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소개]
전혜린(田惠麟, 1934년 1월 1일 ~ 1965년 1월 10일)은 대한민국의 수필가이자 번역문학가이다. 평안남도 순천(順川)에서 조선총독부 고급관리인 아버지 전봉덕(田鳳德) 슬하의 1남 7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으나, 3학년 재학 중 전공을 독어독문학으로 바꾸어 독일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에서 유학하였다. 법학도였던 김철수(金哲洙)와 결혼하고 딸을 낳았지만, 1964년 합의 이혼하였고, 같은 해 성균관대학교 조교수가 되었다. 1965년 1월 10일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주로 번역 위주의 활동을 하였으며, 사후(死後) 출간된 수필이자 일기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와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가 있다.
[작품 소개]
독일 유학의 경험과 여성 문제에 대해서 비교적 담당하게 소회한 에세이들이다. 갑작스러운 자살 이후 비루한 일상의 탈출을 꿈꾸는 이 땅의 젊은 여성들에게 머나먼 피안의 길을 제시해주는, 여성 해방과 서구적인 세련미를 상징해주는 아이콘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지금 읽어보면 무척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젊은 지식인이었다는 점을 알게 된다.
- 영원한 물음 ‘당신은 어디서부터 왔는가’에서 도망하고 싶었다.
내가 독일의 땅을 처음 밟은 것은 가을도 깊은 10월이었다. 하늘은 회색이었고 불투명하게 두꺼웠다. 공기는 앞으로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힐 물기에 가득 차 있었고 무겁고 척척했다. 스카프를 쓴 여인들과 가죽 외투의 남자들이 눈에 띄었다.
아무도 없는 비행장 뮌헨 교외 림에 내렸을 때 나는 울고 싶게 막막했고 무엇보다 춥고 어두운 날씨에 마음이 눌려 버렸었다.
뮌헨 하면 그 이후 내 머리에는 회색과 안개로 가득 차게 된 것도 그의 독특한 나쁜 날씨보다도 내가 에어프랑스에서 내렸던 그 날 오후의 첫인상과 나의 걷잡을 수 없었던 외로움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트렁크를 들고 비행장 버스에 올라 운전사에게 돈을 다 내어 보이고 그 중에서 1마르크만 가져가게 한
일, 힘없이 혼자서 하숙을 찾아 갔던 일 - 나는 정말로 내가 파리에 있는 말테나 된 듯한 서글픈 마음이었다.
우선 고국에서부터 연락해 놓았던 아스타라는 학교 사무국에 가서 벽에 붙은 벽보를 찾아야 했다. '빈 방 있음'의 광고를 보기 위해서였다. 모두 값이 비쌌다(내 생각보다). 또 학교에서 멀었다. 그리고 뮌헨은 나에게 마치 라비린트 그 자체처럼 보였었고, 학교에서 5분 이상 더 가는 곳에 가서 살 자신은 나에게 없었다.
그 중에서 나는 겨우 '빈 방 있음, 전기 있음, 학교에서 도보로 5분, 월세 50마르크'라는 꼬불꼬불한 연필 글씨로 쓰인 광고 용지를 찾아 냈다. 그 집은 정말로 학교에서 5분쯤 가면 있는 영국 공원이라는 광대한 공원에 임해 있었다.
첫인상이 포의 어셔 가를 연상시켰고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수가 어디 있으랴? 다른 빈 방들은 대개가 '미국인에게 한함'이거나 또 엄청나게 비쌌던 것을...
나는 다시 들어서는 발을 억지로 닫혀진 문 앞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60세 가량 된 극단적으로 비만한 흰 단발 머리의 할머니가 나왔다. 키는 작았고 차림새는 누추했다. 나는 '방을 빌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거나 '방을 빌릴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던 것 같다. 할머니의 표정은 의외로 상냥했고 입가에는 구수하다고 형용할 수 있는 미소를 띄어 보였다.
“학교 광고를 보셨습니까?”
할머니는 또 무엇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악의는 없는 말투였다.
“방을 볼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네, 네, 어서 들어오세요.”
