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nkey's Paw
작가 : W.제이콥스
소개 : 인도에서 오래 근무한 특무상사가 가져온 원숭이의 손. 세 사람의 소원을 세 개씩 들어준다는 이 신기한 물건을 특무상사에게서 받은 어느 가족.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는 이 가정의 늙은 가장은 보다 좋은 집을 얻기 위해 2백 파운드를 달라고 원숭이 손에게 소원을 빈다. 그리고 이 가족에게 벌어진 일은...
[작가 소개]
W.제이콥스(William Wymark Jacobs, 1863-1943) : 영국의 소설가. 런던에서 태어났다. 런던 우편국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20세 무렵부터 경쾌하고 유머에 넘치는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1896년 처녀작 <많은 화물선>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필 활동에 들어갔다. '디킨즈의 계보를 잇는 유머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원숭이의 손> 같은 일종의 공포 소설과 단막 희곡 작품들도 많다. <원숭이의 손>은 <유람선의 귀부인(The Lady of Barge, 1902)>에 수록된 작품이다.
그 날 밤은 춥고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였다. 그러나 레이크넘 주택의 조용한 거실은 단단히 닫힌 덧문 아래 화롯불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체스를 두고 있었다. 불리한 체스 판을 한꺼번에 뒤집으려던 아버지는 왕을 지나치게 위험으로 몰아넣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화로 옆에서 조용히 뜨개질을 하던 늙은 아내까지 참견하는 형편이었다.
"저 바람 소리 좀 들어봐." 이미 늦은 다음에야 치명적인 착오를 발견한 화이트 씨는 아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짐짓 상냥하게 말했다.
"듣고 있어요." 아들은 무심히 말하고 열심히 판 위를 보면서 손을 뻗었다. "장군."
"오늘 밤엔 아무래도 올 것 같지 않은데." 체스 판 위로 손을 이리저리 옮기면서 아버지가 말했다.
"장군입니다." 아들이 다시 말했다.
"이렇게 외진 곳에 살고 있으면, 이게 제일 문제야." 화이트 씨가 갑자기 거칠게 말했다.
"더럽고 진흙 투성이지. 변두리 주택단지 가운데서도 여기가 제일 심해. 도로는 뻘밭이고, 큰 길은 시냇물이나 마찬가지야. 도대체 길을 만드는 녀석들이 뭘 생각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아마, 큰 길 근처에 빌려준 집은 두 채 뿐이니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그런 일은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여보." 아내가 달래듯 말했다. "아마, 이번 판은 이기겠죠."
화이트 씨는 언뜻 눈을 들어 어머니와 아들이 의미 있는 눈짓을 교환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뒤가 켕기는 듯 엷은 회색 턱수염 아래 싱글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아, 왔어요." 바깥 문이 큰 소리를 내고, 묵직한 발소리가 현관에 가까이 오자 허버트 화이트가 말했다.
노인은 서둘러 나갔다. 문을 열고 "날씨가 대단하지?"하고 말하는 것이 들렸다. 방문객도 그렇다고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화이트 부인은 "쩝" 혀를 차고, 남편이 방에 들어오자 조용히 기침을 했다. 남편을 뒤따라 키가 크고 몸집이 우락부락한 사나이가 들어왔다. 붉은 얼굴에 작은 눈이 둥글게 빛나고 있었다.
"모리스 특무상사다." 화이트씨는 사나이를 가족에게 소개했다.
특무상사는 악수를 하고 권하는 대로 난로 곁 의자에 앉아 기분 좋은 표정으로 가족들을 둘러 보았다. 주인은 위스키와 글라스를 내놓고 조그만 구리 주전자를 불 위에 얹었다.
위스키를 세 잔째 손에 쥐면서 특무상사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몇 명 안 되는 가족들은 먼 데서 온 이 손님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손님은 의자에 앉아 넓은 어깨를 펴고 자신이 겪었던 이상한 풍경, 영웅적인 행동, 전쟁과 질병, 기묘한 민족 등에 관해 이야기했다.
"21년 동안이나 가 있었지." 화이트 씨는 아내와 자식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친구는 군대에 갈 무렵 창고에서 일하고 있었지. 키가 호리호리한 젊은이였어. 그런데 이제 이렇게 변해버렸어."
