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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계용묵(桂鎔默, 1904년 9월 8일 ~ 1961년 8월 9일).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상환》을 《조선문단》에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최서방》 《인두지주》 등 현실적이고 경향적인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이후 10여 년간 절필하였다. 1935년 인간의 애욕과 물욕을 그린 《백치 아다다》를 발표하면서부터 순수문학을 지향하였다. 작품을 많이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묘사가 정교하여 단편 소설에서는 압축된 정교미를 잘 보여주었다. 대표작으로 《병풍 속에 그린 닭》 《상아탑》 등이 있다.

 

[작품 소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의 소소한 일상과 평범한 사물들에서 느끼는 그다지 강렬하지 않은 소회를 정리한 수필들. 담백한 필치가 거부감 없이 읽히는 것 외에 그다지 깊숙히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던 당시의 잘 알려지지 않은 시대상과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보여준다.

 

 


 

 

서화(書畵)를 좋아하는 어떤 벗이 하루는 어느 골동점에서 추사(秋史)의 초서(草書) 병풍서(屛風書) 여덟 폭()을 샀다.

 

 

“나 오늘 좋은 병풍서 한 틀 샀네. 돌아다니면 있긴 있군!”

 

 

그 벗은 추사(秋史)의 병풍서를 구()하게 된 것이 자못 만족한 모양이다.

 

 

“돈 많이 주었겠군. 추사의 것이면….”

 

 

“아아니 그리 비싸지도 않아. 글쎄 그게 단 오십 원이라니깐 그래.”

 

 

추사의 병풍서 한 틀에 오십 원이란 말은 아무리 헐하게 샀다고 하더라도 당치않게 헐한 값 같으므로,

 

 

“그러면 추사의 것이 아닐 테지, 속지 않았나? 추사의 것이라면 한 폭에도 오십 원은 더 받아먹겠네.”

 

 

하고 의심쩍게 말을 했더니,

 

 

“괜히 추사의 글씨가 아니겠군. 바로 병풍을 붙였다가 뗀 것인데 그 글씨 폭은 지지리 지지리 더럽혀지고, 가장자리로 돌아가면서 붙였던 눈썹지 자리만 하얀 자국이 있는 것만 보더라도 그건 옛날 게 분명한 게야.”

 

 

한다.

 

 

이 소리에 나는 더욱이 그 글씨가 의심스러웠다.

 

 

“이즘 고물인 것처럼 그런 가공들을 해서 많이들 팔아먹는다는데 그 눈썹지 가장자리가 햐얗다는 것과 그 오십 원이란 헐한 값과를 미루어 보면 글쎄 그게 추사 친필이라고…?”

 

 

“아아니! 그렇게만 자꾸 의심할 게 아니라니깐. 내게 추사의 필첩(筆帖) 이 있는데 거기에 찍힌 낙관과 이 병풍서의 것과 조금도 틀림이 없거든.”

 

 

하고, 그는 틀림없는 추사의 친필로 단정을 하고 조금도 의심하려고 않는다.

 

 

그러니 나도 확실히는 모르면서 아니라고 그냥 우길 수는 없어서,

 

 

“그럼 글씨 전문가에게 시원스럽게 한번 감정을 받아 보지?”

 

 

하고, 나도 사실은 그 진부(眞否)가 궁금해서 이런 제의를 했더니,

 

 

“그야 어렵지 않지. 그럼 내 가서 감정을 한번 받아 보겠네.”

 

 

하면서 그는 현재 생존해 있는 모모씨의 글씨도 여러 폭 샀던 것을 추사의 것과 아울러 다 싸가지고 어느 서도 대가를 찾아가서 감정을 받기로 했다.

 

 

내 의심이 틀림없이 맞았다.

 

 

추사의 것뿐 아니라 현 생존자의 것들까지 진짜 친필은 하나도 없다고 그 대가는 말하더란다.

 

 

그러면서 추사의 글씨를 가지고 하는 말이, 추사의 글씨를 방불케 하는 것으로 솜씨는 도리어 추사보다 능숙한 데가 있어 보이나, 도장이 추사의 것이 아니니,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란 말을 하더란다.

 

 

그래서 이 글씨가 추사의 글씨보다 낫다면 추사 이상의 가치를 인정해 줘야 할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그는 웃으면서,

 

 

“어찌 글씨의 능, 불능으로 가치가 있게 됩니까? 이왕 얻은 그 필자의 명성 여하로 글씨의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지요. 낙관이 추사의 진짜 낙관이어야 값이 나갑니다.”

 

하고, 추사의 글씨보다 도리어 나은 점이 있다고는 하면서도 그 대가는 그 글씨를 조금도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이 더 더듬어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밀어 던지더란다.

 

 

하필 글씨에 있어서뿐 아니라 모든 것에 있어서 이렇게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새로이 잘한다는 것이 이미 얻어 가지고 있는 그 명성을 누르기 힘들다. 확실히 그 가치의 판단에 명석한 두뇌도 그 명성 앞에서는 눈을 감는 것이 예의다. 그러기 때문에 이미 자라난 그 명성의 그늘 밑에선 흔히 새싹이 마음대로 오력(五力)을 펴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는 예를 보아도 오거니와, 이 가짜 추사가 추사의 글씨보다 자기의 것이 분명 낫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러면서도 추사의 이름으로 글씨를 써서 팔아먹지 않아서는 안 된다면 그 창조적 고민이 얼마나 클 것일까? 생각을 하며,

 

 

“추사의 글씨보다 능숙하다니 잘 보관해 두게. 그 사람이 출세하면 그것도 만 냥짜리는 될 테니.”

 

 

하고, 웃었더니

 

 

“보관이 다 뭐야! 거 참 흉측한 노릇이로군!”

 

 

하고 그 벗은 그 글씨 뭉치를 아무런 미련도 없이 다시 보자기에 싸더니 골동품점으로 가지고 나가서 이조자기의 화병 한 개로 바꾸어 왔다.

 

 

그 벗 역시 그 추사의 글씨에 혹해서 추사의 글씨를 사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 글씨 필자의 명성, 다시 말하면 추사의 명성을 사려고 하였던 한 사람인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누가 한다.

 

 

명필 추사(秋史)의 선생 조광진(曹匡振)이 하루는 새벽에 일어나니, 잠자리에서 갓 깨어 일어난 참새들이 뜰 앞 나뭇가지에서 재재거리는 소리에 그만 필흥(筆興)이 일어나 저도 모르게 필묵을 베풀어 새벽 새라고 ‘효조(曉鳥)’ 두 자를 제물에 써 버렸다.

 

 

그러나, 이렇게 흥에 겨워 쓰면 언제나 만족한 글씨를 얻게 되는 것이, 흥에 겨워 쓰기는 썼는데도 ‘효조(曉鳥)’라는 鳥[]자의 맨 밑 넉 점을 싸는 치킴이 제대로 올라가지를 못하고 아래로 축 처져서 심히 거슬렸다. 그래 다시는 더 거들떠보기도 싫어 문갑 밑에다가 되는대로 밀어 던지고 말았다.

 

 

그랬던 것을 하루는 어떤 손님이 찾아와서 글씨를 청하므로 다시 필흥(筆興)이 생기지 않아 그것을 그대로 내어주고 말았다.

 

 

그런 지 10년 후, 조광진이 중국에 여행을 갔다가 어떤 귀족의 사랑에서 뜻도 않았던 그 ‘효조(曉鳥)’의 鳥[]자 치킴이 쳐져 내버리는 셈치고 그 손님에게 내어주었던 그 글씨가 중국에서도 유명한 귀족의 사랑에 족자로 걸려서 상당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조씨는 그 鳥[]자의 치킴이 그때와 마찬가지로 마음에 거슬리어 주인이 잠깐 밖으로 나간 짬을 타서 필묵을 꺼내 鳥[]자의 치킴에 가획(加劃)을 하여 처진 치킴을 바싹 올려붙여 놓았다.

 

 

그랬더니 주인이 들어와 이것을 보고 남의 귀한 글씨에다가 손질을 해서 버려 놓았다고 꾸짖으며 노했더라는 것이다. 그래, 조씨의 말이 실인즉 그것이 자기의 글씨인데 鳥[]자의 치킴이 되지를 않아서 내버렸던 것으로 지금 보아도 그게 마음에 거슬려 붓을 좀 넣어 본 것이라고 하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주인은 어성(語聲)을 놓여 하는 말이 당신은 글씨를 쓸 줄만 알고 볼 줄은 모른다고 하면서 효조(曉鳥)라면 새벽 새일테니 잠자리에서 갓 깨어나온 새가 무슨 흥이 있어서 꼬리가 올라가랴, 언제나 보아도 새벽 새는 꼬리를 처트리고 우는 법이라 자기가 이 글씨에 고가(高價)를 주고 사다가 머리맡에 걸고 사랑하는 것도 그 ‘효조(曉鳥)’라는 데 있어 조자(鳥字)의 치킴이 용하게 처트린 데 가치를 찾았던 것으로 이제 아까운 글씨를 버렸다고 하면서 떼어 던지더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문득 졸작(拙作) <병풍(屛風)에 그린 닭이>를 생각했다. 해작(該作)은 작자(作者)인 나에게 있어서는 열작(劣作)의 부류(部類)에 미련없이 처넣고 다시 한번 눈도 거들떠보고 싶지 않은 그러한 작품인데 그렇지 않다고 하는 벗이 있었던 것이다.

 

 

어떤 좌석에서 문학 이야기가 났을 때, 나는 시인 모씨(某氏)로부터 네 작품 가운데는 <병풍에 그린 닭이>하나밖에 없느니라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 이 시인이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태도를 엿보았으나, 결코 그러한 의미에서가 아님을 분명히 알았을 때, 나는 다시 한번 놀라며 그러할 리가 없다고 부인을 했다.

 

 

그러나 이 시인은 제 작품은 제가 모르는 법이라고 하면서 작자에게는 그 <병풍에 그린 닭이>가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보여도 그래도 그 작품 하나가 지금까지 써 온 중에서는 후세에 남으리라고 극언까지 한다.

 

 

그래도 나는 그 말을 전적으로 부인하였더니, 제 작품을 제가 모르는 예는 가까이 시인 김동명 씨(金東鳴氏)에게도 있었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해씨(該氏)가 시집 『나의 거문고』를 출판할 때, 그 어떤 시 한 편이 심히 마음에 거슬려 그 시집에서 빼내려 하는 것을 그 중 백미편(白眉篇)이 그것인데 그것을 빼낸다고 친구들이 아까워해서 마음에는 없는 것을 그대로 넣어 출판을 했던 것인데, 그 후 신간평(新刊評)을 보면 평자(評者)마다 작자로선 빼내려던 그 한 편을 도리어 대표작으로 들어 내세우고 평을 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대개는 작자가 자작(自作)의 가치판단에는 눈이 어두운 것이라고 단안(斷案)을 내린다.

 

 

그러나 내 귀에는 이 소리가 조금도 들어오지 아니하고 그저 내 작품의 가치는 내가 가장 잘 알 것만 같게 여겨진다. 언제나 읽어 보아도 <병풍에 그린 닭이>는 문장이라든가 구성이라든가 그 어느 부분 한 곳에 마음 붙는 데 가 없다. 다만 그저 <병풍에 그린 닭이>하는 그 제목만이 언제나같이 마음에 들 뿐이다.

 

 

여기에 한 가지 궁금한 문제가 남는다. 시인 모씨(某氏)<병풍에 그린 닭이>를 그렇게 제일이라고 쳐도 작자인 나는 그대로 덜 되게만 보이는데 김동명 씨는 아직껏 그 시편이 나와 같이 여전히 마음에 안드는지, 또는 그 ‘효조(曉鳥)’에 대한 조광진(曺匡振)의 심경은…? 글씨는 어디까지든지 글씨요, 그림이 아니니 효자(曉字)가 붙으면 조자(鳥字)의 꼬리가 처져야 하고 주자(晝字)가 붙으면 조자(鳥字)의 꼬리가 올라가야 하고 이렇게 글씨에 임시응변(臨時應變)이 있어야 할 것임이 마땅할 것은 아니나, 그 중국인의 설명을 듣고 글씨를 떼어 버리는 것을 목도(目睹)했을 때의 그 때의 조씨의 심경을 좀 엿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무척 깊어진다.

 

 

 


 

 

 

초록 저고리에 일람 치마를 입은 30대의 한 젊은 여인이, 필시 그 동생이리라, 빨간 저고리에 노랑 치마를 입은 스물이 채 되었을까 한 색시의 손목을 채 지게 위에 모로 누었다.

 

 

일견(一見) 선전(鮮展)의 낙선작품(落選作品)임이 틀림없다.

 

 

색채에 가난한 이 효자동 골목의 한낮은 이 여인의 자태로 해서 자못 화려하다. 오고가는 사람마다 그 여인에게 한 번씩 시선을 아니 던지고 가는 사람이 없다.

 

 

앞으로 이 여인은 이렇게 얼마를 더 가야만 주인을 만나게 되는 것인지 좁지 않은 골목에서 그 어떠한 종류의 선전광고처럼, 지게 위의 신세로 뭇 사람들의 눈에 오르내리게 됨이 짐짓 부끄러운 일일 것 같다.

 

 

작자가 이 그림을 그릴 때에는 일단의 정력이 화필 끝에 여념도 없게 입선 특선에의 꿈이 한껏 아름다웠으련만 회()가 열리는 날 이 그림은 정력에 의 보람도 없이 이제 지게 위에서 무색(無色)이 주인을 이렇게 다시 찾아 가지 않아서는 안 되는 슬픈 운명을 지녔다.

 

 

지게꾼은 그 슬픔 운명의 짐이 오히려 무거운 듯이 땀을 뻘뻘 흘리며 걷는다. 여섯 자 길이에 다섯 자 넓이인 듯한 이 그림 한 개가 그리 과중한 짐은 아니련만 그의 힘에는 헐치가 않은 모양이다. 피와 땀을 정성껏 부어 담은 그 그림에의 생명이 그렇게도 지게꾼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일까?

 

 

어쩐지 그 지게꾼의 느끼는 무거움은 한 달, 아니 한 해도, 이태도 넘어 드렸을지 모를 그 작자의 힘의 표현일 것만 같게도 생각이 든다.

 

 

“역작(力作)이 아마 저렇게 되는 수도 있을 걸…?”

 

 

“어서 가요.”

 

 

같이 가던 비석(飛石)이 여기엔 대구(對句)도 없이 옷자락을 끈다.

 

 

그런 것에 눈을 팔며 군말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목적한 길이나 발락발락 어서 가자는 재촉이다.

 

 

사실 지금 우리는 하나같이 뽑혀서 장내(場內)에 진열(陣烈)되어 있을 그 작품에 눈 담고 떠난 길이다. 그까짓 지게 위의 신세를 면치 못한 그 그림에 발을 멈추고 기웃거리기도 실인즉 싱거운 일이다. 미련을 느낄 까닭도 없이 지게는 내려가는 대로 뒤에 두고 우리는 우리대로 전람회를 향하여 걸어 올라갔다.

 

 

여기에 문득,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그것은 최서해(崔曙海)의 단편 <탈출기(脫出記)>였다.

 

 

서해(曙海)<고국(故國)>이 《조선문단》에 추천을 받을 때 <탈출기>도 같이 들어와 같은 선자(選者)의 눈에 거침을 받았으나 <고국>을 뛰어넘지 못하고 선외가작(選外佳作)이라는 쪽지가 붙어 다만 <탈출기>라는 제목 석 자가 다른 투고자들의 그것과 같이 해지(該誌) 여백(餘白)을 채우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때 작자인 서해(曙海)는 여기에 불만이 있었던지 없었던지 그 후 그로부터 이렇단 이야기 한마디 없이 고인이 되었으니, 이젠 영원히 알 길이 없으나 어쨌든 작자로서는 그 <탈출기>를 차마 그대로 버리기는 아까웠던 모양이다. ()는 그 후 해지(該誌) 기자로 입사가 되면서 곧 <탈출기>를 해 지상(該誌上) 발표하였다.

 

 

놀라운 것은, 그 결과였다. 당시의 문단은 이 <탈출기>를 가지고 얼마나 떠들어 내었던고? 아니 지금까지도 서해(曙海)를 말할 때에는 누구를 물론하고 이 <탈출기>를 그의 대표작으로 내세우기를 꺼리지 않는다.

 

 

그러나 ‘당선’, ‘입선’의 두 관문을 다 무시하고 최고의 입선 규정으로 영예의 ‘추천’을 받았던 <고국>은 그 당시의 반향(反響)도 없었거니와, 그러기에 오늘껏 그것이 그의 작품이었던지 아는 이조차도 드물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니 문득 그 지게 위의 작품이 다시금 눈앞에 나타나며 그 작품을 이제 작가가 받을 때의 그 작자의 심경이 무척 알고 싶어진다. 자기의 예술적 기능 부족으로서의 낙선이라, 그저 부끄러움에 그 작품이 다시 거들떠보기도 싫게 머리가 숙을 것인가? 혹은 심사원의 감상안(鑑賞眼)을 여지없이 비웃음으로 자기 예술적 경기에 그저 그대로 태연히 만족이 되어, 그 작품이 의연히 제대로 사랑스러울 것인가.

 

 

 


 

 

 

하루는 어떤 벗으로부터 자친(慈親)이 회갑이니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하루저녁 이야기나 하자는 청을 받았다. 그 벗은 죽마의 고우일 뿐더러 벗의 자친 또한 나를 퍽이나 사랑하여 주시는 이로, 나는 반갑게 그러마고 승낙을 하였다.

 

 

그리고는 같은 청을 받은 역시 동향 친구인 한 사람의 동무와 같이 그 시각에 대여 가기로 하고 우리는 우선 진고개 백화점으로 향하여 나섰다. 이 갑파(甲婆)에게 무슨 기념이 될 만한 그러한 물건이 없을까 그것을 물색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백화점을 두루 돌아가며 찾아보아야 눈에 띄는 그럴듯한 물건이 없었다. 과자나 쟁반 같은 것은 어떠냐는 동무의 의견도 있었으나, 그런 것들은 그저 빈손이 뭣하여 들고 가는 보통 인사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어서 마음이 내키지를 않아 다시 한 바퀴 물색을 하여 볼까 하는데 눈을 두리번거리던 동무는 별안간 좋은 것이 눈에 띄었다고, 그리고 그것이면 의의만점(意義滿點)이라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질을 하기에 보니 그의 손가락은 과즙류의 진열 속에 포도주병을 가리키고 있다.

 

 

포도주 나도 그것이 그럴듯이 생각되었다. 이러한 축의(祝意)에는 척 떠오르는 것이 술이긴 하였으나, 여인에게는 그것이 합당하지를 않아 망설이다 못해 무슨 물건으로라는 생각만에 헤매던 나는 술은 술이면서도 알콜 성분이 적어 술을 전연(全然)히 마실 줄 모르는 여인네라도 몇 잔간은 연거푸 마셔도 괜찮을 정도의 포도주라면, 그리하여 그것으로 축배를 드리는 것이 무엇보다 의의가 있는 일 같아, 나도 두말없이 그 포도주에 동의하고 점원에게 그것을 달라 명하여 한 병씩 옆에 끼고 벗을 찾아갔다.

 

 

그러나 좌석은 우리로 하여금 그 자리로 곧 축배를 드리게 되지 못해 기회만을 엿보며 그저 술을 먹고 있었다. 최고 오륙배(五六杯)면 족한 내 주량이었건만 즐거운 이날을 다 같이 얼큰히 취해서 즐겁게 노는 것이 이 모임이라 참석을 안 했으면 모르거니와 한 이상에는 아니 먹을 수 없었고, 그렇지 않은지라 내 마음도 즐거워 사양 없이 잔을 들게 되니 약한 내 주량은 그만 남보다 먼저 취하게 되어 축배 드리기를 잊는 무례를 범하고 돌아왔다.

