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소개]
정승윤(鄭勝允, 1953년~ ). 전남 강진 출생. 광주고등학교와 경희대 영문학과 졸업. 중고교 교사로 근무하다 전교조 활동을 이유로 해직 당했고, 이후 복직되어 현재 광주고등학교 교사로 근무.
1. 흰 쌀밥
사람이나 짐승이나 먹을 것에 집착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는데 이놈이 하는 짓을 보면 하루 종일 먹을 것을 탐색하는 일이 전부다. 코로 뭔가를 킁킁거리고 앞발로 파헤치고 아가리로 뭔가를 씹어 보면서 하루를 보낸다. 사람이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의 욕심 중에서도 제일 버리기 어려운 것이 식탐일 것이다. 지금은 돈버는 일에 너무 바빠서 ‘먹는다’는 본질적인 행동이 소홀히 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뱃구레가 넉넉할 때의 이야기고 당장 한 끼라도 굶으면 ‘먹는다’는 것에 우리 인생이 걸려 있다는 걸 곧 깨닫게 될 것이다.
한 번은 우연한 일로 2주 정도 단식을 해 본 적이 있다. 아니 포도즙을 마시면서 했던 포도 단식이라 엄밀한 의미에서는 절식이라고 해야겠다. 그 때 느낀 건데 사람은 참으로 먹기 위해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먹는다는 행위가 우리 삶의 중심에 놓여 있었었다. 내가 굶주린 까닭도 있었겠지만 주위를 보면 정말 끊임없이 먹어대는 모습만 눈에 띄었다. 특히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는 하다못해 과일이나 삶은 계란이라도 반드시 먹을 것이 놓여졌다. 겨우 길어야 열 두세 시간 활동하는 중에 하루 세끼 먹는 것도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호사요 낭비다. 그것뿐이겠는가. 그걸 마련하고 준비하고 치우는데 또 얼마만한 시간이 허비되겠는가. 거기에다 간식이다 주전부리다 쉴새없이 입을 놀리니 내 하루는 가히 강아지가 하는 일과 크게 다름이 없어 보인다.
나 역시 먹기를 즐긴다. 부모님 덕분에 좋은 이와 위장을 가지고 태어나 먹는 것에 부담을 느껴본 적이 없다. 다만 아내의 ‘나이 들면 음식을 사양하는 미덕도 좀 배워라’ 하는 충고와 돌격형 뱃살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절식하고 있을 뿐이다. 크게 내로라하는 미식가는 아니지만 아무거나 잘 먹고 즐길 줄은 안다. 인간이 먹는 것은 거의 다 먹어보려고 노력하고 그 모든 음식들에 한결같이 독특한 맛이 있다는 것에 감탄한다. 음식은 또한 단순한 미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음식마다 풍기는 독특한 향취가 있고 독특한 질감이 있고 독특한 색깔이 있다. 그리고 음식은 놓여지는 때와 장소와 분위기에 따라 그 맛도 달라진다. 같은 음식이라도 그 재료와 만드는 사람의 솜씨에 따라서 그리고 먹는 사람의 식욕과 기분에 따라서 그 맛이 얼마나 천차만별로 달라지는가. 사람 주변에는 항상 음식이 있었고 또한 음식 주변엔 항상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음식 이야기는 자연스레 사람 이야기로 이어진다.
세상엔 고급 음식도 많고 진기한 음식도 많다. 그러나 제일 맛있는 음식은 역시 편하게 먹는 음식이다. 정다운 사람끼리 먹는 음식, 적절한 때에 먹는 음식, 소박하지만 정성이 담긴 음식이 맛이 있다. 음식에는 항상 인정이 섞여 있고 그 음식하면 꼭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랴마는 음식 또한 잊혀져 가거나 없어지는 것이 많다. 있다 하더라도 제 맛을 잃은 것들도 많다. 시대가 변하니 음식도 변하고 사람들의 입맛도 변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 내 삶에 맛과 향과 색을 내고 거기에 추억까지 더 하는 그 음식들의 기억까지 변할 수가 있으랴!
아무리 어린애들이라도 대개는 끼리끼리 논다. 잘 사는 집 애들은 잘 사는 집 애들끼리, 못 사는 집 애들은 못 사는 집 애들끼리 서로 어울린다. 국민학교 이 학년 때 나는 한 친구를 만났다. 그 시절에는 아무리 친했더래두 대개 학년이 바뀌고 반이 갈리면 서로를 잊어먹고 만다. 더구나 그 친구는 굉장히 가난한 집 아이라서 나와의 사귐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던 것 같다. 공부도 못했고 코도 좀 들리고 그리고 말하는게 촌스러웠다. 처음에 나는 그 친구가 그저 그런 편이었지만 그 친구는 나를 굉장히 좋아했다. 노골적으로 내 옆에 붙어 다녔지만 나는 그 친구에게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때로는 좀 성가셔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 때 우리의 관심사는 반에서 누가 제일 쎄냐 하는 것이었다. 공부 시간에 손가락으로 순위를 꼽아 보기도 하고 내가 몇 번째인지 곰곰이 가늠해 보기도 했다. 아주 싸움꾼으로 이름 난 놈들도 있었고 계집애처럼 순해 빠진 놈들도 있어서 상위와 하위는 쉽게 결정이 났다. 그러나 나처럼 어중때기들의 순위 매기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실제 싸워볼 수도 없고 이것저것 관찰해서 속내로 짐작해 볼 뿐이었다. 저 놈은 눈매가 감때 사나워 아무래도 나보다는 한 수 윌 것 같아. 저 놈은 허세만 부리는 부잣집 아들놈이라 아마 내가 눈을 크게 뜨면 겁을 집어먹고 말걸.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실제 싸우는 상상도 하게 되고 흥분해서 혼자 주먹도 쥐어 보고 무서워서 다리를 달달달 떨기도 한다. 그 때 계산으로는 그 친구는 나보다 한참 아래였다. 내가 뭐래도 그냥 웃고 따라다니는 친구였기 때문이다.
한 번은 조회를 하기 위해서 전교생이 운동장에서 북적대고 있을 때였다. 옆 반 앤데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녀석이 하나 있었다. 까불이 촐랭인데 화도 잘 냈다. 까불이들은 대개 겁쟁인데 녀석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제가 먼저 장난을 걸다가도 상대방이 함께 장난을 치면 화를 내고 싸우려 들었다. 한마디로 천방지축인 녀석이었다. 제일 싫고 위험한 녀석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넌지시 물었다.
