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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의 봄 1부

 

운현궁의 봄 2부

 

운현궁의 봄 4부

 

운현궁의 봄 5부

 

운현궁의 봄 6부 

 

 

 


 

 

 

“쉬!”

 

“?”

 

“가만! 이게 무슨 소리냐?”

 

일동은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헷귄가?”

 

“자 대감 거시오.”

 

“걸지. 얼마?”

 

투전판이었다.

 

물주를 선 것은 안필주(安弼周)였다. 흥선, 장순규(張淳奎), 그 밖에 육주비전(六矣廛)의 장사아치가 서너 사람 있었다.

 

어떤 어둑신한 집 안채였다. 투전에 재간을 좀 피울 줄 아는 안필주가 몫을 잡고 물주를 서서 상인들을 알겨먹으려는 플랜이었다. 장 순규는 구경만 하고 있었다. 웃목에 두어 명 쫑그리고 앉은 것은 차력패였다. 마지막에 상인들이 돈을 잃고 말썽을 부리면 달려들어 부술 장사들이다.

 

“자, 박 서방도 거시오.”

 

“걸지요.”

 

“얼마?”

 

“글쎄, 물주 손속이 너무 세서―그러니 잃고 적게 걸 수도 없고…열 냥만 겁시다.”

 

“열 냥? 홍 서방은?”

 

“나는 열 닷 냥.”

 

“최 서방은?”

 

“나도 열 닷 냥.”

 

“그럼 자…”

 

또 바싸 하는 소리가 들렸다.

 

“쉬!”

 

“?”

 

분명히 무슨 소리가 밖에서 났다. 모두들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면 아무 소리도 다시는 나지 않았다.

 

“떡쇠야! 어디 좀 나가 봐라.”

 

돈은 제각기 제 앞에 놓은 채였다. 필주는 몫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방 안의 모든 사람은 경계하듯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떡쇠가 가만히 문을 열었다.

 

“누구요?”

 

가만히 불러 보았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밖에 누구 왔소?”

 

다시 한 번 불러 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좀 나가 보아라.”

 

흥선의 명령이었다. 떡쇠는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앞에 놓은 돈 위에 손을 덮고 여차하면 달아날 준비를 하고들 있었다. 잠시 후에 떡쇠는 무사히 돌아왔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품이 아무도 없더라는 뜻이었다.

 

 


 

 

“아무도 없더냐?”

 

“보이지 않으와요.”

 

“그럼…”

 

흥선은 필주에게 향하였다.

 

“몫 돌리게.”

 

필주는 바야흐로 몫을 돌리려 하였다. 그 때 밖에서는 또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버석 하는 소리가 아니요 덜컥 하는 소리였다. 뒤를 연하여 또 한 번 덜커덕 하는 소리가 났다.

 

“왔다. 뛰자!”

 

순간 방안은 분란이 되었다. 차력들은 벌떡 일어서서 문을 지켰다. 흥선, 필주, 순규의 세 사람은 앞에 놓였던 돈을 네 것 내 것 할 것 없이 모두 긁어 각기 제 주머니에 넣으며 일변 불은 꺼버리며 일어섰다.

 

“내 돈―내 돈…”

 

상인들은 제 돈이라고 덤비어 대나, 그런 말에 구애될 세 사람이 아니었다. 내 돈 네 돈 할 것 없이 분란통에 흥선과 그의 친구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이 때에 콰당콰당 하는 발 소리가 났다. 차력들이 벌써 안으로 건 문을, 잡아 낚는 소리가 들렸다.

 

“잡아라! 이 놈들 문 열어라.”

 

포교들이 온 것이다. 포교도 자그마치 오륙 인은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포교들이 앞문을 열려고 야단하는 동안에, 흥선의 일행과 상인들의 일행은 뒷문을 박차고 앞뜰로 나와서 담을 넘어 한길로 뺑소니치기 시작하였다.

 

뒷담을 넘어서는 제각기 사면으로 헤어져서 달아났다.

 

흥선은 필주와 함께 동쪽 한길로 달아났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해서 뒤에서 따라오는 소리가 나므로, 돌아보매 포교 하나가 흥선과 필주의 뒤를 쫓아온다. 눈치 빠른 그 포교는 집 뒤를 보려고 돌아오다가 도망하는 두 사람을 보고 따르는 것이었다.

 

“이 놈들, 섰거라! 잡아라!”

 

포교는 함성을 지르며 전속력으로 따라왔다.

 

흥선과 필주도 죽을 힘을 다하여 뛰었다. 깊은 밤의 골목에서 이 뛰고 쫓는 일 때문에 때 아닌 활극이 일어나고, 집집의 개들이 어지러이 짖었다.

 

흥선은 왜소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뛰는 데도 속력이 빠르지 못하였다.

 

“대감, 어서! 자 어서!”

 

필주가 연하여 손목을 끌면서 뛰었지만, 포교와의 사이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이러다가는 필경 잡힐 수밖에는 없게 되었다.

 

그때였다. 사람이 죽을 수가 닥치면 살 수가 생긴다고, 숨이 턱에 거의 닿아서, 이제는 더 못 뛰게쯤 되어서 흥선의 눈에는 뉘 집 뒷간(길로 문이 달린)이 하나 띄었다. 흥선은 필주에게 손목을 잡힌 채 그리고 화닥닥 뛰어 들어갔다. 손목을 잡았던 필주도 끌리어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흥선은 안에서 뒷간 문을 잠가 버렸다.

 

한 걸음 뒤 떨어져 온 포교는 뒷간 앞에 서면서 벌써 걸린 문을 잡아 낚았다.

 

“이 놈들, 나오너라! 안 나왔다는 문을 부순다.”

 

위협하면서 문을 발길로 찼다 잡아 낚았다 하였다.

 

 


 

 

그 포교의 야료를 들으면서 흥선은 주머니를 뒤적이었다. 그리고 돈을 한 줌 꺼내어, 듣기 좋게 절럭절럭 흔들었다. 이 돈 소리에 포교의 야료가 좀 멎었다.

 

“흥, 열 냥이로군!”

 

흥선은 밖에서도 들릴 만한 소리로 중얼거리고, 그 돈을 왼손에 바꾸어 쥐며 가만히 문을 걸쇠를 잡아 젖혔다. 그리고,

 

“이 놈! 칼 나간다. 칼 받아라!”

 

하면서 문을 좀 열고 그 틈으로 돈 쥔 손을 쑥 내밀었다.

 

포교는 흥선의 주먹을 받아 쥐었다. 그리고 조심조심히 돈을 받아서 제 몸에 간직하였다. 포교에게 돈을 준 뒤에 주먹을 도로 끌어들이고 이젠 뒷간 밖으로 나갈 차비를 하려는데, 별안간에 포교의 야료가 또 시작되었다.

 

“이 놈들, 이 속에 숨은 줄을 뻔히 안다. 썩 나오거라.”

 

그리고는 문은 잠그지는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열 생각은 하지도 않고, 연하여 요란스러이 두드리기만 하였다. 부서져라 하고―.

 

흥선은 하릴없이 필주에게 돌아서면서 큰 소리로 말하였다.

 

“여보게, 자네 주머니 톡톡 털어서 열 닷 냥만 내게.”

 

한 두 번의 경험이 아닌 필주는 주머니를 열고 열 닷 냥을 세어서 흥선에게 드렸다. 문 두드리는 소리는 또 멎었다.

 

“주머니를 톡톡 털었나?”

 

“인전 한 푼도 없습니다.”

 

큰소리로 주고 받은 뒤에 흥선은 필주의 돈을 받았다. 그리고 아까 모양으로 문을 조금 열면서,

 

“이놈, 총 나간다, 총 받아라!”

 

하면서 주먹을 쑥 내어 밀었다.

 

포교는 두 번째의 돈을 또 받아서 몸에 간수하였다. 그런 뒤에,

 

“에이, 그런 놈들! 어디로 도망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용꿈 꾼 놈들이다. 이 내 눈에는 벗어났담. 헐 수 없군! 인전 가야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차차 저 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뒤에 흥선과 필주는 뒷간에서 나왔다. 그리고 포교가 간 쪽으로 역시 어두움 가운데로 사라졌다.

 

“오늘 얼마 땄나?”

 

좀 뒤에 흥선과 필주는 어떤 내외술집에 마주 앉았다. 필주는 자기의 주머니를 털어서 다 쏟아 놓고 세어 보았다. 일흔 석 냥이었다.

 

“일흔 석 냥 있는데 본전이 열 두 냥 있었으니깐 예순 한 냥 땄습니다.”

 

“스물 닷 냥 공용이 있지?”

 

“참, 그럼 여든에다 엿 냥 딴 셈이올씨다.”

 

“나는 스물 두 냥 밑천이 지금 홑 석 냥 남았네.”

 

“운 좋은 놈들. 홀짝 알겨 먹을렸더니 그놈들이 뛰쳐 들기 때문에…”

 

“아마 다 해서 한 삼사백 냥은 갖고 있었을걸?”

 

“그런 모양입니다.”

 

흥선은 필주의 앞에 놓인 예순 몇 냥의 돈에서 마흔 냥만은 제 주머니에 집어 넣고 나머지를 필주에게 밀어 보냈다.

 

“언제 또 걸릴 날이 있겠지. 그 때 톡톡히 알겨 내세나.”

 

“운수 좋은 놈들―이담에 또 걸렸다만 봐라. 부랄까지 알겨 낼게.”

 

“자, 어서 몇 잔씩 하세. 곤하군.”

 

이리하여 그들은 거기서 술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몇 잔씩만 하고 가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이서―단 둘이서 만난 이상 몇 잔으로 끝이 날 수가 없었다. 한 잔 두 잔이 열 잔 스무 잔으로 넘어가고, 스무 잔이 서른 잔으로 넘어가서 그칠 바를 몰랐다.

 

“이 놈! 그래, 이 놈 필 주야! 그래 네가 이 놈, 나와 마주 앉아서 외람되이 술을 먹는단 말이냐?”

 

“대감, 그래 대감이나 소인이나 ○○ 두 쪽 밖에 없는 신세야 일반이지, 대감은 무슨 큰 신통한 일이 계시오?”

 

차차 취하여 가는 그들은 연하여 농을 하면서 주고받았다.

 

이리하여 밤이 새도록 먹고 마시고―그들이 그 술집을 나선 것은, 봄날 짧은 밤은 다 밝고, 동천에는 벌써 불그스레한 해가 떠오를 때였다.

 

그 집에서 나온 때는 그들은 정신을 모르도록 취하였다. 그다지 넓지는 못하지만 또한 과히 좁지도 않은 길을, 그들은 어깨를 겨루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다시 동쪽으로 돌진(突進)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걸었다. 연하여 소리를 높여서 노래를 불렀다.

 

“백구야 훨훨―

 

필주야, 이 놈 필주야! 껑충 뛰지를 마라. 너 잡을 내가 아니다. 어허! 지금이 대체 저녁이냐 아침이냐? 해가 지붕 너머로 보이는데, 저녁인지 아침인지를 모르겠구나.”

 

“대감, 아마 지금이 아침인 모양이올씨다. 해가 아침하니 지붕 위에 솟아오릅니다. 허허허허!”

 

“아침하니 솟아오르니 아침이라! 그러면 저녁하니 떨어지는 저녁이냐?”

 

“하하하하!”

 

이 대감―지금 바야흐로 그의 일산상의 중대한 운명이 대궐 안에서 극비밀리에 내정되려는 것도 모르고 흥선 대감은 중인(中人) 친구와 함께 아침의 대로상에서 난무(亂舞)를 하는 것이었다.

 

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은 모두 이 이른 새벽 주정군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며 길을 피하였다.

 

“환장할 놈들! 이른 새벽부터 어디서 저렇게 모주를 쳐다리고 야단이람.”

 

“낫살이나 든 녀석이 저 꼴이로군.”

 

이러한 뭇 입을 그들은 듣지 못하고 여전히 동지서지 하여 길을 좁히며 걸었다.

