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ign of Four
[소개]
인도의 고성에 숨겨진 보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살인과 배신. 홈즈와 와트슨은 갑자기 찾아온 한 젊은 여성의 부탁을 받고 이 사건에 뛰어들게 된다. 이 여인의 아버지가 수수께끼처럼 실종되고, 그 뒤 이 여인에겐 무척 값비싼 진주가 해마다 한 알씩 소포로 부쳐온다. 인도의 보물을 시발로 영국 런던의 템즈 강으로 이어지는 줄거리가 흥미진진하다. 여느 셜록 홈즈 추리소설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와트슨의 로맨스가 곁들여지는 것이 이색적이다.
[작가 소개]
코난 도일(Sir Arthur Conan Doyle, 1859-1930) : 영국의 소설가. 에딘버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개업했으나 곧 소설에 전념했다. 아마추어 탐정 셜록 홈즈가 활약하는 <주홍빛 연구> <네 개의 서명> <바스카빌의 개> 등의 작품으로 작가로서 이름을 얻었고, 그밖에 <셜록 홈즈의 모험> <홈즈의 귀환> <홈즈의 회상> <홈즈의 마지막 인사> 등 일련의 작품집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다. 1902년에 <남아프리카 전쟁 종군기>로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그밖에도 소설과 희곡 작품이 있다. 만년에는 오컬트(심령술)에 심취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이상한 사건의 주인공이 찾아오던 날 나는 따분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셜록 홈즈와 함께 관찰과 추리에 대해 다양하게 토론했다. 내가, 관찰과 추리는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자, 홈즈는 머리를 저었다.
"아냐, 절대 그렇지 않아, 와트슨. 자네는 오늘 아침 위그모어 가의 우체국에 갔어. 이건 관찰만으로도 알아낼 수 있지. 하지만, 자네가 거기서 전보를 한 장 쳤다는 것을 알아 내는 건 추리하지 않으면 불가능하지."
"이거 놀랍군. 두 가지 다 제대로 맞췄어. 오늘 아침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어서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우체국엘 다녀왔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이야기해 볼까? 자네의 구두에 진흙이 묻었더군. 요새 위그모어 가에서는 도로 공사를 하고 있어. 우체국에 가려면 그 곳을 지나지 않으면 안되지. 그런데 그곳 진흙은 다른 곳의 흙과 색깔이 달라. 그래서 나는 자네가 우체국에 갔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네."
"음, 그러면 전보를 쳤다는 것은 어떻게 알아냈나?"
"오늘 아침 쭉 자네와 함께 있었지만 편지 쓰는 것도 못 보았고, 또 열어 놓은 책상 서랍에 우표와 엽서가 많이 남아있더군. 그런데도 일부러 우체국에 간 것은 전보를 치기 위한 목적이지 않을까? 이런 것이 추리라는 걸세."
"이제 관찰과 추리의 차이점을 알겠어. 자네의 추리가 이렇게 날카로울 줄은 몰랐어. 그럼 더 어려운 문제를 내 보지. 얼마 전 회중 시계를 하나 얻었는데, 이 시계의 원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맞혀 보게."
나는 호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홈즈에게 내주었다. 홈즈는 시계의 무게를 달아 보더니 글자판을 살폈다.그리고 뚜껑을 열어 속을 살펴 보기도 하고, 나중에는 렌즈를 꺼내어 자세히 조사도 했다. 그리고 시계를 돌려주었다.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듯한 그의 표정을 보고, 나는 은근히 기뻤다.
"그 시계는 얼마 전 분해해서 소제를 했군. 속이 아주 깨끗한걸."
"원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나?"
"글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대충은 추리가 되네. 우선 그 시계는 자네 아버지가 자네 형에게 물려준 것같은데, 어떤가?"
"맞아. 뒤에 H.W 라고 이니셜이 새겨져 있지."
"W는 와트슨의 머리 글자일테고... 시계의 제작 연도는 50 년 전쯤, 새긴 글자가 꽤 낡았어. 즉 우리 부모들이 살던 시대 물건이란 말일세. 또 이런 귀중품은 아버지가 장남에게 물려 주는 것이 일반적이지. 그래서 자네 형이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지."
"거기까진 틀림없어. 그리고 또?"
"자네 형은 느리고 게으른 사람이었던 것 같아. 포부는 컸지만 여러 번 실패를 했어. 돈을 벌기도 했지만 대체로 가난하게 살았고, 죽을 때는 거의 알코올 중독자였지. 어떤가?"
나는 벌떡 일어나 방안을 오락가락 했다. "홈즈, 자네가 이렇게 남의 약점을 헐뜯다니... 자네는 죽은 내 형에 대해 조사해 놓았다가 지금 시계를 보고 안 것처럼 말하는군. 너무 심하지 않나?"
내가 갑자기 화를 내자, 홈즈는 무척 당황한 모양이었다.
"와트슨,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하네. 내가 추리에 열중한 탓에 자네의 슬픈 기억을 건드렸나 보군. 하지만 난 자네에게 형이 있었다는 것조차 이 시계를 보기 전에는 전혀 몰랐네."
"하지만 너무 사실 그대로 맞추지 않았나, 어떻게 알아냈는지 얘기해 주게."
"나는 대충 짐작으로 말한 게 아니야. 시계를 보고 알아 냈을 뿐일세. 자네 형이 게을렀다고 한 것도 시계 아래쪽에 눌린 자국이 두 군데 있는 걸 보고 안 것이지. 시계에 작은 흠집이 많은 건 호주머니 속에 동전이나 열쇠 꾸러미와 함께 가지고 다닌 증거야. 값진 시계를 아무렇게나 다룬 걸 보면 뭔가 허술한 사람이었을 테고, 또 이런 고급 시계를 물려줄 정도라면 다른 재산도 많이 물려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지."
나는 정말 그렇다고 수긍했다. 홈즈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영국의 전당포는 시계를 전당 잡을 때, 시계 뚜껑 안에 전당포 번호를 작게 새겨 놓는다네. 확대경으로 보니 그런 번호가 네 개나 있더군. 그래서 자네 형이 가끔 돈에 쪼들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네. 그리고 태엽을 잘못 감아서 생긴 상처가 많은 걸 보고 시계 주인이 술에 취해 떨리는 손으로 태엽을 감았다는 걸 짐작했네."
"자네 설명을 듣고 보니, 지레짐작으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겠네. 그것도 모르고 화낸 것을 용서하게."
"아니, 그건 오히려 내가 할 말이야. 하긴 요새 너무 따분하던 참이라, 이런 추리라도 하고 나니 머리가 한결 개운하군. 무슨 재미 있는 사건이라도 없나? 원 참..."
그 때, 문이 열리면서 하숙집 아주머니가 명함을 한 장 가지고 들어왔다. "저... 젊은 여자 분이 면회를 청하는데요."
홈즈는 명함을 받아 보았다. "메어리 모스턴 양? 처음 듣는군.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무슨 사건을 가지고 온 모양이군." 이렇게 말하며 그는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방에 들어온 모스턴 양은 금발 머리의 젊은 여자로 조그만 몸매에 고급 양복을 입고 있었다. 특별히 아름답진 않으나 귀염성 있는 얼굴이었고, 특히 푸른 눈이 아름다웠다. 의자에 앉은 모스턴 양의 입술과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으로 보아 큰 걱정이 생긴 것 같았다.
"홈즈 씨, 저는 포레스터 부인 댁에서 가정 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 부인이 언젠가 당신 도움으로 중요한 사건을 해결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좀 의논을 해볼까 싶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포레스터 부인의 일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스턴 양, 제게 의논하고 싶은 일은 어떤 겁니까? 얼마든지 도움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제 아버지는 인도 주둔군의 어느 연대에 근무하는 장교였습니다. 저는 17살까지 에딘버러 기숙 학교에 들어가 있었어요. 어머니도 이미 돌아가셨고, 가까운 친척도 없었기 때문이죠. 그 해 12월 3일, 그러니까 4년 전에 아버지께서 1년간 휴가를 얻어 인도에서 런던으로 오신다는 전보를 받았습니다. 전보에는 랭검 호텔로 오라고 써 있더군요. 저는 기뻐서 곧 그 호텔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호텔 직원은 모스턴 대위가 묵고 있지만, 어제 저녁에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으니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꼬박 하루를 기다렸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결국 경찰에 신고하고, 신문에 아버지를 찾는 광고를 냈어요. 그러나 지금까지 아버지의 행방은 알 수가 없습니다."
모스턴 양은 눈물을 머금고, 말소리마저 가늘어졌다.
"아버지의 짐을 보셨습니까?"
"네. 호텔에는 옷과 책이 조금 있고, 인도 남부 앤더맨 섬에서 가져온 선물이 있더군요. 앤더맨 섬은 군사재판을 받은 병사들의 영창이 있는 곳인데, 아버지는 그곳 경비대장이었습니다."
"런던에 아버님을 아는 분이 계신가요?"
"아버지와 함께 인도에서 근무했던 솔트 소령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그 때 어퍼노이드에 살고 있어서 그 분께 아버지 소식을 물어 보았지만 그분은 아버지가 돌아온 것도 모르고 계셨다고 하더군요."
"이상한 일이군요."
"이상한 건 그 뿐만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6년 전 5월 4일의 일입니다. 이상하게도 신문 광고에 저의 주소를 찾는 광고가 났더군요. 제가 포레스터 부인 댁 가정 교사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입니다. 광고주의 주소가 없어서 저도 같은 신문에 제 주소를 올렸지요. 그러자 그날 저에게 작은 상자 하나가 소포으로 왔더군요. 그 안에는 대단히 아름다운 진주가 하나 있을 뿐 편지도 없었습니다. 그 후 해마다 똑같은 날 똑같은 소포로 그런 진주를 한 개씩 보내 왔습니다. 저는 아직 그걸 보내 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보석상에 물어 봤더니 그 진주는 아주 비싼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 진주를 여기 가져왔습니다."
모스턴 양은 작은 상자를 열어, 6개의 아름다운 진주를 보여 주었다.
"무척 재미있군요. 그밖에 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네, 사실 오늘 아침에 갑자기 이런 편지를 받아서 급히 달려왔어요. 좀 읽어보세요."
홈즈는 편지를 받아 겉봉을 훑어보았다. "런던 남서구 우편국 7월 7일자 소인이군요. 엄지손가락 지문이 남아 있는데, 아마 우편 배달부 것이겠죠?" 그는 겉봉을 뜯어 읽기 시작했다.
'오늘 밤 7시 리디엄 극장 바깥 왼쪽에서 세 번째 기둥이 있는 곳으로 나와 주십시오. 당신은 억울하게 불행을 당했기 때문에 이제 그 대가를 얻게 됩니다. 의심스러우면 친구 두 사람을 데리고 나와도 좋습니다. 단, 경찰에게는 알리지 마십시오. 경찰에 알리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당신이 알지 못하는 친구로부터'
"정말 이상한 편지로군...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해야 좋을지 선생님이 좀 알려 주세요."
"그렇다면... 저와 와트슨이 오늘 밤 당신과 함께 가는 게 어떻습니까?"
"정말 고맙습니다. 그럼 6시에 다시 오겠습니다."
"시간이 늦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참, 소포 글씨와 이 편지 글씨가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소포 포장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모스턴 양은 종이를 6장 꺼냈다.
"당신은 빈틈이 없군요. 이 글씨들은 같은 사람이 일부러 다르게 쓴 것이 분명합니다. 혹시 아버지 글씨 같지는 않습니까?"
"전혀 다릅니다."
"그래요? 그럼 6시에 만나기로 하죠. 편지는 제가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자세히 조사해 보겠습니다."
모스턴 양은 힘을 되찾은 듯 바삐 돌아갔다. 홈즈는 모스턴 양이 돌아가자 편지를 내게 보여 주었다.
"이 편지 글씨를 보고 편지를 쓴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짐작 가는 게 없나?"
나는 편지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깨끗하고 알아보기 쉽군. 이 사람은 사무적이고 퍽 건실한 사람인 것 같은데..."
그러나 홈즈는 머리를 저었다. "그 반대야... 건실한 사람은 글씨를 쓸 때도 길고 짧은 것을 똑똑히 구별하지. 그런데 이 글씨들은 높낮이가 모두 비슷비슷하지 않은가?"
홈즈는 외출 준비를 하며 말했다. "조사할 게 좀 있어서 나갔다가 한 시간 후에 돌아오겠네." 그리곤 홈즈는 나가 버렸다. 나는 창가에 기대어 모스턴 양의 모습을 떠올렸다.
오후 5시경, 홈즈는 유쾌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모스턴 양 사건은 비교적 간단해. 설명은 하나밖에 없어."
나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벌써 해결했나?"
"아니, 대강만 알아봤지. 옛날 타임즈 신문을 조사해 보니, 어퍼노이드의 솔트 소령은 6년 전 4월 28일에 죽었더군."
"솔트 소령은 모스턴 대위의 유일한 친구였어. 그런데 소령은 대위가 런던에 돌아온 것조차 모른다고 했고... 혹시 소령이 대위의 실종과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지. 모스턴 양이 갑자기 진주를 선물 받은 것도 5월 4일의 신문 광고 때문이었는데, 그 엿새 전에 솔트 소령이 죽었으니 말이야..."
"맞아!"
"오늘 모스턴 양이 가져온 편지에 '당신은 억울하게 불행을 당한 사람' 이라고 한 것은 아무래도 그녀 아버지의 실종을 가리키는 것 같아. 선물이 솔트 소령의 죽음과 관계가 있다면, 대위의 행방 불명 역시 소령과 관련이 있겠지."
"그렇다면 모스턴 대위의 실종이 소령 때문이라는 얘긴데, 갑자기 6년이 지난 지금 와서 대가를 준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나?"
"그게 바로 어려운 점이야! 오늘 밤 가 보면 알 수 있겠지. 밖에 마차가 온 것 같군. 모스턴 양이야. 어서 나가세."
나는 모자를 쓰고 굵직한 지팡이를 들었다. 홈즈는 책상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모스턴 양은 모험을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얼굴이 창백했다. 그러나 두려운 기색은 없었다. 마차 안에서도 홈즈가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했다.