너 저 애 이길 수 있어? 친구는 뜻밖에도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응. 그러더니 갑자기 그 녀석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야, 너 나 이길 수 있어? 녀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친구를 바라 봤다. 그러더니 금방 얼굴을 험하게 일그러뜨리고 친구에게 바로 주먹을 날렸다. 그러자 두 말도 없이 싸움이 벌어졌다. 우하고 함성이 터지고 거의 전교생의 절반 정도가 큰 원을 만들어서 본격적인 싸움판을 벌려 주었다.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친구가 녀석을 쓰러뜨리고 몇 방을 날리자 녀석은 더 이상 저항을 못하고 항복해버렸다. 친구는 벌떡 일어나 옷을 툭툭 털더니 나를 보고 자랑스레 웃음을 보냈다.
그 날 나는 그 친구와 같이 하교를 했었다. 평소 같으면 동네 친구들과 노는 일에 바빠서 나는 그 친구는 거들떠도 안 보고 바로 집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은 그 친구가 끄는 대로 그의 집을 향했다. 그는 짐작대로 이상한 동네의 이상한 집에서 살고 있었었다. 도시인데도 시골집 같은 느낌이 나는 집이었다. 시골집처럼 낮은 부엌에 큰 가마솥이 걸려 있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고 그의 어머니만 있었다. 집은 컴컴했고 그의 어머니는 말 수가 별로 없었다. 멍하니 앉아 있는데 부엌에서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둥근 소반에 점심이 담겨 나왔다. 많이 먹으라느니, 반찬이 없어도 맛있게 먹으라느니 어머니들이 보통 하는 의례적인 말도 없었다. 어른들이 쓰는 사기 밥그릇에는 흰 쌀밥 두 그릇이 소담하게 담겨 있었다. 그리고 큰 사발에 김치가 수북히 담겨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의 어머니는 수건을 둘러쓰고 나에게 오래 놀다 가라고 말하고 친구에게는 다 먹고 나서 밥상을 그냥 부뚜막에 두라고 이르고는 어딘가에 일을 나가버렸다. 우리 둘이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밥을 먹었다. 밥은 아침에 해두었는지 약간 식어 있었다. 집에서 김치 한 가지에 밥을 주었더라면 아마 나는 투정을 부렸던지 아니면 몇 숟갈 뜨다가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 나는 코에 땀방울까지 맺으면서 단숨에 밥 한 그릇을 비워버렸다. 우리 둘이는 마치 일을 마치고 온 농부들처럼, 싸움을 끝내고 온 전사들처럼 열심히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그 그릇에 찬물을 부어 마셨다. 그릇 바닥에 복 복자인지 쌍 희자인지가 물에 흔들려 보였다. 밥알 한 톨 남기지 않은 것이다. 쌀밥에 진실로 매료된 것이 아마 그 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 친구와 멀어지고 나서도 한동안 배가 고프기만 하면 나는 그 친구 집에서 먹었던 그 쌀밥과 김치를 떠올리곤 했었다. 그 어두컴컴한 집의 하얀 쌀밥은 내 친구의 불가사의한 만용과 함께 세계의 어느 진귀한 음식보다도, 어느 부잣집의 산해진미보다도 당당하게 내 기억에 자리잡고 있다.
2. 짜장면과 해삼
어린 시절에 최고 별미는 짜장면이었다. 지금도 짜장면을 좋아하지만 주로 배달 위주여서 제 맛이 나지 않는다. 북경요리라든가 사천요리라든가를 전문으로 하는 거대 호화 중국집의 짜장면 맛도 별로다. 물론 다른 기름진 음식맛에 질린 탓도 있겠지만 어린 시절 그 허름한 중국집에서 먹었던 짜장면 맛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얼마나 짜장면을 좋아했던지 부모님이 주신 용돈을 틈틈이 모아 혼자서 짜장면을 사먹으러 간 적도 있었다. 짜장면을 시키자 의자에서 게으르게 졸고 있던 남자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남루한 커튼 너머로 그가 면발을 만드는 모습이 보였다. 반죽을 길게 말더니 그것을 거의 천정에까지 닿도록 두세 번 흔들고는 땅하고 바닥에 내리쳤다. 그리고 그걸 접어서 밀가루를 뿌리고 다시 늘려서 흔들었다 내리쳤다를 몇 차례 반복했다. 그리고 나서 양 끝을 칼로 따고 손으로 이리저리 풀어 헤치니까 신기하게도 뭉툭한 밀가루 반죽이 섬세하고 가지런한 면발로 쫙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 당시 내 눈에는 어떤 세계적인 마술사의 현란한 솜씨도 흉내낼 수 없는 박진감 있고 현실감 있는 마술처럼 보였다. 그는 그 면발을 채에 담은 채로 뜨거운 물에 넣어서 금방 삶아내었다. 그것을 그릇에 담고 그 위에 짜장을 끼얹어 단무지 한 접시와 함께 내 앞에 내려 놓았다. 생생한 면발에서는 뜨끈뜨끈한 김이 솟아나고 있었고 짜장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고혹적인 냄새가 풍겼다.
어린 시절의 음식 맛을 잊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아무래도 성(性)이 본격적으로 계발되기 이전에는 모든 감각이 미각에 치중되는 까닭인 듯 싶다. 그 당시 학교 담 주변에는 하교하는 아이들의 입맛을 꼬드기는 음식 장사들이 많았다. 칡도 팔았고 단팥죽도 팔았고 띠기라고 하는 약간 사행성이 있는 설탕을 녹여 만든 과자도 팔았다.
그러나 그 모든 군것질거리를 제치고 단연 나를 매료시킨 것은 해삼 좌판이었다. 크고 작은 해삼들이 가격에 맞춰 좍 배열되어 있었다. 가까이 가면 시큼한 초장 냄새가 벌써 군침이 돌게 만들었다. 어린애 새끼 손가락만한 해삼에서부터 큼직한 오이만한 해삼까지 크기도 갖가지였고 굵기도 갖가지였다. 큰 해삼들은 우리들의 푼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것들은 돈 많은 어른들의 몫이었다. 검고 우둘투둘한 돌기가 우람했던 그 큰 해삼들은 다분히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전시용이었다(‘언젠가는 돈 많이 벌어서 저 해삼을 사먹고 말리라’던 욕망이 내 무의식의 어딘가 잠재해 있다가 지금도 마트에만 가면 돌출해 나온다).
