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art in Life
루드 서코우
[소개]
서글픈 생각, 아니 분위기가 마음을 짓누른다. 가난한 집안의, 그리고 그런 불리함을 극복할 만한 용모나 성격도 갖추지 못한 소녀. 세상 모르는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인 그 소녀가 남의 집 부엌 일을 돕는 일을 하게 된다. 초라한 집에서 그래도 자신을 아끼고 이해해주는 가족들을 떠난 삶은 어떤 것일까... 인생에 대해 어떤 기대도 품을 수 없는 암담한 처지를 보며 우리는 스스로의 처지가 너무 사치스럽거나 또는 가해자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작가 소개]
루드 서코우(Ruth Suckow, 1892-1960) : 미국 아이오와 주 출신의 여성 작가. 자신의 신변에서 펼쳐지는, 미국 중서부 서민의 생활을 사실적인 시각으로 솔직하게 소설화했다. 장편 <전원의 사람들> <보니 일가> 등과 단편집 <아이오와 이야기>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여기 수록한 <인생의 출발>은 <아이오와 이야기>에 실린 작품이다.
엘머 크루즈가 시장에서 일을 볼 동안 데이지가 떠날 채비를 해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스위처 네 집은 지금 야단법석이었다. 엘머가 데이지를 데리러 온다는 것을 일 주일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가 시간에 맞춰 와 버린 것이다.
"이렇게 비가 오고 길도 험해서 다음 주일쯤 데리러 올 거라고 생각했지..." 이렇게 준비가 안된 것을 변명은 했지만, 실상 언제 왔다고 해도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을 것이다.
데이지의 어머니는 지금 침대 위에 낡은 여행 가방을 꺼내 열어 놓고 딸의 물건을 전부 챙겨 넣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침대 위 잠자리는 아직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가방에 물건을 다 넣기만 하면 준비는 끝나는 셈이다. 데이지가 그걸 들고 떠나면 곧장 오늘 약속한 우드워즈 씨 집으로 달려가서 세탁을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데이지의 물건이 흩어져 있는 갈색 담요나, 꾀죄죄한 시트가 음침한 날씨 탓인지 더욱 지저분하고 눅눅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 침실 전체가 불쾌할 정도로 스산했다. 천장은 경사져서 기울어져 있고, 딱딱하게 네모가 진 구식 유리창, 온 식구가 함께 화장대로 사용하는 작은 장롱 위에는 머리핀이 담긴 그릇이라든가 클립, 부러진 빗, 리본, 그을음이 낀 등잔 따위가 지저분하게 어질어져 있었다. 옷장 문은 열려진 채로 안에 옷가지와 낡은 구두가 멋대로 흩어져 있는 게 훤히 보였다... 스위처 집 사람들은 모두 이 방에서 잔다... 어머니와 드와이트가 하나의 침대에서 자고, 두 딸도 한 몸처럼 엉겨서 벽에 붙은 간이 침대에서 자는 것이다.
"엄마, 그 체크 무늬 드레스의 허리띠가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그래? 거기 어디 있을 텐데? 하지만 그걸 찾고 있을 시간이 없다. 나중에 나올 테니까 그때 보내주마. 누구든 그리 가는 사람이 있을 거야."
어머니로서는 빠짐 없이 준비를 갖춰서 딸을 보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막상... 언제나 집에 돌아와보면 손을 대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의 집 청소나 세탁을 해주는 그녀는 하루 종일 집을 비워야 하기 때문에 정작 자기 집 일을 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오늘은 이미 가야 할 시간이 지났다. 우드워즈 집에서는 늘 세탁을 빨리 해치우고 청소까지 좀 해 주기를 바라는 눈치지만, 오늘만은 아무래도 그럴 시간을 낼 수 없을 것 같다. 데이지를 시골로 먼저 떠나 보내기 전에는 일터로 갈 수 없는 것이다. 엘머가 오면 곧 출발할 수 있는 준비는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푸른색이 바래서 회색처럼 보이는 청소 모자를 쓰고, 세탁이 있는 날만 입고 가는 작업복에 소매에 주름을 넣은 검은색 구식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내복은 어떠니? 모두 더러워지지는 않았겠지?"
"아니, 더러워요. 지난 주일에는 엄마가 우리들 옷은 하나도 빨아주지 않았잖아요."
"그러면 깨끗한 것만 가져가렴. 나머지는 뒤에 어떻게든 너한테 보내 줄 수 있을 거야."
"엘머 씨 네는 일 주일에 한 번씩 시장에 오지 않나요?"
"오기는 하겠지만 그때마다 너를 데리고 오지는 않을 거야."
그녀는 될 대로 되라는, 몸에 밴 체념을 다시 한 번 느꼈다. 하지만 이것만은... 하면서 될 수 있는 한 많은 물건을 여행 가방에 쑤셔 넣었다.
"데이지, 네 준비는 다 됐지?"
"다 됐어요. 그런데 엄마, 그 리본을 달고 싶어."
"그래, 그건 가방 밑에 있을 게다. 그런데 그렇게 깔끔하게 차릴 필요는 없어. 넌 지금 손님으로 가는 게 아니니까.
데이지는 조그만 거울 앞에 서서 옷 매무새를 고쳤다. 볼품이라곤 전혀 없는 아가씨였다. 누가 봐도 한 눈에 스위처 네 집 딸이라는 것을 눈에 알아볼 정도로 그게 뚜렷했다. 비쩍 마른 몸매, 두 눈이 맑고 푸르기는 해도 피로한 느낌이 들고 처량해 보였다. 숱이 적은 머리는 붉게 탄 색깔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보기 싫은 모습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장녀였기 때문에 남의 집에서 입던 양복이라도 얻어오면 제일 먼저 자기 맘에 드는 옷을 고르곤 했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동생인 고르디나 드와이트의 부러움을 샀다. 뭐니뭐니 해도 그녀는 그 조그만 가정에서는 중심 인물인 것이다. 그녀는 시내에 사는 변호사의 딸 앨리스 브로커에게서 물려받은 푸른 외투가 자랑스러웠다. 실은 그 외투를 입으면 고르지 못한 옷자락 밑으로 깡마르고 조그만 무릎이 드러나고 단추도 지나치게 내려 달려 있었다. 어머니가 그녀를 위해서 뜯어 고쳐준 오버코트였다.
