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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石坡)가 올 터인데…”
“글쎄, 모르나?”
“석파의 코는 십 리 밖에서도 술 냄새는 맡는데 모를 까닭이 있나?”
“하하하하!”
“하하하하!”
필운대(弼雲臺)의 답청―
훈련 대장(訓練大將) 영어 김병국(潁漁金炳國)을 비롯하여 서너 대관들의 탐춘 놀이였다. 서로 너나들이하는 가까운 벗끼리, 이 봄의 하루를 즐기려고 필운대에 모인 것이었다. 놀이, 제사, 잔치를 무론하고 대관 집 음식 차림이 있을 때는 어떻게 아는지 반드시 찾아 오는 흥선이 아직 오지 않으므로, 그들의 이야기는 자연히 석파 흥선군에게 미친 것이었다.
필운대의 명물인 만개된 살구꽃은 그윽히 그 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직 성 안에는 봄 풍경이 그다지 명료히 오지 않았지만, 필운대며 그 근방에는 봄도 이미 무르익었다. 아리따운 기생 몇 명이 시중을 들었다. 좀 떨어진 곳에는 공인(工人)들이 한 상 받고 앉아서 서로 한담을 하고 있었다.
“대감! 자네는 흥선군과 흠 없이 지내는 처지이니 말이지, 한 번 말 좀 톡톡히 하게. 우리 보기에도 창피스럽데. 그렇게 먹을 데 바치는 사람은 쉽지 않아.”
숭정(崇政) 갑(甲)이 영어 김병국에게 권고 비슷이 이렇게 말하였다. 영어는 미소하였다.
“그게야 자네는 지내 보지 못해서 경험이 없기에 하는 말이지. 시재 배고픈데 염치를 어떻게 차리겠나?”
“염치를 안 차린대도 분수가 있지, 그런 변이 어디 있겠나? 일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네 그려―”
일전 그 갑(甲)이 어떤 집안 어른을 모시고 봄 구경을 홍인문 밖으로 간 일이 있었다. 그 때 마침 그 근처를 배회하던 흥선에게 들킨 바가 되었다. 흥선은 얼굴에 굶주린 미소를 띄고 이 패에 섞이어 들어왔다. 갑이 모시고 갔던 어른은 이것이 너무 역하여, 그만 일어서서 저 편으로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그러매 흥선은 빈 자리에 들어앉아서 마음대로 음식을 다 버르져 놓고 갔다는 것이었다.
“글쎄, 그런 변이 어디 있겠나? 내가 망신을 했네 그려.”
갑은 이렇게 술회하였다.
영어는 자기의 왼편 귀 아래 맺은 호박 갓끈을 어루만지면서 그냥 미소할 따름이었다. 지금의 권문 전부가 흥선 따위는 사람으로 보지도 않고 수모가 막심하였지만, 영어는 흥선을 수모로 하면서도 일종의 동정심도 또한 가지고 있었다. 흥선의 무염치를 수모는 하면서도, 또한 남들과 같이 내놓고 멸시는 못하는 것이었다.
“석파는 그저 그런 사람으로 여기어 두어야 하네. 어느 어른을 모시고 갔었는지는 모르지만, 석파가 온다고 자리를 피하신 그 어른이 실수시지. 그래 자네 음식상 받았을 때 주린 짐승이나 새 버러지가 온다고 자리를 피하겠나? 그 어른의 실술세.”
“자네는 흥선군을 늘 두둔하데 그려?”
“불쌍하지 않나?”
“십상 팔구는 좀 있다가 여기로 올걸. 오면 내 한 번 망신을 시켜 주지.”
“그건 마음대로 하게.”
“자네 간섭했다는 안 되네.”
“내가 왜 간섭을 하겠나? 내가 석파의 조카인가 삼촌인가? 간섭할 까닭이 있나?”
갑은 기생을 돌아보았다.
“너희도 잠자코 보기만 해야 된다.”
그 기생들 틈에는 흥선과 가까이 지내는 계월이도 있었다. 계월이는 억지의 미소로써 대답하였다.
“대감의 코는 사냥개 이상이야. 허허허허!”
“?”
이 청년 재상들의 예상과 같이 낮 좀 기울어서 흥선은 옷자락을 날리면서 땀을 벌벌 흘리며 이리로 찾아왔다.
“갑갑해서 행화 구경을 왔더니…”
스스로 변명하는 듯이 이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인사를 하며 오는 흥선에게, 갑은 대짜로 사냥개의 코라 조롱하였다.
영어 김병국은 호인다운 미소를 얼굴에 띄고 흥선을 보았다. 미리부터 흥선이 오면 망신을 시키겠노라고 벼르고 는 갑의 잔혹성을 잘 아는 영어는, 이제 갑의 일시적 희롱물이 될 흥선이 가엷었다. 희롱을 한다손 치더라도 흠 없는 희롱으로 그치면 좋으나, 갑의 잔혹성으로 미루어 한 때 웃음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매, 영어는 그것이 속으로 얼마만큼 꺼리었다. 할 수 있는껏 불쾌한 희롱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갑이 다른 말을 시작하기 전에 몸을 일으키면서 흥선을 맞았다.
“자, 어서 오시오. 대감 가야금을 들은지도 오래니 한번 들어 봅시다.”
“아들이 이렇듯 올라오라니 좀 올라가 볼까?”
“에익!”
흥선과 영어는 서로 흠이 없니 농담도 하는 처지였다. 비굴한 웃음 아래서 한 마디의 농담을 던지면서 흥선은 올라왔다. 올라온 흥선을 갑이 맞았다.
“땀을 벌벌 흘리며 예까지 온 이상에야, 대감 거저야 가시겠소? 계월이 너 대감께 한 잔 따라 드려라.”
계월이는 돌아왔다. 잔에 술을 부어 가지고 흥선에게 드릴 때에, 계월이의 얼굴에는 불쾌한 표정이 다분히 나타나 있었다. 땀을 벌벌 흘리며 무얼 찾아 잡수러 오셨소 하는 표정이었다. 나무라는 듯이 계월이가 술을 따라서 부어 주는 것을 흥선은 받아 채어서 먹었다. 권주가도 쓸데없이, 목마른 듯이―
갑이 잔포한 웃음을 띄고 영어를 찾았다.
“영어!”
“오?”
“자네는 언제 흥선군 댁에 양 들었나?”
“예끼 망할…”
“효잘세, 효자야! 물려 먹을 것 많으리. 깨진 항아리, 떨어진 도포, 투전목―하하하하! 또 뭐 있을까?”
이 자기에게 대한 모멸적 비웃음을 아는 모르는지 도리어 흥선이 갑의 말의 뒤를 받았다.
“또 있지요. 영어는 무엇보다도 내 낡은…”
말을 계속하려는 흥선에게 영어가 손을 탁 내밀었다. 그 손을 피하여 흥선은 한 자리 뛰었다.
“하하하하, 내 낡은…”
“예익!”
영어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흥선을 잡으러 한 걸음 달려 갔다.
영어를 피하여 흥선은 일어서서 상 맞은편으로 뛰어갔다. 영어와 흥선은 상을 가운데 놓고 서로 으르고 있었다.
“내 낡은…”
“저런, 버릇 없이! 아비에게 향해서!”
“오자(吾子) 영어야!”
“오손(吾孫) 석파!”
마주 서서 서로 아들이라 손자라 어르는 틈에 갑이 또 끼어들었다.
“대감도 왜 하던 말을 채 못 하시오?”
“그래 낡은 무엇을?”
“내 낡은 후랄 두 쪽을 자기 자당께 드…”
말을 채 맺지를 못하였다. 영어가 상을 건너뛰었다. 그리고 그 커다란 몸집으로 흥선을 붙잡았다. 다음 순간은 흥선의 작다란 몸집은 영어의 양 다리 틈에 끼었다.
“자, 호부(呼父)허오, 호부해!”
“오자(吾子)!”
영어의 다리 틈에 끼인 흥선은 작은 소리로 응하였다.
“자, 호부 못 하겠소?”
영어의 다리 틈으로 겨우 좀 나온 흥선의 얼굴은 힘없게 영어의 다리에 끼웠기 때문에 검붉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냥 굴하지 않았다.
“오자 오손!”
“그냥?”
영어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영어가 다리에 힘을 줌에 따라서, 그 틈에 끼인 흥선의 입에서는 낑낑 하고 괴로운 소리가 났다.
“아이 답답해, 답답해!”
“호부하면 놔 주지.”
“아―버―님!”
흥선은 드디어 굴하였다.
“다시 한 번!”
“아버님!”
“그러면 그렇지!”
그러나 영어가 겨우 다리의 힘을 좀 늦추자, 거기서 뛰어 나온 흥선은 도망하여 계월이의 뒤로 피하였다. 그리고 계월이를 방패삼아 가지고 계월이에게 말하였다.
“자 계월아, 그래 누가 아비냐? 네가 판단을 해라.”
계월이의 얼굴에는 억지의 미소가 나타났다. 그리고 손을 들어서 흥선을 가리키며,
“대감이 아버님이시지요.”
“요년! 무얼?”
“아니올씨다. 오늘 일기가 좋다고 여쭈었습니다.”
한 토막의 희롱은 끝이 났다.
그 내막이 어떤 것을 모르는 흥선은, 농담이 끝난 뒤에 여전히 만족한 듯이 다시 상 앞에 와 앉았다. 그러나 영어는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흥선을 오는 참으로 망신시키려는 것을 자기가 가로 맡아 가지고, 아비라 아들이라 하여 슬며시 그 문제를 삭여 놓기는 하였다. 그러나 갑의 눈치로 보아서 어떤 망신을 흥선에게 줄 것은 분명하였다.
그것이 영어에게는 싫었다. 이 다음에 따로이 같이 흥선에게 망신을 준다는 것은 관여할 바가 아니로되 오늘 이 자리에서만은 망신을 주고 싶지 않았다.
“어, 고약한 년이로군!”
흥선과 희롱을 하기 때문에 구겨진 옷을 툭툭 털면서 영어도 도로 바로 앉았다. 상을 받고 술을 먹으려다가 영어 때문에 못 먹은 흥선은, 농이 끝나기가 바쁘게 다시 먹을 것에 달려들었다.
“나만 먹기 미안하외다 그려. 판서도 좀 드시지요. 오자는 안 먹겠소?”
혼자 상 앞에 마주 앉은 것이 미안스러운지 이런 말을 하였다. 흥선의 말마다 독한 대답으로 응하던 갑은 여기도 또 같이 응하였다.
“혼자 잡수시오. 대감 혼자서도 부족해 맞을 걸…”
“이걸 나 혼자야 어떻게 다 먹겠소.”
“뿐더러 대감 잡숫던 걸 누가 먹겠소?”
어성(語聲)은 예사롭지만 이 지독한 독설에 흥선은 들려던 젓가락을 멈추었다. 한 순간 눈과 귀가 움찔하였다. 그것을 폭발시킬지 삭여 버릴지 판단을 못 하는 모양이었다. 이 가운데를 영어가 뚫고 들어왔다.
“농을 한바탕 했더니 목이 마르군. 갑 판서 을 판서는 많이 잡수셨으니깐 우리 부자끼리 몇 잔씩 더 합시다.”
“참 영어는 효자야! 우리 가문의 행복일걸.”
갑에게 대하여 폭발하려던 노염을 감추어 버리면서 흥선은 영어에게 미소를 던졌다. 이 미소―흥선의 마음이 불쾌하든가 어색하든가 싱겁든가 할 때에는 반드시 나타나는 이 미소는, 흥선에게 있어서는 가장 좋은 호신장(護身裝)인 모양이었다.
“호부(呼父)한 뒤에 인제 말을 고치면 대감 자당을 욕하는 게 된다오. 그런 불효의 짓은 하지 마시오.”
“오자―오손―에이 아들로 승격을 시켜주어라.”
이리하여 영어는 흥선과 상에 마주 앉았다. 갑 판서는 그 뒤에도 기회 생길 때마다 흥선에게 망신을 주려고 독한 입을 놀리고 하였다.
그러나 웬만한 망신은 흥선의 망신으로 여기지 않았다. 신경이 없는 사람이 아닌 이 이상에는 반드시 찔릴 만한 독설을 퍼부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흥선은 이것을 알아들었는지 혹은 못 알아들었는지 거저 넘기고 하였다. 이러한 흥선으로서도 거저 넘기지 못할 최극단의 독설이 나올 때는 영어가 어름어름 넘겨 버려서 그 독설 이 직접 홍선에게 및지 않도록 하였다. 하루를 유쾌히 놀려던 이 답청은 흥선 때문에 이상한 기분으로 종시되었다.
저녁때가 거의 되면서, 하루 종일 수많던 일기가 차차 이상하여 가기 시작하였다. 저녁 하늘에 한 점 거멓게 생겨난 구름 덩이가, 갑자기 퍼지기 시작하다가 순식간에 하늘의 절반을 덮었다. 원뢰(遠雷)의 소리까지 한 두 번 났다. 이 불쾌한 답청을 어서 끝내려고 기회만 보고 있던 영어가, 이 일기의 급변을 보고 즉시로 귀가를 재촉하였다.
“어, 날씨가 갑자기 변한다. 한 소내기 오실 모양이군! 비 오시기 전에 어서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합시다.”
이리하여 저편 딴 데서 놀던 하인들을 불러서 일변 걷어 치우며 일변 교군의 준비를 하며 하였다. 이리하여 흥선과 갑 판서의 사이에 생겨나려던 불상사는 무사히 패스가 되려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인위로서 만들려는 불상사는 이 최후의 순간에 이르되 그만 폭발되고 말았다. 하인들이 남은 음식들을, 버릴 것은 버리고 그릇을 간수하며 하노라고 돌아갈 동안 흥선은 음식 치우는 그릇에서 한 조각의 포육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이 편에서 남녀의 준비를 기다리고 있던 갑 판서가 걸핏 그것을 보았다. 흥선을 망신을 시키려고 벼르기만 하면서 아직껏 진정한 망신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적이 불만하던 그의 눈에 이 꼴이 띄었는지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보는 순간 그는 그 편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하인을 불렀다.
“여봐라!”
하인이 대령하였다.
“깜박 잊었다. 그 남은 음식들을 모두 종이에 싸서 흥선 대감께 드려라. 내버려야 새 짐승의 살이나 할 것이나, 잘 싸서 대감께 드려라. 한동안 반찬은 되리라.”
그리고 흥선을 향하여 말을 계속 하였다.
“대감, 사양하지 마시고 가져가시오. 신발 삭이고 이런데 찾아 다니시기보다, 저것을 가져가면 한동안은 댁에서도 넉넉히 자시리다. 근처에 개 짐승이라도 보이면 주고 말겠건만, 불행히 그런 것은 보이지 않고, 내버리자니 대감이 아수해 하시겠고…”
포육 한 조각을 집어 씹고 던 흥선은, 획 갑 판서를 등지고 돌아서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뒷덜미가 들먹거리는 것으로 보아서, 떠오르는 격분을 누르려고 노력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상전의 부름에 등대는 하였지만, 하인도 이 너무도 심한 영은 그대로 거행할 수도 없는지 허리만 굽히고 그냥 서 있었다. 이런 불쾌한 장면을 조정함에는 다시 영어가 들어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갑 판서의 영 때문에 그릇을 치우던 하인들이 손을 멈추고 있는 것을 보고 영어는,
“금방 비가 쏟아지려는데 왜들 꿈질거리느냐?”
