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or in the Wall
H.G. 웰즈
[소개]
<담장의 문>은 웰즈로서는 보기 드물게 내면의 향기에 가득찬, 영혼의 향수를 내쉰 탄식 같은 단편이다. 철없는 어린 시절에 잠깐 들어갔던 어떤 정원… 그곳에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결코 맛볼 수 없는 온갖 동경과 아름다움과 행복이 있었다. 그 뒤에도 그곳으로 들어가는 '담장의 문'과 몇 번이나 마주쳤지만 발목을 붙잡는 세상사 때문에 항상 스쳐 지나치고 만다. 그에게 있어 그것은 결코 환상이 아닌 실존이었다. 오히려 세상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근원적인 형태 즉 원형(prototype)이었다.
[작가 소개]
H.G. 웰즈(Herbert George Wells, 1866-1946) : 영국의 소설가, 문명 비평가, 계몽 과학자.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고학으로 런던대학 이학부를 졸업했다. 처음에는 공상과학소설 <타임머신> <투명인간>이나 유머 소설 <토노반게이> 등으로 등단했으나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세계주의를 신봉하는 문명 비평가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세계문화사 대계> <생명의 과학> <다가올 세계> 등 저술을 통해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대에 가장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이오넬 월리스가 '담장의 문'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준 것은 석 달 전쯤 어느 날 밤이었다. 서로 감추는 것 없이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는 그런 자리였다. 내가 듣기로는 그가 그 이야기를 꾸며낸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이야기하는 모습은 아주 솔직담백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내 아파트 방에서 잠이 깨자 상황이 달라졌다. 침대에 누워 그가 이야기한 것을 다시 생각해보자 그의 이야기 전체가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이미 주위의 분위기는 어제 저녁과 달랐다. 그의 진지하고도 느린 음성의 매력도 없었고, 갓을 씌운 탁자의 불빛 아래 우리를 은은하게 감싸주는 분위기도 없었다. 어제 저녁 그와 나 두 사람은 스탠드 불빛이 식탁을 비추는 가운데 그늘 속에 잠겨 저녁 식사를 하고 디저트를 먹었다. 유리잔, 식탁보, 냅킨 등이 모두 일상의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진 밝고 작은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모든 것이 사라지자 그가 한 얘기도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친구가 나를 놀려먹은 것이겠지!" 나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솜씨가 아주 대단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친구가 이렇게 이야기를 꾸며댈 줄은 생각도 못했지 뭐야…"
잠시 후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그가 들려준 얘기를 생각해 보았다. 물론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의 회상에는 어떤 현실감, 놀라울 정도로 생생한 현실감이 담겨 있었다.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그것은 나름대로 그의 경험을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그런 방식이 아니면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체험을 암시하거나 제시하거나 혹은 전달하려 했던 것 아닐까.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분명치는 않지만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설명하고 싶지 않다. 한때 품었던 의심을 이제 완전히 털어버린 것이다. 이야기를 들을 당시 그랬던 것처럼 나는 월리스가 해준 얘기를 사실로 믿고 있다. 그때 월리스는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나에게 진실을 들려주었다는 점을 이제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잘 알 수가 없다. 그가 정말 본 것이 정말 사실인지, 아니면 그저 보았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말이다. 그는 엄청난 특권을 가진 인물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환상적인 꿈에 의해 희생 당한 것일까… 나로서는 추측조차 할 수 없다. 나의 의혹은 그의 죽음과 함께 영원한 미궁 속으로 빠져버렸다. 그의 죽음에 대해 여러 가지로 조사한다고 해도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전적으로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는 문제인 셈이다.
그는 무척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마 내가 무심코 어떤 말이나 비판을 꺼낸 탓에 그 친구가 비밀을 털어놓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는 당시 벌어졌던 대규모 사회 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었다. 나는 그의 행동에 실망, 그 운동이 느슨한데다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그는 거기 대해 뭔가 변명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갑자기 그가 그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사실은 뭔가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게 있다네."
그는 조금 있다가 말을 계속했다. "사실 내가 게을렀다는 것은 분명하네. 사실은, 귀신이나 영혼 따위도 아니고… 그게 참 말하기 애매한 문제인데 말일세, 레드먼드, 그러니까 나는 뭔가에 홀린 셈이야. 내가 홀려 있는 그 무언가, 그것 때문에 다른 모든 사물은 광채를 잃고 만다네. 내 마음이 그 뭔가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영국인 특유의 수줍음 때문이었다. 뭔가 감동적인 것, 중대한 일, 또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러한 수줍음은 흔히 우리를 압도하곤 한다. 그것 때문에 그도 말문이 막혔던 것이다.
"자네도 세인트 애설스턴즈 학교를 계속 다녔지?"
그가 말했다. 이것은 그가 앞서 꺼냈던 얘기와는 전혀 무관한, 뚱딴지 같은 소리처럼 들렸다.
"그런데 말일세…" 그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 말을 멈추었다. 그는 얘기를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무척 더듬거렸지만 차차 말을 이어가는 것이 쉬워진 것 같았다. 그렇게 그는 자기 인생의 숨은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갖가지 동경으로 가득 찬 얘기였다. 그 동경은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워왔던 것이다. 그 동경 때문에 이 세상의 온갖 흥미와 볼거리마저도 싱겁고 지루하고 헛된 것처럼 보였으리라. 그만큼 그의 추억담은 아름다움과 행복으로 가득찬 것이었다.
이제 그 이야기에 대한 실마리가 어느 정도 풀린 상황에서 생각해보니, 그때 그의 얼굴에는 모든 것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의 사진을 한 장 갖고 있다. 세상사에 초연한 듯한 그의 표정이 잘 나타나 있는 그런 사진이다. 그 사진을 보면 한때 그를 몹시 사랑했던 어떤 여인이 그에 대해서 한 말이 생각난다.
"그는 갑자기 흥미를 잃어버리곤 했지요. 앞에 상대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리곤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조차 전혀 거들떠보지 않게 된답니다…"
그러나 월리스가 세상사 모든 것에 전혀 흥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어떤 일에 주의를 집중하기만 하면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실제로 그의 인 생은 갖가지 성공 사례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나보다 훨씬 앞서 나갔다. 내 머리 저 위로 날아올라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출세 가도를 달린 사람이다. 그는 아직 서른 아홉 살에 불과했다. 하지만 만일 살아 있었다면 그는 관직에 머물러 새로운 내각에서도 각료로 임명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다들 하는 얘기였다.
학교 다닐 때에도 그는 항상 나보다 앞섰다. 별로 노력하지 않는데도 그랬다. 아마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타고난 것이리라. 우리는 웨스트켄싱턴에 있는 세인트 애설스턴즈 학교를 계속 함께 다녔다. 입학할 당시에는 그도 나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눈부신 실력으로 훌륭한 성적을 올려 나를 훨씬 앞질렀다.
