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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wo Drovers

작가 : S.W.스코트

소개 :

스코틀랜드 하일랜드 지방의 쾌남 로빈 오이그 매콘비히는 소떼를 몰고 잉글랜드로 떠난다. 그로서는 무척 유쾌한 여행. 그러나 떠나기 직전 '네 손에 잉글랜드인의 피가 묻어 있다"는 노파의 불길한 예언을 듣고, 소중한 단검마저 친구에게 맡기지만...

[작가 소개]

월터 스코트(Sir Walter Scott, 1771-1832) : 영국의 시인, 역사가, 소설가.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딘버러에서 태어났다. <마미온> <호반의 미인> 등으로 영국은 물론 해외에까지 이름을 높였지만 바이런의 출현 이후 시를 단념하고 오직 역사 소설만 썼다. '웨버리 소설'이라고 불리는 27부 70권의 소설들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아이반호> 등은 발표 당시 인기를 끌었고, 유럽 각국의 문학에도 큰 영향을 줬다. <소 모는 두 상인>은 <캐논게이트 기록 제1집>(1827)에 수록된 것이다.






이야기는 하일랜드의 도운페어를 떠난 다음날 시작된다. 꽤 활기를 띤 시장이었다. 잉글랜드의 북부와 중부에서 적지않은 가축 상인들이 모여들어 돈푼깨나 뿌려대, 하일랜드 농부들은 싱글벙글댔다.

이 시장이 끝나면 상당히 큰 가축떼들을 잉글랜드까지 보내는 일이 남아있다. 물건을 산 주인이 직접 몰고 가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힘이 많이 들고 또 책임이 무겁고 지루한 일이다. 도살장에 보낼만큼 소를 살찌우는 농장까지는 수백 마일이나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적인 소몰이꾼을 고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일랜드 지방 사람들은 이 까다로운 소몰이 일의 전문가들이었다. 군인으로서도 그렇지만 이 지방 사람들은 이 소몰이 일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이들은 이렇게 힘든 일을 해내는 것이 고난을 이겨내는 좋은 훈련이 된다고 믿는다. 또 이들은 큰 길을 피해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잘 알고 있었다. 큰 길은 자칫 소의 다리를 아프게 하기 일쑤고 또 도중에 돈을 받는 경우도 있어서 소몰이꾼들에게는 반갑지 않다.

보통 사람에겐 길조차 잘 보이지 않는 습지대를 가로지르는 지름길은 넓고 푸른 들이 계속 널려있고 소들이 걷기도 편했다. 마음이 내키면 멈춰서서 소들에게 먹이를 뜯길 수도 있다. 해가 저물면 소몰이꾼들은 비나 바람 따위에는 개의치 않고 소 곁에 벌렁 누워 잠든다. 로커벨에서 랭커셔까지 걸어가면서도 이들 강인한 소물이꾼들은 하루도 지붕 밑에서 자는 경우가 없다.

소몰이 삯은 퍽 높은 편이다. 소를 목적지인 시장까지 잘 보내서 목축업자들의 벌이가 되려면 뭣보다도 이들 소몰이꾼들의 기질과 소를 다루는 솜씨, 정직함이 열쇠였다. 그만큼 이들 소몰이꾼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것이다. 반면 그들이 소를 모는 동안의 비용은 일체 자기 부담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무척 구두쇠 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이들 하일랜드 출신 소몰이꾼들은 이 길고 고생스러운 여행을 하는 동안 대개 한 끼에 귀리 두세줌, 양파 두세 개를 먹을 뿐이고 그밖에 양뿔로 만든 잔으로 위스키를 아침 저녁 찔끔찔끔 마실 뿐이다.

몸에 지니는 무기 역시 단검 하나뿐이다. 그들은 이 무기를 팔 아래 감추던가 체크 무늬 어깨걸이(이것은 하일랜드에서 겨울 외투로 쓰인다) 사이에 감춰두곤 한다. 그리고 소를 모는 작대기가 하나 있을 뿐이다.

하일랜드 사람들에겐 이 소몰이 여행처럼 즐거운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온갖 변화무쌍한 사태가 발생한다는 것이 켈트 사람들의 타고난 호기심과 방랑벽을 자극하는 것이다. 여행 중 만나게 되는 사소한 일들, 농민들, 목축업자, 장사꾼들을 대하는 즐거움이 그것이다. 종종 벌어지는 술자리 역시 이들 하일랜드 사나이들에게는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돈 따위는 상관 없었다. 거기에 자신의 억센 힘에 대한 자신과 긍지가 있었다.

하일랜드 사나이들은 양 떼를 다룰 때는 마냥 어린아이 같았지만 소몰이에 있어서는 위풍당당한 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러한 천성 때문에 활기차지 않은 양치기 생활은 질색이었고 반면 그 삽상한, 자랑스러운 고향의 소떼의 보호자가 되어 당당히 소떼들을 몰고 갈 때는 자세를 쭉 펴고 사는 보람을 느낀다.

그 날 아침 도운페어를 출발한 몇십명의 패거리 속에서 로빈 오이그(오이그는 꼬마 형이라는 뜻)는 가장 위세 좋은 인물이었다. 모자의 챙을 척 올리고, 타탄 무늬의 바지 자락을 무릎 바로 아래에 꼭 묶은 그 다리는 젊음이 넘쳐흘렀다. 오이그라는 별명이 말하듯 몸집이 작고 손발도 그리 억세지 않았지만 그 가쁜하고 삽상하기란 마치 노루를 보는 것 같았다. 튀는듯한 발걸음, 그것은 멀리 여행하는 튼튼한 사나이들도 항상 부러워하는 것이다.

어깨걸이를 맨 모양이나 모자 쓴 것 하나만 보아도 이 하일랜드 출신 호남자에게는 로울랜드(스코틀랜드의 낮은 지대) 처녀들이 놓칠 리 없는 씩씩함이 엿보였다. 햇볕이나 비에 드러낸 얼굴은 거칠다기보다 야무지고 건강한 안색이었다. 혈색이 좋은 볼과 빨간 입술, 하얀 이로 한층 시원스러운 인상이었다. 대부분의 하일랜드 사나이들처럼 오이그 역시 큰 소리를 내 웃는다거나, 이를 드러내는 일이 드물지만 그럼에도 모자 아래 밝은 두 눈에는 기쁨과 유쾌함이 넘쳤다.

로빈 오이그의 출발은 이날 이 작은 읍에서는 그리고 남녀 친구들이 있는 근방 일대에까지 조그마한 사건이었다. 동업자 중에서 그는 첫 손가락에 꼽히는 존재였다. 그 자신의 장사도 상당한 규모였고, 하일랜드 농민이나 다른 여러 곳의 중요 고객들도 그에게 자주 일거리를 맡겼기 때문이다. 이 지방에서는 아무래도 그가 제일이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했다.

조수를 쓴다면 장사 규모를 더 키울 수 있지만 그는 조카 둘을 쓰는 것 외에는 일체 조수를 두지 않았다. 소몰이꾼으로서의 그의 평판 역시 그렇게 소떼를 손수 돌봐준다는 점에 기인한다는 것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업자 가운데 최고의 사례금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이제 몇 번만 더 영국으로 여행하면 그 후는 자기 장사에만 전념해 집안 체면을 세우리라는 희망으로 자위하고 있었다.

집안 체면이란 그의 부친 라프랑 매콘비히(나의 친구의 아들이라는 뜻)라는 이름이 저 유명한 로브 로이(18세기 초에 스코틀랜드에 실재했던 의적)에서 따왔고, 또 로빈의 조부와 이 의적이 아주 친했다는 데 근거한다. 더 캐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로빈이라는 이름도 셔우드의 숲을 중심으로 유쾌하게 설친 로빈훗처럼 이 로호 로오몬의 황야에서 크게 활약한 의적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말도 있다.

제임스 보즈웰(18세기 스코틀랜드의 문인)의 표현처럼 '어느 누가 이 조상을 자랑하지 않을 자 있으랴?'하는 식으로 로빈 오이그도 이 부계 혈통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러나 그도 물론 잉글랜드나 로울랜드로 자주 여행하다 보니 그러한 집안 내력은 물론 촌구석에서나 다소 유익할 뿐이지, 다른 지방에서는 오히려 조소거리나 주체스러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출생의 긍지라는 것은 말하자면 수전노의 보물과 같았다. 혼자 남몰래 자랑스러워 할 수는 있어도 조금이라도 남 앞에서 자랑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로빈 오이그는 축복의 말에 둘러싸였다. 심사원들은 마냥 그가 맡은 소를 좋다고 하고(사실 일급품 뿐이었다) 전송의 뜻으로 냄새 맡는 담배 쌈지를 내밀기도 하고 술잔을 나누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 한마디씩 "잘 가게, 잘 다녀오게. 색손의 시장에선 잘해봐. 종이 쌈지에다 빳빳한 지폐, 그리고 가죽 지갑에다가는 가뜩 잉글랜드의 금화를 가져와." 그야말로 여간 소란한 전송이 아니었다.