고 호령을 하였다. 그러나 이 영어의 말에 갑 판서는 다시 매달렸다.
“얼른 종이에 싸서 드리지 않고 왜들 꿈질거리고만 있느냐?”
그는 하인들에게 이렇게 호령하였다.
“여보게 갑 판서, 그것 뭘 그러나? 농담은 인제 그만 두게나.”
영어는 하릴없이 갑 판서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농담? 자네는 불효잘세 그려! 효성이 있으면 아버님 안주를 어떡허든 마련해 보려고 애쓸 터인데 생기는 안주까지 버리려는가?”
“예익 이 사람! 행차 준비 됐네. 어서 가기나 하세.”
“응, 가지. 자 썩 싸서 드려라. 한 점이라도 버렸다가는 용서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갑 판서가 발을 움직이려 할 때였다. 그 모양을 아니꼬운 듯이 보고 있던 계월이가 갑 판서에게 농담을 한 마디 던졌다.
“대감, 그게 그렇게 아까우세요?”
이 계월이의 말이 드디어 불집이 되었다. 발을 옮기려던 갑 판서는, 천천히 몸을 도로 계월이의 편으로 돌렸다. 오늘 흥선을 감싸는 태도를 보인 것부터 아니꼽게 여기던 터이라, 몸을 돌려서 계월이의 위에 부은 갑 판서의 눈자위는 놀랍게 충혈이 되었다.
“무어 어쩌구 어째?”
이것을 그냥 농담으로 여긴 계월이는 한 마디의 희롱을 더 던졌다.
“그렇게 아까우시면 소인이 대감 댁까지 가져다 드리리다.”
“요년! 너 그게 어디서 배운 버릇이냐? 기생년의 행실이 그러냐?”
“여보게 판서, 취했네. 가세 가.”
“가만 있게! 기생년이 양반에게…요년! 너 그게 어디서 배운 행실이냐?”
농담으로 알고 한 마디 던졌다가 막찔리운 계월이는 눈이 둥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둥그렇게 되었던 눈은 순간에 미소로 변하였다. 명기 현기라는 이름을 듣는 계월이의 혼은, 이 엉터리 트집 아래 머리를 든 모양이었다.
“대감, 소인이 대감께 그런 말씀을 드린 게 행실이 글렀다면 아무런 것을 해서라도 사죄를 하오리다. 그렇지만 대감께 거슬리는 말씀을 대감께서는 왜 다른 분께 하셨습니까? 대감께서…”
말을 맺지를 못하였다. 갑 판서의 억센 손이 계월이의 뺨으로 날아 온 것이다.
“요 망할 계집 같으니! 이놈들! 썩 싸서 흥선 대감께 드리지 못하겠느냐?”
계월이는 고꾸라졌다. 그의 코에는 피가 쏟아졌다. 이 갑 판서의 호령에 아직 주저하던 하인들은 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하인들은 남은 음식을 되는 대로 종이에 쌌다.
“이 사람, 점잖지 못하게 이게 뭐인가? 어서 가세! 행차 얼른 등대해라.”
무안하고 거북하여 영어는 어쩔 줄을 모르고 돌아갔다. 아까 몸을 등칠 뿐 흥선은 죽은 듯이 가만히 서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하든지 어떤 표정을 하였는지, 다만 그의 등만 약간 떨리고 있었다. 갑 판서의 엄명을 거역지 못하여 한 사람의 하인이 음식 싼 종이를 흥선에게 가지고 갔다. 그리고 그것을 받으라는 듯이 그의 소매 아래로 들이밀었다.
흥선의 몸이 비로소 움직였다. 천천히 하인의 편으로 돌아섰다.
“요놈!”
놀라운 음성이었다. 산천이 드르렁 울리었다. 작다란 몸집의 어디서 그런 우렁찬 소리가 나왔나? 이 너무도 우렁찬 소리에 영어는 눈을 흥선에게 던졌다.
그 때 흥선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 그것은 왕자(王者)나 고승(高僧)의 얼굴이고야 비로소 볼 수 있는 온화하고도 엄격하고 위엄성 있는 얼굴이었다. 영어가 흥선을 안 이래 삼십 년―아니 영어가 세상에 난 이래 처음 보는 위엄 있는 얼굴이었다. 영어는 그 얼굴에 위압되어 머리를 딴 데 돌리고 말았다. 갑 판서는 흥선의 호령에 얼굴을 흥선에게로 돌렸다. 돌렸던 얼굴을 황급히 다른 데로 구을리며 남녀로 향하여 발을 뗀 것은, 그도 이 위엄에 압도된 때문인 모양이었다.
영어, 갑 판서, 을 판서의 일행은 벽제 소리 요란히 구종별배를 달고 이 필운대를 떠났다. 계월이 외의 다른 기생들도 떠났다. 뒷설겆이를 하고 하인들도 돌아갔다. 그 뒤에 남은 것은 흥선과 계월과 좀 아랫쪽에 계월이의 교군군뿐이었다.
흥선은 묵연히 서 있었다. 그 곁에 계월이도 쫑그리고 잠자코 앉아 있었다.
하늘은 새까맣게되었다. 금시로 소나기가 쏟아질듯 하였다. 와르르 와르르 천둥소리가 연하여 났다. 하늘을 날던 새 새끼들도 이 무서운 날씨를 피하여 각기 제깃으로 전속력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이런 날씨의 변화도 모르는 듯이 흥선과 계월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댁으로 모시랍쇼?”
교군군이 보다 못하여 채근할 때에도 계월이는 모르는 듯이 가만히 있었다. 드디어 계월이가 먼저 머리를 들었다.
“대감!”
흥선은 대답지 않았다. 못 들은 듯이 그냥 있었다.
“대감!”
“…”
“대감!”
“어, 날씨 고약하군! 비가 곳 올 모양이군. 계월이 너 왜 어서 가지 않느냐?”
“대감!”
“자, 어서 가거라. 여봐라, 교군군. 어서 모셔라.”
아아. 이 공자는 벌써 그 모욕을 잊었나? 계월이로서도 아직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리거늘, 당자 흥선 대감은 벌써 잊었는가? 계월이가 너무도 억울하기 때문에, 눈물 머금은 눈을 쳐들고 흥선의 얼굴을 바라보매, 흥선의 얼굴에 아까 하인을 호령할 때에 나타났던 표정은 씻은 듯이 없어지고, 예사로운 얼굴로 자기를 쳐다보는 계월이를 마주 굽어 보았다.
그러나 계월이가 자세히 보매. 흥선의 얼굴에도 눈물 흘린 자취가 남아 있었다. 아까 묵연히 돌아서 있을 때에 남에게 감춘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 것이었다.
“대감, 내려가셔요.”
“먼저 가라. 나야 걸어갈 사람―비가 오실 터인데…”
우덕덕 커다란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것이 군호였다. 한 방울의 비를 앞잡이삼아 소나기는 드디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우덕덕 뚝덕 좌―좌! 한 방울로 시작된 비는 한 순간 뒤에는 무서운 소나기로 변하였다.
“아이구, 이 비! 대감 어서 가세요.”
“내 걱정은 말고 먼저 가거라. 비라도 좀 맞아야겠다.”
속이 너무 탄다는 뜻으로 계월이는 들었다. 이 소나기에, 기다리던 계월이의 교군군은 또 달려왔다. 그것을 기회 삼아서 계월이는 흥선에게는 특별히 인사도 하지 않고 사인교에 몸을 실었다.
소나기 가운데로 달음질쳐서 사라져 들어가는 계월이의 사인교를, 흥선은 퍼붓는 소나기를 맞으면서 그냥 묵연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려지도 않았다. 퍼붓는 소나기를 피하려지도 않았다.
흥선의 얼굴에서 줄줄 흘러서 땅으로 떨어지는 물―그것은 소나기뿐일까? 흥선의 비분의 눈물이 소나기에 감추어져서 함께 흐르는 것이 아닐까?
무서운 천둥 소리, 무서운 빗소리, 좔좔 골짜기를 흐르는 개울물 소리―이 가운데 흥선은 비를 겹다 하지 않고 죽은 듯이 서 있었다. 흥선이 겨우 그 곳서 발을 뗀 것은 계월이가 내려간 뒤에도 한참 지나서, 흥선의 초라한 옷은 속속들이 비에 젖어서 몸에 착 붙게 된 때였다.
필운대에서 내려오던 흥선은 도중에서 교군을 만났다. 계월이가 먼저 내려가서 흥선을 모시러 보낸 교군이었다. 비에 함빡 젖은 흥선은 계월이가 보낸 교군에 몸을 의탁하였다.
“대감! 자, 이 약주는 마음 놓고 잡수세요.”
계월이의 일가 친척 되는 집 아랫방이었다.
“어느 술은 마음 안 놓고 먹는다디?”
“대감 분하시지 않으서요?”
“흥! 그래야 난 손해 본 게 없다.”
계월이는 눈을 들었다. 원망스러운 눈찌로 흥선을 쳐다보았다. 아아! 이 공자는 왜 이다지도 속이 없나?
“대감!”
“그래서?”
“외람하다고 책망하시지 마세요.”
“무얼?”
“대감께서 놀고 싶으신 생각이 계신 때는 반드시 이 계월이를 찾아 주세요. 아예 다른 대감 댁에는 가시지 마세요. 이전에도 그만치 말씀드렸는데 왜 또 가셨습니까?”
“야, 나보고 기부(妓夫) 노릇을 하란 말이로구나? 반가운 소식일세! 그럼 오늘부터라도 잘 벌어다 먹여 주게.”
계월이는 눈을 감았다. 성나고 싶은 감정 때문에 눈을 떴다는 곱지 못한 눈찌가 나타날지도 모르겠으므로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대감!”
“불러 계시오?”
계월이는 눈을 천천히 떴다. 윤기 많은 커다란 눈을 정면으로 들어서 흥선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보는 동안 계월이의 광채 많은 눈에는 눈물이 한 껍질 씌어졌다.
“대감! 대감은 분해하실 줄은 모르십니까? 계월이는 분하외다. 특별히 계월이에게 관계되는 일은 아니지만 계월이는 분하외다. 왜 대감은 분해하실 줄도 모르십니까?”
흥선도 마주 계월을 굽어 보았다. 흥선의 눈에도 적적한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 적적한 표정에 어울리는 적적한 말도 나올 듯하였다. 그러나 즉시로 그것을 도로 삼켜 버렸다.
“뭐이 분하단 말이냐? 계집들이란 별별 일을 다 분하다더라. 양반이 양반 자세하는데, 나 같은 상놈이야 수모받았지 할 수 있나?”
상놈? 너무도 심한 자가비하(自家卑下)였다. 수년 전 이(사도세자의 증손되는) 흥선의 집안과 (사도세자의 신하되는) 홍국영의 후손과 혼인을 맺게 되었을 때, 홍씨 측에서 도리어 혼인을 꺼릴 만큼 영락된 흥선의 집안인지라, 이 한 마디는 과연 눈물겨운 자가비하였다.
“네, 상놈 대감! 이 양반 기생이 드리는 약주, 마음에 안 드시겠지만 한 잔 받아 주세요.”
“자, 기부 노릇을 할까? 네가 잘 벌지를 못하면 나는 내 재간껏 또 서투른 난촛장이나 그려서 팔지. 살 만한 고객이나 좀 지금부터 물색해 두어라.”
흥선은 잔을 받아서 마셨다.
“음! 여편네가 벌어다 주는 걸 먹으려니까 잘 목구멍을 넘지 않는다.”
“안주도 드세요.”
“들랄 것 없이 먹여 주려무나.”
흥선은 입을 쩍 벌렸다. 계월이가 젓가락으로 집어 주는 안주를, 혀를 기다랗게 뽑아서 받아 먹는 흥선―계월이는 마땅치 않은 듯한 표정으로 흥선에게 안주를 집어 주었다.
“어, 맛나군! 기부 노릇도 할 만한데!”
마치 아까 필운대에서 받은 수모를 계월이에게 갚으려는 듯이 하하하하! 웃어 가면서 흥선은 계월이의 비위에 그슬리게 굴었다.
그러나 계월이는 쓰다 하지 않고 흥선의 비웃음을 정면으로 받았다. 일찍이 마음을 바친 이 공자―한 때 불만한 젖이 있다고 박차 버릴 만큼 부박한 계월이가 아니었다. 흥선은 이 계집의 진신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조소적 태도를 고치지 않았다.
봄날의 새 움을 북돋아 주기 위하여 한바탕 내린 소나기는 어느덧 개었다. 추녀 끝에서 똑똑 때때로 떨어지는 낙수 소리가 지나간 소나기를 추억할 따름이었다. 낙수 소리에 한참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계월이가 적적한 소리로 흥선을 찾았다.
“대감!”
“그래서?”
계월이의 진실한 부름을 흥선은 여전히 농담으로 대하는 것이었다.
“옛날 한신(韓信)이가요!”
“그래서?”
“상놈의 샅으로 기어 들어갈 때 어땠을까요?”
“냄세났겠지.”
“대감!”
계월이는 못마땅한 듯이 흥선을 우러러보았다. 우러러보다가 갑자기 그의 상반신을 흥선의 무릎 위에 던졌다.
“대감! 왜 분해하실 줄 모르세요? 왜 모르세요?”
몸을 흥선의 무릎에 던진 계월이는 몸부림하듯 그의 두 어깨를 흔들면서 비비어 대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그의 눈에서 쏟아졌다.
“허! 기생이 울 때는 기부는 어떻게 위로해야 되나?”
“대감! 대감은 속도 다 썩으셨구료? 우리 같은 천비도 참기 힘든 수모를 어떻게 참으서요? 분하외다. 분해요.”
“허! 왜 갑자기 이 지랄인가? 의원 불러야겠네.”
그러나 입으로는 농담을 하는 흥선이었지만, 이 고마운 동정이 그의 마음에 찔리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왜 이러느냐고 농담으로 넘기려는 그의 눈에도 그득히 눈물이 괴었다. 남에게 몰래 흘려 본 눈물은 적지 않았지만, 남의 보는 앞에서는 철이 든 이래로 처음 내어 본 눈물이었다. 입으로는 농담, 눈에는 눈물―이런 가운데서 흥선은 손을 고요히 들어서 계월이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렸다.
“계월아!”
“?”
“한 신이도 잠자코 더러운 데로 기어 나갔느니라.”
계월이는 머리를 들었다. 눈물 괸 눈으로 흥선을 쳐다보았다. 그 계월이의 눈을 받으면서 흥선은 오른손을 들어서 무릎을 한 번 툭 치며 그가 즐겨서 부르는 시조 한 마디를 읊기 시작하였다.
“이러한들 어이하리, 저러한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년까지 하리라.”
