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s Kirschenfest
E. 글레에저
[소 개]
서양에 토속적인 문학이 있다면 이런 것 아닐까 하는 느낌을 주는, 소박한 분위기의 작품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독일에서 일자리 없이 떠돌아다니는 한 뜨내기 일꾼과 우연히 만난 젊은 농사꾼, 그리고 그의 아내의 사랑과 인연이 시적으로 그려져 있다. 자칫 음습한 불륜의 그림자가 드리울 수도 있는 줄거리인데도 그런 불결한 느낌이 없다. 결말을 불교적인 분위기로 이끌어간 것이, 20세기 들어 서구 지식인들의 유행이 된, 동양 정신에 심취하는 태도의 일환이 아닌지 궁금해진다.
[작가 소개]
에른스트 글레에저(Ernst Glaeser, 1902-1963) : 독일의 소설가. 헤센주 태생. <1902년생> <최후의 시민> 등 장편소설로 이름을 얻었다. 소설 <1919년의 평화>가 평화주의적, 좌익적인 분위기라고 해서 나치에 의해 책이 불태워지는 등 필화를 입어 한 때 스위스에 망명했다가 나중에 귀국했다. 종전 후에는 주로 평론가로 활동했다. 그는 라인이나 헤센, 바이에른 지방의 풍취를 묘사한 작품을 많이 발표했다. <버찌 잔치>는 1936년의 단편집 <헛된 것>에 수록된 작품이다.
라이헤센 지방에서 일 주일 동안 붙들고 있던 일도 끝났다. 호주머니에는 아직 삼 마르크가 남아 있고, 배낭에는 작은 포도주 병도 하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마인츠를 향해 떠났던 것이다.
부둣가의 어느 목노 주점에서 나는 동료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그라트바하 출신 배관공으로, 나와 마찬가지로 역시 일거리 없이 그 모양으로 독일 일대를 싸돌아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우선 작은 컵으로 한 잔 했으나 어느 사이에 네 잔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서로 신세타령을 하다 보니 이것이 여덟 잔이 되었으며 내 돈을 몽땅 털어넣어야 했다. 그리고 동료는 오랫동안 바지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주인이 작은 걸로 두 잔 더 보내오지 않는가. 우리는 감격해서 서로 껴안고 형제 같은 기분으로 술을 들이키고 잔을 비웠다. 동료가, 옛날 그가 얼마나 여러 가지 일을 했는지, 그리고 세상이 얼마나 살벌했던가 하는 데 이르러서는 나도 입을 다물고 그냥 있을 수 없었다. 몸을 일으켜 조립 작업을 하며 독일이나 루마니아, 스웨덴 땅을 돌아다녔던 얘기를 신나게 떠들어댔다. 동료는 입을 딱 벌리며 말했다. "여보게 정말 그때는 멋진 시대였지 않나..."
나는 슬픔이 가슴에 괴어 올라서, 귀여운 최후의 술잔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어찌하련가 아름다운 정원, 서로 스치고 지나가는 속절없는 인간들이여. 장미꽃도 처량하게 꺾어져 버리고..."
이 때 주인이 다가와서 우리들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우리의 대화는 금방 전쟁에 관한 것 일색이 되어 버렸다.
"칸브레 근처에서 말이야..." 동료는 소리를 높여 말했다. 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예 술통을 들고 왔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마저 마저 비우고 말았다. 아아, 그리고 우리들의 영혼은 어느 먼 평야, 에느 강가, 바포옴, 그리고 또 알곤느 산맥을 날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지만, 동료는 갑자기 우울한 눈빛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보게들, 그 때 어떤 평화가 올지 알았더라면..."
우리들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시계 소리만 째깍거리고, 포도주가 컵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거리에 나와 있었다. 목노집에서는 동료가 테이블 위에 두 팔을 뻗고 엎드려서 끙끙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잘 있으라고 인사를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늘 속으로" 하며 그는 소리치고 있었다. "그늘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모두... " 그는 몸도 가눌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나는 그냥 떠났다. 주인은 문간까지 배웅을 나왔다.
햇볕이 비추는 곳에서 그는 내게 말했다. "용기를 내게나. 독일도 곧 좋아질 걸세."