"그리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화이트 부인은 친절하게 말했다.
"나도 인도에 가고 싶어." 노인은 말했다. "구경만이라도 하게."
"아니, 여기 계시는 게 훨씬 좋습니다." 특무상사는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그리고 빈 글라스를 내려놓고 한숨을 쉬면서 또 고개를 흔들었다.
"난 오래된 사원이나 수도자, 마술사들을 보고 싶어." 노인은 또 말했다. "전번에 자네는 원숭이 손인가 뭔가 그런 얘길 하지 않았나. 그건 도대체 뭔가, 모리스?"
"별 것 아닙니다." 군인은 재빨리 말했다. "특별히 신경을 쓸 만큼 가치 있는 물건이 아니예요."
"원숭이 손이라구요?" 화이트 부인은 의심스러운 듯 말했다.
"뭐, 마술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보잘 것 없는 물건일 뿐입니다." 특무상사는 약간 무뚝뚝하게 말했다.
가족 세 사람은 기대에 차서 듣고 있었다. 손님은 뭔가 방심한 표정으로 빈 글라스를 입에 댔다가 내려 놓았다. 주인이 거기다 다시 가득 부었다.
"언뜻 보면..." 호주머니를 뒤지면서 특무상사가 말했다. "말려서 미이라로 만든 흔해빠진 조그만 원숭이 손일 뿐입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냈다. 화이트 부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약간 물러났으나 아들은 그것을 쥐고 진귀한 물건인 것처럼 자세히 살폈다.
"그런데, 이것이 도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화이트 씨는 아들에게서 그것을 받아 들고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그는 그 물건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것엔 나이 많은 수도자의 주문이 불어 넣어져 있습니다." 특무상사는 말했다. "대단히 덕이 높은 성자의 주문이라고 합니다. 운명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것에 성실하지 못하면 슬픔이 올 뿐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그 수도자는 여기에 주문을 불어넣어 세 사람이 각각 소망을 세 개씩 이루도록 했다는 겁니다."
그 태도가 너무 진지하고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얼떨결에 가벼운 웃음을 터뜨린 것이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럼, 왜 당신은 그 세 개의 소원을 이루려고 하지 않습니까?" 허버트 화이트가 제법 재치 있는 질문을 했다.
군인은 마치 중년 사나이가 입이 싼 젊은이를 대하는 것처럼, 허버트를 쳐다 보았다.
"전 이미 소원을 다 말했습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주근깨가 많은 그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럼, 정말 당신은 그 세 개의 소원을 다 이루었다는 겁니까?" 화이트 부인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특무상사는 대답했다. 가지런하고 튼튼한 그의 이빨이 글라스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다른 사람도 소원을 말한 적이 있어요?" 노부인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처음 이 손을 갖게 된 사나이도 세 개의 소원을 말했습니다." 특무상사는 대답했다. "그의 처음 두 개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모릅니다만, 세 번째 그가 바란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원숭이 손을 제 것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말투가 너무 엄숙해 자리에는 숨 막힐 것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자네가 이미 세 개의 소원을 이루었다면 이건 벌써 자네에겐 소용이 없겠구만, 그렇지 않나 모리스?" 이윽고 노인이 말했다. "그런데 왜 아직 갖고 있나?"
"뭐, 내킨 기분이죠." 군인은 차츰 평상시 말투로 돌아왔다. "팔 생각도 해봤습니다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버렸습니다. 이미 이것은 많은 재앙을 불러왔습니다. 사실 사려고 하는 사람도 없었구요. 어떤 사람은 도깨비 같은 허황한 얘기라고 웃어 버리고, 조금이라도 살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먼저 시험해 결과를 보고, 나중에 돈을 주겠다고 그러더군요."
"만일, 자네에게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노인은 날카롭게 상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 번 더 소원을 빌어볼 생각이 있나?"
"모르겠습니다." 군인은 대답했다. "정말 잘 모르겠어요."
그는 집게와 엄지 손가락으로 원숭이 손을 집어 들고선 갑자기 난로 불에 던져 버렸다. 가늘게 외치며 화이트 씨는 몸을 굽혀 그것을 끄집어 냈다.