"솔트 소령은 아버지의 친구 중 아버지와 가장 가까웠던 분입니다. 앤더만 섬에서도 아버지와 함께 일했지요. 아, 그리고 아버지 서랍에서 이상한 종이 쪽지가 나왔어요. 도움이 될까 싶어 가져왔습니다."
홈즈는 모스턴 양이 내민 종이 쪽지를 받아 무릎에 놓고 구겨진 곳을 폈다. 그리고 이중 렌즈로 찬찬히 조사했다. "이건 인도에서 만든 종이군요. 네 귀퉁이에 핀으로 꽂은 자국이 있고, 커다란 건물의 평면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방과 복도, 그 밖의 몇 군데 붉은 십자 표지가 있고, 그 위 '왼쪽에서 3.37'이라고 적혀 있군요. 왼쪽 구석에는 십자 네 개가 나란히 있는데, 그 옆에 조잡한 글씨로 조나단 스몰, 마호멧 신, 압둘라 칸, 도스트 아크발이라고 네 명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이 종이는 사건과 관계가 있을 겁니다. 아주 소중한 것이어서 수첩에 적어 둔 모양입니다."
"예, 수첩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그걸 아셨죠?"
"접은 쪽이 아주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꼭 도움이 될 겁니다. 잘 간직해 두십시오." 홈즈는 그리고 나서 생각에 잠겼다.
마차는 리디엄 극장 가까이 왔다. 9월의 밤은 안개가 자욱했다. 연극 구경을 가는 사람들이 안개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편지에 적힌 대로 세번째 기둥까지 걸어갔다. 이때 마부 옷차림을 한 작은 사나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모스턴 양 일행이십니까?"
"제가 모스턴이고, 이 두 분은 제 친구입니다."
사나이는 홈즈와 나를 슬쩍 쳐다보았다. "실례지만, 혹시 경찰은 아니겠지요?"
"네, 확실합니다. 믿으셔도 됩니다."
모스턴 양이 대답하자 사나이는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한 소년이 사륜 마차를 끌고 나타나 문을 열었다. 우리가 올라타기 바쁘게 마차는 안개 낀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위험한 곳으로 가는 심정이어서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모스턴 양에게 맹수 사냥 이야기를 꺼냈다가, 그만 총을 향해 범을 쏘았다고 말하고 말았다. 모스턴 양이 웃음을 터뜨려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런던의 구석구석을 자세히 알고 있는 홈즈는 밖을 내다보며 마차가 지나는 골목이나 거리 이름을 자세히 알려 주었다. 이윽고 마차는 어느 골목의 집 앞에서 멈추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하인 한 사람이 나왔다.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품이 넓은 옷에 노란 띠를 맨 인도 사람이었다.
"주인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인이 말하자, 안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라고 해."
하인은 우리를 데리고 어두운 홀을 지나 오른쪽 방으로 안내했다. 방에는 30대로 보이는 남자가 혼자 앉아 있었다. 머리칼이 몇 가닥만 남아 있는 대머리가 번들거렸다. 그는 우리를 보자, 처음에는 싱긋 웃더니 이내 얼굴을 찡그렸다.
"모스턴 양, 잘 오셨습니다. 친구들도 환영합니다. 너무 좁은 방이지만, 여기 꾸민 장식은 제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겁니다."
사실 커튼이나 바닥에 깔린 것 모두가 화려했다. 벽과 장롱에는 온통 세계 각지의 진귀한 미술품들이 장식돼 있었다.
"내가 새디어스 솔트입니다. 당신은 모스턴 양, 그리고 친구분들은?"
"이분이 셜록 홈즈 씨, 그리고 이분은 의사이신 와트슨 씨입니다."
"의사 선생님이시라구요? 초면에 실례입니다만, 제 심장을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요즘 영 상태가 좋지 않아서..."
나는 별 수 없이 대머리를 진찰했다. 별로 심장이 나쁜 것은 아니고, 다만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내가 진찰 결과를 얘기하자, 그는 비로소 안심하는 듯 했다. "그렇다면 안심이 됩니다. 모스턴 양의 아버님도 심장에 좀 더 조심했다면 아직 살아 계셨을 텐데..."
갑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들은 모스턴 양은 파랗게 질려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는 가슴을 진정하며 조용히 말했다. "저도 아버지가 이미 세상에 안 계시리라고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얘기는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할 테니, 세 분은 잘 들어 주십시오. 간단한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니 우선 물 담배나 한 모금 피우고 나서 시작하겠습니다."
페르시아나 인도 사람들이 애용하는 물 담배는, 담배 연기를 한 번 물속에 뿜었다가 들이마시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담배 맛이 한결 좋아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머리가 쭈륵쭈륵 소리 내며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 편지를 보내면서 제 주소를 쓰지 않은 것은, 제 뜻을 의심해 경찰에 연락하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경찰이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공연히 법석을 떠는 건 싫거든요."
모스턴 양의 아버지 얘기를 한다던 대머리 사내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모스턴 양이 참다 못해 이야기를 재촉했다.
"빨리 아버지 이야기를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간단치 않습니다. 이야기를 끝내는 대로 여러분을 어퍼노이드의 제 형님 댁으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저는 여러분 편이지만, 제 형님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는 내가 말참견을 했다. "이야기가 갈팡질팡해서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는데, 당신은 모스턴 대위의 친구인 솔트 소령의 유가족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저와 저의 형 바솔뮤는 솔트 소령의 아들입니다. 모스턴 대위의 실종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제 아버지인 솔트 소령에 관해 얘기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11년 전 인도에서 돌아와 어퍼노이드의 폰지셀 별장에서 은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인도에서 가져온 돈과 보물이 많았기 때문에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죠. 다만 아버지는 늘 누구에게 습격 당할 것이라는 공포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에다 권투 선수 출신 경호원을 둘씩 두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특히 의족을 한 사람을 두려워 했죠. 의족을 한 행상인이 물건을 팔려고 집에 들어오자 총으로 쏴 상처를 입혀, 거액의 배상금을 주고 해결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6년 전 정월 인도에서 편지가 한 통 왔습니다. 아버지는 그 편지를 읽고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거의 기절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날 병석에 누운 아버지는 4월 그믐께 돌아가셨습니다. 편지에 어떤 내용이 써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무척 짧은 글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 병이 심해져 의사도 손을 놓았을 때 아버지는 우리 형제를 머리맡에 불러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이제 저승으로 가지만,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내 친구 모스턴의 딸에 관한 것이다. 나는 욕심 많게 그 아이가 받을 보물을 다 차지해 버렸다. 저기 약병 곁의 목걸이도 모스턴의 딸에게 주려고 만든 것인데, 아까워서 내가 갖고 있었다. 내가 죽으면 너희들이 그 아이에게 우리집 보물의 반을 주어야 한다.'
"아버지는 잠시 괴로워 하더니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모스턴 대위가 왜 죽었는지 그 까닭을 말하마. 나는 대위가 영국에 돌아온 것조차 모른다고 했지만, 사실은 대위가 런던에 도착한 날 밤 여기서 만났다. 그가 온 이유는 뻔하지. 인도에 있을 때 나와 모스턴 대위는 많은 보물을 손에 넣었다. 그것을 우리 둘이 나누어 갖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내가 보물을 가지고 먼저 돌아왔기 때문에 그는 그 때 자기 몫을 받으려고 한 거야. 대위와 나는 보물을 나누는 문제로 말다툼을 했다.
그러다 대위는 갑자기 심장에 충격을 받고 '윽!' 하는 소리를 남기고 쓰러졌어. 그 전부터 심장이 좋지 않았지. 대위는 쓰러지면서 보물 상자에 머리를 부딪쳐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나는 곧 경찰을 부르려 했지만 말다툼을 하다가 심장에 충격을 받고 쓰러져 머리가 부딪쳐 죽은 것이라고 해도 경찰이 믿어 줄 것 같지 않았다. 또 소문이 퍼지면 보물 이야기도 세상에 다 드러날 것이고... 그래서 궁리 끝에, 대위가 우리 집에 온 것을 본 심부름꾼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둘이 그 날 밤 시체를 묻어 버렸다.
그래서 모스턴 대위는 인도에서 런던으로 돌아온 날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것이야. 나에게 사람을 죽인 죄는 없다. 그러나 시체를 감추고, 대위와 함께 나누어야 할 보물을 혼자 차지한 것은 대위의 외동딸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니 내가 죽으면 보물을 그 딸에게 나눠 주어라. 보물을 감춘 장소는...'
아버지가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버지는 무서운 표정으로 '저 놈을 쫓아내라, 저 놈!'하고 외쳤습니다. 창 밖을 보니 어두운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더군요. 텁수룩한 수염, 먹이를 노리는 맹수 같은 눈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창가로 달려갔을 때, 그 놈은 도망치고 없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 곁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습니다."
"우리 형제는 또 뜰로 나가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발자국만 몇 개 발견했을 뿐입니다. 다음날 아침에 둘러보니 아버지 방의 유리창이 깨져 있고, 선반과 상자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습니다. 또 아버지 시체 위에 '네 개의 서명'이라고 쓴 종이 쪽지가 핀으로 꽂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고, 그저 잃어버린 것이 없는지 조사해 봤지만 그런 건 없더군요. 다만 서명을 한 네 사람이 아버지가 늘 두려워하던 사람들이란 것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새디어스 솔트는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다시 물 담배를 쭈륵거리며 빨기 시작했다. 모스턴 양은 아버지의 비참한 최후 얘기를 듣고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그녀에게 물을 마시게 해 진정시켰다.
의자에 앉은 홈즈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드디어 자기의 지혜를 짜내어 해결해야 할 사건에 부딪친 것이다. 새디어스 솔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던 보물을 몇 달 동안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말한 진주 목걸이만 보더라도 나머지 보물들이 얼마나 값비싼 물건일지 짐작이 갔습니다. 그 뒤 우리 형제는 진주 목걸이를 두고 말다툼을 했습니다. 형은 그 비싼 목걸이를 모스턴 양에게 주지 말자고 우겼어요. 아버지를 닮은 형은 욕심이 많습니다. 나는, 모스턴 양이 갑자기 비싼 목걸이를 가지면 소문이 퍼져 오히려 일이 잘못될지 모르니, 해마다 하나씩 보내자고 형을 설득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큰일이 생겼습니다. 형이 보물이 있는 곳을 마침내 찾아낸 것입니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르면 그 보물의 반은 모스턴 양이 가져야 합니다. 그래 나는 편지로 모스턴 양을 불러, 모든 이야기를 한 뒤 형이 있는 폰지셀 별장으로 가서 보물을 나누려고 한 것입니다. 욕심 많고 인색한 형이지만, 아버지의 유언을 무시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모스턴 양에게 보물을 나누어 줄 겁니다."
나는 뭔가 무서운 일이 생겨날 것 같아 겁이 났다. 그러나 한편 모스턴 양이 하룻밤 사이에 백만장자가 된다니 기쁘기도 했다. 모스턴 양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얼굴이었다. 홈즈만이 침착하게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새디어스 씨, 당신은 정말 좋은 일을 하셨습니다. 시간도 늦었으니 이제 형님에게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예, 가시죠." 대머리는 물 담배를 치우고 외출 준비를 했다. 이윽고 우리 네 사람은 문 앞에서 기다리던 마차에 올라타 어퍼노이드를 향해 떠났다. 새디어스 솔트는 마차 안에서도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 형은 머리가 좋습니다. 보물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아십니까? 형은 보물이 틀림없이 집 안에 있으리라고 믿고, 건물의 높이와 방의 높이를 따로 계산했습니다. 집의 높이는 22미터 20센티미터, 방의 높이는 2층과 3층을 합해 20미터 10센티미터, 방 천장이 필요 이상 높다는 얘기죠. 그래서 천장 위에 뭔가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겁니다. 과연 텅 빈 천장에 보물 상자가 놓여 있었던 거예요. 보물은 50만 파운드 정도 될 것 같습니다."
50만 파운드의 절반은 25만 파운드! 가정교사를 하던 가난한 처녀가 당장 영국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는 것이다. 마차는 꿈 같은 이야기를 싣고 고요한 어둠 속을 달려갔다.
11시 가까이 되어 마차는 어퍼노이드에 도착했다. 런던 교외인 그곳은 안개가 짙었다. 반달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폰지셀 별장은 거기서도 외진 집이었다. 집 주위에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촘촘히 꽂은 높은 담이 둘려 있고, 대문은 무쇠로 장식해 놓았다. 앞장 선 새디어스가 무슨 신호처럼 문을 똑똑 두드렸다.
"누구야?" 안에서 거친 목소리가 울려 왔다.
"나야, 새디어스야. 맥머드, 문 열어!"
열쇠가 철커덕거리며 문이 열렸다. 키가 작고 가슴이 넓은 사나이가 램프를 들고 나왔다. "새디어스 님이신가요? 그런데 같이 온 분에 대해서는 주인님께 말씀 드리지 않았는데요."
"괜찮아! 어제 다른 손님을 데리고 온다고 말했으니까."
"주인님은 하루 종일 방 안에만 계시고,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 말도 듣지 못했고, 저로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새디어스 님만 들어오시고, 다른 분들은 안 됩니다."
"이것 큰일이군. 이렇게 깊은 밤에 여자 분을 바깥에 세워 둘 수는 없지 않나?"
"허락 없이 들어오시면 제가 쫓겨납니다. 아무리 친구 분이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때 홈즈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맥머드, 4년 전 어느날 밤, 너와 한 바탕 권투를 한 사람을 기억하겠지?"
"어? 홈즈 씨였군요, 이거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자, 들어오십시오."
맥머드의 얼굴은 금세 부드러워지며 막아 섰던 문에서 비켜섰다. 홈즈의 한 마디로 우리는 쉽게 폰지셀 별장의 대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갔다. 마당 쪽 창문은 모두 캄캄했다. 소름이 끼칠 만큼 음산한 분위기였다.
