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out Visible Means
아더 모리슨
[소개]
파업이 불어닥치고, 일거리를 잃은 사람들은 먹고 살 방도를 찾아 무더기로 길을 떠난다. 터벅터벅 걷는 그 길에는 아코디언 연주와 연설이 있다. 그러나 그 황톳길에서 사람들은 배신하고 배신당하며 망가진다. 기침하고 피를 토하면서 죽어가는 노동자는 "나는 그저 실컷 갖고 놀다 망가진 아코디언 건반"이라고 부르짖지만... 대답은 어디서도 들리지 않는다.
[작가 소개]
아더 모리슨(Arthur Morrison, 1863-1945) : 영국의 소설가. 최근에는 <마틴 휴이트 탐정> 시리즈의 추리소설 작가로 많이 알려졌으나 원래 진지한 작품으로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던 작가이다. 특히 첫 작품인 <빈민가 이야기>는 20세기 초를 전후한 런던 슬럼가의 철폐에 커다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이스트 런던 지역의 사람들은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거나, 얼쩡거리며 걸어다니기도 하고 길가에 숨어 기다리다가 튀어나와 소란을 부리거나, 먹을 것이 다 떨어진 부엌에서 울부짖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총파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미리 파업을 준비하고 있던 조합은 파업에 들어가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곧장 파업에 들어갔다.
그보다 규모가 적은데다 준비도 덜 된 조합들 역시 동조 파업에 들어가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역시 마찬가지로 파업에 들어갔다.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그런 노동조합들도 분위기를 타게 되었다. 이들에게도 파업이 한창이니 동조하라는 지령이 내려진 것이다. 그래서 이들 역시 파업에 들어갔다.
연계 업종에서 대부분 파업이 진행되는 바람에 일거리는 거의 사라졌다.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런데도 다른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곳으로 떼를 지어 몰려왔다.
그들보다 먼저 왔던 사람들 가운데는 사정 이야기를 듣고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부두로 떼를 지어 몰려가서 소란을 피우고 난리를 피웠다는 그런 이야기를 일부러 들려줬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 온 사람들은 자기네들보다 먼저 왔던 사람들을 본받아 하는 일없이 떼를 지어 빈둥빈둥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무튼 이스트 런던 지역은 대단히 소란스러웠고, 사람들은 거의 다 굶주리고 있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대단히 흥미롭게 이 지역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여러 가지 충고를 보내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 여기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조합에서 파업 수당도 받지 못하고 먹을 것마저 부족했다.
상황이 별로 유리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맨체스터나 버밍엄, 리버풀이나 뉴캐슬 등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런던의 북쪽 그레이트 노스 가로에선 열 명씩 또는 스무 명씩 사람들이 무리지어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때로는 혼자 또는 두 사람이 함께 걷기도 했다.
한 무리의 노동자들이 버데트 거리에 모여 빅토리아 공원, 클랩튼, 스탠포드 힐을 거쳐 엔필드 거리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그 사람들 뒤쪽에 세 사람의 사나이가 함께 걸어가고 있다.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입심 좋은 사내, 그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과묵한 사나이, 그리고 얼굴이 창백하고 근심 어린 표정의 키가 작은 사나이가 일행이었다. 얼굴이 창백한 사나이는 연장 배낭을 둘러멘 채 이따금 발작적으로 기침을 했다.
이 일행은 거의 말이 없이 묵묵히 생각에 잠겨 보도와 차도를 따라 길을 걷고 있었다. 그래도 이들 노동자의 모습은 아직 부랑인처럼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얼굴도 깨끗이 씻었고 옷도 잘 기워서 손질이 되어 있었다. 지방 법원에서 배심원으로 재판을 방청한 다음 돌아오는 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밭이 듬성듬성 드러나고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 도착하자 일행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행의 맨 앞에 서서 가던 젊은 친구는 아직 마음에 걸리는 가족도 없는 처지였다. 그는 이번 여행을 일종의 기분 전환이나 심심풀이 나들이 정도로 생각하는 기분이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아코디언까지 둘러메고 있었다.