물론 나 역시 그렇게 못하는 편은 아니었다. 내 기억에도 아마 남들 하는 만큼은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학교 시절에 나는 그 '담장의 문'에 대해 처음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가 세상을 뜨기 겨우 한 달 전에 두 번째로 그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이 '담장의 문'은 적어도 그에게는 현실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현실 세계의 벽을 지나 영원불멸의 진실에 이르는 그런 문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나도 그 점에 대해 상당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문은 그가 다섯 살이나 여섯 살 정도의 어린 아이였을 때 처음 그의 생활에 등장했다. 그가 이 얘기를 나에게 고백할 때의 표정과 태도가 떠오른다. 그는 천천히 엄숙한 표정으로 그 때가 언제쯤이었나를 진지하게 따지고 계산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거기엔 진홍색 담쟁이 덩굴이 있었네. 맑은 호박색 햇살이 비치는 하얀 담장이었네. 거기에 진홍색 담쟁이 덩굴이 선명하게 기어오르고 있었어. 어떻게 해서 이런 기억이 남아 있는지는 확실치가 않아. 하지만 어쨌든 그런 기억이 분명히 남아 있다네.
그리고 초록색 문 아래 깨끗한 도로 위에 상수리나무 잎이 떨어져 있었지. 나뭇잎들은 노랑과 초록으로 얼룩진 것이었지. 갈색이나 거무죽죽한 그런 색은 아니었어. 그러니까 아마 방금 떨어진 잎들이었겠지. 그런 것으로 보면 아마 시월쯤이었을 거야. 나는 해마다 나뭇잎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그게 맞을 거야."
"그러니까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난 그때 다섯 살하고 넉 달이 지났을 때였을 거야."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꽤 조숙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는 비정상적일 만큼 어린 나이에 벌써 말을 배웠다. 너무나 어른스럽고 분별이 있어서 그에게는 나이보다 이른 행동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었을 정도였다. 보통 아이들 같으면 그런 자유는 대개 일고여덟 살쯤 되어서야 주어지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두 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 후에는 유모 겸 가정교사가 그를 돌보았다. 당연히 유모는 어머니보다는 주의를 덜 기울이고 엄격하지 않기 마련이었다. 부친은 일에 빠져 지내는 변호사였다. 엄격한 부친은 그에게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으나 또 한편으로는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는 두뇌가 명석했으나 이 세상이 따분하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 때문에 어느 날 그는 집을 나와 길거리를 헤메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주의를 소홀히 한 탓에 집을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또 웨스트켄싱턴의 어떤 길로 걸어갔는지도 분명치 않다. 이 모든 것은 이제는 도저히 되살릴 수 없는 기억의 안개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졌다. 그러나 하얀 담장과 초록색 문만은 아주 뚜렷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 어린 시절의 기억에 의하면 그는 그 초록색 문을 처음 본 순간 다가가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이상한 욕망을 느꼈다고 한다. 그것은 무척 매력적인 감정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 유혹에 빠지는 것이 현명하지 못한, 또는 옳지 못한 행동이라는 확신도 분명히 느꼈다. 물론 그 둘 중 어느 쪽이라고 정확하게 짚어 말하기는 어려웠다.
한편 그의 기억에 따르면 그 문에는 분명히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당장에라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처음부터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어린 소년이 한편으로 마음이 끌리면서도 다른 한편 주저하는 그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왜 그런지 이유를 분명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만일 그 문으로 들어가면 아버지가 무척 화를 낼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 분명히 떠올랐다고 한다.
월리스는 망설이고 주저했던 그 순간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그 문 앞을 그냥 지나쳤다. 두 손을 호주머니에 쑤셔넣고 서투른 휘파람을 억지로 불어대면서 담장 끝까지 그대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보잘 것 없는 초라한 가게들이 여러 개 늘어서 있었다.
그 가게들 가운데 철물점 겸 도배장이 가게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 가게에는 토관, 함석판, 수도관, 벽지 견본, 에나멜 통 따위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물건들이 지저분하게 놓여 있었다. 그는 그 물건들을 구경하는 척하며 거기를 어슬렁거렸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 초록색 문으로 가까이 가서 그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갑자기 그는 질풍 같은 감정에 휩싸였다. 그는 다시 망설이기 싫어서 그 초록색 문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곧장 초록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에서 문이 곧장 쾅하고 닫혀졌다. 그래서 그는 평생동안 그를 사로잡았던 그 정원으로 순식간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가 들어간 정원의 느낌을 남김없이 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아마 월리스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 정원에는 사람을 기뻐 들뜨게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경쾌함, 행복, 여유 있고 느긋한 느낌이 감돌고 있었다. 그곳의 광경은 선명한 색깔이었다. 흠이 없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그런 색깔이었다. 거기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오직 기쁘기만 했다. 이 세상에는 아주 드문, 우리가 어리고 즐거울 때에나 느낄 수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월리스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일세…" 그는 어쩐지 자신 없는 말투로 계속했다.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얘기를 할 때 망설이는 그런 태도였다.
"거기엔 커다란 표범이 두 마리 있었다네. 점이 있는 그런 표범 말이야. 그런데 나는 그 표범이 무섭지 않았어. 넓은 길이 길게 뻗어 있었지. 길 양쪽에는 대리석으로 가장자리를 두른 화단이 있었지. 그런데 거기에서 그 털가죽이 빌로드처럼 매끄러운 표범 두 마리가 공을 가지고 뛰놀고 있더군. 그중 한 마리가 호기심이 생기는지 고개를 치켜돌고 내게 다가오더군.
그놈은 곧장 내게로 달려왔네. 내가 조그마한 손을 내밀자 거기에 그 부드러운 둥근 귀를 조용히 비비는 거야. 그러면서 기분이 좋은지 목을 가르릉거리더군. 그래, 그것은 마법의 정원이었어. 그렇고 말고. 크기 말인가? 아아! 사방으로 온통 쭉 펼쳐져 있었네. 멀리 저쪽에는 언덕이 있었던 것 같아. 웨스트켄싱턴 따위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던 것 같아.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난 꼭 집에 돌아온 것 기분이었어."
"문이 내 뒤에서 닫힌 그 순간부터 나는 그 길, 나뭇잎이 떨어져 있고 마차와 장사꾼들이 손수레를 몰고 다니고 있는 그 길을 깨끗이 잊어버렸어. 그뿐만이 아니었지. 집안의 규칙에 복종하도록 나를 끌어당기는 힘조차도 몽땅 사라져버렸지. 거기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나 두려움, 조심해야 하는 이 세상의 현실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지. 난 그런 것들을 완전히 잊어버린 거야.
