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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dventure of the Bruce-Partington Plans


[소개]
코난 도일의 추리 소설 가운데 그 구성이 치밀하고 스케일이 가장 큰 작품에 속한다. 대개 일상의 평범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일종의 유희 같은 느낌을 주는 도일의 여타 작품과 달리 이 작품은 현대의 첩보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극적 구성과 장치들을 선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작가 소개]
코난 도일(Sir Arthur Conan Doyle, 1859-1930) : 영국의 소설가. 에딘버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개업했으나 곧 소설에 전념했다. 아마추어 탐정 셜록 홈즈가 활약하는 <주홍빛 연구> <네 개의 서명> <바스카빌의 개> 등의 작품으로 작가로서 이름을 얻었고, 그밖에 <셜록 홈즈의 모험> <홈즈의 귀환> <홈즈의 회상> <홈즈의 마지막 인사> 등 일련의 작품집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다. 1902년에 <남아프리카 전쟁 종군기>로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그밖에도 소설과 희곡 작품이 있다. 만년에는 오컬트(심령술)에 심취한 것으로 전해졌다.







1895년 11월 셋째 주의 일이었다. 런던은 짙은 안개로 덮여 있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베이커 거리의 우리 집 창문에서 길 건너편 집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첫날은 홈즈는 두꺼운 참고 서적들에 색인을 붙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틀과 사흘째에는 요즘 새삼스럽게 취미를 붙인 중세 음악에 마음을 쏟으며 지루한 것을 견디고 있었다.

그런데 나흘째가 되자 성미가 급하고 활동적인 홈즈로서는 아무래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나 보다. 아침식사를 끝낸 뒤, 끈끈하고 무거운 다갈색 안개가 사라지지 않고 유리창 밖에 기름기 있는 물방울을 맺히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홈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공연히 오락가락했다. 홈즈는 억눌러왔던 정력이 솟구치는지 손톱을 물어뜯고, 가구를 두드렸다가 혼자서 괜히 몸부림을 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실내를 초조하게 거닐었다.

드디어 홈즈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와트슨, 혹시 뭐 신문에라도 재미있는 기사가 나지 않았나?"

홈즈가 말하는 것은 뭔가 재미있는 범죄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신문에는 혁명이니, 전쟁의 가능성이니, 개각이 임박했다느니 하는 뉴스들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내 친구에게는 이런 뉴스는 관심 밖이다. 범죄 사건 기사들도 하나같이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것뿐이었다. 홈즈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초조하게 방안을 거닐었다.

"뭐 특별한 사건은 없네." 내가 대답하자 홈즈는 짐승을 놓친 사냥꾼처럼 사납게 다시 거실 안을 서성거렸다.

"런던의 범죄자란 놈들은 정말 멍텅구리야. 이 창 밖을 보게나. 사람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다가 안개 속으로 그냥 사라지지 않나. 도둑이든 살인자든 이런 날이라면 호랑이가 정글을 마음대로 다니듯 런던을 온통 쏘다닐 수있지. 덤벼들기 전에는 모습이 보이지 않고, 덤벼들 때도 피해자 외에는 아무도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단 말이야. 이렇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단 말일세."

"좀도둑 따위는 많이 있는데..."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홈즈는 콧방귀를 뀌면서 경멸의 표정을 지었다.

"이 위대하고 어슴프레한 무대는 그보다 훨씬 가치 있는 범죄에 어울리지. 사실 나같은 사람이 범죄자가 아닌 것은 이 사회를 위해서 큰 행운일세."

"사실일세." 나는 진심으로 이렇게 말했다.

"가령 내가 브룩스나 우드하우스 같은 인물, 혹은 내 목숨을 노릴만한 이유가 있는 50명 가운데 한 명이라면... 나의 추격을 피해 내 자신도 얼마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별로 자신이 없네. 무슨 초대랄지, 가짜 회합 따위 약속을 만들어 진작 해치웠겠지. 라틴 계통의 나라에 안개가 별로 끼지 않는 건 정말 하나님이 보살피신 거야. 그 나라들은 대개 암살이 성행하지 않나."

홈즈가 이렇게 말하다가 문득 귀를 기울였다.

"저런, 기어이 뭔가 왔어. 이 따분한 생활에서 나를 구해줄 것 말이야."

하녀가 전보를 들고 왔다. 홈즈는 전보를 읽더니 큰소리로 웃어댔다.

"야, 이게 웬일이야? 마이크로프트 형이 온다는군."

"그게 그리 놀랄 일인가?" 나는 되물었다.

"그렇고 말고. 형의 생활은 시골 길을 달리는 기차처럼 규칙적이고, 레일에서 벗어나는 탈선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지. 팰맬 거리의 하숙과 디오게네스 클럽, 화이트홀 거리(런던의 관청이 모여 있는 지역)의 사무실을 왔다갔다할 뿐이야. 그동안 딱 한 번 여기 온 일이 있었다네. 그런데 오늘 이렇게 탈선을 하다니... 무슨 일일까?"

"전보에 뭐라고 했는가?"

홈즈는 형에게서 온 전보를 내게 건네주었다.

'캐드건 웨스트 사건으로 만나고 싶다. 곧 가겠다. 마이크로프트'

"캐드건 웨스트?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나는 아무 것도 기억이 없어. 하지만 마이크로프트 형이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다니! 행성이 궤도에서 벗어나는 꼴 아닌가. 여보게, 와트슨, 자네는 우리 형이 정부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

나는 '그리스어 통역사건' 때 들은 얘기가 어렴풋이 기억났다.

"글세, 정부의 말단 공무원이라는 얘기를 자네에게서 들은 것 같은데..."

"사실 그때는 자네를 잘 알지 못했으니까... 이건 국가의 중요한 문제라서 신중할 필요가 있었지. 물론 형이 정부에 일하고 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형은 정부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야."

"뭐라고?"

"놀랄 줄 알았네. 형은 기껏 연봉 450파운드를 받는 하급 관리에 불과하네. 야심도 없고 명예나 직위를 받으려는 욕심도 없지만, 그래도 우리 정부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아주 중요한 인물이라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글쎄, 말하자면 형의 지위 자체가 유례가 없는 자리라네. 그리고 형은 그런 지위를 스스로 쌓아올렸다네. 지금까지 그런 자리는 없었고, 앞으로도 두 번 다시 생기지 않을 거야. 우리 형은 드물게 보는 예리한 두뇌의 소유자인데다, 기억력은 당해 낼 사람이 없을 정도야. 나는 그런 능력을 범죄 수사에 쏟고 있지만, 형은 그걸 보다 특수한 업무에 사용하고 있다네.

정부의 각 부처에서 결의된 사항은 모두 형에게 보내지네. 일종의 중앙거래소, 어음 교환소 같은 기능을 한다고나 할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 분야의 전문가지만, 우리 형은 여러가지 일을 광범위하게 아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지. 가령, 지금 어떤 장관이 캐나다나 인도, 또는 해군에 관한 정보, 심지어 화폐의 금은 본위 제도 따위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고 치세. 정부 각 부처는 각기 맡은 분야의 정보를 제출하지만, 이 모든 정보를 종합해서 각각의 요소가 서로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즉석에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이크로프트 형뿐이라네.

처음엔 다들 마이크로프트 형을 편리한 도구나 일종의 지름길 정도로 여겼지만, 지금은 매우 중요한 존재가 되었지. 형의 뛰어난 머리 속에는 모든 정보가 분류 정리되어 있어서 금방 꺼낼 수 있다네. 형의 한마디로 정부 정책이 결정된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네. 형은 일에 파묻혀 지낼 뿐, 다른 것은 일체 생각하지 않는다네. 가끔 내가 찾아가서 사소한 문제로 조언을 부탁하면 머리 훈련을 한답시고 심심풀이로 상대해주지만 말일세.

그런데 오늘, 그 주피터 신 같은 양반이 하계로 왕림하신다니 도대체 어찌된 셈일까? 캐드건 웨스트는 도대체 어떤 친구고, 또 마이크로프트 형과는 무슨 관계일까?"

"아, 생각났어!" 나는 소파 위에 흩어져 있는 신문에 손을 뻗으며 외쳤다.

"여기 실려 있네. 이걸 보게. 캐드건 웨스트는 화요일 아침, 지하철에서 시체로 발견된 젊은 남자라네."






홈즈는 파이프를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도중에 멈추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건 틀림없이 중대한 일이로군, 와트슨. 형의 판에 박힌 습관을 바꿀 정도라면 결코 예사로운 사망 사건이 아닐세. 도대체 형은 그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 사건에는 이렇다 할 특색이 없었어. 그 젊은이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것 같던데... 소지품을 도둑 맞은 흔적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폭행을 당한 것 같지도 않아.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검시 결과 새로운 사실이 더 많이 나타났더군. 좀더 자세히 조사해 보면 이상한 점이 나타날지도 모르지."

홈즈는 팔걸이 의자에서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와트슨, 좀더 자세히 말해주게. 형님의 행동에 뭔가 영향을 줄 정도라면, 이건 애초에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지."

"그 사람 이름은 아서 캐드건 웨스트. 나이는 27세. 아직 미혼이며 울리지 병기 공장의 직원이라네."