그는 일행의 분위기가 침울한 것이 못마땅한지 지금 다들 알렉산드라 궁전으로 가고 있다는 농담을 하면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했다. 그때 배낭을 메고 맨 뒤에서 따라오던 키 작은 사나이가 무의식중에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면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주머니에서 꺼낸 손에는 3실링의 돈이 쥐어져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는 말했다. "아마 린드라일 거야. 내가 나올 때 몰래 살짝 넣은 거겠지! 이런 짓을 왜 해? 자기는 겨우 1실링으로 애들과 함께 지내야 할 텐데..." 그는 걱정스러운 듯 갑자기 땀을 흘렸다. "우체국을 보면 바로 다시 부쳐주어야겠군. 그러면 되겠지."
"부치다니? 쓸 데 없는 짓이야!" 그와 나란히 걸어가던 입심 좋은 젊은 사나이가 경멸하듯이 말했다. "집사람은 끄덕 없을 테니 걱정 말고 자네 앞가림이나 하라구... 여자들이란 항상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게 되어 있단 말씀이야. 이봐, 조이. 곧 피눈물이 날 정도로 그 돈이 필요할 때가 올 테니 내 말대로 그냥 갖고 있는 게 좋아. 그렇지 않아, 데이브??" 그는 과묵한 사나이에게 동의를 구했다.
"거 참, 이상도 하지..." 과묵한 사니이가 대꾸했다. "우리 마누라는 내가 떠나기 전에 주머니 밑바닥까지 샅샅이 뒤져서 가져가던데... 게다가 곧 돈을 더 보내지 않으면 자기를 빌어먹게 했다고 사람을 보내고 난리를 피우고 재판이라도 걸 거야... 여자도 여자 나름이야."
여행은 계속되고, 길은 갈수록 점점 더 먼지투성이였다. 맨 앞에 서서 가던 그 쾌활한 사나이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팔머즈그린에 도착하자, 무리 가운데 네 명의 사나이가 엔필드 병기 공장에 일자리가 있는지 알아보겠다면서 곧장 앞으로 가 버렸다. 다른 사람들은 별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방향을 바꾸어 왼쪽 퍼터즈바 쪽으로 걸어갔다.
키 작은 사나이 - 조이 클레이튼이 오래 침묵하다가 데이브에게 물었다. "데이브, 어느 쪽이 더 가까운가? 뉴캐슬인가, 아님 미들즈버러인가?"
"미들즈버러가 더 가까워. 내가 걸어가 본 적이 있어."
"걷는 것도 별로 힘든 건 아니군, 안 그런가?" 조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때, 자네가 걸을 때도 괜찮지 않았어?"
"나는 죽 걸어갔지... 길이 고되기도 하지만, 그야 형편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운이지, 운. 내가 걸어갈 땐 날씨가 사나웠어."
"만약 지금 가는 곳에 좋은 일자리가 없으면 말이야... 젠장, 거기서도 한바탕 파업이나 일으키는 거야." 입심 좋은 젊은 사나이가 떠들어댔다.
"거기서 파업을 일으킨다고?" 조이가 놀란 듯 큰소리로 반문했다. "어떻게? 누가 사람들을 선동하는 거야?"
"내가 하면 되지, 뭘... 나도 그만한 재주는 있다네, 안 그래? 자, 들어보라구!"
"여러분, 노동자들이 이마에 땀을 흘려 부와 풍요와 사치를 생산했으면서도 그 한가운데서 할 일이 없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노동자 형제들이여, 이제 일어설 때입니다! 노동자를 착취하여 살이 뒤룩뒤룩 찐 저 자본가들을 무릎 꿇게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옳소! 야, 멋지구먼!" 조이 클레이튼이 큰소리로 환호했다. 사실 이것은 귀에 익숙한, 많이 들어본 말들이었다. "뉴먼, 아주 잘하는데!"
뉴먼은 사실 기회만 있으면 언제나 이런 식으로 한바탕 연설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토론회에서 익힌 재주였다. 그리고 조이 클레이튼은 언제나 뉴먼의 열성적인 청중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코디언이 이제 다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뉴먼이 다시 한 번 열변을 토했다.
"공장에선 모두들 나를 보고 농땡이꾼 뉴먼이라고 부릅니다. 왜냐구요? 그거야 물론 내가 농땡이를 치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래!" 이번에는 데이브가 들릴락 말락 중얼거렸다.