방, 내 방인 것이다. 나는 그 할머니를 따라서 긴 낭하를 지나갔다. 낭하는 어두웠고 방이 많았고 방마다 사람의 이름이 작게 써 붙여 있었다. 맨끝에서 할머니는 멎어서더니 주머니에서 열쇠 뭉치를 꺼냈다.
“여기 살던 사람이 이틀 전에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페르시아 사람이었지요.”
열쇠가 돌려지고 문이 열렸다. 나는 주저하면서 할머니 뒤를 따라 들어갔다.
방도 마루처럼 어두웠으나 의외로 깨끗했다. 초록빛 도자기로 된 커다란 난로가 한편 구석에 서 있었고, 전기 곤로가 놓인 대와 흰 요와 이불이 덮인 침대가 하나, 그리고 경대와 찬장이 딸린 콤모데가 있었다. 창은 두 개가 영국 공원과 반대 되는 포도로 나 있었고 이중창에 이중 커튼이 둘러져 있었다.
“하시겠어요?”
할머니가 물었다.
“네.”
“방세는 한 달분 미리 내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할머니가 나간 후 나는 덧문을 열고 유리창을 활짝 열었다. 돌로 포장된 좁은 골목은 완전히 잿빛 안개로 덮여 있었고 물기가 촉촉히 방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어제까지나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사람이 별로 안 지나가고 여기는 뮌헨에서도 가장 오래 된 지역이고 폭격도 안 맞은 1920년대 그대로의 문명의 이기만을 쓰고 사는 마을인 것 같았다.
트렁크를 침대 밑에 넣고 나는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피로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은 안 왔다. 열쇠로 방문을 잠그고 거리로 나갔다. 그 때 마침 가스등을 켜는 시간이어서(다섯 시경이었던 것 같다) 제복 입은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좁은 돌길 양쪽에 서 있는 고풍 그대로의 가스등을 한 등 한 등 긴 막대기를 사용하여 켜 가고 있었다.
더욱 짙어진 안개와 어둑어둑한 모색 속에서 그 등이 하나씩 하나씩 켜지던 광경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짙은 잿빛 베일을 뚫고 엷게 비치던 레몬색 불빛은 언제까지나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내가 유럽을 그리 원한다면 안개와 가스등 때문인 것이다.
다음날 아침에는 나는 근처의 생활 필수품점에 가서 빵 두개와 마가린 한 통을 샀다. 전기 곤로 주전자를 올려놓고 나는 빵을 먹었다.
학교의 개강은 아직 한 달이나 남아 있었다. 나는 원래 돌아다니거나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었고 외국서는 더구나 무서웠다. 그러나 낮에 나는 큰 마음을 먹고(사실 도착 이래 식사다운 식사를 못 해서 배도 고팠다) 바로 근처에 있는 제로제라는 음식점에 들어갔다. 메뉴를 보았으나 별로 눈에 익은 게 없었다.
단 왜지 커틀릿이라는건 나도 알 것 같아 그걸 시켰다. 그러나 프로일라인(하인)이 가져온 것은 우리 개념의 커틀릿이 아니고 돼지고기를 큰 덩어리째로 그냥 삶은 것 같았다(실제로 그렇게 요리하는 모양이다). 나는 힘없이 먹기 싫은 음식을 앞에 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실 것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라는 물음의 뜻도 파악 못 하고 그냥 웃어 보였더니 작은 컵에 맥주를 따라서 갖다 주는 것이었다. 난 그냥 잠잠히 앉아 있었다. 말을 하면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을 안고... 그 때 여러 명의 틴 에이저들이 들어오더니 주크 박스 앞으로 다가가서 판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힐끗 나를 보더니 무슨 판을 눌렀다.