"그렇다면 공무원이군. 그래서 형과 관련이 있는 건가?"

"웨스트는 월요일 밤, 갑자기 울리지를 떠났다네. 마지막으로 그를 본 것은 약혼녀인 바이올렛 웨스트베리 양인데, 그 날 밤 7시 반쯤 안개 속에서 서로 갑자기 헤어졌다고 하네. 두 사람은 그날 다투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웨스트가 갑자기 가버렸는지 그녀도 이유를 잘 모른다는 거야. 그리고 다음날 아침, 런던 지하철의 올드게이트 역 부근에서 메이슨이라는 선로 노동자가 웨스트의 시체를 발견했어."

"그게 언제쯤이었나?"

"시체는 화요일 아침 6시에 발견되었네. 역 근처의 동쪽으로 향한 선로 왼쪽 지점이었어. 그런데 시체는 철로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하네. 그 지점은 지하철이 터널에서 막 빠져나오는 곳이네. 시체는 머리가 참혹하게 깨져 있었어. 아마 열차에서 떨어졌을 때 생긴 상처 같다고 하네. 선로에 떨어지면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 다른 이유는 찾기 어려워. 가까운 마을에서 시체를 운반해 왔다면 역의 울타리를 넘어야 하는데, 거기엔 항상 개찰원이 서 있다니까 말일세. 그 점은 확실한 모양이야."

"좋아, 그건 분명해. 그 사람이 살아 있었건 죽어 있었건 간에 기차에서 굴러 떨어졌겠지. 그게 아니면 누가 떼밀어서 떨어졌던가 둘 중의 하나겠지. 나도 거기까지는 알겠어. 다음을 계속해 보게."

"시체가 발견된 선로를 지나는 열차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열차야. 그런데 그 열차들 가운데에는 시내선도 있고, 또 와이어스던이나 그밖에 교외에서 오는 열차편도 있다고 하는군. 다만 그 사람이 죽은 무렵, 즉 그 날 밤 늦게 그 사나이가 그 열차에 타고 있었다는 건 확실해. 그런데 어디서 탔는지 그걸 모르는 모양이야."

"차표로 알 수 있지 않은가?"

"호주머니에는 차표가 없었다네."

"차표가 없다니! 그것 참 이상한데. 차표를 보이지 않으면 플랫폼에 들어갈 수 없을 텐데... 차표는 갖고 있었다고 봐야겠지. 혹시 웨스트를 죽인 녀석이 빼낸 것 아닐까? 승차한 역을 숨기기 위해서 말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면 차 속에서 떨어뜨렸을 수도 있고. 그 점은 흥미가 있군 그래. 뭘 도둑 맞은 흔적은 없었다고 했지?"

"없는 모양이야. 여기에 소지품 목록이 있네. 지갑에 2파운드 15실링이 들어 있었고, 런던앤드카운티 은행의 울리지 지점 수표책도 한 권 있네. 실은 이것으로 그 친구 신원을 알 수 있었지. 그리고 그 날 밤 날짜가 찍힌 극장 입장권이 두 장... 또 기술 관계 서류가 한 뭉치 있었다는군."

홈즈는 만족스러운 듯이 소리를 높였다.

"드디어 알아냈네. 와트슨! 영국 정부 - 기술 관계 서류 - 마이크로프트 형, 이렇게 완전히 연결이 되네. 그건 그렇고, 드디어 형이 도착한 모양이군. 내 추측이 맞다면 아마 형이 직접 이 사건에 대해 설명하겠지."

잠시 뒤, 키가 크고 체격이 당당한 마이크로프트 홈즈가 방으로 들어왔다. 단단한 골격에 커다란 몸집이 어딘지 둔중하고 무골호인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몸 위에 얹혀 있는 얼굴은 단정한 이마에 깊숙이 들어간 회색 눈이 날카로웠다. 입술은 꼭 다물고 있고, 표정이 예리했다. 누구든 한 번 그를 본 사람은 볼품없는 그의 육체는 잊어버리고, 다만 뛰어난 그 정신력만을 기억하게 될 것 같다.

그의 뒤를 따라 우리와 낯익은 경시청의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들어왔다. 그는 여위고 엄격한 표정을 한 사나이었다.

두 사람 다 긴장된 얼굴이었으므로, 무언가 중대한 문제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경감은 아무 말 없이 악수를 했다. 마이크로프트는 외투를 벗고 팔걸이 의자에 앉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아주 골치아픈 일이 생겼다, 셜록. 나는 습관을 바꾸는 건 질색이지만, 지금은 그런 불만을 늘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다급한 형편이다. 태국쪽 사정도 지금 내가 도저히 자리를 비울 수 없는 형편이지만, 정말 더 긴급한 문제가 생겼단 말이야. 수상이 그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아직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해군성 쪽은 지금 완전히 벌집을 쑤셔놓은 꼴이야. 사건 내용은 신문을 통해 읽었겠지?"

"방금 읽었어요. 그 기술 서류란 게 도대체 뭡니까?"

"바로 그게 문제야! 다행히 아직 밖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만약 사실이 알려지면 아마 신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대겠지. 그 가엾은 젊은이의 호주머니 속에 있었던 서류는 브루스 파팅턴식 잠수함의 설계도였어."

마이크로프트의 긴장된 말투로 보아서 문제가 몹시 중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홈즈와 나는 다음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아마 그 잠수함에 대해서는 너도 소문을 들었겠지?"

"이름은 저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이 잠수함 관련 정보는 정부의 모든 기밀 중에서도 일급 비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가장 엄중한 보안 조치를 취해왔지. 브루스 파팅턴 잠수함의 행동 반경 안에서는 이미 해전은 필요가 없어진다고 할 수 있어. 2년 전에 국가 예산에서 거액을 비밀리에 지출해서 그 특허권을 사들였지.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

그 설계는 대단히 복잡해서 30여개의 독립된 특허로 이루어져 있고, 그 하나하나가 전체 공정에 없어서는 안되는 것들이야. 그래서 공장 옆 기밀실의 초정밀 금고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 방에는 도난 방지용 문과 창문이 설치되어 있지. 무슨 방법을 써도 그 기밀실에서 설계도를 갖고 나올 수는 없어. 해군의 조선 책임자도 그 설계도를 보고 싶으면 울리지의 기밀실까지 직접 가야 했지. 그런데 그것이 런던 한복판에서 죽은 하급 관리의 주머니에 들어 있었던 거야. 이건 도대체 말도 안되는 얘기야. 관청식 표현으로 하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얘기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결국 되찾지 않았습니까?"

"아니야, 셜록. 실은 되찾은 게 아니야. 이건 정말 심각한 사건인데... 기밀실에서는 열 장의 서류가 없어졌는데, 캐드건 웨스트의 주머니에서 나온 건 일곱 장 뿐이야. 가장 중요한 세 장이 없어진 것이지. 도둑을 맞은 거야. 셜록, 만사 제쳐놓고 이 일에 네가 나서줘야겠다. 경범 재판소에 보낼 사소한 범죄 사건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지금부터 해결할 일은 국제적인 사건이야.

캐드건 웨스트는 어째서 서류를 훔쳤는가? 또 그 없어진 서류는 어디에 있는가? 웨스트는 어떻게 해서 죽게 됐는가? 시체는 왜 그런 곳에 있었는가? 어떻게 하면 이 불행한 사태를 막을 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네가 해결해다오. 그렇게 하면 네가 국가에 크게 이바지하게 된다."

"어째서 형님이 직접 나서지 않습니까? 형님은 나만큼 안목이 있지 않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셜록, 세밀하게 자료를 모으는 게 문제야. 만약 내게 상세한 자료를 알려준다면, 나 역시 팔걸이 의자에 앉아서 멋진 의견을 되돌려줄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닌다거나, 철도 감시원에게 물어서 정보를 캐낸다거나, 확대경을 들여다보는 일은 서투르단 말이야.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국가에 뭔가 공을 세워 표창을 받고 싶으면..."

하지만 홈즈는 싱글거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형님, 나는 오직 승부 자체를 즐길 뿐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확실히 흥미가 있군요. 그러니 기꺼이 나서서 조사해 보겠어요. 좀더 자세하게 얘기를 해 주시죠."

"좀더 자세한 내용은 이 서류에 적어 왔다. 도움이 될 만한 주소도 두서너 개 적어 놓았어. 그 서류의 보관 책임자는 유명한 제임스 월터 경이야. 오랫동안 관청에 근무한 훌륭한 신사여서, 그 양반이 받은 훈장과 직위를 일일이 적는다면 아마 인명사전에 두 줄 이상 차지할 걸? 그 양반은 머리가 백발이 된 지금까지 오래 근무해온데다 신분이 높은 가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고, 특히 그 애국심으로 봐서 절대 나라를 팔아먹을 사람은 아니지.

금고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두 명인데, 제임스 경이 그 중 하나야.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월요일 근무 시간 중에는 서류가 분명히 기밀실에 있었어. 그리고 제임스 경은 3시경에 열쇠를 가지고 런던으로 나갔어.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 날 밤에는 버클리 광장에 있는 싱클레어 제독의 저택에 있었어."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까?"

