독하게 재주가 없고 야무지지 못했습니다. 항상 실수투성이에다, 바느질도 물레질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집안 일은 무엇 하나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부모님이 가난 때문에 겪는 고통은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가끔 나는 방 한구석에 앉아 내가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어 부모님을 도와드리고 그들에게 금은보화를 한아름씩 안겨 드리는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그들을 놀라게 해서 그 모습을 보는 즐거운 상상으로 머리가 가득 찼던 것입니다. 그럴 때면 홀연 눈앞에 요정이 나타나는 것 같고, 그 요정이 지하의 보물을 찾아주고 보석으로 변하는 작은 돌멩이들을 주는 상상을 했습니다.
한 마디로 나는 멋들어진 공상에 잠겨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언가 실제 생활에서 남을 돕거나 물건을 나르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서야 할 때면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그 때문에 내 모습은 더욱 서투르게 보였을 겁니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전혀 쓸모없는 집안의 짐덩어리라며 언제나 나에게 화를 내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학대하기 일쑤였고, 나는 아버지로부터 다정한 말을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나는 여덟 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젠 정말 무엇이든 일을 하거나 배워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빈둥빈둥 놀며 세월을 보내는 것은 나의 고집이나 게으름 탓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무척 끈질기게 나를 협박하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협은 아무 효과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마침내 '너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니까 날마다 이런 벌을 받아야 한다'며 무자비하게 나를 다그쳐댔습니다..
그날 나는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버림받은 듯 무척 쓸쓸한 느낌이었고 나 자신이 너무나 가엾어서 죽고 싶을 심정이었습니다. 날이 밝는 것이 두려웠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사실 무슨 일이든지 익숙하게 잘하고 싶었어요. 어째서 나는 주변의 다른 애들보다 멍청한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나는 거의 절망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날이 밝아오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들의 작은 오두막집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넓은 들에 나서서, 곧 햇볕이 잘 들어오지도 않는 숲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피곤한 줄도 모르고 줄곧 달렸습니다. 아버지가 지금이라도 뒤쫓아와서 나를 도로 붙들어다 놓고, 내가 도망치려 한 것 때문에 더욱 화를 내고 학대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숲속을 빠져 나왔을 때는 해가 이미 꽤 높이 솟아올라 있었습니다. 그러나 숲속은 짙은 안개에 덮여 눈앞이 어두컴컴했습니다. 나는 언덕을 기어올라가기도 하고 때로는 바위 사이로 꼬부라져 지나가는 꼬부랑길을 걸어가기도 했습니다. 나는 집 근방에 있는 산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라고 추측했고 그 때문에 외딴 곳에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나는 그때까지 평지에서만 살아와서 산을 본 일이 없었습니다. 남들이 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 들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어린 나에게는 산이라는 말만 들어도 뭔가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만 들렸습니다. 하지만 나는 되돌아갈 용기가 없었고 오직 불안에 가득 차 앞으로만 달렸습니다. 내 머리 위 나무 사이로 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나 멀리서 도끼로 나무를 자르는 소리가 고요한 아침 공기를 타고 울려 퍼질 때마다, 나는 깜짝깜짝 놀라서 돌아보곤 했습니다.
숯을 굽는 사람들 또는 산 속 광부들의 낯선 말소리를 들었을 때에 놀라서 거의 기절할 뻔했습니다. 나는 가끔 마을을 지나칠 때는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서 구걸을 했습니다. 누가 물으면 적당히 둘러대서 그 자리를 그럭저럭 넘겼습니다. 이렇게 거의 나흘 동안을 계속 헤매다가 작은 산길에 접어들었습니다. 이 길은 더 산 속으로 들어가 나는 점점 큰 길에서 멀어지게 됐습니다.
주위에 보이는 바위들은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것과 다른, 훨씬 기묘한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위들이 서로 겹쳐 쌓여서 세찬 바람이 불어오면 금방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계속 앞으로 걸어가야 할지, 어떨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일 년 중 가장 좋은 계절이어서 밤에는 외떨어진 양치기 오두막에서 잠을 자거나 아니면 그냥 숲 속에서도 잘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는 동안 전혀 인가를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이렇게 사람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황량한 곳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길은 갈수록 험악해졌고, 때로는 현기증이 날 만큼 가파른 낭떠러지에 바짝 붙어서 지나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길조차도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져서 소리쳐 울었습니다. 그러자 무섭게 생긴 바위 골짜기로 내 목소리가 무시무시하게 메아리치더군요. 날이 저물자 나는 이끼가 깔린 땅을 찾아 거기에 누워 쉬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밤중에 나는 아주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나운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 같기도 하고, 때로는 바위 틈으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때로는 이상한 새가 우짖는 소리 같기도 했습니다. 나는 기도를 하고 멀리서 동이 터올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습니다.