나는 그 순간 즐겁고 행복에 가득 찬 새로운 세상에 사는 소년이 되었다네. 그것은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네. 햇빛은 더 따뜻했고 깊숙이 스며들면서도 더 부드러웠지. 주위의 공기에서는 투명하고 맑은 기쁨을 느낄 수 있었네. 파란 하늘에는 구름이 햇빛에 밝게 빛나며 둥실 떠 있었지… 내 눈앞에는 길고 넓은 길이 마치 나를 반겨주듯이 펼쳐져 있었네. 길 양쪽에는 잡초 하나 없는 화단이 있었고 거기에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지.
나는 전혀 무서워하지도 않고 내 작은 손으로 두 마리 큰 표범의 부드러운 털을 어루만졌어. 그리고 그 동그란 귀와, 귀 바로 아래 간지럼을 타는 부분까지 쓰다듬어 주었네. 그리고 표범들과 함께 뛰어 놀았어. 표범들은 마치 내가 집에 돌아온 것을 환영하는 것 같았어. 내 마음엔 집에 돌아왔다는 생각이 절실했다네.
문득 키가 큰 아름다운 처녀가 나타났어. 처녀는 웃으면서 나에게 다가와서는 '안녕?'하고 인사를 하더군. 그리곤 나를 들어올려 키스를 한 다음 내려놓고는 손을 잡고 어디론가 데려갔어. 그때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어. 다만 그런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즐거운 느낌이었지. 그 동안 무슨 이유론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행복한 일들을 기억해낸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길게 뻗은 참제비꽃 잎새 사이로 넓고 붉은 계단이 보이더군. 우리는 그 계단을 올라갔네. 그러자 울창한 고목들이 양쪽에 늘어선 길이 나타났네. 벌겋게 갈라진 이 고목들이 늘어선 가로수 길을 따라 대리석 의자와 석상들이 놓여 있더군. 잘 길들인 다정스런 흰 비둘기 떼가 있었다네…"
"그 처녀는 시원한 가로수 길을 따라 나를 데려갔다네.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또 뭔가 얘기도 해 주었어. 아주 재미있고 즐거운 이야기였던 건 분명한데, 그 내용을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어. 그때 그 처녀의 아름답고 상냥한 얼굴, 그 부드러운 윤곽, 섬세한 턱의 모양이 생각나는군…
갑자기 원숭이 한 마리가 나무에서 내려와 내 곁으로 달려왔네. 고동색 털에 순한 회색 눈을 가진, 깔끔한 카푸친 종류였어. 원숭이는 나를 올려다보며 즐거운 듯 온통 이를 드러내더니 금방 내 어깨로 뛰어 올라오더군. 이렇게 우리 두 사람은 무척 즐겁게 그 길을 걸어갔어."
그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재촉했다.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 기억이 나는군. 월계수 사이에 어떤 노인이 생각에 잠겨 있더군. 우리는 그 노인 옆을 지나, 작은 앵무새들이 즐겁게 지저귀는 곳을 지나갔네. 그리고 나서 넓고 그늘진 아케이드를 지나, 아주 넓고 시원한 궁전에 이르렀어. 그곳은 시원한 분수가 뿜어 나오고 아름다운 것들, 소망이 채워진다는 약속으로 가득 차 있었다네.
거기에는 온갖 물건과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저 어렴풋할 뿐이야.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이 아름답고 친절했어. 자세히는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들이 모두 무척 친절했다는 것, 내가 온 것을 무척 기뻐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어. 친절하게 나의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이나 환영과 사랑의 뜻이 담긴 그 눈빛들…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네."
그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함께 놀 친구들을 봤다네. 난 그게 무척 기뻤다네. 그동안 나는 외톨이 소년처럼 지냈으니까. 그 애들은 잔디밭에서 즐겁게 뛰어놀고 있었네. 거기엔 꽃으로 장식한 해시계가 있었지. 함께 놀면서 우리는 무척 친해졌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기억에는 어떤 공백이 있어. 우리가 무슨 놀이를 하고 놀았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다는 걸세. 아무리 생각해보려고 해도 기억할 수가 없었어. 나중에 나는 몇 시간이고 눈물까지 흘리며 그 행복했던 - 그 놀이를 되새겨 보려고 애를 쓰기도 했어. 어린애다운 짓이었지.
나는 내 방에서 그 놀이를 혼자 다시 해 보고 싶었던 거야. 그러나 실패했어. 기억나는 것은 오직 그때의 행복감과, 그리고 나와 함께 놀았던 두 명의 친구뿐이었어…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침울하고 표정이 음산한 어떤 여자가 나타났어. 엄숙하고 창백한 얼굴에 꿈꾸는 듯한 눈을 한 침울한 여자였지. 그 여자는 연한 자주빛 긴 옷을 입고 책을 한 권 들고 있더군. 여자는 손짓으로 나를 부르더니 홀 위에 있는 화랑으로 데리고 가더군.
함께 놀던 친구들은 놀다가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채 나를 데려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어. 그들은 나와 헤어지기 싫었던지 '돌아와! 빨리 돌아와야 해!'하고 소리치더군. 나는 그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네. 그러나 그 여자는 친구들의 말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어. 그녀의 얼굴은 매우 부드러웠지만 엄숙했다네.
그녀는 나를 화랑의 어느 의자 쪽으로 데리고 갔어. 나는 그 여자 옆에 서서 그녀가 무릎 위에 책을 놓고 펼치는 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네. 그녀가 책을 펼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더군. 나는 깜짝 놀랐다네. 그건 살아 있는 책이었어. 그리고 거기서 나는 내 모습을 봤기 때문이야. 그것은 바로 내 자신에 관한 책이었어. 그 안에는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래 생겼던 일들이 모두 들어 있었어…"
"정말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었지. 그 책의 책장은 그림이 아니라 바로 현실 그대로였으니 말일세."
월리스는 말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그의 말을 과연 믿고 있는지 의심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어서 계속하게!" 나는 말했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
"그것은 있는 현실 그대로였어. 그래, 틀림없어. 그 안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고 사물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으니까 말이야. 내가 거의 잊어버릴 뻔했던 사랑하는 어머니, 엄격하고 강직한 아버지, 그리고 하녀, 유모, 내 집에 있었던 낯익은 물건들이 보였어. 그리고 현관과 문밖에 이리저리 마차들이 바쁘게 오가는 거리의 모습도 나타났어.
나는 그것을 보며 정말 놀랐네. 믿어지지가 않아서 새삼스럽게 그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지. 그리고 다시 페이지를 넘겨 여기저기 뛰어넘으면서 책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했어. 그리고 결국 길고 흰 벽, 초록색 문 바깥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주저하고 있는 내 모습까지 보게 되었네. 그리고 나는 그 갈등과 두려움을 다시 느끼게 되었지.
