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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sert Islander

작가 : 스텔라 벤슨


[소개]

세상에는 확실히 각기 다른 인간성이란 게 있다. 남과 북이 만나지 못하는 것처럼, 얼음과 불이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은 서로에게 낯선 존재이다.

여기 두 인간이 있다. 실제적이고 냉정한, 건전한 상식에 따라 움직이는 영국인, 그리고 기분 내키는 대로 움직이지만 마음 속에 자존심과 고집을 움켜쥐고 있는 러시아인. 상인과 시인,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남자와 여자... 이들의 갈등은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영원히 해결하지 못한 그 모순을 닮았다.

중국의 한 벽촌에서 거지 같은 외인부대 병사와 그를 돕는 백인 구원자라는 모습으로 만났건만 이들 사이의 그 근원적인 대립은 역시 감춰질 수 없다.


[작가 소개]

스텔라 벤슨(Stella Benson, 1892-1933) : 위대한 작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독창적인 풍격을 지닌 영국의 여성 소설가. 여덟 개의 장편과 네 개의 단편집 외에 여행기, 시집 등이 있다. <무인도에 사는 사람>은 영국인 기질과 러시아인 기질의 대조를 과장해서 유머러스하게 그렸다. 희극과 비극의 경계선을 교묘하게 연결시키는 것은 이 작가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비극적 인생을 가장 유머러스한 기지의 의상으로 감싸는 셈이다.

 


콘스탄틴은 희망을 품고 중국인 하인의 뒤를 따라 낯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 영국인을 친구로 삼는 계획은 아무래도 성공할 것 같다. 주위에 백인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곳 중국 남부 지방에서 이 영국인은 떠돌이 백인을 돕는 것을 같은 백인으로서의 일종의 의무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설혹 그 영국인이 그 따위 피부색에 따른 의무감 같은 게 전혀 없다고 해도 콘스탄틴은 역시 희망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긴 얼굴은 못생겼고, 다리는 짧고 보기 흉했지만, 그래도 자기 태도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있다고 그는 자신하고 있었다.

징을 박은 구두를 신고 콘스탄틴이 방에 들어서자 화이트 씨는 "아, 당신도 또 그 외인부대 탈주병이오?"하고 물었다. 아무리 봐도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 같지는 않은데...

콘스탄틴은 그 질문에 놀라서 "저는 콘스탄틴 안드레이에비치 소로비에프라는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는 어머니가 영국인었기 때문에 영어를 거의 완벽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또'라는 말을 이렇게 사용하는 것은 듣지 못했다. 이 말은 원래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쓰이지 않는다. 자기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 이 바보 같은 영국인이 말한 것도 완전히 엉터리는 아니다. 지난 주 화요일까지 콘스탄틴은 분명 통킹의 외인부대에 있었다. 하얗게 칠한 헬멧, 딱딱한 카키색 외투, 어색한 훈련복, 각반, 구리 단추, 장화, 이것들은 모두 프랑스 정부에게서 받은 물건들이었다. 그러나 그 속의 알맹이, 즉 혼이 들어 있는 딱딱한 껍질 속의 진주 그것은 오직 콘스탄틴 안드레이에비치 소로비에프 그것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얘기는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콘스탄틴은 이 의심 많은 영국인을 곧장 붙들어 앉혀 통킹 경계와 중국 도시 사이에서 벌어진, 그의 위험천만하고 아슬아슬한 모험에 대해 얘기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뱀이나 호랑이, 사랑에 빠진 중국의 왕녀들 그리고 해적 같은 소재가 머리 속에 금방 떠올랐다. 우선 해적 얘기를 하기로 했다.

전부터 해적에게 습격을 받았다는 얘기를 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려고 여러 가지로 생각해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해적을 만난 적은 없지만 전에 생각해둔 줄거리가 이럴 때 쓸모가 있을 것이다. 콘스탄틴은 혹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해 안정이 되면 자서전을 쓸 작정이었다. 그의 실제 인생도 진귀하지만, 여러 가지 다른 인생을 만들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콘스탄틴은 이를 테면 무인도의 주민이었다. 정신적인 로빈슨 크루소였던 것이다. 모든 것을 자기가 직접 만들어내고 그 중 어느것 하나 헛되이 하지 않았다. 사실 로빈슨 크루소는 그가 애독하는 책이었다. 그가 읽은 단 한 권의 책이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이 그 주인공처럼 무인도의 주민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인간 이성에 의해 희생되어 왔던 야성적인 사상의 껍질로 자기 정신을 감싸고, 스스로 연구해 만든 비 새는 움막에서 속세의 비바람으로부터 자기 정신을 지키기를 좋아했다.

육지에 사는 사람들이 경험이니 교육이니 하면서 훌륭한 양복이나 집을 즐기는 것보다 이 편이 더 좋았다. 그는 야만적인 생활, 섬에 혼자 사는 것을 즐기며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생활이 좋았다. 아무 것도 흉내내지 않고, 아무도 믿지 않고,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고 -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것을 기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항상 갖고 다니는 물건들도 흔해빠진 오늘날 문명국 사람들의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홀로 고도에 사는 인간의 소지품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 그의 유일한 소지품은 담배 갑으로 손수 만든 악기인 발라라이카 뿐이다. 이 악기에 맞추어 그는 자기가 작곡한 노래를(아주 불완전한 노래였지만) 불렀다.

그는 자기 노래나 악기가, 직업적인 작곡가나 발라라이카 제작자의 것보다 낫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배워서 안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점에서 그는 비할 바 없이 그것들을 좋아했다. 만사가 그런 식이었다. 자신이 만든 것보다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을 더 즐기는 것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가 사는 무인도의 수평선에서는 다른 육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는 거지가 아닙니다." 콘스탄틴은 말했다. "어제까지는 부대에서 일하면서 쓰라린 생활을 견디며 저축한 60 피아스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해질 무렵 여기서 20 베르스따쯤 떨어진 어두운 소나무 숲을 지나오다 그만..."

"도둑 떼를 만나셨겠지..." 화이트 씨가 앞질러 말했다. "다 알고 있어... 당신들 모두가 그렇게 말하더군."

콘스탄틴은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았다. 이른바 무인도의 주민인 그는 인간들이 들끓고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나라에서 생활하면서 몇 차례나 거짓말을 하다가 꼬리가 잡혀 찔끔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므로 상대가 이렇게 말을 잘라도 놀라지 않았고 - 화도 내지 않았다.