젊은 처녀들과의 이별은 더욱 정다운 것이었다. 만일 그가 떠나기 전에 한 번 쳐다만 보아주어도, 간직해둔 브로치를 아낌없이 선물로 줄 처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소문이다.

바로 로빈 오이그가 무리에서 떨어진 몇 마리의 소에게 '후우후' 소리를 지를 때였다. 돌연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로빈, 잠깐 기다려. 토마프리치의 자네트야. 아버지의 누이, 자네트 숙모란 말이야."

"제기랄, 저 여편네가 왔군. 저 년은 하일랜드의 마녀야, 여우에 홀리겠군."
스타링 늪에서 온 농부가 투덜거렸다. "우물쭈물하다간 소가 홀릴 거야." "그렇게는 못하지."
소몰이꾼 사이에서 좀 지식이 있다는 한 사나이가 말했다.
"로빈 오이그가 꼬리에 망고 성자님의 매듭을 짓지 않고 내버려 두었을 리는 없지. 어림도 없어. 그것만 해 두면 아무리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는 늙은 너구리 마녀라도 당장 엉덩이에 돛을 달고 줄행랑치는 법이야."

여기서 말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도대체 이 하일랜드 소들은 걸핏하면 마법이나 주문에 홀리기 일쑤다. 그래서 머리 좋은 소몰이꾼들은 꼬리 끝 털을 일종의 독특한 묶음으로 묶고 그것으로 주술을 피하곤 한다. 그러나 농부들의 불신의 시선을 받고 있는 당사자 노파는 전혀 소 따위는 상관 없이 오직 소몰이꾼들에게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로빈은 이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해도 질색이었다.

"어쩌자고 또 이렇게 아침 일찍 화롯가를 빠져나왔어요? 어젯밤에 벌써 인사를 했을텐데."

"아무렴 그렇지. 더구나 돌아올 때까지 쓰라고 이 몹쓸 늙은이에게 뭉텅 용돈까지 주었지. 넌 참 착한 아이다. 그런데 말이다." 늙은 마녀는 말했다.

"내 한 가지 걱정되는 건 만에 하나라도 너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난 이제 먹을 것도 필요없고, 화롯불도 필요없고, 아니 그렇지 저 고마운 해님도 필요 없어. 그러니 말이다, 무사히 다녀서 돌아와. 무사하게 돌아오도록 오른편 돌림의 주문을 해주지."

로빈 오이그는 할 수 없이 발을 멈추었다. 웃으면서도 난처한 듯이 주위의 패들에게 눈짓을 했다. 할 수 없지, 숙모의 마음이 시원해지도록 해주는 것 뿐이니까 라는 의미였다. 자네트 숙모는 비틀비틀 그의 둘레를 돌기 시작했다. 옛 드루이드 신앙(고대 켈트족의 종교)에서 나온 것이라는 의식이었다. 대상이 되는 사람의 주위를 세 번 빙빙 오른쪽으로 돈다. 태양의 운행과 같은 방향이었다. 그러나 돌연 그녀는 우뚝 멈추는가 싶더니 놀란 듯 무서운 소리를 질렀다.


 

"앗, 로빈, 네 손에 피가 묻었어."

"아주머니두, 제발 그만둬요." 로빈 오이그는 말했다.

"그 따위 점은 당치도 않지, 아주머니 자신에게 해로워요. 벌을 면치 못할 걸요."

그러나 노파는 무서운 얼굴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너의 손에 피가 묻었다. 그것도 잉글랜드 사람의 야. 겔 사람(주로 하일랜드 지방에 사는 켈트족의 일부)의 피라면 더 진하고 붉을 게다. 저것 봐, 좀 보여다오. 잠깐만."

로빈이 막을 새도 없이(정말 막으려 했다면 폭력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노파는 민첩했고 막무가내였다. 순식간에 로빈의 어깨걸이 아래 손을 넣어 허리의 단검을 쑥 뺐다. 말끔히 간 칼날이 한 점의 얼룩도 없이 햇빛에 빛나자, 그녀는 또 큰 소리를 질렀다.

"피다, 피야 피. 색슨 사람의 피야. 로빈 오이그 매콘비히, 오늘은 잉글랜드로 떠나선 안돼!"

"농담하지 말아요." 로빈이 대답했다.

"그럴 수야 없죠. 그러면 스스로 자기 발을 찍는 셈이예요. 이봐요, 아주머니. 꼴불견이요. 자, 그 칼을 줘요. 빛깔만 가지고 검은 소의 피, 흰 소의 피를 어떻게 구별한담. 사람의 피는 말이죠, 모두 아담에게서 받은 거예요. 자 그 칼을 달라니까. 괜찮죠, 갔다 오겠어요. 지금쯤 벌써 스타링 다리께까지 많이 갔을 텐대. 자 그 칼. 난 이제 가야겠어요."

"아니야, 못 줘. 이 어깨걸이는 놓지 못하겠어. 이 불길한 칼을 두고 가면 모르지만." 주위의 여인들도 이젠 같은 말을 했다. 자네트 노파의 예언이 맞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로울랜드 농부들은 난처한 얼굴로 아까부터 방관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바에는 어떻게든 끝장을 낼 수밖에 없다고 로빈은 결심했다.

"자, 그럼 말이죠." 로빈은 칼자루를 휴 모리슨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당신네들 로울랜드 사람들은 이런 아귀다툼쯤 아무것도 아니겠지. 그럼 내 칼은 당신이 맡아 줘. 아주 줄 수는 없지. 아버지의 유품이니까. 하지만 당신네 떼는 우리들 바로 뒤에 따라오지. 내 허리에 없는 건 유감이지만 당신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대로 참지. 아주머니 어때요. 이럼 됐죠?"

"할 수 없지." 노파는 말했다. "그런 칼을 맡아주는 바보가 로울랜드 태생에 있다면야."

기운 센 사나이인 휴 모리슨은 소리내어 웃어댔다.
"이봐요. 아주머니. 난 말이죠, 그레네의 휴 모리슨 조상은 옛날부터 호걸 모리슨 일가, 결투하는 데 단검 같은 건 안썼어요. 아직 우리집 역사엔 한 번도 없어요. 그런 건 필요없죠. 모두 덩치가 컸거든요. 나만은 좀 약하지만, 어때요, 이런 걸 씁죠." 휴 모리슨은 그러면서 아주 굉장한 곤봉을 내보였다.

"마시고 먹고 하는 자리에서 느닷없이 쿡 찌르는 따위는 몽땅 하일랜드 깡패들에게 맡깁니다. 아니, 웃을 게 아니죠. 하일랜드 사람들, 특히 로빈 녀석도 그럴 걸. 아무튼 단검은 내가 맡아주지. 이런 할머니의 잠꼬대가 그렇게도 걸린다면 말이야. 필요할 땐 언제든지 도로 돌려줄게."

휴 모리슨의 말투를 듣고 로빈의 속에는 뭔가 꽉 치밀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도 여러 번 여행하는 동안 발끈하는 하일랜드 사람의 본래 기질을 누르고 조금은 인내라는 것을 배운 터였다. 그런 까닭에 약간 배알이 틀리기는 했으나 잠자코 호걸 모리슨 일가의 후예라고 하는 이 사나이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아냐, 저 놈은 아침 술을 안마셔도 기껏 댐프셔 출신의 얼간이야. 그렇지 않다면 조금쯤은 신사다운 말씨를 쓰겠지. 그나저나 너 놈도 돼지새끼나 마찬가지야. 꿀꿀하는 것 밖에는 재주가 없어. 저 따위 때문에 창자 속의 잡탕을 찔러서야 아버지 유물인 칼이 울지, 울어." 이렇게 말하면서(물론 겔 언어로 중얼거린 것이었다) 로빈은 떼를 몰고 배웅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했다. 그는 동업자며 형 아우 하는 사이인, 이번에 함께 가기로 약속한 사나이와 빨리 합류하고 싶었다.

이 친구는 이름이 해리 웨이크필드, 잉글랜드 젊은이였다. 북부의 시장에서는 어디서나 얼굴이 알려져 있었고 또 사실 그 방면의 솜씨에 있어서는 우리의 주인공 로빈 오이그 못지 않게 평판이 좋고 잘 통했다. 키는 6피트 가깝고 스미스필드(런던 옛 성 밖에 있던 광장. 가축 시장이 섰다)의 권투 시합이나 레슬링 시합 같은 데 나가도 충분히 통할만한 훌륭한 체격이었다. 물론 프로 선수에 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시골 아마추어들이 뛰는 권투 시합 정도라면 어떤 상대라도 케이오시킬 정도였다.