어머니는 지금 딸에게 여러 가지를 일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가닥이 잡히질 않았다. 딸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데이지는 리하이(펜실베이니어주 동부)에 사는 프레드 삼촌을 방문한 것 외에는 집을 떠나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엘머의 집에 가는 것도 그녀는 삼촌 집에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제부터 배워야 될 것이 너무 많다. 물론 살아가는 동안 스스로 눈치 채고 배우기는 할 테지만... 이것은 이제 눈앞에 닥쳐온 일이다. 남의 집에 가서 일을 한다는 것 - 그것이 어떤 것인가를 그녀도 알게 될 것이다. 엘머도 에드너도 마음씨 좋은 젊은 부부니까 데이지에게 나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으로 세상 맛을 보는 아가씨로서는 그래도 다행인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삼촌 집에 갔을 때와 대접이 같을 수는 없다.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데이지는 자랑스러움으로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세상에 나가 돈을 번다'는 것은 놀라운 일 아닌가. 주급 일 달러 반을 받으니까 여러 가지 물건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동생들은 깜짝 놀라서 주춤거리며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녀를 부러운 듯이 쳐다보고 있다. 자기들도 데이지처럼 남의 집에 일하러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때 진흙을 튀기며 천천히 다가오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벌써 왔다. 너 잊은 물건은 없니? 고르디, 너 먼저 뛰어가서 누나가 곧 간다고 얘기하렴."
"내가 갈 거야. 내가 가서 말할 거야!" 드와이트가 부러운 듯 앙탈을 부렸다.
"그럼 둘이 가서 이야기하고 오거라, 어머나!"
그녀가 불룩한 여행 가방의 뚜껑을 닫고 가죽 끈을 조이는 순간 한 개의 끈이 툭 끊어진 것이다.
"이렇게 억지로 집어넣었으니 안 끊어질 리가 있나."
가방에 유행이 지나간, 낡은 것으로 그녀의 남편 마트가 죽기 전 외판원 일을 그만 두면서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었다. 죽은 남편이 이미 닳도록 오래 쓴 물건이었다.
"얘, 이제 빨리 가 봐라. 엘머 씨가 오래 기다리게 하면 기분이 나쁠 거야. 다 가져가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든 보내줄 테니까."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은 곧 울상이 되어 버렸다. 누구나 말하지만, 그녀도 이 길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데이지도 집안을 도와야 할 나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일을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딸을 거친 세파 속에 내보낸다는 생각을 하면 딸의 출발을 전송하는 마음이 쓰라렸다. 세상 풍파 속으로 뛰어들어 남의 집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내 말 잘 들어라. 올 여름에 열심히 일을 도와드려야 한다. 그렇게 하면 계속해서 너를 집에 두고 싶어 할 거야. 그리고 가끔씩 놀고 오라고 집으로 보내주기도 할 거야."
어머니의 눈물 어린 눈, 그리고 여윈 팔로 갑자기 거세게 안아주는 모습 등 정확히 의미를 알 수 없는 어머니의 태도를 데이지도 막연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데이지는 갑자기 자기가 가는 길이 쉽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데이지의 조그만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처음으로 훌륭한 어른이 된 것 같은, 자신만만한 생각도 어쩐지 폭삭 사그러드는 것 같았다.
엘머의 커다란 새 자동차는 진흙탕이 된 길에 당당한 차체를 기우뚱하게 서 있었다. 자동차 바퀴에는 진흙이 잔뜩 묻어 있다. 길은 질컥거리는 황토 흙으로 엉망이고, 구덩이마다 흙탕물이 고여 있어 운전하기에는 썩 좋지 않은 날이었다.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진 이 변두리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집 앞을 지나 언덕을 넘어가는 좁은 길은 비에 젖어 아주 쓸쓸하고 고요한 풍경이었다. 엘머는 운전석에 앉아 있고 뒷좌석에는 커다란 식료품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를 밀어놓지 않아도 앉을 수 있겠어?" 엘머가 상냥하게 데이지에게 물었다. "내려서 그걸 밀어 주면 좋겠지만 길이 워낙 진흙탕이어서..."
"괜찮아요, 괜찮아요, 내리지 마세요." 어머니가 당황해서 말했다. "그 정도는 저 애 힘으로 해도 돼요. 자리 아래에 내려 놓아도 되구요."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고 상대방의 마음에 드는 말을 찾아 눈치를 보며 말했다. "가는 길도 별로 좋지 않겠죠?"
"네, 하지만 농부들은 그런 것에 익숙하니까 길이 좀 나빠도 상관 없어요."
"그렇겠군요."
이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엘머는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또 데이지를 억세게 끌어안았다. 데이지는 식료품 상자를 넘어가서 좌석 한 쪽 귀퉁이에 겨우 앉았다.
"앞으로 이쪽에 볼 일이 있어 나오시면 이 애도 데리고 와 주시겠지요?" 어머니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네, 그러고 말구요. 데리고 와야지요."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엘머는 엔진을 걸었다. 엔진 움직이는 소리가 가라앉으면서 차 바퀴가 깊은 진흙 속에서 돌기 시작했다.
