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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쇼세끼
 

 
[소 개]

동화적인 상상력이라고나 해야 할까. 20세기 초반(1908년)에 쓰여진 작품이란 것을 고려하면 시대를 뛰어넘는 초현실주의적 감각과 기법이 놀랍다. 프로이드식의 무의식에 대한 접근이 문학에서 그렇게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대작이 주는 감동과는 또 다른 영감을 두고두고 공급해주는 명품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작가 소개]

나쓰메 쇼세끼(夏目漱石, 1867-1916) : 일본의 소설가. 도쿄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첫 작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성공을 거두자 전업작가로 나서 <도련님> <마음> <산시로> 등의 작품을 연달아 발표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갖고 독자층을 넓혀갈 것으로 기대되는, 몇 안 되는 일본 작가의 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런 꿈을 꾸었다.

팔장을 끼고 베갯머리에 앉아 있노라니, 똑바로 누워있던 여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이제 죽어요" 하고 말한다. 여자는 긴 머리카락을 베개 위에 깔고, 윤곽이 부드러운 갸름한 얼굴을 그 안에 누이고 있다. 하얀 뺨 밑으로 따스한 혈색이 적당히 비쳐 보이고, 입술 빛깔은 빨갛다. 아무리 봐도 죽을 사람 같지는 않다. 하지만 여자는 조용한 소리로 "이제 죽어요" 하고 분명히 말했다. 나도 '이젠 분명히 죽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래, 벌써 죽는 거야?" 하고 위에서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물어보았다. "죽고말구요" 하고 여자는 말하면서 눈을 번쩍 크게 떴다. 커다랗고 젖은 눈이었다. 긴 속눈썹으로 싸인 그 눈 속은 온통 새까맸다. 그 새까만 눈동자 깊숙한 곳에, 내 모습이 뚜렷이 떠 있다.

나는 투명하리만치 깊어 보이는 그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이런데도 죽는 걸까 싶었다. 그래서 다정하게 베개 옆으로 입을 가까이 갖다 대고 "죽지는 않겠지? 괜찮은 거지?" 하고 안타깝게 물었다. 그러자 여자는 졸린 듯 검은 눈을 크게 뜬 채, 여전히 조용한 목소리로, "그래도 죽는걸요, 어쩔 수 없어요" 하고 말했다.

"그럼, 내 얼굴이 보여?" 하고 다급하게 묻자, "보이냐구요? 보세요, 거기 비치고 있잖아요." 하며 생긋 웃어 보였다. 나는 잠자코 머리맡에서 얼굴을 떼었다. 팔장을 끼며 '꼭 죽어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잠시 후에 여자가 또 이렇게 말했다.

"죽거들랑 묻어 주세요. 커다란 진주조개로 구덩이를 파구요.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진 별 조각을 무덤의 표지로 놓으세요. 그리고 무덤 옆에서 기다려 주세요. 또 만나러 올 테니까요."

나는 언제 만나러 오느냐고 물었다.

"해가 뜨지요, 그리고 해가 지지요. 그리고 또 뜨지요, 그러고는 또 지지요... 붉은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떨어져 가는 동안, ... 당신, 기다릴 수 있겠어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조용한 목소리를 높이더니,

"백 년만 기다려 주세요" 하고 뭔가 결심한 듯 말했다.

"백 년만 내 무덤 옆에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꼭 만나러 올 테니까요."

나는 그저 기다리고 있겠노라고 말했다. 검은 눈동자 속에 또렷이 보였던 내 모습이 부옇게 흐려져기 시작했다. 잔잔한 물에 파문이 일어 물 위에 비치던 그림자를 흐트러뜨리듯, 물이 흘러내리는가 했더니 여자의 눈이 깜박 감겼다. 긴 속눈썹 사이로 눈물이 뺨을 흘러내렸다. 여자는 어느 새 죽어 있었다.

나는 정원으로 내려가, 진주조개로 구멍을 팠다. 진주조개는 커다랗고 모서리가 날카롭고 반들반들하게 닳은 조개였다. 흙을 파헤칠 때마다, 조개 껍질에 달빛이 비쳐 반짝거렸다. 축축한 흙 냄새도 났다. 얼마 동안 파내자 구멍이 생겼다. 여자를 그 안에 눕혔다. 그리고 부드러운 흙을 위에서 사르르 뿌렸다. 흙을 뿌릴 때마다 진주조개 껍질 뒤에 달빛이 비쳤다.

그리고 떨어진 별 조각을 주워 와, 흙 위에 살짝 올려놓았다. 별 조각은 동그랬다. 오랫동안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동안 모서리가 닳아 반들반들해진 것 같았다. 가슴에 안아올려 흙 위에 놓는 동안, 내 가슴과 손이 조금 따뜻해졌다.

나는 이끼 위에 앉았다. 이제부터 백 년 동안 이렇게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팔장을 낀 채 둥근 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여자가 말한 대로 해가 동쪽에서 솟아올랐다. 커다랗고 붉은 해였다. 그리고 또 여자가 말한 대로 얼마 후 서쪽으로 떨어져 갔다. 붉은 빛깔 그대로 휙 떨어져 갔다. "하나" 하고 나는 세었다.

얼마 후 다시 붉은 해가 불쑥 솟아올랐다. 그리고 잠잠히 서쪽으로 떨어져 버렸다. "둘" 하고 또 세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세어 가는 동안, 나는 붉은 해를 몇 개나 봤는지 모른다. 세어도 세어도 다 셀 수 없을 만큼 붉은 해가 머리 위를 건너 지나갔다. 그래도 아직 백 년은 되지 않았다. 나중에는 이끼가 낀 둥근 돌을 바라보며, 나는 여자한테 속은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때 돌 밑에서 내 쪽을 향해 비스듬히 파란 줄기가 뻗어왔다. 눈앞에서 순식간에 자라더니, 바로 가슴 언저리까지 와서 멈췄다. 그리고 길게 뻗어 늘씬하게 흔들리는 줄기 끝에서 갸웃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가늘고 긴 한 송이 꽃봉오리가 방긋이 꽃잎을 열었다. 새하얀 백합이 코끝에서, 뼈 속에 스며들 만큼 진한 향기를 풍겼다. 그때 아득히 먼 위에서 툭 하고 이슬 방울이 떨어져, 꽃은 그 무게에 흔들렸다. 나는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 차가운 이슬이 맺힌 하얀 꽃잎에 입을 맞추었다. 백합꽃에서 얼굴을 떼면서 문득 먼 하늘을 바라보니, 새벽 별이 단 하나 깜박이고 있었다.

'벌써 백 년이 된 거였구나.' 그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런 꿈을 꾸었다.