"태워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군인은 엄숙하게 말했다.
"자네가 필요 없다면 글쎄, 모리스" 노인은 말했다. "나에게 주지 않겠나?"
"아닙니다." 상대방은 완강한 말투였다. "저는 이제 그것을 불 속에 던져버렸습니다. 당신이 그걸 주워서 가지는 것은 자유입니다. 다만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걸 제 탓으로 돌리지는 마세요... 아니, 사려 분별이 있는 사람답게 그대로 불 속에 던져 버리세요."
노인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자기 것이 된 물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런데, 어떻게 사용하는 건가?"
"그걸 오른손으로 쳐들고선 소리 내어 소원을 말하는 겁니다." 특무상사는 말했다.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선 조심해야 합니다."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 같군요." 화이트 부인이 일어나서 저녁 차릴 준비를 하면서 말했다. "나에게 팔이 네 개 달리게 해달라고 빌어보지 그래요?"
남편이 호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그 신기한 물건을 끄집어 내자, 곧 부모와 아들 세 사람은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특무상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화이트 씨의 팔을 붙들었다.
"굳이 소원을 말하시려면" 특무상사는 조급하게 말했다. "뭔가 현명한 것을 말씀하세요."
화이트 씨는 그 신기한 물건을 또 호주머니에 집어 넣곤 의자를 가져다 특무상사를 테이블에 앉혔다. 식사를 하는 동안 다들 원숭이의 손은 잊고 있었다. 식사 후 또 인도에서 특무상사가 겪은 모험 얘기를 세 사람은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지금 들은 이야기로 봤을 때, 원숭이의 손 얘기도 별로 믿을 건 못 되는 것 같아요." 겨우 마지막 열차 시각에 맞춰 손님이 집을 떠나자 허버트가 말했다. "이 원숭이 손이란 것도 별 게 없을 건 뻔해요."
"여보, 저것 때문에 얼마나 드렸어요?" 화이트 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남편을 쳐다봤다.
"응, 아주 조금이야." 약간 얼굴을 붉히면서 그는 대답했다. "별로 받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내가 억지로 주었어. 모리스는 계속 그걸 버리는 게 좋다고 그러더군."
"그럴 겁니다." 허버트는 몸서리치는 시늉을 했다. "어쨌든 우리들은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고 행복해질 찬스가 생긴 거죠. 먼저 아버지가 황제가 되고 싶다고 말하세요. 그렇게 되면 어머니 바가지에서 벗어날 수 있겠죠."
화이트 부인에게 욕을 얻어먹고 쇼파 쿠션에 얻어 맞으면서 허버트는 테이블을 빙빙 돌았다.
화이트 씨는 호주머니에서 원숭이 손을 꺼내어 의심스럽게 이리저리 살펴 보았다. "뭘 바라면 좋을지 실제론 잘 모르겠어." 그는 중얼거리며 말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이미 다 이뤄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
"집 문제만 해결되면 아버지는 비로소 완전히 행복해지실 거예요." 허버트가 아버지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2백 파운드 필요하다고 말하세요. 그 돈이면 이 집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경박함이 부끄러운 듯 미소를 띠고 그 신기한 물건을 받들어 올렸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눈길을 보내며 엄숙한 얼굴을 슬쩍 누그러뜨리면서 피아노에 앉아 분위기에 맞춰 연주를 시작했다.
"나는 2백 파운드 얻기를 바란다."
그 말에 피아노의 아름다운 화음이 호응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노인의 떨리는 부르짖음에 뚝 끊겼다. 아내는 노인 쪽으로 달려갔다.
"저것이 움직였어." 오싹한 표정으로 마루 위에 던져진 원숭이 손을 쳐다보며 노인이 부르짖었다. "소원을 말하자마자 내 손에서 마치 뱀처럼 꿈틀거렸어."
"그래도 돈은 보이지 않는군요." 아들은 원숭이 손을 주워 테이블 위에 놓으며 말했다. "내기를 할까요? 결코 돈이 생기지는 않아요."
