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Please His Wife
토마스 하디
[소 개]
그저 질투심 때문에 친구의 애인을 빼앗아 결혼한 여인. 그러나 이 여인의 그러한 행동은 숙명처럼 그녀에게 '대가'를 요구하는 것 같다.
결혼 이후에 자식을 낳고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아가던 이 여인이 자신의 처지에 만족할 줄 알았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을 찾을 수 있었으련만… 토마스 하디의 '시골 이야기꾼'다운 분위기와 함께 어두운 삶의 그늘을 짙게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작가 소개]
토마스 하디(Thomas Hardy, 1840-1928) : 영국의 소설가 ·시인. 석공(石工)의 아들로 건축공부를 하는 여가에 소설을 쓴 것이 당시 문단의 대가 G.메레디스에게 인정받아 문단에 등단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영국의 대표적 소설가라고 할 수 있다. <테스> <비천한 주드> 등 문제작과 <푸른 숲 그늘에서> <귀향> <캐스터브리지의 시장> 등이 유명하다. 로맨틱한 자연 묘사와 지방색이 풍부한 작풍이 특징이다.
헤이븐풀 시에 있는 성 제임스 교회의 내부는 무겁게 드리운 겨울 오후의 구름 때문에, 차츰 어두움이 짙어지고 있었다. 마침 주일 예배가 이제 막 끝나는 시간이었다. 설교대에 선 목사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자신의 임무에서 풀려놓여 적이 마음을 놓고 있었다. 모였던 사람들은 한숨을 쉬면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차례차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잠시 교회 안이 조용해지면서 멀리 방파제 근처에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처럼 그 정적도 금방 깨어졌다. 교회 서기가 회중이 나갈 문을 열어 주려고 서쪽 문으로 가는 걸어가는 발소리가 울렸던 것이다. 그러나 서기가 문 앞에까지 가기도 전에 문고리가 밖에서 벗겨지고 선원 옷차림을 한 사나이의 검은 그림자가 햇빛을 등지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서기가 옆으로 비켜서자, 선원은 조용히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았다. 그리고 교회 안으로 깊숙이 걸어가 설교단 앞 계단 근처에 섰다. 교구의 신자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기도를 드린 뒤, 자신을 위해서도 짤막한 기도를 드리고 있던 목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 불청객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실례합니다.” 선원은 회중 모두에게 확실히 들릴만한 목소리로 목사에게 말을 건넸다. - “사실은 배가 조난을 당했는데 위험한 고비에서 구조를 받았기 때문에 그 감사를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하는 거라고 들었습니다만, 어떻습니까?”
목사는 잠깐 아무말도 하지 않았으나 이윽고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다. - “물론 좋습니다. 다만 여느 때라면, 그런 얘기는 예배를 보기 전에 미리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그러면 보통 감사기도에 그 말을 넣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괜찮으시다면 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난 뒤에 드리는 기도 형식이 있으니까 그거라도 읽어 드릴까요?”
“네, 네, 어떻게든 잘 좀 부탁드립니다.”
기도서 가운데 감사 기도가 실려 있는 페이지를 서기가 가르쳐 주자 목사는 곧 그것을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선원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한 마디 한 마디 분명한 목소리로 목사를 뒤따라 읽었다.
그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일이 되어 가는 모양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그를 따라 기계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설교단 옆 계단 가운데에 혼자 떨어져서 가만히 무릎 꿇고 있는 선원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제단 쪽을 향하여, 모자를 옆에 두고 두 손을 모았다. 사람들의 눈에 자기의 모습이 어떻게 비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감사 기도가 끝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중도 일어서서 일동은 함께 교회당을 나왔다. 밖으로 나온 선원의 얼굴에 조금밖에 남지 않은 햇빛이 비쳤다. - 그러자 오래 전부터 이 마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 사나이가 요 몇 년 동안 헤이븐풀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젊은이 쉐이드랙 졸리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 마을 태생이었으나 어렸을 때 양친을 여의고 일찍부터 선원이 되어 뉴펀들랜드 상대의 무역 일을 했던 사나이였다.
그는 걸으면서도 마을의 이 사람 저 사람과 말을 주고받았다. 그는 몇 해 전 고향을 떠난 이래, 연안 항로를 다니는 조그만 쌍돛대 배의 선주 겸 선장이 되었는데 우연히 이번 폭풍우에 휩쓸렸다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배와 함께 무사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이윽고 그는 자기보다 앞에서 교회를 나가는 두 처녀를 쫓아갔다.
이 두 처녀는 그가 조금 전 교회에 들어섰을 때 회중석에 앉아 있었다. 처녀들은 그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고, 지금 함께 교회를 나오면서도 그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한 사람은 호리호리하고 온순해 보이는 처녀였고, 또 한 사람은 키가 크고 태도가 침착한, 몸집이 큰 처녀였다. 졸리프 선장은 처녀들의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며 등, 어깨와 발뒤꿈치 끝까지 잠시 싫증내지 않고 바라보았다.
"저 둘은 어디 사는 처녀들입니까?" 그는 조그만 목소리로 옆 사람에게 물었다.
"몸집이 작은 아가씨가 에밀리 해닝이고, 큰 쪽은 조안나 휘퍼드라고 하지요."
"아하! 그렇지, 이제 생각이 나는군요."
그는 처녀들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다정한 눈초리로 가만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에밀리, 나를 기억 못하겠소?" 그는 희색빛이 어린 푸른 눈을 처녀에게 향해 물었다.
"기억해요, 졸리프 씨." 에밀리는 수줍어하면서 대답했다.
함께 가는 처녀는 검은 눈동자로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조안나 양은 아무래도 얼굴이 잘 생각이 나질 않는군요." 그는 말을 이었다 - "하지만 어렸을 적 일이나, 일가들의 일은 잘 알고 있지요."
세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졸리프가 얼마 전 아슬아슬하게 생명을 건졌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동안, 어느덧 일행은 에밀리 해닝의 집이 있는 스루프 레인 근처까지 와 있었다. 에밀리는 방긋 웃고 고개를 까닥하고 나서, 남은 두 사람과 헤어졌다. 얼마 가지 않아 졸리프는 조안나와도 작별했다.
그는 이렇다 할 용건이나 다른 약속도 없었기 때문에 다시 에밀리 집쪽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스스로 계리사라고 말하는 아버지와 둘이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벌이가 신통치 않아 에밀리는 생계를 보충하는 수단으로 손수 조그마한 문방구점을 하고 있었다. 졸리프가 들어가자, 이 부녀는 마침 차를 들던 참이었다.