5원짜리는 두 토막을 냈고 10원짜리는 다섯 토막을 냈다. 1원짜리 해삼은 5원짜리나 10원짜리를 아주 가늘게 썰어 놓은 것이다. 그것은 한 입 꺼리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좌판 앞에서 항상 망설이게 되었다. 궁색한 주머니 사정 때문이었다. 오늘 한 번 큰일을 벌려 버려. 마음속으로 그렇게 외치면서도 주머니의 동전들을 만지작거리다 말았다. 언제나 1원짜리나 5원짜리로 현실과 타협하고 말았다. 그 가느다란 해삼을 핀으로 찍어 먹는데 문제는 얼마나 요령있게 초장을 많이 찍어 먹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 초장은 집에서 만든 초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주 묽은 초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더 시큼하고 더 달고 더 시원한 맛이 났다. 어떤 녀석은 1원짜리를 먹으면서 그냥 찍어 먹는 것이 아니라 초장 그릇에 코를 박고 둘러 마셔서 주인아저씨한테 꿀밤을 먹는 것도 보았다. 5원짜리를 먹든 10원짜리를 먹든 언제나 아쉬웠다. 그래서 다 먹고 나서도 떠나지 못하고 한참을 그 큰 해삼들을 바라보다가 돌아가곤 했다. 아쉬움은 언제나 치명적인 것이다. 그 아쉬움 때문에 나는 한동안 해삼에 중독되어 살았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아무리 해삼을 많이 먹어도 어렸을 때의 그 아쉬움은 풀리지 않았다.
3. 할머니의 조청
시골 할머니 집에 가면 먹을 것이 궁했다. 버스길도 없는 시골이라 당연히 구멍가게 하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시골 먹거리들이 다 별미지만 어렸을 때는 단 것만 찾을 때라 항상 입이 궁금했다. 겨울에는 방구석에 큰 대우리가 있었고 그 안에 고구마를 보관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 고향에서는 고구마를 감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정작 감자는 하지 감자라고 불렀다. 그래서 지금도 감자라는 말이 더 귀에 익다. 감자는 사투리가 아니라 일종의 한자어다. 사투리인줄 알았던 말 중에서 나중에 보면 한자어인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굴도 석화(石花)라고 불렀다. 변소도 칫간(厠間)이라고 불렀다. 아마 유배지였던 탓인 것 같다. 정약용 선생을 비롯한 몇 몇 양반들이 쓰시던 말을 이 지역 사람들이 고대로 답습한 것이다. 좌우간 그 감자를 겨우내 깎아 먹는 것이 유일한 군것질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명절 전후해서 할머니가 인절미를 해줬던 기억이 난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쌀을 절구에 넣고 쿵쿵 찧었다. 이윽고 쫄깃쫄깃한 떡살이 되었는데 한 때기 뚝 떼서 콩고물에 굴리면 그대로 인절미가 되었다. 할머니 혼자 찧은 떡이라 먹다 보면 아직도 밥알이 씹혔다. 떡도 떡이지만 그 떡에 발라먹는 조청 맛이 기가 막혔다. 어린 속이지만 그 맛이 하두 기가 막혀 ‘할머니, 이 조청 뭘로 만들었어요?’ 라고 물었더니 ‘옥쪼시(옥수수)로 만들재’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 맛은 그 이후에 먹어 봤던 어떤 꿀이나 물엿보다도 맛있었다. 끈적이지도 않고 술술 넘어갔고 먹고 나면 입 안에 감칠맛이 돌았다.
그 맛에 가장 근사한 것은 강천산 밑의 한봉이었는데 조청 맛에 비하면 그 맛은 너무 강렬하고 너무 달았다. 할머니는 그 조청을 한 되들이 소주병에 담아서 선반에 올려놓았는데 나는 그것을 몰래 훔쳐 먹곤 했다. 조청은 보시기에 조금씩 따라 떡을 찍어 먹는데 사용했기 때문에 어쩐지 병 주둥이에 입을 대고 마시는 건 몰래 해야 할 짓 같았다. 찍어먹는 맛과 둘러 마시는 맛은 또 달랐다. 그 맛은 거칠고 너무 달았다. 미약처럼 귀 끝이 홧홧했다. 그 이후로 나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조청 맛을 찾았다. 그 맛의 기억은 지금도 선연한데 그 맛은 다시 찾을 수 없었다.
그 조청을 만든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재취셨다. 그러니까 사실은 친할머니는 아닌 셈이다. 할아버지가 육이오 때 돌아가시고 지금 생각해 보면 비교적 젊은 나이에 혼자 되셨다. 처녀로 시집오셨는데 순박하신 분이었고 자기 주장은 전혀 없는 분이었다. 항상 표정이나 행동이 여일(如一)하신 분이셨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가끔은 이상한 행동을 하셨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내 형제들도 다 한 번씩은 목격한 바가 있었다. 겨울이면 불을 부엌이 붙은 안방에만 땠다. 그래서 한 식구가 모두 한 방에 모여서 잤다. 다람쥐 눈만한 초꼬지불도 석유를 아끼느라 금방 꺼버렸다. 그래서 시골의 겨울밤은 길고 길었고 그러다 보니 어쩌다 한 밤중에 눈이 뜨였다. 방이 환했다.
빛 때문에 잠이 깨었을까? 천장 더그매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윗목에서 구시렁구시렁 사람 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듯한 낯선 소리였다. 나는 어떤 불길한 예감으로 인하여 잠이 깬 기척을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고개만 빼어 그 쪽을 바라봤다. 끄먹거리는 초꼬지불 앞에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검은 머리를 길게 풀어 헤치고. 혼자서 뭐라고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염불 같기고 하고 누구에겐가 하소연하는 소리처럼도 들렸다.
형제들의 한결같은 증언은 그 때의 할머니는 평상시와 너무나 다른 무슨 마녀나 귀신처럼 보였다고 했다. 무섭다기보다는 궁금했다. 무슨 까닭일까? 그러다가 설핏 잠이 들면 봉창이 훤하게 밝아 있었고 구구구 하는 할머니의 닭 모이 주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는 아침이면 다시 말끔한 비녀 머리를 하고 계셨다. 내가 꿈을 꾸었거나 아니면 할머니가 밤중에 머리를 감고 나서 참빗으로 머리를 빗으셨거니 생각하고 말았다. 나중에 부모님께 그 이야기를 했더니 어두운 표정을 지으시고 다른 말씀은 없었다. 그 할머니가 만든 조청 맛은 할머니의 그 비밀스런 의식과 함께 나에게는 영원한 수수께끼다.
