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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maginative Woman

토마스 하디
 

[소개]

건실한 생활인이지만 속물이라고 할 수 있는 남편, 그리고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둔감한 현실을 벗어난 존재로 여겨지는 시인 트리위... 엘라는 자신의 '환상' 속에서 시인 트리위를 향한 사랑을 키워간다. 하지만 불륜이 아닌 그 사랑은 아마 그렇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더욱 부숴지고 깨지기 쉬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작가 소개]

토마스 하디(Thomas Hardy, 1840-1928) : 영국의 소설가 ·시인. 석공(石工)의 아들로 건축공부를 하는 여가에 소설을 쓴 것이 당시 문단의 대가 G.메레디스에게 인정받아 문단에 등단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영국의 대표적 소설가라고 할 수 있다. <테스> <비천한 주드> 등 문제작과 <푸른 숲 그늘에서> <귀향> <캐스터브리지의 시장> 등이 유명하다. 로맨틱한 자연 묘사와 지방색이 풍부한 작풍이 특징이다.
 





윌리엄 마치밀은 어퍼웨섹스 지방의 유명한 해변 휴양 도시 소렌트씨에서 셋집을 구한 뒤 아내가 있는 호텔로 돌아왔다. 아내는 마침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고 없었다. 그래서 마치밀은 군인 같은 복장을 한 호텔 웨이터가 가르쳐 준 방향으로 아내를 찾아 나섰다.

"원, 멀리까지도 나왔군, 어, 숨이 차는군."

마치밀은 아내를 따라와서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녀는 걸으면서 무슨 책을 골똘히 읽고 있었다. 세 아이들은 유모와 함께 훨씬 앞에서 가고 있었다.

마치밀 부인은 책을 읽으며 삼매경에 빠졌다가 깜짝 놀라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네, 당신이 너무 오래 걸리셔서... 호텔 방에 가만히 있자니까 너무 지루해서요. 미안해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좀처럼 괜찮은 집을 찾을 수가 없더군. 아주 고생했어. 공기 좋고 쾌적한 방이라고 해서 막상 가보면 숨이 막힐 지경으로 형편없는 곳이지 뭐야. 간신히 하나 정하긴 했는데 어디 한 번 같이 가보지 않겠소? 별로 넓지는 않지만 별로 좋은 집도 없고 말이야... 마을이 모두 피서객으로 꽉 차 버렸어."

부부는 아이들과 유모는 그대로 산책을 하도록 놔두고 함께 먼저 돌아왔다.

이들 부부는 나이도 그렇고, 용모도 누구에게 빠지지 않을 정도여서 서로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집안 형편도 괜찮았다. 하지만 이들은 성격이 어쩐지 잘 맞지 않는 점이 있었다. 남편은 둔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차분한 편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예민하고 다혈질인 편이었다. 그렇다고 부부가 자주 충돌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취미나 기호 같은, 아주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부분에서 두 사람은 공통 분모가 없었던 것이다.

남편인 마치밀은 아내의 성격이나 습성을 다소 유치하다고 여겼다. 아내는 남편의 그것이 천하고 물질적이라고 치부했다. 그녀의 남편은 북부의 어느 번화한 도시에서 총기 제조업을 하고 있었고, 언제나 이 사업에 몰두해 있었다. 반면 그의 아내는 약간 고리타분하면서도 우아한 표현인 '시혼(詩魂)의 숭배자'라는 이름에 썩 잘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이 여인은 매우 감수성이 예민하고 감동하기 쉬운 기질이었다. 엘라라는 이름의 이 여인은 남편이 만드는 물건들이 결국 생명을 빼앗는 도구라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남편의 직업에 대해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남편이 만드는 무기 가운데 일부는 자기보다 약한 동물을 잔인하게 해치는 무서운 새나 사나운 짐승을 없애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간신히 마음의 평온을 되찾곤 했다.

결혼하기 전에는 이런 직업이 그를 남편으로 맞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리라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세상이 어머니들이 늘 강조하는 것처럼 여자란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결혼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윌리엄의 청혼을 받아들였고, 신혼 여행을 갔다 와서 자신의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길 때까지 남편의 직업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야 그녀는 마치 어두운 곳에서 뭔가에 발이 걸려 넘어진 사람처럼 머리 속으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얻은 것일까? 신기한 것인가 아니면 흔해빠진 것인가, 거기 들어 있는 것은 금인가 아니면 은이나 납 같은 것인가, 장애물인가 주춧돌인가. 그리고 내 자신에게 소중한 것인가 별것 아닌가를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막연하지만 그녀는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 그 이후로 그녀는 자신을 소유한 사람의 우둔함과 고상하지 못함을 불쌍하게 여기게 되었다. 자신의 불운함에 대해서도 가련하게 여기는 한편, 자신의 섬세하고 우아한 감정을 발산할 수 있는 상상의 세계나 공상에 빠져서 밤중에 한숨을 내쉬면서 스스로를 달래곤 했다. 물론 그녀가 빠져 있는 상상의 세계는 설혹 남편이 알더라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을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엘라는 키가 작고 우아했으며 체격이 날씬했다. 동작은 경쾌하고 생기가 넘쳤다. 눈은 검었으며 눈동자는 영롱한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엘라와 같은 성격의 소유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특징이었다. 놀랄 만큼 밝은 그녀의 눈동자는 가끔 주변 남자들의 마음을 휘저어놓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곤 결과적으로 엘라 자신도 마음이 상하곤 하는 것이었다.

남편은 키가 크고 얼굴이 길었다. 갈색 수염을 기르고 생각에 잠긴 듯한 눈매를 하고 있었다.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그가 언제나 아내에게 친절하고 관대했다는 점이다. 그는 딱딱 부러지는 분명한 말투로 이야기했으며, 무기를 필요로 하는 이 세상에 대해 무척 만족하고 있었다.

그들 부부는 남편이 말한 그 집에 도착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약간 언덕진 곳이었다. 소금기 있는 바람을 막기 위해서 정원에 상록수를 심어놓고 있었다. 현관에까지 돌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이 집 역시 주변의 집들과 마찬가지로 번지가 있었는데 모두들 뉴퍼레이드 13번지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집은 다른 집보다 약간 규모가 큰 때문인지 집주인 여자만은 일부러 코버그 하우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위의 집과 구분하고 있었다. 지금은 여름철이라 햇볕이 들고 활기가 있지만 겨울이 되면 문 앞에 모래 포대를 쌓고 열쇠 구멍까지 틀어막아서 비바람을 막아야 했다. 비바람에 페인트칠이 거의 다 벗겨져 밑에 칠한 것과 이음새를 매운 자국이 드러나 보였다.

그들 부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집주인 여자는 현관까지 나와 그들을 맞이하여 방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기술자였던 남편이 갑작스럽게 죽는 바람에 살기가 어려워졌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면서 걱정스러운 말투로 자기 집이 묵기에 왜 편리한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마치밀 부인은 위치나 건물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집이 작아서 방을 다 쓰지 않으면 불편할 것 같다고 말했다.

집주인은 실망한 듯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자기는 손님들이 꼭 자기 집에 머무르게 되면 좋겠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방 두 개를 어떤 독신 신사분이 그 동안 계속 빌려서 쓰고 있는 중이다... 물론 여름 휴가철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특별히 방세를 더 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년 내내 방을 빌리는데다 말썽도 일으키지 않는 아주 훌륭한 젊은이이기 때문에 한 달 동안 돈을 더 받으려고 그를 내보내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혹시 그분이 잠시 동안 나가 있겠다고 하실지도 모르겠군요..." 집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마치밀은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중개업자에게 더 알아볼 생각으로 호텔로 돌아왔다. 그들이 호텔로 돌아와 차를 마시려고 앉자마자 그 집주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 신사는 자기가 3,4 주일 동안 자기 방을 비워줄 테니 새로 오신 손님들을 받도록 하라고 얘기했다는 것이었다.

"정말 친절하신 분이군요. 하지만 그런 불편을 드리고 싶지는 않아요." 마치밀 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전혀 불편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건 아니에요!" 집주인이 웅변조로 늘어놓았다.