"틀림없어. 제임스 경이 울리지를 떠난 것은 동생 발렌타인 월터 대령이, 그리고 런던에 도착한 건 싱클레어 경이 증언했어. 그러니까 제임스 경은 이 사건과 직접 관계는 없다고 봐야겠지."

"또 한 사람, 열쇠를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굽니까?"

"주임 사무관인 제도사 시드니 존슨이야. 40세의 기혼자로 아이가 다섯이나 있지.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사람이지만, 대체적으로 근무 성적은 좋은 모양이야. 동료간 평판이 그다지 좋지는 않지만, 아주 부지런한 편이야. 그의 말로는 월요일 저녁엔 근무를 마친 후 줄곧 집에 있었고, 시계줄에 매달아 놓은 열쇠는 한번도 풀어놓은 일이 없었다는 거야."

"캐드건 웨스트에 대해서 말해 주시죠."

"근무한 지 10년째로, 그동안 성실하게 일해 왔어. 성미가 급하고 흥분하기 쉽다고 하지만, 정직하고 착실한 사람이어서 나쁜 평판을 들은 일이 없어. 직장에서는 시드니 존슨 다음의 지위에 있고, 직무상 매일 설계도를 만질 기회도 있었지. 그밖에 설계도를 취급한 사람은 없다는군."

"그 날 밤 설계도를 금고에 넣은 사람은 누구지요?"

"주임 사무관인 존슨이야."

"그렇다면 설계도를 훔쳐낸 사람이 캐드건 웨스트라는 건 분명하군요. 그의 시체에서 설계도가 발견되었으니까, 그것이 결정적인 증거 아닙니까?"

"하지만 셜록, 몇 가지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어. 첫째로 무엇 때문에 그걸 가지고 나왔느냐 하는 거야."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겠죠."

"그걸 팔면 수천 파운드쯤은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어."

"그밖에 설계도를 런던으로 가져갈 만한 다른 이유는 없을까요?"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지."

"그러면 그걸 팔 작정이었다고 가정하고 생각해야겠군요. 웨스트는 돈 때문에 설계도를 끄집어냈다... 그런데 그것은 여벌 열쇠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사실은 열쇠가 여러 개 필요하지. 건물이나 사무실 문도 열어야 하니까."

"그렇다면 여러 개의 여벌 열쇠를 가지고 있었겠지요. 그리고 기밀 설계도를 팔려고 런던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다만 다음날 아침에 분실된 것이 탄로 나기 전에, 금고에 도로 갖다 놓으려고 했겠지요. 그리고 런던에서 그런 매국 행동을 하는 동안 살해된 거겠지요."

"어떤 식으로 살해됐다는 건가?"

"울리지로 돌아가려고 할 때 살해되어 열차 밖으로 내던져진 것으로 가정해봅시다."

"시체가 발견된 올드게이트는 울리지로 가는 방향인 런던 브리지 역에서는 상당히 떨어진 지점이야."

"런던 브리지를 통과해 버린 이유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가령 차 안에서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가 싸움이 벌어져 목숨을 잃었다거나, 아니면 차에서 뛰어내리려고 하다가 철로에 떨어져 죽었는지도 모르죠. 그리고 나서 상대방은 그냥 문을 닫아버리고... 어느 쪽이건 안개가 짙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까지의 정보로는 그 이상 생각할 수도 없겠지... 하지만, 우리가 아직 검토해보지 않은 점도 분명히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여러 가지로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 이런 가정을 해보자. 즉 캐드건 웨스트가 이전부터 그 설계도를 런던으로 가져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웨스트는 당연히 외국의 스파이와 만날 약속을 하고, 그 날 밤에는 다른 약속을 하지 않았겠지. 그런데 그는 극장표를 두 장 사서 약혼녀와 함께 가다가 갑자기 모습을 감춰버린 거야."

초조하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끼어들었다.

"아마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고 그랬을 테지요."

"정말 이상한 일이야. 아무튼 그게 첫째 의문이고, 두 번째 의문은 이거야. 웨스트가 런던에 가서 외국 스파이와 만났다고 가정하자. 아침까지는 서류를 도로 갖다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류가 없어졌던 사실이 들통이 날 테니까. 그가 훔쳐낸 것은 열 장이었는데 그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것은 일곱 장뿐이었어. 나머지 세 장은 어떻게 했을까? 아무 대가도 없이 순순히 내주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다면 스파이 행위를 해서 받은 대가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의 주머니에는 많은 돈이 있어야 했을 텐데, 그렇지 않았거든."

"그거야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이 분명한 것 같은데요..." 레스트웨스트가 말했다. "웨스트는 서류를 팔 생각으로 스파이와 만났습니다. 그런데 흥정이 잘되지 않아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겁니다. 스파이가 그 뒤를 밟았습니다. 그래서 열차 안에서 그를 죽이고 중요해 보이는 서류를 빼앗은 다음, 시체를 밖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잘 설명되지 않습니까?"


"어째서 차표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요?"

"차표가 있으면 스파이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역이 알려지니까요. 그래서 스파이는 웨스트의 주머니에서 차표를 꺼냈을 겁니다."

홈즈가 말했다. "레스트레이드 씨, 아주 훌륭한 추리입니다. 당신의 이론은 분명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이 사건은 이미 끝장입니다. 우리는 때를 놓친 거요. 웨스트는 죽었고, 브루스 파팅턴 잠수함 설계도는 벌써 대륙으로 건너갔을 테니까.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없는 셈이지요."

홈즈의 말에 마이크로프트는 펄쩍 뛰면서 말했다.

"그건 안돼! 내 예감으로 봤을 때 그 설명에는 반대야. 셜록, 힘을 좀 써줘야겠다. 너는 범행 현장으로 가야 해. 관계자를 모두 만나야 해. 이 잡듯이 샅샅이 조사하는 거야. 네가 이렇게 국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 거야."

홈즈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자, 가세. 와트슨. 레스트레이드 경감도 한두 시간 시간을 내줄 수 있겠습니까? 일단 먼저 올드게이트 역으로 가봅시다. 그럼, 형님... 안녕히 가세요. 저녁까지는 뭔가 보고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미리 말씀드리는데,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한 시간 뒤 홈즈와 레스트레이드 경감 그리고 나는 올드게이트 역 바로 앞, 지하철이 터널 밖으로 나오는 지점에 서 있었다. 불그스름한 얼굴의 점잖은 노신사가 지하철 회사를 대표해서 거기 입회했다.

"그 청년의 시체는 바로 여기 있었습니다."

그는 레일에서 1미터쯤 떨어진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위에서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여긴 벽으로 막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열차에서 떨어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죠.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그 열차는 월요일 한밤중에 여길 통과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차량을 검사했을 때 무슨 폭행의 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았습니까?"

"그런 것은 없었고, 차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문이 열려 있었던 흔적은 없었습니까?"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이 때 레스트레이드가 말했다.

"오늘 아침에 새로운 증거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월요일 밤 11시 40분 경 보통 시내선 열차를 타고 올드게이트 역을 통과했던 어떤 승객이 말한 겁니다. 그 사람 말로는, 열차가 역에 도착하기 직전에 선로에 뭔가 떨어지는, 철썩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개가 짙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는 그냥 있었지만 오늘 아침 신고해 왔더군요. 홈즈 씨는 왜 저러는 겁니까?"

홈즈는 숨이 막힐 듯 긴장된 표정을 짓고, 철로가 터널에서 구부러져 나오는 지점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올드게이트는 환승역이어서 철로가 그물눈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홈즈는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날카롭고 활기에 넘치는 그 얼굴은 나에게 무척 낯익은 표정이었다. 꼭 다문 입술, 떨리는 콧구멍, 여덟 팔자로 찌푸려진 굵은 눈썹... 홈즈가 중얼거렸다.

"포인트야, 포인트..." 그는 중얼거렸다(포인트는 철로의 분기점에 붙여 차량을 다른 철로로 옮기는 장치 - 번역자 주*).

지하철 회사 사람이 물었다.

"그것이 어쨌다는 겁니까? 무슨 뜻입니까?"

"이런 선로에서는 포인트가 그리 흔하지 않겠죠?"

"예, 별로 없습니다."

"게다가 커브까지 있고... 포인트와 커브... 그렇다면 틀림없다!"

"무슨 얘깁니까, 홈즈 씨? 무슨 단서라도 있습니까?"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뭐 아직은 사소한 것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사건은 점점 재미있게 되는군요. 확실히 색다른 사건이야, 무척 특수해. 그렇게 밖에는 생각할 수 없소. 선로 위에는 핏자국이 없군요."

"네,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의 상처가 꽤 심했다고 들었는데요."

"뼈가 부러졌지만 외부의 상처는 그리 심하지 않았습니다."

"그해도 피가 어느 정도 흘렀을 텐데요. 안개 속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는 그 손님이 탔던 열차를 좀 조사할 수 없을까요?"

"어려울 겁니다, 홈즈 씨. 차량들은 이미 다 연결을 풀어서 사방으로 흩어져 있으니까요."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말했다.