그에 이어서 뜻밖에도 일본말 노래가 새어나오는 데는 아연하여 보고 있었더니 일본의 이별의 노래라고 그 중의 하나가 나에게 알려 주듯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마 나를 일본인으로 안 모양이었다. 그 때만 해도 뮌헨에 한국인이라고는 거의 없었고 더구나 여자는 구경하려 해도 없었을 때니까 아마 그렇게 짐작한 모양이었다. 나는 역시 웃어 보였을 뿐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 서글퍼졌고 덜 혼자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 후로 나는 오후나 저녁때 그 집을 자주 찾아갔다. 거리도 내 방에서 가까웠고 음식값도 다른 데보다 싼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프로일라인도 친절했다. 늘 말없이 호의를 보여 주었고 주간지도 내 테이블에 갖다 주곤 했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이 음식점이 보통 음식점이 아니라 예술가들의 합숙소인 것도 알게 되었다. 목요일에는 '시의 밤'이 있고 화요일에는 '화가의 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집의 한편 벽에 더덕더덕 붙어 있는 사진이며 편지며 분필 사인이 토마니 링겔나츠니 캐스트너니 좀머니... 하는 쟁쟁한 작가나 화가나 만화가들의 소행인 것도 점점 알게 되었고 이 집이 한때 반나치 운동의 중심이었던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일제 아이힝가라는 여류 시인의 존재를 그 여자의 특이한 용모와 매력적인 긴 흑발과 함께 알았다.
가을은 깊어만 갔다.
강의가 끝나면 나는 학우들(오스트리아 여학생이나 프랑스 학생)과 같이 근처의 다방에 가서 크림 커피 한 잔으로 점심을 때우는 방법도 배웠다. 주립 도서관도 자기 집 내부처럼 환히 알게 되고 뮌헨 시내의 고서점이란 고서점은 다 환히 알게 되었다. 헌 책방 주인과도 친해지고 이미륵 씨 얘기도 듣게 되었다. 학교 정문 앞에서 파는 군밤 장수의 군밤을 50페니히쯤 사서 교실에서 먹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그러나 마음은 몹시 허전했다. 고국에까지 뛰거나 걸어서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무서운 심연을 내 마음 속에 열어 놓을 줄은 나도 몰랐었다.
짙은 안개를 들이마시면서 나는 새파란 하늘을 그리워했다. 감나무나 대추나무를 꿈에 그렸다. 사실로 내가 그리워한 것은 황색 그림자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감상이나 미학적인 어떤 음탄이 아니었다. 그것은 색이 있는 민족의 환영 - 그들의 비극이 내 속에 담겨져 있고 그들의 대표자로 내가 여기에서 간주되고 있는 그러한 비전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였다고 해도 좋다. 강의실 내의 교수의 방언과 노령에 의한 발음의 불명료에 그리고 '생활 필수품점' 속에 진열돼 있는 셀로판지로 담긴 이탈리아 쌀에... 어디서나 그 비전은 나를 따랐다.
뮌헨 대학에서 내 하숙에 이르는 레오폴드 거리는 거대한 꼿꼿하게 높기만 한 포플러 가로수로 줄지어져 있었다. 그 길은 온갖 빛의 낙엽으로 두껍게 깔리기 시작할 무렵의 가을이 아름다웠다. 그 거리에는 작은 어항같이 생긴 '유리 동물원'이 있었다. 유리로 기막히게 정교하게 만든 온갖 작은 짐승들, 도자기
발레리나들... 안데르센 동화 속의 나라 같았다. 나는 매일 그 앞을 지날 때마다 5분 이상이나 진열장을 들여다보곤 했었다. 갖고 싶고 애무하고 싶은 유리 동물들이었다.
그 가게 뒤에 쓰러져 가는 '노아 노아'라는 집이 있었다. 거기는 다다이스트의 집합소로서 늘 해괴하고도 기상천외인 그림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화가들이 수염을 늘어뜨리고 떠들며 담론하는 살롱이기도 한 것 같았다. 때로는 에리카 만의 낭독회도 열리는 모양이었다.
그 무렵에 나는 제로제보다 더 싼 음식점을 발견했다.
서서 먹는 집이었다. 흰 소시지를 불에 구워서 겨자를 발라 먹는 소시지 집이었다. 거기다가 신 오이 한 개와 리모나데 한 컵을 먹어도 1마르크가 안 되니 싸기도 하려니와 냄새만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맛이 있었다.
먹는 것은 간단히 빨리... 그리고 나는 걸어다녔다. 학교에서 내 집까지 사이의 골목 그리고 영국 공원 속...이러한 곳이 내 산보지였다.
