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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지붕에 걸리련다. 옳다! 넘어섰다.”
겨울 바람이 꽤 강하게 부는 날이었다.
재황 소년은 사랑뜰에서 연을 올리고 있었다. 그의 곁에 형 재면이 서서 올라간 연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소년의 뺨과 손등은 찬 바람 때문에 새빨갛게 되었다. 그러나 연줄을 통하여 손에 감각되는 탄력에 온 정신을 붓고 일심불란 올라가는 연을 어르고 있었다.
“어디 튀김을 주어 보아라.”
빙긋이 웃으면서 형 재면이 이렇게 말하였다. 그 말에 응하여 소년이 튀김을 주니, 벌써 지붕 위 꽤 높이 올랐던 연은 춤을 추면서 아래로 거꾸로 내려왔다.
“어타! 어타!”
“어디 나좀!”
“좀 있다가요.”
손을 내미는 형을 피하면서 소년은 줄을 더욱 풀어 주었다. 거기 따라서 연은 하늘로 향하여 춤을 추며 올라갔다. 문득 밖에서 꽤 많은 인마의 두선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인마는 분명히 흥선 댁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년들은 그다지 관심하지 않았다. 만약 지금 오는 사람이 고귀한 사람일 것 같으면 당연히 벽제의 소리가 있을 것이어늘, 그렇지도 않고 숙숙히 이 집으로 들어오는 인마거니, 그다지 소년들의 흥미도 끌지 못하였다.
중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하늘에 높이 오른 연만 바라보던 소년은, 한 순간 중문 편으로 눈을 돌렸다가 그리로 들어오는 꽤 점잖은 사람 하나를 흘낏 보고는 도로 눈을 연으로 돌렸다. 소년에게 있어서는 지금 하늘 끝 닿은 데로 오른 연밖에는 다른 것은 관심되는 것이 없었다.
중문으로 앞서서 들어온 것은 도승지 민치상이었다. 도승지의 인도로 뒤를 따라 들어온 것은 영의정 김좌근이었다.
한 걸음의 길을 갈 때라도 반드시 평교자에 몸을 싣고 다니던 김좌근이지만, 오늘 신왕을 봉영하러 옴에 그는 도보로써 지팡이도 짚지 않고 온 것이었다. 인마가 들어오는 기수에 정침 안에 있던 흥선이 쪽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그리고 지금 들어오는 인물을 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민 치상이 댓돌 위에 올아서서 청지기를 부르려 할 때에는 흥선은 벌써 손을 맞으러 대청에 나선 때였다.
“영감 어떻게 오시오.”
여전한 깨어진 갓, 군데군데 꿰맨 도포였다. 그러나 그 얼굴과 태도에는 어젯날의 때는 벌써 씻은 듯이 없어졌다.
흥선의 물음에 응한 사람은 민치상이 아니고 김좌근이었다. 좌근은 댓돌 아래로 가까이 와서 손을 읍하고 허리를 굽히며, 공손한 어조로 말하였다.
“오늘 대왕대비전마마의 어명으로써 대감의 둘째도령님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군을 하옵고, 익종 대왕의 대통을 승계하시와 대위에 오르시게, 영의정 김좌근이 봉영차로 왔습니다.”
흥선은 눈을 감았다. 안 감으려야 안 감을 수가 없었다. 떠오르는 감정의 격발―튀어나려는 통곡―이 모든 것을 감추기 위하여 눈을 힘있게 감았다.
하옥도 자기의 할 말만 한 뒤에는 입을 봉하고, 머리를 수그리고 가만히 있었다. 이전에는 초개만큼도 아니 여기던 흥선의 앞에(일찌기 상감의 앞에서도 이렇듯 굽혀 본 일이 없는) 허리를 굽히고서―
한참 뒤에 흥선이 비로소 눈을 떴다. 동시에 입도 열었다.
“수고허오.”
위연히 내어던진 한 마디의 대답이었다. 그런 뒤에 발을 그 자리에서 떼었다.
“자, 어머님께 들어가서 하직을 고합시다.”
벌써 오냐를 할 수 없는 존귀한 아드님의 손목을 이끌고 흥선은 내실로 들어갔다.
아직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하는 소년은, 아버지의 명으로 걷어 놓은 연을 아까운 듯이 힐끗힐끗 보며 손목을 잡혀서 안으로 들어갔다.
“부인, 지존께 절을 하시오. 오늘부터는 팔도 삼백여 주인의 지존이시외다.”
부인은 눈을 들었다. 그 비슷한 말을 일찍부터 흥선에게 못 들은 바는 아니었지만, 이런 일이 이르리라고는 뜻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에 있어서도 오히려 의심스러운 얼굴로 지아버니를 우러러보았다.
“영상이 봉영차로 와서 사랑에서 기다리고 있소이다. 어서 의대를…”
“대감!”
이 지아버니를 우러러보는 부인의 눈에는 그득히 눈물이 괴었다.
그것은 환희의 절정의 눈물일까? 그렇지 않으면 애석의 눈물일까? 일찍이 종가에 시집을 와서 조선 왕실의 많고 많은 비극을 다 아는 부인이매, 사랑하는 아들의 장래의 운명을 근심하는 눈물일까?
“야 명복아! 이리 온.”
그리고 가까이 이른 소년을 부인은 힘을 다하여 쓰러안았다.
“야, 명복아!”
“왜 그러세요, 어머님!”
“어머님…어머님…재황아! 너한테 어머님 소리를 듣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로구나. 다시 한번 불러 다고.”
소년은 손을 들었다. 어머니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만져 보았다.
“어머님, 왜 우세요?”
“아니로다. 우는 것이 아니로다. 너는 오늘부터는 나라의 나랏님! 네가 그렇게 되니 너무도 기뻐서 눈물이 저절로 나오는구나.”
나라님? 나라님은 대궐에 계신 분이다. 소년에게 있어서는 어머니의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미리 준비하였던 새 옷을 바꾸어 입고 복건을 쓰고 천담포를 입은 이 소년은, 영문을 모르면서도 부모께 하직을 고하였다.
그 때는 벌써 흥선군의 둘째도령이 신왕이 된다는 소문이 퍼지기 때문에, 흥선의 집 근처에는 백립 백의의 무리가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소년이 흥선에게 인도되어 안에서 나올 때는, 신왕을 모실 연(輦)은 벌써 안문 밖에 등대되어 있었다.
신왕의 보련―영의정 김좌근이 도보(徒步)로서 딱 곁에 붙어 서고, 도승지 민 치상이 그 뒤에 달리고, 시위 장사며 관원들에게 호위된 이 연은, 소년의 생장한 경운동 흥선 댁을 뒤로 하고 창덕궁으로 향하여 떠났다.
해지고 덜민 옷을 갈아 입지도 않은 흥선과 흥선 부인은, 자기네들의 아드님이요, 또한 지금은 이 나라의 지존이 된 소년의 연을 중문 밖까지 전송하였다.
“하늘이여, 신왕의 위에 복을 내려 주십사. 영원하도록 복을 내려 주십사.”
고요히 고요히 축수하는 이 중로(中老)의 부부의 눈가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흥선 댁에서 돈화문까지―그 길 가에는 벌써, 새 임금을 맞으려는 무리가 하얗게 늘어섰다.
어린 임금을 모신 보련 곁에는, 백발의 영의정 김좌근이 딱 붙어 서서 길을 인도하고 있었다. 일찍이 '개똥이'라는 소년으로의 이 신왕과 만날 같이 연을 올리며 돈치기를 하던 동리의 소년들은, 펄펄 뛰면서 연하여,
“개똥아!”
“명복아!”
“재황아!”
부르면서 행차를 어지럽게 하였다. 많은 백의군들은 신왕의 용안을 절하고자 서로 앞을 다투어 헌화하였다.
멀지 않은 거리였다. 그러나 좌우편에 구름같이 모여든 무리들 때문에 빨리 갈 수가 없었다. 의장병사들은 뭉치와 막대를 휘두르면서 길을 방해하는 무리들을 헤치고 있었다.
문득 한 소년이 구경군들 중에서 뛰쳐 나왔다. 그리고 보련을 향하여 달려왔다. 보매 그것은 연 동무였다.
“웬 놈이냐? 비켜라!”
달려 오는 소년에게 향하여 의장병사의 뭉치가 한 번 날아갔다. 동시에 소년은 이마에 피를 흘리면서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가만!”
늠연히 울린 신왕의 음성에 보련은 그 자리에 섰다. 곁에 붙어서 가던 좌근이 보련 쪽으로 돌아섰다.
“무슨 하교가 계시오니까?”
“저 애 이마에서 피가 흐릅니다.”
“네, 길을 어지럽게 하는 소년이길래…”
신왕은 용안을 들었다. 어리지만 영특함과 자애심이 사무친 용안이었다.
“나는 오늘부터 이 나라의 상감이라지요?”
“네…”
“왕은 그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고 옛날 성현이 가르쳤습니다. 저 애를 일으켜 주십시오. 그리고 또 병사들에게 일러 주시오. 다른 사람들도 몽치로 쫓지 않도록 일러 주십시오.”
이 너무도 숙성한 하교에 좌근은 뜻하지 않고 용안을 우러러보았다. 그런 뒤에 배행하는 도승지 민 치상을 불렀다.
“배관하는 서인들에게 난폭한 일을 하지 말라는 분부가 계시오니, 그대로 전하게.”
이 뜻을 민 치상이 큰 소리로 외칠 때에, 그 말을 들은 백성들은 와 하니 함성을 지르며 신왕의 자비심을 찬동하였다. 이로부터 길은 더욱 더디게 되었다. 신왕을 맞으려는 군중은 이 신왕의 고마운 전교를 듣고, 모두 함성을 지르며 길 가운데로 어지러이 들어와서, 용안을 절하고자 우러렀다.
“우리 나라님!”
“우리 상감님!”
이 소년왕께 대하여 모두 '우리'라는 관사를 붙여 가지고, 환희의 함성을 지르며 따라를 왔다. 돈화문까지 이르매, 뭇 종친들이며 원로 대신들은 모두 예복을 갖추고 제 이십 육대의 임금을 맞으러 돈화문 밖에 열을 지어 서 있었다.
보련은 이 맞이하는 종친들이며 대신들의 절을 받으며 돈화문으로 들어가서 인정전을 왼편으로 끼고 돌아서 빈전(殯殿)인 대조전으로 들어갔다.
대조전 서온돌에는 벌써 대왕대비 조씨며, 왕대비 홍씨며, 대행왕비 김씨가, 새로 된 상감을 맞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뭇 여관들은 새 임금을 절하러 모두 문을 방싯이 열고 겹겹이 둘러서서 그 틈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소년 신왕은 마주 나온 재상 정원용의 앞잡이로 대행 군주의 재궁(梓宮)을 모신 동온돌로 들었다. 그리고 이십 육대의 군주로서, 선행 대왕의 영해에 절하였다.
환영의 기쁨과 선왕께 대한 애통으로 뒤섞인 대궐―그 안에서 궁인들은 분주히 왔다갔다 하였다.
“아기씨마마!”
신왕이 당신께 와서 절할 때에, 조 대비는 늙은 얼굴에 명랑한 미소를 띄었다.
“자, 이리로 가까이 와서 앉읍시오.”