'그 다음은?' 난 이렇게 소리치면서 페이지를 넘기려고 했네. 그런데 그 엄숙한 여자의 차가운 손이 나를 가로막더군.
'그 다음은?' 난 이렇게 고집을 부리며 있는 힘을 다해서 그 여자의 손가락을 잡아 떼서 밀어내려 했다네. 마침내 여자가 양보하더군. 그리고 내가 페이지를 넘기자 그 여자는 마치 그림자처럼 내 위로 머리를 수그리고 이마에다 키스를 했어."
"그러나 그 다음 페이지는 내게 그 황홀한 정원도, 표범도, 내 손을 붙잡고 인도해준 그 처녀도, 나와 헤어지기 싫어하던 그 친구들도 보여 주지 않았어. 오직 그 페이지는 웨스트켄싱턴 거리를 보여줄 뿐이었어. 아직 등불이 켜지기 전 싸늘한 저녁 시간의 길고 어두침침한 그 거리 말이야. 나는 바로 거기에 있었어. 작고 초라한 몰골로. 나는 울음을 참으려 애썼지만 그만 소리내서 엉엉 울고 말았다네.
내 등 뒤에서 '돌아와! 빨리 돌아와야 해!' 이렇게 소리치던 그 친구들 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슬퍼서 나는 울었던 거야. 그런데 그것은 책의 한 페이지가 아니었어. 냉혹한 현실이었어. 나는 거기 그렇게 내버려진 거지. 그 황홀하던 정원, 그리고 나를 가로막던 엄숙한 그 여자의 손도 모두 사라졌어… 도대체 다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불빛을 들여다보며 침묵을 지켰다.
"아!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그 비참함이라니…!" 그는 중얼거렸다.
"그래서?" 나는 잠시 기다렸다가 그를 재촉했다.
"난 정말 가련하고 불쌍한 아이였네! 이 회색빛 세상으로 되돌아왔다니 말이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게 되자 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기고 말았다네. 게다가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엉엉 울었다는 수치심과 굴욕감까지 맛보아야 했지. 그런 모습으로 겁에 질려 집에 돌아가야 했던 그 수치심과 굴욕감을 난 결코 잊을 수 없어.
금테 안경을 쓴, 마음씨 좋게 생긴 노신사가 걸음을 멈추고 들고 있던 우산으로 나를 쿡쿡 찌르면서 말을 건네더군. 그 얼굴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네. 그 사람이 이러는 거야. '딱하기도 하지. 길을 잃었나 보구나!' 다섯 살이나 먹은 런던 토박이인 나를 보고 글쎄 길을 잃었다니!
그 노신사는 친절하게 젊은 경관을 불러왔네. 어느새 사람이 주위에 모여들어서 함께 나를 집에까지 데리고 갔다네. 결국 나는 엉엉 울면서, 여러 사람들의 눈길을 온몸에 느끼면서 겁에 질려 우리 집 계단으로 돌아왔지. 그 황홀한 정원을 잃어버리고 말이야."
"그 정원, 아직도 나를 사로잡고 있는 그 정원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겨우 이 정도야. 그리고 물론 나는 그 정원에 떠돌던 느낌을 다 설명할 수는 없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투명한 듯한 비현실성, 보통 우리가 이 세상에서 느끼는 경험과 다른 특성에 대해서는 설명할 재간이 없어.
그러나 이것은 분명 사실이야. 분명 그런 일이, 바로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났던 거야. 만일 그것이 꿈이었다고 하더라도 아주 희한한 꿈이었지. 대낮에 꾸었던 별난 꿈이라고나 할까… 물론 나는 나중에 아주머니, 아버지, 유모, 가정교사 등등 온갖 사람들에게서 이것저것 질문을 받느라 시달려야 했지."
"나는 그들에게 사실 그대로 이야기했네. 하지만 아버지는 난생 처음으로 내 종아리를 때리더군.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야. 나중에 아주머니에게도 그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했지만 또 다시 벌을 받았을 뿐이네. 내가 전혀 반성하지 않고 끝내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었어. 그리고 모두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마저 금지됐다네. 그래서 난 거기 대해 한마디도 할 수 없게 돼버렸어.
심지어 얼마 동안은 동화책마저 빼앗겼지… 내가 너무나 '공상적'이라는 이유였지. 뭐? 정말이라니깐. 정말 책들을 압수 당했어. 우리 아버지는 약간 고루한 데가 있어서… 결국 그 이야기는 나 혼자 마음에 간직할 수밖에 없었어. 나는 어린애처럼 눈물을 흘리며 내 배개에다 속삭이곤 했지. 덕분에 내 배개는 축축하게 젖어 짭짤한 맛이 나곤 했지.
그리고 나는 형식적이고 열성이 없는 기도 다음에 한 가지 진심에서 우러나온 소원을 덧붙이게 되었다네. '하나님, 제발 그 정원의 꿈을 꾸게 해 주세요. 아! 제발 저를 그 정원으로 데려가 주세요!'라고 말이야. 사실 그 정원의 꿈을 자주 꾸기도 했네. 그때마다 내가 처음에 겪은 것과 다르게 약간 더하거나 혹은 좀 바꾸었을지도 모르지…
자네도 짐작하겠지만 이 모든 것은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들을 가지고 아주 어렸을 때의 경험을 다시 구성하려는 것이네. 그러나 이 기억과 그 이후 내 어린 시절의 다른 기억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놓여 있어. 그러는 동안 그 놀라운 환상을 다시 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 그런 때가 왔다네…"
나는 뻔한 질문을 했다.
"아니야…" 그는 대답했다. "어렸을 때에는 그 정원으로 가는 길을 다시 찾으려고 했던 기억이 없어.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한 일이지. 아마 이 사고가 있은 뒤부터는 내가 또 길을 잃을까봐 가족들이 내 행동을 더 엄격하게 감시했는지도 모르지.
내가 그 정원을 다시 찾으려고 했던 것은 사실 자네를 만났을 그 무렵쯤이었을 거야. 한때는 그 정원을 완전히 잊어버린 적도 있었다네. 물론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지만 말이야. 아마 그때가 여덟이나 아홉 살 무렵일 거야. 자네, 세인트 애설스턴즈 학교에서 내 어렸을 때 모습 기억하겠나?"
"물론이지."
"내가 그 무렵 무슨 비밀스러운 꿈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을 테지?"
그는 갑자기 고개를 들고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노스웨스트 항로'란 놀이 있었잖아? 그걸 나하고 해본 적이 있었나…? 아 참, 학교 가는 길이 나하고 달랐을 거야."
그는 말을 계속했다.