나는 그와 악수를 하고, 이미 서로 몇 번씩 되풀이했던 그 말에 대답했다.
"그렇게 되길 기원하네, 전우여."
처음에는 집들이 기울어진 것처럼 보이고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는 마치 나의 얼굴을 향해 뛰어드는 것 같았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단숨에 차도를 건너갔다. 차들이 급히 멈추고, 나는 승객들에게서 욕을 얻어먹었다. 이것은 유쾌한 일이었다. 나는 고함을 치는 그 사나이에게 소리를 질러 주었다. "뭐라고 그러는 거야, 이 못난 녀석아!" 이렇게 말하다 나는 뱃속의 것을 왈칵 토하고 그 자리를 물러났다.
그러면서 점차 나의 눈에도 인생은 평상시 같이 또렷한 모습으로 보이게 되었다. 뒤에 두고 온 옛 시가지의 초라함이나 동료 배관공, 옛 전우인 술집 주인, 작은 컵에 내려주신 신의 위안, 포도주 통 속의 유쾌한 거품까지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나는 똑바로 걸어갔다. 그러니 어찌 된 셈인가. 얼마 걷지도 않아서 나는 라인 다리에 이르렀던 것이다.
오, 그 강물을 보았을 때 내 마음은 얼마나 뛰었던가.
녹색으로 칠한 난간에 몸을 기대려니까, 삼월의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나를 포근히 감싸주었다. 강물 위를 멀리 바라보았으나 떠가는 배는 하나도 눈에 뜨지 않았다. 배들은 항구에 닻을 내리던가 밧줄로 묶여 있을 뿐이었다... 배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실업 상태였던 것이다.
내 앞에는 마을이 보였다. 집들의 초라한 정면이 나란히 줄을 지어 서 있고, 그 지붕 위로 성당이 솟아 있다. 햇볕은 모든 것 위에, 지붕 위에, 뻗어가는 라인 강 위에 남김없이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갈매기는 다리 주위를 유유히 날고, 하늘에는 자그마한 하얀 구름이 몇 조각... 네덜란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정신을 차려 앞을 쏘아 보았다. 어쩐지, 조국에 이만큼 빛이 있는 이상 내 자신도 결코 버림을 받지는 않을 인간처럼 느껴졌다.
나는 용기를 내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한산한 공장들이 늘어서 있는 지루한 교외를 지났다. 그러나 그것도 마침내 끊어지고,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길이 시작되었다. 호두나무가 늘어선 가로수 길이었다.
아스파라거스 밭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내 앞에 노란 먼지를 휘감아올렸다. 멀리 지평선을 줄달음치는 푸른 산들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오덴 산맥이다. 나는 그곳을 향해 걷고 있었다.
다름슈타트에 다달은 것은 밤이 거의 다 되어서였다. 여관에 찾아갔으나 대번에 거절을 당했다. 몸에서 아직 술 냄새가 물씬물씬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따위 일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이미 오던 길에 마을 끝에 있는, 마른 풀을 넣어두는 움막을 하나 눈 여겨 봐 두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라면 따스하고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마른 풀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어둠 속에 내 몸을 맡겼다.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으스스 한기가 돌기에 또 작은 술병 신세를 졌다. 포도주가 언제나 마음 좋게 베풀어 주는 그 기적이 이번에도 역시 나의 불쌍한 수족에 퍼져 왔다. 세수는 근처 연못에서 했다. 연못엔 보트가 한 척 흔들거리고 있었다. '엘프리데' 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천천히 길 위로 올라와 위쪽 숲으로 들어갔다. 새들이 날아다니고 아네모네 잎사귀 위에서 아침 이슬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두 시간 남짓 걸었을까, 이젠 배가 고파왔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 보아도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공기는 맑고, 햇빛은 잎사귀 사이로 무수히 많은 얼룩처럼 듬성듬성 내리고 있었다. 나뭇가지 끝에서 바람이 울었다. "불쌍하게 됐군." 나는 생각했다. "자연이 아무리 평화스럽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야. 지금 네 밥통이 평화를 지키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야."
반 시간 정도 더 걷자 다리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주저앉아 심호흡을 했다. 차츰 가슴은 가라앉았다.