신왕은 대비의 지시하는 자리에 가 앉았다. 조 대비는 손을 내밀어서 소년왕의 수장(手掌)을 잡았다.
“마마, 무슨 생입시오?”
“금년에 열 두 살이옵니다.”
소년왕은 그 영특한 안정을 치뜨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참 영특도 합시오. 마마, 이제부터는 나를 어머니라 부릅시오. 나는 오늘부터는 마마의 어머니가 되는 사람이외다.”
그의 사랑하는 아드님 헌종이 임종시에 두어 번 불러 본 이외, 어머니라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하고 오십여 년의 생애를 보낸 조 대비에게 있어서는, '어머니'란 말은 꿈과 같이 즐겁고도 눈물겨운 말이었다.
“원상!”
대비는 발 밖에 대령하고 있는 정원용을 불렀다.
“여기 대령하왔습니다.”
“흥선군을 대원군(왕의 私親)의 친호)으로 하고 흥선군 부인을 낙랑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으로 봉하고―그 수속은 다 하셨겠지요?”
“하비대로 하왔습니다.”
“흥선군 사택은 운현궁(雲峴宮)으로 궁호를 내리고…”
“네…”
“그 밖에 또 무슨 의견이 없습니까?”
“대비전마마, 한 가지 계청하올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오니까?”
“다름이 아니오라, 우리 나라에는 아직껏 생존한 대원군이 없사와, 그 선례 고빙할 바가 없사오니, 지금 주상전하의 생친되시는 흥선대원군을 어떤 형식으로 대우하여야 하올지, 거기 대한 하교가 계시오기를 바라옵니다.”
이야말로 어려운 문제였다. 조성하가 사이에 나서서 흥선군과 대비의 사이에 왕래한 결과, 이 문제의 해결책도 다 내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과연 대신들에게 무사히 통과가 될는지 의문이었다. 아직껏 역사상에 생존한 대원군이 없었는지라, 지금 여기 갑자기 생겨난 생존한 대원군의 격식 문제는 난문제 중의 난문제였다.
“거기 대해서는 내일 원로 대신들이 다시 희정당에 모여서 좋도록 의논을 하기로 합시다.”
“또 한 가지, 주상 전하는 아직 연치가 유충하시매, 선례에 의지해서 대비전마마께오서 수렴청정을 하시올지, 혹은 어떤 다른 방식을 취하올지, 거기 대한 하교도 계시오기를 바라옵니다.”
“거기 대해서도 내일 함께 의논을 하도록 합시다.”
“즉위의 어절차는 어떻게 하오리까?”
“그것은 선례에 의지해서 하기로 합시다.”
이리하여 대략은 모두 내일로 미루기로 작정하였다.
그 날 밤, 자리에는 들어갔지만 조 대비는 머리에서 일고 잦는 수 없는 망상 때문에 좀체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제는 흥선의 도령을 영립하였다. 몸은 비록 대왕대비로서 이 종실의 어른의 지위에 있었으나, 이전부터 삼 대째 내려온 뻗고 또 뻗은 김씨들의 세력에 눌려서, 마음에 있는 일 한 가지도 뜻대로 해보지 못하고, 당신의 사랑하는 조카 성하조차, 겨우 승후관이라는 변변치 못한 지위에 머물러 두었는데, 이제 바야흐로 그 모든 김씨의 세력을 꺾어 버리고, 당신의 새 세력을 뻗칠 것을 생각하매, 야심 만만한 조 대비는 그 망상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 때 세도가 너무도 크더니, 너희들도 꺾일 날이 있구나.”
이전 이하전 때의 겪은 억분까지 한꺼번에 떠올라서, 김씨 일문에 대한 증오 때문에 대비의 마음은 새삼스러이 어지러웠다.
김문에서도 이 밤 또 다시 중대한 회의가 열렸다. 이미 흥선 댁 도령이 보위에 오른 이상에는, 거기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자 다시 긴급한 회의가 열린 것이었다.
“한 가지 있습니다.”
무거운 눈을 치뜨며 이렇게 말한 사람은 김병기였다.
“아직 한 가지의 길―나라에는 두 임금을 둘 수가 없으니까 흥선군은 당연히 신위(臣位)에 두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지금 보건대 만조 백관이며 자사 녹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흥선군에게 심복을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깐 흥선군을 신위에만 두게 될 것 같으면 그다지 무서울 일도 없을 줄로 생각합니다.”
병기는 어디까지든지 흥선을 멀리 하기를 주장하였다. 여기 대하여 병학이 자기의 의견을 말하였다.
“흥선은 본시 현문과의 교제가 적고 매일 사귄다는 친구가 대개는 시정의 부랑자들이매, 흥선군이 어떤 권세를 잡는다 해도 그 권세를 그냥 보전하기 위해서, 혹은 우리 일문의 편으로 가담하지는 않을는지요? 더구나 대왕대비전께서는 가까운 친척이라고는 조성하, 조 영하, 그 밖 한두 사람밖에는 없으니깐, 이제부터라도 흥선군과 사귀기만 하면 혹은 흥선군은 우리들의 사람이 될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의논은 여러 가지로 일어났다. 어떤 사람은 흥선과 다시 결탁을 하자고 주장하였다. 어떤 사람은 흥선으로 하여금 단지 임금의 생친으로서의 위의를 보전할 만한 명목을 주고, 운현궁에는 홍마목(紅馬木)을 세워서 그 출입의 자유를 금하고, 일체로 정사에는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런 몇 가지의 의견을 묵묵히 듣고 앉았는 하옥은 머리로는 아까 낮에 신왕을 봉영하러 흥선 댁을 찾은 때의 일을 다시 회상하였다.
영의정인 하옥 자기가 허리를 굽히고 국왕의 생친으로서의 흥선에게 경의를 표할 때에, 흥선은 의연히 다만 한마디,
“수고하오.”
할 뿐이었다. 그 말투 그 태도는 웃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대하여 하는 태도에 틀림이 없었다. 뿐더러, 그 때 흥선의 미간(眉間)에 나타나 있던―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기색―아직껏은 흥선으로 미루어서 하옥이 그 때 그 말을 전하면 허둥지둥 두서를 차리지 못할 줄만 알았더니, 흥선의 그 때의 태도는 가장 당연한 일을 만난 듯이, 조금도 낭패하는 기색이 없이 소년을 부르러 뜰로 내려섰다.
이 때부터 하옥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한 가지의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흥선의 이중 인격이었다. 아직껏 비굴한 웃음을 얼굴에 띄워 가지고 기신기신 권문을 찾아다니던 것은 단지 흥선의 호신책이 아니었던가?
이번에 흥선 댁에 떨어진 행운은 그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요, 그 사이 십여 년 간을 세밀한 주의 아래 계획하고 진행시켜 온 일의 오늘날의 성공이 아닐까? 더구나 이하전 역모 사건이라 하는 것도 무론 구체적으로 빚어 내기는 자기네 일문에서 한 노릇이지만, 그로부터 사오 일 전에 흥선이 하옥을 찾아서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다가,
“전하 천추하시는 날에는 아마 대개 이 도정이 보위에 오르게 되겠지요?”
이런 한 마디를 던져서, 그것 때문에 위협을 느끼고 자기네는 부랴부랴 이하전 역모 사건이라는 것을 빚어 내었다. 그것이 우연한 암합이면 모르지만, 그것 역시 흥선의 세밀한 계획의 일단이라 할진대, 그 추단력, 그 지력, 그 통찰력은 사람으로서 능히 추측하기 힘들도록 놀라운 인물이다.
대원군을 불신례(不臣禮)로 대우할 것.
운현궁에는 홍마목을 세워서 궁에 입하려면 대궐의 허락을 맡도록 할 것.
대원군의 지위의 임금의 아래, 대신의 위에―대군(大君―王嫡子)과 동렬에 두고, 그 출입에는 삼군의 군사로 호위하게 할 것.
기린 흉배(麒麟胸背)에 옥대(玉帶)를 정복으로 할 것.
일체 정치에 간섭하지 않게 하고, 단지 임금의 생친으로서 존경하게 할 것.
―흥선대원군의 금후 대우에 대하여 이렇게 작정하기로 의논을 하였다. 이리하여 이 밤의 회의를 끝내었다. 그리고 원상 정원용과 좌상 조두순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서, 내일 대비 어전 회의 때에 틀림없이 이대로 결정을 짓기 위하여, 이미 밤도 깊었으나 하옥이 몸소 정원용과 조두순을 찾기로 하고 그 밤은 헤어졌다.
길의 순서에 의해서 하옥의 탄 평탄자가 바야흐로 조두순 댁 솟을대문 앞에 놓이려 할 때에, 대문이 삐그덕하니 열렸다. 그리고 그리고는 웬 사람이 하인에게 좌초롱을 들리고 나왔다.
조 대비의 조카 조성하였다. 하옥은 가슴이 뜨끔하였다. 벌써 흥선의 손이 조두순에게 펴진 것을 직각하였다.
“대감, 어떻게? 밤도 깊었는데…”
근엄하기 짝이 없는 조두순의 책상 앞에 자리를 잡으면서 하옥을 맞았다.
“밤도 깊었지만 내일 희정당에서 열릴 중대한 어전 회의 때문에 그 의논을 좀 하러 왔습니다.”
두순은 눈을 굴려서 좌근을 쳐다보았다.
“어떠한 의논이오니까?”
“다름이 아니라, 내일 일에 대해서 대감의 의견을 좀 알아보고서…”
“의견…우리에게 무슨 의견이 있겠습니까? 대왕대비전마마의 하교가 계오신 대로 시행할 따름이지, 신자(臣子)가 외람되이 무슨 의견을…”
당찮은 말이라는 뜻이었다.
하옥은 말머리를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대감 홀로의 의향은 어떠시오니까?”
두순은 머리를 숙였다. 한참을 생각한 뒤에 한 마디씩 한 마디씩 끊어서 똑똑히 대답하였다.
“방금도 대비전마마께오서 승후관 조성하를 보냅셔서 물으시기에 이렇게 붕답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주상전하의 생친이시매, 허수로이 대접은 못할 것이로되, 또한 나라에는 두 임금을 둘 수가 없으니, 좋도록 처분이 겝시사고…”
“그 밖에는?”
“그 밖에는…”
말을 끊고 두순은 다시 생각하였다. 한참 생각한 뒤에 두순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하옥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대감은 흥선대원군을 어떻게 보십니까?”
“?”
“무서운 지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내 혼자의 생각으로는 내일 어전 회의에서 대비전마마께 흥선 개원군의 섭정을 간원하려고 합니다.”
하옥은 입을 딱 벌렸다. 흥선의 손은 벌써 이 근엄 착실한 조두순까지 긁어 잡은 것이었다. 어느 틈에? 그것은 알 수 없으나, 하옥은 여기서 맹연히 일어서는 거인의 그림자를 분명히 직각하였다. 눈을 감은 때는 천하가 요동을 할지라도 아는 체도 안 하지만, 한 번 눈을 뜰 때는 좌충우돌 천하를 위복시키는 무서운 위력을 보았다.
조두순에게서 달가운 대답을 듣지 못하고 하옥이 다시 평교자를 달려서 원상 정원용의 집으로 가매, 하옥보다 먼저 정원용을 찾고 지금 방금 돌아가려는 조성하가 하인을 앞세우고 원용의 집에서 나오는 즈음이었다.