 

 

이것을 나는 그 이튿날에야 깨닫고 벗에게 예를 잃은 것보다 내 마음이 지극히 섭섭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몇 달을 두고 잊혀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하루는 그때 그 좌석에서 같이 잔을 나누던 한 친구를 만나 그때 그 포도주는 군()이 가지고 갔던 것이냐고 하기에 그렇다고 대답을 하였더니 이 친구 대답 끝에 하는 말이 그날 내가 돌아간 후에도 아직 덜 취한 사람들은 그대로 앉아서 술을 계속하다가 포도주를 가져온 사람이 있으니 별미로 그것을 한 잔씩 하자는 누구인가의 제의로 주인은 포도주병을 들여다 뚜껑을 그것을 떼고 잔마다 돌아가며 한잔씩 가득 부어 놓고 권하였다 한다. 그러나 좌석은 잔을 들어 입에 댔다가는 포도주의 그 이상한 맛에 다시 잔들을 놓고는 의심쩍어 차마 삼키지를 못하고 상()귀에 뱉어 놓기를 일제히 하면서 서로 그 이상한 맛을 따져 물으니 그저 신맛 한 가지밖에 모르겠다는 것이 누구의 입에서나 일치하게 나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포도주가 썩은 것은 아닌가 하여 병엣것을 큰 그릇에다 쏟아서 검사를 하여 보았더니 그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로 판명이 되는 바람에 ‘애―에―’하고 들 돌려 놓으니 건넌방에 모여 앉았던 근처 집 여인네들이 “우리 집에 초가 없더니 우리 집에 초가 없더니”해서 모두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다. 점원은 필시 포도주를 초로 잘못 바꾸어 싸 주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그러지 않아도 예를 잃어 미안한데 뜻도 않았던 이러한 미안까지 이중의 미안을 겹쳐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하니 그때 만일 그 좌석이 나로 하여금 그 갑파(甲婆)에게 축배를 드릴 만한 여유를 주었으면 얼마나 나는 무안하였을까 하니, 그리고 그것은 축배를 잊음으로 잃은 예보다 얼마나 더한 무례였을까 하니 취중에 잊어버린 예가 오히려 다행하기 짝이 없는 일같이 생각도 되었다.

 

 

그러니, 이제 바라고 싶은 것은 다만 그 초가 포도주 이상의 축의(祝意)를 가진 성분이 세상 사람 모르게라도 지니고 있었으면 하는 것이나, 그것이 안타까운 억지임을 다시금 깨달을 땐, 그저 세상사란 묘하게도 된다는 한탄밖에 더 해 볼 것이 없다.

 

 

 


 

 

 

길을 묻기운다. 길을 가다가도, 정전지대(定全地帶)에 섰다가도 나는 흔히 시골 사람에게 길을 묻기운다. 주위에 사람은 많건만 시골 사람은 두리번두리번 사람을 살피어 물색을 하다가는 내 앞으로 와서 나더러 길을 가르쳐 달란다.

 

 

이 시골 사람들이 하고 많은 사람 가운데서 하필 왜 나를 쫓아와 붙들고 길을 가르쳐 달라는지 나는 길을 묻기울 때마다 이 시골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내 자신의 인물됨이 무척 알고 싶어진다.

 

 

“자기보다 낮춰 보여서?”

 

 

“시골 사람처럼 보여서?”

 

 

“겸손하게 보여서?”

 

 

그 이유는 분명히 셋 가운데 어느 하나이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면 이 셋 가운데 그 어느 것이 그들에게 보이는 나인 것일까?

 

 

자기보다 낮춰 보여서―

 

 

글쎄 그렇게 내가 낮춰 보일까. 키가 작으니 위풍이 없다. 위풍이 없으면 초라하게 보이는 법이다. 초라한 사람을 대하면 자기가 잘난 것 같아, 어깨가 자연히 올라가게 되는 것이 보통 사람의 심정으로, 이 사람이야 내가 물으면 황공히 가르쳐 주겠지 하는 그런 심리에서가 아닐까.

 

 

그러나 아무리 풍채에 가난한 나이라 해도 그렇게까지 내가 초라하게 보 임직하지는 않고.

 

 

겸손하게 보여서―

 

 

하지만 아무리 거울에 비춰 내 외모를 뜯어보아도 겸손 이자(二子)의 인상을 주기론 되어먹지를 않은 것 같다. 눈초리가 치붙고 광대뼈가 쑥 두드 러졌으니 설령 마음은 그와 반대로 착하다 해도 그렇게 보일 리는 도저히 없을 것이고.

 

 

시골 사람처럼 보여서―

 

 

여기에 나는 어느 정도까지 그들의 마음을 찾고 싶어진다. 도시의 물을 먹고 사노라고는 해도 시골서 나서 시골서 자라난 나이니 시골 때가 벗겨질 리 없고, 또 애써 그 때를 벗으려고도 힘쓰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종로 한복판에 팔을 벌리고 섰다 해도 서울 사람 냄새는 그 어느 한 모에서도 맡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시골 사람의 인상을 받게 되는 데서 같은 시골 사람이라, 어려움성이 적어지는데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것은 다 내 추측에 불과한 것이고, 한 가지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들이 나를 보는 데 있어 내 외모에서 나를 보지 아니하고, 내 마음을 엿뚫어 보는 것 같은 것이 그것이다.

 

 

나는 누구에게서나 길을 묻기우면 알 수 있는 한에서는 데리고 까지 가서라도 찾아 주리라는 친절을 도모할 마음을 굳이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내가 어렸을 때 생소한 곳에서 길을 잃고 길을 묻다가 그들의 불성의에서 찾아야 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밤이 이슥하도록 고생을 해 본 일이 있는 후부터 길만은 친절히 가르쳐 줘야 한다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굳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 후부터 길을 묻기울 때마다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정성을 다하여 인도(引導)를 베풀어 왔고, 또 앞으로도 그것은 그래야 된다는 것이 도덕인 줄을 알고 있는 나이므로 주위에 많은 사람을 두고 하필 나더러 길을 가르쳐 달랄 땐 그 무슨 점으로든지 그러한 내 마음을 엿뚫어 보는 것 같아서 한참이나 그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곤 한다.

 

 

그러나 사람마다 나를 반드시 그렇게 보아 주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기는 하다. 나는 이러한 친절을 베풀다가 단단히 실패한 일이 가까이 한 번 있다.

 

 

밤 열두시가 거의 가까웠을 때다. 견지정(堅志町) 거리를 올라가노라니 어떤 젊은 여인이 청진정(淸進町) ××번지가 어디일가요 하고 묻는다. 일견(一見) 시골서 서울로 요즘 이사를 올라온 모양으로 야시(夜市)에 무엇을 사러 나왔다가 집을 잃은 것이 분명하였다. 그래서 저 여자를 집까지 찾아 줘야 된다는 생각으로 나를 따라오시오 하고 가던 길을 되돌아서 청진정(淸進町) 쪽으로 빠져 들어가니 그 여자는 길만 가르쳐 주지 아니하고 자기를 데리고 가는 것이 필시 내가 무슨 나쁜 마음을 먹고 딴 곳으로 끌고 가는 것은 아닐까 하여 의심이 바짝 동하는 모양이었다. 컴컴한 불 없는 좁은 골목을 들어서기만 하면 그 여자는 몰래 내빼려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고 자꾸만 외딴 골목으로 새곤 한다. 그러나 그가 새는 길이 찾는 번지와는 엄청나게도 반대쪽이므로 그런 걸 빤히 알면서 그대로 두는 수가 없어 내닫는 것을 찾곤하면 겁()이 시퍼렇게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그래, 나는 그 여자가 집을 잃고 헤매는 것보다 내가 데리고 다니는 것이 더욱 그의 마음을 태우는 것 같아 어째든 그 번지는 그리로 가면 안 될 것이고 이쪽으로 찾아보아야 될 것이니 이쪽으로만 골목골목 뒤져 보라 이르고 돌아섰다.

 

 

짐작컨대 이 여자는 그 전에도 집을 잃고 길을 찾다가 한번 혼이 난 경험이 단단히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내 심정을 몰라주는 그 여자가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른다.

 

 

아마 지금도 그 여자는 그날 밤의 그 일을 생각하고는 나를 고약하게만 알고 몸서리를 치고 있을 것이겠지.

 

 

 


 

 

 

알지도 못하는 여인의 뺨을 전차 안에서 갈겼다. 서투른 운전수의 운전에 차체가 모로 쏠리어 비치는 몸을 진정시킨다는 게 그만 어떻게 되었던지 앞에 앉았던 젊은 여인의 뺨에 내 손은 힘차게 부딪치고야 배겨날 수 있었다.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하였으면 태도가 천연하여야 할 것인데, 그렇지를 못하다. 불쾌의 반증일까, 아픔을 못 참아서일까, 그렇지 않으면 사람 많은 데서 맞은 뺨이 부끄러워서일까? 마음이 놓이지를 못하여 다시 한번,

 

 

“과()히 다쳤습니까?”

 

 

그러나 힐끗 쳐다볼 뿐, 말이 없다.

 

 

비로소 깨닫게 하는 것이 전차의 동요를 빙자해서 일부러 내 몸에 손을 댄 것이지? 그리고는 다시 수작을 추근추근하게 붙이는 것이지? 하는 눈치라고 아니 볼 수 없게 그 눈은 분명 나를 흘긴다.

 

 

되어먹은 내 위인이 이러한 오해를 의심 없이 받아 무방하게 그렇게 불량스럽게 보이는 것인가? 그 순간 나는 내 외모를 마음속으로 가리가리 뜯어보며 지극히 섭섭함을 금치 못했다.

 

 

그것이 공교히 뺨이었고, 그리고 부딪침이 좀 세기에 그러지 이러한 일은 전차 안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또 얼마든지 목도해 오는 사실로 고의로서의 행동이 아닌 이상, 피차에 관대한 마음으로 서로 대해 주는 것이 승객의 도덕일 것임은 이 여인도 응당 모를 것이 아니건만 단지 상대자가 동성이 아니고 이성이라는 데서 승객으로서의 도덕적 아량에 그렇게 인색하여야 함으로 나는 단연히 오해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언제인가 한 번은 또 그것이 아마 작년 봄인 듯싶다. 어떤 벗과 같이 광화문통 큰 거리를 추어 오르다가 문득 보니 도청 곁에 만개한 앵화(櫻花)가 저도 모르게 봄의 흥취를 돋우어,

 

 

“유녹화홍춘이색(柳綠化紅春二色), 버들 푸르고, 꽃 붉으니 봄은 두 빛이더라.”

 

 

하고, 고인의 시 한 절을 입 밖에 내고 새겨 보았더니 우리 앞으로 걸어가던 한 젊은 여인이 힐끗 뒤돌아보고는 걸음을 빨리한다. 그 연인은 필시 그 시구를 자기에게 두고 들으라는 듯이 읊은 줄로 알았던 모양이다.

 

 

이러한 경우에 만일 그 여인이 그러면? 하고 돌아서 나더러 어쩌자는 게냐고 대들었던들, 나의 솔직한 변명이 족히 그 여인의 오해를 풀어 주었을 것일까? 백 번 말해도 곧이는 아니 들었으리라 짐작한다.

 

 

이성 간에는 묘하게도 오해를 이렇게 사게 된다. 그리하여 오해를 가지는 이론 자기가 잘못 하는 그대로 언제든지 그렇게 그 사람의 존재가 인식에 남아 있을 것이니 오해를 받는 이로선 이렇게도 섭섭할 데가 없다. 어찌하여 이성이 이성을 보는 눈은 그렇게도 정직하지 못한 것인가?

 

 

하긴 전차의 만원을 핑계로 모르는 체 창밖을 억지로 내다보게 만드는 괴로운 한 순간을 여자들에게 주는 그러한 불량배도 없지 않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도 가만히 보면 점잖은 사람이 별로 없음을 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그러리라고 믿어지지 않는 사람도 젊은 여자만 보면 힐끗 한 번 눈을 치떠 보고야 만다. 그 보는 법이 또한 묘하다. 앞뒤에 거리낄 사람이 없이 혼자일 때에는 대담하기 짝이 없다. 그 여자가 부끄러워 외면을 하건 말건 자기 볼 대로는 마음대로 훑어 본다. 그리고 어성버성한 동료 간으로 같이 동반이 되었을 땐, 서로들 여간 점잖은 것이 아니다. 자기 인격을 낮게 보이지 않으려고 옆으로 여자가 지나가기나 하느냐는 듯이 오히려 눈이 마주칠까 두렵게 점잖다. 그러나 허물없이 터놓고 지나는 벗으로 동반이 되었을 땐 피차에 하는 노릇이 되어서 그런지 혼자일 때보다 그것은 좀 더 대담하게 됨을 본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기 멋대로의 해석에 고집을 일률적으로 갖게 된다는 것은 그리하여 멋대로의 고집에서 영원한 오해 속에 산다는 것은 오해를 받는 편보다 하는 편이 좀 더 생활의 가치를 잃으며 살게 되는 것이 된다. 나는 오해를 받으므로 단지 마음이 좀 섭섭할 따름이나 오해를 하는 그 여자들은 확실히 참되게 살아야 빛날 생활의 그 한 부분을 영원히 속은 것이다.

 

 

여기에 나는 같은 과실을 범하고도 지극한 감격 속에 생활이 살쪄보는 한 순간을 가져 본 때가 또 있다.

 

 

노량진행의 전차를 타고 황금정(黃金町)을 지나다가 이번은 차체의 동요에서도 아니고 표를 사려 호주머니 속에서 돈을 꺼내다가 팔고비로 뒤에 앉았던 여인의 눈을 다쳤다.

 

 

“핫!”

 

 

하는 소리와 같이 팔고비에 맞히는 감촉이 있기에 돌아다보니 퍼머넌트에 핸드백을 옆에 낀 한 젊은 여자의 손은 왼쪽 눈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아이 머 괜찮아요.”

 

 

여자는 눈을 대었던 손을 떼고 미소로 인사를 받는다. 그리고는 천연한 안색을 가지려고 고개를 드나, 눈은 심히 쓰린 모양으로 뜨랴뜨랴 못 뜨고 다시 손이 눈으로 간다. 그러면서도 어디까지든지 낯빛을 화순(和順)이 가지려고 애를 쓰는 빛이 드러나는 것은 분명히 내가 미안하여할 것을 염려하는 어이넓은 마음의 표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눈의 쓰림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나를 보고는 손을 떼였다가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대이고 대이고 한다.

 

 

“과히 다쳤나 봅니다.”

 

 

“아니 과()치 않아요. 이제 나을 거예요.”

 

 

하고 웃으며 손을 떼는데 보니 눈물에 젖은 눈알이 빨갛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예상 외로 심한 듯싶었다.

 

 

여자는 세브란스병원 앞 정류장에서 내린다. 내려선 그때에야 핸드백 속에서 수건을 들어내어 눈물을 씻고, 전선주를 지나 또 거울을 들어내 제 눈을 비추어 보며 제 마음대로의 행동을 가진다. 차 안에선 사람이 많은 데 부끄러움을 꺼렸던 것이 아니라, 그 다침이 나로 하여금 헐한 것처럼 보이려고 그러한 행동을 일절 사양했음에 틀림없었다.

 

 

그 아름다운 마음씨―그 마음씨는 그 순간 내 마음속에 깊이 무젖어 들며 이제껏 두고두고 생각게 하여 생활의 살이 된다.

 

 

나는 그 여자에게 괴로움을 줌으로 생활에의 한 점의 살을 얻었다. 제 자신을 속지 않으려는 그 여자의 진지한 생활의 표현은 이렇게 내 생활에까지 빛이 되는 것이다.

 

 

뺨을 맞은 여자와, 눈을 다친 여자, 그 여자들은 꼭같은 나의 과실에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성을 보는 눈은 어이 그리 괴롭지 못하던고?

 

 

 


 

 

 

구두 수선을 주었더니 뒤축에다가 어지간히는 큰 징을 한 개씩 박아 놓았다. 보기가 흉해서 빼어 버리라고 하였더니, 그런 징이래야 한동안 신게 되고, 무엇이 어쩌구 하며 수다를 피는 소리가 듣기 싫어, 그대로 신기는 신었으나, 점잖지 못하게 저벅저벅 그 징이 땅바닥에 부딪치는 금속성 소리가 심히 귀맛에 역했다. 더욱이 시멘트 포도(鋪道)의 단단한 바닥에 부딪쳐 낼 때의 그 음향이란 정말 질색이었다. 또그닥또그닥, 이건 흡사 사람은 아닌 말발굽 소리다.

 

 

어느 날 초어스름이었다. 좀 바쁜 일이 있어 창경원 곁 담을 끼고 걸어 내려오느라니까 앞에서 걸어가던 이십 내외의 어떤 한 젊은 여자가 이 이상하게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에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 또그닥 소리의 주인공을 물색하고 나더니 별안간 걸음이 빨라진다.

 

 

그러는 걸 나는 그저 그러는가 보다 하고 내가 걸어야 할 길만 그대로 걷고 있었더니, 얼마쯤 가다가 이 여자는 또 뒤를 한 번 힐끗 돌아다본다. 그리고 자기와 나와의 거리가 불과 지척 사이임을 알고는 빨라지는 걸음이 보통이 아니었다. 뛰다 싶은 걸음으로 치맛귀가 웅이하게 내닫는다. 나의 그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는 분명 자기를 위협하느라고 일부러 그렇게 따악 딱 땅바닥을 박아내며 걷는 줄로만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여자더러 내 구두 소리는 그건 자연이요. 고의가 아니니 안심하라고 일러 드릴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어서 가야 할 길을 아니 갈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나는 그 순간 좀더 걸음을 빨리 하여 이 여자를 뒤로 떨어트림으로 공포에의 안심을 주려고 한층 더 걸음에 박차를 가했더니, 그럴 게 아니었다. 도리어 이것이 이 여자로 하여금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내 구두 소리가 또그닥또그닥, 좀 더 빨라지자 이에 호응하여 또각또각, 굽 높은 뒤축이 어쩔 바를 모르고 걸음과 싸우며 유난히도 몸을 일어내는 그 분주함이란 있는 마력은 다 내 보는 동작에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또그닥또그닥, 또각또각, 한참 석양 노을이 내려 비치기 시작하는 인적 드문 포도 위에서 이 두 음향의 속 모르는 싸움은 자못 그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나는 이 여자의 뒤를 거의 다 따랐던 것이다. 2, 3보만 더 내어디디면 앞으로 나서게 될 그럴 계제였다. 그러나 이 여자 역시 힘을 다하는 걸음이었다. 2, 3보라는 것도 그리 용이히 따라지지 않았다. 한참 내 발부리에도 풍진이 일었는데, 거기서 이 여자는 뚫어진 옆 골목으로 살짝 빠져 들어선다. 다행한 일이었다. 한숨이 나간다. 이 여자도 한숨이 나갔을 것이다. 기웃해 보니 기다랗게 내 뚫린 골목으로 이 여자는 휭하니 내닫는다. 이 골목 안이 저의 집인지, 혹은 나를 피하느라고 빠져 들어갔는지 그것은 알 바 없으나, 나로선 이 여자가 나를 불량배로 영원히 알고 있을 것임이 서글픈 일이다.