"그래, 이렇게 하는 게 좋겠어..." 나는 생각했다. "배가 고플 때는 잠을 자야지... 잠은 가난한 자의 빵이니까 말이야."
그런데 꿈 속에서 내 양심이란 놈이 벌떡 일어나 내 가슴을 누르고 앉았다.
"이봐, 하인리히" 그 녀석은 말했다. "네가 그 삼 마르크로 술을 마셔 버렸겠지. 그래서 하인리히, 너는 지금 배가 고파 헐떡이는 거야." 나는 그 녀석이 하는 말이 조목조목 옳아서 추위를 느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의 반대 양심이란 놈이 벌떡 일어나 앉아 말했다. "뭐라구? 뭘 그리 까다롭게 구는 거야? 대체 이 불쌍한 녀석의 한심한 인생을 보라구! 술도 없이 어떻게 버텨나가라는 거야?"
양심은 내 가슴에서 뛰어내려 반대 양심을 향해 돌진해 그것을 때려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 상대방은 갑자기 어떤 낭랑한 목소리로 변했다.
그 소리는 나무들이 흔들리는 덤불 속으로 높이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햇빛 속에 녹아 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것은 또 이슬이 되어 내렸다.
그것은 모든 곳에 나타나면서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고 마침내 킬킬거리는 웃음 소리로 변하는 산울림으로 변했다. 산울림은 저기 멀리 채석장 쪽으로 자취를 감췄다.
나는 이렇게 양심의 갈등 따위는 멀리한 채 두 발을 뻗고 자연의 대지에 가로 누워 있었다. 여신들의 질투를 끄는 파리스처럼 마냥 성스러운 잠을 즐긴 것이다.
나는 뭔가에 퍽 얻어맞는 바람에 눈을 떴다. 눈 앞에 불쑥 말의 커다란 모습이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이 주정뱅이 자식아."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 내가 길 한복판에 드러누운 것을 어떤 사나이가 본 것이다. 아마 잠이 든 채 나도 모르게 거기까지 굴러간 모양이다. 농사꾼 한 사람이 마차에서 뛰어 내렸다. 나도 벌떡 일어났다. 그 농사꾼은 화가 나서 얼굴이 벌개져서 내게 덤벼들었다. 젊은 농사꾼이었다. 그는 내 어깨를 거세게 끌어당겼다.
"이제 겨우 아침 일곱 시밖에 안됐는데 얼굴이 맛이 갔군." 그는 호통을 치며 나를 밀어서 길 옆 개천에 던지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잽싸게 딱 한 대 먹여주자 그대로 나자빠졌다. 당연히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서로 주먹질을 했다. 그러나 나는 권투를 해본 경험이 있었다. 시골 농사꾼 따위는 상대가 되질 않는다. 젊은 농사꾼은 얼마 안 가서 땅바닥에 나자빠져 꼼짝도 못하게 되어 버렸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숲의 달콤한 공기를 가슴에 흠뻑 들이마셨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일까. 나는 금세 생기를 되찾았다. 나는 가슴을 쭉 펴고 늘 하던 식으로 작은 술병을 한 모금 하려고 했다. 그 때 마차에서 어떤 여자가 뛰어내렸다. "이 멍청아!" 그 여자는 외치면서 농사꾼 옆으로 뛰어가 머리를 쳐들고 이마를 쓸어주기 시작했다.
"아니, 아주머니, 그걸로는 안될 걸." 나는 여자에게 말을 걸며 그들 부부 곁으로 가서, 농사꾼 코 밑에 술병을 들이밀었다. 그는 눈을 떴다.
농사꾼은 윗몸을 일으키더니 마누라가 제 몸을 받치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당신을 한 대 먹인 거지 뭐야." 내가 대답해 줬다. 그러자 그 마누라는 웃었다. 농사꾼이 영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이 근처를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설치는 날치기나 사기꾼이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나는 말을 계속했다. "내가 누군가 알려드리지. 일터를 잃은 조립공일 뿐이야. 내가 사랑하는 조국 땅을 떠돌아다니는 중이지. 그러다 지치고 허기져서 여기서 잠깐 잠이 들었던 걸세."