옛날 그의 조상 태종 대왕이 고려의 충신 정 몽주의 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부른 시조―그리고 또한 가슴이 울울하고 불평할 때마다 흥선이 자기를 위로하기 위하여 부르는 시조였다.
“야! 가야금이나 내어 오너라. 울울하다.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져도 할 수 없지. 되는 대로 내버려 두고, 우리는 한송정 소나무로 배나 무어 가지고 한강에 띄워 놓고 술이나 먹자. 계월이는 붓고 석파는 먹고―이렇게 한 백 년 살자꾸나. 하늘이 주시지 않는 복을 따려도 따질 것도 아니고, 따지지 않는 것을 따려는 것은 헛수고나 하는 것이고―자, 너도 한 잔 받아라. 그리고 가야금을 내어 오너라. 먹고 놀고 놀고 먹고. 한 백 년을 이렇게 지내면 그 이상 팔자가 어디 있느냐?”
흥선은 적적한 미소를 띄어 한숨을 내어 쉬면서 이렇게 술회하였다.
비 갠 봄 하늘에는 커다랗고 부연 달이 솟아올랐다. 문을 방싯이 열고 그 달을 우러러볼 때에 흥선의 눈물 괴었던 눈에는 또 다시 새로운 눈물이 나오려 하였다.
하늘을 나는 밤새의 기괴한 소리가 몇 마디 봄 하늘에 퍼져 나갔다.
“적적한 밤이로다.”
흥선은 혼잣말을 하였다. 사람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봄밤―
가야금을 가운데 놓고 흥선과 계월이는 우두커니 마주앉아 있었다. 흥선은 안석에 가댄 채로 팔을 기다랗게 뻗어서 둥둥 두어 번 가야금의 줄을 튀겨 보았다. 그러나 곡조도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둥둥 두어 번 의미 없는 소리가 나므로 계월이는 힐끗 흥선을 보았다. 그러나 곧 도로 눈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고요하고 정숙하고 쓸쓸한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흥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야 계월아!”
“네?”
“너는 불러라, 나는 뜯으마.”
계월이도 비로소 머리를 들었다.
“무얼 부르리까?”
“탁문군의 상부련(想夫憐)―”
“네, 그럼 부르리다. 뜯어 주세요.”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의 입에서는 애음 끊어지는 듯한 '상부련' 한 곡조가 울려 나왔다.
흥선은 계월이의 노래를 따라서 가야금을 뜯었다. 혹은 성낸 물결과 같이 우렁차게―혹은 수풀의 벌레 소리와 같이 끊어지는 듯―가야금에 얼리어서 높고 낮은 음파는 부드러운 밤 공기를 헤치고 멀리까지 울리어 나갔다. 길을 가던 사람이며 밤 잠을 들지 못하여 혼자서 전전하던 젊은 과부들은, 이 너무도 절실한 음파에 모두 정신을 가다듬고 귀를 기울였으리라. 한 곡조 끝이 났다. 그것이 끝이 나기가 무섭게 흥선은 계월이에게,
“또 불러라! 또 뜯으마.”
하였다.
“이번은 무엇을 부르리까?”
“네 장기대로, 네 마음대로 아무것이나―”
계월이는 다시 불렀다. 흥선은 다시 뜯었다.
그뇌스러운 봄밤을 계월이는 부르고 흥선은 뜯어서 새웠다. 한 마디가 끝나면 다시 새로운 것―그것이 끝나면 또 다른 것―이리하여 동리의 젊은 과부로 하여금 한 잠도 못 자게 흥선과 계월이는 꼬박 밤을 세웠다.
자기네들의 온 정열을 부은 노래, 자기네들의 온 불평을 담은 노래, 자기네들의 온 희망을 실은 노래―이 절절한 노래는 동리의 젊은 과부뿐 아니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뉘 집에서 누가 불렀으며 누가 뜯었는지, 동리로 물으러 다닐 만큼 진실미를 띤 것이었다. 마음에 적지 않은 불평을 가지고 그 불평을 하소연할 곳이 없는 두 사람은 하루의 고뇌스러운 봄밤을 이리하여 너는 부르고 나는 뜯어서 세웠다.
“대감!”
“왜?”
“대감께 꽃 필 날이 언제 이르리까?”
“모른다. 고요히 기다려 볼 뿐이로다. 기다릴 줄을 아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라고 옛날 성현이 가르쳤느니라.”
엄숙한 구조로 이렇게 말하는 흥선을 계월이는 고뇌와 환희로 찬 마음으로 우러러보고 하였다. 거리의 술망나니, 주착 없는 치인의 일컬음을 듣는 흥선의 그런 양자는 씻은 듯이 없어지고, 당당한 왕실 공자다운 고아(高雅)하고도 경건할 이 밤의 모양에, 계월이는 자기의 눈이 결코 사람을 그릇 보지 않았음을 기뻐하였다.
동녘 하늘에 새벽 놀이 비치고, 참새들이 추녀 끝에 와서 노래를 할 때에야, 흥선과 계월이는 피곤한 몸을 금침 속으로―
봄날 새벽에 꾸는 계월이의 꿈은 매우 즐거운 것이었다.
한양부의 남쪽을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 하류변(漢江下流邊)―
강 이쪽이며 건너쪽이며 할 것 없이, 서너 사람 대여섯 사람씩 몰려 서서, 무엇을 기다리는 듯이 강 상류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안 오지?”
“벌써 오겠나?”
근처의 어부, 농군, 촌부 할 것 없이, 남녀 노소가 한 떼 한 떼씩 몰려 서서 공론들을 하고 있다.
“백 섬이라던가?”
“아니 오십 섬이라나보데.”
“오십 섬은? 스무 섬이야.”
“스무 섬만 치더라도 우리 집안이 이 년은 남아 먹을 걸세 그려! 돈도 흔한 사람들도 있지―”
“흔하지 않겠나? 매일 시골 생원들이 갖다가 바치는 것만 해두 수천 냥씩 된다네.”
“쉬! 허투루 못할 소릴세.”
말하던 사람, 금지당한 사람, 모두가 경계하는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봄날 맑은 한강 물은 이런 상놈들의 평판을 담아 가지고 넘실넘실 아래로 흘러 내려간다.
나주 합하 양씨(羅州閤下梁氏)의 시반일(施飯日)이었다.
옛날 명종조(明宗朝)에, 대신 윤 원형(尹元衡)에게 난정(蘭貞)이라 하는 첩이 있었다. 간사하고 악착한 계집으로서, 뇌물을 즐기고 음사를 즐기는 인물이었다. 그 난정이 일 년에도 두세 번씩, 밥을 여러 섬씩 지어서 실어 가지고 두모포(豆毛浦) 등지에 가서 강에 밥을 던졌다. 물고기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었다.
명종 시대의 윤 원형의 첩과 같은 길을 걷는 하옥 김좌근의 첩 양씨도, 밥을 이십 섬어치를 지어 가지고는 오늘 한강에 던져서 고기들에게 은혜를 베풀려고 떠나는 것이었다.
스무 섬이면 자기네 집안에서는 이 년을 먹고도 남겠다고 불평을 말하던 젊은이가, 이번에는 무슨 중대한 보고나 하는 듯이 함께 이야기하던(농군인 듯한) 친구에게 입을 가까이 대고 소근거렸다.
“아랫마을 차손이네 알지?”
“이 서방네 작은아들 말이지?”
“그래!”
“…”
“그 사람이 어쨌단 말인가?”
“알다시피 그 집에서는 작년 홍수에 농사를 통 망치고 사실 이즈음은 삼순구식하는 형편이 아닌가? 오늘 나온다네.”
“나오다니?”
“그…”
입을 더욱 귀에 가까이 대었다.
“물 속에 숨바꼭질해서 고기 밥을 건져 가겠다고 벼르데. 필시 나올걸!”
농부인 듯한 사람은 눈을 약간 크게 하고 친구를 돌아보았다.
“정말인가?”
“그럼!”
“흥!”
잠시 두 사람은 말을 끊었다. 농부인 듯한 사람이 한숨을 쉬었다.
“웃마을에도 삼순구식하는 사람…”
“거진이지!”
“도둑놈들!”
또 말이 끊어졌다.
좀 뒤에 어부인 듯한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은 나도 갈까 하네.”
“무얼?”
“한 치룽만 건진다 해도 얼만가? 사흘 고기잡이 해서 그걸 벌겠나?”
“고기밥 뺏어 먹는 셈일세 그려!”
“고기 잡아 먹고 고기밥 뺏어 먹고…용궁에서 알았다가는 그냥 안 둘 걸세.”
어부인 듯한 사람은 적적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하긴 김 대감 댁 밥을 이런 때 아니면 구경이나 하겠나? 많이 건져 오게.”
“암! 많이 건져 오다마다. 여보게, 창피한 말이지만 나는 오늘 조반도 아직 못 먹었네. 집에서는 어제 저녁도 변변히 못 먹었네. 그것 건지지 못하면 내일도 굶는 수밖에 없네.”
“고기 팔자만도 못 할세 그려!”
“도둑놈들!”
양씨의 시반선(施飯船)―
맨 앞에는 악공(樂工)들을 만재한 배였다.
둘째로는 이십 섬의 밥과 무당 그 밖의 하인들이 탄 배였다.
세째로는 오늘의 주인 양씨와 가까운 친척들과 하인들이 탄 배였다.
맨 뒤의 것은 드나드는 아랫사람이며 영인 잡배며 하인들을 실은 배였다.
오정쯤 되어서 이 호화로운 일행은 밥을 고기에게 던져 주려고 운파 오 리의 길을 떠났다. 출발하는 근처 좌우편 언덕에는, 이 장관을 구경하러 모여든 무리들 때문에 입추의 여지도 없었다.
삼현 육각의 부드러운 소리를 선두삼아 가지고, 구름같이 모여든 구경군들의 탄성, 욕설, 비웃음, 칭찬―가지각색의 비평을 뒤에 남기고, 네 척의 배는 무당의 공수를 기다랗게 물 위에 퍼치면서 둥실둥실 떠 나갔다.
그 배들이 언덕에서 떠나기만 기다리고 있던 이 근처의 많은 아이들이 와르르 하니 몰려들었다. 이십 섬의 밥을 강 언덕에서 지었는지라 눌은밥이며 부스럭밥이 그 근처에 꽤 많이 흐르고 널렸다. 이 근처의 가난한 여인이며 아이들은 그것을 주워 가려 모여들었다. 거기서 지키는 하인들의 욕설이며 매며를 무릅쓰고, 꿀에 모여 드는 개미떼같이, 이 굶주린 무리들은 요리조리 피하면서 밥 부스러기를 주우러 모여들었다. 그리고 제각기 많이 줍기를 경쟁하였다.
언덕을 떠난 자선선(慈善船) 네 척은 특별히 바쁜 길이 아닌지라, 그다지 젓지도 않고 물의 흐름을 따라서 고요히 고요히 아래로 흘러 내려갔다. 세째 배에 탄 오늘의 주인 양씨가 보아 가다가 몸하인에게 명하면, 몸하인은 즉시로 다른 하인에게로 전하고, 그 하인은 앞의 시반선으로 전하여 앞 배에 탄 복술이 축원을 드리고 그 다음에는 밥을 한 함지박씩 떠서 물에 던지고 하는 것이었다.
이 날의 주인 양씨의 얼굴에는 득의의 표정이 흐르고 넘쳐 있었다. 대단히 엄숙한 얼굴로 좌우 언덕에 있는 구경군들을 살펴보다가는, 생각난 듯이 몸종에게 시반을 명하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물결을 날리며 밥이 물에 떨어져서 잠겨 들어갈 때마다 몸소 일어서서, 마치 그 밥이 물 속에 잠겨서 고기들이 맛있게 먹는 양이 보이는 듯이 만족한 얼굴로 물 속에 가라앉는 밥을 굽어 보고 하였다.
내려가다가 뱃사공이 어떻게 실수를 하여 노(櫓)로라도 철썩하는 소리를 내면, 양씨는 안색까지 변하며 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기들 놀라리라. 가만가만 저으라고 그래라.”
이 동정심 많은 여왕은 몸종을 시켜서 사공을 꾸짖는 것이었다.
소리가 안 나게―배가 흔들리지 않게―그리고도 또한 배가 물결대로 마음대로 흐르지 않게 강의 중심을 내려가도록―이 힘드는 역할을 맡은 사공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배를 조종하였다. 실수를 하여 물 한 방울이라도 이 귀인들의 몸에 뛰었다가는 제 몸에 좋지 못한 일이 생길 줄을 잘 아는 사공은, 배에서 연하여 물로 던지는 허연 밥을 슬금슬금 곁눈으로 보면서 배를 젓지 않는 듯이 젓느라고 노력하였다. 이리하여 이 풍악과 열락이 자지러진 자선선(慈善船) 일행은 기름같이 잔잔한 한강을 아래로 아래로 흘러 내려갔다. 이십 섬의 밥을 처치해 버리기 위하여―
좌우 언덕의 굶주린 촌민들은 이 위대한 사업을 경이의 눈으로 서로 수군거리며 구경하였다. '아랫마을'이 서방의 작은아들 차손이는 스물 한 살 난 총각이었다.
나주 합하 양씨가 오늘 행하는 자선 사업에 뛰어 들어서 밥을 좀 도둑질해 내려는 더러운 생각을 품고, 그는 강 언덕 갈밭 틈에서 자선선이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차손이가 벌어 오는 밥을 받아 가려고 그의 늙은 어머니가 광주를 가지고 함께 갈밭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강변에서 생장한 차손이는 헤엄치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한강을 너덧 번은 넉넉히 왕래하며, 물 속을 숨바꼭질을 하여서라도 한 번쯤은 넉넉히 건너가는 것이었다.
“너 조반도 변변히 못 먹고 괜찮겠니?”
“걱정 마세요.”
“기운이 부족했다는…”
“도로 헤엄쳐 나오지요. 걱정 마세요.”
물에는 자신을 가지고 있는 차손이는 걱정하는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풍악 소리가 차차 가까워 왔다. 시반선 일행은 그들 모자가 숨어 있는 갈밭 앞 강을 천천히(일변 밥을 던지며) 흘러 내려갔다.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요.”
어머니에게 한 마디 당부한 뒤에, 차손이는 용감스러이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와스스, 스! 귀에 울리는 놀라운 물 소리를 들으면서 차손이는 강의 중심을 향하여 물 속을 헤엄쳐 나갔다. 아들을 물 가운데로 내보낸 늙은 어머니는, 이 전대 미문의 기괴한 모험을 감행하는 아들의 신상이 근심스럽기가 짝이 없어서, 거의 사색이 되어서 강의 사면을 두룩거리며 살필 때에 (그것은 이 노파에게 있어서는 무한히 긴 세월과 같았다) 아까 차손이가 물 속으로 사라진 자리에서 좀 하류쯤 되는 곳에, 물결이 잠시 괴상히 움직이다가 그 물 면으로 사람의 머리가 쑥 나왔다.
그러나 물 면에 얼굴은 내밀었지만, 차손이는 잠시도 움직이지를 못하였다. 얼굴이 백짓장같이 하얗게 된 그는 코를 찢어지도록 벌리고 씨근거리며 한참 숨을 돌리고 있었다.
