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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 Schicksal des Freiherrn von Leisenbohg

아르투어 슈니츨러
 

[소개]

한 여인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평생을 뒤쫓아다닌 한 부유한 귀족이 결국 맞게 되는 운명은 어떤 것일까? 자칫 위악적이고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 작품은 인생이 갖는 잔인한 실상에 대해 양보하지 않고 메스를 들이대는 미덕을 보여준다.

[작가 소개]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1862-1931) :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수도 비인에서 태어나 원래 의사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섬세하고 예리한 심리 관찰을 통해, 부드러운 정감을 엮어 비인 시민들의 우아한 생활과 퇴폐상을 묘사했다. 독일의 자연주의에 대하여 호프만스탈과 더불어 '젊은 비인'이라 불리는 도회적, 감각적인 문학 경향을 수립했다. 대표작으로 <아나톨> <연애 삼매경> <윤무> 등의 희곡과 <죽음> <푸른 앵무새> 등의 소설이 있다.





'밤의 여왕'으로 분장한 클래레 헬이 오랜 만에 다시 무대에 나타난 것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5월 어느 날 밤이었다(밤의 여왕 : 모짜르트와 쉬카네더 공동창작 오페라 '마술 피리' 에 나오는 여가수 역할).

이 여가수는 거의 두 달간이나 오페라에 출연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3월 15일 리하르트 베덴브루크 대공이 말에서 떨어져 겨우 몇 시간만에 클래레의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난 것이다.

대공이 병원에 누워 있늠 몇 시간 동안 클래레는 줄곧 그의 곁에 있었다. 클래레의 상심이 너무 심해 사람들은 그녀의 목숨까지 위태롭지 않을까 걱정할 지경이었다. 또 정신이 이상해진 것 아닌가 이야기도 나왔고, 또 최근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상한 것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음성에 대한 걱정도 처음 두 가지 걱정처럼 기우였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다시 관중 앞에 선 그녀는 호의와 기대 어린 박수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첫 번 째 긴 아리아가 끝나자마자 그녀의 절친한 친구들, 그리고 그다지 가깝지 않은 다른 친구들까지 그녀에게 축하 인사를 쏟다부었다.

5층 관람석에서 앉아 있던 패니 링아이저 양의 앳띤 얼굴도 기쁨에 넘쳐 환해졌다. 그리고 그녀 뒤에 앉아있던 다른 팬들도 클래레의 다정한 친구인 이 아가씨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패니는 마리아힐프 거리(비엔나의 서쪽에 있는 제6구역)의 레이스 상인의 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인기 여가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의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클래레 집 오후 간식 시간에 초대를 받곤 했다. 패니가 작고한 대공을 남몰래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다.

공연의 중간 휴식 시간에 패니 양은 자기의 남녀 친구들에게 이 '밤의 여왕' 역으로 클래레가 다시 등장한 배경을 들려주었다. 즉 클래레는 라이젠보그 남작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이 역할에 출연하기로 했던 것이다. 남작은 이 검은 의상이 지금 그녀의 기분에 딱 들어맞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는 얘기였다.

남작 자신은 언제나 그런 것처럼 오케스트라 바로 앞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바로 중앙통로 제일 첫째 줄 끝 좌석이다. 남작은 거기에서 인사를 건네오는 친구들에게 기쁜 미소로 응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엔 어딘지 고통이 담겨 있었다. 오늘 그의 머리엔 갖가지 추억이 그의 머리를 스쳐가고 있었다.

남작은 10년 전에 클래레를 알게 되었다. 당시 그는 어떤 고독한, 붉은 머리칼의 젊은 여인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 젊은 여인의 예술 수업을 후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여인은 아이젠슈타인 음악학교의 '연극의 밤'에 미뇽 역으로 처음 데뷔하게 됐다. 바로 거기에 남작이 참석했다가, 그 여인이 출연한 같은 장면에서 필리네 역을 맡아 노래하는 클래레를 처음 보았던 것이다.

당시 남작은 스물 다섯의 나이에 독신이었고, 매인 데 없이 자유로운 몸이었다. 그는 미뇽 역을 맡은 여인에게는 완전히 관심을 잃어버리고, 공연 후 나탈리에 아이젠슈타인 부인을 통해 피리네를 소개받았다. 그 자리에서 남작은 자신의 마음, 재산 그리고 극장 총감독과의 인간 관계 등을 모든 것을 그녀를 위해 바치겠노라고, 그리고 그런 행동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클래레는 당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우정국 중간 간부의 미망인이었다. 그리고 클래레는 어떤 의대생과 열애중이었다. 그녀는 가끔 시 외곽 알저포슈타트 구역에 있는 그 대학생 방에서 차를 마시고 잡담을 나누곤 했다. 그녀는 남작의 폭풍우 같은 구애를 거절했지만, 남작의 찬사 때문에 기분이 좋아져서 자신이 의대생과 애인 사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다.

클래레가 자신의 애정 관계를 숨김없이 털어놓자, 남작은 다시 붉은 머리칼의 여자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나 클래레와의 친분 관계는 계속 유지했다. 그는 축제일이랄지 무슨 구실이 있을 때마다 그녀에게 꽃과 봉봉 과자를 보냈고, 가금 우정국 중간 간부의 미망인 집을 인사차 방문하기도 했다.

가을에 클래레는 데트몰트 극장과 최초의 계약을 맺었다. 라이젠보그 남작은 당시 아직 중앙 관청에서 근무하는 관리 신분이었다. 그는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 휴가를 이용하여 클래레가 새롭게 머물게 된 데트몰트를 방문했다. 그는 클래레와 사귀던 그 의대생이 의사가 되어 지난 9월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남작이 도착하자 클래레는 여전히 뻣뻣한 태도로 그에게 자신이 궁정 극장의 테너 가수를 사랑하게 됐노라고 밝혔다. 때문에 남작은 클래레와 시내의 숲에서 플라토닉한 산책을 하고, 다시 그녀의 동료 몇 사람과 함께 극장 안의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데트몰트에서는 그 외에 특별한 추억을 만들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데트몰트를 자주 방문했다. 그는 예술 애호가로서 클래레의 눈부신 발전에 큰 기쁨을 느꼈다. 또 문제의 그 테너 가수가 다음 해 시즌에는 함부르크로 옮겨가기로 계약을 맺은 사실도 그가 기대를 품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다음 해에도 그는 역시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클래레가 루이스 베르하옌이라는, 네덜란드 출신 거물급 상인의 구애를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다.