4. 첫키스
음식 맛의 으뜸은 누가 뭐래도 재료의 신선함에 있다. 피가 뚝뚝 듣는 꼬막은 삶은 자리에서 밥 없이도 한 사발 정도는 거뜬히 까먹을 수 있다. 한 마을에서 하룻밤 까먹는 꼬막만으로도 한 무더기의 패총 정도는 너끈히 쌓아 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재료가 신선한 음식은 그 특징이 별 양념이 없어도 각별한 맛이 난다는 것이다. 한 여름 모깃불 옆에서 끓여 먹는 반지락국은 소금 한 술 정도로 훌륭한 맛이 났다. 고아 먹는 국물과는 또 다른 시원하면서도 상쾌한 맛이었다. 갯가에서 조심스럽게 돌로 찧어 윗 껍질로 파먹는 석화는 아무 양념 없이도 후루룩 마시면 바다의 짭조름한 맛이 입 안을 감돌았다.
한 번은 군대 있을 때 소대장을 따라 해안 초소를 도는데 우연히 주막에 들렀다가 문조리(망둥어) 한 접시를 대접받은 적이 있다. 못 생긴데다 흔해 빠진 고기라 밥상에 올리기도 꺼려하는 천덕꾸러기다. 낚시로 막 잡아온 그걸 도마에서 숭덩숭덩 썰어 이빠진 접시에 담아 내왔다. 초장에 식초 원료를 사용했는지 온 주막 전체가 독한 식초 냄새로 진동을 했다. 몇 점을 씹을 때까지 식초 맛 때문에 입안이 얼얼했다. 그러나 문조리의 싱싱한 맛은 결국 그 독한 식초 맛을 이기고 뇌리 깊숙이까지 전해졌다.
불은 인간에게 보다 풍요롭고 다채로운 맛을 선사했다. 모든 동물 중에서 불을 다룰 줄 아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화식(火食)을 한다. 프로메테우스의 채화 이후에 마치 연금술사들처럼 인간은 모든 음식을 불 위에서 다루어 본다. 지지고 볶고 삶고 튀기고 찌고 덖어 본다. 불을 강하게도 해보고 약하게도 해본다. 장작불도 써보고 숯불도 써보고 석탄과 가스도 사용해 본다. 그때마다 맛들은 희한하게 변한다. 인간의 음식은 점점 다양해지고 인간의 입은 점점 사치스러워진다. 불은 인간을 점점 인위적인 맛에 길들어지게 하고 자연의 맛에서는 멀어지게 한다. 먹는 자와 먹히는 자가 직접 부딪히는 그 생동감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순환의 굴레 속에서 영원히 자연이 주는 그 싱싱한 맛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싱싱함이 맛에 미치는 영향은 비단 해산물에만 국한 되는건 아니다. 과일이야말로 싱싱함이 생명이다. 과일은 꽃과 마찬가지로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부터 시들기 시작한다. 과일의 참맛을 보려면 반드시 제 철에, 제 때에 맞춰, 제 산지에서 먹어야 한다.
사과는 제 맛으로 먹기 힘든 과일 중의 하나다. 자칫하면 너무 시거나 너무 무르거나 너무 퍽퍽하다. 일광이 알맞게 스며들었을 때, 너무 설익지도 너무 농익지도 않은 바로 그 순간 사과를 따야한다. 가지가 너무 당겨지거나 너무 맥없이 떨어지지 않고 적당히 버팅기면서 똑 떨어지는 바로 그 순간 사과를 따야 한다. 푸르고도 청신한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채 깊숙한 곳에서부터 농염함이 스며나오는 바로 그 순간. 아침의 서리를 오후의 일광이 녹이는 바로 그 순간. 사과를 뚝 따서 바지춤에 두어 번 문지르고는 크게 한 입 베어 물어 보라. 베어 무는 그 순간 사과 주변에 작은 오로라가 생기면서 오색의 향취가 번져 나간다. 사과의 신맛이 목젖을 쏘고 이윽고 단맛이 입안에 가득 찬다. 그 풍부하고 향기로운 즙이 목으로 코로 혀로 이로 폐부로 스며드는걸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맛을 무엇에다 비유하랴. 굳이 지상에서 그 맛에 합당한 비유를 찾자면 그건 첫 키스의 맛이다. 첫 키스의 향기이다.
그러나 냉큼 다가온 국외자에게 사과는 결코 그 깊은 맛을 전하지 않는다. 봄부터 가꾸고 기르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염려했던 농부에게만 그 깊은 맛을 전한다. 나의 첫 키스도 그런 오랜 기다림이었다. 봄 아지랑이 같은 마음 저림에서부터 여름날의 폭풍 같은 격정을 이기고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듯한 쓸쓸한 가을날 나의 첫 키스는 찾아왔다. 마치 사과의 신맛처럼 강렬하게, 단맛처럼 달콤하고도 애처롭게, 오랜 기다림의 보답처럼 그렇게 깊숙이 찾아왔다.
5. 친구들
음식은 자리가 편해야 한다. 아무리 산해진미라 할지라도 불편한 자리라면 음식 맛이 떨어진다. 음식은 단지 혀로만 즐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음식의 향기, 음식의 색깔, 음식을 둘러싼 분위기, 그 날의 날씨까지가 음식맛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함께 음식을 먹는 사람들과의 관계나 분위기이다.
낯선 사람과의 식사는 음식맛도 낯설다. 음식을 집는 거나 씹는 거나 찌꺼기를 뱉는 거까지 모든 것이 조심스럽다. 심지어 음식 넘기는 소라까지 신경이 쓰이니 밥맛이 제대로 날리가 없다.
불편한 관계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속에서부터 치받는 불편함이 음식 자체를 거부한다. 오감이 막혀서 음식의 맛도 빛도 향도 모두 사라져 버린다. 오직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다.
한 번은 어쩌다 고급 한정식집엘 간 적이 있는데 웬 한복 입은 여자들이 들락거리며 식사 시중을 들었다. 그런 일은 처음이기도 하려니와 여자가 옆에 앉아 젓가락 시중까지 드니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일을 굳이 만류할 수도 없고 집어주는 반찬을 받아먹자니 송구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주제넘은 것 같기도 해서 반찬이 어디로 넘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려면 음식 대접이 최고라지만 어쨌든 그 불편함이 해소될 때까지는 음식맛은 보류될 수밖에 없다. 심리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음식을 먹고나서 토하거나 심지어 배탈이 날 수도 있다. 오죽하면 '개도 먹을 때는 나무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까.
그렇다고 혼자 먹는 것이 반드시 편안한 식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하여 음식맛은 뒷전이기 십상이다. 혀끝이나 볼따구니를 씹는 실수를 할 때가 대개 혼자 식사를 할 때이다. 더구나 혼자 먹을 때는 왠지 과식하게 되어 속이 더부록해지기 쉽다. 굉장히 처량한 생각이 들어 밥도 더 많이 푸고 라면도 끓이고 반찬도 더 죽 늘어놓기 일쑤다.