한참 거기서 숨을 돌려 가지고 어머니 앞에 돌아온 때는, 차손이의 옆에는 물이 뚝뚝 흐르는 밥을 절반만큼 담은 자루가 끼어 있었다.
“후!”
아직 창백한 얼굴로 밥자루를 놓을 때에, 늙은 어머니는 귀여운 손자나 보는 듯이 자루를 채었다.
“핸 자루 못 되는구나!”
“더 넣을래두 숨이 막혀서 그만 왔어요. 또 한 번 가서 담아 오지.”
어머니는 자루를 열었다. 그리고 물에 젖은 밥을 광주리에 쏟았다.
“자, 자루 얼른 주세요. 또 한 자루 담아 오게!”
일변 밥을 한 덩이 입에 집어 넣으며 어머니가 쏟는 자루를 잡아 채었다.
차손이가 채는 자루를 어머니는 도로 뺏었다. 그리고 자루를 뒤집어서 한 알 한 알 붙은 것까지 털어서 광주리에 떨어뜨렸다.
“얼른 주세요.”
“가만, 아직 한 줌이나 붙어 있다.”
물에 던진 것을 주워 온 것이지만, 이 노파에게 있어서는 한 알 두 알이 아까운 모양이었다.
“한 자루만 더 얻어 오면 닷새는 걱정 없이 먹겠다.”
“이번에는 한 자루 가득 담아 오지요.”
차손이는 밥을 한 줌 또 쥐어 먹었다. 그리고 다시 물로 향하였다.
“좀더 내려가서 기다려 주세요. 지금 세째 배가 지나가는 그만치 가서 기다려 주세요.”
이러한 말을 남기고 이 총각은 다시 한 자루 얻어 오려 두 번째 물 속에 뛰쳐 들어갔다. 차손이는 물 속을 꿰어서 시반선 아래까지 이르렀다. 그 때 방금 시반선에서는 또 한 광주리의 밥을 물로 던진 때였다. 어른어른 차손이는 눈 앞으로는 허연 밥덩어리가 물 바닥을 향하여 헤엄치며 내려갔다.
차손이는 거기서 숨을 내쉬었다. 꿀럭꿀럭 한 뭉기의 기포가 물 면을 향하여 올라갔다. 그것을 보면서 차손이는 몸을 뒤채어 물 바닥을 향하여 거꾸로 내려갔다. 그의 눈 앞에는 아직도 자리를 못 잡고 흐느적거리는 크고 작은 밥 덩이들이 물을 통하여 부옇게 보였다. 차손이는 자루의 입을 벌렸다. 그리고 연하의 몸이 떠오르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왼편 밥을 물 바닥에 있는 바위 틈에 꽂아 놓고 밥 덩이들을 자루를 향하여 몰아 넣었다. 그 근처에 흐느적거리는 덩어리 밥은 모두 자루로 몰아 넣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불행히 헤어진 밥이 많기 때문에 자루의 삼분의 일도 되지 못하였다.
겨우 차차 숨이 답답함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자루가 너무도 곯았으므로 얼른 새 밥을 좀더 담아 가지고 돌아가려고, 차손이는 곯은 자루를 옆에 끼고 한번 발버둥이쳐서 하류로 물 속을 꿰어 내려갔다. 눈을 감고 하류를 향하여 물 속을 헤엄쳐 내려가던 차손이는, 무슨 기괴한 물건이 자기의 양 다리를 꽉 붙잡는 것을 알았다. 온 몸에 소름이 쭉 끼치며 보매, 부연 물을 통하여 벌거숭이 송장(?) 하나가 그의 다리를 잡은 것이었다.
차손이는 거의 공포와 경악 때문에 심장의 고동까지 멎을 듯하였다. 두 다리를 힘있게 버둥거리면 버둥거리느니만큼, 그 괴물은 더욱 힘있게 차손이의 다리를 잡고 붙안는다. 그 괴물은 차손이의 다리로 비롯하여 차차 차차 몸을 끄을어 당겼다. 그리하여 그것에게 붙안겨서 차손이는 공포의 눈을 겨우 들면서 마주 보매, 그것은 송장도 아니요 괴물도 아니요, 웃마을 사는 최 서방이었다. 역시 시반을 훔치러 물 속에 기어든 최 서방은, 불행히 발을 바위 틈에 끼우고 뽑지를 못하여 안달하다가, 자기 곁으로 빠져 내려가는 총각을 붙든 것이었다.
차손이도 그것이 최 서방인 줄 알고 최 서방의 하반신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 의의를 짐작하였다. 그래서 최 서방의 몸을 마주 쓸어안고 발로써 물 바닥을 힘껏 버티었다. 그러나 최 서방은 발을 어떻게 끼었는지 옴짝하지를 않았다. 이제는 차손이는 숨이 답답하여 왔다. 힘껏 최 서방을 안고 땅을 버티어 보았으나, 빠지지는 않고 숨은 답답하고 하여, 자기 혼자라도 피해 가려고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 최 서방은 죽을 힘을 다해서 차손이를 끌어안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물 속에서 두 개의 벌거숭이 동물은 서로 비비여 대며 다투었다. 그러나 최 서방까지 구하면 여니와, 차손이 단독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가 없도록 최 서방은 차손이를 안고 있었다. 이제는 차손이도 숨을 더 돌릴 수가 없었다. 꿀럭꿀럭 차손이의 입에서 기포가 또 물면을 향하여 떠올랐다. 차손이가 답답한 가슴을 펼 때에 그의 폐와 위로는 다량의 물이 들어갔다.
이 때였다. 아직껏 힘없이 차손이의 허리를 쓸어 안고 있던 최 서방의 팔 힘이 좀 풀리는 듯하였다. 그래서 차손이가 몸을 빼어 낼 때에는 아직껏 그렇게 힘써도 단단히 박혀 있던 최 서방의 발도 저절로 바위 틈에서 빠져 나왔다. 차손이는 한편 팔로 최 서방을 안은 채, 단 발로 물바닥을 힘있게 찾다. 두 개의 벌거숭이는 시반선 일행이 방금 지나간 물면을 향하여 떠올랐다. 물 면을 향하여 떠오른 두 개의 벌거숭이는, 양씨의 하인들이 탄 배에 발견되어 구조되었다. 아니, 구조되었다기보다 잡혔다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었다. 오늘의 신성하고 엄숙한 놀이를 더럽힌 고얀 놈으로서두 벌거숭이는 하인들의 배에 끌려 올라간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때는 벌써 가련히도 최 서방은 물을 많이 먹었기 때문에 저세상으로 마지막 길을 떠나고, 차손이도 아직 채 죽지만 않았지, 물을 많이 먹고 정신을 잃은 때였다. 최 서방의 시체와 차손이를 건져 올린 하인들은 시반선 일행을 떠나서 급급히 언덕으로 갖다 대었다. 그리고 거기다가 송장과 반송장을 내려 놓고, 사내 하인 셋이 내려서 지키기로 하고, 배는 그내로 일행에게로 따라갔다. 거기서 내린 하인들은 최 서방의 시체를 먼저 흔들어 보았지만, 물을 잔뜩 먹었기 때문에 배가 남산같이 된 최 서방은, 이제는 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완전히 떠난 것이었다.
모퉁이 모퉁이에서 오늘의 위대한 놀이를 구경하고 있던 근방 사람들도 모여들었다. 양반 댁 하인의 호령으로 근방 사람들이 차손이를 거꾸로 달고 두드리고 한 결과, 차손이는 많은 물을 토하고 겨우 회생되었다.
“지독한 도둑놈!”
물 면에 떠오르면서 기절할 때까지 차손이는 자루를 그냥 끼고 있었으므로 차손이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하인들은 알았다. 차손이가 깨어나기가 무섭게 하인들은 차손이를 발길로 차면서 지독한 도둑놈이라 욕하였다.
이튿날은 나합의 엄명을 들을 하옥 대신의 영으로 이 '지독한 도둑놈'을 포청에 내렸다. 뿐만 아니라, 차손이의 늙은 부모와 형과 형수―그의 온 집안까지 잡혀서 옥에 갇히게 되었다. 나주 합하의 노염은 여간 크지 않았다. 엄숙한 놀이를 깨뜨린 데 대한 분함, 자기의 신성한 눈으로 벌거벗은 상놈의 시체를 본 데 대한 분함, 자기의 겸인이며 하인들의 배에 잠시나마 송장을 태웠던 데 대한 분함, 엄숙한 시반을 도둑질해 낸 행사에 대한 분함―이런 모든 일 때문에 합하의 노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래서 이 하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상놈과 그의 일족을 당장에 박살을 하라고 하옥에게 엄명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나주 합하의 충복인 하옥일지라도 이 '지독한 도둑놈'과 그 일족을 박살까지는 할 만한 죄목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몇 번을 절충하고 타협한 결과로서, 이 중대 범인을 주범은 태형 백 개, 일족들은 오십 개씩을 때려서 내쫓기로 하였다.
양씨는 매우 불만족하였지만 드디어 하릴없이 여기 승복하였다.
이리하여 이 차손이는 시반을 도둑질하려던 죄로 엉덩이 뼈가 부러지도록 매를 맞고, 그의 가족은 그 밥을 바란 죄로 오십 개씩의 태형을 받고, 그 위에 자기네 조상 이래로 살아 내려오던 그 동리에서까지 쫓겨나게 되었다.
또한 최 서방은 도둑질도 채 하지 못하고 용왕의 노염을 사서 직접 피해자 양씨가 벌하기 전에 용왕께 극형의 벌을 받은 것이었다.
천벌을 받기는 받았지만도, 그런 고약한 놈들이 어디 있어. 대체 밥을 도둑질한댔자 몇십냥 몇백 냥어칠 도둑질해 내겠다고, 천벌도 모르고 그런 무서운 짓을 한담.”
양씨는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이렇게 술회하고 하였다. 이 술회를 듣는 사람은 모두 머리를 조으며 천벌의 무서움을 탄식하였다.
“대감마님, 살려 줍시오! 갑자기 동리를 떠나면 어디가서 붙어 살겠습니까?”
뜰에 꿇어 앉아서 애원을 하는 것은 '지독한 도둑놈'이 차손의 늙은 아버지 이 서방이었다. 이 서방의 곁에 손을 읍하고 서서 이 서방의 애원할 때마다 허리를 굽실거려서 맞장구를 치는 것은 흥선댁 하인 누구였다. 대청에 긴 담뱃대를 물고 앉아서 이 애소를 듣고 있는 것은 무력한 공자 흥선이었다.
나주 합하의 엄명으로 동리를 쫓겨나게 된 이 서방의 일가는, 너무 딱하여 생각다 생각다 못 해서 그들이 가진 다만 한 가지의 방책을 써 보기로 한 것이었다. 즉 그들의 먼 일가가 흥선 댁에 하인으로 있는 것을 결련하여 흥선군에게 애소를 해서 피해 보려는 것이었다.
흥선의 무력을 그들도 모름은 아니었다. 그러나 짚이라도 붙들려는 물에 빠진 사람의 심정으로, 흥선에게라도 한 번 매달려 보려 함이었다. 이 이 서방의 애소를 흥선은 다분의 곤혹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종실의 한 사람으로서 흥선은 무론 하옥의 집도 자주 찾아 다녔다. 얼마만큼 호인적 기품을 가지고 있는 하옥은, 젊은 재상들같이 노골적으로 흥선을 모멸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의 이 일은 하옥의 일존뿐으로 좌우될 성질의 사건이 아니었다. 하옥의 뒤에 숨은 양씨의 마음으로라야 결정이 될 것이지, 하옥은 그 처결권을 가지고 있지를 못한 것이다. 영의정 하옥이로되 영의정의 지배자가 또 그 뒤에 있는 이상에는 영의정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 먹을 게 없어서 고기 밥을 도적해 먹는담?”
흥선은 담배를 떨어 버리면서 이렇게 을러 보았다.
“황송하옵니다.”
그래도 자기를 사람이라고 찾아와서 이런 부탁을 하는 이 서방을 볼 때에 사실 가엷었다. 그리고 거기 따라서 자기의 입장이 더욱 괴로웠다.
걱정 말아라, 무사히 만들어 주마―이렇게 안심시키고 싶은 생각은 얼마나 많았으랴? 일개 시골 기생―아무리 지금은 당당한 영의정 김좌근의 총애를 받는다 할지라도, 역시 소실에 지나지 못하는 양씨의 세력이 너무도 큰 데 대한 미움도, 새삼스러이 흥선 마음을 더 아프게 하였다.
'奪民之食 施江魚 奪此與彼之禍 不亦甚於 鳥鳶?蟻 之問乎'
백성의 밥을 빼앗아 강 물고기에게 주니
이쪽을 빼앗아 저쪽에 주는 재앙(禍)이
또한 까마귀(나) 솔개(가) 개미(를 잡아먹는)사이 보다 심하지 않은가?
옛날 윤원형의 첩 난정(蘭貞)의 일에 대하여 사가(史家)가 욕한 그것과 꼭 같은 양씨의 일을 정면으로 비평할 수조차 없는 자기는 무력한 공자였다.
이 서방은 연하여 땅에 머리를 조으며 애원하였다. 흥선은 연하여 긴 한숨만 쉬고 있었다. 이렇게 한나절을 무위히 앉아 있다가, 흥선은 벌떡 일어나서 침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런 뒤에 청지기를 불러서,
“이 서방이란 놈을 끌어다가 문 밖에 내쳐라.”
고 호령을 하였다.
그러나 이 서방이 하인들에게 끌리어서 나갈 때에, 흥선은 문을 방싯이 열고 초연히 끌리어 가는 이 서방의 뒷모양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 서방을 그냥 내쫓은 흥선의 마음은, 쫓겨나가는 이 서방의 마음보도다 더욱 아팠다.
“음!”
―태조 강헌황제폐하(太祖康獻皇帝陛下)! 당신은 당신의 후손이 지금 이렇듯 가슴 찢어지는 듯한 일을 겪고 있는 것을 아시나이까? 찢어지는 듯하옵니다. 이 당신의 피를 물려받은 가슴이…
흥선은 눈을 깜박일 줄도 잊은 듯 묵연히 앉아 있었다.
헌종이 승하한 것은 기유년(己酉年) 유월(십 이 년 전―흥선의 나이 한창 장년인 서른을 겨우 넘은 때)이었다. 한아버님 순조의 뒤를 이어 여덟 살 때에 보위에 오른 헌종은 십 오 년 간을 지존의 위에 있다가, 보수 이십 삼에 창덕궁 중희당(重熙堂)에서 승하하였다. 승하한 헌종께서는 왕제(王弟)도 왕자(王子)도 없었다. 뿐더러 헌종의 아버님 익종(翼宗)께도 동기가 없고, 또 그 아버님 순조도 외로운 몸이었다. 헌종의 증조한아버님 정종께야 몇 동기가 있었을 뿐, 그 다음 순조 때부터 삼 대째는 겨우 대(代)만 끊이지 않고 내려왔다. 그런지라, 헌종 재세시에도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야 칠촌숙이나 팔촌형제지, 그보다 더 가까운 혈기는 없었다.