"당신 기분 탓이예요. 틀림없어요." 아내는 걱정스러운 듯 남편을 주시했다.
남편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저것이 특별히 무슨 피해를 끼친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난 놀랐어."
그는 다시 난로 곁에 앉았다. 두 사나이는 파이프를 피웠다. 바깥에는 바람이 더 세게 불었다. 2층의 문이 탕 하고 닫히는 소리에 노인은 신경질적으로 움찔했다. 세 사람 모두 유달리 숨막힐 것 같은 분위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윽고 노부부는 침실로 가기 위해 일어섰다.
"아버지 침대 한복판에서 현금이 가득 들어있는 보따리가 발견될지도 모르죠." 편히 주무시라는 인사에 덧붙여 허버트가 한 마디 했다. "그리고 부정하게 얻은 그 돈뭉치를 챙기려고 하면 이불장 위에서 뭔가 무서운 괴물이 도사리고 앉아 아버지 어머니를 노려보는 것 아닐까요?"
다음날 아침, 반짝이는 겨울 햇볕이 아침 식사 테이블에 비쳐 들어오자 허버트는 어젯밤 일을 놓고 쓸 데 없는 걱정이라고 비웃었다. 방에는, 어젯밤과 달리 평범하고 건강한 분위기가 떠돌고 있었다. 마르고 지저분한 조그만 원숭이 손은 제멋대로 식기 장 위에 던져져 있어 그 영험 따위에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이 먹은 군인은 모두 그 모양이야." 화이트 부인은 말했다. "우리들이 그런 쓸 데 없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니. 지금이 어떤 시대라고, 그렇게 소원이 이루어지겠어요. 설령, 이루어진다손 쳐도 2백 파운드가 당신에게 재앙을 안기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잖아요, 그렇지 않니 화이트?"
"아니, 하늘에서 2백 파운드가 아버지 머리에 떨어질지도 모르죠." 허버트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모리스 얘기로는" 아버지가 말했다. "모든 일이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나니까, 가령 어떤 일이 생겨도 그것이 그 소원의 결과일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하더군."
"어쨌든 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그 돈에 손을 대지 말아 주세요." 허버트는 테이블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 돈이 아버지를 욕심꾸러기로 만드는 바람에, 자칫 아버지가 집에서 쫓겨나는 일이 생겨서는 곤란하니까요."
어머니는 웃으면서 현관까지 아들을 배웅했다. 아들이 큰 길에 나간 것을 보고 나서 아침 식사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리고 남편의 경박하고 귀가 얇은 성질을 놀려먹으며 아주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도 역시 그녀는 우편 배달부가 현관 문이라도 두들기면 다급하게 달려 나가기도 하고, 그 우편물이 양복점에서 온 청구서인 것을 알고선 퇴역 특무상사의 황당한 얘기를 유쾌하게 비웃었다.
"허버트가 돌아오면 또 뭔가 우스운 얘기를 할 거예요." 부부가 점심 식사를 하며 마주 앉았을 때 그녀는 말했다.
"그래도" 맥주를 직접 따라 마시면서 화이트 씨는 말했다. "그게 내 손에서 움직인 것은 분명해. 그것만은 맹세코 단언할 수 있어."
"그렇게 착각한 것 뿐이예요." 아내는 달래듯 말했다.
"아니, 확실히 움직였어." 남편은 말을 자르며 대꾸했다. "착각한 것이 아니야. 난, 다만... 왜 그래?"
아내는 대답을 하지 않고 집 바깥에서 한 사나이가 묘한 거동을 하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나이는 이 집에 들어오려고 했다가도 그러나 또 뭔가 주저하는 듯 집안을 살펴보고는 했다. 그녀는 이 사나이가 훌륭한 옷차림에 번쩍이는 고급 실크햇을 쓰고 있는 것을 보고 문득 2백 파운드를 떠올렸다.
세 번이나 그 사나이는 문 앞에까지 왔다가 또 뒤로 돌아섰다. 사나이는 네 번 째 다가와 문에 잠깐 손을 댄 채 서 있다가 이윽고 단호하게 문을 열고 통로로 들어왔다. 화이트 부인은 재빨리 손을 뒤로 돌려 에이프런의 끈을 풀어 의자 쿠션 밑으로 쑤셔 넣었다.