햇빛이 얼굴을 비치자 나는 눈을 떴습니다. 나는 바위 위에 올라가 멀리 살펴보면 이 외진 곳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어쩌면 사람들이나 인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겨우겨우 바위 절벽 위를 기어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높은 곳에 올라서서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내가 보아왔던 풍경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뿌연 안개로 덮여 있었고 날은 침침하게 흐렸습니다. 좁은 바위 틈으로 외롭게 솟아오른 두서너 그루의 나무를 제외하고는 초원도, 수풀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가령 그 때 누구를 만났다면 또 나는 무척 두려워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때 심정으로는 누구라도 좋으니 단 한 사람이라도 만났으면 하고 얼마나 갈망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너무 배가 고파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죽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엔 또 살고 싶은 생각이 솟아오르더군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물을 흘리고 한숨을 쉬면서 다시 온종일 걸었습니다. 나중에는 나 자신을 거의 의식할 수도 없었고, 그저 피곤해서 기진맥진했습니다. 더 살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었지만, 그러나 죽는 것만은 두려웠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주위 일대가 약간 아늑해진 기분이었습니다. 나의 생각이 생기를 얻고, 나의 소망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습니다. 살고 싶은 생각이 혈관 구석구석까지 퍼져갔습니다. 마침 어디선가 물레방아의 쏴 하는 물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황량한 바윗길의 끝에 이르렀을 때, 나는 얼마나 기쁘고, 마음이 홀가분하던지요.
멀리 보이는 산의 모습들이 무척 정답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숲과 초원이 다시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는 마치 지옥에서 천국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어서, 외로움도, 의지가지없는 신세도 이젠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물방아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내가 들었던 것은 폭포 소리였던 것입니다.나는 말할 것도 없이 무척 실망했습니다. 폭포 아래로 흐르는 물을 손으로 떠서 한 모금 마셨을 때, 약간 떨어진 곳에서 가벼운 기침 소리가 난 것 같았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으나 그만큼 또 반가웠습니다.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숲의 가장자리에 어떤 할머니가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온 몸에 검은 옷을 걸치고 있었습니다. 검은 두건으로 머리와 얼굴을 거의 다 덮고 있었고, 손에는 목발을 들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할머니에게 다가가서 도와달라고 말했습니다. 그 할머니는 나를 옆에 앉히고 빵과 포도주를 조금 주었습니다. 내가 그걸 먹는 동안 할머니는 조용한 소리로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할머니는 자기를 따라오라고 말했습니다.
할머니의 목소리와 태도가 매우 이상해 보이기는 했지만, 나는 할머니가 이렇게 말해 준 것이 무척 기뻤습니다. 목발을 짚었지만 할머니는 산길을 꽤 빨리 걸었습니다. 그러나 한발한발 내디딜 때마다 얼굴을 온통 찌푸렸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것이 우스워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험한 바윗돌들을 점점 뒤로 멀리하고 우리들은 아늑한 초원을 넘어서 꽤 긴 숲을 지나갔습니다. 우리들이 숲에서 빠져 나왔을 때는 해가 막 지평선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날 저녁의 풍경과 그 때 느꼈던 기분을 절대 잊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한없이 부드러운 붉은 색과 황금 빛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나무들의 우듬지는 저녁놀을 받아 붉게 물들어 있었고, 들판 위 하늘에는 황홀한 황금 빛이 깔려 있었습니다. 숲과 나뭇잎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잠잠했고, 맑은 하늘은 마치 활짝 열어 젖힌 낙원처럼 보였습니다. 졸졸 흐르는 샘물 소리와 나무들이 부드럽게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가끔 들려왔습니다. 주위의 쾌적한 적막 속에 뭔가 슬프면서도 기쁜 느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나는 어렸지만 이때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일들에 대해서 어떤 예감 같은 것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나는 내 자신과 나를 안내하는 할머니의 존재를 잊어 버리고, 마음과 눈이 금빛 찬란한 구름 사이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자작나무가 심어져 있는 언덕을 올라갔습니다. 언덕 위에서는 자작나무가 우거진 푸른 계곡이 아래로 내려다 보였습니다. 그리고 저 아래 나무들 한가운데에 조그마한 오두막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경쾌하게 개 짖는 소리가 우리를 맞이했고 곧 조그마하고 날렵하게 생긴 개 한 마리가 할머니에게 뛰어오르면서 꼬리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나한테도 다가와서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다정한 몸짓으로 할머니에게 되돌아 갔습니다.