헌종이 아직도 이십 삼의 청년이기 때문에, 친척 중에서 따로이 동궁을 책립하지도 않고 왕자 탄생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승하하였다. 그런지라, 이 삼천리의 강토는 지배자를 잃음과 동시에 새로운 지배자가 누가 될지도 예측할 수가 없게 되었다. 승하한 헌종의 칠촌숙이나 팔촌형제 가운데서 선왕이 영립이 될 것이었다. 흥선도 헌종의 칠촌숙이었다.
이 때에 헌종의 한아머님 대왕대비 김씨(숙종비)가 신하들을 궁으로 불러 들였다. 상감 없는 지금에 있어서, 김 대비는 종실의 어른이요, 따라서 이 나라의 어른이었다. 나라로 보자면 상감 대리요, 종실로 보자면 사당 받들 후계자를 지정할 권리를 잡은 이는 김 대비 밖에 없었다. 대왕대비의 부름에 영중추 조 인영(領中樞 趙寅永), 판중추(判中樞), 좌의정 김 도희(左議政 金道喜) 등이 희정당(熙政堂)에 들어왔다. 상감을 갑자기 잃고 그 후계자까지 못 가진 신하들은 목이 메어서 발(廉) 뒤에 있는 대왕대비께 호소하였다.
“신등이 무록(無祿)하와 이 봉척지통을 만났습니다. 나라에는 잠시도 용상을 비일 수 없사오니 하교 계오시기를 바라옵니다.”
비록 친히 당신의 소생은 아니지만, 가꾸고 기른 애정을 끊을 수가 없는 김 대비는 목이 메어서 잘 말을 이루지를 못하였다. 발 안에서 대비의 무슨 하교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음성이 너무 작고 어읍 상반(語泣相半)이기 때문에 신하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세 대의 임금을 섬기고 이제 바야흐로 또 네 대째의 임금을 섬기게 된 노신 정원용이 무릎걸음으로 조금 나갔다.
“대비전마마! 막중막대한 일이옵니다. 봉사교청(奉辭敎請)뿐으로는 안 되겠사오니 언교(諺敎)를 내려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이윽고 발 뒤의 대왕대비에게서 언교가 나왔다. 미리 준비했던 모양이었다. 도승지 홍 종응(都承旨 洪鍾應)이 받아서 폈다.
“영묘(英廟)의 혈맥은 금상(今上)과 강화(江華)에 있는 원범(元範)뿐이라, 이에 종사를 부탁하도록 정하노라.”
그리고 '원범'이란 이름 곁에 ×지제삼자(×之第三子)라 주가 달렸는데, 맨 윗 자는 잘 알아볼 수가 없이 되었다. 대신들은 돌려 보았다. 돈인이 다시 물었다.
“대비전마마! 광(廣)자의 변이 무슨 변이오니까?”
“구슬옥 변에 넓을 광!”
―강화 이광(李珖)의 셋째아들 원범으로 이 종실의 후계자를 삼는다―하는 것이었다.
즉일로 원범을 덕완군(德完君)으로 봉하였다. 그리고 노신 정원용을 시켜서 강화로 가서 신왕 덕완군을 모셔오게 하였다. 즉 현 상감 철종―당시의 보령 십 구. 종실 공자지만 영락되고 영락되어서 강화도에서 초동(樵童)으로 지내던 노총각―
세 임금을 먼저 보내고 네 번째의 임금을 봉영하러 늙은 재상 정원용은 도승지 홍 종응(洪鍾應)과 몇 시위 장사들을 인솔하고 강화도로 향하였다.
강화도에서 겨우 농사를 짓고 새를 베어다가 보리밥이나 굶지 이러고 지내던 전계군(全溪君) 댁에서는, 조정의 백발 재상이 장사를 인솔하고, 앞으로 연(輦)을 모시고 왔는지라, 망지소조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족으로 태어났다가 잘못하다가는 역모로 몰려서 화를 보기가 쉬운 시절이라, 이 뜻 안 한 관원들의 행차에 모두들 숨고 뛰고 야단하였다. 동리 사람들은 큰 구경거리가 났다고 멀리 모여서 서로 수군거렸다. 이 삼천리 강산의 최고 지배자의 위에 오르게 된 원범은, 그런 것도 모르고 그 때 새를 베러 뫼에 올라가 있었다.
일변 피한 가족들을 도로 데려 오고, 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불러 오고, 그들에게 오늘 조정에서 재상이 이리로 오게 된 까닭을 알리고 이해시키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설명하여 주어야. 이 청천벽력 같은 길보를 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고 몸만 벌벌 떨고 있는 것이었다.
집안 사람들이 겨우 오늘의 행운을 이해하고 동리 사람들도 겨우 눈치채서, 이 가난하고 또 가난하던 이씨 댁이 오늘부터는 대원군 댁이 된다고 서로 눈을 둥그렇게 하고 수군거리며, 가족들은 어서 산으로 가서 오늘의 주인공을 찾아 오라고 야단할 때에, 이런 괴변(?)도 모르는 행운의 총각은 새를 한 짐 하여 지고 유월 염천에 땀을 벌벌 흘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시위 장사가 문 밖에 늘어섰고, 뜰에는 백발의 재상이 역시 높은 관원을 데리고 서 있으며, 가족들은 한편에 모여서 욱적거리는 양에, 이 총각은 서먹서먹하여 들어서면서 샛짐을 벗어 놓고 몰래 도로 피하려 하였다. 그것을 먼저 발견한 것이 전계군 부인이었다.
“원범아, 이리 오너라.”
지금은 아무리 어머니라도 휘(諱)를 감히 부를 수 없는 지존임에도 불구하고, 향속에 젖은 부인은 습관대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정원용이 그 편을 보았다. 짐작이 갔다. 원용은 멀리서 그 총각께 절하고 가까이 가서 그 앞에 엎디었다.
“전하! 판중추 신 정원용(判中樞臣鄭元容)이 봉영차로 왔습니다.”
총각은 눈을 둥그렇게 하였다.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였다.
어려서 천자문을 좀 배우다가 가세가 가난하기 때문에 학문도 중지하고 아직껏 초동으로 지낸 총각은, 오늘의 일이 무슨 일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 저―나―소인은…”
무엇이라 대답은 했지만 아무도 알아 들을 사람이 없었다. 짐작하건대 총각 자신도 몰랐을 것이었다. 이 총각에게 오늘의 행운을 이해시키기는 매우 힘들었다. 더구나 붙들고 가르치지도 못하고 계상(啓上)하는 형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더욱 힘들었다. 그것을 겨우 노력하여 이해하게 하고, 이 총각에게 천담포(淺淡袍)를 입히고 복건(幅巾)을 씌워 가지고, 정원용이 그 곁에 배종을 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이리하여 신왕은 뭇 종친이며, 문무 백관의 출영으로 돈화문으로 하여 빈전(殯殿)에 돌아서 대행왕의 영해를 모셨다.
사흘 뒤에 인정전에서 즉위하였다. 즉 철종―대행왕의 칠촌숙이요 흥선의 육천동생이었다. 어린 왕께 대한 대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은 왕의 보령 십 오까지로 그만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상감께 있어서는 그 예를 취할 수가 없었다. 즉위가 보령 십 구 때였다. 그 생장과 환경이 너무도 낮아서, 정사는커녕 우중의 의식에도 너무나 앎이 없었다. 그런지라, 보령 십 구 세의 상감께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철종이 승지 김문근(承旨金汶根)의 따님, 김병학의 종매(從妹)를 왕비로 책한 것은 즉위한 지 이태가 넘어 지난 신해년 구월이었다. 대왕대비 김씨의 수렴청정이 중지된 것은 즉위한 지 사 년째(만 삼년나마)되는 임자년 섣달이고, 계축년 정월부터야 비로소 친정을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기유년에 즉위하여서 신유년까지 만 십 이년간, 왕비를 맞은 지 만 십 년 간, 친정을 한 지 만 구 년 간 한낱 강화의 초동으로부터 팔도 삼백여 주의 통수자로 올랐지만, 그것은 철종에게 있어서는 결코 행복된 일이 아니었다. 보리밥과 굳은 채소에 젓은 총각의 위에는 국왕으로서 수라는 너무 기름져서 잘 소화가 되지를 않았다. 매일 산으로 벌로 새 베러 다니던 총각의(안일한) 궁중 생활은 너무도 평안하여 체력이 나날이 줄었다. 대신들이 가져다 바치는 책은 골치 쏘기 여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강화 총각으로서 갑자기 보위에 오른 상감은,
―이것은 왕자로서의 당연한 의무거니.
여기고 싫다고 하는 뜻을 나타내지도 못하였다. 소화는 잘 안되지만 보리밥보다 맛있는 음식, 안일한 생활, 아리따운 비, 빈, 상궁 나인―이러한 가운데서 철종의 거간을 나날이 쇠약하여 갔다.
강화의 초동으로 보위에 오른 철종인지라, 오랜 수양으로서야 비로소 가질 수 있는 '자기 비판안'과 '자제력(自制力)'을 못 가졌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아리따운 궁녀며 향그러운 술이며 맛있는 음식인지라, 당신의 건강이 그 때문에 쇠약해 가고 두뇌는 몽롱하여 가는 것을 짐작은 하지만 나날이 더욱 침혹하였다. 당신의 위에 만약 의외의 행운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 일생을 강화도에서 보냈더면, 여생의 한편 모퉁이에는 이런 환락경이 있다는 것도 짐작도 못 하고, 흙과 먼지에 싸인 일생을 보낼 뻔하였는지라, 느지막이 만난 이 행운을 즐기고 또 즐겼다.
아리따운 후궁의 부어 올리는 푸른 술에 약간 취하여 과거를 회상할 때에는, 철종께는 지나간 날의 초동 생활이 마치 꿈과 같았다. 만약 과거의 그 때가 꿈이 아닐 것 같으면 현재가 필시 꿈일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생활의 사이에는 사람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는 너무도 넓고 큰 차이가 있었다.
이렇게 옛 말에나 나오는 생활과 같은 안일한 생활의 십여 년 간, 이전 강화에서 단련된 총각의 건강은 없어지고, 지금은 약하디 약한 몸이 되었다. 용상에서 일어나다가 그냥 혼도하여 모셨던 신하들로 하여금 망지소조하게 한 일도 여러 번이었다. 신하들과 무슨 의논을 하다가 그냥 정신을 잃은 일도 간간 있었다.
노염, 비애, 환희 - 경우를 가리지 않고 때를 가리지 않고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일어나는 이런 감정들 때문에 돌발적으로 행한 기행(奇行)―아니 괴변도 적지 않았다. 혹은 어린애같이 까닭 없이 눈물을 흘리는 일도 있었다.
대궐에서는 이러는 사이에도 여러 번 아기의 탄생이 있었다. 그러나 탄생한 아기는 모두 수가 짧았다.
나날이 체력이 쇠약하여 가는 임금의 앞에서 권신들은 또한 암투를 시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도 쇠약하고 너무도 무규칙한 생활을 하는지라, 언제 어떠한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겨날지 예측도 할 수가 없었다. 당연한 승통자(承統者)가 없는 임금인지라,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겨나는 날에는, 승통자 영립문제로 한번의 분규가 생겨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 상감의 척신이자 또한 권신인 김문(金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신중히 고려해야 할 처지였다.
불행히 상감이 승하하는 날에는 그 승통자를 지정할 권리는 오로지 대왕대비 한 분에게 있다. 아무리 권문 김씨일지라도 '진주 종반 이씨'의 가문의 사자(嗣子)에까지 간섭할 권리는 없다. 그리고 '종반 이씨'의 가문에 사자되는 분이 또한 마땅히 이 나라의 지존이 될 분이다. 그러므로 현 상감 승하한 뒤에 신왕 영립에 대하여는 아무리 척신이요 권문인 김씨 일파일지라도 용훼할 권리가 없다.
이런지라, 김씨 문에서는 여기 대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대왕대비로서 엉뚱한 종친을 신왕으로 지적하여 놓으면, 김문의 세력에 큰 흔들림이 생길 뿐만 아니라, 잘못 하다가는 멸족의 참화를 볼지도 알 수 없다. 만약 불행히 현 상감이 승하하고 그 뒤에 영립되는 신왕이 김씨 일문을 밉게 보는 분이면, 김씨 일문의 오늘날의 권세는 하룻밤 사이에 꺾어져 버릴 밖에는 도리가 없다. 이 불행을 피하고 자기네의 권세를 자자손손이 누려 먹기 위하여는 여기서 비상한 수단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그들이 택한 방법이 소위 이하전 역모 사건(李夏銓逆謀事件)이었다.
도정(都正) 이하전은 종친 가운데 꿋꿋한 사람이었다. 선조(宣祖)의 아버님인 덕흥 대원군의 정통 후계자(장손 줄기)인 이하전은, 마음이 굳고 활달하고 그 정치안이 또한 비범한 사람이었다. 다른 종친들이 모두 시정에 숨어 버리거나 낙향을 하여 버릴 동안, 이하전은 그냥 가운데 버티고 권문 김씨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고 있던 것이었다. 뿐더러 선왕 헌종이 승하하고 그 승통자가 없어서 종친 회의가 열렸을 때에 신왕의 후보자로 꼽히었던 사람이었다. 권 돈인(權敦仁)은,
“이 분이야말로 이 삼천리의 지배자로서 가장 적당한 분이다.”
고 역설하여, 하마터면 이십 오대의 조선 국왕이 될 뻔한 사람이었다.
불행히 그 때의 대왕대비 김씨의 의견 때문에 강화의 초동이 새 왕으로 영립되고, 이하전은 여전히 그냥 종친의 한 사람에 지나지 못하게 되었으나, 그 때의 신왕이던 현 상감이 승하하는 날에는 새 승통자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하전은 김씨 일문의 방자를 미워하는 사람이며, 마음 꿋꿋한 사람이며, 김씨 일문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인지라, 이하전이 여차하는 날에는 김씨 일문은 근본적으로 망하여 버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었다.
거기 대한 대책으로 김씨 일문에서는 손을 먼저 걸기로 한 것이었다. 화근을 미리 없이 하여 한을 천추에 남기지 않도록 하려 함이었다.
“제 계획이 제일일 줄 압니다.”
이렇게 말하며 얼굴에 날카로운 미소를 나타낸 것은 김병필(金炳弼)이었다.
―김씨 일문의 회의였다.
좌장 격으로 하옥 김좌근이 있었다. 부원군 김문근은 몸이 편하지 않아 참석하지 못하였다. 하옥의 양사자 김병기며, 김병학, 김병국, 김 헌근, 생질 남병철 모두 한 좌석에 모였다.
그들의 의논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한 먼 곳에 하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가까이는 이 일족 이외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가운데서 그들은 이하전에 관한 의논을 하는 것이었다.
병학은 좀더 기다려 보자는 의견을 제출하였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니 갑자기 말자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거기 대하여 병필이 맹렬히 반대하였다. 오늘 내일 미루어 가다가 여차하는 날에는 땅을 두드려도 번복하지 못할 일이니, 의논이 시작된 이 기회에 결말을 내자는 것이 병필의 의견이었다.