아무래도 식사는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함께 해야 제맛이 돈다. 어려서 형제들이 한창 사이좋게 자랄 때 왈캉달캉 두레상에 모여 앉은 우리들은 말 그대로 숟가락을 뽑아든 걸신들이었다. 그 때는 허기를 채우는 것이 전부라 느긋하게 음식맛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 허기라는 것이 신묘해서 마이더스의 손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배고픈 아이들의 눈으로는 이 세상이 쵸코렛 집, 찰떡 돌멩이, 구름 사탕, 흙 떡고물로 보인다. 오죽하면 봄철에 피는 하얀 꽃을 이밥(이팝)나무라 부르고 톱질 끝에 쌓이는 하얀 나무 부스러기를 톱밥이라 불렀을까. 고명 하나 안 들어간 보리개떡을 세상에 다시없는 진미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무시무시한 허기다. 어려서 이 허기에 붙들려본 사람들은 평생 식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인생을 웬만큼 즐길만한 여유가 생겼을 때 몇 십 년 지기들과 함께 하는 식사야말로 최고의 기쁨으로 꼽을 수 있겠다. 형편이 좀 어려워진 친구가 도시 근교의 허름한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땅은 널찍한 편이어서 채소도 갈아 먹고 그런대로 마음 편히 살고 있어서 자주 그 집에 모이게 되었다.
우리 중엔 특별히 잘 살거나 식성이 까다로운 친구가 없어서 아무 음식이나 즐겁게 먹었다. 하루는 그 집 마당에서 고기를 굽는데 날은 이미 어둑어둑하였다. 근처의 잘 아는 식육점에서 일부러 두껍게 썰어온 고기는 싱싱하고 빛깔이 고왔다.
특별한 기구나 재료도 없이 브로크 벽돌을 양 쪽에 괴고 마른 삭정이로 불을 지핀 다음 석쇠를 얹었다. 점점 굵은 나무로 불이 옮겨 붙은 다음 고기를 얹자 고기 기름이 떨어지며 순식간에 불길이 맹렬해졌다. 거기에 굵은 소금을 뿌리고 익자마자 친구가 뜯어온 상추에 된장을 발라 입안에 틀어넣었다. 아직은 건강한 이빨로 와작와작 씹는 소리들이 요란하였다.
술도 몇 순배 돌고 뱃구레도 넉넉해지자 불빛에 비친 불콰해진 얼굴들에 웃음이 가득하다. 더러는 집어 올리다 고기를 떨어뜨리기도 했는데 재만 탈탈 털어먹으면 그만이었다. 안주인도 김치에 풋고추에 소박한 밥상을 보아주곤 들어가 버려서 우리끼리 남게 되자 남자들 특유의 음담패설에 외도 이야기가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우리의 야만적인 식성을 더욱 자극하였다. 이 모닥불을 둘러싼 어둠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먹는 음식이라면 무슨 거리낄 일이 있겠는가.
고기는 불길이 조금 사그라지고 나무가 숯이 되면서 점점 은근하게 익어갔다. 우리의 식욕도 조금 진정되면서 나무향이 짙게 밴 고기를 천천히 음미하게 되었다. 불빛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니 반평생 고생한 흔적들이 역연하다. 그 얼굴들 위로 뭔가 하늘하늘 떨어졌다. 불길 따라 올라갔던 재가 떨어지는 것이려니 했더니 불길에 피식피식 녹는다. 첫눈이었다.
이제 잘 익은 고기에 흰 눈을 얹어서 씹어본다. 잘 익은 고기의 육즙과 단 소금맛과 나무 연기의 훈향에 알싸한 첫눈의 기운까지 더해져서 거의 환상적인 맛이 난다. 이 맛은 하늘이 우리에게 베푼 몇 안 되는 축복 중의 하나다. 그동안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연면히 이어온 우리의 우정도 물론 그런 축복 중의 하나일 것이다.
퇴직한 후에 시골에 땅뙈기 몇 평이라도 마련해보고 싶은 것도 그런 축복을 이어보고 싶은 심정에서 일 것이다. 그러나 모닥불을 피우고 고기를 얹고 고기 굽는 냄새가 연기와 함께 하늘에 피어오를지라도 그 친구들 과연 그 자리에 얼마나 오래 머물러 줄지는 의문이다.
6. 홍어애국
진도에 한 후배가 산다고 해서 찾아가 본 적이 있었다. 몇 번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얼굴을 대하기는 처음이었다. 뚜렷한 직장을 가져본 적도 없고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며 시인이면서도 시에 전념하는 것 같지도 않다는 것이 내가 그에 대하여 전해들은 이야기였다.
물론 자유로워 보였지만 댄디해 보이지는 않는 그냥 시골 촌놈이었다. 술에 좀 쩔어보인다 싶더니만 결국 그 날 동행한 또 한 명의 후배와 술로 날밤을 세우는 모양이었다. 시보다는 진도의 역사와 문화가 주된 화제였는데 어찌나 해박한지 거의 향토사학자 수준은 되어 보였다.
취중의 그와 바둑 한 판을 두었는데 취한 놈이 무슨 상대가 되랴 싶었지만, 웬걸 완전히 취권이었다. 겉보기에 취한 놈들이 나중에 보면 정신은 항상 말짱했다는 걸 알게되면 뒤늦게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그가 등단했다는 문예잡지를 건네 받고는 화장실에서 시 몇 편을 읽었다. 이상이 그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썼음직한 시였다. 그가 한 때 인천에 살았으며 아내는 공장에 나가고 그는 무슨 일로 뒷방에 남아 울분을 토한다는 시였다. 물론 이상보다는 훨씬 건강한 감수성이었지만 어쩐지 상황이 '이상'스러웠다.
어찌어찌 새벽잠이 들었고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났지만 시골 읍면 단위의 시간이 그러하듯 조금도 쫒기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진도 문인협횐가 하는 사무실도 들르고 어슬렁어슬렁 후배가 이끄는 대로 아침을 먹으러 갔다.
시골에 가서 음식점 찾기가 난망스럽거든 대개 군청 앞으로 가라는 속설이 있다. 그래도 그 곳에서 내로라하는 음식점은 꼭 군청 근처에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후배는 우리를 군청 앞으로 끌고 갔다. 그러더니 군청 앞에서 오른쪽으로 틀고 한참을 가서 또 오른쪽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좀 오래돼 보이는 골목에 얕은 집들이 나오고 결국 간판 하나 없는 도저히 식당처럼 보이지 않는 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아주머니 한 분이 후배와 몇 마디 아는 체를 하고 우리는 후배를 따라 그 집에서도 가장 후미지고도 컴컴한 방으로 들어갔다.
