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아무도 보지 않는 달밤이 이리도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섭리는 이 달밤에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 창조주의 섭리를 혼자서 사색하는 한 신부의 궁금증에 대한 답변은 상투적이지만 아름답다. 그리고 아름다움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인간은 그 아름다움에 완전히 잠겨 아름다움의 일부가 된 사람들뿐일 것이다.
[작가 소개]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1893) : 프랑스의 소설가. 플로베르에게 소설을 배웠다. 1880년 <비게 덩어리>를 발표하면서 일약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여자의 일생> <피에르와 장> 등 장편 외에도 3백편 가량의 단편소설이 있다. 특히 그의 단편소설은 간결한 문장과 군더더기 없는 표현으로 다양한 삶의 단면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마르탱 신부는 키가 크고 몸집이 호리호리했다. 거의 싸움꾼 같은 인상이었고, 그의 신앙은 광적이었으며, 마음은 믿음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가슴 속에 신앙이 깊이 뿌리를 내려 흔들리는 일이 없었고, 자기만은 하느님을 잘 알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더욱이 그는 자신이 하느님을 잘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과 의도까지도 능히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탱 신부도 시골의 작은 사제관 정원을 걸어갈 때면, 가끔 두 가지 의문이 생기곤 했다. 어찌하여 하느님은 그런 일을 용납하셨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하느님의 입장에서 의문에 대한 해답을 골똘히 찾아내곤 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의문에 대한 그럴싸한 답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저는 하느님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섭리를 잘 알게 해주십시오. 만약 저의 능력으로 알 수 없는 일이라면 적어도 추측이라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하고 간구하곤 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만물이 모두 찬양할 만한 절대자의 말씀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왜?’라는 의문과 동시에 ‘∼때문에’라는 대답이 저울의 양면같이 언제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아침 햇빛은 왜 만드셨을까? 아침잠을 깬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려고. 낮은? 밀과 보리가 익으라고 만드셨겠지. 비는? 밀과 보리에 물을 주기 위해 만드셨고. 저녁은? 사람들을 졸음으로 인도하고 밤중에 푹 잠들라고 만드셨을 거야.’
신부가 생각하는 것은 이런 식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일 년의 사계절은 농사짓기에 필요한 모든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이 대자연의 모든 현상은 맹목적인 것이 전혀 없으며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이 반드시 그 계절과 날씨 그리고 물질적인 필요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부는 여자만은 싫어했다. 무의식중에 싫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능적으로 여자를 멸시했다. 그리하여 때때로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여인이여, 그대와 나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는가?" 또는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몸소 지으신 이 작품에 대해서는 만족하지 않으시는 모양이야"하고 덧붙이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여자란 어떤 시인이 말한 것처럼 '열 두 번이나 죄를 지은 어린애’일 뿐이었다. 인류의 시초에 남자를 유혹하고, 그 뒤에도 계속해서 그 죄 많은 후손들을 유혹해온 것이 여자라고 신부는 생각하였다. 연약하면서도 위험한 존재, 사람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존재, 영원히 죄에 매인 육체이면서도 사랑이 가득 찬 그 마음, 신부로서는 이러한 존재를 더욱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탱 신부 역시 지금까지 자기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여인들의 사랑을 느끼는 경우가 꽤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여자들이 자신의 사랑이 신부의 견고한 믿음을 침범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들 가슴 속에서 사랑의 욕구가 설레인다는 점에 대하여 신부는 짜증을 느끼곤 했다. 그의 생각에는 하느님이 여자를 만드신 것은 오직 남자들을 유혹하여 하나의 시련을 주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여자에게 접근해야 할 경우에 신부는 반드시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 유혹에 대한 방패를 삼고, 여인들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었다. 사실 여자들이 남자를 향해 팔을 내밀며 입술을 방긋 사랑스럽게 벌리는 모습은 함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일부 믿음이 두터운 여자들만이 경건한 기도의 힘으로 남자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고 자신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나 신부는 이런 여자들을 대할 때에도 어디까지나 냉정을 잊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억눌린 마음, 이른바 경건해진 가슴속에도 여전히 그 영원한 사랑의 불길이 남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영원한 사랑의 불길이 신부인 자기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불길을 수녀들의 믿음 가득한 눈길 속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힘차게 솟아오르는 그 희열 속에도 사실은 성적 감각이 어느 정도 혼재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불쾌한 마음이 솟아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것은 분명히 여자의 사랑 바로 육체적인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저주스런 사랑을 그들의 얌전한 마음속, 자기에게 말을 건네는 그들의 부드러운 목소리 속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조용히 내려 깐 눈초리 속에서도, 또한 자기가 퉁명스럽게 꾸짖을 경우에 그들이 애처롭게 흘리는 눈물 속에서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수녀원 문을 나설 때면 옷자락을 털면서 마치 위태로운 곳을 빠져나오는 사람처럼 발길을 재촉하곤 했다.