 

 


 

 

흥선은 문득 누가 자기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는 것을 알았다. 그 충동으로서 흥선은 비틀하면서 돌아보았다.

 

“대감, 시생이올씨다.”

 

웬 젊은 사람이 흥선의 소매를 놓으며 인사하였다.

 

흥선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였다. 술에 과히 취하였기 때문에 눈의 촛점이 모아지지 않았다.

 

흥선은 눈을 이리 찡그리고 저리 찡그리며 젊은이를 마주 보았다.

 

“대감! 시생이올씨다.”

 

“시생이란? 보아하니 나보다 큰데 시생이란? 선생이지?”

 

“몰라 보시겠습니까? 조성하올씨다.”

 

그것은 조성하였다. 어제 조 대비의 부름으로 대궐에 들어갔다가 조 대비께서 흥선군을 좀 모셔 오라는 영을 듣고, 어제 낮부터 오늘 아침까지 밤을 새워 가면서, 흥선이 갈 만한 곳은 모두 찾아다니다가, 여기서 겨우 죽게 취한 흥선을 만난 것이다.

 

“오오, 조성하라! 누군가 했더니 조성하라! 웬놈인가 했더니 조성하라! 자네 이 주부 사윌세그려?”

 

“네!”

 

“이 주부께는 아들이 있겠다. 그 아들놈한테 내 딸을 주기로 했네그려. 하니깐 이 주부는 내 사돈이야. 자네는 그 이 주부의 사위니깐 내게는 사돈의 사돈―즉 팔돈일세 그려! 여보게 팔돈!”

 

성하는 민망한 듯이 허리를 굽혔다.

 

“대감! 어디서 약주를 과히 잡수셨습니다그려?”

 

“허어! 어제 투전해서 돈 땄네그려, 그래서―어―이 사람 어디 갔나? 여보게 필주!”

 

조금 앞에 담벽을 기대고 건들거리던 필주가 나왔다.

 

“네이! 여기 대령했습니다.”

 

“흥, 자네가 그 모퉁이서 필주! 하니 나오니 이름이 필줄세그려.”

 

“대감은 소인을 부르시는데 하으―ㅇ 하고 부르시니 하응(昰應)이올씨다그려.”

 

 


 

 

성하가 가로 들어섰다. 어디웬 놈으로서 아무리 술에 취하고 흠이 없다기로서니, 흥선의 이름을 외람히도 부르는 것을 그저 볼 수가 없었다. 나서는 다음 순간, 성하의 오른손은 필주의 뺨으로 날아 갔다.

 

“이 놈! 버릇 모르는 놈 같으니. 아무리 네 정신이 아니기로, 너는 죽을 혼이 들었느냐? 고약한 놈!”

 

필주는 정신을 펄떡 처리는 모양이었다. 눈을 딱 바로 뜨고 잠시 성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흥선의 소매에 늘어지며 엉엉 울기 시작하였다.

 

“대감, 저 양반이 소인의 따귀를 가져가셨습니다. 소인의 볼이 달아났습니다. 대감, 대감! 아이고 이런…”

 

차차 구경군들이 둘러서기 시작하였다.

 

“볼이 없어졌다? 그럼 자네는 무협필주(無頰弼周)―아니 협비(頰飛) 필줄세 그려! 뺨이 없으면 모두새렷다. 여보게 팔돈! 내 친구의 뺨을 어디다 두었나? 도로 주게.”

 

“대감! 자, 어서 댁으로 돌아가십시다. 잠시 좀 진정하셔서 예궐을 하셔야겠습니다. 조 대비마마께서 대감을 부르십니다.”

 

조 대비―정신을 못 차리던 흥선은 이 한 마디에 펄떡 정신을 차렸다. 이 한 마디는 흥선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청량제였다.

 

성하가 부른 가마 두 채에, 앞 가마에는 흥선이 타고 뒷 가마에는 성하가 타고, 필주는 그냥 떼어 버리고 가마를 몰아서 흥선 댁으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조금 뒤였다.

 

“자, 대감! 조금 쉬세요. 시생도 대감 계신 곳을 찾노라 밤을 곱게 새웠습니다. 좀 쉬시고 오시나 지나서 대비께 들어가 뵙시다. 무슨 중대하신 의논이 계신 모양입니다.”

 

이리하여 성하는 흥선의 웃옷을 모두 벗기고 흥선을 붙안아서 보료 위에 고이 뉘었다. 그리고 드러눕기가 무섭게 즉시로 코를 고는 흥선을 보면서 자기도 잠시 쉬려고 몸을 벽에 기대었다.

 

밤을 새워서 흥선을 찾으라고 돌아다녔기 때문에 성하도 몸이 몹시 곤하였던지라, 벽에 기댄 조금 뒤에는 성하 역시 약하게 코를 골았다. 두 사람은 흥선의 사랑에서 한잠을 잤다.

 

 


 

 

성하가 잠이 든 지 조금 지나서 흥선이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뜨고 아래 위를 한 번 살핀 뒤에 흥선은 일어났다. 술에 과히 취하였기 때문에 쪼개지는 듯이 골치가 쏘았다. 흥선은 눈살을 연하여 찌푸리며 가만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마루에 걸터앉아서 두어 번 숨을 깊이 들이 쉬었다.

 

“여봐라, 이리 오너라!”

 

성하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청지기를 찾았다. 그리고 청지기에게,

 

“세수물 떠다가 이 마루에 놓아라.”

 

고 명하였다.

 

시원하게 활활 얼굴을 씻고 나니, 골치 쏘는 것은 좀 낮고 취기도 좀 깨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나서 흥선은 대청으로 지필을 내어 오래 가지고 거기서 편지를 한 장 썼다. 그리고 하인을 불러서,

 

“이 편지를 사동 김 판서 댁에 갖다 드려라.”

 

하고 편지를 내어 주었다. 사동 김 판서라 함은 영어 김병국을 가리킴이었다.

 

그런 뒤에 자기는 청지기 응원이를 데리고 침방으로 들어갔다. 침방에서 다시 정침으로 나올 때는, 흥선은 전날의 거리의 부랑자 이하응이가 아니요, 정일품 현록대부(顯祿大夫) 흥선군 이하응이었다. 옥색 관복에 서대(犀帶)를 띠고 사모를 쓰고 홀을 든 이 공자―옷에서는 복온(馥溫)한 훈향(燻香)내가 피어오르며, 그 속옷은 비록 무명옷이나마 최근에 새로 지은 듯한 관복이며 사모며는, 흥선으로 하여금 전날의 거리의 부랑자 이하응의 흔적을 없이하고, 영종의 고손 왕족 흥선군의 위엄을 갖게 하였다. 가까운 장래에 사용할 것을 예기하고 관복을 새로지어 두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흥선은 아랫목으로 내려가서 곤하게 벽에 기대고 잠자는 성하의 얼굴을 바라보며 스스로 미소하였다. 성하가 깨면 반드시 놀랄 것을 예기하고― 잠시 뒤에 청지가가 가만히 문을 열었다.

 

“다 대령됐습니다.”

 

“부족이 없는가?”

 

“없습니다.”

 

 


 

 

현록대부 흥선군 이하응이 탈 만한 사인가마와 하인들을 (가난하기 때문에) 갖고 있지 못한 흥선은, 김병국에게 편지하여 가마와 하인들을 빌어온 것이었다.

 

잠시 뒤에 곤한 잠에서 깬 조성하는 아랫목의 흥선을 보고 놀랐다. 아랫목에 앉아 있는 흥선―그것은 어제그제 늘 보던 그 흥선이 아니었다. 옷뿐이 아니라, 그 온화한 듯한 가운데도 두 눈 틈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패기며 위압력이, 무서운 지배자가 아니고는 갖지 못하는 '왕자'로서의 위엄이었다.

 

“가난한 석파라 환옥 관자며, 호박 갓끈이 없네그려. 그렇다고 초라하게 입고 대비께 뵙기도 너무 황송스럽고, 하릴없이 낡은 관복을 꺼내 입었네.”

 

그러나 그것은 흥선의 거짓말―그의 관복은 아직 입어 보지 않은 새 것이었다. 흥선은 성하를 재촉하여 소세를 하게 하였다.

 

소세가 끝난 뒤에 앞뜰로 나가 보니, 거기엔 벌써 행차가 등대하고 있었다. 호피를 깐 사인남여가 준비되어 있고, 여덟 명의 별배가 철릭을 휘날리며 남녀를 호위하고 있고, 요강망태라 영변서랍이나 부산연죽(煙竹)이라 지갑이라 호피방석이라를 든 열 명의 구종이 벙거지에 더그레를 입고 높높이 날뀌고 있었다. 성하의 탈 가마도 준비되어 있었다. 성하는 망연히 이 모양을 바라보았다.

 

“에이, 물렀거라! 섰거라! 선 놈은 모두 앉거라!”

 

위풍 당당하게 벽제 소리 요란히 흥선의 댁 대문을 나오는 이 행차를 동리 사람들도 모두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흥선은 이런 행차에 익은 사람같이 단정히 사인남여 안에 앉아 있었다.

 

'이 일(이하전 사사 사건)이 대감께는 혹은 전화위복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하전의 사건이 돌발된 때 성하가 흥선에게 향하여 던진 이 한 마디를, 흥선은 얼굴의 모든 표정을 죽여 버리고,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네.'

 

하고 넘기어 버렸지만, 그 말이 흥선에게 있어서 결코 무의미한 말이 아니었다.

 

 


 

 

그 날 밤 가인들이 모두 잠들기를 기다려서, 홀로 향불을 피워 가지고 가묘의 지나간 오 대의 조상의 위패 앞에 설 때는, 흥선은 기괴한 흥분과 기괴한 기대 때문에 가슴이 떨렸다.

 

일찍이 성하를 통하여 조 대비께 가서 뵙고, 조 대비에게 미음은 사지 않을 만한 교제를 맺어 놓았지만, 그것으로서 그의 야심이 찰 바는 무론 아니다. 조 대비께 그만 신임뿐으로 야망이 성취된다 하면, 종친 공자로서 야망을 성취 못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흥선도 짐작하거니와 인손이라는 인물이 조 대비의 사랑하는 왕실 공자로서, 상감 불행한 뒤에는 십중 팔구는 사직의 승계자가 인손이가 될 것이다. 이제 얼마만큼 조 대비께 자주 출입하여 흥선 자기가 인손이보다 더 신임을 얻기 전에는 '떡'은 인선이의 것이 될 것이다. 흥선 자기는 닭 쫓던 개 모양으로 지붕만 쳐다볼 인물이 될 것이다.

 

시정에 배회하면서 권문 거족들에게 멸시를 받을 일을 끊임없이 하는 한편으로는, 흥선은 또한 조 대비께 더욱 가까이하여 인손이보다 더 신임을 얻을 방략을 늘 꾸미고 있던 것이었다. 이제 김씨 일문의 손에 인손이가 없어졌는지라, 흥선 측으로 보자면 또한 강적(强敵) 하나가 없어진 것이었다.

 

“당신의 후손의 앞에 지금 복의 문이 열리나이까. 혹은 이 일도 특별히 관심할 바가 아니오니까?”

 

위패 앞에 이런 호소를 할 때는 흥선의 눈에는 찬란한 빛이 났다.

 

그로부터 흥선의 난행(亂行)은 더욱 심하여졌다. '천하장안'을 연하여 불러 오며, 대낮에도 이런 잡배들과 큰 소리로 농담을 던지며 거리를 횡행하여, 더욱 사람들의 웃음과 멸시를 사기에 노력하였다. 지금 자기의 몸은 귀한 몸―여차하다가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귀인이 될지도 모르는 몸인지라, 이 몸을 섣불리 김씨 일문에 산 제물로 바쳐서는 안 될 일이다.

 

이리하여, 그렇지 않아도 남이 손가락질하는 난행을 거듭하던 흥선은, 이하전이 없어진 뒤에는 더욱 어지럽고 거친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는 한편 혹은 조 대비가 자기를 부르는 날이 있지 않을까 하여, 그는 그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 신임하던 이하전을 잃은 조 대비였다. 다른 종친들은 지금 모두 김문의 부하가 되어 있는 중에(멸시 받을지언정) 부하는 아직 되지 않는 유일의 종친―자기는 장래 어떤 날 반드시 조 대비가 부를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날을 준비하기 위하여 흥선은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서 새 관복이며 서대며 사모를 모두 준비하여 두었던 것이다.