"이상하다? 형님 방에도 불빛이 보이질 않는군." 새디어스가 창문 하나를 가리켰다.
"하지만 새디어스 씨, 이쪽 작은 창에는 불빛이 비치는데요?"
"저것은 가정부 번스턴 부인의 방입니다. 그럼 부인에게 물어 봅시다. 응? 이건 무슨 소리야?" 갑자기 여자의 자지러지는 비명이 들려온 것이다.
"번스턴 부인입니다. 이 집에는 여자라곤 부인밖에 없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곧 다녀오겠습니다." 새디어스는 집으로 달려갔다. 문이 열리자, 키가 큰 늙은 여자가 나타났다. "새디어스 씨! 큰일났습니다!"
여자의 떨리는 말소리와 함께 새디어스는 집 안으로 사라졌다. 나와 모스턴 양은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면서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가끔 구름 밖으로 얼굴을 드러내는 반달의 희미한 빛에 비친 마당은 구석구석 파헤쳐져, 마치 광산에 온 것 같았다.
"6년 동안 보물을 찾아 뒤진 흔적이군!" 홈즈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이 때 건물 문에서 새디어스가 헤엄을 치는 듯 허우적거리며 나타났다.
"형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빨리 와 보세요!" 새디어스가 울 듯이 떨며 말했다. 홈즈는 그와 함께 집 안을 여기저기 살피며 가정부 방으로 들어갔다. 번스턴 부인은 모스턴 양의 침착한 얼굴을 홈즈의 어깨 너머로 보며 말했다. "당신네를 보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번스턴 부인은 반가운 듯 모스턴 양의 손을 잡은 채, 홈즈를 향해 말했다. "주인님은 오늘 하루 종일 문을 걸어 잠그고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끔 있었던 일이라서 별로 걱정도 하지 않았죠. 그러다 방 안이 너무 조용해 열쇠 구멍으로 들여 보았습니다. 주인님이 방 한가운데 앉아 계시더군요. 그 때 그 무서운 얼굴... 주인님을 모신 지 10년 가까이 되었지만, 그렇게 무서운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 자, 보세요."
새디어스는 그저 부들부들 떨고 있어, 홈즈가 램프를 들고 주인 방에 가기로 했다. 모스턴 양과 가정부는 그냥 남아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며 홈즈는 확대경을 꺼내 먼지에 남아 있는 발자국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계단을 지나 복도로 나오자 왼편에 3개의 문이 나란히 있었다. 그 중 세째 번 문이 이 저택의 주인 방이었다. 홈즈가 문을 두드렸지만 대답이 없었다. 손잡이를 돌려봐도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허리를 굽혀 방 안을 들여다보던 홈즈가 갑자기 숨소리를 죽였다. 나는 그가 이렇게 놀라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와트슨, 자네도 좀 들여다보게!"
홈즈가 말하는 대로 나도 허리를 굽혀 들여다보았다. 달빛이 흘러 드는 방 한가운데 의자에 이쪽을 향해 누군가 앉아 있었다. 훌렁 벗어진 대머리와 창백한 두 볼,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듯한 얼굴, 그것은 놀랍게도 우리를 데리고 온 새디어스 솔트였다. 나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도 새디어스가 공포에 떨며 서 있었다. 웬일일까? 바로 방 안에 있는 사람은 새디어스의 쌍둥이 형 바솔뮤였다.
"큰일났군! 이미 죽은 게 분명해!" 나는 다급하게 홈즈에게 말했다.
"문을 부수고 들어가야겠군."
홈즈는 힘껏 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나와 새디어스까지 합세해 부딪치자, 간신히 자물쇠가 벗겨졌다. 방 안은 마치 화학 실험실 같았다. 유리병, 분젠, 시험관 따위가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방 다른 구석에는 큰 병에 산 용액들이 담겨 있었다. 깨어진 병에서는 검은 액체가 흘러나와 고약한 냄새가 가득했다. 또 한쪽에는 발판이 놓여 있고, 그 위 천장에 사람이 드나들 만한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밑에는 긴 밧줄이 동그랗게 감긴 채 놓여 있었다.
집 주인은 무서운 미소를 띤 채 죽어 있었다. 죽은 지 몇 시간은 지난 것 같다. 시체는 얼굴 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굳어 있었다. 시체 옆 책상 위에는 이상한 도구가 보였다. 다갈색의 단단한 나무에 돌멩이를 묶어 망치처럼 만든 물건 - 그 곁에 종이가 한 장 떨어져 있다. 홈즈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음, 그 종이 쪽지와 같군!"
"네 사람의 서명 말인가? 이건 무슨 암호 같은데...?"
"살인 예고야. 역시 그래, 이것 좀 보라구."
홈즈는 시체의 귀 옆에 꽂힌 나무못 같은 것을 가리켰다.
"화살 아닌가?"
"응, 뽑아 보게. 독이 묻어 있을 테니 조심해."
나는 화살을 손가락으로 쑥 뽑았다. 그 자리에 피가 맺혀 있었다.
"뭐가 뭔지 통 모르겠군." 내가 답답해 하자, 홈즈는 싱긋 웃었다.
"난 반대로 모든 일이 척척 풀려 가는데...."
이 때,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던 새디어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앗, 보물이 없어졌다! 보물을 도둑맞았어요! 형이 천장에서 보물 상자를 내릴 때 내가 도와줬는데... 그러고 나서 형은 아무도 만나지 않았을 텐데?"
"그게 몇 시였습니까?"
"오전 10시쯤이었어요. 내가 형을 만난 거라면, 경찰은 나를 살인범으로 보겠군요. 홈즈 씨,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새디어스 씨, 걱정 마십시오. 지금 곧 경찰에게 가서 신고하세요.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홈즈의 부드럽게 달래는 말에 새디어스는 비틀거리며 방을 나갔다.
홈즈는 새디어스의 발소리가 사라지자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와트슨, 경찰이 여기 오려면 30분은 걸릴 거야. 그때까지 내가 짐작한 것이 맞나 조사해 보세. 이 사건은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복잡하군."
"간단하다고?"
"응. 우선 범인이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 나갔는지 살펴볼까? 문은 어젯밤 새디어스가 돌아갈 때 잠갔다니 창문을 살펴보세."
홈즈는 램프를 들고 창가로 나갔다.
"창은 안으로 닫혀 있군. 창틀이나 문 장식은 상한 곳이 없고 지붕도 높아 손이 닿지 않았을 테고... 아, 창턱에 올라선 자국이 있군! 어젯밤에 이슬비가 내렸으니 창턱에 발자국이 생길 수밖에... 음, 방 안에도 같은 자국이 있어, 와트슨."
나는 홈즈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뭐야, 이건 발자국이 아닌데...?"
"뭔지 모르겠나? 바로 의족의 자국이야."
"아, 범인은 바로 의족을 한 사나이란 말인가?"
"하지만 범인은 한 사람이 아닐세. 공범이 한 사람 있어. 자네, 이 벽을 올라올 수 있겠나?"
나는 창 밖을 보았다. 창은 땅 위에서 20미터 높이어서 도저히 기어오를 수 없을 것 같았다.
"도저히 올라올 수 없지."
"그냥은 불가능하지. 하지만 공범이 위에서 저기 있는 밧줄을 내려준다면 올라오거나 내려갈 수 있지. 그 공범은 범인이 일을 끝내고 내려간 다음, 밧줄을 감아 올려 방에다 버리곤 사라진 거야."
"그렇다면 공범은 어디로 들어온 거지? 닫혀 있는 창문으로 들어왔을 리도 없고, 굴뚝으로 기어 들어왔단 말인가?"
"저 천장 구멍으로 들어왔을 거야. 몸이 아주 재빠른 녀석이지. 범인 한 사람은 다리가 불구여서 공범의 도움을 받아 밧줄을 이용했어. 그 공범의 손은 아주 부드러운 것 같아. 밧줄에 피가 묻어 있거든? 손바닥 껍질이 벗겨지며 피가 난 거야. 자, 이젠 공범자가 드나든 천장 구멍을 조사해 보자구."
홈즈는 발판 위로 뛰어올라 '휙' 몸을 날려 천장으로 올라갔다. 그는 램프를 받아 들고는 나도 올라오도록 했다. 천장 위 비밀의 방은 2-3미터 가량 넓이였다. 바닥은 얇은 판자여서, 용마루를 딛지 않으면 추락할 위험이 있었다. 머리 위 지붕이 세모꼴을 이루고 있었다. 홈즈는 손으로 지붕을 더듬었다.
"맞아, 여기 밖으로 나가는 창이 있군. 그 공범은 여기를 이용한 거야."
홈즈는 램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닥에는 어른 발 절반도 안 되는 작은 맨발 자국이 많이 나 있었다.
"홈즈, 공범은 혹시 아이 아닐까?"
"글쎄, 놀랍군! 하지만 자세히 보게. 이건 절대 어린애 발자국이 아니야."
"그렇지만 이렇게 작은 발자국이 어른이라면, 그 놈은 난장이란 말인가?"
홈즈는 별 대꾸 없이, 조심스럽게 바닥을 살피다가 기쁜 듯 소리쳤다. "됐어! 범인은 크레오소트(백무나무를 증류해 만든 말간 유액. 방부제나 진통제로 사용) 속에 발을 헛디뎠어. 이것 보라구! 발자국에서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나지 않나? 여기 그릇이 깨져 약이 흘렀군."
크레오소트는 독한 자극성 냄새를 풍기는 약이다. "크레오소트에 발을 헛디뎌서 어떻단 말인가?"
"나는 이 냄새를 지구 끝까지 따라갈 수 있는 개를 알고 있지. 아, 경찰이 온 모양이야!" 떠들썩한 소리와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아래에서 들려 왔다.
"시체가 죽은 지 얼마나 되는지 좀 봐 주게."
"사람이 죽으면 몸이 곧 굳어지지만, 이건 참 어려운 경우야. 얼굴이 마치 웃는 것 같은데, 실은 얼굴 근육이 굳어져 웃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분명히 독이 몸에 퍼졌기 때문이야."
"맞아. 화살에 독을 발랐겠지. 그런데 무슨 독약일까?"
나는 시체에서 뽑아낸 화살을 램프로 가져왔다. "이 화살은 영국에서 만든 게 아니야."
"그래. 공범이 누군지 짐작이 가는군."
이 때, 진한 회색 양복을 입은 몸집이 큰 사람이 거친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뒤에는 경찰 한 사람과 새디어스 솔트가 따라오고 있었다. 몸집 큰 사나이는 방으로 들어서면서, "이거 지독하군... 아니, 거기 누구요?"하고 우리들을 노려보았다.
"존스 경감님, 저를 모르십니까?" 홈즈가 나서며 부드럽게 물었다.
"오, 이론가이신 홈즈 씨로군. 당신은 이미 이 사건을 조사했겠지. 그래, 이 사나이가 죽은 까닭이 무엇인 것 같소?" 존스 경감은 홈즈를 놀리듯 물었다.
"아직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런 것 쯤이야 내가 조사하면 당장 알 수 있지. 문은 닫혀 있었고... 보물을 50만 파운드나 도둑맞았고. 참, 창문은 어때요?"
"창은 안으로 잠겨 있었고, 바깥엔 흙 발자국이 있습니다."
"잠겨진 창 밖의 발자국은 별 의미가 없소. 이 사나이는 급한 발작을 일으키고 죽었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잠깐! 보석이 없어진 게 문제군. 이봐, 경관! 새디어스 씨를 데리고 좀 나가 주게."
그는 커다랗게 경관에게 명령했다. 그러고 홈즈 곁으로 다가서 나직하게 말했다. "홈즈 씨, 저 새디어스 솔트가 어젯밤 이곳에서 형과 싸운 모양이오. 그러다 형이 죽자 보물 상자를 들고 도망친 게 확실해. 틀림없어."
"형은 독 화살에 찔려 죽었습니다."
"그래도 새디어스가 형을 죽인 것이 분명해요. 이 집에는 인도에서 가져온 물건이 많은데, 화살도 그 중 하나일 거요. 그런데 새디어스는 죽인 뒤 어떻게 이 방을 빠져나갔을까? 아, 천장에 구멍이 뚫려 있군! 틀림없이 저 곳으로 도망쳤어."
몸집이 큰 존스 경감은 발판을 딛고 천장으로 올라가, 거기서 지붕에 뚫린 창을 발견했다.
"경관, 새디어스 솔트를 데리고 오게."
새디어스가 들어오자, 경감은 냉정하게 말했다. "솔트 씨, 미안하지만, 형을 죽인 살인범으로 당신을 체포해야겠소."
새디어스는 금세 얼굴이 새파래졌다. "아, 걱정한 대로 내가 드디어 범인이 되고 마는군! 홈즈 씨, 저를 좀 구해 주십시오!"
새디어스의 호소에 홈즈는 머리를 끄덕였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제가 씻어 드리지요."
홈즈는 경감을 향해 말했다. "범인은 새디어스 솔트 씨가 아닙니다. 어젯밤 이 곳에 들어온 범인은 혼자가 아니라 두 사람입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이름과 인상까지 알고 있어요. 조나단 스몰이라는, 무식하고 몸이 작고, 동작이 날쌘 사람입니다. 오른발은 의족을 하고 있죠. 뭉툭하고 뒤꿈치에 굵은 대갈(말굽에 편자를 신기는 데 박는 징)을 박은 구두를 신고 있으며, 얼굴이 햇볕에 그을린 전과자입니다. 덧붙여 어제 저녁 사건으로 손바닥이 벗겨졌다는 것도 말씀 드리죠."
홈즈가 너무 자세하게 범인의 인상을 말하자 존스 경감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혼자서 새디어스를 체포할 욕심 때문인지 홈즈의 설명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또 한 사람은 누구요?"
"또 한 녀석은 전혀 다른 인간이지만, 그 놈도 금방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와트슨, 잠깐만!" 홈즈는 갑자기 말을 그치더니, 층계 가까이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조용히 말했다.
"모스턴 양을 계속 이 집에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자네가 집에까지 데려다 주게. 난 여기서 자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응, 알았어. 그런데 존스 경감의 비위를 너무 상하게 하진 말게."