"하지만 여러분, 난 그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난 철저하게 농땡이꾼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농땡이꾼일 겁니다! 한 사람의 노동자가 일을 덜 하면 자본가들은 그만큼 더 노동자를 고용해야 할 테니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난 농땡이를 친다, 이 말씀입니다."
"한두 주일 정도라면 자네 맘대로 농땡이를 칠 수도 있겠지..." 데이브 버지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하지만 말을 좀더 삼가는 게 좋겠어."
포터즈힐에 이르자 일행은 걸음을 멈추고 울타리 그늘에 앉아 빵과 치즈를 먹고 깡통에 든 차가운 차를 마셨다. 그냥 빵만 먹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 것도 준비해 오지 않은 농땡이꾼 뉴먼은 친구 두 사람 것을 얻어서 먹고 마셨다. 일행이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그레이트 노스 거리에 들어서자 때 뉴먼은 허리를 펴더니 교활한 눈으로 조이 클레이튼 쪽을 슬쩍 보면서 말했다. "나한테 한두 실링만 있어도 자네들한테 맥주 한 잔씩 앵길 텐데 말씀이야..."
조이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자네한테 돈이 없으면 나라도 한턱 내야 되겠지..." 그는 불안한 듯 이렇게 말하고 가까운 술집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조이와 뉴먼은 걸음을 멈추려하지 않는 버지에게 소리를 질렀다. "한 잔 하지 않으려나?" 그러나 데이브는 천천히 대답했다. "글쎄, 그런 식으로 멋 부리는 건 잘하는 짓 같지 않구먼..."
조금 지나서 조이는 적어도 2실링 정도는 부칠 생각으로 우체국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뉴먼이 나서서 반대했다. 만일의 경우 필요할지도 모르는 돈을 멀리 보내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여자란 것은 어떤 경우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는 존재라는 자신의 논리를 몇 번씩 되풀이했다. 조이는 일단 돈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하루 이틀 정도 미루기로 한 것이다.
길은 점점 더 나빠졌다. 먼지가 심해서 일행의 꼬락서니도 점점 더 뜨내기 무전 여행객의 행색이 드러났다. 이따금 아코디언 연주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저녁 무렵이 되자 그것도 완전히 멎고 말았다. 연주하는 사람이 지친 것도 지친 것이지만, 일행 가운데 나이 많은 몇몇 사람들이 걷는 일이 피곤해지면서 아코디언 소리마저 소음을 듣는 것처럼 짜증을 냈던 것이다.
조이 클레이튼은 먼지 때문에 기침이 더욱 심해져서 특히 아코디언 소리가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발작적으로 기침이 터질 때마다 열댓 번씩 되풀이되는 아코디언의 그 연주 소리가 정말 신경에 거슬렸던 것이다. 아코디언의 느리고도 웅웅거리는 소리...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엇이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지 자신도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트필드 역에서는 일행의 앞에서 걷던 두 사람이 어떤 승객의 무거운 짐을 거들어 주고 동전 몇 닢을 벌었다. 딕스웰 힐까지 오자 그 동안 함께 모여 있던 사람들의 길다란 줄도 거의 흩어졌다. 뉴먼도 이젠 연설을 할 수 없어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윽고 밤이 되었다. 맑게 갠 밤 하늘의 공기에는 달콤한 냄새마저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웰원과 코디코트 중간 지점에서 일행은 잠을 청할 만한 헛간 같은 곳을 찾아 모두 흩어졌다.
아코디언 연주자만은 웰원에 있는 자그마한 주막을 찾아갔다. 한 곡 연주해서 재수가 좋으면 맥주 한 잔에다 헛간 구석자리라도 얻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데이브 버지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 초가 오두막 한 채를 찾아냈다. 그 안에는 아직 다발로 묶지 않은 건초더미가 쌓여 있었다.