 

―굴러 오는 복!

 

 


 

 

그것은 과연 굴러 오는 복에 틀림이 없었다. 김씨 일문은 자기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하전을 없이한 것이로되, 이하전이 없어지기 때문에 이하전에게 내려지려던 복덩어리는 이제 십중 팔구는 흥선 자기에게 굴러올 것이다.

 

표면 난행을 거듭하면서도 이 날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조 대비의 조카 성하가 대비의 분부로 자기를 데리러 온 것이다. 위풍당당히 성하와 함께 창덕궁으로 가는 동안, 흥선의 얼굴은 희망과 기대로 빛났다. 그리고 어떤 정도까지의 자신도 가지고 있었다.

 

“왜 그간 한 법도 아니 오셨소?”

 

흥선의 절을 같이 몸을 일으켜서 받으면서, 대비는 비교적 명랑한 미소를 얼굴에 띄워 가지고 물었다.

 

“가난한 백성이라, 무사 분주하기 때문에 한 번두 문후를 못 했습니다. 성하를 통해서 대비전마마의 사연도 늘 알고 있었습니다마는…”

 

여전한 호활한 웃음은 그의 얼굴을 장식하였지만, 이날의 흥선은 전날의 무뢰한 이하응이 아니었다. 호활한 패기와 불기적 기상이 뚜렷이 나타나 있기는 하지만, 어디인가 종실 공자다운 단아함과 위엄이 갖추어 있었다.

 

“성하 너라도 좀 모시고 오지?”

 

대비가 말을 성하에게 돌리는 것을 흥선이 가로받았다.

 

“그 사이 성하는 여러 번 그 말씀을 하옵니다마는, 여가도 없고―사실을 말하자면 대비마마께 뵈올 만한 의대(衣帶)도 없었습니다. 하하하하! 벼르고 별러서 가난한 가운데서 뽑아 내서 이 의대 한 벌을 장만했습니다.”

 

흥선은 태도를 과장하여 가며 자기의 새 관복 소매를 들어 보였다. 옷이 없다든가 무엇이 부족하다든가 하는 것을 입 밖에 내기는커녕 생각하기조차 부끄러이 여기는 대궐 안에서, 자기의 소매를 들추면서, 옷이 없어서 그간 못 왔노라고 천연스러이 말하는 흥선의 태도는 도리어 유쾌하였다.

 

이 불기한 흥선의 태도를 대비는 연하여 상쾌한 미소를 얼굴에 나타내며 보았다.

 

 


 

 

“대감과 우리와는 촌수로 보자면 육촌 형제―항간에서는 그다지 먼 일가가 아니건만, 우리는 왜 그다지도 소원히 지냅니까?”

 

왜 소원히 지내느냐? '저것을 좀 저편으로 밀어 주세요.'―지금부터 십 이 년 전, 사랑하는 아드님 헌종이 대비의 무릎에 누워서 임종시에 어보(御寶)를 가리키며 한 말을 대비는 지금 추상하는 모양이었다. 어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모자지간 근친지간도 그것 때문에 이렇듯 소원해지지 않으면 안 되나? 명랑한 미소 아래서도 이 말을 할 때는 대비의 낯에는 한참 동안 적적한 빛이 흘렀다.

 

“육촌은 오촌보다 멀고 오촌은 사촌보다 멀지 않습니까? 골육지간에도 서로 다투는 세상이올씨다.”

 

“제발 우리는 좀더 가까이 지냅시다.”

 

하하하하! 큰 소리로 웃고 지껄이는 흥선이로되, 오늘 대비가 자기를 부른 데 대하여 좀 다른 기대를 가지고 있는 흥선은 대비의 일언 일구, 일동 일정을 모두 주의하여 보고 주의하여 들었다. 만약 대비로서 흥선의 어리석음을 이용하려면, 흥선은 자기를 어리석게 가장(假裝)할 것이요, 대비로서 흥선의 활달함을 이용하려면, 흥선은 자기를 활달하게 가장할 것이요, 대비로서 흥선의 '김문에 대한 악감'을 이용하려면, 흥선은 또한 그만큼 자기를 가식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이라, 흥선은 대비의 손가락의 조그만 움직임이라도 주의하여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흥선의 주의 가운데서 잠시간 그리하여 담이 계속되었다. 대비도 무슨 특별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흥선은 흥선으로서 바람 부는 대로 혹은 동으로 혹은 서으로 기울어질 따름이었다.

 

“대감! 종친 중에 인재 하나를 또 잃었구료!”

 

성하는 승후방으로 나가서 기다리라 하고, 모시는 여관들을 물리치고, 대비와 흥선 단 두 사람이 되었을 적에 대비는 비로소 이 말을 하였다.

 

흥선은 힐끗 대비를 쳐다보았다. 보다가 대비와 눈이 마주쳐서 황급히 눈을 도로 아래로 떨어뜨렸다.

 

“대비전마마, 신도…”

 

이렇게 말하고 잠시 끊었다가 계속하였다.

 

“그 날 밤―또 그 이튿날 밤을 잠을 이루지를 못했습니다.”

 

“대감도 혹은 짐작하시는지? 이 사람과 인손이―하전이의 사이를…”

 

“짐작하옵니다. 얼마나 심통하실까고. 황송합니다만, 신도 가까이 위로는 못 드리나마 혼자서 마음껏 애탔습니다..”

 

 


 

 

인손이의 사건에 나가해서 대비가 받아 보는 처음 조상이었다. 간단한 한 마디의 조상이나마 대비에게는 마음에 드는 조상인 모양이었다. 대비는 눈을 적이 굴려서 한참을 흥선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말이 끊어졌다. 그 뒤에 대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효명익황제(孝明翼皇帝)의 대는 끊어졌구려.”

 

지금의 상감은 대비의 지아버님인 익종의 뒤가 아니요 당신의 시아버님인 순조의 후사라 하는 뜻이었다. 죽은 인손이가 익종의 대를 이을 사람이었었다 하는 임시였다.

 

대비의 이 말에 대하여 흥선은 입에서 불끈 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삼켰다가 그냥 고요히 꺼내었다.

 

“대비마마! 호명황제의 어대를 이을 소년 하나를 신이 추천하오리까? 영특한 소년이옵니다. 제왕의 풍기를 가진 소년이옵니다. 아무 데를 내놓을지라도 결코 부끄럽지 않은 소년이옵니다.”

 

대비는 흥선의 이 말에 고요히 재쳐 물었다.

 

“누구오니까?”

 

“흥선의 둘째아들 제황이, 금년에 열 살 나는 애올씨다.”

 

“?”

 

“자식을 보기에 아비만한 눈이 없고, 제자를 보기에 스승만한 눈이 없사옵니다. 흥선이 비록 미련하오나 자식에 익애(溺愛)되어 그릇 볼 만치 둔하지는 않사옵니다. 사십 년 생애를 술과 허튼 노름으로 허송했습니다마는, 아비가 그렇게 자난 만치 자식은 그렇게 보내지 않게 하고자 애를 다 쓰고 힘을 다 써서 훈도한 공이 겨우 나타나서, 아비와 다른 영특하고 활달한 소년이 되었습니다.”

 

커다란 운명이 그의 바로 한 뼘 앞에 늘어져 있는―지금의 권문 거족에게 짐승의 대우를 받으면서도, 얼굴에 떠오르는 피를 그냥 삭여 버리고 참고 지낸 것은 오늘이 장차 올 것을 얘기하였으므로가 아니었던가? 지금 바야흐로 눈 앞에 걸린 이 운명의 열매를 바라보면서 흥선은 죽을 힘을 다 썼다. 아직 어떤 수모를 받을지라도 눈 한번 껌뻑 감았다가 뜨면 스러져 버리던 흥선이로되, 지금 이 자리에서는 등으로 땀을 벌벌 흘렸다. 표면 아무 기교가 없이 대비에게 대하여 있는 흥선이로되, 한 마디 한 마디의 말도 모두 그 사이 오랜 기간을 닦고 갈고 깎고 하여, 준비하여 두었던 말이었다. 이 자리의 한 마디의 말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는 형언할 수도 없는 것이다.

 

대비는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뚫어질 듯이 흥선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동으로?

 

서로?

 

마음이 너무도 산란하기 때문에 얼굴에 장식하였던 평온한 미소가 사라지려는 것을 억지로 회복하면서, 흥선은 대비의 이 시험의 눈앞에 단정히 꿇어 앉아 있었다. 등과 가슴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만약 두 시간만 이렇게 앉아 있으라면, 흥선은 과도한 긴장 때문에 기절을 할 것이다.

 

“후!”

 

 


 

 

흥선과 성하가 대비께 하직하고 물러나올 때에, 흥선은 기다란 숨을 내어 쉴 뿐 아무 말도 안 하였다.

 

성하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흥선을 따라서 흥선 댁으로 왔다. 남녀에서 내려서도 흥선은 성하를 돌아보지도 않고 주인을 맞는 청지기에게 행차(병국이에게 빌어 왔던)를 돌려 보내라는 간단한 명령을 할 뿐, 빠른 걸음으로 정침으로 들어갔다. 성하도 묵묵히 따라 들어갔다.

 

흥선은 옷을 갈아 입을 생각도 않고 그냥 아랫목에 내려가 앉았다. 근심스러운 얼굴이라기보다도, 만족하다는 얼굴이라기보다도―단지 평범하고 엄숙한 얼굴이었다.

 

성하는 문 안에 읍하고 섰다. 무엇이라 흥선의 입에서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흥선은 성하의 존재도 모르는 듯이 잠자코 앉아 있었다. 숨소리도 고요하고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헴!”

 

성하는 혹은 흥선이 자기가 온 줄을 모르지나 않나 하여 기침을 하여 보았다. 흥선은 모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 증거로는 성하의 기침 소리에 한 순간 성하를 본 뒤에 다시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대비와의 사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그리고 어떤 말을 들었으며 어떤 결과를 얻었나? 성하는 알 길이 없었다. 흥선의 표정으로써 짐작하여 보려 하였으나 그것도 실패했다.

 

평범하고 엄숙한 표정―그것은 일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 나타나는 절망의 표정으로도 볼 수가 있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일이 마음대로 된 뒤에 고요히 그 성공을 즐기고 있는 표정으로도 볼 수가 있었다.

 

이 알 수 없는 흥선의 표정 앞에 성하는 웃목에 읍하고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성하에게 향하여 앉으란 말도 없었다. 그렇다고 또한 나가라는 말도 없었다. 마치 낮잠에서 깨어난 사람 모양으로 묵묵히 앉아 있었다. 예장(禮裝)을 갖추고 묵묵히 앉아 있는 흥선의 모양은, 어떻게 보면 사람의 미고소(微苦笑)조차 자아내는 것이었다.

 

이윽고 흥선은 담뱃대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담배 서랍으로 쓰는 나무 곽을 끌어당겼다. 흥선의 뜻으로서 보통 연죽보다 썩 짧게 만든 자기의 연죽에 담배를 담으면서야 비로소 흥선은 성하의 서 있는 편으로 머리를 돌렸다.

 

“여보게!”

 

“네?”

 

흥선의 인식을 받고야 성하도 비로소 꿇어앉았다.

 

“내 마음이 지금 어지러웨. 산란해서 앞뒤를 가릴 수가 없어. 머리가 뒤집히는 것 같아. 정신을 가다듬을 수가 없네.”

 

“대비께서는 무슨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흥선은 눈을 감았다. 천천히 말을 하였다.

 

“별 말씀하시는 것이 없으시네. 나 같은 사람에게 무슨 별말씀을 하시겠나? 하여간 내 마음이 어지럽고 산란하고 갈피를 차릴 수가 없으니, 자네는 돌아가게. 언제 다시 와 주게. 그 때 다 말해 줌세.”