 

 

여자는 왜 그리 남자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여자를 대하자면 남자는 구두 소리에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가져야 점잖다는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라면 이건 이성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생각을 하며 나는 그 다음으로 그 구두징을 뽑아 버렸거니와 살아가노라면 별한 데다가 다 신경을 써 가며 살아야 되는 것이 사람임을 알았다.

 

 

 


 

 

 

<선심 후심(先心後心)>

 

서대문 우편국 앞에서였다.

 

 

커다란 보퉁이를 가지고 전차에서 내린 한 노파가 무거운 짐이라, 혼자로서는 일 수가 없는 모양으로 가슴에다가 두 손으로 잔뜩 받쳐 안은 채 전차 선로를 건너서더니,

 

 

“미안합니다만 이 짐을 좀 받아 이어 주세요.”

 

 

그러마는 내 승낙도 얻기 전에 노파는 그 짐을 내 가슴에 내어나 던지듯이 안긴다.

 

 

나는 말없이 짐을 받아서 꺼꾸부둥하고 머리를 내미는 노파의 머리 위에 들어서 얹었다.

 

 

“아이 신세스럽소.”

 

 

인사와 같이 허리를 펴다가 그 짐이 닿았던 내 외투자락에 무언지 허연 가루가 뽀얗게 묻는 것을 노파가 보았다.

 

 

“아이구 옷을 버려서 어쩌나!”

 

 

장갑 낀 손으로 털어 보고 문질러 보고 그리고 그 무거운 짐에 눌린 머리를 두 번인지 세 번인지 숙여 가며 감사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을 거듭 표하고 간다.

 

 

나는 우편국으로 들어가 한 이십 분 가량이나 그러한 시간을 허비하여 볼 일을 보고 벗을 찾아 마포 쪽을 향하여 죽첨정(竹添町)의 상가를 끼고 걸어가고 있었다. 풍전아파트 채 미치지 못해서 복술(卜術)쟁이가 점책을 펴 놓고 앉은 가로수 아래 웬일인지 사람이 한 이십여 명이나 원을 그리고 죽 둘러섰다. 기웃해 보니 아까 그 노파가 사람 성() 가운데서 무언지 볼 부은 소리로 흥분이 되어 지껄인다.

 

 

“―글쎄 내가 이제 개명 앞에서 그 웬 양복쟁이 녀석더러 이 보퉁이를 좀 받아 이어 달라고 했더니 그 밖에야 어느 누가 이 보퉁이에 손이나 대여 본 일이 있었기….”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 노파가 여기서 나를 만난다면 잠잠히 그대로 있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얼른 발길을 돌려 모르는 체 휭하니 나 갈 길을 그대로 걸었다.

 

 

노파의 그 말만으로는 무엇을 잃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잃기는 분명 잃은 모양으로 그 의심을 내게다가 두는 것을 보면, 그리고 이런 노상에서 뭇 사람들을 대하야 이렇게 지껄여 내는 것을 보면 기필코 나를 붙들고 물건을 잃었으니 내라고 행악을 할 것임이 빤히 내다보이는 것같이 그게 한껏 우스우면서도 한껏으로는 겁이 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니 믿을 녀석이 세상에 있나 보지? 우라질 녀석 같으니….”

 

 

이어서 들려오는 그 노파의 볼 부은 소리.

 

 

조금 전에 내게 향하여 그렇게도 감사하던 마음이 지금은 극도의 증오에 충만되었다.

 

 

나는 걸어가며 생각을 했다.

 

 

이 노파가 처음에 머리를 숙여 감사하던 그 마음과 지금 증오의 격분에 목에다가 핏대를 돋우는 그 마음과 그 어느 것이 좀더 마음의 밑을 통하여 나왔을 진심이었을 것일까를, 그리고 만일 내가 그 노파를 피하지 아니하고 대하였던들 나는 족히 그 노파와 군중을 설복시킬 재주가 있었을 것일까를….

 

 

<벗>

 

아무리 사람의 진정한 벗이 되려고 해도 진심으로 마음을 주는 벗이 내게는 별로 없다.

 

 

그들의 충고 가운데는 벗으로서의 충고 그것보다 제 자신을 위한 교언 (巧言)이 많음을 늘 지나 본다. 내가 만일 그들에게 우러러 보이는 높은 지위에 있는 존재라면 그들은 얼마나 나를 향하여 자기를 속이며 입술에 기름을 바를 것인고? 차라리 내가 그러한 높은 지위를 못 가진 일개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 그들의 인격을 위하여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사람의 아첨을 받을 때처럼 불쾌한 것은 없다. 말없이 주는 정, 그리고 말로 받기를 원치 않는 정, 그러한 정을 늘 받아 보고 싶고, 또 주고 싶다.

 

 

이러한 사람이 내 시골에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이 다 농사를 짓는 삼십대의 꼭같은 연배로 한 동리에 살았다. 휴가일 때마다 그들은 서로 찾는다. 앉아서는 빙그레 웃는다. 웃는 것이 인사다. 그런 다음엔 계속되는 것이 무언 속에 그저 일이다.

 

 

이따금 빙그레 서로 웃음을 바꾼다. 이 무언의 웃음의 교환 속엔 참뜻이 통하는, 그리하여 스며드는 정이 한껏 만족한 반증이다.

 

 

어느 날 그 한 사람이 근처에서 상량(上樑)하는 구경을 갔다가 그만 올려 놓았던 보가 떨어지는 바람에 다리를 치었다. 심한 상처였다.

 

 

치료하는 월여(月餘) 동안 그의 친지는 누구나 한 번씩 찾아가는 것이 인사였다. 그것으로 친지로서의 인사는 다 되었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짬이 있는 대로 밤이나 낮이나 가리는 법이 없이 무시로 찾아가서는 마주앉는, 그리하여 꾸준히 아픔을 같이하는 다만 한 사람, 그것은 오직 무언의 상대 그였던 것이다.

 

 

<취직>

 

사람을 속이고 싶지는 앞으면서도 속이게 되는 때가 있다.

 

 

내가 모사(某社)에 취직을 할 적이다.

 

 

“무엇이 제일 장기(長技)십니까?”

 

 

“주판놀음만 아니면 무어나 다 할 수 있겠습니다.”

 

 

“할 수 있는 가운데서 말입니다.”

 

 

××()이나 ㅇㅇ부()가 제겐 아마 제일 적당한 부라고 생각 합니다.”

 

 

“글쎄 본시 지원은 그 두 부()에다가 하셨지만 지금은 자리가 어느 부에 나 없으니까요 □□부라도 희망을 하신다면 거긴….”

 

 

“그 부엔 대게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주판은 없습니다.”

 

 

“그럼 그 부에라도 무방하겠습니다.”

 

 

“한번 입사를 하시면 삼 년이고 사 년이고 꾸준히 계속해서 있을 각오로 들어오셔야 됩니다.”

 

 

“네 물론 일만 손에 맞는다면 그럴 각오입니다.”

 

 

“네?”

 

그는 놀란 듯이 눈을 치뜬다.

 

 

“일이 손에 맞으면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두어 번 머리를 주억일 뿐 다시는 말이 없다.

 

 

일이 손에 맞는다면 하고 내 자신 양심으로서의 책임상 솔직히 바친 그 한마디가 다 된 죽에 떨어진 코 같은 위험성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엎지른 물이라 주어 담을 수가 없다. 저쪽에서 다시는 말이 없는 이상, 이쪽에서도 말을 되끄집어내어 변명을 하기도 쑥스러운 일이다.

 

 

그가 말이 없으니 나도 말이 없을 밖에.

 

 

한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알았습니다. 지금 하신 말씀은 요컨대 입사를 해 보아서 일이 손에 맞지 않으면 그만두신다는 말씀이지요?”

 

 

한참 만에 입을 열더니 그 말을 집어 꺼낸다.

 

 

이 기회였다. 나는 여기서 나를 속임으로 나를 살릴 재조(才操)를 입 빨리 부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역시 내 양심은 실컷 뒤재어 본다는 것이 같은 말밖엔 더 입으로 내 보지 못했다.

 

 

“아니올시다. 일이 손에 맞는다면 삼사 년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도 있겠다는 각오로 드린 말씀입니다.”

 

 

“글쎄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나는 선생의 솔직한 마음을 이해는 합니다. 만은 세상사란 그렇지 않으니까 이제 □□부에 부장이 혹 묻거나 해도 그때엔 그런 말씀을 마시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힘껏 하겠다구 그렇게 대답을 하십시오. 취직을 하려는 이가 그렇게 솔직히 이야기를 하면 어디 됩니까.”

 

 

그는 이렇게 후의를 보이는 거짓말을 가르쳐 준다.

 

 

얼마 후, □□부의 부장이 물을 때 나는 가르쳐 준 그대로 그저 네네 하고 대답과 같이 머리를 숙였다.

 

 

“그럼, 내일부터 아홉시에 출근을 하시도록 하시지요.”

  

 

 


 

 

 

이러한 노인이 있었다.

 

 

난 법 없어도 살 사람이라고 저 스스로도 그렇게 자처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동리에서도 누구나 다 그 노인을 그렇게 알았다.

 

 

동년배로 같이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도 그에게선 법 밖에 나서 사리(私利)라든가 그런 데 탐내는 눈치를 조금도 본 일이 없다고 했다.

 

 

더욱이 그 노인이 조밭에 닭 보는 것이란 유명한 것이었다. 닭이 자기네 밭에 한 번씩 들어가 다 익은 조를 녹여내는 것을 보고도 닭 임자가 보면 미안해할까 보아 닭을 쫓는다는 게 큰 소리 한 번 지르지 아니하고 돌팔매한 번 들어 보는 일 없이 그저 “쉬―쉬―”하고 이랑마다 드나들며 닭을 몰아내는 것이다.

 

 

이 한 가지만으로 미루어 보아도 그 노인의 마음자리는 가히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듣지 않는 마을의 고집쟁이들도 이 노인만은 믿었다.

 

 

어느 해 여름, 그 노인이 부치는 밭 가까운 어떤 집에서 하루 닭이 두 마리나 없어졌다고 하면서 이는 필시 족제비의 소위(所爲)라고 떠들었다.

 

 

이 소리를 들은, 역시 그 노인네 밭과 연접해서 닭을 보는 어떤 아이가 하는 말이 아무개네 노인이 조밭에 닭이 들어간 것을 보더니 돌팔매질을 하고는 닭이 맞아 죽으니까 옷자락 앞섶에 감추어서 산으로 가져다가 던지는 걸 보았는데 닭 없어지는 게 그게 다 그 노인의 짓 같다고 했다.

 

 

그러나 마을의 누구도 그 아이의 말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자기가 닭을 보면서 닭을 어떻게 했달까 겁이 나서 공연히 노인을 걸어대 가지고 발뺌을 하는 것이라고들 했다. 닭을 잃은 집에서도 그건 그저 족제비 장난이라고 족제비 함정을 짜 놓고 족제비를 잡으려고만 애를 썼다.

 

 

하지만 그 해 여름이 지나고 가을철이 접어들어도 닭은 여전히 없어지고 족제비는 한 마리도 함정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비로소 닭 주인은 의심을 품고 하루는 닭 보는 노인을 감시했다. 그러나 돌아가는 말대로 노인은 언제나 마찬가지로 그저 닭채를 내두르며 “쉬―쉬―”하고 이 이랑 저 이랑 닭을 쫓아다니며 몰아낼 뿐, 돌 같은 것 한 번 손에 드는 걸 종일토록 보지 못했다.

 

 

“그러면 그렇지 그 노인이 남의 닭을 때려 잡으려고!”

 

 

중얼거리며 완전히 의심을 풀고 돌아왔다.

 

 

노인은 군자(君子)대로 여전히 행세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 반면에 닭에 대한 의심은 그적엔 이 아이에게로 돌려 몰리게 되었다.

 

 

“그 자식 거 제가 닭을 잡아다가 팔아먹고 하는 사설이 분명해!”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에 그 아이는 자기의 말이 서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그 얼마나 하였을까. 아니 그 곡해(曲解)에의 안타까움은….

 

 

나는 이러한 생각을 해 보고는 사실까지를 무시하게 되는 믿음의 힘, 그 힘의 위대한 데 문득 놀라곤 한다.

 

 

 


 

 

소학교도 나오지 못한 아내를 가진 친구가 있다.

 

 

무식하면 첩경 그렇게 되기 쉬울 것이거니와 소중히 하여야 할 것과 헐하게 하여야 할 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 연중(然中)에도 질색이라고 한다.

 

 

편지 같은 것이 문간에 떨어져도 그게 광고와 분간이 가지 못해서 혼동이 되기 때문에 중요 서류를 한 번은 분실하였기에 다음부턴 광고구 편지구 문간에 떨어진 종이쪽이면 무엇이든지 주어다가 애들의 손이 가지 않는 것에 간직해 두라고 일렀더니, 그 이튿날의 정성이 가관이더란다. 의장 설합을 통으로 하나 내어선 그걸 편지를 모으는 그릇으로 쓰는 모양으로, 저녁에 회사에서 돌아오니,

 

 

“이게 다 오늘 온 거예요.”

 

 

하며 뺄함 채로 빼어 내놓는데 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더란다. 편지는 한 장도 없고 보기조차 역한 광고 부스러기가 소중히 보관이 되어 있더라고.

 

 

‘관상을 보러 오라는 광고’

 

 

‘구두 수선 신설 광고’

 

 

‘서커스단 광고’

 

 

“이거 다 아침참에 온 거예요.”

 

 

온 시각까지 일러주는 정성이었으나, 입맛이 써서 아무 말도 아니하고 한숨과 같이 돌아앉으니 아내는 무슨 또 실수나 한 줄 알고,

 

 

“이것밖엔 온 게 없어서요. 저녁엔 한 장도 없구요.”

 

 

하고 오늘은 여간 소중히 간수한 것이 아닌데 ― 하는 태도로 자신 있게 정색을 하더란다.

 

 

“이런 무식엔 참….”

 

 

하고 그는 머리를 주억거렸다.

 

 

“이혼해야 쓰겠군 그래?”

 

 

농을 부쳤더니,

 

 

“아아니 그야 될 말인가. 무식하긴 해두 그 아름다운 심덕이 그까짓 유식 볼 줴지르네.”

 

 

한다.

 

 

“그래 그게 이충기대(異充其代)는 되는 셈인가?”

 

 

“되구두 남지. 글쎄 이웃에서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군 집사람뿐이라면 더 할 말이 없지 않은가.”

 

 

“괜히 이혼할 차비가 되지 못하니까 그런 자위라도 가져 보는 것이겠지 뭘 그래.”

 

 

“참 젊었을 땐 자위책으로 참고 견딜 그 무슨 미점(美點)이 없을까 그런 걸 찾아보려고 애를 써 보았네만은 뭐 그게 자연 나타나며 마음을 붙들더군 그래. 사람이란 결국 심성이 무던한 데 있는 것 같아, 그저 그게 마음을 사거든. 이 이웃에서 내 아는 가운데선 보통학교 맛이나 만은 못 본 아내를 가진 이가 없지. 그러나 이거 보게, 이웃 늙은이들이 나보구 하는 말이 아 선생은 어떻게 그렇게 심덕이 무던한 부인을 맞었누? 게다가 못 하는 일이 없구 침공(針工)은 좀 잘하는 것 말이지. 그것도 아마 다 선생 복이신가 봐 하고 이렇게 인사는 해두, 원 아무개 부인은 무식해서… 하고 아내나 나를 헐려고 하는 말은 내 여지껏 들어 본 일이 없으니 사실은 소중한 아내일세. 그렇지 않으면 실수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 난 그저 그 관상 광고니 구두 수선 광고니 하는 걸 무슨 중요한 서신인 것처럼 간직했다가 내어놓은 것이 우스워서 해 본 말이지―.”

 

 


 

 

전차를 타면 자리에 앉기를 그리 즐기지 않는 나이었건만 그날은 몸이 좀 피곤해서 하차할 거리도 멀고 하여 자리를 엿보아 앉았다.

 

 

그러나 일단 앉고 보니 뉘 집 심부름아이인 듯한 열셋이나 그렇게 밖에는 안 되어 보일 계집애 하나가 무엇인지 꽤 무거워 보이는 보퉁이를 조심히 두 손으로 받쳐 가슴에다가 안고 내 옆에 서서 심히 거북해한다. 짐은 놓고서 있으면 그런 거북함만은 없을 것인데 그대로 들고만 서 있을 차빌 하는 걸 보면 필시 아무 데나 막 놓아서는 안 될 무슨 그런 중요한 것이 들어 있음이 틀림없었다.

 

 

“너 여기 앉고 그 보퉁이는 무릎 위에다 놓아라.”

 

 

보다 못해 나는 일어서며 그 계집애에게 자리를 권했다.

 

 

“아니에요, 어서 앉으세요.”

 

 

계집애는 그럴 수가 어디 있느냐는 듯이 힘있게 몸을 흔들어 보인다.

 

 

“어서 앉아라 무거운데.”

 

 

“괜찮아요 전. 어서 선생님 앉으세요.”

 

 

“어서 네가 앉아.”

 

 

“아니에요.”

 

 

“앉으래도.”

 

 

계집애는 곧장 사양을 하면서 해몰해몰 웃기만 한다.

 

 

하는 양이 아무리 해도 그 계집애는 내게 대한 미안을 무릅쓰고 그 자리에 앉을 예를 잃지 않으려고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일단 일어서 권하던 나이니 그 계집애가 앉지 않는다고 해서 나 또한 그 자리에 다시 밑을 댈 수는 없었다.

 

 

“어서 앉아. 뭐 미안해서 그러니?”

 

 

그냥 권하여 보는 것이었으나 계집애는 여전히

 

 

“어서 앉으세요, 선생님.”

 

 

하고 고집이다.

 

 

서로 이렇게 자리를 사양하는 판인데 새까만 오버 자락이 내 옆 좁은 틈을 비비고 뚫더니 그 자리에다가 커다란 엉덩이를 쑥 들이댄다. 보니 바로 우리 옆에서 처음부터 우리들의 하는 이야기를 흥미가 있는 듯이 듣고 있던 그 신사다. 나도 그 계집애도 다 그 자리에 앉지를 않고 비워 둘진댄, 누구든지 그 자리에 앉음으로 피로를 푸는 것이 마땅한 일이기는 하나 이 자리는 보통 남아 있는 그런 자리와는 성질이 좀 다른 자리임을 안다면 반드시 사양의 여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자리를 빼앗겨서가 아니라 그 예의에 눈 어두운 소행이 실로 불쾌했다. 숭편치 않는 눈이 떠진다. 그 계집애의 눈도 역시 메밀 알이 되어서 힐끗힐끗 신사를 쏘아보다가는 내 편을 향하여 돌린다. 이렇게도 뻔뻔한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는 내 동의를 구하는 눈치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의 자위요, 그 일순 후엔, 나나 계집애나 다 같이 서로 그 자리를 권할 권리를 잃고 어이없이 제각기 바라만 보는 것이 우리들의 예의요 인사였을 뿐인데. 차가 그 다음 정류장에 머무르려 할 즈음,

 

 

“헹이!”

 

 

계집애는 닁큼 뛰며 울상이 된다.

 

 

보니 그의 가슴에는 이제껏 안고 있던 보퉁이가 없다. 떨어뜨린 것이다.

 

 

하얀 보 밖으로는 걸쭉한 물이 스며 나오기 시작한다.

 

 

계집애는 떨어뜨린 보를 다시 주워 들으려고도 아니하고 여전히 울상이 된 채 그것만 한심하게 내려다만 보고 있다.

 

 

“뭔데 깨졌나 보구나?”

 

 

“계란이에요. 다 깨졌을 걸 어떻게 집으로 들어가요, 욕먹을 텐데!”