"염려 마. 그 사람은 결국 나에게 한 수 배우러 올 테니. 그리고, 모스턴 양을 바래다 주고 돌아오는 길에 핀친 골목 3번지에 가서 오른쪽 세 번째 집의 셔먼이라는 박제 장사를 찾게나. 진열장에 토끼를 노리는 족제비 박제가 있으니 쉽게 찾을 거야. 그 셔먼 노인에게 내 이름을 대고, 급히 더비가 필요하다고 말하게."
"더비는 개 이름인가?"
"응, 잡종 개야. 냄새를 아주 잘 맡지. 오늘 밤 더비가 한몫 단단히 해주어야 겠어."
"알았네. 지금이 1시니까 3시까지는 돌아올 수 있을 거야." 나는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나는 모스턴 양을 존스 경감의 마차로 포레스터 부인 댁까지 바래다 주었다. 거의 2시 가까운 시간이었다. 포레스터 부인은 잠을 자지 않고 걱정스럽게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씨가 퍽 고운 부인임에 틀림없다. 가정 교사인 모스턴 양이 무사히 돌아오도록 기도하고 있었음을 그 태도로 알 수 있었다.
부인은 나에게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서 다음 기회로 미루고 다시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핀친 골목을 향해 달렸다. 밤은 아주 깊어, 셔먼의 가게 문은 아무리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었다. 다시 문을 힘껏 두드리자 2층 창문이 열리며 어떤 사나이가 아래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어떤 놈이야! 썩 꺼지지 못해? 그러지 않으면 개를 40마리 한꺼번에 풀어놓겠어!"
"개는 한 마리면 충분합니다."
"뭐야? 그렇다면 뱀도 함께 보내주마!"
"전 셜록 홈즈의 부탁으로 왔습니다." 그러자, 창문이 닫히고 누군가 층계를 퉁탕거리며 내려오더니 문이 열렸다. 셔먼은 마르고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었다.
"홈즈의 친구라면 언제나 환영이지. 이맘때쯤 짓궂은 동네 녀석들이 시끄럽게 굴어서 또 그 놈들인 줄 알았어. 이봐! 곰 곁에 가면 안돼. 물어뜯는다네. 그래, 홈즈는 뭐가 필요한 건가?"
"더비를 빌리자고 하더군요."
"더비는 그 왼쪽 7호 우리에 있네."
노인은 동물 우리를 지나 개집의 문을 열었다. 뛰어나온 개는 털이 길고 귀가 축 늘어진, 험상궂은 잡종이었다. 노인이 주는 각설탕을 더비에게 주었더니, 더비는 잠시 망설이다 그것을 받아 먹었다. 나는 곧 더비와 친해질 수 있었다.
마차를 타고 더비와 함께 폰지셀 별장에 돌아오자, 새디어스 솔트는 물론 고용인들도 모두 바솔뮤 살해 공범으로 묶여 있었다. 홈즈는 파이프를 물고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더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더비, 잘 왔다. 이제 네가 한바탕 활약할 차례야."
더비를 책상 다리에 매어 놓고, 홈즈는 나와 함께 시체가 있는 방으로 올라갔다. 경찰 한 명이 방을 지키고 있었다. 홈즈는 경관에게서 램프를 받아 들고 내게 말했다. "와트슨, 그 종이를 내 목에 걸어 주게. 그리고 내 구두와 양말은 아래에 갖다 두고, 손수건을 크레오소트에 적셔주게. 자, 그럼 다시 천장으로 올라가 볼까."
우리는 천장으로 올라갔다. 홈즈는 천장 바닥에 난 발자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는 이 발자국을 어린애 발자국이라고 했지. 보통 어린애의 것과 좀 다른 게 없나?"
"발가락 사이가 벌어져 있네."
"바로 그게 중요한 점이라네. 이제 저 지붕의 창에 가서 냄새를 맡아 보게."
나는 그 말대로 코를 창문 가까이 대 보았다. 타르 냄새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타르 냄새가 난다고 말하자, 홈즈는 빙그레 웃었다. "그럼 아래로 내려가 더비와 함께 마당에서 내 재주를 구경해보게나."
나는 더비를 데리고 마당으로 나왔다. 홈즈는 지붕 위를 이리저리 걸어다니다, 창이 있는 곳에서 아래로 소리쳤다.
"와트슨, 어디 있나?"
"여길세."
"발자국을 따라 여기 왔는데, 거기 검은 것은 도대체 뭔가?"
"물통이야."
"거기 뚜껑이 있나?"
"응, 있어."
"사다리 같은 건 혹시 없나?"
"응, 그런 건 보이지 않는데..."
"이상하다... 아냐, 됐어! 홈통이 있었어! 이 홈통으로 내려가겠네."
홈즈는 램프를 들고 홈통을 따라 내려왔다. 그리고 양말과 구두를 신더니, 나한테 자랑스럽게 무언가 내밀었다. 그것은 풀로 짠 조그만 상자로, 그 안에 죽은 바솔뮤의 귀에 꽂힌 독화살과 똑같은 화살이 대여섯 개 들어 있었다.
"범인이 서둘러 도망치다 지붕에 떨어뜨린 것 같아. 우리가 이걸 주은 것은 무척 다행이야. 그 녀석의 무기가 줄어들었으니까. 그런데 와트슨, 자네 이제부터 10킬로미터 정도 걸을 수 있겠나?"
"암, 걸을 수 있지."
"그럼 됐어. 자, 더비, 부탁한다. 이 손수건 냄새를 맡아 둬라."
홈즈는 크레오소트를 적신 손수건을 더비의 코에 댔다. 더비는 앞다리로 땅을 딛고, 표정을 찡그리며 코를 실룩거렸다. 홈즈는 손수건을 버리고 더비를 물통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더비는 코를 땅에 대고 꼬리를 꼿꼿이 세우며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냄새 나는 발자국을 찾은 모양이다. 동쪽 하늘이 천천히 밝아오고 있다. 더비는 마구 파헤친 마당을 가로질러 담 밑으로 가더니, 참나무 밑에서 멈추었다. 담은 벽돌을 엇갈려 쌓아 쉽게 넘을 수 있었다. 홈즈가 먼저 넘어가 더비를 받았다. 집 밖으로 나오자 더비는 다시 코를 땅에 대고 열심히 길을 찾았다.
"와트슨." 홈즈가 말을 걸었다. "내가 더비만 믿고 있는 것은 아니야. 다른 방법을 써도 범인은 잡을 수 있어. 하지만 지금은 개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빠를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범인의 이름과 인상까지 미리 알아 냈지?"
"뭐 간단하네. 인도 경비대에서 근무하던 두 장교가 보물이 감춰진 장소를 알아내고, 스몰이라는 영국 사람이 그 장소를 나타낸 지도를 만들었지. 스몰이라는 이름은 지도에 적혀 있어. 다른 세 사람 이름은 모두 백인이 아니야. 그 장교 한 사람이 보물을 꺼내서 영국으로 돌아왔어. 스몰과 다른 세 사람이 보물에 손대지 못한 건 갇혀 있는 죄수였기 때문이야."
"감옥에 갇힌 죄수 네 사람은 나중에 나눠 갖기로 약속하고 보물 이야기를 털어 놓았는데, 그 장교가 몰래 빼돌려서 영국으로 도망쳤다는 말이지?"
"맞았어. 도망친 그 장교가 바로 솔트 소령이야. 그런데 인도에서 편지가 왔어. 어떤 편지인지 이젠 상상할 수 있겠나?"
"죄수들이 감옥에서 풀려 나왔다는 소식이겠지..."
"맞아. 하지만 풀려난 게 아니고 탈옥했을 거야. 그들이 감옥에서 풀려나올 날짜를 솔트 소령이 몰랐을 리 없으니 말이야. 그 이후 소령은 의족을 한 사나이를 경계하게 된 거야. 의족을 한 사나이는 백인이 분명해. 소령이 의족을 한 장사꾼에게 총을 쏘았다는 걸로 미루어 알 수 있지. 이 사람이 바로 스몰이야. 어때, 내 추리에 뭔가 빈 틈이 있나?"
"없어. 아주 정확해!"
"이제 스몰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세. 그는 자기의 보물을 찾을 겸 자기를 속인 소령에게 복수하려고 영국으로 돌아왔네. 영국에 돌아와 솔트 소령의 주소를 알아 내고 그 집안 사람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지. 폰지셀 별장의 집사가 아무래도 스몰에게 넘어간 것 같아. 가정부 번스턴 부인에게 물어 보니, 그 놈은 몹시 성질이 사납다더군. 하지만 스몰은 보물이 감춰진 곳을 알 수 없었지. 그런데 소령이 병으로 앓아 눕게 되었네. 소령이 죽으면 보물이 영영 사라질 것 같아, 스몰은 창 밖에서 병실을 들여다보기도 했지. 마침내 소령이 죽자, 스몰은 그날 밤 폰지셀 별장에 침입해 방 안을 다 뒤져 보았지만 보물은 나오지 않았어. 그래서 별 수 없이 자기가 왔었다는 쪽지만 남기고 사라진 거야."
"종이 쪽지를 남겨 두면 자기 정체를 경찰에게 알리게 될 텐데?"
"복수하려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자기 정체를 알리고 싶은 심리가 있어. 스몰은 보물을 찾는 데 실패한 뒤에도 계속 폰지셀 별장을 지키고 있었어. 그러다, 솔트 소령의 아들인 바솔뮤가 보물을 찾아낸 기미를 알아 차렸지. 다리 불구 때문에 자기 혼자선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없기 때문에 공범의 도움을 얻어 보물을 빼앗아 간 거야."
"그럼 바솔뮤를 죽인 자는 스몰이 아니군."
"그래, 스몰은 보물만 훔치면 되니까. 그런데 성질이 거친 공범은 끝내 독 화살로 바솔뮤를 죽이고 만 것이라네."
"그 공범은 어떤 녀석인가?"
"곧 보여줄 테니 좀 기다리게. 아, 해가 떠오르는군. 벌써 아침이 됐어. 그런데, 자네 권총을 갖고 오지 않았나?"
"응, 하지만 지팡이가 있네."
"그럼 됐어. 내게 권총이 있으니까, 일이 터지면 내가 그 놈을 맡지." 홈즈는 권총에 실탄을 두 발 잰 다음 저고리 주머니에 넣었다.더비는 여전히 땅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으며 앞장 서서 가고 있었다. 훤히 밝아 오는 아침 거리에 하나 둘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윽고 광장으로 나오자 냄새를 맡으며 우리를 인도하던 더비가 갑자기 머리를 쳐들고 근방을 빙빙 돌았다.
"왜 이러지? 냄새를 잃어버린 모양이야. 범인들이 비행기를 타고 도망치진 못했을 텐데 어떻게 된 거지?"
홈즈는 더비를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더비는 다시 냄새를 맡았는지, 이전보다 더 자신 있게 걸어갔다.
"됐어! 이번에는 코를 땅에 대지도 않는군. 냄새가 아주 짙은 모양이야. 범인이 가까이 있다는 증거야. 자, 와트슨. 한판 벌어질지 모르니 자네도 정신 바짝 차리게."
더비는 우리를 재목이 산더미처럼 쌓인 곳으로 데려갔다. 그 재목 더미 한가운데 커다란 통이 하나 놓여 있었다. 더비는 그것을 향해 마구 짖어댔다. 통에는 진한 크레오소트가 가득 들어 있었다. 홈즈와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서로 바라보며 웃고 말았다. 더비는 범인의 냄새와 이 크레오소트 통의 냄새를 헷갈렸던 것이다.
"어디서 냄새가 헷갈렸을까?" 나는 당황해 홈즈에게 물었으나, 그는 침착했다.
"아까 그 광장이 틀림없어. 더비가 망설이던 곳 말이야. 그곳으로 돌아가세."
우리는 더비를 광장까지 데리고 돌아갔다. 더비는 커다란 원을 그리며 이리저리 냄새를 맡다가 방향을 잡고, 다시 기운차게 걷기 시작했다.
"이번엔 틀림없을 거야. 저 봐. 아까는 차도로 가더니 이젠 인도를 걷지 않나? 크레오소트 통이 있는 곳은 차도로 갔었지."
홈즈는 다시 눈을 빛내며 더비를 따라갔다. 길은 템즈강 가까이로 이어졌다. 얼마 있지 않아 우리는 선창가로 나왔다. 더비는 물을 내려다보며 계속 으르렁거렸다.
"이거 큰일이군! 그 놈이 배를 타고 간 것 같아."
홈즈는 더비에게 기슭에 매어 둔 배의 냄새를 맡게 했다. 그러나 크레오소트 냄새를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짐을 높이 쌓아놓은 선창가에 2층 집이 한 채 있고, 대문에 [스미스 선박 임대소]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홈즈는 그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 안에서 6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가 뛰어나오더니, 그 뒤를 어머니인 듯한 뚱뚱한 여자가 수건을 손에 들고 따라 나왔다.
"잭, 얼굴을 씻어야지. 참, 애를 어떡하나? 말을 안 들으면 아빠한테 일러 줄 테다."
홈즈는 소년을 불렀다. "얘야, 엄마 말을 잘 들어야 착하지. 자, 아저씨가 돈을 주마."
"정말?"
"그럼, 정말이고 말고.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렴."
홈즈는 소년에게 돈을 쥐어 주고, 그 여자에게 말했다. "스미스 부인, 애가 참 착하군요."
"어머, 죄송합니다. 말도 못할 장난꾸러기랍니다. 아빠가 안 계시니까 말을 더 안 듣는군요."
"예? 스미스 씨가 지금 안 계십니까? 상의할 것이 있어서 왔는데요."
"어제 아침 나가셔서 아직 안 오셨어요."
"사실은 작은 증기선을 한 척 빌려야 합니다."
"이걸 어쩜 좋아? 증기선은 어제 아침 애 아빠가 타고 나갔어요. 석탄도 충분치 않을텐데 이렇게 늦는군요."