 

성하가 일어나서 하직을 고할 때에 흥선은 변명하듯이 말을 보태었다.

 

“노엽게 생각하거나 별다르게 생각 말게. 너무 마음이 어지러워서 좀 혼자 생각해 보려고 그러네.”

 

무슨 중대한 사건, 중대한 결과가 생긴 것뿐은 분명하였다. 그 흥선의 사람됨이 전염되었는지, 성하도 흥선의 집을 나서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가슴이 산란하기가 짝이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 물어보아도 왜 산란한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국구―ㅇ(鞠躬)

 

바―이―(拜)

 

흐―ㅇ(興)

 

평시―ㄴ(平身).”

 

작년(庚申年) 구월에 경희궁으로 이어하였던 상감은, 모든 궁인들을 인솔하고 금년 사월에야 다시 창덕궁으로 환어하였다. 환어한 뒤의 첫 번 숙배(肅拜)였다. 월대(月臺) 위에는 인의(引儀)가 높이 올라서 있다. 그 아래는 정일품부터 종구품까지의 열 여덟 개의 표석(表石)이 서 있고, 열 여덟 계단의 조신들은 각기 그 품반 품서에 서 있다.

 

“국구―ㅇ”

 

기다랗게 뽑은 인의의 호령에 백관들은 모두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바―이―”

 

두 번째의 호령에 뱍관들은 북향하여 절하였다.

 

“흐―ㅇ”

 

세 번째의 호령에 몸을 절반만큼 일으켰다.

 

“평시―ㄴ”

 

몸을 고쳐 일으켰다.

 

다시 국궁, 바이, 흥, 평신―이리하여 사배는 끝이 났다.

 

승후관(承候官)의 한 사람으로서 조성하도 이 숙배에 참례하였다.

 

숙배를 받은 뒤에 상감은 내관들에게 부액을 받고 편전(便殿)으로 들었다.

 

성하는 승후청으로 나왔다. 그리고 거기서 관복을 편복으로 바꾸어 입고 잠시 더 머뭇거리다가, 금호문(金虎門)으로 하여 대궐 밖으로 나왔다. 이 날은 비번이므로 숙배만 끝낸 뒤에는 나와 버려도 괜찮은 날이었다.

 

궐 밖으로 나오기는 하였지만, 갑자기 갈 데가 없었다. 유난히도 마음이 어지러워서 집으로도 돌아가기가 싫었다. 성하는 하인과 가마만 먼저 돌려 보내고, 잠시 돈화문 밖으로 돌아와서 머뭇거리다가 발을 서쪽으로 돌렸다. 며칠 만에 흥선 댁이라도 한 번 찾아보고자 함이었다.

 

며칠 전 흥선을 모시고 대비를 가서 뵈온 이래, 성하는 그 뒤 아직 흥선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날의 인상은 성하에게 있어서는 꽤 컸다.

 

자기의 눈이 결코 잘못 보지 않았음을 성하는 그 날 확연히 알았다. 주착 없는 인물, 상갓집 개―이런 칭호를 들으면서도 탓하지 않는 흥선을, 성하는 아직껏 의심의 눈으로 보고, 흥선의 그런 인격의 배후에는 무슨 커다란 책략이 있지나 않은가고 늘 유심히 보았지만, 너무도 감쪽같이 속이므로 성하로서도 마지막에는 반신반의치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날 확실히 성하는 흥선의 진면목과 진인격을 보았다. 표면 어리석은 듯이 꾸미는 그 가면을 벗는 날―그 속에서 나온 흥선은 결코 주착 없는 술망나니가 아니었다. 염치 모르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 응대, 태도, 언어, 행동, 어느 점에 있어서도 대궐 안에서 생장한 대군왕자에게 지지 않는 단아한 귀인이었다.

 

이런 일면을 가진 그가 항간에 돌아다니며 하는 행동은 너무도 어지러운 행동이었다. 만약 그것이 김씨 일문을 속이는 가면이라면, 흥선이야말로 고금에 다시 없는 훌륭한 배우였다.

 

 


 

 

'이 놈, 네가 그 모퉁에서 필주―하니 나오니 이름이 필주로구나.'

 

흰 옷을 입은 인물(당시에 있어서는 양반은 옥색 기타 물들인 옷이며 평민은 흰 옷) 관속배와 상투를 맞잡고 중인 환시의 대로상에서 희롱을 하는 흥선―이 흥선과 그 날의 흥선과는 너무도 차이가 있었을 뿐더러, 그런 주착없는 일을 한 지 단 두세 시간 뒤에 흥선은 그렇듯 변한 것이었다.

 

그 기괴한 인물에 대한 위포와 경모의 정이 젊은 성하의 마음에 무럭무럭 일어났다. 이 사람에게 몸을 의탁하면 장래 반드시 한 때 그 덕을 볼 것을 성하는 분명히 직각하였다.

 

“대감 계신가?”

 

댓돌에 선뜻 올라서는 성하를 흥선 댁 청지기가 맞았다.

 

“출타하셨습니다.”

 

“어디 가셨나?”

 

이런 질문은 어리석을 질문이었다. 주착 없이 돌아 다니는 흥선인지라, 청지기가 알 까닭이 없었다. 물어보았지만 성하도 스스로 고소하고 다시 내려섰다.

 

안사랑에서 웃음소리가 나므로 귀를 기울여 들으니, 흥선의 맏아들 재면이가 그 외삼촌 민승호와 무슨 담소를 하고 있었다.

 

성하는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흥선댁을 나갔다.

 

거기서 나선 성하는 갈 곳이 없었다.

 

―자, 어디로 가나?

 

이렇게 되면 더욱 집으로는 돌아가기가 싫었다. 성하는 어디로 가겠다는 계획이 없이 발을 옮겼다.

 

종로에까지 이르렀다. 공랑(公廊)이며 육주비전(六矣廛)의 흥성스러운 흥정을 곁눈으로 보면서, 성하는 지향없는 길을 남대문 쪽으로 향하였다.

 

“성하! 성하 아닌가?”

 

누가 자기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인가 하고 그냥 가다가, 서너 번째 불리고야 성하는 돌아보았다.

 

 


 

 

성하는 눈을 둥그렇게 하였다.

 

“아이구 이게 뉘십니까?”

 

그것은 성하의 외가로 아저씨뻘 되는 이 학사라 하는 늙은 선비였다.

 

“그렇게 들리지를 않던가?”

 

성하의 절을 받으며 이 학사는 이렇게 물었다.

 

성하는 의아한 눈으로 노인을 보았다.

 

가난하고 또 가난하여 도포 한 벌도 없어서 밖에 나다니지도 못하던 이 학사였다.

 

삼순구식이 아니라 구순삼식이라고 형용하고 싶도록 가난하던 이 학사였다. 정월에 성하가 문안을 갔을 때오 정월 초승부터 굶고 앉았던 이 학사였다.

 

그런데 이 날은 그의 머리에서는 통영갓이 어른거렸고 깨끗한 도포에 수띠는 분명히 생활이 넉넉한 선비의 차림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학사의 뒤에는 하인까지 하나 어려 있었다. 하인도 깨끗이 차렸으며, 그 하인은 무슨 귀중한 물건인 듯한 네모난 상자를 공단 보에 싸서 들고 있었다.

 

“아저씨, 아직 그 댁에 계십니까?”

 

그 오막살이랄 수가 없어서 댁이란 명사를 붙이면서 성하는 속으로 고소하였다.

 

“아니라네. 이사했네. 나하고 집에 같이 가 보지 않겠나?”

 

“어디오니까?”

 

이 학사는 대답 대신으로 입을 삐죽하게 하고 그 입으로 하인의 들고 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성하는 학사의 입을 따라 보기는 하였지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조(彫)라네.”

 

“네?”

 

“사충사(四忠祠) 조라네. 내게도 운 틀 날이 굴러 오노라고, 이번에 사충사의 일유사를 하게 되었네그려.”

 

성하는 겨우 알아들었다.

 

 


 

 

이 가난한 노선비가 가난에 굴고 또 굴다가, 어떻게 사충사의 유일사를 얻어 하게 된 모양이었다. 하인이 받들고 있는 그 상자는 '조'를 넣은 상자인 모양이었다.

 

사충사(뿐만 아니라 조선 안 모든 서원)의 조─그것은 이 나라에 있어서는 옥새(玉璽)의 다음 가는 권위 있는 '도장'으로서, 각 지방의 방백의 관인(官印)보다 훨씬 세력이 높은 것이었다.

 

옥새며 지방관의 관인은 흔히 본 일이 있으되, 조를 처음 보는 성하는 그 공단보에 싸인 네모난 상자를 흥미 깊은 눈으로 굽어 보았다. 그 '조'의 놀라운 권위는 이미 익히 듣고 있었으므로―

 

노돌 나루를 건너서면, 장청류의 한수를 굽어 보는, 경개 좋은 바위 위에 한 사당이 서 있으니 그것이 사충사이다.

 

당쟁 때문에 참화를 본 김창집, 조태채, 이의명, 이건명의 네 유신(儒臣)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서, 그 때 함께 결련되었던 유신들의 후손 가운데서 일유사를 뽑는 것이었다. 이 학사도 그의 오대조가 그 때 그 사건에 원배를 갔던 덕으로, 어떻게 운동을 하여 일유사 자리를 구한 것이다.

 

“그러면 아저씨도 인젠 생활이 좀 펴셨겠습니다그려?”

 

“생활? 암 폈지. 석 달 내에 내 몫으로도 개똥밭이며 수원 논이며가 약간 생겼네그려. 이제 일년 안으로 당대 먹을 게야 생기겠지.”

 

“호오! 많이 벌으셨습니다. 그 때 그―심? 석?”

 

“석경원이란 놈 말인가?”

 

“네, 석 이방(石吏房)말씀이외다.”

 

“암, 그놈도 벌써 잡아다가 가두기를 네 번 했네그려. 내 재산 홀짝 빨아 먹었던 그 놈, 인젠 다시 나한테 홀짝 빼앗기구 거지가 돼서 어디로 떠나 갔다지.”

 

“시원하시겠습니다.”

 

“시원쿠 말구! 좌우간 우리 새 집에 가 보세.”

 

“그러십시다.”

 

성하는 이 쾌활한 늙은 선비의 인도로 선비의 집을 찾기로 하였다.

 

사충사에서 발행하는 서독(書牘)―일유사의 '조'가 찍힌 그 서독은 놀라운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지방관의 관인(官印)이 찍힌 영장은 그 관할 구역 이내에서밖에는 통용이 못 된다. 영변 부사의 영장이 안주 땅에서 통용 못 되고, 전라감사의 영장이 경상도에서 통용 못 되고―각각 그 관원의 관할하는 구역 안에서밖에는 통용이 되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원 유사의 도장이 찍힌 서독은, 남으로는 제주에서부터 북으로는 백두산까지 통용 안 되는 곳이 없다. 가령 용산 건너 노돌에 있는 사충사에서 '동래 땅에 사는 아무를 잡아 오라'는 서독이 날 것 같으면, 그것을 가진 하인은 동래 땅에 가서 그 지정한 인물을 잡아 올 권한이 있다. 그 곳의 지방관도 이를 금지하지를 못한다.

 

잡아 오는 데 무슨 명목이나 까닭이 없다. 그저 잡아올 따름이다.

 

 


 

 

그 잡아 온 죄인을 일유사는 다시 이조(吏曹)나 한성판윤(漢城判尹)에게 곱게 가두어 두기를 촉탁한다. 그러면 이조에서나 한성부에서는 이를 거절하지를 못한다. 일유사에게서 다시 놓아 주라는 부탁이 오기까지는 까닭을 모르는 그 죄인을 곱게 가두어 둘 뿐이다.

 

본시는, 서원이라하는 것은 옛날의 성현들을 존경하기 위하여, 유인(儒人)들이 모여서 옛날의 성현들의 끼친 학문을 토구하며 성현들의 영을 제사하기 위하여 시작된 것이었다.