우리들이 언덕에서 내려오자 이상한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마치 새소리처럼 들리는 그 노랫소리는, 오두막집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숲의 적막이
나를 기쁘게 한다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오, 나를 기쁘게 하는
숲의 적막이여
이 몇 마디 가사가 쉴새 없이 되풀이되었습니다. 그 소리를 굳이 표현한다면 마치 사냥꾼의 피리소리와 목동의 피리소리가 아주 먼 데서 한 데 뒤섞여서 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갑자기 호기심이 생겨서, 할머니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오두막집으로 따라 들어갔습니다. 주위에는 벌써 황혼이 깃들이고 있었습니다. 집 안에는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컵이 몇 개 벽장에 있었고 이국풍의 그릇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창가에 걸려 있는 번쩍이는 새장 속에 새가 한 마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이상한 가사는 바로 이 새가 노래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헐떡거리며 콜록콜록 기침을 하고 있었습니다. 보기에는 도저히 나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새와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그 새는 늘 부르는 똑 같은 노래로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내가 그 자리에 같이 와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듯 행동했습니다.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나는 몇 번이나 무서워서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할머니는 얼굴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데다 나이를 먹은 탓인지, 줄곧 머리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그녀의 진짜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기침이 좀 가라앉자, 불을 켜고 아주 조그마한 식탁에 식탁보를 깔고, 거기에 저녁식사를 차려 놓았습니다. 그제서야 할머니는 나를 돌아보고, 등나무 의자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나는 할머니의 바로 앞에 마주앉았습니다. 등불은 우리 사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뼈만 앙상한 두 손을 모으고 얼굴을 찡그리며 큰 소리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나는 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가 화를 내지 않도록 무척 주의를 했습니다.
저녁을 먹은 뒤 할머니는 다시 기도를 드리고 나서 천장이 낮고 좁은 방에 내 잠자리를 정해주고, 자기는 다시 그 방에 돌아가 잤습니다. 나는 내 방에 누워 얼마 동안 눈을 뜨고 있다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밤중에 몇 번 잠을 깰 때마다 할머니의 기침소리와 개와 이야기하는 소리, 노랫소리 따위가 간간히 들려왔습니다.
새는 꿈을 꾸고 있는지 줄곧 그 노래의 한두 구절만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창문 앞에서 살랑거리는 자작나무 소리, 먼데서 들려오는 꾀꼬리 소리 등이 아주 묘하게 한 데 어우러져, 나는 마치 깨어있는 것 같지 않고 또 다른 더욱 기이한 꿈속에 빠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침에 할머니는 나를 깨우고, 곧 내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는 실을 짜야 했습니다. 그리고 개와 새도 보살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집안일에 재빨리 익숙해졌고,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해 잘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원래부터 으레 그래야만 되는 것 같았고, 할머니에게 이상한 점이 있다던가, 집이 괴상하게 생기고 속세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든가 또 새가 좀 특별하다든가 하는 것들은 염두에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새의 아름다운 모습은 정말 언제나 감탄스러웠습니다. 오색찬란한 깃털에 아주 아름다운 담청색과 타는 듯한 진홍색이 목과 몸에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노래할 때면 언제나 자랑스러운듯이 거드름을 피우는 그 모습이 더욱더 화려한 깃털의 생김새를 돋보이게 했기 때문이죠.
할머니는 가끔 외출했다가 저녁에야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개를 데리고 마중을 나갔고 할머니는 나를 자기 딸처럼 다정하게 불렀습니다. 나는 마침내 그 할머니가 진심으로 좋아졌습니다. 우리들은 뭐니뭐니해도, 특히 어릴 때는 무엇에나 정이 들게 마련이니까요. 밤에는 할머니가 나에게 글 읽기를 가르쳐줘서, 읽는 법을 금방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내가 혼자 있을 때 무한한 즐거움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이상한 이야기가 적혀있는 낡은 필사본 책을 몇 권 가지고 있었거든요.
당시의 내 생활을 돌이켜 보면 지금도 여전히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 없이, 그렇게 호젓한 집에서 무척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개도 그렇고 새도 그렇고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오던 친구 같았습니다. 나는 지금 그 개의 이름을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기억할 수 없습니다. 무척 이상한 이름이었어요. 그 이름을 당시에는 그렇게도 자주 불렀는데도 지금은 전혀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니 참 이상한 일이죠?
4년 동안 나는 이렇게 할머니와 같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열 두 살이 되었을 때입니다. 할머니가 나를 더욱 믿게 되었는지 마침내 비밀을 하나 털어놓았습니다. 즉 그 새가 날마다 알을 하나씩 낳는데, 그 속에 진주나 보석이 하나씩 들어있다는 얘기였습니다. 나는 그 전에도 할머니가 새장 속에서 뭔가 조심스럽게 꺼내는 것을 늘 보아왔지만, 거기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할머니는 그 얘기를 한 뒤부터는 자기가 없을 때, 이 알들을 받아 값진 보석상자 속에 간직하는 일을 나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내가 먹을 음식을 남겨놓고, 전보다 더 오래 몇 주일이고 몇 달이고 집을 비우곤 했습니다. 나는 물레를 윙윙 돌렸고, 개는 컹컹 짖어댔으며, 새는 신기한 노래를 불렀고, 주위의 모든 것이 조용했습니다. 내가 거기에 있는 동안 폭풍이 불거나 천둥번개가 몰아친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길을 잃고 찾아 드는 사람도 없었고, 들짐승도 우리들이 사는 집 근처에는 가까이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을 하며 하루하루 만족스럽게 보냈습니다. 사람이 만약 죽을 때까지 그렇게 쭉 평온한 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면 아마 무척 행복한 일생일 것입니다.