"석탄이야 다른 곳에서도 살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다른 곳에서 석탄을 사면 너무 비싸요. 그보다 같이 배를 타고 간 의족을 한 남자가 어쩐지 마음에 꺼림칙해요."
"의족을 한 남자라구요?" 홈즈는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예, 얼굴이 빨간 것이 마치 원숭이 같더군요. 전부터 가끔 찾아와 애 아빠하고 무언가 수근거리곤 했어요. 어제 아침엔 새벽같이 찾아와 자는 사람을 깨우더군요. 약속이 돼 있었나 봐요. 증기선 준비도 다 되어 있어서 큰아들 짐까지 데리고 떠났어요."
"그래요? 그 의족을 한 남자는 혼자 왔던가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저는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니까요. 그 사나이 목소리와 의족으로 딱딱걷는 소리만 들었어요."
"어쨌든 큰일이군요. 증기선을 꼭 빌려야 하는데... 배 이름은 무엇입니까?"
"오로라 호입니다."
"푸른 바탕에 노란 줄이 그려져 있는 배지요?"
"아뇨, 까만 칠을 새로 한 위에 붉은 줄이 두 개 있어요."
"그래요? 스미스 씨는 곧 돌아오겠지요. 오로라 호를 만나면 아주머니께서 걱정하시더라고 전해 드리지요. 그러니까 배 전체가 까만 색이라는 거죠?"
"연통에는 흰 줄이 하나 있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거기를 물러나 강가에 있는 나룻배를 타자, 홈즈는 입을 열었다.
"저런 여자와 이야기할 때는 이쪽 속셈을 모르도록 가급적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놔야 해. 자칫 잘못하면 입을 꽉 다물고 전혀 말을 해 주지 않는다네."
"덕분에 이제 오로라 호를 곧 발견하겠군."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겠지. 템즈강을 모조리 뒤질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럼 경찰에 부탁해 보지 그러나?"
"아냐, 나는 끝까지 내 힘으로 해 보겠어."
"신문에 광고를 내보면 어떨까?"
"그러면 죽도 밥도 안 되네. 범인들이 눈치채고 외국으로 도망갈 수도 있어. 놈들은 지금 경찰이 눈치를 채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유유히 런던에 남아있을 거야."
"그럼 자네는 어떻게 할 셈인가?"
나룻배가 강 기슭에 닿았다. 우리는 배를 내려 마차를 잡아 탔다.
"자, 이제 집으로 돌아가 아침을 먹고 잠이나 한숨 푹 자기로 하세. 오늘 밤 또 밤샘을 해야 할지도 몰라. 마부 양반, 우체국에 잠깐 섰다 갑시다. 그리고 더비도 데리고 가야지.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말이야."
홈즈는 우체국에서 전보를 쳤다.
"어디로 전보를 쳤는지 알겠나?" 마차로 돌아온 홈즈가 물었다.
"글쎄..."
"베이커 거리의 특공대장 이긴즈 소년이야. 아침 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부하들을 데리고 오겠지."
"아니, 그 거친 애들을 이용하려는 건가? 재미있는 생각인데..."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홈즈는 '베이커 거리의 특공대'란 그럴싸한 이름을 가진 이 불량 소년들을 귀여워했다. 그들 역시 홈즈의 부탁을 언제든지 환영하는 편이었다.
이윽고 우리는 하숙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아침 식사를 했다. 신문을 펼쳐 든 홈즈는 웃으면서 말했다. "예상했던 그대로야. 존스 경감이 바솔뮤의 가정부와 심부름꾼까지 다 잡아갔어. 신문도 이들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대문짝만하게 써놓았군."
나는 신문을 받아 읽어 보았다. "이러다 우리까지 붙잡혀 가는 것 아닐까? 아, 발자국 소리가 들리네. 혹시 경찰 아닐까?" 나는 층계를 올라오는 요란한 소리에 움찔해서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 베이커 거리의 특공대들이야." 과연 10명도 넘는 소년들이 방 안으로 몰려들었다. 한결같이 누더기를 걸친 더러운 아이들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소년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전보를 받고 나서 곧 아이들을 모아 데리고 왔어요. 전차 요금이 3실링 반 들었어요."
"그래, 수고했어." 홈즈는 전차 요금을 내주고 소년들을 둘러보았다.
"너희들에게 부탁할 게 하나 있다. 지금부터 오로라 호라는 증기선을 찾아줘. 너희들은 그 증기선을 찾아 이긴즈에게 보고해라. 그러면 이긴즈가 나에게 연락할거야. 이런 좁은 곳에 너희들이 모두 드나들 수는 없으니까. 오로라 호의 주인은 스미스인데, 배에 검은 칠을 했고, 붉은 줄이 두 개 있다. 연통도 검은 색이지만, 흰 줄을 하나 그려 놓았어. 알겠나? 증기선을 발견한 사람에겐 상금 1기니를 주겠다. 자, 이것은 오늘치 수고비다."
홈즈는 한 사람마다 1실링씩 주었다. 소년들은 신이 나서 방을 뛰어 나갔다.
"저 애들은 여기저기 파고 들어가 여러 가지를 알아 올 거야. 저녁때 쯤이면 틀림없이 증기선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 걸세."
"그럼 자네는 그때까지 한숨 자 두게."
"아니, 이젠 피로가 풀렸어. 그래서 다시 한 번 이 일을 생각해 봐야겠어. 의족을 한 친구도 묘한 놈이지만, 공범은 더욱 그렇단 말야. 구두를 신은 적이 없는 어린애처럼 작은 발... 발가락은 모두 밖으로 벌어졌고... 런던에서 맨발로 걸어 다니는 놈이라... 녀석의 얼굴은 햇볕에 그을렸고, 몸은 아주 날쌔고, 돌을 단 막대기나 독 화살을 무기로 사용한다..."
"토인 아닐까, 토인! 인도의 토인 말이야?"
"인도에 그런 발을 가진 토인은 없을 텐데... 어디 한 번 조사해 보세."
홈즈는 책장에 가서 두꺼운 책을 꺼냈다. 그리고 이리저리 책장을 넘기더니 갑자기 소리쳤다. "여기 적혀 있군! 한번 읽어 볼까? '앤더맨 섬의 토인은 지구에서 가장 키가 작은 인종으로서 평균 신장이 120센티미터 이하이다. 이보다 더 작은 어른도 많다. 성질은 잔인하고 여간해서는 외부인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게 중요한 대목이야. 그리고 또 이렇게 적혀 있어."
'용모가 흉하며 손발은 아주 작다. 그들의 성격은 매우 난폭하다. 영국은 오랜 기간 그들을 평화스러운 백성으로 적응시키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들은 난파선을 습격해서 생존자를 구타하거나 독 화살로 쏘아 죽이고, 그 고기를 먹는다.' 어때, 와트슨? 의족을 한 사나이가 어떤 인물을 수하로 두고 있는지 이걸로 짐작이 가겠지?"
나는 소름이 끼쳤다. 우리는 지금 식인종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날 저녁 식사는 매우 즐거웠다. 범인이 있는 곳을 짐작한 홈즈도 마음이 들뜬 것 같았다.
"와트슨, 자네 서랍에 권총 있나?"
"있어. 옛날 군대에서 쓰던 것을 넣어 두었지."
"그럼 그걸 가지고 가세. 권총이 있으면 만약의 경우에도 마음이 든든하니 말일세. 자, 문 밖에 마차가 온 모양이야. 6시 반에 오라고 했으니 어서 떠나세."
우리는 웨스트민스터를 향해 마차를 몰았다. 선창가에 도착한 것은 7시가 좀 지났을 무렵이었다. 경찰선은 존스 경감이 지시한 대로 선창에 대기하고 있었다. 홈즈는 배를 둘러보며 말했다.
"경감님, 이 증기선에 경찰 표시가 있습니까?"
"배 왼편에 켜진 푸른 불이 경찰선이란 표시입니다."
"그럼 그걸 떼어 주십시오."
푸른 불은 곧 떼어졌다. 우리가 올라타자 증기선은 곧 강변을 떠났다. 우리 세 사람은 증기선 뒤쪽에 앉아 있었고, 선실에는 운전사 한 사람과 기관사, 그리고 증기선 앞에는 아주 건장하게 생긴, 든든해 보이는 두 사나이가 떡 버티고 앉았다. 모두 7명이었다.
"어느 쪽으로 갈까요?"
존스 경감이 홈즈에게 물었다.
"제이콥슨 조선소 쪽으로 가도록 지시해 주십시오."
증기선은 엄청난 속도로 달렸다. 어찌나 빠른지 짐을 잔뜩 실은 똑딱선들이 제자리에 그대로 멈추어 선 것처럼 보였다. 홈즈는 만족스러운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런 속도라면 아무리 빠른 배라도 쫓아갈 수 있겠군요. 고맙습니다, 존스 경감님."
"네, 이 배는 우리 경찰도 자랑으로 여기고 있죠. 아마 이 강에서는 당해낼 배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쫓아가는 오로라 호도 빠르기로 소문난 배입니다. 얕잡아 보아서는 곤란해질 수도 있습니다."
나는 홈즈가 어떻게 오로라호의 행방을 알아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기회를 보아 물어 보았다.
"와트슨! 나도 겨우 그걸 알아 냈다네. 내 부탁을 받은 소년들이 강변을 샅샅이 뒤져도 허탕만 쳤지. 그래서 오로라 호는 절대 강가에 배를 대거나, 집에 돌아오지는 않았을 거라고 짐작했지. 범인 스몰은 폰지셀 별장을 감시하기 위해 런던에 계속 머물렀을 정도니, 보물을 손에 넣었다고 해서 금방 런던을 빠져 나가지는 않았을 것 같아. 천천히 준비를 갖춘 다음에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네."
"스몰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런던을 빠져 나갈 준비를 해 두지는 않았을까?"
"아니야. 보물이 감추어진 곳을 갑자기 알았기 때문에 미리 도망칠 준비까지 해 두긴 어려워. 게다가 스몰은 아주 안전한 장소에 숨어 있기 때문에, 부랴부랴 떠날 필요는 없을 거야."
"그건 그래. 남의 눈에 띄기 쉬운 난장이 토인을 데리고 있으면, 보통 안전한 곳이 아니면 안 되겠지."
"맞았어. 그 난장이 때문에도 스몰은 금방 도망치지는 못할 거야. 큰 사건을 저질러 떠들썩한 판에 이상하게 생긴 놈을 데리고 움직인다는 건 위험하니까. 스몰이 난장이를 데리고 다니는 건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밤 시간이야. 그런데 스미스를 찾아간 시간은 새벽 3시. 3시라면 날이 새기 시작하고 사람들도 일어날 때니까, 두 사람은 멀리 가진 못했을 거야. 스몰은 스미스 부자에게 돈을 많이 주어 입을 막았을 걸세. 증기선은 마지막으로 달아날 때 쓰려고 깊이 감추어 두고, 자기는 어느 집에 숨어서 가만히 일을 살펴보고 있겠지. 경찰이 다른 사람에게 혐의를 두고 있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그들은 오늘 밤쯤 런던을 빠져 나가려고 할 거야."
"그럼 오로라 호는 지금 어디에 있나? 설마 그 놈들이 있는 집안에 숨겨 놓지는 않았겠지?"
"그야 물론이지. 하지만 숨어 있는 곳에서 그리 멀리 있지는 않을 거야. 내가 스몰의 입장이라면 증기선을 조선소에 넣어 모양을 조금 바꾸어 달라고 부탁했을 거야. 강변에 매어 두면 곧 발견될 테니까. 조선소가 제일 안전한 곳이야."
"정말 그렇군. 어째서 나는 자네처럼 조선소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나는 늙은 선원으로 변장하고 템즈 강 유역의 조선소를 모두 뒤졌어. 열 다섯 번이나 허탕을 치고, 열 여섯 번째야 겨우 오로라 호가 제이콥슨 조선소에 스크루 고장을 고치려고 들어와 있는 것을 알아 냈네. 마침 선주 스미스가 거나하게 취해서 조선소 직공들에게 말하더군. '오늘 밤 8시 정각에 떠나니, 그 때까진 모두 수리해 줘야 해'라고 말이야. 조선소 직공들은 '염려 마세요. 고장 난 게 아니니까.'하고 대답하더군."
"나는 스미스를 뒤따라 갔어. 그는 어느 술집으로 들어가더군. 그래서 다시 조선소로 돌아와 베이커 거리 특공대 한 명을 감시원으로 남겨 놓고 돌아왔네. 증기선이 떠나면 소년이 강변에서 손수건을 흔들어 신호하기로 돼 있어. 그러니 우리는 그 때까지 조선소 둘레를 왔다 갔다 하는 거야. 이제 보물을 찾고 범인을 체포하는 건 시간 문제야."
이 때 홈즈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존스 경감이 말했다. "정말 치밀한 계획입니다. 그렇지만 나 같으면 곧장 조선소로 들어가 증기선 안에 숨어 있다가 범인이 올라오면 모조리 잡아버릴 겁니다."
"그건 안 됩니다. 스몰이란 녀석은 워낙 빈틈이 없어, 배에 오르기 전에 반드시 누굴 시켜서 자세히 살펴 모게 할 겁니다. 조금이라도 수상하면 절대 배를 타지 않겠지요."
"선주인 스미스를 달래서 스몰이 숨은 곳을 알아보는 게 어떨까요?"
"스미스도 아마 스몰이 숨은 곳은 모를 겁니다. 스미스는 술을 실컷 얻어 먹고 돈이나 두둑히 받으면 그것으로 족하지, 범인에 대해서는 도통 관심이 없을 테니까요. 그들은 일이 있을 때만 스미스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그래서 지금 하는 방법이 제일 좋을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증기선은 런던 중심지를 빠져 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세인트폴 사원 지붕 꼭대기의 십자가가 저녁놀을 받아 반짝거렸다.
"자, 드디어 제이콥슨 조선소가 보이는군."
홈즈는 망원경을 꺼내 잠시 조선소 쪽 강변을 바라보았다. "감시원 소년이 보이긴 하는데, 손수건은 아직 흔들지 않는군."