침착하지 못한 태도의 이 수상한 사나이를 그녀는 방으로 안내했다. 사나이는 슬쩍 화이트 씨를 쳐다봤다. 그녀가 방안이 어지러운 것, 남편이 뜰을 손질할 때 입는 작업복을 걸치고 있는 것을 변명했으나 그 사나이는 거의 듣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여성다운 인내심을 보이며 상대방이 용건을 꺼내기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상대방은 처음에 기묘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저는 댁을 방문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간신히 입을 연 상대방은 몸을 구부려 바지에서 조그만 솜 꼬투리를 집어 뜯었다. "저는 모오앤메긴즈 회사에서 왔습니다."
노부인은 흠칫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그녀는 숨을 거칠게 쉬면서 물었다. "허버트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무슨 일입니까? 무슨 사고라도?"
남편이 말을 가로막았다. "잠깐, 여보" 다급하게 그는 말했다. "좀 앉으세요. 뭐 그렇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어. 아마 당신은 나쁜 기별을 하려고 오신 건 아니겠지요?" 그는 우울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만..." 손님은 말을 꺼냈다.
"다치기라도 했습니까?" 어머니가 물었다.
손님은 말없이 머리를 숙였다. "그런데 상처가 너무 심해서..."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고통스럽진 않을 겁니다."
"다행이군요." 늙은 여인이 말했다. "정말 다행이야. 다행이..." 그러다 그 위로의 말이 지닌 무서운 의미가 어렴풋이 이해되면서, 그리고 이 쪽의 시선을 피해 외면하는 상대방의 표정을 보고 갑자기 그녀는 말을 끊고 숨을 삼켰다. 그리고 와들와들 떨면서 둔감한 남편의 손에 자신의 늙은 손을 포갰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기계에 휩쓸려 들어갔습니다." 이윽고 손님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기계에 휩쓸렸다고?" 화이트 씨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그 말을 따라 했다. "그래요?"
노인은 앉은 채 얼빠진 것처럼 창 밖을 주시하며 아내의 손을 두 손으로 끌어당겨 40년 전 연애 시절 그랬던 것처럼 꼭 쥐었다.
"허버트는 우리의 하나뿐인 자식입니다." 조용히 손님 쪽을 향해 노인은 말했다. "참혹합니다."
상대방은 기침을 하고 일어나서 천천히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회사에서는 당신들의 불행에 진정으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신들에게 전하도록 저를 보낸 것입니다." 부부를 보지도 않고 그는 말했다. "저는 회사의 고용인일 뿐입니다. 다만 회사의 지시에 따를 뿐이라는 점을 이해해 주십시오."
아무 대답도 없었다. 늙은 여자는 얼굴이 창백해져 두 눈을 크게 뜨고 큰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남편의 얼굴은 바로 그 특무상사가 처음 싸움터에 나갔을 때 지었던 그런 표정이었으리라.
"저는, 모오앤메긴즈 회사가 이 일에 대해 모든 책임을 거부한다는 사실을 전하고자 합니다." 상대방은 말을 계속했다. "회사는 아무 책임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댁의 자제의 그 동안의 근무 상태를 고려, 약간의 금액을 보상으로 드리고자 합니다."
화이트 씨는 아내의 손을 놓고 일어섰다. 그리고 무서운 눈으로 손님을 쏘아 보며 메마른 입술로 겨우 물었다. "얼마 정도나?"
"2백 파운드 입니다." 상대방은 말했다.
아내의 비명 소리도 듣지 못하고 노인은 몽롱하게 미소를 지으며 앞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탁 마루 위에 쓰러져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노부부는 2마일 정도 떨어진 새 묘지에 아들을 매장하곤, 어둠과 침묵에 싸여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눈이 돌 듯이 순식간에 끝나버려 두 사람은 처음에 거의 사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뭔가 다른 일 - 늙은 사람의 마음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줄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뭔가 기다리는 기분은 체념으로 바뀌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희망 없는 체념,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감각으로 잘못 이해되기도 하는 그런 상태로 변한 것이다. 둘은 서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함께 이야기할 일은 아무 것도 없고 두 사람의 나날은 다만 지루하고 우울할 뿐이었다.