 

 

하얀 눈물이 두 눈에서 쑥 나온다.

 

 

가까운 주위의 시선이 다들 이리로 몰린다. 신사의 눈도 분명히 여기에 호기심을 가지고 빗겼다.

 

 

나는 지금도 보는 듯하거니와, 그 신사의 눈도 다른 주위의 눈들과 같이 능히 깨어진 계란을 바라볼 수 있는 대담성에 놀랐다.

  

 


 

 

 

어느 과자집에서다.

 

 

십칠팔 세의 고학생이 책을 한 아름 안고 들어오더니, 문 안에서부터 차례로 손님 앞에 마다 걸음을 세우고는 모자를 벗고 그리고 예를 하고 책을 쭉 펴 놓고 재학증을 내보이며 판에 박은 듯이

 

 

“고학생입니다. 한 권만 팔아 주세요.”

 

 

하고 애원을 한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응하지 않는다. 나도 응하지 않았다. 볼 만한 책이 없었다. 볼 것 없는 책을 돈 주고 사서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필요 없으니 딴 데 가 보시오.”

 

 

나 역시 남과 같은 말로 응대하는 아량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입맛이 쓴 듯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떡 하고 물러난 학생은 순차(順次)인 내 옆 좌석으로 돌아선다.

 

 

거기엔 스물한둘 가량의 양장한 여인이 열두세 살쯤의 자기 동생인 듯한 그렇게밖에 안 보이는 어린 여자와 마주앉아 아이스크림에다가 생과자를 찍어 먹고 있었다.

 

 

“책이오?”

 

 

하고 그 여인은 학생이 펼쳐 놓은 책은 보려고도 아니하고 고개를 들어 실내를 한 바퀴 쭉 둘러 살피더니,

 

 

“여기 앉아요.”

 

 

하고, 자기 뒤 빈 좌석에 그 학생을 앉히고 불쑥 일어서 과자 열대로 나가더니 먼저 돈을 치르고 아이스크림 한 그릇에, 구리만두 한 개를 손수 가져다 학생 앞에 놓으며,

 

 

“다니기 더울 텐데 좀 요기나 해서 가요, ?”

 

 

앉으라니 멋모르고 앉았다가 이 의외의 환대에 놀라는 듯이 학생은 닁큼 일어서며,

 

 

“아니에요!”

 

 

“어서 앉아요. 앉아서 먹고 책은 다른 데 가서 팔면 되잖아요.”

 

 

좌석의 눈도 둥그래졌다. 십여 인 손님이 하나같이 거절해 오는 이 고학생을 이 젊은 여인이 유독 이렇게도 동정을 베푸는 것이다.

 

 

내 시선도 그리로 쏠렸다. 이 여인이 고학생을 위한 지극히 범속한 용단에 나도 아니 놀랄 수 없었던 것이다.

 

 

구걸하는 거지의 애원에 이것밖에 가진 것이 없다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투르게네프의 그것과는 이건 다르다. 학생은 책을 팔아 주기 원했다. 그리하여 거기서 버는 할인으로 학비를 얻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 줄을 그 여인도 응당 모를 것이 아니련만, 책을 팔아 주지 아니하고 아이스크림을 대접하는 환대를 베푼다. 책도 비싼 것이 아니었다. 대개가 7,80원짜리 만화요, 가장 고가인 듯하게 보이는 것이 120원짜리 <유관순전>이었다. 아이스크림 한 잔에 80, 구리만두 한 개에 30. 그 값이 110원이면 80원짜리 만화 한 권을 팔아 주는 것이 도리어 이로웠다. 학생의원은 원대로 들어주면서도 이로운 책은 아니 팔아 주고 손해를 보면서까지 구태여 아이스크림을 사서 대접하는 이 여인의 심리는 과연 어디 있었던 것일까.

 

 

사서 볼 만한 책이 없으면 아이스크림 대신에 그만한 대가를 현금으로 주는 편이 이 학생으로선 보다 더 긴요할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건 결국 극 고학생을 위한 동정에서라기보다 자기 자신의 향락을 만족시키기 위한 동정에서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밥이 없어 허덕이는 친구에게 단 돈 10원의 청은 무가내하(無可奈何)로 거역하면서도 담배 한 대 술 한 잔은 싫대도 부득부득 권하는 속세인정(俗世人情)에 조금인들 다를 것이 무엇이랴. 동정이라는 것이 흔히 상대방을 위해서보다 자기 자신의 명예나 자존심을 위해서 베풀어지듯이 이 여인의 동정도 이런 예에서 조금도 벗어나는 것이 없는 것 같다.

 

 

그 학생이 아이스크림을 받아서 먹기는 먹으면서도 그 대신에 이것이 현금이었다면 하고 마음 아쉽게 여겼다면 이 여인의 모처럼의 동정은 아무런 의의도 지녀진 것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그 여인이 다시 한 번 더 쳐다보여졌다.

 

  

 


 

 

 

한 사람이 말 세 필을 몬다. 구공탄 스무 상자를 실은 조랑말이다. 그걸 니리니리 연해 세워 놓고는 맨 앞의 말 하나만 고삐를 붙들고 뒤엣 말들은 욕으로 위협을 하여 가며 몬다.

 

 

하루의 일이 지리할 때도 된 석양인 데다 얼었다가 녹은 길은 어지간히 진 것이 아니다. 차바퀴가 푹푹 잠겨서 말들은 그것을 끌어내기에 있는 힘을 다하는 듯이 목들을 내저으며 터벅신다.

 

 

그래도 차부(車夫)는 말의 그 걸음에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 염병을 하다가 자빠질….”

 

 

중얼거리며 돌아서더니 냅다 악 소리를 지른다.

 

 

“야악!”

 

 

뒤의 말이 떨어진 것을 본 것이다.

 

 

악 소리에 이 말은 흠칠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든다. 그리고 분주히 속력을 내 본다. 그것이 아마 제게는 죽어라 하고 있는 힘을 다 내 보는 모양 같았다. 그러니 그 힘이 제대로 꾸준히 계속될 원기가 있을 리 없다. 여전히 앞엣 말을 따르지 못하고 가다가는 떨어진다.

 

 

“야악!”

 

 

“야악!”

 

 

떨어질 때마다 차부는 무섭게 눈알을 흘기며 장작개비를 얼메여 위협을 한다.

 

 

그러나 그저 악 소리를 들을 그때일 뿐, 말의 걸음은 매한양이다.

 

 

픽 돌아서기가 무섭게 장작개비는 말의 가는 잔등을 후려친다. 말은 네 굽을 들었다 놓는다. 타악타악타악 장작개비는 세 번인지 네 번인지가 사정없이 연거푸 같은 자리에 떨어진다. 말은 장작개비가 번쩍 올라갈 때마다 떨어질 그 매의 무서움을 생각하고는 흠칠하고 네 굽을 들곤 한다.

 

 

“아이 가엾어!”

 

“정말이다. 아이 가엾어라아!”

 

 

어깨에 가방을 짊어진 국민학교 6년인 듯한 계집애 둘이 지나가다가 이것을 보고 걸음을 멈춘다.

 

 

말은 눈을 껌벅껌벅하며 말없이 그 매를 순종하고는 다시 걷기를 시작하였으나 이제라고 없는 힘이 생기는 수는 없다. 말의 걸음은 한결같이 차부의 만족을 사지 못했다.

 

 

“야악!”

 

 

장작개비는 다시 말 잔등을 후린다. 말은 인제 네 굽을 들 기력도 없는 듯이 그러나 아픔만은 느낄 수 있는 듯이 그리고 그것을 강잉히 참든 듯이 목을 좌우로 내두른다.

 

 

“야악!”

 

 

장작개비는 또 올라간다.

 

 

“아이 또 때린다아!”

 

 

“사정없는 사람두!”

 

 

계집애들은 말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는 듯이 일제히 낯을 찡그린다. 그리고 한참이나 바라보고 섰더니 한 아이가 다른 한 아이의 팔소매를 끌고 차도로 내려서 그 경을 치는 말의 차바퀴 뒤로 돌아가 붙든다. 차를 밀어 말의 힘을 도와주려는 의사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차부는 항용 있는 애들의 버릇인 매어달려서 끌려오는 그런 장난으로 만 안 것이다.

 

 

“경칠 계집애들이….”

 

 

눈을 부릅뜨고 우뚝 마주선다.

 

 

계집애들은 겁을 집어먹고 어쩔 줄을 모르게 불이 나서 인도로 뛰어오른다. 그리고는 다시는 더 차바퀴에 가 붙을 생념을 내지 못하고 걸어가며 무어라고 저희들끼리 재잘거리다가는 그 말과 말꾼을 둘러 살피곤 한다.

 

 

“야악!”

 

 

별안간 말꾼은 또 소리를 지른다. 애들은 걸음을 멈칫 세우며 눈을 그리로 쏜다. 말꾼의 손에는 그 버리지 못하고 들고 가던 예의 장작개비가 힘있게 번쩍 높이 들여 있음을 보았다. 이것을 보는 순간 저 매가 떨어지면 하는 애처로운 생각은 그 애들로 하여금 말꾼의 그 우직한 눈초리의 두려움도 헤아릴 여지가 없었던 모양이다. 한 아이가 뿌르르 달려 내려가 차바퀴 뒤에 또 가 붙으니 한 아이가 마저 덧달려 간다.

 

 

“이 경칠 계집애들까지 오늘은 또 성화야!”

 

 

“아니에요. 우리는 밀어 줄 테예요.”

 

 

“아니 못 비킬 테냐?”

 

 

차부는 장작을 얼멘 채 성큼 한 발자국 나선다. 애들은 다시 인도로 뛰어 올라온다. 차부는 단단히 애들을 쫓아 버릴 모양으로 인도로 올라서는 그들의 뒤를 연해 따른다. 애들은 한참이나 그냥 뛰다가 몸을 피하여 골목길로 빠져 들어간다.

 

 

이 애들이 그 말의 정경을 보고 다시 골목길을 나와 끝까지 말을 위하여 본의를 다해 싸웠는지 나는 그대로 그 마차의 뒤를 따라오며 그 아름다운 풍경에 끝까지 눈을 머무르고 있을 그럴 시간의 여유가 없어 나 갈대로 갈 길을 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지금도 생각하면 아쉽거니와, 그 어린 소학생들의 참을 수 없어 하는 순진한 마음씨, 그 아름다운 마음씨를 이제껏 잊을 길이 없다. 언제든지 거리에서 구공탄 구루마를 끄는 조랑말을 보기만 하면 그 깜정 두루마기에 책가방을 짊어진 그 어린 소학생들이 보이고 그러한 학생들을 볼 때마다 구공탄 구루마를 끄는 조랑말이 또한 눈앞에 나타나서는 묵은 기억을 되살리곤 한다.

 

 

우직한 차주의 사정없는 그 매, 그 매를 말없이 순종하는 그 말, 그 말의 정경을 차마 그대로는 보지 못하는 티 없는 어린 마음―그것은 분명히 거리에 핀 아름다운 꽃이었다.

 

  


 

 

 

집을 사는 것처럼 곤란한 게 없다.

 

 

무슨 모양이라든가, 허우대가 좋은 그리고 굉장한 집을 택하는 데서가 아니라 실용적인 것을 찾자니 오히려 그런 게 그리 어렵다. 달포를 두고 골라 보았어도 이렇다 눈에 드는 집이 나서질 않는다. 대가는 얼마든지 무작정하고 골라 보았으면 혹 있었을는지 몰라도 내가 견준 칸수의 집으로선 근 백채를 보아 왔어도 모두 그것이 그것 같은 것들이었다.

 

 

본시 내가 있던 집을 판 것도 그 때문이었거니와 사람의 거처를 위하여 지었다는 것보다는 한 개의 상품으로 그저 돈만을 염두에 두고 지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정도의 그러한 집들이었다.

 

 

쓸모라면 그건 살림살이에 따라 각기 다를 것이로되 통풍채광만은 건강에 절대한 조건이므로 주택에는 으레 그것이 따라야 할 요건이요, 하루라도 결해서는 아니 될 물이 또한 그에 못지않은 요건의 하나임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요구한다는 집도 첫째 이 두 조건의 충실에 있었다.

 

 

그러나 통풍과 채광이라는 것은 전연 고려치도 않고 문과 주위는 어찌 되었든 그저 그 일정한 건평 위에 어떻게 하면 다만 한 칸이라도 방을 더 세워 칸수를 늘려 볼까 하는 설계에서 지은 집이라는 것이 보는 집마다 드러나다.

 

 

한 주춧돌 위에다 기둥 둘을 세우고 옆집 벽이 내 집 벽이요 내 집 벽이 옆집 벽이 되는 집과 집이 맞붙어 놓은 집까지 있다. 그러니 남의 집과 남의 집 사이라 뒷창을 내는 수가 없어 창이라고는 다만 출입하는 정면의 그 소위 출입문이라는 것 하나밖에는 내어 놓지를 않았다. 이러한 칸수 배치에 어떻게 우연히 볕이 들게 되는 방이 혹간 한방씩 있게 되고는 일년 열두 달 가야 하루도 볕을 못 보게들 되었다.

 

 

그리고 기둥은 제대로 세우고 지었다고 하는 집들도 그 기둥과 기둥 사이가 불과 일 척 미만이어서 장님 눈 뜨나 감으나 격으로 뒷창을 내었대야 역시 눈흘림이요 볕 한 줄기 바람 한 점 들어올 틈이 없다. 게다가 추녀 끝에는 낙수물받이의 차양을 달아 놓아서 하늘조차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완전하면 볕은 못 들어와도 위험성은 없을 것이, 이건 좌우 두 집의 차양을 그 한복판에다가 달아 놓고 두 집의 낙숫물을 한 곳으로 받아내게 만들었으니 함석의 이음을 땐 납의 힘이 충분히 그 두 집 물의 중량을 받아낼 능력이 모자라서 차양은 이은 짬마다 떨어져 낙숫물이 그 뒷벽과 기둥으로 흘러내려 뒷창을 열고 살피어 보면 뒷벽이 아니 무너진 집이 별로 없고 뒷벽이 무너진 집이면 개개(皆皆) 기둥은 썩었다. 비는 맞고 볕은 못 보고 썩을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뒤가 저렇게 썩었으니 방안에도 물론 이상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방안을 또 기웃해 보면 곰팡내가 코를 찌른다.

 

 

정면으로 보면 아직 칠도 노랗게 그대로 있는 멀쩡한 집들이 이 모양이기에 대체 몇 해나 되었기에 하고 마루로 올라서 용마루의 건축 연대를 살피어 보면 다들 불과 5, 6년 안짝에 지은 집들이다. 그런데도 수명은 다들 앞으로 몇 해가 안 갈 것 같다.

 

 

그래도 이러한 집에 들어서게 되면 남의 집과 벽이 맞붙질 않았다고 복덕방의 기세는 자못 높은 것이었다.

 

 

“이 집은 뒤가 돌았습니다. 아주 시원하죠. 겨울이면 장작도 그 뒤에 한 수레는 들어갑니다.”

 

 

아닌 게 아니라 벽이 맞붙어 옆집 변소가 내 집 안방 벽이 되어 있는 이런 집보다는 아니 나을 수가 없긴 없다.

 

 

땅을 아껴도 분수가 있는 것이지 이렇게도 거처 본위로 되어 있지 않는 집이 들어서는 집마다 거의 다인 것을 보고는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물의 설비가 완전한 집도 별로 없었다. 이러한 유의 집들이면 수도는 으레 없고, 대개가 우물이 아니면 펌프인데 우물이 있다는 집도 위명(爲名)만 우물이지 물들이 여간 바르지 않다. 한 자나 두 자쯤만 더 깊이 파서도 그렇지는 않을 것을 물빛만 보이면 남의 눈을 가릴 수가 있다고 노깡통만을 집어넣어 놓았다. 그리고 펌프라는 것이 또 우습다. 우물도 파지 않고 그대로 땅 위에다가 파이프를 내려 꽂고는 그 옆에다가 하수도 구멍을 내어 놓았다. 그러니 그 펌프물이 완전할 리가 없다. 밑바닥에 저수(貯水)가 없으니 불과 몇 바케쓰에 수량이 끊이고 말 뿐 아니라, 땅 밑바닥을 빨아올리기 때문에 모래가 언제나 그냥 묻어 올라온다.

 

 

그러나 그것도 몇 해만 지나면 하수도의 노깡에 고장이 생겨서 영락없이 그 하수도 물이 우물로 흘러들어 그나마 물이 더럽기 짝이 없이 된다. 그래서 이걸 폐정(廢井)으로 버려두고 물 가난을 보는 집은 오히려 안심이나 되거니와 이런 것을 모르고 그냥 그 물을 음료수로 전과 다름없이 쓰고 있는 집도 없는 것이 아니었으니 실로 보는 바 딱도 한 사정이었다.

 

 

그러나 복덕방은 그저 칭찬이다.

 

 

“우물이나 펌프가 사실은 수돗물보다 낫습니다. 여름에 차고 겨울엔 덥고… 또 물맛이나 좀 좋습니까?”

 

 

복덕방의 말을 신청(信聽)하여서가 아니라, 마땅한 집이 없으니 알고도 사는 수가 없지 않아 있게 된다.

 

 

그러니 보건 조건(保健條件)이 불비한 이런 집에 마음이 가라앉을 리 없다. 기회를 보아서는 다시 팔려고들 한다.

 

 

왜들 자리를 한 곳에 못 붙이고 비용을 들여 가며 집을 싸지고 떠돌아다니는 것일까 하였더니 이제 이러한 것을 알고 보건대 대부분의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볕도 못 보는 지옥 같은 방안에서 기거를 하며 이 불결한 구정물을 먹고 그 집에 들어 사는 사람들은 참으로 가족들의 건강이 아니 근심 될 수 없을 게다. 사람의 일생에 있어 건강에 으뜸가는 복이 없다고 하거늘, 건강이란 조금도 고려치 않고 지은 집들.

 

 

이 집들의 건축주들도 응당 제 손으로 제 집들을 지었으려니 하면 그리하여 그들도 다들 이러한 집들을 쓰고 이러한 방에 들어앉아 이러한 물을 먹고 들 살까 하는 생각이 들며 그들의 살림집들이 은근히 한번씩 보고 싶어진다.

 

 

 


 

 

 

종이에 손을 베였다.

 

 

보던 책을 접어서 책꽂이 위에 던진다는 게 책꽂이 뒤로 넘어가는 것 같아 넘어가기 전에 그것을 붙잡으려 저도 모르게 냅다 나가는 손이 그만 책꽂이 위에 널려져 있던 원고지 조각의 가장자리에 힘껏 부딪쳐 스쳤던 모양이다. 선뜩하기에 보니 장손가락의 둘째 마디 위에 새빨간 피가 비죽이 스미어 나온다. 알알하고 아프다. 마음과 같이 아프다.

 

 

차라리 칼에 베였던들, 그리고 상처가 좀 더 크게 났던들, 마음조차야 이렇게 피를 보는 듯이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칼 장난을 좋아해서 가끔 손을 벤다. 내가 살아오는 40면 가까운 동안 칼로 손을 베어 보기 무릇 수백 회는 넘었으리라 안다. 그러나 그때그때마다 그 상처에의 아픔을 느끼었을 뿐, 마음에 동요를 받아 본 적은 없다.

 

 

그렇던 것이 칼로도 아니고, 종이에 손을 베인 이제, 그리고 그 상처가 겨우 피를 내어도 모를 만치 그렇게 미미한 상처에 지나지 않는 것이건만 오히려 마음은 아프다. 종이에 손을 베다니! 종이보다도 약한 손, 그 손이 내 손임을 깨달을 때, 내 마음은 처량하게 슬펐다.