"그럼 강 아래로 내려가 배를 매어 두고 기다립시다."
존스 경감의 말에 홈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글쎄요. 오로라호가 강물을 타고 내려갈 가능성이 높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단언하기는 곤란합니다. 여기서는 조선소 입구가 잘 보이지만 저쪽에선 이쪽이 보일 리 없으니 그대로 여기에 있기로 하죠. 보세요. 직공들이 가스등을 들고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아, 저걸 봐! 손수건을 흔들고 있어!"
"드디어 손수건을 흔드는군!" 나도 따라서 외쳤다. 홈즈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드디어 오로라 호가 나온다! 무척 조심스럽게 나오는군. 기관사, 전속력으로 저 배를 쫓아가세!"
강으로 나선 오로라 호는 쏜살같이 달려 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정말 뜻밖의 속력이었다. 존스 경감은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오로라 호를 바라보았다. "대단한 속력이야. 우리 증기선이 쫓아갈 수 있을까?"
"무슨 일이 있어도 붙잡아야 합니다. 자, 석탄을 집어 넣어요! 증기선이 타 버릴 만큼 집어 넣어!" 홈즈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경찰 증기선은 너무 느린 것 같았다. 석탄 아궁이가 무쇠 심장처럼 울부짖기 시작하고 엔진은 소나기 같은 소리를 냈다. 강물이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물결이 옆으로 높게 퍼져 나갔다. 이윽고 우리 증기선의 노란 불빛이 오로라 호를 비추기 시작했다. 증기선이 무섭게 달리자, 옆을 지나가던 작은 배들은 위험하다고 아우성이었다.
"석탄을 더 집어 넣어, 석탄!" 홈즈는 기관실을 들여다보며 재촉했다. 홈즈의 얼굴에 석탄 불이 비쳐 붉게 타는 것 같았다.
"조금 가까워진 것 같은데..." 존스 경감이 앞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조금만 더 속력을 냅시다!"
이때였다. 3척의 화물선이 우리가 탄 증기선 앞을 가로질렀다. 그대로 곧장 달리다가는 꼼짝 없이 부딪칠 상황이었다. 우리는 뱃머리를 왼편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앞을 가로막은 화물선을 돌아 겨우 방향을 잡자, 오로라 호는 벌써 200미터나 앞서가고 있었다. 그러나 배의 모습은 똑똑히 보였다. 석탄을 가득 넣은 그 배의 아궁이도 터질 듯 타고 있었다. 존스 경감이 탐조등을 비추자 오로라 호에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배 뒤에는 무릎에 무언가 검은 것을 올려놓고 들여다보는 사나이가 있고, 바로 그 옆에 개처럼 웅크린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선주 스미스는 아들 짐에게 키를 잡게 하고, 자기는 시뻘겋게 단 아궁이에 연방 석탄을 퍼 넣고 있었다. 오로라 호도 처음에는 우리가 뒤따르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뒤에서 계속 탐조등을 자기들에게 비추는 것을 보고는 우리의 추격을 눈치챈 것 같았다. 오로라 호와 우리 배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이때까지 여러 곳에서 사냥을 했지만, 이날 템즈 강의 사람 사냥처럼 손에 땀을 쥔 적은 없었다. 정말 조마조마한 사냥이었다.
경찰 증기선은 오로라 호와 거리를 조금씩 좁혀 갔다. 오로라 호의 엔진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배 뒤쪽에 웅크리고 있던 사나이는 두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가끔 얼굴을 들어 우리 배와의 거리를 눈으로 재고 있었다. 두 증기선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이윽고 존스 경감이 큰 소리로 외쳤다.
"거기 서라!"
두 증기선 사이 거리는 불과 4,5 미터, 존스 경감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오로라 호 뒤쪽에 앉았던 사나이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이 쪽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큰 소리로 외쳤다. 힘은 세어 보였으나 한쪽 다리는 분명히 의족이었다. 그가 소리치자, 그의 발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검은 그림자가 벌떡 일어났다. 개처럼 보였으나, 그것은 개가 아니라 키가 작달막한 사람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작은 사람도 있단 말인가! 키에 비해 무척 큰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더부룩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홈즈는 어느새 권총을 꺼내 들었다. 나도 권총을 꺼냈다. 담요를 뒤집어쓴 토인은 얼굴만 내밀고 있었으나 그 얼굴만 보고도 몸에 소름이 끼치면서 머리카락이 쭈삣했다. 눈을 번뜩이며 두터운 입술 사이로 붉은 잇몸을 드러낸 꼴이 마치 금방 달려드는 맹수 같았다.
"저 녀석이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망설이지 말고 즉각 방아쇠를 당기게."
홈즈가 침착하게 나에게 속삭였다. 이 때 우리 증기선은 오로라 호와 불과 2,3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배 뒤에 있는 두 사나이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의족을 한 스몰은 두 다리를 버티고 연방 고함을 질렀고, 난장이는 괴상한 소리로 울부짖었다. 난장이의 모습이 똑똑히 보인 것은 우리에게 무척 다행이었다. 난장이가 담요 속에서 무언가 꺼내는 모습이 똑똑이 보였던 것이다. 다음 순간 우리의 권총은 일제히 불을 뿜었다. 그러자 그 난장이 토인은 두 손을 축 늘어뜨리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물 속으로 빠졌다. 물 속으로 빠지는 순간 토인의 눈은 무섭게 빛났다.
이 끔찍한 광경을 본 의족의 사나이는 갑자기 키에 달려들어 대담하게 배를 왼쪽으로 돌렸다. 오로라 호의 고물을 경찰 증기선과 충돌하게 하려는 시도였다. 경찰선이 아슬아슬하게 충돌을 피하자 오로라 호는 템즈 강 남쪽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경찰선도 곧 방향을 돌렸으나, 오로라 호는 벌써 강변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 곳은 수렁이 있는 곳으로, 한번 빠지면 좀처럼 빠져 나올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오로라호가 '쿵'하고 무거운 소리를 내며 수렁 지대에 빠지고 말았다.
의족 사나이는 배에서 뛰어 내렸다. 수렁에 뛰어 내리자, 나무 다리는 깊숙이 빠져들었다. 그는 빠져 나오려고 허우적댔지만, 그럴수록 다리는 더 깊이 빠지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이 증기선을 대어 놓고 그 곳에 다가가자 스몰은 수렁 속에서 꼼짝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큰 고기라도 낚아 올리듯, 밧줄을 던져 그를 건져 올렸다.
스미스 부자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배 위에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은 명령에 따라 순순히 경찰 증기선으로 올라왔다. 그 증기선에는 무쇠 상자가 실려 있었다. 이것이 솔트 씨 집에 있었던 보물 상자임에 틀림없다. 열쇠는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 상자를 조심스럽게 경찰 증기선으로 옮겼다.
배는 다시 강을 올라가면서 탐조등으로 이곳저곳을 살폈지만 토인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 이상한 난장이 토인은 템즈 강 수렁 밑에 영원히 묻혀 버린 것 같았다.
"이걸 보게, 아주 아슬아슬했어!"
홈즈가 가리키는 곳에는, 뜻밖에도 독 화살이 꽂혀 있었다. 우리가 서 있던 바로 옆이었다. 우리가 권총을 쏘았던 순간, 토인도 화살을 쏜 것이었다. 홈즈는 태연하게 웃었으나, 나는 목숨이 위험했던 그 순간을 생각하며 몸에 소름이 끼쳤다.
의족의 사나이 스몰을 무쇠 상자 앞에 꿇어앉혔다. 그의 까만 얼굴에는 눈만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주름살 투성이의 얼굴... 온갖 고생을 겪은 것이 분명하다. 수염이 무성하게 자란 턱은 의지가 굳센 성격을 잘 나타내고, 희끗희끗한 머리는 나이가 쉰을 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커다란 머리와 네모진 턱으로 인해 화를 낼 때는 악마처럼 무섭게 보였지만, 조용히 있을 때는 그리 나쁜 인상이 아니었다. 그는 수갑을 채운 손을 무릎에 얹고 머리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모든 감정이 사라진 듯한 얼굴 표정이었다.
"조너던 스몰, 결국 이렇게 되다니, 무척 억울하겠군."
홈즈가 담배를 피워 물며 말을 건네자, 스몰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소. 그렇지만 내 목이 달아나지 않을 것은 확신하고 있소. 하나님께 맹세할 수 있어. 바솔뮤 씨를 죽인 건 내가 아니야. 난쟁이 동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화살을 쏘았소. 나중에 그걸 알고 내 혈육이 죽은 것처럼 슬퍼했어. 그래서 그 악마 같은 녀석을 마구 때려 주었지. 일단 저질러진 일이라, 아무리 때려 줘도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리는 없지만 말이오."
"자, 담배나 한 대 피우게. 술이라도 한 잔 줄까? 물에 빠졌으니 몹시 추울 거야. 자네가 폰지셀 별장에 몰래 들어가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사이에, 그 난쟁이가 바솔뮤 씨를 죽였겠지?"
"선생께서는 마치 그 자리에서 있었던 것처럼 말씀하시는군. 그렇소. 그 때 방에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바솔뮤 씨가 저녁 식사를 하러 내려가는 시간이었소. 바솔뮤 씨 아버지에게는 원한이 있지만, 그 아들에게는 아무 원한도 없었소. 물론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자네는 존스 경감에게 붙잡혔지만, 우선 자네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가겠네. 거기서 자네가 한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보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자네에게 불리하게 하진 않겠어. 토인이 쏜 화살 독은 워낙 효과가 빨라, 자네가 밧줄을 타고 방으로 내려가기 전에 이미 바솔뮤 씨의 온몸에 퍼졌다고 내가 증명해 주겠어."
"말씀하신 그대로요. 내려가 보니 벌써 그 사람은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고 있더군."
이 때 존스 경감이 끼어들었다. "흥, 아주 친해지셨구만. 범인 하나가 죽은 건 아까운 일이지만 할 수 없지요. 아무튼 오늘 밤 홈즈 씨 솜씨는 아주 대단했습니다."
"저도 오로라 호가 그렇게 빠를 줄은 몰랐습니다."
"스미스가 그러더군. 템즈 강에서는 어느 배에게도 지지 않을 증기선이라고. 조수가 한 사람만 더 있었다면 붙잡히지 않았을 거라고 얘기하더군. 그렇지만 그는 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어요."
스몰은 존스 경감의 이야기를 듣고 내뱉듯 말했다. "스미스는 아무 것도 모르오. 속력이 빠른 증기선을 갖고 있어서 돈을 많이 주고 빌렸을 뿐이오. 그레브센드까지 가서 브라질 행 기선을 타면 돈을 더 주기로 약속했지."
"스미스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면 처벌도 가벼울 거야."
갑자기 엄한 표정으로 스몰에게 대답한 존스 경감은 홈즈와 나에게 말했다. "경찰선은 일단 복스홀 다리에 댈 테니까, 와트슨 씨는 그 무쇠 궤짝을 들고 배에서 내려 주십시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규칙을 어기고 사건 증거물을 내드리는 것이니 조심해서 취급하셔야 합니다. 걱정이 되어 그러니 경관을 한 사람 딸려 보내겠습니다. 물론 마차로 가시겠지요?"
"네, 마차로 갈 겁니다."
"그런데 궤짝을 열 열쇠가 없어서 곤란하군. 열쇠가 있다면 우선 안을 조사해볼 텐데. 스몰, 열쇠는 어디 있지?"
"강물에 던져버렸소." 스몰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고약한 녀석이군! 그럼 와트슨 씨, 궤짝 자물쇠를 부숴야 하겠군요. 모스턴 양에게 일단 보이고 난 뒤 곧 베이커 거리로 가져 오십시오."
나는 경관 한 사람과 함께 복스홀에서 증기선을 내린 뒤, 마차를 불러 타고 포레스터 부인 집으로 달렸다. 문간에 나온 하녀는 밤이 늦은 탓인지 의아하다는 얼굴로 "부인은 지금 안 계십니다"하고 말했다. 그러나 모스턴 양은 집에 있었다. 나는 경관을 마차에 남겨둔 채 무거운 궤짝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모스턴 양은 나를 보자 무척 반가워했다.
"마차 소리를 듣고 부인이 오신 줄 알았는데 당신이군요.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요?"
"기쁜 소식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나는 테이블 위에 궤짝을 내려 놓고 기운차게 말했다.
"보세요, 이것이 보물 상자입니다." 모스턴 양은 궤짝을 흘끔 쳐다 봤지만 그리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대단히 무거웠지요?"
"물론이죠. 아그라의 막대한 보물이 이 속에 들어 있으니까요. 그 절반은 당신 것입니다."
"이건 모두 당신 덕분이에요."
"아닙니다. 제 덕분이 아니지요. 셜록 홈즈가 고생 끝에 간신히 찾아낸 것입니다. 하마터면 마지막 순간에 놓칠 뻔 했습니다."
"그 이야기나 좀 더 자세히 해 주세요."
나는 모스턴 양을 찾아온 뒤에 생긴 일을 대강 말했다. 홈즈가 드디어 오로라 호의 행방을 찾아낸 일, 오늘 밤 강 위에서 벌어진 아슬아슬한 추격담도 말해 주었다. 모스턴 양은 가슴을 졸이며 내 이야기를 들었다. 독 화살이 내 곁에 꽂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기절이라도 할 듯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는 이야기를 끝내고 궤짝을 열려고 했다.
"이제 궤짝을 열어 봅시다. 열어 보기만 하고 곧 다시 경찰에 맡겨야 합니다."
"퍽 아름다게 꾸민 궤짝이로군요. 이 궤짝만 해도 굉장히 비싸겠어요. 열쇠는 갖고 계신가요?"
"열쇠는 스몰이 강에 던져 버렸답니다. 부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부젓가락을 자물쇠 구멍에 넣고 비틀었다. 한참 그렇게 하자, 마침내 자물쇠는 '철컥' 소리를 내며 뜻밖에 쉽게 열렸다. 우리는 떨리는 손으로 궤짝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우리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궤짝 속은 텅 비어 있었다. 텅 비어 있는데도 그렇게 무거웠던 것은 궤짝이 무쇠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어머, 보물이 없네요?"