 

그 예절을 장려하기 위하여 서원을 유지할 만한 전장(田庄)을 기부받는 것을 허락하고, 그 서원의 서독의 어떤 정도까지의 권한을 인정하여 주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수백 년 내려오는 동안 본의는 잃고 말의(末意)만 남아서, 조선의 온갖 더럽고 추한 일은 모두 거기서 생겨나게까지 되었다.

 

이 서원의 횡포 때문에 당시의 백성들은 얼마나 괴로움을 받았다? 서원에 부속된 많고 많은 유의 유식의 선비들은, 모두 그 근처의 백성들의 고혈을 자기네의 당연히 먹을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원은 서원이라기보다 오히려 악도청이었다.

 

본(本)을 모르고 말(末)만 아는 선비들이 그 서원을 근거삼아 가지고 행하는 폐단은 여간이 아니었다.

 

서원에서는 자기의 가진 권한을 이용하여, 시골 돈냥이나 있는 사람을 잡아다 가둔다. 명목은 아무것이라도 좋았다. 성현을 몰라본 죄라든가, 조상께 제사를 정성되게 못한 죄라든가, 하는 막연한 명목으로 잡아다가 가둔다. 그리고 그냥 내버려 둔다.

 

그러노라면 그 집의 아들이라든가 친척이 찾아와서 흥정을 한다. 서원에 얼마의 장전을 기부할 테니 이번만은 특별히 용서하여 주십사고 애걸복걸한다. 그러면 그 죄인의 재산에 상당한 기부를 받은 뒤에 그 죄인을 특별히 용서를 하여 준다.

 

그렇지 않으면 그 근처에 돈냥이나 있어서 선비 노릇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장의를 판다. 사지 않으려면 강제로라도 판다. 이 강제 판매에 응치 않았다는 큰 코를 다치므로, 한 번 서원이 겨눈 이상에는 피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후일 흥선군이 대원군이 되면서, 그의 대 영단으로 전국의 서원을 모두 부수고, 서원에 모셨던 위패들을 모두 없이할 때에, 그 수효 천여 개, 거기 도의도식하던 무리가 수만 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서원을 근거삼아 가지고, 거기 모신 옛날 성현의 옷 소매를 방패삼아 가지고 온갖 더럽고 추한 일을 다하다가, 일이 불여의하게 되면 곧 옛날 성현을 앞장 세워서 이 사대성(事大性)이 많은 국민을 위협하던 것이었다.

 

사람을 죽일 권리는 없지만 잡아 가둘 권리는 있는 그들에게, 단지 포금죄(抱金罪) 밖에는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경옥이며 향옥에 갇혀서 신고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사충사 서독―

 

화양서원(華陽書院―충청도 청산에 있다)의 화약묵패(華陽墨牌)―

 

당시의 서원 가운데서도 가장 권위 있는 이런 몇 곳의 서독은 세력이 당당한 곳으로서, 옥새가 찍힌 왕령에 거의 지지 않을 만한 권세를 가졌던 것이다. 이조판서 한성판윤도, 일개 유생이 발행한 이 서독의 영을 거역지 못하였다.

 

 


 

 

그런지라, 사충사의 일유사 자리를 얻은 이 학사는 의기가 양양하였다. 학자는 권세를 초개같이 여기고 금전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권세를 싫어하고 금전을 싫어하는 사람은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비교적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의 주인인 이 학사도 역시 권세와 금전을 좋아하는 노인이었다.

 

이 학사의 집은 목멱산 아래 깨끗이 새로 지은 집이었다. 넉 달 전에 거처하던 단간방에 비기건대, 설초운향, 그 차이를 형용할 말이 없었다. 선비의 집이라기보다 오히려 재상가의 산당에 가까운 집이었다.

 

“경치 좋고 공기 맑고 아주 좋습니다.”

 

성하의 이런 치사를 들으면서, 학사는 도포와 갓을 훌훌 벗어 버리고 관을 바꾸어 썼다.

 

“자, 흠 있겠나. 자네도 도포 벗게.”

 

하는 것을 성하는 벗지 않았다. 선비와 달라, 도포를 벗으면 창의라도 반드시 입어야 하는 벼슬아치의 집에 태어난 성하는, 동저고리 바람은 거북하기 때문이었다. 학사는 성하를 데리고 산 정자로 돌아갔다.

 

“인젠 날이 꽤 더워졌네. 정자에서 이야기나 좀 하고 가게.”

 

정자를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목멱산 기슭―장안이 굽어 보이는 언덕에 팔각으로 지은 얌전한 정자였다. 과시 앉아서 시나 읊고 토론이나 하기에는 적당하게 생겼다. 하인은 마치 학사의 꽁무니에 다린 사람인 듯이 '조'를 들고 따라 왔다.

 

“유사님, 아까 참 손님이 오셨다가 가셨습니다.”

 

성하와 학사가 마주 앉을 때에 하인은 생각난 듯이 말하였다.

 

“응? 누구더냐?”

 

“어제도 오셨던 분이올씨다.”

 

“어제도? 어제도 여러 사람이 왔었는데…”

 

“―그 육주비전에서 지전(紙廛)을 보시는 분이올씨다.”

 

“응! 그래 아무 말도 없이 갔냐?”

 

“저녁에 또 다시 오겠습니다고요.”

 

“그 뿐이야?”

 

“네!”

 

학사는 성하를 돌아보았다.

 

 


 

 

“자네는 승후관이니 혹은 종친 중에 흥선군 이하응이라는 사람을 아나?”

 

“네, 짐작이나 합니다.”

 

“주책 없는 인물!”

 

그리고 하인에게 향하여,

 

“주안이나 좀 내어 오너라.”

 

하여 돌려 보냈다.

 

“왜 흥선군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글쎄 말일세. 종친으로 태어나서 그게 무슨 주책 없는 짓이람.”

 

“왜요?”

 

“사연이 이러네그려. 흥선군이란 인물이 안필주라나 하는 관속과 부동을 해 가지고, 지전 보는 홍모를 쇡임 투전에 걸어 넣어 가지고 육백 냥을 빼앗았다나?”

 

“찾아온다는 사람이 그 홍모랍니까?”

 

“그렇지! 그 홍모가 매일 찾아와서, 흥선군은 잡아 가두지 못하되 안모라는 사람을 좀 잡아 가두어 달라는구면.”

 

“그래 어떡허시기로 했습니까?”

 

“자네에게니 말이지, 장사아치는 참 더럽데. 지전 주인이 그게 무슨 꼴이람. 처음에는 열 냥 가져왔지. 그 담에 또 열 냥 가져왔지. 쉰 냥도 못 되고야 누가 그걸 잡아 가두어 주겠나? 오늘은 얼마 가져왔는지는 모르지만, 너덧 번 더 헛걸음 해야 될걸. 하하하하!”

 

“그러면 홍모는 부러 돈을 삭여 가면서 안모를 잡아 가두면 뭘 한답디까?”

 

“내가 그게야 알겠나. 아마 안모는 흥선군의 막역지우니깐, 흥선군한테 좀 떼내려는 셈이겠지.”

 

성하는 머리를 수그렸다. 무슨 매우 더러운 물건에 직면한 것 같은 느낌 때문에 불쾌하였다.

 

“홍모뿐이 아닐세그려. 이 놈을 잡아 가두어 주오, 저 놈을 가두어 주오, 매일 청 대러 오는 인물들이 부지기술세그려.”

 

“다 돈냥을 가지고 옵니까?”

 

“그럼! 거저야 가두어 주나. 그런 것은 내 수입―큰 장전은 사당 재산―그렇게 되는 것일세그려.”

 

“아저씨, 그 안모라는 관속을 쉰 냥이 차기만 하면 가두어 주시겠습니까?”

 

“그럼, 내게 손해나지 않는 일…”

 

 


 

 

성하는 머리를 수그렸다. 수그리고 잠시 있다가 머리를 들 적에는 그는 자기의 얼굴의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아저씨, 제가 고 쉰 냥을 아저씨께 드릴게, 홍모에게 받으신 금전을 도로 내어 주시고 안모는 모를 체해 주십시오.”

 

“?”

 

학사는 성하를 보았다. 의아한 듯이 머리를 기울여 보았다.

 

“자네도 그 안모를 아나? 자네도 아는 사람이라면…”

 

말을 계속하는 것을 성하는 가로채었다.

 

“모릅니다. 모르지만 옛날 어느 성현께서 돈 받고 남을 잡아 가두라고 하셨습니까?”

 

학사는 즉시 대답지 못하였다. 잠시 뒤에 머리를 돌리며 대답하였다.

 

“그거야, 그런 말씀은 안 하지만, 서원 치고 안 하는 곳이 어디 있나? 서원뿐인가? 자네도 잘 알다시피, 내가 시골서는 본시 벼 천 석이나 하던 사람이야. 그게 왜 중년에 그렇게 가난하게 지냈나? 내가 외도를 해서 썼나, 역적 도모를 하다가 관가에 적몰을 당했나, 내 논 밭 삼백 석지기를 향교에 들어가고, 칠백 석지기는 석경원이란 놈이 앗아 먹고…그래서 중년 삼십 년 간을 삼순구식을 하면서 겨우 연명만 해 오지 않았나?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일이라네. 자네는 아직 젊어서 그런 일을 모르니깐 그렇게 생각하나보이마는, 사충사 일유사라는 것은 그만한 일을 하라고 나라에서도 권한을 주신 것이 아닌가?”

 

나라에서 매관 매작―

 

서원에서도 매첩 매직―

 

나라에서도 뇌물과 강탈―

 

서원에서도 뇌물과 강탈―

 

이 아래 끼운 세력 없고 힘 없는 서민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성하는 다변(多辯)한 아저씨의 말을 들으면서, 더욱 불쾌하였다.

 

“그럼, 아저씨께서는 그 새 몇 사람이나 가두어 보셨습니까?”

 

“나야 일유사가 된 지 석달 밖에 못되니깐 몇 사람 안되지―자, 평양 김모, 해주 최 서방, 또…”

 

누구누구 잠시 꼽아 본 뒤에,

 

“일곱 사람 밖에는 못 되네.”

 

하고 수효가 적은 것을 부끄러이 여기었다.

 

“일곱 사람에 합해서 얼마나 거두셨습니까?”

 

“내야 나 먹자고 거두는 게 아니니깐 얼마 되겠나? 큰 것은 사당으로 보내야 되고, 부스러기나 내게 돌아오는 것일세 그려, 아까 말한 것같이 장토 약간, 돈 얼마, 이집, 그것뿐일세. 한 십 년만 하면 나도 착실해지기는 하겠구면.”

 

이 선량한 노인은 십 년 간을 조를 맡아 두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여보게 성하!”

 

“?”

 

“다른 놈 잡아 가둔 건 그다지 별다르지 않지만, 석경원이란 놈 잡아 가둔 일을 생각하면 십 년 체기가 한꺼번에 내려가는 듯하네. 이 놈이 십 년 전에 내게 대해서 행한 행사를 생각하면 그런 시원한 일이 없데. 이 놈의 아들놈 손자놈 할 것 없이 모두 집으로 몰려 와서, 손이 발이 되도록 애걸하던 꼴은 지금도 눈에 서언하네. 내 그놈을 한 푼 없이 알겨 냈지. 지금 거지가 돼서 떠돌아 다닌다네.”

 

“어떻게 잡아 오셨습니까?”

 

“듣고 싶은가? 내 이야기할께 들어 보게. 가만, 주안 나오나베. 천천히 먹어 가면서 이야기하세.”

 

내어 온 주안을 가운데놓고 학사는 성하에게 자기가 철천지한을 품고 있던 석경원이에게 원수를 갚던 일장 이야기를 꺼내었다. 성하는 안주도 집지 않고 술도 들지 않고, 잠자코 아저씨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 학사의 집안은 시골서 벼 천 석이나 하던 집안이니까 부자 소리도 듣는 집안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어디 명색 없는 부자나 없는가고 탐지하는 두 가지의 세력(하나의 관력, 하나는 벌력)이 이 이학사의 집안을 거저 넘기지를 않았다.