그 때 그 마누라가 또 한 번 웃었다. 빨간 보자기를 뒤집어 쓴, 그 밑의 머리카락은 까맣고, 그 이는 어쩌면 또 그리 희고 깨끗할 수 있을까.
"아유, 멍청이." 그녀는 농사꾼의 턱에 붙은 흙을 문질러 털어주면서 말했다. "처음에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기라도 했으면 이렇게 싸우지 않아도 됐을 걸... 그 벌을 받은 거에요."
멍청이, 그 농사꾼은 일 분 가량 나를 그렇게 노려보았다. 그리곤 물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아무튼 어디든지 마을을 찾아 들어가 배를 채워야겠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버터를 바른 빵이라든가 따뜻한 감자를 좀 얻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말이다.
"여기 타게." 멍청이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마차에 탔다. 조그마한 말이 종종걸음으로 달리고, 앞 자리에는 그 멍청이가 타고 고삐를 잡았다. 나는 그 마누라와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숲의 바람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렇게 우리들은 만나서 마차를 타고 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으로 내가 멍청이네 집에 붙어 있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길을 가는 동안 우리들은 정말 한 마디도 지껄이지 않았다. 마차는 평평한 분지의 어떤 마을에 이르러 어느 농가 앞에 멈췄다. 집은 아주 컸고 우리들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거기 들어서면서 나는 너무 기진맥진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을 떠 보니 나는 높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창가에 고양이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둘러 보았더니 벽에 수호천사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그림을 보고 나는 기뻤다. 울창한 숲 속의 위험한 길에서 천사가 한 어린이를 인도해가는 그림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내 침대 위에도 그런 그림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소가 울었다. 나는 메크렌부르크의 그 불행했던 아마리에 고모 집에 내가 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가 다시 한 번 울자 나는 또 생각했다. '이건 프랑돌의 휴양지로구나. 그러면 머지않아 콘라드와 슈나이더 녀석들이 올 게다. 그러면 또 다들 트럼프 놀이에 열을 올리게 되겠지.'
그런데 소가 세 번째 울자 문을 열고 그 멍청이가 들어왔다. 그리고 "너는 이틀 밤 이틀 낮을 꼬박 자기만 했어" 하고 말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훑어 보면서 말했다. "자네가 해줄 일이 있어. 실은 나흘 전에 우리집 일꾼이 죽어 버렸거든."
"그게 바로 그 친구 침대였어." 그는 내가 누워있던 침대를 가리키며 말을 덧붙였다. 나는 껑충 뛰어오르며 외쳤다. "밥과 잠자리만 준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네."
"그렇게 하지." 멍청이는 말했다. 우리들은 아랫방으로 내려가 진을 마시고 치즈와 빵을 먹었다.
농사꾼 집에는 별로 힘드는 일이 없었다. 멍청이는 내가 하고싶은 대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우선 나는 기계란 기계는 모조리 다 고쳐주었다. 짚을 묶는 기계에서부터 작두, 전기 줄 배선 또는 원심기에 이르기까지. 소나 말의 뒤치닥거리도 했고 장부 적는 것도 거들어줬다.
어느날 밤에는 멍청이가 오토바이를 사고 싶다고 하기에 함께 노이슈타트까지 가서 괜찮은 중고품을 하나 사오기도 했다. 내가 그것을 먼저 시승해본 이후 이 멍청이는 매일 밤 이 고물 오토바이를 윙윙거리며 고개 꼭대기 참나무가 서 있는 곳까지 꼬불꼬불한 산길을 몰곤 갔다 오곤 했다.
시간은 달콤한 휴식 속에서 지나갔다. 농장의 짐승들을 돌보고 난 뒤의 기분은 어쩌면 그리도 흐뭇했던지. 외양간 속에 짐승들은 윤이 나도록 솔질을 했다. 그곳을 지나가면서 나는 그들 멍청이 부부가 만족스러워 하는 것이 기뻤다. 멍청이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나를 칭찬했다. 그는 자주 나를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혀 숲 가운데 있는 주막으로 데려가곤 했다.
그의 마누라 이름은 요하나였다. 젊고 미인이었다. 나에게는 별로 말을 건네지 않았고 나도 될 수 있으면 그녀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다. 사실은 그녀가 곁에 있으면 언제나 나는 프렌츠헨의 생각이 떠올라 난처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좋아하면서도 건드려보지 못한 첫 사랑 여자애였다. 그러나 지금은 매일매일 일하고 자고, 그리고 먹어 지새는 멋진 생활이었다.