이하전과 가까이 지내는 친구 몇 명을 금부로 잡아다가 독한 국문을 가한 후에, 그들이 토사하였다는 구실로서 이하전을 없이하여 버려서 화근을 미리 씻어 버리자는 것이었다.
하옥은 이 의논에 자기의 의견은 말하지 않았다. 얼굴에 호인다운 미소(이런 긴한 회의에 있어서도 하옥은 호인다운 미소뿐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고 나타내는 것이다)를 띄고 잠자코 조카들의 격론을 듣고 있었다. 병국이 병학의 편을 도와서 천천히 일을 진행시키는 편이 좋겠다 하면, 남병철은 병필의 의견에 찬동하여 즉시 결행을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두 가지의 의논이 서로 타협되지 못하고 그 재단을 좌장 하옥에게 구하게 되었다. 호인다운 미소로써 의논을 듣고 있던 하옥은 자기의 아들 병기를 돌아보았다.
“네 의견은 어떠냐?”
자기 아버지와 같이 먹먹히 듣고만 있던 병기가 비로소 머리를 들었다.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는지는 지금 미리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혹은 이 도정이 그냥 있더라도 아무 관계도 없게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불행히 재미 없는 일이 생길 때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하전을 없이했다고 우리에게 불리한 일은 없을 테니, 없이하여 손해 없고, 그냥 두었다가는 혹은 불리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이하전, 결행해 버리는 것이 좋을 줄 생각합니다.”
병기의 의견이 병필에게 가담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왕족 이하전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그 뒤에 다른 왕족들에 대하여도 그들은 물색하여 보았다. 물색하는 가운데는 흥선의 이름도 나왔다. 그러나 흥선의 이야기가 나온 때는 이 척신 일동은 그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시정의 무뢰한―술 잘 먹고 투전 잘 하고 생일집 잘 찾아 다니는 흥선과, '장래의 국왕'과의 사이에는 너무도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흥선을 영립하게 되면 재미있겠습니다.”
“용상 앞에 막걸리 병을 가져다가 놓고…”
“정전에 투전판을 차려 놓고…”
“하하하하!”
“하하하하!”
이리하여 종친들의 위에 엄중한 검토의 눈을 붓고 있는 김씨 일문도, 흥선에게뿐은 감시의 눈을 던질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이름은 종친이라 하나, 흥선의 인격은 그들의 눈에는 너무도 비루하게 보였으므로 종실의 강아지에게까지 경계의 눈을 붓는 김씨 일문에서도, 흥선군 이하응에게뿐은 절대의 안심을 느끼고 있었다.
용산서 친한 친구들과 뱃놀이를 하다가 이하전은 참변을 만났다.
배에서는 한창 연락이 벌어졌을 때에, 수십 명의 나장(羅將)이 강 언덕에 나타나서 이 놀잇배를 불렀다.
그들은 이것이 무슨 오해거니 하였다. 아무 죄도 없는지라, 나장에게 불릴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사공을 재촉하여 그냥 모른 체하고 배를 저어 갔다.
이 그냥 달아나는 배를 나장들은 다른 배를 얻어 타고 쫓아왔다. 그리고 배가 맞닿게 되자 나장들은 이 배에 난입하였다.
“웬일이냐? 무슨 일이냐?”
하전은 무례한 나장들에게 귀공자답게 고요히 호령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의외였다.
“어명이다! 왜 도망하느냐?”
이리하여 사공을 재촉하여 다시 배를 갖다 대었다.
배가 언덕에 닿으매 나장들을 지휘하던 금부당상이 가까이 이르렀다. 그 금부당상까지 출장을 한 모양을 보고 하전은 비로소 일이 심상하지 않은 줄을 알았다.
하전은 직각하였다. 자기 몸뿐 아니라, 자기 때문에 자기의 친구들까지 무서운 죄명에 직면했음을―
한 사람 한 사람 배에서 내리는 사람마다 오라로 결박을 지었다. 다만 하전은 종친의 한 사람이라는 명색 때문에 결박만은 면하였다.
“무슨 일이냐?”
“어명이올씨다. 우리는 모릅니다.”
“누구를 잡으라는 명이냐?”
“도정 이하전과 및 같이 의논하는 역적을 모두 잡으라는 명이올씨다.”
하전은 결박진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죄명은 역모(逆謀)였다. 역모에 대한 벌은 극형이었다. 무슨 까닭으로 죄 없는 자기가 이런 죄명을 쓰게 되었는지는 너무도 분명한 일이었다. 자기와 함께 배를 타고 봄날의 하루를 즐기던 밖에는 아무 죄도 없는 친구들도, 당연히 '하전과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죄를 쓸 것이었다.
안 하였노라고 변명을 하여도 쓸데 없는 일이었다. 이미 일이 이렇게 된 이상에는 고요히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박진 친구들을 돌아보다가 하전은 빙그레 미소하였다. 가슴에 엉긴 피를 속이는 미소였다.
“사태는 글렀네. 내세에서나 다시 만나세. 나하고 사귄 죄일세. 그 사죄도 내 내세에서 함세.”'친구들에게는 이렇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나장에게,
“나는 집으로 간다. 어명이면 승지를 보내라.”
하고 그 곳서 발을 떼었다. 거기서 나장에게 잡힌 친구들을 작별하고 지나가는 가마를 하나 잡아 타고 돌아오는 동안, 하전의 마음은 자기로도 어찌하여야 할지 분간하지 못하였다. 죽음이라는 커다란 그림자가 그의 앞에서 어릿거릴 따름이었다. 피할 수 없는 그 그림자―그것은 단지 자기가 왕족의 한 사람이며 왕족 가운데 좀 두드러진 인물로 생긴 때문에 받지 않을 수 없는 쓰디쓴 잔이었다. 왕족으로 태어났거든 바보가 되거나, 지금의 권신들한테 머리를 땅에 대고 아첨을 하거나 하여야 할 것이어늘, 그렇지 못한 죄밖에는 아무 죄도 없었다.
그 죄 때문에 지금 자기의 위에 임한 잔―그것은 너무도 과한 잔이었다. 억지로 씌우는 잔인지라, 피할 길도 없다. 이 잔은 너무도 잔혹한 잔이었다.
송구히 설렁거리는 가슴을 부둥켜 안고, 하전은 가마를 몰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 영문을 모르는 자기를 맞는 가인들이며 가족들을 손짓으로 물리치고, 하전은 하인을 시켜서 관복을 내다가 갈아 입고 급급히 그의 그림자를 가묘(家廟) 안에 감추었다. 선조 대왕의 아버님 덕흥 대원군과 영전에 가문의 위급을 봉고할 사손(嗣孫)의 지위로서―
“이전에 임금이 될 뻔하고 못된 그 벌충을 하기 위하여 이하전은 부량한 장사들을 모아 역모를 의논하였다. 도당들은 모두 잡았다. 하전은 집으로 돌아가서 어명을 기다린다.”
사건은 이렇게 만들게 되었다.
이 이하전을 두고 권신들 가운데서는 하전의 처치에 대하여 의논이 분분하였다.
하전의 친구들을 금부로 잡아다가 때리고 두들기고 별별 악독한 고문을 다 하여, 소위 토사라 하는 것을 만들어 내었다.
“역모를 하였소이다. 이하전을 추대하기로 하였습니다. 용산서 거사의 의논을 하다가 잡혔습니다.”
이만한 토사를 만들어 내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처형에 있어서 원배를 보내자, 사약(賜藥)을 하자, 멸족(滅族)을 하자, 여러 가지의 의논이 났다.
이제 왕통 승계자가 작정되기까지의 기간을 이 종친 중의 위물(偉物)인 하전을 경이원지하여 먼 곳에 정배를 보내자는 의논이 가장 세력이 있었다. 자기네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하전에게 역모의 죄명은 씌웠으나나, 뻔히 죄 없는 줄 아는 하전을 극형에까지 처하기는 그들도 좀 어려웠던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 대하여 김병필이 극력으로 반대하였다. 화근을 없이하는 기회에 철저히 없이할 것이지, 그런 뜨뜻미지근한 방책은 쓸 것이 아니라고 맹렬히 반대하였다.
이리하여 의논이 분분한 뒤에, 드디어 두 가지의 의견의 가운데를 취하여 역적 이하전에게 사약을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임금의 재단을 구하러 영의정 하옥 김좌근이 배알하였다.
관복을 갖추고 황황히 입궐 배알한 하옥이,
“덕흥 대원군의 사손 도정 이하전이 역모를 했사옵니다.”
이렇게 계달할 때에, 상감은 안석에 몸을 의지하고 몽롱히 하옥을 건너다 볼 따름이었다. 재위 십 이 년 간 아직 한 가지도 새 일을 못 기억하는 상감은, 덕흥 대원군이 누구이며 이하전이 누구며 역모가 무엇인지 똑똑히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용산서 수상한 장정 몇 명이 무슨 밀의를 하옵는 것을 금부에 잡아다가 국문을 했더니, 의외에도 역모를 하던 것이 탄로되옵고 수괴는 이하전이옵니다.”
상감은 비로소 이하전이라는 인물이 못된 일을 하다가 잡힌 것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흥, 그 놈 잡아다가 매를 쳐야겠소그려? 곧 잡아 오도록 하시오.”
자리가 불편한 듯이 연하여 비비적거리며 왕은 이렇게 하교하였다.
“그래서 신들이 의논하온 결과, 이하전이 아무리 역천의 죄를 지었삽기로, 덕흥 대원군의 자손이매 선성(先聖)의 공을 보아, 멸족까지는 과심하옵고 사약을 하옵는 것이 지당하올까 하옵니다.”
“그렇지! 옳은 일이외다. 매를 칠 수가 있소? 사약―약을 주면 그것을 먹고 죽겠다. 하하하하! 그 약이 몹시 쓰오?”
“역적 이하전도 전하의 관대한 처분에 감읍할 것이옵니다.”
“감읍하여야지요. 대감, 이 하준이―하전이?―를 보시거든 감읍하라고 그러서요.”
“황공하옵니다. 전하 만수무강하옵소서.”
―이리하여 봉명 승지는 그 하나는 약원(藥院)으로 약을 짓기를 명하러, 또 하나는 금부 도사에게로 하전의 최후를 감시하기를 명하러 갔다.
좀 뒤에 금부 도사와 의관은 구슬픈 사명을 띠고 하관들을 거느리고 도정의 댁으로 갔다.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아직 더럽힌 일이 없습니다. 가문의 명예, 소손(小孫) 저의 대에서는 조금도 더럽힌 일이 없습니다. 지금 이것을 이대로 소손의 사자(嗣子)에게 물려 주옵고, 소손은 대대의 조선(祖先)이 계신 나라로 가고자 하옵니다.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가묘에 마지막 봉고를 하는 하전―
사모 관복 품대, 도정(都正)의 정장(正裝)으로서 하전은 최후의 봉고를 하였다.
중종(中宗) 때부터 군가(軍家)를 갈라져서 덕흥 대원군의 대에서 선조 대왕을 왕실로 바칠 뿐, 명예 있는 종친의 일가로 전면히 내려온 대대의 위패 앞에 꿇어 앉은 하전의 눈 좌우에는 눈물이 흘렀다.
사당에서 정침으로 돌아온 때는 하전의 마음은 얼마만큼 가라앉았다. 그가 청지기에게 대궐서 봉명 승지가 오거나 금부도사가 오면 여니와, 그 밖에는 집안 사람이라도 방에 들이지 말라고 엄명한 뒤에 사후의 처리에 착수하였다.
유훈을 썼다.
유언을 썼다.
서류를 전부 정리하였다.
사후를 위한 정리가 죄 끝난 뒤에 하전은 비로소 내실로 들어갔다.
예복을 갖춘 채로 내실로 들어오는 하전을 의아한 눈으로 부인이 우러러 볼 때에, 하전은 아랫목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부인!”
“네?”
“조선 봉사, 후손 양육―어려운 일이외다. 잘 맡으시오.”
“네?”
부인은 영문을 알지 못하였다. 더욱 의아하여 쳐다볼 뿐이었다.
“역모에 몰렸소이다.”
청천의 벽력이었다. 종친, 종친 가운데도 꿋꿋하게 태어난 이의 가족은 언제든 조마조마하여 이런 일이 오지나 않을까 하고 조심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급격히 이를 줄은 꿈도 안 꾸었던 부인은, 이 청천의 벽력 같은 한 마디에 잠시도 입만 딱 벌리고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러나 겨우 이 무서운 비극이 이해될 때에, 와락 달려들면서 통곡을 시작하였다.
“아이고 나으리! 이 일이 웬일이서요?”
그러나 통곡하는 부인을 도정은 고즈너기 밀었다.
“벌써 십 이 년 전에 당했을 일이외다. 십 이 년 간을 더 살았으면 넉넉지 않소?”
왕의 물망에 올랐던 사람은 죽어야 하는 것이다. 십 이 년 전 헌종 승하했을 때에 왕의 물망에 올랐던 도정은 그 때 왕이 못 된 이상에는 마땅히 죽었어야 할 것이었다. 오늘날까지 산 것은 횡수였다. 부인의 통곡에 대하여 하전은 이렇게 고요히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망극한 일에 부인이 정신을 못 차리고 그냥 통곡할 때에 하전은 몸을 피하여 일어섰다.
“뒷일은 맡으시오. 피할 수 없는 길이외다. 금부도사가 오기까지 나는 산 송장이오, 유언 유훈은 정침 문갑 서랍에 들어 있소.”
하고는 듯 몸을 빼어서 사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고요히 아랫목에 앉았다.
밖에서는 나비―혹은 풍뎅이인지가 한 마리 방 안으로 날아 들어 오려는 문창을 뚱뚱 두드리고 있었다. 때때로 날아서 저편까지 갔다가는 다시 문창으로 돌아와서 창을 두드리고 하였다.
―무얼 하러 이 방에 들어오려느냐?―
하전은 고요한 마음으로 나비―풍뎅이인지―의 동향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죽음을 앞에 한 사람의 낭패는 보이지 않았다.
이튿날―
'죽음'이라 하는 상서롭지 못한 사명을 띠고 금부도사의 일행이 도정 댁에 이르렀을 때는 하전은 금부도사의 일행을 맞을 준비가 다 되어 있는 때였다.
목숨을 뺏을 독약이 한시 바삐 온 몸에 퍼지게 하기 위하여 방에는 불을 처때어서, 웃목까지 발을 들여 놓기가 힘들도록 뜨거웠다. 아랫목 두터이 깐 보료는, 속에서 타는 내까지 났다. 그 위에 이하전은 도정의 정복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양을 달일 숯불도 마루에 준비되어 있었다.
청지기의 인도로 죽음의 사자의 일행이 들어오는 것도 하전은 눈 까딱하지 않고 고요히 맞았다.
문 밖에서 부글부글 약 끓는 소리를 들으면서, 바야흐로 죽음의 길을 떠나려는 하전과, 그 죽음을 감시할 금부도사와, 죽음을 판단할 의관은 말 없이 마주 앉아 있었다. 방이 너무도 덥기 때문에 그들의 이마에서는 구슬같은 땀만 뚝뚝 떨어졌다.
