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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n who would be king

작가 : R.키플링


[소개]

20세기 들어 이 지구 상에는 '빈 땅'이라곤 손톱 만큼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서양 문명 그리고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 모두가 느끼는 숨막힘과 스트레스는 어쩌면 그러한 사실 - 더 이상 우리가 찾아갈 수 있는 빈 땅이 없다는 사실 - 에서 연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19세기 말 그리고 20세기 초반까지도 아직 이 세계에는 임자 없는 땅, 지배자 없는 백성들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인도에서 쓰레기 같은 생활을 하던 부랑자 두 명이 어느날 갑자기 대오각성(?), 주인 없는 땅을 찾아가 왕이 되기로 마음 먹는다.

말도 안 되는 허황한 꿈처럼 보였지만, 처음에 그들은 깜짝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역시 어떤 인간도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희극일까, 아니면 비극일까? 실은 둘 다이다. 어떤 쪽을 받아들이는가 하는 선택은 철저하게 독자의 몫이다.

[작가 소개]

R.키플링(Rudyard Kipling, 1865-1936) : 영국의 소설가, 시인. 1917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인도의 봄베이에서 태어나고 1882년부터 1889년까지 인도의 언론계에서 활약했으며, 세계 각지를 여행했다. 늑대에 의해 키워진 소년의 얘기를 그린 단편집 <정글북>, 라마승과 함께 방랑의 길을 떠난 소년의 이야기 <킴> 등 인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로 명성을 떨쳤다. 시집 <병영의 노래> 등 시 작품이 영국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애국 시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만한 사나이라면 왕의 형제 분이나, 아니면 거지의 친구라도 되겠지.

이 표현은 편협하지 않은 처신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대로 실행하기란 쉽지 않다. 나는 그 동안 여러 번 거지의 친구가 된 적은 있으나, 그게 과연 가치 있는 일인지, 어떤지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나는 왕이 되려다 만 어떤 사나이와 매우 친해져서 어떤 왕국 즉, 군대와 법정, 세금과 국가 정책 등을 제대로 갖춘 하나의 왕국을 양도 받기로 약속한 적이 있다. 그러나 정작 왕의 형제가 되지는 못했다. 왕이 되려다 만 이 사나이도 이미 죽었다. 그러므로 내가 왕관이 탐이 나면 내 스스로 찾으러 나가야 할 판이다.

그 일은 인도의 아지밀에서 마우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처음 시작됐다. 호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나는 일등석의 반액에 불과한 2등조차 타지 못하고, 견디기 어려운 하급 객석에 앉아 여행하고 있었다. 하급 객석엔 쿠션도 없고 승객들은 하층 유라시아 사람이거나 원주민들이어서, 긴 밤차 여행을 같이하기에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나머지 승객들은 대개 한 잔씩 걸쳐 얼큰해진 부랑인들이었다.

이런 하층민들은 식당차를 이용하지 않는다. 보자기나 병에 음식을 넣어 오거나 원주민 과자 장사에게서 과자를 사기도 하고 길가의 물도 마신다. 당연히 더운 계절에는 열차 안에서 죽어 나가기도 한다. 이들이 푸대접을 받는 것은 너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그 때 내가 타고 있던 하급 객석은 나시라바드에 도착하기까지 텅 비어 있었다. 그 역에서 한 사람 키가 크고 눈썹이 짙은 신사가 와이셔츠 바람으로 올라 타서 나에게 인사를 했다. 이 사나이도 나처럼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고 있었으나, 그래도 위스키에 관해서는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

그 사나이는 자기가 겪은 사건이나, 인도의 벽촌에 가 본 체험담, 단 며칠 먹을 양식 때문에 결사적인 모험을 벌인 얘기 등을 들려주었다.

"만약 인도 사람들이 모두 당신이나 나처럼 매일매일 밥벌이를 한다면 인도에서 얻을 세입은 7천만 정도가 아닙니다. 적어도 7억 정도는 짜낼 수 있을 거예요." 그는 말했다. 나는 상대방의 입과 턱을 바라보면서 과연 그런가 하고 무심히 들었다.

우리들은 정치에 관해서도 얘기했다. 그래 봐야 정치판 멀리서 상황을 바라보는 떠돌이들이 여기저기서 줏어 들은 인도 지방 왕국의 정치에 대한 것이었을 뿐이다. 우편 행정에 관한 얘기도 화제가 되었다. 내 이야기 상대가 마침 다음 정거장에서 아지밀로 전보를 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지밀은 인도 서부로 가는 봄베이 선과 마우 선 철도의 분기점이다.

내 상대방이 가진 돈은 밥값도 하기 어려운 8아나 뿐이었으며 나도 아까 말한 것처럼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서 지갑에 한 푼도 없었다. 더욱이 나는 인도의 벽지로 가는 도중인데, 재무부와 미리 연락을 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내 목적지엔 우체국 따위는 없다. 그래서 어차피 나는 그를 도와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역장을 공갈해서 요금은 나중에 지불하기로 하고 전보를 치면 됩니다." 그 친구는 말했다. "당신에게 이것 저것 묻겠지만, 그래도 요즘 나는 여기저기 쫓기는 판이라서.... 당신이 머지 않아 이 노선으로 돌아올 때 도와주면 안될까요?"

"내 일정은 열흘 가량 걸립니다." 나는 대답했다.

"8일 이내에 돌아오실 수 없을까요?" 그는 말했다. "내 일이 조금 급한 거라서요."

"열흘 이내에는 당신 전보를 쳐드릴 수 있겠지만... " 나는 말했다.

"하긴 다시 생각하니 전보 같은 걸로는 그 놈을 불러 들이지 못할 것 같은데... 사실 내가 전보를 보내는 녀석은 23일에 델리를 출발, 봄베이로 갈 테니까 즉 23일 밤에 아지밀을 통과하게 됩니다."

"하지만 난 지금 인도 중부 사막 지방으로 취재차 가는 길입니다." 나는 다시 설명했다.

"이것 대단하시군!"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조도포아 지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마와 역에서 갈아 타게 되겠지요. 그 외에 다른 길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 친구는 봄베이 행 우편 열차로 24일 아침에 마와 환승역을 통과하게 되어 있어요. 그 시간에 역까지 나와주실 수 없을까요? 당신에게 별로 지장은 없을 줄 같습니다만... 당신이 바크우즈만 신문의 통신원이라 해도, 사실 그런 인도 중부 지방에는 기사거리로 쓸만한 건 전혀 없으니까요."

"당신도 그 지방에서 기사 취재를 한 적이 있습니까?" 나는 물어 보았다.

"여러 번 있지요. 하지만 관리들에게 곧 적발돼 뭐라고 변명을 하기도 전에 쫓겨나곤 했지요. 그런데 내 친구, 그 친구에게 용무를 알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약 그 놈이 다른 곳으로 가 버리면 완전히 계산이 어긋나게 되거든요. 당신이 마와 환승역에서 그 놈과 만나 '그 남자는 이번 주에 남부로 가 있을 거요'라고 전해 준다면 무척 도움이 될 겁니다."

그는 말을 계속했다. "그렇게만 말해도 충분히 알아먹을 수 있습니다. 그 친구는 빨간 수염을 기른, 키가 큰 사나이로 대단한 멋쟁이입니다. 짐을 팽개친 채 이등차에서 신사 차림으로 누워 자기도 하지요. 아무튼 그 친구를 찾아 '그 남자는 이번 에 남부로 가 있다'고 말해 주시면 됩니다. 당신의 저쪽 체류 일정을 이틀쯤 단축하면 됩니다."그는 힘주어 말했다.

"당신은 어디서 오는 길입니까?" 나는 물었다.

"동부에서요." 그는 말했다. "당신 어머니와 나의 어머니의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내 부탁을 들어 주십시오..."

영국인은 대개 어머니의 추억이라고 해도 좀처럼 부드러운 기분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때 어쩐지 그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당신이 내 부탁대로 말을 전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마와 환승역에서 이등 객차입니다. 거기 누워 있는 붉은 수염의 남자입니다. 틀리면 안됩니다. 전 다음 역에서 내려야 합니다. 그렇게 전해주면 그 친구가 찾아오거나, 아니면 내게 필요한 물건을 부쳐올 겁니다. 그래서 난 거기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을 보면 전해 드리지요." 나는 말했다. "그런데 내 어머니와 당신 어머니를 위해 충고하죠. 지금 상황에서 바크우즈만 신문의 통신원이라고 떠들면서 인도 중부지방을 돌아다니는 건 위험할 겁니다. 그 쪽에 진짜 통신원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어떤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고맙습니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그 통신원 자식들은 언제쯤 돌아갈까요? 그 자식들이 내 일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해서 무작정 굶어죽을 수는 없으니까. 난 데간바 토후의 계모 사건을 미끼로 저 토후 자식을 혼내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소."

"그 토후가 자기 계모에게 무슨 일을 한 거요?" "고춧가루를 싫컷 먹인 뒤 기둥에 달아매어 숨이 넘어가도록 마구 때렸습니다. 그 사건을 냄새 맡은 사람이 몇 있지만, 거기 찾아가 토후를 협박해 돈을 얻을 용기를 가진 사람은 나뿐이오. 내가 이전에 비슷한 사건으로 골드움나로 찾아갔을 땐 녀석들이 내게 독약을 먹이려고 했지요. 그건 그렇고, 내가 부탁한 것을 마와 환승역에서 그 친구에게 전해 주시겠지요?"

그가 시골의 조그만 역에서 차를 내린 뒤, 나는 생각에 잠겼다. 신문사 통신원의 이름을 빌려, 폭로하겠다고 협박해 조그만 지방의 토후에게서 돈을 뺏어내는 인간들의 얘기는 여러 번 들었지만 직접 그런 인간을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런 사람들은 어려운 생활을 보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는 것이 예사다.

인도 오지 지방의 토후들은 자기들의 특이한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영국 신문에 대해서 뿌리 깊은 공포심을 품고 있다. 그래서 자기들을 노리는 신문 통신원들에게 샴페인을 먹여 정신을 잃게 하거나, 마차에 태워 쫓아내는 일이 많다. 그들이 백성을 지나치게 억압해 폭동이 일어나거나 너무 겉으로 드러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토후가 누군가에게 독약을 먹이건 말건, 주정뱅이가 되건 말건, 병에 걸리건 말건 세상 사람들이 누구 하나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토후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지방은 지상의 암흑세계라고 할 만하다. 그곳에선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일들이 너무 많다. 한쪽에선 철도나 전신의 혜택을 받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선 옛날 하른 알 라시드 시대 그대로인 것이다.

나는 열차에서 내려 여러 토후들과 만나 일을 마치는 8일 동안 수많은 굴곡을 거쳐야 했다.  하루는 그럴싸한 예복을 입고 왕후나 위정자들과 섞여 수정 술잔을 기울이며 백은 그릇으로 음식을 먹는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에는 땅바닥을 기며 닥치는 대로 풀잎에 음식을 담아 먹고, 냇물로 목을 축이고 하인과 함께 모포를 덮고 자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일상 다반사였다.

일을 마치고 난 약속대로 예정일에 인도 사막 쪽으로 기차를 타고 갔다. 야간 우편 열차는 나를 마와 환승역에 내려 주었다. 여기서부터는 조그마한, 천하태평이라는 태도의 인도인이 운영하는 철도가 조도포아로 향한다. 델리에서 오는 봄베이행 우편 열차도 여기서 잠깐 정차한다.

내가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그 우편 열차도 구내에 들어왔기 때문에 나는 다급하게 플랫폼으로 달려가 겨우 객차를 찾아냈다. 그 열차엔 이등차는 하나밖에 없었다. 창을 올리고 보니 여행 모포를 뒤집어쓴, 불 타는 것처럼 빨간 수염의 사내가 눈에 띄었다. 내가 찾던 사나이였다. 그는 자고 있었지만 내가 옆구리를 찌르자 끙끙대며 눈을 떴다. 램프 불빛으로 보이는 얼굴은 크고 기름기가 번들거렸다.

"또 차표 검사야?" 그가 말했다.

"아니오." 내가 말했다. "그 남자가 이번 주에 남부에 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거요. 그 남자는 이번 주에 남부에 가 있소."

열차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붉은 털 사나이는 눈을 부볐다. "그 남자가 이번 주에 남부에 가 있다고?" 그는 따라 했다. "과연 그 놈답게 뻔뻔스럽군. 그 놈이 뭐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난 당신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아."

"그런 말은 없었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열차에서 내렸다. 바람이 모래를 휩쓸어 올리며 불고 있어 아주 추웠다. 나는 기차에 뛰어올라 - 이번엔 하급 객차가 아니었다 - 잠이 들었다.

만일 그 털보가 1 루피 동전이라도 줬다면 기묘한 경험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나는 그것을 보관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유일한 보수는 자기 의무를 다했다는 기분 뿐이었다.

