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소개]
정승윤(鄭勝允, 1953년~ ). 전남 강진 출생. 광주고등학교와 경희대 영문학과 졸업. 중고교 교사로 근무하다 전교조 활동을 이유로 해직 당했고, 이후 복직되어 현재 광주고등학교 교사로 근무.
꿩
산길에 사람의 눈이 마주치면 피었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화르르 져버리는 꽃이 있었다. 깊은 산 속엔 아무도 모르게 피었다 지는 꽃도 있다고 하지만, 저렇게 사람에 연연하는 꽃도 아름답지 않은가. 푸른 풀숲에 피어나는 붉은 꽃 같은 장끼의 옆모습이 보였다. 동화(同化)를 거부하는 저 불타는 분노, 그 이면에는 못내 인간을 그리워하는 연모(戀慕)의 옆얼굴도 있었다. 꽃은 그저 우연히 피었다 질뿐인데 정작 그는 그 꽃을 못 잊어 점점 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운주사에서
탑 위에서 구름이 피듯이
인고의 돌 위에 꽃이 핀다
탑 위에 구름이 스러지듯이
번뇌와 망상도 스러지기를.
한 세상의 빛과 그늘이 하는 일은
저 탑돌 위에 푸른 이끼를 키우는 일
한 세상의 수행자가 하는 일은
그의 입술을 침묵으로 닫아 거는 일.
종루에 오르는 돌계단은 불과 다섯 계단
석상에 자라는 돌이끼는 불과 천년
석양이 그 돌계단을 오르고
석양에 그 이끼의 그림자가 자란다.
몽상가의 구름
청남빛 어둠의 시간
긴 풀들이 인기척을 내고
달맞이꽃이 돌연 생생해지는 시간
몇 점의 구름이 소리없이 떠있다
해를 삼킨 도시의 공장들이 점점 컴컴해지고
개들이 불안해지기 시작할 때
산 위도 아닌, 숲 위도 아닌
누군가의 지붕 위에 떠있는 구름
말풍선 같은 구름
거친 붓자욱 같은 구름
행복과 불행을 뒤섞어 놓은
몽상가의 칵테일,
우울한 구름
금색 파리떼
똥더미 위에 파리떼가 앉아 있다. 꼭 그 똥더미 크기만큼의 파리떼였다. 나는 그 금색의 파리떼들을 본 적이 있다. 언젠가 숲속에서 도시락을 먹을 때 그 놈들이 달겨들었다. 손으로 내쫒으면 도망갔다가 금새 또 달겨들었다. 밥 한 술 먹고 덮고 쫒고 또 한 술 먹고 덮고 쫒았다. 어찌나 그악스럽게 덤벼드는지 목숨 따위는 개의치 않는 놈들처럼 보였다. 그 파리떼들은 참으로 삶에 악착같았다. 그러나 삶이 끝나면 분연히 떨치고 달아날 놈들이었다. 삶의 진 자리 정도 남겨두고 우리들의 금색의 영혼처럼 날아가버릴 놈들이었다. 어딘가에 또 다른 삶이 있으면 교묘한 배합으로 다시 모여서 또 다른 영혼이 되었다가 어느새 떠나가버릴 놈들이었다. 우리는 결국 그렇게 흩어졌다가 만나고 흩어졌다가 다시 만날 파리떼들이었다.
개문발차(開門發車)
공중부양을 아십니까? 그것도 평지가 아닌 달리는 차 위에서의 공중부양말입니다. 처음 버스에 탔을 땐 비록 비좁은 틈새였지만 완강한 두 다리로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정류장, 두 정류장 사람이 늘 때마다 아구구구 비명소리와 함께 내 몸이 내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을 실을 수 없겠지라는 생각이 들 때 쯤 수용연대 특무상사처럼 생긴 버스 운전사가 급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아구구구 몸뚱이들이 뒷쪽으로 쏠리며 순간적으로 생긴 공간에 또 십여 명의 몸뚱이들이 채워집니다. 만원 버스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경직을 풀고 몸의 유연성을 최대한 살려야 합니다. 급브레이크의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그 급물살에 몸을 맡겨야 합니다. 좁은 틈새를 따라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몸통은 몸통대로 따로 놀려야 합니다. 때론 관절 꺾기나 빗장 뽑기 같은 비장의 묘수도 사용해야 합니다. 내릴 때를 위하여 바닥에 간신히 까치발이라도 딛고 있어야 하지만 그 욕심마저도 버리면 여러분은 가볍게 공중부양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길게 거의 수영하는 자세로 내 몸이 들려 있었습니다. 몸비벼오는 여자의 살냄새 때문에 알 수 없는 곳에 가 있는 내 무죄한 성기는 발기해 있었고 뒤틀린 팔목의 검지 손가락은 가방을 놓치지 않으려고 꼬불려져 있었습니다. 이제는 비명소리마저 짓이겨져 들리지 않고, 몸뚱이들은 잘 밀착되어 어떤 충격에도 더 밀리지 않을 만큼 요지부동일 때, 이제는 송곳으로 찔러도 더 이상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 때, 버스는 내리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또 한 정류장에 멈춰 섰습니다. 입김으로 얼룩진 창을 내다보니 십여 명의 사람들이 아귀떼처럼 출입구로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제발 좀 그만 태우라고 운전사에게 사정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만만한 버스 차장을 마구 나무래고 있었습니다. 열대엿 살이나 먹었을까, 쬐끄만 버스 차장은 당찼습니다. 어떤 욕설을 퍼부어도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몰려와도 끄뗙도 하지 않았습니다. 막차에선 항상 졸고 있던 그 버스 차장, 출근길엔 용감하기 그지 없습니다. 꾸역꾸역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태웁니다. 운전사는 안으로 더 들어가라고 소리지르고 입구의 사람들은 비집고 들어가기 위하여 안간힘을 씁니다.그러나 버스문은 끝내 닫기지 못하고 출발합니다. 닫기지 않는 문 대신 버스 차장이 두 팔로 여나문 명을 안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개문발차(開門發車)입니다. 개산원조(開山元祖)도 아닌 개안공양(開眼供養)도 아닌 개문발차입니다. 개발독재도 아닌 빈부격차도 아닌 개문발차입니다. 개문발차의 그 버스 지금도 어는 언덕길 힘겹게 오르고 있는지, 팔벌려 그 시대의 고통을 한아름 안고 가던 그 소녀, 지금은 아줌마거나, 과부거나, 혹은 망자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 소녀, 벌린 두 팔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지금은 무엇을 안고 가고 있는지.