뉴먼은 건초더미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 가장 아늑한 구석자리로 가서 몸을 눕혔다. 데이브 버지는 뉴면이 누운 자리에서 마른 풀을 좀 끄집어내더니 괜찮아 보이는 장소에 조이 클레이튼을 도와 잠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는 자기도 이내 잠이 들어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이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기침을 하면서 이리저리 뒤척였다. 이런 환경에 익숙치 않을 뿐만 아니라 몇 달 동안 감옥 신세라도 지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다들 잘 알고 있기는 했지만, 헛간에서 자는 패거리들 가운데는 일부러 그런 이야기를 퍼뜨리는 친구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엔 다행히 코디코트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북쪽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세 사람이 음식점에서 찬 고기와 빵을 사서 먹여 주었던 것이다. 아코디언을 가진 사나이는 그들을 따라갔다. 잠자리와 아침 식사, 그리고 8펜스의 돈을 얻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히친에 머물러 하루 정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 다음에는 일행과 헤어져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닐 속셈이었다. 그래서 히친을 지난 뒤부터는 그나마 음악도 들리지 않았다.
드디어 조이 클레이튼의 처지기 시작했다. 뉴먼은 마음속으로 뭔가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세 사람은 다른 일행보다 훨씬 뒤떨어지게 되었다. 조이는 힘겹게 비틀거리며 두 사람의 뒤를 겨우 따라가고 있었다. 원래 체력이 달리는데다 잠도 부족했던 것이다. 데이브 버지가 연장 배낭을 들어주었다. 그래도 조이는 몇 번이나 길에서 쉬어야 했다.
뉴먼은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동료들과 떨어지지 안겠다고 자기 결심을 말했다. 그러더니 한 잔 하자고 넌지시 말을 꺼냈다. 데이브 버지는 헨로우에 있는 철도 건널목에서 놀라 날뛰는 말을 잡아 주고 2펜스를 벌었다. 기차가 지나가는 바람에 말이 놀랐던 것이다. 그러나 조이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조이는 길의 노랗게 빛나는 색깔만 보아도 현기증이 일었다. 어떤 때는 세상이 빨갛게 보이고 또 어떤 때는 파랗게 보이기도 했다. 기침이 심해서 몸의 상태가 엉망이었다. 그는 가끔씩 동료의 부축을 받고, 때로는 혼자 비틀거리며 걸었다. 자기가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거의 의식불명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일행들은 대부분 한참 앞으로 가 버렸다. 조금만 더 가면 풍차가 있는데 거기에 가서 쉰다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비들스웨이드 바로 바깥쪽 강가의 낡은 보트 오두막에서 걸음을 멈췄다. 거의 졸면서 걷고 있던 조이는 털썩 바닥에 쓰러지더니 해질 무렵부터 다음 날 아침 해가 훤할 때까지 꼼짝도 않고 잠을 잤다.
눈을 떠보니 데이브 버지는 문 쪽에 앉아 있었으나, 뉴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자기의 연장 배낭도 보이지 않았다.
"찾아보았자 헛일이야." 데이브가 말했다. "그놈이 한 짓이야."
"뭐?"
"그 농땡이꾼 자식 말이야. 자네 연장을 슬쩍 채 가지고 달아난 거야. 그 자식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 도리가 없지."
"그럴 리가!" 조이는 파랗게 질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연장을 훔쳐가다니... 설마 그럴 리가... 세상에... 그 배낭에 든 연장은 15실링이나 하는 값비싼 물건인데... 두께나 지름을 재는 캘리퍼스까지 있는데... 믿을 수 없어... 이렇게 뺑소니를 치다니..."
그러나 데이브 버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호주머니도 한 번 뒤져보게. 아마 거기에도 손을 댔을 걸세."
그가 말한 대로였다. 조이는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 2실링은 집에 부칠 참이었는데... 게다가 연장도 없어졌으니 일은 어떻게 하지? 정 일자리를 못 구하면 그거라도 잡혀서 집에다 돈을 부칠 작정이었는데... 정말이야... 그럴려고 했는데... 정말 너무 하는군!"
잠을 많이 자기는 했지만 걷느라고 너무 지쳐서 조이는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데이브는 그런 조이를 다시 걷게 하느라고 진땀을 흘려야 했다. 조이는 어제 오후에 있었던 일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앞서 가던 일행이 어디로 갔는지 묻기도 했다. 두 사람은 몇 마일을 아무 말도 없이 터벅터벅 걸었다. 그러다 갑자기 조이가 길가의 풀덤불에 몸을 던지듯 주저앉았다.