그 뒤 나는 그 두 사람이 이마를 맞대고 의논, 신문의 통신원을 사칭하고 다니면 인도 중부나 남부의 라주피타나 같은 고양이 낯짝만한 좁은 지방에서는 봉변을 당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수고를 무릅쓰고 기억을 더듬어, 그런 인간들을 추방하는 관계자에게 되도록 정확하게 두 사람의 인상을 써 보냈다. 그 뒤 들은 바에 의하면 둘 다 데간바 국경에서 잡혀서 송환됐다는 것이었다.

그 후 나는 옷차림을 다듬고 임금님도 없고 매일 신문을 제작하는 것 외에는 아무 사건도 없는 회사로 돌아갔다. 신문사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곳이다. '인도 부인 사상 선도회의'라는 단체에서 한 부인이 찾아와 다른 업무를 즉각 중지하고 변두리 뒷골목 빈민가에서 있었던 기독교 행사의 기사를 쓰도록 주필에게 요구하는가 하면 예비역 대령들이 찾아와 '고참 직업군인과 징집병의 비교'라는 주제에 대해 쓴 10회, 12회, 아니 24회분의 논설을 게재해달라고 전해주기도 한다.

선교사들에게 비판적인 기사도 적지 않건만, 또 다른 선교사들은 어째서 자기들은 기사로 취급해주지 않느냐고 항의하기도 한다. 매출이 부진한 극단이 지금 당장 광고료를 지불할 수는 없지만 뉴질랜드나 타히티 공연에서 돌아오면 이자를 붙여서 갚아 준다며 신문사를 찾아오기도 한다.

특허에 관련된 사람도 많다. 차량 연결기, 부러지지 않는 칼, 신형 차축 등의 발명자들이 서류를 호주머니에 넣고 아무 때나 찾아온다. 차(茶) 공장 사람들이 찾아와서 사무실에 놓인 펜으로 자기들의 취지서를 정성스럽게 쓰기도 하며, 무용 협회의 실무자들이 그 동안 자기들이 벌인 댄스 행사를 더 상세하게 써 달라고 떠들어댄다. 이상한 부인네들이 성큼성큼 들어와 "이건 분명 주필의 의무니까, 미안하지만 부인용 명함을 백 매 곧 인쇄해주세요"라고 말한다.

또 인도 각지의 간선 도로를 떠도는 형편없는 놈팡이들이 교정계에 채용해 달라고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요구하기도 한다. 1년 내내 전화벨은 미친 듯 울리고 유럽에서는 국왕이 살해되며 나라끼리 서로 욕을 퍼부어댄다. 원고를 가지러 다니는 검둥이 꼬마는 "카피 체이하이에(원고를 넘겨 주시오)"하며 지친 벌 비슷한 소리를 질러댄다. 그러나 아직 신문 지면 대부분은 모드레드(옛 전설에 나오는 아더 왕의 조카로 원탁의 기사의 한 사람. 그의 방패엔 아무 표시도 없었다고 한다)의 방패처럼 하얗게 비어있는 상태다.

그래도 이 때가 일 년 중에서는 비교적 재미있는 시기이다. 나머지 6개월 동안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온도계 눈금은 1인치씩 꼭대기까지 올라가고 회사엔 차양을 치고, 겨우 글자를 읽을 정도로 어두워진다. 인쇄기는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뜨거워지며 산악 지방의 피서지 행사 등 오락기사나 사망기사 외엔 아무도 펜을 들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전화 벨 소리가 무서워진다. 전화는 대부분 것은 친하게 지내던 누군가가 사망했다는 소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통 땀 투성이가 되어 "구다 얀타 칸 지구에서 온 보도에 따르면 이 병의 발생은 전혀 돌발적이고 예측 불가능이었다. 아직 환자는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지구 당국의 불굴의 노력에 의하여 목하 병의 확산은 거의 중단된 상태다. 그러나 모모 씨의 서거를 여기에 쓰면서 우리의 애도의 심정 금할 길 없다..." 따위 문장을 쓰는 것이다.

진짜 전염병이 발생할 경우 독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보도를 적게 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여러 나라 국왕들은 변함없이 제 멋대로 행동하며, 편집장은 무조건 신문이 24시간 내에 인쇄돼야 한다고 믿고 산악 지대 피서지에서 빈둥거리는 인간들은 사랑 놀음을 즐기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거 참, 어째서 신문을 좀 더 재미있게 만들지 못할까. 여기엔 기사거리가 아주 많을 텐데 말이야."

이것이 1년 중 싫은 6개월이다. 말 그대로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인 셈이다.

그렇게 싫은 계절의 어느날이었다. 런던 신문의 관습대로 토요일 밤이 아닌, 일요일 아침에 그 주 최종판의 인쇄를 앞두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상황이 대단히 좋은 것이다. 새벽에 인쇄를 돌린 직후 그나마 선선해진 공기 덕분에 잠을 청할 참이었다. 밤새 열기에 시달려 흐느적거릴 정도로 지쳤지만, 이제 아침 햇살로 뜨거워지기 전까지 잠을 잘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날 밤 나는 혼자서 신문 인쇄를 감독하고 있었다. 그 시간에 지구 저편에서는 국왕과 궁정 대신들과 매춘부와 단체 등이 때론 위독해지거나 신헌법을 만들며 또 뭔가 중대한 일을 하고 있다. 때문에 신문은 그러한 소식을 게재하기 위하여 인쇄 시간을 최대한 늦춰 잡아야 한다.

그 날 밤은 한 치 앞도 분간 못할 만큼 어둡고, 6월 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숨이 막히게 더웠다. 뜨거운 서풍이 메마른 가지를 휩쓸어 불고, 곧 뒤따라 비가 올 것 같은 기색이었다. 삶은 것 같은 물방울이 개구리가 뛰는 것처럼 모래 위에 떨어져 왔다. 하지만 이 지쳐버린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비를 내리는 흉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편집실보다는 인쇄실 쪽이 약간 더 선선해 나는 거기 앉아 있었다. 활자가 철컥철컥 소리를 낸다. 독수리는 창밖에서 울고 벗다시피 한 식자공들은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물 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서풍이 그치고 최후의 활자까지 조판이 되고 주위는 침묵한 채 질식할 것 같은 열기 속에 조용해졌으나 우리들이 손 모아 기다리던 사건은 -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 어쨌든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선잠을 자면서 기다리는 뉴스 전보가 기대에 들어맞는 건지 어떤지 생각해 보기도 하고, 또 지구 저쪽의 여러 인간들이 자신들로 인해 생기는 온갖 파장을 과연 알고서 행동하고 있을까 등을 생각하기도 했다. 더위와 긴장감에서 오는 피로 외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시계 바늘이 세 시를 가리키고 인쇄를 시작하기 전에 준비가 제대로 됐는지 조사하기 위해 기계를 2,3회 돌려볼 즈음 나는 뭔가 큰 소리로 부르짖고 싶은 기분이 됐다.

이윽고 윤전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일어서 나가려고 할 때 내 앞에 흰 옷의 사나이 둘이 우뚝 서 있었다. 첫째 사나이가 "그 때 그 양반이야" 하니까 두 번 째 사나이가 "정말이군" 하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인쇄기 소음보다 더 크게 웃고선 이마의 땀을 닦았다.

"길 저쪽에서 불이 켜진 걸 봤소. 우리들은 선선한 저쪽 구석에서 자고 있었죠. 내가 이 친구에게 말했어요. '신문사가 열려 있으니 가서 우리들을 데간바주에서 추방하게 만든 그 양반에게 말이라도 건네 보자.'고 말이오." 말을 꺼낸 것은 두 사람 가운데 작은 쪽이었다. 그는 전에 마우선 열차에서 만난 사나이였으며 같이 온 사람은 마와 환승역에서 만난 붉은 털의 남자였다.

나는 부랑인들을 만나지 않고 침대에 들어가 자고 싶었다. 그래서 싫은 표정을 하며 "무슨 용무요?"하고 물었다.

"회사 안 시원한 곳에서 당신과 30분쯤 얘기하고 싶소." 붉은 털의 사나이가 말했다. "뭐든 마실 것이 있으면 좋겠는데. 피치, 아직 계약이 시작되지 않았으니까 날 볼 필요는 없어. 사실 지혜를 좀 빌리고 싶어서... 돈을 달라는 게 아니오. 데간바주에서 우리를 골탕 먹인 건 알고 있지만 그 대신 부탁을 하나 들어 주시면 좋겠소."

나는 인쇄실을 나와서 지도가 걸려있는 무더운 편집실로 안내했다. 붉은 털 사내는 두 손을 맞잡으며 "그래도 찾던 물건이 있구먼"하고 지껄였다.

"바로 우리가 원하던 곳이야. 선생, 소개할까요. 이 쪽은 피치 개넌, 난 그 친구인 다니엘 드라보트입니다. 우리가 해온 일에 대해선 자세히 말할 필요가 없겠지. 거의 못해 본 일이 없으니까. 군인, 선원, 식자공, 사진사, 교정계, 노상 설교사, 한 때 바크우즈만 신문의 통신원도 했습니다. 그러나 개넌도 그렇고 나 역시 정신 상태는 정상입니다. 먼저 그 점을 분명히 하고 싶어요. 그래야 우리 얘기를 도중에 가로채지 않을 테니까. 당신 여송연을 한 가치 불 좀 붙여 볼까요?"

나는 시험조로 그들이 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둘 다 술은 입에 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미지근한 위스키 소다를 주었다.

"기막히게 좋군." 눈썹이 짙은 개넌이 수염의 거품을 닦으며 말했다. "자, 내가 말하겠어. 응, 선생. 우리들은 인도를 두루 다녔어요. 엔진 조립공도 하고 운전수도 하고 시시한 청부업자도 해봤지. 뭣이고 다 해 본 결과, 인도란 땅은 우리 같은 사람에겐 너무 좁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확실히 그 편집실은 그들에게 너무 좁았다. 둘이 테이블에 앉으니까 드라보트의 수염이 실내의 반을 채우고 나머지 반은 개넌의 어깨로 가득 차 보였다.

개넌은 지껄였다. "이 나라는 이제 손댈 곳이 없어요. 여길 다스리는 녀석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손가락 하나 찌르지 못하게 한단 말이야. 놈들은 눈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어. 우리들이 삽으로 바위를 깨거나, 석유를 찾거나, 그밖에 무슨 일을 조금이라도 하려고 들면 당장 관리들이 나타나 '손을 대선 안돼. 우리에게 넘겨'라고 막는단 말이죠."

"그래서 그 말씀대로 우리는 더 이상 손을 대지 않기로 했어요. 사람들이 법석대는 이 곳 말고 뭔가 마음대로 해볼 수 있는 지방으로 가기로 한 거야.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우린 해낼 수 있어. 물론 술만은 별도지만, 이 점에 대해선 계약을 했죠. 지금 우리들은 왕이 되려고 마음 먹고 떠나는 중이오."

"우리 힘으로 왕이 되는 거야." 드라보트가 중얼거렸다.

"좋은 이야기군." 내가 말했다. "당신들은 낮에 햇빛을 받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녔고 거기다 오늘 밤은 지독하게 더워. 왕이 되는 생각이라도 해야 잠이 잘 오겠지. 한숨 자고 나서 내일 다시 오는 게 좋겠어."

"취한 것도 아니고, 일사병에 걸린 것도 아니오." 드라보트가 말했다. "우리는 지난 반년간 꿈속에서도 이 일을 계속 생각해 왔소. 책과 지도를 살펴본 결과 우리 같은 사나이들이 들어갈만한 지방은 온 세계에서 한 군데 뿐이라는 걸 알아냈지요. 그 땅 이름은 가피리스탄이오. 내 계산으론 아프가니스탄의 오른쪽 제일 위 페샤와에서 3백 마일도 떨어져 있지 않아요."

"그 지방에선 32명의 우상신을 숭배하지만, 우리는 33번째, 34번째 우상이 될 거요. 산골이긴 하지만, 그 지방 여자들은 아주 예쁘다고 하더군."

"하지만 다니엘, 그건 안돼. 계약에 명시해뒀어." 개넌이 말했다. "여자도, 술도 안돼."

"이게 전부요. 그 밖에 아직 그 지방에 간 외부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 거기 놈들은 짐승처럼 서로 싸운다는 것 정도를 알고 있소.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곳에선 어디건 군사훈련을 제대로 시키는 놈이 왕이 될 수 있소. 우리는 거기 가서 왕을 보고 말할 참이오. '넌, 적군을 무찌르고 싶지?'라고 말이오. 그리곤 훈련하는 걸 왕에게 보여주는 거지. 이런 건 우리들이 잘 아니까요. 그리고 그 왕을 쫓아내고, 새 왕조를 세울 셈이야."