신부에게는 조카딸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자기 어머니와 함께 교회 옆에 붙은 조그마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신부는 그 조카딸을 수녀로 만들려고 단단하게 벼르고 있었다. 조카딸은 아름다운 소녀였으나 좀 경솔하고 남을 곧잘 조롱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는 신부가 강론을 시작하면 흔히 킥킥거리며 웃어댔다.
신부가 나무라면 소녀는 삼촌을 가슴으로 힘껏 껴안곤 했다. 그러면 신부는 자기도 모르게 이 포옹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그는 어떤 남자의 내면에나 잠재해 있는, 아버지로서의 애정에 눈을 뜨고 그 포옹에서 아늑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었다.
신부는 때때로 소녀와 함께 전원을 걸으면서 하느님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러나 조카딸은 그의 이야기를 전혀 귀담아 듣질 않고, 하늘을 쳐다보거나 초목과 꽃들을 바라보곤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두 눈에는 삶의 행복이 감돌고 있었다. 때로는 깡충깡충 뛰어가서 작은 날짐승을 잡아 와서는 "삼촌, 이것 보세요. 예쁘죠? 정말 키스하고 싶어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비나 라일락의 열매에도 "키스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소녀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애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신부의 마음을 불안하고 짜증나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서도 여자의 마음속에서 언제나 꿈틀거리며, 도저히 뿌리 뽑을 수 없는 사랑의 불씨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부의 가사를 돌봐 주던 성당 관리인의 아내가 그의 조카딸에 대해 알려주었다. 애인이 생겼다는 귀띔이었다. 신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마침 면도를 하기 위해 얼굴에 온통 비누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은 놀라운 심정을 간신히 억눌러야 했다.
"멜라니, 설마 그럴 리가! 그렇지 않을 거요. 말도 안돼요."
그러나 농사꾼의 아내는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했다.
"원 신부님, 제가 거짓말을 할 리가 있나요. 하나님의 벌이 두렵지 않다면 모를까. 저녁마다 아가씨는 엄마가 잠자리에 들기 무섭게 거리로 나가곤 한답니다. 그리고 그 남자랑 두 사람이 나란히 강가를 거닐곤 해요. 열 시부터 열두 시 사이에 강가에 나가기만 하면 언제나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신부는 턱수염을 깎다가 말고, 방안을 왔다갔다 걷기 시작했다. 이것은 깊은 생각에 잠길 때의 버릇이었다. 이윽고 다시 수염을 깎기 시작했으나 코와 귀에 무려 세 군데나 살을 베었다. 그는 하루 종일 침묵했다. 분하고 원통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이 어쩔 수 없는 사랑에 대해 어린 영혼을 맡은 신부로서의 분노와 함께, 정신적 또는 법률상의 보호자로서의 세속적인 분노까지도 느꼈다. 마치 자식에게 속고, 도둑을 맞고, 조롱을 당했다는 노여움과 비슷했다. 딸이 자기 마음대로 남편을 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버이로서 느끼는 배신감, 숨이 막힐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책을 읽으려고 했으나 전혀 내키지 않고 짜증만 솟구칠 뿐이었다. 그에게는 지팡이가 하나 있엇다. 투박한 참나무로 만든 몽둥이로 신부가 저녁에 병자를 위로하기 위해 길을 나설 때면 으레 손에 드는 물건이었다. 신부는 우락부락한 시골뜨기의 손에 쥐어져 사람을 위협하는 것처럼 휘두르기에 적당한 그 몽둥이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그러다 별안간 몽둥이를 치켜들고 이를 갈면서 의자를 내리쳤다. 의자는 둘로 뽀개지면서 마룻바닥에 흩어졌다.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려다가 찬란히 빛나는 달빛을 보고 흠칫 놀라며 문간에 우뚝 섰다. 그 눈부신 달빛은 마치 생전 처음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비록 종교인의 직업을 갖고 있지만, 기질상으로 정감이 풍성한 시인들이 흔히 지닌 감성적인 천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눈부신 아름다움을 정적 속에서 은은하게 드러내는 달빛에 감동되어 신부는 마치 황홀경에 빠진 것 같았다.
작은 정원 속 모든 것이 부드러운 달빛에 고요하게 잠겨 있었다. 길게 늘어선 과일 나무는 푸른 잎을 걸치지 않은 알몸의 가느다란 그림자를 뜰을 가로지르는 길에 던지고 있었다. 한쪽 벽 위로 기어오른 무성한 넝쿨장미는 흡사 설탕을 뿌려 놓은 듯 달콤한 대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부드럽고도 환하게 빛나는 밤 공기 속에 마치 요정과도 같이 싱싱한 체취를 뿜어내는 것이었다.
신부는 마치 술꾼이 포도주를 삼키듯 숨을 길게 들이마시며 대기를 마음껏 호흡하기 시작했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황홀하고 놀라워 조카딸의 생각은 거의 잊어버리고 서서히 발길을 옮겼다. 그러다가 문득 신부는 발길을 멈추고 벌판을 둘러보았다. 애무하는 듯한 달빛에 포근히 젖어 있는 들판은 아늑한 이불에 싸인 것처럼 밤의 고요 속에 듬뿍 취해 있었다.