"아, 벌써 차를 드실 시간입니까? 저도 한 잔 주실 수 있겠습니까?"
졸리프는 방으로 들어가 차를 마시고, 선원 생활에 대한 이야기 등을 여러 가지로 지껄이면서 거기 주저앉았다. 이웃 사람들도 몇 사람 찾아와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러는 동안 에밀리 해닝은 그 일요일 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선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한 두 주일이 더 지나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암암리에 약속이 이루어졌다.
그 다음 달, 어느 달 밝은 밤이었다. 쉐이드랙 졸리프는 마을 동쪽 밖으로 길게 곧장 뻗은 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신식 주택들이 늘어선 둔덕진 교외로 접어들었다. 물론 신식 주택이라곤 하지만 진짜로 신식이라고 할만한 집들이 오래 된 항구 도시 근처에 있을 리는 없다. 다만 비교적 그렇다는 얘기다.
그때 그는 문득 자기 앞을 걷고 있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흘깃 뒤돌아다보는 그 모습이 어딘지 에밀리같기도 했다. 그러나 뒤를 쫓아가 보니 그것은 조안나 휘파드였다. 그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 함께 나란히 걸었다. 조안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냥 먼저 가세요. 그렇지 않으면 에밀리가 나중에 질투할 거예요!"
그러나 그는 별로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그대로 조안나와 함께 계속 나란히 걸어갔다.
이날 이 산책 도중에 서로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 또 어떤 일을 했는지 쉐이드랙 자신도 나중에는 기억이 분명치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조안나는 이날 이후로 자기보다 나이도 어리고 훨씬 더 온순한 라이벌로부터 감쪽같이 그 사나이를 떼어놓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졸리프는 오직 조안나 휘퍼드 꽁무니만 쫓아다니고 에밀리에게는 거의 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부두 주위에서는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바다에서 살아 돌아온 졸리프 노인의 아들이 조안나와 결혼할 계획이라는 얘기였다. 그래서 에밀리가 몹시 낙담하고 있다는 얘기도 함께 들려왔다.
이런 소문이 퍼지고 난 뒤 어느 날 아침 조안나는 외출 준비를 하고 좁은 골목에 있는 에밀리의 집으로 찾아갔다. 에밀리가 쉐이드백이란 사나이를 잃고 매우 상심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녀 역시 에밀리의 애인을 가로챈 것에 대해 양심을 가책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조안나는 사실 자신의 소유가 된 이 선원이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 사나이에게서 정중한 대접을 받는 것은 싫지 않았다. 또한 결혼이라는 화려한 예식은 항상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진심으로 졸리프를 사랑했던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야심가였다.
사회적 지위로 보더라도 그녀의 상대방은 자기보다 결코 지위가 높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처럼 용모가 뛰어난 여인이라면 결혼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만약 에밀리가 소문처럼 그렇게 낙심하고 있다면 차라리 그를 돌려보내는 게 좋겠다… 조안나는 전부터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쉐이드랙에게 쓴, 파혼을 알리는 편지를 들고 있었다.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진정 에밀리가 그렇게 슬퍼하고 있다면 그 편지를 쉐이드랙에게 직접 부칠 계획이었다.
조안나는 스루프 레인의 옆골목으로 들어서서 길보다 조금 위치가 낮은 문방구점으로 내려갔다. 이 시간에는 에밀리의 아버지가 집에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는 것을 보면 에밀리도 집을 비운 것 같았다. 원래 손님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오 분 정도 가게를 비워도 아무 문제도 없었다. 조안나는 그 조그만 가게 앞에 서서 에밀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 가게에서 파는 물건들도 아주 보잘 것 없었으나 에밀리는 여성다운 솜씨를 발휘해 별로 값도 나가지 않는 물건들을 보기 좋게 진열해놓고 있었다. 잠시 후 진열장 밖에 어떤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사람은 육 펜스짜리 문고본, 종이 다발, 실로 매달아놓은 판화 따위를 살펴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쉐이드랙 졸리프 선장이었다.
그는 집안에 에밀리가 혼자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서 안을 들여다 봤던 것이다. 조안나는 에밀리의 체취가 남아 있는 그곳에서 그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가게 안쪽 거실로 통하는 문으로 살그머니 몸을 숨겼다. 그녀는 에밀리와 친했기 때문에 집안 구석구석 잘 알고 있었고, 지금까지도 종종 그렇게 드나든 일이 있었다.
졸리프는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간막이 유리에 드리워진 커튼 너머로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에밀리가 보이지 않아 실망하는 것 같았다. 졸리프 선장이 막 단념하고 가게를 나가려 하는 순간 에밀리의 모습이 문간에 나타났다. 그녀는 일을 보러 나갔다가 서둘러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녀는 졸리프를 보자 깜짝 놀라 다시 문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에밀리, 그렇게 달아나지 말아요! 달아나면 안돼! 어째서 그렇게 날 무서워하는 거요?"
"무서워할 리가 있나요, 선장님? 다만 너무 갑작스럽게 오셔서… 그저 깜짝 놀랐을 뿐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가 깜짝 놀랐다는 것, 정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지나가다 잠깐 들렀소." 졸리프는 말했다.
"혹시 종이라도 필요하신가요?" 에밀리는 얼른 카운터 뒤로 돌아갔다.
"아니오, 에밀리. 어째서 그런 곳으로 숨는 거요? 내 옆에 있어주면 안되오? 나를 무척 원망하는 것 같군요."
"원망하다니, 그럴 리가 있나요. 제가 어떻게…"
"그렇다면 이리로 나오세요. 서로 점잖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말입니다."
에밀리는 억지로 웃는 것처럼 어색하게 웃으며 그가 말하는대로 가게 안으로 나와 그의 옆에 섰다.
"이제야 착한 아가씨가 된 것 같군요." 그는 말했다.
"선장님, 그런 말씀은 마세요. 그런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해주실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요."
"그래요, 잘 알겠소. 하지만 에밀리, 나는 오늘 아침까지도 당신에게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지 알지 못했소.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지 않소. 그야 나도 조안나에게는 호의를 갖고 있지요. 하지만 그 아가씨는 처음부터 나를 친구 이상으로 여기지는 않았어요. 겨우 이제야 나도 누구에게 내 아내가 되어달라고 청혼해야 할 것인지 알게 된 거예요.