"국경 넘어 50마일도 못 가서 갈기갈기 찢겨 죽을 텐데..." 나는 말했다. "그 나라로 가려면 아프가니스탄을 빠져 나가야 해. 아프가니스탄은 산 봉우리와 빙하 덩어리로 된 땅이야. 그곳을 빠져나간 영국인은 하나도 없어. 그곳 사람들은 완전히 야만인이야. 설혹 가피리스탄으로 도착했다 해도 손을 댈 수 없는 지방이야."

"정말 그럴까." 개넌이 말했다. "우리를 미친 사람 취급한다면 오히려 고맙지. 우리들이 온 것은 그 나라의 일을 알기 위해서요. 그 나라에 대해 쓴 책을 읽고 싶소. 그리고 지도를 얻으려고 하는 거요. 바보 취급을 해도, 당신이 책만 보여 준다면 좋아." 그는 책장 쪽을 둘러보았다.

"당신들 지금 진심이야?" 나는 말했다.

"어느 정도는." 드라보트가 기분 좋은 듯 말했다. "가피리스탄에 관한 거라면 아무 거나 좋으니, 당신네 회사에서 제일 큰 지도와 종류 상관 없이 책을 좀 빌려줘요. 우리들은 별로 교육은 못 받았지만 글자는 읽을 수 있소."

나는 32마일을 1인치로 축소한 인도 지도와 그보다 소형의 변경 지도 두 권을 빼내고 또 대영백과사전의 '인후칸' 부의 한 권을 끄집어 냈다. 그들은 그것을 살펴봤다.

"이걸 보시오!" 드라보트는 엄지손가락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그다라크까지는 피치도 나도 길을 알고 있소. 우리들은 로바쓰 군대와 함께 그곳에 간 일이 있지. 라구만 지역을 빠져나가 자그다라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야 해. 그러면 산간 지방이지. 고도 1만4천 내지 1만5천 피트, 이곳은 추운 곳일 거야. 지도상으로 보면 더울 것 같지는 않군."

나는 그에게 <오그자스의 자원>이라는 표제를 단 우드의 저서를 주었다. 개넌은 백과사전에 몰두해 있었다. "이것 참 복잡하군"하며 드라보트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종족의 이름 따위는 알아 봐야 소용 없어. 종족이 많을수록 싸움이 많을 테고, 또 그만큼 우리에겐 유리하단 말이야. 자그다라크에서 아샨 훈으로 가는 거야!"

"그 나라에 관한 기사는 매우 간략하고 부정확한 거야." 나는 잔소리를 했다. "실제로는 그 지방에 대해서는 아무도 제대로 알고 있지 않아. 여기에 다른 파일이 있으니까 뭐라고 적혀 있는지 읽어 보게."

"거기에 뭐라고 적혀 있건 전혀 상관 없소." 개넌이 말했다. "선생, 놈들은 기분 나쁜 이교도들이지만 이 책에는 그 놈들이 우리 영국인을 친척이라고 생각한다고 쓰여 있어."

두 사람이 우드의 책과 백과사전 등에 열중하고 있는 동안 나는 담배를 피웠다.

"당신은 여기 있지 않아도 좋소." 드라보트가 조용히 말했다. "벌써 4시군. 쉬고 싶으면 아무쪼록 일어나시오. 우리는 6시 전에 떠나겠소. 종이 조각 하나 훔치지 않겠소. 일어나지 않아도 상관 없소. 우리는 위험하지 않은 미치광이들이니까. 다만 내일 저녁 캐래번 숙소까지 나와주면 고맙겠습니다."

"당신 둘 다 바보야." 나는 대답했다. "국경에서 쫓겨 오거나 그렇잖으면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자마자 이 세상과 작별할 테니 말이야. 돈이나 어디 취업 추천장이 필요하다면 다음 주쯤 일할 기회를 만들어 줄 수도 있어."

"고마운 얘기지만 다음 주에는 우리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거요." 드라보트가 말했다. "왕이 된다는 것은 곁에서 보기처럼 쉬운 건 아니오. 우리 왕국의 치안이 정비되면 당신에게 연락하겠소. 그러면 와서 도와주시오."

"미치광이들이 이런 계약을 할 것 같소?" 개넌은 손때 묻은 노트 반쪽을 내게 보여주었다. 자랑스러운 마음을 억누르는 것 같았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나는 이 희귀한 문서를 즉각 베껴 놓았다.

귀하와 소생의 이 '계약'은 신의 이름으로 약정된 것임. 아멘...

1조. 귀하와 소생은 함께 이 문제를 처리할 것. 즉 가피리스탄의 왕이 되는 일임.

2조. 귀하도 소생도 이 일을 하는 동안에는 어떤 착오에 휩쓸리지 않도록 술과 여자에겐(흑인이건 백인이건 갈색이건) 일체 눈을 주지 않을 것

3조. 우리들은 위엄과 분별을 갖고서 행동할 것. 그리고 만일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곤란을 당하면 나머지 한 쪽은 이를 지원해야 함.

월       일   두 사람의 서명.
피치 다리아페로 개넌
다니엘 드라보트
두 사람 모두 무직의 신사

"최후의 항목은 불필요하오만" 개넌은 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해야 진짜처럼 보이니까요. 아마 당신은 부랑인 따위가 만든 문서라고 쉽게 여기겠지만 - 선생, 인도를 나가기 전까진 우리는 부랑인이오 - 진심이 아니라면 이런 계약에 서명할 필요가 있겠소? 우리는 이 세상을 달콤하고 허황된 것으로 만들어 주는 두 가지를 끊어버리는 거요."

"그런 미치광이 같은 모험을 하면 오래 살 수 없어. 방에 불이 나지 않도록 주의해주게." 나는 말했다. "그리고 9시까지는 여길 나가야 해."

나는 지도를 바라보면서 계약서에 각서를 써넣고 있는 두 사람을 남겨 놓고 방을 나왔다. "내일 꼭 캐러번 숙소까지 와 주시오." 이것이 그들의 작별 인사였다.

이 세상 모든 곳에서 인간들이 모여드는 곳, 감하센 캐러번 숙소는 북쪽에서 온 낙타나 말의 짐을 내려놓는 곳이다. 여기에서는 중앙 아시아의 모든 민족과 인도의 거의 모든 인간들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바르그 사람과, 보가 사람, 벵골이나 봄베이 사람들이 만나 서로 속이면서 돈 벌이를 한다.

감하센에서는 망아지, 터어키 구슬, 페르샤 고양이, 굵은 꼬리 양, 사향 등을 살 수도 있고 또 여러 가지 진귀한 물건들을 공짜로 손에 넣을 수도 있다. 오후가 되어 나는 예의 두 사람이 진지하게 맹세를 지킬 의사가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취해서 잠자고 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나갔다.

헝겁과 모포를 몸에 두른 사제 한 사람이 종이로 만든 팔랑개비를 돌리면서 가까이 걸어왔다. 그 뒤에는 하인이 진흙 장난감이 들어 있는 상자를 무거운 듯 지고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낙타 두 마리에게 짐을 실어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감하센의 상인들은 모두 킥킥 웃으면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사제는 미치광이야." 어떤 말 상인이 나에게 말했다. "저 놈은 국왕에게 장난감을 팔려고 가브르로 간다는 거요. 표창을 받지 않으면, 목을 베이겠지요. 오늘 아침부터 여기 와서 쭉 미친 짓을 하고 있어요."

"어리석은 자에겐 신의 가호가 있는 법이다." 볼을 푹 꺼진 우즈베크 사람이 인도 사투리로 더듬으며 말했다. "어리석은 자는 미래의 일을 예언한다."

"우리 캐러밴이 적어도 목표 지점 가까이 갈 때까지는 곳에서 신와리스 족의 습격을 받지 않을 거라고 저 놈들이 예언해주면 좋겠군!" 라지퓨타나 무역 대리점의 사나이가 외쳤다. 그는 유스후자이 족이었다. 그의 상품은 국경을 겨우 넘자 마자 강도들의 손에 빼앗겨 시장의 웃음거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보, 스님 당신은 어디서 왔어? 그리고 어디로 가는 거야?" "난 로마에서 왔어." 그 사제는 팔랑개비를 흔들며 외쳤다. "로마에서 마귀들의 숨길에 날려, 바다를 건너서! 오, 도둑이여, 강도여, 거짓말쟁이여, 사기꾼에게도 피아 칸의 축복이 이르기를! 나는 언제 어디서나 효력을 발휘하는 부적을 국왕에게 팔기 위하여 나섰노라! 이런 나를 북부로 데려갈 자는 없는가?"

"나를 캐러번에 넣어 주는 자들의 낙타는 상처를 입지 않고 그 자식들은 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 아내는 남편이 없는 중에도 정절을 지킬 것이다. 루즈의 왕을 황금 신발로 쳐 던지려는 나를 도와줄 자는 없는가? 피아 칸의 가호는 그 자의 노고 위에 있을지어다!" 그는 가바틴 옷의 소매를 제키고 매어 둔 말의 말 끈 사이를 그럴사한 몸짓으로 뱅뱅 돌았다.

"20일 후에 페샤와에서 가브르로 향하는 캐러번이 출발합니다, 사제님." 유스후자이 족 상인이 말했다. "제 낙타도 함께 가지요. 당신들도 함께 오셔서 우리에게 행운을 빌어 주세요."

"나는 지금 곧 가야 해." 사제는 부르짖었다. "날개 달린 내 낙타를 타고 하루 만에 페샤와에 도착하자꾸나! 이 놈, 하자르 미아 칸!" 그는 하인을 향해 외쳤다. "그 낙타를 이리 데려와. 먼저 내 낙타를 타야겠지."

낙타가 무릎을 꿇자 그는 낙타 등에 휙 타고선 나를 돌아보며 외쳤다. "그대여, 그대도 잠깐 동행하구려! 그리하면 나는 그대에게 부적을 팔 것이야. 그대가 가피리스탄의 왕이 되게 하는 부적 말이야."

그제서야 나도 눈치를 챘다. 나는 두 마리 낙타를 따라 감하센을 뒤로 하고 큰 거리에 나와 그 사제가 멈출 때까지 따라갔다.

"지금 연극은 어때요?" 그는 이제 영어로 말했다. "개넌은 그놈들의 말을 못하기 때문에 내 하인으로 삼았지요... 너무 과분한 하인입니다만. 난 이 나라를 14년간 공연히 쏘다닌 것이 아니오. 아까 지껄인 것은 괜찮았죠? 우리는 페샤와에서 캐러번에 끼어 자그다라크까지 갈 셈이오. 그 다음 낙타 대신 당나귀를 입수하던지 한 다음에 가피리스탄으로 들어갈 거요. 국왕에게 팔랑개비, 아니 이거 죄송합니다! 이 낙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시오. 무엇이 있소?"

내 손가락에 마르티니 총의 개머리판이 여러 개 닿았다.

"스무 자루죠." 드라보트는 침착하게 말했다. "스무 자루와 거기 필요한 탄약이 팔랑개비와 진흙 인형 밑에 숨겨져 있소."

"그런 걸 갖고 있다 붙들리면 어떻게 되겠어?" 나는 말했다. "파탄인에게는 마르티니 총 한 자루가 같은 무게 은 값과 맞먹지."

"자본금 1만5천 루피 - 우리들이 빌리거나 훔친 돈 전부- 이 돈이 이 낙타 두 마리에 투자되어 있소." 드라보트가 말했다. "우리들은 붙잡히지 않소. 정규 캐러번과 함께 가이바 고개를 지나 갈 예정이니까. 가난하고 미친 사제에게 손을 댈 사람은 없어요."

"필요한 물품은 다 입수한 거요?" 나는 놀랍다는 생각을 하면서 물었다.

"아직 멀었죠. 하지만 어떻게 되겠지요. 당신을 기념할만한 물품을 하나 주지 않겠소, 형제? 당신은 어제도 마와의 그 때도 우리를 도와주었소. 말 그대로 우리의 왕국의 딱 절반을 당신에게 헌정하리다."

나는 시계줄에서 조그마한 장식용 나침반을 풀어 사제의 손에 넘겨 주었다.

"안녕" 드라보트가 조용히 손을 내밀며 말했다. "지금부터 당분간 영국인과 악수할 수 없겠지. 개넌, 자네도 이 분과 악수해두게." 두 번째 낙타가 내 곁을 지나달 때 그는 부르짖었다.

개넌은 몸을 숙여 악수했다. 이윽고 낙타는 먼지투성이 길을 사라져갔다. 나는 거기 남아 생각에 잠겼다. 내 눈으로는 그들의 변장에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캐러번의 풍경은 두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털끝만큼도 의심을 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따라서 개넌과 드라보트가 들키지 않고 아프가니스탄을 빠져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곳을 빠져나가면 둘은 곧 살해되겠지. 아주 잔인하게 말이지...