이 농사꾼 집에 온 지 어느덧 한 달 반이나 지났다. 내 뺨에도 도톰하게 살이 올랐다. 이제 근처 마을 계집애들이 나를 후리려고 노리게끔 됐다. 밤에 요하나 생각이 치밀어 오르면 나는 살짝 방을 빠져 나와 목장 쪽으로 내려가곤 했다. 그리고 따뜻한 바람을 받으면서 들판을 헤매곤 했다. 그렇게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가슴이 설레는 것을 견디기 힘들면 나는 파이프에 불을 당기고 주막집을 찾아갔다.그리고 조국 만세를 외치는 젊은 농사꾼들과 어울려 친구가 됐다. 당시 독일은 분위기가 그랬다. 모두 노래를 부르고, 행복한 날이 오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봄은 어느 새 다가왔다. 나는 말처럼 부지런히 일했다. 이렇게 듬직한 일꾼은 아직 본 적도 없다고, 멍청이는 말하곤 했다. 얼마 안 있어 골짜기는 온통 꽃에 파묻혔다. 목장으로부터 풍겨오는 꽃 냄새로 밤에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다. 멍청이는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그는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요하나는 방에 들어박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의 일이었다.
나는 마음속이 무거웠지만 한눈 팔지 않고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멍청이가 나를 방으로 불렀다. 거기에 요하나도 앉아 있었다. 멍청이는 말했다. "하인리히, 지금 벚꽃이 한창이야. 저 창 밖을 보라구, 저 산 말이야. 벚나무 뿐이지. 저건 내 산이야. 내 재산 목록 일 호인 셈이지. 버찌가 다 익으면 자네하구 요하나 둘이서 츠빙겐베르크 장에 가서 팔아오지 않겠나? 자네는 그 때까지는 여기 있어 주겠지?"
그 때 요하나가 나를 쳐다봤다. 나는 말했다.
"그러지."
벚꽃은 피고 또 피었다. 가지가 부러지도록 열매가 열렸다. 태양은 눈부시게 비췄다. 버찌는 익어갔다.
어느날 아침이었다. 나는 소와 말을 돌보고 있었다. 멍청이는 사람들과 정치 이야기를 할 것이 있다며 오토바이를 타고 집을 나갔다. 그런데 요하나가 마당에서 나에게 말했다. "하인리히, 벚나무 동산에 가요."
우리들은 각자 바구니를 두 개씩 들고 길을 떠났다. 처음엔 산비탈을 오르는 보통 황토 길이었으나 차츰 길이 좁아졌다. 목장을 빠져나가 조그마한 개울을 건너자 거기서부터 온통 벚나무 동산이었다. 눈앞에 나무들이 죽 늘어서고 열매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요하나는 헛간 문을 열고 나는 사다리를 꺼내 나무 위에 올라가 열매를 따기 시작했다. 두 시간 가량 지난 뒤 그녀가 내려오라고 소리를 쳤다. 나는 내려가 그녀 옆의 젖은 잎새 위에 앉았다. 저 아래 마을이 내려다 보였다. 교회 종이 여섯 시를 쳤다. 산들바람이 풀숲을 빠져 지나갔다.
"하인리히." 조금 있다가 요하나가 말했다. "이 벚나무 동산은 원래 내 것이에요. 결혼할 때 친정에서 받아온 거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나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에요."
"그래요?" 나는 대답했다. "이걸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니 참 좋겠군요."
"그럼요." 요하나는 말했다. "그 멍청이는 돈뿐인걸요. 하지만 나무는 내 것이죠."
우리들은 양철 깡통에 든 찬 커피를 마시고 바구니에 넣어 온 빵을 잘랐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나무에 올라가 버찌를 땄다. 요하나는 아래에서 그것을 주워 모았다. 여덟 시가 되자 바구니 네 개가 꽉 찼다. 그러자 요하나는 집 아래채 쪽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얼마 안 있어 하녀가 마차를 몰고 왔다. 우리는 버찌 바구니를 마차에 싣고 요하나가 고삐를 잡았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츠빙겐베르크 장터를 향해 떠났다.