주지승의 방을 물러나와 복도를 지나 내 방으로 돌아오자, 등잔불이 희미하게 켜져 있다. 방석에 한쪽 무릎을 대고 심지를 돋우자, 꽃봉오리 같은 등잔 기름이 붉게 칠한 받침대 위에 뚝 떨어졌다. 동시에 방이 환하게 밝아졌다.

장지문의 그림은 부송(蕪村, 에도시대의 시인이자 화가)이 그린 것이다. 검은 버드나무가 짙고 흐리게, 또 멀고 가깝게 그려져 있고, 추워 보이는 어부가 삿갓을 비스듬히 쓰고서 제방 위를 걸어가고 있다. 도꼬노마(방의 상석에 바닥을 한 단 높게 만들어 족자나 꽃을 장식하는 곳)에는 해중문수(海中文殊, 사자를 탄 문수보살이 시종을 거느린 채 구름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모습을 그린 불교화) 족자가 걸려 있다. 어두운 구석에는 타다 남은 향냄새가 아직도 풍기고 있다. 넓은 절간이 온통 고요하기만 하고 인기척이 없다. 검은 천장에 비치는 등잔불의 둥근 그림자가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릎을 세운 채, 왼손으로 방석을 들추고 오른손을 넣어 보니, 생각한 그 자리에 제대로 있었다. 안심하고, 방석을 원래대로 해 놓고 그 위에 털썩 앉았다.

"너는 사무라이다. 사무라이라면 해탈하지 못할 리 없을 테지" 하고 주지승이 말했다. "그렇게 언제까지고 깨치지 못하는 걸 보면 사무라이가 아닌 게로구나" 하고 말했다. 인간 쓰레기라고 말했다. "응, 화가 났군" 하며 웃었다. "분하면 해탈한 증거를 갖고 오라"며 고개를 획 돌리며 돌아앉았다. 괘씸한 땡초 같으니.

커다란 옆방에 놓여 있는 시계가 다음 시각을 알릴 때까지는, 반드시 해탈해서 보여주마. 해탈한 다음, 오늘밤 또 입실(주지승한테 가서 선에 관한 문답을 하거나 질문을 하는 것)해야겠다. 그리고 주지승의 목과 해탈을 맞바꿔 주겠다. 해탈을 못 하면 주지승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 해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사무라이란 말이다.

만약 해탈하지 못하면 내 손으로 목숨을 끊겠다. 사무라이가 치욕을 당하고 살아 있을 수는 없다. 깨끗이 죽어 버리겠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내 손은 또 나도 모르게 방석 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붉은 칼집에 든 단도를 끄집어 냈다. 칼자루를 꼭 쥐고 붉은 칼집을 저쪽으로 밀어내자, 차가운 칼날 빛이 어두운 방안을 가르며 빛났다. 참담한 무언가가 손끝을 통해 슬슬 빠져나가는 것 같다. 그리고 빠져나가서는 모조리 칼 끝의 한 지점에 모여 살기를 가두어 놓고 있다. 나는 이 날카로운 칼날이 내 의지와 달리 바늘끝만큼 줄어들어서 한 자 길이 맨끝에서 하릴없이 뾰족해져 있는 것을 보며, 당장에라도 푹 찔러보고 싶어졌다. 온몸의 피가 오른손 팔목으로 흘러들어와, 쥐고 있는 칼자루가 끈적끈적하다. 입술이 떨렸다.

단도를 칼집에 다시 꽂고 오른쪽 옆에 쪽에 가까이 놓은 뒤, 똑바로 좌선의 자세를 취했다. 조주 선사가 무(無)라고 했다. '없다(無)'는 말이지. 도대체 뭐가 없다는 말이냐. 땡땡이 중놈 같으니, 하고 이를 갈았다.

어금니를 너무 악물었더니 코에서 더운 김이 거칠게 뿜어나온다. 관자놀이가 땅기며 아프다. 눈은 보통 때보다 두 배나 크게 뜨고 버텼다.

족자가 보인다. 등잔불이 보인다. 다다미가 보인다. 주지승의 벗겨진 대가리가 선명하게 보인다. 커다란 입을 찢어져라 옆으로 벌리고 조롱하는 목소리까지 들린다. 고약한 중놈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 모가지를 잘라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해탈하고야 말 테다. "무다, 무..." 하고 혀끝으로 되풀이 외었다.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데, 여전히 향냄새가 난다. 에끼 이놈의 냄새!

나는 별안간 주먹을 쥐고 내 머리를 세게 쥐어박았다. 그리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양쪽 겨드랑이에서 땀이 흐른다. 등이 막대기처럼 뻣뻣하다. 무릎 관절이 갑자기 아파온다. 무릎이 부서진들 무슨 대수랴 싶었다. 하지만 아프다. 고통스럽다. 무는 좀처럼 찾아와주지 않는다. 온다고 생각하면 금방 아파진다. 화가 난다. 가슴이 무너진다. 너무 분하다. 눈물이 줄줄 흐른다. 차라리 몸을 바위에 단숨에 부딪쳐, 뼈도 살도 박살을 내고 싶어진다.

그래도 꾹 참으며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참을 수 없으리만치 간절한 무언가를 가슴속에 담은 채 견디고 있었다. 그 간절한 것이 온몸의 근육을 밑에서부터 밀면서 땀구멍을 통해 밖으로 밖으로 빠져나오려 안달이다. 하지만 어디고 다 완전히 막혀 마치 출구가 없는 듯한, 완전히 참담한 상태였다.

그러는 사이에 머리가 멍해졌다. 등잔도 부송의 그림도 다다미도 선반도, 있으면서 없는 것처럼, 없으면서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는 전혀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망연히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별안간 옆방 시계가 땡 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번쩍 제 정신이 들었다. 오른손을 잽싸게 단도에 갖다 댔다. 시계가 두 번째 종을 땡 하고 울렸다.


 


이런 꿈을 꾸었다.

여섯 살짜리 아이를 업고 있다. 분명히 내 자식이다. 다만 이상하게도 어느 새 눈이 뭉그러져서 장님이 되어 있다. 네 눈이 언제 그렇게 되었느냐고 묻자, "뭐, 아주 옛날부터지" 하고 대답했다. 목소리는 아이 목소리가 틀림없지만, 말투는 마치 어른 같다. 게다가 나와 똑같이 맞먹는 말투다.

길 양쪽은 벼가 푸르게 자란 논이다. 길은 좁다. 해오라기 그림자가 이따금씩 어둠을 가른다.

"논두렁길로 들어섰군." 등뒤에서 말했다.

"어떻게 알지?" 얼굴을 뒤로 돌려 묻자,

"해오라기가 울지 않나."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해오라기가 과연 두어 번 울었다.