열흘 후 페샤와의 원주민 통신원이 그 날의 일지를 통지해왔다. 그 통신의 마지막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영험이 새롭다고 떠들어대는 부적과, 싸구려 물건, 천한 장신구 따위를 보가라의 국왕에게 팔러 간다는 미치광이 사제가 현지에서 웃음거리가 되어 있다. 그 사제는 페샤와를 통과하여 가브르 행 캐러번에 참가했다. 상인들은 저런 미치광이가 행운을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에 기뻐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그 둘은 국경을 넘은 모양이다.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마침 그날 밤 유럽의 진짜 국왕이 서거했기 대문에 나는 사망기사를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세월은 되풀이해 비슷한 모양으로 흘러간다. 여름이 지나면 겨울이 오고 또 여름이 오고 겨울이 된다. 신문은 매일 발행되고 나도 그것에 종사하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3년째 여름 어느 날, 더워서 미칠 것 같은 밤이었다. 새벽 판 발행을 앞두고 세계의 저쪽에서 무슨 전보라도 있지 않을까 하고 기다리는 긴장된 기분은 먼저 말한 것과 똑 같았다.

지난 2년간 지명인사가 두세 명 죽었고 인쇄기의 소음은 더욱 요란해졌으며 신문사 뜰의 나무는 몇 피트 더 자랐다. 하지만 변화란 그런 정도였다.

나는 인쇄소에 나가 똑 같은 장면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신경의 긴장은 2년 전보다 강하고 더위도 한층 더 심하게 느껴졌다. 3시에 "인쇄 개시"하고 외치고 돌아설 때, 무척 초라한 어떤 인간이 의자 쪽으로 다가왔다. 머리를 힘없이 늘어뜨리고 앞으로 구부린 채 곰처럼 갈 지자 걸음을 걷고 있었다.

나는 그 사나이가 걷는지, 기는지 거의 분간할 수 없었으나 그 누더기를 걸친 절름발이는 우는 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난 돌아왔습니다." 하고 외치고 있었다. "마실 것을 좀 주세요." 그는 우는 소리를 냈다. "제발 마실 것 좀 주세요!"

내가 편집실로 가자 그 사나이는 괴로운 듯 앓으면서 따라왔다. 나는 램프의 심지를 크게 했다.

"당신, 날 알겠소?" 그는 굴러 떨어지듯 의자에 앉아 숨을 헐떡이며 회색 머리털이 쑥대밭처럼 헝클어진 찌푸린 얼굴을 들어 불빛을 향했다.

나는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1인치나 되는 굵은, 코 위에서 마주친 짙은 눈썹을 본 기억이 있지만 어디서 봤는지는 아무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본 기억이 없는데" 나는 그에게 위스키를 주면서 말했다. "무슨 일로 온 거요?"

그는 위스키를 병 채 들고 꿀꺽 한 모금 마시더니, 질식할 것 같은 열기에도 불구하고 몸서리를 쳤다.

"난 돌아왔소." 그는 되풀이했다. "난 가피리스탄의 왕이었소. 나도 드라보트도, 왕관을 쓴 왕이었어! 이 방에서 우리는 맹세했지. 당신은 거기 앉아서 우리에게 책을 빌려 주었고. 난 피치요. 피치 다리아페로 개넌 말이오. 당신은 그 때부터 쭉 여기 있었구. 엄청난 차이구먼!"

난 적지 않게 놀랐다. 내가 무척 놀랐다는 것을 피치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정말..." 피치 개넌은 누더기를 두른 다리를 비벼대며 메마른 소리로 지껄였다. "이건 분명해요, 우리는 머리에 왕관을 얹은 왕이었소. 나도 드라보트도 말이야, 불쌍한 단... 아, 불쌍한 단. 나 그 놈에게 여러 번 말해 봤지만 내 충고는 먹혀 들지 않았어!"

"위스키라도 마시고 기분을 가라앉혀요." 나는 말했다. "생각나는 것은 모두, 남김없이 자초지종을 얘기해주지 않겠나? 드라보트는 미친 사제, 자넨 그 하인으로 변장하고 낙타로 국경을 넘었지, 기억하고 있나?"

"난 아직 미치지 않았어. 아직까지는 말이야. 하지만 곧 그렇게 되겠지. 물론 난 기억하고 있소. 가만히 내 두 눈만 바라보시오. 그렇잖으면 내 말은 끊기고 말 거야. 가만히 내 눈을 쳐다보고 말은 하지 마시오."

나는 몸을 앞으로 당기고 될 수 있는 대로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개넌이 한 팔을 털썩 테이블 위에 떨어트렸기 때문에 나는 그 손목을 쥐었다. 그 손은 새의 발같이 거칠어지고 손등에 붉은 다이아몬드 모양의 상처가 불거져 나와 있었다.

"아니, 그런 것을 보면 안 돼. 나를 봐야지." 개넌이 말했다. "그 상처에 대해선 나중에 얘기하지. 그러나 지금은 제발 내 머리를 어지럽게 하지 마시오. 우리는 그 캐러번들과 함께 갔지. 동행들을 기쁘게 해 주려고 나와 드라보트는 여러 가지 우스운 짓을 해 보였어. 캐러번들이 저녁 요리를 하고 있을 때 드라보트 녀석이 모두를 웃기곤 했지... 그리고... 그리고 놈들은 뭘 했더라?"

"모닥불을 피웠는데 그 불똥이 드라보트의 수염에 튀어서 다들 죽어라고 웃었지. 조그만 불똥이 드라보트의 빨간 수염으로 튀어서 말이야... 어찌나 우습던지..." 그는 눈을 내 눈에서 떼곤 백치같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나서 자네들은 캐러번과 함께 자그다라크까지 갔겠군." 나는 짐작으로 말했다. "자그다라크에 가서 가피리스탄으로 길을 돌았지?"

"아니, 그렇게 하지 않았소. 전혀 그렇지 않아요. 길이 괜찮다고 그래서 자그다라크 바로 앞에서 길을 꺾었소. 그런데 우리 일행, 나와 드라보트 그리고 낙타 두 마리가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었어. 캐러번과 헤어진 후 드라보트와 나는 완전히 옷을 갈아 입었지. 가피리스탄 사람들은 마호멧 교도에겐 말을 안 하니까 이교도가 되자는 거였지."

"그래서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을 했어. 아마 그 꼬락서니를 상상도 못할 거야. 드라보트는 수염을 반쯤 태워버리고 어깨에 양 가죽을 걸치고 머리는 듬성등성 깎아 버렸소. 놈은 내 머리도 깎고 이교도처럼 보이도록 야릇한 옷을 입혀 주었소."

"험한 산중이어서 우리 낙타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어. 그 낙타는 마치 산양처럼 성질이 거칠었지. 가피리스탄엔 산양이 많아. 그리고 그 산도 그 산양처럼 성질이 거칠지. 항상 변덕을 부리고 사람을 못 살게 굴지. 언제나 싸움을 걸어와 밤에 잠을 못 자게 하거든."

"위스키를 한 모금 더 하는 게 어때" 나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가피리스탄으로 가는 길이 너무 험해서 낙타가 가지 못하게 됐을 때 자네와 드라보트는 어떻게 했어?"

"우리가 뭘 했느냐고? 드라보트에겐 피치 다리아페로 개넌이라는 짝이 있었지. 그 놈 얘기를 해줄까? 그 녀석은 그 추운 곳에서 죽어 버렸어. 다리에서 발이 미끄러져 1페니 짜리 팔랑개비처럼 공중에서 몸이 빙빙 돌다가 뒤집어지다 하면서 피치는 밑으로 떨어졌어. 아니 그렇군, 그건 두 개 3펜스 반이야, 그 팔랑개비 말이야. 그렇지 않다면 엄청 실수한 거지. 또 손해를 보겠고..."

"낙타는 소용 없게 되었지. 그래서, 피치는 드라보트에게 말했어. '우리 목숨이 달아나기 전에 뭔가 수를 내 보자'고 말이지. 그래서 둘은 낙타를 죽여버렸지. 먹을 것이 전혀 없었거든. 그리고 총과 탄환만 챙겼어. 마침 두 사나이가 노새를 네 마리 끌고 지나가더군. 그러자 드라보트가 놈들 앞에 나가 사정을 했지. '노새를 팔라'고 말이야."

"그러자 한 녀석이 '그런 돈이 있다면 이리 내 놔라'고 그러더군. 그러나 그 놈이 칼에 손을 대기도 전에 드라보트가 무릎으로 그 놈 목을 꺾어버리니까 나머지 다른 녀석은 달아나 버렸어. 개넌은 낙타에서 내린 총을 노새에 싣고 둘이 함께 추위가 뼈 속까지 스미는 산속을 기어갔어. 그 길이란 게 손바닥 만 했지."

그가 잠깐 말을 멈춘 사이에 나는 그가 갔던 나라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물어봤다.

"될 수 있는 대로 있는 그대로 선생에게 얘기하긴 하는데, 아무래도 머리가 이전보다 좋지 못해. 드라보트가 죽을 때 똑똑히 보라고 놈들이 내 머리 속에 못을 박고 말았거든. 그 나라는 온통 산 뿐이고 노새도 견뎌내지 못하고 거기다 사람이라고 해야 가물에 콩 나기로 볼 뿐이야. 우리 둘은 기어오르다가 다시 내려가고... 개넌은 눈사태라도 생길까 봐 드라보트에게 너무 노래를 크게 부르거나 휘파람을 불지 말라고 부탁했지. 드라보트는 노래도 못 부른다면 왕이 되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그러더군."

"우리는 그렇게 노새 꽁무니를 때리면서 한 시도 쉬지 않고 10일 동안 걸었지. 우리들이 산중의 크고 평평한 골짜기에 왔을 때엔 노새가 완전히 지쳐버려 다시 죽여 버렸어. 그놈들도 우리들도 먹을 게 전혀 없었어. 우리들은 상자에 앉아 노름을 했지. 그 때 활을 든 남자 열 명이 스무 명의 남자에게 쫓겨 그 골짜기로 달려 내려왔어. 녀석들 끔찍하게 싸우더군."

"그놈들은 백인이었어. 당신이나 나보다 더 하얀 거야. 머리칼은 노랗고 체격도 아주 당당했어. 드라보트가 총을 꺼내며 그러더군. '우리 사업의 마수걸이다. 저 열 명을 돕자.' 그러면서 그는 스무 명 쪽으로 두 발 쐈어. 2백 야드 쯤 떨어진 곳에 있던 놈이 푹 쓰러지더군. 다른 놈들은 도망쳤지만 개넌과 드라보트는 상자에 앉아 골짜기 위 아래로 거리도 재지 않고 마구 쏴댔지."

"그리고 나서 열 명 쪽으로 가니까 그놈들도 우리에게 화살을 쏘더군. 하지만 드라보트가 그놈들 머리 위로 빵빵 맥이니까 전부 땅바닥에 납짝 엎드렸지. 그는 놈들에게 걸어가 발로 걷어찼지. 그리고 그놈들을 일으켜선 친하게 지내자는 뜻으로 모두 악수를 했어."

"놈들을 불러모아 상자를 운반시키면서 그는 이미 왕이 된 것처럼 행세했어. 일행은 상자를 짊어지고 골짜기를 가로질러 구름을 헤치고 산 꼭대기 소나무 숲으로 들어갔어. 거기에는 커다란 석상이 여섯 개 서 있었지. 드라보트가 그 중 제일 큰 것에 가서 - 그건 인브라라고 하는데 - 총과 탄약을 밑에 놓곤 그 석상의 코와 자기 코를 공손하게 부비고 머리를 어루만진 다음 그 앞에 절을 했지."

그는 놈들에게 돌아서서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어. '이제 됐어. 난 잘 알고 있어. 이 늙은 인형들은 모두 나와 친해.' 그리고 자기 입을 손으로 가리켰어. 녀석들이 먹을 것을 가져오자 '필요 없어'라고 하더군. 두 번째 사나이가 먹을 것을 가져와도 '필요 없어' 그러는 거야. 그러나 나이 많은 노인, 그 부락의 추장이 먹을 것을 가져오니까 '좋아' 그러면서 천천히 먹더군."

"이렇게 해서 그는 별안간 귀신처럼 떡 나타나 별로 소동을 일으키지 않고 마을에 도착한 거야. 결국 우리는 그곳의 그 다리에서 떨어지게 됐지만 말이야, 이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잘 모르겠더군..."

"위스키를 한 잔 더 하고 얘기를 계속하지 않겠나?" 나는 말했다. "그게 자네들이 들어간 최초의 부락이었군. 그런데 어떻게 해서 왕이 될 수 있었지?"

"난 왕이 아니었어." 개넌이 말했다. "드라보트가 왕이 됐지. 머리에 멋있는 금빛 왕관을 쓴 걸 보니 녀석도 그럴싸해 보이더군. 드라보트와 개년은 그 부락에 머물러 아침마다 드라보트가 늙은 인브라 곁에 앉으면 녀석들이 와선 절을 하는 거요. 이건 드라보트의 명령이었지. 그런데 어느날 이웃 마을 녀석들이 거기 쳐들어와 개넌과 드라보트는 무작정 총을 쏴대면서 놈들을 쫓아갔지."