순간 데이지는 자기 집 전체를 눈에 담았다. 황량하고 높은 곳에 서 있는 작은 집, 바람과 비에 씻겨 더러워진 벽 위로 여기 저기 빗물이 흐른 흔적이 보인다. 위태롭게 경사진 현관 앞 돌층계는 양쪽 난간이 부서진 채 빗물에 젖어 있다. 비쩍 마른 닭이 먹을 것을 찾아 젖은 땅을 왔다 갔다 하고 있다.
게다가 아이들이 장난감 삼아 가지고 논 여러 가지 돌, 짐수레, 낡은 들통의 덮개 따위가 몇 장씩 흩어져 있다. 뒷마당에는 색이 바랜 속옷이 한 장 물에 젖은 채 빨래 줄에 걸려 있다. 정원은 풀이 엉성하다. 도로에 닿은 언덕에는 잡초가 길게 자라 있었다. 그 아래쪽 누런 땅에는 구멍이 군데 군데 패여 있다.
고르디와 드와이트는 딱딱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어머니의 얼굴도 보였다 - 깡마르고 피곤한 듯 하면서 상냥스러운 얼굴, 눈물을 흘려도 위로해줄 사람 하나 없으면서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다. 이가 빠진 탓인지 입 언저리가 유난히 쓸쓸한 것 같다... 낡은 외투에다 초라한 신을 신고 청소할 때 쓰는 모자를 쓰고서... 일에 시달려 관절이 툭 불거져 나온 손가락으로 자기 외투 자락을 꼭 움켜쥐고 있다.
바로 어제까지도 타고 놀았던, 한 그루밖에 없는 나무에 매여 있는 낡은 그네는 양쪽 줄이 비에 젖어 있고 앉는 자리도 줄이 꼬여 엉켜 있었다.
자동차는 진흙에 미끄러지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녀는 자신이 지금 이런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손을 흔들었다.
그들도 데이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머니는 한동안 제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곧 단풍나무 아래에 있는 낡고 검은 무쇠 펌프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을 위해 물을 길어다 놓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남의 집에 일하러 가려고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데이지는 진흙에 미끄러지며 언덕길을 내려가는 자동차에서 잔뜩 긴장해 매달려 있었다. 엘머는 잘 알고 있는 길이었기 때문에 타이어에 체인을 달지 않았다. 그러나 데이지는 무서워 견딜 수 없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숨을 몰아쉬었다. 언덕을 다 내려온 엘머가 차를 간선도로로 접어드는, 풀이 무성한 작은 길에 몰아 넣었을 때에야 데이지는 비쩍 마른 작은 손으로 모자를 누르면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이제 이 조그만 언덕길도 내려오고 말았다 - 나는 지금 이 커다란 자동차에 타고 있다. 발치에는 여행 가방이 놓여 있다. 이렇게 생각하자 이제부터 잘 모르는 시골로 가고 있다는 실감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설레게 했다. 주위의 풍경도 모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그 경치를 그녀는 그대로 자기 시야에 꼭 담아 두었다.
길 한쪽에 덩켈 씨의 집이 보였다. 하얀 집인데 문이 모두 닫혀 있다. 낡은 창살 틈으로 커튼도 없는 창이 찬 바람이 부는 느낌이다. 과일 나무들 아래 의자가 하나 놓여있다. 의자는 쿠션 커버가 찢겨져 지푸라기가 튀어나와 있었다.
덩켈 씨 부부는 늙은 가톨릭 신자로 전혀 이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집 앞 정원에는 키 큰 소나무가 서 있고 갈색 나무 줄기가 비에 젖어 쓸쓸하다. 푸른 나뭇가지도 흠뻑 비에 젖어 한층 짙은 색깔로 보였다. 그 아래 땅은 빗물을 잔뜩 머금어 거무튀튀한 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길의 반대쪽은 방목장이었다. 비에 젖은 풀밭이 온통 푸른 색으로 펼쳐져 있고 띄엄띄엄 석회암이 노출되어 있는 곳에는 홈통마다 빗물이 조그마한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방목장 저쪽은 얕은 언덕이 음울한 색의 숲으로 덮여 있다. 언덕은 비 구름을 배경으로 완만한 기복을 이루며 물결치고 있다.
자동차는 간선도로에 나왔다. 방목지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튀기며 흐르고 있었다. 자동차는 시냇물 위에 걸린 조그만 다리를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데이지는 자동차 창문으로 시냇물을 내려다 보았다. 물은 조그만 거품을 말아 올리면서 흐르고, 긴 풀이 시냇물에 잠겨 흔들리며 빈 깡통이 하나 바위 틈에 걸려 있었다.
그녀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보겠다고 마음을 먹은 그녀의 작은 얼굴은 긴장 때문에 딱딱해져 있었다. 진흙 길 도랑에 물이 고여 있다. 키 작은 오얏나무가 비에 젖어 거무죽죽했다. 그녀는 신경을 날카롭게 하고 있었지만 자동차가 미끄러져도 놀라서 비명을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쩐지 드라이브라도 하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어느 비 오는 일요일에 브로키 씨가 그녀 일가를 교회에서 집까지 차로 태워준 일이 있었다. 그 때 그녀는 동생 고르디, 드와이트와 함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 때 빗방울이 때리는 양쪽 커튼이 쳐진 창문 틈으로 진흙 냄새가 좁은 차 안으로 흘러 들어왔던 것이다. 포드를 타고 일하러 가는 파티 씨에게 시내까지 태워 달라고 부탁해볼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하곤 했다.
그들은 길로 쫓아 나가서 "파티 아저씨! 시내로 가요?" 하고 큰 소리로 부르곤 했다. 이 소리가 상대방에게 들리지 않은 때도 있었지만 파티 씨는 가끔 호인답게 무뚝뚝한 말투로 "자, 태워 주마" 할 때도 있었다. 그러면 그들은 "타도 좋대" 하고 떠들면서 모두 트럭 뒤에 뛰어올랐던 것이다.