일 주일 정도 시간이 지나갔다. 밤중에 갑자기 눈을 뜬 노인은 손을 뻗쳐 보고 침대에 자기 혼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침실 안은 어두웠다. 창 쪽에서 짓눌리는 듯한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침대에서 고개를 들고 귀를 기울였다.
"돌아와." 노인은 상냥하게 말했다. "춥지?"
"그 애는 더 추울 거예요." 늙은 여자는 이렇게 말하곤, 또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흐느껴 우는 소리가 노인의 귀에서 사라졌다. 침대는 따뜻했으며 눈꺼풀은 졸음에 겨워 무거웠다. 잠깐 잠이 깼지만 노인은 다시 잠들었다. 그러다 미친 듯 부르짖는 아내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다시 눈을 떴다.
"그래, 저 원숭이 손!" 그녀는 미친 듯 부르짖었다. "저 원숭이 손!"
노인은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어디? 어디 있어? 왜 그래?"
늙은 여인은 엎어지면서 방을 가로질러 노인에게 왔다. "그걸 찾아야 해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걸 없애버리진 않았죠?"
"거실에 있어. 장 위에."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그는 말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그녀는 울다가 웃다가 뭄을 숙이고 그의 뺨에 키스했다.
"이제 생각이 났어요." 그녀는 히스테릭하게 말했다. "어째서 지금까지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어째서 당신은 그 생각을 못했죠?"
"뭘 말이야?"
"두 개의 소원이 남아 있어요." 그녀는 재빨리 말했다. "아직 하나밖에 소원을 말하지 않았잖아요?"
"그걸로 아직 부족한가?" 노인은 날카롭게 외쳤다.
"아니예요." 그녀는 뚜렷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나 더 소원을 말하는 거예요. 빨리 밑으로 내려가 그걸 가져와요. 우리 아들이 살아 돌아오도록 소원을 말해요."
침대에서 일어난 남편은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걷어 치웠다. "턱도 없는 소리야. 당신 돌았어?" 노인은 질색을 하고 외쳤다.
"그걸 가져와요." 그녀는 헐떡였다. "빨리 그걸 가져와 소원을 빌어요... 오, 내 아들, 내 아들!"
남편은 성냥을 그어 촛불을 켰다. "침대로 돌아와." 노인은 초조하게 말했다. "당신은 지금 제 정신이 아니야." "첫 번 째 소원은 이루어졌어요." 늙은 여인은 흥분해 소리쳤다. "어째서 두 번 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겠어요?"
"그건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야." 노인은 더듬거렸다.
"빨리 내려가서 그것을 가져와 소원을 빌어 주세요." 늙은 여자는 부르짖고는 늙은 남편을 문으로 끌고 갔다.
노인은 어둠 속을 내려가 더듬거리며 거실 벽난로로 다가갔다. 그 물건은 거기 그대로 있었다. 아직 소원을 말하진 않았지만, 소원을 말하면 이 방에서 나가기도 전에 당장 손발이 잘려나간 아들이 눈 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는 전율에 휩싸여 문을 찾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이마가 차가워졌다. 손으로 더듬어 테이블을 돌아 벽을 따라 걸어서 노인은 그 저주스러운 물건을 손에 들고 좁은 복도에 이르렀다.
침대에 들어가자 늙은 아내의 얼굴까지 기괴하게 변해 보였다. 창백한 얼굴로 가만히 뭔가를 기다리는 늙은 아내의 얼굴 표정이 섬찟하게 느껴졌다. 노인은 공포에 떨며 아내가 무서워졌다.
"빨리 소원을 빌어요." 늙은 아내는 격렬하게 부르짖었다.
"어리석고, 사악한 짓이야." 그는 머뭇거렸다.
"빨리 빌어요." 늙은 아내는 되풀이했다.
그는 한 손을 들었다. "전 자식이 살아 돌아오기를 소원합니다."
저주 받은 물건은 마루 위에 떨어졌다. 노인은 몸을 떨며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떨리는 몸을 의자에 던졌다. 늙은 여인은 타는 듯한 눈으로 창 쪽으로 가서 덧문을 열었다.