어떤 날 나는 백조가 마지막으로 떠 있는 것을 저녁 늦도록 지켜 본 일이 있다. 어둑어둑한 박명 속을 흰 덩어리가 여기저기 모여 있었고 때때로 바스락 소리를 냈다. 몹시 외로워 보였다.
나 자신의 심경이 그대로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마음 속을 뒤흔들린 편지를 매장한 곳도 이 호수였고 내 꿈과 동경 – 몇 년이나 길게 지속되었던 - 을 던져 넣어 버린 곳도 이 호수 속이었다. 이 호숫가의 가스등 밑에서 나는 안개에 감싸이는 쾌감과 머리를 적시는 눈에 안 보이는 비를 맛보았다. 그리고 추위에 떨면서 귀로에 서곤 했었다. 도자기 난로
속에서 석탄이 붉게 타오르는 것을 지켜 보고 있으면 쓸쓸하지 않았다. 불이 타오르는 소리, 그리고 붉은 불의 혓바닥...이러한 것과 함께 있는 것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불길을 지켜 보면서 언제나 어떤 시의 구절을 생각했다.
휴식과 포도주에 넘친 어둠,
슬픈 기타 소리가 흐른다.
그리고 방 안의 부드러운 등불로
꿈 속처럼 너는 돌아간다.
공기에서는 서리와 안개와 낙엽 냄새가 섞여서 났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공원에 가는 일도 드물어졌다. 11월 중순 - 아직 한국에서는 가을이지만 여기서는 눈이 큰 송이로 내렸다. 눈이 내리는 소리, 그리고 난로의 석탄이 타오르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날이 계속되었다. 눈이 와도 무섭게 왔다. 세원 둔 자동차가 눈에 폭 파묻혀 안 보이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한국서 가져온 얇은 천으로 된 학생용 검은 오버를 입고 오돌오돌 떨면서 학교에 다녔다.
점심은 커피 대신 그로크(펄펄 끓인 포도주)와 수프로 했다. 그래도 추웠다.
때로는 눈이 멎고 다시 영원한 뮌헨의 하늘빛인 회색 구름장이 덮이거나 안개비가 촉촉히 내렸다.
나는 두꺼운 색양말을 신고 두꺼운 머릿수건을 쓰고 다시 공원으로 갔다.
사람이라고는 없고 나뭇가지가 앙상한 해골을 노정시키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서 검은 나뭇가장이들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변함없는 회색일까? 하고...
아는 얼굴이나 목소리가 하나만 있어도 이 하늘이 이렇게까지 우울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한 물음 '당신이 어디서부터 왔는가?'에서 도망하고 싶었고 황색 비전을 나는 좇고 있었다. 낮이나 밤이나 우울한 회색과 안개비와 백일몽의 연속이었다. 악몽처럼 혼자라는 생각이 나를 따라다녔고 절망적인 '고국까지의 거리감'에 나는 앓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뮌헨의 가을 하면 내가 처음 도착한 해의 가을이 생각나고 그 때의 심연 속을 헤매던 느낌과 모든 것이 회색이던 일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아무것에도 자신이 없었고 막막했고 완전히 고독했던 내가 겪은 뮌헨의 첫가을이 그런데도 가끔 생각이 나고 그리운 것은 그러나 웬일일까? 뮌헨이 그 때의 나에게는 미지의 것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인지, 또는 내가 뮌헨에 대해 신선한 호기심에 넘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개비와 유럽적 가스등과 함께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때의 나의 젊은 호기심인지도 모른다.
나의 다시없이 절실했던 고독인지도 모른다.
- 여성의 가장 큰 본질적 약점은 사치의 광적 추구와 같은 생에 대한 비본연성인 것 같다.
'여자는 전체로 보아서 아직도 하인의 신분에 있다. 그 결과 여성은 자기로서 살려고 하지 않고 남성으로부터 이렇다고 정해진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를 선택하도록 된다. 남자의 손에 쥐어진 경제적 특권, 남자의 사회적 가치, 결혼의 명예, 남자에 의존하는 것에서 얻는 효과, 이러한 모든 것이 여자들로 하여금 남자의 마음에 들도록 애쓰고 있다.'