검게 젖은 밭의 흙 가운데 옥수수 줄기가 반듯하게 줄지어 서 있다. 그 조그만 잎사귀가 새뜻하다. 길을 따라 줄지어 선 가로수는 잎이 무성했다. 물을 퍼내는 휘발유 펌프 소리가 유난히 높게 들려왔다. 젖은 풀밭에는 소들이 한가롭게 서 있고, 방목지의 이곳 저곳에는 울창한 나무숲의 모습이 쓸쓸하다. 그녀는 발치에 놓은 여행 가방을 건드려 보고 옆에 놓인 식료품 상자를 건드려 보았다. 엘머가 시장에서 사온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 속에는 신선한 파인애플이 들어 있다. 스위처 집 사람들은 구경도 못하는 물건이다. 이것은 에드너가 식사 때 사용할 것일까... 데이지는 생각했다. 잠시 후 자동차는 교외를 달리고 있었다. 이제는 보고 싶어도 우리 집은 보이지 않는다. 조그만 언덕 위에 서 있는, 잡초가 무성한, 비에 젖은 더러운 집. 그 생각을 하자 데이지는 목이 메었다.
그녀는 에드너의 아이들과 놀 테니까 괜찮지만, 동생 고르디와 드와이트는 그녀가 없는 곳에서 지금부터 점심 때까지 놀겠지. 그녀는 자신이 장녀라는 것을 역시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엘머 부부의 집에 일하러 간다는 것도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자랑스러움 속으로 혼자가 되었다는 쓸쓸한 기분이 흘러 들어오고 있다.
그녀는 엘머와 나란히 운전석에 앉고 싶었다. 엘머가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근처 농장에는 누구 누구가 살고 있는지, 엘머의 아이들은 몇 명이나 되는지 알고 싶었다. 엘머와 에드너는 토요일 밤에 시내에 가면 항상 영화를 볼까? 이런 자동차를 산 것을 보면 엘머는 돈이 많을 것이다. 더구나 자기 농장에 새 집을 짓지 않았는가. 어머니 말을 들어보면 거기에는 수도도 있는 모양이다. 영화 구경을 갈 때는 나도 데려다 주려나? 이렇게 생각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얼마 전 프레드 삼촌 네에 갔을 때는 기차로 갔지만 데이지는 이렇게 차로 가는 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이대로 오래 오래 자동차에 탄 채로 있고 싶었다.
그녀는 엘머에게 말을 걸었다.
"저, 댁까지는 아직 멀었어요?"
"뭐라고?" 그는 돌아다 봤다. "아아, 이 길 끝이야. 길이 진흙탕이라서 무섭니?"
"아니, 전혀 무섭지는 않아요. 드라이브하는 건 언제라도 좋아요."
그녀는 엘머의 뒷모습을 보았다. 낡은 펠트 모자를 아무렇게나 쓰고 있다. 푸른 와이셔츠 깃 위로 드러난 목덜미는 햇빛에 그을리고 노란 털이 나 있다. 탄탄한 몸매를 약간 앞으로 숙이고 유유히, 그리고 능숙하게 핸들을 놀리고 있다. 엘머나 에드너 모두 평범한 젊은이지만, 어머니 말에 의하면 다른 젊은 농부들과 달리 당초부터 재산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두 사람 다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스타일인 모양이다. 데이지는 이제부터 자기도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을 수 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자, 이제 다 왔다."
"네, 여기가 댁이에요?" 데이지는 소리를 죽이며 이렇게 말했다. 집은 도로에서 제법 들어간 곳에 서 있었다. 앞은 넓은 정원이어서 키 작은 풀들이 여기저기 드문드문 자라고 있을 뿐 아무 것도 없다. 근대적인 분위기로 지은 그 조그만 집은 하얗고 노란 페인트 색깔이 새롭고 신선했다. 새로 지은 가축 우리는 너무 커 보였다. 나무는 한 그루도 없다. 엘머는 뒤뜰로 자동차를 몰고 갔다. 그 뒤뜰에, 약간 찬 바람이 불어 왔다.
에드너가 뒷문 층계참에 나와 있었다. 엘머는 식료품 상자를 내리면서 그쪽을 보고 씩 웃었다. 에드너도 약간 미소를 띠었다. 그녀는 상냥하게 말했다.
"어머, 데이지를 데리고 오셨군요. 어서 와, 데이지. 올 여름에는 우리 집에 있어 주겠지?"
"그럼요." 그녀는 약간 뽐내듯이 대답했다. 그러나 차를 내려 좀 썰랑한 바람을 몸에 받으면서 정원 가운데 서 있자니 어쩐지 갑자기 마음이 허전하고 서글퍼졌다.
"데이지 집에 들러서 데리고 왔어." 엘머가 말했다.
"길이 좀 어때요?"
"별로 좋진 않아. 그련데 왜?"
"응, 조금 이따가 엄마한테 가보고 싶어서."
"아, 그 정도 가는 건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데이지는 그 조그마한 귀를 곤두세웠다. 그렇다면 또 자동차에 탈 수 있을 것이다! 이 생각을 하자 그녀는 기뻤다.
"문 안을 좀 봐요." 에드너가 턱으로 그 쪽을 가리키면서 일부러 낮은 목소리로 애교 있게 말했다.
조그맣고 동그란 금발 머리가 두 개 거기 문 뒤에 숨어 있었다. 거기서 "압빠! 압빠아!"하고 요란하게 부르는 소리가 났다. 식료품 상자를 안고 서 있는 엘머는 눈을 꿈뻑거리고 어깨를 으쓱으쓱 추키면서 일부러 놀란 것 같은 몸짓으로 "저런, 저게 누굴까?" 말했다.