세 번째 시즌에 클래레는 드레스덴 궁정 극장 전속 가수로 초빙되었다. 이 때 남작은 아직 젊은 나이에 전도 유망한 국가 관리였으나 미래의 출세마저 포기하고 드레스덴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제 그는 매일 저녁 클래레와,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어머니는 무척 영악스럽게 처신했다. 딸이 벌이는 어떤 연애 행각도 교묘하게 모르는 체했던 것이다. 남작은 이제 새로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재수가 없었다. 그 네덜란드 상인에게는 고약한 습관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편지를 보낼 때마다 다음 날 자기가 드레스덴으로 찾아올 것이라고 예고하였고, 자기가 보낸 첩자들이 클래레를 둘러싸고 암암리에 감시하고 있다는 점을 넌지시 암시하곤 했다. 그리고 그녀가 정절을 지키지 않을 경우, 극히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살해하겠다는 위협을 적어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상인이 실제로 드레스덴을 찾아온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오직 그 편지는 클래레를 극도의 신경과민 증세로 몰아갔을 뿐이었다. 그래서 라이젠보그 남작은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그 상인과 클래레의 관계를 끝장내주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 상인과 개인적으로 담판을 짖기 위해 데트몰트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 상인은 남작에게 놀랍게도 엉뚱한 얘기를 했다. 자신이 클래레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나 위협의 편지는 단지 기사도적인 의무감에서 쓴 것일 뿐이라는 설명이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앞으로 그런 의무감에서 벗어난다면 그보다 더 반가운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남작에게 분명히 밝혔다.

라이젠보그는 마치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행복한 마음으로 드레스덴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클래레에게 이번 담판이 아주 원만하게 마무리되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녀는 그에게 진실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나 남작이 그녀와의 애정 관계를 더 진척시키려고 하자, 그런 시도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남작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지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남작은 클래레의 태도에 대해 절박하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마지못해 털어놓았다. 남작이 드레스덴을 떠나있는 동안 다른 사람도 아닌 카예탄 황태자가 자신에게 격렬한 사랑을 고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황태자는 클래레가 이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맹세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왕실과 나라 전체를 슬픔에 빠지게 하지도록 하지 않으려면 그녀가 황태자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비통으로 찢긴 가슴을 안고 라이젠보그는 드레스덴을 떠나 비엔나로 돌아왔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인간 관계를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클래레가 그 이듬해 벌써 비엔나 오페라단과 출연 계약을 맺게 된 것에는 그의 이런 노력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초청 공연이 성공적으로 끝난 다음 클래레는 10월에 정식 계약을 체결했다. 비엔나에서 최초의 공연을 마친 저녁, 분장실에서 그녀는 라이젠보그가 보낸 화려한 꽃바구니를 받았다. 이 꽃바구니는 남작의 소원과 희망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었다.

남작은 기분이 들떠서, 공연이 끝나고 나서 그녀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또 다시 선수를 빼앗긴 것을 알고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2,3 주 전부터 클래레와 함께 연습을 해왔던 금발의 남성이 그녀로부터 '권리'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그 남성은 작곡가이자 극장의 조감독으로서 상당한 지위를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 스스로 그 남성의 권리를 무슨 일이 있어도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그로부터 7년의 세월이 홀렀다. 이 조감독의 뒤를 이어 많은 남자들이 클래레를 거쳐갔다. 조감독의 뒤를 이어 두려움을 모르는 승마의 명수 클레멘스 폰 로데빌 씨, 그리고 그 뒤에는 가끔 자신이 지휘하는 오페라와 함께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 가수의 노래가 들리지 않을 때도 있다는 악장(樂長) 빈센츠 클라우디 씨가 자리를 이어받았다.

클라우디 씨 뒤에는 알반 라토니 백작이었다. 그는 트럼프 도박을 하다가 헝가리에 있던 자신의 영지를 몽땅 날리고 나중에는 다시 오스트리아 평야 지대에 있는 성 하나를 딴 풍채 좋은 한량이었다. 백작 다음에는 에드가 빌헬름 씨가 등장했다.

그는 극작가로서 자기가 쓴 발레 대본에 쓸 음악을 작곡시키기 위해 엄청난 돈을 쓰는 인물이었다. 또 얀츠 극장을 빌려서 자기가 쓴 비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그는 자기 시를 그 도시에서 가장 얇은 고급지에, 가장 아름다운 글씨체로 인쇄하도록 하곤 했다.

그 다음에는 아마두스 마이어라는 굉장한 미남 신사가 나타났다. 그는 나이가 열 아흡인데다 거꾸로 설 줄 아는 폭스테리어 애완견 말고는 가진 게 전혀 없었다. 그 외에는 아무 특징도 없는 사나이었다. 이 마이어씨 뒤를 이은 인물이 바로 제국에서 제일 가는 멋쟁이 신사라는 리하르트 베덴브루크 대공이었던 것이다.

클래레는 자신의 애정 행각을 숨기는 법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중산층의 평범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다만 바뀌는 것은 그 집의 바깥 남자뿐이었다. 대중 사이에서 그녀의 인기는 굉장했다. 상류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일요일마다 미사에 참석하고, 한 달에 두 번씩 고해성사를 하며, 교황이 직접 정결 의식을 치른 성모상을 항상 수호자로서 가슴에 달고 다닌다는 것, 또 자기 전에 반드시 기도를 드린다는 사실 등이 상류층 사람들에게 무척 호감을 주었던 것이다.

도시에서 가끔 열리는 자선 바자회에 그녀는 빠지지 않고 초대를 받았다. 물론 그녀가 직접 물건을 파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문 좋은 귀부인들이나 돈 많은 유태계 부자 상인의 부인들도 모두 클래레와 함께 자신의 물건을 내놓는 것에서 행복감을 느꼈다.

열광적인 젊은 남녀 팬들은 무대로 통하는 문 곁에 지켜 서서 그녀를 기다리곤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들을 향해 사람의 넋을 뺄만큼 황홀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했다. 그녀는 자기에게 보내온 꽃들을 그 인내심 많은 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한 번은 깜박 잊고 분장실에 꽃을 그냥 두고 온 일이 있었다. 그 때 그녀는 자신의 용모에 무척 잘 어울리는 비엔나 사투리로 이렇게 말했다.

"어쩜 좋아! 오늘은 샐러드(꽃을 비유한 것 - 편집자 주*)를 잊고 그만 내 방에 두고 나왔네! 여러분, 뭘 좀더 드실 분들은 내일 오후에 저희 집으로 오세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차에 올라타 막 떠나려는 순간 그녀는 다시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소리쳤다. "커피 정도는 대접할 수 있답니다!"