나는 내 자식이지만 조금 무서워졌다. 이런 녀석을 업고 있다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어디 내다버릴 곳은 없을까 하고 맞은편을 바라보니, 어둠 속에 커다란 숲이 보였다. '저기가 좋겠다' 하고 생각하자마자, 등뒤에서,

"흐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 웃어?"

아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 무거워?"하고 물었다.

"무겁지 않아."하고 대답하자,

"곧 무거워질 거야." 하고 말했다.

나는 잠자코 숲을 향해 걸어갔다. 논 가운데 길이 구불구불 불규칙하게 이어져, 생각대로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지 않는다. 얼마쯤 가다 보니, 두 갈래 길이 나왔다. 나는 그 갈림길에 서서 잠깐 쉬었다.

"돌이 서 있을 텐데." 하고 아이가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방 여덟 치 되는 네모난 돌이 허리 정도 높이로 서 있었다. 그 돌에는 왼쪽 히가쿠보(日窪), 오른쪽 홋타하라(堀田原)라고 새겨져 있다. 어둠 속에서도 도룡뇽의 배 같은 색깔의 붉은 글자가 또렷이 보였다.

"왼쪽이 좋겠지." 아이가 명령했다. 왼쪽을 보니 아까 보이던 그 숲이 하늘로부터 어두운 그림자를 우리 머리 위로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잠깐 망설였다.

"망설일 것 없어." 아이가 또 말했다. 나는 할 수 없이 숲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속으로는, '장님이 용케도 모르는 것이 없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외줄기 길을 걸어 숲 쪽으로 다가가는데, 등뒤에서 "아무래도 장님은 너무 불편해서 곤란해." 하고 말했다.

"그래도 업어 주니까 괜찮지 않으냐."

"업혀서 미안하기 하지만,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지 정말 곤란해. 부모들까지 그러니 말이야."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다. 빨리 숲으로 가서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걸음을 서둘렀다.

"조금만 더 가면 알게 될거야... 꼭 이런 밤이었지." 등뒤에서 아이가 혼자말처럼 중얼댄다.

"뭐가?"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뭐긴 뭐야, 다 알고 있으면서..." 하고 아이는 조롱하듯 대답했다. 그러자 어쩐지 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정확히는 모르겠다. 단지 이런 밤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조금만 더 가면 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걸 알게 되면 큰일이니, 알기 전에 빨리 버려 버리고 안심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아까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길은 더욱 어두워진다. 거의 정신이 나간 것처럼 걷는다. 다만, 등에 조그마한 아이가 달라붙어, 그 아이가 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샅샅이 비추면서 사소한 사실 하나도 낱낱이 놓치지 않는 거울처럼 번득이고 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내 자식이다. 그리고 장님이다. 나는 견딜 수 없었다.

"여기야, 여기. 바로 여기 그 삼나무 그루터기야."

빗속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뚜렷이 들렸다. 나도 모르게 멈춰 섰다. 어느새 숲 한가운데 들어와 있다. 아이의 말대로 한 칸 정도 저만큼 앞에 있는 검은 그림자는 분명히 삼나무처럼 보였다.

"아버지, 그 삼나무 그루터기 있는 곳이었지?"

"응, 그렇지." 나도 모르게 얼떨결에 대답했다.

"문화 5년(에도 시대 연호. 1808년) 진년(辰年)이었지?"

그러고 보니 정말 문화 5년 진년이었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네가 나를 죽인 것은 지금부터 꼭 백 년 전이었지?"

이 말을 듣는 순간,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문화 5년 진년 이렇게 캄캄한 밤에, 이 삼나무 밑에서 한 장님을 죽였던 기억이 불현듯 머리속에 떠올랐다. 내가 살인자였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 등에 업힌 아이가 갑자기 돌부처처럼 무거워졌다.






넓은 마당 한가운데 평상 같은 것이 있고, 그 주위에 작은 의자가 늘어서 있다. 평상은 검고 반질반질 윤이 났다. 한쪽 구석에는 네모난 상을 앞에 놓고 노인이 혼자 술을 마시고 있다. 안주는 고기 조림인 것 같다.

노인은 술기운이 올라 얼굴이 꽤 빨개져 있다. 얼굴 전체가 통통하게 윤이 흘러, 주름살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하얀 수염을 잔뜩 기르고 있기 때문에 나이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어린아이면서도, 이 할아버지의 나이가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뒤뜰 홈통에서 물을 길어 오던 안주인이, 앞치마로 손을 닦으면서,

"할아버지 올해 몇 살이세요?" 하고 물었다. 노인은 입에 가득 머금은 고기 조림을 꿀꺽 삼키고는,

"몇 살인지 잊어버렸소." 하고 딴청을 부렸다. 안주인은 물기를 닦은 손을 가느다란 허리띠 사이에 찔러 넣고, 옆에서 노인의 얼굴을 보며 서 있었다. 노인은 커다란 대접 같은 그릇으로 술을 쭉 들이키고는, 하얀 수염 사이로 푸우 하고 기다란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안주인이,

"할아버지 댁은 어디세요?" 하고 물었다. 노인은 숨을 기다랗게 쉬다 말고,

"배꼽 속이지." 하고 말했다. 안주인은 가느다란 허리띠 사이에 손을 꽂은 채,

"어디로 가시는 거에요?" 하고 또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또다시 대접 같은 커다란 그릇으로 더운 술을 쭈욱 들이키고는 아까처럼 숨을 푸우 하고 내쉬더니,

"저쪽으로 가지." 하고 말했다.

"곧장 가시는 거에요?" 하고 안주인이 물었을 때, 푸우 하고 내쉰 숨이 미닫이 문을 지나 버드나무 아래를 빠져, 곧장 냇물 쪽으로 흘러갔다.

노인이 밖으로 나갔다. 나도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노인의 허리에 조그마한 호리병이 매달려 있다. 네모난 상자가 어깨에서 겨드랑이 밑으로 매달려 있다. 연두색 바지와 소매 없는 연두색 저고리를 입고 있다. 버선만이 노랗다. 무슨 가죽으로 만든 신발 같았다.

노인은 곧장 버드나무 아래까지 갔다. 버드나무 아래에 아이들이 서너 명 있었다. 노인은 웃으며 허리춤에서 연두색 수건을 꺼냈다. 그 수건을 종이 노끈처럼 가느다랗게 꼬았다. 그리고 땅바닥에 놓았다. 그러고 나서 수건 주위에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마지막으로, 어깨에 맨 상자 속에서 놋쇠로 만든 엿장수 피리를 끄집어냈다.

"이제 그 수건이 뱀으로 변할 테니까 보고 있으렴, 보고 있으렴." 하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아이들은 열심히 수건을 보고 있었다. 나도 보고 있었다.