좌근은 원용을 찾지 않고 교자를 돌이켰다. 성하가 먼저 다녀간 뒤에 이제 원용을 찾는대야 쓸데없는 것은 아까 좌상에게 미루어 경험한 바였다. 만월을 우러러보며 자기 집으로 평교자를 달리는 동안, 이 노상의 입에서는 연하게 장탄식이 나왔다.
이튿날 흥선대원군의 위계에 대한 중대한 회의를 앞하여, 흥선은 직접 대궐에 들어가서 한참을 조 대비와 밀의한 바가 있었다.
낮쯤하여 희정당에서 회의가 열렸다.
“대원군의 의주에 대해서 대신들의 의견이 있으면 어디 말씀해 보시오.”
발 뒤에서 대비가 대신들을 내다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글쎄올시다. 아직껏 우리 나라에 생존한 대원군이 없었사오매 전거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정원용의 대답이었다. 원용의 말을 이어서 좌근이 아뢰었다.
“신의 의향을 계상하겠습니다. 나라에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으매, 아무리 전하의 생친이시라 하지만, 역시 신하의 반열에 들 밖에는 없을까 하옵니다. 그러나 또한 부자의 의라 하는 것은 인륜의 본의오매, 어버이되는 사람으로서 아드님께 북면해서 절하라 하는 것도 인륜에 어그러진 일이 아니올까 하옵니다.
그러니깐 대원군은 임금은 아니요, 신하도 아니므로서, 운현궁 안에 모시옵고 홍마목을 세워서 이를 대접하옵고, 임금의 사친으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내수사(內需司)에서 조도품을 운현궁에 조달하옵고, 주상 전하께서는 매달 한 번씩 운현궁에 납셔서, 사친께 대한 효성을 표하옵고, 그 계제는 대군(大君)과 같이 하옵고, 주상 전하의 사친으로 하여금 일체 정치 문제에 간섭하지 않게 하오면, 첫째로는 인자로서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사올 것이오며, 둘째로는 나라에 두 임금을 두지 않게 될 것으로서, 신의 의향으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제일이 아닐까 하옵니다.”
“좌상의 의향은?”
“영상의 의향도 그럴 듯하옵니다마는 요컨대 대원군은 임금이냐 신하냐 하는 한 가지의 문제밖에는 없을 줄로 아옵니다. 주상 전하께오서 이미 익종 대왕께 출사를 오신 이상에는, 아무리 사친이라 하여도 벌써 그 인연은 끊어졌사오매, 역시 신하의 예로 대우하지 않으면 안 될까 하옵니다. 인자의 도리로서 생친께 추배를 받을 수 없사오니, 단지 추배하지 않고 칭명하지 않고, 위계는 삼공의 위에 두어서 명분을 밝히는 것이 지당하지 않을까 하옵니다.”
조두순의 의견은 좌근의 의견을 반대하는 것인지 찬성하는 것인지, 아주 막연하여 잘 알 수가 없었다.
“다른 대신들께 다른 의향은 없소이까?”
대비가 다시 물을 때에,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김씨 일문의 의견은 좌근이 이미 대표하여 말하였으며, 다른 의견은 조두순이 말하였는지라, 별다른 의견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더구나 어느 편으로 기울어질지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 이 자리에서 섣불리 자기의 의견을 말하기를 모두 꺼리었다.
잠시 침묵이 계속 된 뒤에 대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두 가지의 의견을 들었소이다. 두 가지의 의견이 다 일리가 있는 것으로서, 어느 편을 취하고 어느 편을 버리기가 어려운 일이외다. 그러니 그 두 의견을 잘 절충해서 이렇게 하도록 하면 좋을 줄 생각합니다. 대원군은 주상 전하의 사친이매, 북면해서 신하로서 섬길 수는 인륜상 힘든 일이니, 추배하지 않고 칭명하지 않고 신사(臣仕)하게 하자는 좌상의 의견을 채용하고,
대원군이 아무리 신렬(臣列)에 있다 하되 주상 전하의 시친임에는 틀림이 없으니, 임금의 사친으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그 출입에는 삼군영의 병사를 두어서 시위하게 하며, 운현궁장(雲峴宮庄)을 마련토록 하고, 쌍초선을 받고 대궐 출입에는 남여를 타고 내관이 부액을 해서 전에 오르고, 그 위계는 대군의 위에 두고, 그 복제는 기린 흉배에 옥대를 쓰게 하고, 이것은 영상의 의견을 좆기로 합시다.”
조참(朝參)에는 대원군의 자리를 대신의 위에 따로 정할 것. 임금의 사친에 대한 예로서 운현궁 밖에는 하마비(下馬碑)를 세울 것.
삼공 이외에는 영내(楹內)에 같이 앉지 못할 것―등등 대원군의 의주에 관하여는 대략 결정이 되었다.
의주는 결정이 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자격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은커녕 말도 나지 않았다. 이 자격 문제야말로 그 사이 흥선이 온갖 수단을 다 써 가면서 전후 좌우로 운동한 것이다.
은인(隱忍) 십여 년, 이제 바야흐로 떨어지려는 복덩어리를 온전히 붙들기 위하여는, 대원군의 자격 문제가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다.
만약 흥선으로서 단지 왕친이라 하는 허명이나 탐하고, 일신상의 영화만을 꾀하려면 지금 여기서 결정된 그 의주는 그의 그런 야심뿐은 넉넉히 만족하게 하고 오히려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야심이 단지 자기의 일신상의 안일에 있지 않고, 자기의 커다란 손을 이 나라의 국정상에 펴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는 흥선에게 있어서는, 허영은 오히려 우스운 것이었다.
'왕의 생친의 섭정'
아직껏 전례가 없는 이러한 명목을 붙들고자, 일변으로 정원용, 조두순 등 원로 대신을 달래고, 위로는 이 결정권을 잡은 조 대비께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기로 약속하고 승낙을 얻은 것이었다.
대원군의 의주에 관해서는 대략 결정이 된 후에 이 전각 안은 잠시 고요하여졌다. 대원군의 의주가 너무도 어마어머하게 된 것에 대해서는, 그 발안자(發案者)인 조두순도 오히려 경이의 눈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라에는 두 임금을 두지 못한다 하나, 지금 결정된 의주로 보자면, 대원군의 대우도 또한 임금께 그다지 지지 않았다.
“아, 참 또 한 가지…”
잠시 침묵에 잠겨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이렇게 말하는 조 대비의 낯에는 분명히 흥분의 기색이 있었다. 무슨 의외의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려는 것에 틀림이 없다.
“주상 전하가 유충합실 때에는 옛날 예로 말하자면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격식이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노파―국사 다난(國事多難)한 이 때에, 나같은 무식한 노파가 청정을 하느니보다는, 전하의 생친 대원군이 섭정을 하는 것이 어느 편으로 보든간 상책일 테니깐 그렇게 하도록 마련하시오.”
드디어 터져 나왔다. 대비의 입에서 한 마디가 나오면 나오느니만큼 더욱 높아 가는 대원군의 지위였다. 이 전대 미문의 하교에, 원로 대신들은 미처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발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김좌근이 먼저 정신을 가다듬었다. 지금 좌일보 우일보로서 그의 사활이 작정되는 위급한 마당이매, 생명을 걸어서라도 반대하려고 머리를 들었다.
그러나 이 때는 벌서 때가 늦었다. 한 마디의 거탄을 내어 던진 뒤에 대비는 재쳐,
“별다른 이의(異議)가 없는 모양이니 그렇게 작정하도록 하시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노파, 내전에서 주상전하의 어장성이나 보고 즐기고 있겠소이다.”
말을 채 맺지도 않고 여관들을 거느리고 내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어느 누가 반대를 한다든가 이의를 제출할 틈도 없이 혼자서 방안하고 혼자서 작정한 뒤에, 전광석화와 같이 내전으로 몸을 피하여 버렸다.
“몰락이다! 몰락이다!”
대비가 내전으로 들어간 뒤에 좌근은 혼자서 중얼중얼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술 따르기냐?”
탁! 기생이 들어 바치는 술잔을 병기는 쳐 버렸다. 술은 좌우편으로 헤치며, 잔은 웃목으로 달아났다. 일족의 몰락, 눈 앞에 걸린 무서운 문제 때문에, 병기는 술을 먹어도 취하지를 않았다.
흥선 댁 도령의 승통―뒤이어 결정된 대운군의 의주―그 뒤를 따라서 대원군의 섭정 결정―전광석화와 같이, 그러나 또한 명쾌한 솜씨로 처리된 이번의 사건 뒤에 숨은 흥선군의 위력이라 하는 것을 병기는 비로소 알았다. 한 가지가 진행되고 두 가지가 진행될 동안 처음에는 단지 우연한 행복이 흥선에게로 떨어지거니 이만큼 보았지만, 지금에 있어서는 그 뒤에서 움직인 흥선의 거대한 손을 병기도 알았다.
김문 가운데서도 병기는 가장 노골적으로 흥선을 모욕하던 사람이었다. 자기의 모욕에 참다 참다 못해서 돌아서서 흔히 눈물을 짜 내던 과거의 흥선을 생각한 때에, 병기는 자기의 일족―적어도 자기뿐은 흥선이 권세를 잡기만 하는 날이면 당장에 그 보복을 받을 것을 예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감, 약주 안 드시고 무슨 생각을 하세요?”
기생이 다시 술을 부어서 권할 때에, 병기는 이번에는 나무람이 없이 받아 마셨다.
“자, 또 부어라!”
“네…”
또 한 잔―
“자, 또 부어라! 열 번만 연거푸 부어라!”
연하여 따르는 술을 연하여 열 번을 받아 마셨다.
“야 옥주야!”
“네?”
“흥선군이 대원군이 되었다.”
“네? 대언군? 대언군이 뭐오니까?”
“상감의 아버님―흥선군의 작은도령이 나라님이 되셨다.”
“네? 참말이세요? 그럼 계월이한테 한 턱 잘 받아야겠구만요?”
―한 턱 아니고 백 턱이라도 받아라. 이 거대한 변화를 너희들은 단지 한 턱 받을 사람쯤으로 아느냐? 이 가련한 동물아―
―그렇다! 내일 운현궁을 찾아 가 보자. 어차피 몰락할 신분이거니, 내일 운현궁을 찾아서 대원군의 심중을 한 번 진맥해 보자. 아직 상감의 즉위식도 들지 못하고, 따라서 정식으로 섭정의 지위에도 서기 전에 이 편에서 먼저 그를 찾아서, 그 의향을 진맥해 보고, 그가 손을 쓰기 전에 먼저 내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자.
진퇴의 길, 여기 대하여 병기는 자진하여 흥선대원군을 찾아 보기로 결심했다.
어젯밤까지도 발 아래로도 보지 않던 흥선이로되, 오늘날은 이 나라의 생살 여탈권을 한 손에 잡은 권위의 정이었다. 저 편에서 무슨 행동을 취하기 전에 먼저 이 편에서 찾아서, 그 때의 경우를 보아서, 만약 머리를 수그릴 필요가 있으면 숙일 것이고, 숙인대야 쓸 데가 없으면 고요히 자기의 운명에 복종할 것이고―이렇게 마음먹고 병기는 이 위급한 마당에 흥선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옥주야!”