드디어 약은 다 졸았다. 다 존 약을 앞에 받아 놓은 뒤에야 하전은 비로소 금부도사에게 한 마디 물어 보았다.
“내 친구들은 다 어떻게 되었소?”
금부도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권한이 없는 것이다.
“조금만 지나면 알 일이지만 궁금해서 물었소. 아마 새남터로 갔겠지요?”
거기 대해서도 금부도사는 침묵으로 응하였다.
하전은 질문을 중지하였다. 그리고 아직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약 그릇을 한 번 굽어 본 뒤에, 몸을 고즈너기 일으켜서 북향 사배하였다.
북을 향하여 절한 뒤에 도로 몸을 제자리에 바로하고, 약이 뜨거운지 어떤지를 새끼손가락을 넣어 둘러서 짐작을 본 뒤에, 고요히 약 그릇을 양손으로 받쳐 들었다.
독을 푼 그릇을 쳐들 때에도 하전은 손도 떨지 않았다. 이미 피할 수 없는 길인 줄 각오한 이상에는, 깨끗이 자기 위에 임한 괴로운 잔을 받기로 결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관복을 단정히 하고 엄숙한 태도로 약을 든 하전은 눈을 고요히 감고 입을 그릇에 갖다가 대었다. 꿀꺼덕 꿀꺼덕 꿀꺼덕! 세 번 소리를 내어서 약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릇을 도로 고요히 놓은 뒤에 도사에게,
“복명하오.”
침착한 소리로 말한 뒤에 자기의 몸이 어지러이 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장침과 사방침을 좌우편 옆으로 끌어다 놓았다.
이리하여 하전은 고요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그와 역모를 같이 하였다는 죄목으로 금부에 잡힌 친구들은 그 전날 벌써 가지각색의 악형을 다 받고, 서소문 밖에서 참형을 당하였다.
성종(成宗)의 비 한시(韓氏)는 불행히 성종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세하였다. 후궁으로 있던 윤씨(尹氏)의 몸에서 왕자가 탄생하였으므로, 성종은 윤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윤씨의 몸에서 난 왕자가 후일의 연산군(燕山君)이었다.
윤씨는 시기심이 많고 버릇이 없는 사람으로서, 왕도 더 볼 수가 없어서 드디어 윤씨를 폐하고 사사(賜死)를 하려고, 그 의논 때문에 신하들을 전정(殿廷)으로 불렀다.
그 때의 재상 허종(許琮)은 왕의 부름을 받고 입궐하던 도중에, 시간도 좀 이르고 하므로 자기의 누님 댁에 들렀다. 그리고 누님에게 지금 입궐하는 까닭을 말하였다. 그러매 누님은 허 종의 말을 다 듣고 생각한 뒤에 허 종에게 향하여 한 가지의 비유로서 말하였다.
―어떤 집의 하인이 주인의 명령으로 마님(주인의 마누라)을 죽였다. 하인은 주인의 영을 충실히 복종한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서 주인의 아들(주인의 아들이면 또한 마님의 아들이다)을 섬기게 될 때에도 그 하인은 새 주인에게 총애를 받을까?
이 누님의 현명한 비유에 허종은 깨닫는 바 있었다. 그래서 누님 집에서 나와서, 입궐 도중 돌다리를 건널 때에 부러 낙마(落馬)하여 부상을 하고, 그것을 핑계삼아 입궐하지 않았다. 따라서 윤씨 폐비의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위에 오른 뒤에, 연산군은 어머님 윤씨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그 때 그 회의에 열석하였던 재신을 전부 살육할 때에, 허 종은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덕으로 화를 면하였다. 사직골에 있는 종침교(琮沈橋)가 즉 허 종이 부러 낙마한 다리다.
왕실의 후사에 관한 의논에는 누구든 용훼하기를 꺼리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만약 용훼하여 자기의 의견이 성공되는 날이면 이어니와, 실패에 돌아가는 날에는 그의 몸에는 반드시 좋지 못한 일이 이를 것이었다.
허종의 사건은 한 기묘한 예에 지나지 못한다. 영사를 뒤적이자면 종친의 어떤 사람과 가까이 지낸 사람은 지극한 영화를 보든가 지극한 참화를 보든가, 극단에서 극단에의 운명을 반드시 보았다.
이하전이 역모로 몰려서 해를 본 뒤에도, 거기 대하여 비평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침묵을 지켰다.
정당한 승계자가 없는 상감인지라, 장래를 예측할 수가 없으매, 누구나 거기 대한 비판을 할 수가 없었다. 섣불리 비판하였다가 후일 어떤 일을 겪을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종친 가운데서는 한 마디의 비평도 없었다. 신하들 가운데서도 한 마디의 비평도 없었다. 모두들 그 사건에 대하여는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이런 사건에 대하여 비평이라는 것은 금물이었다. 비평을 피하기 위하여 모두들 그런 사건이 있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듯이 분주히 그 날의 저녁을 준비하고, 내일 아침의 조반감을 준비하였다. 모른 체하는 이상의 상책은 없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이하전의 역모 사건은 적지 않은 사람의 희생자를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의 비평도 듣지 못하고 무사 평온한 가운데 처결되었다.
그들의 근친들이 남몰래 통곡을 하고, 남몰래 억울하다고 가슴을 몇 번씩 두드릴 뿐이었다.
그 일을 결행한 권신들도 자기네들의 한 일에 대하여 스스로 비평을 꺼리고 침묵을 지켰다. 그들도 많은 말을 하기가 싫었던 것이었다.
이리하여 표면은 한 번의 비평도 받지 않고 무사히 전 국면이 낙착되었다.
그러나 이 일 때문에 종친들의 가슴에 부어진 커다란 반향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 소식을 귓결에 듣고 종친의 한 사람인 흥선은 가슴이 서늘하여, 상세한 내막을 들을 용기도 없이 집으로 달려 돌아왔다.
무론 없지 못할 일이었다. 김문의 방자함을 짐작하고 종친들의 무력함을 짐작하는 흥선은, 스스로 가슴의 피가 끓는 것을 죽여 가면서, 한낱 바보로서의 행동을 계속하였다. 이하전이 권문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행동을 보고서, 흥선은 반드시 오늘날이 있을 줄을 짐작하였다. 그러나 급기 그 일을 당하고 보니, 흥은 가슴이 서늘하고 치가 떨려서, 거리에서 상세한 후보를 듣고 있을 수가 없다.
집으로 달려 돌아온 흥선은, 신발도 벗는 둥 마는 둥 점침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도 안절부절 손을 비비며 서 있다가, 마치 무엇에 쫓기는 사람 모양으로 내실로 들어갔다.
의관도 그냥 한 채로, 마치 누구한테 쫓기듯 내실로 허둥지둥 들어오는 흥선의 모양에 부인이 놀라서 일어섰다.
“대감, 왜 이러세요?”
“도정이 역모에 몰렸소. 목릉 참봉 이하전이가…”
역모―
종친에게 있어서는 이렇듯 놀라운 명사가 없었던 것이었다. 부인의 안색도 순간에 창백하게 되었다.
“이 일을 어쩝니까? 그래 누구누구가 걸렸습니까?”
“자세히는 못 들었소. 윤 승지, 홍 참판 몇몇 사람이 들었다는 듯합니다.”
“그래…?”
우리는 그 축에 끼지 않았습니까 하는 뜻이었다.
“우리야 무사허지.”
아아, 이런 때에 무사하다고 장담을 할 보장을 얻기 위하여, 혀를 깨물고 피눈물을 쏟은 적이 몇십 몇백 번이나 되나? 상갓집 개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래도 얼굴에 개가죽을 씌우고 그냥 기신기신 권문들을 찾아 다닌 것은, 이런 때의 방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하옇든 이 일을 어쩝니까? 그럼 도정 잭은 멸족이겠구료?”
“아직 모르겠소.”
“아이구! 가슴이 서늘해.”
“요 다음은…”
흥선은 여기서 기다랗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뉘 차롈까?”
“맙시사, 하느님! 너무도 심하시외다.”
생후 사십 년―부인이 흥선을 안 지 이십 유여 년, 오늘같이 낭패한 흥선을 부인은 일찍이 본 일이 없었다. 겁에 뛴 커다란 눈을 좌우로 두르며 앉지도 못하고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이러한 창망한 경우에서 흥선은 문득 자기의 둘째아들을 생각하였다.
“이 애, 작은애는 어디 갔소?”
“저 방에서 글 읽나 보이다.”
흥선은 소리를 높여서 소년을 불렀다. 그리고 아버지의 부름에 응하여 온 소년에게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무슨 글이냐?”
“'좌씨전(左氏傳'이올씨다.”
“내버려라! 나가 놀아라! 건넛집 행랑애들과 돈치나 해라. 글은―글은…”
아아 무엇보다도 목숨을 보전해야 할 것이다.
글? 좌씨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을 사랑하는 아들에게 시키고 싶지 않았다.
“가슴이 떨립니다.”
“에익! 고약한! 천도도 너무도…”
흥선은 말을 끊었다. 너무도 억하기 때문에 목이 메려 하였다. 그것을 부인에게 속이기 위하여 흥선은 두어 번 헛기침을 하였다. 그런 뒤에 이 너무도 기막히는 일에 가슴이 답답한 듯이 주먹을 들어서 자기의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부인은 창백한 얼굴로 흥선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소위 공모자들은 서소문 밖에서 참하였다. 이하전에게는 사약을 하였다. 이러한 '이하전 사건'의 후보(後報)를 가지고 흥선을 찾은 사람은 조 대비의 조카 조성하였다.
이런 비상시에 종친 중의 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그 일이 드러나서 후일 어떤 박해를 받을는지, 그것은 예측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성하는 흥선을 찾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찾은 것이었다. 이 때는 흥선은 한때의 흥분을 다 삭이고 그의 평온을 회복한 뒤였다.
“종친 중의 인물이 또 하나 없어졌네.”
성하가 가져온 후보를 듣고 한참 뒤에 흥선이 한 말이 이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더 있다가 그 말을 보태어서 토하는 서이 말하였다.
“마지막 인물―인제는 종반에는 인물은 없다. 김씨의 세상이다. 안심하고 잘들 놀아라.”
“?”
성하는 힐끗 흥선을 쳐다보았다. 이젠 종친에는 인물이 없다. 마음대로 놀아라 하는 흥선의 말이 성하에게는,
“종반에 너희가 모르는 '인물'이 여기 또 하나 있다.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하는 것과 같이 들렸으므로―
성하는 흥선을 찾았다.
“대감!”
“?”
“그분의 원죄를 울릴 북은 없겠습니까?”
“없겠지! 올리려면 채가 부러지겠지.”
“그 분의 원사를 조상할 술은 없겠습니까?”
“없겠지! 헛죽음이겠지!”
“대감!”
“왜?”
“하나 여쭈어 보겠습니다. 만약 종친 중에 김문에서 알지 못하는 '인물'이 있으면, 이번의 불상사를 다행으로 여기겠습니까, 불행으로 여기겠습니까?”
무슨 깊은 뜻을 머금은 듯한 성하의 질문에, 흥선은 낭패한 표정으로 대하였다. 성하가 자기의 말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만약 다른 '인물'이 있다손 치면, 이번의 불상사는 그분에게는 도리어 경쟁자 하나이 없어져서, 장래 목적을 달하기에 좀더 가능성이 많아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깐 그런 분이 있다 하면 이번의 불상사가 그 이에게는 도리어 복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흥선은 알아 듣지 못하겠다는 듯이 머리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그가 성하의 말에 분명히 낭패하였음을 나타내었다. 성하의 말이 분명히 그의 마음을 찌른 것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를 못하겠네.”
“대감? 이번의 불상사가 대감께 있어서는 도리어 전화위복의 격이 아닙니까? 장래의 기약에 한층 더 가능성이 많아지지를 않았습니까?”
그러나 흥선은 알아 듣지 못하겠다는 듯이 머리를 기울이며 담뱃대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담배를 담으며 성하에게,
“아까운 인물―마지막 인물이 없어졌다. 인제는 종친 중에는 천치나 부랑자나 헌놈밖에는 남지를 않았다. 쓸 인물은 하나씩 하나씩 다 없어지고… 여보게 성하, 나도 인물 못나기가 되려 다행일세 그려! 잘났더면 견디어 배기질 못할걸. 자네는 조문(趙門)에 태어나길 잘했지. 자네가 이문(李門)에 태어났더면 이번은 자네 차례일세. 다행이야.”
한 뒤에 싱겁게 껄껄 웃었다. 그리고,
“잘났다 못났다 말이나 말게, 잘나기 못나기는 보기 탓이지.”
잡가 한 마디를 코로 흥얼거리면서 담배를 붙여 물었다. 성하는 멍하니 흥선을 우러러볼 따름이었다.
“이하전이 역모를 하던 것이 발각되었사와 사약을 하였다 하옵니다.”
내사가 들어와서 이 보고를 올릴 때는, 종실의 어른되는 조 대비는 나인(內人) 최씨에게 머리를 빗기우고 있던 때였다. 벌써 여기저기 잡혔던 얼굴의 주름살이 한 순간 쭉 펴졌다.
“이하전이란 인손(仁孫)이 말이냐?”
“목릉 참봉(穆陵參奉) 도정 이하전이올씨다.”
툇마루에 끓어 엎드린 내시는 황공히 아뢰었다. 내시의 대답을 들었다. 그러나 대비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내시를 굽어 볼 뿐이었다. 잠시 뒤에야 대비는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
“대신의 한 일이로구나!”
“어명이올씨다.”
“아니로다. 상감마마가 무엇을 아시느냐? 교동(校洞) 대신의 한 일이로다.”
그리고 거기 대하여 내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을 내리 씌우듯이,
“상감마마께 내가 즉시 뵈옵겠단다고 아뢰어라.”
고 명하였다
내시는 절하고 나갔다. 최씨는 다시 빗을 들었다. 그리고 벌써 드문드문 흰털이 보이는 대비의 머리를 빗기면서 말하였다.
“대비마마! 소인도 들었사옵니다.”
“응, 너도 들었느냐? 들으면 왜 일찍이 말하지 않았느냐?”
“왕대비마마(현종비 홍씨)께옵서도 친히 국청에 납시와 옥초(獄招)를 보셨다 하옵니다.”
“?”
최씨의 손에 잡히여 있던 머리를 홱 뽑으며 대비는 최씨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창백하여졌다. 눈에는 충혈이 되었다. 망칙하고 해괴한 일―왕대비의 몸으로 몸소 국청에 나가서 옥초를 보았다는 것은 웬일이냐?
“그게 언제 일이냐?”
“어젯일이올씨다.”
“그럼…”
대비는 말을 끊었다. 뒷말은 너무도 하기가 어려운 말이었다.
“사약도 벌써 하였겠구나!”
“어제 즉일로 하였다 하옵니다.”
어제 즉일로―그러면 벌써 저질렀다. 도정 이하전이는 벌써 죽었을 것이었다.
“잘들 한다.”