이런 초대에 선뜻 응할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 소수의 열성 팬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패니 링아이저 양이었다. 클래레는 패니 양과 농담 섞어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마치 대공비(大公妃)처럼 상냥한 표정으로 패니 양의 가족에 대해 묻기도 했다. 클래레는 이 싱싱한 처녀 아이가 발랄하게 수다를 떠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한 번 놀러오라고 초대했다.

패니는 이 초대에 응했다. 그리고 곧 이 예술가의 집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녀가 이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클래레가 아무리 친밀하게, 비둘기처럼 다정하게 신뢰감을 나타내도 패니는 결코 클래레에게 친근한 것 같은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패니 양도 여러 번 청혼을 받았다. 청혼한 상대방은 대부분 그녀가 무도장에 함께 춤추러 다니곤 했던 마리아힐프 공장주들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청혼을 모두 거절했다. 그건 일종의 규칙 같았다. 그녀는 이제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이 차례차례 클래레의 연인들에게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클래레는 베덴브루크 대공을 3년 이상 줄곧 사랑했다. 그 열정과 진실함은 그 이전의 어떤 남성에게 대한 것보다 더 깊은 것으로 보였다. 지난 10년 동안 수없이 실망을 맛보고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라이젠보그조차도 이제는 10년 동안 정성을 들여 사모해왔던 그 행복이 영원히 꽃피지 못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진지하게 하게 되었다.

그는 클래레가 그 동안 사귀던 남성에 대해 싫증을 내는 것 같은 조짐을 보기만 하면 어떤 경우 어떤 순간에라도 자기가 그 동안 사랑하던 사람에게 이별을 고하곤 했다. 클래레의 사랑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려는 것이었다. 이번 리하르트 대공이 갑자기 사망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사실 이번에는 어떤 확신 때문이 아니라, 그저 습관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라이젠보그에겐 처음이었다. 클래레가 대공의 죽음을 너무 고통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그녀가 인생의 모든 즐거움을 영원히 포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매일 작고한 대공의 묘소를 찾아가 꽃을 바쳤고, 화려한 옷들은 모두 벗어서 지붕 밑 다락방에다 처박아 버렸다. 장신구들은 책상의 가장 아래 손이 잘 닿지 않는 서랍 속에 넣어 버렸다. 영원히 무대를 떠나겠다는 그녀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그야말로 진지한 설득 작업을 해야 했다.

복귀 무대가 대단히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뒤에,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녀의 삶은 이전과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동안 약간 소원했던 예전의 친구들도 다시 모여들었다. 음악 평론가 베른하르트 포이어슈타인은 점심 식사로 뭘 먹었건 상관없이 항상 짧은 윗도리에 시금치나 토마토 자국을 묻힌 채 나타나 남녀 배우나 무대감독 등에게 욕설을 퍼부어댔다. 클래레는 이걸 무척 재미있어 했다.

죽은 리하르트 대공의 두 조카인 루치우스와 크리스티안은 베덴브루크 가문의 방계에 속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예전처럼 지극히 담백하고 공손하게 클래레를 대했다. 그녀는 거기 대해서도 별 얘기가 없었다. 또 프랑스 대사관에 근무하는 한 신사와 체코의 피아노 명인을 새로 소개받기도 했다. 6월 10일에는 비로소 경마를 하러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다소 문학적 재능이 없지 않은 루치우스 대공이 그녀의 상태에 대해 표현한 것이 있었다. 즉 '그녀의 영혼이 겨우 깨어났지만, 그 마음은 여전히 조는 듯 잠겨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 말 그대로였다. 나이가 젊거나 늙은 그녀의 친구들 가운데 누군가가, 이 세상에는 부드러운 사랑과 격정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무리 넌지시 암시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그런 말을 듣자마자 곧 미소가 사라지고, 눈빛이 어두워졌다. 때로는 손을 가볍게 쳐들어 이상야릇한 거부 동작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런 거부의 행동은 마치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어느덧 6월도 하순 무렵이었다. 스칸디나비아 출신 가수 지그루트 외르제가 비엔나 오페라단에서 트리스탄 역을 맡아 노래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특별히 격조가 높지는 않았지만 맑고 탄력이 넘쳤다.

그는 대단히 키가 크고 살이 찐 편이었다.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을 때, 그의 얼굴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표정이 나타나지 않았고 그저 평범했다. 그러나 일단 노래를 시작하면 그의 투명한 잿빛 눈은, 신비롭게 반짝였다. 마치 그의 내부에서 뭔가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와 그 눈빛은 모든 사람, 특히 여성들을 황홀한 도취경으로 이끌었다.

클래레는 그 때 공연이 없는 남녀 동료들과 함께 극장 맨 위쪽 특별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만이 유일하게 그 날 노래에 감동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다음 날 오전에 그녀는 극장 사무실에서 지그루트 외르제를 소개받았다. 그녀는 그의 어제 공연에 대해서 친절한 말 몇 마디를 건넸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냉담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발언에 불과했다.

그날 오후 외르제는 특별한 초청을 받지도 않았으면서 클래레를 방문했다. 그 자리에는 라이젠보그 남작과 패니 양이 자리를 함께 했다. 지그루트는 그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노르웨이의 작은 마을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는 자기 부모에 대한 이야기, 하얀 요트를 타고 여행중이던 어떤 영국 사람이 호젓한 피오르드 해안에 정박하였다가 자신의 노래 소질을 기적처럼 발견한 이야기 따위를 들려주었다.

그의 아내는 이탈리아 사람이었으나 신혼 여행 도중에 대서양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가 돌아간 뒤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오랫동안 침묵에 잠겨있었다.

패니 양은 가만히 자기 앞의 빈 잔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클래레는 피아노 앞에 앉어 닫아놓은 뚜껑 위에 팔꿈치를 고이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남작은 말없이 걱정하며, 의문에 빠져 있었다. 대공이 죽은 후, 클래레는 이 세상에 사랑에 들뜬 사람들의 얘기, 격정적인 애정 관계 등 사람이 살아가는 데 없을 수 없는 애정에 관한 얘기 비슷한 것만 나와도 거부 반을 보였다. 손을 들어 가로막는 그 이상한 거부 동작 말이다. 하지만 오늘 지그루트가 신혼 여행 얘기를 할 때에는 왜 그 동작을 취하지 않았을까?

지그루트 외르제는 그 밖의 초청공연 배역으로 '지그프리트'와 '로엔그린' 역을 맡아 노래를 불렀다. 클래레는 그때마다 무감동하게 특별석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껏 노르웨이 영사관 말고는 별로 사람들과 사귀지 않았던 이 북유럽의 가수는 매일 오후가 되면 클래레의 집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는 라이젠보그 남작이나, 특별한 경우를 빼놓고는 패니 링아이저도 늘 만나곤 했다.