"홈즈 씨, 제가 책임지고 말씀드리지만, 차량들은 철저히 조사했습니다. 내가 직접 했습니다."

내 친구의 결점 가운데 하나가 자기보다 머리가 둔한 사람을 잘 견디지 못하는 성미라는 점이다. 홈즈는 얼굴을 돌리면서 말했다.

"그러셨겠죠. 하지만 지금 내가 조사해보고 싶은 건 차량이 아니라오. 와트슨, 여기서 할 일은 다 끝났네. 레스트레이드 경감, 이젠 더 이상 당신이 수고하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지금부터 울리지로 수사하러 가야 하니까요."

런던 브리지에서 홈즈는 형님 앞으로 전보를 써서, 보내기 전에 나에게 내용을 보여 주었다. 거기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어두운 밤에 광명을 봤지만, 꺼질 수도 있음. 영국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 외국 스파이와 국제 간첩의 명단을 보내주십시오. 주소까지 포함, 사환을 시켜서 보내주십시오. 베이커 거리에서 회답을 기다림. 셜록'

울리지 행 좌석에 앉자 홈즈가 내게 말했다.

"이번 일은 제법 도움이 되는군. 형 덕분에 오랜만에 재미있는 사건에 부딪힌 셈이야."

홈즈의 진지한 얼굴에는 긴장된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중요한 실마리를 찾아낸 것 같았다. 뭔가 기묘한 암시를 주는 자극에 부딪혀 생각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상태인 것이다.

폭스하운드가 귀가 쳐지고 꼬리를 꼬면서 개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상태를 생각해 보라. 그러다가 갑자기 개는 눈이 빛나고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한다. 강렬한 짐승의 냄새를 쫓아 달려갈 태세를 갖추는 것이다. 지금 홈즈의 변화한 모습이 그랬다. 고작 몇 시간 전에 안개에 둘러싸인 방안을 왔다갔다하며 안달하던, 생기 없는 모습이 일변한 것이다.

"단서는 바로 눈앞에 있네. 그러니까 수사의 방향도 드러난 셈이야. 지금까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난 얼간이었어."

"아직 확실한 건 알 수 없지 않을까?"

"마지막 결말이 어떻게 날지는 아직 모르겠어. 하지만 이제 쭉 더듬어 갈 수 있는 방향이 잡혔네. 죽은 남자는 실은 어디 다른 곳에서 죽었어. 그리고 시체는 열차 지붕에 얹혀 있었던 거야."

"지붕이라고!"

"놀랍겠지. 하지만 생각해 보게. 열차는 포인트 있는 곳에 오면 덜컹거리게 되네. 그 지점에서 시체가 발견된 것이 그저 우연일까? 시체가 지붕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면 바로 그 장소야 말로 시체가 발견될만한 곳이지. 다음으로, 핏자국에 대해서 생각해 보세. 죽은 사람이 어딘가 다른 장소에서 피를 흘렸다면 당연히 철로에는 피가 별로 묻어 있지 않을 걸세. 이렇게 하나하나 따져보면 결국 사실은 이 추리에 들어맞는 것 같아."

"게다가, 차표도 그렇지!" 나는 소리쳤다.

"그래 맞았어. 왜 시체에 차표가 없었는지 그 동안 설명할 수 없었지만, 이런 전제를 깔면 충분히 설명이 돼. 모든 것이 딱 들어맞아."

"그건 그렇다 쳐도 그가 어째서 죽었는가 하는 수수께끼는 좀처럼 풀리지 않네. 간단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이상해지는 것 같은데..."

"그럴지도 모르지."

홈즈는 깊이 생각에 잠기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런 상태로 열차가 열차가 울리지 역에 당도해 속도를 늦출 때까지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역에 도착하자, 홈즈는 마차를 불러 세우고 주머니에서 마이크로프트가 써준 메모지를 꺼냈다.

"오후에 잠깐 들를 곳이 있긴 하지만, 우선 제임스 윌터 경을 만나는 것이 좋을 것 같네."






그 저명한 관리는 푸른 잔디가 템즈 강 기슭까지 이어지는 훌륭한 저택에 살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안개가 개이기 시작하고 엷고 축축한 햇살이 비추기 시작하고 있었다. 엄숙한 표정의 집사를 우리를 맞이하러 나왔다.

"제임스 경을 찾으신다구요? 제임스 경은 오늘 아침에 돌아가셨습니다."

홈즈는 깜짝 놀라 소리를 높였다.

"아니, 뭐라고요! 어떻게 해서 돌아가셨습니까?"

"들어오셔서 동생 되시는 발렌타인 대령님을 한 번 만나 보시지요."

"그럼, 그렇게 해 주시오."

집사는 우리는 조명을 어두운 응접실로 안내했다. 얼마 있다가 키가 크고 용모가 단정한, 약간 턱수염을 기른 50세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가 죽은 제임스 경의 동생인 발렌타인 대령이었다. 미칠 것 같은 눈, 젖은 볼, 흩어진 머리카락 등이 이 집에 갑자기 닥친 불행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령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무서운 불상사 때문입니다. 형님은 각별히 명예를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었습니다. 도저히 이런 사건을 견뎌낼 수 없었던 겁니다. 형님은 평소에도 자신의 부서가 유능하다는 것을 늘 자랑하고 계셨으니까요. 이번 일은 형님으로선 회복 불가능한 타격이었습니다."

"형님을 찾아 뵙고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만한 말씀을 들을 생각이었습니다만..."

"그건 제가 보장할 수 있습니다. 이번 사건은 형님에게도 완전히 수수께끼였습니다. 형님이 알고 있던 것은 모조리 경찰에 말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건 캐드건 웨스트의 소행이라고 믿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밖의 다른 일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고 그러시더군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혹시 무슨 단서가 될 만한 일이라도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저 역시 신문에서 읽었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것밖에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홈즈 씨, 실례인 줄은 압니다만, 지금 보시다시피 집안이 아주 어수선하니 가급적 일을 빨리 끝내 주셨으면 합니다."

마차 있는 곳으로 돌아오면서 홈즈가 말했다.

"사건이 뜻밖의 방향으로 나가는군. 자연사일까, 아니면 자살일까? 자살이라면 직무를 소홀히 한 데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겠지. 하지만 일단 그 문제는 뒤로 미루기로 하세. 자, 지금부터 캐드건 웨스트의 집으로 가보세."

울리지의 교외에 있는, 손질이 잘된 자그마한 집에는 캐드건 웨스트의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나이 많은 어머니는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 부인에게선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곁에 얼굴이 하얀 아가씨가 있어 스스로 자기 이름을 밝혔다. 그녀는 웨스트의 약혼녀이자, 사건이 있던 날 밤 웨스트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인 바이올릿 웨스트베리 양이었다.

바이올릿은 이렇게 말했다.

"홈즈 씨, 저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날 밤부터 한숨도 자지 못하고 도대체 무슨 일인지 생각해 봤지만 도무지 모르겠어요. 캐드건은 이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용감하며, 애국심이 강한 사람이었어요. 자기가 맡고 있는 나라의 비밀을 파느니 차라리 자기 오른팔을 잘라냈을 겁니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번 사건은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고, 도저히 이치에도 맞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런 사건이 생긴 건 사실 아닙니까, 웨스트베리 양."

"예, 하지만, 저도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웨스트 씨는 돈을 욕심내는 편이었나요?"

"아닙니다. 뭐 욕심이 있다 해도 사소한 것들이었어요. 또 봉급도 충분했습니다. 200-300파운드 정도 저금도 있어서, 내년 1월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거든요."

"뭔가 마음이 흔들리는 눈치는 없었습니까? 웨스트베리 양 생각나는 건 남김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홈즈의 날카로운 눈은 바이올릿의 태도가 약간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바이올릿은 얼굴을 붉히면서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녀는 드디어 말을 꺼냈다.

"예,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뭔가 걱정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그게 언제부터였습니까?"

"바로 지난 주부터였어요. 가만히 생각에 잠겨서 뭔가 걱정이 있는 것 같기도 했어요. 저는 그에게 무슨 일인지 이야기해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자 직장에서 뭔가 걱정이 되는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당신에게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중대한 일'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그 이상은 캐물을 수 없었습니다."

홈즈는 표정이 굳어졌다.

"그 다음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웨스트베리 양. 비록 웨스트 씨에게 불리한 일이라고 생각되더라도 말해 주셔야 합니다. 그게 반드시 웨스트 씨에게 불리하다고만 볼 수는 없으니까요."

"이 이상 드릴 이야기는 없습니다. 한두 번 저에게 당장 뭔가 말할 것 같은 눈치를 보인 적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엔가 그 비밀이 아주 중대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외국의 스파이라면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엄청난 돈도 낼 것이라고 한 기억이 나요."

홈즈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그밖에 뭐 다른 건 없습니까?"

"그런 점에서 관청은 별로 주의 깊지 못하다고 말했어요. 나라를 배신하는 인간이 쉽게 설계도를 가져갈 수 있게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 말은 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까?"

"예,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

"그럼, 마지막 날 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우리는 극장에 갈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안개가 너무 짙어서 마차를 잡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걸어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관청 바로 앞에 이르자 그 사람이 갑자기 안개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말입니까?"