이봐요, 에밀리. 바다에서 오랫동안 항해를 하고 돌아오면 남자들은 누구나 박쥐처럼 눈이 멀고 말지요. 여자들을 보고서 전혀 분간을 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어느 여자나 다 똑같이 그저 여자로 보일 뿐이에요. 이 사람 저 사람 가릴 것 없이 모두 예뻐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상대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좀더 훌륭한 아가씨를 만날 수 있는지 따위는 생각도 하지 못하죠. 그래서 누구나 쉽게 손에 잡히는 사람에게 달려가는 겁니다. 나는 처음부터 당신이 좋았어요. 하지만 당신이 너무 수줍어하는데다 뒤로 꽁무니를 빼는 바람에 내가 이렇게 귀찮게 따라 다니는 것이 싫은 모양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조안나에게 갔던 거지요."
"그만, 제발 그런 말씀은 이제 그만하세요. 졸리프씨, 제발 부탁이에요!" 에밀리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 그렇게 말했다. "다음달이면 조안나와 결혼할 예정인데, 그런 말씀은 하시면 안돼요. 그런... 그런..."
"에밀리, 사랑스러운 에밀리!" 졸리프는 이렇게 외치면서 에밀리의 자그마한 몸을 두 팔로 억세게 껴안았다. 그녀가 미처 그의 행동을 눈치챌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커튼 뒤에 서 있던 조안나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눈을 돌리려 했으나 마음처럼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오… 진짜 사랑해서 결혼까지 할 그런 사람 말이오. 게다가 조안나가 하는 얘길 들어보면 언제든지 흔쾌히 나와 헤어질 수 있는 것 같아요. 조안나는 나보다 훨씬 지체도 높고 훌륭한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만, 그냥 친절한 마음에서 나에게 결혼을 승낙한다는 말을 해버린 거에요. 그런 멋진 아가씨야 사실 나처럼 하찮은 선원의 아내가 되기엔 적당치 않죠… 당신이야 그런 역할도 잘 하겠지만 말입니다."
쉐이드랙은 그러면서 몇 번이나 그녀에게 키스했다. 에밀리의 나긋나긋한 몸은 그의 격렬한 포옹에 안겨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정말 조안나가 당신과 헤어질까요? 네? 괜찮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녀도 우리를 일부러 불행하게 만들 생각은 아마 없을 거요. 틀림없이 흔쾌하게 양보해줄 겁니다."
"정말,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좋겠지만! 하지만 이젠 정말 돌아가셔야 해요, 선장님!"
그래도 쉐이드랙은 자리를 뜨지 않고 얼쩡대고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어떤 손님이 가게로 들어와 일 페니짜리 봉랍(封蠟)을 사는 바람에 그는 가까스로 그 자리를 떠났다.
조안나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가슴속에 질투의 불길이 파랗게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고 몰래 그 집을 빠져나갈 셈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에밀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몰래 그 집에서 나와야 했다. 그녀는 거실에서 복도로 살며시 빠져나가 거기서 앞문 쪽으로 돌았다. 그리고 발소리를 죽이며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애무하는 장면을 지켜본 조안나는 애당초 에밀리를 찾아왔을 때 마음속으로 했던 결심을 완전히 뒤집어버렸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쉐이드랙을 놓칠 수 없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자기가 썼던 편지를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나서 졸리프 선장이 자기를 찾아오더라도 몸이 불편해서 만날 수 없노라고 이르도록 어머니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쉐이드랙은 조안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자기의 솔직한 심정을 밝힌 편지를 써서 보내왔다. 언젠가 그녀가 졸리프 선장에게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은 우정 이상의 것이 아니라고 솔직히 밝힌 적이 있는데, 그 말처럼 이젠 두 사람 사이의 약혼을 취소해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하는 편지였다.
쉐이드랙은 편지를 쓰고 나서 하숙집에 죽치고 앉아 멀리 부두와 그 너머 섬들을 바라보면서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눈이 빠지게 기다려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는 점점 마음이 불안해져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무렵 그는 하숙집을 빠져나와 거리로 나왔다. 조안나를 찾아가서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조안나의 어머니가 나와서 지금 딸의 기분이 좋지 않아 그를 만날 수 없노라고 전했다. 그러나 얘기를 듣고 보니 결국 그의 편지가 그녀의 그 슬픔의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부인, 그 편지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대강 아실 테죠?" 그는 물었다.
휘퍼드 부인은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지금 자기 모녀의 입장이 매우 난처해졌노라고 덧붙였다. 그 말을 듣자 쉐이드랙은 자기가 뭔가 큰 죄라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만약 자기가 보낸 그 편지 때문에 조안나가 그렇게 고민한다면, 그것은 뭔가 오해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로서는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한 일이라고 변명했다.
만약 그 편지가 자신의 의도와 달리 엉뚱한 결과를 빚어냈다면, 자신으로서는 어디까지나 약속은 약속대로 이행할 생각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니 그 편지는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생각해주기를 바란다는 얘기였다.
다음날 아침 그는 조안나가 보내온 전갈을 받았다. 그녀가 오늘 밤 어떤 모임에 참석할텐데, 거기서 돌아올 때 그가 집에까지 바래다 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가 말한대로 했다. 마을 공회당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조안나는 그와 팔짱을 끼고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회는 이제 완전히 그전처럼 된 거죠? 그렇죠? 쉐이드랙, 그 편지는 잘못 쓰신 거죠?"
"아, 그래요. 전과 똑같지요." 그는 대답했다. "당신이 그렇게 해달라고 말한다면 말입니다."
"전 당신이 그렇게 해주시기를 바래요." 그녀는 조그만 목소리로 그렇게 소근댔다. 그러다가 그녀는 문득 에밀리를 생각하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쉐이드랙은 종교적인데다가 고지식한 사나이였다. 자기의 약속을 지키는 것은 그에게 생명처럼 소중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식을 올렸다. 그보다 앞서 졸리프는 에밀리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조안나가 자신에게 냉담하다고 생각한 것은 자신이 잘못 판단했던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
결혼한 뒤 한 달만에 조안나의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신혼 부부는 자질구레한 살림살이에까지 일일이 신경을 써야만 했다. 부모를 모두 잃었기 때문에 조안나는 남편을 다시 바다로 내보낼 생각이 도무지 생기질 않았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도무지 그가 집에서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상의한 끝에 팔려고 내놓은 큰길가 식품 가게를 인수하기로 했다. 그 상점은 재고 상품과 단골 거래처까지 그대로 인수자에게 넘긴다는 얘기였다. 쉐이드랙은 장사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조안나 역시 아무것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이럭저럭 일을 하면서 장사를 새로 배워볼 생각이었다.