모스턴 양은 좀 놀란 듯 조용히 말했으나, 그다지 실망한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오히려 뛸 듯이 기뻤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러자 모스턴 양은 이상스럽다는 듯 나를 보며 물었다. "이상하네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시죠?"
"모스턴 양, 전 당신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곧 청혼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당신이 갑자기 엄청난 보물의 주인이 된다면, 누구나 나를 보고 그 보물이 탐나서 청혼했다고 할 것 아닙니까? 보물 욕심에 사랑하는 체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차라리 보물이 없어진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모스턴 양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렇다면 저도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겠어요." 모스턴 양이 나의 사랑을 받아들인 것이다.
내가 텅 빈 무쇠 궤짝을 베이커 거리로 가지고 가자, 존스 경감은 입을 딱 벌렸다. 그러나 홈즈는 그런 일쯤 있을 수 있다는 듯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수수께끼만 풀면 그만이지, 보물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한편 스몰은 무엇이 우스운지 연방 히히덕거렸다. 존스 경감은 눈치를 채고 "스몰, 네가 상자를 비웠지?"하고 그에게 덤벼들었다.
"그렇소. 당신들이 손댈 수 없는 곳에 감추었지. 그 보물은 내 것이오. 앤더맨 섬의 감옥에 있는 세 사람과 나 외에는 그 보물에 절대 손댈 수 없지. 나는 감옥의 세 사람을 대표해 보물을 찾느라 갖은 고생을 했으니, 보물을 어떻게 처리하든 그건 내 마음 아니겠소?"
"그래, 보물을 어디에 감추었지?"
"템즈 강 밑에 있소. 지금쯤 보물은 열쇠와 난장이 동가와 함께 어디엔가 잠겨 있겠지."
"거짓말 마! 보물을 템즈 강에 버릴 거라면 궤짝을 송두리째 버리는 것이 훨씬 쉬웠을 것 아닌가?"
"그건 그렇지. 그러나 내던지기 쉬운 만큼, 당신들이 다시 건져 내기도 쉽겠지. 내가 한 일을 눈치 채고 쫓아다닐 만큼 영리한 사람들이니, 당신들이 물 속에서 끌어 내기도 잘 할거요. 그래서 그냥 강물에 뿌려 버린 거요. 그 땐 눈물이 날 정도로 아까웠지만, 누구도 손에 넣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이젠 오히려 마음이 가볍구먼."
"바보 녀석!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판결도 훨씬 가벼워질 텐데."
그 말을 듣고 스몰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림 없는 소리! 내가 어떻게 보물을 손에 넣었는지 얘기할 테니 들어 보시오. 온통 열병이 들끓는, 그 진흙 투성이 땅에서 난 20년이란 세월을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며 아그라의 보물을 손에 넣었소. 그런데, 보물을 훔친 놈에게서 내 물건을 되찾아 아무에게도 넘겨주지 않는 게 왜 미련한 짓이오? 말조심해요!"
스몰은 몹시 화가 난 듯, 얼굴이 빨개지도록 화를 냈다. 눈에 번쩍번쩍 불꽃이 튀고, 수갑이 철컥거리며 울렸다. 이런 사나이에게 협박을 받은 솔트 소령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이때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던 홈즈가 조용히 말했다.
"이봐, 스몰! 우리는 당신이 인도에서 얼마나 고생을 해서 보물을 얻었는지 잘 알지 못해. 그러니 당신에게 직접 듣지 않고는 누가 옳고 그른지 알 수 없어. 어디, 우리가 알 수 있게 한 번 얘기해 보라구."
"선생은 사리가 참 밝은 것 같소. 내가 붙잡힌 것도 선생 때문이지만, 선생을 원망하진 않소. 모든 것은 운수일 뿐이니까. 내 이야기가 듣고 싶다면 얘기해 보리다. 비록 생긴 건 이래도 거짓말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이오. 그럼 어디 얘기를 시작해볼까."
그리고 스몰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우스터셔 주의 상당히 이름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소.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거친 편이라 18살 때부터 군인이 되고 싶었지. 그래서 마침 인도로 갈 예정인 제 3 연대에 지원해 들어갔소. 그러나 난 뜻하지 않은 불행이 닥쳐 와 곧 군인 생활을 단념해야 했소...
인도에 가서 제법 총 쏘기에 익숙해질 무렵에 나는 수영을 하러 갠지즈 강으로 나갔어. 갠지즈 강은 악어가 많기로 유명하지. 강 복판으로 나갔을 때 나는 그만 오른쪽 무릎을 악어에게 물리고 말았소. 함께 갔던 홀더가 수영 선수여서 나를 재빨리 강변으로 끌어 내 간신히 목숨만은 구했지. 하지만 다섯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지고 의족을 딛고 병원을 나왔을 때, 나는 이미 군인이 아니었어. 20살도 되기 전에 나는 이렇게 병신이 되고 말았어.
그런데 농장을 경영하던 화이트라는 영국 사람이 나를 불쌍히 여겨 농장 감독으로 써 주었소. 농장 감독은 말을 타고 넓은 밭을 둘러보고, 밭에서 일하는 인도 사람을 감독하는 일이었소. 다리가 불구여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었지. 나는 기꺼이 일생을 그 일로 보낼 작정이었소. 주인 화이트 씨도 마음이 좋은 분이어서 나를 잘 돌봐 주었지. 그렇지만 좋은 일만 계속되지는 않는 모양이야. 가까운 지방에서 인도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켰으니 말이오. 백인에게 고용됐던 인도 사람들의 불만이 폭발해 인도인 병정들과 싸움이 벌어졌지.
당시 내가 있던 곳은 마루투였소. 토인들은 밤마다 백인들 집에 불을 질렀지. 불길이 하늘을 찌르고, 백인들은 가족을 거느리고 영국 군대가 주둔해있는 아그라로 피난 가기 위해 우리 밭 근처를 지나갔소. 화이트 씨는 폭동이 곧 멈출 것이라며, 도망칠 준비조차 하지 않았소. 그래서 나는 물론, 화이트 씨 집안 일을 거들던 도슨 씨 부부도 아그라로 도망치지 않고 있었지.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밭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는데, 시냇물에 칼을 맞은 백인 여자의 시체가 떠있었소. 자세히 보니 도슨의 아내더군. 깜짝 놀라 조금 더 갔더니, 거기에는 도오손이 손에 권총을 쥔 채 쓰러져 죽어 있었소. 그 근처엔 인도인 병사 네 명이 쓰러져 있었소. 깜짝 놀라 집 쪽을 바라보니, 화이트 씨 집은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있었소.
주위에는 시커먼 인도인 병사들이 수백 명 모여 미친 듯 날뛰며 춤을 추고 있더군. 말을 타고 있는 나를 보더니, 와아 함성을 지르며 나를 향해 몰려오지 않겠소?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지. 그날 밤 늦게야 겨우 아그라 마을에 도착했어. 하지만 아그라 마을도 그리 안전하지 않더군. 폭동은 인도 전체로 퍼졌고, 가는 곳마다 벌집을 쑤셔 놓은 듯 폭도들이 날뛰는 바람에 영국 사람들은 그저 떨고만 있었소. 인도인 병정들의 총이나 나팔, 옷까지 모두 영국에서 받은 것인데, 그들은 그걸로 영국 사람들을 공격하는 거야. 아그라로 피난해 온 사람들이 모여 의용군을 만들자 나도 부자유스러운 몸이었지만 거기에 한몫 끼었소.
아그라에는 낡은 성 하나가 있었지. 일부을 요새처럼 고쳐 수비대가 사용했지만, 나머지 부분은 드나드는 사람도 없이 그냥 텅 비어 있었소. 그 성은 캄캄하고 구불구불한 복도와 길이 여러 갈래로 뻗어 있어서, 한번 길을 잃어버리면 영영 나올 수 없게 되는 거요. 성 바로 앞에 갠지즈 강이 흐르고 있어서 방어선이 되었지만, 오른쪽과 왼쪽, 그리고 뒤에는 입구가 몇 개 있어서 그 곳을 지켜야 했지. 나는 시크 인 병사 두 사람과 함께 서남쪽에 따로 떨어져 있는 성문의 수비를 맡게 됐어.
우리는 매일 밤 몇 시간씩 그곳을 지켜야 했지. 비상시에는 총소리로 본부에 알려 주력 부대가 지원해주기로 했지만, 방금 말한 것처럼 성 안이 무척 넓고 길이 구불구불해서 겁이 나더군. 내 부하는 두 사람 다 키가 큰 인도인 병사로, 한 사람은 이름이 마호멧 신, 또 한 사람은 압둘라 칸이라고 했소. 처음 이틀은 무사했지. 그런데 사흘째 되는 날,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밤이었소. 새벽 2시쯤 본부에서 순시를 다녀간 다음 내가 담배를 피우려고 총을 놓는 순간, 부하 두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양쪽에서 내게 달려드는 거야. 한 사람은 총으로 나를 겨누고, 또 한 사람은 칼을 내 목에 갖다 대더군.
"이게 무슨 짓이야, 자네들 나를 배신할 셈인가?"
내가 고함을 치자, 그 놈들은 뜻밖에도 한 발짝 물러나며 조용히 말했소.
"떠들지 마시오. 우린 배신자가 아니오. 우리 요구만 들어 주면 되는 거요."
"뭐? 총과 칼을 들이대고 무조건 요구를 들어달라? 이건 너무하지 않나?"
그러자 압둘라 칸이 이렇게 말했소.
"우리의 동지가 되든지, 아니면 목숨을 버리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시오!"
"너희의 동지? 만약 이 성을 적에게 넘기는 얘기라면, 나는 대영제국 사람으로서 죽어도 너희 동지가 될 수 없다. 자, 그 칼로 어서 나를 찔러라!" 나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대답했소.
"아니오. 성을 적에게 내주는 따위 일이 아니오. 당신도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해 인도에 온 것 아니오? 우리와 함께 돈을 벌자는 것이오. 우리 요구를 들어주면, 보물의 4분의 1을 당신에게 주겠소."
"뭐, 보물? 나라고 해서 부자가 되는 게 싫을 리는 없지."
"그럼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밤 일을 입 밖에 내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소?"
"약속하지. 아까 말한 것처럼 이 성을 적에게 내주는 일이 아니라면."
"좋소. 그럼 이제 보물을 꺼내어 당신에게 4분의 1을 나눠주겠소."
"그런데 여긴 세 사람 뿐이지 않나?"
"도스트 아크발이라는 사람이 또 있소."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나?"
"곧 여기에 또 한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
"또 한 사람이라구? 그럼 다섯 사람이 되는데..."
"자세한 얘기를 해 주겠소. 북쪽 지방에 아주 돈 많은 왕이 있소. 이번에 폭동이 일어나자 그 왕은 영국과 인도인 반군 양쪽의 비위를 맞추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소. 어느 쪽이 이기든 자기 재산 절반은 남의 손에 넘기지 않고 자기 것으로 남기려는 속셈이었지. 그래서 보물의 반은 왕궁 지하실에 넣고, 나머지 절반은 무쇠 궤짝에 넣어 장사꾼으로 변장한 부하를 시켜 이 아그라 성 깊숙이 감추었단 말이오. 인도 반군이 이기면 왕궁 지하실의 보물이 남고, 영국이 이기면 이 아그라 성의 보물이 남는다는 계산이지."
"그럴듯한 생각이군."
"재산 정리를 마친 왕은 정세를 살피다가 인도 반군이 우세하자, 그 쪽에 붙어 버렸소. 그러니 이 성에 감춘 보물은 포기해 버린 셈이지. 그런데 왕의 명령을 받아 이곳으로 보물을 감췄던 아크메는 내 친구 도스트 아크발에게 이 비밀을 말하고 둘이 함께 이 곳으로 보물을 찾으러 오기로 했소. 아크메만 죽여 버리면 보물은 나머지 네 사람의 것이 되는 것이오."
"하지만, 아크메를 죽이지 않고 보물을 다섯으로 나누는 것이 어떨까?"
"그건 절대 안되지. 그 놈은 보물을 독차지할 속셈이거든. 도저히 우리들과 의견이 맞지 않소. 그러니 자, 우리들 편에 끼지 않겠소?"
"좋아, 나도 한몫 끼지!"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소. 이렇게 약속하고 나서 내가 망을 보는데,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초롱불이 보이기 시작했소.
"저기 오고 있다!"
내가 압둘라 칸에게 속삭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소. "당신은 저 놈들을 불러 세우시오. 그리고 당신이 망을 보는 사이에 우리들이 감쪽같이 처치해 버리는 거요."
초롱불은 점점 가까워졌소. 두 사람이 올라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누구냐!" 하고 내가 고함을 쳤소. 그러자 상대방이 대답했소. "우리들일세."
나는 들고 있던 초롱불로 상대방을 비추었소. 앞에 선 사람은 검은 수염을 가슴까지 기른 뚱뚱한 시크 사람인데, 마치 씨름 선수처럼 늠름했소. 이 사람이 바로 아크메였소. 손에 짐을 들고 있더군. 그는 두려운 듯 손을 부들부들 떨고, 쥐새끼처럼 눈을 번들거리고 있었소. 이 사람이 이제 죽임을 당할 왕의 부하였던 거야. 순간 나는 불쌍한 마음이 들었소. 그는 내가 백인이라는 것을 알자 반가운 듯 나에게 다가왔소.
"살려 주십시오. 저는 불쌍한 장사꾼 아크메입니다. 난리를 피해 이 아그라로 온 것 뿐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모두 인도인 병사들에게 죽고, 남은 것은 이 짐 뿐입니다."
"그 짐은 무엇인가?"