오히려 사냥꾼이 특별히 까다로운 언덕 위 짐승을 보고 기뻐하듯 일순 이 융통성 없는 화이트 씨를 사랑하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이 사람은 정말 가까이 해볼 만한 인물'이라고 콘스탄틴은 생각했다. 무인도의 주민으로서 이런 경우 도둑의 얘기 따위는 그만두고 고귀한 독립심도 일단 버리는 것이 좋다는 것을 그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니, 아닙니다." 콘스탄틴은 말했다. "도적은 만나지 않았습니다. 한 푼 없이 뛰쳐 나왔고 지금도 한 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돈을 좀 얻으려고... 여기 온 것도 실은 그것 때문입니다." 그는 말을 끝내고 커다란 코로 만족한 듯이 깊이 숨을 들이 쉬었다. 이것이야말로 나다운 화술이다. 이곳에 먼저 온 외인부대 탈주병들과 자기가 구별되는 점이 바로 이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화이트 씨도 역시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굵은 목소리로 짧게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편이 좋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영국인도 이 정도라면 쓸 만해. 영국 놈들 가운데 제일 뛰어난 놈들은 대개 좀 비정상적인데, 이 녀석은 그렇지 않아. 그리고 이 녀석들은 뭔가 비정상적인 사람에게 호감을 갖거든.' 콘스탄틴은 호감을 느끼며 생각했다. "당신이 좋아졌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리고 계속했다. "저는 영국인이 좋습니다. 미국인 아닌 영국인에게 이런 부탁을 하게 된 것이 다행입니다. 정말입니다. 미국인은 대개 당신보다 돈이 많지만... 그러나 인색합니다. 나는 미국인을 싫어합니다. 특히 미국 여자의 그 젖은 것 같은 손톱이 마음에 안 들어요."

화이트 씨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젖은 것 같은 손톱? 아, 그거... 그 매니큐어 말이군. 그건 그래... 정말 언제나 젖은 것 같은 손톱이지... 핫핫... 맞다.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어..."

"물론 그렇지요." 콘스탄틴은 깜짝 놀라 말했다. "그건 내가 발견한 거니까. 당신이 어떻게 그걸 알 수 있겠어요." 그리고 잠시 사이를 두고 그는 덧붙였다. "나는 축음기가 아니에요."

화이트 씨는 콘스탄틴의 말에 약간 기분이 나빴지만 "축음기가 있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은 걸로 여기고 곧 맘을 바꿔 대답했다. "축음기야 물론 가지고 있지. 내 소중한 친구야. 당신은 음악을 좋아하나? 물론 좋아하겠지. 러시아 사람은 거의 대부분 음악을 좋아하니까. 나는 하루라도 쇼팡을 듣지 않으면 쓸쓸해서 견딜 수 없어. 하인들이 당신 먹을 걸 준비하는 동안 음악을 좀 듣는 게 어때?"

"고맙지만 축음기 음악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연주를 해드리지요. 둘도 없는 악기로 둘도 없는 음악을 말입니다."

"그거 참 좋군." 화이트 씨는 안경 너머로 담배 갑 발라라이카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당신은 영어를 굉장히 잘하는군." 화이트 씨는 음악 연주에서 상대방의 생각을 딴 데로 돌리고 싶었던 것이다. "하긴 러시아 사람은 대개 어학의 천재들이야."

"제 음악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콘스탄틴이 말했다. "그런데 우선 말씀 드립니다만 '러시아 인이니까 음악을 좋아한다'거나 '러시아인은 모두 영어를 잘한다'거나 하는 말은 어쩐지 맘에 들지 않는군요. 나를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저 그런 한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아 어쩐지 바보스러운 생각이 드니까요."

"우리는 누구나 여러 사람 중 한 사람일 뿐이야." 화이트 씨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화도 내지 않고 말했다.

"당신은 그럴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콘스탄틴은 말했다. "내 생각이 아닌, 내 영어를 가지고 당신은 이러쿵저러쿵하는 군요. 죄송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내가 말하는 것을 당신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죠. 생각 없는 축음기 소리를 듣는 것처럼 당신은 내 목소리만 듣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아직 내 축음기 소리를 들어보지도 않았잖아." 화이트 씨는 자기가 아끼는 축음기를 상대가 깔보자 자기도 모르게 울컥 화가 치솟아 콘스탄틴의 말을 가로막았다.

"남의 말소리가 어떻든, 무슨 나라 말을 하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쓰는 말은 다 비슷비슷한 겁니다. 그러나 사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생각하는 당사자 한 사람만의 것입니다."

화이트 씨는 아무려나 맘대로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당신은 대단한 철학자군."

"나에 대해 딱 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콘스탄틴은 막힘없이 말했다.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일 뿐입니다. 쇼팡이 좋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사람은 모두 '당신은 대단한 철학자'라는 따위 말을 좋아하죠."

"이번에는 당신이 나를 도매금으로 넘기는 얘기를 하는군." 화이트 씨는 화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당신이 아까 한 얘기는 사람을 함부로 규정하지 말라고 한 뜻이었을텐데."

"세상에는 그렇게 도매금으로 넘기는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죠." 콘스탄틴이 말했다. "자, 이제부터 내 음악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좋아하는 그런 음악하고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당신도 알게 되겠지요."


콘스탄틴은 화이트 씨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러시아어로 노래했다. 콘스탄틴은 남의 흉내 내는 것을 무척 꺼려했기 때문에 사실 그의 노래 가사는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수의사를 하고 있을 때 외워 둔 말의 병명을 늘어놓은 것이었다. 소리는 분명 독특했고, 쉰 목소리였다. 너무 목이 쉬어서 가볍게 기침이라도 하던가, 코를 시원하게 풀어버리면 깨끗하고 맑은 소리가 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소리 하나 없이 조용히 가라앉은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오는 것처럼 조그맣게 들렸다.

그렇게 조그맣고 맑지 못한 소리였지만, 묘하게 부드럽고 생생해서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데가 있었다. 악기 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듣기 거북한 소리지만 묘하게도 조용한 음색이었다. 듣는 사람이 뭔가 어리둥절해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를테면 산양 같은 동물이 목청을 가다듬고 무슨 마술처럼 거친 화음을 내는 것을 듣는 것 같았다.

"내 음악은 바로 이런 겁니다. 어떻습니까, 마음에 듭니까?" 콘스탄틴이 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쇼팡을 듣는 것이 더 마음에 드는군." 화이트 씨가 대답했다.

"레코드 판에 담긴 쇼팡 말입니까?"

"그래, 레코드 판에 실린 쇼팡이지."

"그렇지만 내 음악은 지금까지 당신이 들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는 겁니다. 쇼팡 레코드 판은 수백 만 명 인간에게 똑같은 소리를 들려주는 기계일 뿐이잖아요?"

"아냐, 그래도 그게 더 좋아."

콘스탄틴은 입술을 약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기분을 바꿨다. "그래도 나는 당신이 좋습니다." 그는 대범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정말 훌륭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제 신상 얘기를 듣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 지그재그 이론을 설명해 드릴까요?"

"아니 그런 얘기보다 우선 당신은 뭘 먹어야겠지." 앵글로 색슨족은 대개 다른 사람을 먹이고 마시게 하는 걸 좋아한다. 화이트 씨도 스스로 마음이 흐뭇해지는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내 지그재그 사상은 뭘 먹으면서도 설명할 수 있어요." 콘스탄틴은 방 저쪽 식탁 쪽으로 앞장서 걸어 가면서 말했다. "당신도 같이 식사하지 않으렵니까?"

"난 밤 열 시에 고기를 먹는 습관이 아니야."

"습관이 없다는 게 지금 먹지 않는 이유입니까?"

"그런 셈이지."