여성에 관해서 말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남성에 대한 여성의 관계에 있어서 언급되어야 한다. 우리 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여성과 남성 간의 사회적 차이와 대립이 완전히 제거된 곳은 없으며 앞으로도 사회 구조의 전적인 변화가 없는 한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몹시 느린 속도로 향상되어 가는 과정에 있고 아직도 우리는 평균적으로 보아서 여자가 사회에 한 발을 디디고 서기가 마치 미국에서 한 흑인이 그렇게 하려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힘드는 처지에 있다. 그러한 남성과 여성 간의 커다란 차이를 미리 고려하면서만 우리는 여성의 제문제 또는 약점을 파고들어갈 수가 있을 것이다.
여성의 가장 본질적 약점으로 나는 생 전반에 대한 비본연적 태도를 들고 싶다. 자기 자신을 순간순간마다 의식하고 사회와 세계에 대해서 자기를 투기하고 초월하면서 사는 것이 본연적인 생활 태도라면 태반의 여성의 생활은 그와 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보다 큰, 보다 진실한 문제 – 유는 - 에 빠져 있고 그 곳에서 아무런 타격도 전율도 반응 없이 흘러가듯이 사는 생활 태도, 말하자면 비진정하고 불성실한 생활 태도가 대부분 여자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녀를 막론하고 인간이라는 무서운 조건하에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유일의 일은 우리의 삶을 규명하는 것일 것이며 적어도 그러한 근본적인 생활 감정에 지배된 생활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의 진실하고 엄숙한 문제는 회피하고 자그마한 일들, 물진, 사치스런 생활, 남자에게 의존 또는 기계와 같은 나날의 틀 속에 안면하는 의식, 이러한 것들 속에 자기를 소외해 버리는 생활은 허위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생과 사에 자기를 똑바로 응시하고 산다는 것은 무서운 용기와 신경력을 요한다. 특히 이 사회의 구조와 한국적 풍토 속에서는 너무나 신경이 긴장되는 작업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전생의 의의가 무로 화하는 것이니까 그것을 회피하는 것은 일회적으로 주어진 우리 삶에의 죄인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좀더 응시할 수 있을 것, 자기를 견딜 수 있을 것이 결과적으로는 다 비극인 우리의 생의 소상을 긴박한, 팽팽하게 차 있는 참된 순간으로 지속시키는 방법일 것이다.
우리가 존재에서 외면하고 사실의 세계로만 눈을 향하는 데에 여성에 대한 사회의 비난의 근본 원인이 있다고 본다. 자기 과제를 느끼지 못하는 삶에는 필연적으로 공허가 따르고 따라서 오락의 필요가 생긴다.
최신 유행의 여성들에게 갖는 매력은 거기에 있다. 왜냐하면, 물건을 사는 것 - 특히 몸에 붙일 - 은 어느 나라 여성을 막론하고 남자들에게 있어서 바와 필적할 만한 상쾌한 오락인 까닭이다.
가장 유행이고 가장 비싼 물건을 입거나 신을 여자의 얼굴에는 반드시 어떤 빛나는 생기가 떠 있다. 그 순간은 그 여자는 살고 있는 까닭에 자기가 이룰 수 없는 사회 내의 일이나 지위나 가치의 인정을 완전히 보상해 주어서 하고 있다.
사치스러운 복장에 대한 여성의 판타직은 억눌려진 야심 사회 내에서 해당하고 싶은 본질적 욕망과, 자기는 다른 여자와 다르다고 어떤 여자든지 반드시 믿고 있는 오신, 또 누구나 다소 가지고 있는 나르시즘(자기 연애) 등의 혼합물인 것이다.
정말로 수많은 여인은 이 광신의 추구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아끼지 않고 있다. 월급의 전액을 차지하는 값의 지갑을 태연히 들고 다니고 연봉에 해당되는 값의 외투도 서슴지 않고 해 입는다.
현실에서는 발견하거나 인정되지 않는 자아의 가치를 이러한 방법으로나마 가상적으로라도 만들어 보려는 것이다.
외투도 신도 곧 닳아 버리는 물건이고 유행도 바뀐다. 즉 가상적 자아의 '바벨탑'은 너무나 빨리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면 또 새로운 투쟁이 시작된다.