 

먼저 향교에서 이 학사에게 장의(掌議)라는 명색을 주고 삼백 석을 앗아갔다. 천 석 추수에서 삼백 석은 꽤 큰 상처는 상처지만 치명상까지는 안 되었다. 학사는 장의라는 직함을 얻어 가지고 이것이 도리어 행세하는 근거가 된 것으로 여기고, 그다지 애석히 생각지는 않았다. 아직 칠백 석지기가 남았으니 그것을 가졌으면 넉넉한 생활은 할 수가 있으므로―

 

그러나 당시에 있어서 시골 장의 따위의 칠백 석이 또한 그냥 보전될 수가 없었다. 관력(官力)이라 하는 것이 학사의 칠백 석을 엿보기 시작하였다.

 

석경원이라는 인물은 영문 이방(吏房)이었다. 마음이 곱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 때의 그 곳의 장관인 감사도 또한 마음이 좀 검은 사람이었다. 학사―이 장의는 연하여 감찰부에 잡혀 갔다.

 

“감영 삼문에 사또님을 훼방하는 방을 붙인 것이 너지?”

 

혹은―

 

“결전(結錢)을 속였지?”

 

별의별 명색을 다 붙여서, 이 장의를 옥에 가두고 하였다. 그리고 그 매번을 자손들이 석경원이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치고야 놓여 나오고 하였다. 이리하여, 갇혔다가는 뇌물로써 벗어나고, 또 같은 일이 번복되고 하여, 몇 해 후에는 이 장의네 집은 고생은 할이만큼 다 하고도 재산은 홀짝 다 빼앗겼다.

 

 


 

 

그 때 감사도 먹기는 좀 먹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석경원이가 먹은 것이었다. 좌우간 겨우 삼백 냥이란 돈을 마련하여 이방 자리를 산 석경원은, 이방 십 오년 간에 삼천 석이라 하는 거대한 재산을 움켜 잡은 것이었다.

 

재산 전부를 석경원한테 앗기운 이 장의 집안은, 그 뒤 십 년 간을 이리저리 굴러 다니면서 숱한 고생을 다 겪었다. 그러다가 금년 봄에 어떻게 어떻게 하여, 집안 오대조를 팔아서 사충사 일유사를 얻어 하게 되었다. 일유사가 되면서, 학사가 제일 첫 번 조를 찍은 것은 철천지 원수 석경원 압래장이었다. 석경원은 이 위대한 권세를 가진 종이 조각 때문에 한성부에 갇히게 되었다.

 

흥정은 시작되었다. 백 석지기를 사총사에 비치리다, 이백 석 바치리다, 삼백 석 바치리다. 석의 아들이 찾아와서 호소호소하는 것을 학사는 대번 고개를 가로 저어서 돌려 보냈다. 드디어 석은 학사의 만족할 만한 토지를 제하고야 백방이 되었다.

 

그러나 석의 재산을 홀짝 다 빨아서 거지를 만들기 전에는 학사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학사는 비밀리에 이 석을 천주 만동묘(萬東廟)로 넘겼다. 사충사에서 초벌 벗기운 석은 다시 만동묘에 또 한 벌 벗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동묘에도 만족할 만한 뇌물을 바치고 겨우 백방이 된 때는, 학사의 비밀 활동으로 또한 다른 서원이 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하여 몇 군데 넘어가는 동안, 이방 십 오 년 간에 번 적지 않던 재산은, 모두 이 서원이며 저 서원으로 넘어가고, 하잘것없는 거지가 되어 버렸다.

 

이리하여 십여 년에 겪은 원혐을 학사는 사충사의 일유사가 되어 가지고 고대로 갚은 것이었다.

 

조―

 

한 개의 뿔 조각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 이 학사의 십 년 전 원수를 갚아 준 것이었다.

 

“어떤가? 내가 못할 일을 했나? 다들 하는 노릇이고, 하게 마련된 노릇을 나 혼자 안 하면 어리석은 짓이라네.”

 

학사는 성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성하는 머리를 조금 들어서 학사의 오른편 옆에 놓여 있는 조를 보았다. 정목으로 만든 위에 명주 끈을 달고 주석으로 장식을 한 그 상자는, 옥새를 간직하는 그릇보다는 약간 손색이 있었으나, 지방 장관(長官)의 관인을 넣는 상자보다는 훨씬 더 치레를 하였다.

 

“조는 인주로 찍습니까?”

 

“먹으로 찍는다네.”

 

“아저씨 말씀은 알아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제 소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모두 좋지 못한 일을 하더라도, 남들이 한다고 그것이 좋은 일이 될 까닭이 없습니다. 옛날 재상은 죽은 뒤에 장례지낼 비용이 없는 것을 자랑했다 하지 않습니까? 그 마음을 아저씨께서는 본받으실 수가 없습니까? 제 소견으로는 높은 선비는 금전을 사랑하지 않아야 하지 않는가 합니다.”

 

 


 

 

노인은 청년을 굽어 보았다. 못 알아 듣겠다는 모양이었다. 사충사의 일유사가 된 이상에는 자기도 큰 선비일 것이다. 역대의 일유사도 물론 모두 높은 선비였을 것이다. 그 모든 높은 선비들이 아직껏 예사로이 행한 일을,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성하 따위가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이 아니꼽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자네는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기에 그런 말을 하지, 남 듣는 데서는 아예 그런 말 다시 말게. 명유(名儒)들의 하신 일을 외람되이 말할 것이 아닐세.”

 

지나간 시대의 사람들이 행한 일이니 즉 옳은 일이라고 단정하는 이 단순한 노인을 성하는 결코 악의(惡意)로 볼 수는 없었다.

 

뿐 아니라, 이 노인의 마음에도 결코 악의가 없는 것은 성하도 잘 아는 바였다. 양기롭고 쾌활하고 단순한 이 노인은, 자기의 행하는 일에 대하여 판단을 내리지를 못할 따름이었다. 지나간 시대의 사람들이 모두 잘난 사람들이었고, 그 잘난 사람들이 행하던 일이니 결코 나쁜 일이 아니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행하는 뿐이지, 마음에 악의가 있어서 행하는 일이 아닌 것은 성하고 짐작하였다.

 

이 단순하고도 지나친 시대의 사람을 절대로 존경하는 노인에게 대하여, 그 일이 그릇된 일임을 이해시키는 것은 지난한 일일 것이다. 지나간 시대의 사람이 잘못하였다고 지적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일뿐더러, 잘못하다가는 순한 노인의 감정난 사기가 십중 팔구일 것이다.

 

“아저씨, 그럼 그 말씀을 다시 하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제 부탁 하나는 들어 주십시오.”

 

“무엔가?”

 

“아까 말씀하시던 그 안모―안필주는 그대로 넘겨 주시면 좋겠습니다.”

 

“자네가 그렇게 부탁하면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자네는 그 안모와 면분이라도 있다.”

 

“안모가 아니라 흥선군과 면분이 있습니다.”

 

“흥선군? 흠! 자네는 명문 거족에 태어나서 왜 그런 주책 없는 인물과 교제를 하나?”

 

“할 수 있습니까? 이미 한 노릇을 도로 없이할 수도 없고…”

 

“그럼 내일 홍모가 오면 받았던 것은 도로 내어 줘야겠군.”

 

'투전해서 돈 땄네, 하하하' 하고 너털거리던 흥선의 모양이 획 성하의 머리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 때 함께 가던 인물이 안필주였다. 그것을 생각하고 홍모의 호소를 연상할 때에, 성하는 스스로 입가에 떠오르는 고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흥선군은 홍모와 사화할 돈도 없습니다.”

 

성하가 이렇게 보태었다. 성하가 이 학사의 집에서 나온 것은 거의 황혼 때나 되어서였다.

 

“간간 오게. 자네 즐기는 평양 감홍로도 마련해 둘게, 심심하면 놀러 오게.”

 

학사는 동저고리 바람으로 대문까지 따라 나와서 성하를 보냈다. 쾌활하고 양기로운 노인과 하루 진일을 보낸 성하인지라, 당연히 그의 마음은 가벼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노인의 집을 나온 성하의 마음은 여간 무겁고 불쾌하지 않았다. 무엇이 이 천진하고 단순하고 유쾌한 노인으로 하여금 의에 벗어난 일을 예사로이 하고 조금의 반성도 하지 않게 하는가?

 

 


 

 

―첫째로 제도였다. 그런 제도를 만들고 그 제도에 물들기 때문에 그렇듯 유쾌한 노인으로 그렇듯 불쾌스런 행동을 예사로이 하게 하는 것이었다.

 

둘째로 그릇된 사대사상(事大思想)이었다. 사원을 신성시(神聖視)하고, 서원에서 하는 노릇은 불가침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 나라에 퍼지고 또 퍼진 사대 사상의 산물이었다. 군권과 관권보다도 삼고의 예의를 더욱 존중히 여기기 때문에 이런 불례(不禮)의 일이 산출된 것이었다.

 

세째로 위정자의 타락이었다. 자기네들도 매나가 매작과 토색과 뇌물을 가장 당연한 일로 여기고 행하는지라, 서원의 횡포를 금할 면목이 없을 것이었다.

 

'붉은 문의 안에서는 마부(馬夫)가 대추와 밤을 밟으며, 단청한 누각의 아래에서는 나귀가 약식(藥食)을 먹어서 가축이 인식을 먹되 금할 줄을 모르나, 이 나라는 풍년되고 따스한 겨울에도, 전하의 적자는 오히려 굶고 얼어 죽는 사람이 있소이다.'

 

얼마 전에 간관(諫官) 모의 상소와 같이 고관 거족들의 쓰레기 가운데도 고기 덩이가 그냥 섞여 있는 반면에는, 또한 물고기 먹으라고 강에 뿌리는 밥을 훔쳐 먹으러 위험을 무릅쓰고 물 속에 숨바꼭질하여 들어가는 가난한 백성이 부지기수이니 너무도 모순된 세상이었다.

 

이러한 모순된 세상을 바로잡으려면, 그것은 여간한 과단성과 힘과 패기를 가지고서는 하지 못할 것이었다. 천년에 한 번 날까말까 하는 위대한 인물의 위대한 손이 아니면 도저히 행하지 못할 노릇이었다.

 

누구―그런 힘센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지금 성하 자기가 머리를 수그리고 길을 걷는 동안에도, 많고 많은 재물들이 혹은 마바리로 혹은 소바리로 권문들의 집 창고로 몰려 들어갈 것이다. 권문들의 창고로 하루에 몰려 들어가는 재물이라 하는 것은, 또한 시골의 몇 집안이 몇 대를 내려오면서 근검저축을 하여 쌓아 온 노력의 결정일 것이다.

 

―이런 일을 생각할 때에 이 너무도 어지럽고 혼란된 상태는, 어떤 위인이 생겨날지라도 도저히 펼 수가 없을 듯이까지 보였다.

 

―흥선 대감! 시생이 본 바의 당신은 분명히 비범한 인물이올씨다. 다른 사람이 감히 손도 못 댈 일을 넉넉히 감당할 분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어지러운 국면을 당신은 능히 개척할 만한 능력을 가지셨습니까? 당신의 힘을 의심함이 아니라, 세태가 너무도 어렵게 됨을 근심함이로소이다. 시기를 놓치면 명의(名醫)라도 병을 고치지 못한다 하지 않습니까?

 

―대감! 일어서십시오. 만약 당신이 명의의 수완을 가지신 분이라면 하루 바삐 일어서십시오. 시기가 너무 늦어서 대사를 그르치기 전에 어서 일어서십시오.