 

 

내 일찍이 내 손으로 밥을 벌어 먹어 보지 못했다. 선조가 물려준 논밭이 나를 키워 주기 때문에 내 손은 늘 놀고 있어도 족했다. 다만 내 손이 필요했던 것은 펜을 잡기 위한 데 있었을 뿐이다. 실로 나는 이제껏 내 손이 펜을 잡을 줄 알아, 내 마음의 사자가 되어 주는 데만 감사를 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펜이 바른손의 장손가락 끝마디의 왼모에 작은 팥알만한 멍울을 만들어 놓은 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었다. 글 같은 글 한 줄 이미, 써 놓은 것은 없어도 그것을 쓰기 위한 것이 만들어 준 멍울이래서 그 멍울을 나는 내 생명이 담긴 재산과 같이 귀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것은 온갖 불안과 우울까지도 잊게 하는 내 마음의 위안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멍울 한 점만을 가질 수 있는 그 손은 이제 확실히 불안과 우울을 가져다준다. 내 손으로 정복해야 할 그 원고지에 도리어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네가 그 멍울을 자랑만으로 능히 살아 나갈 수가 있느냐 하는 그 무슨 힘찬 훈계와도 같았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내 손은 불쏘시개의 장작 한 개비도 못 팬다. 서울로 이사를 온 후부터는 불쏘시개의 장작 같은 것은 내 손으로 패야 할 사세인데 한 번 그것을 시험하다가 도끼자루에 손이 부르터 본 다음부터는 영 마음이 없다. 그것이 부르터서 튀어지고 또 튀어지고 그렇게 자꾸 단련이 되어서 펜의 단련에 멍울이 장손가락에 들듯 손 전체에 굳은살이 쫙 퍼질 때에야 위안이던 불안은 다시 마음의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련만, 그 장손가락의 멍울을 기르는 동안에 그러할 능력을 이미 빼앗기었으니 전체의 멍울을 길러 보긴 이젠 장히 힘들 일일 것 같다.

 

 

그러나 역시 그 손가락의 멍울에 불안은 있을지언정 그것이 내 생명이기는 하다. 그것에 애착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때, 나라는 존재의 생명은 없다. 나는 그것을 스스로 자처하고도 싶다.

 

 

하지만, 원고지를 정복할 만한 그러한 손을 못 가지고 그 원고지 위에다 생명을 수놓아 보겠다는 데는 원고지가 웃을 노릇 같아, 손을 베인 후부터는 그게 잊히지 아니하고 원고지를 대하기가 두려워진다. 도끼자루에 손이 부르터 본 후부터는 그것을 잡기가 두려워지듯이 그렇게….

  

 


 

 

 

바람이 살랑거리니 바깥보다는 방안이 한결 좋다. 밤의 방안은 더욱이 마음에 든다. 등하(燈下)에 책상을 기대앉으면 마음이 폭 가라앉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연히 사색케 한다. 등화가친(燈火可親)이라는 말이 있거니와 등화(燈火)를 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 겨울밤인 듯싶다.

 

 

저녁을 치르고 일순의 산책이 있은 다음 불을 켜고 고요히 방안에 들어앉으면 내 마음은 항상 무엇에 그렇게 주렸는지 공허한 마음이 저도 모르게 그 무엇인가를 찾기에 바쁘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찾을 수 없는 그 마음이다. 찾아질 리 없다. 허나 그것을 못 찾는 마음은 우울하기 짝이 없다. 나이 인제 사십의 고개턱에 숨이 차게 되었으니 인생의 감상 시절은 지났다고 보아도 좋으련만 내 마음은 무엇을 찾기에 그리 늘 우울한지.

 

 

언제나 나는 내 마음에서 그 무엇인가를 찾다 못 찾으면 그것을 서적에서 찾으려고 애를 쓴다. 그 어떠한 책 속에는 족히 내 공허한 마음을 채워 줄 그러한 무엇이 들어 있을 듯만 싶은 것이다. 그래서 멍하니 앉아서 생각을 더듬다가는 벌떡 일어서 서가로 달리어가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지금 단칸셋방의 객사인 내 집엔 서가(書架)는커녕 책조차 비치한 것이 없다. 좋거나, 나쁘거나 그저 얻을 수 있었던 몇 권의 책이 책상 위에 놓여서 있을 뿐, 마음을 끄는 책이라고는 단 한 권도 없다. , 지극히 책이 그립다.

 

 

고향의 내 서재로 마음을 달린다. 여섯 층으로 된 천정을 찌르는 높다란 서가가 눈앞에 보인다. 거기에 빈틈없이 질서 있게 나란히 책들이 가득 꽂혀 있다. 그러나 그것도 팔아먹고 남은 나머지다. 그것들의 책에 구미가 동할 리는 더군다나 없다.

 

 

나는 또 장 속에 처박아 둔 2, 3의 서가를 연상해 본다. 몹시 마음이 허전하다. 한 번씩 눈을 거쳐는 보았다고 해도 내 마음을 살찌워 준 것이 그것들이었다. 그것이 이제 궁여(窮餘)의 일계(一計)에서 담배연기로 화해 버리고 빈 서가만 남았거니 하니 마음의 공허가 더욱 심절하다. 어쩐지 그 빈 서가는 내 자신인 듯도 싶게 내 마음의 공허함을 느끼듯 공허함을 느끼는 것 같은 것이 알뜰히 걸린다. 그 서가에 가득하던 천여의 부수를 다시는 채워 보지 못할까, 아득한 생각이다. 그 부수를 다시 채우기만 하면 그래도 그 속에는 내 마음의 공허도 채워질 그러한 부분이 있을 듯만 싶은데 이제 그것을 임의로 할 수 있을 여유의 생각조차 맺지 못하니 내 자신은 이젠 아무렇게나 장 속에 던져 둔 서가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며 서글프기 짝이 없다.

 

 

그리하여 영원히 채울 길이 없는 그 서가와 같이 내 마음속에도 티끌과 거미줄만이 쌓이고 끄슬리는 가운데 나날이 낡아 빠지는 것만 같다.

 

 

밤마다 등하에 고요히 앉기만 하면 나는 마음의 공허를 이렇게 느끼고 마음의 구석구석 들어차는 티끌 속에 케케묵어 가는 나라는 인간의 존재를 내다보고는 어이없이 웃어 보곤 한다.

 

 

 


 

 

 

아침 여덟시 치는 소리를 그대로 이불 속에서 무시하고, 한껏 단잠에 취해도 출근에의 초조가 없어 좋다.

 

 

정성을 다하여 마음껏 일에 힘을 들여도 그 성의가 무시되는 데 불쾌함이 없어 좋고, 사사(私事)에 일을 쉬게 되는 주위의 사안(斜眼)에 미안을 느낄 필요가 없어 좋다.

 

 

자식들의 학비에 쪼들려도 실직을 빙자로 없다는 대답이 헐히 나와 좋고, 원고 아니 모이는 걱정, 책이 늦어질 걱정, 기사 쓸 걱정, 검열 걱정, 다 안 해도 좋다.

 

 

나는 이즘 산마(山馬)와 같이 마음이 자유를 행사한다.

 

 

밤이 깊은 줄도 모르게 독서와 사색에 마음껏 잠겼다 늦어진 잠이 이튿날 오정을 넘어도 거리낄 데 없고, 진종일을 거리로 싸다녀도 내 자유를 구속하는 건 오직 ‘고·스톱’밖에 없다.

 

 

한밤 동안 우리 안에 갇히었던 병아리가 오력(五力)을 펴느라고 마음껏 날개를 펴고, 마당이 좁다 춤을 추며 돌아가듯이, 나도 거리가 좁다 활개를 펴고 돌아간다. 이것이 나의 굶주렸던 생에의 욕구이었던가 싶다.

 

 

자유의 아름다움―그것이 한껏 아름다울 때 내 생은 빛나며 있을 것이 아닐까? 비로소 생존에의 영역을 벗어나 생활에의 문을 두드리는 도중에 선 것 같은 감이 조금도 아쉬움 없이 실직에의 위무(慰撫)를 준다.

 

 

더욱이 밤과 자유―나는 이 밤의 자유에 얼마나 주렸던 것인고. 만뢰(萬賴)가 잠든 고요한 밤, 혼자만이 앉아서 주위의 의식 없는 숨소리를 들으며 마음껏 정신을 가라앉히고 책상을 기대어 좌우에 쌓아 놓은 애서(愛書)의 탐독에 자신을 잊는 여유와 자신을 찾는 사색에 이튿날의 늦잠에도 근심을 잊는 자유 그것은 더할 수 없는 나의 행복을 말하는 시간이다.

 

 

읽고 싶은 책에 손이 멎을 여유를 못 가지는 때처럼, 자신을 찾는 마음에 시간의 초조가 방해를 한 때처럼 고민인 것은 없다.

 

 

나는 이제 여기에 자유를 가졌다.

 

 

서적의 유혹에 가난한 지갑귀를 글키우고, 창작에의 유혹에 어찔하도록 사색이 붙들어도 오히려 싫지 않다. 내 마음은 제멋대로 살쪄 볼 욕망에 불붙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침묵이란 결국은 고민의 표백인 것이다.

 

 

그 어떤 비약을 꿈꾸고 자진하여 사색 속에 깊이 침묵을 지키게 된다 하여도 그것이 창조충동의 제어인 점에선 역시 마찬가지의 고민일 것이거늘, 하물며 주위의 사정이 그것을 허치 않음에랴. 작가가 직업을 아니 가져서는 안 되는 때처럼 비극은 없을 것이다. 지난날에 있어서의 나와 직업은 참으로 우울 그것이었고, 고민 그것이었다.

 

 

그래도 다른 것과는 달리 비교적 창작과는 인연이 가까웠다고 볼 수 있는 붓 노름이 직업이었건만 그것이 창조적인 참을 수 없는 그 무슨 충동에서의 그러한 붓이 아니었고 그날이 그날 같은 기계적으로서의 역할에 아니 충실할 수 없는 직업적 책임이 정력에의 소비, 붓끝에의 권태를 아쉬움 없이 가져다 주어 여극(餘隙)에의 이용에도 실로 창작에의 붓은 들리지 않았다.

 

 

이제 직업과 같이 눌리었던 창작에의 만만한 야심―그것은 마치 눌러도 눌러도 기어코 땅속을 뚫고 나와 마침내 아름다운 꽃을 피어내고야 마는 한떨기의 봄풀과 같이 누르려야 누를 수 없는 형세로 해직(解職)조차 기회를 만난 듯이 머리를 들고 일어선다.

 

 

나는 이제 이것을 어느 정도까지 살려 가며 만족해 볼 것인가, 녹슨 붓끝, 사색에의 둔감, 표현에의 치졸은 끝없는 수련을 요해 마지않건만 철없이 서두는 참을 수 없는 충동, 두려운 붓대를, 부끄러운 붓대를 나는 다시 들어야 되나 보다.

 

 

신문사가 깨어져 한가하겠으니 창작을 달라는 잡지 편집자들이 주는 자극, 그대는 나더러 무엇을 쓰기를 요구하는 것인고, 그리고 나는 또 무엇을 쓰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인고, 창작과 제재의 빈곤, 나는 무엇을 써야 되나? 여기에 창조적 고민이 다시금 새롭다.

 

  


 

 

 

억지로 못 할 건 글인가 보다. 테마의 준비만 되면 써질 것 같아도 마음의 안정과 시간의 여유가 없어도 붓은 내키지 않는다. 테마가 확정되고 마음의 안정에 시간의 여유까지 충분히 있어야 붓끝엔 흥이 실린다. 한 센텐스에 같은 부사가 곱잡아 하나만 연달리게 되어도 필흥(筆興)이 죽는 내 성벽(性癖)엔 원고 마감 기일이 박두하면 마음의 초조에 그 테마가 충분히 매만져지질 않는다. 적어도 그 기일을 4, 5일 쯤 앞두고 끝이 날 만한 예정의 시일이 내다보여야 마음이 턱 놓이고 붓이 들린다.

 

 

그러나 이렇게 붓은 들리게 된다 해도 그 진행까지엔 또 하나의 난관이 돌파되어야 하는 것이니, 그것은 처음으로 내어야 할 서두 그것이다. 나에겐 언제나 이 서두 일행(一行) 여하에 그 작품의 성(불성(不成)이 따르게 된다. 서두가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을 시일 관계로 그래도 되겠지 하고 진행을 시키다가는 번번이 실패를 본다. 실로 이 서두 일행에 내용을 살릴 작품의 형식이 결정되는 것이니, 이 서두에 소홀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테마가 결정되고 마음의 안정을 기다려 시간의 여유를 충분히 얻어 놓고도 서두가 흡족히 되어야 그제서야 붓은 일사천리로 내닫게 된다.

 

 

시작이 절반이라는 말이 있지만 나의 창작에 있어선 시작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작만 되면 시간이 허하는 한 쉼이 있다.

 

 

이 서두 일행 때문에 살이 깎인다. 8·15 이후 내가 들었던 붓을 다시 놓고 침묵을 지키기 무릇 몇 해이거니와 구상까지 다 되어 있는 것도 이 서두를 내지 못해 머리 속에서 그대로 썩어나는 게 4, 5개나 된다.

 

 

누군가 글을 비붓이 부탁만 해도 곧 승낙을 하고 잡은 참에 앉아서 4, 50매 내지 100여 매짜리를 꾸려대던 그 옛날 어느 시기를 생각하면 내게도 과거에 이런 시절이 있었나 하리만큼 놀랍게 생각된다. 이것이 글을 무서워할 줄 모르는 소치였는지 모르나 어쨌든 그런 용기만이라도 되살려 찾고 싶은 마음이 문득 나곤 하는 때가 있다.

 

 

이번 《문예》지 창간호가 나에게 그렇게도 간곡히 마감 기일을 연기 하면서까지 창작을 원하는 그 부탁의 성의로 해서라도 어떻게 하나 만들어 보리라 시간이 있는 대로 노력을 해 보았으나 이놈의 서두가 몇 번이고 고쳐 보아도 불만이어서 끝내 이행을 못 하고 이런 잡문으로 색새(塞賽)를 하게 된다.

 

 

구체적인 내용 이야기는 작가의 비밀이라 피하거니와 후암동 개천가 종이 집을 쓰고 사는 그 어떤 부족의 내력을 그려 보려고 처음 서두를 이렇게 내었던 것이다.

 

 

별이 흐른다. 물이 흐른다. 밤이야 깊거나 말거나 별은 별대로 흐르며 눈을 부시고, 물은 물대로 흐르며 귓전을 어지럽힌다.

 

 

그러나 마음이 붙질 않아 찢어 버리고,

 

 

어야 디야아

 

어어야 디야아

 

 

놋대가 물을 세기 시작하자 배는 수면을 미끄러져 나간다.

 

어야 디야아

어야 디야아

 

 

노래 소리가 높아질수록 미끄러지는 속도도 빠르다. 호심으로 호심으로 기어드는 배는

 

 

하고, 써 보다가 또 집어치우고,

 

 

백여 년 동안이나 해마다 가을철이면 진흙으로 뒤바르고 하기를 잊지 않은 바람벽은 시멘트 콘크리트처럼 단단하다. 육십이 장근한 늙은 몸이라고는 해도 힘을 다하는 곡괭이였다. 어깨 너머로 잔뜩 품었다가 냅다 건너 치는데도 ‘텅’하고 소리만이 요란할 뿐, 구멍 하나 제대로 뚫리지 않는다.

 

 

엇취

 

엇취

 

땀을 벌벌 흘리며 초시는 곡괭이를 메었다 건너친다.

 

 

이렇게 시작을 해 보니 어느 정도 내용을 살리어 나가는 것 같아서 그대로 계속해 10여 장을 내려 써 보았으나 이 역시 달갑게 마음에 당기는 것이 아니어서 또 내어 버리고는 아예 붓대를 놓고 단념해 버렸다.

 

 

이렇게도 어려운 창작이건만,

 

 

“저 댁에서는 소설을 쓴대. 쓰윽쓱 쓰기만 하면 돈이 생길걸….”

 

 

하고 우리 집을 가르쳐 근처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땐 참으로 어떻게 대답을 하여야 할 것인지 모르겠다.

 

 

 


 

 

 

작가 생활에 있어 여행이 지극히 필요한 줄은 알면서도 나는 여행에 취미를 그토록 느끼지 못한다. 그리하여 특수한 사정으로서가 아닌 한에선 우금(于今)껏 여행을 위한 여행이란 단 한 번도 가져 본 일이 없다.

 

 

고독이 찰지게 두고 스며들 때에는 여행이라도 하여 보면, 시원할 듯이 문득 생각은 되면서도 차마 그것을 실행하여 그 찰지게 파고드는 고독을 아주 잊고 싶지는 않다. 고독이란 그 무슨 진리를 담은 껍데기 같게도 생각이 되면서 나를 버리지 않고 따르는 그 고독이 차라리 반갑게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독을 피함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고자 하기보다는 그것을 싸와 익힘으로, 그래서 그 껍데기를 깨트림으로 그 속에 담긴 그 참된 진리를 알뜰히 꺼내 보고 싶은 욕심이 여행에의 취미보다 오히려 고독에의 취미에 보다 더 강한 유혹을 받는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고독이 심할수록 고요한 곳을, 지극히 고요한 곳을 찾아서는 것보다 더한 고독으로 친하여 보자는 것이 언제나 잊지 못하는 태도다.

 

 

그러나 그 고독이란 껍데기 속에 들어 있을 듯한 진리는 가만히 눈을 감곤 숙친하기에 여간 베찬 것이 아니다. 숨이 막힐 듯이 답답하여 오는 가슴은 얼마 동안의 계속을 더 못 견디어 벌떡 몸을 일으켜 방안으로 걸음을 돌린다. 역시 감은 눈에 뒷짐을 지고 홍글홍글 몇 바퀴고 수없이 돌아본다.

 

 

그래도 마음이 시원치 않으면 밖으로 나가, 뜰 안을 돈다. 방안보다는 여유 있는 면적이, 그리고 호흡할 수 있는 신선한 공기가 한결 시원함을 느끼어 주위의 사정에 거리낌이 없는 한, 그래서 때가 밤일 경우에는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몇 시간이고 줄곧 계속 하여 돌게 된다. 그러나 중안의 시선에 이 행동이 드러날 우려가 있는 낮일 때에는 산상(山上)을 찾는다. 산상의 평다분한 잔디판을 고요히 눈을 감고 제 사념에 자기를 잊어 가며 거니는 맛이란 담배연기 자욱한 기차 속에서 오력(五力)을 못 펴고 무릎을 맞비벼야 되는 그러한 여행에 비할 정도의 맛이 아니다.

 

 

그리하여 끊일 줄 모르는 이 취미는 같은 산상의 같은 자리에서 흔히 반복되는 것이므로 한때에는 흉보기 잘하는 근처 집 노파에게 아무개가 그게 미치지 않았나? 하는 퀘스천마크를 길게 끌고 다니며 외임을 들어 본 일도 있지만 고독을 친하자는 나의 이러한 취미는 도차 안 고칠 수 없는 하나의 버릇으로 되어 무엇을 생각하게만 되면 그 처소가 어디임을 헤아리지도 못하고 벌떡 일어서 왔다갔다 좌석을 거니는 무례를 범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이 버릇을 구태여 자신에 책하고 싶은 마음이 없이 주위를 피하여 마음놓고 거닐어 볼 터전이 없는 서울에 살게 됨을 한한다.