"그건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들이 매일 하는 그런 놀이였어. 이를테면 학교로 가는 '노스웨스트 항로'를 발견하는 것이었지. 물론 학교 가는 길이야 뻔하지. 그런데 이 놀이는 색다른 길을 발견하는 것이 핵심이지. 보통 때보다 십 분 일찍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출발해서 익숙하지 않은 낯선 길로 해서 학교까지 가는 그런 놀이였어.
그런데 어느 날 난 캠프던힐 맞은편 빈민가에서 그만 길을 잃어버렸어. 그래서 이번에는 놀이에도 지고, 학교에도 늦을 거라고 걱정했지. 그런데 막다른 골목길처럼 보이는 곳에서 에라 모르겠다며 끝까지 갔더니 다른 길이 새로 나오는 거야. 나는 다시 희망을 갖고 그 길을 서둘러 걸어갔지. '아직 늦은 건 아니야…'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말일세.
그런데 그렇게 걷다보니 골목길 사이로 묘하게 낯이 익은 지저분한 가게들이 나타나더군. 그리고 놀랍게도 거기에 하얀 벽과 초록색 문이 나타났단 말이야! 환상의 정원으로 들어가는 바로 그 초록색 문 말이야!"
"난 정신이 번쩍 들었어. 역시 그 정원, 그 행복의 정원은 결코 꿈이 아니었다는 것이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그 초록색 문을 두 번째로 보았을 때는 나는 그 문을 처음 보았을 때와는 달라져 있었어. 이미 학생으로 바쁜 생활을 보내는 상황이었다는 거야. 과거 어렸을 때처럼 얼마든지 놀 시간이 있는 건 아니었지. 어쨌든 난 이때 문으로 금방 들어갈 생각은 없었어. 우선 말이야, 우선 학교 시간에 늦지 않게 가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지. 개근 기록을 깨고싶지 않았거든.
물론 그 문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도 조금은 있었겠지. 그래, 그건 분명해… 하지만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그 문은 그저 어떤 방해물이나 유혹처럼 느껴졌던 것 같네. 물론 다시 한 번 초록색 문을 발견했기 때문에 무척 호기심을 느낀 것도 사실이야. 그래서 나는 학교로 가면서도 계속 그 생각만 했지. 마음이 벅차더군.
하지만 나는 쉬지 않고 학교로 계속 걸었어. 그 생각 때문에 걸음을 멈추거나 쉬지는 않았단 말이야. 나는 뛰어가면서 시계를 꺼냈지. 아직도 십 분 가량 여유가 있더군. 언덕을 내려가니까 눈에 익은 길이 나오더군. 나는 숨을 헐떡이며 학교에 도착했어. 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각은 하지 않았지. 그리고 코트와 모자를 걸었던 것도 기억이 나네… 그렇게 난 그 문 바로 앞을 그냥 지나쳐 버렸던 거야. 이상하지 않은가?"
그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때는 그것이 늘 거기에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없었지. 소년의 상상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문이 거기 있고, 또 그리로 가는 길을 알았다는 것만은 아주 기뻤던 것 같아. 하지만 학교 수업이 날 붙잡고 있었지.
난 그날 오전에 몹시 산만하고 정신 집중이 잘 되지 않았던 것 같아. 그 아름답고 신비로운 사람들을 금방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그들에 대한 기억을 이것저것 더듬고 있었던 거야. 참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그들이 나를 만나면 무척 기뻐하리라는 점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어… 그래, 맞아. 그날 아침 나는 그 정원을 가끔씩 찾아가 쉴 수 있는 장소로 생각했어. 힘들게 학교 생활 중간중간에 이용할 수 있는 장소 말이야."
"하지만 그날은 거기 가지 않았어. 이튿날이 토요일이어서 그것도 내 생각에 영향을 끼쳤을지 모르네. 아니면 그날 수업에 산만했던 탓에 벌로 보충수업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거기 들를 시간이 없었는지도 몰라. 어느 쪽인지는 잘 모르겠어.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그날 마법의 정원이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는 거야. 그래서 도저히 나 혼자만 그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는 것이야."
"그래서 난 그 이야기를 입밖에 내고 말았지. 지금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데… 거 얼굴이 족제비처럼 생겨서 우리들이 스퀴프라고 부르던 녀석 있었잖아?"
"홉킨스 2세를 말하는 모양이군." 내가 말했다.
"맞아, 홉킨스였지. 사실 그 녀석에겐 말하고 싶지 않았네. 그 녀석에게 그 얘길 하는 건 뭔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런데도 난 그 얘기를 하고 말았어. 마침 집으로 가는 길이 그 녀석과 같은 방향이었단 말일세. 그래서 우리는 같이 걷고 있었지. 그 녀석은 말이 좀 많은 편이어서 그 마법의 정원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아마 무슨 다른 이야기를 하기는 했을 거네만…"
"게다가 그때 나는 그때 도저히 다른 얘기를 할 수는 없는 심정이었지. 그래서 난 그 이야기를 녀석에게 하고 말았어. 그랬더니 그 녀석이 내 비밀을 다른 애들에게 떠벌리고 돌아다닌 거야. 다음 날 쉬는 시간이 되자 나보다 큰 놈들 대여섯 명이 날 둘러싸더군. 녀석들은 나를 놀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무척 호기심을 느끼는 눈치였어.
나더러 자꾸 그 마법의 정원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라고 그러더군. 거 덩치 큰 포세트란 녀석도 끼어 있었지. 자네, 그 녀석 기억하겠나? 또 커너비, 모얼리 레이널즈란 녀석도 있었지. 자넨 거기 없었어… 하긴 자네가 거기 있었다면 내가 잊을 리가 없지…"
"애들의 감정이란 참 묘한 걸세. 난 속으로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덩치 큰 녀석들의 주목을 받는 것이 다소 우쭐한 기분도 든 것이 사실이야. 특히 크로쇼란 녀석이 칭찬할 때는 특히 기분이 좋았어.
왜 자네도 기억하겠지? 작곡가 크로쇼의 아들 말이야. 그 녀석은 '이거 내가 들어본 거짓말 중에서 아주 최고야!' 이러지 않겠나? 그러나 동시에 나는 신성한 비밀을 얘기한 것에 대해 정말 뼈저린 수치심을 느껴야 했네. 그 짐승 같은 포세트란 놈이 그 초록색 문 안에 있던 처녀에 대해 더러운 농담을 했거든."
그 수치심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월리스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다. "난 못 들은 척했어." 그는 말했다. "그러자 커너비가 갑자기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그러더군. 나는 정말이라고 우기면서 옥신각신했지. 그리고 나는 그 초록색 문이 있는 곳을 분명히 알고 있다고 말했어. 십 분이면 그곳으로 데리고 갈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친 걸세.
