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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백석(白石, 1912~ ?) : 본명 기행(夔行). 평북 정주(定州) 출신으로 오산중학을 거쳐 일본 청산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어느 문학동인이나 유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활동한 시인이다.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그 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35년 조선일보에<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위치를 분명하게 했다. <여성> 지 편집에 관여하다가 교사로도 일하며 만주로 떠났다가 해방 이후 고향에 돌아왔다. 대표작으로 <여우난골족(族)>,<여승>,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등의 작품이 유명하며 시집 <사슴>을 남겼다.

 

 

 




여우난골족(族)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할머니 진할머니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 나무가

많은 신리(新理) 고모 고모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

열여섯에 40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모

고모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동이

60리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끝에 섧게

눈물을 짤때가 많은 큰골 고모 고모의 딸 홍녀(洪女) 아들

흥동이 작은 흥동이

배나무 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지를 좋아하는 삼촌 삼촌엄매

사촌누이 사촌 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찰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 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이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기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기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 가는 집안에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랫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윗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랫목 싸움 자리 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시누이 동서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 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고향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디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삼천리문학, 1938. 4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여성, 1938. 3월

 

* 마가리 : 오막살이

* 고조곤히 : 고요하게, 소리없이

 


 

 

여 승(女僧)

 


여승(女僧)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낮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느 산(山)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사슴, 1936


*가지취 : 취나물의 일종

*금전판 : 금광

*섶벌 : 재래종 일벌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학풍(學風) 1948. 10월


 


주막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

부엌에는 빨갛게 질들은 팔(八)모알상이 그 상 위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잔이 보였다

아들 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

울파주 밖에는 장꾼들을 따라와서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조광, 1935. 11월

 

*붕어곰 : 붕어를 알맞게 지지거나 구운 것

*질들은 : 오래 사용하여 반들반들한

*팔모알상 : 테두리가 팔각으로 만들어진 개나리소반

*장고기 : 잔고기

*울파주 : 대, 수수깡, 갈대, 싸리 등을 엮어 놓은 울타리

*엄지 : 짐승의 어미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짖도 개털억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수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한 이도 뭉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노루 - 함주시초2




장진 땅이 지붕넘어 넘석하는 거리다

자구나무 같은 것도 있다

기장감주에 기장차떡이 흔한데다

이 거리에 산골사람이 노루새끼를 다리고 왔다

산골사람은 막베 등거리 막베 잠방등에를 입고

노루새끼를 닮었다

노루새끼 등을 쓸며

터 앞에 당콩순을 다 먹었다 하고

서른닷냥 값을 부른다

노루새끼는 다문다문 흰 점이 백이고 배안의 털을 너슬너슬 벗고

산골사람을 닮었다

 

 

산골사람의 손을 핥으며

약자에 쓴다는 흥정소리를 듣는 듯이

새까만 눈에 하이얀 것이 가랑가랑하다

 





북방에서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금은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여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나의 태반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늘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수라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히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오리 망아지 토끼


오리치를 놓으려 아배는 논으로 나려간 지 오래다

오리는 동비탈에 그림자를 떨어트리며 날아가고 나는 동말랭이에서 강아지처럼 아배를 부르며 울다가

시악이 나서는 등뒤 개울물에 아배의 신짝과 버선목과 대님오리를 모다 던져버린다

 

 

장날 아츰에 앞 행길로 엄지 따러 지나가는 망아지를 내라고 나는 조르면

아배는 행길을 향해서 크다란 소리로

-- 매지야 오나라

-- 매지야 오나라

 

새하려 가는 아배의 지게에 지워 나는 산으로 가며 토끼를 잡으리라고 생각한다

맞구멍난 토끼굴을 아배와 내가 막아서면 언제나 토끼새끼는 내 다리 아래로 달아났다

나는 서글퍼서 서글퍼서 울상을 한다




적경(寂境)


신살구를 잘도 먹드니 눈오는 아침

나어린 아내는 첫아들을 낳었다

 

인가(人家) 멀은 산(山)중에

까치는 배나무에서 즞는다

 

컴컴한 부엌에서 늙은 홀아비의 시아부지가 미역국을 끓인다

그 마을의 외따른 집에서도 산국을 끓인다


 




정주성


산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리 조을든 무너진 성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조선일보. 1935. 8. 30






흰 밤


옛성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조광 1권 2호. 1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