"산을 몇 개 넘어 가보니 처음 마을과 비슷한 마을이 또 있는데 거기 녀석들이 우글거리고 있더군. 드라보트가 물었지. '너희 두 마을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거냐?'구 말이야. 그러자 놈들이 당신이나 나처럼 피부가 하얀 백인 여자를 가리키더군. 드라보트는 그 여자를 처음 마을로 데려가서 죽은 자를 세어봤는데, 모두 여덟이었어. 그 여자 때문에 싸움이 벌어져 그렇게 죽은 거야."

"드라보트는 죽은 자를 위해 하나하나 땅에 우유를 붓고 팔을 팔랑개비처럼 휘두르곤 '이제 괜찮아' 그랬어. 그리고 드라보트와 개넌은 두 마을 추장을 붙잡고 골짜기 밑으로 데려갔어. 그리고 골짜기 아래 땅에서 창으로 선을 그어 잔디밭을 둘로 나눠준 거야. 그렇게 하니까 놈들은 모두들 따라 내려와서 악마처럼 떠들고 야단이더군."

"드라보트는 놈들에게 '가서 땅을 파헤쳐 열매가 많이 열리도록 하라'고 말해줬어. 놈들은 영문도 모르면서 어쨌든 시킨 대로 하더군. 그 때부터 우리는 여러 가지 물건의 이름을 그놈들 말로 뭐라고 하는지 들어 봤지. 빵이니 물이니 불이니 우상이니 하는 것들 말이야. 그리고 드라보트는 두 마을의 사제를 우상 앞으로 끌고 가서 '거기 앉아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심판하라'고 명령했지. 착오가 생기면 쏴 죽이겠다고 하면서 말이야."

다음 주에는 놈들이 벌처럼 조용하게, 그리고 벌보다 더 훌륭하게 골짜기 땅을 전부 파헤쳤어. 사제들은 사람들의 불평을 듣고 그것을 손짓과 발짓으로 드라보트에게 말해줬어.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해.' 드라보트가 그러더군. '저 놈들은 우리를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드라보트와 개넌은 건장한 놈 스무 명을 선출해서 총의 방아쇠 당기는 법이랑, 4열 횡대, 일렬 종대 전진 따위를 가르쳐 줬지."

"놈들도 그걸 아주 좋아하더군. 게다가 머리도 좋아서 호흡도 잘 맞췄어. 그 일이 끝나자 우리는 파이프와 담배 갑을 두 마을에 하나씩 남겨 놓고 다음 골짜기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사하러 갔어. 이웃 골짜기라 해도 바위뿐인 땅이지만 어쨌든 거기에도 조그만 부락이 하나 있더군."

"개넌은 그 놈들을 처음 부락에 데려가 일을 시키려고 마음 먹었지. 그래서 놈들을 데리고 돌아와선 주인 없는 땅을 조금 나눠줬지. 놈들로 보자면 줄을 잘못 선 셈이지만 어차피 새로운 왕국을 만들기 위해선 어떤 희생양이 필요했어. 즉 이미 우리가 다스리던 백성들에게 뭔가 감명을 주려는 거였지. 놈들이 자리를 잡자 개넌은 다른 골짜기에 가 있던 드라보트를 찾아갔어."

거기는 눈과 얼음 투성이인, 아주 지독한 촌구석이었지. 너무 험하니까 군대도 겁을 먹고 전진을 못했어. 드라보트는 졸병 중 한 놈을 쏘아 죽이고는 가까스로 부대를 전진시켰지. 그리고 마침내 다른 마을에 도착해 사람들을 찾아냈어. 그놈들은 아주 낡아빠진 구식 총을 들고 있었지. 드라보트는 놈들에게 '목숨이 아깝거든 그 따위 쓸모 없는 구식 총을 함부로 쏘아대지 말라고 경고했지."

"우리는 거기 사제들하고 친해졌어. 나는 혼자 군인 두 사람과 남아서 그곳 녀석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켰어. 그러자 다른 마을 추장이 졸개들을 이끌고 쇠 북과 뿔 피리 따위를 요란하게 울리면서 기세 등등하게 쳐들어왔어. 녀석은 어디선가 새로운 신이 나타나 여기저기 짓밟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은 거야. 개넌은 반 마일쯤 떨어진 놈들 가운데서 한 놈의 팔을 쐈어. 그리고 추장에게 사자를 보내 목숨이 아깝거든 곧 와서 악수를 청하라고 전했어."

"추장이 혼자 왔는데 개넌은 그 놈과 악수하고선 드라보트가 늘 한 것처럼 자기 두 팔을 휘둘렀지. 추장은 아주 놀라더군. 개넌이 추장에게 손짓으로 네가 미워하는 적이 있느냐고 물으니 '있다'고 그러더군. 그래서 개넌은 추장 부하 가운데 몇 명을 뽑아 이쪽 군인 두 명에게 훈련을 맡겼어. 이 주일 지나니까 이 놈들도 군인 노릇을 할 수 있게 됐지. 그래서 개넌은 추장과 함께 산꼭대기 마을로 진격했어."

"추장의 부하들은 그 부락을 습격해 점령했어. 우리는 적에게 마르티니 총을 쏴댔어. 그 부락을 빼앗고 난 뒤 난 추장에게 옷 자락을 베어주면서 '내가 돌아오기까지 점령하고 있으라'고 지시했지. 이 말은 사실 성경(누가복음 19장 13절)에서 따온 거야. 나는 1천8백 야드쯤 걸어가 눈 위에 서 있는 추장 근처에 한 방 쏴줬어. 녀석의 간이 서늘하도록 두려움을 심어놓기 위해서였지. 한 놈 남기지 않고 모두 땅에 바짝 엎드리더군. 그리고 난 드라보트에게 편지를 써 보냈지."

상대방의 말을 끊어버릴 위험에도 불구하고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런 지방에서 어떻게 편지를 써서 보낼 수 있었지?"

"편지 말인가? 그래! 편지... 제발 내 두 눈 사이만 똑바로 쳐다 보라니깐! 그건 매듭 편지야. 우린 펀잡 지방의 장님 거지에게서 그 실 매듭 편지를 배웠지."

나는 과거에 마디 투성이의 작은 가지와 실을 가진 장님 한 사람이 편집실로 찾아온 것을 되새겼다. 그 장님은 그 작은 가지에 독특한 방법으로 실을 매 의미를 표시했다. 그가 표시하는 알파벳은 11가지 원시적인 음으로 요약돼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 주려고 했으나 나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난 그 편지를 드라보트에게 보냈어." 개넌이 계속했다. "왕국이 너무 커져서 내 혼자 힘으론 감당할 수 없으니 돌아와 달라고 그랬지. 그리고 시킨 일을 사제들이 잘 하고 있는지 보기 위해 최초의 골짜기로 돌아갔지. 우리가 추장과 함께 점령한 부락 이름은 바슈가이로, 처음 빼앗은 마을은 에아헤브였어. 에아헤브의 사제들은 별 문제없이 해내고 있었지만 내가 봐 줘야 할 문제도 있었어. 게다가 다른 부락 놈들이 밤마다 찾아와 화살을 쏴대곤 했지."

"난 문제를 일으킨 그 부락을 찾아가 1천 야드 떨어진 곳에서 총을 쏴 댔어. 덕분에 탄약을 다 써버렸지. 그리고 나서 이미 2,3 개월이나 자리를 비운 드라보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백성들이 소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조마조마하게 버티고 있었어."

"어느날 아침 요란하게 북과 피리 소리가 들려오더군. 보니까 단 드라보트가 수 백 명을 거느리고 언덕을 내려오는 거야. 놀란 것은 놈의 머리에 커다란 금관이 얹혀 있는 거였어."

"댄은 말했어. '어이, 개넌 대장, 이건 대단해. 뺏을만한 곳은 이제 모두 손에 넣었어. 난 세미라미스 여왕(니느웨의 창설자로 알려진 니누스 왕비)의 후손, 알렉산더의 자손이며 넌 내 동생이고 동시에 신이야! 이건 엄청난 거라고! 난 군대를 거느리고 육 주일 동안 전투를 해서 50마일 사방 부락은 남김없이 항복시켰단 말이야. 너도 금방 알게 되겠지만 나는 이 연극의 열쇠를 쥐고 있어'라는 거야."

"그는 또 말했어. '거기다 네 왕관도 갖고 왔어. 슈우라는 곳에서 그놈들에게 왕관을 두 개 만들게 했는데, 그 곳에는 금이 양 고기 속 비게처럼 바위 속에 박혀 있어. 나는 금도 봤고, 터어키 구슬을 절벽에서 파내기도 했지. 석류석은 강의 모래밭에 널려 있어. 이건 호박이 넝쿨 채 굴러들어온 거야. 사내 녀석들을 모조리 소집해. 그리고 자, 너의 왕관을 받아.' 한 녀석이 검은 주머니를 열고 왕관을 주기에, 난 머리에 얹어 보았어. 보기엔 작아도 꽤 무겁더구만. 그래도 뭔가 멋지게 보일 것 같아 그냥 머리에 얹어 두었지. 금으로 만든 것인데 무게는 5파운드 정도? 금을 두른 술통 모양이야."

"드라보트가 그러더군. '이봐 피치, 우리는 이제 전쟁을 하지 않아도 돼. 지금부턴 비밀결사를 이용하는 것이 상책이야. 그러니 도와줘!' 그리곤 내가 바슈가이에 남겨 두었던 그 추장을 끌어내더군. 우리는 그놈을 비리 휘슈라고 부르곤 했어. 옛날 우리와 함께 큰 탱크를 조종하던 비리 휘슈와 꼭 닮았기 때문이지. '이놈과 악수해봐.' 드라보트가 그러기에 악수해보고 난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어. 비리 휘슈가 그 악수 법, 바로 그 악수하는 법을 알고 있는 거야."

"나는 아무 말 않고 다시 제 2 급 악수 법으로 해보았지. 그랬더니 역시 응답의 악수를 해오더군. 이번엔 제 3 급 결사단원의 악수 법으로 해보았더니 그것은 모르더군. '이놈은 2급 결사단원이야!'하고 드라보트에게 말해줬지. '이놈은 암호도 알고 있나?' '그럼!' 드라보트가 대답했지.

'그런데 사제 녀석들도 모조리 이 악수 방법을 알고 있어. 이건 기적이야! 추장과 사제들은 마음만 먹으면 우리들과 꼭 같은 제 2 급 결사단원의 집회도 열 수 있어. 그리고 바위에다 결사의 기호를 새겨놓고 있는데, 제 3 급은 모르고 있어. 하지만 그런 게 있다는 것은 눈치를 채고 있어. 이건 틀림없어. 난 아프가니스탄 놈들이 제 2 급 결사단원 등급을 알고 있다는 걸 전부터 짐작했지만, 이건 기적이야. 난 신이기도 하고, 또 결사의 지부장이기도 해. 난 제 3 급의 지부 회합을 열 작정이야. 그리고 우리 둘이 각 부락 사제들 중에서 우두머리와 추장을 진급 시키자구.'

나는 말했지. '인가를 받지 않고 지부 회합을 연다는 건 규칙 위반이야. 우리는 어느 지부와도 의논한 적이 없잖아.' '그게 바로 수완이라는 거야.' 드라보트가 그러더군. '이 나라를, 저절로 굴러가는 수레처럼 손쉽게 다스리는 방법인 거야. 지금 새삼스럽게 인가를 받을 수 있나. 머뭇거리면 소동만 일어날 뿐이야. 난 추장 40명을 공적에 따라 진급 시켜줬어. 이 놈들을 마을마다 배치하고 어떤 식이건 상관 없으니까 지부 회합을 열어 보자구. 장소는 인브라의 사원이 적당할 거야. 여자들에겐 네가 가르쳐 줘서, 휘장을 만들도록 해. 난 오늘 밤 추장들의 접견식을 가질 거야. 지부 회합은 내일이야.' 드라보트는 이렇게 말했어."

"그날 밤 난 다리가 뻣뻣해지도록 쫓아다녔지. 이 결사를 만드는 일은 우리에게 무척 중요했지. 사제의 아내들에게는 등급에 따라 각각 다른 휘장을 만들라고 가르쳤어. 드라보트의 휘장은 베가 아닌 흰 가죽에 선을 두르고 터어키 구슬로 장식했지. 네모진 큰 돌을 사원 안에 갖다 놓고 지부장 좌석을 만들고 나머지 회원들 의자는 작은 돌로 만들었지. 그리고 검은 돌에 하얗게 사각형을 그려넣고 하여간 만사를 그럴싸하게 형식을 갖춘 거지."

"접견식은 그날 밤 큰 모닥불을 피워 놓고 산 중턱에서 열렸어. 그 석상 앞에서 드라보트는 자기와 내가 신이며 알렉산더의 아들로 지부장을 한 일도 있으며 또 우리들이 가피리스탄으로 온 것은 누구든지 평안 무사하게 먹고 마실 수 있도록, 그리고 특히 모두 우리에게 복종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어."