그들은 이 식품점을 운영하는 데 모든 힘을 다 기울였다. 그들은 몇 년 동안이나 가게를 꾸준히 운영했지만 그다지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다. 부부 사이에는 두 아들이 태어났다. 아이 어머니는 그 아이들을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워했다. 그녀는 남편에 대해서는 실상 단 한 번도 진실한 사랑을 느껴보지 못했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는 어떠한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사는 도무지 번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자식들의 교육이나 장래를 위해 모처럼 뭔가 해보려고 해도 냉엄한 현실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모두 평범한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집이 바닷가였던 때문인지, 아이들은 점점 항해술이나 모험 따위 그 나이 또래의 으레 흥미를 느끼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런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는 졸리프 부부의 가장 큰 관심사는 - 물론 자신들의 가정 문제를 제외하고 - 에밀리의 결혼 문제였다. 사람이란 눈에 잘 띄는 것은 오히려 잘 놓쳐버리고, 한편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것을 생각지도 못하게 찾게 되는 수가 있다. 온순한 에밀리 역시 이런 이상한 인연 때문인지 어떤 부자 상인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 상인은 에밀리보다는 나이가 꽤 많지만 아직 한창 일할 나이의 홀아비였다. 에밀리도 처음에는 이 세상 누구와도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상대인 레스터씨는 끈기 있게 에밀리의 마음이 변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여전히 별로 마음내켜하지 않는 그녀에게서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이 부부 사이에도 두 아이가 태어났다. 에밀리는 이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기가 이렇게 행복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하곤 했다.
이 훌륭한 상인의 집은 고풍적인 분위기의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집이었다. 벽돌로 만들어진, 커다랗고 육중한 분위기의 저택이었다. 그 저택은 하필이면 큰길을 사이에 두고 졸리프 부부의 가게를 마주보는 위치에 있었다. 아무리 운명이라곤 하지만, 조안나는 이런 처지가 마음 아팠다.
오직 질투심 때문에 자기는 경쟁자로부터 아내의 위치를 빼았았는데, 그 상대방은 지금 아주 유복한 처지가 되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먼지투성이 가게 안에서 싸구려 막대사탕이나 수북하게 쌓인 건포도 더미, 깡통에 든 차 따위가 든 진열장을 지키고 있는 볼썽사나운 처지다.
장사가 여의치 않아 살림이 점점 기울어졌기 때문에 조안나는 손수 가게에 나가 손님들을 접대해야 했다. 손님이 뭘 찾기라도 하면 그녀는 몇 푼 되지 않는 물건 때문에 가게 안을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런 모습을 에밀 리가 길 하나 건너 저편 커다란 저택의 응접실에 앉아 지켜보고 있을 생각을 하면 그녀는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아무리 하찮은 손님일지라도 기분 좋게 맞아야 했고, 길에서라도 마주치면 또 그 때에도 꼬박꼬박 인사를 해야 했다. 그런데 에밀리는 아이들이랑 가정교사까지 거느리고 마을을 마음대로 누비고 다녔다. 게다가 만나는 상대방들도 이 마을이나 근처 다른 마을의 상류층 사람들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은 별로 사랑하지도 않았던 쉐이드랙 졸리프를 에밀리에게서 빼앗은 대가였다.
쉐이드랙은 선량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나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 모두 아내에게 성실했다. 에밀리에게 사랑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도 이제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점점 날개가 잘리고, 자식들의 어머니인 아내에 대한 헌신 속에서 무뎌졌다. - 젊은 시절의 그 격렬했던 정렬도 완전히 잊혀졌다. 어느 틈엔가 에밀리는 그에게 한 사람의 친구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에 대한 에밀리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약 에밀리의 태도에 조금이라도 질투 비슷한 것이 엿보였다면 조안나는 오히려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꾸민 그 계획의 결과에 대해 에밀리나 졸리프 모두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오히려 그녀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쉐이드랙에게는 수많은 경쟁자들과 싸워서 가게를 운영하고 키워갈만한 장사 수완이 아예 없었다. 보따리 장사꾼이 귀찮게 달라붙어 억지로 가게에 들여놓은 '기적적인 계란 대용품'이 있다고 치자. 이 물건이 정말 쓸만한지 손님이 물어보기라도 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도대체 푸딩 과자에 진짜 계란을 넣지 않고 계란의 맛을 낸다는 것은 도무지 억지 소리일 뿐입니다."
또 가게에 진열해놓은 '진품 모카 커피'가 진짜냐고 손님이 물으면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코딱지만한 가게에서야 그런 정도로 통하는 거지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어느 여름날의 일이었다. 무더운 햇빛이 맞은편 커다란 벽돌 저택을 반사하고 나와서 가게 안에까지 비추고 있었다. 가게 안에는 부부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안나는 에밀리네 집 현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현관에는 막 그 집을 방문한 어떤 부자 손님의 마차가 서 있었다. 최근 에밀리는 이 가게의 물건을 팔아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눈치였다.
"쉐이드랙, 사실 말해서 당신은 절대 장사꾼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에요." 조안나는 실망스럽게 중얼거렸다. "애초부터 장사꾼이 될만한 환경도 아니었고, 게다가 당신처럼 중간에 뛰어들어서는 도저히 재산을 모을 방법이 없어요."
무슨 일에나 아내의 의견을 고분고분 따랐던 쉐이드랙은 이번에도 그녀가 하는 말에 그대로 동의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억지로 재산을 모을 생각은 전혀 없소." 그는 쾌활하게 말했다. "지금 이 상태만 해도 나는 충분해. 게다가 그럭저럭 살아가는 데는 별 지장이 없지 않소."
자질구레한 물건이 담긴 병들 사이로 조안나는 다시 한 번 커다란 저택을 바라보았다.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 그거야 물론 그렇죠." 그녀의 말투는 딱딱했다.
"하지만, 이것 좀 봐요. 에밀리 레스터가 설치는 것 좀 보라구요. 어때요? 옛날에는 정말 가난뱅이였는데 말이에요. 저 집 아들들은 틀림없이 고급 사립학교에 가겠죠. 그런데 우리집 아이들은 어때요? - 기껏해야 교구에서 운영하는 자선학교에 보내야 할 처지라구요! - "
쉐이드랙은 에밀리에 대한 상념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에밀리 만큼 당신에게 잘해준 사람도 없지 않소!" 그는 기분좋게 말했다. "그렇지 않소? 당신이 그때 에밀리를 나에게서 떨어지도록 만들었지. 덕분에 에밀리와 나는 그 쑥스러운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고! 그래서 결국 저 여자도 레스터씨가 청혼해왔을 때 승낙한 거 아니요?"
남편의 이 말에 조안나는 거의 미칠 정도로 흥분했다.