"보고 있으렴, 보고 있으렴, 어떻게 변하는지" 하고 말하면서 노인은 동그라미 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나는 수건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수건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노인은 닐리리 닐리리 피리를 불었다. 그리고 동그라미 위를 몇 번이나 돌았다. 짚신 발끝을 세워 발돋움하고 살금살금, 수건을 건드릴까 조심하는 듯 돌았다.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재미있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노인은 피리를 뚝 그쳤다. 그리고 어깨에 맨 상자를 열고, 수건을 손가락으로 살짝 집어서 상자에 던져 넣었다.

"이렇게 넣어 두면, 상자 속에서 뱀이 된다. 이제 금방 보여 주마. 금방 보여 주마." 하고 말하면서 노인은 곧장 걷기 시작했다. 버드나무 아래를 지나, 좁은 길을 곧장 내려갔다. 나는 뱀이 보고 싶어서, 좁은 길을 계속 따라갔다. 노인은 이따금 "금방 된다."라거나 "뱀이 된다." 하면서 걸어간다. 나중에는

"금방 된다, 뱀이 된다,
틀림없이 된다, 피리가 울린다"

하고 노래하며 마침내 냇가로 나왔다.

다리도 배도 없기 때문에, 여기서 쉬면서 상자 속의 뱀을 보여 주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노인은 첨벙첨벙 물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 무릎까지 차던 물이, 차차 허리에서 가슴까지 물에 잠겨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노인은,

"깊어진다, 밤이 된다,
곧장 된다"

하고 노래 부르며 계속 곧장 걸어갔다. 그리고는 수염도 얼굴도 머리도 두건도,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노인이 저쪽 냇가에 올라오면 뱀을 보여 주겠지 생각하며, 갈대가 서걱대는 곳에 혼자 서서,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끝내 기슭으로 올라오지 않았다.





이런 꿈을 꾸었다.

아마도 아주 오랜 옛날, 오히려 신화 시대에 더 가까운 태고적 이야기 같다. 나는 전쟁에서 운 나쁘게 패배해서, 포로가 되어 적장 앞에 끌려나가 있었다.

그 무렵 사람들은 모두 키가 컸다. 그리고 모두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가죽 허리띠를 매고, 그 허리띠에 막대기 같은 칼을 차고 있었다. 활은 굵은 등나무 줄기를 그대로 쓴 것 같았다. 옻칠도 하지 않았고 반드르르하게 광을 내지도 않았다. 아주 소박한 것이었다.

적장은 활의 한가운데를 오른손에 쥐고, 그 활을 풀 위에 꽂았다. 그리고는 엎어 놓은 술독 같은 것에 걸터앉아 있었다. 적장의 얼굴은, 코 위로 굵은 두 눈썹이 이어져 있다. 그 무렵에는 면도기 따위는 물론 없었다.

나는 포로였기 때문에 걸터앉을 수가 없다. 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발에는 커다란 짚신을 신고 있었다. 이 시대의 짚신은 목이 높았다. 일어서면 무릎까지 닿았다. 끝부분은 짚을 다 여미지 않고 조금 풀어 헤쳐서 술처럼 늘어뜨리고, 걸을 때 너울거리도록 해서 장식으로 삼고 있었다.

대장은 화톳불 빛으로 내 얼굴을 보더니 "죽겠느냐 살겠느냐?" 하고 물었다. 이것은 그 당시의 관습으로, 포로라면 누구에게나 일단 그렇게 묻는 것이다. 살겠다고 대답하면 항복한다는 뜻이고, 죽겠다고 말하면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이 된다. 나는 한마디, 죽겠다고 대답했다. 대장은 풀 위에 꽂아 두었던 활을 저쪽으로 내던지더니, 허리에 찬 막대기 같은 칼을 휙 뽑으려 했다.

그때, 바람에 쓸린 화톳불이 태울 듯이 옆으로 다가들었다. 나는 오른손을 단풍잎처럼 벌리고 손바닥을 적장을 향해 눈 위로 쳐들었다. 잠깐 기다리라는 신호다. 적장은 철컹 소리를 내며 굵은 칼을 칼집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 무렵에도 사랑은 존재했다. 나는 죽기 전에 한 번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적장은 날이 새고 첫닭이 울 때까지만 기다리겠노라고 말했다. 첫닭이 울 때까지 여자를 이곳으로 불러오지 않으면 안 된다. 첫닭이 울어도 여자가 오지 않으면 나는 만나보지 못하고 죽게 된다.

대장은 걸터앉은 채, 화톳불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커다란 짚신을 신고 발을 가부좌로 꼰 채, 풀 위에 앉아 여자를 기다린다. 밤은 점점 깊어 간다.

가끔씩 화톳불이 사그러드는 소리가 난다. 사그러들 때마다 불꽃이 스스로를 가누지 못하듯 적장 쪽으로 쏠린다. 적장의 눈이 새카만 눈썹 아래에서 빛난다. 그러면 누군가 와서 새 나무토막을 불 속에 던져넣고 간다. 그리고 나면 얼마 뒤 불꽃이 튀는 소리가 난다. 어둠을 밀어 낼 듯이 기운찬 소리다.

이때 여자는, 뒤뜰 졸참나무에 매어 놓은 백마를 끌어 냈다. 갈기를 서너 번 툭툭 쓰다듬고는 높다란 등에 제비처럼 가볍게 뛰어 올라탔다. 안장도 등자도 없는 말이다. 길고 흰 다리로 옆구리를 걷어차자, 말은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화톳불을 더 올려서, 먼데 하늘이 어렴풋이 밝아 보인다.

말은 이 밝은 곳을 향해 어둠 속을 날아온다. 코에서 불기둥 같은 두 줄기 콧김을 내뿜으며 달려온다. 그래도 여자는 가느다란 다리로 쉴 새 없이 말 옆구리를 걷어차고 있다. 말은 허공에 말발굽소리가 울릴 정도로 질풍같이 달린다. 여자의 머리칼은 어둠 속에서 바람에 나부껴 깃발처럼 뒤로 흩날린다. 그래도 아직 화톳불 있는 곳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때 캄캄한 길가에서 홀연히 꼬끼오 하는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몸을 하늘 쪽으로 젖히며, 두 손에 쥔 고삐를 힘껏 잡아당겼다. 말은 앞 발굽을 단단한 바위에 콱 찍어 박았다.

꼬끼오 하고 닭이 또 한 번 울었다.

여자는 앗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잡아당겼던 고삐를 갑자기 늦췄다. 말은 무릎을 꿇고 쓰러진다. 그리고 타고 있던 사람과 함께 곧장 앞으로 곤두박질쳤다. 바위 밑은 깊은 골짜기였다.