7월 27일 외르제는 마지막으로 트리스탄 역을 맡아 무대에 나섰다. 이번에도 클래레는 무감동한 표정으로 객석에 앉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패니와 함께 대공의 묘소를 찾아가 엄청나게 큰 화환을 그 앞에 놓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내일이면 비엔나를 떠날 이 초청 가수의 환송 파티를 열었다.

엄청나게 많은 친구들이 빠짐없이 거기 모여들었다. 지그루트가 그녀에게 완전히 푹 빠져 있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다. 늘상 그런 것처럼 그는 홍분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런 이야기 가운데 그는 자기가 배를 타고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러시아 대공과 결혼한 한 아라비아 여자로부터 손금을 보았다는 얘기를 했다. 그 여자는 그에게 곧 생애의 가장 운명적인 시기가 다가올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예언을 단순한 홍미거리 이상으로 확고히 믿고 있었다. 사실 그는 미신을 단순한 화젯거리 이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어떤 에피소드는 다른 사람에게도 잘 알려진 것이었다. 즉 그가 지난 해 초청 공연을 하기로 되어 있던 뉴욕에 도착한 직후 선박의 상륙용 다리에서 검은 고양이가 다리 사이를 빠져 달아난 일이 있었다. 그는 바로 그날 유럽으로 가는 배를 타고 말았다. 계약 위반에 따라 엄청난 많은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로서는 그러한 이상한 징조들과 인간의 숙명 사이에 어떤 비밀스러운 관계가 있다고 믿을 만한 나름대로의 근거를 충분히 갖고 있었다. 런던의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어느 날 밤, 그는 무대에 서기 전에 할머니로부터 전해 받은 주문을 암송하는 것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갑자기 음성이 나오지 않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또 어느 날 밤에는 꿈에 분홍빛 타이츠를 입고 날개가 달린 요정이 나타나, 그가 좋아하는 이발사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실제로 그 이발사는 목을 매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외르제는 짧지만 내용이 의미심장한 편지 한 장을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 편지는 브뤼셀에서 열린 심령술사 회의에서 이미 사망한 여가수 코르넬리아 루얀의 혼령으로부터 건네받은 것이었다. 그 편지는 유창한 포르투갈어로, 지그루트가 유럽과 미국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가수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담고 있있다. 그는 이 날 이 자리에서 그런 것들을 몽땅 얘기했다. 심령술사 회의에서 만들어진, 그린우드 회사가 만든 분홍색 편지지에 쓰여진 그 편지가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다. 사람들은 그 편지를 보느라 술렁거렸다.

그러나 클래레 본인은 거의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다만 가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라이젠보그는 점점 더 불안해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층 예민해진 그의 눈에는 분명 위험한 징조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특히 지그루트는 저녁식사 내내 남작에게 묘하게 친근한 태도를 보였다. 이것은 예전 클래레의 애인들이 그랬던 것과 꼭 같았다.

지그루트는 저녁식사를 하면서 남작을 몰데 피요르드 해안에 있는 자기 저택으로 초청하는가 하면 나중에는 친밀하게 서로 말을 트자는 얘기까지 했다. 게다가 패니 링아이저는 지그루트가 말을 건넬 때마다 온몸을 부르르 떠는가 하면, 그가 커다랗고 차가운 잿빛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면 얼굴이 창백해졌다 벌개졌다 오락가락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이제 떠날 시간이 다 되었다고 말하자, 그녀는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클래레는 여전히 침착하고 담담한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녀는 지그루트의 불타는 듯한 시선에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와 나누는 대화 역시 다른 사람들과 하는 것보다 특별히 더 진지한 것도 아니었다. 마침내 그가 클래레의 손에 키스를 한 후 간청하는 듯한, 맹세하는 듯한, 미칠 것 같은 눈길로 그녀를 올려다보았을 때도 엷은 베일에 싸인 듯한 그녀의 눈빛이나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라이젠보그는 이 모든 것을 의혹과 공포의 심정으로 유심히 관찰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은 연회가 모두 끝나고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눌 때 일어났다. 남작으로서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었다. 남작이 맨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들처럼 클래레 손에 키스를 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쥐고는 속삭였다. "다시 오세요."

그는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한 번 그의 손을 꼭 쥐더니 그의 귀 가까이 입을 대며 다시 되풀이했다. "다시 오세요. 한 시간 안에 오실 줄 알고 기다릴께요."

거의 휘청거릴 것 같은 발걸음으로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집을 나왔다. 그는 패니 양과 함께 지그루트를 호텔까지 바래다주었다. 지그루트가 클래레에 대해서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주절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그것은 먼데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이어서 그는 부드럽고 서늘한 밤의 공기를 마시며 고요한 거리를 지나 패니 링아이저를 마리아힐프 구역으로 데려다 주었다. 패니 양은 마치 어린애처럼 발그스레한 뺨 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마저도 안개 너머로 보이는 것처럼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런 다음에야 그는 마차를 세워 몸을 싣고 클래레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녀 침실의 커튼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그림자가 거기 살짝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그는 보았다. 다음 순간 그녀가 커튼 사이로 머리를 내밀고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결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라이젠보그 남작은 말을 타고 프라터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그는 행복감과 젊어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오랜 소원이 이렇게 뒤늦게 이루어진 데에는 보다 깊은 어떤 뜻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지난밤 체험했던 것은 아주 놀라운, 기적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조금 생각을 돌려보면 어쩌면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클래레와 맺어온 관계의 상승이자 필연적인 귀결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는 이제 이것이 만드시 올 수밖에 없는 결론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제 거기에 이어서 이것저것 앞으로 이어질 장래의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앞으로 얼마 동안이나 더 무대에 서게 될까?' 그는 생각해봤다...