눈꽃
꽃이 피었다.
벚나무에 개나리 가지에 꽃이 피었다.
목련과 배롱나무에도 꽃이 피었다.
화서도 없이 일시에 꽃이 피었다.
느티나무에도 산사나무에도 꽃이 피었다.
높은 가지에도 낮은 가지에도 꽃이 피었다.
온 공간에 가득히 꽃이 피었다.
백양나무에도 버드나무에도 꽃이 피었다.
오리나무에도 산딸나무에도 꽃이 피었다.
12월에도 봄날처럼 꽃이 피었다.
거리는 생생한 향기가 넘쳐났다.
꽃은 피면서 져내리고 있었다.
뾰쪽탑 위에도 석사자의 갈기에도 꽃이 피었다.
꽃이 없던 곳에도 꽃이 피었다.
누추한 자의 어깨 위에도 노인의 가슴에도 꽃이 피었다.
가늘고 메마른 가지일수록 아름다운 꾳이 피었다.
죽었던 것들은 환생하고 살아있는 것들은 저승에 닿는
가지 끝 허공에도 꽃이 피었다.
골목길
이곳은
지하로 내려갔던 광부가
다시 돌아와 뚫어놓은 막장이다.
이곳은
혁명가가 살고 있는 곳이다.
세상 대신 세간을 때려 부수고
혁명 대신 혁대를 풀어
아내를 후려치는 곳이다.
이곳은
바다를 두려워하는 선원이
그의 배를 끌고 와 살고 있는 곳이다.
용마루 너머 그의 배의 용골이
시치미 떼고 숨어 사는 곳이다.
이곳은
간수도 없는 고적한 감방이다.
모서리 한 줌 흙에
들국화 한 포기가 갇혀 있는 곳이다.
단조(短調)
1.풀잎
풀벌레를 보면
풀잎이 어떻게 풀벌레가 되는지 알겠다
풀벌레의 날개짓을 보면
그가 또 어떻게 풀잎이 되는지도
알겠다
2.황금 갈대
강은 마르고
길은 끊겼도다.
황혼의 순간까지
한무더기의 흙으로까지
쫓겨온 그대 일족은
이제 빈 마음 땅에 꽂고
黃金 갈대가 되었도다.
3.거름
내 거름은
똥 만으로 되는건 아니다.
내 거름은
풀과 합수(合水)만으로 되는건 아니다.
내 거름엔
고통에 찬 신음과 피울음이 섞여있다.
내 거름엔
이 모든 걸
덮고 누르고 썩이는
긴 세월의 인내가 있다.
4.봄 출정
광활한 개활지의 지평에서 부터
문명의 대군이 밀려온다.
이 곳 섬처럼 남아있는 마을은
산벗꽃, 홍매화, 버들개지 기(旗)를 꽂고
봄 출정 준비에 한창이다.
운명을 아는 듯 쇠락한 군막(軍幕) 뜰에는
살구나무 한 그루만 그득하다.
전쟁이 밀물처럼 밀려와
이 섬이 사라지면
어쩌나 우리가 사랑했던 저 살구나무
바닷속 산호가 되려나.
5.태양에서 온 가시고기
태양에서 온
황금 가시고기가
오늘 아침 솔밭을
유유히 헤엄쳐 간다
내 볼의 온기는
가시고기가 스쳐간
흔적이다
6.살별
살별이 흐른다
성냥을 긋듯이 가까이 흐른다
가까울 수록 떨리는 마음
오, 불붙을 것 같다
7.어두운 밤
별이
물 속의 조약돌들을 만지는 듯이
맑은 밤
나무 한 그루
우주를 지켜보는
어두운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