내 말을 듣고 커너비는 정색을 하더군. 꼭 바보 같은 그 표정 말이야. 그러면서 자기들을 데리고 가서 증거를 보여 주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그러는 거야. 자네 커너비에게 팔을 비틀려 본 적이 있나? 그렇다면 내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충분히 짐작할 거야. 나는 끝까지 정말이라고 우겼네.
당시 애들이 커너비에게 당하고 있어도 전교에서 누구 하나 나서서 도와줄 학생이 없었지. 크로쇼가 한두 마디 끼어들기는 했지만 커너비를 당할 수가 있나. 카너비 녀석은 그날 아주 좋은 사냥감을 하나 잡은 셈이지. 난 흥분해서 귀가 빨개지고 겁도 나더군. 난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한 셈일세.
나는 결국 나를 협박하는 그 애들 여섯 명을 이끌고 그 정원을 찾아갔네. 나 혼자서 그 마법의 정원을 찾아가지 않고 말일세. 놀려대면서도 한편으로는 호기심에 차서 겁을 주는 그 녀석들을 끌고 말이지. 나는 뺨이랑 귀가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은 쑤시고 아팠네. 더할 수 없이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마음에 고통스러웠지."
"그런데 말이야, 우리는 그 하얀 벽과 초록색 문을 찾아내지 못했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찾을 수 없었다, 그 말이야. 정말 찾을 수만 있었으면 난 그 애들을 데리고 갔을 거야… 나중에 나 혼자 갔을 때도 결코 찾아낼 수 없었어. 다시는 찾지 못했어. 그후에도 학교에 다니면서도 계속 그곳을 찾아 봤지만 한번도 찾아 내지 못하고 말았다네… 단 한번도 말이야!"
"그날 그 녀석들이 무척 괴롭혔겠구먼…"
"아주 지독하게 당했지… 커너비는 내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다면서 회의까지 열었다네. 그날 내가 울었던 흔적을 감추려고 집에 가서 몰래 이층으로 올라갔던 것을 기억할 수 있네. 그렇지만 내가 울다 지쳐서 잠이 들었던 것은 결코 커너비 때문은 아니었어. 그 정원, 내가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그 아름다운 오후, 아름답고 다정한 여자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 때문이었지. 다시 한번 배우고 싶은 그 놀이, 그 잊어버린 아름다운 놀이 때문이었어…"
"그 녀석들에게 그 말만 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어. 그후로 보낸 시간은 모두 형편없었지. 밤에는 울고 낮에는 멍청하게 넋을 잃고 있었지. 두 학기 동안 내내 게으름을 부려서 성적이 뚝 떨어졌지. 자네 기억나나? 물론 기억하고 있겠지. 자네가 산수에서 나를 이기지 않았나. 그래서 난 다시 한번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다네."
얼마 동안 내 친구는 타오르는 불길 한가운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열 일곱이 될 때까지 나는 그것을 보지 못했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세 번째 기회가 찾아왔네. 옥스퍼드 장학생 선발시험을 보려고 마차로 패딩턴 역에 가던 중이었네. 그때는 아주 순간적으로 힐끗 보았을 뿐이야. 이륜마차 창문에 팔을 기대고 담배를 피우면서 내가 제법 그럴싸하게 출세의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지. 그런데 갑자기 그 문과 벽이 나타나지 뭔가.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그리고 아직 손에 넣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치더군."
"마차는 덜커덕거리며 길을 달리고 있었어. 나는 그때 너무나 놀라서 그 길을 지나 모퉁이를 돌 때까지도 마차를 멈출 생각을 하지 못했네. 나는 내 의지가 방향이 다른 둘로 나뉘는 기묘한 순간을 경험했어. 나는 마차 천장의 조그만 문을 두드렸네. 그리고 팔을 내려 시계를 꺼내려고 했네.
마차꾼이 금방 '네, 무슨 일이신데요?' 하고 묻더군. 나는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니오. 내가 뭔가 잘못 안 모양이오! 시간이 별로 없소. 그냥 갑시다!' 라고 소리쳤어. 마차는 그대로 계속 달려갔지…"
"난 장학금을 받게 되었어.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는 통지를 받던 날 밤 나는 우리집 이층의 작은 내 서재에서 난롯가에 앉아 있었어. 아버지는 좀체로 칭찬하는 일이 없었지만 그날은 칭찬과 함께 여러 가지로 좋은 충고를 해 주시더군.
나는 애용하던 파이프를 피우며 - 청년들이 좋아하는 불독처럼 뭉뚝하게 생긴 파이프였지 - 그 길고 하얀 담장의 초록색 문을 생각했네. '만일 그때 마차를 세웠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장학금을 놓쳤을 거야. 그리고 옥스퍼드에도 들어가지 못했겠지.
그리고 내 경력도 엉망이 되었을거야! 그러고 보면 나도 이제 사리를 제법 판단하게된 모양이야! 내 결론은 그런 것이었어. 나는 깊이 생각한 끝에 내 출세를 위해서라면 마법의 정원 따위는 희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걸세."
"그리운 그 정원의 친구들, 그리고 그 맑은 분위기… 물론 그것들은 내게 무척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었어. 하지만 그때 내 생각으로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 같았어. 바야흐로 나는 현실에 대해 점점 집착하게 되었던 걸세. 나는 다른 문, 즉 출세의 문이 내 앞에 열려 있는 것을 보게 된 거야."
그는 다시 난롯불을 들여다보았다. 한 순간 장작이 활활 타올랐다. 그 붉은 불빛이 그의 얼굴에 떠오른 굳센 의지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난 출세를 위해 노력해왔네. 많은 일을 했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도 많았어. 그러나 나는 그 황홀한 정원을 수천 번이나 꿈꾸었다네. 그리고 그 이후 네 번이나 그 문을 보았다네. 그래, 네 번씩이나 말이야. 비록 힐끔 본 것이었지만 말일세.
한동안 나는 이 세상이 무척 눈부시고 흥미롭게 느껴졌지. 의미가 있고, 훌륭한 기회로 가득찬 것 같았어. 거기에 비해서 그 정원의 매력은 이미 절반쯤 사라진데다 거리가 멀고 희미하게 느껴졌네.
아름다운 여인, 유명 인사들을 만나러 만찬회에 가는 사람이 표범 따위를 쓰다듬을 생각이 들었겠나? 옥스퍼드를 졸업하자 나는 전도 유망한 청년으로서 런던에 진출했지. 사실 만만찮은 실적도 올렸어. 꽤 성공을 거둔 셈이지. 그러나 물론 실망스러운 것도 있었다네…"
"나는 두 번 사랑에 빠진 일이 있었네. 거기에 대해선 자세히 얘기하고 싶지는 않네. 다만 언젠가 어떤 여인을 찾아가는 길이었지. 그 여인은 과연 내가 자기에게 접근할만한 용기가 있는지 의심스러워하고 있었어. 나는 얼즈 코오트 근처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조그만 지름길을 걷고 있었네.