"무슨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것뿐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기다렸지만, 그 사람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12시경에 그 끔찍한 소식을 듣게 된 거예요. 아아, 홈즈 씨. 제발 그 사람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세요. 그 사람은 명예를 무척 소중하게 생각하는 분이었습니다."

홈즈는 슬픈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자 와트슨.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다음 장소는 서류를 도둑맞은 바로 그 관청이야."

마차가 덜컹거리며 달리기 시작하자 홈즈가 말했다.

"그 청년은 벌써부터 수상하긴 했지만, 조사해보니 더욱 수상해지는군.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는 것도 충분히 범죄의 동기가 되지. 돈에 탐이 났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있었을 테지. 그 아가씨에게 자기의 계획을 이야기하고, 나라를 파는 일에 끌어들이려고 했던 거야. 이거, 아무래도 쉽지 않겠는데."

"하지만 홈즈. 그래도 웨스트의 품성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그는 성실하고 애국심이 강한 사람이었다지 않은가. 게다가, 약혼녀를 거리 한복판에 팽개쳐두고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은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바로 그거야! 확실히 그 점이 의심스러워. 그러나 그 의문만으로는 이 사건의 커다란 파장을 잠재울 수 없겠지..."






관청에서는 주임 사무관인 시드니 존슨 씨가 정중하게 우리들을 맞이했다. 홈즈의 명함만 내밀면 어디서나 보게 되는, 그런 정중한 태도였다. 존슨 씨는 앙상하게 마르고 성미가 까다롭게 생긴 안경을 낀 중년 남자였다. 그는 두 볼이 좀 꺼지고, 신경질적으로 두 손을 떨고 있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입니다. 홈즈 씨,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부장님이 돌아가신 것은 알고 계십니까?"

"지금 부장 댁에서 오는 길입니다."

"여긴 지금 완전히 엉망입니다. 부장님은 돌아가시고, 캐드건 웨스트는 죽고, 서류는 도둑을 맞고! 하지만 지난 월요일 저녁에 문을 잠글 때까지는 여기도 다른 어느 부처 못지 않게 모범적인 곳이었는데... 정말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웨스트가 그런 짓을 하다니!"

"그럼 틀림없이 웨스트의 짓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렇게 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는 나부터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월요일에 관청은 몇 시에 문을 닫았습니까?"

"5시입니다."

"당신이 문을 잠갔습니까?"

"내가 언제나 마지막으로 여기를 나갑니다."

"그 설계도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저 금고 안입니다. 내가 직접 넣었습니다."

"청사 소속의 감시인은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다른 부서도 돌아보고 다닙니다. 군인 출신으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날 밤 다른 이상은 없었다고 합니다. 물론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습니다만."

"캐드건 웨스트가 몇 시간 뒤에 사무실로 들어간다고 가정해 보죠. 설계도 있는 곳까지 가려면 열쇠가 세 개는 있어야 하겠군요?"

"그렇습니다. 세 개가 필요합니다. 청사에 들어오는 열쇠와 기밀실의 열쇠, 그리고 금고의 열쇠... 이렇게 말입니다."

"제임스 월터 경과 당신만 그 열쇠를 가지고 계시지요?"

"나는 문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금고의 열쇠뿐이지요."

"제임스 경은 무척 규칙적인 편이셨죠?"

"그렇다고 봐야죠. 세 개의 열쇠는 같은 열쇠고리에 달려 있었습니다. 열쇠고리에 달려 있는 걸 몇 번이나 보았으니까요."

"제임스 경이 그 열쇠 꾸러미를 가지고 런던으로 가신 거군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열쇠를 몸에서 떼어놓은 일은 없나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웨스트가 범인이라고 가정하면, 그가 다른 열쇠를 만들어서 가지고 있었던 셈이군요. 그런데 시체에서는 열쇠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이 사무실 직원이 설계도를 팔 생각을 했다면, 원래 도면을 훔쳐내는 것보다 자기가 베끼는 편이 간단하지 않을까요?"

"설계도를 정확하게 베끼려면 상당히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제임스 경이나 당신, 그리고 웨스트는 그런 전문 지식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있긴 합니다만, 제발 나를 끌어들이지는 마세요. 원래 도면이 웨스트의 시체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런 식으로 토론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입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하지만, 간단하게 베낄 수 있고, 또 그것을 원도면과 똑같이 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웨스트가 위험을 무릅쓰고 원도면을 가지고 나간 건 정말 이상한 일 아닙니까?"

"확실히 이상하긴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가지고 나간걸 어떡합니까?"

"이 사건은 조사를 하면 할수록 점점 모를 일이 많아지는군요. 그런데 잃어버린 채 돌아오지 않은 설계도가 세 장 있습니다만, 그것은 확실히 중요한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그 설계도 세 장이 있으면, 나머지 일곱 장이 없어도 브루스 파팅턴 잠수함을 건조할 수 있는 겁니까?"

"해군성에는 그런 취지로 보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설계도를 다시 검토해 봤더니 반드시 그렇게만 볼 수는 없더군요. 되돌아온 서류 중 하나에 자동 조절 구멍의 이중 밸브가 있어요. 외국에서 그걸 만들 경우 그 장치를 직접 고안해내지 않는 한 그 잠수함을 만들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물론, 시간이 좀 지나면 어떻게든 그 문제를 해결하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없어진 그 세 장의 설계도도 매우 중요한 것이겠지요?"

"물론입니다."

"당신이 허락하신다면 지금부터 사무실 내부를 좀 돌아보고 싶습니다만? 이제 더 이상 물어볼 만한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요."

홈즈는 금고의 자물쇠, 기밀실의 문, 창의 철제 덧문 등을 샅샅이 조사해 보았다. 그 뒤에, 앞뜰의 잔디밭에 나오자 흥미로운 물건이 있었다. 창 밖의 월계수 나무 가운데 몇 개가 구부러졌거나 꺾은 흔적이 있었다. 홈즈는 확대경을 꺼내 그것을 자세히 조사하고, 그 아래 땅바닥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발자국도 조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임 사무관에게 철제 덧문을 닫아 달라고 부탁했다. 홈즈는 내게, 철제 덧문이 꼭 들어맞지 않아, 밖에 있는 사람이 방안에 있는 사람이 무얼 하는지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사흘이나 지났기 때문에 발자국이 희미해져서 잘 모르겠어. 중요한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지. 그런데, 와트슨. 이 이상 울리지에 있어 보았자 시간 낭비일 거야. 런던으로 돌아가서 좀더 다른 걸 알아보세나."

그러나 우리는 울리지를 떠나기 전에 또 다른 수확을 얻었다. 역의 직원이 월요일 밤에 낯익은 캐리건 웨스트를 보았다는 것이었다. 웨스트는 그날 밤 8시 15분발 런던 브리지 행 열차를 탔다고 한다. 웨스트는 혼자였고, 3등 열차 표를 한 장 샀다는 것이다.

역 직원은 그때 웨스트가 겁에 질리고 흥분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너무 부들부들 떨고 있어 거스름돈도 제대로 받지 못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시간표를 조사해 보니, 웨스트가 약혼녀와 7시 반경에 헤어지고 나서 차를 탔다면 그 8시 15분발의 열차가 처음으로 런던 브리지로 나가는 것이었다.

홈즈는 30분쯤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와트슨,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보세. 이렇게 까다로운 사건은 없었던 것 같군. 한 가지를 해결했는가 싶으면, 금방 새로운 문제점이 나타나곤 하니 말일세. 하지만 그래도 뭔가 성과는 있었어. 울리지에서의 수사 결과는 대체로 캐드건 웨스트에게는 불리하지만, 창문 밑의 발자국만은 그렇지 않아. 가령 외국 스파이가 웨스트를 유혹했다고 가정해 보세.

기밀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는 서약이 있었겠지. 하지만 약혼자에게 어렴풋이 암시를 준 것으로 봐서 웨스트는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망설이고 있었어. 그건 틀림없어. 그 다음 웨스트는 약혼녀와 함께 극장에 가는 도중, 안개 속에서 그 스파이가 관청 쪽으로 가는 것을 언뜻 보았다고 하세. 성급한 사람이니까 결단도 빨랐을 테지. 역시 자기 임무가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래서, 그 스파이의 뒤를 따라 창문으로 다가가, 서류를 훔쳐내는 것을 보고는 스파이를 추적했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사본을 만들 수 있었는데도 어째서 일부러 원도면을 훔쳤는가 하는 의문을 풀 수 있지. 전문 지식이 없는 스파이라면 원도면을 훔쳐야 했을 테니까. 여기까지는 제대로 줄거리가 성립되는 셈이지."

"그리고 그 다음은 어떤 건가?"





"그런데 여기서부터 막히는 거야. 그런 상황에서 웨스트가 먼저 보일 행동은 그 도둑을 붙잡고서 사람을 부르는 것이었겠지. 그런데 왜 그 청년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서류를 훔치는 게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서류를 훔쳐 낸 것은 혹시 부장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웨스트의 행동은 납득이 가는데.... 부장이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려서 부장이 집으로 가기 전에 앞질러 가려고 곧장 런던으로 간 것일까? 어쨌든 무척 급한 상황이었던 것은 분명해. 안개 속에 약혼녀를 두고 가면서도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을 정도니 말이야.