나는 그 집에 있는, 몇 권 되지 않는 책을 읽고, 세상과 세상 사람들에 대해 아주 희한한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모든 것을 내 생활, 즉 나하고 같이 사는 개와 새, 그리고 할머니와 연관시켜 상상한 것입니다. 명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면, 그들이 꼭 조그마한 그 개처럼 느껴졌고, 화려한 귀부인들은 언제나 그 새처럼 생각되었으며, 할머니들은 모두 다 이상한 그 할머니처럼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연애 이야기도 약간 읽었습니다. 그럴 때는 내 자신을 주인공으로 이상야릇한 이야기를 머리 속에 그리곤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기사를 머리 속에 그리고, 그를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꾸며놓았지만, 정작 내 정성을 다해 꾸며놓은 그 기사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는 생각해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사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모습을 그려보면 나 자신이 정말 가련해지곤 했습니다.
그럴 경우 나는 그를 설득하려고 한참 동안 감동적인 말들을 머리 속으로 꾸며서 늘어놓기도 하고 때로는 직접 그 말들을 입 밖으로 내서 큰 소리로 되풀이하기도 했습니다. 웃고 계시는군요. 이건 우리들 모두가 젊은 시절 한 때 거쳤던, 그런 일들이지요. 이젠 물론 모두 다 이런 시절을 지나왔으니까요.
그 무렵엔 나는 혼자 있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혼자 있으면 집안에서 이것저것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거든요. 개는 나를 무척 좋아하고 내가 시키는 대로 잘 따라 했습니다. 새는 내가 무엇을 묻거나 언제나 그 노래로 대답을 대신했으며, 물레는 언제나 신나게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뭔가 변화를 바라는 욕망을 전혀 느끼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오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내가 알뜰하다고 칭찬하면서 내가 그 집에 들어온 이후 살림살이가 훨씬 좋아졌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할머니는 내가 건강하게 잘 자라난 것을 무척 기뻐했습니다. 한 마디로 할머니는 나를 꼭 자기 딸처럼 대했던 것입니다. '기특하구나 애야!' 한번은 할머니가 그렁그렁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습니다. '지금처럼만 계속한다면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거다. 그러나 올바른 길을 벗어나면 절대로 잘될 수가 없단다. 조만간 그 벌이 뒤따라오기 마련이야.' 할머니가 이런 말을 해도 나는 그 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때 나는 온몸에 활기가 넘쳐흘렀기 때문에, 차분하게 앉아 뭔가 생각하기 어려운 그런 시기였으니까요.
한밤중에 문득 잠에서 깨면 할머니의 그 말이 머리에 언뜻 떠오르곤 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잘 알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 말을 한마디 한마디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는 전에 부귀영화를 누리는 생활에 관한 책을 읽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의 진주와 보석이 무척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습니다. 이 생각은 점차 나에게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그러나 할머니가 말한 그 올바른 길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나는 할머니의 말뜻을 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열 네 살이었습니다. 인간이 분별을 갖게 됨으로써, 마음의 순결을 잃게 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불행한 일입니다. 할머니가 집을 비울 때 새와 보석을 훔쳐서 내가 책에서 읽었던 세계를 찾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건 오직 내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여전히 내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던 더없이 아름다운 기사와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 특별히 강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물레 앞에 앉아 일하고 있으려면 본의 아니게 언제나 그 생각이 다른 여러 가지 생각들 사이를 뚫고 나와 되살아나곤 했습니다. 나는 그 생각에 몰두해서 내가 호화찬란하게 차려 입고 기사와 왕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넋을 잃고 이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눈을 들어 조그마한 방안에 앉아 있는 내 자신을 보게 되면 정말 슬퍼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내가 일을 하고 있을 때엔 더 이상 내 거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할머니는 다시 길을 떠나면서 이번에는 다른 어느 때보다 더 오래 집을 비울 것이니 모든 일에 주의를 게을리하지 말고 부지런하게 집안 일을 잘 돌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어떤 불안을 느끼면서 할머니와 작별했습니다. 어쩐지 할머니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나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면서 왜 내가 그렇게 불안한지 나 자신도 알지를 못했습니다. 내 계획이 어떤 것인지 나도 잘 알지 못하지만, 그 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개와 새를 보살핀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전보다 더 이것들에게 강한 애착을 느꼈던 것입니다. 할머니가 떠난 지 며칠이 지나자 나는 새를 데리고 오두막집을 떠나 이른바 내가 그리던 세계를 찾아가 보려고 결심을 굳혔습니다. 막상 자리에서 일어나자 답답하고 괴로운 생각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다시 눌러앉고 싶었지만 또 그 생각이 귀찮아졌습니다. 나의 마음 속에서 고집 센 두 영혼이 기이하게 싸우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처럼 조용하게 혼자 사는 것이 무엇보다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한 순간 들었다가도 바로 다음 순간에는 다시 놀랍도록 다양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이 나를 무아지경으로 몰아넣곤 했습니다. 나는 내 자신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개는 자꾸만 나에게 뛰어오르고 햇빛은 벌판 위로 눈부시게 퍼지고 있었으며 푸른 자작나무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마치 몹시 급한 볼일이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조그마한 그 개를 붙들어다가 방안에 꼭 매어두고 새가 든 새장을 집어 들었습니다. 개는 평상시와 다른 이 심상치 않은 행동에 몸을 구부리고 킹킹거리면서 애원하듯이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개를 데리고 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나는 보석이 가득 들어있는 상자 가운데 하나를 집어 주머니 속에 슬쩍 넣고 나머지는 그대로 놓아두었습니다.