 

저녁때라도 제 집으로 돌아들 가는 어지러운 무리의 사이에 섞여서, 성하는 머리를 푹 가슴에 묻고, 마치 술취한 사람 모양으로 고르지 못한 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옥색 무문 갑사 창의(氅衣, 벼슬아치가 평소에 입는 웃옷. 소매가 넓고 뒤 솔기가 갈라져 있다) 정자관(程子冠. 예전에, 선비들이 평상시에 머리에 쓰던, 말총으로 만든 모자. 위는 터지고 산 모양으로 된 층이 두 층 또는 세 층으로 되어 있다)―

 

이런 편의(便衣)로서 김병기는 자기 침방에서 안석에 기대어 앉아 있다. 그 창 밖 툇마루에 세간 청지기가 치부책을 들고 꿇어 앉아 있다. 금은으로 장식한 부산 연죽(煙竹)에서 피오 오르는 향그러운 삼등초(三登草)의 연기에 상쾌한 듯이 한 번 기다랗게 숨을 내어 쉬고 병기는 말하였다.

 

“××부사에게서는?”

 

청지기는 치부책을 뒤적이었다.

 

“정월 열 나흗날 삼천 냥, 삼월 스무 이튿날 천 냥이올씨다.”

 

“○○현령에게서는?”

 

청지기는 벌걱벌걱 책장을 뒤졌다.

 

“정월 여드렛날 이천 냥이올씨다.”

 

“△△군수에게서는?”

 

“이월 열 사흗날 천 냥뿐이올씨다.”

 

약채전(藥債錢―각 고을 수령에게서 권문에 보내는 공물)을 조사하라는 것이었다. 단 천 냥이라는 데 병기는 한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군수에게서는?”

 

청지기는 책장을 이편으로 뒤적이고 저편으로 뒤적이고 한참을 뒤졌다. 한참을 뒤적일 동안 병기는 참을성 좋게 말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은 온 게 없는가 봅니다.”

 

병기는 숨을 내어 쉬며 눈을 천천히 한 번 감았다가 떴다. 병기 자기의 손을 통하여 각 곳에 나간 수령들을 차례로 꼽는 것이었다.

 

“○○군수에게서는?”

 

“산삼 열 근과―그…”

 

청지기는 말을 주저하였다. 병기는 재쳐 물었다.

 

“그…?”

 

“그…”

 

“응!”

 

생각났다. 산삼 열 근과 몸 심부름이라도 시키시라는 명목으로 아리따운 처녀 한 명을 구해 보낸 것이었다.

 

“산삼 열 근과 돈 삼만 냥이지, ○○군수에게서는?”

 

“…”

 

“?”

 

“이만 냥을 추송한다 하옵니다.”

 

병기는 눈을 번쩍 떴다.

 

“외상이냐?”

 

“…”

 

“썩 물러가거라!”

 

 


 

 

청지기는 자기가 무슨 큰 죄라도 지은 듯이 코를 마루에 비볐다.

 

“이 놈! 외상이 무냐? 썩 직전을 가져오너라.”

 

청지기는 또 한 번 코를 마루에 비볐다.

 

어디 군수 어디 현령―병기가 주선하여 내보낸 수령들의 점검이 다 끝났다.

 

병기는 재떨이에 담배를 떨면서 말하였다.

 

“금년 정월부터 지금까지에 천 냥 미만을 가져온 사람들은 모두 따로이 적어 두어라.”

 

“네!”

 

“외상도 미봉 편이다. 응, 그리고 만 냥 이상 가져온 사람도 또 따로 적고… 그 군수(산삼 열 근과 계집을 바친)는 만 냥 이상 편이다.”

 

“네!”

 

“또 그―××현령은 미봉이지만 특별히 눈감는다.”

 

특별이라는 것은 또한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병기와 그 당자―혹은 당자의 여권(女眷, 여자 식구)의 사이에 남이 헤아리지 못할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물러가거라.”

 

상전에게 하고 물러가는 청지기를 힐끗 보면서, 병기는 비로소 이편으로 향하여 돌아앉았다.

 

“영감 미안하외다.”

 

“아니올씨다. 시생이 황공하옵니다.”

 

거기는 병기의 주선으로 어떤 고을의 수령으로 나가게된 한 중로(中老)가, 부임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병기에게 하직을 하러 와 있었다. 그 사이의 보는 앞에서 병기는 약채전의 조사를 한 것이다. 장래 수령 영감은 눈이 부신 듯이 병기를 우러러보았다.

 

“영감! 무엇보다도 백성을 사랑하실 줄을 알아야 하오. 수령이 되어서 백성을 모르면 그 직책을 다할 수 없는 것이오.”

 

“지당한 말씀이올씨다.”

 

파격(破格)의 예로서 영내(楹內, 현관의 안쪽. 기둥의 안쪽이라는 말로 관청이나 궁궐 등의 堂을 나타냄)에 들어앉은 새 군수는 황공한 듯이 허리를 굽혔다.

 

“××는 산읍(山邑)이지만 산삼이며 돈피(?皮) 많이 나는 곳, 그 곳의 수령은 특별히 백성을 사랑할 줄을 알아야 하오.”

 

“지당한 말씀이올씨다.”

 

 


 

 

지당한 말이나 또한 그 뜻을 알아 듣기 힘든 말이었다. 산삼이며 돈피가 생산되니 백성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수령들은 재상가에게 약채전이나 공물이나를 많이 보내는 것으로 주장을 삼지만, 백성의 어른되는 자의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이외다. 혹은 공물이 부족하면 인부(印符)를 도로 거두어서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일도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공물을 위주해서는 안 되오. 제 일도 제 이도 제 삼도 백성뿐을 위주하여야 하오.”

 

“지당한 말씀이올씨다.”

 

“그 지방에 부유(富裕)하고 점잖은 사람이 있거든, 그런 인재는 그냥 흙에 묻어 둘 수가 없으니깐, 나라에 상계를 해서 무슨 벼슬을 시키도록 노력하시오. 그다지 많은 황금이 아닐지라도 인재만 있으면 벼슬은 시킬 수가 있으니깐―”

 

“지당한 말씀이올씨다.”

 

삼십 미만의 평안 감사를 지낸 일이 있는 병기는, 백성을 긁어 먹는 온갖 방법을 다 경험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백성을 긁어 먹는 수령들을 또한 교묘히 코오치하고 벗길 줄을 아는 사람이었다.

 

“연전에 △△가 ××감사로 갔을 때에 이런 일이 있었소, ××은 부읍이라, 돈냥이나 가진 백성들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을 모두 다 상계해서 벼슬을 시킬 수는 없으니깐, 얼마만치는 벼슬을 시키고 나머지는 한 사람 한 사람씩 불러써, 그대의 행실이 갸륵하니 나라에 상계를 해서 벼슬을 시키겠노라고 즉 '말 벼슬'을 주었소. 그러면 그 사람들은 감사에게 대해서 그 상보를 그만두어 달라고 간청을 하지 않겠소?

 

그 사람들이 처지로 말하면 벼슬을 받자면 오만 냥 이상은 바쳐야 하겠고, 그 벼슬을 삭여 버리려면 감사께 이삼만 냥만 바쳐도 면할 수가 있으니까, 감사께 몇만 냥씩 바치고 벼슬을 구만둡니다 그려. 시속말로 말하자면 벼슬 환퇴금이지. 하하하하! 시골 수령살이를 다니자면 별별 일을 다 겪는 법이외다.”

 

이 때에 청지기가 왔다.

 

“대감마님, 김천(金泉) 사는 최 장의라는 선비가 왔습니다.”

 

병기는 눈을 들어서 청지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뒷말을 채근하는 뜻이었다.

 

“도령님 연(鳶)줄 값으로 이백 냥을 갖고 왔습니다.”

 

“외사로 모셔라.”

 

청지기가 도로 나갔다. 병기는 다시 군수에게 향하였다.

 

“영감, 춘추가 금년에 얼마시오?”

 

“쓸데없는 나이만 많이 먹었습니다. 계유생이올씨다.”

 

“음! 계유라, 마흔 아홉이시군. ××군수로 있을 때 만고 절색을 하나구해 보내 주었더니. 참 ××는 색향이야.”

 

이런 방면에 많은 경험을 가진 병기는 이 새 군수에게 대하여 차근차근 군수살이의 비결을 가르쳤다. 새 군수는 연하여 머리를 조으며 병기의 훈화를 들었다. 훈화를 다 듣고 일어나서 절하고 하직을 고할 때에, 병기는 청지기를 불러서 외사에서 기다리고 있는 김천 선비 최 장의를 불러들였다. 병기는 사람 응대를 대개 침방에서 하였다.

 

 


 

 

두 손을 앞으로 읍하고 황공한 듯이 들어오면서 영외(楹外)에 엎드려 절하는 사람은, 나이는 한 사십쯤 났을 비교적 초라한 옷을 입은 인물이었다. 청지기의 말로는 도령님께 연줄 값 이백 냥을 가져왔다 하나, 이십 냥도 손에 쥐어 보지도 못했을 인물 같았다.

 

“자네가 최 장의인가?”

 

병기는 고즈너기 물었다.

 

이 물음에 그 사람은 몹시 낭패한 모양이었다. 어릿어릿 미처 대답을 못하였다.

 

“네, 아니―저 소인…”

 

“김천 사는 최 장의 아닌가?”

 

“소인은―저, 남, 남산동 살으와요. 성명 삼자는…”

 

병기는 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소리를 높여 하인을 불렀다.

 

“이리 오너라.”

 

그리고 등대한 청지기에게 향하여 잠시 꾸짖는 눈을 붓고 있다가 물었다.

 

“이 사람이 김천 최 장의냐?”

 

청지기도 낭패한 모양이었다. 낭패하여 어릿거리는 청지기에게 향하여 연거푸 병기의 호령이 내렸다.

 

“눈이 눈이 아니고 티눈이기로서니 사람을 바꾼단 말이냐? 썩썩 내몰아라.”

 

남산동 산다는 모는 청지기에게 뒷덜미를 잡혀서 나갔다. 그러나 뜰에 내려서서는 하인과 무슨 승강을 하는 모양이었다. 듣노라니깐 돈 넉 냥이 어떻고 닷 냥이 어떻고 승강을 하고 있다. 잠시 듣고 있을 동안, 병기의 눈살은 차차 찌푸려졌다.

 

하인과 남산동인과의 승강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남산동인은 대감께 뵈려고 그것을 주선하여 달라고 하인에게 돈 닷 냥을 찔러 주었던 모양이었다. 그 덕으로 대감은 김천 최 장의를 부르는데, 하인이 남산동인을 들여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들어는 왔지만 한 마디도 아뢰어 보지 못하고 도로 쫓겨 나가는 남산동인은, 하인에게 아까 주었던 닷 냥을 도로 내라는 것이었다. 닷 냥을 도로 내라거니 안 주겠다거니 뜰에서는 그것으로 승강이가 났다. 병기가 소리를 높여서 세간 청지기를 불렀다.

 

“에서 무에 요란스러우냐?”

 

“잘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어? 대체 누구냐?”

 

“…”

 

“누구야?”

 

두 번째의 힐문에 세간 청지기는 드디어 지금 뜰에서 남산동인과 승강을 하고 있는 청지기의 이름을 대감께 아뢰었다. 동료의 한 일―그리고 또(규모의 크고 작은 구별은 있다 하나) 상전 대감도 만날 하는 일과 꼭 같은 일을 한 동료에 대하여 감싸 주고 싶은 생각은 있었으나, 병기의 두 번째의 힐문에는 대답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병기의 가법에, 같은 말을 주인이 세 번째 묻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번에 두 번까지는 질문을 하였지만, 거기 역시 대답하지 않아서 세 번째 질문하게 되는 날에는, 그 벌은 자기에게까지 이를 줄을 아는 세간 청지기는, 두 번째의 힐문에는 솔직하게 지금 뜰에서 승강이하고 있는 청지기의 이름을 알리었다.

 

병기는 잠시 노여운 눈으로 세간 청지기를 굽어 보았다. 그리고 한 마디씩 끊어서 분한 어조로써 엄명하였다.

 

“××놈은 광에 가두고 남산동 모는 곤장을 쳐서 내쫓으렷다. 조금이라도 사가 있어서는 안 된다. 고약한 놈들!”

 

 


 

 

하인은 허리를 굽힌 채 이마 너머로 주인을 힐끗 보았다. 한 번 입 밖에 꺼낸 말은 절대로 번복하는 일이 없는 병기인지라, 힐끗 본 뒤에는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물러갔다.