"왜 다들 나를 못살게 구는 거야?" 그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난 누구한테도 해를 끼친 적이 없는 사람이야. 어렸을 때부터 20년 동안이나 리터슨 공장에서 일을 해왔어. 그런데 파업을 하라고 그러길래 모두 함께 파업을 했지. 아무 일도 없었지. 난 별로 하고 싶지 않았어. 사실이야. 그래도 하라니깐 파업을 했지... 이건 하나님도 알고 계셔.
그런데 그들이 나보고 나가라고 그러길래 난 즉시 나와 버렸어. 그러다가 섬에 가서 다른 일자리를 구했더니, 덩치 큰 친구들이 넷씩이나 몰려와서 나를 반쯤 죽도록 때리더군. 난 그곳이 파업 지역이어서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인지도 몰랐어...
그 친구들 가운데 두 명이 경찰에 붙잡혔지. 조합은 나더러 그들을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하라고 그러더군. 그렇게 하면 파업 수당을 다시 주겠다고 그러더란 말일세. 그래서 시키는 대로 했지. 그런데 조합 자식들, 파업 수당을 주기는커녕 실컷 비웃은 다음에 날 쫓아내더란 말이야... 그래서 이젠 길바닥에 앉아 굶어죽게 되었어... 그 농땡이꾼 자식... 해도 너무하는군... 그 친구마저 나를 이렇게 만들다니!"
조이는 차츰 화물차 뒤에서 스웨덴 무를 빼내 먹는 법도 배우고, 철 이른 무나마 감지덕지 여기게 되었다. 구걸하거나 도둑질하는 재주도 없고, 그런 일을 감히 해볼 엄두도 못내는 사람에게 떠돌이 생활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도 뼈저리게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줄곧 기침을 했다... 기침이 너무 심해지면 기둥이나 문을 붙잡고 피를 토하는 일도 있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의식이 몽롱해진 상태로 기계적으로 터벅터벅 걸을 뿐이었다.
한 번은 마치 꿈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묻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거야?"
"다른 사람이라니?" 데이브는 순간 어리둥절해서 이렇게 되물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아, 그래... 다른 사람들도 있었지. 알다시피 다들 훨씬 앞으로 가 버렸다네."
조이는 입을 다문 채 반 마일 가량 걷더니 다시 말했다.
"그 친구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겠지."
"응, 아마 그럴 거야..." 데이브가 말했다.
잠깐잠깐 기침을 할 때를 빼면 조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코디언을 갖고 있지 않겠지... 하지만 먼 길을 걸을 땐 아코디언이 있어야 해. 먼 길을 여행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친구는 아코디언을 갖고 있더군. 아주 잘 지내더라구... 아코디언을 연주하면서 가면 그렇게 힘들지 않을 거야..." 데이브 버지는 모자 위로 머리를 긁으면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조이의 말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날은 재수가 없는 날이었다. 농가에서 빵 부스러기를 좀 얻어먹었을 뿐이다. 언덕을 넘고 다른 길로 들어서도 길은 끝없이 누렇게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그들의 불안한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제 조이는 거의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데이브 버지보다 한결 더 차분하게 견디고 있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조이가 다시 말했다. "그렇지... 아코디언을 연주하면서 가면 그렇게 힘들 건 없어. 그 친구들 아코디언을 아주 제대로 써먹더군... 이제 정말 못 견디겠어..." 그러다가 갑자기 덧붙였다.
"그래, 우리는 모두 아코디언이나 마찬가지야!" 그는 킥킥대는가 싶더니 금방 기침 때문에 목구멍을 그렁댔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인간이란 단지 아코디언을 수없이 모아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구..." 겨우 숨을 가다듬고 그는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아코디언 다루듯이 자기들이 원하는 아무 곡이나 연주해대는 거야... 그걸로 다들 먹고사는 거지. 여보게, 데이브... 우린 모두 아코디언 비슷한 거란 말일세." 이렇게 말하고서 그가 웃었다.