"추장들이 차례로 와서 우리와 악수를 했는데, 모두들 피부가 하얗기 때문에 마치 옛날 친구들과 악수하는 기분이더군. 우리는 녀석들 인상에 따라 인도에서 알았던 사람들의 이름을 붙여 줬지. 즉 비리 휘슈나 호리 딜워스 따위로 말이야. 내가 마우에 있을 때 시장 관리인이던 피키 개어건이란 이름도 붙여 줬지."

"다음날 지부 회합에서 깜짝 놀랄만한 기적이 일어났어. 늙은 추장 하나가 우릴 뚫어져라 바라보는 게 난 기분이 무척 언짢았지. 그 의식이 결국 사기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맴도는데다 녀석들이 어디까지 사실을 알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거든. 그 늙은 사제는 바슈가이 부락 건너편에서 온,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 아가씨들이 정성스레 만든 지부장의 휘장을 드라보트가 몸에 걸치는 순간, 그 늙은이가 고함을 지르면서 드라보트가 앉아 있던 돌을 뒤집어 엎으려고 하더군."

"나는 순간 '이제 다 틀렸어'하고 드라보트에게 말했지. "정식 허락도 없이 지부를 만들려고 하니 이런 일이 생긴 거야." 그러나 드라보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더군. 열 명의 사나이가 지부장 의자를 들어 뒤집어 엎어도 - 그 의자는 인브란의 바로 그 돌이었지 - 꿈적하지 않았어. 그 늙은 사제는 뒤집은 돌 아래쪽 흙을 닦아 내더군. 그리고 거기서 드라보트의 휘장에 새겨진 것과 똑 같은 표지를 발견해 다른 사제들에게 보여주었어."

"인브라의 다른 사제들도 거기 그런 것이 새겨진 것을 모르고 있었어. 그 늙은 사제는 드라보트 앞에 엎드려 드라보트의 발에 키스하더군. '이봐, 이번에도 기가 막히게 운이 맞아 떨어졌어.' 드라보트가 내게 말하더군. '놈들은 이 기호가 어떻게 새겨진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어. 이제 우리는 안전해. 우릴 위협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드라보트는 의사봉 대신 들었던 총의 개머리판을 땅바닥에 쾅 내리치고는 외쳤어."

"그는 '내 오른팔의 권능으로, 그리고 여기 피치의 도움을 얻어 나는 내가 이 나라 가피리스탄의 비밀공제조합 모태 지부의 지부장임을 선언한다. 또 피치와 함께 이 나라의 왕이 될 것임도 아울러 선언한다.' 그리고선 왕관을 쓰더군. 그래서 나도 내 것을 머리에 썼지. 난 행사 집행자 역할을 했고, 그리고선 아주 엄숙한 의식을 시작한 거야. 사실 놀라 자빠질 만한 기적이 아닐 수 없었지."

"별로 설명도 해주지 않았는데 사제들은 기억이 생생한 것처럼 제 2 급의 방식대로 격식을 맞춰 움직이는 거야. 그 의식이 끝나자 피치와 드라보트는 여러 부락의 신분이 높은 사제나 추장 등 우두머리급들을 진급 시켰지. 비리 휘슈가 그 가운데 제일 지위가 높았어. 우리는 휘슈의 간이 콩알만 해지도록 일부러 무서운 의식을 치렀지. 사실 그건 원칙이 아니지만, 당시로선 그럴 필요가 있었어. 우두머리는 10명 이상 두지 않았지. 우리가 주는 지위를 싸구려로 여겨서는 곤란하거든. 녀석들은 서로 진급하고 싶어서 다들 아우성이었지."

"드라보트는 '반 년이 지나면 또 집회를 열어 너희들의 활동 결과를 조사하겠다.'고 말했어. 놈들 부락의 사정을 알아보니, 놈들도 이제 서로 싸우는 것에 지치고, 싫증을 내고 있더군. 사실 자기들끼리 싸우지 않더라도 무슬림(마호멧 교도)들과 싸울 일이 만만치 않았어. 드라보트는 '무슬림들이 공격해오면 너희들이 나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지."

"드라보트는 또 말했어. '마을 사람 열 명에 한 명씩 군사를 뽑아 국경을 지키도록 한다. 한 번에 이백 명씩 이 골짜기에 와서 군사 훈련을 받는다. 올바로 행동하면 앞으로는 누구도 사살되거나 창에 찔지 않는다. 너희가 나를 속이지 않으리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너희는 백인, 즉 알렉산더의 후예이며 아무 데서나 빈둥거리며 자빠져 있는 깜둥이 무슬림과는 다르니까 말이야. 너희들은 나의 백성이다. 그러므로 신에게 맹세코...' 녀석은 여기서부터는 영어로 말하더군. '난 너희들을 훌륭한 국민으로 만들어 주마. 그렇지 않으면 나는 도중에서 죽게 되겠지.'하고 말이야."

"그때부터 반년 간 우리가 한 일을 일일이 말할 수는 없어. 드라보트 녀석이 나로선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많이 벌렸거든. 또 나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일을 해냈지. 즉 드라보트는 그 지방 놈들의 말을 금방 배워 버렸어. 나는 녀석들의 경작을 돕고, 가끔 군인들을 데리고 다른 부락을 순시하러 다니고, 골짜기 사이에 다리를 놓곤 했지. 골짜기 때문에 교통이 전혀 이어지질 않았으니까."

"드라보트는 내게 아주 잘해 주었지. 하지만 그 시뻘건 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소나무 숲을 어슬렁거릴 땐 뭔가 내가 간섭할 수 없는 계획을 머리 속에서 짜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지. 그래서 나는 점잖게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지."

"드라보트는 백성들 앞에선 결코 날 소홀히 대하지 않았어. 토인들은 나와 군대를 무서워하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드라보트가 우두머리였어. 그는 사제나 추장들과 모두 친하게 지냈지. 누구나 언덕을 넘어 드라보트를 찾아와 불평을 말하곤 했는데, 드라보트는 공평하게 이것을 들어주고 네 사람의 사제를 불러 어떻게 처리하라고 일러주곤 했지. 다른 조그만 부락과 전쟁을 할 때는 중요한 추장들을 불러 회의를 가졌지."

"바슈가이에서는 비리 휘슈, 슈우에서는 피키 개건, 그리고 가후제람이라는 추장이 그들이었어. 이것이 최고 군사회의였던 셈이야. 그리고 바슈가이, 슈우, 가와그, 마드라에서 4명의 사제들이 참가한 것이 이를 테면 핵심 간부회의였어. 그 회의의 결정에 따라 나는 부하 40명에게 총 스무 자루를 들리고 일꾼 60명에게 터어키 구슬을 짊어지게 해서 마르티니 총을 사러 고아반드 지방으로 갔지. 그리고 헤라티 국왕 근위연대가 갖고 있는 마르티니 총을 몰래 사들였어. 놈들은 터어키 구슬을 주면 자기 이빨이라도 빼 줄 놈들이거든."

"나는 고아반드에 한 달 머무르면서 그곳 관리 한 녀석에게 입막음으로 좋은 터어키 구슬을 주고, 연대 지휘관인 대령에겐 좀 더 많이 줘서 매수했지. 그 두 사람을 통해 마르티니 총 2백 자루, 사정 거리 6백 야드인 가브르제 총 상급품 1백 자루, 그리고 품질이 별로 좋진 않지만 거기 쓸 탄약을 입수했어."

"나는 그걸 갖고 돌아와 군사 훈련을 받는 녀석들에게 나눠 주었지. 드라보트는 너무 바빠서 이런 일에 손을 댈 수 없었어. 그래도 처음 훈련 받은 고참병들이 도와줘서 5백 명을 훈련시켰고 그 가운데 2백 명은 총을 쏠 수 있도록 했지. 허술하게 손으로 만든 총이지만, 놈들에겐 기적 같은 물건이었지."

"겨울이 가까워 오니까 드라보트는 소나무 숲 속을 왔다 갔다 하면서 화약 공장을 세울 엄청난 계획을 세우고 있었어. '겨우 나라 하나 세우는 건 흥미가 없어졌어!' 드라보트가 말하는 거야."

'난 이제 제국을 만들 작정이야! 이 놈들은 흑인이 아닌, 영국인이야! 이 놈들의 눈과 입을 보라구. 서고 앉는 모습도 그렇고. 이 놈들은 집안에서 의자를 사용해. 이 놈들은 [사라진 종족]으로 알려진 바로 그 녀석들이야. 결국 영국인이란 얘기지. 사제들이 반대만 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국세 조사를 할 계획이야. 이 일대 골짜기에는 최소한 2백만 명 정도는 살고 있어. 부락은 어린애들로 가득하지. 2백만 명의 백성, 그리고 25만 명의 병사, 게다가 이들은 모두 영국인이야! 필요한 것은 총과 약간의 훈련 뿐이야. 러시아 놈들이 인도를 엿볼 경우 25만 명의 병사가 러시아 옆구리를 찌를 준비를 하고 있는 셈이지.'

"그는 수염을 비비면서 말했어. '우리는 제왕이 될 수 있어. 지상의 제왕! 브르크의 토후 따위는 이제 우습지. 인도 총독이라 해도 우린 대등하게 대할 수 있어. 총독에게 말해서 우리 정치를 도와주는 훌륭한 영국인 12명, 내가 알고 있는 12명을 보내달라고 말해야겠어. 세고우리에는 연금으로 생활하는 마크레이 중사가 있네. 나에게 몇 번씩 맛있는 저녁 식사를 대접해 주었지. 더구나 그 마누라는 내게 바지도 하나 주었어. 톤후 형무소 간수인 동킹도 괜찮지. 내가 인도에 있을 때 뒤를 봐주던 사람들이 많단 말이야. 봄이 되면 그들에게 사자를 보내는 거야. 그리고 지부장인 나의 업적에 대해 편지를 써 조합본부의 사면장을 얻도록 하는 거야.

지금 인도 원주민 병사들이 마르티니 총을 받게 되면, 그 동안 사용하던 스나이더 총은 전부 쓸모 없게 돼. 낡긴 했지만, 이런 변방에서 전쟁을 치르는 데는 아직 괜찮은 물건이야. 영국인 12명과 1백만 자루의 스나이더 총으로 조금씩 아프가니스탄 왕국을 정복하는 거야. 일 년에 20만 자루씩 입수하면 돼. 그래서 우리들의 제국을 만드는 거야.

모든 일이 이루어지면 나는 이 왕관, 내가 쓰고 있는 이 왕관을 빅토리아 여왕 앞에 무릎을 꿇고 바치는 거야. 그러면 여왕 폐하는 말하겠지. [일어서시오, 다니엘 드라보트 경!] 와, 이건 엄청난 일이야! 굉장하지? 응, 이봐! 그러나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바슈가이, 가아와그, 슈우, 그리고 여기저기에 말이야.'

'도대체 무슨 일 말이야?' 나는 드라보트에게 물었지. '가을엔 군사 훈련을 시킬 수 없어. 저 낮게 깔린 구름을 좀 봐. 엄청난 눈이 내릴 거야.'

'내가 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다니엘은 내 어깨를 꽉 붙잡으면서 말했어. '나는 네가 반대하는 일은 결코 하고 싶지 않아. 나를 도와서 현재의 지위까지 오르게 해준 것은 누구도 아닌 바로 너니까 말이야. 너는 최고 사령관이며, 국민들도 모두 그걸 잘 알고 있어. 그러나, 좌우간 나라가 커졌으니까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을 네가 다 도와줄 수는 없단 말이야.'

'그러면 저 촌뜨기 중 놈들에게 말해보지 그래?' 나는 이렇게 말하고선 곧 잘못했다고 후회했지. 하지만 그 동안 촌놈들을 훈련시켜 군사로 만드는 일이며, 여러 가지로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해 왔는데, 다니엘 녀석이 그렇게 거만한 말을 하니까 나도 기분이 나빠졌던 거라구

'싸움은 그만 두자, 피치.' 다니엘 녀석이 화도 내지 않고 말하더군. '너도 왕이고, 이 나라의 절반은 네 것이야. 그래도 피치, 이건 분명해. 이젠 우리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이 필요해. 우리를 대신해 온갖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서너 명은 있어야 해. 나라가 커진 데다, 내가 항상 모든 일을 다 지시할 수는 없단 말이야. 생각한 것을 실행할 수 있는 시간도 부족하고... 게다가 이제 겨울이 닥쳐오고 있어.' 녀석은 새빨간 수염을 씹으며 말했어.

'내가 잘못했어, 다니엘.' 내가 말했지. '나는 나름대로 힘껏 했어. 놈들을 훈련시키기도 하고, 보리를 솜씨 있게 쌓는 법도 가르쳤고. 고아반드에 가서 무기도 가져왔지. 하지만 네가 지금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지 내가 모를 리 있나. 왕이란 자리는 그렇게, 언제나 스트레스를 받는 거겠지.'