"음... 음... 아니, 당신처럼 되어보고 싶군요."하고 콘스탄틴은 힘을 주어 말했다. "스스로를 밀고 나가는 것은 - 일체 남에게 이끌리지 않고 산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죠. 나는 정말 당신이 너무 마음에 듭니다."

"자, 시금치를 먼저 드시지." 화이트 씨가 말했다.

"그러면 지그재그 사상을 설명해 볼까요."

"먹으면서도 얘기할 수 있다면 어디..."

콘스탄틴은 무척 배가 고팠다. 화이트 씨를 정면에서 보면서 얘기할 수 있도록 자리에 앉았지만 그는 금방 접시에 고개를 숙이고 먹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은 입에 너무 많이 음식을 물고 있어서 말도 못할 형편이다. 그러나 그 검은 눈으로, 자기가 얘기를 시작할 때까지는 입을 열지 말라고 부탁하듯이 화이트 씨 얼굴을 쳐다 봤다.

"그래서..." 그는 입에 든 음식을 급히 삼키고 얘기를 시작했다. "나는, 지그재그는 언제나 아래로 아래로 내려 가는 것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공간에서 이런 선을 긋는단 말입니다. 이렇게... 똑바로 직선 말입니다. 그리고... 알겠습니까, 그 아래 끝에서 이번에는 경사지게, 미묘한 선이 나옵니다. 이렇게 말이죠, 내가 말하는 것을 알겠습니까? 지그는 그쪽으로 가고, 재그는 그쪽에서 나오는 거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면..."

"자네 한 쪽 발이 왜 그렇게 퉁퉁 부었나?" 화이트 씨가 물었다.

"붕대를 감고 있어서 그럽니다. 그런데 나는 이 지그재그가 인간이 사물을 생각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두뇌가 움직이는 것은 지그 아니면 재그... 그쪽으로 가지 않으면 그쪽에서 나오는 것이며... 대담한 지그는 직선적이어고 이렇게, 보다 영리하며 냉혹한 재그는 그 밑에서 살짝 달린다. 마치 이렇게 인간의..."

"그런데 붕대는 왜 감고 있지?"

"말에게 채었어요. 그런데 인간의 논리 전개도 꼭 그런 모양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요. 우선 여기 단순하고 충실한 이해 방법이 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재그가 돼서 단순한 신앙을 반영하는, 느긋하고 영리한 지혜가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그 아래에... 이렇게, 또 지그가 옵니다. 말하자면 현명하고 침착한 이해력이지요. 그리고 다음에는 또 그것과 반대인 재그가 나타납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침착하게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아이러니칼한 놈입니다. 그런데 그 아래에 또다시 이번엔..."

"당신 발을 좀 볼까." 화이트 씨가 물었다. "이래 봬도 전쟁 때에는 나도 의무대에 있었지."

"아니 발이 어쨌단 말입니까." 콘스탄틴은 소리쳤다. "발 같은 건 어느 거나 다 비슷합니다. 수 백 만 명이 다 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의 발이나 다 피와 뼈와 근육... 모두 이런 쓸모없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의무대에서는 발을 잘라 버리기도 하고 상처를 고쳐 주기도 하고, 뼈와 뼈를 이어주기도 하고, 지혈을 시키기도 합니다. 정말 쓸 데 없는 짓들이죠. 인간의 육체는 전혀 쓸 데 없고, 인간의 독자성은 오직 그 정신에 있는 것입니다요."

"그럴 테지." 화이트 씨는 말했다. "하지만 정신이고 뭐고 여기저기 걸어 다니려면 발이 필요할 거야. 당신 발을 좀 보여줘."

"좋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발에 관한 얘기를 합시다. 우리는 누구나 발을 가지고 있어요. 당신이나 나나."

"상처가 아물지 않은 곳에 그렇게 더러운 넝마를 감으면 안돼. 그 넝마를 감지 말고 다른 좋은 방도가 있었을 텐데?"

"더러운 게 아닙니다. 그저 약간 거무튀튀할 뿐이죠. 논 물에 빨았으니까." 콘스탄틴의 무릎 근처에서 뭔가 찌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가 새삼 자기 발에 흥미를 느끼고 무릎 사이에 머리를 쳐 박으며 바라봤던 것이다. "그리고 상처를 물로 씻었어요. 무릎 뒤에 종기가 세 개 있더군요. 넝마가 거무튀튀한 것이 아니라 원래 상처가 거무튀튀했을 뿐이죠."

화이트 씨는 한 마디 대답도 없이 벌떡 일어섰다. 콘스탄틴은 짐승처럼 각반을 다리에 감은 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는 입에 음식을 한 입 문 채 또다시 지그자개론을 떠들기 시작했지만 곧 얘기를 중단했다. 방안을 왔다 갔다 하는 화이트 씨가 말을 듣는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콘스탄틴은 화이트 씨가 멀리 떨어져 방 한쪽을 귀찮은 듯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고 자기한테서 싫은 냄새라도 나는 것 아닌가 염려했다. 비길 데 없이 귀중한 그의 인격이 육체에 의해 이렇게 잔인하게 배신을 당하는 것인가... 이것이 그의 끊임없는 근심거리였다. "기분이 상했습니까?" 그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화이트 씨의 귀찮은 듯한 그러면서도 침착한 태도가 일변했다. 내뱉는 그의 목소리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하필 이런 때에, 정말 어떻게 해 볼 수 없군. 이렇게 오도 가도 못할 경우가 생기다니. 할 일은 태산처럼 쌓여있고... 거기에다 이 지방은 어디나 전쟁터라서 움직여 볼 수도 없고..."

"뭐가 그리 난처합니까?" 기가 질려 영어를 더듬거리며 콘스탄틴이 물었다.

"말해 주지." 콘스탄틴 앞에 다리를 크게 벌리고 서서 화가 난 목소리로 화이트 씨가 말했다. "당신은 오늘 밤 이 집 지붕 밑 방에서 자야 해.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일찍 깨워주지. 그리고(정말 별 수 없어) 내가 차를 운전해 라오쵸에 있는 병원까지 데리고 가겠어... 자동차로 이틀, 3백 마일이야... 그리고 길 형편이 무척 나쁘다는 걸 미리 알아 둬야 해."

콘스탄틴은 충격으로 심장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도대체 왜 병원 같은 델? 제 발이 그렇게 좋지 않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그래." 화이트 씨는 더 냉정하게 말했다. "내가 의사라면 그 발을 한 시간도 더 몸에 붙여놓지 않아."

콘스탄틴은 이빨이 딱딱 마주치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죽는다. 이 꼴을 하고. 이 시커먼 발 때문에 나는 죽는다... 이 귀중한 단 한 사람인 내가 죽는 거야..." 위로의 말을 기대하면서 그는 화이트 씨를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사나이는 귀중하지 않아... 집단 속의 한 사람일 뿐이야... 그러니까 오히려 얼마든지 대담해질 수 있는 거다."