낡은 이불이 깔려있는 그 방은 의외로 따뜻했다. 밥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는 벽에 등을 기대고 또 설핏 잠이 들었나 보았다. 달그락달그락 밥상 위에 음식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보다 조금 앞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음식 냄새가 우리의 잠과 식욕을 동시에 흔들어 깨웠다.
"이거 그래도 귀한 건데 입에 맞으실랑가 모르겄소?"
그것은 홍어애국이었다. 전라도에서 홍어는 잔칫집이나 상갓집에 반드시 오르는 음식이었고 또 사람들이 좋아해서 수시로 먹게 되는 음식이지만 홍어애국은 참 오래간만이었다. 홍어애를 보리 된장국에 넣어 푹푹 끓인건데 어린 보리와 홍어애의 조화가 절묘했다.
첫 숟갈을 뜨는 순간 이곳이 진도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맵싸하고 구수한 맛과 함께 더운 기운이 온몸으로 확 번져 나갔다. 그것은 뭐랄까, 어리고 풋풋한 보리가 뚫고나온 겨울 대지의 기운이 서해 심해의 맑은 해수에 녹아드는 맛이랄까, 아니면 겨울에 곰삭은 거름더미에 새봄의 눈이 젖어드는 맛이랄까, 뭐 그런 좀 형용하기 어려운 맛이었다.
요새는 전라도 음식이 전라도 사람 따라 서울이고 어디고 막 번져 나가서 홍어애국은 오히려 흔한 음식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정확히 그 맛을 내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더구나 칠레산 홍어까지 마구잡이로 들여와 입맛을 해치는 통에 옛날 홍어맛을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요즘의 홍어는 기피하는 음식 중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그 홍어애국 맛이 아슴한 추억이 되어 기억의 뒷편으로 사라지고 있을 무렵에 우연히 다른 일행과 함께 진도 여행을 하게 되었다. 후배가 출타 중이어서 나 혼자 그 집을 찾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 근처는 분명한데 사람들 말로는 원래 이 근처에는 전혀 밥집 따위는 없었다는 것이다.
옛날에 읽은 단편소설 중의 '파란 대문집' 이야기 같았다. 우연히 파란 대문 안으로 들어갔는데 부드러운 잔디가 깔려 있고 소녀가 살고 있고 황금색 사자도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 곳에서 꿈같은 오후를 보내고 다음에 또 다시 찾아갔지만 평생 그 집을 다시 찾지 못했다더니 내가 필시 그 꼴이었다.
그 집을 다시 찾으면 절대 그 집을 떠나지 않겠다는 정도까진 아니지만 인생 만사가 그러하듯 어쩐지 아쉽고 꿈 속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후배에게 물으니 '아마 그 아짐 장사 그만뒀을껄요'라는 심드렁한 대답을 들었을 뿐이다.
아무튼 그 날 아침이 일요일 아침이었는데 문제는 시골도 일요일이면 거의 모든 밥집이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군청 앞에서 몇 군데를 돌아다녀 봤는데 다 문이 닫혀있고 늦게라도 열지 않는지 옆집 사람에게 물었더니 '주인 양주가 다 등산을 가서 저녁 늦게야 온다'는 대답이었다.
진도읍을 시골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의문이지만, 시골사람들이 일요일이면 등산을 간다는 말은 얼핏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 사는 곳 자체가 산이고 물이고 바다인데 또 새삼 어디를 간다는 말인고.
배도 잔뜩 고팠고 또 어딘가는 한 군데 쯤 꼭 문을 연 곳이 있으리라는 신념을 갖고서 우리는 골목 안까지 끈질기게 밥집을 찾아다녔다. 마침내 우리가 찾은 곳은 밥집이라기보다는 선술집에 가까운 곳이었다. 그것도 영업을 하고 있는 곳이 아니라 문을 걸어 잠그고 주인 아주머니가 김치를 담그고 있는 집이었다.
우리는 너무 배가 고파 만약에 거절하면 주인을 밀치고서 김치 한 가닥이라도 뺏어 먹야 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사정 이야기를 하고 있는대로 아무 거나 달라고 했다. 아주머니는 행주치마에 손을 씻으며 '정말 있는 것은 밥밖에 없다'며 의외로 미안해하면서 쩔쩔매기까지 하였다.
'밥밖에 없다'는 말은 우리에게 거의 구원에 가까운 말이었다. 왜냐하면 저기 저 커다란 고무 함지에 가득히 쌓여서 젓갈 내를 솔솔 풍기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김치였던 까닭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일부러 김치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밥, 밥이면 된다고 했다. 밥만 달라고 했다.
"으짜까요, 반찬이 아무껏도 업는디.. 저 김치는 집에서 먹을라고 아무렇게나 담근 것인디... 저 김치에라도 드실라요?" 저 김치라니. 우리는 거의 눈물이 나올 뻔 했다. 아주머니는 서둘러 밥을 푸고 새로 비빈 김치를 쭉쭉 찢어서 상 위에 내놓았다.
일행은 많고 상은 좁아서 우리는 그냥 서서 먹었다. 일요일 우리는 머나먼 진도에까지 가서 어느 허름한 선술집에서 빌어먹는 놈들처럼 선 채로 허겁지겁 아침 한 끼를 때웠다. 그러나 그날 아침 그 한 끼를 어찌 기름지고 사치스러운 농어회 따위와 맞바꾸랴. 좌우간 우리는 홍어앳집을 찾지 못한 분풀이를 그 선술집에서 원 없이 하고야 말았다.
그 집 또한 '파란색 대문'처럼 두 번 찾기 어려울 뿐더러 일부러 두 번 찾는 그런 어리석음도 범하지 않으리라.
7. 찐라면
논산훈련소 훈련병 시절엔 우리 모두 먹을 것에 집착했었다. 훈련이 너무 고되어서 많이 먹어두지 않으면 훈련을 버티어낼 수 없으리라는 강박관념 탓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먹을 것만 많이 준다면 어떤 훈련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다 재수가 없어 배식을 적게 받으면 눈물이 핑 돌곤 했었다. 밥 한 톨, 김치 한오라기도 남김없이 야금야금 씹어 먹었다.