 

 

문 밖을 나서면 거리다. 눈을 부릅뜨고 좌우를 살펴 가며 걸어도 어느 틈에 앞으로 맞닥뜨리는 자전거, 자동차가 사람을 몰라보는 혼잡이다. 바른 정신을 가지고는 차마 감불생심이요, 산이 그리우니 발 가까운 데가 없다.

 

 

적어도 하루의 시일은 다들 요()할 만한 곳이다. 그러니 다만 허여(許與)된다는 곳이 오직 제가 기거하는 방안일 따름이다.

 

 

그러나 방이란, 내 방이자 곧 아내의 방이요, 그러니까 아이들의 방이 또한 아니 되지 못한다.

 

 

조용할 리도 없거니와, 세간살이 도구가 너저분히 널렸다. 생념이 날 턱도 없는데 걸음까지 또한 촌보도 허치 않는다.

 

 

그러니 실내 여행에조차 굶주리게 되는 고독의 껍데기는 이제 비껴 볼 길이 없이 제대로 아주 굳어져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진다.

 

  


 

 

무어라고 따집을 수 없는 허전한 마음이 나를 늘 헌책전으로 끌어낸다.

  

이 마음의 요구엔 아무리 친한 벗도 응할 자격이 없고, 아무리 맛나는 음식, 아무리 재미나는 오락도 인연이 멀었다. 먼지 앉고, 곰팡내 나는 그 어느 책 속에서 활자를 셈으로만이 그저 요구의 대상일 것 같아, 벗에서나, 음식에서나, 오락에서나 마찬가지로 역시 속아는 오면서도, 그래도 제일 신용이 있음직해서, 속아도 속아도 나는 이 헌책전의 유혹에만은 벗어나지 못한다.

  

옛날 어떤 서적광이 맨 처음으로 만든 책은 어떤 것이었을까, 있을 수도 없는 이 책이 그리워, 모든 일을 전폐하고 도서관이란 도서관은 온통 뒤락, 지구 위를 행각(行脚)하며 돌아가다가 하루는 어떤 도서관에서 몇 길이고 높이 쌓아 올린 서가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먼지를 털며 뒤적이다 그만 실수를 하여 떨어져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어느 문헌에서 보고 그 어리석음을 웃었거니와, 내가 지금 받는 유혹도 이런 어리석인 짓이 아닐까, 필시 어리석인 짓일 것 같으면서도 헌책전을 눈 담고 떠나게 되고, 길을 가다가도 헌책전이 눈에 뜨이면 아니 들어가고는 못 배긴다.

 

그러나 수많은 철인, 문인이 몇 세기를 두고 정력을 다하여 짜 낸 그 정수도 하나같이 내 가슴을 날카롭게 찔러 무릎을 되사리고 앉게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결국은 현대 문화의 최고 수준이 몇 천 년 전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복이었던 것이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와서 나를 한 번 놀라게 하고는 세계의 정신은 또 이것의 반복 답보이었다. 스트린드 베리의 <다마스커스에>가 그것이었고, 월포울의 <경인(鏡人)>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반복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찾고 나는 또 한 번 놀랐던 것이니, 이것이 내 허전한 가슴에 찔린 두 번째의 자극이었다.

  

그리고는 괴테, 도스토예프스키에서 그냥 답보를 하여 오던 현대의 정신은 식사나 궐한 것같이 이렇게도 마음이 늘 허전한 현대인의 가슴에다 <파우스트>나 <죄와 벌>같은 영양소 대신에 원자탄을 안겨 주는 놀라운 창작을 하였다. 이 누구의 가슴에다 자극을 주렴인가. 이 원자탄을 가슴에 안고 놀람에 앞서 대담히 한 번 껄 껄 웃은 자, 이 지구 위에 과연 있었을까.

  

인류를 지극히 사랑하여도 위인이라 받들고, 인류를 무참히 죽여도 영웅이라 받드는 것이 현대인의 정신임을 내 모르지 않거니와, 아무튼 <죄와 벌> 이후, 이 놀라운 승리가 원자탄이라면 이건 현대인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놀라운 노력을 가슴 허전한 현대인을 위하여 부어넣어 주었던들 현대의 정신은 얼마나 살이 쪄 자라고 있을 것인가. 그랬으면 이 혜택으로 나도 한동안은 이렇게 날마다 헌책전을 뒤타지 않고도 살쪄 볼 수 있었으련만, 오늘도 나는 여전히 허전한 마음에 헌책전으로 의연히 나서야 하는 신세다.

 

 


 

 

집 없는 사람에겐 봄과 가을처럼 서러운 시절이 없다.

  

간신히 집 한 칸을 얻어 들어 밑을 붙이고 삼동을 나게 되면 집이 팔렸으니 나가라, 그리하여 복덕방 순례를 또 하여 가며“가족이 간단하지요? 어린애 없지요? 단 내외분이어야 놓는다는 방은 있습니다.”하는 따위의 불유쾌한 이야기를 들어 가며 아이들이 있어도 없다 속이고 또 간신히 방 한 칸을 얻어 들고 여름을 나면 집이 팔렸으니 나가라 명령이다.

  

서울서 집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태반이 집으로 먹고 사는 장사치들이다.

  

그렇지 아니한 사람은 방의 여유가 있어도 세를 늘 놓지 아니하고, 이런 축들만이 세를 놓는 것이므로 이런 데밖에 얻어 들 수가 없는데, 집은 늘 내놓아 가지고 있다가 단돈 만원이라도 붙게 되면 팔아서 바꾸는 것이니, 세 집에 들어 사는 무리들은 이 가을과 봄이 돌아오기만 하면 이사를 아니 하게 되지 못한다.

  

나도 이 가을에 집을 또 얻어야 하는 사람의 하나다. 그러나 자꾸만 올라가는 집값이라, 작년 가을에 얻어 들었던 그 세전을 받아 가지고는 도저히 그만한 집을 얻어 들 수가 없다. 월여를 두고 장안을 돌아보았으나 받은 세전에 맞는 집은 없다. 작년 가을보다 거의 배가 올랐다. 해방 후 단편집을 하나 내 가지고 그 인세로 4천 원짜리 전세를 한 2년 살다 보니 그 돈 4천 원으로는 방 한 칸 월세도 되지 않아 쓴 입을 다시고 작년 가을에 단편집 판권을 또 팔아 다시 세전을 마련했던 그 본전이 금년에 와서는 이렇게 또 모자란다.

  

집을 쓰고야 살게 마련된 것이 사람일진댄 사람 하나에 집 하나씩은 쳐져서 세상에 내보낼 것이지, 조물주의 이 무슨 모순이냐. 산으로 기어올라 번지 없는 집에라도 살아 보자는 생각이 문득 떠오르곤 하나, 그러나 그 물을 어떻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연일연시로 끌어 올려다 먹는단 말인가. 마흔두 층대를 올라가는 냉동(冷洞) 꼭대기에서도 살아 보았거니와, 물통 하나 자유로 들 수 없는 백면서생으로선 물 없는 집에 사는 도리가 없었다. 딱한 사정이다.

  

이것이 허구 많은 학문 가운데서 하필 문학을 골라잡았다는 벌일까. 자래(自來)로 글과 친한 이, 다 가난하였다거니와, 어떻게 해야 돈을 모을까 하고 남들은 눈이 빨개 돌아가는데, 이건, 자나깨나 발부리만 들여다보고 앉아서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쓸 수가 있을까 이것만 생각하니 그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언젠가 이북서 넘어온 피난민 한 사람이 브로커질을 해서 상당한 액수의 돈을 잡은 것을 보고 그 주위의 사람들이 슬근히 구미들이 동해서,

  

“그 배 언제 또 떠나나?”

  

“자네도 또 가나? 이번엔 나두 한몫 넣어 주게.”

  

하고들 떠들 때 나는 나도 저렇게 한번 브로커질을 해 보리란 생각보다 대뜸 머리에 떠오른다는 욕심이, 이 광경을 어느 소설의 한 장면으로 집어 넣었으면 하는 생각부터 하기에 나는 나대로 만족한 나이었던 것이니 이러다가는 청내 가야 방 한 칸 마련해 놓고 살아 볼 것 같지 못하다.

  

서울서 아주 살림을 하기로 작정하고 내 권솔을 다 몰고 올라와 남의 집 사랑방 한 칸을 얻어 들었다가 한 달이 채 못 돼서 집이 팔렸노라 앞자리를 치우라고 해서 방 한 칸을 마련하려 두 달 석 달을 돌아가다가 그 해 겨울도 깊어 섣달 보름날에 이르러서야 겨우 냉동 꼭대기에다 어느 친구의 집 신세를 질 수 있게 됨으로 한숨을 쉬고 나서는 그적부터 오막살이라도 집은 한 채 잡고 살아야겠다고 해마다 별러 오는 게 곧이곧대로 오늘까지 이르러 10여 년이다. 집 한 칸 없으면서도 해방통에 남 다 드는 적산을 치사하다 혼자 안 들고 뻗댄 결과는 그래 무엇이냐. 겨울은 버적버적 닥쳐오는 하는 수가 없어 적산이라도 하나 얻어 들려, 용산 방면이라, 상도동이라, 이즘은 연일 섰다시피 뒤가 타 돌아다녀 보다 그 엄청난 권리금이 내 재산과 상대되는 집이라곤 고를 길이 없다.

  

하기야 지난날도 제 집 없이 10여 년을 살아왔거니, 앞날이라고 못 살아갈 바 있으랴, 집을 구하다가는 지치어 이런 자위라도 하여는 보나 물가변동이 이렇게도 심하고 보면 한양같이 제 발부리나 들여다보고, 이러한 글줄로 원고용지 구멍이나 메워야 되는 직업으로선 한 칸의 셋방이라도 얻어질 것 같지 못하다. 그러니 집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은 이젠 깨끗이 잊어버리고 삶이, 차라리 한 근심만은 덜어 줄 것도 같다.

 

 


 

 

맛치고 담배 맛처럼 알뜰한 맛은 세상에 다시없을 것 같다. 내 생활에 있어 담배는 잊을 수 없는 하나의 벗이요, 또 좋은 스승이다.

  

몸이 피로하여졌을 때 담배를 한 대 피워 무는 맛이란 실로 애연가가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가까운 벗이 일찍이 이 담배 맛에서처럼 지친 심신에 위안을 준 적이 있을까. 한 대 피워 물고 고요히 앉아서 힘껏 한 모금을 들여 빨았다가 후- 내어쉬면 그 연기와 같이 피로도 몰려나와 공중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 같은 기분이 정신을 새롭게 해 준다.

  

내가 일찍이 담배를 못 배웠던들 이렇게 온갖 맛 중에 제일가는 좋은 맛 하나를 영원히 모르고 지나게 되었을 것이 아닌가 하면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기어코 배워 냈던 지난날의 그 어린 시절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야족의 종교적 예의 중에는 이미 담배 잎을 태워서 신에게 바치는 행사가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 담배의 역사는 가장 낡은 역사를 가진 마야족과 같이 이어오는 것으로 추측이 되거니와 신에게 담배를 바치는 승려가 담배의 그 진기한 마취작용 그것이란 신의 현현(顯現)이라 하여 마침내는 그 자신조차가 끽연에의 탐을 내어 일반인사로부터 경끽(競喫)을 하게 되는 취미(趣味)를 가르쳐 준 것이 되어 보편적으로 습관이 길러짐으로 오늘에 와서는 내 입에까지 빨리게 된 것을 생각하면 이 담배의 율칙(律則)을 범한 그 승려에게 나는 다시 한 번 감사함을 사양치 못한다.

  

처음에는 내가 어떠한 동기에서 담배를 배우기 시작했는지는 생각이 퍽 옹색하나 열한 살 적에 떨어진 대통을 주어다 붓대를 잘라 맞추어서 곰방대를 만들어 가지고 증조모님의 담배함에서 기새미를 훔쳐내다가 변소 같은 곳으로 숨어 다니며 성(盛)히 피워 내던 기억만은 지금도 선하다.

  

구주(毆洲)에서 담배를 처음으로 피우던 스페인의 로드리크 더 헤레스라는 사람도 담배를 피우는 것 때문에 종교재판을 받아 옥중신세까지 졌다는 말이 전하여 내려오거니와 나도 담배를 배우기까지에는 경을 치기 한두 번이 아니다. 근처 노인네들한테 망해 나가라는 극언을 듣기도 여러 번 하였고 소학교 적에는 선생한테 들켜서 벌까지 서 본 일이 있다.

  

점심 후 역시 변소에 들어가서 한 대를 피고 났는데 뜻밖에 사무실로부터 호출이 내렸다. 들어가 보니 아무런 말도 묻는 것이 없이 다짜고짜로 선생의 손은 나의 포켓으로 들어와 반도 못 먹은 2전(二錢)짜리 꽃표 권련갑(卷 煉匣)을 드러냈다. 동시에 선생의 다른 한 손은 어느 새인지 철썩하고 나의 뺨에 와 부딪치기에 사정이 없었다. 그것만이면 그래도 헐했다. 두 시간 동안인가를 허수아비처럼 곧장 팔을 벌리고 기척을 하고 딱 서서 벌을 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도 나의 담배에 대한 길은 들지 않았다. 조금도 후회하는 법이 없이 여전히 숨어 다니면서 피우기를 즐겼다.

  

이렇게 주위에서는 담배 피우는 것을 금할 뿐 아니라, 담배를 피운 다는 것이 또 자신으로서도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건만 끊지를 못했다. 한 모금을 힘껏 들여 빨아 삼키면 그 고통이란 말할 수도 없다. 머리가 얻어맞은 것처럼 텡하고 속이 후리후리한 것이 메스껍고 하여 실로 밥을 못 먹고 병인처럼 근더져서 한나절을 지나보내곤 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웬일인지 그것을 끊지 못하고 끝끝내 계속하여 필야엔 제 맛을 알고 빨게 되기까지 배워 놓고야 말았다.

  

이리하여 이래 20여 년을 꾸준히 피워 오며 친한 담배를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좋은 벗이 되어진 것이다.

  

중학 시절에 한 번은 체조 선생이 담배를 조사하는 바람에 호주머니 속에 넣었던 피존 갑(匣)을 갑자기 처치할 길이 없어 책상 밑 뒤 판자 아래 구겨 넣으므로 급변을 피하게 되었든 것이 후일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그것이 나를 도와주는 역할이 되었던 것이니 그 후 하휴(厦休)의 영어시험간(英語試驗間)의 하나로서 물은 비둘기의 스펠이 무엇이든지가 생각이 나지 않아 부등부등 애를 쓰다가 문득 그때의 그 책상 뒤 밑의 피존 갑이 생각나기로 끄집어냄으로써 Pigeon이라 똑똑히 보고 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도 이제 보면 담배를 사귀어 두었던 그 덕이라 아니 할 수 없거니와 정신적으로서의 활동이 계속되는 동안, 그동안에 있어서의 참 벗은 내게는 오직 담배를 두고 다시 없다. 글을 쓰다가도 문득 혀끝에 담배 맛이 당기면 생각이 자자들고 붓이 멎는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담배의 준비가 없이는 붓을 들지 못한다. 그것을 피움으로 권태를 느낄 줄 모르고 심신의 위로를 사며 앞으로의 생각을 길이 더듬어 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시 담배의 비치(備置)가 없다든가, 끽연에의 자유가 없는 그러한 장소에 처하게 되는 때의 생활은 내게 있어선 생활하는 그 순간이 아니요, 다만 생존해 있는 그러한 순간에 지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이러한 생활에의 욕망은 포켓에의 여유에까지도 기다리기에 급하여 가다간 가끔 가끔 담배값으로 책을 강요한다. 담배로 책을 바꾸게 된다는 것이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담배 역시 책과 다름 없이 내 마음을 쳐 주는 벗이 아닌가 하고 생각이 들면 책이나 담배를 가릴 것이 없어 그저 어느 것이든 간 충실한 벗으로서의 역할을 다해 주었으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 같아, 하루 세 갑의 담배 소비에 군색(窘塞)을 피치 못할 땐 나의 가난한 서가에는 한 금씩 한 금씩 틈이 벙으러저 나간다.

  

이로 미루어 볼진대 앞으로 내 생활에 있어 물질의 여유가 있게 되는 것이 아닌 한엔 서가는 서가 저대로 나날이 파리해 가고 있을 것이 빤히 내다 보인다.

 

 


 

 

저온(低溫) 생활을 하려니 일현(日鉉)이 생각이 가끔 난다.

  

그는 몇 해 전 내 시골 집에 머슴으로 있던 스물둘이든가, 아마 그러한 연령이었던 엄지럭 총각이었다. 백설이 펄펄 날리는 엄동에도 그는 구들에 불을 넣는 법이 없었다. 구들이 차면 병이 난다고 아무리 불을 넣고 자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고 맨구들 위에다 그저 짚북데기를 약간 깔고는 그 위에서 그냥 잤다.

  

남의 집이라 혹 샛더미에 때마다 임의로 손을 대기가 어려워 그러지는 않을까 싶어 하루는 조부님이 이렇게도 말씀을 해 보았다.

  

“네 방에 불은 산에 가서 네가 나무를 해다가 넣고 자도록 해라.”

  

그리고는 그 태도를 보았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그저 여전히,

  

“전 춥지 않아요?”

  

한마디로 나무 한 조각 해 오지 않고 그 추운 겨울을 냉돌에서 끝끝내 났다. 그러면서도 감기 한 번 뱃증 한 번 걸리고 앓는 일 없이 건강한 몸으로 일은 일대로 남 지지 않게 해내는 아이였다.

  

조부님뿐이 아니요, 나뿐이 아니라, 우리 전 가족, 아니, 온 동내에서 모두 이 일현이의 생활에는 아니 놀라지 못했다.

  

물론 그의 정신에 다소 이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철도 연변의 밭에서 김을 매다가 무심중 기적을 울리며 달리어 들어오는 기차에 놀라 기절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정신이 좀 부족해진 듯하다고는 하나, 그러나 그의 모든 행동을 종합해 보면 그의 행동이 전연(全然) 정신 이상에 있다고만 그렇게 단순히 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거리에서 거지로 노숙을 흔히 보거니와 빈한(貧寒)한 그의 가정은 그 후 곧 산지사방(散之四方)하게 되면서 그는 잠깐 남의 집 사람이 되었다가 한 해 동안을 한지(寒地)에서 아니 지낼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한(耐寒)에의 단련을 받게 된 것이, 지금의 체질을 만들어 내었는가 보다고 그 자신도 말하는 걸 들었거니와, 사실 거기에 원인이 없었다고 볼 수가 없었다.

  

이건 내가 직접 자식들을 기르며 지나도 본 일이지만 추위를 타거나 타지 않는 것은, 그리하여 건(健), 불건(不健)의 체질을 갖게 되는 것은 아이의 그 기르는 방법에 있어 좌우됨이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조모님은 증손자가 귀하다고 내 자식을 일상 품에 품으시고 추울세라 절절 끊는 아랫목에다 묻어 놓고도 바람이 어디로 들어오는 것은 아닐까 수건을 씌우고 또 머리맡을 가리고 하시며 방한과 보온에 할 수 있는 힘과 정성을 온통 기울여 길러 냈다.

 

그리고 그 다음 것 계집아이는 그까짓 것은 여차라고 누구 하나 탐탁히 안아 주는 사람조차 없어 어머니의 젖을 떨어져선 아랫목 맛이라고는 보지도 못하고 웃목에서 저 혼자 되는대로 자라났다.