"실은 그분은 말이에요, 보통 젊은이들과는 전혀 다른 분이랍니다. 뭐라고 할까요, 마치 꿈꾸는 듯하고 고독하며 약간 우울한 편이지요. 요즘같이 사람들이 떠들썩한 계절보다는, 남서풍이 문을 매섭게 때리고 파도가 이곳 큰길까지 덮쳐서 사람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때를 더 좋아한답니다. 그래서 실은 이번에도 기분 전환도 할 겸 가끔 찾아가던 건너편 섬의 작은 농가에 가 있겠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 부부가 자기 집에 와 묵었으면 한다고 집주인은 말하였다.



 

그래서 마치밀 일가는 이튿날 그 집에 짐을 풀었다. 집은 지내기는 편할 것 같았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남편은 부두로 산책을 나갔고 마치밀 부인은 아이들을 모래사장으로 놀라고 내보냈다. 그런 다음 부인은 한숨 돌리고 이것저것 살펴보기도 하고, 옷장 문에 달린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그 젊은 신사가 쓰던 뒤쪽 작은 거실에는 그의 가구들이 남겨져 있어 어딘지 그의 개인적인 취향이 느껴졌다. 희귀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주인의 정확한 안목이 느껴지는 그런 낡은 책들이 방 구석구석에 차곡차곡 조심스럽게 쌓여 있었다. 아마 이 방의 주인은 피서철에 여기를 찾는 사람들이 이런 책에 흥미를 느끼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이 방의 전 주인은 눈에 잘 안 띄도록 구석에 책을 쌓아 놓았다.

집주인 여자는 마치밀 부인이 뭔가 못마땅하다고 말하면 곧바로 고칠 생각인지 그 방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책들이 있어 좋군요. 이 방을 제가 쓰면 좋겠어요." 마치밀 부인이 말하였다. "그런데 방을 내주신 분은 책이 무척 많으신 모양이에요. 제가 좀 읽어도 괜찮을까요, 후퍼 부인?"

"그럼요. 괜찮고 말고요. 부인, 그분은 책이 참 많으시답니다. 문학을 하시는 분이거든요. 사실 그분은 시인이랍니다. 예, 시인이요... 이름도 알려지신 분이래요. 그리 대단한 부자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시를 쓰며 살 정도의 수입도 있으신 모양이에요."

"시인이라구요? 어머나! 그런 줄은 전혀 몰랐군요."

엘라는 책을 한 권을 집어들고서 첫 장에 있는 주인의 이름을 살펴보았다.

"어머나!" 그녀는 환성을 올렸다. 그리고 말을 계속하였다. "저도 잘 아는 이름이에요. 로버트 트리위... 잘 알고 말고요. 이분의 시도 잘 알고 있지요. 우리가 빌린 방이 바로 그분 방이라니, 우리가 그분을 쫓아낸 셈이네요."

잠시 후 엘라 마치밀은 혼자 남아서 로버트 트리위를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그런 우연이었다. 그녀의 이런 놀라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녀는 불우한 문인의 외동딸이었고, 최근 한두 해 동안은 자신도 직접 시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고통스럽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 감정의 돌파구들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살림살이를 꾸려나가고 평범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으면서 그녀의 정신은 우울한 침체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날의 밝고 반짝이던 영감이나 명석함이 모두 떠나버린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렇게 쓴 시를 남자 이름으로 별로 이름 없는 잡지에 기고해서 실린 적이 있었다. 상당히 이름 있는 잡지에 시가 두 번 실리기도 했다.

이름 있는 잡지에 그녀의 시가 두 번째로 실렸을 때, 공교롭게도 그 잡지에는 로버트 트리위의 시가 함께 실렸다. 그녀의 시가 작은 활자로 아래에 실리고 바로 그 위에 로버트 트리위가 같은 주제로 쓴 시가 여러 편 커다란 활자로 실렸던 것이다.

사실 이들 두 사람은 신문에 보도된 어떤 비극적인 사건을 보고 놀라 동시에 거기 관한 시를 쓴 것이었다. 편집자는 주를 달아 이 두 사람의 시가 우연히 일치했다는 것을 밝히고 둘 다 훌륭한 작품이어서 함께 발표한다고 설명했다.

'존 아이비'라는 필명으로 그 동안 시를 발표해왔던 엘라는 이 일이 있은 뒤부터 로버트 트리위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보통 남성의 경우 당연한 것이지만, 로버트 트리위는 작가의 성별 차이라는 것에 대해 아마 거의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여성의 이름을 쓸 생각 따위는 꿈에도 해본 일이 없었으리라. 하지만 엘라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즉 세상을 거꾸로 가는 데에서 나름대로 이유를 발견하고 거기에 만족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시에 표현한 그녀의 세련된 감수성이 수완 좋은 사업가의 아내, 평범한 총기 제조업자의 부인이자 세 아이의 어머니의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그녀의 그 영감을 신뢰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트리위의 시는 기발하기보다 정열적이고, 세련됐다기보다 풍부했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그만그만한 시인들의 작품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상징주의자도 데카당도 아니었다. 인생에 있는 최악의 우연조차도 인생의 가장 행복한 사건과 마찬가지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을 염세주의자라고 부른다면, 그는 그런 점에서 염세주의자였다.

그는 내용과 상관없이 단지 형식과 운율만이 앞선 시에 대해서는 전혀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 그의 감정이 예술적 형식을 능가할 때는 운이 맞지 않는 엘리자베스 왕조 양식의 소네트를 써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말많은 비평가들로부터 실수를 지적받곤 하였다.

엘라 마치밀은 이 경쟁자의 작품을 수없이 읽어보고 되풀이해서 읊어보곤 했다. 그것은 슬프지만 도저히 이루어질 가망이 없는 질투심인 셈이었다. 자신의 미약한 작품과 비교할수록 그의 시가 얼마나 힘찬 것인지 그녀는 새삼스럽게 느끼곤 했다. 그의 시를 흉내내기도 해봤지만 도저히 그의 수준을 따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완전히 실망에 빠질 때도 있었다.

몇 달 후 그녀는 출판사의 광고를 통해 트리위가 그 동안 발표했던 작품들을 한 데 모아 한 권의 시집을 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 뒤 그 시집이 실제로 출판되었으며 어느 정도 평판도 얻었다. 적어도 그 시집은 출판 비용을 충당할 정도는 팔렸다.

존 아이비는 이와 같은 사태 진전에 자극을 받아 자신도 지금까지 그리 많지는 않지만 발표된 몇 편의 시와 미발표 원고들을 덧붙여 한 권의 시집을 만들어 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출판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두서넛 잡지 평론이 그녀의 시집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지만 보통 화제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시집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그 시집은 세상의 빛을 본 지 이 주일 뒤에는 영영 묻혀 버리게 되었다.

우연히도 그 무렵 이 시인은 자신이 셋째 아이를 밴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었다. 또한 집안에 비교적 걱정거리가 없었던 때였던지라 시집 출판의 실패는 별 타격 없이 그냥 지나갈 수 있었다. 남편은 병원 치료비와 출판사 경비을 한꺼번에 책임졌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당분간 모든 일은 그대로 끝나고 말았다.

그녀는 물론 한 세기를 풍미하는 시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흔해 빠진 엉터리, 단순히 종족을 늘리는 역할에 그치는 그런 여자도 아니었다. 엘라는 최근 들어 과거의 시적 영감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우연히도 그녀는 로버트 트리위의 방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녀는 뭔가 깊이 생각에 잠겨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 시인으로서의 흥미를 지니고 방안을 여기저기 살폈다. 다른 책들 사이에 트리위의 시집도 끼어 있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그 시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그것이 새삼스럽게 말을 걸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읽어보았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은 일을 핑계삼아 안주인 후퍼 부인을 불러 다시 한 번 그 젊은 시인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럼 그 분을 한 번 만나보시지요. 무척 재미있는 분이니까요. 하지만 그분은 낯을 가리시는 편이기 때문에 쉽게 만나려고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후퍼 부인은 그 방의 이전 거주자에 대한 호기심을 풀어 주는 것이 오히려 기쁜 것 같았다.