이렇게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여성의 물질에 대한 애착은 웃거나 비난하기에는 너무나 어둡고 심각한 근원이 여성의 내재 속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비본질적 존재로 여성을 만든 것은 여성의 지능 계수도 생리도 아니고, 다만 사회의 상황인 것으로 사회와 가정은 여성을 가능한 한 비본질적으로 교육하기에 전력을 다해 왔다.
여성의 자주성을 찾으려는 가장 조그만 움직임이나 생각까지도 조소되고 비난받아 왔고 다만 두 사람의 합의에 의해서 공동하게 생활을 건설해 가고 둘이 다 자아의 생장을 지속시켜 가는 공동체라고 보아야 할 결혼을 사회는 여자의 궁극적인 숙명, 여자의 자아 발전의 무덤으로서 또 어떤 절대적인 영광스러운 예속으로서 가르쳐 주어 왔다.
말하자면 비진정하면 할수록 여자다운 여자일 수 있다. 그러한 전통에 닦인 여자도 자연히 그러한 사고 방식을 갖게 되었고 그것에서 이익을 끝내어 줄 것까지도 알게 되었다.
즉 자기의 삶 전부를 실존을 스스로 순간마다 결단하고 세계로 향해서 투기하는 생활 대신에 한 남성에게 자신을 꽉 맡겨 버리고 자기는 더 이상 사고할 필요 없이 사소하고 무상하게 흘러가는 일상성과 사실성의 세계에 파묻히는 편이 얼마나 편하고 또 사회에서 잘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어느 여자도 그것에 완전히 만족하거나 행복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런 생활에는 일순 일순의 팽팽한 충일감과 초월의 느낌이 없을 것이다. 어느 주부든지 어떤 순간에는 반드시 자기를 부조리하게 느낄 것이다.
쌀 씻고 빨래하고 옷 꿰매고, 나날의 무서우리만큼 단조한 반복 속에서 그 여자의 인식은 엷게나마 눈을 뜰 것이다.
이것이 나의 생활인가 하고, 그럴 때 우리는 그 의식의 각성을 소중히 포착해야 한다. 그리고 파고 들어가야 한다. 분명 그것은 나의 생활이 아닌 것이다. 누구냐의 생활에 불과한 것이지 자기를 사물이나 타자의 속에 소외해 버린 일반적인 아무나의 삶이지 그것은 이 일회적인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의식할 때 우리는 생이 진정한 것이 아니었고 불성실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보다 한 발자국 나와 가까워진다. 자아에 대해서 비로소 눈을 뜬 느낌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도 자아에 자기의 감정과 이성과 신경에게 충실한 것, 그것 이외에 우리가 자아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없다. 그것만이 사치, 허위, 소극성, 아첨, 비굴, 수다 등등의 여성에 붙여진 비난의 제 레테르를 벗는 길로 한 걸음 나아가는 길이다.
이 모든 레테르는 남성들의 사회에서 남성에 의해서 붙여진 레테르이다.
그러나 사회 상황의 변화에 의해서 남녀가 정말로 동등한 입장이 되고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향해서 자신을 초월하는 행위 속에 자기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여성은 개인적으로라도 무서운 고독과 절망과 싸우면서 자아를 좇는 길을 걸어가지 않을 수 없으며 현재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 숨은 곳에 많으리라고 확신한다.
지엽적인 여성의 결점은 모두 이러한 비실존적 생활 태도에서 나온 것이므로 우리는 여성의 결점을 열거하는 것보다도 우선 우리의 존재의 문제를 좀더 밝혀야 한다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사회적·경제적으로 비의존적으로 투기가 가능해진다면, 아니 한 마디로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남성의 그것과 동등해진다면 여성의 근본 결함인 비진정, 불성실한 생활 태도는 자연 소멸하고 여성도 보다 높은, 보다 참된 과제를 자기의 생활 과제로 삼게 될 것이다.
- 그 당시 언제나 내 입에는 '출발하기 위해서 출발하는 것이다'라는 누군가의 시 구절이 떠나질 않았다.
왜 하필 독일에 가게 되고 또 독문학을 공부하게 되었는가? 라고 간혹 질문받을 때마다 나는 한 마디로 대답을 못 한다.