말발굽 자국은 아직도 바위 위에 남아 있다. 닭 우는 흉내를 낸 것은 심술궂은 마귀다. 이 말발굽 자국이 바위 위에 새겨져 있는 한, 마귀는 나의 원수인 것이다.





운케이(運慶, 가마쿠라 시대의 조각가)가 고꼬구지 절(護國寺)의 산문에서 인왕을 새기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산책 겸 가 보니, 나보다도 먼저 사람들이 잔뜩 모여서는 이러쿵저러쿵 한마디씩 하고 있었다.

산문에서 대여섯 칸쯤 떨어진 곳에 커다란 적송이 있는데, 그 적송 줄기가 비스듬히 산문의 지붕 기와를 가리며 먼 창공까지 뻗어 있다. 푸른 소나무와 붉게 칠한 산문의 빛깔이 서로 대조적이어서 무척 멋있어 보인다. 게다가 소나무의 위치가 좋다. 문 왼쪽 끝이 눈에 거슬리지 않게 비스듬히 위로 뻗어 올라가며 갈수록 폭이 넓어져 지붕까지 뻗어 있는 것이 어쩐지 고풍스럽다. 가마쿠라 시대(12세기 말부터 14세기 중반)인 것 같다.

그런데 구경하는 사람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죄다 메이지 시대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인력거꾼이 가장 많다. 손님을 기다리다가 심심풀이 삼아 서 있는 것에 틀림없다.

"엄청나게 크기도 하군." 하고 말한다.

"사람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힘들 거야." 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허어, 인왕이로군. 요새도 인왕을 만드나? 그렇구먼... 난 또 인왕은 전부 옛날 것만 있는 걸로 생각했지." 라고 말하는 남자도 있다.

"정말 힘이 세어 보이는군요. 뭐라더라, 옛날부터 뭐니뭐니 해도 인왕만큼 힘센 사람은 없다잖아요? 어쨌든 야마또 다께노미꼬또(日本武尊, 일본 고대 역사에서 일본 동부를 평정한 영웅)보다 더 세다구 그러지 않던가요." 하고 말을 걸어온 남자도 있다. 이 남자는 엉덩이가 보일 만큼 옷자락을 치켜서 걷어올리고, 모자도 쓰지 않고 있다. 어지간히 무식한 사람인 모양이다.

운케이는 구경꾼들의 평판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끌과 나무망치를 움직이고 있다.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다. 높은 발판에 올라서서, 인왕의 얼굴 부분을 열심히 파 나가고 있다.

운케이는 머리에 작은 두건 같은 것을 쓰고, 조복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옷의 넓은 소맷자락을 등뒤에서 묶어 놓았다. 그 모습이 아주 고풍스럽다. 떠들썩한 구경꾼들과는 전혀 조화가 되지 않는다. 나는 어째서 운케이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가 하고 생각했다. 정말 이상한 일도 있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서서 지켜 보았다.

그러나 운케이는 전혀 이상하거나 묘하다고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그저 열심히 조각에만 정신을 쏟고 있다. 고개를 쳐들고 이 모습을 바라보던 한 젊은 남자가 나를 돌아보더니,

"역시 운케이는 다르군요. 우리 같은 건 전혀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에요. 천하의 영웅은 오직 인왕과 나뿐이라는 태도에요. 정말 대단하군요." 하며 칭찬을 시작했다.

나는 이 말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흘낏 그 젊은 남자를 쳐다봤더니, 젊은 남자는 곧바로,

"저 끌과 망치 다루는 솜씨 좀 보십시오. 자유자재의 경지라고 해야겠지요."했다.

운케이는 그때 굵은 눈썹을 한 치 굵기 가로로 파내더니, 끌을 세로로 젖히자마자 위에서 비스듬히 망치로 내리쳤다. 단단한 나무가 단숨에 깎여, 두꺼운 나뭇조각이 망치 소리와 함께 튀어나왔다. 그러자 순식간에 콧구멍이 크게 벌어진 매부리코의 옆 모습이 드러났다. 끌을 다루는 그 솜씨가 전혀 거침이 없어 보였다.

"저렇게 아무렇게나 끌을 쓰는데도, 용케 눈썹이니 코가 마음 먹은 대로 만들어지는구만." 나는 너무 탄복해서 이렇게 혼자말처럼 말했다. 그러자 아까 그 젊은 남자가,

"아니죠, 끌로 저런 눈썹이나 코를 만드는 게 아니지요. 저런 눈썹이나 코가 나무 속에 원래 묻혀 있는 것을 끌과 망치로 긁어낼 뿐이죠. 마치 흙 속에 묻혀있는 돌을 파내는 거나 마찬가지니, 절대 실패할 리가 없어요." 하고 말했다.

나는 그때 비로소 조각이란 그런 건가 하고 생각했다. 정말 그렇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갑자기 나도 인왕을 만들어 보고 싶어졌다. 나는 구경을 그만두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도구 상자에서 끌과 망치 따위를 갖고 나와 뒤뜰로 가 보니, 며칠 전 폭풍으로 넘어진 떡갈나무를 장작으로 만들려고 톱으로 잘라놓은, 적당한 나무토막이 잔뜩 쌓여 있었다.

나는 그 가운데 가장 큰 놈을 골라서 신나게 파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왕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 다음 나무토막에서도 역시 운 나쁘게 파낼 수 없었다. 세 번째 것에도 인왕은 없었다. 나는 쌓아놓은 장작을 닥치는 대로 파 보았지만, 인왕은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결국 나는, 메이지 시대의 나무에는 결코 인왕이 파묻혀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운케이가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이유도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커다란 배를 타고 있다.

이 배가 밤낮 끊임없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파도를 헤치고 나아간다. 무시무시한 소리를 낸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다만 파도 밑에서 시뻘겋게 달군 부젓가락 같은 해가 솟아오른다. 태양은 높은 돛대 한가운데 와서 잠시 걸려 있다가, 어느 새 큰 배를 앞질러 가 버린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뻘겋게 달구어진 부젓가락처럼 치익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파도 밑으로 잠긴다. 그럴 때마다 푸른 파도가 멀리서 보랏빛으로 끓어오른다. 그러면 배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그 뒤를 따라간다. 하지만 결코 따라잡지는 못한다.

어느날 나는 뱃사람 하나를 붙들고 물어 보았다.

"이 배는 서쪽으로 갑니까?"

뱃사람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잠시 나를 보고 있더니, 이윽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되물었다.

"떨어지는 해를 뒤쫓아가고 있으니까요."

뱃사람은 껄걸 웃었다. 그러고는 저쪽으로 가 버렸다.