하루는 야간 훈련이 있어서 배식차가 야외 훈련장까지 왔었다. 비가 주룩주록 왔지만 훈련은 예정대로 강행되었다. 받아든 식판엔 밥이 절반 빗물이 절반이었다. 배식하는 놈이 가늠을 잘못해서 처음부터 너무 많이 퍼주었기 때문에 뒷줄로 갈수록 배식량이 줄어 들었다. 멀리서 줄어드는 식깡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자 득득 바닥 긁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긁어서라도 두세 차례 퍼줄 줄 알았는데 단 한 차례의 주걱질로 끝이다. 겨우 식판 귀퉁이에 주걱 문지른 자국만 남아 있었다. 분노와 절망의 눈물이 솟구쳐 올랐지만 거기서 엉기다가는 기간병에게 쪼인트를 까이거나 국자로 얻어맞기 십상이다,
한 쪽에 소대장과 분대장들이 판쵸 우의를 깔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울분을 참고 그 주변 가까운 곳에서 식사를 했다. 혹시 그들이 남긴 밥을 얻어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나 같은 생각을 가진 놈들이 주변에서 밥을 먹으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고 다른 놈들은 일찌감치 식판을 반납했는데 아직 미련이 남아 붙들고 있는 내 식판엔 빗물이 가득 차서 넘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게 먹을 것에 온 신경을 모으고 머릿속엔 온갖 음식을 공상하는데 훈련소 식단은 거의 매일 동일하였다. 반 한 그릇, 국 한 그릇, 반찬 한두 가지가 고작이었다. 맛 따위가 무슨 상관이랴, 배만 채워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런 훈련소에도 별미는 있었다.
그것은 일요일 점심으로 특별히 제공되던 라면이었다. 원래부터 라면을 좋아했지만 훈련소의 그 라면 맛은 정말 특별했다. 조리법이 사회와 달랐던 것이다. 그 많은 수를 먹이려니 아마 특별한 조리법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찐 라면이리라. 일일이 한 그릇씩 끓여 낼 수는 없고 한꺼번에 끓여내면 퍼지기가 십상이었으리라. 그래서 라면의 면발만 따로 분리해서 고압 수증기로 쩌내는 기상천외의 조리법이 생겨났으리라.
약간 곁 이야기지만 훈련소의 사역 중 최고의 사역은 단연 라면 분리 작업이었다. 라면의 봉지를 뜯어서 면발과 수프 봉지를 따로 분리하는 작업이었다. 일이 편한 것도 있지만 취사병의 감시를 피해 수프 몇 봉지를 셔츠 안에 숨겨올 수 있다는 망외의 소득을 바랐기 때문이다. 그 수프를 밍밍한 국에다 풀어 먹으면 국에서 오색 향취가 날 정도로 맛이 달라졌다.
좌우간 우리는 수증기로 삶아낸 면발을 두 개씩 배급받았다. 그대로 쪄내서인지 면발의 모양은 조금도 흐트리지지 않은 채였다. 그 면발 위에 수프만 따로 끓인 뜨거운 국물을 부어주었다. 면발은 약간 꼬돌꼬돌했는데 그 맛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 나는 꼬돌꼬돌한 면발의 매니어가 되었다.
지금도 나는 끓는 물에 라면을 넣고 형태가 풀리기 전에 불을 꺼버린다. 국물도 그 때처럼 수프만 넣은 맨 국물 그대로가 좋다. 달걀을 풀면 오히려 개운한 맛이 사라지고 만다. 면발의 느낌이 살아있는 그대로 뜨거운 국물에 휘휘 저어 먹으면 얼굴에 땀이 확 솟으며 속이 다 후련해진다. 그러나 훈련소의 찐 라면은 분명 그 이상의 흉내낼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제대 후에 어떤 동기 녀석이 그 라면 맛을 못잊어 집에서 밥을 할 때 뜸들이는 밥솥에 라면을 집어 넣어서 라면을 쪄볼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군대의 일을 사회에서 재현해 보려는 것은 멍청한 중에서도 우둔한 짓이 아닐까? 그 라면 맛을 다시 맛보고자 한다면 마땅히 장정 대기소를 거쳐 논산훈련소의 연병장을 다시 밟아야 할 것이다.
8. 옥수수죽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담이 측백나무로 둘러쳐져 있었다. 교명이 중앙국민학교였는데 그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잘 몰랐었다. 나중에는 시내 중심에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려니 생각했고, 더 나중에는 그 명칭이 일제시대부터의 교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가 많이 다니는 학교를 시내 중심에 두었고 또 그렇게 이름지었다고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학교 운동장 모퉁이에 수상쩍은 정원이 있었다. 운동장에선 항상 황량한 모랫바람이 불었는데 유독 그 곳만 나무가 칙칙하였고 사람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철책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 곳은 학교 안에 있으면서도 항상 학교와는 관계없는 땅처럼 여겨졌다. 어쩌다 호기심이 일어 철책 위로 몸을 드밀고 안을 들여다 보면 오솔길이 있었고 오솔길이 끝나는 곳에 무너진 계단 같은 것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정원은 내가 3,4학년쯤 되었을 때 부족한 교실을 증축하면서 없어져 버렸다.
그 외에도 일제의 잔재는 많았었다. 내가 어릴 때 살던 집도 적산집이었고 이층에는 다다미가 깔려 있었었다. 어른들이 쓰던 일본말을 어린 우리들도 무심코 답습해서 쓰고 있었다. 어머니는 하늘색을 항상 소라색이라고 불렀다. 그 말은 '하늘에 떠있는 소라'라고 하는 다소 '장콕또'다운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본정통'이라 불리우는 거리가 있었는데 그 곳에 사는 아이들은 꽤 부유한 상인의 자녀들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가난했다. 어디에서 사는지도 모르는 남루한 행색의 아이들이 태반이었고 그 아이들 중에는 유독 머리를 박박 밀고 똑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우리는 그 아이들을 '고아원 얘들'이라고 불렀다.
그 얘들은 사친회비를 비롯한 모든 공과금이 무료였고 항상 함께 모여 다니곤 했다. 어느 날 누군가가 그 얘들 중 한 명을 때렸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고아원 얘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는데 선생님도 말리지 못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이후로는 아무도 그 얘들을 건드리지 못했다. 아이들이라 군것질이 심했고 하다 못해 학교 근처에서 파는 칡이라도 씹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얘들은 아무 것도 씹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굉장히 우울해 보였다.