'또 다른 문제도 있어.' 드라보트는 방을 거닐며 말했어. '이제 겨울도 되고, 국민들도 크게 떠들어댈 것 같지는 않아. 또 들고 일어난댔자 우리를 어떻게 하진 못할 거야. 난 이제 마누라를 얻어야겠어.' 난 말했지. '제발, 여자에겐 손을 대지 말게. 난 바보지만, 우리 둘이 할 수 있는 건 모두 손에 넣었다는 걸 알고 있어. 계약을 생각해. 그리고 여자에겐 다가가지 말란 말이야.'

'그 계약은 우리들이 왕이 될 때까지만 유효한 거야. 그리고 우리가 왕이 된 지 벌써 몇 달째야.' 드라보트는 손에 왕관을 들고 무게를 달아보며 말했어. '너도 아내를 얻도록 해, 피치. 추운 겨울에 너를 따뜻하게 안아줄 그런 귀엽고 발랄한 아가씨 말이야. 여기 아가씨들은 영국 여자보다 더 좋아. 게다가 맘대로 고를 수도 있어!'

'유혹하지 마! 지금보다 더 안정될 때까지는 난 여자와 사귀지 않겠어. 나는 두 사람 몫을 일해왔고, 너는 세 사람 몫을 했지. 조금 몸을 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좋은 담배를 가져오고 맛있는 술을 들여오는 건 뭐 괜찮겠지. 하지만 여자는 절대 안돼!'

'여자 얘기는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어.' 드라보트가 말했어. '난, 정식 아내를 말하는 거야. 왕자를 낳을 왕비 말이야. 제일 강한 종족에서 왕비를 선출하면 그놈들과 친족 관계를 맺게 되는 거야. 그리고 왕비는 내 곁에서 국민들이 우리들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내게 모두 얘기해 주겠지. 내가 바라는 건 바로 그런 것이야.'

'내가 선로공으로 있던 시절에 모갈에서 함께 살았던 그 벵갈 여자를 기억하고 있나?' 난 드라보트에게 말했어. '그 여자도 꽤 괜찮았어. 내가 잘 모르는 말이며, 그밖에 이것저것 가르쳐 주었지.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된 줄 알아? 역장 심부름꾼과 눈이 맞아서 내 한 달 월급의 절반을 갖고 도망쳐 버렸어. 트기 녀석들과 붙어서 다도우르 환승역으로 간 거지. 거기서 뻔뻔스럽게 그 녀석이 자기 남편이라고 지껄여댔다는 거야. 사정을 뻔히 아는 그 기관수 앞에서 말이야!'

'그건 그거고, 이건 달라.' 드라보트는 잘라 말하더군. '여기 여자들은 너나 나보다 더 피부가 하얗지. 난 겨울 안에 왕비를 맞아들이겠어.'

'마지막 부탁이다. 단, 제발 그만둬.' 나는 말했어. '그런 짓을 하면 재난이 올 뿐이야. 성경에도 쓰여 있지만 왕은 여자에게 정력을 낭비하지 말아야 해. 나라를 다스린 지 얼마 되지 않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지.'

'나도 최종적으로 대답하는 거야. 난 왕비를 얻을 거야.' 드라보트는 이렇게 말하고 왕관과 수염을 햇빛에 빛내면서 커다란 악마처럼 소나무 숲을 빠져 나갔어."

"그러나 막상 아내를 맞아 들이려고 하니, 드라보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어. 이 문제를 회의에 붙이자,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어. 비리 휘슈만이 나중에 '아가씨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좋겠다'고 말하더군. 드라보트는 결국 화를 터뜨렸지. 인브라의 석상 앞에 서서 '도대체 내가 뭐가 문제냐?'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 거야.

'내가 개냐? 너희들의 딸의 상대로 부족하다는 거냐? 나는 이 나라를 위해 모든 힘을 바쳤다. 아프가니스탄 무슬림들이 공격해오는 것을 막은 사람이 누구야?' 사실 그 일은 내가 해낸 것이지만 드라보트는 그런 걸 기억해낼 상황이 아니었어. '누가 총을 사들였나? 다리를 고친 사람이 누구야? 저 돌에 새겨진 기호의 지부장이 도대체 누군지 말해봐!' 그는 그렇게 말하고 회의 때 의자 대신 앉았던 둥근 나무를 손으로 딱딱 내리쳤어."

"비리 휘슈는 한 마디도 못하고, 다른 녀석들도 가만히 있었지. '이봐, 진정하라구.' 내가 말했어. '역시 아가씨들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어. 우리 조국에서 모두 그렇게 하고, 여기 사람들은 영국인과 꼭 같으니까 말이야.' 그러나 드라보트는 버럭 화를 냈지. '왕의 결혼은 국가적인 행사다.'라면서 말이야. 그는 회의실에서 나가 버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땅만 쳐다보면서 침묵을 지켰지."

"나는 비리 휘슈 바슈가이 추장에게 이 문제에 어떤 장애물이 있는지 알아봤어. '친구에겐 숨기지 말고 말해야 하네' 하면서 말이야. '잘 알지 않습니까?'하고 비리 휘슈가 대답하더군. '뭣이나 다 알고 있는 당신에게 일부러 말씀드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인간의 딸이 신이나 악마하고 결혼할 수 있습니까? 이건 보통 일이 아니예요.'

성경에 비슷한 얘기가 있었던 걸 난 기억했지. 그러나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가 신이라고 믿어온 녀석들에게 그게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더군.

'신은 뭐든 할 수 있어.' 난 말했어. '만약 우리 왕이 누구의 딸을 좋아하게 되면 그 딸이 죽게 버려두지 않아.'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리 휘슈가 대답했어. '이곳 산중에서는 여러 신이나 악마들이 때로 인간의 딸과 결혼하지만 그러고 나면 그 딸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됩니다. 당신들은 저 석상에 새겨진 기호를 알고 있어요. 그걸 아는 자는 신 뿐입니다. 그 지부장 표시를 보이기 전에는 나도 당신들이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난 그 제 3 급 결사단원 표시가 전혀 우연의 일치였다는 걸 털어놓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어. 그날 밤 내내 산중턱 모든 사원에서 뿔 피리가 울리고 어떤 아가씨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지. 어떤 사제가 말해주기를, 그 아가씨가 왕에게 시집 오기로 결정됐다는 거야.

'이런 어리석은 소동은 그냥 둘 수 없어.' 드라보트가 말했어. '난 너희들 관습에 간섭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난 어쨌든 아내를 얻어야 해.'

'저 아가씨는 지금 무서워하고 있는 겁니다.' 그 사제가 대답했지. '신에게 시집가면 반드시 죽는다고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지금 위로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좀 더 잘 위로해줘.' 드라보트는 말했어. '그렇잖으면 이 개머리판으로 너희들을 갈겨 주겠어. 두 번 다시 위로 따위를 할 수 없도록 말이야.' 그리곤 그는 다음날 아침 자기 손에 들어올 여자를 생각하면서 한밤중까지 여기저기 돌아다녔어. 아무래도 침착해질 수가 없었던 거야. 설혹 스무 번이나 왕 노릇을 했다 해도 외국에서 여자를 맞아들인다는 것은 참 시끄러운 일이라는 걸 안 거지."

"다음 날 아침 드라보트가 아직 자고 있을 때 내가 일찍 일어나 보니 사제들이 여기저기서 쑥덕쑥덕 하고, 추장들도 얼굴을 맞대고 수근거리고 있더군. 그러면서 날 힐끗힐끗 보는 거야.

'무슨 일이 있나, 비리 휘슈?' 난 모피 옷을 걸친, 풍채가 당당한 바슈가이 추장에게 물었어. '확실히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는 대답했지. '지금 임금님의 결혼을 중단시키는 것이 왕이나 당신, 그리고 내 자신에게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난 말해줬지. '하지만, 이봐. 비리 휘슈 당신은 우리에게 맞서기도 했고, 또 우리 편에서 싸우기도 했으니까 말하지. 왕도 나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만들어낸,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야. 맹세코 우린 그저 평범한 인간이야.'

'아마 그렇겠지요.' 비리 휘슈가 대답했어. '그래도 역시 유감이군요.' 그리고 나서 녀석은 잠시 모피 외투에 고개를 박고 생각하더니 다시 말했어. '임금님, 당신이 인간이건 신이건, 또 악마라 할지라도 그건 상관 없소. 오늘 난 당신 곁에 있겠어요. 난 20명의 병사를 데려왔지만, 그들은 내 명령에 따를 겁니다. 우린 이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바슈가이에 가 있기로 합시다.'

밤에 눈이 조금 내려, 북쪽 하늘에 두껍게 드리워진 어두운 구름을 빼면 모든 것이 아주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어. 드라보트 녀석은 팔을 휘젓는가 하면 발을 구르면서 그림 속 인물보다 더 기쁜 표정으로 머리에 왕관을 쓰고 나오더군.

'더 이상 부탁하지 않겠어. 제발 그만 두게.' 난 소리를 죽여 말했지. '비리 휘슈가 그러는데 폭동이 일어날 것 같다네.'

'내 백성이 폭동을 일으킨다고?' 드라보트는 말했어. '별 일 아닐 거야, 피치. 여자를 얻지 않겠다니, 바보 같군. 색시는 어디 있지?' 그는 마치 수 당나귀처럼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추장과 사제들을 모두 소집해. 그리고 황제에게 어울리는 황후를 어떻게 골랐는지 보여달라고 해.'

일부러 소집할 필요도 없었지. 소나무 숲 가운데 공터로 총과 창을 든 녀석들이 전부 모여 있었어. 사제 몇 명이 신부를 데리러 조그만 사원으로 내려가자 죽은 사람을 부르는 것 같은 뿔 피리 소리가 울리더군. 비리 휘슈는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되도록 다니엘 옆에 붙어 있었고, 그 뒤에는 20명의 부하가 구식 총을 들고 서 있었지. 녀석들은 모두 키가 6피트가 넘는 놈들이었어."

"나는 드라보트 옆에 서 있었지. 신부가 올라오는 걸 보니 대단한 미인이더군. 은과 터어키 구슬로 장식했지만,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지. 신부는 자꾸만 사제들 쪽을 쳐다 보더군.

'이 정도면 됐어.' 드라보트가 신부를 내려다 보며 말했어. '이봐, 아가씨. 무서워할 필욘 없어. 자, 와서 내게 키스해줘.' 그가 신부를 안자, 신부는 두 눈을 감고 비명을 지르더니 얼굴을 그의 타는 듯 붉은 수염에 갖다 댔는데, 그만...

'이 계집이 나를 물어 뜯었어!' 드라보트는 손으로 자기 턱을 두들기면서 말했어. 과연 그 손으로 빨간 피가 흐르더군. 비리 휘슈와 구식 총을 든 두 사람의 병정이 그의 어깨를 잡고 바슈가이 사람들 쪽으로 끌어 당겼지. 사제들은 악다구니를 써대더군. '신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그냥 보통 인간이야!' 난 간이 서늘해졌지. 사제 한 놈은 똑바로 내게 달려들고 그 뒤 병사들은 바슈가이 사람들에게 총을 쏘아대기 시작하더군.

'전능하신 하나님!' 다니엘은 말했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돌아와요! 피해요!' 비리 휘슈가 말했어. '모든 게 끝났어요. 폭동이 일어났어요. 바슈가이로 피할 수 있는 데까지 피해 봅시다.'

난 내 부하들 즉 정규군들을 진정시켜 보려고 했지만 허사였지. 그래서 별 수 없이 마르티니 총을 쏘아서 그 거지 같은 녀석 세 명을 한꺼번에 쓰러뜨렸어. 골짜기는 온통 울부짖고 외치는 소리로 가득 찼어. 어느 놈이나 한결같이 '신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그냥 보통 인간이다!'하고 떠들어 대는 거야."

"바슈가이 병사들은 모두 용감화게 비리 휘슈 편에 붙어 있었지만, 그들의 구식총은 위력이 가브르제 총의 절반도 못되지. 네 사람이 총에 맞았어. 다니엘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소처럼 고함을 지르고 있었어. 비리 휘슈는 그가 사람들 앞으로 뛰어가려는 것을 막느라고 무척 고생을 했지.

'이제 버틸 수 없소.' 비리 휘슈가 말했지. '골짜기로 내려가. 모두 적이다.' 구식총을 든 병사들이 달려가자 우리도 드라보트를 억지로 끌고 골짜기를 내려갔지. 그는 무섭게 몸부림을 치며 '나는 왕이다'하고 외쳐댔어. 사제들은 우리에게 큰 돌을 굴러 떨어뜨리고 정규군이 총을 탕탕 쏘아대는 바람에 살아서 골짜기에 도착한 사람은 드라보트와 비리 휘슈와 나를 제외하면 겨우 여섯 명 뿐이었어."