"옛날 얘기는 꺼내지도 말아요!" 그녀는 슬픔 때문에 얼굴이 파랗게 질릴 지경이었다. "아무튼 좀 생각해봐요. 당신이야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겠지만, 아이들이나 저를 위해서 어떻게 좀 더 돈을 벌 방법이 없는지 생각해보란 말이에요!"
"글세…" 쉐이드랙도 이제는 말투가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도 그 동안 분명하게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런 장사 체질이 아닌 것 같기는 해. 그걸 절실하게 느껴왔어. 나는 좀더 활개를 펴고 일할만한 곳이 필요해. 이런 데서 친구나 이웃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찔끔거리며 사는 건 내게 맞지 않아. 뭔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넓은 곳이 좋아. 나도 내게 맞는 일을 하면 누구 못지 않게 부자가 될 수 있을 거요."
"글세, 그렇게 좀 해 보세요! 그래, 당신에게 맞는 일이라면 어떤 게 좋을까요?"
"다시 배를 타야겠지."
선원의 아내란 거의 과부 생활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남편을 일부러 집에 붙잡아둔 사람은 다름 아닌 조안나 자신이었다. 그러나 조안나의 그런 본능적인 생각조차 지금 그녀의 야심 앞에서는 짓눌릴 수밖에 없었다.
"틀림없이 잘할 수 있어요?"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지."
"그래서 쉐이드랙, 당신은 가고 싶은 거에요?"
"사실 그다지 재미가 있어서 가는 건 아니지. 바다에는 아무 즐거움도 없소. 조안나, 사실은 집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것이 훨씬 더 좋다오. 솔직하게 말해서 나라고 해서 바다가 뭐 그다지 좋겠소? 이건 옛날에도 마찬가지였어. 하지만 당신이나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얘기가 또 다르지. 나처럼 태어나면서부터 뱃사람으로 자라난 경우에는 역시 재산을 모으려면 바다로 나가는 수밖에 없단 말이오."
"시간이 오래 걸릴까요? 돈을 모으는 데 말이에요."
"글세, 그거야 뭐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기는 어렵지. 별로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수도 있겠지."
다음날 아침, 쉐이드랙은 옷장에서 옛날에 입었던 선원용 웃옷을 꺼냈다. 그것은 옛날 바다에서 이 마을로 돌아왔을 때 몇 달 동안 입고 다녔던 바로 그 옷이었다. 그는 옷의 좀을 털어낸 다음 그것을 입고 부두 쪽으로 갔다. 부두는 옛날처럼 흥청거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뉴펀들랜드 무역 때문에 아직 제법 번화한 편이었다.
그는 얼마 되지 않아 전 재산을 털어서 돛을 두 개 단 배를 사들였다.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투자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그 배의 선장이 되었다. 배를 사고 나서 얼마 동안은 가까운 연안을 다니면서 장사를 했다. 그러면서 쉐이드랙은 식품점을 하면서 몸에 배었던 육지 생활의 때를 벗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봄이 되기를 기다려 그는 드디어 뉴펀들랜드로 출발했다.
조안나는 자식들과 함께 집에 남아서 그를 기다렸다. 아이들은 이미 늠름한 젊은이로 자랐다. 그들은 항구와 부두 근처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곤 했다.
'저렇게 조금씩 일을 하는 것도 아마 괜찮을 거야.' 아이들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이야 집안 형편이 어려우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만, 쉐이드랙이 돌아올 때쯤이면 항구에서 하는 일은 그만두게 하고, 가정 교사를 붙여서 철저하게 교육을 시키는 거야. 그래봐야 저 애들은 기껏 열 일곱, 열 여덟 살이니까… 이제 손에 돈만 좀 들어오면 우리 아이들도 대수나 라틴어를 배우게 해야지! 그래서 에밀리 레스터네 두 아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멋진 신사로 만들어야지!"
쉐이드랙이 돌아온다고 약속한 날이 다가왔다. 그러나 이윽고 그날이 되었지만 그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사람들은 원래 돛단배란 것이 도착 예정일보다 늦어지는 일은 다반사라며 걱정할 것 없다고 조안나를 위로했다. 사실이 그랬다. 원래 입항 예정일보다 무려 한 달이나 지난 어느 비오는 날 밤늦게 배가 항구에 돌아왔다는 통지가 왔던 것이다.
이윽고 문간에 선원들 특유의, 쉐이드랙의 발소리가 들리고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 아이들은 밖에 나가고 없어서 아버지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조안나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재회의 기쁨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졸리프는 왜 이렇게 늦게 돌아왔는지 설명했다. 한 건 잡을 수 있는 일을 맡았는데, 요행히 그게 들어맞아서 상당한 돈을 손에 쥐었다는 애기였다.
"당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지. 어때? 이것을 보면 그래도 꽤 마음에 들 거야!"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콩나무에 올라갔던 재크가 거인을 죽이고 가져온 주머니처럼 쉐이드랙은 묵직하고 커다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는 그 주둥이를 끄르고 속에 든 것을 꺼냈다. 난로 곁 낮은 의자에 앉아 있던 아내의 무릎 위로 일 파운드 금화며 일 기니짜리 금화(당시에는 아직 기니 금화가 유통되고 있었다)가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그 무게 때문에 그녀의 옷자락이 마루바닥에까지 축 늘어질 지경이었다.
"자, 어때?" 쉐이드랙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어떻소? 내가 말하지 않았어? 꼭 뭔가 보여주겠다고 말이야. 어때, 응?"
그러나 돈을 손에 쥔 최초의 흥분이 가라앉자 이미 그녀의 얼굴에는 조금 전처럼 환희의 빛이 반짝이지 않았다.
"참 많군요. 하지만… 이게 다예요?"
"이게 다냐고? 조안나,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그 한 무더기가 무려 삼백 파운드나 된단 말이오! 그만하면 한 재산이지!"
"그래요… 그건 그렇지요. 한 재산이라고 해야겠죠… 바다에선 말이에요. 하지만 육지에서는 그 정도는…"
그러나 그녀도 역시 당장은 돈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윽고 아이들도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일요일, 쉐이드랙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기도의 내용을 일반 감사 기도에 특별히 넣어달라고 부탁하는 방법으로 기도를 드렸다.
이삼 일이 지나자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문제가 떠올랐다. 그는 아무래도 자신이 기대했던 것만큼 아내가 기뻐하지 않는 것 같다고 발했다.
"글세, 쉐이드랙… 그게 말이에요." 그녀는 대답했다. "우리야 돈을 백, 이백 이런 단위로 세지만, 저 건너집은 말이에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길 건너 맞은편 집을 고개짓으로 가리켰다. "천, 이천 이렇게 센단 말이에요. 당신이 장사를 나간 뒤로는 아예 쌍두마차를 타기 시작한 걸요."
