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소개]
정지용(鄭芝溶, 1903-1950) : 충북 옥천(沃川) 출생.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광복 후 이화여자전문 교수와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냈다. 광복 후 좌익 문학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이었으나 전향, 보도연맹에 가입했으며 6·25 때 납북돼 사망했다.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여 대상을 선명히 묘사, 한국 현대시의 신경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를 평가할 때 30년대 이상과 청록파를 문단에 소개한 공로도 빼놓을 수 없다. 작품으로 <향수(鄕愁)> <압천(鴨川)> <이른봄 아침> <바다>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정지용 시집> <백록담> <지용 시선> 등이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삼동내 - 얼었다 나온 나를
종달새 지리 지리 지리리...
왜 저리 놀려대누.
어머니 없이 자란 나를
종달새 지리 지리 지리리...
왜 저리 놀려대누.
해바른 봄날 한종일 두고
모래톱에서 나 홀로 놀자
산너머 저쪽에는
누가 사나?
뻐꾸기 영 우에서
한나절 울음 운다.
산너머 저쪽에는
누가 사나?
철나무 치는 소리만
서로 맞아 쩌 르 렁!
산너머 저쪽에는
누가 사나?
늘 오던 바늘장수도
이봄 들며 아니 뵈네.
가을볕 째앵하게
내려쪼이는 잔디밭.
함빡 피어난 다알리아.
한낮에 함빡 핀 다알리아.
시악시야, 네 살빛도
익을 대로 익었구나.
젖가슴과 부끄럼성이
익을 대로 익었구나.
시악시야, 순하디 순하여다오.
암사슴처럼 뛰어다녀보아라.
물오리 떠돌아다니는
흰 못물 같은 하늘 밑에.
함빡 피어나온 다알리아.
피다 못해 터져나오는 다알리아.
노주인의 장벽(腸壁)에
무시로 인동(忍冬) 삼긴 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어 붉고.
구석에 그늘지어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냄새 훈훈히 김도 서리다가
바깥 풍설(風雪) 소리에 잠착하다.
산중에 책력(冊曆)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