화이트 씨는 다시 귀찮은 듯한, 흥미 없다는 태도로 돌아가서 이 조그만 러시아인을 지붕 밑 방으로 안내하고 나가 버렸다. 방에는 보기 좋게 접어서 깔아놓은 하얀 시트나, 방바닥에 정사각형으로 깔린 푹신한 푸른 양탄자, 열린 양복장 안에 한쪽으로 걸린 몇 개의 옷걸이가 있었다. 이런 것들을 보자 콘스탄틴은 화이트 씨가 그 물건들 만큼이라도 손님으로 온 자기를 가치 있게 여기는지 의심스러워졌다.

이 조그맣고 깨끗한 방안에 서서 그는 자신의 이 육체 - 화가 날 정도로 골치 덩어리인 두 다리 위에 얹힌 채 목욕도 하지 않으며 수염도 깎지 않고 더러운 옷으로 싸인 이 피곤한 몸뚱이에게 배반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 달리 입을 옷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 입고 있는 것은 모두 벗어 던지자고 그는 결심했다. 눈부실 정도로 하얀 시트 위에서는 자기 자신의 빛나는 나체로 있는 것이 오히려 그럴듯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될 수 있으면 몸을 씻고 싶었지만 옷을 벗으면서 발의 상처에 관심이 갔다. 별로 아프지는 않지만 이제는 아픔보다도 상처의 추악함에 가슴이 답답할 정도였다. 온 몸의 신경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상처를 살피는 순간 튀어나와 그 고통을 느끼게 하려고 벼르는 것 같았다. 무릎 위쪽에서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통증이 새로 생겨났다. 콘스탄틴은 셔츠 하나만 걸친 채 급히 층계를 내려가 불빛이 보이는 방으로 뛰어 들었다. "이것 좀 보세요... 이것 좀 보세요, 딴 곳이 아프기 시작해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증거입니까?"

깨끗한 파란색과 흰색 무늬의 파자마를 입은 화이트 씨는 막 넥타이를 소중하게 걸고 있는 중이었다. 넥타이 걸이와 그가 입고 있는 파자마, 정성스럽게 기념문이 쓰인 은제 빗, 그리고 문 옆에 걸려 있는 고무줄 달린 운동기구, 이런 것들을 본 순간 콘스탄틴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타인과 자기의 큰 거리를 생생하게 느꼈다.

"자, 돌아가 주무시오." 화이트 씨는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조금만 더 분별 있게 자중해 주면 좋겠소."

콘스탄틴은 지붕 밑 방에 돌아와서 가까스로 생각했다. "그 때 말해줬어야 하는 건데... '당신이야말로 좀 분별있게 행동해주지 않겠어요?'라고. 분별이라니... 정말 쓸 데 없는 소리야."

그렇지만 그 분별 덕분에 내일은 다리를 잘라내기 위해 삼 백 마일이나 자동차로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피곤한 콘스탄틴은 몇 분마다 잠에서 깨어나면서 밤새도록 알 수 없는, 토막토막 끊기는 꿈들을 꾸었다. 느닷없이 깨끗한 고급 옷이 가득 든 슈트케이스를 갖고 있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갑자기 넥타이 대신 더러운 붕대를 목에 감고 있는 화이트 씨의 모습이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콘스탄틴은 꿈 속에서 나는 훌륭하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복장을 단정히 한 화이트 씨가 깨웠을 때 콘스탄틴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맑고 찬 광선이 비스듬히 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콘스탄틴은 언제나 잠에서 깨어날 때는 머리 속이 선명했다. 화이트 씨는 콘스탄틴이 어제 밤 혐오감을 느끼면서 벗어 던진 더러운 옷들이 어지럽게 쌓인 것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콘스탄틴은 오싹하는 느낌에 휩싸였다. 이 사람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콘스탄틴은 일부러 기분 좋고 원기 있는 태도를 지었다. "야, 날씨가 드라이브하기에 괜찮을까요?"

"형편없는 날씨야." 화이트 씨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비가 막 쏟아지는군. 길이 어떠리라는 건 미리 각오해둬야 할 거요."

"아니 이런 야만스러운 중국 땅에 길이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요."

"길이 없는 편이 낫지. 길이 없으면 이런 엿 같은 여행을 할 생각도 못했을 테니까."

"재빨리 옷을 입고 준비하겠습니다." 벌거벗은 채 침대에서 뛰어내려 화이트 씨 뒤에서 더러운 옷을 입으면서 콘스탄틴은 말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화이트 씨를 향해서 다시 말했다. "생판 모르는 타인, 그것도 거지나 마찬가지인 사람을 인간을 위해서 이 심한 빗속을 왜 삼 백 마일이나 차를 타고 가시는 겁니까?"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 이 친구는 이제 나의 가치를 인정하는 최소한의 발언을 할 수밖에 없다. 무슨 말을 하건 그건 당연히 그런 고백이 되는 거야.'

"그거야 뻔하지. 나는 당신 다리를 잘라낼 수 없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어." 화이트 씨가 우울하게 말했다. 다리를 잘라낸다는 말을 듣고 다시 신경이 날카로워진 콘스탄틴은 더 이상 묻거나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손이 덜덜 떨려 단추가 잠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외인부대 근무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의지할 데 없는 인간에게 적당한 경험은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서는 사람들에게 무시 당하고, 형편없는 음식을 먹고, 바보 취급을 받기는 했어도 그 이상 이렇게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에 부딪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그곳의 경험은 더욱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확신을 강화시켜 주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소중한 자아가 쓸 데 없는 육체에게 속수무책으로 좌우된다고 생각하니 이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콘스탄틴의 열에 들뜨고 흥분하기 쉬운 마음에 이것은 견디기 힘든 굴욕감을 안겨 주었다. 죽음은 결정적이고 가장 혐오할만한 육체의 승리였다. 죽음은 침묵과 부패 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 죽음마저도 사나이답게, 그 심연을 마주하고 태연하게 마주 볼 수 있으련만...

흥분하고 창백해진 콘스탄틴이 다리를 끌며 앞문으로 나가자 자갈을 깐 정원 끝에 낡은 포드차가 비 속에 서 있었다. 별로 의식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이렇게 다리를 절룩거리게 된 것은 어제 밤부터였다. 다리 전체가 불안한 느낌이었다. 피부가 수축하는 것처럼 쑤셨다. 콘스탄틴은 자동차 속을 들여다 봤다. 화이트 씨의 하인이 뒷 좌석에 가죽 끈이 달린 깨끗한 가방을 꼭 껴안고 앉아 있었다. 어제 밤 넥타이 걸이가 그의 심통을 건드린 것처럼 또 다시 이 여행 가방이 콘스탄틴의 시선을 끌고 자존심을 건드렸다.

이 집 주인의 물건은 모두가 손댈 수 없는 억측의 세계에 속하며, 또한 말할 수 없이 균형이 잡힌, 트집 잡을 수 없는 권위와 같았다. 콘스탄틴은 속으로 감탄하면서 그리고 한편 일종의 굴욕감을 느꼈다. 콘스탄틴은 차에 몸을 실으며 "캠프용 침대까지 저렇게 갖추다니, 정말 빈 틈이 없군!"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한 사람 것 밖에 없어." 화이트 씨가 말했다. "그럼, 이걸 나 때문에 가지고 가는 겁니까?" 혼자 멋대로 생각하고 득의양양해진 콘스탄틴은 화이트 씨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아니 이건 내가 쓸 거야." 근시에 태연한 미소를 지으면서 화이트 씨가 말했다. "외인부대에 있던 사람이면 어떤 침대나 상관 없겠지.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해. 나는 침대 습관이 완전히 몸에 배어서 중국인들의 방에서 그냥 잠을 잘 수 없어."