"무쇠 궤짝입니다. 남들에게는 하찮을지 몰라도 제게는 소중하기 짝이 없는 물건입니다. 살려 주신다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이 사나이와 이야기를 하면서 점점 불쌍한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이야기를 끊어 버리고 "이 사나이를 본부로 데리고 가라!" 하고 부하들에게 명령했소. 부하 두 사람은 그 사람 양쪽에 바짝 붙고, 사나이와 같이 온 사람은 그 뒤를 따라 성문으로 들어갔소. 발 소리가 멀어지더니, 이내 소란스러워지면서 서로 싸우는 소리가 났소. 그러더니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겠소?
초롱불을 비춰 보니 맨 앞에서 피투성이가 된 아크메가 달려오는데, 내 부하들이 칼을 휘두르며 그 뒤를 쫓고 있었소. 나는 그 뚱뚱보가 그렇게 빨리 뛸 줄은 몰랐소. 그는 내 부하들을 점점 멀리 떨어뜨리며, 내 옆을 바람처럼 지나가더군. 순간 나는 재빨리 총을 들어 그 사나이의 뒤통수를 갈겼지. 그 사나이는 쓰러지더니 금방 다시 일어서려고 하더군. 그러나 뒤따라오던 내 부하가 칼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소. 사나이는 찍 소리도 못하고 숨을 거두었소. 이렇게 해서 보물 상자는 네 사람의 차지가 되었던 거요.
여기까지 이야기한 스몰은 옆에 있던 위스키 잔을 들어 마른 목을 축였다. 그의 손에는 수갑이 채워진 채였다. 나는 사람 죽인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가 미워 견딜 수 없었다. 홈즈나 존스 경감도 같은 기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스몰은 그런 생각을 알아챈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여러분은 우리를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하겠지요? 물론 우린 나쁜 놈들이오. 하지만 우리들은 그때 전쟁중이었소. 정말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판이었지. 수상한 녀석을 성 안에 들여보내도 우리 목숨은 없어지고 또 그 녀석이 성에서 도망쳐도 우리는 상관에게 붙잡혀 총살을 당하는 판이었어."
"어서 이야기를 계속하게." 홈즈가 재촉했다.
"그러지요." 스몰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마호멧 신을 성문지기로 남겨두고, 압둘라 칸과 도스트 아크발과 함께 아크메의 시체를 성 안으로 운반했소. 복도를 지나 크고 넓은 방에 이르면, 마룻바닥이 무너져 마치 지하 무덤처럼 되어 있었소. 아크메를 그곳에 넣은 뒤 자갈로 덮어 버렸소. 그런 다음 보물 상자가 있던 곳으로 와서 상자를 열어 보았소. 상자 안에는 눈부신 보석이 가득 들어 있더군.
우리는 그 자리에서 보석의 목록을 만들었소. 1등품 다이아몬드가 143개, 아름다운 에머랄드 97개, 루비 117개, 사파이어가 219개, 그 밖에 터어키 석도 있었고, 진주도 300개 가까이 되었으며, 그 중 12개는 황금 관에 장식되어 있었소. 이번에 궤짝을 되찾아 조사해 보니 이 12개의 진주가 없어졌더군. 보석 조사가 끝나자 성문을 지키고 있는 마호멧 신에게 가서 그것을 보여 주고, 우리 네 사람은 이 보석의 비밀을 굳게 지키기로 약속했소.
궤짝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성 안에 감추어 두기로 했소. 아크메의 시체를 파묻은 근처의 벽을 파서 궤짝을 집어 넣고, 나중에 잘 알 수 있도록 지도를 네 장 만들어 각자 한 장씩 나눠 가졌지. 궤짝은 네 사람의 것이니 누구도 독차지할 수 없도록 네 사람이 똑같이 서명했던 것이오. 한편, 처음에 우세했던 인도 폭도들은 영국군이 지원군을 얻어 다시 세력을 회복하는 바람에, 끝내 항복하고 말았지. 우리들은 보물을 꺼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기뻐했지만, 막상 그 때가 되자 아크메를 죽인 사실이 그만 폭로되어 네 사람은 붙잡히고 말았소.
아크메를 죽인 사실이 알려진 데는 이유가 있었지. 아크메에게 보물을 맡긴 왕은 그를 믿을 수 없어서 또 한 명의 부하에게 아크메를 감시하게 했던 것이오. 그런데 아크메가 아그라 성에 들어간 다음 다시 나오지 않자, 뒤따르던 감시원이 이 사실을 사령관에게 일러바친 것이오. 그래서 곧 성 안을 뒤져 아크메의 시체를 찾아 냈고, 그것이 우리의 소행이라는 것도 곧 알려졌소. 우리는 붙잡혀 감옥에 들어갔지만, 보물에 대해서만은 입을 다물었소. 그래서 궤짝은 성 안 벽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소.
그 후 우리 네 사람은 영영 감옥을 떠날 수 없는 종신형을 선고 받았소. 우리들 모두 앤더맨 섬으로 유형을 당했지만, 그 곳엔 백인 죄수가 드물었고 내가 아주 온순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감옥에서 풀려나와 자유롭게 살 수 있었소. 물론 자유롭다곤 하지만, 사방이 바다여서 도저히 도망칠 수는 없었소. 나는 군의관 서머튼 박사 밑에서 조수로 있으면서 약 만드는 법도 배웠소. 장교들은 일이 한가한 밤이 되면 자주 트럼프 놀이를 했소.
나는 직접 트럼프를 하는 것도 좋아했지만, 남이 하는 것도 곧잘 구경하곤 했소. 트럼프 놀이를 하는 패에는 솔트 소령, 모스턴 대위, 브라운 중위, 그리고 방금 말한 서머튼 군의관, 그리고 간수들도 끼어 있었소. 그런데 장교들은 솜씨가 서툴러, 간수들에게 돈을 털리곤 했소. 특히 솔트 소령은 한 번도 이기지 못했지. 내기에 지면 사람은 더욱 열중하기 마련이오. 솔트 소령은 계속 트럼프를 하다가, 어느 날 밤 드디어 돈을 몽땅 털리고 말았소. 그는 모스턴 대위에게 이런 말을 하더군.
"모스턴 대위, 나는 이제 군인도 그만이야. 이젠 완전히 파산이야!"
모스턴 대위가 열심히 소령을 위로하더군. 나는 이틀이 지난 뒤, 소령이 혼자 산책하는 바닷가로 다가갔다오.."
"대장님, 한 가지 의논하고 싶습니다."
"무슨 일인가, 스몰?"
"임자가 없는 보물을 찾아 내면, 그건 찾아낸 사람 것이 되나요?"
"그렇지 않아. 그건 정부의 것이 되는 거지."
"그래요? 그런데 사실은 제가 50만 파운드나 되는 보물이 묻힌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
"뭐, 50만 파운드?" 소령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소.
"예, 보석과 진주가 무더기로 파묻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정부에게 빼앗기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잠깐! 도대체 너는 어떻게 보물이 묻힌 곳을 알게 되었지? 그것부터 얘기해봐."
그래서 나는 그가 보물이 묻힌 곳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그 동안의 사정을 대략 들려 주었소. 소령은 대단히 열심히 이야기를 들었소.
"음, 스몰. 정말 대단하군. 내가 잘 생각해서 너를 도와줄 테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잠자코 있어야 한다." 소령은 이렇게 말하고 나와 헤어졌소. 그리고 이틀째 되는 날 새벽, 소령은 모스턴 대위와 함께 나를 찾아왔소. "스몰, 그 이야기를 한번만 더 모스턴 대위에게 들려다오."
그래서 나는 아그라 성 이야기를 다시 들려 주었소. 소령과 대위는 서로 마주보며, "어때, 한번 해 볼 만 하지 않은가?" 하더니 나에게 물었소.
"이봐 스몰, 모스턴 대위와 내가 생각해봤지만, 네 비밀을 정부에 알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우리 둘이서 네 비밀을 사기로 했다. 그래, 얼마면 팔겠는가?"
"대장님! 이런 섬에 일생 갇혀 있을 사람에게 돈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제 소원은 이 섬을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도 감옥에서 나오게 해야죠. 우리 네 사람에 당신들까지 합해 보물의 5분의 1을 두 분에게 드리겠습니다. 5분의 1이라 해도 10만 파운드나 됩니다."
"그렇지만 너하고 시이크 인 세 사람을 자유롭게 해 주는 건 도저히 불가능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바다를 건널 배와 먹을 것만 있으면 섬을 빠져 나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음, 그건 쉽지 않지만 잘 생각해 보겠다. 그러나 우선 네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 알아봐야겠어. 궤짝이 묻힌 곳을 말해 봐. 내가 휴가를 얻어 인도에 한 번 갔다 오겠다."
"세 친구와 의논해 보겠습니다. 한 친구라도 반대하면 이 이야기는 없었던 걸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마호멧 신과 압둘라 칸, 그리고 도스트 아크발 등 세 사람과 함께 이 문제를 의논했소.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렸소.
'우선 보물을 감춘 곳을 그린 지도를 만들어 솔트 소령에게 주어, 이 이야기가 사실이란 것을 확인시킨다. 사실을 확인하면, 소령은 곧 식량을 실은 배를 준비해 우리들을 섬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그리고 소령이 모르는 체 하고 섬으로 돌아오면, 이번에는 모스턴 대위가 휴가를 얻어 아그라에서 우리와 만난다. 그리고 나서 보물을 분배한다. 이렇게 하면 소령이나 대위는 상관으로부터 아무 의심도 받지 않고 일을 무사히 치를 수 있다.'
우리들은 솔트 소령을 굳게 믿었소. 그러나 인도에 간 솔트 소령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소. 모스턴 대위에 따르면, 솔트 소령은 큰아버지의 막대한 유산을 물려 받아 군대에서 제대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소. 신문에 그렇게 보도됐다는 거였소. 그 후 모스턴 대위가 아그라 성에 가서 보물 궤짝을 조사했지만, 궤짝은 이미 없어지고 말았소. 솔트 소령은 우리를 배신하고 보물을 독차지한 다음 영국으로 돌아간 것이오. 개보다도 못한 비겁자라는 것은 바로 솔트 소령 따위를 두고 하는 말이오.
그 때부터 우리는 어떻게 하든 솔트 소령에게 복수하려고 마음 먹었소. 날이면 날마다 섬에서 탈출할 생각 뿐이었소. 보물을 되찾겠다는 생각보다 솔트 소령을 죽이겠다는 생각이 앞섰지. 나는 어느 날, 산 속에서 토인 한 사람이 중병에 걸려 죽어가는 것을 발견하고, 막사로 데려와 간호를 해 줬소. 이 토인은 식인종이라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기를 살려 준 은인이라 해서 나를 잘 따르더군. 토인이 산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기에 나와 함께 살자고 했소. 동가가 바로 그 토인이오.
동가는 통나무 배를 한 척 가지고 있었소. 음식과 술을 장만한 우리는 열흘 동안 바다를 헤매다 열 하루째 되는 날 마침내 상선의 구조를 받아 런던으로 오게 됐소. 하지만 그 동안 동가와 함께 얼마나 힘든 모험을 했는지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소. 지금부터 6년 전, 드디어 우리는 영국에 도착해 어렵지 않게 솔트가 있는 곳을 알아 낼 수 있었소.
우리는 솔트가 아직 보물을 갖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폰지셀 별장의 심부름꾼을 한 사람 우리 편으로 끌어넣었소. 보물을 어디다 숨겼는지는 알아 내지 못했지만, 아직 솔트가 보물을 갖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소.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솔트에게 접근하려고 했소. 그러나 그는 집에 경호원을 두 사람이나 두고 언제나 조심하는 바람에 쉽게 접근할 수 없었소.
그러던 어느 날, 솔트가 죽어 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소. 나는 내 손으로 솔트를 죽일 생각이었기 때문에, 폰지셀 별장에 숨어 들었지. 그런데 마침 솔트가 두 아들에게 뭔가 말하고 숨을 거두는 순간이더군. 그때 나는 몰래 방으로 들어가 보물을 뺏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어. 할 수 없이 지도에 서명한 네 사람의 이름을 써서 시체의 가슴에 핀으로 꽂아 두었던 것이오.
솔트 소령이 죽었으니 이제 내가 할 일은 보물을 찾는 것 뿐이었지. 보물은 솔트의 큰아들이 6년 동안 찾다가, 지난번에 간신히 천장 위에서 발견됐소. 그런데 보물의 진짜 주인은 바로 나요. 그러나 나는 다리 때문에 천장에 올라갈 수 없어 동가를 데리고 들어갔지. 그런데 동가가 그만 멋대로 솔트의 아들을 죽이고 만 거야. 나는 동가를 호되게 혼을 내주었지. 아무튼 보물 궤짝을 되찾은 나는 오로라 호를 타고 도망 쳤는데, 운수가 사나워 여기 있는 명탐정에게 붙잡히게 된 거요.
스몰은 긴 이야기를 끝마치고, 이젠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시원스럽게 웃었다. 홈즈도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군. 그런데 동가는 독 화살 통을 솔트 소령 집에 떨어트렸는데, 증기선에서 우리에게 또 화살을 쏜 건 어찌된 건가?"
"아, 그건 단 하나 남았던 마지막 화살이오." 스몰이 대답했다.
"그래? 그 화살에 자칫 내가 죽을 뻔 하지 않았겠나."
존스 경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홈즈 씨, 이제 스몰을 경찰서에 데리고 가도 좋겠지요?"
"네, 그렇게 하십시오." 홈즈는 어딘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스몰도 일어나서 우리를 향해 쓸쓸히 웃으며 "두 분, 안녕히 계시오." 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들이 사라지자 홈즈는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이제 재미있는 사건이 끝났군! 나는 사건이 없으면 따분해 견딜 수 없단 말어. 내 즐거움은 비록 고생을 하더라도 복잡하게 얽힌 수수께끼를 푸는 데서 생기거든."
나는 망설이며 말했다. "사건이 끝나 사실 난 무척 기쁘네. 홈즈, 난 모스턴 양과 결혼하기로 했어. 이미 약속이 되어 있지."
"그래? 실은 나도 대강 짐작했지." 홈즈는 그렇게 한 마디 했을 뿐, 축하한다는 말도 없었다. 셜록 홈즈는 범죄 수사에 관한 것 외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던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