“네?”
“너도 이제부터는 흥선군께 수청을 들어야겠구나?”
어제까지 총애하던 기생들조차 내일부터는 자기를 버리고(전날 그렇게 눈 아래로 깔보던) 흥선에게로 달려갈 것을 생각할 때에는, 병기는 질투 비슷한 감정조차 일어나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영창에 달빛이 비치었다. 만월의 밝은 빛―그것은 마치 장차 빛나려는 흥선의 빛을 예언하듯이 교교한 빛을 영창 위에 던지고 있다.
흥선 댁―운현궁에 병기의 방문, 이것은 과연 의외의 일이었다.
병기가 운현궁에 흥선을 찾은 때는 흥선은 의복을 정제하고 단연히 아랫목 보료 위에 앉아 있을 때였다.
“아, 대감이 이런 누추한 집에를 어떻게 행차하시오?”
벌써 말투도 이전과 달랐다.
“이번의 경사를 축하하러 왔습니다.”
“감사하외다. 우연히 굴러온 복―흥선에게는 너무 과하외다. 자, 날이 추운데 이리 내려와 앉으시오.”
흥선과 병기는 대좌하였다.
병기는 푹 머리를 수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흥선 역시 아무 말도 없었다. 천려 만사, 가슴에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렴인지 눈까지 굳게 감고 있었다.
드디어 흥선이 눈을 떴다. 얼굴에 미소가 나타났다. 몸을 틀어서 문갑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꺼내었다.
“대감!”
“불러 계십니까?”
“이것을 대감께 선사하리까?”
명랑한 웃음 아래서 흥선은 문갑에서 꺼낸 물건을 병기에게 내밀었다.
“그게 무엇이오니까?”
“호박갓끈!―사 년―오 년 전인가, 대신 생신연에 내가 대감께 빌러 들어갔을 때에, 대감은 내게 안 빌려 주셨지만 오늘은 내가 하나 대감께 선사하리까?”
병기는 가슴이 뜨끔하였다. 그러나 이런 막다른 곳에 임하여 병기는 자기의 호담한 성격을 회복하였다. 병기는 여기서 한 번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허허! 만약 대감께 오늘날이 있을 줄 그 때 알았더면, 천 백 개의 갓끈이라도 드렸을 것을, 병기 불민해서 선견의 명이 없기 때문에 오늘 대감께 이런 조롱을 받습니다.”
이 대답에 흥선은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도리어 병기의 이 대답을 장쾌하게 여기는 듯이 병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병기가 말을 이었다.
“대감! 오늘은 나 같은 몰락인은 대감의 처분만 기다립니다. 주시는 갓끈을 감사히 받겠습니다.”
흥선의 얼굴에서 차차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대신 엄숙한 기분이 나돌기 시작하였다.
흥선이 입을 열었다.
“대감!”
“네?”
“사사 감정으로 일국의 정사를 좌우해서는 안 될 일―내가 대감께 대해서 품은 사혐이 적지 않을 줄은 대감도 짐작하시겠지요?”
“처분만 기다리옵니다.”
“안심하십시오. 사혐으로 정사를 좌우할 흥선이 아니외다. 지금 조야를 둘러 보아야, 국가 다난하고 인재 부족한 이 때에, 대감 같은 인물을 거저 버려 둘 수 없으니, 아무 근심 말고 기다리시오. 무재 무력한 흥선이 이제 장차 국사를 조리할 때에는 대감 같은 인재의 협력이 없어야 어찌 다하리까? 아무 염려 마시고 하회 있기만 기다리시오.”
의외의 말에 병기는 눈을 들어 흥선을 쳐다보았다. 온화하고도 엄숙한 표정―아직껏의 전례로서 한 개의 세력이 서게 되면 먼젓번의 세력은 반드시 박멸을 시키는 것이어늘, 자기의 맞은편에 단연히 앉아 있는 이 인물(어제까지도 한 개의 비루한 인물로 밖에는 보지 않던)은, 어떤 심산을 가졌길래 적지 않은 위협을 진 자기에게 대하여 이런 관대한 처분을 내리나?
이 집 문안에 들어설 때까지도, 역시 별다른 감정을 가지지 않았던 병기지만, 갑자기 자기의 마음에서 생겨 나서 자라는 흥선에게 대한 위포와 존경의 염을 병기는 스스로 금할 수가 없었다.
“대감!”
이윽고 병기가 눈을 흥선에게로 굴릴 때에는, 병기의 얼굴에는 공손의 표정이 뚜렷이 나타났다.
“무엇이라 올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감께서는 그렇듯 관대히 마음을 잡수시지만, 대비전마마께서 어떤 처분을 내리실지 알 수 없습니다.”
당연한 걱정이었다. 그 사이 권력을 천단하고 조 대비께까지 감히 하지 못할 짓을 함부로 한 그들인지라, 대비가 자기네의 일족에게 대하여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잘 알았다.
흥선이 빙긋이 웃었다.
“대감도 꽤 소심하시오.”
그렇게 소심하면 어떻게 이전과 같은 대담한 일을 하였느냐는 풍자였다.
“대감, 생각해 보시오. 섭정은 이 나 흥선이외다. 아무리 대비전마마라도 섭정을 넘어서서 처분을 내리시지 못하실 줄은 대감도 짐작하실 바, 무슨 별다른 걱정을 하시오?”
“그렇지만…”
대비에게서 명령이 내릴 때에도, 능히 거기 거역하고 자기네를 보호하여 줄 수 에 있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아무 근심 말고 흥선을 믿으시오. 든든한 배를 탄 것같이 마음을 턱 놓고 흥선만 믿으시오. 아직껏은, 대감네들은 흥선을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지만, 흥선은 대감네들이 생각하시는 바와는 좀 달라서, 인정의 움직임을 볼 줄 아는 사람이외다. 행하지 못할 일을 장담할 경박한 사람이 아니외다. 흥선이 한 번 장담한 이상에는, 그럴 만한 자신이 있기에 하는 일이니깐 대감의 운명을 내게 맡기고 얼마만 더 기다리시오.”
무슨 자신이 있는 것과 같이 이렇게 장담하는 흥선을, 여기는 거의 하늘을 우러르는 마음으로 우러러보았다.
좀 있다가 대궐에 들어가서 대비께 뵙고 병기의 사건을 주선하기를 흥선은 병기에게 약속하였다. 그 대신으로 병기가 돈 십만 냥만 희생하여 용동궁(龍洞宮―조 대비 사무궁―본시는 동궁 사무궁)에 부치라는 것을 권고할 때에, 병기는 혼연히 이를 승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겁고도 증오와 반감으로 찬 마음으로 흥선의 집을 찾았던 병기는, 거기서 나올 때는 그 불쾌한 기분을 다 삭였다, 그리고 가볍게, 흥선에게 대한 존경과 애모의 염을 가득히 품고 자기의 집으로 돌아왔다.
병기는 여기서 아직껏 자기네들의 상식으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온전히 타입이 다른 인물을 보았다. 동시에 그 인물이 바야흐로 펴려는 커다란 손을 보았다. 사람의 감정으로 말하는, 아직껏의 전례로 말하든, 당연히 원심을 품고 자기네를 박멸하기에 온 힘을 다 하여야 할 흥선이, 그와는 단연 반대로 도리어 나아가서 대비께 알선까지 하여 자기네들을 구원해 주려는 것을 볼 때에, 병기는 거기서 단순히 '관대심'이라든가 '동정심'이라든기 '온정주의'라든가 하는 것 밖에,
'사사로운 위혐보다는 더욱 큰 사업이 이 세상에 있으며, 그 사업을 위하여서는 구구한 사혐은 잊어버려야 한다.'는 위대한 마음을 보았다.
그 흥선의 큰 마음을 보고, 돌이켜서 아직껏의 자기네들의 단지 사욕 채움을 위한 암투며 살육이며 책동 등을 생각할 때에, 병기는 스스로 얼굴이 훅훅 다는 것을 금치 못하였다.
본시 어리석지 않은 병기―어리석지 않기에 또한 흥선은 그 인물을 아끼어 사혐을 모두 잊고 병기의 조명(助命)을 대비전에 품하려 하는 것이다―는, 이제 바야흐로 펴려는 흥선의 거대한 날개를 오히려 많은 호기심과 존경의 염으로 바라보고, 흥선으로서 병기를 부르기만 하면, 부족하나마 한 팔의 힘을 돕기를 아끼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병기와의 약속을 이행하고자, 오후에 흥선은 대궐에 들어갔다. 지금의 회견은 가난한 종친과 대비와의 회견이 아니었다. 섭정 국태공 대원군 저하(邸下)와 대왕대비전하 조 씨의 회견이었다.
“대감, 김가들을 어떻게 처치하시렵니까?”
벽두에 대비께서 김씨에 대한 말이 나왔다. 대비에게 있어서도 원한 사무친 김씨 일문, '김씨'도 아니요, '김가'였다.
“네, 거기 대해서도 어떤 하교가 계시올지 듣잡고자 입내하였습니다.”
대비는 한 순간 말을 끊었다. 준비하였던 말을 꺼내려는 예비 행동이었다.
“한 가지 길―대감, 그 사이 김가들한테 수모를 받은 생각을 하면 치가 떨립니다. 왕실의 계통이 얼마나 존엄한 것이관대, 외람되이 김 수근, 김좌근배(金洙根金左根輩)가 주둥이를 디밀어서…”
십 사 년 전, 인손이를 제해 버리고 대행왕을 강화에서 모셔 온 일에 대한 노염이었다. 흥선은 황공히 머리를 조았다.
“황공하옵니다.”
“또 이하전 옥사에, 소위 대비(헌종 홍씨)가 몸소 금부에 옥초를 보았다니, 이런 해괴한 일이 어디 있겠소이까? 생각하면 가슴이 떨리고 담이 서늘해집니다.”
“황공하옵니다.”
“이런 흉적을 대감께서 잘 처분하셔야겠소이다. 고 혜당 김수근(故惠堂金洙根)은 관을 꺼내어 참시(斬屍)를 하고 병학, 병국은 절도에 원배를 보낼 것이고, 하옥 김좌근은 선마마(선조비 김씨)의 동기이니 삭관이나 하고 생명은 그냥 두지만, 병기는 파양 원배(破養遠配) 후에 사사(賜死)를 하는 것이 지당할 줄 생각합니다.”
당연한 처분이었다. 이전과 같으면 이러한 처분은 당연한 것으로서, 지금 김씨 일문들도 그만한 각오는 하고 있을 것이었다.
듣기를 끝내고 흥선은 한참 있다가야 머리를 들었다.
“대비전마마!”
흥선의 눈에는 눈물이 그득히 괴었다.
“지당하신 처분이옵니다. 마마의 흉중도 모르는 바가 아니옵니다. 신도 김씨들에게 대해서 마마께 지지 않는 원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옵니다. 그러나 마마…”
눈에 그득히 눈물을 머금고 한 마디씩 한 마디씩 뚝뚝한 어조로 말하는 흥선의 말에는 진심미가 있었다.