여기서부터 우리의 추리는 더 이상 이어지질 않고 있네. 지금 세워 본 두 개의 가설과, 웨스트가 일곱 장의 기밀 서류를 주머니에 넣은 채 시내선 열차 지붕 위에 시체로 누워 있었다는 것 그 사이를 연결할 수가 없어. 그래서 이번에는 정반대 방향에서 조사를 해볼 생각이야. 마이크로프트 형이 영국에 있는 스파이들의 주소 목록을 보내 주면, 의심스러운 작자들을 골라서 그 쪽을 더듬어 보세. 그럼 우린 하나가 아닌, 두 가닥의 실을 붙잡고 갈 수 있겠지."

런던의 베이커 거리로 돌아와 보니 과연 편지가 한 통 와 있었다. 정부의 문서 배달원이 긴급 우편으로 배달한 것이었다. 홈즈는 쭉 읽어보더니 내게도 보여주었다.

'송사리야 무척 많지만, 이런 대사건을 저지를만한 거물급은 많지 않다. 특히 의심해볼 만한 사람은 다음의 세 사람 정도다. 웨스트민스터 지구 그레이트 조지 거리 13번지의 아돌프 마이어. 노팅 힐의 캠딘 아파트의 루이 라 로티엘. 켄싱턴 지구 콜필드 가든 13번지의 휴고 오버스타인. 이 오버스타인은 월요일에 시내에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단서를 발견했다는 말을 들으니 기쁘다. 정부는 이 사건에 관한 최종 보고서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극히 고귀하신 분으로부터 긴급히 해결하라는 당부 말씀도 있었다. 필요하다면 국가는 모든 능력과 수단을 다 동원해 지원한다. - 마이크로프트.'

홈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사건에 여왕의 말이나 군대를 모조리 동원한다 해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거야."

홈즈는 그리고 런던의 상세 지도를 펼치고 열심히 살폈다. 그러더니 이윽고 만족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됐다. 이젠 좀 빛이 보이는 것 같아. 와트슨, 결국에는 멋지게 해결될 거야."

홈즈는 갑자기 쾌활해지면서 내 어깨를 툭 쳤다.

"나는 잠깐 나갔다 오겠네. 그냥 좀 살펴보는 것 뿐일세. 자네처럼 믿을 수 있는 파트너가 옆에 없으면 중대한 일은 하나도 못하겠지. 하지만, 그래도 자네는 여기 있어 주게. 한두 시간이면 돌아오게 될 테니까 말이야. 너무 지루하거든 종이와 펜을 꺼내놓고 글을 쓰는 거야. 즉 '우리는 어떻게 해서 국가의 위기를 구했는가?' 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쓰기 시작해도 좋을 거야."

홈즈의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자, 나도 기분이 유쾌해졌다. 홈즈는 웬만큼 기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언제나 무덤덤한 태도를 보이는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기나긴 11월 밤을, 나는 홈즈가 돌아오기만을 마음 졸이며 기다렸다. 9시가 조금 지나서야 홈즈는 사람을 시켜서 짤막한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지금 켄싱턴 지구 글로스터 거리의 골디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네. 지금 곧 와주게. 조립식 지렛대, 칸델라, 끌, 권총을 가지고 와 주게. - 홈즈'

선량한 시민이 그런 물건을 들고, 게다가 안개에 휩싸인 어두운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사실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외투 안에 감추고서 지정된 장소로 마차를 달렸다. 그곳은 굉장히 화려한 이탈리아 풍의 레스토랑이었다. 홈즈는 입구 쪽 작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식사는 했나? 그럼, 커피와 큐라소라도 들게나. 이 여송연을 피워 보게. 이 식당의 자랑거리인데,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아. 어때, 연장은 가지고 왔나?"

"여기 있네. 외투 안에."

"잘했어. 지금부터 우리가 할 일을 말해줄게.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한 일에 대해서도 간단히 설명하겠네. 와트슨, 자네도 분명히 알겠지만, 그 웨스트 청년의 시체는 열차의 지붕 위에 놓여 있었어. 그 청년이 굴러 떨어진 것은 지붕에서지. 열차 안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는 점은 확실해."

"신호대에서 떨어진 건 아닐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 같네. 열차의 지붕은 약간 둥그스름해서 손 잡을 만한 곳이 없어. 그러니까 웨스트는 그곳에 얹혀졌던 것이 거의 확실해."

"어떻게 거기에 시체를 얹었을까?"

"그게 내가 해결해야 할 숙제였어. 가능한 방법은 딱 하나 뿐이야. 자네도 알겠지만, 지하철 열차는 웨스트 엔드의 한 지점에서 터널을 빠져 나온다네. 기억이 희미하지만, 내가 지하철을 탔을 때 바로 지하철 지붕 위에 집들의 창문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어. 열차가 그런 창문 밑에서 멈춰 설 경우 열차 지붕에 시체를 얹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

"글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다른 가능성이 없는 경우에는, 아무리 있을 것 같지 않은 일이라도 진실이 될 수 있어. 이것 아주 오래된 진리이지. 사실, 그런 설명 외에는 다른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네. 게다가 얼마 전에 런던을 떠났다는 그 거물급 국제 스파이가 지하철 선로 근처의 집에 살고 있다는 거야. 그런 사실을 알고 나는 비로소 가능성을 발견한 거야. 그래서 나는 기분이 유쾌해졌던 것이고..."

"아아, 그랬었군."

"그렇다네. 콜필드 가든 13번지의 휴고 오버스타인이 나의 과녁이 된 거야. 나는 글로스터 거리 역에서 행동을 시작했어. 어떤 역무원이 아주 큰 도움을 줬어. 함께 선로를 걸어가면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었네. 콜필드 가든의 저택들 뒤쪽 계단의 창문은 선로를 향하고 있어. 그뿐만이 아니야. 선로들이 여기서 서로 교차하고 있기 때문에 지하철 열차는 바로 그 지점에서 몇 분 동안 멈춰서는 일이 자주 있다는 거야."

"굉장하네, 홈즈. 드디어 찾아냈군."

"아무튼 상당히 진전이 있는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결승점은 아직 멀었어. 그건 그렇고 콜필드 가든의 뒤쪽을 다 보고 나서 정면으로 돌아가, 내 사냥감이 이미 달아나 버린 것을 알았지. 상당히 큰 집인데, 2층 방에는 내가 보기로는 가구가 없어. 오버스타인은 하인 한 사람만 두고 그 집에서 살고 있는데, 그 하인도 아마 공범인 것 같아.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버스타인이 대륙으로 건너간 것은 입수한 물건을 처분하기 위해서라는 거야. 달아날 생각은 아니야. 체포를 당할 염려도 없고, 가택 수색 따위는 꿈에도 생각지 않을 테니까 말일세. 그런데 지금부터 우리가 할 일이, 바로 그 집을 수색하는 거라네."

"합법적으로 수색 영장을 받을 수는 없을까?"

"아직은 증거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집을 뒤져서 도대체 뭘 얻겠다는 건가?"

"단서가 될만한 편지 따위가 발견될지도 모르지."

"홈즈, 나는 그런 짓을 하기는 싫네."

"여보게, 와트슨. 자네는 거리에서 감시만 해주면 돼. 범죄 비슷한 일은 짓은 내가 할 테니까 말이야. 지금 그따위 사소한 것으로 구애받을 때가 아니야. 마이크로프트 형의 편지나 해군성, 내각 그리고 뭔가 반가운 소식을 기다리고 계실 고귀한 분 그런 걸 생각해보게. 아무래도 우리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네."

대답 대신 나는 테이블에서 일어섰다.

"자네 말이 옳으이, 홈즈. 아무래도 가긴 가야겠군."

홈즈는 펄쩍 뛰듯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와트슨, 고마워. 자네가 최후의 순간에 꽁무니를 빼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네."

홈즈의 눈엔 평소에 보기 힘든 그런 정겨운 빛이 어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단단한 태도로 돌아갔다.






"거리는 여기서 반 마일 정도지만 서둘 건 없으니 걸어가세. 혹시라도 연장은 떨어뜨리지 말게나. 괜히 수상하다고 해서 붙잡기라도 하면 귀찮으니까 말이야."

콜필드 가든은 넓직한 정면에 돌 기둥이 줄지어 있는 집이었다. 런던의 웨스트엔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빅토리아 양식으로 지은 멋진 건물이었다. 이웃집에서 어린아이들이 파티라도 벌이는지 귀여운 목소리로 얘기하는 소리와 피아노 소리가 밤하늘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다행히 주위에 아직도 안개가 자욱해서 우리의 모습을 감출 수 있었다. 홈즈는 칸델라에 불을 붙이고 우람한 현관을 비춰 보았다.

"이건 만만치 않겠는데... 열쇠를 채우고 거기에 빗장까지 질러 놓았어. 뒷편 지하 출입구로 들어가는 게 낫겠어. 글쎄 저걸 보라구. 꼬장꼬장한 경찰관이 들어올 때에 대비해서 도망치려고 아치까지 있군. 와트슨, 잠깐 손 좀 빌리세. 나도 자네를 올려줄 테니까."