이 자의 얼굴을 찰싹 때려주면 얼마나 후련할까 하고 콘스탄틴은 처음으로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은 정신적인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웬만큼 용기가 없는 사람이면 침대에 대해 물어볼 때 겉치레라도 [물론, 당신 때문이지.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운전대 주인 옆에 앉으면서 콘스탄틴은 두리번거리며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정말 대단합니다. 축음기처럼 자기 분수를 넘는 것 말고, 그렇지 않은 기계에는 감탄하게 되죠. 자동차라는 이 기계의 영토는 공간이겠지요. 자동차는 공간을 정복하거든요.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가령 이 자동차처럼 볼품 없는 것이라 해도 말입니다. 화이트 씨, 당신 자동차는 보잘 것 없군요. 이게 별 탈 없이 삼 백 마일이나 달릴 수 있을까요?"

"달릴 수 있을 거야." 화이트 씨는 대답했다. "그 때 그 때 휘발유와 기름, 물 따위를 넣어주면 걱정 없네. 나야 기계를 잘 다룰 줄 모르지만." "그럴 리 없지요. 어쨌든 축음기는 걸 줄 아니까." "당신은 계속 내 축음기를 물고 늘어지는군. 나에게 그 축음기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야... 나에게 그것은 정말 쇼팡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어."

콘스탄틴은 화이트 씨의 속물 근성이 드러나는 이런 말을 듣고 자부심과 기쁨을 느꼈다. 발을 구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런 대답이나 내뱉는 화이트 씨 같은 속물에 비하면 나는 마치 신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자기 만족의 순간 속에서 순간적으로 어떤 무서운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혹시, 화이트 씨의 지붕 밑 방 침대에 벼룩을 옮겨놓지 않았을까... 이런 하는 불안에 사로잡힌 것이다.

침대를 정리할 때 그 침착하고 꼼꼼한 중국인 하인이 반드시 벼룩을 발견하겠지. 그리고 화이트 씨가 집에 돌아가면 틀림없이 "그 외국인 병사가 지붕 밑 방 침대에 벼룩을 옮겨 놨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방을 나오기 전에 침대를 자세히 살펴보는 건데... 그렇지 않다면 그런 하인의 말을 화이트 씨가 믿지 않게 할 그럴 듯한 거짓말이 어디 없을까... 콘스탄틴은 마음 속으로 간절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고통과 죽음에 대한 불안에 짓눌린데다, 자기와 함께 가는 이 동행인을 감동시킬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속이 뒤틀려 그는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세상에는 인정과 용서가 없다... 그저 모든 것이 암담할 따름이다. 달리 생각해볼 여지가 전혀 없이 모든 것이 절망적이다. 절망만이 확실한 것이고, 희망에 찬 것은 모두가 쓸 데 없는 꿈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벼룩을 옮긴 것이 분명하다. 비는 그치지 않고 언제까지나 계속 내린다. 자동차의 옆 커튼에서는 비가 샌다. 도로는 미끄러지기 알맞다.

발이 쑤시고 외과의사의 수술용 톱이 머리에 떠오른다. 뒷좌석에는 뭐라고 형언하기 곤란한 심정을 자아내는 그 여행 가방이 의젓하게 놓여 있다. 담배 상자로 만든 발라라이카가 그 옆에서 빙빙 소리를 내고 있다. 괴로울 때의 구원의 신 같은 화이트 씨는 지나치게 침착하고 지나치게 훌륭하다. 콘스탄틴은 함정에 빠진 것 같은 슬픈 마음을 버릴 수 없고, 즐거운 생각은 전혀 찾아낼 수 없었다.

포드 자동차는 점잖은 소나 겨우 빠져나갈 것 같은, 그렇게 거친 길을 달리고 있었다. 차 바퀴가 미끄러져 물 웅덩이에 빠지면 고생스럽게 빼내야 했다. 콘스탄틴이 "정말 엿 같은 길이군"하고 말을 걸자 화이트 씨가 점잖게 말을 가로막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운전 중엔 이야기를 못하오. 운전이 서툴러 주의해야 하니까. 게다가 길마저 이렇게 엉망이니..."

"대답은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게 가장 이상적인 대화 방법이라고 생각하니까. 왜 내가 외인부대에 들어갔는가 그 얘기를 하지요. 당신도 그것이 궁금할 테니까. 얘기를 열심히 하고 있으면 자신의 불행도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소."

"미안하지만 얘기를 듣고 싶지 않군." 화이트 씨는 조용히 말했다.

'이 늙은 구렁이 같은 놈.' 콘스탄틴은 화가 나서 가슴이 멈춰버릴 것 같았다. '정나미 떨어지는 놈이다.분명하고, 차갑게 도와줄 뿐... 다정한 얼굴도 없고, 상냥한 태도도 없다. 과연 영국인다운 방법이다. 러시아 사람이라면 똑 같은 일을 하더라도 좀더 따뜻하고 친절한 태도를 보일 텐데...'

자동차는 계속 달렸다. 콘스탄틴은 벼룩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자동차 밖으로는 중국 남부 지방의 녹황색 대지가 비에 젖어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며 스쳐 지나갔다. 단정하면서도 복잡한 논밭의 무늬가 흩어지고 또 새로 모이면서 복잡한 모양을 그려 보이는 것이 마치 마을에서 사람들이 떼를 지어 춤이라도 추는 것 같았다. 빗발이 무늬를 그리며 내리는 계곡 밑의 평지 저 멀리 뿔처럼 솟아난 바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산으로 접어드는 길 저편에 언덕들이 구비치고 좁은 계곡 입구의 마을에는 병정들이 깔려 있었다. "이제부터 귀찮게 되는군." 화이트 씨가 침착하게 말했다. 오합지졸처럼 어슬렁거리는 그 병정들은 아무렇게나 생겨먹은 볼품 없는 놈들이었다. 그러나 쓸쓸한 마을 길에 여기저기 모기가 다리를 벌린 것처럼 놓여 있는 기관총은 음산하고 긴장된 인상을 주었다.

자동차가 물을 튕기며 그 사이를 지나갈 때 콘스탄틴은 기관총이 무서운 눈초리로 자기의 소중한 심장을 노려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중국 놈들 싸우는 곳을 이렇게 지나가도 괜찮겠습니까?" 콘스탄틴이 물었다. "100%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 화이트 씨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당신 발을 그냥 두는 건 훨씬 더 위험한 일이야."

콘스탄틴은 화가 나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 말을 들으면 인간에게는 오직 발밖에 없는 것 같군요."