"호오, 그랬어?"
"이것 봐요, 쉐이드랙. 당신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잘 몰라요. 하지만 어쨌든 좋아요. 이 돈으로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봐야죠. 어차피 저 집은 부자이고, 우리는 어디까지나 가난뱅이니까요."
그 뒤 일 년이라는 세월이 별로 하는 일도 없이 그냥 지나가 버렸다. 그녀는 여전히 우울한 표정으로 집안과 가게 앞을 얼쩡거리고 있었고, 아이들은 그 전처럼 항구 근처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조안나!" 어느 날 졸리프가 말을 꺼냈다… "당신 눈치를 보니까 아무래도 내가 벌어온 것으로는 아직 부족한 모양이군."
"사실 그걸로 충분할 수가 없지요.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우리 자식들은 레스터네가 갖고 있는 배나 부리면서 먹고 살아야 할 거예요. 나는 이래봬도 옛날에는 그 여자보다는 훨씬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다구요!"
졸리프는 아웅다웅 다투는 것을 싫어하는 사나이였다. 그는 입속으로 한 번 더 배를 타볼까 하고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그는 그 후 며칠 동안 뭔가 곰곰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어느 날 오후 부두에서 돌아오자마자 느닷없이 얘기를 꺼냈다.
"이봐, 여보. 한 번만 더 배를 타면 틀림없이 당신이 원하는 만큼 어떻게 해볼 수가 있을 텐데 말이야… 만약, 만약…"
"여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당신이 백이나 이백이 아니라, 천이나 이천 단위로 세게 해 주겠다는 얘기지."
"하지만 어떻게요? 만약이란 게 도대체 뭐예요?"
"만약 내가 우리 아이들을 데려갈 수 있다면 말이오."
그녀는 낯빛이 변했다. 그리고 허둥대며 물었다. "여보, 도대체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갑자기 놀라는 거요?"
"그런 말은 듣기도 싫어요! 끔찍해요! 아이들을 바다로 데려가다니! 그런 위험한 곳에 말이에요. 전 아이들을 신사답게 키우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바다에서 위험한 일을 시킬 것 같아요? 바다에 가는 건 목숨을 거는 일이라구요. 이떻게 얘들에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요? 그래요, 도저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그래, 잘 알겠소. 그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그 다음 날,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조안나가 남편에게 물었다.
"이봐요, 만약 저 아이들까지 함께 가면 벌이는 훨씬 더 좋아지는 거예요?"
"그거야 당연하지. 내가 혼자 하는 것에 비하면 적어도 세 배는 더 많이 벌게 될 거요. 내 밑에서 일을 시키면 내가 두 사람 더 늘어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말이오."
시간이 좀 더 흐른 후 그녀는 다시 물었다… "좀더 자세하게 얘기를 해봐요."
"그럽시다. 우리 애들은 말이야, 배를 다루는 일에서는 아주 뛰어난 재주를 타고났어. 타고난 선장감들이지. 북해라고는 하지만 이 항구 근처 모래톱들보다 특별히 더 위험할 것은 없단 말이오. 또 게다가 이 녀석들은 어렸을 때부터 이 근처 바다에서 단련이 됐거든. 게다가 대담하기도 하고. 얘들보다 두 배 나이 먹은 어른이라 해도 얘들처럼 침착하고 믿음직스럽게 해내지는 못할 거야."
"하지만 바다는 너무 위험하잖아요? 게다가 곧 전쟁이 터질 것이란 소문도 있던데…" 그녀는 근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물론 위험한 일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하지만…"
만약의 경우… 그러한 위험을 생각할수록 어머니의 가슴은 불안으로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불안은 점점 커져서 그녀는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나 에밀리가 갈수록 거만해지는 모습은 도저히 참고 볼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조안나는 남편을 붙잡고 건너편 집과 비교해서 자신들이 너무나 가난한 것을 한탄하고 바가지를 긁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닮아서 성격이 좋았다. 얘들은 항해로 모험을 하는 얘기를 듣자 꼭 하고 싶다고 나섰다. 그들도 아버지와 마찬가지였다. 그다지 바다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구체적인 계획을 듣자 반드시 해보고 싶다며 열을 올리게 되었다.
이제 모든 것은 어머니의 승낙에 달려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망설이며 승낙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나 드디어 아이들이 아버지와 함께 항해를 떠나도 좋다고 허락했다. 쉐이드랙이 특히 더 기뻐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나를 계속 지켜주셨다.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어김없이 꼬박꼬박 감사의 표시를 드렸다. 설마 하나님이 나처럼 믿음이 깊은 사람을 버리시지는 않을 것이다.
졸리프네의 재산은 모조리 이 항해에 쏟아 부었다. 가게의 물건도 거의 없어졌다. 이른바 이 '뉴펀들랜드 무역'을 마칠 동안 조안나가 살아갈 만큼의 물건만 남겨놓고 모조리 이 항해에 쏟아 부은 것이다. 그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그 쓸쓸한 세월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 것인지 그녀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지난번에는 아이들이 옆에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이 시련을 견뎌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녀는 이렇게 자신을 격려했다.
배에는 장화와 단화, 기성복, 낚시 도구, 버터, 치이즈, 밧줄, 돛대며 그밖에 여러 가지 상품들을 실었다. 그리고 돌아올 때에는 기름이며 모피, 생선 등 여러 가지 필요한 물건들을 싣고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리고 목적지를 갔다 오는 동안 다른 항구에도 들러서 장사를 하고 돈을 듬뿍 벌어들인다는 계획이었다.
***
배는 어느 봄 날 월요일 아침에 항구를 떠났다. 그러나 조안나는 배가 떠나는 것을 배웅하지 않았다. 결국 자기의 생각 때문에 생겨난 이 이별의 장면을 차마 자기 눈으로 보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남편도 그걸 알았는지 그 전날 밤, 그녀에게 출항 시간이 내일 점심 때 조금 못 미쳐서라고 말해주었다.
다음날 아침 다섯 시에 잠이 깨었을 때 그녀는 아래층에서 남편과 아이들이 바쁘게 돌아 다니는 것을 느꼈지만 일부러 내려가지 않고 자리에 누워 있었다. 헤어질 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짐작으로는 지난 번 항해처럼 이번에도 아홉 시쯤 집에서 출발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한참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에 내려가 보니 집안에는 남편의 모습도, 아이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책에 분필로 쓴 글씨만 남아 있었다. 그것은 쉐이드랙이 급히 휘갈겨 쓴 이별의 편지였다. 새삼스럽게 이별을 하노라고 다시 한 번 당신을 슬프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그냥 떠난다는 것이었다. 남편의 편지 아래로 아이들이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쓴 글씨도 있었다.