이윽고 우리 두 사람은 지하 출입구로 내려갔다. 막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자, 위쪽 안개 속에서 순찰 경관이 걷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멀어지자 홈즈는 출입문을 비틀어 열기 시작했다. 몸을 구부리고 열심히 작업하는 모습이 한참 보이더니 이윽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우리는 출입구를 닫고 어두운 복도로 들어갔다. 계단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지 않았다. 홈즈는 계단을 앞서 올라가 모통이를 돌았다. 부채 모양의 노란 빛이 칸데라에서 나와 낮은 창문을 비추었다.

"겨우 찾았군, 와트슨. 바로 이것인 모양이야."

홈즈가 창문을 활짝 열자 나지막하게 칙칙폭폭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커지면서 엄청난 굉음으로 변했다. 그 소리와 함께 열차가 어둠 속을 지나갔다. 홈즈는 창틀을 칸데라로 비춰 보았다. 거기에는 기관차의 검댕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그러나 그 검은 표면의 군데군데에 벗겨진 곳이 있었다.

"여기에 시체를 놓아둔 흔적일 거야. 이봐, 와트슨. 이건 뭘까? 뭐 볼 필요도 없겠지. 틀림없는 핏자국이네."

홈즈는 창틀에 묻어 있는 희미한 얼룩을 가리켰다.

"계단의 돌에도 묻어 있어. 이제 증거는 갖춰진 셈이야. 열차가 멈출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보자구."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다음 열차가 앞서간 열차처럼 땅을 울리며 터널에서 나왔다. 기차는 터널을 나오자 속도를 줄이고 제동을 걸면서 바로 창문 밑에서 멈췄다. 창문에서 열차 지붕까지 거리는 1미터 50센티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홈즈는 조용히 창문을 닫았다.

"여기까지는 들어맞은 것 같네. 어떻게 생각하나, 와트슨?"

"정말 걸작이야. 이렇게 훌륭한 솜씨는 아직까지 못 본 것 같군."

"별로 그렇지도 않네. 시체가 지붕 위에 있었다는 생각에서부터 모든 것이 이어진 셈이지. 그걸 생각해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야. 다른 일은 당연히 거기서 이어지는 것이고... 국가의 중대사가 아니라면 이 사건은, 지금으로선 아직 시시한 사건에 불과해. 그러나 앞으로 곤란한 일들이 많이 남아 있어. 하지만, 이 집에서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이 나오겠지."

우리는 부엌의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이어져 있는 방 가운데 하나는 검소하게 꾸민 식당으로, 별로 흥미를 끌 만한 것이 없었다. 또 하나는 침실이지만, 이것 역시 별다른 것은 없었다. 나머지 방에 뭔가 있을 것 같은지 홈즈는 계획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책이나 서류 따위가 흩어져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 서재로 쓰는 방인 것 같다. 홈즈는 재빨리 차례차례 서랍이나 찬장을 열고 그 안에 있는 물건을 뒤졌다. 그러나 그의 엄숙한 표정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났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교활한 자식 같으니라고! 흔적을 모조리 감춰 버렸어. 범죄를 드러낼 만한 물건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어. 위험한 편지는 찢어 버렸거나 가지고 갔을 테지. 이제 이것이 마지막 희망인데..."

그것은 책상에 놓여 있는, 함석으로 만든 조그마한 휴대용 금고였다. 홈즈는 그것을 끌로 비틀어 열었다. 그 안에서는 돌돌 말아 둔 몇 개의 종이가 나왔다. 종이에 숫자나 계산이 가득 쓰여 있었으나 설명은 전혀 붙어 있지 않았다. '수압'이라든가 '1평방인치와 압력'이란 단어가 몇 번이나 나오는 것을 보면 아마 잠수함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홈즈는 화를 내며 그것을 던져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봉투 하나뿐이었다. 그 안에는 신문지에서 오려 낸 조그만 종이들이 들어 있었다. 홈즈는 테이블 위에 그것을 쏟아내더니 갑자기 얼굴 표정이 밝아졌다. 뭔가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이건 뭘까, 와트슨? 이건 신문 광고를 이용한 연속 통신이야. 인쇄와 종이로 봐서 <데일리 텔리그래프>의 개인 광고란이네. 지면 오른쪽 제일 위에 있는 거야. 날짜는 없지만 통신문의 순서는 알 수 있지. 아마 이것이 맨 처음 통신일 거야.

'통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건 승낙함. 카드 주소로 상세하게 알려주기 바람 - 피에로'

다음은 이거라네.

'복잡해서 이해하기 힘들다. 자세한 설명을 바람. 현품과 교환 조건으로 사례금을 준비하겠다. - 피에로.'

그 다음은, '사정이 긴박해졌다. 계약을 이행하지 않으면 취소할 수밖에 없다. 만날 날짜를 편지로 통지할 것. 이쪽에서는 광고로 알리겠다. - 피에로.'

마지막은... '월요일 밤 9시 이후. 두 번 두드릴 것. 우리 둘뿐이다. 의심할 필요 없다. 현품과 교환 조건으로 현금 지불한다. - 피에로.'

완전한 기록이 갖춰져 있네. 와트슨, 이 광고의 상대방을 잡을 수만 있다면 말이야."

홈즈는 테이블을 손가락 끝으로 두드리면서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이 집은 이 정도 해 두면 충분해. <데일리 텔리그래프> 신문사로 마차를 몰아 오늘 일을 마무리짓기로 하세."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치자 약속한 대로 마이크로프트 홈즈와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집으로 찾아왔다. 셜록 홈즈는 우리가 어제 한 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우리가 강도와 같은 일을 한 것을 들려주자 경감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우리 경찰관은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홈즈 씨, 당신이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성과를 올리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면, 당신이나 와트슨 씨 두 분 모두 곧 봉변을 당할 겁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조국 영국을 위해서 한 일입니다. 와트슨 군, 그렇지 않은가? 우린 조국이라는 제단의 순교자인 셈이지. 그건 그렇고,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훌륭한 일이야, 셜록. 정말 감탄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 거냐?"






홈즈는 테이블 위에 있는 <데일리 텔리그래프>를 집어들었다.

"오늘 신문에 나온 피에로의 광고를 보셨습니까?"

"뭐야? 또 나왔어?"

"바로 이겁니다. '오늘밤, 시간과 장소 같음. 두 번 두드릴 것. 매우 중요함. 당신의 신변 안전도 의심스럽다. - 피에로.'"

레스트레이드가 외쳤다.

"굉장한데! 만일 상대가 이걸 보고 나와 준다면 독 안에 든 쥐가 되는 거야."

"그런 생각으로 내가 광고를 낸 겁니다. 두 분이 오늘밤 8시경에 콜필드 가든에 오시면 이 사건의 해결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홈즈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몰두하고 있었던 사건이 해결의 기미가 보이면, 얼른 생활을 바꿔 자기의 취미 활동으로 들어가 버린다는 점이다. 더 이상 일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면 보다 가벼운 활동에 힘을 쏟는 것이다. 이 날 역시 홈즈는 고대 교회 음악인 라사스의 다음 성가곡(多音 聖歌曲)에 관한 논문 집필에 관심을 돌렸다.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은 마음의 여유를 갖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 날 하루가 유난히 긴 것처럼 느껴졌다. 이 사건이 어떻게 결말이 나느냐에 따라 국가적으로 미칠 영향, 그리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고위층, 우리들이 시도하는 이 시험의 무모함 따위가 모두 내 신경을 피로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가벼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모험에 나서게 되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레스트레이드 경감과 마이크로프트는 약속대로 글로스터 거리의 지하철 역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오버스타인 저택 지하의 뒷문은 어제밤부터 우리가 열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마이크로프트 홈즈는 난간을 넘어가는 일은 싫다고 화를 냈기 때문에 내가 안으로 들어가서 현관 문을 열어 주어야 했다. 9시에는 모두 서재에 앉아서 상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또 한 시간이 지났다. 11시가 되자, 교회의 큰 시계가 정확하게 시간을 알려 주었다. 그 소리는 마치 우리의 희망을 부질없다고 비웃는 것 같았다. 레스트레이드 경감과 마이크로프트는 불안한 듯이 의자에 앉아 1분 동안에 두 번씩이나 회중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보았다. 홈즈는 입을 다물고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반쯤 눈을 감고 있었으나, 신경은 면도날처럼 예민해진 상태다.


갑자기 홈즈가 머리를 들었다.

"온다!"

조심스럽게 현관을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발소리는 조금 있다가 되돌아왔다. 밖에서 발을 끄는 소리가 들리고, 다음에는 문에 달린 쇠 고리를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홈즈는 우리에게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손짓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관에 하나 놓여 있는 가스등을 빼면 불빛은 전혀 없었다. 홈즈는 현관 문을 열고 검은 그림자가 미끄러지듯 들어오자, 문을 닫고 열쇠를 채웠다.

"이리로!"