"도대체 누구지? 누가 압빠 압빠 부르는 거니? 압빠가 뭘 가지고 왔는지 너희들 알겠니?" 엘머는 이렇게 말하면서 에드너를 데리고 부엌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 때 에드너가 데이지를 생각하고 그녀를 서둘러 불렀다.
"데이지야, 이리 오렴!"
부엌에 들어간 데이지는 따돌림 받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꼈다. 큰 아이 빌리는 신이 나서 엘머의 무릎에 기어 오르며 캔디를 달라고 조른다. 빌리의 동생도 웃으면서 주변을 깡총깡총 뛰어 다니고 있었다. 이런 광경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한편 반짝반짝 빛나는, 푸르고 흰 체크 무늬의 리놀륨이나 에나멜에 니켈을 칠한 요리 솥, 나무로 잘 다듬은 벽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에드너가 웃으면서 엘머와 빌리를 나무란다. 빌리가 기어코 아빠에게서 캔디를 뺏은 것이다. 데이지의 조그만 눈은 그 레몬 드로프스를 마치 집어삼킬 듯 바라보고 있었다. 에드너도 이것을 눈치챘다.
"데이지 누나도 한 개 줘야지."
그러나 빌리는 데이지한테 가는 것이 싫었다. 데이지가 와서 제가 한 개 집어가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데이지는 에드너가 캔디 봉투를 접시에 넣어 식기 선반에 넣는 것을 보았다. 조금 있다가 꺼내서 나에게도 주겠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제 여행 가방이 바깥 차에 있는데요." 데이지는 그들이 잊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말했다.
"엘머! 당신이 가져다 이층까지 올려다 주지 않을래요?"
"뭘?"
"데이지의 가방인지... 뭔지 몰라도... 자동차에 놓고 왔다는데요..."
"아, 그래?" 엘머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낡은 여행 가방이에요." 데이지가 공손하게 말했다. "상당히 낡은 거에요. 우리 아버지가 옛날에 쓴 것이니까요. 오늘 아침 엄마가 뚜껑을 덮고 조르다가 가죽 끈이 끊어졌어요. 우리 집에는 슈트케이스가 없어서 할 수 없이 그걸 가지고 온 거에요. 엄마가 새 걸 사주지도 않아서..."
에드너는 체면치레로 미소했다. 그리고 어린애가 달려들어 오는 것을 보고 몸을 움츠려 아이의 손을 뿌리칠 시늉을 하다가, 그래도 귀엽다는 듯 그 동그란 머리에 그녀의 볼을 비비는 것이었다.
데이지는 딱딱한 표정으로 그들의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집 아이들이 둘 다 남자 애일줄은 몰랐어요"하고 말했다. "하나는 계집애인 줄 알았어요. 우리 집이 그래요... 남자 애 하나 여자 애 하나."
"응, 응" 에드너는 별 흥미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아저씨 따라가서 이층에 외투도 벗어놓고 오거라, 데이지." 그녀는 계속해서 데이지에게 말했다. "그리고 이층에서 가방 짐도 정리하면 어떻까? 그게 끝나거든 내려와서 부엌 일을 도와 줘야지. 내 심부름을 하려고 왔으니까." 이 사실을 잊으면 곤란하다는 듯 에드너가 데이지에게 말했다.
데이지는 시키는 대로 엘머를 따라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이층 복도에는 얼룩 하나 없는, 섬세한 천으로 만든 노란색 깔개가 두 장 바닥에 깔려 있었다. 엘머는 침실 하나에 데이지의 가방을 운반해 갔다.
"자, 이 방이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방을 나갔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조금 있다가 부엌에서 뭔가 작은 목소리로 얘기를 주고 받으며 웃는 소리도 들려왔다. 뒤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데이지는 급히 창가로 달려갔다. 엘머가 성큼성큼 가축 우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신기한 듯 방안을 둘러 보았다. 방바닥도 깨끗하게 니스 칠이 되어 있다.
혼자 쓸 수 있는 침대 - 조그만 구식 침대가 있다. 옛날에 쓰던 것이겠지. 물 탱크로 가는 파이프가 통하는 이 방에 그대로 넣어 둔 것이리라.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샅샅이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살금살금 여기저기 걸어 다니면서 양복장 서랍도 열어보고 창 밖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녀의 시선에는 사람의 눈을 꺼리는 것 같은, 남 모르는 불안함이 서려 있었다.
데이지는 외투와 모자를 벗어 침대에 놓았다. 지금 당장 가방의 짐을 꺼내는 것보다 오히려 부엌에 있는 에드너한테 내려가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 자기도 가는 것이니까 거리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점심 시간이 되어 엘머가 집에 들어왔다. 그는 흙 냄새가 나는 바깥 공기도 함께 집안에 가지고 왔다. 부엌의 난로가 활활 타고 있었다. 식탁에는 하얀 기름 종이가 덮여 있고 니스 칠을 한 껑충한 어린이 의자에 조그만 아이들이 살이 통통 찐 조그만 손들을 올려놓고 앉아 있다. 그러나 부엌에는 어쩐지 찬 바람이 도는 것 같았다.
에드너는 엘머를 향해서 뭔가 뜻 있는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그러나 데이지는 그걸 보지 못했다. 그녀는 에드너가 요리를 만들고 있는 곳에서 좀 떨어져 서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드너는 데이지에게 등을 돌리고 의식적으로 신경을 쓴 말투로 말했다.
"자, 데이지, 엘머 아저씨가 식사하러 돌아오셨어. 급히 준비하지 않으면 안 돼. 너도 도와 줘야지. 빵을 썰고 식기를 날라야 한다. 너는 일을 해야 하는 거야. 그것 때문에 와 달라고 한 거니까."