그 순간 그들이 달려가는 좁은 계곡의 한쪽에서 팽팽한 철사 줄이 끊어지는 것 같은 소총탄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이어서 높은 바위산 위에서 계속 사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콘스탄틴은 자신의 용기를 시험하는 기회를 항상 만나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또 그런 경우의 각오가 마음 소에 준비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의 자존심과는 상관없이 그의 몸이 갑자기 혼자 움직였다.

그는 화이트 씨를 끌어안았다. 운전하는 손이 방해를 받아 자동차는 갑자기 방향을 바꾸며 옆으로 미끌어졌다. 그리고 차는 비스듬히 도로 위에 멈췄다. 콘스탄틴은 기름 땀을 흘리고 자존심을 되살리며 거북스럽게 팔을 도로 움츠러뜨렸다. 화이트 씨는 아무 말 없이 태연하게 콘스탄틴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약간 흔들었다. 자동차는 다시 출발, 묵묵히 드라이브를 계속했다. 총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니, 정말 당신은 전혀 놀라지 않는군요." 콘스탄틴은 주먹을 쥐면서 말했다. 유아독존의 무인도의 주민으로 자처하는 그에게는 오랜 전통을 고수하는 육지의 백성처럼 겁을 먹는 모습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용감하든 겁쟁이든 콘스탄틴이란 인간은 콘스탄틴일 뿐이고 이런 태도는 자기가 선택한 것이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만들 것이며 스스로가 만들어낸 자기에 철저해져서 힘을 내기도 하고 패배도 한다. 용감하기보다 겁쟁이인 편이 어떤 의미에서는 더 재미있다. 그러나 이 밉살스러운 그의 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정오가 되어도 이른 아침보다 별로 밝아지지 않았다. 회색 하늘에서 비는 사선을 그리며 사정없이 계속 내렸다. 빗방울을 잔뜩 받은 앞 유리를 통해서 보이는 나무들이나 하늘 그리고 계곡과 산은 서투른 화가가 팔레트에 아무렇게나 붓을 놀려서 그려내는 풍경화 같았다. 그러나 햇빛이 나든 안 나든 이제 정오다. 화이트 씨는 마치 롤스로이스 같은 고급 차가 이곳을 지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소 밖에 지나가지 못할 도로의 한 켠에 단정하게 차를 세우고 샌드위치 꾸러미를 풀기 시작했다.

"자네 때문에 캐비어 샌드위치를 좀 가져왔지." 화이트 씨가 속삭이듯 말했다. "러시아인은 캐비어를 아주 좋아하잖나."

"그럼 당신네 영국인들은 언제나 로스트비프를 먹겠군요. 오늘 그걸 싸 왔습니까?" 콘스탄틴은 비꼬듯 말했다. 화이트 씨가 언제나 집합명사로만 사람들을 부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야, 나는 훈제 페이스트를 먹을 거야."

두 사람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기분 나쁜 침묵 속에서 음식만 씹었다. 콘스탄틴은 이제 자신이 외인부대에 들어갔던 사정을 화이트 씨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무슨 얘기건 이제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화이트 씨 앞에서는 무엇이든 그럴 듯한 거짓말을 나열하는 즐거움 - 아니 평범한 진실을 말하는 즐거움조차 묘하게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것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뭔가 콘스탄틴을 화나게 하는 것이 있었다. 화이트 씨는 핸들 위에 엎드려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차 운전에 피곤해진 것이다. 조금 전의 캐비어, 거기다 그의 피곤해하는 모습, 이것들이 콘스탄틴을 자극했다. 화이트 씨가 점점 더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고 있다고 콘스탄틴은 생각한 것이다.

"이제 내 얼굴을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이런 겁니까." 그는 결국 이렇게 독이 든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화이트 씨는 정중하게, 그러나 별 성의 없이 말했다. "내 태도에 마음 상할 건 없어. 나는 백년이 지나도 이 모양일 테니까."

"내 발이 붙어 있든, 잘라지든 - 아무렇게나 취급되어 죽든 살든 - 백년 후에는 아무 변화도 없다 이 말씀이지요." 콘스탄틴이 상대방의 발언을 고의로 되풀이, 인간 개성의 귀중한 신비에 대한 모욕적인 말로 해석하는 것은 일부러 상대방을 걸고 넘어지려는 병적인 심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니, 이봐. 내가 자네 다리 때문에 이 이상 어떻게 더 해 줘야 하나?" 화이트 씨는 다시 자동차를 움직이면서 화가 나서 말했다.

'그 몇 백만 배, 몇 백만 배라도 해줄 수 있다.' 콘스탄틴은 거의 히스테리에 가까운 이런 생각을 했지만 꾹 참고 말은 하지 않았다.


비가 오는 가운데 석양 빛마저 사라지고 하늘이 회색으로 바뀔 무렵 차는 오늘 밤 묵을 모오민 시에 들어갔다. 시의 성벽 밖에서 병정들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모오민 시는 적의 공격에 대비해 방어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귀에 이상하게 늘어붙는 광뚱어로 20분이나 이야기를 주고 받고 난 후에 이들 두 백인은 걸어서 시의 문을 통과하라는 허가를 받았다. 포드 차는 성밖 오두막집에 남기고 화이트 씨의 하인이 지켰다. 화이트 씨는 직접 여행 가방을 들고 캠프용 침대는 콘스탄틴이 들도록 했다.

"아니, 나더러 그걸 들라면 내 발라라이카는 자동차 속에 그냥 놔두란 말입니까." 콘스탄틴은 어린애처럼 징징댔다.

"괜찮아. 자 빨리 해. 여길 관할하는 장군을 만나러 가야 해. 내 자동차를 징발 당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약간 빈정대는 말투로 화이트 씨가 말했다.

캠프용 침대를 한쪽 어깨에 메고 콘스탄틴은 화이트 씨의 뒤를 따라 절룩거리며 따라갔다. 한쪽 겨드랑이에 낀 발라라이카가 조그만 소리를 냈다. 지저분한 길이 복잡한 모양으로 둥그렇게 뻗어나간 가운데에 여관이 있었다. 궤짝처럼 초라한 그 건물 한 쪽은 약간 무너져 있었다. 그날 이 시가지가 폭격을 받은 것이다.

이 여관은 무너지기 전에도 제대로 된 숙소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폭격을 받은 후로는 전혀 수습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일꾼들은 대부분 도망쳐 버리고 여관 주인은 부서진 방에서 건져낸 가재도구를 지붕에 쌓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단 하나 남은, 상체를 벌거벗은 심부름꾼 소년이 이 여관에서 쓸 수 있는 유일한 방에 화이트 씨와 콘스탄틴을 안내했다.

"두 사람이 한 방을 써요?" 콘스탄틴은 벼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옷과 목욕을 안 한 자신의 몸을 생각하며 외쳤다. 처녀처럼 새 것인 저 여행 가방이 있는 곳에서 군복 상의의 기름 때 묻은 칼라 단추를 푸는 것은 생각만 해도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여행 가방의 저 눈부시게 흰 빛이 마치 문명인이 야만인을 보듯이 그렇게 내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마치 육지의 등대에서 비추는 찬란한 빛이 눈에 거슬리는 장애물인 무인도를 비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앞뒤가 맞지 않는데...' 콘스탄틴은 생각했다. '이것이 나의 문제다. 나는 내 불결함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나를 더럽힌 것은 다름아닌 바로 내 자신이니까.'