던캐스터의 경마가 있으면 그는 언제나 득의양양했다. 뱃심 좋게 적지 않은 돈을 걸고 또 대개의 경우에 으레 이겼다. 쟁쟁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요크셔의 닭싸움에도, 장사에 지장이 없는 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가 없었다. 아주 서글서글한 젊은이로 놀기 좋아하고 노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얼굴을 내미는 그런 사나이었으나 본래는 착실하고 장사의 이해관계에서는 세심한 로빈 오이그보다도 오히려 밝았다.

그는 쉴 때는 철저히 쉬는 반면 일하는 날은 열심히 끈기 있게 일했다. 그는 심신이 함께 그 옛날의 명랑한 잉글랜드 시골 농부의 전형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던 전쟁터에서 조국에 영광과 패권을 가져다 주고 지금도 역시 조국의 호위를 다하는 잉글랜드 농민의 전형이었던 것이다. 간단하게 금세 쾌활해지는 성격이었다. 신체가 건강하고 환경이 좋으니까 주위의 것이 모두 즐겁기만 했다. 때로 곤란한 일이 생겨도 그에게는 두통거리라기보다 한낱 재미있는 여흥이었다. 그만큼 그는 단단한 사람이었다.

만사가 이렇게 유쾌한 인간이었지만 결점도 있다. 그것은 화를 잘 낸다는 것이었다. 때로 싸움꾼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또 걸핏하면 직접 완력으로 해결하려 했다. 권투 솜씨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웨이크필드와 로빈 오이그가 처음에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이 두 사람, 소의 이야기 말고는 서로 통하는 화제나 관심이 없을 것 같은 이 두 사람에게 여하튼 아주 진한 우정이 싹텄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송아지 이야기, 카이로 소의 이야기 외에 로빈의 영어는 반편이었고 해리의 심한 요크셔 말투는 겔 언어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언젠가 민치무어의 습지대를 횡단할 때 로빈은 거의 한나절 걸려 겔 말로 송아지라는 단어의 정확한 발음을 가르쳐주려 했지만 허사였다.

트라게야에서 마더케인에 이르는 동안 근방의 언덕은 몇번을 되풀이해도 잘 안되는 해리의 굵은 목소리와 실패할 적마다 뱃속에서 터져나오는 웃음 소리로 진동하곤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공감하는 것이 있었다. 해리에게는 몰이라든가 스잔 등 여러 처녀들을 반하게 했던 노래 재주가 있었고 로빈은 로빈대로 스코틀랜드 고유의 피보로크 곡을 실로 약약하게 휘파람으로 부는 재주가 있었던 것이다.

잉글랜드인 해리를 더욱 기쁘게 한 것은 그가 북방의 노래, 경쾌한 것이든 슬픈 것이든 참으로 많이 알게 됐고, 어느새 그것을 베이스로 맞춰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해리가 경마나 닭싸움, 여우 사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로빈은 잘 알아듣지 못했고, 반대로 하일랜드의 요정, 유령 이야기, 민족전쟁, 약탈 행위 같은 옛 전설이 해리에게는 뚱딴지 같은 소리였겠지만, 그렇더라도 둘은 같이 있으면 즐거웠던 것이다.

이 3년 내내 둘은 항상 단짝이었고 여행도 방향만 같다면 꼭 함께 다녔다. 그것은 서로 편리하기도 했다. 하일랜드로 갈 때 잉글랜드 사람으로서는 로빈 이상의 길 안내자를 얻기란 불가능한 일이었고, 또 일단 해리가 말하는, 국경 안쪽으로 한 발 디디면 해리의 얼굴과 지갑이 로빈에게는 매우 유용했던 것이다. 사실 그는 뱃심이 좋아 한 두 번 크게 은혜를 입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토록 서로 사랑한 친구는 없었다
어찌 다툴 일이 일어날 까닭이 있으랴!

아아, 그토록 그들은 친구를 사랑하고
어떻게든 우정을 보답하고자 염원했거늘
지금은 하나의 벗조차도 남지 않고
아아 그는 그 벗과 싸울 결심을 세웠다.'
- 스코틀랜드의 옛 노래

두 친구는 전과 다름없이 다정하게 리데스딜의 초원을 넘어 캔버랜드의 스코틀랜드 쪽 황무지 지대를 지나고 있었다. 이렇게 황량한 지대에서는 소들이 제멋대로 먹이를 찾아가든지, 아니면 부근의 목장과 운 좋게 부딪히면 잠깐 침범, 실례하고 가는 일도 있다. 그런데 마침 무대가 바뀌었다. 마침내 울타리를 친 비옥한 지대에 내려왔지만 이제 제멋대로 소들의 배를 채울 수는 없다. 사전에 토지 소유자와 교섭을 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스코틀랜드의 큰 시장이 가까운 곳은 그랬다. 잉글랜드의 가축 상인도 스코틀랜드의 가축 상인도 몰고 온 소 얼마는 이 큰 시장에서 팔게 되지만, 그러려면 되도록 소의 원기를 북돋고 좋은 상태로 시장에 내보내야 했다. 그래서 초원의 이용권을 얻기 어렵고 값도 비쌌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헤어져 가야 했다. 제각기 소의 사료 조달을 위해 떠나는 것이다.

불운하게도 두 사람은 하필 근방에 땅을 소유하고 있는 어느 시골 신사의 땅을 동시에 교섭했다. 해리 웨이크필드는 전부터 잘 아는 관리인을 통해 교섭을 시작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그 주인인 시골 신사가 관리인에게 의심을 품고 '울타리 안의 목장을 누가 사용하려고 신청하면 반드시 사전에 자신에게 알려야 한다'고 지시했던 것이다.

마침 그 시골 신사 애어비 씨는 바로 전날 일이 생겨서 수마일 떨어진 북쪽으로 떠났기 때문에 관리인은 그 조건을 이미 끝난 것으로 마음대로 해석하고 해리 웨이크필드의 요청을 수락했다. 주인과, 아마도 자신의 이익을 잘 고려해준다면 허락한다는 것으로 얘기를 끝냈던 것이다.

한편 로빈 오이그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소를 몰고 가는 중이었다. 그 때 뒤에서 망아지를, 그것도 당시의 유행으로 털을 짧게 깎은 망아지를 타고 굉장히 멋을 부린 작은 남자가 뒤따라왔다. 착 달라붙은 가죽 바지를 입고 반짝반짝 빛나는 말채를 든, 목이 긴 이 사나이는 시장의 경기가 어떠니, 소 값이 어떠니 하며 오이그에게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로빈도 꽤 이야기가 통하는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말결에 어디 근방에 풀밭을 빌릴만한 곳이 없는가, 잠시 소에게 풀을 먹이고 싶다고 물어보았다. 운이 좋았다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으리라. 이 가죽바지의 사나이는 바로 먼저 해리가 관리인과 교섭한, 아니 그 때는 아직 교섭중이었을지도 모르는 그 목장의 소유주였던 것이다.

"그야 젊은이,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건 운이 좋은 거야. 보아하니 당신의 소도 퍽 지친 것 같은데. 바로 여기서 3마일쯤 가면 좋은 들이 하나 있지. 이 근방은 그 곳 밖에 없을 걸."

"2,3메에르나 4메에르 쯤이라면 소도 아직 걸을 수 있죠." 빈틈없는 로빈 오이그는 "그런데 그 풀밭을 2,3일 빌린다면 나리, 빌린 삯이 한 마리당 얼마입니까?"하고 물었다.

"뭐 서로 무리가 없도록, 겨울장을 볼만한 송아지 여섯마리 얻으면 더 말 않지."

"그렇더라도 어떤 소가 좋을까요?"

"응, 글쎄... 저 검은 놈으로 두 마리. 빨간 놈으로 하나... 그리고 저기 저 두 살 배기 소, 저 뿔이 휘어진 놈, 그리고 이 뿔없는 놈 정도면... 한데 대체 한 마리에 얼만가?"

"참, 나리는 눈이 높군요. 좋습니다. 척 들어맞았어요. 가령 내가 말이죠, 여섯 마리를 고른다고 해도 그 이상 고르진 못하죠. 내 자식처럼 잘 아는 내가 말이죠."

"그건 그렇고, 한 마리에 얼만가?" 애어비씨는 되풀이해서 물었다.

"도운이나 핼커크도 꽤 좋은 값이었다는데고 하던걸요."

이야기는 대개 이런 투로 나아가고 결국 소는 타당한 값으로 일단락 지었다. 로빈은 이것으로써 풀만 좋다면 웬 땡잡은 장사냐고 생각하고 있었다. 애어비씨는 줄곧 소떼를 따라갔다. 안내인으로서 소를 풀밭까지 넣은 것을 보기도 하려니와 스코틀랜드 일대의 최근 시황을 듣고싶기도 했던 것이다.

