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r dem Gesetz
F. 카프카
[소개]
유태계인 작가의 신과 율법에 대한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서양 정신의 한 근간을 이루는 헤브라이즘과 신학에 대한 이해 없이는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내용일 수도 있다. 비록 짧은 단편이지만 이 작가가 줄곧 추구해온 인간 실존의 문제에 대한 일종의 키워드를 던져주는 느낌이다.
[작가 소개]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 독일 작가. 생전에는 표현주의에서 신즉물주의(新卽物主義)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특이한 작가로 평가받았으나 사망 이후 유고들이 발견되면서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서 프랑스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흔히 표현되는, 명석 투철한 표현으로 근대인의 고독과 불안, 절망의 상황을 잘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표작으로 <변신> <성> <심판> 등이 있다.
율법 앞에 문지기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어떤 시골 사나이가 하나 이 문지기 앞으로 걸어와 율법 안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들어가게 해 줄 수 없다며 그 부탁을 거절했다. 시골 사나이는 곰곰히 생각해본 끝에, 그렇다면 나중에는 들어가게 해줄 것인지 물어보았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은 안돼." 문지기는 이렇게 대답했다.
율법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여전히 열려 있고 문지기는 옆으로 걸어갔다. 사나이는 문 너머에 뭐가 있는지 보고싶어서 몸을 기웃거렸다. 문지기는 이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들어가고 싶거들랑 어디 한 번 나를 밀어젖히고 한 번 들어가보지 그래. 하지만 이건 알아두는 게 좋아. 난 말이지, 아주 힘이 세단 말이야. 하지만 나는 기껏해야 제일 졸병 문지기란 말일세. 안의 방마다 문기기가 서 있는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힘이 세진단 말이야. 세 번째 방의 문지기만 해도 나는 그 문지기 얼굴조차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니까 말이야."
시골 사나이는 이런 어려움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율법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만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털가죽 외투를 입고 있는 그 문지기의 크고 우뚝한 코며 타타르 사람처럼 가늘고 길게 기른 새까만 수염 따위를 가만히 지켜보는 사이에 시골 사나이는 들어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바꿨다. 문지기는 그에게 앉을 수 있는 의자를 하나 내주고 문 옆에 앉도록 해주었다.
사나이는 그곳에서 며칠이고 몇 년이고 줄곧 앉아 있었다. 사나이는 그동안 안에 들어가려고 온갖 수를 다 쓰고, 문지기에게 떼를 썼기 때문에 마침내 문지기조차 넌더리를 낼 지경이었다.
문지기는 가끔씩 그 사나이에게 잠깐잠깐 이것저것 묻곤 했다. 사나이의 고향이나 그밖에 여러 가지를 묻곤 했으나 그것은 높은 사람들이 으레 한 번씩 던져보곤 하는 그런 무관심한 질문에 불과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에 문지기는 언제나 똑같은 대답, 즉 판에 박은 듯이 아직은 안으로 들여보내줄 수 없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시골 사나이는 이 여행을 위하여 귀중한 물건을 많이 준비해왔다. 하지만 이제 문지기를 매수하려고 그 물건들을 거의 다 써버리고 말았다. 문지기는 사나이가 뭔가 줄 때마다 주는대로 다 받았다. 그러나 그렇게 물건을 받으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이걸 받는 건 너를 위해서야. 네가 스스로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고 후회하지 않도록 받아두는 거란 말이야."
여러 해가 지나가는 동안 사나이는 이 문지기를 줄곧 관찰했다.
이제 이 사나이는 다른 문지기 따위는 다 잊어버리고, 오직 이 첫 번째 문지기만이 계율로 들어가는 유일한 장애라고 여기게 되었다. 처음에는 큰 소리로 자신이 처한 이 불운을 한탄하기도 했지만 점점 더 나이를 먹어가면서부터는 그저 투덜투덜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제 사나이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되어 버렸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문지기를 관찰해온 결과 문지기의 외투 섶에 벼룩이 살고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벼룩들에게 자기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문지기를 설득하여 자기를 문 안으로 보내주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드디어 이 사나이는 눈이 무척 나빠져서 그의 주위가 정말 어두워졌는지, 혹은 자기의 눈이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지 모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첩첩이 닫혀 있는 그 율법의 문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빛이 자기의 주위를 둘러싼 그 어둠 가운데로 흘러나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오래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의 머리 속에는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 전체의 경험이 한 데 모여 하나의 질문이 생겨났다. 그것은 지금까지 문지기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던 질문이었다. 그는 이제 몸이 굳어져서 스스로 몸을 일으킬 수도 없어 문지기에게 눈짓을 하였다.
문지기는 그의 얘기를 듣기 위해 그에게 다가와 몸을 깊숙이 숙여야 했다. 이미 두 사람의 신장은 그렇게 시골 사나이에게 훨씬 불리하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문지기는 사나이에게 물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뭐가 더 알고 싶은 거야? 넌 도무지 지치지도 않느냐?"
사나이는 문지기에게 물었다.
"모두가 다 나처럼 율법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나 외에는 아무도 이 문에 들어가려고 요청한 사람이 없으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문지기는 사나이가 이미 거의 다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가 들을 수 있도록 흐려져가는 귀에 대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이 문으로는 다른 사람은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어. 왜냐하면 이 문은 오직 너만을 위해 만들어져 있었던 거니까 말이지. 이제 나도 어디론가 떠나야겠지. 그리고 이 문은 그만 닫아버려야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