하루는 교문에 들어서는데 뭔가 모를 고소한 냄새가 콧속을 파고 들었다. 교문 오른쪽에 양호실인지 소사실인지가 있었고 그 유리창문 너머로 큰 솥이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그 솥 안에 흰 죽이 가득 들어 있었고 누군가가 큰 주걱으로 그 흰 죽을 젓고 있었다.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혈색이 나쁜 아이들이 그 죽을 타먹기 위해 죽 줄을 서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냄새는 그 죽에서 풍겨나오는 향기였다.
그 죽을 저을 때마다 흰 김이 물큰물큰 피어올랐다. 그 냄새는 우리가 흔히 먹었던 밀가루죽이나 푸대죽이 아닌 옥수수죽의 냄새였다. 그 흰 옥수수죽의 색깔과 냄새에 매료되어 하염없이 그 창가에 서있었던 모양이다. 오전에 수업이 끝나는 나 같은 1학년 꼬맹이들은 그 죽을 타먹을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감히 먹을려는 욕심도 없이 구경삼아 서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연유에선지 내 손에 죽 한 그릇이 주어졌고 나는 그 죽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맛은 약간 깔깔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그리고 달콤하면서도 말할 수 없이 고소하였다. 말하자면 그 옥수수죽은 내가 맛본 여러가지 구호물품 중에서 최초의 서양식 수프에 해당되었던 셈이다. 지금도 양식집에 가면 제일 내 입맛에 와 닿는 건 단연 수프다. 고기 수프보다는 야채 수프나 크림 수프에 약간 겨자를 쳐 먹는 걸 좋아한다. 그 때 그 옥수수죽에 대한 나의 추억이랄까, 오마쥬랄까, 뭐 그런 거 아닐까 싶다.
나는 그 후로 두 번 다시 옥수수죽을 먹어 본 적이 없다. 굳이 먹어 보자면 못 먹어 볼 것도 없겠지만, 다시 억지로 끓여 먹어 본다 해도 그 맛이 날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혹 모르겠다. 일인용 욕조처럼 생겼던 그 길고 큰 쇠솥에 그만한 양의 옥수수죽을 함께 끓인다면 혹시 그 맛이 다시 날련지.
국민학교 6년 내내 그 옥수수죽을 다시 먹어볼 기회가 없을까를 생각하며 학교에 다녔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 옥수수죽도, 옥수수죽을 끓이던 그 큰 무쇠솥도, 큰 유리창문이 달려 있던 그 실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참, 언젠가부터 그 고아원 얘들도 소식도 없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기나 긴 일제의 흔적들, 그리고 거기에 겹쳐진 전쟁의 상흔들은 하도 오래된 기억이라 어쩔 때는 환상이 아닐까, 또는 누구 다른 사람의 기억이 잘못 입력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어쩌랴, 그 맛과 그 냄새와 두 손에 받쳐 들었던 그 뜨거움까지 아직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
9. 어머니의 손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숙수를 꼽으라면 대개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릴 것이다. 나에게도 어머니는 특별한 분이셨다. 음식을 만드시는 솜씨가 빠르고 거침이 없으셨다. 앉은 채로 이야기하시면서도 뚝딱뚝딱 음식을 만들어 내셨다. 봄동이나 솔지(부추김치) 같은 금방 무쳐내는 음식에서 특히 손맛이 느껴졌다. 재고 다듬고 따르고 모양내는 게 없으셨다. 큰 양푼에 채소와 함께 고춧가루, 깨, 참기름 등을 들들들 들이 붓고는 손으로 썩썩 문지르면 맛깔나는 음식이 되었다. 어머니는 그런 거침없는 솜씨로 그 많은 식솔들을 거둬내시고 그 많은 손님들을 치러 내셨다.
집에 몇 개의 식칼이 있었지만 어머니는 주로 나무 손잡이가 달린 남원 식칼을 사용하셨다. 무수한 칼집이 나다 못해 가운데가 움푹 패인 도마 위에서 어머니는 갖가지 음식을 준비하셨다. 김치 같은 경우에는 무엇으로 자르느냐에 따라서 그 맛이 미묘하게 변했다. 막 담은 새 김치는 어머니의 손가락으로 쭉 찢어줘야 제 맛이 났다. 묵은지는 바로 그 도마 위에서 남원 식칼로 썰어야 묵은지 특유의 군둥내와 함께 싸르르한 칼맛이 섞여 비로소 제 맛이 났다.
지금의 식가위로 접시 위에서 써는 김치는 다만 김치의 흉내일 뿐이다. 그 묵은지로 끓여내는 김치 찌게는 단연 우리 형제들이 이구동성으로 손꼽는 어머니 최고의 음식이었다. 자배기 뚜겅이 들썩거리도록 센 불에 막 끓여낸 김치찌개의 맛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신김치와 돼지고기와 콩나물의 조화는 그 찌게 위에서 젓가락 숟가락들이 쟁탈전을 벌릴 만큼 우리의 왕성한 식욕을 자극했었다.
지금도 어머니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모습이 도마 위에서 칼질을 하시던 그 활발한 모습이다. 지금도 산낙지나 닭발 따위를 다질 때 나던 그 땅땅하던 도마 소리와 함께 어머니의 그 함박웃음이 눈에 선하다. 어디 우리 어머니뿐이랴. 우리 친구들의 어머니도 모두 뛰어난 요리사셨다. 누구네 집은 젓갈이 맛있었고 누구네 집은 열무 국수가 맛있었다.
그 분들은 모두 우리들을 소중한 손님인양 끼니 때만 되면 밥을 해 먹이셨다. 본인들은 식은 밥을 드실망정 우리에겐 항상 따뜻한 밥을 해 먹이셨다. 냉장고가 나오기 이전에는 여름철이면 쉬이 밥이 쉬었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대나무 광주리에 밥을 담아서 시원한 툇마루 기둥에 매달아 두셨다. 그래도 밥이 쉬면 우물에서 찬물로 밥을 씻어 내셨다. 그래서 쉰 맛이 좀 가시면 그걸 다시 물에 말아 마시듯이 드셨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는 항상 따뜻한 밥을 먹이려고 애쓰셨던 분들이다. 이제 그분들은 거의 돌아가셨거나 병드셨거나 너무 늙어버리셨다.
다시는 어머니가 손수 만드신 음식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오랜 병석에 누워 계시는 어머니는 의식이 거의 없으신 상태에서도 지금도 나를 보면 그 앙상한 손을 내미신다. 이 땅의 모든 음식들을 주무르시던 그 손. 우리에게 그 음식들을 거둬 먹이시던 손. 그 손을 만지면 아직도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모든 물기가 빠져나가고 뼈만 남은 그 손이 지금도 뭔가를 먹일 양인 양 내 입술을 더듬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