'아마 4년이나 5년 정도겠지... 그보다 더 일찍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되면 난 그녀와 결혼하겠지. 그러면 함께 시골에서 살기로 하자... 비엔나에서 아주 가까운 생 바이트나 라인쯔(당시 비엔나 서쪽 근교의 고급 주택가) 쯤이 좋겠지. 거기 집을 한 채 사서, 그녀 취향대로 집을 꾸미게 하자. 우린 아주 조용히 살아가겠지... 하지만, 가끔 멀리 여행도 떠나기로 하자... 스페인이나 이집트, 인도 쯤이면...' 그는 말을 타고 호이슈타들 목초지를 빠르게 달리면서 이런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속도를 조금 늦추어 큰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프라터 로타리에서 자기 마차로 옮겨 탔다. 그는 포사티 꽃집에서 마차를 멈추고 클래레에게 화려한 흑장미 꽃다발을 보내도록 시켰다. 그는 여느 때처럼 슈바르첸베르그 광장에 바로 맞닿아 있는 자기 집에서 혼자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 후 그는 안락 의자에 길게 누웠다. 클래레를 보고 싶은 마음이 사무쳤다. 그녀 말고 다른 여인들이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그들은 다만 기분풀이의 대상일 뿐이다.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언젠가 클래레가 자기에게 비슷한 말을 해줄 그런 날이 오리라고 믿었다. 다른 남자들이 나에게 무엇이었냐구요? 내가 지금까지 사랑한 유일한 남자, 그 사람은 바로 당신이에요! 이렇게 말할 그런 날이 오리라고 그는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긴 안락의자에 누워 눈을 감고 그 동안 클래레를 거쳐간 수많은 남자들을 떠올렸다. 그래, 그건 확실해. 그녀는 나 이전에 다른 어느 누구도 진실로 사랑하지 않았던 거야. 항상 나만을 사랑하고 있었던 거지... 모든 사람 안에서 나를 보았던 거야! 남작은 옷을 갈아 입었다. 그리고 재회를 기다리는 그 기쁨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마음에 새기고 싶어서 천천히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익숙한 길을 걸어 올라갔다.

원형의 광장에는 산책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이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계절은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라이젠보그는 이제 여름이 왔다는 것, 클래레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자신의 모습을 머리속에 떠올렸다. 그녀와 함께 바다와 산을 즐기게 될 것을 생각하니 기뻐서 견딜 수 없었다. 황홀한 나머지 큰 소리로 환호성이라고 지를 지경이었다. 그는 애써 자기 자신을 억제했다.

그녀의 집 앞에 서서 그는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오후의 햇살이 창문에서 반사되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는 대문 쪽으로 계단을 두 개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렀다.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라이젠보그는 그제야 문에 저금통 모양 자물쇠가 채워진 것을 발견했다.

이건 도대체 뭐야? 내가 집을 잘못 찾았나? 그녀는 평소 집에 문패를 걸어놓지 않았다. 그러나 맞은편 집에는 늘 그랬던 것처럼 '폰 엘레스코비츠 중위'라는 문패가 그대로 걸려 있었다. 이건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녀의 집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집은 지금 닫혀있다.

그는 서둘러 계단을 달려 내려와 관리인 집의 문을 열었다. 관리인의 마누라는 어두운 방안 침대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지하층의 작은 창문을 통해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또 다른 아이는 입에 빗을 물고 뜻을 알기 어려운 어떤 노래를 흥얼거리는 중이었다. "헬 양은 지금 집에 계시지 않소?" 남작은 물었다. 그러자 여인이 일어섰다. "지금 안 계십니다. 남작 님. 헬 양은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뭐라고?" 남작은 소리를 질렀다.

"아, 참, 그렇지..." 그는 소리가 새는 것처럼 덧붙였다

"세 시에... 그렇지?"

"아니오, 남작 님. 헬 양은 아침 여덟 시에 떠났습니다."

"그래, 어디로? 글쎄, 내 생각으로는 아마 곧장..." 그는 입에서 나오는대로 멋대로 말했다.

"아마 드레스덴으로 바로 갔겠지?"

"아닙니다, 남작 님. 헬 양은 주소를 전혀 남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어디에 있는지 곧 편지로 알리겠다고 그러셨어요."

"그래? 그렇지... 음, 그랬겠지... 그건 그렇고, 아무튼 고마워..." 그는 발걸음을 돌려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집 쪽을 돌아보았다. 석양 무렵의 해가 창문에 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빛나는 모습이 아까 이 집에 올 때의 그 모습과 어쩌면 이리도 다르게 느껴질까? 묵지근하고 어딘지 서글픈, 여름날 저녁의 그 답답하고 울적한 기분이 도시 전체에 드리워 있는 것 같았다.

클래레가 떠났다고? 왜 그랬을까? 그녀 스스로 떠나다니? 도대체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게 무슨 뜻일까? 그는 처음에 오페라 극장으로 가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모레부터는 여름 휴가로 공연을 쉰다. 그리고 그 전 이틀 동안 클래레의 공연은 없다는 것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마차를 타고 패니 링아이저가 살고 있는 마리아힐프 거리 76번지로 달려갔다. 나이 먹은 요리사가 나와 문을 열어주며 말쑥하게 차려입은 방문객을 어딘지 수상쩍다는 듯이 살펴보았다.

그는 링아이저 부인을 찾았다. 그리고 물었다. "패니 양이 지금 집에 있습니까?" 그는 이제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왜 그러시는 건데요?" 링아이저 부인이 빠른 말투로 물었다. 남작은 자기 이름을 말해줬다.

"아, 그러시군요. 남작 님, 아무쪼록 안으로 들어오세요."

부인이 말했다.

남작은 현관에 서서 다시 한 번 물었다. "패니 양은 집에 없습니까?"

"자, 남작 님, 우선 안으로 잠깐 들어오세요."

라이젠보그는 별 수 없이 그녀 뒤를 따라갔다. 그는 천장이 낮고, 푸른 빌로드 빛 낡은 커튼이 드리워진, 가구들도 같은 색깔로 비치해 놓은 어두침침한 방에 들어갔다.

"그래요, 패니는 지금 집에 없답니다. 헬 양이 그 애를 휴가에 데리고 떠났습니다."

"어디로 간 겁니까?" 남작은 물었다. 그는 피아노 위 금박 액자에 담긴 클래레의 사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딘지는 저도 모릅니다" 링아이저 부인이 대답했다.

"아침 여덟 시에 헬 양이 직접 찾아와서 저에게 패니와 함께 가게 해달라고 그러더군요. 글쎄, 하도 간절하게 부탁을 하는 바람에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더군요."





"어디로 간 건지 모르십니까? 말씀해주세요." 라이젠보그는 절박하게 다시 물었다.

"그건 저도 말씀드릴 수 없어요. 패니는 헬 양이 어디 머물 것인지 결정하게 되면 곧 전보로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만... 아마 내일 아니면 모레쯤 뭔가 연락이 오겠지요."

"그렇군요..." 라이젠보그는 이렇게 말하고 피아노 앞에 놓인 조그만 등나무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그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러다 갑자기 일어서서 링아이저 부인에게 손을 내밀고 번거롭게 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 낡은 집의 어두운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는 매우 조심스러웠어. 정말 그렇지! 사실 그렇게까지 조심스러워 할 필요는 없는데... 내가 추근거리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을 텐데...