내가 새를 가지고 문밖으로 나올 때, 새는 이상하게도 머리를 돌리고 나를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개는 내 뒤를 따라오려고 몹시 애를 썼지만 남겨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험악한 바위 쪽으로 통하는 길을 피하여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습니다.
개는 집안에 남아 계속 울부짖으며 낑낑거렸습니다. 그 소리에 나는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새는 몇 번이나 노래를 시작하려고 했지만, 길을 걸으며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아마 불편해서 노래가 잘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내가 오두막집에서 멀어질수록 개 짖는 소리는 점점 더 희미해지다가 마침내는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하마터면 다시 되돌아갈 뻔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새로운 것을 보고 싶은 욕망이 나를 재촉하여 계속 앞으로 걸어가게 했습니다.
산을 넘고 몇 개의 숲을 지나자 날이 저물었습니다. 나는 어느 마을에서 잠자리를 잡고 묵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주막집에 들어갔을 때 나는 몹시 겁을 집어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방과 침대를 정하고, 할머니가 나에게 야단치는 꿈을 꾸기는 했습니다만, 꽤 편히 잠을 잤습니다.
여행은 지루했습니다. 길을 가면 갈수록 할머니와 개에 대한 생각이 나를 더욱더 불안하게 했습니다. 개는 내가 돌봐주지 않았기 때문에 필경 굶어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숲속을 걸을 때면 할머니가 갑자기 맞은편에서 나타날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나는 눈물을 흘리고 한숨을 쉬면서 길을 계속 걸었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쉴 때 새장을 땅바닥에 내려놓으면 새는 그 이상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면서, 버리고 온 아름다운 오막살이를 아주 생생하게 머리 속에 그리곤 했습니다. 인간이란 원래 잊어버리기를 잘하는 모양입니다. 나는 그 오두막집에 가기 전, 그보다 어린 시절에 했던 옛날의 그 여행이 지금 이 여행만큼 비참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다시 과거 할머니를 만나기 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나는 보석을 몇 개 팔아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어떤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그 마을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무엇에 놀랐는지 잘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은 바로 내가 태어난 고향 마을이었으니까요. 나는 정말 놀랐습니다. 수많은 추억이 갑자기 되살아나고, 너무 기뻐서 눈물이 뺨 위를 한없이 흘러내리더군요.
마을은 많이 변했더군요. 새로운 집들이 들어서 있었고, 그 전에 있던 집들은 대개 허물어져 있었으며, 불에 탄 집터도 보였습니다. 모든 것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고 답답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여러 해 만에 부모님을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올랐습니다. 나는 조그마한 내 집을 찾아냈습니다. 눈에 익은 문턱이 보이고, 문의 손잡이는 예전에 내가 살던 그때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문을 반쯤 열고 뛰쳐나온 것이 바로 엊그제 같았습니다. 가슴을 몹시 두근거리며 나는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낯선 사람들이 방안에 둘러앉아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내가 양지기 마르틴은 어디 갔느냐고 묻자, 그는 벌써 3년 전에 부인과 함께 죽었다고 말하더군요. 나는 그 집을 나와서 엉엉 울면서 그 마을을 떠났습니다.
나는 내가 갖고 온 재물을 드려 부모님을 놀라게 해주는 일을 매우 아름답게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이상한 우연으로, 내가 어린 시절에 늘 꿈꾸던 그 환상을 이제 실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젠 모든 것이 허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부모님은 나와 함께 기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언제나 가장 바래왔던 소망이 이젠 나에게서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 뒤 나는 어떤 살기 좋은 도시에 자리를 잡고, 정원이 있는 조그마한 집을 한 채 세를 얻었습니다. 가정부도 한 사람 두었지요. 막상 살아보니 세상은 내가 상상했던 것만큼 아름다운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나는 할머니의 일도 그 전에 살던 곳의 일도 어느 정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꽤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새는 벌써 오래 전부터 노래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밤 새가 갑자기, 더군다나 노래 가사를 고쳐서, 다시 부르기 시작했을 때에 나는 정말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숲의 적막은
저 멀리에 있다.
세월이 가면
언젠가는 후회하게 될 것을...