산길을 따라 하얀 교회당 건물이 서 있는 자그마한 시골 읍이 쭉 이어졌다. 길에 햇볕이 내려 쪼이며 피어 오르는 흙먼지가 반짝반짝 빛났다. 울창한 숲을 몇 군데나 빠져 나갔다. 나는 몇 번 고삐를 넘겨받아 마차를 몰았다. 조그마한 말은 빨리 걸었다. 어쩌면 이렇게 평화스러울까. 나는 요하나를 돌아봤다. 그녀는 눈을 반쯤 감고 얼굴에 햇볕이 내려 쪼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부풀어오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작은 말은 딸깍딸깍 달리고, 요하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이날 버찌를 판 돈은 대단한 금액이었다. 요하나의 돈 주머니는 가득 차 찢어질 것 같았다. 우리는 장터의 찻집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저녁 다섯 시가 되어 집으로 향했다. 말은 왔던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고삐를 쭉 놓고 있었다. 요하나는 내 옆에 앉아 있었다. 길은 숲 속 언덕으로 오르고 있었다.
무슨 망령이 들었을까. 나는 갑자기 요하나의 허리를 팔로 휘어감았다.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나는 말을 세우고 요하나에게 키스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미소를 띠고 말했다. "난 당신 마누라가 아니에요, 하인리히."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고삐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작은 말은 종종걸음으로 달렸다. 숲의 공기는 차가웠고, 마차 뒤쪽에 실린 빈 바구니가 달각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인리히." 요하나가 말했다. "나는 그 멍청이의 아내에요. 내가 좋아했던 사람은 전쟁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난 그 사람하고 결혼한 거에요. 어쨌든 여자는 결혼해야 하잖아요. 그리고 그 때 그 멍청이는 씩씩한 농사꾼이었죠.
그 사람의 씩씩하고 기운 센 것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결혼해 같이 살게 된 거랍니다. 하인리히, 그러나 그건 좋아했다기보다 분별이란 것 때문이에요. 당신을 이렇게 보고 있으면 난 그것을 정말 똑똑히 알 것 같아요. 한 달 반 넘게 당신을 지켜봐 왔어요. 그래서 난 잘 알게 되었죠. 그 전에는 이런 일은..."
"요하나." 나는 대답했다... 요하나, 단지 그 말밖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난 그저 평범한 시골 여자에요." 그녀는 계속했다. "하지만 마음만은요, 당신과 같이 언제나 나그네 길이에요. 한 달 반 당신을 보아왔지만 당신도 역시 나처럼 외로운 것 같아요."
"요하나" 나는 말했다. 그밖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 일은 무엇이고 간에 이미 다 결정되어 버렸답니다." 요하나는 말했다. "어린애를 낳게 됐어요. 그 멍청이는 애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느라고 안달이에요."
숲은 시원했다. 작은 말은 달렸다. 내 마음은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
"난 정말 당신이 좋아요, 하인리히!" 요하나는 말했다. "정말이에요. 그건 사실이에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뿐이에요. 그렇지만 어린애는 그 멍청이의 자식이고 또 당신도 그냥 우연히 여기 뛰어 들어온 사람은 아니에요."
우리는 천천히 마을로 다가갔다. 요하나는 말했다. "그 멍청이는 좋은 농사꾼이에요. 그이의 희망은 아들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이가 생각하는 그런 마누라가 되는 거에요. 그거면 되는 거에요. 그래서 나는 사실 그대로 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하인리히, 나도 가끔은 달아나고 싶을 때가 있어요. 이 마을에서, 이 골짜기에서... 하지만 그것은 결국 해보는 이야기일 뿐이에요. 당신은 결국 언젠가 떠나서 떠돌아다니게 될 뜨내기이고... 나는 그럴 수 없어요. 왜냐 하면 나 역시 그 멍청이가 좋고, 어린애는 역시 그이의 자식이니까요..."