마침내 목장에 닿았고 풀의 상태는 아주 좋았다. 그러나 거기에서 놀라운 것은, 방금 소유주와 로빈 사이에 이야기가 됐던 풀밭에 관리인이 유유히 소떼를 끌어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애어비씨는 즉각 말에 박차를 가해 관리인에게 달려갔다. 관리인과 해리 사이의 이야기는 곧 알아들었으나 그는 해리에게 관리인이 여기를 빌려주긴 했으나 자기의 승인을 받지 않았으므로 풀은 아무데나 딴 곳에서 구하기 바란다, 아무튼 여기는 빌려줄 수 없다고 한 마디로 거절하고 말았다.

애어비씨는 관리인이 자신의 지시를 무시했다고 마구 힐난하고 그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지쳐버린, 모처럼의 진수성찬을 눈앞에 두고 뜯어먹으려는 해리의 소떼를 밖으로 쫓아내도록 명령했다. 대신 당장 로빈의 소떼를 넣어주라는 것이었다. 해리는 처음으로 로빈을 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때 해리의 가슴에 품은 감정으로는 당연히 애어비씨의 결정에 항의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잉들랜드인, 준법의 정신이 몸에 배어 있다. 더구나 관리인인 존 프리스뱀킨까지 뚜렷이 월권이라는 점을 인정한 이상, 해리로서도 억울하지만 실망한 소들을 다시 모아 어디든 다른 곳을 찾아 몰고 갈 수밖에 없었다.

일의 자초지종을 안 로빈 오이그는 난처했다. 그래서 해리에게 문제의 풀밭을 함께 쓰면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나 해리 웨이크필드는 자존심이 상했다. 앙연히 대답했다.

"까짓, 다 주지. 몽땅 줄게. 흥, 담배를 둘이 필 수야 있나. 높은 사람과 직통이라 평민 따위는 벙어리 방석이란 말이렸다. 제기랄 그만 둬. 난 말야, 더러운 구두에 입맞추고 남의 부뚜막에서 빵을 굽겠다곤 안해. 천만의 말씀이지."

로빈 오이그는 친구가 화를 내는 것이 슬프긴 했지만 무리라고는 보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친구를 설득해봤다. 불과 한 시간만 참아줄 수 없을까. 애어비씨의 집에 갔다가 소의 대금을 받은 즉시 다시 돌아와서 함께 딴 휴식장을 찾도록 하고 또 이렇게 둘이 엉뚱하게 엇갈리고 만 까닭도 자세히 설명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나 해리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

"그렇군. 그럼 장사까지 했군. 맙소사, 틀림없는 선생님이시군. 척척 장사의 썰물 때를 잘 맞추시거든. 가란 말이야. 지옥이든 어디든 맘대로. 여하튼 배신하는 녀석의 낯짝 따위는 두 번 다시 보고싶지 않으니까. 자네, 그래도 내 얼굴을 보는군."

"뭐, 누구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지." 로빈도 다소 화가 났다. "그뿐인가. 오늘이라도 자네, 저 아랫마을에서 묵게 되면 틀림없이 또 한번 보기 마련일걸."

"뭐라고? 아무튼 나오지 않는 게 나을 걸세." 해리는 대답했다. 그리고 휙 등을 돌리고 관리인과 함께 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관리인도 어떻게 해서든 해리에게 서비스를 함으로써 약간의 주머니 계산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두세 군데 근방의 농장주들을 부딪혀 보았으나 맘에 드는 풀밭을 제공하겠다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해리 웨이크필드는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겨우 주막집 주인을 통해 우선 급한 불을 끌 수밖에 없었다. 이 주막집은 처음에 그가 로빈과 헤어질 때 오늘 밤 함께 묵기로 약속을 정했던 집이었다. 주막집 주인은 바로 옆의 습지에 먼젓번 관리인이 요구한 풀값보다 조금 싸게 소를 넣어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땅은 습기가 많고 거친 곳이었다. 이런 곳에 돈까지 지불하고 보니, 해리는 그것이 로빈의 우정과 신의의 배신의 결과라고 느꼈다. 또 해리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것은 관리인과 주인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두어 손님이었다. 관리인으로 말하자면 생각지도 않던 주인의 꾸지람을 산 이유가 로빈에게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로빈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질 이유가 분명했다.

주막 주인과 손님들이 해리의 노여움을 부채질한 것은 우선 옛날부터 국경지대 사람들에게 남아있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었다. 또 아담 이래 신분, 계급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일이 벌어져라'는 심정도 분명히 작용했다. 더구나 맥주를 마시며 그런 얘기를 한 것이 기분을 선동하는 데 큰 몫을 했다. 말 많은 주인과, 배신자에 대한 벗의 저주는 큰 컵을 몇 차례 비우는 동안 완전히 일종의 맹세로 굳어졌다.


 



그 때 애어비씨는 로빈을 집에 끌어들여 기분이 으쓱한 상태였다. 식품 저장고에까지 들어가 로빈의 앞에 얼린 고기를 잔뜩 갖다 놓고, 집에서 만든 맥주를 큰 잔에 가득 부어 거품을 불고 있었다. 좀처럼 얻어먹기 힘든 이런 음식을 로빈이 마음껏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서 애어비씨는 무척 기뻤다. 그 자신은 조용히 파이프 담배를 피우면서 방안을 왔다갔다 했다. 이 귀한 손님과의 환담은 가장으로서의 위신과 잡담을 즐기는 서민성 이 두 가지를 잘 만족시키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던 길에 또 한 떼를 봤는데..." 애어비씨가 말했다. "그 소들도 역시 당신 고향에서 온 것 같던데. 물론 소는 당신 것만 좀 못하더군. 거의 두 살 짜리 소였고, 몰이꾼은 키가 큰 사나이던데, 당신처럼 킬트 스커트(스코틀랜드 특유의 허리에 감는 스커트)는 아니고, 바지를 입었어. 누군지 아나?"

"글쎄요, 휴 모리슨일까? 그래요. 그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이건 그 친구가 이긴 셈이군. 그러나 이렇게 서둘러 왔다면 아무리 대단한 친구라고 해도 꽤 피곤할 걸. 어디까지 왔을까요?"

"여기서 한 6,7마일쯤 될거야. 녀석을 떼어놓은 곳이 크리슨베리 크락이었고 자네를 만난 곳이 훗란부슈였으니까. 소가 지쳤다면 그만 팔아버릴지도 모르지."

"아닙니다. 그렇진 않아요. 휴 모리슨은 그런 장사는 못합니다. 아무래도 이 로빈 오이그처럼 스코틀랜드 사람 아니면 못하죠. 자 그럼 이만 물러가겠어요. 난 저 아랫마을에 가서 해리 웨이크필드 녀석이 아직도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봐야겠습니다."

주막집의 패거리는 아직 한참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화제는 당연히 로빈 오이그의 행동이 중심이었는데, 마침 당사자가 딱 들어온 것이었다. 그런 경우 언제나 그렇듯, 그를 화제로 한 얘기는 일순간 딱 그쳤다. 그리고 모두들 차디찬 침묵으로 그를 맞이했다. 이러한 환영은 말하자면 몇 백마디 호통보다 더 그가 매우 반갑지 않다는 것을 내방객에게 알려주게 된다.

놀라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별로 이 냉대에 물러설 이유도 없는 오이그는 태연히 아니 차라리 거만하다고 할 태도로 걸어갔다. 말 붙이는 사람도 없어서 그 역시 인사 한 마디 없이 곧바로 난로 옆, 해리와 관리인 그리고 손님 두셋이 둘러싸고 앉은 테이블에서 좀 떨어져 앉았다. 그 넓은 캔버랜드식 부엌은 더 떨어져 앉았어도 여유가 있었으련만...

로빈은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싼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마침 떨어졌는데요." 주인인 로버트 헤스켓이 말했다. "손님께선 자기 담배를 가지신 것 같은데 그러면 술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손님의 고향에선 그게 당연한 걸로 아는데요."

"당신두,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바지런히 움직이고 있던 서글서글한 안주인이 말했다. 그리고 재빨리 그에게 술을 갖다 주고 "손님이 좋아하시는 걸 당신도 잘 알지 않아요? 당신 장사는 손님을 존중하는 거예요. 스코틀랜드 손님은 맥주를 더 달게 마시는지 모르지만 값 치르는 것은 틀림없다는 걸 당신도 잘 알지 않아요."

그러나 로빈은 이들 부부의 대화에 거의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다. 둥근 병을 높이 쳐들고는 주막 안의 손님들에게 소리 내어 여러분을 위해, 시장의 경기를 위해 축복하며 건배했다.

"북쪽 땅 소몰이꾼 따위는 아예 기어 들어오지 않는 편이 낫지." 농장 주인 한 사람이 말했다. "저 하일랜드의 못된 소가 이 잉글랜드 목장을 마구 파헤치게 할 수는 없지."