“김씨 일문을 극형에 한달사, 대비마마 생존 중에는 태산과 같이 동요가 없겠읍지만, 마마 천세 후의 일을 생각할 때에는 신은 가슴이 저리옵니다. 지금 궁중 부중을 막론하고 모두가 김씨들에게 신세진 자들…천 명이고 만 명이고 그 종자를 잔멸시키자면 여니와, 그렇지 못하면 불행히 마마 천세하오신 후에는 누가 김씨의 남은 뿌리를 대적하리까? 주상 전하도 전하려니와, 마마의 애질(愛姪) 성하, 영하(寧夏)는 그 때 누구를 힘입으오리까. 마마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닙지만, 후일의 성하, 영하를 생각합셔서 관대한 처분 계시오기를 바라옵니다.”
반박할 수 없는 이론이었다.
“그러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을 흥선이 다시 가로막았다.
“마마, 흥선은 자기의 힘을 아옵니다. 흥선의 앞에선 김씨들은, 봄날의 눈과 같이 자멸의 길을 취할 밖에는 다른 길이 없사옵니다. 관대한 처분이 계실지라도 김씨 일문은 스스로 몰락이 될 것이옵니다. 마마께서 흥선을 믿읍시고 흥선에게 대권을 주신 이상에는, 흥선의 말씀을 좇으시와 관대한 처분이 계시오면, 한 편으로는 마마의 덕을 김씨에게 내리심이 되오며, 또 한 편으로는 후일의 덕행의 표본이 될 것이오매, 잠시 노염을 잊읍시고 놔대한 처분 줍시기를 바라옵니다.”
이 이치 정연한 흥선의 의견에는 대비도 더 반대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대비가 말하였다.
“그럼 김가에게 대해서 대감은 어떤 처분을 주실 의향이외까?”
“신의 소견으론 이렇게 했으면 좋을까 하옵니다. 신 본시 낙척 시대에 병학, 병국 형제의 신세를 적지 않게 졌습니다. 금수도 또한 은혜를 알거든 만물의 영장이 어찌 잊으오리까? 신의 면을 보셔서 병학, 병국 형제를 그냥 관에 머물러 두는 것을 허락해 주십사. 하옥 김좌근은 아무리 순원왕후마마의 동기로되 무능한 노물에 지나지 못하옵고, 그 위에 하옥의 배후에는 독부 양씨가 있사오니, 실직(實職)을 깎으시고 원로의 열(元老列)에나 그냥 두는 편이 좋을까 생각하옵니다. 또 혜당은 이미 죽은 사람을 참시나 해서 무얼 하리까? 막론하시옵소서. 또 병기는…”
흥선의 얼굴에는 빙긋이 미소가 돌았다.
“신, 병기에게 대해서는 잊지 못할 원혐이 있습니다. 병기의 재간으로 보자면 공위(公位)에 두어도 부족이 없는 인물이로되 신의 사혐 또한 잊기 어려우오니, 당분간은 관을 깎고 고향 여주로 내려가 있게 하였다가, 기회를 보아서 중경(개성)이나 강화(江華)나 광주(廣州)나 어느 중요한 곳의 유수(留守)쯤으로 보내오면, 덕은 덕대로 베풀고, 인물은 인물대로 쓰고, 원혐은 원혐대로 갚는 최상지책이 아닐까 하옵니다.”
예사로이 하는 말이로되, 음성이 굵은 흥선의 말인지라 전각이 드렁드렁 울리었다.
“대감 좋으실 대로 헙시오.”
대비는 이렇게 승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 정식으로 취임을 안 하였지만, 이미 작정된 섭정 국태공―흥선의 의견은 이젠 대비의 권병으로도 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대감 맏도령도, 무슨 요긴한 자리를 하나 마련하셔야겠구료.”
“네, 승후관 한 자리나 마련되면 다행일까 하옵니다.”
이것은 대비에게는 의외의 대답이었다.
“승후관이란? 그래도 그럴 듯한 자리를 하나…”
“그 애 본시 명민하지 못하와, 높은 자리에 두면 도리어 자리를 더럽힐 근심이 있습니다. 전하의 동기라고 자격이 없는 높은 지위를 맡기는 것은 정사를 흐리게 하는 일―흥선이 섭정으로 있는 동안은 일호도 사사의 정의로써 사람을 좌우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이것은 벌써 옛날부터 생각한 바옵니다. 만약 그 애가 마마의 애질 성하만큼만 명민할 것 같으면, 자식에게 대한 어버이의 마음이 왜 높이 등용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이후 대비가 무리하게 사람을 추천할 때가 있으면 그 때에 대한 방비선인 동시에, 또한 재래의 관습을 깨뜨려 버리고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자기의 정견을 대비께 내어 비침이었다.
대비의 조카 성하를 상당한 자위에 등용하겠다는 것을 약속하여, 흥선은 대비의 마음을 얼마만큼 흡족하게 하였다.
김좌근, 병학, 병기, 병필 등 김족의 지금의 거대한 재산은 모두 학정에서 얻은 것이니, 속죄하는 뜻으로 매명에 몇십만 냥씩 거두어 상납하게 할 터이니, 용동궁에 붙여서 대비의 사용에 쓰라고 하여, 대비의 마음을 물질적으로도 흡족하게 하였다.
대비께 하직을 하고 창덕궁에서 나올 때에, 흥선은 지금 바야흐로 커 가는 자기의 위력을 새삼스러이 통절히 느꼈다.
그 사이의 빈곤 때문에 영양 불량으로 장작개비같이 빼빼 마른 자기의 손을 관복 소매 밖으로 내밀어 물끄러미 굽어 볼 때에, 흥선은 이제 이 장작개비 같은 손아귀의 안으로 들어올 거대한 그 무엇을 생각하고 빙긋이 웃었다.
대궐에서 돌아오는 길에 흥선은 영초 김병학의 집을 찾았다.
흥선에게 대하여 그다지 혹독한 일은 한 일이 없으나, 역시 김족의 한 사람으로 전전긍긍히 처분만 기다리고 있던 영초는 망지소조하여 버선발로 뛰어나와서 맞았다.
“대감! 이전 대감의 은혜를 갚을 날이 오늘에야 왔소이다.”
흥선이 영초에게 허리를 굽히며 이렇게 말할 때에 영초는 땅에 머리를 조았다.
이전과 같은 '상갓집개'가 아니요, 지금 웃사람의 지위로서 이 집을 찾을 때에 흥선은 감개 무량하였다.
“대감! 이젠 어느 설 때 보내 주신 세찬―그 날의 은혜는 흥선 죽을지라도 잊을 수가 없소이다.”
내일 모레면 섣달 그믐이라 대목께, 팽경장의 집에서 참지 못할 수모를 받고 쫓겨 나와서, 갈 데가 없어서 바람 찬 종로의 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지나가던 영초에게 발견이 되어 영초의 집으로 끌려 가서 적지 않은 대접도 받았거니와, 더구나 많은 전곡을 보내 주어서 무사히 과세를 하게 한 그 날의 고마움은 흥선의 마음에 아로새겨져서 잊지 못할 일이었다.
“원한은 기억할 필요가 없으나, 은혜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외다. 그 날의 은혜 이제 갚을 날이 있으리라.”
흥선은 감연히 이렇게 말할 때에, 영초는 황공하여 감히 머리도 들지 못하였다.
여기서 흥선은 영초에게, 김문에 대한 조 대비의 처분을 말하여 주었다.
하나, 조 대비는 김문에게 대한노염이 매우 커서 모두 극형을 엄명하였지만, 겨우 주선을 하여서―
하나, 김좌근은 영의정을 사퇴하고 단지 상신에 머물러 있을 것.
하나, 병기는 당분간 근신하는 뜻으로 시골이라도 내려가 있으면 장차 다시 부를 기회가 있을 것.
하나, 병필은 실직을 사퇴할 일.
등등으로 낙착이 된 것을 말하고, 병학, 병국의 형제는 이전의 은혜도 있으니, 조정에 머물러서 흥선 자기를 협찬해 줄 것을 아울러 부탁하였다.
전대 미문의 은전(恩典)이었다. 이런 관대한 처분을 뜻도 하지 않고 있던 병학은, 혼연히 이 은전을 자기네의 일족에게 알게 하여, 대감의 주선이 덕을 보답하기로 약속하고, 아울러 우둔하지만 대감의 앞에서는 견마의 노를 아끼지 않기를 맹세하였다.
길까지 따라 나오면서 전송하는 영초와 작별을 하고 흥선은 다시 교군에게 명하여 조두순의 집으로 갔다.
“이번 주상 전하 영립에 대하여 많이 노력하심을 감사하러 왔습니다.”
이렇게 흥선이 인사할 때에, 근엄한 조두순은 자리를 물러 앉아 절하며 국태공 흥선군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대비의 어의로 영의정 김좌근은 퇴직을 하고 그 뒤를 조두순이 올라서서 영상의 직을 받기로 내정되었으니, 그만큼 알아 두고 그 준비를 하여 두라고 부탁하였다.
모든 일은 이제 명년(갑자년) 정월 주상 전하의 즉위식이 지난 다음에야 구체적으로 결정이 될 서이지만, 지금 내정된 것으로 그만큼 되었으니 그렇게 알아 두라는 것이었다.
조두순의 집에 서나와서는 정원용의 집에도 잠시 들렀다. 그리고 거기서도 주상 전하 영립의 공로를 감사하고 정원용의 아들 기세(基世)는 대비의 분부로 병조판서로 내정이 되었으니 그만큼 알아 두라고 당부하였다.
흥선이 원용의 집에서 운현궁으로 돌아온 때는, 겨울의 짧은 해가 다 가고 꽤 어두운 때였다.
불안(不安)의 계해년 섣달이었다.
상감이 갑자기 승하였다. 그 후사가 없었다.
누구? 누가 될까?
모두들 이러한 마음으로 하회를 기다릴 동안, 의외 천만으로 흥선의 아드님이 이십 육대의 조선 군주로 옹립이 되었다.
이 의외의 일에 딱 벌렸던 입이 닫히기도 전에 뒤따라 더욱 놀랄 만한 일이 생겼다.
흥선이 섭정이었다.
그 족보로 따지자면 당당한 종실의 공자지만, 영락되고 영락되어, 기생집 아랫목이나 지키고 투전판이나 찾아다니던 흥선이었다. 그 흥선이 한 번 뛰어서 국태공이 되고 두 번 뛰어서는 왕의 왕이 되었다.
그 너무도 급속한 변화에 누구 한 사람 크게 반대하여 볼 겨를이 없었다. 너무도 의외의 변화에 반대성을 올리려고 할 때에는, 벌써 한 걸음 더 뛰어 올라가서, 반대성이 이르지도 못할 높은 자리에서 위연히 굽어 보는 흥선이었다.
한 번 뛰고 두 번 뛰어서, 이런 높은 지위에 올라갔거니, 그 첫 행정으로서 원한 많은 김씨 일문을 잔멸시키려니, 누구든 이렇게 믿었다.
그러나 흥선의 김씨 일문에게 대하여 한 손가락도 대지 않았다.
이것은 무슨 까닭?
지금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장래의 일격을 준비하는 예비 행동인가?
혹은 섭정공의 세력으로도 김문의 힘은 능히 꺾지 못함인가?
무거운 기분에 잠긴 계해년 섣달이었다.
아직 국왕의 즉위식도 들지 못하였다. 따라서 흥선도 정식으로 섭정의 자리에 서지 못하였다.