그녀는 옷도 제대로 챙겨입지 못하고 부랴부랴 부두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항구와 아득히 먼 파란 수평선 저 너머까지 남편과 아이들이 탄 배를 찾아 보았다. 그러나 조안나 호의 깃대와 바람을 안은 돛이 멀리 보일 뿐이었다. 사람의 모습은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외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보냈어! 내가 저들을 보낸 거란 말이야!"
집으로 돌아와 분필로 쓰여진,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라는 글씨를 보고 그녀는 다시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큰길 쪽으로 난 방으로 들어가 길 건너편 에밀리의 집을 바라보자 그녀의 여윈 얼굴에는 승리를 자랑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제 두고 보자, 곧 있으면 나도 이 비굴한 노예와 같은 처지에서 빠져나갈 수 있단 말이야…
사실 엄격하게 말하면 에밀리 레스터가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며 거만을 떤다는 것도 조안나의 자격지심 때문에 생긴 오해라고 할 수 있었다. 부자 상인의 아내로서 에밀리의 생활이 조안나보다 사치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마주칠 때면 - 물론 두 사람이 만나는 일 자체가 좀처럼 없었다 - 에밀리는 될 수 있으렴 두 사람 사이의 신분 차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신경을 써왔던 것이다.
그들이 떠난 후 첫해 여름이 그렇게 지나갔다. 조안나는 가게에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근근히 살아갔다. 그러나 이제 가게에는 겨우 진열장과 카운터만 남아 있는 정도였고, 물건을 제대로 들여놓지 못했다. 사실 에밀리만이 거의 유일한 단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에밀리는 물건이 좋건 나쁘건 그런 것은 따지지 않고 가리지 않고 사 주었다.
그러나 조안나에게는 에밀리의 그런 호의마저도 불쾌했다. 마치 보호자나 자선을 베푸는 것처럼 너그러운 태도가 오히려 반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길고 쓸쓸한 겨울이 깊어 갔다. 그녀는 사무용 책상을 벽쪽으로 돌리고, 분필로 쓰여진 작별 인사가 지워지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아무래도 그 글씨들을 닦아버릴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조안나는 몇 번이나 눈물이 글썽해져서 그 글씨들을 바라보았다.
훌륭하게 장성한 에밀리의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휴가를 맞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에게는 이제 어느 대학에 진학할 것인지가 화제거리였다. 그러나 조안나는 마치 물속에 잠긴 사람처럼 가만히 숨을 죽이고,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이제 한 번만 더 여름이 지나가면 '무역 기간'이 끝나는 것이다…
이윽고 그 기간도 다 끝나갈 무렵 에밀리는 어렸을 적의 친구를 찾아갔다. 벌써 몇 달 째 남편과 아이들에게서 아무 소식도 없어 조안나가 무척 근심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조안나는 말없이 에밀리를 맞았다. 에밀리가 좁은 카운터를 스쳐 지나면서 가게 안 응접실로 들어올 때 그녀의 비단 치맛자락이 사각사각 자랑스럽게 소리를 내는 것이 조안나의 귀에 들렸다.
"너는 모든 게 다 잘 됐는데, 나는 완전히 그 반대야!"
"왜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 남편이랑 아이들이 한 재산 벌어서 돌아올 거라고 다들 그러던데…" 에밀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아, 정말 그들이 돌아올까? 이렇게 불안한 건 여자로서는 이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생각해 보렴, 세 사람이 모두 한 배에 타고 갔단 말이야. 그런데도 벌써 몇 달째 아무 소식도 없으니 말이야!"
"하지만 아직 돌아올 때가 된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미리 쓸데없는 걱정을 해서는 안돼!"
"이 세상 어떤 것도 그들이 없는 내 슬픔을 보상해줄 수는 없어!"
"그럼 왜 그들을 떠나보냈니? 가게도 훌륭하게 꾸려나가고 있었잖아?"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 조안나는 정색을 하고 에밀리쪽으로 자리를 고쳐 앉으면서 말했다.
"그 이유를 설명해줄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들은 매일매일 안달복달하면서 힘들게 살아가는데, 너희들은 부자가 되어서 위세를 부리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게 약이 올랐던 거야! 자 이제 난 모든 걸 다 얘기했어. 날 미워하든 말든 알아서 하렴!"
"내가 널 왜 미워하겠니, 조안나?"
조안나의 불안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이윽고 밝혀졌다. 가을이 지나고, 배가 들어와야 할 때가 진작 지났는데도 모래톱 근처 수로에는 조안나 호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드디어 근심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된 것이다. 조안나 졸리프는 불이 타오르는 난로 옆에 앉아 있으면서도 밖에 바람이 요란하게 불며 지나갈 때마다 몸을 떨었다.
그녀는 원래부터 바다를 무서워하고 싫어했다. 바다는 거대한 생물과도 같았다. 여인의 슬픔을 기뻐하는, 매정하고도 요란스러운,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그런 생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반드시 돌아올 거야!'
조안나는 쉐이드랙이 출발하기 전에 해주었던 말을 생각했다. 다행히 이번 항해에서 성공을 거두고 무사히 돌아오는 그날 새벽에 교회에 가서 아이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자던 얘기였다. 오래 전 그가 조난을 당했지만 무사히 이 항구로 들어왔던 바로 그 때처럼 말이다.
조안나는 아침이나 저녁이나 빠짐없이 교회에 나갔다. 그리고 거기 설교단에 가장 가까운 맨 앞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시선은 옛날 쉐이드랙이 아직 젊은이였을 그 무렵 무릎 꿇었던 계단 앞에 언제나 못 박혀 있었다. 이십 년 전 바로 그날, 그가 무릎 꿇었던 바로 그 자리를 그녀는 한 치도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무릎을 꿇었던 그의 뒷모습도, 그리고 그 옆 계단에 놓여있던 그의 모자도 그녀는 다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운 분이시니, 남편은 틀림없이 다시 돌아와 저곳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그가 말한 것처럼 아들 둘을 양 옆에 하나씩 앉히고서 말이다. 조지는 저기에, 짐은 바로 여기에…
예배를 보면서 가만히 그 장소를 지켜보고 있는 동안 그녀에게는 돌아온 세 사람이 그곳에 무릎꿇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두 아들의 훤칠한 뒷모습 사이로 남편이 앉아 늠름한 모습으로 기도를 드리며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 아닌가. 공상은 점차 발전하여 거의 환상이라고 할 정도가 되었다. 지쳐버린 눈을 계단으로 돌릴 때마다 거기에는 반드시 세 사람의 모습이 보이게 됐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아직 그녀의 영혼을 구제해주시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죄의 보상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육친을 자신의 야심의 노예로 만들어버린 대가로 그녀가 치러야 하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그것은 죄의 보상의 차원을 넘어 그녀의 마음은 거의 절망 상태에 빠졌다. 입항 예정일로부터 벌써 몇 개월이 지났지만 배는 돌아오지 않았다.