그런데 거기서 난 뜻밖에도 그 하얀 담장과 낯익은 초록색 문을 만났어. '거 참 신기한 일이로군! 이 담장은 캠프던힐에 있지 않았던가? 스토운헨지의 그 헤아리기 어여려운 신비한 돌처럼, 이곳 역시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장소였는데… 내가 기묘한 백일몽을 꾸었던 바로 그 장소 아닌가…' 난 이렇게 중얼거렸지. 하지만 나는 눈앞의 목적에 정신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그냥 지나쳐 버렸네. 사실 그날 오후엔 그 장소가 나에게 그다지 매력적일 수 없었지."
"물론 일순간 어떤 충동을 느낀 건 사실이야. 겨우 서너 걸음만 걸어가면 그 문을 열 수 있었거든. 게다가 나는 마음속으로 분명 그 문이 열릴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네. 하지만 만일 그렇게 하면 그 약속을 어기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네. 난 그 약속에 내 명예가 걸려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나중에 나는 시간을 너무 철저하게 지킨 것을 오히려 후회했다네. 잠깐 들여다보기만 했어도 좋았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한 거지. 표범들에게 손이라도 흔들어줄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나도 그때쯤에는 이미 세상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였어. 열심히 찾아도 발견할 수 없는 물건을 뒤늦게 다시 찾으려 하지는 않았네. 그래서 그 때 그 순간이 무척 아쉽다네…"
"그후 몇 년 동안 나는 열심히 일했네. 그 문은 한 번도 보지 못했어. 그 문이 다시 내게 나타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야. 그리고 동시에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 뭔가 회의를 갖기 시작했어. 뭐랄까… 이 세계에 옅은 앙금 같은 것이 덮여 있는 기분이랄까 그러면서 그 문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무척 슬프게 느껴지더군.
아마 과로로 몸이 좀 약해진 때문인지도 모르지.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사십대 중년 남자들이 느끼는 그런 감정인지도 몰라. 잘 모르겠어… 그러나 생생하게 빛나는 어떤 것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야. 사실 그것 때문에 나는 그 동안 힘들게 일을 해도 힘이 드는 줄 모르고 지낼 수 있었단 말이야. 세상이 어쩐지 시들해진 셈이랄까?
그런데 지금은 하필이면 정치판에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서 내가 훨씬 더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하는 그런 시기란 말일세. 참 묘한 일 아닌가? 그런 판에 나는 인생이란 것이 몹시 고달픈 것이라는 걸 깨닫기 시작한 거야. 고생한 보답을 받을 시기가 됐는데 정작 그 보상이라는 것이 아주 보잘 것 없다는 걸 느끼게 됐단 말일세. 그래서 얼마 전부터 난 그 정원이 간절하게 생각나더군. 그래, 그리고 나는 그걸 세 번이나 봤다네!"
"그 정원 말이야?"
"아니, 그 문 말이야! 그런데 난 거기로 들어가지 않았어!"
그의 목소리에는 형언하기 힘든 서글픔이 담겨 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로 몸을 내밀었다. "세 번이나 기회가 있었단 말일세. 무려 '세 번'이나 말이야! 사실 그동안 나는 마음속으로 맹세를 했었네. 만일 그 문이 다시 나타난다면, 무조건 거기로 들어가겠다고 말이야.
이 지저분한 세상, 공허한 공명심 싸움, 빛을 잃은 화려함, 힘들기만 하고 실속이 없는 이 세상을 벗어나 거기로 들어가려고 했어… 그리고 거기 들어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고 거기 머물러 있겠다고 이렇게 속으로 맹세했지. 하지만 막상 기회가 오면 나는 그곳에 들어가지 않았어. 일 년 동안 세 번이나 그 문을 지나치면서도 나는 거기 들어가지 않은 거야. 작년 한 해 동안 세 번씩이나 말이야."
"첫 번째는 소작인 구제법안을 놓고 여론이 분열되었던 그날 밤이었어. 정부는 그 법안 표결에서 세 표 차로 간신히 이겼지. 자네도 아마 기억하겠지? 우리편이나 반대편 모두 그날 밤 토론이 결말이 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네. 그런데 뜻밖에도 토의는 금방 마무리됐어. 나는 호츠키스, 그리고 그 친구 사촌과 함께 브렌트퍼드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네.
그때 우리 둘에게 전화 연락이 왔다네. 우리가 표결에 참석하지 않아서 현재 찬반 동수라는 얘기였지. 우리는 즉시 호치키스 사촌의 차를 타고 의사당으로 달려갔네. 우리는 간신히 시간 안에 도착했네. 그런데 가는 도중에 난 그 담장의 문을 지나쳤던 거야. 그 문은 받아서 하얗다기보다 납빛으로 보이더군. 그리고 자동차 불빛을 받은 곳이 노랗게 얼룩이 졌어.
하지만, 분명히 그 담장의 문이었어. '이런!' 나는 이렇게 소리쳤지. 그러자 호츠키스가 무슨 일이냐고 묻더군. 나는 '아냐, 아무 것도 아닐세!'' 이렇게 대답했지. 그 순간은 그렇게 삽시간에 지나가고 말았어."
"난 의사당에 들어가면서 원내총무에게 '난 지금 엄청나게 큰 희생을 치르고 온 거야!' 이렇게 말했지. 그랬더니 그 친구도 그러더군. '그건 다들 마찬가지라네'라고 말이야. 그 친구는 그러면서 급히 가 버리더군."
"그때는 사실 다른 방도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 같네. 그 다음 번은 바로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가던 때였어. 엄격했던 아버지도 이제 나이가 드셔서 병상에 누워 계셨고, 생명이 경각에 달린 긴급한 상황이었어. 역시 어쩔 도리가 없었던 거야.
그러나 세 번째는 경우가 달랐다네. 실은 바로 일주일 전에 일어난 일인데… 지금 생각해도 너무 후회가 되는구먼. 그때 나는 거커, 그리고 랠프스와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네. 자네도 아마 잘 알겠지? 내가 거커하고 뭔가 거래가 있었다는 것은 이제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니까 말일세.
우리는 프로비셔에서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했네. 사실 그건 둘 사이에만 주고받은 비밀스러운 안건이었다네. 새 내각에서 내가 맡을 역할은 계속 관심의 대상이었지. 그렇다네, 그렇지. 이제 다 결정이 된 셈이지. 아직 말을 꺼낼 필요는 없지만 자네한테야 뭐 감출 필요도 없지… 응, 그래 고마네. 하지만 내 이야기를 좀더 들어주지 않겠나?"