그리고 '우연이지요'라고 대답할 때가 대부분의 경우였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나의 유학의 동기는 막연했고 또 우연의 별의 지배 밑에 놓여 있었던 것 같기만 하다.
나는 국민학교 때부터 대학까지를 관립 학교만을 나왔었고 다녔었다. 또 점수따기와 책상버러지와 독서광의 부류에 속해 왔었다. 따라서, 이러한 경로를 밟은 사람이면 알 수 있는 온갖 관료적, 점수주의적 암기식 교육에 대해서 맹렬한 반발과 자유로운 학문에 대한 끝없는 갈망을 품고 있었다.
부산 영도의 피난 가교사에서 졸업식을 마치고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와 또 커트라인 높은 학교에 대한 우등생다운 유치한 무의식의 흥미로 법대에 입학하고 난 후부터 나는 몹시도 혼란한 정신상태 속에 살고 있었다.
배우는 학과마다 'du sollst(너는 해야 한다)'였고 로마 제국의 법언과 양피지 냄새가 났었다.
조금도 리얼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가장 리얼한 시스템인 정치 체계 위에 세워진 학문이 가장 공소하게 나에게는 느껴졌었다.
그것이 없으면 절대로 안 되는 유일의 것, 궁극적인 것이 빠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유일의 것은 그 때의 나에게는 정신 또는 철학이라고 느껴졌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 때부터인지 철학을 공부하려 마음먹게 되었고 책을 읽게 되었다.
그러나 외국에 간다는 것은 언젠가의 꿈으로 돌려져 있었다.
대학 3학년, 내가 스물한 살 때였다. 나의 둘도 없는, 그 때 미국에 가 있던 주혜라는 친구가 독일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느냐고 편지를 했었다. 주혜는 그의 아버지의 친구인 독일인을 서신을 통해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 다음은 수없는 서류 작성과 독일어 공부, 유학생 시험... 그리고는 한국이 세계에서도 그 복잡성과 번거로움에 첫째 간다는 출국 수속으로 바삐 돌아다녔다.
언제나 내 입에는 '출발하기 위해서 출발하는 것이다'라는 누군가 시인의 시 구절이 떠나지 않았고 갑자기 지평선이 무한대로까지 넓어진 느낌이 났었다. 그 때의 그 신선한 흥미와 이유 없는 마음의 약동을 아마 나는 일생 다시는 가져 보지 못할 것이다. 다시 어디고 가게 되더라도. 맏딸로서 정신적으로 미숙하고 늘 양친에만 매달려 온, 말하자면 어리광둥이인 나에게 출발의 날은 어제까지의 분주와 약동과 흥미와는 딴판으로 암담했다.
갑자기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만 같았고 절대로 내 집을 떠날 수 없는 것 같았다. 자신이 없었다. 그보다도 무서웠다.
그 때까지 국내에서도 피난 때의 왕복 이외에는 여행이라고는 해 본 일이 없는 나였고 내 집 이외에는 친척집에서도 자 본 일이 없는 나였다. 미칠 듯이 울었던 생각이 아직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비행기가 뮌헨에 닿았을 때도 그 암담은 또 한 번 내 마음을 덮었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었고, 그 때만 해도 독일에 유학가는 한국인이 거의 없을 때였다. 더구나 여자로는 아무도 마중나올 사람이 있을 리 없었고 독일어도 자신이 전연 없었다. 무슨 차를 타도 그것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1955년 가을이었다.
덧붙여 한 마디 - 내가 살았던 슈바빙 구의 분위기가 가르쳐 준 거. 언제나 아무도 안 사는 그림을 그리고 아무도 안 읽을 시를 쓰면서 굶다시피 살면서도 오만과 긍지를 안 버리는, 이 구역에 사는 모두가 가난했고 대개가 외국이나 타 지방에서 모여든 화가나 학생이었던 그들한테서 나는 자유로운 생활이 무엇인지를 배운 것 같다.
목적을 가진 생활, 그 일 때문이라면 내일 죽어도 좋다는 각오가 되어 있는 생활, 따라서 온갖 물질적인 것에서 해방되어 타인의 이목에 구애되지 않는 생활이 그것인 것이다.