아, 단 하나의 기쁨
숲의 적막
나는 그날 밤새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시 머리 속에 선명하게 떠올랐고 내가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을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정말 그 새를 보기가 싫었습니다. 새는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그 새와 같이 있는 것이 나는 더욱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그 새는 이제 잠시도 노래를 그치지 않고 전에 늘 하던 것보다 더 크고 울리는 소리로 노래했습니다.
새를 보면 볼수록 나는 더욱더 불안해졌습니다. 나는 마침내 새장을 열고 손을 집어넣어 새의 모가지를 움켜쥐고 힘껏 죄었습니다. 새는 애원하듯이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손을 늦추어 놓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새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뜰에다 묻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집에 두었던 가정부가 점점 두려워졌습니다. 내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생각해볼 때마다 그녀도 언젠가는 내게서 물건을 훔쳐갈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어떤 젊은 기사와 사랑하게 되어 결국 그와 결혼을 했습니다. 발터 씨, 이것으로 내 이야기는 모두 끝났습니다."
"당신이 그 당시 아내를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에크벨트가 얼른 아내의 말을 받았다.
"아내는 그때 고독하게 자란 사람만이 갖는 아름다움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신비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지요. 나는 정말 감탄했지요. 그리고 나는 아내를 더없이 사랑했어요. 내게 재산은 없었지만 아내의 사랑으로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었습니다. 이곳으로 이사 온 뒤로도 우리는 우리들의 결혼을 후회해본 일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벌써 밤이 무척 깊었군요. 이제 주무셔야지요." 베르타가 말했다. 그리고 베르타는 일어나서 자기 방으로 갔다. 발터는 일어서는 베르타의 손에 입을 맞추면서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부인 감사합니다. 그 이상한 새와 함께 있는 당신의 모습, 그리고 당신이 그 조그마한 슈트로미안에게 먹을 것을 주는 모습이 머리 속에 뚜렷이 떠오르는군요."
발터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에크벨트는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방안을 왔다갔다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말았다." 그는 중얼거렸다.
"내가 괜한 얘기를 꺼내서 아내가 자기 과거를 털어놓고 말았어... 이제 와서는 후회가 되는군... 발터가 이 이야기를 악용하지 않을까?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인간의 본성이란 다 그런 것 아닌가? 우리가 갖고 있는 보석에 욕심을 내서, 그 때문에 흉계를 꾸미고 시치미를 뚝 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발터가 잘 자라는 다정한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자러 가버렸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물론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일단 의심을 품게 되면 어떠한 사소한 일도 다 의심거리로 삼게 마련이다. 에크벨트는 마음을 고쳐먹고, 이 훌륭한 친구에게 점잖지 못한 의심을 품는 자기 자신을 책망했다. 그러나 원래 품었던 의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밤새껏 그 생각과 싸우느라고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다음날 베르타는 몸이 아파서 아침식사 때 나오지 못했다. 발터는 거기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고, 그 집을 떠날 때도 어쩐지 냉담한 태도처럼 보였다. 에크베르트는 발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아내를 찾아갔다. 아내는 열이 대단해서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지난밤의 이야기가 이렇게 자기를 흥분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 밤 이후 발터는 에크벨트의 집을 찾는 일이 아주 드물어졌다. 혹시 찾아오는 일이 있어도, 몇 마디 별 뜻도 없는 말을 하고 나서는 다시 가버리곤 했다. 이러한 행동은 에크벨트의 마음을 몹시 괴롭게 만들었다. 그는 물론 그의 고통을 베르타와 발터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했지만, 그들은 그의 행동을 통해 틀림없이 그의 마음 속 불안을 눈치챘을 것이다.
베르타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마침내 의사도 심각하게 걱정하게 되었다. 두 뺨에는 붉은 색이 사라지고, 반면 두 눈은 점점 더 불타 오르는 것 같았다... 어느날 아침 그녀는 남편을 침대 곁으로 불렀다. 그리고 하녀들을 모두 내보내고 입을 열었다.
"여보, 당신에게 털어놓을 게 있어요. 그 자체는 별것 아닌 하찮은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것 때문에 나는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에요. 건강이 이렇게 망쳐진 것도 사실은 그것 때문이에요. 내가 어린 시절 그렇게 오랫동안 사이 좋게 지내던 그 조그마한 개의 이름을 아무리 애를 써서 끝내 기억해내지 못한 것은 당신도 잘 알 거에요. 그날 밤 발터에게 얘기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그날 발터는 자러 가면서 갑자기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당신이 조그마한 슈트로미안에게 먹을 것을 주는 모습을 머리 속에 뚜렷이 그릴 수 있군요' 라구요.
이것은 우연일까요? 그는 개 이름을 어림짐작으로 맞혔을까요? 아니면 이미 알고서 슬쩍 불러본 걸까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나의 운명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나는 이 이상한 일이 단지 나의 공상에 불과한 것 아닌가 갈피를 못잡겠어요. 하지만 그것은 틀림없어요. 너무나 확실해요... 다른 사람이 내 기억을 그렇게 되살려주었을 때, 나는 무서운 공포감에 사로잡혔던 거에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에크벨트?"