"그래 두 사람이 한 방을 써야 해." 화이트 씨는 단호하게 말했다. "될 수 있는 대로 잘 해볼 수밖에 없어. 자네는 여기서 짐을 지키고 있게. 나는 장군을 만나서 차를 징발하지 않도록 당부할 테니까."

혼자 남아서 콘스탄틴은 지저분한 외투를 벗었다. 그는 옷을 벗으며 '화이트 씨가 돌아오면 열이 있으니까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자'하고 결심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정말 열이 있는 것을 느꼈다. 머리와 상처을 입은 다리가, 온 몸의 뜨거운 피가 이 두 군데로 모인 것처럼 후끈거리며 아팠다. 한편 가슴과 허리 근처는 마치 얼음 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차디찼다.

쓸쓸한 방에는 보기 싫은 테이블과, 거기 어울리는 딱딱한 의자 외에는 가구 하나 보이지 않았다. 벽의 움푹 패인 곳이 이를테면 침대였다. 거기에는 황갈색의 지저분한 발이 드리워 있었다. 콘스탄틴은 화이트 씨의 지붕 밑 방 청결한 침대보다 더 편안하게 이 관 같은 딱딱한 침대에 드러누웠다.

드러눕자 발에 더욱 열이 오르고 맥박이 심하게 뛰었다. 자기 다리를 자르는 모습이 상상 가운데 떠올랐다. 피가 튀고 근육이 잘라지고 톱이 뼈를 끊는다. 마취약의 효과는 아예 문제 밖이다. 벌써부터 열이 끓어올랐다. 무섭게 몸이 떨린다. 딱딱한 멍석 위에서 몸이 물고기처럼 뛰는 것 같았다. 뜨거운 공기를 호흡하면서도 뼈 속에 들어찬 것 같은 얼음이 풀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괴로운 상태를 사랑하는 심리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는 경련상태를 한층 크게 과장했다. 화이트 씨가 돌아와서 이런 모습을 보면 관심과 동정을 표시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흡족했다. 그러나 정작 계단을 올라오는 화이트 씨의 무거운 발소리를 듣자 콘스탄틴의 눈은 재빨리 하얀 여행 가방 위로 옮겨갔다. 벼룩이나 더러운 냄새, 걱정하고 있던 그런 것만이 다시 머리에 떠올랐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우월감 깊은 화이트 씨의 얼굴엔 깊은 혐오의 감정이 선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할 수 없다, 할 수 없어." 콘스탄틴은 이를 갈면서 외쳤다.

화이트 씨는 이 러시아인의 흐트러진 기분을 모르는 척했다. "자동차는 이제 뺏기지 않을 것 같네."

그는 계속 말했다.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인을 차에서 자도록 했어. 장군은 정말 정중한 사람이더군. 돌아올 때 사용할 허가증까지 내줬어. 그렇지만 이대로 라오쵸까지 가는 건 어려워. 거기까지 가는 길에서 지금 전투가 치열하다고 그러더군. 또 다리도 모두 파괴됐어. 적이 강 저쪽까지 와서 종일 시가를 폭격했다네. 자네 병을 얘기했더니 장군은 자네를 내일 산판 나무를 나르는 배로 라오쵸까지 강을 내려서 운반하는 게 좋을 거라고 하더군. 총격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대단하지는 않겠지. 그리고 나면 걱정 없어... 이 시의 남쪽에서 강이 반대로 꺾어지니까 전투 지역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지. 강을 타고 내려가면 라오쵸까지 열 여덟 시간이면 도착하는 모양이야. 자네를 위해서 산판 배를 얻어 놨어. 정말 이곳은 참을 수 없을 지경이군."

화이트 씨는 더러운 방을 둘러보고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 "정말 이런 곳에서는 속이 다 울렁거려."

"할 수 없지. 미칠 것 같지만..." 콘스탄틴은 울먹거리다가 금방 울기 시작했다. 이미 그는 무서운 고통에 휩싸여 있어 참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울다니, 이 이상한 영국인으로서는 외인부대 병사로부터 예기하지 못한 반응이었으리라... 그런 생각이 잠깐 그의 머리를 때렸다. 그러니까 그건 그것으로 좋다 - 이렇게 형편없이 초라해졌지만 그래도 유아독존의 무인도 주민이니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역시 자기 자신이 싫었다.

불쾌감을 주지 않을까 하는 병적인 생각에 매달려 있기도 했지만 열이 있는 데다가 어울리지 않게 울기까지 하니 정말 스스로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화이트 씨 역시 혐오스럽다는 표정이면서도 곁에 와서 돌봐 주었다. 기름 때가 묻은 칼라를 풀어 주기도 하고 손수건을 빌려 주고, 힘을 내도록 뜨거운 중국차를 시키기도 했다.

"내가 오뎃사에 있을 때 모습을 보셨어야 하는 건데..." 발작 사이사이에 콘스탄틴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이 나에게 반해 버렸다오. 당신은 하필이면 나의 가장 비참한 면밖에 보고 있지 않아요."

화이트 씨는 콘스탄틴의 타는 듯한 이마에 얹으려고 비단 손수건을 냉수에 적시면서도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는 접은 캠프용 침대에서 베개를 꺼내 콘스탄틴의 머리 밑에 그것을 넣으려다, 약간 주저했다. 그러나 그는 일순 체념하고 결심한 듯이 깨끗한 조그만 베개를 콘스탄틴의 머리 밑으로 밀어 넣어 주었다.

"그 무렵엔 비단이 아니면 몸에 걸치지도 않았지요." 콘스탄틴은 얌전한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 속에서 열이 파도처럼 소용돌이치자 그는 까닭 없이 아무 잘못도 없는 화이트 씨에게 잔인한 마음이 생겨서 터무니 없는 말을 퍼붓고 싶어졌다.

그날 밤 화이트 씨는 캠프용 침대에 잠깐씩 몸을 눕혔을 뿐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위생병 경험을 살려 간호를 한 것이다. 날이 희끄무레하게 샐 무렵 겨우 한 시간 가량 눈을 붙였을 뿐이다.

밖의 총성으로 잠에서 깨어난 콘스탄틴은 침대 위에 누운 채 화이트 씨의 잠자는 얼굴을 바라봤다. 콘스탄틴의 열은 내렸고 이제 오히려 한기가 날 것 같은 느낌이며 뭔가 불안했다. 자기는 몸을 움직여서는 안 되는 병자의 처지다. 병자인 자기를, 끊임없이 총성이 울리고 위험이 가득 차 있는 곳으로 산판 배를 타고 떠나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여인숙에서 자기는 최악의 추태를 보였고 자기를 데리고 가는 사람도 그 추태를 보았다. "이 무서운 기억을 어떻게 해서든 고쳐 놔야 한다. 화이트 씨가 나에 대한 추악한 기억을 없애버리기 전에는 이 사람을 떠나서는 안된다." 콘스탄틴은 마음 속으로 맹세했다. 그는 누운 채 자기를 데리고 가는 사람의 얼굴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증오하며. 이 정나미 떨어지는 밤이 새기 전에 가장 지독한 추태를 본 눈이 영원히 감겨 뜨지 않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바랐다.