"여기 산 지 오래되었냐구요? 그렇지요, 거의 이년 가까이 되었답니다. 여기 계시지 않더라도 항상 방은 그대로 두고 있었으니까요. 아마 이 지방의 맑은 공기가 그분 가슴에 좋다나 봐요. 그래서 언제든지 마음 내키면 훌쩍 찾아오시는 걸 좋아하죠. 그분은 대개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편이고, 사람들은 그다지 많이 만나지 않아요. 하지만 정말 마음이 좋고 친절한 분이랍니다. 그러니까 한 번 만나보기만 하면 누구든지 그분과 가까워지고 싶을 거예요. 그렇게 성품이 부드러운 분은 요즘 세상이 그다지 흔치 않으니까요."





"그래요? 부드럽고, 착한 분이신 모양이군요?"

"그렇구 말구요. 제가 부탁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들어주신답니다. 가끔 제가 '트리위씨, 어쩐지 기운이 없으신 것 같군요' 이러면 그분은 '정말 그렇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후퍼 부인?'하고 대답한답니다. 그러면 저는 그분에게 권하지요. '기분 전환으로 여행이라도 하시면 어때요?' 그럼 그분은 하루나 이틀 뒤에 파리나 노르웨이 또는 그 밖의 어디론가 여행을 가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돌아올 때쯤이면 완전히 기운을 회복해서 생기가 넘쳐흐르지요."

"그래요? 그분은 정말 예민한 분인 모양이에요."

"그렇지요. 하긴 좀 색다른 점도 있긴 하지만요. 언젠가 한 번은 밤이 깊어서 시 한 편을 다 쓰신 모양이에요. 그런데 밤새 그걸 낭송하면서 방안을 걸어 다니는 바람에... 이런 얘긴 뭣하지만 사실 저희 집 마룻바닥이 좀 얇거든요... 말씀드렸지만 급하게 지은 집이라서요. 그래서 저는 잠을 잘 수가 없어서 결국 그분께 잠 좀 자게 해 달라고 말씀을 드렸답니다... 그래도 그분과는 아주 사이좋게 지낸답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이들은 그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신예 시인에 대하여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트리위가 화제에 올랐을 때 후퍼 부인은 그 때까지 엘라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침대머리를 가린 커튼 뒤의 벽지에 연필로 작게 끄적거린 글씨였다.

"어머나, 좀 보여주세요." 마치밀 부인은 허리를 굽혀 아름다운 얼굴을 벽 가까이 갖다댔다. 솔직히 애정 어린 호기심이 솟아나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이게 바로 그분 시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어요." 후퍼 부인은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처음 생각나는 착상을 이렇게 적은 거예요. 대부분 지워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읽을 수 있지요. 아마 한밤중에 시 구절이 떠오르면 잠에서 깨어 아침이면 잊어버릴까봐 벽지에 적어둔 것이겠지요. 여기 씌여진 것이 나중에 그대로 잡지에 실린 것을 본 적도 있답니다. 아주 최근에 새로 쓴 것도 있는 것 같더군요. 자, 이거 보세요. 이건 저도 보지 못한 건데요... 바로 며칠 전에 써둔 모양이지요."

"정말, 그렇군요!"

엘라 마치밀은 이유도 없이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문득 이제 집주인이 나가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주인에게서 듣고 싶은 것을 다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제 문학적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뭐라고 형언하기 곤란한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그 글을 혼자 읽고 싶었던 것이다. 아마 혼자서 그걸 읽으면 그 감흥도 훨씬 더하리라. 그녀는 그 즐거움을 기대하며 혼자 될 때를 기다렸다.

섬 밖으로 나가면 파도가 거칠었다. 엘라의 남편은 배를 타는 데 별로 익숙치 않은 아내와 함께 나가기보다 혼자서 배를 타는 것이 훨씬 더 즐거울 거라 생각했다. 그는 관광용 기선에 혼자 타는 것을 즐기는 편이었다. 달빛 아래에서 남녀가 춤을 추기도 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배가 기울면 마치 이것이 기회라는 듯 서로 껴안기도 한다.

사실 그가 아내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들려준 것처럼 그 배에는 점잖지 못하고 야비한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별로 아내를 데리고 가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잘 나가는 이 사업가가 이렇게 숙소를 떠나 마음껏 바다 바람을 쏘이며 기분을 전환하는 동안, 엘라의 생활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단조로웠다. 기껏해야 하루에 몇 시간 해수욕을 하고 바닷가를 산책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시적인 충동이 다시 강하게 솟구쳐 그녀는 열정에 휩싸인 상태였다. 그래서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거의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녀는 최근에 나온 트리위의 작은 시집을 거의 다 외울 정도로 거듭해 읽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그의 시에 필적할만한 작품을 한 번 써보려고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도저히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하고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도 접근하기 어려운 그 스승에게는 자석과 같은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매력은 지적이고 추상적이라기보다 개인적인 요소가 훨씬 더 강했다. 그녀도 이러한 사실이 의아스러웠다.

그녀가 밤이나 낮이나 둘러싸여 있는 그 환경은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 늘 그녀에게 그의 존재에 대해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존재는 그녀가 아직 한 번도 얼굴조차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뭔가 자신의 벅찬 감정을 배출할 수 있는 적절한 대상을 찾고 있었고, 그 사람은 그녀가 가까이 할 수 있는 첫째 대상이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엘라 자신은 이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혼이라는 것은 문명이 그 열매를 맺기 위해 고안해낸 환경이다. 그러한 무미건조한 조건에서 나온 애정이 으레 그렇듯이 엘라에 대한 남편의 사랑도 가끔 변덕을 피우는 우정 정도였다. 사실 엘라가 남편에게 품고 있는 사랑도 이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그보다 훨씬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가슴속에 열정을 품고 있는 여성이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어떤 마음을 붙일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 운명에 정열을 불태우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아이들이 벽장에서 숨바꼭질을 하다가 너무 신이 나서 그 안의 옷을 끄집어냈다. 후퍼 부인은 그것은 트리위 씨의 것이라고 말하고 다시 벽장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여느 때처럼 호기심에 사로잡힌 엘라는 그날 오후 늦게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벽장문을 열고 거기 걸려 있는 레인코트를 꺼내 입어 보았다.

'엘리야(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선지자. 그의 제자 엘리사가 스승의 겉옷을 통해 권능을 이어받는다는 얘기가 나온다. - 편집자 주*)의 외투여!'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것을 입은 나에게도 영감이 솟아올라 저 기막힌 천재와 한 번 겨룰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런 생각에 잠길 때면 그녀는 언제나 눈물에 젖어 시야가 흐려지곤 했다.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거기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심장이 이 외투 속에서 고동치고, 그의 두뇌가 이 모자 밑에서 그녀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고상한 사색을 펼쳤으리라. 그와 비교해보면 그녀는 자신의 재능이 빈약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생각이 그녀의 가슴을 몹시 아프게 했다. 그러나 그녀가 옷을 채 벗어놓기도 전에 문이 열리더니 남편이 들어왔다.

"그게 도대체 뭐하는 거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얼른 외투를 벗었다.

"이 벽장 속에 걸려 있더군요. 그래서 장난 삼아 입어 본 거예요. 도대체 할 일이 없는 걸요. 이런 장난이라도 해야지, 너무 심심해요. 당신은 늘 밖에 나가 있으니까요."

"늘 밖에 나가 있다고? 흠, 그래...?"


 

그날 밤 엘라는 또다시 그 집 여자 주인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여자 집주인 역시 자진해서 그 시인에 관해서 이것저것 열심히 들려주는 것을 보면, 트리위에게 애정 비숫한 것을 품어 왔는지도 모른다.

"그것 보세요. 부인께서도 트리위 씨에게 상당히 흥미를 갖고 계신 모양이군요." 여자 주인은 말했다. "실은 방금 전에 그분에게서 연락이 왔답니다. 제가 만일 집에 있다면 내일 오후에 들러서 필요한 책을 좀 찾아가시겠답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아 그럼요!"

"만나보실 생각이 있으시면 그 때 트리위 씨를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남모르는 즐거움을 느끼며 약속을 하고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남편은 이렇게 말을 꺼냈다.