에크벨트는 괴로워하는 아내가 가엾어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말없이 혼자 생각에 잠겨 있다가 아내를 몇 마디 위로하고는 그 곁을 떠났다. 구석 방에 들어가서 그는 말할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안절부절못하고 이러 저리 거닐었다. 발터는 여러 해 전부터 사귀어온 그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자기를 괴롭히고 압박하는 유일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만일 이 유일한 존재만 없애버릴 수 있다면 마음이 기쁘고 가벼워질 것만 같다. 그는 활을 꺼내 들고 기분전환을 할 겸 사냥을 나갔다.
눈보라가 사납게 몰아치는 겨울날이었다. 산에는 눈이 깊이 쌓여 있었고 나뭇가지들도 눈이 내려앉아 무겁게 아래로 휘어져 있었다. 그는 여기저기 뛰어다녀 이마에 땀이 서렸다. 그러나 짐승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 불쾌한 기분이 점점 더해갔다. 별안간 그는 먼데서 뭔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나무 아래에서 이끼를 채집하고 있는 발터였다. 에크벨트는 자기도 모르게 활을 겨누어 발터를 쏘려고 했다.
발터는 문득 그를 돌아보고서 몸짓으로 위협하는 듯한 몸짓을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화살이 시위를 떠나 발터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에크벨트는 마음이 가벼워지고 진정이 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다음 순간 공포감에 쫓겨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숲속 깊은 곳에서 길을 잃고 먼 길을 헤매야만 했다. 그가 집에 도착했을 때 베르타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녀는 죽기 조금 전까지도 여전히 발터와 할머니에 대하여 계속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었다.
에크벨트는 그 이후 오랫동안 무척 고독한 생활을 했다. 그는 이미 그 전부터, 아내의 이상한 과거 때문에 불안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어떤 불행한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늘 두려워했고 우울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완전히 자기 분열 상태에 빠져버렸다. 친구를 살해하던 그 광경이 끊임없이 눈앞에 어른거렸고,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살아야 했다.
기분 전환을 하려고 그는 이따금 가까운 도시로 가서, 모임이나 축제에 참석하곤 했다. 그는 친구를 사귀어 허전한 마음을 채우려고도 해봤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발터 생각을 하게 되면 친구를 사귀겠다는 생각이 두려워지곤 했다. 그는 앞으로 어떤 친구와 사귀더라도 그 관계가 다시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아주 평온하게 베르타와 살아왔고, 또 발터의 우정으로 인해 여러 해 동안 무척 행복했다. 그러나 이제 두 사람 다 너무나 갑자기 죽어버렸다. 순간 순간 그의 인생은 현실의 인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상한 동화처럼 생각되곤 했다.
그렇게 말이 없고 우울한 에크벨트에게 후고라는 젊은 기사가 접근해왔다. 서로 사귀게 되면서, 그는 에크벨트에게 참된 우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에크벨트는 이것이 무척 놀랍고 이상했지만, 예기하지 않았던 우정이었던 만큼, 한층 더 급속히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자주 함께 지내게 되었고 이 새 친구는 에크벨트에게 정성을 다해 호의를 베풀었다. 야외로 나갈 때는 거의 언제나 둘이서 같이 나갔고 어떤 모임에서나 그들은 함께 만났다. 그들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에크벨트의 이런 즐거움은 언제나 순간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는 후고가 자기를 좋아하는 것은 어떤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후고는 그를 잘 모르고 있었고, 그의 과거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후고가 정말 자기의 친구인지 아닌지 확인해볼 수 있도록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것은 과거 발터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느꼈던 그런 충동이었다. 그러나 후고가 이야기를 듣고 나면 또다시 발터처럼 자기를 꺼려할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두려움으로 생각을 돌이키곤 했다.
에크벨트는 자기가 보잘 것 없는 사실을 언제나 머리 속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를 존중하는 사람은, 실상 자기를 전혀 모르는 사람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마음 속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 어느날 두 사람만 거닐던 호젓한 산보 길에서 그는 친구에게 자기의 과거를 모두 털어놓고 살인자를 친구로서 좋아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후고는 마음속으로 감동을 느끼고 그를 위로하려고 애썼다. 에크벨트는 마음이 무척 가벼워져서 그를 따라 시내로 들어왔다.
그러나 사람을 신뢰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의심을 품는 것이 그의 영원한 형벌인 모양이다. 그들이 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환한 불빛에 비치는 친구의 표정이 에크벨트에게는 뭔가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후고가 음흉한 미소를 짓는 것 같았고, 자기와는 별로 말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후고가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자기에게는 일부러 시선을 돌리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 자리에는 늙은 기사가 한 사람 앉아 있었다. 이 사람은 언제나 에크벨트를 적대시하고, 때때로 그의 재산과 아내에 대해서 이것저것 기분 나쁘게 따져 묻곤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후고가 이 노인과 같이 앉아서, 둘이서 에크벨트 쪽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한동안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에크벨트는 자기가 의심하던 것이 지금 사실로 드러났고, 자기가 배신당했다고 생각했다. 무서운 분노가 그의 마음을 거세게 사로잡았다.