"어디로 모실까요, 남작 님?" 마부가 물었다. 그제서야 그는 자기가 지붕 없는 마차에 올라앉아 한동안 멍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퍼뜩 깨달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영감을 좇아 그는 "브리스톨 호텔(켈트너링 구역의 고급 호텔)로 가 주게"라고 대답했다.

지그루트 외르제는 아직 출발하기 전이었다. 그는 남작을 방으로 올라오도록 청했다. 그는 남작을 기쁘게 맞아 비엔나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을 자기와 함께 보내달라고 청했다. 라이젠보그는 지그루트가 여지껏 비엔나에 머물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웠지만 아무튼 그의 반가워하는 태도가 눈물이 나올 정도로 고마웠다.

지그루트는 곧 클래레 얘기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그는 라이젠보그에게 클래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몽땅 다 얘기해달라고 사정했다. 남작이 클래레의 가장 오래되고 좋은 친구라는 사실을 자기는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라이젠보그는 여행용 트렁크 위에 걸터앉아 클래레의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자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기사로서의 품위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얘기만 빼놓고, 이 가수에게 거의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지그루트는 그 얘기를 들으며 황홀해하는 것 같았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지그루트는 오늘 저녁에 당장 함께 비엔나를 떠나 몰데에 있는 자기 집으로 가자고 권유했다. 남작은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형편상 오늘 당장 떠날 수는 없다고 거절하고, 이번 여름 안으로 한 번 방문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역까지 함께 마차를 타고 갔다.

"나를 미치광이라고 여기실지 모르지만... 한 번만 더 그녀 창문 곁을 지나가고 싶군요." 지그루트는 말했다. 라이젠보그는 곁눈질로 그를 훔쳐보았다. 이게 혹시 나를 속이려는 수작 아닐까? 아니면 정말 이 가수 녀석이 이 일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일까? 클래레의 집에 도착하자 지그루트는 닫혀 있는 창문을 향해 키스를 보냈다. 이어 그는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제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라이젠보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돌아오면, 그렇게 전하리다."

지그루트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미 여기를 떠나 어디론가 갔습니다." 라이젠보그는 덧붙였다.

"오늘 아침에 여행을 떠났어요. 인사도 없이... 그녀는 늘 그런 식이랍니다." 하지만 이것은 남작의 거짓말이었다.

"여행을 떠났군요..." 지그루트는 이렇게 되풀이하더니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기차가 출발하려고 하자 두 사람은 오랜 친구처럼 다정하게 포옹했다.

남작은 그날 밤 침대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어릴 때 이후 아직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클래레와 함께 했던 그 쾌락의 한 시간이 어두운 전율처럼 그를 감쌌다. 어젯밤 클래레의 눈이 마치 미친 것처럼 반짝이던 것이 떠올랐다.

이제야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너무 서둘렀던 것이다. 그녀의 부름에 너무 섣불리, 일찍 응한 것이다... 베덴브루크 대공의 망령이 아직 그녀를 지배하고 있다. 클래레를 소유하는 바람에 이제 영원히 그녀를 잃게 되었다고 라이젠보그는 생각했다.

그 후 며칠 동안 남작은 낮과 밤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비엔나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지금까지 그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 모든 일 - 신문 읽기, 카드 놀이, 승마... 이 모든 것에 그는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그는 자신의 생활 전체가 오직 클래레에 위해 존재한다는 것, 심지어 다른 여인들과의 정사조차도 실은 그녀에 대한 열정의 광채 안에서 명맥을 유지해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잿빛 먼지가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그와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뭔가 감추려는 듯 목소리를 더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를 이상한 눈초리로, 살피는 것처럼 쳐다보는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는 느닷없이 역으로 나가 아무 생각 없이 이슈르(오스트리아의 온천 휴양지로 프란쯔 요셉 황제의 여름 궁정이 있다)로 가는 차표를 샀다.

거기서 그는 아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별 뜻 없이 그에게 클래레의 소식을 물었다. 그러나 그는 그 질문에 대해 신경질적이고 무례하게 응수하는 바람에, 별 상관도 어떤 신사와 결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전혀 흥분도 하지 않은 상태로 결투 장소에 나갔고, 총알이 귓전을 휭 하고 스쳐 지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허공에다 총을 쏘았다. 결투 후 30분만에 그는 이슈르를 떠났다.

그는 티롤, 엥가딘, 베르너 고원 그리고 제네바 호반 등을 여행했다. 보트를 젓기도 하고, 산길을 걷고, 가파른 산봉우리를 기어올랐다. 한 번은 알프스 산중의 오두막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제는 뭘 했고, 또 내일은 뭘 할지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느 날 그는 비엔나를 거쳐온 전보를 한 통 받았다. 그는 열에 들뜬 것 같은 손길로 그 전보를 펼쳤다. 전보에는 '만일 당신이 내 친구라면, 이 연락을 받은 즉시 저에게 와 주십시오. 저는 지금 단 한 사람이라도 친구가 필요합니다. 지그루트 외르제'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이 전보 내용이 틀림없이 클래레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허둥지둥 짐을 꾸려, 가장 빠른 교통편으로 머무르고 있던 아익스를 떠났다. 그는 중간에 아무 데도 들르지 않고 뮌헨을 거쳐 함부르크로 갔고 거기서 슈타방거로 가는 배를 탔다. 그리고 어느 활짝 갠 여름날 저녁에 그는 몰데에 도착했다. 그 여행은 가도가도 끝이 없는 길처럼 느껴졌다. 눈길을 끄는 아름다운 경치 따위도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는 요즘 들어서 클래레의 노래나 얼굴조차도 더 이상 떠올릴 수 없었다. 비엔나를 떠난 것이 몇 년 전, 아니 몇십 년 전인 것 같았다. 그러나 하얀 플란넬 양복을 입고 하얀 사냥 모자를 쓴 지그루트가 바닷가에 서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마치 어제 저녁에 그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피곤했지만 그는 갑판에 서서 지그루트의 영접을 미소로 응답하고 여유 있는 태도로 배의 트랩을 걸어 내려갔다.

"제 요청에 응해주셔서 정말 너무 고맙습니다." 지그루트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간단히 덧붙였다. "전 이제 완전히 끝장났습니다..."

남작은 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지그루트는 무척 창백해 보이고, 관자놀이 근처의 머리카락 색이 유난히 옅어졌다. 팔에는 흐릿한 녹색 숄을 걸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라이젠보그는 굳은 미소를 띠며 이렇게 물었다.