 

이 명령이 시행되느라고 뜰에서는 두선거리는 소리를 병기는 역한 듯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듣고 있었다.

 

김천 최 장의가 병기를 만나게 된 것은 저녁때가 거의 되어서였다. 돈냥이나 있는 듯한 최 장의는 병기의 아들을 위하여 연줄 값으로 이백 냥을 내고, 청지기에게 또한 심부름 값으로 쉰 냥을 내고, 그 쉰 냥의 덕으로 여러 번 대감을 재촉하였지만 대감은 좀체 만나 주지 않았다. 

 

남산동 모를 내쫓은 뒤에는 내실로 들어가서 한 시각이나 있다가, 다시 정침으로 나와서도 좀체 최 장의를 만나 주지 않았다. 점심을 먹는다, 점심 뒤에는 잠시 낮잠을 잔다, 낮잠에서 깨서는 어제 읽던 소설의 계속을 한참 읽는다 하여 저녁때가 되어서야 최 장의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최 장의는 나이는 거의 병기와 연갑이었다. 영외에서 인사를 드리는 최를 병기는 거만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네가 김천 사는 최 장의인가?”

 

“네, 그렇습니다.”

 

“거기 앉게.”

 

병기는 담뱃대로 최의 앉을 자리를 지적하였다.

 

“선향이 어딘가?”

 

“△△올씨다.”

 

“김천읍내 사는가?”

 

“네!”

 

“성주는 누구더라?”

 

최 장의는 성주의 이름을 말하였다.

 

“응, 정사는 어떤고?”

 

“선정이올씨다.”

 

“그래서 나를 찾은 연고는 무엇인고?”

 

“네, 다름이 아니오라, 소인은 남성사의 장의(掌議)이옵는데, 이번 남성묘에 충문공(忠文公―金祖淳) 어른의 위패를 모시고 선액(宣額)을 받잡고자 대감께 그 소장을― 좀…”

 

병기는 눈을 천천히 굴려서 선비를 바라보았다. 그 소장은 하려면 예조를 통하여 대궐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것을 자기에게로 떠들고 온 그 까닭을 얼굴의 표정으로 써 보고자 함이었다. 충문공 김조순은 병기의 양할아버지다. 이러한 연줄로 자기에게 부탁함인가?

 

다른 데로 가져가면 당연히 거대한 황금을 바치고야 성공할 일을, 사손(嗣孫)에게 부탁하여 공짜로 하여 보려는 심정으로 자기에게 가지고 온 것인가? 혹은 자기는 이 나라의 세도인지라, 자기라야 그 일이 성공될 줄 알고 다른 곳을 젖혀 놓고 자기를 찾아 온 것인가?

 

김천에서 남성사라는 서원이 있다는 말을 병기는 일찍 들은 일이 없다. 그런즉 남성사라는 것은 그다지 유명하지 못한 서원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 미약한 서원에 충문공(순조비 김씨의 아버지요, 지금 권문 김씨의 조상인)을 모시고, 충문공의 위패의 힘으로써 세력을 펴 보려는 계획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공자를 모시기보다도, 명나라 어떤 천자를 모시기보다도, 권문 김씨의 조상을 모시는 편이 더욱 세 쓰기에 첩경인 것은 거듭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 충문공의 위패를 모심에 있어서 다른 곳을 찾지 않고 그의 자손되는 병기 자신을 찾은 까닭을 병기는 알아보려고 최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병기는 퉁기어 버렸다.

 

“그러면 자네는 길을 잘못 들었네. 나는 어떻다고 대답할 수가 없네.”

 

병기는 담배 서랍에서 삼등 엽초(三登葉草)를 꺼내어 손으로 말면서 고요히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최 장의의 얼굴에는 낙심의 표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만한 인사상의 거절은 미리부터 각오하고 왔던 모양이었다. 최 장의는 도포 자락을 좀더 헤치며 조금 나앉았다.

 

“대감, 길을 헛들은 줄은 소인도 모르는 바가 아니올씨다. 그렇지만 다른 데 청을 드리기보다는 그 어른의 사손되시는 대감께 드리는 편이 좋겠읍고, 더구나 만약 그 어른의 사손이 안 계시면여니와, 계실뿐더러 현관으로 계신 이상에야 어찌 다른 곳을 찾게 되겠습니까? 다른 곳을 찾는다 할지라도 순서로서 대감께서 그 곳을 손수 지시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병기는 담배를 대에 담았다. 그리고 부시쌈지를 얻으려고 허리춤을 만졌다. 그러매 최 장의가 영외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뛰어 들어와서, 어느 틈에 꺼내었는지 자기의 부싯돌로 쑥에 불을 일으켰다. 쑥에 붙였던 불은 유황 성냥으로 옮아 갔다. 그 불을 최 장의는 양 손으로 읍하고 기다란 병기의 담뱃대 끝에 달린 대통에 대었다.

 

뻑 뻑, 힘있게 담배를 빨면서 병기는 눈을 굴려서 최 장의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쥐와 같이 생긴 얼굴이었다. 노란 수염이 몇 올 코 아래의 턱에 났으며, 하관이 빠른 그의 얼굴은, 사람을 비웃는 듯한, 또는 간사한 듯한, 그렇지 않으면 아첨하는 듯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고지식하지 않고, 꾀 많고 간사하게 생긴 이 얼굴을 병기는 만족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진행되려는 일에 있어서는, 고지식한 인물이 제일 다루기 힘들고 어려움을 병기는 오랜 경험으로 잘 알았다.

 

향그러운 삼등초는 최 장의의 켜 든 성냥 아래서 피어 올랐다. 최 장의는 한 번 엄지손가락으로 담배의 뿌리를 눌러서 자리를 잡아 놓은 뒤에 다시 성냥에 불을 옮겨서 대었다.

 

눈치 덩어리였다. 병기는 만족하였다. 대감께 담배를 다 붙여 올린 뒤에, 최 장의는 그냥 허리를 구부린 채, 뒷걸음쳐서 아까의 자리로 돌아갔다. 병기는 담배를 한 번 힘껏 빨아서, 그 연기로서 제 얼굴 전면을 감추면서 말하였다.

 

“최 장의!”

 

“네?”

 

“내가 그 어른의 사손이니깐 더욱 그런 일을 간섭하기 어렵지 않나? 밟을 길을 밟게. 내게는 귀찮게 굴지 말게.”

 

이런 말에 떨어질 최 장의가 아니었다. 또한 이런 말에 떨어질 사람이 아님을 알았기에 병기는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처음 뵙고 너무 조릅니다마는 대감밖에는 이 일을 주장해 주실 분이 안 계십니다. 다른 길을 밟는다 해도 대감께서 지도해 주셔야 할 것이옵고, 그만둔다 할지라도 대감의 지시만 받을 것이옵고… 소인은 모릅니다, 대감께 매달려 조르고 억지 쓸 따름이올씨다.”

 

“허! 이 사람, 감질 났네그려. 그럼 내 편지…”

 

“아니올씨다. 소인은 대감밖에는 모릅니다. 죽여도 대감께서 죽이시고, 살려도 대감께서 살리셔야지 다른 데는 모릅니다. 대감께서 응낙하시기까지는 소인은 열흘이고 한 달이고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병기는 고소(苦笑, 쓴웃음)하였다. 웃으면 홍소(哄笑)―그렇지 않으면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는 병기에게 있어서 고소라 하는 웃음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돈―금액에 대하여는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병기 측에서는 최 장의가 꺼내기를 기다렸다. 최 장의 측에서는 대감이 꺼내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금액이라는 문제를 가운데 놓고,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 주위만 뱅뱅 돌았다.

 

이런 흥정에 있어서 최 장의는 상당한 수완을 가진 인물인 모양이었다. 천병만마지간을 다 다닌 병기도 그 수완을 넉넉하다 보았다. 그것은 구렁이와 여우와의 승강이였다.

 

 


 

 

흥정은 한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동복이 들어와서 백통 촛대에 촛불을 켜 놓고 나가기까지 흥정은 결말이 나지 않았다. 드디어 최 장의가 이런 말을 꺼내게까지 되었다.

 

“대감, 대감 댁 도령님 지필가(紙筆價)로 남성사서 한 삼천 냥 드리겠습니다.”

 

이 말에 담배만 뻐근뻐근 빨고 있던 병기가 번쩍 머리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노염이 타올랐다. 병기는 고요히 말하였다.

 

“여보게!”

 

“네?”

 

“아직 젊은 사람이니 용서해 주거니와, 다시는 그런 버릇 없는 말 입 밖에 내지 말게. 내 자식은 아직 조상을 팔아서 지필을 살이만치 궁하지 않았네.”

 

그리고 거기 대하여 최 장의가 놀라서 무슨 변명을 하렬 때에, 병기는 내리 누르듯이 말을 계속하였다.

 

“아무리 나이가 못 들었기로서니 선비의 처신에 그만 지각도 없을 까닭은 없겠지. 썩 돌아가게. 오늘 밤으로 김천으로 내려가게. 에이! 고약한 사람 같으니…”

 

그리고는 담뱃대를 들고 일어서서 내실로 들어가 버렸다.

 

병기는 내실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오늘 밤은 내실에서 자겠노라는 뜻을 눈짓으로 부인에게 알게 한 뒤에, 천천히 다시 사랑으로 나왔다. 그것은 아까 병기가 최 장의를 버려 두고 내실로 들어갔던 때부터 약 한 시각쯤 뒤로서, 해시(亥時)가 거의 된 때였다.

 

병기는 나와서 세간 청지기를 불렀다. 대령한 청지기에게 향하여,

 

“김천 최가는 갔느냐?”

 

고 물었다.

 

“아직 외사에 있습니다.”

 

“음, 고약한 사람 같으니…”

 

병기는 아직도 괘씸하다는 듯이 입맛을 쩍쩍 다시며 문갑 위에 놓여 있는 주판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양 두돈 오푼, 양 두돈 오 푼을 몇 번을 놓다가 그것을 멈추고, 천(千) 줄에다가 위에 한 알, 아래 두 알을 놓아서 칠천이라는 수효를 나타내어 가지고 물끄러미 주판을 굽어 보았다. 이 주판은 청지기도 넉넉히 볼 수 있도록 조금 밖쪽으로 젖혀 가지고―

 

그리고 잠시 가만 있다가, 청지기에게 도로 물러 가기를 명하고, 동복을 불러서 좌초롱에 불을 켜서 앞세우고 내실로 들어갔다. 병기가 내실로 들어간 뒤에 사랑 조용한 한 방에서는 김천 선비와 병기 댁 세간 청지기의 사이에 흥정이 시작되었다.

 

상의(商議)가 거듭되고 거듭되어 야반에 이르기까지 거듭된 결과 남성사에서는 김병기에서 구천 냥(만 냥이 아니면 안 될 것이로되, 청지기가 특별히 대감께 잘 알선하여 구천 냥에 떨구겠다고 장담하고)을 바치고, 남성사에는 충문공의 위패를 모시게 하도록 하여 주겠다는 약속이 성립되었다. 그 구전으로 청지기에게 남성사에서 삼백 냥을 뇌물하였다.

 

남성사에서는 병기 댁 청지기에게 구천 삼백 냥을 드렸다. 청지기가 맡은 치부책에는 남성사 앞으로 칠천 냥이 적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 영의정 김좌근의 상계로서 김천 남성사에 충문공의 위패를 모시는 사액(賜額)을 할 것이 윤허(允許)되었다.

 

그러나 그 윤허가 내리기 전에 벌써 남성사의 하인들은 각곳으로 헤어져서, 근린의 돈냥이나 있는 사람들을 모두 김천 읍으로 잡아다가 가두었다. 그리고 거기서는 또 다른 상의(商議)가 진행되고 있었다.

 

윤허가 내린 때쯤은 가난하고 가난하던 남성사는, 어느 덧 천 석에 가까운 제전이며 많은 산림을 소유하게 되었고, 여기저기 비싼 이자로써 빚을 줄 돈도 꽤 많이 생겼다.

 

<운현궁의 봄 4부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