또 나는 편견 없이 산다는 것인 무엇인가를 본 것 같다. 정신만이 결국 문제되는 유일의 것이라는 것도. 국적도 피부색도 아무것도 거기에는 문제가 되고 있지 않았다. 영혼의 교통이 가능하여 정신이 일치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벗이냐 그렇지 않느냐만이 문제였지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문제되지 않았다.
슈바빙 구역은 가장 정신이 자유로운 곳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 곳에서의 몇 가지 일들이 생각난다. 내가 가장 깊이 연구했고 전 작품과 생애를 공부해야 했던 그릴파르처의 세미나에서 ‘사포와 탓소의 비교 연구’라는 테마를 받고 도서관에서 그릴파르처와 사포에 관한 책은 모조리 빌려서 겨우 타이프지 열 장의 레포트를 써 낸 생각,
늘 파우스트를 강의하는 보르헤르트 교수가 너무 노령이고 너무 사투리가 심하고 목소리가 작아서 언제나 속상했던 일, 또 라이스트 교수나 데쿠 교수나, 가장 많은 학생들로부터 인기를 모으고 있던 기독교적 실존에 관한 강의를 하는 구아르디니 교수, 강의 때 라틴어와 희랍어를 너무 많이 써서 나는 받아쓰지 못하고 있는데 다른 독일 학생들이 모두 원어로 척척 받아쓰는 것을 보고 통분했던 일.
추억은 괴로웠던 일로만 달리게 되는지도 모른다.
- 10월이 되면 레스토랑이나 다방에서 '데운 맥주'를 요구한다.
뮌헨의 10월이 그립다.
거기에 있을 때는 언제나 이렇게 추운 가을은 처음 보았느니 한국의 가을 하늘을 못 본 사람이 가엾느니 하면서 새파란 하늘,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석류, 추석 보름달, 독서의 계절 천고마비 등의 이미지와 불가분인 한국의 가을을 그리워했었다. 끔찍한 김장 시즌조차가 못 견디는 향수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지 2년째 되는 요즘 웬일인지 자꾸 뮌헨의 가을이 생각난다.
뮌헨의 10월은 벌써 본격적인 털외투가 필요해지는 계절이다. 한달 중 20일은 비가 오는 계절이기도 하다.
언제나 하늘을 뒤덮고 있는 짙은 회색 구름과 언제나 공기를 무겁게 적시고 있는 두꺼운 안개, 안개비, 보슬비 등과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 뮌헨의 10월이다.
벽이 두껍고 방 안에서 이중창에 세 겹 커튼을 두르고 난로를 때고 앉으면 독서의 계절이라는 슬로건이 없어도 누구나가 마치 회색 안개에 눌린 듯이 생각과 책읽기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내가 살던 슈바빙이라는 뮌헨의 한 구는 일부러 옛날 것을 그대로 놔 두는 파리식인 예술가 촌이었다.
거기서만은 형광등 대신 여전히 가스등이 가로등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저녁때의 짙은 안개 속에 가물가물 어렴풋이 보이는 가스등의 아름다움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자전거를 탄 할아버지가 긴 막대기로 유유히 한 등 한 등 켜 가는 박모(薄暮, 땅거미)의 광경은 이런 계절에는 더욱 몽환적으로 동요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10월이 되면 레스토랑이나 다방에서 손님들이 '데운 맥주'를 요구하는 수가 늘게 된다.
그러나 추위를 덜기 위해서 그보다 흔히들 마시는 것은 물과 설탕을 끓이고 럼주를 섞은 그로크라는 음료와 또 붉은 포도주에 계피, 사향, 레몬, 설탕 등을 넣고 끓인 '굴류와인'이라는 음료다.
둘 다 북극다운 침침하고 검소한, 음악도 없는 뮌헨의 학생 다방에서 마실 때 무척 맛있게, 또 추위에 대해서 유효하게 생각된 음료지만 한국에서 마시면 어떨는지? 아직 한 번도 시험해 보지 못했다.
아마 그 우울한 안개비의 포장과 뜨거운 사기 난로, 구운 소시지 냄새,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을 날라다 주는 금발의 프로일라인의 친절한 미소 없이는 맛없는 음료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