그러나 화이트 씨는 갑자기 눈을 떴다. "큰일났다!" 그는 시계를 보며 말했다. "벌써 일곱 시야. 날이 샐 때쯤 계단으로 오라고 산판 배 주인에게 말해 놨는데."

"머리가 이상해진 것 아니오?" 콘스탄틴은 큰 소리로 외쳤다. "저 총소리를 들어봐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는 소리요. 더구나 내가 병자라는 걸 언제쯤이나 알게 되겠소? 난 걷지도 못해... 이런 판에 중군 놈들 살인자들이 들끓는 가운데를 지나갈 수는 없어."

화이트 씨는 쇼팡의 멜로디를 살짝 휘파람으로 불면서 화를 꾹 누르며 방에서 나갔다. 곧 밖에서 광뚱어로 여관 주인과 뭐라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온 그는 말했다. "산판 배 주인이 기다리고 있어. 그는 오늘부터 이곳에 퍼부어질 폭격을 피해 달아나려고 해. 백 야드 쯤 떨어진 곳에 배를 매두고 있어. 강 굽이만 돌면 총탄이 미치지 못할 거야. 자 서둘러야 해. 자네는 한 시라도 빨리 병원으로 가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 해. 그게 서로 좋은 거야."

정 떨어지는 하룻밤을 새면서 지칠 대로 지친 콘스탄틴은 아무 말도 않고 눈을 감고 얼굴을 벽으로 향한 채 누워 있었다. 전투가 벌어져 총성이 울리는 위험한 곳으로 대담하게 뛰어나가기에는 정말 몸의 상태가 나빴다. 그러나 될 수 있는 대로 방해를 하자, 질질 끌고 버텨서 이 폭군을 방해하는 비겁한 방법 말고는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 바보야, 일어나야 해." 화이트 씨가 병자의 베개를 갑자기 빼며 소리쳤다. "일어나지 않으면 목을 끌고 강까지 데리고 가겠어."

더러운 목! 콘스탄틴은 곧 일어났다. 이제 영영 이 사나이의 경멸을 지워버릴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 이 사나이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다. 나의 세계에서 이 사나이를 쓸어내 버리고 싶다. 이 사나이가 죽어 없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그는 마음 속으로 참을 수 없을 만큼 간절하게 바라고 또 바랬다. 이 격렬한 욕구의 힘으로 그는 침대에서 굴러 나왔다. 그리고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고 나서 그 답답할 정도로 날씬한 여행 가방에서 종이로 싼 것을 몇 개 꺼내는 화이트 씨를 아니꼬운 듯 바라보았다.

"비스킷과 페이스트가 좀 남아 있어." 화이트 씨가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이것 밖에 없지만 내일 아침 라오쵸에 도착할 때까지는 요기가 될 거야... 우선 자네를 강까지 데려다 주고 이걸 가지러 다시 와야겠어."

화이트 씨는 이 혼란하고 이상한 상황에서도 자세하고 질서정연한 계획을 세우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콘스탄틴이 본 그 모습, 넥타이 걸이에 넥타이를 걸 때 본 그 태도로 유유하면서도 진지하게 은으로 된 솔로 윗도리를 털었다. 굴욕적인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 환경 속에서도 이 빈틈 없는 사나이는 조용하고 초연하게 자존심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사람을 해치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피해를 당한다. 콘스탄틴도 역시 그것을 막연히 알 수 있었다.

"자,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어." 화이트 씨는 여행 가방의 벨트를 조이면서 일어서서 콘스탄틴에게 말했다. 뭔가 다른 여지를 주지 않는, 확실한 결말을 지으려는 태도가 드러났다.

두 사람은 여관을 나왔다. 바리케이트를 친 길 양쪽으로 초라한 상점들이 있었다. 강까지 급하게 경사가 진 그 길엔ㄴ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소총을 발사하는, 회초리 휘두르는 소리가 그들이 걷는 동안 공기를 울렸다. 총소리가 벽에서 벽으로 날카롭게 번져 갔다.

이제 한 발자국만 더 걸으면 어쩔 수 없이 총탄이 날아다는 곳에 몸을 내던져야 한다. 콘스탄틴은 "위험해... 정말 이건 위험한 짓이야"하고 중얼거리며 갑자기 발에 뿌리라도 난 듯 서 버렸다.

"다리가 썩도록 그냥 놔두는 것보다는 덜 위험하지." 화이트 씨는 큰 손으로 조그만 러시아인의 팔을 잡고 층계에서 끌어내렸다. 콘스탄틴은 지금까지 부끄러움을 당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 새삼스레 자기의 공포감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린애처럼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텼으나 당해내지 못하고 그 구세주의 뒤를 두리번거리며 따라갔다. 그리고 조그만 배 위로 억지로 밀려 들어갔다.

"자, 비스킷을 가져가, 그럼 안녕. 행운을 비네." 화이트 씨는 큰 소리로 말했지만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유쾌한 미소가 비로소 그 얼굴에 떠올랐다. 잠시 후 두 사람 사이에는 비가 내리는 공기가, 그리고 춤추는 수면이 차츰 그 거리를 넓혀갔다.

"개 자식아, 뒈져 버려라!" 콘스탄틴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묘하게 화이트 씨의 다리가 앞으로 구부러지며 덤벼들 것 같은 자세로 변했다. 영국인의 얼굴에는 아직그 미소가 남아 있었다. 그는 마치 우주에 뛰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한 손을 흔들며 다른 한 손은 가슴을 쥐었다. "안녕, 행운을..."하고 다시 한 번 말하려는 것처럼 미소 띤 얼굴을 콘스탄틴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계단 위에 쓰러지며 대머리의 벗겨진 부분이 물에 닿았다. 불과 오 분 전에 솔질을 한 윗도리에 흙탕물이 묻었다.

산판 배의 사공 부부가 큰 소리로 뭐라고 소리쳤다. 그들은 콘스탄틴의 주의를 그 쪽에 돌리려고 불렀으나 그는 이미 이십 야드 쯤 건너편 넘어진 사나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공 부부는 더 빨리 노를 저어 배를 몰고 싶었지만 콘스탄틴이 과연 그것을 원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 돌아가서 동료를 도와줄 것인지 그들은 알 수 없었다.

"계속 노를 저어... 그대로 말이야." 콘스탄틴은 러시아어로 소리쳤다. 그리고 배가 방향을 꺾어 흐름을 타는 순간 노를 주워 들고 배의 속도를 더 빠르게 하려고 애썼다. 드디어 다시 섬으로 돌아온 이 무인도 거주민 주위를 물이 점차 넓게 둘러싸고 있었다. 노를 쥔 콘스탄틴은 배에 흔들리면서 뒤를 돌아보며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뒤로 제쳤다. 저 우연의 한 발이 은인의 머리에 박혀 그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기억을 깨끗이 씻어버린 지금, 콘스탄틴은 앞으로 이 강의 굽이까지 가는 동안 있을 총격 따위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