"엘! 어제 당신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소. 내가 밤낮 혼자 돌아다니고 당신 혼자서만 내버려두었다는 그 말 말이오. 아무래도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아. 오늘은 바다가 조용하니 함께 보트나 타는 게 어떨까 싶소."

남편이 그런 제안을 하는 데도 마음속으로 기쁘지 않았던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단 그 자리에서는 남편의 제안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출발 시간이 다가오자 그녀는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에 잠겨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제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이 분명해진 그 시인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다른 생각을 모조리 압도하였다.

'가고 싶지 않아.' 그녀는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무지 가고 싶지가 않아. 역시 가지 않는 게 좋겠어...'

그녀는 남편에게 뱃놀이를 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고 말하였다. 남편은 그녀의 그런 태도를 전혀 개의치 않고 혼자서 나가버렸다.

아이들도 모두 해변에 나가고 없어서 집안은 말할 수 없이 조용하였다. 담장 저편 바다에서 산들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왔다. 햇볕이 비치는 가운데 창문 블라인드가 그 바람에 흔들렸다. 여름 한 철에만 고용되는, 그린 싸일리지언이라는 외국인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을 주민들 대부분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그 음악 소리에 끌려 몰려갔는지, 코버그 하우스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하녀가 손님을 맞으러 나가는 눈치가 보이지 않아 엘라는 몸이 달았다. 트리위가 가지러 온다는 책들은 지금 그녀가 앉아 있는 이 방에 있다. 그러나 아무도 올라오는 기척이 없었다. 그녀는 벨을 눌렀다.

"누군가 현관 문 앞에 온 모양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아뇨, 부인. 조금 전에 어떤 분이 오셨다가 금방 가셨어요. 제가 나가 보았는 걸요." 하녀가 대답했다. 그 때 후퍼 부인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이거 정말 실망이에요..." 그녀가 들어오며 말했다. "트리위 씨는 결국 오시지 않는다는군요."

"그렇지만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요."

"아뇨, 그건 어떤 분이 세를 놓는 집으로 잘못 알고 방을 보려고 왔던 겁니다. 깜빡 잊고 말씀 못 드렸는데요... 점심 조금 전에 트리위 씨가 쪽지를 보내왔어요. 이제 책이 필요 없어져서 오지 않을 테니까 차를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그랬더군요."

엘라는 비참할 정도로 실망하였다. 잠시 동안은 <찣겨진 생명>이란, 민요 형식으로 쓰인 트리위의 슬픈 시조차 읽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들뜬 가슴이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고, 쓰라린 심정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이들이 양말을 온통 적신 채 돌아와서 엄마 앞으로 달려오고 바닷가에서 겪은 온갖 경험담을 늘어놓아도 그녀는 여느 때의 절반만큼도 관심이 생기질 않았다.

***

"후퍼 부인, 혹시 저... 사진 가지신 것 있어요? 전에 여기 계시던 그분 사진 말이에요..." 엘라는 그의 이름을 직접 입에 담는 것이 이상하게도 부끄러웠다.

"네, 가지고 있답니다. 부인이 지금 쓰시는 침실 벽난로 선반 위 그 사진틀에 끼워져 있어요."

"그래요? 하지만 그 액자에는 태공 부처의 사진이 들어 있던데요?"

"네, 그렇죠. 사실은 그분 사진이 그 밑에 들어 있답니다. 원래 그 분 사진을 넣어둔 액자예요. 제가 사온 것인데, 그분이 잠시 떠나시면서 제게 부탁을 했답니다. 제발 이 방에 들어오는 분들에게 자신의 사진이 눈에 띄지 않게 해달라는 거예요. 그 분 말씀이 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싫고, 그 사람들 역시 자기 모습이 내려다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지요.

그래서 제가 그 양반 사진 앞에다 임시로 태공 부부의 사진을 끼워 넣은 거예요. 마침 다른 액자도 없는데다, 방을 장식하는 사진으로는 이름없는 젊은 청년보다는 왕족들 사진이 더 어울릴 것 같아서요. 그 사진을 빼내면 그 아래 그분 사진이 있을 겁니다. 그 분이 아신다 해도 별로 상관없을 겁니다. 그분도 이 방에 오시는 분이 부인처럼 아름다운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아마 자기 사진을 숨길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테지요."

"그분은 잘 생기신 분인가요?" 그녀는 두려운 듯이 이렇게 물었다.

"글쎄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요..."

"제가 보기에도 그럴까요?" 그녀는 진지하게 물었다.

"부인도 아마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 생겼다기보다는 엄격한 인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요. 눈이 크고 날카로운데, 늘 생각에 잠긴 것 같아요. 예민하게 주위를 살필 때면 눈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아요. 시를 써서 먹고사는 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그렇게 날카로운 눈빛이에요."

"그 분은 나이가 얼마나 되었지요?"

"아마 부인보다는 서너 살 위일 것 같아요. 서른 한 두 살 정도 되었을 것 같은데요."

사실 엘라도 서른을 넘긴 나이였다. 다만 누구도 그렇게 나이 들게 보지는 않았다. 그녀의 천성은 여리고 천진난만했다. 하지만 그녀의 나이는 이미, 첫사랑보다는 마지막 사랑이 훨씬 더 강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그런 나이였다.

여자들이 지금 그녀보다 조금 더 나이를 먹을 경우, 허영심이 강한 여자라면 창문에 등을 돌리거나 덧문을 반쯤 내리지 않고서는 찾아온 남자 손님을 만나는 것을 망설이게 될 것이다. 그런 쓸쓸한 인생의 시기가 그리 멀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후퍼 부인이 한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고는 더 이상 나이에 대해서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마침 그때 전보가 한 장 왔다. 남편이 보낸 것이었다. 남편은 친구들과 함께 요트로 해협을 따라 버드머스까지 왔으며, 다음 날에나 돌아올 수 있겠다는 내용이었다.



 

가벼운 식사를 마치고 나서 엘라는 아이들과 함께 해질 무렵까지 바닷가를 거닐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기 방에 있는, 아직 열어보지 않은 그 사진을 생각했다. 뭔가 이 세상의 일 같지 않은, 무척 멋있는 일이 일어날 것을 조용히 기대하는 심정이었다.

오늘 밤에는 남편이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며 이 젊은 여인은 곧장 이층으로 뛰어올라가 액자를 꺼내 사진을 보는 것을 삼갔다. 이 여인은 상상의 비단결을 미묘하게 수놓는 그런 사치에 익숙했다. 환한 오후의 햇살 아래서 그 사진을 보는 것보다 주위가 고적해진 가운데 장엄한 바다 소리를 들으며, 별들이 반짝이는 밤에 촛불을 켜고 그 사진을 혼자 지켜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이들을 재웠다. 그리고 나서 아직 열 시도 되지 않았지만 그녀 역시 곧바로 침실에 들어가 잘 준비를 했다. 정열에 불타는 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녀는 우선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리고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책상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트리위의 가장 아름다운 시를 몇 편 읽었다. 그리고 나서 액자를 불 앞으로 들고 가서 뒷판을 열고 사진을 꺼내 눈앞에 놓았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거리는, 그런 얼굴이었다. 시인은 멋진 콧수염과 나폴레옹 3세를 연상시키는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깊숙이 눌러 쓴 소프트 모자가 이마를 가리고 있었다. 아까 안주인이 말하던 커다란 검은 눈은 무한한 슬픔을 견뎌낸 듯한 힘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잘생긴 이마 아래 눈은 상대편 얼굴을 보면서 온 우주를 읽어내는 듯했다. 그러나 그 시선은 눈에 들어오는 광경에 조금도 만족하지 않는 그런 표정을 담고 있었다.

엘라는 낮고 부드럽게,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로 당신이군요. 지금까지 그토록 몇 번이나 잔인하게 저의 빛을 가린 사람이...'

그 사진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어느새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마침내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사진에 살짝 입술을 댔다가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웃고는 눈물을 닦았다.