짧지만 날카로운 개구리 울음 소리가 벌판의 공기를 가르고, 멀리 꾀꼬리의 노랫소리가 호응하며 그를 꿈속으로 인도했다. 꾀꼬리의 가늘고 나지막하게 울리는 소리는 듣는 사람을 달빛의 유혹에 빠지게 하는 힘이 있었다.
신부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제 마음이 한결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그는 갑자기 맥이 빠지면서 온몸이 나른해졌다.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언제까지고 깊은 명상에 잠기거나, 주위에 널려있는 하느님의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창조주의 능력에 감사하고 싶었다. 굽이치는 작은 개울을 따라, 버드나무가 길게 줄을 지어 이어지고 있었다.
달빛에 흠뻑 젖은 희미한 수증기가 강변을 온통 흰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은은한 광채를 내는 강둑을 둘러싸고 대기가 잠자는 것처럼 퍼져 있었다. 굽이쳐 흐르는 강물은 솜처럼 가볍고 투명하게 보였다.
그러자 신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 아니 일종의 막연한 불안감이 떠올랐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가끔 한번씩 신부의 머리를 지배하던 의문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 의문이 지금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분명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 밤을 만드셨을까? 단순히 인간을 잠으로 이끌기 위해서일까? 무의식이나 휴식을 통해 인간을 망각으로 이끌기 위해 하나님이 밤을 만드셨다면, 이렇게 낮보다 밤을 더 매혹적으로 만드신 이유가 무엇일까? 또한 아침 햇살이나 저녁노을보다 밤을 더 아늑하고 친밀하게 만드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태양보다도 더 시적이고 한없이 신비스런 모습을 간직한 저 달은 왜 저 선명한 햇빛으로 밝힐 수 없는 물체들까지도 비춰야 할 운명을 타고 난 것일까? 강렬하고 매혹적인 저 천체는 어찌하여 지옥까지도 밝히는 신비한 광채를 지닌 것일까? 새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저 꾀꼬리는 어찌하여 여느 새들과 달리 불안한 어둠 속에서도 끊임없이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어스름이 이처럼 온세상을 덮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슴은 어찌하여 이처럼 설레며 육신은 왜 이리도 권태로운 것일까? 왜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어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도 자연은 이처럼 견딜 수 없는 유혹을 드러내는 것일까?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 보내는 이 장엄한 풍경, 이렇게도 시적인 감성이 넘쳐흐르는 풍경은 도대체 누구에게 주는 선물일까?
신부는 도무지 이런 의문들에 대해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때, 목장 저쪽 끝에 촉촉하게 안개에 젖은 무성한 나무 아래로 나란히 서서 걸어오는 두 그림자가 보였다. 키가 훨씬 더 큰 남자가 여자의 목에 가볍게 손을 얹고 이따금 그 이마에 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이 한 쌍의 남녀가 나타나자 적막에 싸여 있던 대자연이 느닷없이 생기를 띠는 것 같았다. 주위의 모든 대자연이 마치 두 사람의 배경이 되기 위하여 하늘이 보내주는 영상인 것처럼 두 사람을 완벽하게 에워싸는 것이었다. 두 그림자는 마치 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을 위해 이 아늑하고 고요한 밤이 준비된 것 같았다.
그들은 신부 쪽으로 다가왔다. 마치 신부가 품고 있는 의문에 대하여 하나님이 던져주시는 생생한 해답 같았다. 신부는 심장이 뛰고 머리가 어지러워 마치 못 박힌 듯 제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성경 속 룻과 보아스의 사랑 이야기(편집자 주 : 구약성경 룻기)를 지금 눈앞에서 보는 것 같았다. 성경이 소개하는 하느님의 위대한 뜻을 눈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기가 막힌 예술품이었다. 뜨거운 정열에 대한 찬미의 노랫소리가 그의 머릿속에 호소하는 것 같았다. 사랑에 불타는 육체의 애끓는 목소리가 간절한 시정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신부는 '하나님이 이러한 밤을 만드신 이유는 아마, 사랑하는 두 남녀를 가장 적당한 베일로 감싸주시기 위해서인가 보다'하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서로 꼭 껴안고 앞으로 다가오는 한 쌍의 연인들 앞에서 그는 한 발짝 옆으로 물러섰다. 그것은 그의 조카딸에 틀림 없었다. 신부는 이제 자기가 그 동안 하느님의 뜻을 어기려고 했던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하느님이 이처럼 아름다운 광경을 이 밤에 펼쳐 보이는 것은 바로 남녀의 이러한 사랑을 허락하신다는 뜻 아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신부는 마치 발을 들여놓을 권리가 없는 성전에 들어서기라도 한 것처럼 당황하고 부끄러워져서 서둘러서 그 자리를 피해야 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