"글쎄, 그런 것 같기도 하군." 데이브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상대의 표정을 묘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이제까지 조이가 그런 식으로 웃음소리를 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이는 자신의 이 생각이 무척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이따금 입속으로 중얼거리듯 아코디언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모두가 아코디언이야... 빌어먹을. 시키는 대로 어떤 곡이라도 뽑아내는 그런 아코디언이란 말이야... 인간은 그냥 아코디언 신세일까? 아니야, 그 정도도 못돼. 우린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건반에 불과하지... 노래에 맞춰 제멋대로 눌러대는 그런 건반 말이야... 빌어먹을, 양철 조각같이 보잘 것 없는 건반...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건반 말이야... 그 동안 나를 갖고 꽤나 잘 논 셈이지... 오랫동안 나를 갖고 논 거야..."
데이브 버지는 마음이 불안해져서 화제를 다른 것으로 바꿔보려고 했다. 그러나 조이는 데이브의 말에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동안 나를 갖고 꽤나 잘 놀았어... 오랫동안 갖고 놀았더란 말이야." 그는 고집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어떤 친구가 나를 갖고 놀다가 그만 스프링이 끊어지고 만 거라구..."
밤에는 더욱 운이 나빴다. 가죽 각반을 차고 개를 데리고 다니는 사나이가 모처럼 찾은 괜찮은 헛간에서 그들을 쫓아낸 것이다. 그들은 한참 동안 더 가면서 이슬을 피할 장소를 찾았지만 마땅한 잠자리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건초더미를 하나 발견했다. 꼭대기에는 잘만한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올라갈 사다리가 걸쳐 있었다.
버지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 축축한 손으로 자기 얼굴을 만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눈을 떠 보니 짙은 안개가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데이브, 나야..." 클레이튼이 말을 걸었다. "난 자네가 없어져버린 줄 알았어. 그런데 이게 다 뭔가? 설마 물은 아니겠지? 우리가 물에 빠진 건가? 옷이 몽땅 젖어버렸어."
버지도 속옷까지 몽땅 젖어 있었다. 그는 조이를 눕히고선 어서 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침이 발작적으로 나는 바람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코디언 소리 때문이야. 그래서 눈을 뜨고 말았어." 기침이 멎자 조이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럭저럭 밤이 지나가고, 회색빛 새벽빛이 세상을 감싸고 있었다. 두 명의 떠돌이는 건초더미에서 내려왔다. 오돌오돌 떨리는 몸을 녹이기 위해 일부러 발에 힘을 주어 걸으며 한길로 나갔다.
그날 아침 조이는 이따금 현기증을 일으켜 잠깐 동안 정신을 잃곤 했다.
"스프링이 끊어져 버린 거야." 정신이 들면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양철 조각으로 만든 그 보잘 것 없는 건반이 고장이 나 버린 거야."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한 곡 더 울릴 참이야. 보라구, 바로 저거야... 저게 죽음의 행진곡이라는 걸세."
마을을 벗어나는 곳에서 조이는 어느 집 문에 기대어 기침을 했다. 살이 찐 늙은 부인이 조그만 털북숭이 강아지를 데리고 나가다가 그에게 1실링을 주었다. 조이는 손이 말을 듣지 않아 돈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데이브가 그것을 주워서 조이에게 주었다. "이봐, 조이. 1실링짜리야. 어떤 마나님이 자네한테 주는 걸세. 자, 어서 가서 맥주라도 한 잔 하세."
그들은 데이브가 전날 번 돈으로 2페니짜리 빵을 사고 조그만 주막으로 들어갔다. 데이브는 맥주를 주문했으나, 조이는 1페니 어치 진을 섞은 독한 스타우트 맥주를 주문했다. 이윽고 조이는 머리꼭지까지 취해 탁자 위로 머리를 떨구었다. 깊이 잠든 것이다. 1실링을 내고 받은 거스름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데이브는 일어나서 남은 빵 조각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당구에서 쓰는 초크를 집어들고 술집 구석 조그만 흑판에 이렇게 썼다.
'제발 부탁입니다. 이 남자를 구빈원에 데려다 주십시오.'
그런 다음 그는 식탁 위에 널려 있던 동전을 한데 모아들고 조용히 거리로 나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