흥선은 일체로 침묵을 지켰다.
그런지라, 다만 불안에 싸일 뿐, 누구라 장래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
흥선으로서 만약 이제도 보통인의 생활을 했으면, 그 생활로 미루어서 장래를 추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에 너무도 변화 많은 생활을 보낸 사람이라, 그 마음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하늘밖에는 알 이가 없었다.
김문뿐 아니라 정부의 백관은 모두 전전긍긍하였다. 이제 이 해가 지나고 새 해, 흥선이 섭정의 위에 정식으로 앉게만 되면, 어떻게 세상이 뒤집힐지 알 수가 없으므로 마음을 놓을 사람이 없었다.
위로는 의정부 삼공에서부터 아래로는 자사차역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인사 변동이 없었다.
전례로 따져 보자면, 한 개의 세력이 꺾이고 다른 세력이 들어설 때에는, 한 번 뒤집어 놓은 듯이 모두 변하였는지라, 지금 한 사람의 이동도 없는 것이 더욱 무시무시하였다.
단지 승후관 조성하가 정삼품 통정대부 우승지(正三品通政大夫右承旨)로 승차하고, 상감의 백형 재면이 새로이 승후관으로 임명된 뿐, 영의정 김좌근 이하 한사람도 아직 이동이 없었다.
이 무시무시한 '안정' 때문에 모두 모이면 수군수군하였다.
돌아가는 말로서는, 이제 상감이 등극하고 대원군이 정식으로 취임하게만 되면 당일로 김씨 일문의 수령 삼십여 명을 한꺼번에 참하라는 밀령을 대비에게서 받고, 흥선은 극비밀리에 그 준비를 하고 있다 하여, 가이나 불안한 공기를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어제까지는 한 개의 거리의 부랑자에 지나지 못하던 흥선의 지금 일동 일정 일거수 일투족은 온 조야의 주의의 표적이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서 흥선은 흥선으로서 아무 의견도 입 밖에 내지 않고 다만 정관하고 있었다. 섭정 태공의 자리를 정식으로 잡는 날을 고요히 기다리며―
흥선 댁―아니 지금은 운현궁―에는 차차 사람의 출입이 빈번하여 갔다.
이전의 술 친구, 기생집 동무, 투전 친구들도 모두 새 옷을 구해서 떨쳐 입고 운현궁을 찾아와서 하의(賀意)를 올렸다.
원로 대신들도 남녀도 연하여 운현궁 문에 드나들었다. 이전에는 한낱 부랑자로 인정하고 자기 집으로 찾아올 지라도 들이지 않던(지벌과 가품을 자랑하는) 명문 거족들도, 모두 서로 앞을 다투어 운현궁으로 몰려들었다.
그 가운데 처하여 그들을 응대하는 흥선의 태도―그것은 과연 보는 사람의 눈을 둥그렇게 하였다.
폐의 파립―얼굴에는 늘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먹을 것을 만나면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달려들던 흥선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지금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난 흥선은 어떤 사람인가?
“하하하하! 내가 무얼 하오?”
호기롭게 그가 소리쳐 웃을 때는, 그 웃음 소리는 능히 만인의 머리를 숙어지게 하였다.
야위고 창백한 얼굴이지만, 한 번 그 눈을 크게 뜰 때는 등골로는 소름이 쭉 끼쳤다.
천연히 구비된 위풍―일조 일석에 배우거나 스스로 짓지 못할, 그것은 왕자의 위엄이었다.
눈을 고요히 감고, 고요한 말로 하는 한 마디의 명령이라도, 앞에 있는 사람은 마음이 송구하여져서 저절로 시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 위풍―그것은 결코 배우거나 연습하여서 될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본시 그런 천품을 타고 나서야 비로소 가질 수 있는 위엄이었다.
대사가 결정된 이후에는 한 번 흥선을 찾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진심으로 흥선에게 복종하기를 맹세하였다.
이 패기, 이 위력, 이 압력, 이 지배력, 이 통찰력 이래 반항을 하거나 대항을 할 만한 용기를 가져 본 사람이 없었다.
흥선의 이 위력과 압력을 봄에 따라서, 현하의 정계의 암류(暗流)는 더욱 불안하고 무시무시하였다. 한 번 손을 들 때에는 어떤 일이든 결행할 만한 흥선의 위력과 담력을 차차 이해함에 따라서, 장래에 생겨날 참극을 생각하고 모두 전전긍긍하였다.
조성하는 만날 운현궁을 떠나지 않고 흥선을 모셨다.
흥선의 도령이 보위에 오르기만 하면, 좀더 높은 자리를 예상하고 있던 성하가, 겨우 정삼품에 머문 것은 약간 불만하기는 하였지만, 흥선의 인물을 이미 안 성하는 표면에까지 그 불평을 나타내지 않았다. 장래 자기의 수완만 있으면 얼마라도 올라갈 길이 남아 있으며, 더구나 흥선이 자기의 맏아들도 겨우 승후관의 지위에 갖다놓고, 서자 재선(庶子 載先)은 그냥 야(野)에 머물러 두게 함에 비추어서 자기의 정삼품이라 하는 지위에 불평을 말할 수가 없었다.
성하도 고요히 기다렸다. 어서 이 며칠 남지 않은 계해년이 다 가고, 새 해가 이르러서 눈을 뜬 사자의 포함성을 들어 보고자―
어떤 포함성이 나오나, 그 사이 십 수 년 간을 은인하고 은인하여 가면서, 닦고 라고 궁리하고 세운 이 사자의 계획은 어떤 것인가고―그 때의 빛나는 우렁찬 날을 생각할 때에, 젊은 성하는 가슴이 들먹거리는 것을 금하지를 못하였다. 그리고 자기도 또한 그 우렁찬 날에 한 개의 역할을 맡아서 할 사람임을 생각할 때에, 희열과 만족감과 긍지를 금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불안과 희망이 뒤섞인 계해년은 고요히 고요히 저물어 흘러갔다.
그 며칠 사이에 소위 '속죄(贖罪)하기 위한 상납'이라는 명목으로서 김씨 일문에서 내어 놓아서, 흥선의 손을 통하여 용동궁에 갖다가 붙인 금액이 합계 구십여 만 냥이었다.
그 어떤 날 흥선은 갑자기 하옥 김좌근을 찾았다.
“대원군 전하께서 행차하셨습니다.”
하인이 이렇게 아뢸 때는, 하옥은 양씨의 집 내실에서 양씨와 마주 앉아서 시골로 내려갈 의논을 하고 있던 때였다.
하옥은 허둥지둥 일어섰다.
“무얼 하러 왔을까?”
이전 같으면 흥선 따위는 올지라도 눈하나 거들떠 보지도 않을 하옥이로되, 지금은 몸을 벌벌 떨면서 황황히 일어나서, 양씨에게는 눈짓을 하고 사랑으로 뛰쳐 나왔다.
“대감께 주상 전하 옹립에 대한 감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이렇게 말할 때에 흥선의 얼굴에 나타난 것은 너무나 명랑한 미소였는지라, 호인 하옥은 이것을 조소(嘲笑)로 알지 못하였다.
“천만에, 대감 어떻게 이런 누추한 집에를 왕림하셨습니까?”
“네, 대비전마마의 하교가 곕셔서…”
하옥은 눈을 들어서 흥선의 얼굴을 우러러보았다.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과 같은 심정으로―
“어떤 하교오니까?”
여기 대해서 흥선은 즉시 대답치 않았다. 머리를 수그리고 말하기가 매우 거북한 듯이 두어 번 코를 울렸다.
그런 뒤에야 입을 열었다.
“대비전마마꼡서, 대감 작은마마(양씨)를 불러 곕시는데요.”
의외의 말이었다. 하옥은 낭패하였다. 머리를 들었다가 도로 수그렸다. 수그렸다가 도로 들었다.
“왜 부릅시는지 알 수 없겠습니까?”
“글쎄올씨다―한데 대감 이상한 말을 묻습니다마는, 대감 댁 작은마마가 그―저…”
말하기가 매우 거북한 모양이었다.
“언제, 그…저…그 대감께 폭행을 한 일이 있습니까?”
하옥은 번쩍 머리를 들었다. 대답은 못하였다. 망지소조하여 들었던 머리를 좌우로 휘둘렀다. 대답은 못 지하였지만, 그런 일이 있는 것은 분명하였다.
“순원왕후 전하의 동기되시는 귀인께 외람되이 하향 전비가 폭행을 했다고, 대비전마마의 노염이 여간 크지 않습니다.”
엉뚱한 거짓말을 지어서 하옥을 위협하는 흥선이거니, 속으로 하옥의 낭패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꼴이 우습기가 짝이 없었다.
“대감, 살려 줍시오.”
몇 마디의 위협을 더 받은 뒤에 하옥의 입에서는 드디어 탄원성이 나왔다.
“대감만 믿습니다. 대비전마마께 잘 말씀드려서, 모면하도록 해 줍시사. 대감만 믿습니다. 아무런 노릇이라도 대감 처분대로 할게―”
이리하여 여기서는 한 개의 상의(商議)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상의는 하옥이 십만 냥, 양씨가 이십만 냥을 용동궁에 상납을 하고, 그 대신 벌을 모면시키도록 주선하기로 낙착이 되었다.
“대비전마마! 하옥 김좌근이 용동궁에 삼십만 냥을 상납하겠다 하옵니다. 김가의 행실을 보자면 괘씸하기 짝이 없으되, 훗날을 생각합셔서 이것으로 좌근의 죄는 용서해 줍시기를 바라옵니다.”
흥선이 삼십만 냥의 어음을 대비의 앞에 내어놓고 이렇게 빌 때에, 대비도 명랑히 웃으면서 이를 승낙하였다.
피비린내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흥선은 이편 저편으로 돌아 다니며 알선하였다. 만약 흥선의 알선만 없었더면, 김씨들은 모두 참몰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 동안 조두순, 김병학 형제 등은 자주 운현궁에 왔다. 그리고 조두순이나 김병학이 온 때는 흥선은 조성하까지 멀리 하고 밀실에서 의논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 결과로 정부 대신들도 대략 작정이 되었다.
영의정 조두순(領議政 趙斗淳)
우의정 김병학(右議政 金炳學)
좌의정 결원(左議政 缺員)
삼공은 이러하였다. 그 아래로는 또한 이와 같았다.
이조판서 김병학 겸섭(吏曹判書 金炳學 兼攝)
―후에 이의익(李宜翼)이 정식으로 맡음.
호조판서 김병국(戶曹判書 金炳國)
병조판서 정기세(兵曹判書 鄭基世)
선혜당상 이승보(宣惠堂上 李升輔)
좌포도대장 이여하(左捕盜大將 李景夏)
우포도대장 신명순(右捕盜大將 申命純)
금위대장 이장렴(禁衛大將 李?濂)
어영대장 이경우(御營大將 李景宇)
총융사 이방현(總戎使 李邦玄)
그 밖에 각조의 참판 이하로는 남인과 북인과 소론을 많이 기용하기로 하였다. 아직껏 정부의 요로에 선 사람은 모두 노론파(老論派)로서, 소론?남민?북인은 모두 낙척하여 겨우 그 날 그 날의 생명이나 유지해 가던 것이었다.