홈즈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우리가 기다리던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홈즈는 바로 그의 뒤를 따라왔다. 남자가 놀라서 부르짖으며 달아나려고 하자, 홈즈가 멱살을 잡아 방안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상대가 아직 균형을 잡기 전에 문을 닫고 거기에 등을 기대고 가로막았다. 그 남자는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더니, 다시 비틀거리며 기절해서 방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지는 순간, 머리에서 챙이 넓은 모자가 벗겨지고 목도리가 미끄러져 내렸다. 그리고 거기에 발렌타인 윌터 대령의 길고 옅은 턱수염과 기품 있고 단정한 얼굴이 나타났다.

홈즈는 놀라서 혀를 찼다.

"와트슨, 이번에는 우리 얘기에 나를 멍청이라고 써도 좋아. 이런 사람이 걸려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네."

마이크로프트는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도대체 이 친구는 누구야?"

"잠수함 건조 부장이었던 제임스 윌터 경의 동생입니다. 그래 그래, 이제 사정을 알 것 같군. 아, 깨어났군. 조사는 내게 맡겨 주는 것이 더 좋겠어요."

우리는 대령의 축 늘어진 몸을 소파 위에 올려놓았다. 대령은 일어나 자리에 앉더니, 공포에 떠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이마에 손을 대며, 마치 자기가 지금 보고 듣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이게 어찌된 겁니까? 나는 오버스타인 씨를 찾아왔는데요."

홈즈가 말했다.

"이미 모든 것이 다 드러났소, 윌터 대령. 영국 신사라는 사람이 그런 짓을 하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 얘기요. 오버스타인과 당신이 주고받은 통신문은 모두 우리 손에 들어왔소. 캐드건 웨스트 청년이 죽은 사정도 마찬가지요. 남자답게 죄를 뉘우치고 자백을 해서 조금이라도 동정을 받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 입으로 보다 상세하게 들어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오."

대령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우리는 좀더 기다렸지만 대령은 말이 없었다. 홈즈가 말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기본적인 것은 모조리 알고 있소. 당신이 돈에 쪼들린 것도, 당신 형님이 보관하고 있던 열쇠를 복제한 것도, 오버스타인과 연락을 취하기 시작해서 오버스타인이 <데일리 텔리그래프>의 광고란으로 연락했던 사실도 알고 있어요. 월요일 밤, 당신은 관청에 갔었지. 그런데, 캐드건 웨스트가 당신의 모습을 보고 뒤를 밟은 거요. 웨스트는 전부터 당신을 의심하고 있었던 거지.

웨스트는 당신이 서류를 훔쳐내는 것을 보았어. 하지만, 그것을 런던의 형님에게 가지고 갈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위급한 상황을 알리지 않았던 거요. 웨스트는 선량한 시민이었기 때문에 약혼녀까지 거리에 팽개쳐 두고 안개 속에서 당신의 뒤를 밟았지. 당신이 이 집으로 들어오자 웨스트는 여기까지 따라와 당신의 일을 방해한 거야. 그래서 당신은 국가 기밀을 판 데에 더해 무서운 살인까지 저지른 겁니다, 월터 대령."

대령이 외쳤다.

"내가 아니오! 내가 아니야! 하나님께 맹세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캐드건 웨스트가 어떻게 죽었고, 그래서 열차의 지붕에 얹혀졌는지 자세히 말해 보시오.."

"얘기하겠습니다. 모든 걸 밝히겠어요. 그 밖의 짓은 모두 내가 한 겁니다. 당신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주식 거래소에 진 빛을 갚아야 했어요. 나는 돈에 쪼들려 고민했습니다. 오버스타인은 내게 5천 파운드를 내겠다고 했어요. 나는 파산을 면하기 위해 그의 말에 따랐지요. 그러나 살인만은 결코 제가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럼, 일이 어떻게 된 겁니까?"

"웨스트는 전부터 나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말한 것처럼 내 뒤를 미행했어요. 나는 현관에 도착해서야 내가 미행 당한 사실을 알게 됐어요. 안개가 너무 짙어서 3 야드 앞도 보이지 않았거든요. 문을 두 번 두드리니까 오버스타인이 나타나더군요.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웨스트가 달려와 그 서류를 어떻게 할 셈이냐고 따지더군요.

오버스타인은 짧은 지팡이를 항상 가지고 다닙니다. 그걸 손에서 떼어 놓는 일이 없지요. 그 속에 칼이 들어 있는 겁니다. 웨스트가 우리 뒤에서 집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오버스타인은 그 지팡이로 웨스트의 머리를 갈겼습니다. 그건 치명적이었어요. 웨스트는 그리고 5분도 안 되어서 죽어버린 겁니다.

현관에 그가 죽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망설였습니다. 그때 오버스타인이 뒤쪽 창문 밑에 열차가 머무는 것을 생각해내더군요. 하지만 먼저 내가 가지고 간 서류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가운데 세 장은 중요하니까 자기가 갖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말했습니다.

'줄 수는 없소. 그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지 않으면 아마 울리지에서 대소동이 벌어질 거요.'

오버스타인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가져야겠어. 아주 전문적인 내용이라서, 짧은 시간 안에 베끼는 것은 불가능하다구.'

'하지만 오늘 밤 안에 전부 갖다 놓지 않으면 야단이 벌어지는 거야.'

오버스타인은 한참 생각하더니 소리를 지르더군요.

'이 세 장은 내가 갖겠어. 남은 일곱 장은 이 사람의 주머니 속에 넣어 두자구. 그럼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다들 이 사람이 한 짓이라고 생각할거요.'

그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가 하자는대로 했습니다. 우리는 창가에서 30분이나 열차가 멈추기를 기다렸습니다. 안개가 너무 짙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웨스트의 시체를 열차 지붕에 얹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나에 관한 내용은 이걸로 끝입니다."

"그럼, 당신 형님은 왜 돌아가신 거요?"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언젠가 내가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을 한 번 들킨 적이 있었지요. 그래서 아마 나를 의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형의 눈빛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형은 그 뒤 두 번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으니까요."

방안은 침묵에 덮여 있었다. 그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마이크로프트였다.

"속죄를 할 방법이 없을까? 그렇게 되면 양심의 가책도 다소 덜게 될 거고, 처벌도 가벼워질 텐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요?"

"오버스타인은 설계도를 가지고 어디로 갔습니까?"

"모르겠습니다."

"혹시 행선지를 말하지 않았습니까?"

"파리의 루브르 호텔 앞으로 편지를 내면 받아볼 수 있다고 하더군요."

셜록 홈즈가 말했다.

"그렇다면 아직 속죄할 수 있는 방법은 있는 셈이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나는 그 녀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녀석 때문에 나는 이렇게 파멸한 것입니다."

"여기 종이와 펜이 있소. 이 책상에서 내가 부르는 대로 받아 쓰시오. 봉투의 주소는 그 친구가 말한대로 적어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편지의 내용은 이렇게 하시오.

'인사말씀 줄이옵고. 지금쯤은 알아차렸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지난번 거래에서는 중요한 것이 한 가지 빠져 있습니다. 여기 복사본이 한 장 있습니다. 그것이 있어야 당신의 서류는 완전해집니다. 하지만 이것을 손에 넣기 위해 상당히 고생을 했으니까, 500파운드는 더 받아야 합니다. 우편 송금은 믿을 수 없고, 금화나 지폐로 줘야 합니다. 그 쪽으로 가도 좋지만, 지금 본국을 떠나면 주목을 끌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토요일 정오에 채링크로스 호텔의 다방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영국의 지폐나 금화 외에는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자 이제 됐소. 이렇게 해도 상대가 오지 않는다면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진 거겠지."

과연 오버스타인은 나타났다! 이것은 이미 역사적인 사실로 공개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공개된 기록보다 훨씬 더 아기자기하고 흥미 있는 얘기가 숨어 있는 것이다.

오버스타인은 자신의 성공을 보다 완전하게 하고싶은 욕심 때문에 함정에 걸려들었다. 그 결과 그는 영국의 감옥에서 15년간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오버스타인의 큰 가방 속에서 브루스 파팅턴 설계도가 발견되었다. 오버스타인은 이것을 전체 유럽 국가의 해군에 경매를 붙여놓고 있었던 것이다.

윌터 대령은 형기가 2년쯤 지났을 무렵 감옥에서 병으로 죽었다. 홈즈는 기분을 새롭게 해서 라사스의 다음 성가곡의 논문 작성에 매달렸다. 그 후 연구 논문을 자비로 출판,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 주제로는 아직 이만한 성과가 없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내가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사건이 해결되고 몇 주일이 지나자, 홈즈는 여왕이 거주하는 윈저 궁으로 초대를 받았다. 돌아왔을 때 그는 눈부신 에메랄드 넥타이핀을 꽂고 있었다.

"그거 자네가 산 건가?"

내가 물었더니 홈즈는 빙긋 웃었다.

"어느 자비로운 귀부인께서 주신 선물이야. 그분을 위해 다행히도 조그마한 일을 해드린 일이 있거든."

홈즈는 그 이상은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귀부인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그 에메랄드 넥타이핀은 언제까지나 홈즈에게 저 브루스 파팅턴 설계도 사건을 기억나게 할 것이 분명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