"놈들은 사격을 중단했지만 이번엔 사원 안에서 요란스럽게 뿔 피리를 불어대더군. '도망가요. 빨리 도망가요!' 비리 휘슈가 말했어. '놈들은 우리가 바슈가이에 도착하기 전에 모든 부락에 파발을 보낼 겁니다. 바슈가이라면 당신들을 보호할 수 있지만,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소.'

내 생각으론, 그때 다니엘의 머리가 돌아버린 것 같아. 그는 마치 목구멍을 찔린 돼지처럼 여기저기 힐끔거리더군. 그는 혼자 돌아가 맨손으로 사제들을 죽일 생각이었던 거야. '난, 황제야!' 다니엘이 그러더군. '그리고 내년엔 여왕 폐하의 기사가 되는 거야.'

'맞아, 단' 내가 그랬지. '그래도 지금은 빨리 달아나야 해.'

'이건 네가 군대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야. 이건 네 잘못이야.' 그는 말했어. '군대가 반란을 일으키는 걸 모르고 있다니. 이 멍청한 기관수, 선로공, 기차를 공짜로 타는 가짜 선교사, 도둑놈!' 그는 바위에 걸터앉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게 마구 욕설을 퍼부었지. 이런 곤경에 처한 건 순전히 단의 바보짓 때문이었지만, 당시 난 완전히 절망해서 그걸 따질 기운도 없었어.

'미안해, 단' 나는 말했어. '하지만 여기 놈들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이 소동은 우리가 57년에 겪은 사건이나 마찬가지야(1857년 인도인들의 폭동. 이 사건을 이용, 영국은 인도에 대한 통제를 공고히 했다). 그렇지만 바슈가이에 도착하면 또 어떻게 해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럼 바슈가이로 가자.' 단이 말했어. '그리고 내가 한 번 더 여길 올 때는 맹세코 골짜기를 싹 쓸어서 고양이 새끼 한 마리 남겨놓지 않겠어.'

우리들은 그날 종일 걸었어. 드라보트는 그날 밤 내내 수염을 물고 혼자서 중얼거리며 눈길을 걸었지.

'아무래도 달아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비리 휘슈가 말했어. '사제들은 부락에 파발을 보내 당신들이 보통 인간이라고 말했을 겁니다. 왜 일이 더 안정될 때까지 신이라고 행세하지 않았습니까? 난 이제 틀렸어요.' 비리 휘슈는 눈 위에 몸을 던져 신에게 기도를 드리더군."

"다음날 아침 우리는 지독한 곳으로 들어갔지. 어디를 봐도 평지는 전혀 없고, 먹을 것도 없었지. 바슈가이 사람 6명은 이상한 표정으로 비리 휘슈를 바라봤지만 말은 한 마디도 없었지. 정오쯤 우리는 눈으로 온통 뒤덮인 평평한 산꼭대기에 도착했어. 그런데 이것 봐라? 거기엔 군대가 진을 치고 우릴 기다리고 있지 않겠어?

'파발들이 엄청 빠르게 다닌 모양이군.' 비리 휘슈가 가늘게 웃으면서 말하더군. '놈들은 우릴 기다리고 있어.'

저쪽에서 서너 명이 총을 쏘아대더군. 그 중 한 발이 다니엘의 정강이에 맞았어. 덕분에 단은 제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어. 눈 너머로 상대방을 바라보고 놈들이 든 총이 우리가 이 나라에 가져온 총이라는 걸 알게 됐지.

'우린 이제 마지막이야.' 그는 말했어. '저 놈들은 영국인인가? 이봐, 여기 있는 사람들, 너희들이 이 지경에 빠진 것은 내 어리석은 행동 때문이었어. 비리 휘슈, 돌아가게. 부하들을 데리고 돌아가 줘. 넌 나를 위해 최선을 다했어. 이제 내 손을 놓게.'

'그리고 개넌, 나와 악수하고 비리 휘슈와 함께 떠나다오. 아마 놈들은 너를 죽이지는 않을거야. 난 혼자 부닥치겠어. 죄는 내게 있어. 바로 왕인 내게 말이야.'

'빌어먹을!' 난 말했지. '빌어먹을... 단, 난 너와 함께 있겠어. 비리 휘슈, 자네는 피하게나. 우리 둘이 저 놈들을 상대하겠어.'

'난 추장이오.' 비리 휘슈는 침착하게 말했지. '난 당신들과 함께 있겠소. 부하들만 피하게 하면 되오.'

바슈가이 사람들은 두 말 없이 피해 달아나고, 단과 나와 비리 휘슈는 북과 피리를 울려대는 가운데로 걸어갔지. 대단한 추위였지. 너무 추웠어. 지금도 내 머리 꼭대기에 그 추위가 남아 있어, 덩어리처럼 뭉쳐 있지."

신문사 일꾼들은 모두 잠에 골아 떨어져 있었다. 석유 램프 두 개가 편집실 안에서 타고 있었다. 내가 몸을 앞으로 당기자 땀이 얼굴을 타고 압지 위로 흘러 떨어졌다. 개넌은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정신을 잃을까 두려웠다. 나는 얼굴을 닦고 무참하게 짓이겨진 그의 손을 새삼 쥐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곤 어떻게 됐어?"

내 눈이 그의 얼굴에서 조금 벗어난 모양이다. 그의 의식이 갑자기 흐려졌다.

"뭐라고 그랬소?" 개넌은 우는 소리를 냈다. "놈들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우리 세 사람을 붙들었어. 눈을 따라 걸어가는 동안에도 전혀 소리를 내지 않았어. 처음 손을 댄 놈을 왕이 때려 쓰러뜨려도, 피치가 놈들 한복판에 마지막 총알을 쏘아도 말이야. 그 돼지 새끼들은 끝까지 소리 하나 내지 않았어. 다만 꽉 뭉쳐 있을 뿐. 놈들의 털옷에서 구린내가 났지."

"우리와 제일 친했던 비리 휘슈란 친구가 있었는데, 놈들은 그 자리에서 돼지처럼 그 친구의 목을 끊어 버렸어. 그러자 왕이 피투성이 눈밭을 발로 걷어차며 말했어. '우리는 이제 이 꼴이 됐다. 다음엔 무슨 일이 생길까?' 그런데 피치, 피치 다리아페로 이 친구는 선생, 정말 털어놓고 말하지만, 그는 정신이 돌아버린 거야. 아니, 머리가 돈 게 아니지. 왕이 정신이 이상해진 거야. 그렇게도 정성 들여 만든 그 다리 위에서 말이야. 그 종이 베는 칼 좀 빌려주시오, 선생."

"놈들은 1마일 정도 그들을 끌고 와서는 밑에 강물이 흐르는 절벽에 걸린 다리로 왔어. 그렇게 걸린 다리를 본 적 있나요? 놈들은 마치 소라도 쫓는 것처럼 몰아댔소. '너희들, 잘 봐둬!' 왕이 말했지. '내가 사내답게 죽을 수 없다고 여기는 모양이지?' 그는 피치 쪽을 돌아봤지. 귀신처럼 울부짖는 피치 쪽을 본 거야.

'피치, 내가 널 이렇게 만들었어.' 그가 말했어. '가피리스탄에서 행복하게 잘 지내는 너를 끌어내, 이런 꼴을 당하게 만들었어. 네는 가피리스탄 황제군의 총사령관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용서한다고 말해 줘, 피치.'

'괜찮아.' 피치가 말했지. '난, 자네를 진심으로 용서하네, 단.'

'악수해줘, 피치.' 그가 말했어. '잘 있어.'

그는 오른쪽이나 왼쪽을 돌아보지 않고 똑바로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흔들리는 다리 한복판까지 걸어갔어. 그리곤 '이 거지 같은 새끼들아, 자 이제 끊어라!'하고 외치더군. 놈들은 다리를 탁 끊었어. 단은 2만 마일 깊이 저 아래로 빙빙 돌면서 떨어져 갔지. 물에 부딪힐 때까지 반 시간이나 걸렸으니까. 내겐, 그의 몸이 바위에 부딪히는 것이 보였어. 금관이 그 옆에 굴러 떨어지더군."

"그리고 나서 놈들이 소나무 사이에 피치를 넣고 어떻게 한 줄 알겠어? 피치의 손을 보면 알겠지만, 선생, 놈들은 피치를 찢어 죽이려고 했어. 손발에 나무 못을 박았지. 그래도 죽진 않았어. 그는 거기 매달린 채 가쁜 숨을 쉬고 있었지. 다음 날 놈들은 피치를 끌어내리곤 '죽지 않았군, 기적이야' 하더군. 놈들은 그를 죽이지 않고 끌어 내렸어. 놈들에게 조금도 나쁜 짓을 하지 않은 그 피치, 불쌍한 피치를 말이야."

그는 몸을 흔들면서 울기도 하고 상처 자국이 있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곤 하면서 어린애처럼 십 분 가량 탄식을 거듭했다.

"이 놈은 다니엘보다 오히려 더 신에 가깝다고 하면서, 놈들은 그를 사원에 가두었지. 엄청나게 그를 괴롭힌 다음엔 눈밭으로 쫓아내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지. 그래서 피치는 별수 없이 줄곧 구걸을 하면서 일 년쯤 걸어 돌아온 거요. 다니엘 드라보트는 피치 앞에서 '이쪽이야, 피치. 우리들이 하는 일은 엄청난 거야.'하면서 길을 안내해줬기."

"그 고약한 산들이 요란을 떨었지만, 금방이라도 피치를 떨어뜨릴 것처럼 요란을 떨었지만, 단이 손으로 지켜 주어서 피치는 기다시피 해서 돌아온 거요. 그는 결코 단의 손을 놓지 않았어. 단의 목을 놓지도 않았어. 놈들은 내가 두 번 다시 올 생각을 못하도록 단의 목에 왕관을 씌워 내게 주었어. 그 왕관은 순금이지. 그러나 피치는 굶어죽을 지경이었어도 그걸 팔지 않았어. 여보 선생, 당신은 드라보트를 알고 계셨지. 당신은 우리 형제 드라보트 각하를 알고 있었지! 자, 그 친구를 만나 보시오."

그는 구부린 허리 아래 누더기 옷을 더듬어 은실 장식이 있는 검은 말총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서 내 테이블에 내놓은 것은, 다니엘 드라보트의 메마르고 쭈글쭈글해진 머리였다. 좀 전부터 램프의 빛을 희미하게 만들고 있던 아침 태양이 그 붉은 수염과 움푹 꺼져 들어간 눈을 비추고 있었다. 그 빛은 연마하지 않은 터어키 구슬을 점점이 박은 무거운 황금 왕관도 함께 비추고 있었다. 개넌은 박살이 난 드라보트의 관자놀이에 왕관을 살짝 얹어 주었다.

"지금 당신이 보는 것이 살아 있을 때의 장신구를 걸친 왕이오." 개넌이 말했다. "머리에 왕관을 쓴 가피리스탄의 왕입니다. 한 번 왕이 되어 봤던 불쌍한 옛 친구 다니엘이오!"

나는 몸이 떨렸다. 용모는 완전히 변했지만, 그 머리에서 마와 환승역에서 만났던 그 사나이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개넌은 일어나서 가려고 했다. 나는 그를 말렸다. 그가 바깥을 돌아다닌다는 것은 무리였다. "위스키를 좀 갖고 가게 해 주시오. 그리고 돈도 좀 주지 않으려오?" 그는 헐떡이며 말했다. "난 그래도 한때 왕이었소. 군수한테 가서 몸이 좋아질 때까지 의료원에 입원시켜 달라고 부탁해볼 생각이오. 아니, 고맙지만 나를 위해 차를 부르지는 마시오. 난 다른 급한 용무가 있어요. 남부, 그 마와에서..."

그는 휘청거리며 편집실을 나가 군수 저택 쪽으로 떠났다. 그날 낮,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무더운 거리의 가로수 그늘 아래로 나가니 허리가 구부러진 한 사나이가 모자를 손에 들고, 영국의 구걸 노래를 부르며 먼지 속을 돌아다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부근에는 사람 그림자도 없고, 노래 소리가 들리는 근처에는 집도 없었다. 그래도 그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왕자의 싸움 그 피 젖는 깃발에
따라서 나아가는 용사는 누구뇨

나는 노래를 계속 듣지 않고 몰락한 사나이를 차에 싣고 제일 가까운 선교사 집으로 데려갔다.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나와 함께 있으면서 그 노래를 두 번 정도 되풀이해 불렀지만, 내가 누군지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 사나이를 선교사에게 맡기고 물러났다.

이틀 뒤 나는 정신병원의 사무장에게 그의 병세를 물어봤다.

"그 남자는 입원했을 때 일사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어제 아침 일찍 죽었어요. 그 남자가 대낮에 두 시간 동안이나 머리를 햇볕에 드러내고 있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사무장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죽을 때 혹시 머리에 뭔가 얹고 있지 않았습니까?"

"제가 알기론,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사무장이 대답했다.

이 사건은 이것으로 끝났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