"당치않은 소리. 그건 말도 안돼." 로빈은 조용히 대꾸했다. "사실 불쌍한 우리 스코틀랜드 소들을 홀딱 쳐먹고 살찌는 건 잉글랜드 인간들이야."

"그보다는 하일랜드의 소몰이들을 홀딱 처먹어줄 사람이 누구 없을까." 딴 농장주가 말했다. "그 놈들 눈이 생생하게 번쩍인데서야 어디 우리 잉글랜드 사람들이 먹을 걸 제대로 먹겠나."

"또 있지. 멀쩡한 놈이 느닷없이 나타나 고용인과 주인 사이에 끼어들어 주인 기분을 잡치게 한단 말이야. 두 사람 새에 들어와 훼방을 놓거든." 이렇게 말한 것은 바로 애어비씨의 농장 관리인이었다.

"그건 농담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로빈은 아직 평정을 잃지 않은 듯 말했다. "한 사람의 인간에겐 지나친 말이군."

"농담이라니, 이건 진담이야. 이봐, 로빈 오이그인지 뭔지 모르지만, 똑똑히 말해두지. 여기 있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알아둬. 네 놈의 이 친구, 해리 웨이크필드에 대해 네 놈이 한 짓은 인간 쓰레기 똥개 새끼 같다는 거야."

"그래, 잘 알겠어." 로빈은 변함없이, 놀라울 만큼 침착했다. "너희들 모두의 소갈머리에 나도 감탄했어. 너희들의 생각, 너희들의 하는 짓이 난 조금도 탐탁치 않지만 말이야. 허나 해리가 그렇게 고생을 했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 값을 치를 수 있는가 그것도 말해줄 수 있지 않느냐 이거지."

"그건 그래." 해리 웨이크필드는 그때까지 잠자코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로빈에게서 받은 상처에 대한 노여움도 노여움이지만, 지금까지의 오랜 우정 때문에 마음이 착잡했던 것이다. 그가 비로소 입을 연 것이다. 그는 벌떡 일어나 로빈에게 가까이 갔다. 로빈도 일어서서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해리, 그래 그래. 해 버려. 눕혀버려." 사방에서 일제히 외쳤다. "한 대 갈겨서 늘씬하게 뻗게 만들어."

"다들 조용해. 그래서 말이야." 해리는 로빈을 돌아보며 경의와 도전이 반반 뒤섞인 표정으로 내민 손을 잡았다. "이봐, 로빈. 오늘 네가 한 짓은 누가 뭐래도 심했다. 하지만 말이야. 사나이답게 손을 잡고 어디든 밖에서 한 바탕 겨루고 싶다면 내 너를 용서해도 좋아. 그리고 다시 한 번 지금보다 더 사이 좋게 지내보자."

"하지만 말이야." 로빈이 대답했다. "이번 일은 다시 말하지 말고 이대로 화해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다리나 허리를 다치지 않고 말이야. 이대로 더 좋은 친구가 되자."

그러자 이 말을 들은 해리는 로빈의 손을 놓았다기보다, 거칠게 뿌리쳤다.

"난 말이야, 지난 3년간 이런 겁쟁이와 사귄 줄 몰랐는데..."

"겁쟁이? 내 이름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말이야." 로빈의 눈이 번쩍였다. 그러나 아직은 흥분을 꾹 누르며 말했다. "이봐, 해리 웨이크필드, 저 후르의 여울에서 말이야. 시꺼먼 바위 위에서 허우적대던 너, 강의 뱀장어들이 고마운 미끼라고 기다리던 때 너를 건져준 이 팔과 다리가 설마 겁쟁이의 것이라곤 못하겠지?"

"그렇지, 그건 네 말이 맞아." 해리는 적잖이 가슴이 섬찟했다.

"야, 이거 왜 이래, 해리." 관리인이 외쳤다. "설마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지는 건 아니겠지? 아 참 스코틀랜드 킬트 따위를 두른 녀석과 오래 있으면 - 사나이 본때도 잊는 모양이구만."

"여보슈 프리스밤킨씨, 똑똑히 가르쳐 주지. 남자의 본때를 잊은 건 아니야." 해리는 말을 계속했다.

"이봐 로빈, 그건 틀렸어. 아무튼 한바탕 해보지 않으면 안돼. 그러지 않으면 둘 다 이곳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거야. 절대 너에게는 상처 같은 건 입히지 않을 테니까. 뭐하면 네가 원하는대로 장갑을 끼어도 좋아. 자 사내답게 나가는 거야."

"하지만 강아지처럼 맞은들 쓸데없는 짓 아닌가." 로빈이 말했다. "내가 너에게 나쁘게 했다면 난 얼마든지 나갈 수 있어. 여기 법률도 언어도 전혀 모르지만 말이야."

"안돼, 안돼. 법률이 문제가 아니야. 재판 문제도 아니구. 실컷 한바탕 하는 거야! 친구는 그때부터 되는 거야." 모인 패들이 모두 한마디씩 했다.

"그러나 해리." 로빈이 말했다. "가령 한다고 해도 말이다. 난 원숭이처럼 때리고 할퀴고 하는 싸움은 할 줄 모른다."

"그럼 어떡하면 좋다는 거냐." 해리가 말했다. "어쨌든 나와 대등하게 맞서기는 힘들 줄 알고 있지만 말이다."

"나 같으면 단검을 갖고 하지. 그리고 먼저 피를 낸 편이 칼을 거두고... 나리들이 하는 그 식으로 말이다."

물론 그 말은 냉정한 이성의 소리라기보다는 차츰 복받쳐오르는 감정에서 자기도 모르는 새에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 도전을 듣고 사람들은 크게 웃어댔다. 동시에 사방에서 벌떼처럼 떠들어댔다.

"나리라는데!" 누군가 외치자 또 웃어댔다. "훌륭하신 나리셔! 여봐, 라프 헤스켓, 어때 결투용 칼 두 자루 있지? 나리께 드리는 거야."

"없는데. 칼라일의 병기고에 사람을 보내면 있겠지. 하지만 그때까지 포크라도 두 개 빌려드릴까? 그런대로 써보지 그래."

"쓸 데 없는 농담은 그만두게." 한 사나이가 말했다. "적어도 스코틀랜드 놈이라면 태어나서부터 머리엔 푸른 모자, 허리엔 단검과 피스톨, 이것만은 갖고 있는 법이야."

"그러나" 관리인이 또 입을 벌렸다. "아무래도 고비 성에 사람을 보내서 나리께 이 나리의 후견인을 맡아 주십사 부탁을 해야겠지."





일제히 퍼붓는 조소 속에서 불현듯 로빈의 손은 본능적으로 어깨걸이 밑을 찾았다. "하지만 역시 그만둬야지." 그는 겔 말로 중얼거렸다. "부끄럼도 예의도 모르는 돼지 같은 놈들이다. 악마라도 잡아 가라지."

"자, 모두 길이나 비켜라." 입구쪽으로 걸어가며 그는 말했다.

그 때 딱 커다란 덩치를 내밀고 버티며 그의 길을 가로막은 건 과거의 벗 해리였다. 로빈 오이그가 밀어 제치고 나가려는 순간 그는 느닷없이 얻어맞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싸움이다, 싸움." "해라 해리!" "뉘어버려." "어이 조심해. 아니 저 놈 피가 나는군!" 입이란 입이 모두 미치광이처럼 외치는 바람에 새까만 나무 선반에 매달아놓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덩어리가 마구 흔들리고 벽의 선반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큰 접시까지 서로 맞닿아 달그락 소리를 냈다.

여하간 굉장한 소동이었다. 로빈은 겨우 땅에서 일어났지만 콱 흥분이 치밀어 오르면서 이성이나 자제력을 모두 잃고 말았다. 분노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산고양이처럼 대들었으나 노여움만으로 훈련으로 다진 주먹에 맞설 수는 없었다. 여지없이 또 얻어맞고는 그 일격에 그대로 땅바닥에 뻗어버렸다. 주막 안주인이 놀라서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관리인이 제지하며 가까이 가지 못하게 했다.

"내버려 둬." 그는 말했다. "이제 살아날 거야. 그러면 또 덤비겠지. 아직 덜 맞았거든."

그러나 해리 본인은 옛 우정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마음이 되살아났는지 "아니, 이제 그만, 이쯤 해두겠어. 뒤는 당신에게 맡기지, 프리스밤킨씨. 당신도 한 마디 하고싶을 테니까. 그리고 로빈 녀석 싸움을 시작하는 데 쓸데없는 것조차 벗을 줄 모르니까 말이야. 어깨걸이를 너덜너덜 걸치고 덤벼들다니. 임마 로빈, 일어서! 자 이젠 친구다. 너의 일, 너의 고향 이야기를 아직도 뭐라고 그러는 놈이 있으면 너 대신 내가 한꺼번에 맡아 주지."