노인은 추위에 온 몸이 차가워질 때까지 앉아 있었다. 그리고 늙은 아내가 몇 번씩 창 밖을 내다보는 모습을 지켜봤다. 도자기 촛대의 짧은 촛불이 떨리는 그림자를 천정과 벽에 던지고 있었으나 이윽고 한 번 번쩍하더니 꺼져버렸다. 노인은 소원을 빈 결과가 나타나지 않자 차음 안심이 돼 살짝 침대로 돌아왔다. 1,2분 지나자 늙은 여인도 말없이 냉정하게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어느 쪽도 입을 열지 않고 둘 다 묵묵히 누워 벽 시계의 똑딱똑딱 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쥐가 바스락거리며 쪼르르 벽 쪽으로 달려갔다. 어둠은 무겁고 괴로웠다. 잠깐 더 누워 있다가 노인은 용기를 내어 성냥갑을 집어 한 개비 그어 불을 붙여선 초를 가지러 계단을 내려갔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면서 성냥이 꺼졌다. 하나 더 그으려고 하는 순간 거의 들릴까 말까 슬쩍, 현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냥갑이 노인의 손에서 떨어졌다. 꼼짝도 하지 않고 숨을 죽이고 서 있는데 또 노크 소리가 났다. 노인은 발꿈치를 들고 돌아서 재빨리 침실로 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세 번 째 노크 소리가 온 집안을 울렸다.
"뭘까요?" 늙은 아내는 놀라 일어나면서 외쳤다.
"쥐야." 떨리는 목소리로 노인은 말했다. "쥐야. 계단에서 내 곁을 지나갔어."
늙은 아내는 귀를 기울이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노크 소리가 온 집안을 울렸다.
"허버트예요!" 늙은 여인은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허버트예요!"
여인은 문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남편이 달려가 아내의 손을 붙들었다. 그는 그녀를 꽉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 그래?" 쉰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저건 우리 아들 허버트예요!" 있는 힘을 다해 버둥거리며 아내는 부르짖었다. "그 애가 2마일이나 떨어져 있다는 것을 깜빡 했어요. 왜 나를 붙잡는 거예요? 놔 줘요. 문을 열어줘야 해요."
"부탁이야, 저걸 집에 들여놓아서는 안 돼." 와들와들 떨면서 노인은 부르짖었다.
"당신은 자기 자식이 무서운 모양이군요." 버둥거리며 아내가 부르짖었다. "놓아 주세요. 걱정 마, 곧 간다, 허버트, 곧 간다."
또 노크 소리가 났다. 소리가 울리자 늙은 여인은 남편의 손을 비틀어 떼곤 침실에서 달려 나갔다. 노인은 계단 끝까지 쫓아가 달려가는 아내의 뒤에서 애원하며 불렀다. 문의 빗장을 벗기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아래쪽 자물쇠가 조금씩 끌려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파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자물쇠가 빠졌어요." 아내가 소리 높여 외쳤다. "자, 내려와 도와주세요. 난 손이 닿지 않아요."
그러나 남편은 마루 위에서 미친 듯 원숭이 손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다. 밖에 와 있는 저 누군가가 집 안에 들어오기 전에 그것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는 간절히 생각했다. 연속적으로 두들기는 노크 소리가 온 집안을 울리고 있었다. 아내가 복도에서 의자를 가져와 문에 기대서 세워 그걸 밟고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위쪽 자물쇠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노인은 원숭이 손을 발견했다. 그는 미친 듯 세 번째, 그리고 최후의 소원을 외쳤다.
갑자기 노크 소리가 그쳤다. 그러나 그 메아리는 아직 집안에 울리고 있었다. 의자가 밀리면서 현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찬 바람이 계단까지 불어왔다. 아내가 낙담해 슬피 탄식하며 우는 소리가 높게, 그리고 길게 들려왔다. 그는 용기를 내 그녀에게 쫓아 내려갔다. 그리고 통로를 나가 문 있는 곳까지 가 봤다. 길 건너 가로등이 깜빡이며 사람의 그림자도 없는 고요한 길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