데이지는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무섭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한 표정이다. "빵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요."
"오늘 아침 넣어 두라고 그랬잖아? 그런데 어디다 넣었는지 모르겠어? 저기 선반의 큰 상자 안에 있어. 데이지, 정신을 차리고 뭣이 어디 있는지 항상 알아 둬야 해."
엘머는 자기를 보는 에드너의 표정에 약간 어리둥절했으나 곧 휘파람을 불면서 손을 씻기 시작했다.
"압빠의 친구들은 안녕하신가?" 그는 아이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건드리면서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에드너는 그 옆을 지나다가 머리를 흔들면서 "오늘 아침부터 저 모양이에요" 하고 소리를 죽인 채 거의 입술만 움직여 이렇게 말했다.
엘머는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대답으로 빙긋 웃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데이지는 그들이 주고받은 말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느낌이 이상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에드너가 가지고 있는 물건과 하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이 집의 분위기 밑바닥에는 무언지 종잡을 수 없는, 신경을 자극하는 묘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아침에 왔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 알 수 없는 느낌이 지금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곳의 분위기에서 그녀가 지금껏 몰랐던 기묘한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 그녀의 입장과 이 집 두 아이들의 입장에는 무언가 묘한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이번에는 손님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하고 엄마가 한 말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막연하게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쩐지 또 이가 아플 것 같아요." 그녀는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에드너는 감자를 꺼내서 물기를 닦아냈다... "데이지, 접시 한 개 가져다 주렴." 데이지가 무척 오래 접시를 찾는 동안 보다 못한 에드너가 돌아보고 손가락으로 접시를 가리켰다. 그리고 에드너는 다른 식기까지 자기 손으로 식탁에 갖다 놓았다. 젊은 목소리로 활발하게 떠들던 입술이 지금은 굳게 닫혀 있다. 분명히 어떤 생각을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데이지는 어리둥절해서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바짝 마르고 아무리 봐도 귀여운 데가 없는 소녀였다. 털 오버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아무렇게나 걸친 빌리가 서투른 걸음으로 부엌을 여기저기 걸어 다니고 있었다. 금발 머리가 탐스럽고 귀여웠다. 데이지는 아이를 식탁에 데리고 가려 했다. 순간 빌리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에드너가 깜짝 놀라 몸을 돌리더니 얼굴빛이 확 달라졌다.
"얘를 식탁에 데려다 주려고 했어요." 데이지는 가냘픈 소리로 변명했다.
"네가 무섭게 하니까 그래. 얘는 아직 너한테 낯이 익지 않았어. 네 손이 닿는 게 싫은 거야. 자, 빌리, 울지 마라 응. 누나는 괜찮아."
"자, 압빠가 데려다 주마." 당황한 엘머가 달려들었다.
빌리는 눈물이 고인 푸른 눈에 증오의 빛을 띠고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데이지를 노려 보았다. 데이지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이상하게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런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고르디와 드와이트를 데리고 사 남매가 집을 지킨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럴 때 드와이트를 식탁에 앉히는 것은 언제나 그녀의 책임이었다. 그녀가 제일 나이 많은 연장자였기 때문이다.
에드너가 스스로를 자제하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있는 것을 식탁에 갖다 놓아라, 데이지..."
모두 식탁에 앉았다. 지금까지 데이지는(그녀의 동생들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자기 집의 빈약한 식탁보다 다른 집에서 밥을 얻어 먹는 것이 훨씬 맛있다는 것을 항상 느껴왔다. 그래서 그들은 점심 때가 되면 메인저 아주머니 집 근처에 모여 웅성거리면서 그 집에서 불러 주길 마음 속으로 기다리곤 했다. 그리고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며 그 집에서 쫓아낼 때도 그다지 감정을 상하지는 않았다.
데이지는 지금 그 조그만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무척 먹고 싶은 듯 감자나 구운 햄, 파이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메인저 아주머니처럼, 혹은 그들을 동정해서 자기 집에 불러들인 브로커 부인처럼, 그녀의 눈치를 살펴서 좀더 먹으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데이지는 파이가 더 먹고 싶었다. 그러나 누구도 더 먹으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너는 남의 집 살이를 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집에 있는 것과는 다르단 말이야." 엄마가 일러준 말이 생각났다. 이 말의 뜻을 그녀는 겨우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에드너가 말했다. "데이지야, 접시를 씻어라."
말을 하고서 에드너는 아이들을 데리고 옆 방으로 가버렸다. 부엌에 혼자 남아서 조심스럽게 설거지를 하는 데이지의 귀에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의자에 앉아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에드너의 행복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 밖을 내다보니 비가 올 듯한 하늘을 배경으로 커다란 가축 우리가 희미하게 서 있었다. 빨리 자동차로 에드너의 어머니 집에 가지 않으려나 하고 데이지는 생각했다.
데이지는 되도록 빨리 일을 끝내고 에드너가 아이들의 내리닫이 옷을 만들고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에드너는 바느질하는 손을 쉬지 않았다. 데이지는 서글픈 얼굴로 앉았다. 기묘한 마음의 아픔이 전신에 퍼져 갔다. 그녀는 들릴락 말락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또 이가 아픈 것 같아요."
에드너가 실을 이로 물어 끊었다.
"얼마 전에 무척 앓은 일이 있어요. 좀 있으면 엄마가 치과 의사한테 데리고 간다고 했었는데..."
"그거 어떡하니..." 마지 못해 에드너가 이렇게 중얼거렸지만, 더 이상 위로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반들거리는 가죽 소파 한 귀퉁이에 담요를 깔고 베개를 베고 자고 있는 자기 아이의 얼굴을 이상한 미소를 띠고 바라보았다.
"엘머 아저씨는 내일 시내에 자동차를 타고 가시나요?"