조안나의 눈과 귀는 언제나 그들 일행이 돌아오는 기척을 느끼곤 했다. 넓은 바닷가가 한눈에 들어오는 항구 위 언덕에 서면 멀리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위로 남쪽으로 파도를 헤치고 가는 조그마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그녀는 그것이야말로 틀림없이 조안나 호의 돛대 꼭대기가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안에 있을 때에도 큰길이 부두로 이어지는 마을 끝 창고 모퉁이에 뭔가 잘 알 수 없는, 누군가 부르는 소리나 떠드는 소리가 들리면 그녀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외쳤다.
"저것 봐, 그들이 오고 있어!"
그러나 소리를 낸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일요일 오후면 언제나 교회 설교단 옆 계단에 무릎을 꿇었지만, 그녀가 보는 세 사람의 환영은 끝내 현실이 되어 나타나지 않았다. 가게도 이미 바닥이 드러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독과 슬픔에 지친 나머지 그녀는 완전히 기운이 빠져버려서, 최소한의 상품조차도 들여놓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곧 마지막 손님마저도 가게에 발걸음을 끊었다.
에밀리 레스터는 이렇게 딱한 처지를 보다 못해 될 수 있는 대로 손을 써서 이 비참한 여인을 도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노력은 여지없이 거절을 당하곤 했다.
"너는 꼴도 보기 싫어! 네 얼굴을 쳐다보기도 싫단 말이다!"
에밀리가 찾아가서 도와주려고 할 때마다 조안나는 언제나 목이 쉰,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조안나! 난 어떻게든지 네 힘이 되어주고 싶어. 그래서 너를 위로해주고 싶은 거야!" 에밀리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신분이 다르지! 돈 많은 남편과 멀쩡한 아이들이 있는 행복한 마나님 아니냐? 그런데 나처럼 죽지 못해 사는 이 머리 허연 할망구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거냐?"
"조안나, 이렇게 하면 좋겠어… 이렇게 음산한 곳에 혼자 있지 말고, 우리 집에 와서 나와 함께 지내주렴!"
"그랬다가 만약 그들이 집에 돌아와서 내가 집에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우리들 사이에 찬물을 끼얹겠다는 심보지? 싫어, 나는 여기 있을 거야. 나는 도대체 네가 싫단 말이야! 아무리 친절하게 해준다 해도 나는 전혀 고맙지 않아!"
그러나 시간이 더 지나자 아무 수입도 없는 조안나는 집과 가게 임대료조차 내지 못하게 되었다. 조안나도 이제 쉐이드랙과 아이들이 돌아올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별 수 없이 레스터네 집 신세를 지겠노라고 승낙했다. 레스터는 삼층의 방을 그녀 혼자서 쓰도록 내어주고, 가족 누구와도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해주었다.
조안나는 이미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려앉고, 이마에도 깊은 주름살이 새겨졌다. 몸도 무척 여위고 가늘어졌고, 허리도 구부정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그 사람들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다 계단에서라도 에밀리와 마주치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네가 어째서 나를 이곳에 데려왔는지 나는 다 알고 있어. 그들이 돌아왔을 때, 내가 집에 없는 것을 보고 실망해서 다시 나가버리게 하려는 거지? 그렇게 해서 내가 너에게서 쉐이드랙을 가로챈 복수를 하려는 거지?"
에밀리 레스터는 슬픔에 짓눌린 여인의 입에서 나오는 이러한 비난을 참았다. 그녀 역시 다른 헤이븐풀 마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쉐이드랙과 아이들은 모두 바다 밑 해초더미 사이로 사라져버린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배가 난파한 것이 뻔하다고 체념해버린 지도 벌써 몇 년의 세월이 더 흘렀다. 그러나 아직도 조안나는 밤중에 잠을 자다가 무슨 소리에 문득 잠이 깨면 침대에서 일어나곤 했다. 그리고 깜박거리는 가로등 불빛 사이로 길 건너편 가게 쪽을 내려다보곤 했다. 혹시나 그들이 돌아온 것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두 개의 돛을 단 조안나 호가 떠난 지 육 년이 지났다. 날씨가 궂은 어느 십이월의 밤이었다.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바다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안개가 마치 젖은 플란넬 천처럼 사람의 얼굴을 덮는 것 같았다. 조안나는 최근 들어서 좀처럼 느껴본 적이 없는 열정과 확신을 갖고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평소처럼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열한 시쯤 잠이 들었다.
문득 깊은 한밤중에, 아마 한 시나 두 시쯤 됐을까? 그녀는 갑자기 깜짝 놀라 일어났다. 분명히 한길가에서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고, 쉐이드랙과 그녀의 아이들이 가게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녀는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자기가 무엇을 걸쳤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에밀리네 저택의 융단을 깐 넓은 계단을 구르다시피 뛰어내려왔다. 그녀는 현관 테이블에 촛불을 켜 놓았다. 그리고 문의 빗장과 쇠사슬을 벗겨내고 한길로 뛰어나갔다.
부두에서 한길로 몰려오는 안개 때문에 바로 눈앞에 있는 가게의 모습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큰길 건너편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일까?
거기에는 사람의 그림자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이 불쌍한 여인은 미친 듯이 맨발로 길거리를 왔다갔다 헤맸다… 그러나 그래도 역시 사람의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옛날에는 자기 집이었던 가게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집 문을 있는 힘껏 두드렸다…
자기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들은 이날 밤 여기에서 아침까지 자고 있는 것이다. 그게 틀림없다… 이윽고 몇 분 뒤 이층 창문이 열리고 누군가 얼굴을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얼마 전 이 가게를 새로 빌린 젊은 사나이였다.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고 가게 앞에 서 있는, 바짝 여윈 사람 그림자가 그의 눈에 띄었다.
"누군가 여기에 찾아오지 않았소?"
그 그림자는 이렇게 물었다.
"아이구, 졸리프 부인이셨군요. 전 누구신가 했습니다."
사나이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덧없는 기대에 의지한 채 간신히 서 있는 그녀의 그 간절한 마음이 그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리라. 젊은 사나이는 말했다.
"아뇨, 아무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