이렇게 우리는 집에 도착했다. 멍청이가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요하나가 그에게 돈이 든 지갑을 주었다. 멍청이는 소리 내어 웃으며 우리를 방으로 데리고 가서 진을 가지고 왔다. 멍청이와 나는 그렇게 두 시간 동안이나 마셨다. 요하나가 자러 가자 멍청이는 또 웃으며 과실주를 가져왔다. 우리들은 이것마저 마셔 치울 참인었다. 멍청이는 앞으로 세 달만 있으면 아들이 생기는데 그러면 그 때 잔치를 할 생각이니 그 때까지만 있어달라고 졸랐다.
두 주일 동안 나는 매일 아침 요하나와 함께 벚나무 동산으로 갔다. 버찌를 걷어들이는 일이 끝나면 츠빙겐베르크 장터로 가곤 했다. 그 두 주일 동안 요하나는 나를 더욱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나는 요하나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두 주일 동안 요하나는 멍청이를 위해 정조를 지켰다.
어느날 멍청이가 나를 붙잡고 말했다. "내일 모레가 버찌 잔치일세."
나는 요하나에게 버찌 잔치가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그것은 버찌의 수확을 감사하는 잔치로서 근방의 친척들과 악사들이며 젊은이들, 처녀들이 모여든다는 것이었다.
그날 아침 요하나와 나는 또 버찌를 싣고 떠났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녀는 나에게 이제 두 달만 지나면 어린애를 낳게 되고, 그러면 어린애에게 하인리히라는 이름을 지어줄 작정이라고 말했다.
우리들은 숲을 지났다. 요하나는 울면서 우리들이 죄를 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슬퍼했다.
"좋아요, 요하나." 나는 말했다.
"나는 앞으로 어디로 떠돌아다닐지 몰라요. 하지만 당신의 이 마음씨만은 언제까지나 잊어버릴래야 잊어버릴 수 없을 거에요. 당신은 이렇게 가까이 있고, 또 이렇게 멀리 있으니 말입니다."
요하나는 말을 세우더니 말해다. "하인리히..." 요하나는 이렇게 말하고 내 눈시울에 키스했다. 그곳은 언덕길 꼭대기였다. 황토 길은 바람에 바짝 말라 있었고, 풀이 나부끼고 있었다. 마을은 저 아래에 있었다. 그리고 목장도 저 아래에 있었다. 아! 그것은 정말 부드러운 푸르름이었다.
"내게도 인생이 있어요." 요하나는 말했다. "저곳에는 없는 그런 인생이..." 그렇게 말하면서 요하나는 마을을 가리켰다.
"하지만 어린애는 저곳을 떠날 수 없을 거에요. 하인리히,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알아 주시겠죠? 저기서 태어난 여자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말구요." 나는 대답했다.
"요하나,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살아야 할 그 길을 살아가면 되는 거야."
요하나는 또 울었다. 나는 말을 움직였다. 마차는 골짜기로 내려갔다.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이 지금도 내 눈 앞에 어른거린다. 우리들이 마을로 들어가자 갑자기 여자들이 몇 사람 이쪽을 향해 뛰어왔다. 그 뒤로 남자들, 그리고 어린애들, 모두가 우리에게 뛰어와 우리를 가만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요하나는 일어서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말을 채찍질했다. 우리는 곧 집에 닿았다. 거기에는 악사들이 서 있고 마당의 나무들에 오색 리본으로 장식돼 있었으며 집 정면 벽에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나는 뛰어내렸다. 요하나도 내려와 내 옆에 나란히 섰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외쳤다. 그러자 마당 안쪽에 모여 있던 남자들이 잠깐 흩어졌다. 그 뒤로 멍청이가 벤치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이마가 깨어져 피투성이였다. 윗도리도 피투성이, 아래 쪽 땅에도 피가 흘러내려 피투성이였다.
"어떻게 된 거에요?" 요하나가 외쳤다. 멍청이 옆에 서 있던 사나이, 노이슈타트에서 온 의사가 우리에게 다가와 말했다. "오토바이 사고입니다. 지금 거의 빈사 상태입니다."
아아, 요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이런 외침은 아직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울부짖었다. 그런가 하면 이번엔 웃는 것이었다. 남자들은 움찔했다. 여자들이 여기 뛰어들었다. 그러나 요하나는 못 박힌 듯 그대로 서 있었다. 혼자서, 제 몸을 부등켜 안 듯 소리쳐 외치더니 그만 기절했다. 어머나! 여자들이 그녀를 부축하여 몸부림치며 소리치는 요하나를 집안으로 떠메고 들어갔다.