"내일? 내일은 안 가겠지."
"내 체크 무늬 옷 벨트를 엄마가 찾다가 못 찾았어요. 그래서 혹시 엘머 아저씨가 가시면 저도 같이 가서 가져오려구 생각했어요. 그게 매고 싶어서요."
데이지는 울 것처럼 보기 흉한 입술을 깨물고 있다. 그녀의 이가 아픈 것쯤은 누구도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에드너는 데이지의 몸이 불편하다는 얘기 따위는 듣고 싶지도 않은 눈치였다. 데이지는 에드너가 약이 있다든가 없다든가 하는 정도 걱정은 해주기를 기다렸지만 사실 이가 아픈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몸 전체가 뒤틀릴 것 같은 적적하고 막막한 기분을 호소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대로 가면 무서운 병이 될지도 모른다. 엄마가 저녁 때 집에 돌아 와도 내가 이렇다는 것을 알려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으로 흘낏 본 엄마의 그 모습이 그녀의 뇌리에 되살아왔다 -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으면서도 억지로 웃으려고 애쓰던 그 얼굴, 낡은 청소용 작업모를 쓰고 한 손으로 외투 자락을 꽉 틀어쥐고 있던...
에드너는 데이지를 힐끔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매력이 없는 아이다. 외로움에 젖어 있을 때도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는 구석이 없다. 에드너는 약간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데이지야, 빌리가 좀 귀찮게 구는구나. 부엌에 데리고 가서 놀아 주지 않을래?"
"제가 안으면 우는 걸요." 자신 없다는 듯 데이지가 대답했다.
"이젠 안 울 거야. 거기 데리고 가서 나무 블록을 가지고 놀게 해. 애들을 상대해서 놀아주는 것도 네 일이야."
"저하구 같이 갈까요? 빌리가..."
"그럼 가구 말구. 자 가지? 빌리야, 데이지하고 같이 가서 놀아라, 우리 애기 참 착하지."
빌리는 커다란 눈으로 한동안 데이지를 흘겨 보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까닥까닥 걷는 빌리의 조그맣고 통통한 손을 잡고 나란히 부엌에 들어 가면서 데이지는 몸이 짜릿할 정도로 기쁨을 느꼈다. 이렇게 통통한 손이 또 있을까... 데이지는 생각했다. 에드너는 장난감 나무 블록 상자를 가져다가 데이지의 옆에 놓았다.
"자, 빌리를 잘 보고 있어라. 나는 바느질을 끝내야 하니까."
"같이 놀자, 빌리 - " 데이지는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손으로 상자를 잡고 속에 든 블록을 요란하게 바닥에 쏟아놓고 기쁜 듯이 그리고 자랑스러운 듯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안 돼, 빌리야. 그렇게 다 쏟아 놓으면... 그냥 둬. 넌 아직 어리니까 이걸 쌓아 올리진 못할 거야. 안 돼, 안 돼... 가만 있어! 누나가 해 줄게. 누나가 정말 굉장한 걸 만들어서 보여 줄게 응?"
빌리는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지는 매끄러운 리놀륨 바닥 위에 장난감 블록을 가지런히 놓았다. 이렇게 좋은 블록을 만져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동생 드와이트의 것은 낡고 수도 적으며 종류가 다 갖추어져 있지도 않았다. 무엇이든 집에서 동생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놀던 기분이 살아났다. 그래서 자기가 블록을 쌓아 올렸다가 옆에서 빌리가 손을 뻗칠 때마다 그 통통한 손을 매섭게 밀쳤다. 이렇게 좋은 장난감이라면 정말 좋은 것을 만들 자신이 있었다.
"가만히 있어, 빌리! 그러면 안 돼. 누나가 말이야, 끝까지 다 만들거든 말이야, 이게 무슨 모양인지 알게 될 거야."
그녀는 정말 흥미진진하게 블록을 하나 하나 맞춰갔다. 자기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새 집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니 새 교회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벽을 다 만들었을 때였다. 빌리가 슬쩍 손을 뻗어왔다. 그리고 빌리는 기쁜 듯 소리를 지르면서 방바닥 하나 가득 블록을 흩어버렸다. 블록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빌리는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펴고 만족스럽게 "야!" 환성을 올렸다.
"얘, 빌리야 - 참, 애두... 기껏 짓고 있던 집이 부숴졌잖아! 네가 부순 거야. 자, 여기 떨어져 앉아 있어. 내가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 줄 테니까."
통쾌하고 자랑스러워 하던 빌리의 얼굴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빌리가 큰 소리로 투정을 하는 것도 모른 척하고 데이지는 그를 안아다 부엌 한 귀퉁이에 앉혔다. 빌리는 큰 소리로 울었다. 그는 이렇게 밀려난 적이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에드너가 놀라서 뛰어왔다. 데이지는 자기가 한 일이 정당하다는 것을 알아 주려니 하고 에드너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순간 그녀는 직감적으로 방어 태세를 취했다.
"빌리가, 쌓아놓은 장난감 집을 무너뜨렸어요. 공들여 만든 걸 헐어 버렸어요."
"앙! 앙!" 빌리는 더욱 슬프게 큰 소리로 울었다. 통통 살이 찐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구원을 바라는 듯 엄마를 향해 두 손을 벌렸다.
"전 때리지는 않았어요." 데이지는 어쩔 줄 모르고 말했다.
"괜찮다, 아가." 에드너는 쓰다듬듯 속삭였다. "얘가 제 장난감을 흐트린 게 뭐가 나쁘냐? 이건 빌리의 장난감이지 네 것이 아니야, 데이지." 에드너는 이렇게 말했다. "가만히 앉아서 네가 하는 걸 보고만 있으라니까 그게 싫은 거지 뭐냐. 얘도 그걸 가지고 놀고 싶은 거야. 알았니? 네가 울린 거야."
