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제주도 올레길을 밤에 걸은 적이 있었다. 광치기 해변 근처였던 것 같다. 주위엔 아무도 걷는 이가 없었고 밤바다에선 쉼없이 바람이 불어왔다. 평지의 풀밭 위를 걷는데 문득 가까이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멀리서 들리는 건 파도의 뒤척임이고 가까이서 들리는 건 분명 생명의 기척이었다. 나는 그와 몇 걸음을 사이에 두고 멈춰 섰다. 검은 그림자일 뿐이지만 서로 두려움이나 적의는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마주 보며 한참을 서있었다. 그의 실루엣이 뚜렷해지면서 그의 잔등 위로 밝은 별들이 보였다. 그와 나는 태고(太古)에 처음 만난 동물들처럼 밤의 어둠 속에서 서로를 확인했다. 그 말은 자유로웠다. 굴레도 안장도 얹지 않았다. 긴 갈기털이 바람에 휘날렸다. 여인의 긴 생머리 같았다. 바람이 불었고 나는 내 길을 갔고 말은 풀을 뜯기 위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존재와 존재의 자유로운 스침이었다. 언젠가 소유를 모르던 아득한 옛날, 나는 그와 그렇게 스쳐지나간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