그러나 로빈의 분노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하겠다고 발버둥쳤다. 그러나 한편에서 안주인이 말리고 또 해리도 이미 맞설 의향이 없음을 알자 자연 그의 노여움은 마음 속의 앙금으로 가라앉았다.

"자, 이제 감정은 풀자." 해리는 영국인다운 뱃심으로 배포 좋게 말했다. "자, 악수. 다음부턴 이제까지보다 더 사이 좋게 지내자."

"사이좋게?" 로빈 오이그는 거친 소리로 외쳤다. "사이 좋게라구? 천만에,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해리."

"끈덕진 스코틀랜드 근성이구만. 연극 대사는 아니지만, 크롬웰 각하, 제발 벌을 주십사 하는 건가? 네 신상에 뭐가 좋은 건지 모르겠나? 똥 같은 놈, 생각해봐. 사람이 싸운 뒤 화해하는 말 말고 그 이상 할 말이 뭐가 있어?"

아무튼 둘은 이런 식으로 헤어졌다. 로빈 오이그는 아무 소리없이 동전 한 닢을 꺼내 탁자에 던지고 곧바로 주막을 나갔다. 나갈 때 문간에서 잠깐 뒤돌아보며 두고 보자는 뜻인지 위협의 뜻인지 그는 손가락을 세워 해리쪽을 향해 흔들었다. 그리고 밝은 달빛 아래로 사라져갔다.

그가 나간 뒤 관리인과 해리는 사소한 말다툼을 했다. 관리인은 로빈을 괴롭혀준 것이 기뻤던 반면 해리 웨이크필드는 전후가 모순된 태도로 이번에는 로빈의 역성을 들어 자칫하면 싸움도 불사할 태세였다.

"물론 잉글랜드 사람처럼 주먹은 시원치 않지만 그건 지방 특성이라 어쩔 수 없는 거야"라는 요지였다. 그러나 다행히 이번의 싸움은 안주인의 호통으로 그럭저럭 무사히 끝났다. "더 이상 이 집에서 싸움은 안돼요. 하지만 웨이크필드씨, 이제 알게 될 거예요. 옛 친구를 원수로 만든 것이 어떤 결과가 될 것이라는 걸."

"원, 아주머니두, 로빈이란 녀석은 멋진 놈이예요. 원한 같은 건 품지 않아요."

"안심해서는 안되요. 당신이 얼마나 스코틀랜드 사람을 잘 아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원한과 집념은 대단해요. 제 어머니가 스코틀랜드 사람이었거든요." "그래, 그래서 그렇게 성격이 앙칼맞구먼." 주인 라프 헤스켓이 아내의 말을 받았다.

부부의 대화를 끝으로 화제는 바뀌었다. 술집에는 새로 손님이 들어오고 나가는 손님도 있었다. 이야기는 주로 앞으로 설 장날,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등 각지의 소 시세에 대한 소문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흥정이 시작되고 운 좋게도 해리 웨이크필드의 소떼 얼만가를 유리한 조건으로 사준다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초저녁의 불쾌했던 싸움 같은 건 벌써 잊어버릴만 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설령 에스크에서 이든까지 소라는 소는 몽땅 자기 것으로 만든대도 잊지 않을 사나이가 있었다. 바로 로빈 오이그 매콘비히가 그였다. "아, 무기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았다니." 그는 중얼거렸다.

"생전 이런 일은 처음이다. 하일랜드에서 태어난 사나이에게 그 단검을 벗어놓으라면 말이 되나, 빌어먹을, 단검 - 그렇다. 잉글랜드의 피, 숙모가 그렇게 말했지. 그 아주머니가 말한 것 치고 그대로 되지 않은 게 없지." 그 무서운 예언이 떠오르자 그의 언뜻 떠올랐던 살의(殺意)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 결심으로 변했다.

"그렇지, 모리슨 녀석, 바로 뒤에서 따라오고 있을 거다. 까짓 백 마일이 떨어졌대도 무슨 상관이냐."

마냥 흥분하기 쉬운 성미는 고스란히 무서운 결의, 그리고 행동력으로 나타났다. 그는 하일랜드의 자랑인 나는 듯한 걸음을 황야로 옮겼다. 오늘 애어비씨의 얘기로 미루어볼 때 모리슨은 반드시 이 길로 올 것이다. 마음은 굴욕감, 그것도 친구에게서 받은 굴욕감 때문에 더욱 쓰라렸다. 그리고 그 친구는 이제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겨졌다. 그에 대한 복수심이 마음 속에 불타 올랐다.

그렇잖아도 그의 자부심, 태생과 가문 등에 대한 은근한 자랑은 말하자면 수전노의 보물과 마찬가지였다. 남몰래 혼자 즐긴다는 의미에서 더욱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지금은 그 보물을 빼앗긴 셈이다. 남 몰래 예배하던 우상이 더럽혀지고 짓밟힌 것이다. 얻어터지고 채이고 모욕을 당한 것이다. 가문의 이름 앞에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심정이었다. 이제 아무 것도 없다. 남은 것은 다만 복수 뿐이다. 이런 생각은 한 발 한 발 숨차게 걸음을 내디딤에 따라 더욱 굳어졌다. 이 복수는 받은 모욕과 똑 같은 모양으로, 일격에 되돌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

로빈이 주막을 나왔을 때 그와 모리슨의 거리는 적어도 7,8마일 정도였다. 모리슨은 소떼의 걸음으로 인해 그리 빨리 움직일 수 없었다. 반면 로빈은 맑은 11월의 달빛 아래 바윗돌과 히이드가 널려있는 들을 나는 듯이 걸어갔다. 밤 서리가 내려 그루터기 밭들과 나무 울타리들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모리슨 일행인 듯 소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마치 두더지 떼처럼 습지대를 걸어오는 소의 모습이 나타났다. 마침내 만났다. 그는 재빨리 소떼 사이를 뚫고 지나가 모리슨을 찾아냈다.

"어, 수고가 많구만." 모리슨이 말했다. "로빈 매콘비히 아닌가! 갑자기 귀신처럼 웬일이야?" "맞아, 로빈 오이그 매콘비히일세. 아니, 그게 아닐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어떻든 상관없고, 그보다 내 단검을 주게."

"뭐라고? 하일랜드에 돌아갈 셈인가? 제기랄, 장에 내놓기도 전에 벌써 다 팔아치웠단 말인가? 원 재빠른 장사꾼이구먼." "아니, 판 게 아니야.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두 번 다시 고향에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아무튼 휴, 내 단검을 주게. 주지 않으면 좀 시끄러울지 몰라." "그래, 알겠어. 하지만 로빈, 주기 전에 좀 생각이나 해보세. 본래 이 단검은 하일랜드 사내가 가지면 무섭고 위험한 무기야. 자네 혹시 어디 털러 갈 생각이라도 한 건가?"

"노, 농담은 말게! 아무튼 칼이나 주게." 로빈 오이그는 답답해졌다. "뭐, 그리 급하게 굴진 말게." 사람 좋은 휴 모리슨은 진정시키듯 말했다. "찌르고 베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을 알려주지. 이봐, 자네도 알테지만 하일랜드 사내나 로울랜드 사내, 그리고 국경 지방의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한 발 국경만 넘어서면 한 형제나 마찬가지야. 보게, 뒤에서 자꾸 오는 에스크델의 젊은이들이나 싸움 좋아하는 리데스데일, 로카비 친구들도 그렇구, 라스트라자의 4인조나 그밖에 여러 친구들도 이제 자주 만나게 되지 않나! 자네가 뭔가 일을 당했다면 여기 있는 이 힘센 모리슨 나리도 있는데, 설령 칼라일이나 스탄빅스 패들이 한꺼번에 덤빈대도 우리들 손으로 너끈히 맛을 보여줄 수 있어."

"아니, 실은 말이야" 로빈 오이그는 대답했다. 이 이상 휴의 의혹을 받고싶지 않았던 것이다. "블랙워치(스코틀랜드 제42 고지연대의 별명) 부대에 입대했어.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 출발해야 해." "뭐, 입대라구?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닌가? 아니면 취하기라도 했나? 돈을 주고 그만 둬. 스무 장쯤은 빌려주지. 소만 판다면 스무 장쯤은 어떻게 되겠지."

"뜻은 고마워. 참 고마워 휴. 그러나 난 어떻게든 가야 해. 그러니까, 칼을 줘. 칼 말이야." "그래, 주지. 도저히 말을 들을 것 같지 않군. 그러나 내가 지금 말한 것을 꼭 한 번 생각해보게. 그건 그렇고 볼키다의 산골이 실망할 거야. 다름아닌 로빈 오이그 매콘비히가 엉뚱한 길로 가버리니 말이야."

"볼키다에서 실망한다구? 그렇겠지." 로빈은 상심한듯 말했다. "아무튼 휴, 잘있게. 장사 잘하구. 앞으로 두 번 다시 자네와는 시장에서나 어디서나 만나지 못할 걸세." 그는 바쁜 듯 친구와 악수하고는 오던 길을 다시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갔다.