"나 엄마 있는 데 갈래." 빌리가 울면서 말했다.
"그래, 그래. 엄마 있는 데로 가자." 에드너는 아이를 안고 눈물을 닦아 주었다.
"전 때리지도 않았어요." 억울한 듯이 데이지가 말했다.
"자, 그만 둬. 블록을 치우고 부엌 바닥이나 청소해라. 너 그릇들만 씻고, 부엌 바닥 소제는 안 했지?" 그리고 다음은 빌리에게 말했다. "곧 아빠가 오실 거야. 오시거든 같이 재미있게 차를 타고 나가자."
데이지는 가라앉은 기분으로 장난감 재목을 상자에 넣고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내가 빌리에게 뭘 잘못했단 말인가. 내가 만든 장난감 집을 부순 것은 빌리 아닌가. 드와이트는 언제나 내가 다 만들 때까지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다. 제일 나이가 많은 내가 뭐든 앞장 서서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녀의 이유를 들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뭣이든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다. 그녀는 부엌 바닥을 깨끗이 닦으면서 눈물을 흐르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좀 있다가 엘머가 돌아와서 그녀의 기분은 좀 밝아졌다. 엘머는 뒤 현관 계단에 올라서자 부엌을 지나면서 "에드너!"하고 아내를 불렀다.
"저쪽에 있어요." 데이지는 묻지도 않은 것을 일러 주었다.
"이제 갈까? 어! 우리 아기는 잠들었나?" 의외란 듯이 엘머는 말했다.
에드너의 얼굴에 경고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데이지는 되도록 조용히 빗질을 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이 얘기하는 것이 띄엄띄엄 들려온다 - "거북해지면 싫어요... 그건 그렇지만 일단 시작한 바에는... 하루 종일 뭐 하나도... 우리가 저 애를 데려온 것은..." 데이지는 이 말들의 뜻을 잘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급히 청소를 끝내고 빗자루를 치웠다. 그리고 자신도 외출 준비를 해도 좋은지 어쩐지 분명히 알고 싶었다.
엘머가 활발하게 방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대로 데이지 곁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창으로 내다보니 차고에서 자동차를 돌려 밖으로 꺼내고 있다. 이층에서 에드너와 빌리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을 깨서 칭얼거리는 아이의 울음 소리도 들렸다. 나도 여기서 우물쭈물하지 말고 외투라도 입어야 하지 않을까.
엘머가 클랙슨을 울렸다. 곧 에드너가 외투에 모자를 쓰고 급히 계단을 내려왔다. 빌리는 빨간 스웨터를 입고 뜨개 모자를 쓰고 있어 어쩐지 어린이 걸스카웃 단원 같은 모습이다. 아이도 조그만 외투를 입고 있다.
"여보, 애 좀 데리고 가요." 에드너가 밖에 있는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데이지쪽은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렇게 돌아 보지도 않으면서 빠른 말투로 "데이지, 우린 잠깐 드라이브하고 올 테니까... 청소는 끝냈니? 그래, 그럼 식당에 어질어진 걸 치워라. 곧 돌아올 테니까 그리 알고. 다섯 시 십오분이 되거든 불을 켜는 거야. 낮에 내가 보여줬지? 그리고 남은 감자를 얇게 썰고 그리고 고기도. 그것이 다 되거든 식탁 준비도 해 둬."
클랙슨이 또 울렸다.
"네! 알았어요. 그럼 갔다 오겠다. 데이지! 자, 아가 아빠가 빨리 오라고 그러시잖니."
데이지는 제 자리에 서서 그들이 출발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빌리가 소리를 지르며 아빠 옆에 앉았다. 에드너는 남편 손에서 아이를 받아 뒷자리 자기 옆에 앉혔다. 자리는 넉넉하다 -뒷좌석 반이 그대로 비어 있는 것이다. 집에서 할 일은 이제 아무 것도 없다. 이 사실이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다. 그들은 나를 데려가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들은 모두가 제 집안 사람, 남의 집 사람은 데려 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이방인인 것이다. 그들은 모두 저 아이까지도 - 기대에 찬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엔진이 부릉거렸다. 그리고 그들은 출발했다. 대문까지는 진흙을 튀기면서 천천히 가다가, 거기서부터 차츰 속력을 내서 모퉁이를 돌아선 뒤 차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맥없이 식당으로 들어갔다. 비오는 날의 오후 늦은 시간. 창으로 스며드는 빛도 어두침침하다. 쥐색 깔개 위에 내리닫이 아기 옷의 핑크색 천이 흩어져 있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그것을 모아 코로 슬쩍 냄새를 맡으면서 천천히 치우기 시작했다. 빅벤을 본뜬 부엌의 기둥시계가 크게 시간을 새겨 가는 소리가 들린다.
무서운 쓸쓸함이 그녀의 전신을 휩쌌다. 누구 하나 이것을 알아줄 사람은 없다. 전에는 언제나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걱정하면서 집에 돌아왔다. 이따금 나무랄 때도 있었지만 아이들 기분이 상하지 않나 늘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써 주었다. 엄마도 고르디도 드와이트도 그녀를 생각해 주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먼 시골에 와 있고 그들은 모두 집에 있다.
그녀는 이렇게 남의 집에 있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엄마 말을 들어보면 이번 여름부터는 나도 차차 일을 돕지 않으면 안 되는 모양이다.
못생긴, 조그만 입 언저리가 이지러지며 울음이 곧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소리는 내지 않았다.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 밖에 없다. 울건 어쩌건 누구 하나 생각해 주지도 않을 뿐 아니라 달래 줄 사람도 없다는, 소름 끼치는 이 현실을 그녀도 이제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