"제 말씀 좀 들어주십시오." 지그루트 외르제가 말했다. 남작은 지그루트의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폭이 좁고 작은 마차를 타고 푸른 바닷가를 따라 이어진 아름다운 오솔길을 달려갔다.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었다. 라이젠보그는 감히 나서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의 눈길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파도의 숫자를 세어보고 싶은 그런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것은 덧없고 이상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들이 위에서 천천히 방울지어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 생각의 끝은 클래레 헬이라는 이름이었다. 그런 이름의 여가수가 이 세상에 분명 있으며, 세상 어디선가 배회하고 있으리라는 그런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별로 대수로운 것도 아니다... 마침내 마차가 덜커덕 흔들리더니 온통 짙은 초록색에 싸여 있는 아담한 하얀 집 앞에 멈춰 섰다. 그들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베란다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얼굴 표정이 엄숙한 하인 한 사람이 시중을 들었다. 이 하인이 잔에 포도주를 부을 때에는 마치 위협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투명한 북유럽의 밤 하늘은 끝간데 모르게 한없이 고요했다.

"자, 그런데요?" 라이젠보그는 마치 둑이라도 터진 것처럼 초조한 생각이 밀려들었다.

"전, 이제 끝장이 났습니다." 지그르트는 멍한 시선을 앞으로 향하며 이렇게 말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시오?" 라이젠보그는 억양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 제가 어떻게 해드리면 좋겠습니까?" 그는 기계적으로 덧붙였다.

"그럴 일도 별로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그르트는 테이블 보, 난간, 정원, 창살, 길거리, 바다 너머 저 멀리로 시선을 던졌다. 라이젠보그는 마음이 굳어진 채 여러 가지 생각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클래레가 죽기라도 했나? 지그루트가 그녀를 죽인 것일까? ...그래서 바다에 던졌을까? 아니면 지그루트가 죽었단 말인가? 이런 바보 같으니... 그럴 순 없지... 이 친구는 지금 내 눈앞에 앉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않는 거야?

그리고 갑자기 어떤 엄청난 불안감에 사로잡혀 라이젠보그는 말을 내뱉었다. "클래레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가수는 천천히 남작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의 약간 뚱뚱한 얼굴이 안으로부터 빛을 내기 시작하고, 이상한 웃음을 띤 것 같았다. 만약 그게 그의 얼굴에 어른거리는 달빛이 아니라면 말이다. 지그루트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고, 발을 테이블 아래로 길게 뻗고 있었다. 남작은 그 순간 자기와 함께 앉아 있는 이 눈빛이 흐릿한 사나이가 세상에서 두 번 다시 찾아보기 힘든 광대처럼 느껴졌다.

녹색 숄이 베란다 난간에 걸려 있었다. 순간 남작에게는 그것이 무척 오래 전부터 친숙한 물건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우스꽝스러운 물건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혹시 난 지금 꿈을 꾸는 게 아닐까? 나는 지금 몰데에 와 있다... 정말 희한한 일이다... 내가 맑은 정신이었다면 이 가수 녀석에게 이렇게 말했을 텐데... '이봐, 무슨 일이야? 어이 광대,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하고 말이다...

그는 불쑥 아까 했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아까보다 훨씬 조용하고 침착하게 되풀이해 물었다. "클래레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가수는 몇 번씩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클래레가 문제지요... 당신은 정말 내 친구 맞지요?"

라이젠보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딘지 오싹하는 기분이었다. 미지근한 바람이 바다에서 불어왔다. "난 당신의 친구요. 나에게는 딱딱하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습니까?"

"남작, 그 날 밤 일을 기억하시겠지요? 우리가 작별 인사를 주고받던 그 날 밤 말입니다. 브리스톨 호텔에서 같이 저녁을 먹고 역에까지 배웅을 나와 주셨지요..." 라이젠보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내가 탔던 바로 그 기차로 클래레 헬이 비엔나를 떠난 것은 아마 꿈에도 무르셨을 겁니다..."

라이젠보그는 머리를 무겁게 가슴 쪽으로 숙였다.

"나 역시 당신이나 마찬가지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지그루트는 말을 이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는 역에 도착해서 비로소 클래레를 보았습니다. 그녀는 패니 링아이저와 함께 식당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더군요. 당시 상황이나 그녀의 거동을 보고 나는 그녀를 만난 것이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계속하시오." 남작은 말하며 약간씩 흔들리는 푸른 숄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나중에 그녀는 그게 우연이 아니었다고 내게 고백하더군요... 그날 아침부터 우리는 쭉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클래레, 패니 그리고 저 말입니다. 오스트리아에는 기가 막힌 호수가 많지요... 우리는 그런 호반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사람들과 떨어진, 물과 숲 사이 작고 유쾌한 집을 장만했습니다. 우리는 무척 행복했지요."

지그르트는 환장할 정도로 느릿느릿 말했다. 이 자식이 왜 날 이곳으로 불렀을까? 라이젠보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게서 뭘 원하는 거야? 그녀가 저자한테 고백했을까? 난 무엇 때문에 여기 이 몰데의 베란다까지 와서 저 광대 자식과 함께 앉아 있지? 왜 저 자식은 날 저렇게 가만히 쳐다보는 거야? 이건 모두 꿈이 아닐까? 나는 어쩌면 지금 클래레의 품에서 쉬고 있는 것 아닐까? 결국 그날 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부릅떴다.

"저의 원수를 갚아주시겠습니까?" 지그루트는 불쑥 이렇게 물었다.

"원수를 갚아요? 아니... 무슨 얘깁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남작은 이렇게 되물으면서 자신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나를 파멸시켰습니다... 난 이제 끝장이 났습니다."

"하여간 이야기를 해보시오." 라이젠보그는 딱딱하고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패니 링아이저 양도 함께 있었습니다." 지그루트는 계속했다. "그 아가씨는 좋은 사람일 겁니다. 그렇죠?"

"그럴 겁니다..." 남작이 대답했다. 그리고 갑자기 그는 그 푸른 빌로드 가구와 싸구려 커튼이 걸린 어두컴컴한 방에서 패니의 어머니와 함께 얘기했던 것이 몇 백 년 전의 일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그 아가씨는 바보예요..." 지그루트가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남작은 대답했다.

"그래요... 그 아가씨는 우리들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어요..." 그리고 나서 그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계속하시오." 라이젠보그는 이렇게 말하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클래레는 아직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지그루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녀는 항상 해가 높이 떠오를 때까지 잠을 잤지요. 난 숲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때 갑자기 패니가 나를 뒤쫓아오더군요. 그리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외르제 씨, 늦기 전에 어서 떠나세요. 당신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태에요. 당장 여길 떠나세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 이상은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더군요.