그러나 의사까지 우리 남자 세 사람은 멍청이의 옆에 서서 소와 말들이 소란을 떠는 것을 그냥 듣고만 있었다. 갑자기 집안에서 여자들이 또다시 외치고 게다가 마침 교회의 저녁 기도를 알리는 종소리까지 울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떠들고 갈팡질팡하는 인간들을 무서운 하늘이 덮어버릴 것만 같은 바로 그 때, 멍청이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의 입에서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희멀건 거품마저 흘리며, 그러나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는 숨결이 넘어가면서도 이렇게 물었다.
"내 아이가 나왔나?"
사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몸이 오싹했다. 우리는 그를 떠메어 거실로 옮겨 가까스로 자리에 눕혔다. 위층에서는 요하나가 울부짖고 멍청이는 겨우 숨을 돌리는 듯 하더니 다시 묻는 것이었다. "내 아이가 나왔나?" 그리고 나서 그는 축 늘어져 허탈한 미소를 풍기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겨우 숨을 돌렸다.
마당이 조용해졌다. 나는 멍청이 옆에 앉아 있었다. 그의 가슴은 뭉개지고 뺨 위로 피가 흥건하게 흐르고 있었다. 위에서는 요하나가 아직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몇 번인가 이 농사꾼은 뭔가 말하려고 했다. 마치 어린애들이 태어나서 비로소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하는 그런 입 모습이었다. 아아, 나는 생각하는 것을 말로 나타내지 못하는 그가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다.
의사가 돌아와서 멍청이에게 주사를 놓았다. 그는 조금 안정이 되었다. 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이봐, 멍청이." 나는 물었다. "나를 알겠나?"
"내 아이냐?" 그는 잘 돌지 않는 혀로 말했다.
"그렇고 말고." 나는 말했다. "어린애..." 갑자기 멍청이는 손가락으로 위층을 가리켰다.
"하인리히, 어린애... 그러면... 돼. 내 아이만 나오면 나야 죽어도 상관없지 않겠나?"
나는 그의 이마에 물수건을 얹었으나 그는 그것을 집어던지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눈을 치켜 떴다. 나는 이렇게 무서운 눈초리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들었나?" 그는 속삭였다. "저 소리 들었나?"
위에서 무시무시한 비명 소리가 세 번이나 울려퍼졌다. 유월의 따스한 밤 바람이 목장을 스쳐 지나가고, 버찌 잔치 리본이 마당의 나무에 매달려 바스락 바스락 스치는 가운데 이 젊은 농사꾼은 일어서더니 문으로 비틀비틀 걸어가다가 넘어졌다. 그리고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내 아이가 먼저, 그리고 그 다음이 나야. 하나님, 소원입니다."
나는 그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그는 마구 팔을 휘둘렀다. 그 때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의사가 방에 들어왔다. 그는 웃음 소리를 내며 손을 닦았다.
"튼튼한 아이야" 그는 소리쳤다. "조금 빠르기는 하지만, 뭐 토실토실한 애야."
갑자기 멍청이는 마루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똑바로 침대로 걸어갔다. 몸을 눕히는가 싶더니 입에서 피를 토했다.
"아, 그렇지..." 의사가 말했다. "깜빡 잊을 뻔했군..." 그러나 멍청이는 벌써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피가 가슴에서 펑펑 쏟아졌다. 그는 두 팔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세 번 가량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어렴풋이 미소를 짓는 듯 하더니 그만 자리에 쓰러졌다.
"아멘." 의사는 말하고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이층에서 갓난 아이가 울고 있었다. 나는 마구간에 가서 짐을 꾸렸다. 안마당엔 악사들과 열 여덟 명의 처녀들이 서 있었다. 의사가 웃으면서 문 앞에 나와 고함을 쳤다.
"멍청이의 아이야..."
그 소리를 듣자마자 악사들은 나팔을 불어대고 여자들은 기뻐서 스커트에 손을 자꾸 문질러댔다.
찬송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나는 큰 길로 나섰다... 우리들이 그 속에서 나와 그 속으로 사라져갈 흙먼지 속으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