"그런데 그날 밤에는 여러 가지 소문만 무성했고, 아직 일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지. 그래서 내 지위는 무척 미묘한 상태였어. 나는 거커로부터 확실한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랠프스가 합석하고 있어서 그게 쉽지 않았다네. 나는 가볍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가려고 노력했네. 경솔하게 내 문제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한 거야. 반드시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다네."
"그후 랠프스의 행동을 보더라도 당시 그렇게 조심한 것은 아주 잘한 조치였다네… 나는 랠프스가 켄싱턴 대로를 지난 다음에 우리와 헤어질 것이라는 점을 생각했지. 그러면 거커에게 바로 노골적으로 문제를 꺼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살다보면 때로는 그렇게 잔머리를 굴려야 할 때가 있다네…
그런데 바로 그때 내 시야에 다시 한번 그 하얀 담장과 초록색 문이 들어오는 거야. 거리 저쪽으로 말이지. 우리는 이야기하면서 그 앞을 지나갔네. 그냥 지나친 거야. 우리가 천천히 거기를 지나갈 때 나와 랠프스의 그림자, 그리고 거커의 옆 모습이 뚜렷하게 그 담장에 비치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네. 거커의 오뚝한 코 위로 오페라 모자를 눌러쓴 것이랑, 그의 목도리의 주름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네."
"나는 그 문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을 걸어갔지. 나는 속으로 이렇게 물었지. '지금 이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이 문 안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사실 거커에게 그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릴 지경이었어."
"하지만 온갖 문제들로 머리가 복잡해서 난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어. 나는 생각했네. '이 친구들은 아마 나를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만약 내가 지금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전도 유망한 정치가가 갑자기 실종된 센세이션한 사건일 거야! 내 마음은 온통 이런 것들에 신경을 쓰고 있었지. 그 중요한 순간에 수천가지 쓸데없는 생각들이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던 걸세."
그는 슬픈 미소를 띄우며 내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그래서 난 지금 여기 있는 거라네!"
"그래서 난 지금 여기 있는 거야!" 그는 되풀이했다. "그리고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어. 일 년 동안 세 번이나 그 문이 내게 나타났는데 말이야… 평화와 기쁨에 이르는 문,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이 세상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그 친절함에 이르는 그 문 말일세. 그런데도 레드먼드, 나는 그 문을 거부했다네. 그리하여 그 문은 내게서 영영 사라지고 말았어."
"어떻게 그럴 아나?"
"난 알 수 있네. 암, 알고 말고. 나는 내게 기회가 올 때마다 그동안 나를 강하게 끌어당기던 그 일들에 얽매여 그것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어. 자네는 내가 성공했다고 말하겠지. 하지만 이 성공이란 놈은 천하고 겂싼, 겉만 번지르르하고 역겨운 존재야. 그리고 사람들의 시기심만 불러일으키지. 그래, 나는 성공했어."
그는 큰 손에 호두를 하나 쥐고 있었다. "만일 이것이 나의 성공이라면 말이야…" 그는 이렇게 말하며 호두를 움켜쥐어 깨뜨렸다. 그는 그걸 나에게 내밀었다.
"이봐, 레드먼드 조금만 더 말하지… 그 기회를 놓친 것이 나를 망가뜨리고 있네. 지난 두 달 동안, 거의 십 주 동안이나 나는 거의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있어. 아주 시급한, 필수불가결한 일조차도 미뤄놓고 말일세. 내 마음은 어떻게도 달랠 수 없는 후회 뿐이야. 사람들이 날 알아보지 못하는 밤에 나는 밖으로 나가 홀로 헤맨다네.
그래,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정부 부처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처를 책임진 각료가 이렇게 방황하는 모습을 본다면 말이야. 그 장관이 그 문, 그 정원 때문에 슬퍼하며, 때로는 거의 소리내어 흐느끼며 홀로 방황하는 것을 본다면 말이야!"
나는 지금 그의 창백한 얼굴과 낯설고 음울한 불빛이 생생하게 떠올랐던 그의 눈을 기억할 수 있다. 지금 나는 자리에 앉아서 아주 분명하게 그의 모습을 눈앞에 보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 그의 말투가 머리에 떠오른다. 소파에 놓인 어제 날자 석간 신문 <웨스트민스터 가제트>에는 그의 사망 기사가 실려 있다. 오늘 점심 때는 클럽이 온통 그의 사망에 관한 얘기로 시끄러웠다. 그 밖의 다른 화제는 전혀 없었다.
어제 새벽 이스트켄싱턴 역 근처 깊은 웅덩이에서 그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곳은 지하철을 남쪽으로 확장하기 위해 파놓은 두 개의 갱도 가운데 하나였다.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큰길에다 판자로 울타리를 쳐 놓았지만 근처에 사는 노동자들이 다니기 편하도록 판자에 조그만 문을 뚫어 놓았다. 그런데 양쪽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의 부주의로 그만 그 문을 잠그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문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여러 가지 의문과 풀 수 없는 수수께끼 때문에 내 마음은 무척 어둡다.
그날 밤 그는 하원을 나와 집으로 계속 걸어왔던 모양이다. 지난 회기 동안에도 그는 걸어서 집으로 간 일이 자주 있었다. 밤늦게 텅 빈 거리를 외투를 걸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어둠 속을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려본다. 정거장 근처의 창백한 전등불이 거친 판자를 하얗게 비추었을 것이다. 그는 그 모습을 하얀 담장으로 착각했던 것 아닐까? 그리하여 그 숙명적인 어떤 기억을 되살린 것 아닐까?
도대체 그 초록색 문이 달린 하얀 담장이 과연 있기는 있었을까?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그저 그가 내게 말해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는 것 뿐이다. 드물기는 하지만 그런 환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월리스는 그런 환상, 그리고 부주의 때문에 함정에 빠져서 희생된 것일 수도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내 본심으로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여러분은 내가 미신적이거나 어리석다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월리스는 분명 비상한 재능과 어떤 천부적인 감각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확신한다. 바로 그런 재능이 그에게 이 세상보다 훨씬 아름다운 다른 세상으로 가는 출구를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하얀 담장과 초록색 문은 그에게 바로 그 출구였던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느냐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배신일까? 바로 이 지점에서 여러분은 몽상가들, 환상과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의 가장 깊은 비밀에 다가가게 된다. 우리는 지금 이 세계를 아름답고 일상적인 것으로, 판자로 둘러싸여 있고 웅덩이가 있는 곳으로 본다. 우리의 환한 대낮을 기준으로 본다면 월리스는 분명히 안전한 세계에서 어둠과 위험과 죽음을 향해서 걸어간 것이리라…
그러나 과연 월리스 본인도 그렇게 보았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