흥선은 이 실의(失意)의 남인·북인 가운데서 인재를 추려 내어서 당연히 정부의 요직에 가져다 놓기로 하였다.
“주상 전하 즉위의 예가 지난 뒤에 발표할 것이지. 그 전까지는 대감의 마음에 깊이 잡수시고 발설하지 마시오.”
흥선은 조두순에게 이렇게 당부하여 두었다.
남인·북인뿐 아니라 정부의 요직에는 절대로 오를 자격이 없던 중인, 관속들도 많이 등용하기로 내정하였다.
소론이며 남인, 북인은 역시 양반의 꼭지인지라 별 말이 없었지만, 중인, 관속들을 등용하는 데 대해서는 격식을 존중히 여기는 두순은 반대의 뜻을 표하였다.
그러나 두순의 반대쯤으로 굽힐 흥선이 아니었다.
“인재면 상놈일지라도 높이 쓸 것이고, 무능하면 임금의 형일지라도 승후관 이상은 주지 않는 것이 내 주장이외다.”
얼굴에 미소를 띄고 이렇게 말할 때는 조두순도 승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모든 준비는 암암리에 진행되었다. 화살은 이미 메어졌다.
줄도 당겼다. 이제는 손을 놓아 준다는 과정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성하, 어떤가? 옷이란 무서운 것―폐의 파립 때의 흥선과 금옥 탕창의 흥선과 보기에도 좀 다르지?”
하하하하 웃으면서 이런 농담을 던지는 흥선의 양 눈썹 사이에는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있어서, 앞에 있는 자로 하여금 저절로 위압감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었다.
천희연, 하정일, 장 순규, 안필주―소위 천하장안의 네 사람은 벌써 일찍이 흥선의 영을 받고 시골로 제각기 헤어져서 내려갔다. 각 방백 수령들의 행장을 비밀리에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이전 낙척 시대에는 기생방 친구―권세를 잡은 지금에 있어서는 심복 궁리였다. 이리하여 장래의 일격을 준비함에 추호도 미비함이 없도록 만반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폭풍우를 준비하는 여름날 저녁과 같이 고요하고도 움직임이 없는 외양이었지만, 그 속에서는 장래 세상을 놀라게 할 무서운 폭풍우가 가장 규칙적으로, 가장 계획적으로, 가장 정세하게 착착 진행이 되고 있었다.
낡은 것은 다 물러가고 새로 잡히는 갑자년 정월 초이튿날―
이전 같으면 비록 정월이라 할지라도 몇 사람의 종친이나 술 친구밖에 찾는 사람도 없던 흥선의 집이로되, 이제는 섭정 태공의 거궁으로서 초하룻날 이른 아침부터 이튿날 저녁인 이 때까지, 문안 오는 무리가 뒤를 따라 이르렀다.
그것을 대충 치르고, 흥선은 내실로 들어갔다.
흥선이 내로 들어설 때에, 마침 웬 처녀가 하나 와 있다가 황급히 발치로 물러 앉았다.
흥선은 아랫목에 자리를 잡으면서 처녀를 바라보았다. 낯 익은 처녀였다.
“저 애가 누구더라.”
부대 부인이 거기 대하여 대답하려 할 때에, 흥선은 자기의 기억 가운데서 그 처녀의 정체를 찾아 내었다.
“오오, 민 생원 댁 처자로구나! 그렇지?”
“네.”
부대 부인과 처녀가 동시에 대답하였다.
처녀는 민치록의 딸―얽은 소녀였다.
“음, 너 몇 살이더라?”
“새해에 열 네 살이 잡힙니다.”
“천애의 고아―적적하지 않느냐?”
소녀는 적적한 미소를 얼굴에 띄었다.
“어떠냐? 너의 오빠(양오라비 민승호―부대 부인의 동생)와의 사이의 의는 좋으냐?”
“네, 퍽 귀여워해 주십니다.”
“그러려니!”
흥선은 잠시 말을 끊고, 이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영특한 소녀의 눈찌―비록 한두 점의 얽은 자리는 있으나, 얌전하고 슬기롭고 영리한 얼굴이었다.
“글도 배우느냐?”
“네, 오빠한테 소학도 다 떼고…”
“그리고?”
“이즈음 '좌씨전(左氏傳)'을 조금씩 읽습니다.”
“좌전을 읽는다? 그래 알아보겠더냐?”
“모를 것이 너무 많아서, 오빠께 꾸중을 늘 듣습니다.”
흥선은 담뱃대를 끌어다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한 모금 뻐근하니 빨고, 그 푸른 연기와 얼굴 앞에 어리는 가운데로 흥선의 말이 새어 나왔다.
“계집이란 첫째도 둘째도 세째도 온순해야 하느니라. 승호를 양오빠로 여기지 말고 친동기로 섬겨라. 천애의 고아 승호―한 사람밖에는 의지할 사람이 없지 않으냐? 어 참, 계집으로 태어난 이 아깝군!”
부대 부인이 흥선의 말에 응하였다.
“집안을 얘기 통 혼자 도맡아 살핀답니다그려. 아직 다른 집 계집애 같으면 각시놀이나 하고 있을 나이에…”
“영특하게 생겼소.”
“기박하고 가련한 팔자를 타고났지. 양가로는 친척도 있지만 친편으로는 제일 가깝대야 육촌 칠촌이지, 가까운 일가도 없이 불쌍한 아이외다.”
“응, 자주 오빠와 함께 집에 놀러 오너라.”
그러나 입으로는 이런 말을 하나, 흥선은 속으로는 이 소녀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까운 일가도 없다. 참 가엾어라!”
혼잣말 비슷이 이렇게 한 번 더 중얼거리고 다시 생각난 듯이 담배를 빨았다.
그 소녀는 밤에야 양오라비 승호와 함께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 부대 부인은 소녀가 타고 갈 가마까지 빌려 주었다.
흥선의 둘째도령―지금은 감히 그 휘(諱)조차 부를 수가 없는 지존은, 어렸을 적에 벌써 김병문(金炳聞)의 딸과 혼약을 맺었다.
흥선의 불우한 시대에 혼약을 한 것이었다. 즉, 김병문의 딸은 장래의 흥선의 며느리요 재황의 아내가 될 처녀였다.
그러나 지금 지위가 변하여서, 흥선은 대원군이 되고 재황은 지존이 된 오늘에 있어서는, 좀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 문제였다. 조선의 아직껏의 큰 폐단의 하나는 왕비의 친척의 방자였다. 더구나 흥선과 사돈한 집안은 그렇지 않아도 몇 대를 내려오면서 집안의 딸을 대내로 들여보내고, 그 세력이 이미 하늘을 찌를 듯한 김족의 한 사람이다.
내심으로 이 문제에 머리를 앓고 있던 흥선은 여기서 한 얌전한 처녀를 발견하였다. 집안은 부끄럽지 않는 양반의 집안이었다. 영특하고 슬기롭게 생긴 처녀였다. 학문에 있어서도 벌써 '좌씨전'을 읽는다 하니, 여인으로서는 과하면 과하지 부족함이 없었다. 그 위에 가장 두통거리되는 '가까운 일가'가 없는 처녀였다.
밤에 흥선은 그 소녀의 일신상에 대하여 부대 부인에게 끈끈히 물었다. 그 묻는 태도가 너무도 끈끈하므로, 부인이 이상히 생각하고 왜 그렇게 묻느냐고 반문을 하매, 흥선은 다만 웃어서 스러져 버리고 말았지만, 한참 뒤에 흥선은 스스로 다시 그 문제를 내었다.
“그 규수를 중전(中殿)으로 삼도록 하면 어떨까?”
여기 대해서 부대 부인의 의아하다는 눈치를 흥선은 위에 던졌다.
“벌써 사돈한 댁이 있지 않습니까?”
“김병문 말이오?”
“네.”
“있기는 있지만…”
시원하지 않은 대답이었다.
“있기는 있지만―김―김씨가―김문이―김가가―불길해…”
“불길해도 할 수 없지요. 사세가 그런 것이야…”
그러나 흥선은 부인같이 간단히 단념하지를 못하는 모양으로 연하여 머리만 기웃거리다가,
“좌우간 부인!”
하고 찾았다.
“네?”
“그 규수를 간간 놀러 오라시오. 그리고 그 인품이며 사람됨을 좀 유심히 보아 두시오.”
한 뒤에 말을 끊으려다가 다시 이어서,
“그 규수가 아니라도 김가는 좋지 못해. 있는 김가들도 꺾어야 할 판에, 새로 새 김가를 들여다 놓으면 마찬가지지. 김가 세상이 또 되게…”
―이리하여 후일 국태공과 민 중전의 악연은 여기서 그 실마리가 맺어졌다.
가까운 일가가 없다고 안심하고 모셔 들였던 이 소녀는 후일 시아버님 국태공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동성 동본이면 모두 일가라 하고 끌어들였다.
영특하고 슬기로운 성격은 단지 대궐 안의 여주인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의 섬세하고도 날카로운 손을 길게 펴서 여자다운 능란한 외교술을 농락하여, 그의 위대한 시아버님을 거꾸러뜨린―민 중전과 국태공과의 악연은 여기서 이렇게 맺어졌다.
흥선의 활달하고 밝은 눈으로도 여자의 세 치 마음 속은 능히 꿰어 보지 못하여, 천추에 원한을 남긴 서투른 짓을 하였다. '일가가 없는 양반 집 딸'이라 하는 미끼가 흥선의 눈을 어둡게 한 것이다.
일양내복―
다사다난한 계해년이 지나고, 갑자년 춘정월―유난히도 명랑한 날씨―한 조각의 바람도 없고 겨울날이라 해도 따스한 볕이 골고루 내려 비치고 있었다. 두어 조각 분홍빛 구름이 백악(白岳) 위에 걸쳐서 이 명랑한 날씨를 더욱 곱게 장식하고 있었다. 갑자기 따스로와진 일기 때문에 집집마다 처녀에서는 눈 녹은 물이 땅을 적시고 있었다.
이 날 조선 팔도 방방곡곡에는 모두 축하의 기분이 넘쳐 있었다.
제 이십 육대 조선 국왕―새해에 열 세 살 되는 소년 왕이 등극하는 날이었다.
종로를 장식하던 공랑이며 육주비전 이하 온 상점은 모두 철전을 하였다. 그리고 시민들은 이 날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하여 모두 새 옷을 바꾸어 입고 거리로 몰려 나왔다.
이 날 아침부터 거리에는 정일품으로부터 종구품에 이르기까지 높고 낮은 관원들이 모두 자기의 품에 적당한 조복(朝服)으로 몸을 장건하고 뒤를 이어서 금호문 안으로 사라졌다. 이 뒤를 연하여 대궐로 들어가는 높고 낮은 관원들의 행차 때문에, 중인 이하 상놈들은 길복판 한가운데는 나설 기회도 없었다.
“에익, 이 놈들, 물리거라, 비켜라!”
행차의 앞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위세 좋게 울리는 경필의 소리에, 혹은 초헌, 혹은 사인남여에 몸을 실을 높은 재상이며, 아래로는 나귀 한 마리에 마부와 하인 겨우 한두 명을 단 아랫관원들의 행차에 이르기까지, 불안과 희망을 아울러 품고서 금호문 안으로 금호문 안으로 그 그림자를 감추는 것이었다.