하지만 나는 그녀를 다그쳐서 결국 그녀가 말하는, 나에게 닥쳐올 위험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아, 그녀는 그때까지도 아직 나를 구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나에게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난간에 걸린 초록색 숄이 바람 때문에 돛처럼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그 바람에 테이블 위 램프 불마저 조금씩 흔들거렸다.

"그래. 패니 양이 무슨 얘기를 한 겁니까?" 라이젠보그는 엄숙하게 물었다.

"기억하십니까?" 지그루트가 물었다. "우리가 클래레의 집에 손님으로 초대되어 갔었던 그날 저녁 말입니다."

"그 날 아침 클래레는 패니 양과 함께 대공의 묘소에 갔습니다. 그리고 대공의 무덤 앞에서 클래레는 이 여자 친구에게 아주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소름 끼치는 이야기라구요?" 남작은 몸이 떨려왔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대공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계시겠죠? 대공은 말에서 떨어진 뒤에도 몇 시간 더 살아 있었습니다."

"그건 알고 있소."

"그 곁에는 클래레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랬지요."

"대공은 클래레 외에는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죽어가면서 그녀에게 저주를 내렸습니다."

"저주라구요?"

"저주 말입니다! 대공은 말했습니다. '클래레, 나를 잊지 말아 줘. 당신이 날 잊는다면, 난 무덤 속에서도 결코 편안하지 못할 거야.' 그러자 클래레는 '난 잊지 않을 거예요'라고 대답했어요. '날 잊지 않는다고 맹세할 수 있어?' '맹세할게요.' '클래레, 난 당신을 사랑해... 하지만 난 이제 죽을 수밖에 없어...'"

"그건 누구 얘기요?" 남작은 소리를 질렀다.

"내가 말하는 겁니다." 지그루트는 말했다. "그런데 난, 이걸 패니 양에게 들었고, 패니는 클래레에게 들었어요... 그리고 클래레는 대공으로부터 들은 겁니다. 내 말 이해하시겠지요?"

라이젠보그는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치 죽은 대공의 목소리가 세 번이나 겹겹으로 닫힌 관 안에서 새어나와 밤하늘로 울려 퍼지는 것을 듣는 느낌이었다. 지그루트는 제 입으로 대공이 한 말을 옮겼다.

"클래레, 난 당신을 사랑해... 하지만 난 죽을 수밖에 없어... 당신이 이렇게 젊은데... 나는 죽어야 하다니... 그럼 다른 녀석이 나를 대신하겠지. 그렇게 되리라는 걸 난 알아... 다른 녀석이 너를 품에 안고 너와 즐기겠지... 그렇게 할 수는 없어... 그건 허락할 수 없지... 그 자식이 그렇게 못하게 하겠어... 난 그놈을 저주할 거야... 클래레, 듣고 있어? 그놈을 난 저주한단 말이야!

내 뒤에 이 입술에 키스하고, 이 몸을 껴안은 첫번째 남자는 지옥에 떨어지고 말 거야! 클래레, 신은 죽어가는 자의 저주를 들어준다고 하더군. 조심하라구... 그 자식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걸... 그 자식은 지옥으로 떨어져, 미치광이가 되는 거야! 참혹하게 죽는 거야! 화가 있으라! 화가 있으라! 화가 있으라!"

입으로 죽은 대공의 목소리를 울려내던 지그루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크고 뚱뚱한 몸을 하얀 플란넬 양복으로 감싸고 서서 맑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록색 숄이 난간에서 정원으로 떨어졌다. 남작은 무섭게 얼어붙었다. 몸 전체가 굳어오는 것 같았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저 입만 크게 벌릴 뿐이었다... 이 순간 그는 클래레를 처음 보았던 성악교수 아이젠슈타인의 작은 홀에 있었다.

무대에는 한 광대가 서서 울부짖고 있었다. "대공은 이런 저주를 토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들어보세요. 최초로 그녀의 품에 안겼던 그 불행한 자, 그 저주를 실현시킬 그 불쌍한 인간, 그 사람이 바로 납니다! 바로 나예요! 나라구요!"

이 순간 무대는 커다랗게 우지끈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려, 라이젠보그 눈앞에서 바다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사실은 남작이 마치 꼭둑각시 인형처럼 힘없이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진 것이었다.

지그루트는 튀어 오르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하인 두 사람이 달려와 정신을 잃은 남작을 들어올려 테이블 옆 긴 등받이 의자에 눕혔다. 한 사람은 의사를 부르러 달려나갔고, 다른 한 사람은 물과 식초를 가져왔다. 지그루트는 남작의 이마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러나 남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의사가 와서 진찰을 했다. 진찰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의사가 말했다. "이 분은 죽었습니다."

지그루트 외르제는 마음이 무척 흔들려, 의사에게 필요한 조치를 해달라고 부탁하고는 테라스를 빠져나왔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응접실을 지나 위층으로 올라가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불을 켠 다음 그는 다급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클래레, 난 지체없이 몰데로 왔소. 이곳에 당신의 전보가 와 있더군... 솔직히 고백하자면 난 당신 말을 믿지 않았었다오. 그저 당신이 거짓말로 나를 안심시키려 한다고 생각했지. 날 용서하오. 이제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겠소. 라이젠보그 남작이 여기 왔었다오. 실은 내가 부른 거요.

하지만 난 그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소. 명예를 중시하는 남자로서 그는 나에게 거짓말을 했을 테니까... 나에겐 기발한 생각이 있었어. 남작에게 대공의 저주 이야기를 전해주었던 거야. 그 효과는 정말 놀라울 정도였지. 남작은 의자 뒤로 넘어져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오.'

지그루트는 손을 멈췄다. 그리고 뭔가 열심히 대단히 진지하고 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그는 방 한가운데 우뚝 서서 목소리를 다듬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약간 기어들어가는 것 같은, 어설픈 목소리였다. 그러나 점차 소리가 맑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높고 화려하게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나중에는 그 노래 소리가 마치 파도에 부딪쳐 울리듯이 격렬하게 터져 나왔다. 안도의 미소가 그의 얼굴에 흐르고 있었다. 그는 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는 다시 책상으로 다가가 그의 전보에 덧붙였다. '너무나 사랑하는 클래레! 용서해주오! 모든 게 다시 원래처럼 좋아졌소. 사흘 안에 당신 곁에 도착할 수 있을 거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