"뭐가 어떻게 된 모양인데." 모리슨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아침이면 더 자세히 알게 되겠지."




그러나 아침이 채 오기 전에 이야기의 파국은 이미 다가왔다. 이미 두세 시간쯤 지나 그 싸움이 거의 잊혀졌을 때였다. 로빈 오이그는 헤스켓의 주막으로 돌아왔다. 술집 안은 여러 손님이 들어차고 그만큼 소란했다. 유달리 조용히 주고받는 이야기는 거래의 흥정이었을 것이고 유쾌히 노는 것밖에 할 일이 없는 패들은 그저 웃고 노래하고 떠득석하게 농담을 지껄였다. 그 패거리 속에 해리 웨이크필드는 끼어 있었다. 들일을 하는 옷, 못박은 구두, 또 잉글랜드인 특유의 유쾌한 얼굴의 패거리 사이에서 그는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야 농부가 좋아, 수레 끌고, 로자 나리인지, 어쨌단 말이냐?'

그 때 돌연 귀에 익은 목소리, 강한 하일랜드 사투리가 들려왔다.

"이  자식, 해리 웨이크필드, 사나이라면 나와라."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손님들은 일제히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 하일랜드 녀석이야." 이미 술이 꽤 취한 관리인이 말했다. "오늘 말이지, 해리에게 뜨거운 국을 한 그릇 얻어먹었지. 양배추 수프가 식었다고 또 데우러 온 모양이지."

"해리 웨이크필드!" 불길한 도전이 다시 소리 높이 울렸다. "사나이라면 나왓!"

이미 생각의 결론을 내리고 지르는 소리, 그것은 그 울림만으로도 기묘하게 듣는 사람의 귀를 울리고, 공포를 자아내는 어떤 것이 있었다. 손님들은 일제히 벽으로 물러나 한가운데 서 있는 하일랜드 사나이, 눈을 험하게 치켜뜨고 결의에 찬 굳은 얼굴을 응시했다.

"로빈, 얼마든지 상대해주지. 단 그건 말이야, 자네와 화해의 악수를 하고 언짢은 것을 모두 술로 씻어버리기 위해서야. 좋지 않나? 어쩐지 자네는 악수하는 법도 모르는 것 같지만 뭐 자네 마음이 나쁜 것은 아니니까."

그는 상대방 바로 앞에 가서 섰다. 상대방을 믿고 있는 그의 거침없는 얼굴은 어둡고 불길한, 요기(妖氣)마저 띠고 있는 로빈의 얼굴과는 기묘하게 대조적이었다. 로빈의 눈동자는 외골수로, 마음 속에 자리잡은 복수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로빈, 자네는 잉글랜드 태생이 아니야. 그렇지 않은가? 계집애처럼 제대로 싸울 줄 모른다고 해서 그게 자네의 수치는 아니야."

"뭐라고? 그렇지 않아." 로빈의 대답은 날카로웠지만 이상하게도 냉정하게 들렸다. "이제 그걸 보여주지. 해리, 자네는 오늘 색슨 사람의 싸우는 법을 보여주었지. 그러니까 이번엔 하일랜드 젊은이의 방법을 가르쳐주지."

그 뒤는 바로 행동으로 이어졌다. 쑥 칼을 뽑았는가 싶더니 날쌔게 커다란 잉글랜드 농민의 가슴에 꽂았다. 있는 힘을 다해 필살의 일격을 가한 것이다. 해리의 가슴뼈에서 일순 뿌드득 하는 소리가 나고, 칼은 바로 심장을 찔렀다. 해리 웨이크필드는 한마디 신음 소리를 냈을 뿐 그대로 쓰러져 숨이 끊어졌다. 로빈은 이어 관리인의 멱살을 잡고 단검을 목줄에 갖다 댔다. 공포와 경악으로 관리인은 방어할 기력조차 없었다.

"네 녀석도 함께 재워주려고 했다." 로빈이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칼에 이 멋진 사내의 피와, 너 따위 거지 같은 녀석의 피를 함께 묻힐 수는 없지." 로빈은 상대의 몸을 힘껏 밀어 던졌다. 사나이는 바닥에 쓰러졌다. 로빈은 동시에 또 한 손으론 피투성이 흉기를 석탄불 속에 탁 던졌다.

"자, 잡을테면 잡아라. 피는 이 불로 깨끗하게 할 테다."

모두들 넋을 잃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로빈은 조용히 경관을 찾았다. 경관이 한 사람 다가섰다. 그는 순순히 줄에 묶였다.

"지독한 짓을 저질렀군." 경관이 말했다.

"당신 잘못이야." 로빈이 대답했다. "두 시간 전에 당신이 만일 저 녀석을 말렸더라면 저 녀석도 아직 살아서 생생하게 떠들고 있을 텐데."

"하지만, 이건 벌이 무거울 거야." 경관이 또 말했다. "상관없어. 죽으면 온갖 빚이 모두 끝나는 거야. 이 녀석한테도 빚을 다 갚는 거니까."

구경꾼들의 공포는 점차 분노로 변했다. 그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던 사나이가 당장 눈앞에서 살해 당한 것이다. 아무리 복수라 해도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들은 당장 여기서 린치를 가해 죽여 버리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찰도 수수방관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몇몇 비교적 이성을 잃지 않은 패들의 도움을 받아 칼라일까지 가는 호송마차를 찾을 수 있었다. 다음 순회 재판까지 판결을 기다리기 위한 것이었다.

호송을 준비하는 동안 로빈은 전혀 무관심한 태도로 거의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막 주막을 나서려고 할 때 처음으로 다시 한번 시체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시체는 의사의 검시가 있을 때까지 커다란 탁자, 바로 얼마 전까지 해리 웨이크필드가 의기양양하게 좌중을 휘어잡고 있었던, 바로 그 탁자 위에 눕혀져 있었다. 얼굴에는 깨끗한 손수건이 덮여 있다. 구경꾼들은 놀래서 야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로빈은 살짝 손수건을 제치고 슬프게, 그러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친구의 죽은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 바로 아까까지 생명이 넘치던 그 얼굴은 자기 힘에 대한 흐뭇함과 적에 대한 경멸, 그리고 지금은 화해로 누그러진 표정 그런 것들이 뒤섞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 방금 방안을 피바다로 만든 상처에 범인의 손이 닿아 다시 피를 뿜지나 않을까 구경꾼들은 아슬아슬한 심정이었다. 로빈은 도로 손수건을 덮고는 모두에게 의외인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정말 멋진 녀석이었어."





이 이야기도 마지막이 가까워졌다. 이 불행한 하일랜드 사나이는 칼라일에서 재판을 받았다. 내 자신도 젊은 스코틀랜드 법률가이자, 변호사의 한 사람으로서 다소 이름이 있었기에 캠버랜드 주 장관의 호의를 얻어 판사단의 한 사람에 끼어있었다. 사실 심리는 이미 이야기한 내용을 그대로 되짚는 정도였다. 복수라고는 하지만 암살이라는 너무나 非잉글랜드적인 이 범행에 대해 처음에 법정의 반감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피고의 뿌리깊은 민족 정서, 육체적 폭력을 당했을 때 그로서는 지울 수 없는 치욕, 불명예로 여길 수밖에 없다는 점이 재판에서 잘 설명됐다. 또 그가 처음에는 무척 인내심을 발휘하며 화해하려 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잉글랜드 법정의 관용이라고 할까, 그의 범행이 결코 잔인한 심정이나 상습적인 범죄 성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도 충분히 이해됐다. 잘못된 명예심으로 인해 돌발적인 일탈 행위가 나온 것이라는 점을 재판 관계자들이 이해하게 된 것이다. 특히 노(老) 재판장이 배심원에게 한 발언은 대단한 웅변이나 비장한 감정을 담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법으로 제재를 가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판결을 내리는 것이 무척 불쾌하고 꺼림칙한 그런 사건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 특이한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적용해야 할 이 법률은 분명히 정당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지금 적용하는 것은 슬픈 의무입니다. 이 사건은 아주 중죄이지만 악랄한 마음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정의에 대한 불행한 편견, 그것에서 생긴 것입니다."

"여기 두 사람이 있습니다. 둘 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상당히 존경을 받았으며, 또 서로 무척 친한 벗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이 살해당했고, 또 한 사람 즉 친구를 죽인 당사자는 지금 직접 법률의 복수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 민족의 감정, 민족적 정서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행동한 것입니다. 이들은 고의로 잘못된 길에 접어들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잘못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충분히 동정의 여지가 있습니다."