"서쪽으로 지는 해, 종착지는 동쪽이냐, 그게 정말이냐, 동쪽에서 뜨는 해, 고향은 서쪽이냐, 그것도 정말이냐. 몸은 물결 위, 키를 베개 삼아, 흐르네, 흘러가네." 하고 흥겨운 소리가 난다. 뱃머리에 가 보니, 뱃사람들이 잔뜩 모여 굵은 밧줄을 잡아당기고 있다.

나는 몹시 불안해졌다. 언제 육지에 오르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파도를 헤치고 가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물결은 굉장히 높다. 한없이 푸르게 보인다. 때로는 보라빛이 되었다. 다만 배가 움직이는 주위에는 항상 하얗게 거품이 일었다. 나는 몹시 불안했다. 이런 배를 타고 있느니 차라리 몸을 던져 죽어 버릴까 생각했다.

배에 탄 손님은 많았다. 대개 외국 사람 같았다. 하지만 모두들 갖가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늘이 흐려지고 배가 흔들릴 때, 한 여자가 난간에 기대 서서 자꾸만 울고 있었다. 눈물을 닦는 손수건 색깔이 하얗게 보였다. 하지만 옷은 사라사(새나 짐승, 꽃이나 나무 등 화려한 무늬의 옷감) 천으로 만든 양장이었다. 이 여자를 보고, 나 혼자만 슬픈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느 날 밤, 갑판으로 나가서 혼자 별을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어떤 외국 사람이 다가와서는 천문학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도무지 재미가 없어 죽을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천문학 같은 건 알 필요가 없었다.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그 외국인이 금우궁(金牛宮) 별자리에 있는 일곱 개의 별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리고 별도 바다도 모두 신이 만든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에게 신을 믿느냐고 물었다. 나는 하늘만 쳐다보며 잠자코 있었다.

어느 날 살롱에 들어가자, 화려한 옷을 입은 젊은 여자가 돌아앉아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그 옆에는 키가 크고 멋진 남자가 서서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 입이 아주 커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자기네 두 사람에 관한 일 외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배에 타고 있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점점 더 따분해졌다. 드디어 죽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어느 날 밤,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과감하게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발이 갑판을 떠나 배와 인연이 끊긴 그 순간, 갑자기 목숨이 아까워졌다. 안 뛰어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싫으나 좋으나 바닷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아주 높은 배여서, 몸은 배를 떠났지만 발은 좀처럼 물에 닿지 않는다. 하지만 붙잡을 것이 하나도 없어, 차츰 물에 가까워진다. 아무리 다리를 오무려 봐도 가까워진다. 물은 검은 빛깔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배는 여전히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지나가 버렸다. 나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배인지는 몰라도, 역시 타고 있는 것이 나았다고 비로소 깨달으면서, 하지만 그 깨달음을 이용하지도 못한 채 한없는 후회와 공포를 안고 검은 파도 쪽으로 조용히 떨어져 내렸다.



 

이발소 문에 들어서자, 흰 옷을 입고 모여 서 있던 서너 명의 사람이 일제히 "어서 오십시오" 하고 말했다.

한가운데 서서 둘러보니 네모난 방이다. 양쪽 벽에 창문이 나 있고, 나머지 두 벽에는 거울이 걸려 있다. 거울이 몇 개인가 세어보니, 모두 여섯 개였다.

나는 그 가운데 한 거울 앞으로 가서 앉았다. 의자에 엉덩이가 푹신하게 파묻힌다. 꽤나 편안하게 만들어진 의자다. 내 얼굴이 거울에 환하게 비쳤다. 얼굴 뒤로는 창이 보였다. 그리고 카운터 옆 부분이 비스듬히 보였다. 카운터에는 사람이 앉아 있지 않다. 창 밖의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윗모습이 잘 보였다.

쇼타로가 여자와 함께 지나간다. 언제 산 것인지, 쇼타로는 파나마 모자를 쓰고 있다. 여자는 도대체 언제 사귄 것일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두 사람이 다 무척 희희낙락한 얼굴 표정이다. 여자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려고 하는데 그만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두부 장수가 나팔을 불며 지나갔다. 나팔을 입에 대고 있어 뺨이 벌에 쏘인 것처럼 부어올라 보였다. 부어 있는 채 지나갔기 때문에, 무척 신경이 쓰인다. 평생 벌에 쏘인 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게이샤가 나타났다. 아직 화장을 안 한 모양이다. 높게 땋아올린 시마다 머리(주로 미혼 여성들이 기모노를 입을 때 하는 머리형)가 느슨해져, 어쩐지 머리가 부스스한 것 같다. 또 자다가 말고 나온 얼굴이다. 딱하리만치 얼굴색이 나쁘다. 그러면서 누군가와 "인사드립니다, 아무개입니다" 하고 인사를 나누고 있다. 그러나 상대방의 모습은 끝내 거울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흰 옷을 입은 커다란 사나이가 가위와 빗을 갖고 내 뒤로 다가와, 내 머리를 살펴본다. 나는 그리 많지도 않은 수염을 꼬면서, "어떻소, 잘 다듬을 수 있겠소?" 하고 물었다. 흰 옷을 입은 사나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에 든 호박색 빗으로 가볍게 내 머리를 두드렸다.

"글쎄, 머리는 어떻소, 잘 다듬어질 것 같아요?" 하고 나는 그 사나이에게 또 물었다. 흰 옷을 입은 남자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이, 찰칵찰칵 가위를 놀리기 시작했다.

나는 거울에 비치는 그림자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 싶어서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러나 검은 머리카락이 눈으로 날아오는 것이 무서워서, 가위 소리가 날 때마다 하는 수 없이 눈을 감아야 했다. 그러자 흰 옷을 입은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손님, 저 길에 있는 금붕어 장수를 보셨습니까?"

나는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흰 옷 입은 남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가위만 찰칵거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갑자기 커다란 목소리로 "위험해" 하고 소리쳤다. 흠칫 눈을 뜨자, 흰 옷을 입은 남자의 소매 밑으로 자전거 바퀴가 보였다. 인력거의 손잡이도 보였다. 그 순간, 흰 옷을 입은 남자가 두 손으로 내 머리를 꾹 눌러 잡고 옆으로 휙 돌렸다. 자전거와 인력거는 이제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가위 소리가 찰칵찰칵 난다.