남편과 세 아이를 가진 여인이 이렇게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나이에게 터무니없이 마음이 끌리다니... 얼마나 사악한 일인가? 그녀는 생각했다. 아니다... 트리위는 본 적이 없거나 알지 못하는 남자가 아니다! 그녀는 그의 감정과 생각을 마치 자기의 것처럼 잘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생각과 감정은 그녀의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그리고 분명 남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하기야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남편으로서는 그런 감정 따위는 아예 없는 것이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아직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사실 이 사람이 나와 더 가까운 사람이야. 윌보다는 이 사람이 진실한 내 자신과 훨씬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어...' 그녀는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엘라는 침대 옆 탁자에 트리위의 시집과 사진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베개에 몸을 눕히고 전에 표시를 해두었던, 로버트 트리위의 작품 가운데 가장 감동적이고 진실하다고 느꼈던 것들을 다시 한 번 읽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시집을 옆에 내려놓고 그의 사진을 침대 한쪽에 세워 놓고는 옆으로 누워서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서 엘라는 다시 촛불을 들고 머리 위 벽지의 이제는 절반쯤 지워진, 희미한 연필 글씨 자국을 다시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싯귀며 대귀, 화운 따위와 시행의 첫 구절이나 중간 구절, 그리고 셀리가 남긴 여러 가지 단편적인 머릿속 시상 등이 적혀 있었다.

쓰인 것 가운데 제일 짧은 것도 강렬한 힘이 넘치고 너무 달콤하고 생생했다. 마치 그 벽이 그 시인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처럼 지금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벽에서 시인의 따뜻하고 다정한 숨결이 스며 나와 그녀의 볼을 스치는 것 같았다. 그는 틀림없이 이렇게 손을 들었을 것이다... 손에 연필을 쥐고, 이렇게 팔을 뻗었겠지... 글씨가 비스듬하게 쓰여진 것을 보면 틀림없다.

'살아있는 인간보다 더 진실한 형상들
영원의 생명으로 자라나는 것들이여'

이것은 시인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묘사한 것이리라. 비평가들의 냉혹한 비평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깊은 밤 자연스럽게 가슴 가운데서 솟아나는 사색과 정신의 모색, 영혼의 약동을 적은 것이리라. 이것들은 스며드는 달빛이나 등불, 혹은 파르스름한 새벽의 어스름 가운데서 서둘러 쓴 것이지, 환한 대낮에 쓴 것일 수는 없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머리카락은, 그 시인이 금방 사라지고 마는 그런 상상을 붙잡았을 때 그의 팔이 놓여 있던 바로 그곳에서 물결치고 있다. 그녀는 신성한 천상의 공기처럼 스며드는 시인의 영혼에 깊이 잠기고 시인의 정신에 흠뻑 취했다. 그녀는 마치 시인의 입술 아래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꿈꾸는 듯한 마음으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걸 느끼는 순간 바로 문 밖 층계참에 귀에 익은 남편의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엘, 어디 있소?"

설혹 그녀가 자신의 환상을 남편에게 자세히 설명해주려고 해도 그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는 지금까지 자기가 한 일을 남편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는 본능에 사로잡혀 그 사진을 베개 밑에 슬쩍 감추었다. 거의 동시에 남편이 문을 활짝 열었다. 남편은 꽤 술을 마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 이거 미안하군. 어디 머리가 아파? 잠든 걸 내가 깨운 것 아니오?" 윌리엄 마치밀이 말했다.

"괜찮아요. 머리가 아픈 건 아니예요." 그녀는 대답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돌아오셨어요?"

"응, 오늘 안에 돌아오는 방법을 찾아냈지. 내일은 또 갈 곳이 있어서 거기서 괜히 하루를 더 있고 싶지 않더군."

"식당으로 내려갈까요?"

"아니 괜찮소. 나도 지금 몹시 피곤해. 저녁은 든든히 먹었으니까 나도 이제 자야겠소. 내일 아침에는 여섯 시에 일어나야 하거든. 당신 일어나기 훨씬 전이니까 잠에서 깨지 않게 살그머니 나갈 거요. 당신이 한참 잠에 빠져 있을 때 말이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남편의 동작을 지켜보면서 사진을 더 깊은 곳으로 가만히 밀어 넣었다.

"정말 몸이 불편한 것 아니야?" 그는 아내 위로 몸을 구부리며 물었다.

"아니에요. 단지 좀 우울할 뿐이에요."

"별 것 아닌 걸로 신경을 쓰지는 말아요." 그는 몸을 굽혀 그녀에게 키스했다. "오늘 밤 당신하고 같이 있고 싶었다오."





이튿날 아침 마치밀은 여섯 시에 잠을 깼다. 엘라는 남편이 일어나 하품을 하면서 혼자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거, 밑에서 버석거리는 게 도대체 뭐야?"

그는 아내가 아직 자고 있는 걸로 여기고 여기저기 뒤지다가 무엇인가 끄집어냈다.

"제기랄, 이게 도대체 뭐야?" 남편이 소리쳤다.

"여보, 왜 그러세요?" 아내가 물었다.

"그래, 당신도 일어났소? 이런 세상에, 하하하!"

"도대체 왜 그러세요?"

"도대체 생전 본 일도 없는 녀석의 사진이야. 여기 집주인이 아는 사람이겠지. 그런데 어떻게 여기 와 있을까? 자리를 고쳐놓을 때 선반을 건드려서 굴러떨어졌나 보군!"

"어제 내가 보던 사진이에요. 아마 그 때 떨어졌나 보군요."

"그래? 당신이 아는 사람이라구? 꽤 멀쩡하게 생긴 친구로군."

엘라는 자신이 존경하는 그 대상이 남편의 조소를 받는 것을 잠자코 듣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떨렸다. 그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반응은 어딘지 지나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요즘 아주 유망한 시인이에요. 나는 아직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지만 말이에요. 우리가 여기 오기 전에 이 방 두 개를 쓰고 있던 사람이에요."

"그걸 어떻게 아오? 아직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면서 말이야..."

"후퍼 부인이 어제 저한테 사진을 보여 주면서 말하더군요."

"아, 그래? 자 그럼 난 이제 가봐야겠소. 오늘은 조금 일찍 돌아오리다. 함께 가지 못해서 미안하오. 아이들이 물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 줘요."

그날 마치밀 부인은 후퍼 부인에게 트리위 씨가 언제쯤 다시 올 것 같으냐고 물어봤다.

"오실 거예요. 일 주일 뒤에 오셔서 이 근방에 있는 친구 집에 묵으실 거라고 하더군요. 부인 댁이 떠나실 때까지 거기 계시겠지요. 그땐 꼭 오실 거예요."

마치밀은 그날 오후 일찍 돌아왔다. 그는 자기가 없는 동안 도착한 편지들을 죽 뜯어보더니 갑자기 원래 예정보다 일 주일 앞당겨서, 사흘 후에 가족 모두 여기를 떠나자고 말했다.

"하지만 여보, 일 주일쯤 더 있다 가면 안될까요?" 엘라는 애원이라도 하듯이 남편에게 말했다. "전 여기가 퍽 마음에 들어요."

"난 그렇지 않은 걸. 점점 싫증이 난단 말이오."

"그럼 나하고 아이들은 남겨 두고 혼자 가시는 게 어때요?"

"엘라, 참 당신도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는구려. 왜 그렇게 해야 한단 말이오? 게다가 내가 그럼 또 당신을 데리러 올 것도 생각해 봐요. 역시 함께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소. 그 대신 조금 더 있다가 노스웨일즈나 브라이튼에라도 가서 지내면 될 것 아니오? 게다가 여기서도 앞으로 사흘 동안이나 더 있을 수 있잖소!"

자신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시적 재능에 경탄했던 그 남자,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애정을 느끼는 그 남자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숙명인가 보다! 하지만 엘라는 마지막으로 노력을 해보고 싶었다. 그녀는 집주인 여자로부터 트리위가 맞은편 섬 번화한 시가지에서 별로 멀지 않은 조용한 곳에 묵고 있다는 사실을 대충 알아낼 수 있었다. 다음 날 오후 엘라는 가까운 선창에서 여객선을 타고 그 섬에 건너가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헛된 여행이었던가! 엘라는 그 집 위치를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가까스로 그의 집이라고 여겨지는 곳을 찾아낸 다음 그녀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저 집에 시인이 살고 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모른다는 대답을 들었을 뿐이었다. 또 설령 그가 거기에 산다고 하더라도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감히 방문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세상에는 그만큼 배짱이 두둑한 여자도 있겠지만 엘라로서는 그럴 수 없었다. 불쑥 찾아가면 아마 그는 미친 여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냥 한 번 방문해 달라고 청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라는 그럴 용기조차 없었다. 그녀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바닷가 언덕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방황했다. 그리고 이윽고 시간이 되자 돌아가는 배를 탔다.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나 저녁 시간에 늦지 않게 가까스로 돌아와서 그녀는 별로 의심을 받지 않았다.