  

그러나 결과에 있어서는 되는대로 길러낸 아이 편의 건강이 오히려 좋은 것이었다. 냉기나 겨우 피한 정도의 온돌이 밤 열한 시나 그러한 시각이 되면 코뿔이 얼어들고 손이 시럽고 하여 으슥거리는 몸이 이불을 뒤집어쓰지 않고는 배겨날 수가 없는데 이 아이만은 뎅글하게 등에다 샤쓰 하나만을 걸치고 종아리는 벌거숭이 그대로 들어내 놓은 채 조금도 한습(寒襲)을 두려워하는 일 없이 그저 저 할 일에 자세가 천연하다.

  

나는 그게 여간만 부럽지 않다.

  

한참 혈기에 충만한 아이들과 건강을 동석에서 비해 말할 것은 아니로되 허투로 길러지지 못하고 아랫목에서 뼈가 굵게 된 내 건강은 아이 적에도 그리 좋은 편은 못 되었다. 그러나 운동에 취미를 얻음으로 단련이 된 몸은 씨름 같은 것도 한태 할 줄 아는 건강이었다.

  

그렇던 것이 문학과 인연을 맺게 되고부터는 운동이라는 데는 조금도 관심을 아니 하게 되고 오직 그것이 생명인 것처럼 칠팔 년을 꼭 두문불출 방(房) 속에 박혀서 기거를 하며 책과만 씨름을 하게 되는 무리(無理)가 감행되는 동안 건강은 저도 모르게 좀이 먹어 들었다. 십칠 관(十七貫)을 넘던 체중이 아무리 발에 힘을 주고 굴러 보아도 십칠 관 상하에서 저울 침을 더 돌릴 수가 없게 깎여 내린 것이다. 누워서 독서를 했기 때문에 눈이 나빠지고, 책상에 다년간 수굿하고 앉아 있었던 관계로 비색증(鼻塞症)도 생기고―하는 것이 그 부분적으로도 영향이 큰 것을 따져 짚은 의사의 말이었다.

  

아니 그것만이면 오히려 다행이었다. 심장도 확실히 약해진 것을 알고 있거니와 이것도 문학이 그렇게 만든 것이 사실이다.

  

정신생활을 위하여 희생시킨 건강을 장(將)한 일이라고 볼 것인가, 건강의 지속이 없을 때 정신생활도 따라서 영위할 수 없게 될 것은 빤한 일이다. 건강이 제일이라는 말은 보약 광고의 과장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여기서 절실히 느끼게 된다. 아니 오히려 좀더 굳세게 건강은 그대로 그것이 인생이라고 나는 강조하고 싶다.

 

문학을 위하여 건강을 희생하고 문학을 할 능력을 잃게 된다는 것은 그 얼마나한 비극일 것인가.

  

시작한 지 불과 한 시간밖에 아니 되었을 이 짧은 글을 이까지 쓰는 동안에도 나는 몇 번이나 붓을 놓고 혹은 입김으로도 혹은 엉덩이 밑에도 깔아 보고 불어 보고 하며 그리곤 그 손으로 코끝을 감싸 녹히고 하기에 몇 줄 건너 거듭하여 왔는지 모른다. 아니 이것만이 몸에 마취는 견디기 어려움이라면 오히려 헐할 것이다. 정신이 어찔함을 느끼게까지 된다는 것은 참….

  

일현이 같은 건강, 그러한 건강의 꿈을 나는 왜 일찍이 꾸어 보지 못하였을까, 그리하여 길러 오지 못하였을까.

  

겨우내 불이라고는 단 한 번 맛도 보지 못한 그 냉돌(冷突) 위에서 자기의 체온만으로 엄습하여 들어오는 한파를 조금도 곤란 없이 막아내며 천연히 앉아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루 너어머간다.”

  

하고, 가끔 한 가닥씩 넘겨가며, 밤마다 새끼를 꼬던 일현이, 그 일현이의 건강이 나는 얼마나 부러운 것인고.

 

 


 

 

사람이 세상에 날 때에 일생의 필자를 그 얼굴에다 내여 박고 나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대개 그 사람의 팔자가 그 얼굴에 그려 있는 듯이 보이기는 한다. 붙음 붙음이 괴롭게 정리되고, 번듯하게 생긴 얼굴의 소유자는 그것이 그대로 그 사람의 복을 말하는 것 같고, 또 그와는 반대로 얼굴이 조밀작해서 어딘지 구차해 보이는 얼굴의 소유자는 아무리 해도 복은 없을 것 같게만 보인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도 않은 예를 우리는 빤히 내다볼 수 있는 것이니, 육안으로 보아도 그렇게 번듯하게 복스럽게 생기고 아니 생긴 것으로는 그 사람의 운수를 따져 볼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얼굴이 번듯하게 생긴 사람을 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해도 어쨌든 복 좋은 사람같이 보이는 데는 할 수 없다.

  

그리고 또 그것이 장래의 팔자에는 어찌 되었든 뭇 사람에게 그렇게 복스럽게 보이는 것만 해도 천복을 타고 난 사람 같아 나는 그러한 얼굴의 소유자를 대할 때마다 내 얼굴을 연상하고, 그러면 내 얼굴은 뭇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 하는 생각에 가끔 거울에다 자신의 얼굴을 비춰 놓고 요모조모 뜯어 가며 장단점을 찾아본다. 그리고 오늘까지 보아 오는 동안에 제일 잘생겼다고 인정하던 그런 얼굴에다도 비해 보고, 또 제일 못생기었다고 보였던 그런 얼굴에다도 비해 본다.

  

그러나 내 얼굴은 내가 좋아하는 형으로 그렇게 복스럽게 환하지도 못하고 할복한 형이라고 인정하는 그렇게 조밀작한 얼굴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나 하나의 보통 얼굴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면 내 얼굴 같은 이러한 형은 그 소위 관상학상으로는 어떤 것일까 나는 근래 그것이 무척 궁금하였다. 이것은 무슨 관상법을 믿어서가 아니라 복스럽게 생긴 사람도 복이 없고 복스럽게 생기지 못한 사람도 복이 있는 것을 볼 때 관상학상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보나 하는 호기심이 내 관상에서 한번 그것을 시험하여 보고 싶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인즉 역시 쑤그러운 짓이라 돈을 주고까지 보일 필요는 없어 한번 보여 보자 하고 그 어떤 기회만을 엿보아 오던 것이 월전(月前)에 우연히도 모모 씨로 더불어 이야기를 하던 끝에 관상이야기가 나서 돈을 아니 받고도 보아 준다는 청운정(淸雲町) 오개석 씨(吳介石氏)를 찾아가 관상을 보인 일이 있다.

  

그러나 관상학상으로 보는 관상은 우리가 척 보기에 그저 번듯하고 아니 번듯한 것으로 복(福), 불복(不福)을 따져 버리는 그런 추상적 관법이 아니라, 사람의 일생에 굴곡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얼굴에도 그 부분부분에 굴곡이 있어서 그것을 일생에 맞추어 보는 그러한 구체적인 관법으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 보는 법이 아주 과학적이요, 조직적이다.

  

그러면 관상법으로 본 내 얼굴은 어떠하였나, 그 역시 대체로 볼 때는 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그저 평범한 하나의 보통 얼굴로 본다. 그가 본 내 얼굴의 형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나 자래형이라는 단안을 내린다. 그리고 세부분으로 들어가 일생의 그 소위 팔자를 논하는 데 있어선 머리가 좋으니 초년 팔자는 좋았으나 이마가 들어가 삼십대 팔자는 극히 좋지 못한 데, 코가 또한 좋아서 사십대부터는 다시 운수가 좋다 한다. 그러나 그 직업의 가집에 있어 운(運), 불운(不運)이 좌우될 것인즉 문필을 집어 던지고 장사를 하여야 성공을 할 것이라 한다.

  

그래 그 성공이라는 것이 어떠한 정도의 것이냐고 물었더니 이천 석 하나는 염려 없다는 것이다. 그런 데다 입까지 또한 좋아서 그것을 족히 지킬 것이니 부디 장사를 하란다. 그리고 뺨 아래 뼈가 넙적하게 두드러졌으니 부하를 많이 거느릴 관상으로 유순한 마음은 심성으로 그 부하를 사랑하고 지도하나, 그 심성을 몰라주는 부하들이라 그들로부터의 시비는 면할 수가 없는 형이라고 한다. 이것이 그의 관상법으로 본 내 얼굴에 두드러진 팔자다.

  

무슨 이것을 믿을 것은 아니요, 또 믿고 싶은 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문필을 던져야 된다는 얼굴이 내게는 갑자기 밉게 보였다. 그리고 가만히 얼굴을 뜯어보니 그 어느 한 모에 문재(文才)를 나타내는 그러한 재기에 찬 부분을 사실상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또한 나는 문필을 황금으로 바꾸어 버릴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 내 팔자에 타고났던 벼 이천 석을 아깝게도 쌓아 보지 못하고 뉘 집 곳간에다 자선을 베풀게 되는 셈이 되고 만다.

 

 


 

 

인제 버들잎이 완전히 푸르른 걸 보니 밤나무 잎에도 살이 한참 오르고 있을 것 같다.

  

버들 뒤에 잎이 푸르른 나무가 하필 밤나무뿐이랴만 버들잎이 푸르면 나는 내 고향집 정원의 그 늙은 밤나무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그것은 몇 백 년이나 되었는지 팔순의 노인네들까지 자기의 어렸을 시절에도 역시 그저 지금이나 다름없는 모양으로 그렇더라고 하는, 언제 어느 때에 심어졌는지 그 유래조차 알 수 없는 그러한 연령을 가진 밤나무다.

  

어떠한 나무든지 아름드리로 굵게 되면 그 보이는 품이 사람으로 비해 보면 많은 수양에 단련이 된 그러한 학자같이 침착하고 장중한 맛이 있어 보이거니와, 이 밤나무야말로 사상이 일관된 철학자같이 숭엄하게, 무겁게, 그리고 거룩하게 보였다.

  

주위에 둘러선 백양이라든가 솔 같은 것은 바람이 부는 듯만 해도 바람 좇아 몸을 부지할 줄 모르건만 유독 이 밤나무만은 고삭고 무지러진 가지일래 의연히 서서 그 자세를 변치 않는다.

  

척 보면 이젠 아주 생명이 다한 것 같이 속속들이 좀이 파먹어 들어가 껍데기 안으로 겨우 한 치 두께의 살밖에 붙어 있지 않지만 그래도 버들잎이 푸르면 잊는 법이 없이 뒤이어 잎을 피우고, 가을이면 기어이 열매를 맺어 굽알을 떨웠다.

  

이것은 마치 그 속속들이 구새 먹어 썩어진 등덜미가 이러한 도를 닦기까지 얼마나한 세고의 풍상에 부대끼며 속을 썩인 그 자취인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 같아, 그 밤나무를 대할 때마다 나는 무엇엔지의 사색에 저도 모르게 머리가 숙군했다. 어쩐지 나는 그것이 좋았다. 그것이 좋아서 조석으로 이 밤나무 그늘 아래를 거니는 것이 남 모르는 내 한동안의 즐거움이었다.

  

조부님도 내 마음과 같았던지 항상 이 밤나무 밑을 떠나지 못하시고 나와 같이 그 그늘 아래 거닐기를 즐기셨다. 그러다가 요 바로 몇해 전에는 해마다 그 가지가 고삭고 축나는 이 늙은 철학자를 보호하여 그로부터 영원한 벗을 삼으시려 돈을 들여 가며 인부를 사서는 북을 돋우어 주고, 그리고 그 둘레론 돌을 때려 대를 쌓고 정자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는 과객조차도 그 아래 머물러 같이 즐기게 하기 위하여 자연석을 주어다가 곳곳에 좌석을 만들어 놓고 이 늙은 철학자를 주위로 돌아가며 장미라, 목단이라, 매화라, 이런 향기 높은 꽃나무까지 구해다 심어서 정자로서의 정취를 한층 더하게 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나로 하여금 이 늙은 철학자와 좀더 친할 수 있게 하는 원인이 되었거니와, 사람들은 이것을 율정이라 이름 짓고 여가(餘暇)가 있으면 이 철학자를 찾아 모여 와서 고풍한 그 정취 속에 잔을 기울여 가며 시를 읊었다. 내 그 시를 지금 일일이 기억 못 하거니와 그 지방 일대는 물론, 남북관(南北關)으로부터서까지 모여든 시문이 실로 기백 수(幾百首)로 조부님도 지금은 그것을 노여(老餘)의 보배로 제책(製冊)까지 하여 머리맡에 두시고 그 시문 속에 구원한 진리가 담긴 듯이, 그리하여 그것을 찾으시려는 듯이 짬짬이 읊으심으로 심신의 위로를 삼아 오신다.

  

내 창작도 태반(殆半)은 여기서 되었다. 직접 이 철학자를 두고 짜여진 것은 아직 한 편도 없으나, 이 철학자와 벗하여 상이 닦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상(想)이 막히어 붓대가 내키지 않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책상을 떠나 이 철학자의 그늘 밑으로 나왔다. 그리하여 그 밑에서 고요히 눈을 감고 뒷짐을 지고 거닐면서 매듭진 상을 골라서 풀곤 했다. 생각이 옹색해도 이 그늘을 찾았고 독서와 붓놀음에 지친 피로가 몸에 마칠 때에도 이 그늘을 찾았다. 실로 이 늙은 철학자 밤나무는 나에게 있어 내 생명의 씨를 밝혀 주는 씨앗터였다.

  

이러한 씨앗터를 내 이제 떠나 살게 되니 해마다 버들잎에 기름이지면 이 늙은 철학자의 그늘 밑이 더할 수 없이 그리워진다. 인제 그 밤나무에도 잎이 아마 푸르렀겠지. 비바람에 고삭은 가지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 안부가 지극히 알고 싶어지고, 그 밑에서 고요히 눈을 감고 사색에 잠겨 보고 싶어진다.

  

더욱이 생각의 가난에 원고를 자꾸만 찢게 될 땐, 어쩐지 그 그늘 밑 자연석 위에 잠깐만 앉아 눈을 감아 보아도 매듭진 상의 눈앞은 훤히 트여질 것만 같게 그 품속이 생각난다.

  

얼마나 나는 그 품속에 그렇게 주렸든지, 바로 며칠 전 그때가 아마 밤 열시는 넘었으리라, 역시 그 밤에도 나는 기한이 박두한 원고와 씨름을 하다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어서 이런 때이면 언제나 하던 버릇 그대로 이미 쓰인 몇 장의 원고를 사정조차 없이 왈왈 찢어 쓰레기통에 동댕이를 치고 대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일단 발이 멎고 보았을 때 그것은 가지리라고 믿었던 그 철학자의 품속이 아니었고 대문 밖이자 행길인 냉천정(冷泉町)도 한 꼭대기 돌층대 위임을 알았다. 그적에야 비로소 나는 내 몸이 서울에 있는 몸임을 또한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 순간, 갈 곳을 모르는 나는 어처구니도 없이 한동안을 그대로 멍하니 서서 쓴웃음을 삼키고, 아까 낮에 일터에서 돌아올 때 복덕방 영감이 돌층대 아래 죽어 가는 한 그루의 포플러 그늘을 지고 담배를 한가히 빨고 앉았던 것을 문득 생각하고 거기라도 좀 앉아서 생각을 더듬어 보리라 포플러 그늘을 찾아 내려갔다.

  

그러나 낮에 있던 그 나무 판쪽의 기다란 의자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 그대로 두면 그것도 잃어버릴 염려가 있어 영감은 필시 가지고 들어간 모양이다. 그러니 그 행길 가에 그대로 우뚝 서 있을 맛이 없다. 그것보다도 나는 지금 마음을 가라앉힐 시원하고도 고요한 자리를 찾는 것이다. 이 근처엔 어디 그만한 곳이 없을까, 담배를 한 대 피어 물고 뒷짐을 지고 연희장(延禧莊)으로 넘은 산탁 길을 추어 올랐다. 그러나 거기도 역시 마음을 놓고 앉았을 만한 곳이 없다. 산이라고는 하나 사람의 발부리에 지지리 밟히어 돋아나다 죽은 풀밭 위에는 먼지만이 보얗게 쌓여 조금도 신선한 맛이 없다. 밑도 대여 볼 생념이 없어 다시 집으로 내려와 옷을 갈아입었다. 내 다방에 취미를 모르거니와 이러한 경우엔 싫더라도 서울선 다방이란 곳밖에 찾을 데가 없는 것이다.

  

다방에도 제법 그 우리 고향 집 정원의 주인공 늙은 철학자와 같이 구새가 먹은 모양으로 흉내를 내어 꾸며서 분에다 심어 놓은 마치 애들의 장난감 같은 나무가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것의 그늘 밑에서는 한동안의 마음을 가라앉히기커녕, 그리하여 사색에의 힘을 얻기커녕 인위적으로 자연을 모독하여 순진한 사람의 눈을 속이려는 그것에 도리어 불쾌를 느끼게 되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현대의 권태가 담배연기와 같이 자욱이 떠도는 그 분위기 속에 숨 막히는 답답함이 도리어 정신을 흐려 놓아 줄 뿐이다.

  

하지만 잠지나마 다리를 쉬자면 역시 그러한 다방밖에 어디 밑 붙일 휴식처가 없으니 인위적인 철봉으로 생나무를 지지여 놓고 자연을 비웃으려는 그 분에 심은 나무와 억지로라도 벗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하면 그리하여 그 나무를 무시로 대하고 바라보며 인생을 생각해야 되는 것인가 하면 내 자신의 마음까지도 그 나무와 같이 철봉에 지지워드는 것 같아 그러지 않아도 속인으로서의 고민이 큰데 자꾸만 인위적인 속인의 속인으로 현대화되어 가는 것 같은 자신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 늙은 철학자 밤나무의 자연 속에 생각을 깃들여 자연 그대로 살고 싶은 욕망이 전에보다도 더 한층 간절하다.

  

나 떠난 이후에 이 늙은 철학자는 누구와 더불어 뜻을 바꿈으로 마음을 치는지, 조부님 좇아 이젠 연로에 자유롭게 이 철학자와 벗을 하실 기력이 근심되는데….

 

 


 

 

꽃을 여자에게 비한다면, 진달래는 이미 춘정을 잊은 스무 고개는 훨씬 넘어선 여인 같으면서도 또 정숙하여 보입니다. 그리고 확호한 인생관이 유행이라는 데는 눈도 뜰 줄 모르는, 그리하여 속세의 풍정과는 높이 담을 쌓은 점잖음이 속속들이 깃들여 있어 보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꽃은 나비를 기다려 춘정을 느끼건만 진달래는 나비도 오기 전에 산간 깊숙이 홀로 피어서 스스로 봄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진달래와 같은 시절의 피는 꽃으로 두봉화(杜蜂花)가 있습니다. 두봉화는 꽃도 잎도 그리고 나무까지 분간할 수 없이 진달래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두봉화인 것같이 벌을 방비하는 약을 지니고 있는 것이 다만 진달래와 다른 것뿐입니다. 꽃을 싼 화판 밑에는 어교(魚膠)보다도 거센 진이 꽃이 시들 때까지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제아무리 큰 벌이라도 와서 어르다니기만 하면 발이 붙고, 일단 붙으면 헤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생명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봉화의 지조도 아니 가상타 할 수 없습니다만 진달래는 그러한 것의 방비책으로보다는 마음으로 그것을 이기어 내는 데 좀 더 고상한 뜻이 담긴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두봉화와 진달래는 같은 형상, 같은 빛의 꽃이로되 우리는 진달래를 좀더 알고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진실로 진달래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놓는 힘은 큰 것입니다.