잠시 후 흰 옷을 입은 남자는 내 옆으로 돌면서 귀밑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이제 눈 앞에서는 머리카락이 튀지 않아서 나는 안심하고 눈을 떴다. "찹쌀떡, 찹쌀떡, 찹쌀떡 사려어..." 하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온다. 일부러 작은 절굿공이를 절구에 넣어 장단을 맞추어 떡을 찧고 있다. 찹쌀떡 장수는 어릴 때 이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한 번 좀 보고 싶다. 그러나 거울에는 도무지 찹쌀떡 장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떡을 찧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나는 눈을 모아 거울 한구석을 들여다봤다. 그러자 카운터에 어느 새 여자가 한 사람 앉아 있다. 얼굴색이 좀 검고 눈썹이 짙은, 몸집이 커다란 여자다. 은행 머리(메이지 시대에 주로 중년 여성들이 기모노를 입을 때 하던 머리형의 하나)를 틀어올리고, 검은 공단 깃이 달린 홑겹 옷을 입고서 무릎을 세운 채 지폐를 세고 있다. 지폐는 십 엔짜리인 모양이다. 여자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얇은 입술을 꼭 다물고 열심히 소리를 내가며 지폐를 헤아리고 있다. 그 돈 세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그런데도 지폐는 언제까지 세어도 끝이 없는 것 같다. 무릎 위에 올려 놓은 것이 기껏 백 장 정도인데, 그 백 장이 언제까지나 그대로 백 장이다.

나는 멍하게 여자의 얼굴과 십엔 짜리 지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귀 옆에서 흰 옷을 입은 남자가 커다란 목소리로 "자 머리 감으세요." 하고 말했다. 마침 잘 되었다 싶어, 의자에서 일어서자마자 카운터 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카운터 안에는 여자도 돈다발도 보이지 않았다.

요금을 내고 밖으로 나오니, 문밖 왼쪽에 타원형 물단지가 다섯 개 놓여 있다. 그 안에 빨간 금붕어, 점박이 금붕어, 가느다란 금붕어, 둥그스럼한 금붕어가 잔뜩 들어 있었다. 금붕어 장수가 그 뒤에 있었다. 금붕어 장수는 턱을 괴고, 앞에 놓인 금붕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는다. 시끌벅적한 거리 모습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금붕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보고 있는 동안, 금붕어 장수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금방 전쟁이라도 터질 것 같다. 불 난 집에서 뛰쳐나온 말이 안장도 얹지 않고 밤낮으로 집 주위를 날뛰며 돌아다니고, 졸개들이 우왕좌왕하며 그 말들을 쫓아다니는 그런 분위기다. 그러면서도 집 안은 그저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

집에는 젊은 어머니와 세 살짜리 아이가 있다. 아버지는 어딘가에 가고 없다. 아버지가 어디론가 가던 날은, 달도 없는 한밤중이었다. 아버지는 이불 위에서 짚신을 신고 검은 두건을 쓰고, 뒷문으로 나갔다. 그때 어머니가 들고 있던 초롱불 빛이 어둠 속에 가늘고 길게 드리워, 울타리 앞에 있는 커다란 늙은 소나무를 비추었다.

아버지는 그 이후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세 살짜리 아이에게 "아빠는 어디 계셔?" 하고 매일 묻는다.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쯤 지나자 "저어기" 하고 대답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언제 오셔?" 하고 물어도 역시 "저어기" 그렇게 대답하곤 웃었다. 그러면 어머니도 같이 웃었다. 그리곤 "이제 곧 오신단다" 하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가르쳤다. 하지만 아이는 '이제 곧' 이란 말만을 기억했다. 가끔 "아빠는 어디 계셔?" 하고 물으면 "이제 곧" 이라고 대답할 때도 있었다.

밤이 되어 사방이 적막에 휩싸이면, 어머니는 허리띠를 고쳐 매고 상어 가죽 칼집에 든 단도를 허리띠에 꽂고, 가느다란 띠로 아이를 등에 들쳐 업고는 살짝 뒷문을 빠져나간다. 어머니는 항상 조리(엄지와 둘째 발가락을 끈에 끼우는, 일본식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아이는 자박자박 울리는 이 조리 소리를 들으며 어머니 등에서 잠이 들어버릴 때도 있었다.

흙담이 이어져 있는 큰 저택 옆을 서쪽으로 걸어 완만한 비탈길 끝까지 내려가면, 커다란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이 은행나무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돌아가면, 한 구획을 지나서 돌로 만든 도리이(신사 입구의 문)가 있다. 한쪽은 밭이고 또 다른 한쪽은 얼룩 조리대가 무성한 길이다. 이 길을 따라 걸어가, 도리이를 지나면 어두운 삼나무 숲이 나온다. 거기서 다시 스무 칸 정도 돌길을 따라 쭉 가면, 오래 된 배전(拜殿) 계단 밑으로 오게 된다.

빗물에 씻겨 색깔이 회색으로 바랜 시주함 위에 커다란 방울을 매단 끈이 걸려 있고, 낮에 보면 그 방울 옆에 하찌만구우(八幡宮)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여덟 팔 글자가, 비둘기 두 마리가 마주보는 것 같은 서체로 쓰여 있는 모양이 재미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현판이 걸려 있다. 대개 사무라이가 쏘아 맞힌 과녁에 금빛을 칠해, 쏜 사람의 이름과 함께 걸어 놓은 것이 많다. 가끔은 긴 칼을 간직해둔 것도 있다.

도리이를 지나면 삼나무 가지 끝에서 언제나 부엉이가 울고 있다. 그리고 짚으로 된 조리를 끄는 소리가 울린다. 그 소리가 배전 앞에서 그치면, 어머니는 우선 방울을 흔들어 소리를 내고, 곧바로 쭈그려 앉아 손뼉을 친다. 그러면 대개 부엉이가 울음을 뚝 그친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는 정신을 모아 열심으로 아버지가 평온무사하기를 빈다. 어머니는, 남편이 사무라이니까 활의 신 하찌만(八幡)을 모신 신사에 와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면 아마 들어 주실 거라고 믿는 것이다.

아이는 가끔 이 방울 소리에 깨어난다. 깨어나 주위를 보면 캄캄한 어둠이어서 갑자기 등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일이 있다. 그러면 어머니는 입 속으로 무어라고 빌면서 등을 흔들어 어르려고 한다. 어떨 때는 쉽게 울음을 그치기도 한다. 또 어떨 때는 점점 더 심하게 울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어머니는 쉽게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는다.

대강 남편의 안전을 빌고 나면, 이번에는 끈을 풀어 등에 업었던 아이를 조금씩 살그머니 앞으로 돌려서는 두 손으로 안고 배전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우리 아기 착하지, 조금만 기다려라" 하고는 자기 뺨을 아이의 뺨에다 비빈다. 띠를 길게 풀어서 아이를 묶어 놓고, 한쪽 끝을 배전 난간에 매어 놓는다. 그러고는 계단을 내려가 스무 칸 돌길을 왔다갔다하면서 백번길 치성(일정 구간을 백 번 왔다갔다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드리기 시작한다.