드디어 런던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지자 남편은 뜻밖에도 정 남아 있고 싶으면 주말까지 아이들과 함께 여기 머물러 있어도 좋다고 말했다. 다만 나중에 자기가 데리러 오지 않아도 좋다는 조건 아래서 말이다. 그녀는 속으로 무척 기뻤으나 그런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마치밀은 다음날 아침 혼자서 돌아갔다.

그러나 트리위는 그 주가 다 지나가도록 찾아오지 않았다.

토요일 아침에 마치밀의 나머지 가족들은 그녀에게 그렇게 정열을 불러일으켰던 그 고장을 떠났다. 쓸쓸하고 지루한 기차 여행, 먼지투성이 좌석에 햇볕이 내리쬐어 뜨겁게 달구고 있다. 길게 뻗은 더러운 철로, 낮게 드리운 전선들, 이런 것들만이 그녀의 길동무였다. 창 너머로 보이던 짙푸른 수평선도 마침내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와 함께 그 시인의 집도 아득히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무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으려고 했지만 그저 눈물만 나왔다.

마치밀 씨의 사업은 무척 순탄했다. 덕분에 그의 가족은 넓은 대지 위에 세운 커다란 새 저택에 살고 있었다. 그 집은 그의 사무실이 있는 중부 지방의 도시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다. 교외의 생활이 으레 그렇듯이 엘라의 생활은, 특히 어떤 계절에는 몹시 쓸쓸했다. 그래서 엘라는 취미인 서정시나 비가를 쓸 시간이 많았다.

그녀는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애독하던 잡지 최신호에 트리위의 시가 실린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녀가 쏘렌트씨로 피서를 가기 직전에 쓴 것이 틀림없다. 그 침대 옆 벽지에 연필로 써 놓은, 후퍼 부인이 최근에 쓴 것이라고 말했던 그 시구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엘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충동적으로 펜을 들고 존 아이비라는 이름으로 동료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보내는 축하 편지를 썼다. 자신도 마찬가지로 시를 쓰지만 자신이 무척 노력하면서도 별로 훌륭한 결실을 거두지 못하는 데 비해, 그는 자기 영혼을 움직이는 사상을 훌륭하게 운율로 만들어내고 리듬을 맞추는 재주를 갖고 있다고 칭찬하는 편지를 썼던 것이다.

뜻밖에도 트리위는 이 편지에 답장을 보내왔다. 2,3일 후 트리위는 예의 바르면서도 짤막하게 자기는 아이비 씨의 작품을 잘 모르지만 언젠가 그 이름으로 아주 촉망받았던 시가 두어 편 실렸던 것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또 이렇게 아이비 씨와 편지로 시귀게 된 것이 매우 기쁘며 앞으로 쓰는 작품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겠다는 사연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보낸 편지가 남자가 쓴 것 치고는 아무래도 어딘지 좀 여리고 소심한 내용이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트리위는 답장에서 어딘지 선배 또는 연장자 같은 말투를 사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아무튼 그가 답장을 보내 오지 않았는가! 그녀도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방에서 그의 손으로 직접 써 보낸 편지이지 않은가? 그는 지금쯤 그 집에 다시 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그들의 편지 왕래는 두 달 가량 이어졌다. 엘라 마치밀은 가끔 자기가 쓴 시 가운데서 가장 자신있는 작품을 몇 편 골라서 트리위에게 보내곤 했다. 그는 답장에 잘 받아 보았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그다지 정성들여 읽은 것 같지는 않았다. 또 자기 시를 답장에 함께 보내오지도 않았다. 트리위는 그녀가 남자인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 이런 점을 생각하지 않았으면 그녀의 상처는 아마 훨씬 더 깊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태로는 그녀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한 번만이라도 본다면... 상황은 아마 전혀 달라질 수도 있을 텐데... 이런 유혹의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에서 솟아났다.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그에게 솔직하게 알리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와 만날 기회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연한 일이 생겨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 지방에서 가장 유력한 신문의 편집장이 어느 날 저녁 그들 부부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는 남편의 친구였다. 이 자리에서 우연히 이 시인이 화제에 오르게 되었다. 그 편집장은 풍경 화가인 자신의 아우가 트리위의 친구라는 것, 그리고 마침 그 둘이서 지금 웨일즈 지방을 여행중이라고 말했다.

엘라는 이 편집장의 아우인 화가와도 안면이 있었다. 이튿날 아침 그녀는 그 화가에게 편지를 써서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부디 자기 집에 들러서 며칠 동안 묵어가라고 초대했다. 또 친구인 트리위 씨와는 전부터 사귀고 싶었던 차여서 가능하면 함께 와달라고 부탁했다. 며칠 후 답장이 왔다. 자기와 트리위가 남쪽으로 가는 길에 기꺼이 그녀의 초청에 응하겠으며 다음 주 이러이러한 날에 방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엘라는 기뻐서 팔짝 뛸 지경이었다. 계획이 성공한 것이다. 마음속으로만 사모하면서 아직 만나보지 못한 그 사람이 드디어 오는 것이다. '저것 좀 봐, 그분이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그녀는 이렇게 하늘에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산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구약성경 아가의 2장의 구절 - 편집자 주*)

그런데 그가 와서 묵을 때의 잠자리며 식사 등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것들도 준비해야 한다. 그녀는 정성에 정성을 다해서 준비를 마치고 그날 그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오후 다섯 시쯤 현관의 초인종이 울리고 편집장의 동생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라는 스스로 여류 시인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이날은 요즘 유행하는 의상을 공들여 입었다. 최근 런던에 갔을 때 본드 거리에 있는 양장점에서 산 것으로, 예술과 낭만적인 취향을 즐기는 여인들에게 유행하는 스타일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카이튼이란 옷과 비슷한 스타일의 의상이었다. 손님은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손님의 뒤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도대체 로버트 트리위는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아, 정말 죄송합니다." 화가는 으레껏 하는 인사를 나눈 다음 이렇게 말했다. "트리위는 정말 묘한 친구예요. 마치밀 부인, 그 친구는 처음에는 꼭 오겠다고 하더니, 이제는 올 수 엇다고 그러는 겁니다. 배낭을 짊어지고 여러 마일을 걸어와서 완전히 먼지투성이가 됐거든요. 그래서 그대로 집으로 가고싶어졌나 봅니다."

"그럼, 그분은... 그분은 오시지 않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대신 저더러 사과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분과 헤어지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그녀의 아랫입술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마치 트레몰로처럼 떨렸다. 그녀는 이 무섭도록 끔찍한 상황에서 달아나 어디론가 가서 마구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막 저 건너 큰길에서 헤어져서 이리로 오는 길입니다."

"네? 그렇다면 그분이 우리 집 문 앞을 지나쳤겠군요?"

"네, 그렇죠. 댁의 문 앞까지 왔을 때... 그런데 정말 훌륭한 문이더군요. 제가 봤던 현대식 철문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 글쎄 여기까지 와서 걸음을 멈추고는 잠깐 이야기를 했지요. 그런데 그 친구는 그만 헤어져서 돌아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지 뭡니까. 사실 지금 그 친구는 기분이 우울해서 아무도 만나기 싫다는 겁니다.

참 좋은 친구고 아주 다정한 성격입니다만, 이따금씩 변덕이라고나 할까요? 마음이 흔들리고 우울해질 때가 있습니다. 뭐든 심각하게 생각하는 성격이지요. 그 친구의 시도 어떤 사람들은 너무 에로틱하고 감정적이라고 그러더군요. 실은 어제 발간된 <** 평론> 잡지에서도 무척 혹평을 받았답니다. 우연히 역에서 그걸 읽은 겁니다. 아마 부인도 읽으셨겠지요?"

"아뇨."