그가 계속 그 쪽을 노려보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발터의 얼굴이 나타났다. 발터의 얼굴 표정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보였고, 자기가 그렇게도 잘 알던 얼굴이 실제 모습 그대로 나타났다. 그는 여전히 그 쪽을 노려보면서, 저 노인과 이야기할 사람은 발터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그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놀랐다. 그는 정신없이 밖으로 뛰쳐나가서, 그날 밤으로 그 도시를 떠났다. 에크벨트는 몇 번씩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가 가까스로 자기집으로 돌아왔다.
마치 떠돌아다니는 망령처럼 그는 이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잠시도 한 자리에 있지를 못했다. 어떠한 생각도 집중할 수 없었으며, 머리 속으로 무서운 생각을 떠올리다가 그것이 한층 더 무서운 생각으로 이어지곤 했다. 잠은 전혀 오지 않았다. 때로 그는 자기 머리가 돌아서 모든 것이 자기 머리 속으로 꾸며댄 망상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다시 발터의 모습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모든 것이 점점 더 수수께끼처럼 생각될 뿐이었다.
그는 혼란한 머리 속을 정리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따뜻한 우정과 친교를 바라는 마음을 그는 이제 영원히 포기해 버렸다.
그는 정처 없이 길을 떠났다. 그는 자기 앞에 펼쳐진 경치에도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최고의 속력으로 며칠간이나 계속 말을 몰았다. 그리고 바위 사이로 난 꼬부랑길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아무리 해도 거기를 빠져나가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한참을 그러다가 그는 어떤 늙은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그에게 폭포 앞으로 지나가는 좁은 길을 가르쳐주었다. 고맙다는 뜻으로 동전을 몇 푼 주려고 했지만, 농부는 거절했다.
"틀림없다." 에크벨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다름 아닌 발터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또 다시 나의 망상에 불과한 것일까?"... 그러면서 그가 다시 한 번 뒤돌아보았을 때, 그것은 틀림없는 발터였다... 에크벨트는 말에 박차를 가하여 최대한 빨리 달려, 초원을 지나고 숲을 지났다. 마침내 말은 지칠 대로 지쳐 그를 태운 채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그러나 에크벨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걸어서 여행을 계속했다.
그는 꿈을 꾸듯이 어떤 언덕을 올라갔다. 가까이서 개 짖는 소리가 힘차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소리와 섞여서 자작나무가 살랑거렸고, 이상한 목소리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숲의 적막이
다시 나를 기쁘게 한다
내겐 슬픔이 일지 않고
여기엔 시기가 없다
기쁨이 새로워라
숲속의 적막
이제 에크벨트는 모든 의식과 감각을 잃어버렸다. 그는 지금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이전에 베르타라는 여인의 꿈을 꾸었던 건지 마치 수수께끼 같았다. 가장 이상한 것이 가장 평범한 것과 뒤범벅이 되었다. 그를 둘러싼 세계가 마술에 걸려서 그는 생각도 추억도 마음 먹은 대로 할 수 없었다.
등이 휘어진 어떤 꼬부랑 할머니가 기침을 하면서 지팡이를 짚고 언덕을 기어올라와 그에게 다가왔다.
"내 새를 가지고 왔어? 내 진주는? 내 개는?" 할머니가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봐라, 나쁜 짓을 하면 스스로 벌을 받게 되느니라. 내가 바로 너의 친구 발터였고, 또 후고였다."
"오오, 주여!" 에크벨트는 나지막하게 혼자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엄청난 고독 속에서 나의 생애를 보내왔다는 말인가."
"그리고 베르타는 너의 누이동생이었다."
에크벨트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어째서 그 처녀는 나를 속이고 떠났단 말인가? 그러지 않았다면, 모든 일이 좋게 잘 되었을 텐데. 베르타의 시련은 알다시피 이미 거의 다 지났었지. 그 애는 어떤 기사의 딸이었어. 기사는 그 애를 양치기의 손에 맡겨 자라게 했던 것이야. 그 아이는 네 아버지의 딸이란 말이야."
"어째서 나는 이 무서운 생각을 언제나 예감하고 있었을까?" 에크벨트는 외쳤다.
"네가 아주 어렸을 때, 네 아버지가 언젠가 그 말을 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지. 너의 아버지는 자기 부인, 네 어머니 때문에 이 딸을 자기 슬하에서 키울 수 없었던 것이야. 이 딸은 다른 여자에게서 태어났으니까."
에크벨트는 이미 미쳐버렸다. 그는 죽어가면서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멍하게 머리가 혼란해진 채, 그는 할머니가 말하고 개가 짖고, 새가 되풀이해서 노래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