  

화전(花煎)이라면 진달래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진달래가 봄 일찍이 피는 꽃이니까 한겨울 동안 그리웠던 춘정에서 빨리 서두는 것이 진달래를 찾게 되는 원인 같으면서도 진달래보다 빨리 피는 개나리를 찾아 화전을 노지는 않습니다. 다른 어느 꽃보다 붉은 꽃이 좀 더 유혹적이기는 하지만 그 빛의 유혹에서라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우리는 진달래의 그 높은 품위와 아름다운 마음씨에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보는 것만으로서는 만족하지 못하고 그 꽃을 먹어까지 보자는 것이 화전의 목적으로 찹쌀가루에 꽃잎을 따 넣어서 꽃전을 지지어 먹는 것입니다. 술병을 지니고 진달래를 찾는다 해도 우리는 반드시 그 술잔에다 꽃잎을 뜯어 띄워서 마시고야 만족합니다. 이것은 높은 뜻을 지닌 진달래 꽃빛 물이 내 마음속에도 물들어지고 싶은 그러한 심정에서가 아닌가 합니다.

  

봄이면 그리운 진달래입니다. 해마다 한식절(寒食節)이면 선조의 선영(先瑩)으로 성묘를 가서 그 산 속에 핀 진달래꽃을 따 먹어 보며 노닐던 어린 날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이 봄에서 성(盛)히 피었을 그 선영의 그 진달래꽃, 그 진달래는 내가 그렇게도 저를 그리워하는 줄이나 알고 피었는지? 아니, 속진(俗塵)에 무젖은 나를 잔뜩 피어서 비웃고 있는 것인 아닐는지? 진실로 한 잔 술에다가 진달래 꽃잎을 마음껏 따 넣어 실컷 마셔 보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속을 새빨갛게 물들여 진달래 마음이 되어 보고 싶습니다.

 

 


 

 

하필 꽃에 있어서뿐 아니라, 무슨 빛에 있어서나 그 어느 다른 빛보다 붉은 빛이 좀더 유혹적이거니와 같은 향기를 담은 같은 장미로되, 황장미(黃薔薇)보다는 홍장미(紅薔薇)가 한결 마음을 끈다.

  

황장미를 보통 여자에 비한다면 홍장미는 확실히 그것을 뛰어넘는 미인이다. 그리고 황장미는 숙성한 여인같이 점잖아 보이는 데 반하여 홍장미는 한참 시절을 자랑하는 17, 8의 처녀 같은 애교를 가졌다.

  

나는 이 붉은 장미의 애교에 반했다. 어느 때나 무시로 대할 수 있는 가족공원의 한 모통이에 핀 꽃이건만 나는 그렇게 한지(寒地)에 세워두고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한 가지를 꺾어 책상 위에 꽃아 놓고 마주앉아 그 높은 향기와 애교에 취하고 또 사랑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가지를 꺾으면 그렇게 고이 가꾸던 꽃이 성기어져 보기 싫을 것을 염려하면서도 나는 칼을 꺼내 들고야 말았다.

  

그러나 가시 때문에 용이히 손을 댈 수가 없다. 뿌리짬에서 줄기의 끝까지 바늘끝같이 날카로운 가시가 손을 대일 자리도 없어 다닥다닥 붙었다.

  

황장미에는 그래도 손댈 자리는 있는데 이 홍장미에 그렇게 많다.

  

이것은 마치 예쁜 여자일수록 마음이 독하듯 꽃도 그러한 듯하다. 예쁘게 생기면 뭇사람들의 눈독을 많이 받아야 될 것이니까 그 예쁘고 아름다운 미의 절개를 지키게 하기 위하여 창조의 신은 미를 지으실 때에는 반드시 그 보호책으로 독을 주신 듯하다.

  

그러나 미를 사랑할 줄 아는 인간은 그것을 마음껏 사랑하여 보아야 만족을 느낀다. 가시 때문에 꺾기가 힘들다고 나는 그대로 두지는 못했다. 가시가 손에 닿지 못하게 새끼로 채앵챙 감아쥐고 기어코 그중에도 탐스러운 한 가지를 꺾고야 말았다.

  

미인치고 지조를 가지는 여자가 드물다거니와 근본적으로 마음이 방탕한 탓은 아닐 게다. 미인일수록 그만치 마음은 독했으리라. 그러나 이 미에 취하는 눈은 꺾기 어렵다고 그 미를 그대로 두지는 않는 소이(所以)가 아닐까 한다.

  

나는 화병에다가 꺾은 꽃가지를 볼품좋게 꽂아서 책상머리에 놓았다. 그러나 그 당시뿐이었다. 그 꽃을 꺾을 그때처럼 정열적으로 그 꽃에 사랑이 가지 않았다. 시들기에 보니 물 주기를 며칠이나 게을리 했던 것이다. 미에 취하는 마음도,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도 일시였던 것이다. 그 미를 꺾음으로 나의 미에 대한 욕심은 벌써 만족하였던 모양이다.

 

 


 

 

우중(雨中)에 미안하나, 좀 급히 와 달라는 벗의 부름을 받고 연두 끝에 우산을 벗긴다는 것이 어둠 속에 그만 제비 둥지에 손이 닿았던 모양이다.

  

둥지 안에서 알을 품던 제비가 파드득 날아난다.

  

지척도 분별할 수 없는 새까만 이 밤중에 더구나 비까지 내리는 이 밤중에 어디로 날아 났을까, 꽤 그놈이 다시 제 둥지를 찾아 들어올까, 둥지 틀 자리까지 손수 만들어 주고 고이고이 새끼를 쳐 내가기를 바라던 내 마음은 자못 불안하였다.

  

받으려던 우산을 나는 다시 내려놓고 방안으로 얼른 들어가 램프불을 밖으로 내다가 번쩍 들어 둥지를 비춰 주었다. 그러니까 어디를 갔던 겐지 획 하고 제비가 어둠 속으로 불빛을 좇아 재빠르게 날려 들어온다. 그러나 연두 끝에 바짝 다가 틀어 놓은 둥지에까지 자유롭게 내려 붙기에는 아직도 불이 어두운 모양이었다. 둥지를 배앵뱅 싸고 돌면서도 올라붙지를 못한다.

  

그러니까, 그 옆 처마대에 올라앉아서 자던 수놈이 목을 넌지시 빼고 좀 더 바짝 날아 들어오라는 듯이 재재거리며 부른다. 그러나 암놈은 붙으려다 붙으려다 못 붙고 기진하여 다시 처마 밖으로 벗어나 지붕으로 날러 나가 앉는다. 그리고는 숨을 태이는 양, 깃을 늘이고 한참이나 앉았더니 또 처마 밑으로 날아 들어와 아까 모양으로 둥지에 붙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소망을 못 이룬다. 두 번 세 번 이렇게 들락날락 거듭하기를 칠팔차나 하던 제비는 깃까지 함북이 비에 젖어 나는 것조차 둔하여져서 둥지의 주위에도 날아오르지를 못하고 토방과 처마 끝의 반 중동에서 오르락내리락 헤맨다.

  

그 정상은 내가 보기에도 딱하니, 처마 끝에 앉아 있는 수놈이야 오죽할 것인가. 둥지에까지는 못 올라붙어도 여기에나 올라오라는 듯이 수놈은 한편 쪽으로 몸을 앉은걸음으로 비켜 가며 자꾸 재재거린다. 허나, 그 암놈은 기운이 다 빠진 듯이 거기에까지도 오르지 못하고 토방 위에 떨어지듯이 그만 내려앉고 만다. 고추장빛 턱 아래 털이 몹시도 불룩거리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숨이 찬 모양이다.

  

한참이나 이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수놈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처마대를 왔다갔다하며 안타까워하더니 그만 참을 수 없는 듯이 푸드득 날아 내려와 자꾸 올라가자고 위로 날아올랐다가 토방 위에 내려앉았다가 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암놈도 수놈의 그 뜻을 아는지 푸드득 같이 날아오른다. 그러나 역시 둥지에 붙지를 못한다. 아니, 그 수놈까지도 암놈과 같이 붙으려다 붙으려다 붙지 못하고 토방 위로 내려앉고 만다. 그리하여 두 놈이 다 올라붙지를 못하고 번갈아 오르락내리락하더니 필야엔 암놈이 먼저 올라붙는다. 그러나 이제 또 수놈이 처음 암놈 모양으로 올라붙지를 못하고 한참식이나 태수를 하다가는 힘이 빠져 떨어지곤 한다.

  

그러니까 이번엔 암놈이 또 둥지 속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처음 그 수놈 모양으로 안타까워하다 못해 수놈 따라 또 좇아 내려온다.

  

등불을 들고 장시간 이것을 바라보고 섰던 나는 그 제비 부부의 아름다운 마음씨에 자못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생사를 같이하려는 그 높은 정신에 나는 내 마음의 온갖 것을 빼앗기고 어서 두놈이 다 같이 처마 대로 올라붙어 그 높은 희생적인 정신에 위안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암놈이 붙으면 수놈이 못 붙고, 수놈이 붙으면 그 적엔 암놈이 또 못 붙고 오르락내리락 안타깝다. 급기야 그 두 놈이 다 제 자리에 올라붙기까지에는 내 누이동생까지 불러내다가 쌍불을 받아 비추어 주었을 때로, 그 동안이 아마 한 시간은 나마 걸렸으리라고 보였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급하게 부르는 벗에게 미안함을 느꼈으나, 그것보담 오히려 무슨 커다란 무엇을 얻은 듯이 마음은 흡족한 것이 있었다. 만일 벗이 꾸짖는다 하더라도 할 말이 있는 것 같고, 그리고 설혹 벗이 내 마음을 비웃는다 하더라도 나는 거기에 스스로 만족할 것 같은 느낌이 조금도 벗에 대한 신의에 미안할 것 같지 않았다.

 

 


 

 

서울서 사자니 제비가 그립다. 봄 삼월이면 해마다 잊지 않고 내 서재(書齋) 문〔窓(창)〕앞 처마 밑에 들어와 깃을 들이고 새끼를 치던 그 제비가 그리운 것이다.

  

시골 있을 땐 음력 이월 그믐이 접어만 들면 나는 제비가 들어와 둥지 틀 자리를 나무 판지라든가 그러한 것으로 적당한 곳에 마련을 해 놓고는 맞아들이곤 했다. 그리고는 그놈이 아무 지장도 없이 고이고이 새끼를 쳐 내가 기를 이심으로 바라곤 했다.

  

그것은 무슨 제비가 들어와 새끼를 쳐야 그 집에 운이 든다는 그러한 전설을 염두에 두어서가 아니라, 나를 찾아들어와 내 방문 앞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치는 그것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였다.

  

그것은 참으로 내 가족과 같이 귀여웠고 사랑스러웠다.

  

그러한 제비였건만 서울 와서 살게 되면서부터는 아주 소원하여졌다. 나를 찾아 들어오는 놈이 있기커녕 공중에 날아다니는 그것조차 찾을 길이 없어졌다.

  

내가 서울 살림을 이제 처음 하여 보는 것이 아니요, 학생시절로부터 통산을 하여 보면 십유여 년은 살았을 것이다. 그때는 집이라는 것이 없었고 남의 집 한 칸 방을 빌려 기숙을 하는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니까 특별히 그러한 관심이 없었던 것이나 집을 잡고 살림이라고 살게 되니 가족과 같이 여기던 그 제비라, 그 제비가 안 들어오니 가족이 안 들어오는 듯이 그 제비가 그리운 것이다. 실로 나뿐이 아니라, 선조대대로 봄이면 맞아들이고 살던 그 제비였다고 생각하니 제비 없는 집에 살기가 더욱 쓸쓸한 감이 있다.

  

시골선 제비가 안 들어오는 집이면 흉가라고 한다. 그놈이 참으로 이상한 짐승이기는 한 것이었다. 안 들어오는 집은 영 안 들어온다. 시골이라도 읍(邑)이라든가 그런 고층건물이 번화한 거리에는 으레 들어오지 않는 것이지만 농가로 떨어져서도 안 들어오는 집이 있다. 조금도 다름이 없는 그 집이 그 집이나 마찬가지인 초가이로되 집이면 집마다 다 들어오면서도 빼어놓는 집이 있다.

 

그러면 그 집의 그 해의 운은 나쁜 것이라고 추측을 하게 되는 것이 농촌 일반의 상식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흉수(兇數)를 말할 만한 것이라는 그렇게 믿을 만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니 그놈이 번화한 도시에는 들어오지 않는 것과 같이 어딘지 그 집에는 그놈의 비위에 맞지 않는 그 무슨 점이 필시 있을 것이라고 알 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일을 직접 한 번 내 집에서 지나 본 일이 있다. 십여 년 전 내 집이 파산을 당할 때 내 서재에는 물론, 건넌방 큰방 사랑방 할 것 없이 방이면 방마다 그 방문 앞 처마 밑 도리 짬에다가 세 쌍, 네 쌍, 심지어는 다섯 쌍, 여섯 쌍 그 수도 모를 만치 들어와 다투며 둥지를 틀던 것이, 이 해 따라 어느 방문 앞에나 깃을 들이지 않고 그저 들어와서는 처마 밑에 그 무슨 무서운 것이 있기나 하는 듯이 기웃 하다가는 달려나가서 지붕 위를 빙빙 돌아가는 나가고 하면서 간혹 가다가 마당에 건너 맨 빨랫줄에 앉아 보되, 그것도 못 앉을 데를 앉은 듯이 날름하니 앉았다 가는 곧 날아 나가곤 했다.

  

이렇게 하기를 삼사 쌍이 들어와서 봄내 하더니 여름철을 접어들면서 겨우 한 쌍이 내 서재 문 앞 처마 밑에 둥지를 틀고 새끼 한 배를 쳤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도 역시 그 전해 모양으로 제비란 놈이 들어와서는 지붕만을 빙빙 돌다 나가고 나가고 하다가 또 한 쌍이 남아서 깃을 들이고 하더니 설레는 집안이 조용해지자 삼 년째 되던 해 봄에 이르러서야 방문 앞마다 쌍쌍이 들어와 이른봄부터 예전대로 둥지를 틀었다.

  

이것이 이상하기는 했다.

  

대체 제비란 놈이 사람의 집 문전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치려는 그 이유는 오직 사람을 믿고 자기를 해할 고양이라던가, 이런 모든 짐승을 돌보아 주리라고 믿는 데 있다고 추측되는 것만은 사실 같으니, 가령 그놈이 새끼를 치려고 하던 집에 불안한 빛이 보이게 되면 자기의 신변까지 보호하여 줄 그러한 성의가 그 집에 없으리라는 것을 엿보는 데서가 아닐까 하고 그 원인이 어디 있을 것인가를 한동안 생각해 본 일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제비가 대답을 하지 않는 한, 영원한 숙제로 남을 그러한 성질의 것밖에 더 되는 것이 아니어서 다시는 더 그것을 생각하려고도 아니하고 있는 지가 오래다.

  

이제껏 내가 제비를 못 잊어 하는 것은 다만 나를 찾아 해마다 들어오던 그 귀여움을 못 잊어서고, 또 내 집이 있게 된 후부터 몇 백 년을 맞아 오던 그 제비를 맞지 못하는 섭섭함이 늘 마음에 남아 있는데서다.

  

서울도 제비가 들어오기만 한다면 내 서재 문 앞에 틀던 그 제비가 와 주기를 바라기나 하련만 내가 없으니 그 서재에 둥지 틀던 그 제비 필시 자리를 옮겨 뉘 집 문전에 깃도 들이고 그 집주인의 사랑을 받고 있을 것이라 아니 다시 그 시골집의 서재로 돌아가 그 제비를 불러다 놓고 책을 들고 앉아 보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간절하여진다.

 

 


 

 

정릉의 산 속은 새소리 없이도 푸르다. 물소리만이 그저 솨아솨 골짜기마다 들릴 뿐인데 산은 푸르렀다. 새소리를 무시하고도 정기만으로 푸르른 그 기개만은 장하다 아니 할 수 없으나 적어도 이만한 녹음이라면 꾀꼬리 소리 한마디 들을 수 없음이 무색하구나.

  

내 본래 산이나 바다의 취미를 모르거니와 오늘 내가 정릉의 녹음을 찾게 된 것도 무슨 이런 녹음의 유혹에서가 아니요, 사우(社友)들의 종용에 마지못해 따라 나섰던 길이니 그까짓 녹음이야 짙었던, 말았던 꾀꼬리야 울던, 마던 어아(於我)에 하관(下關)이리오만 그래도 이 녹음에, 이 물소리라면 꾀꼬리 소리 한마디쯤은 있어야 면목이 설 것 아닌가. 어쩌다 오다가다 숲 속을 다녀가는 밀화부리 소리 한마디 들을 수 없다.

  

이러한 녹음(綠陰)도 좋다고들 모여든다. 우리도 그리 늦은 편은 아니었건만 언제들 이렇게 떨쳐났는지 아직 오정도 멀었을 텐데 산은 사람으로 찼다. 아니, 곳에 따라선 벌써 도도한 취흥에 허리를 부러치고 꼽당춤에 냄비 장단이 한참인 데도 있었다. 우리 일행도 물이 흐르는 골짜기의 한 곳을 택정하고, 짐을 풀었다. 소고기, 닭고기, 계란, 과자, 술, 쌀 거기에 이것들을 요리할 도구 일습이 자전거로 하나가 실리어 왔다.

  

논다는 것은 결국 먹는다는 의미가 아닐는지 모른다. 제 아무리 명승경개를 대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향락으로서의 본의였다면 반드시 먹는 일항(一項)이 따라야 그 의의를 지니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먹을 줄 모르는 것까지 먹어야 되는데 그 의의가 있다면 향락의 존재에 나는 의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일행 칠팔 인 중 다만 한 사람만이 호주객이요, 여타는 모두 비주객인데 우리의 짐 속에서도 소주가 한 되, 삐루가 서너 병 나왔으니 먹을 줄 모르는 술이라도 이러한 좌석에서는 먹어야 된다는 법칙일까. 그리하여 억지로라도 먹어야 향락이 되는 것일까. 어쩌자고 먹을 사람도 없는 술의 준비가 이렇게도 많았을까. 처리에 곤란할 것이 미리부터 짐작되었지만 결국 삐루 몇 잔에 나는 괴로웠다. 제가 그물을 떠나 놓고 그 그물에 걸려드는 것이 사람의 장난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지어서 괴롭게 만들어 놓고 괴로워하는 것으로 낙을 삼는 것이 인생 본래의 사는 재미인지 모른다. 육자배기 장타령에 산을 떠내 보낼 듯이 노자 때리던 맞은짝에서도 모두 혼곤히들 근더졌다. 즐거운 현상일까 괴로운 현상일까. 나도 한번 한껏 취하여 그들의 심경에까지 이르러 봄으로 그들의 심경과 같은 심경에서 인생을 한 번 내다보고 싶기도 하건만 몇 잔에 괴로운 술이니 도저히 그런 경지에까지 보지 못할 주량이 한이다.

  

“자, 한 잔만 더?”

  

하는, 권도 간절한 좌석의 권고이었으나 주량의 말을 안 듣는다.

  

나는 인생의 밑바닥을 들어가서는 살아 볼 수 없는 영원한 인생의 초년병인가 보다.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에….”

  

하고 곡조도 어디선가 흘러드는 것을 보면 술에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녹음에도 취하는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 같거니, 녹음에도 술에도 취할 수 없는 인생은 결국 괴로운 의의를 모르는 인생일까. 그렇다면 녹음도 술도 모르고 괴로운 내 마음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괴로움일까.

  

만산에 주흥이 물소리와 같이 골짜기마다에 찼는데, 오직 침묵으로 물소리만을 흘려 내려 보내는 이 골짜기는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녹음도 술도 무시한 이날의 히트에 틀림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