"읽지 않기를 잘 하셨습니다. 그따위 글에 일일이 신경을 쓰다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겁니다. 그 잡지의 편협한 독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편집자가 일부러 청탁해 쓴 글일 뿐입니다. 하지만 트리위는 그 글을 보고 무척 기분이 나빠진 모양입니다. 말도 안 되는 왜곡이라는 거죠. 정정당당하게 공격하는 것이야 견딜 수 있지만, 이런 식의 왜곡이나 날조는 도저히 반박할 수도 없고 퍼지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견디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사실 이런 것이 트리위의 약점이죠. 사교계나 장사꾼들의 세상에서 얽혀 살다보면 그런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을 텐데, 혼자서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 박혀 있다 보니 별 것 아닌 것에도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는 겁니다. 이곳에 오고 싶지 않다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집이 너무 최신식이고... 이거 실례의 말씀 같습니다만, 집에 돈을 너무 많이 들인 것 같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여기에 오시면 그분에게 따뜻하게 공감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아마 아셨을 텐데! 혹시 여기 주소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던가요?"

"아, 예... 그 말은 들었습니다. 존 아이비 씨라고 하던가요. 아마 부인의 친척이 마침 여기 와 있는 것일 거라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그분이 아이비를 좋아하신다는 말은 없으셨어요?"

"글쎄요, 그 친구가 아이비라는 분에게 별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더군요."

"그럼, 그의 시에 대해서는?"

"글세, 제가 보기로는 그의 시에도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로버트 트리위는 그녀의 집이나 그녀의 시, 그리고 그것을 쓴 사람에게 전혀 흥미를 갖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그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게 되자 곧장 아이들에게 달려가 마구 키스를 퍼부었다. 자신의 상한 감정을 씻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들마저 남편을 닮아서 무표정하고 평범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언짢고 혐오감이 치솟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둔하고 단순한 풍경 화가는 그녀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녀의 태도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그가 아니고 트리위였을 뿐이라는 것을 끝내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이 방문을 매우 유쾌하게 여기며 엘라의 남편과도 무척 잘 어울렸다. 남편도 이 화가가 매우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들은 그 근처를 여기저기 안내하며 화가에게 구경을 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둘 다 엘라의 심정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화가가 떠난 지 하루 이틀 정도 지난 어느 날 아침 그녀는 이층 거실에 혼자 앉아 런던에서 방금 배달된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발견했다.

'시인의 자살

장래가 촉망되는 서정 시인으로서 최근 몇 년간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던 토버트 트리위 씨가 지난 토요일 밤 쏘렌트씨에 있는 숙소에서 권총으로 오른쪽 관자놀이를 쏘아 자살했다.

그는 최근 새로 <미지의 여인에게 드리는 노래>라는 시집을 내어 지금보다 훨씬 광범위한 독자들의 주의를 끈 바 있다. 정열적인 내용의 그 시편들은 과거에 보기 드문 정서의 표현으로 인해 많은 독자들의 호응을 받았으며 본지 역시 거기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한 적도 있다.

다만 그의 새 시집은 어떤 평론 잡지에서 신랄한 비평을 받기도 했다. 문제의 그 잡지가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으며 그 비평이 소개된 이후 그가 매우 침울했다는 주위 사람들의 증언으로 미루어 확실치는 않으나 이번 그 혹독한 평가가 이번 비극의 원인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신문에는 검시 결과 등 경찰 수사 상황에 대해서도 알리고 있었다. 또 멀리 있는 친구에게 남긴 다음과 같은 유서도 소개되어 있었다.

'*** 군에게

이 편지가 자네 손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이제 더 이상 내 주위의 것을 보고 듣고 알게 되는 고통에서 벗어나 있을 걸세. 나는 나의 이 행동에 대해서 굳이 자네에게 구차한 설명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네. 다만 나의 행동이 이유가 분명하고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히 해둘 수 있네.

만일 하나님께서 내게 어머니나 누이, 혹은 그밖에 나를 다정하게 보살펴주는 여성을 보내 주셨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좀더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발견했을지도 모르지.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오랫동안 그런 여성,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없는 여인을 동경해왔다네. 자네도 아다시피 그녀, 발견할 수도 없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 여인이 나의 마지막 시집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네.

세상에는 이러쿵저러쿵 수근거리는 모양이지만, 그 여인은 어디까지나 나의 환상 속에서만 살고 있는 여인일 뿐이네. 그 시집의 제목에서 말하는 그 여인은 결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네. 그녀는 끝내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만날 수도 없었고, 끝내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네. 그저 환상으로 끝난 셈이지.

혹시라도 어떤 여인이든 나를 거만하고 차갑게 대했기 때문에 내가 자살했다는 오해를 빚을까봐 이렇게 밝히는 걸세. 누군가 현실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여인이 오해로 인해 그런 비난을 받을 위험이 생기지 않도록 하려는 것일세.

부디 하숙집 주인에게는 이런 불쾌한 일을 보여드려서 죄송하다고 전해 주게. 하지만 내가 그 방에 묵은 적이 있다는 것조차 아마 금방 잊혀지고 말겠지. 내가 지불해야 할 이런저런 비용 정도는 내 은행 구좌에 들어 있다네.'

엘라는 한 대 얻어맞은 듯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옆방으로 달려가 침대에 얼굴을 묻고 쓰러져 버렸다.

슬픔과 고통이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 시간 동안이나 미칠 것 같은 슬픔에 휩싸여 있었다. 쉴새없이 떨리는 입술로 그녀는 간신히 띄엄띄엄 중얼거렸다.

'아, 그가 나를 알기만 했더라도... 나를, 나를 알기만 했다면! 아아, 내가 한 번만이라도 그를 만났더라면... 단 한 번이라도, 그래서 그의 뜨거운 이마에 내 손을 얹고... 키스를 하고,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려줬더라면...

그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치나 비방이라도 기쁘게 감수하고,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을 것이라는 걸 알려줄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의 소중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아냐... 틀렸어! 이젠 다 틀렸어! 그런 일은 허용되지 않아! 하나님은 질투가 심하시거든. 그이와 나에게 그런 행복을 허용하셨을 리가 없지...'

소망은 이제 다 끊어지고 말았다. 이제는 영영 만날 희망조차도 사라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소망이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해도... 지금이라도 엘라의 환상 속에서 그런 시간은 거의 그대로 숨쉬고 있었다.

'존재할 수 있었지만 이제 영원히 사라져버린 시간
남자와 여자의 마음이 품은 바람이건만
이제 그런 시간이 불가능해진 적막한 삶'

그녀는 제 삼자의 이름으로, 가능하면 감정을 억누른 온건한 문체로 쏘렌트씨에 있는 그 하숙집의 주인에게 편지를 썼다.

마치밀 부인이 신문에서 그 시인의 죽음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는 것, 후퍼 부인도 아시다시피 마치밀 부인은 코버그 하우스에 머무는 동안 트리위 씨에게 무척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 따라서 그의 관 뚜껑을 덮기 전에 그의 머리카락을 조금 얻어서 보내주면 기념으로 삼고 싶어한다는 것 등을 적어 보낸 것이다. 그리고 아울러 사진틀에 있던 사진도 함께 보내 주면 고맙겠다고 부탁했다. 그녀는 편지에 1파운드의 우편환을 동봉했다.

회신 우편으로 부탁한 물건이 왔다. 엘라는 사진을 받아들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것을 소중하게 자기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 트리위의 머리카락은 하얀 리본으로 묶어 품속에 고이 간직했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가끔 꺼내어 입을 맞추곤 했다.

"도대체 그게 뭐요?"

어느 날 그녀가 또 그러고 있을 때 드디어 신문을 보던 남편이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뭘 보고 우는 거요? 그거 머리카락 아니오? 그게 도대체 누구 머리카락이란 말이오?"

"죽었어요!" 그녀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누가?"

"꼭 말해야 하는 게 아니라면, 지금은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 속에는 침통함이 배어 있었다.

"아아, 괜찮소. 그만두구려."

"얘기하지 않아서 불쾌하세요? 나중에 다 말씀을 드릴게요."

"괜찮아요, 그리 신경쓸 것 없소."