대궐 담 밖에는 이 날의 경사를 음향으로나마 엿보려고 모여든 무리들 때문에, 벌써 송곳 세울 여지도 없게 되었다. 이윽고 국태공 흥선대원군의 행차가 돈화문 앞에 이르렀다.
기린 흉배에 옥대를 띠고, 단연히 앉아서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주위의 시민들을 둘러보는 이 귀인―누가 이를 어젯날 한길에서 갈지자 걸음으로 난행을 하던 하응으로 볼 것이냐? 시종이 받든 조산(??) 그늘에서, 피곤한 듯한 눈을 굴려서 흥선은 좌우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 전후 좌우를 시위하는 가마와 도보의 병사들은 늠름히 날뛰고 있었다.
오늘의 주인의 생친(生親)을 맞기 위하여 돈화문이 넓게 열렸다. 삼공이라도 걸어서가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는 대궐 안(재상은 견여(肩輿)로써 입궐하던 것을 신유년 삼월에 금함)을 흥선의 남녀는 위세 좋게 들어갔다.
흥선의 남여가 문 안으로 그림자를 감춘 다음에는 돈화문은 다시 고요히 닫혔다.
그 뒤로도 관원들의 행차는 연하여 금호문으로 하여 대궐로 들어갔다.
기쁨에 넘친 날이었다. 하늘조차 이 날을 축하하는 듯이 근래에 보기 드문 명랑한 날이었다.
“저 분이 대원군이시지?”
“그럼!”
“본시 흥선군이라지?”
“그래!”
단아한 공자, 위엄성 있는 귀인, 그러면서도 친애할 수 있는 동무―시민들은 여기서 자기네들을 지배할 무서운 권력자를 보기보다, 오히려 친애하고 서로 무릎을 겯고 의논할 수 있는 온화하고도 믿음성 있는 웃사람을 발견하였다.
문득 대궐 안에서는 부드러운 아악 소리가 울리어 나왔다. 제 이십 육대의 임금의 즉위 예식은 바야흐로 시작이 되는 것이었다.
대궐 밖의 시민들은 모두 일제히 허리를 굽혀서 이 경사에 축하와 경의를 표하였다.
인정전에서의 즉위의 예식과 아울러 국태공 섭정의 취임식은 무사히 성대히 끝이 났다.
신왕은 대왕대비 조씨의 인도와 섭정 국태공의 배행으로서 종료에 거동하여, 열성(列聖)의 영전에 이 사직 받듦을 봉고하였다.
이튿날은, 처음 조회를 보는 날이었다.
인정전 용상에는 새로이 삼천리의 강토에 군림한 소년 상감이 좌어하였다. 그 곁에는, 섭정 태공이 모시고 있었다.
국궁!
바이!
흥!
평신!
북향하여 네 번의 숙배도 끝이 났다.
숙배가 끝이 난 뒤에, 흥선―지금은 변하여 태공―은 내관의 부액을 받고 고요한 걸음으로 인정전 전각 밖으로 나섰다.
월대(月臺)에까지 나선 태공은 눈을 들어서 아래 품반품서(品班品序)를 따라서 숙연히 서 있는 문무백관을 굽어 보았다.
문득 태공이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흥선대원군, 주상 전하의 사친이오.”
놀라운 성량(聲量)―그 넓은 뜰에 태공의 말은 우렁차게 울리어 나갔다.
“대왕대비전하의 어명으로 오늘부터 유충하신 주상 전하를 협찬해서 이 사람이 대정(大政)을 보기로 합니다. 국정이 극도로 피폐한 오늘, 대소 백관들의 협력을 바라오.”
취임사(就任辭)였다.
만정의 백관들은 죽은 듯이 고요하였다.
몇 마디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의 뜻은 태산보다 무거웠다.
'전 책임을 내가 지고 전 의무를 내가 갖겠다.'
태공의 말은 이 뜻에 틀림이 없었다.
다시 돌아서서 전각 안으로 들어올 때는, 태공 흥선의 입에서는 길다란 한숨이 나왔다.
“아아, 커다란 씨름을 치렀다!”
하염 없이 눈에서 흘러 내리는 눈물―그것은 커다란 안심에서 저절로 솟아오르려는 눈물이었다.
“상감마마를 편전으로 모셔라!”
내관에게 명하고 내관의 부액으로써 편전으로 드는 상감의 뒤를 따라서 태공은 내전으로 들었다.
“전하, 곤하시지 않소이까?”
태공이 자애에 가득찬 눈으로 아드님을 굽어보며 이렇게 여쭐 때에, 면류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은 상감은 용안을 적이 들고 생친을 우러러보았다.
“곤하지는 않습니다.”
“곤합니다. 곤합니다. 몸이 곤하기보다 마음이 곤합니다. 천만의 백성을 헤아리시기, 삼천리의 강토를 다스리시기―몸보다도 마음이 곤합니다. 영화스러우나 괴롭고 고단하신 자립니다.”
“아직은 곤한 줄을 모르겠습니다.”
상감의 탄 연에 딱 붙어 서서 이 아버지는 존귀한 아드님께 임금의 자리의 고단함을 설명하였다.
편전으로 돌아와서 편의(便衣)로 바꾸어 입는 것을 본 뒤에 태공은 아드님께 하직하였다.
“나는 운현궁으로 돌아갑니다. 부디 일찍이 침전에 듭시고 수라를 많이 진어합시오.”
편전 앞까지 남녀를 불러 대어 남녀에 몸을 싣고 돈화문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도중에서 태공은 문득 하옥 김좌근을 만났다.
하옥은 황급히 길을 비키며 국태공에게 인사를 드렸다. 그러나 태공은 그 하옥의 인사에 대하여 가볍게 머리를 끄덕일 뿐, 다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의장 병사를 불러 거느리고 운현궁으로…
눈 좌우로 하염 없이 흘러 내리는 눈물―
가묘(家廟)에 들어서, 선고 남연군(先考南延君)의 영전에 가문의 길보를 봉고할 때에는, 태공의 눈 좌우로는 하염 없이 눈물이 흘렀다.
“기뻐하십시오. 영락되고 영락돼서 영전을 뵈올 면목도 없던 가문, 지금 다시 일어서렵니다. 일찍이 소자를 보실 때에, 선인(仙人)이 한 아이를 맡기시더라던 꿈―지금 바야흐로 실현되려 하옵니다. 소자 무력하와, 미처 당하지 못하는 일이 있삽거든 부디 가르치셔서, 이 나라와 이 사직의 만세 태평을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꿇어 앉아서 술을 붓고 절할 동안, 끊임없이 태공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진실로 거대한 야욕의 공전 절후의 성공이었다. 항상 계획을 하며 진행을 시키면서도 일변으로는 스스로 코웃음치고 싶던 이 야욕이 오늘날 성공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사이 십 수 년 간을 시정에 배회하며 시민들과 무릎을 마주 겯고 사귀면서 보고 들은 지식에 의지하여, 그들에게서 고통과 중하(重荷)를 제하고, 이 나라로 하여금 굳센 나라가 되게 하고, 이 백성으로 하여금 가멸한 백성이 되게 하고, 이 강토로 하여금 기름진 강토가 되게 하고, 이 사직으로 하여금 아직껏의 더럽고 추잡한 구태를 벗고 명랑하고 화기 찬 사직으로 만들어 놓는다는 도정이다.
태공은 자기의 역량을 믿었다. 하늘로서 태공 자기에게 넉넉히 수(壽)만 주실 것 같으면, 이상대로 이 나라를 만들어 놓을 심산과 자신이 있었다.
가묘에 예배를 끝내고 사랑으로 나오매, 하객(賀客)들은 구름과 같이 대청에 모여서 태공의 출어를 기다리고 있다가 일제히 일어나서 절하였다.
그 가운데를 태공은 무거운 발걸음을 천천히 아래로 향하여 옮겼다.
“후우!”
태공은 기다란 한숨과 함께 몸을 곤한 듯이 보려 위에 내어 던졌다.
이튿날 섭정 대원군의 명의로서 정부 관리의 이동이 발표되었다. 이 발표를 보고 모두 눈을 둥그렇게 하였다. 양반은 양반이로되 아직껏 무세하던 소론, 남인, 북인이 많이 요로에 서게 된 것도 그들을 놀라게 하였다. 중인, 상놈까지 파격의 등용을 한 것도 그들을 놀라게 하였다.
흥선군 시대의 친구들이 비교적 적게 등용된 것도 그들의 의외였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보다도 더욱 의외로 느낀 것은 김씨 일문에게 대한 관대한 처분이었다.
김좌근은 실직은 떠났으나 그냥 상부(相府)에 머물게 되고, 그 양자 병기가 단 한 사람 삭관된 뿐, 병학도 선왕때보다 위가 올라서 공렬(公列)에 서게 되고, 병국도 훈련대장에서 호조판서로 오르게 되고―이것이 가장 눈을 크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벼우면 원배(遠配), 그렇지 않으면 사사(賜死)거나 참(斬)을 할 것이어니 하고 있었는지라, 이 처분은 과연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이러한 관대한 처분 때문에 국태공으로서의 흥선의 광채는 찬연히 그들의 머리 위에서 빛났다.
이제는 대비도 없었다. 상감의 그림자까지 태공 뒤에 감추어졌다. 그들의 앞에 커다랗게 나타나서 빛나는 것은 국태공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광채뿐이었다.
그 광채의 아래 만조 백관들은 공손하는 뜻으로 허리를 굽혔다. 잠들었던 사자는 드디어 기지개를 하였다. 그리고 첫 포함성을 질렀다.
산림이 울리어 나가는 그 포함성―그 아래에서 잠 깬 사자는 그의 운동을 시작하였다.
쇠퇴한 국운, 피폐한 국정, 실추된 국권―이 모든 무거운 짐을 한 몸에 뭉쳐 지고, 거인은 드디어 그 조리(調理)를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시정에 배회하여 이 시민의 사정과 고통을 속속들이 다 아는 이 거인은, 시민들을 도의 쓰라림에서 건져 올리고자 그의 커다란 손을 내어 밀었다. 정확히 통찰하는 그의 눈과 든든한 그의 손은, 오랜 학정에 피폐해서 마지막 힘까지 다 사라져 가려는 시민의 위에, 새로운 청량제를 부어 주려고 준비하였다.
이 사자가 출현하기 전에 삼림 속에서 제 세상이로라고 횡행하던 시랑들은 사자의 포함성에 질겁을 하여 그림자를 감추어 버렸다. 이 사자의 구태여 그들을 쫓아가서 필요 없는 살육을 행할 필요가 없이, 시랑들은 스스로 숨어 버렸다.
아직껏 소인들의 장난에 시달리고 시달린 삼천리의 강토는 이 거인의 출현을 혼연히 맞았다.
운현궁은 정치의 중심지며 따라서 이 나라의 중심지로 되었다. 이전에는 비루먹은 개 한 마리 찾지 않던 흥선댁이나, 지금은 팔도 강산에서 매일 찾아 드는 수 없는 시민의 무리 때문에, 수십 명의 궁리도 그 응대를 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옛날 흥선이 관직을 내어 던진 이래, 오랫동안 쓸쓸하기 짝이 없던 그 집에도 드디어 봄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봄은(오랫동안 쓸쓸하였더니만큼) 또한 유달리 화려한 봄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