"출발점에서는 피고에게 잘못이 없습니다. 피고는 울타리 내 풀밭에 대한 점유권을 정당한 시장 법칙에 따라 합법적인 계약을 거쳐 소유주인 애어비씨로부터 얻었습니다. 그렇게 정당한 권리에 대해 잘못된 비난, 특히 성격이 급한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그런 비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피고는 평화와 우정을 위해 자신의 권리 절반을 양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호의는 모욕적으로 거절 당했습니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그 뒤 헤스켓씨의 주막에서 벌어진 일 역시 피고인은 피해자를 포함해 여러 구경꾼들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오히려 이들 당사자들을 부추겨 일을 크게 벌어지게 만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피고는 화해를 원했고, 대화로써 문제를 풀고자 했으며 치안관계자나 중재인의 중재를 기꺼이 따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은 그런 호의마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모욕을 받고 거절 당했습니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구경꾼들은 페어플레이라는 국민정신을 망각한 자들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피고가 끝까지 평화적으로 현장을 피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피해자에게 붙잡혀 구타 당하고 피를 흘렸던 것입니다."

"배심원 여러분, 앞서 진술한 박학다식하신 검사의 논고를 본관은 매우 괴로운 심정으로 들었습니다. 검사께서는 피고의 행위를 매우 악랄한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즉 피고가 피해자에게 당당히 도전하지 않고, 또 권투의 규칙에 따라 싸우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비열한 이탈리아 사람처럼 단검을 흉기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정정당당히 싸워서는 결코 이기지 못할 상대를 흉기로 쓰러뜨렸다는 얘기입니다."

"바로 논고의 이 부분에서 피고는 특히 용기 있는 자 특유의 혐오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로서는 살이 떨리는 일일 것입니다. 본관이 이 고발의 부당함을 하나하나 논박해야 아마 피고도 본관의 공평무사함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피고가 꺾이지 않는 인간, 다소 과도하리만큼 불굴의 인간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본관으로서는 피고의 그런 본성이 다소 부드러운, 아니 그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는 충분한 교육을 받았더라면 하는 아쉬운 심정을 갖게 됩니다."

"배심원 여러분, 검사께서 지적한 격투의 규칙 문제는 사실 투우장이나 투계장, 또 곰 따위 동물들이 싸우는 장소에서는 분명 공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는 다릅니다. 자칫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이런 싸움에서 그런 격투 규칙은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의 쌍방 당사자가 동등한 입장에 있고, 또 관련 법률을 양 당사자가 모두 알고 있으며 그 법률을 받아들이는 것도 양측이 모두 양해한 경우에 있어서만 그런 규칙은 의미가 있습니다."

"가령 높은 지위에다 교양까지 갖춘 신사에게, 젊고 기운이 세고 권투 기술이 뛰어난 사람과 대결하면서 똑 같은 격투 규칙을 따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권투의 규칙 역시 검사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유쾌한 옛 잉글랜드의 페어플레이 정신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면 설마 이런 경우에까지 적용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배심원 여러분, 만일 이 피고가 받은 것과 같은 직접적인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잉글랜드 신사가 받았을 경우 그 신사에게 자신을 지키기 위한 단검의 사용을 허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불쾌한 상황에 쫓긴 이 외국인, 이방인도 법에 의해 보호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피고인이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사람의 조소를 받고,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에 의한 직접 폭력 같은 불가피한 강박을 받아 마침내 흉기를 사용했다면(게다가 이 단검은 피고의 지방에서는 으레 몸에 지니는 것이라고 합니다) 본관은 양심적으로 도저히 이 사건을 모의살인죄로 판결해 달라고 배심원 여러분에게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번 피고의 자위 행위는 우리들 법률에서 말하는 정당방위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적용할 죄명은 모의살인이 아닌, 고의살인 정도여야 할 것입니다. 덧붙여 제임스1세가 공포한 법 제3장에 대해 말씀 드리자면, 작은 흉기에 의한 살해의 경우 비록 사전 음모나 살해 의사는 없었다 해도, 소위 교회 재판에 있어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사건의 경우에는 이것 역시 관대한 소송 제기가 옳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 법률 역시 일시적인 배경에 의해 제정된 것이며 범죄의 실체에 변함이 없는 한 그것이 단검에 의한 것이든 장검이나 권총에 의한 것이든 모두 똑 같은 사건으로 취급하는 것이 근대법 정신에 일치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배심원 여러분, 사실 이 재판의 핵심은 최초의 폭행이 일어난 후 복수극으로 살인을 벌이기까지 두 시간이 경과했다는 그 점에 있습니다. 직접 몸을 부딪혀 싸움을 벌이는 동안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 법은 인간성이 약하다는 점을 참작하고 그런 격한 감정에 대해 너그럽게 판단합니다. 예를 들어 싸움 당시의 고통이나 폭행에 대한 두려움, 몸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폭력 등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필요 이상으로 상대방을 괴롭히거나 상처를 입히는 과도한 방어행위의 수준을 엄밀히 따지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그런 정황을 충분히 배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피고처럼 폭력 사건 이후 12마일을 걸었다면, 아무리 빨리 걸었다고 해도, 충분히 냉정을 되찾을 시간은 있었을 것입니다. 충분히 생각할만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살인 사건을 저질렀다면 이것은 이미 일시적인 분노, 일시적인 공포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예정된 복수를 목적으로 저질러진 행위였으며 여기 대해서는 법률도 동정의 여지가 없고, 별다른 재량의 여지도 없습니다."

"물론 이 불행한 피고인의 행위는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는 특수한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피고가 사는 지방은 극히 최근까지도 잉글랜드의 법은 커녕 인근 스코틀랜드의 법조차 시행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잉글랜드의 법은 아직 그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있으며 스코틀랜드의 법 역시 사정은 비슷합니다. 즉 북미의 인디언들이나 마찬가지로 이들은 한 번 산간 지대에 들어가면 각 부족이 끊임없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때문에 각 개인은 자연스럽게 자위의 방편으로 무기를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들은 가문의 이름을 존중한다고 할까, 일종의 자존심이라고 할까 그런 생각에서 자신을 평화로운 나라의 농민이라기보다 기사나 병사로 여기는 기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앞서 검사께서 말씀하신 격투장의 규칙 같은 것은 이들 호전적인 산악 부족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자연이 만인에게 부여한 무기 즉 육체적 수단만으로 승패를 결정하는 방식은 이들에게 아주 어리석은 해결책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반면 복수는 그들 사회의 습속으로 봤을 때 마치 체로키족이나 모호크족 등 인디안 부족이나 마찬가지로 일종의 일상사입니다. 그 본질에 있어서, 베이컨 경이 갈파한 것처럼 이것은 일종의 야만 미개인들의 정의인 셈입니다. 즉 폭력을 제지하는 데 있어서 제대로 법이 힘을 발휘하지 않는 곳에서는 복수의 공포, 그것만이 압제자의 손을 제지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모든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피고의 조상 이래로 이 지역 사람들에게 이런 사고방식이 일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법의 집행은 결코 변경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배심원 여러분이나 본 재판장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처럼 가슴 아픈 사건에 있어서도 그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문명의 제일 목적은 모든 사람이 그 칼이나 완력에 의해서 멋대로 적용하는 정의가 아닌, 만인에게 평등하게 시행되는 보편적인 법률의 보호를 설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을 향해서 '복수는 내가 맡는다'고 외치는 법률의 소리는 신의 계시 다음가는 소리입니다. 비록 일순간일지라도 격정이 식고 이성이 개입할 여유가 있었다면 당사자간의 시비를 판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법률 뿐입니다. 그 법률만이 각자가 각자에게 복수하려는 그 행위를 가로막는 영원불멸의 방패입니다. 다시 한번 되풀이하지만 개인적인 감정으로 말하자면 이 사건의 불행한 피고인은 증오의 대상이기보다 오히려 동정의 대상일 것입니다. 피고는 이런 사실에 대해 무지했고, 또 그릇된 명예감으로 인해 죄를 저지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배심원 여러분, 피고는 어디까지나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여러분의 숭고하고 중대한 임무입니다. 분노의 격정으로 말하자면 잉글랜드 사람들 역시 스코틀랜드 사람들과 아무 다름이 없습니다. 만일 피고의 행위에 대해 아무 형벌도 내려지지 않는다면 그 이유야 어떻든 남으로 랜즈엔드에서 북으로 오니크섬의 끝에 이르기까지 수백 수천의 흉기를 일제히 풀어놓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나이 먹은 재판관은 이처럼 말을 맺었다. 그러나 그 감동적인 거동으로 보나, 또 눈물이 글썽글썽한 얼굴을 보나 그로서는 그러한 발언을 한다는 것이 무척 괴로운 일이었음에 틀림없었다.

로빈 오이그 매콘비히, 본성 마그레가는 사형 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됐다. 그는 매우 의연한 태도로 거기 복종하고 판정의 정당함도 인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무기를 지니지 않은 사람을 습격했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결코 참으려 들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내가 빼앗은 생명에 대해서는 나도 생명으로 갚는다. 그 이상 어떻게 하란 말인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