 

그는 아무렇게나 휘파람을 불면서 나가 버렸다. 하지만 시내에 있는 공장에 도착하자 문득 이 문제가 다시 머리에 떠올랐다. 그도 쏘렌트씨에서 묶었던 그 집에서 최근 자살 사건이 벌어진 것은 알고 있었다. 또 요즘 아내가 그의 시집을 들고 있었던 것, 그들이 쏘렌트씨에서 머물 때 집주인이 트리위에 대해 이야기하던 것을 얼핏 들었던 기억도 났다. 그는 갑자기 중얼거렸다. "그래, 바로 그 녀석일 거야! 대체 엘라는 그 녀석을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을까? 이러니 여자란 정말 교활한 것들이란 말이야!"

그는 그 문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다시 차분히 일에 몰두했다. 그 무렵 집에 있던 엘라는 어떤 결심을 했다. 후퍼 부인이 머리카락과 사진을 보내면서 장례식 날짜도 알려 주었던 것이다. 점심 무렵이 되자 트리위가 어디에 묻혔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고인을 사모하는 이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제 그녀는 남편이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평범하지 않은 행동이 어떻게 비칠지에 대해서는 거의 개의치 않았다. 엘라는 남편 앞으로 그날 오후와 저녁은 집을 비우고 내일 아침에 돌아오겠다는 간단한 쪽지를 써서 책상 위에 남겨 놓았다. 그녀는 하인들에게도 그렇게 이르고는 걸어서 집을 나섰다.

마치밀이 오후 일찍 집으로 돌아오자 하인들이 어딘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유모가 가만히 그에게 찾아와 지난 며칠 동안 부인의 태도로 봐서는 너무 슬퍼하는 바람에 혹시 투신자살이라도 하는 것 아닌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마치밀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내가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집안 사람들에게 어디 간다고 밝히지 않고, 자기를 밤새 기다리지는 말라고 당부한 뒤 집을 나섰다. 그는 마차를 타고 기차역으로 달려가 쏘렌트씨 행 기차표를 샀다.

그는 급행을 탔지만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주위가 캄캄했다. 아내가 먼저 떠났다고 해도 그 시간에는 완행열차밖에 없으므로 자기보다 별로 빨리 도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쏘렌트씨는 이제 시즌이 지나서 길거리가 몹시 쓸쓸했다. 지나다니는 마차도 드물고 요금도 많이 떨어졌다.

그는 묘지로 가는 길을 물어 곧 그곳에 도착했다. 입구의 문은 당혀 있었다. 묘지 관리인은 안에 아무도 없다고 하면서도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었건만 주위에는 벌써 가을의 저녁 빛이 덮여 있었다. 그는 관리인의 설명을 듣고 그날 매장한 묘지들이 있는 곳을 향해 꾸불꾸불한 길을 더듬어 갔다.

그는 풀뿌리에 채이고 말뚝에 걸리기도 하면서 가끔 몸을 구부려 어디 사람의 모양이 보이지 않나 여기저기 살폈다. 그러나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윽고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이 나타났다. 거기 새로 묻은 무덤 곁에 어떤 사람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엘라는 그의 발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 이게 무슨 바보같은 짓이오?" 그는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멋대로 집을 뛰쳐나오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소? 그렇다고 이 가엾은 친구를 질투하는 건 아니오. 하지만 결혼을 해서 애들이 셋씩이나 있고, 게다가 곧 넷째가 태어날 당신 같은 여자가 죽은 옛 애인에게 정신을 잃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요! 묘지 문이 닫혔다는 건 알고 있었소? 밤새도록 여기서 못 나갈 뻔하지 않았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그 사람과 깊은 관계까지 간 건 아니겠지?"

"절 모욕하지 마세요, 윌."

"명심해요. 난 이런 일은 더 이상 그냥 두고 볼 수 없소. 알겠소?"

"알았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마치밀은 아내의 팔을 잡고 묘지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날 밤에는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또 이런 비참한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내를 기차역 근처의 허름한 찻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일찍 그곳을 떠났다. 말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결혼 생활에서 흔히 일어나는 고통의 하나라는 생각에서 그들은 기차 안에서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정오쯤 그들은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서 여러 달이 지나갔다. 부부 중 어느쪽도 이 일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엘라는 종종 서글픈 듯한, 무기력한 심정에 사로잡혀 차분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어딘지 앓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에게 네 번째 해산의 고통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도 그녀에게 기운을 차리게 하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무사할 것 같지 않아요." 어느 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원,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지금까지도 잘해 왔는데, 이번이라고 다를 게 뭐란 말이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전 꼭 죽을 것 같은 느낌이에요. 아이들... 넬리와 프랭크, 티니만 아니라면 차라리 그러는 편이 기쁠 것 같아요."

"나도 있지 않소?"

"당신이야 금방 저를 대신할 사람을 찾으실 거예요." 그녀는 쓸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정말 당신은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어요. 정말이에요."

"엘, 당신 아직도 그... 시인이라는 친구를 못 잊고 있는 것 아니오?"

그녀는 남편의 이런 추궁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엔 제대로 치러내지 못할 것 같아요." 그녀는 되풀이했다. "예감이랄까요? 틀림없이 그럴 것 같아요."

흔히 그렇듯 이런 예감은 불길한 일의 징조가 되는 법이다. 6주일이 지난 오월 어느 날, 그녀는 맥박이 약하고 핏기가 사라진 채 희미하게 숨쉬는 것조차 힘겨워 하며 자리에 누워 있었다. 태어난 아기는 건강하고 살이 통통하게 쪘다. 하지만 별로 필요하지 않은 그 생명을 낳기 위해 그녀의 생명은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남편에게 조용히 말을 꺼냈다.

"윌, 당신에게 그 일... 당신도 아시죠? 우리가 쏘렌트씨에 갔을 때의 일을 남김없이 말하고 싶어요. 내가 무엇에 사로잡혔는지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당신, 남편인 당신을 그렇게 까맣게 잊을 수 있었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 제가 좀 어떻게 됐나 봐요. 당신이 다정하게 해주지 않고, 저를 무시하는 것 같았어요. 그 사람은 저보다 훨씬 뛰어난데, 당신은 제 수준에도 못 미친다고 생각했어요. 전 다른 애인이 필요했다기보다 좀더 저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원했던 것 같아요..."

그녀는 기진맥진해서 더 이상 남편에게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시인과의 연애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밝히지 못하고 갑자기 숨을 거두고 말았다. 윌리엄 마치밀은 결혼한 지 여러 해 지난 남편들이 대개 그런 것처럼 지난 일을 질투해서 새삼스럽게 심란해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미 죽어버려서 자기에게 아무런 해로울 것도 없는 사내와 있었던 일을 고백하라고 아내에게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내가 죽고 이 년이 지난 후 재혼할 여인을 집에 맞아들이기 전에 정리할 생각으로 잊고 있었던 서류들을 뒤적이다가 마치밀은 우연히 봉투 속에서 죽은 시인의 사진과 함께 한 줌의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사진 뒤에는 죽은 아내의 글씨로 날짜가 적혀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쏘렌트씨에서 여름을 보내던 시기였다.

마치밀은 뭔가 마음에 지피는 게 있어 가만히 그 머리카락과 사진을 지켜보며 생각을 추스렸다. 그리고 어머니를 죽게 만든 막내 아이를 데리고 와 무릎에 올려놓았다. 아이는 벌써 아장거리며 걷고 수선을 떠는 나이였다. 마치밀은 시인의 머리카락과 아이의 머리카락, 사진의 얼굴과 아이의 이목구비를 자세히 비교했다.

설명하기 곤란한 자연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그 아이의 모습에는 엘라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그 남자와 닮은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꿈꾸는 듯한 시인의 독특한 표정이 마치 그 생각을 물려받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의 표정에 서려 있었다. 게다가 머리카락도 같은 색깔이었다.

"과연 짐작했던 대로군..." 마치밀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그놈하고 하숙집에서 놀아난 거였어! 어디 보자! 피서를 간 것이 8월 둘째 주고... 이 자식이 태어난 것이 5월 셋째 주니... 틀림없어, 에이, 빌어먹을... 저리 가! 이 자식아! 넌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놈이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