배전 난간에 묶여 있는 아이는 어둠 속에서, 끈 길이가 닿는 데까지 넓은 마루 위를 기어다닌다. 그럴 때는 어머니가 아주 편안한 밤이다. 하지만 매어놓은 아이가 앙앙거리며 울어대면 어머니는 안절부절못한다. 백번길 치성을 드리는 발걸음이 자연 빨라진다. 어쩔 수 없을 때는, 도중에 배전까지 올라와서 어떻게든 달래놓고 처음부터 다시 백번길 치성을 시작하는 일도 있다.

이렇게 어머니가 며칠 밤을 잠 못 이루며 마음 졸여 염려하던 아버지는, 그러나 벌써 오래 전에 떠돌이 사무라이에게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이런 슬픈 이야기를, 꿈 속에서 어머니한테 들었다.





쇼타로(庄太郞)가 여자한테 붙잡혀갔다가 이레째 되는 날 밤 홀연히 돌아와, 갑자기 열이 나며 몸져누웠다고 겐씨가 알리러 왔다.

쇼타로는 우리 동네에서 제일가는 미남 청년이며 무척 선량하고 정직한 사람이다. 다만 한 가지 나쁜 취미를 갖고 있다. 저녁이 되면 파나마 모자를 쓰고 과일 가게 앞에 걸터앉아, 길 가는 여자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무작정 감탄한다. 그 밖에는 이렇다 할 만한 특색이 없는 사나이다.

여자들이 별로 지나다니지 않을 때는, 길거리를 보지 않고 과일을 본다. 과일은 여러 가지가 있다. 복숭아, 사과, 비파, 바나나 따위를 보기 좋게 바구니에 담아, 금방 선물로 가져갈 수 있도록 두 줄로 늘어 놓았다. 쇼타로는 이 바구니를 보고, 아름답다고 한다. 장사 중에서는 과일 장사가 제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파나마 모자를 쓰고 빈둥거리며 지내고 있다.

이런 색깔이 좋다며, 금귤(여름에 열리는, 껍질이 두껍고 작은 귤) 따위를 품평하는 일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돈을 내고 과일을 산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렇다고 공짜로 먹는 일도 물론 없다. 그저 색깔을 칭찬할 뿐이다.

어느 날 저녁, 한 여자가 불쑥 가게 앞에 나타났다. 지체 있는 집 사람인지 옷차림이 무척 비싸 보인다. 그 옷의 색깔도 무척 쇼타로의 마음에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쇼타로는 여자의 얼굴 생김새에도 무척 감탄했다. 그래서 그 소중한 파나마 모자를 벗어들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여자는 가장 큰 바구니를 가리키면서 "이걸로 주세요" 라고 했다. 쇼타로는 얼른 그 바구니를 집어서 건네 주었다. 그러자 여자는 그 바구니를 잠깐 들어 보더니 "꽤 무겁네요" 하고 말했다.

쇼타로는 원래 한가한 사람인데다 대단히 상냥한 성품이었기 때문에 "그럼 댁에까지 들어다 드리지요" 하고는 그 여자와 함께 과일 가게를 나섰다. 그러고는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쇼타로라지만 이건 너무 태평한 것 아닌가. 필시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며 친척과 친구들이 법석을 떨고 있는데, 이레째 되는 날 밤에 쇼타로는 홀연히 돌아왔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들 둘러싸고 "그동안 어디 갔었느냐"고 묻자, 쇼타로는 전차를 타고 산에 갔었다고 대답했다.

아무튼 아주 긴 전차 여행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쇼타로의 말에 의하면, 전차에서 내리자 바로 들판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들판은 아주 넓었고, 보이는 곳마다 파란 풀이 온통 덮여 있었다. 여자와 함께 풀밭 위를 걸어가자, 갑자기 낭떠러지 꼭대기가 나타났다. 그러자 여자가 쇼타로에게 "여기서 뛰어내려 보세요" 하고 말했다. 밑을 보니 낭떠러지만 보이고, 바닥은 보이질 않는다.

쇼타로는 파나마 모자를 벗어 보이며 거듭 거절했다. 그러자 여자가 "만약 지금 용감하게 뛰어내리지 않으면 돼지한테 욕을 보게 될 텐데, 그래도 괜찮아요" 하고 물었다. 쇼타로는 돼지와 구모에몬(雲右衛門, 메이지 시대의 대중 가수)을 아주 싫어했다. 하지만 목숨과는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고, 여전히 뛰어드는 것을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돼지 한 마리가 콧김을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쇼타로는 별 수 없이 갖고 있던, 가느다란 빈랑나무 지팡이로 돼지의 콧등을 쳤다. 돼지는 꿀 하며 나동그라져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 쇼타로가 휴 하고 한숨을 돌리고 있으려니까, 돼지가 또 한 마리 커다란 코를 쇼타로한테 문지르러 왔다. 쇼타로는 어쩔 수 없이 또 지팡이를 휘둘렀다. 돼지는 꿀 하고는 또 낭떠러지 아래로 거꾸로 떨어졌다. 그러자 또 한 마리가 나타났다.

이때 쇼타로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저쪽을 바라보니, 멀리 푸른 풀숲이 끝나는 지평선에서부터 셀 수도 없는 수 만 마리 돼지가 떼를 지어 일직선으로, 낭떠러지 위에 서 있는 쇼타로를 향해 꿀꿀대며 다가오고 있었다. 쇼타로는 정말 무서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가오는 돼지의 콧등을 일일이 빈랑나무 지팡이로 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돼지는 지팡이가 코에 닿기만 하면 맥없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내려다보니,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로 돼지 떼가 거꾸로 줄지어 떨어져 간다. 내가 이렇게 많은 돼지를 낭떠러지로 밀어 떨어뜨렸나 생각하니, 쇼타로는 자기가 한 일이면서도 무서워졌다. 하지만 돼지는 계속 다가온다. 검은 구름에 다리가 달려 파란 풀을 밟아 걸어오는 것처럼, 무진장으로 꿀꿀거리며 다가온다.

쇼타로는 필사적으로, 여섯 밤 하고도 이레 동안이나 돼지 콧등을 두들겼다. 하지만 마침내 기진맥진하여, 손이 묵처럼 늘어져 결국은 돼지한테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낭떠러지 위에 쓰러졌다.

겐씨는 쇼타로의 이야기를 여기까지 하고는 "그러니까 여자를 너무 바라보는 건 좋지 않다"고 말했다. 나도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겐씨는 쇼타로의 파나마 모자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쇼타로는 아마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파나마 모자는 겐씨가 차지하겠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