한참 뒤에 대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잘들 한다. 종실의 어른되는 당신이 이 곳에 있거늘, 한 번 품도 하여 보지 않고 종친의 한 사람인 이하전에게 죽음을 준 것이었다.
그로부터는 대비는 입을 꼭 봉한 채,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최씨가 머리를 다 빗기도록―그리고 방안을 다시 다 정돈하도록 대비는 입을 꼭 봉하여 버렸다.
커다랗게 뜨고 앞만 바라보는 대비의 눈에는 노염이 서리어 있었다.
너무도 방자하고 외람된 일이었다. 인손이―인손이―이제는 벌써 저세상으로 갔을 인손이의 어렸을 때의 모양이 차례로 대비의 머리에 떠올랐다. 꼬리를 땋아 늘인 시절의 사랑스런 도령이던 인손이의 모양―그 인손이가 이하전이라는 튼튼한 청년이 되어서, 지금 무력한 종친들 틈에 일단의 이채를 발할 때에, 대비는 그에게 얼마의 촉망을 붙이었던가? 모든 종친들이 지금의 외척들에게 감히 손가락질도 못 하고 멀리서 엎디어 절할 때에, 인손뿐은 왕족의 위신을 그들에게 보여 주고 있지 않았나?
눈을 멀거니 뜨고 있는 대비는 머리로는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전의 일을 회상하여 보았다. 조 대비의 아드님되는 헌종이 아직 재위 때―그리고 대비의 시어머님이시오 헌종의 조모님되는 순조비 김씨의 재세 시대―
조 대비의 아드님 헌종이, 한아버님 순조의 뒤를 이어서 즉위한 것은 여덟 살 되던 해였다. 열 한 살 되는 해에 승지 김 조은의 따님을 왕비로 맞았다. 그 왕비는 헌종 열 일곱 살 되던 해에 마마에 걸리어 사랑하는 지아버님을 남기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 이듬해에 판서 홍 재룡(洪在龍)의 따님으로 두 번째의 비로 맞았다. 이리하여 왕비를 두 번 맞고 위에 있기를 십 오 년 간, 불행히도 왕자를 보지를 못하였다.
나라에는 왕이 없으면 안 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의 이치로, 동궁(東宮)이 없으면 안 된다. 사람의 일이란 짐작할 수 없는 것으로서, 여차하는 날에는 상서롭지 못한 어떤 일이 생겨날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대궐에서는 장래 불행한 날의 방비를 하기 위하여, 은근히 종친 가운데 똑똑한 도령을 물색을 하여, 헌종이 왕자 없이 불행하는 날의 방비를 삼기로 하였다. 그리고 거기 선택된 이가 덕흥 대원군의 사손 이하전이었다.
하전은 대궐로부터 인손(仁孫)이라는 이름까지 받았다. 인릉(仁陵―순조의 능)의 손자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만약 헌종이 왕자를 못 보고 불행하는 날에는, 헌종의 뒤를 이어 이 존귀한 사직을 물려받기로 내정이 되었다.
조 대비의 지아버님되는 익종은 동궁(東宮)으로 하세했기 때문에 위에 올라 보지를 못하였다. 익종의 아드님 되는 헌종은 한아버님 순조의 뒤를 이어서 위에 올랐다. 그런지라, 익종은 비록 헌종의 생친(生親)이라 하나 후사를 잃은 셈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조 대비는 당신 아드님 헌종을 시아버님 순조의 후사로 드렸는지라, 조 대비(익종)의 대는(아드님을 두고도) 절사(絶嗣)가 되게 되었다.
조 대비는 이 새로운 공자 인손으로 하여금 절사가 된 지아버님 익종의 대를 잇도록 하게 하려 하였다. 그런지라, 조 대비는 매우 인손을 사랑하여 늘 인손을 대궐로 불러 들여서 궁중의 예의며 행실을 가르치신 것이었다.
만약 그 동안에라도 헌종이 왕자를 보면 이어니와, 그렇지 못하고 왕자 없이 만세하는 날에는 인손이는 익종(헌종의 아버님, 조 대비의 지아버님)의 대를 이어서 즉위할 귀하고 귀한 몸이었다.
이러한 동안에 드디어 헌종의 불행하는 날이 이르렀다. 한아버님 순조의 뒤를 이어서 여덟 살에 등극을 하여 재위 십 오 년, 왕자를 못 보시고 기유년(己酉年) 오월에 창덕궁 중회당에서 병환이 중하게 되었다.
헌종의 어머님인 조 대비의 심통은 거듭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지아버님 되는 익종을 스물 세 살 때에 잃은 이래로, 이 쓸쓸한 인생을 아드님의 장성과 건강뿐을 축수하면서 살아오던 조 대비는, 지금 그 외아드님의 중환에 세상 만사를 잊고 간호하였다. 성년인 아드님을 만날 무릎에 붙안고, 대비는 마치 그 옛날 어린 시절과 같이 등을 두드리며 간호하였다. 인생에서 낙원을 겨우 만나 본 스물 세 살에 지아버님을 잃고 여기서 또 외로운 여생의 유일의 촉망이던 아드님의 중환을 만난 조 대비는, 오뉴월 염천의 더위를 잊고 오로지 성심을 다하여 간호하였다.
그러나 천명은 조 대비의 성심으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유월달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환후는 다시 가망이 없도록 되었다. 누구의 눈으로 볼지라도 금명간 국상이 날 것은 분명하였다. 그러나 조 대비뿐은 아직도 그렇게 보기가 싫었다. 눈에 분명히 보이는 일이라도 그것을 부인하고, 되지 못할 일이라도 만들어 보려는―그것은 극진한 모성애였다. 애통의 날은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갔다.
만약 여기서 헌종이 승하하고 특별한 책동만 없었더면 그 뒤를 이어서 보위에 오를 이는 인손이 밖에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순탄히 진행되기에는 당시의 세태는 너무도 어지러웠다. 당시의 종실의 어른은 조 대비의 시어머님되는 순조비 김씨였다. 그 김 대비의 세력을 근거삼아 궁중 부중에는 벌써 김문 세력이 단단히 벋어 있었다.
김 대비는 김조순(金祖淳)의 따님이었다. 김좌근(金左根)은 김조순의 아들이요 김 대비의 오라비였다. 김 무슨 근(根) 무슨 근 하는 '根'자 항렬이며, 김 병(炳) 무엇 병 무엇 하는 '炳'자 항렬이 정부의 귀한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김문의 세력은 벌써 하늘을 찌를 듯하게 뇐 때였다. 그런데 여기 만약 인손이가 헌종의 뒤를 이어서 장래의 임금이 된다 하면, 그 김씨의 세력은 한풀 꺾이고, 인손이를 배경으로 조 대비의 일가 조씨의 세력이 일어설 것이다.
이 기미를 본 김문에서는 헌종의 중환을 앞에 하고 책동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당시에 있어서는 한 가지의 세력이 꺾이고 새로운 세력이 설 때에는, 낡은 세력이던 김씨 일문은 세력만 꺾일 뿐 아니라 생명까지 위협을 받을 것이었다. 그러매 그들의 책동은 맹렬하였다.
지금 이 종실의 승계자를 지정하여 새 승계자를 종료에 봉고할 권한이 있는 사람은 종실의 어른인 김 대비 한 사람뿐이다. 누구를 후사고 정하든 간에, 그 후사를 종묘에 봉고하여 정식으로 후사로 만들 사람은 김 대비 한 사람밖에 없다. 이런지라 아무리 인손이가 승계자로 내정이 되었다 할지라도, 김 대비가 이를 종묘에 봉고하기 전에는 정식으로 왕통을 이을 수가 없다. 그 김 대비의 권한을 김문에서는 이용하고자 하였다.
많고 많은 낙척 종친 중에서 한 무명하고 그다지 슬기롭지 못한 사람을 선택하여, 이 사람으로 하여금 헌종의 대를 잇게 하도록 만들려고 물색한 결과, 그들이 발견한 것은 강화도에 내려가서 농사를 지어 겨우 연명을 하는 통칭 '강화 도령'이라는 전계군의 둘째아들 원범이었다.
하옥 김좌근은 자기의 누님 김 대비를 궁중에 찾았다. 그리고 장시간 밀의한 바가 있었다. 인손이를 폐하고 전계군의 아들 원범을 세우기에는 좋은 핑계가 있었다. 즉 원범이는 영종의 고손이요, 사도세자의 종손이며, 순조왕비 김씨에게는 오촌 시조카로서 영종의 직계 혈통이되, 인손이는 종친은 종친이라 하나 덕흥 대원군의 후손으로서 영종의 혈통과 좀 멀었다. 종친 가운데 가까운 직계 혈통이 있음에 불구하고, 다른 갈래에서 승통자를 맞아 옴은 이치에 어그러진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서 김 대비께 여쭈어 김좌근과 김 대비 남매의 사이에는 장차 헌종 승하하는 날에는 '강화 도령'을 모셔다가 계통을 잇게 하자는 굳은 밀약이 성립되었다.
그 밀약의 덧붙이로서 '강화 도령'을 영립한 뒤에, 자기네 일족 김문근(金汶根)의 딸로써 신왕의 비를 삼게 하자는 계획까지 성립이 되었다. 이리하여 순조에서 신왕까지 삼 대째 김문의 딸로써 내리의 어머니를 만들고, 밖으로는 그 외척되는 김 무슨 근이며, 김 병 무엇에서 영세하도록 영화를 누리고 권세를 누리자는 계획과 약속이 든든히 성립이 되었다.
김 대비의 며느리 조 대비(헌종의 어머님)는 이런 일이 진행되는 줄은 전연 모르고 있었다.
유월 초엿샛날이었다.
중하던 헌종은 그 날 여러 번 정신을 잃었다. 그 곁에서 조 대비는 아드님의 중환을 간호하고 있었다. 상감은 어머님의 무릎을 베개삼아 고요히 누워 있었다. 그 아드님을 굽어 보며 조 대비는 눈을 깜박일 줄도 잊은 듯이 앉아 있었다.
“어머님!”
상감의 말이었다. 이 분의 입에서 어머님이란 말을 들은지도 벌써 십 오 년이다. 어머님은 아드님을 전하라 부르고, 아드님은 어머님을 대비전마마라 부르는 십 오 년 간, 비록 모자지간의 정애는 죽일 수 없다 하지만, 표면 얼마나 쓸쓸한 생활이었던가? 아드님에게 향하여 신분이 서로 갈리기 때문에,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하고 한 번 불러 보지도 못하고 외로운 공규를 지켜 온 조 대비에게는, 헌종의 이상 말이 가슴에 콱 질리었다. 상감은 고요히 눈을 떴다. 눈물어린 눈이었다.
“어머님?”
“오냐, 좀 어떠냐?”
겁결에 나온 말이었다. 감정의 속에서 저절로 뛰쳐 나온 '어머니'의 말이었다.
오냐! 나 여기 있다. 너의 어머니가 여기 있다. 지금의 너는 이 삼천리 강토의 임금이 아니요, 오직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로다―조 대비는 손을 들어서 아드님의 이마 위에 얹었다.
십 오 년 만에 처음 듣는 '오냐'에 대하여 상감도 감격된 모양이었다. 잠시 어머님의 얼굴을 마주 쳐다보다가 기쁜 듯이 미소하였다. 굽어 보는 눈과 쳐다보는 눈―그것은 임금과 대비의 눈이 아니었다. 어머니와 아들의 눈이었다. 그 사이 십 오 년 간을 차디찬 의식적 생활에 싸여서, 서로 죽이고 죽었던 모자로서의 정애의 눈이었다.
“어머님! 저것을 조금 저 편으로―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 놓아 주서요.”
“무얼?”
조 대비는 상감의 가리키는 편으로 눈을 돌려 보았다. 거기는 이 나라의 최고 존엄(尊嚴)을 자랑하는 어보(御寶─옥새)가 찬연히 놓여 있었다.
그것이었다. 그것이 사이에 막히기 때문에, 십 오 년 간을 어머님은 아들을 아들이라 부르지 못하고, 아드님은 어머님을 어머님이라 부르지 못한 것이었다. 바야흐로 승하하려 함에 임하여, 지금은 국왕과 대비의 사이가 아니요, 단지 한 아들과 한 어머니의 사이로, 최후의 순간의 평화를 보지하려매 상감께는 어보가 장애가 된 것이었다.
대비는 조금 그것을 밀어 놓았다. 상감에게 보이지 않을 만큼―그러는 사이에 대비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나왔다.
“어머님! 소자는―소―소자는…”
숨이 찬 모양이었다.
“그간 불효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서요? 아니 무슨 말을 하느냐? 얘야!”
십 오 년 만에 서로 부르고 불리는 이 모자의 모양은 곁에서 부채질하고 있는 여관(女官)의 눈에서까지 눈물을 자아내었다.
“답답하옵니다. 가슴을 쓸어 주서요.”
“오냐! 어서 나아라. 천만 백성이 기다린다.”
모자는 십 오 년 만에 공(公)으로서의 지위를 벗어나서 모자로서의 정회를 풀고 있었다.
대왕대비 김씨가 김좌근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표면으로는 손자님 상감의 환후 문안이라는 명색으로 여관 몇 명을 데리고 이 중희당(重熙堂)에 온 것은 바야흐로 이 때였다. 그리고 그것은 여름날의 긴 해도 거의 인왕산으로 넘고 황혼이 가까운 때였다. 창경궁의 숲에서는 깃을 찾아 돌아오는 새 소리들이 어지러이 여기까지 들릴 때―
시어머님 김 대비가 들어오기 때문에 조 대비는 황급히 아드님의 머리를 괴었던 무릎을 뽑았다. 그리고 조금 물러 앉았다.
“상감 환후가 좀 어떠시오?”
상감은 대왕대비께 인사를 하기 위하여 몸을 움직이려 하였다. 그것을 김 대비는 손짓으로 제의하고 좀 가까이 내려왔다. 그리고 수척한 상감을 굽어 보았다.
김 대비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히 나타났다. 이젠 절망이었다. 가망이 없는 것이 분명하였다. 오늘―늦어야 내일일 것이다.
한참을 수척한 상감을 굽어 보다가 얼굴을 들 때는, 김 대비의 입에서도 기다란 한숨이 나왔다. 그 한숨과 함께 모시고 온 명부(命婦)를 돌아보았다.
“저 보(寶)를 들어라.”
이 김 대비의 명령에 여관은 나아가서 어보를 양손으로 받들었다. 아까 조 대비가 아드님의 간청으로 조금 멀리 밀어 놓았던―
“이리 모셔 오너라.”
이 강역의 존엄을 표현하는 어보는 김 대비의 손으로 들어갔다.
조 대비는 깜짝 놀랐다. 상감 만세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이 손을 대지를 못하는 어보였다. 승하하면 새로운 승통자뿐이 또한 손을 댈 권리가 있는 어보였다. 아무리 대왕대비며 왕대비라도 상감 계실 동안은 감히 손을 대지 못할 것이었다. 조 대비는 시어머님께 공손히 물었다.
“어보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통상시라면 대왕대비며 시어머님되는 김씨께 이런 대담한 질문은 할 염도 못 낼 일이었다. 비상시인 지금에 있어서도 좀 도가 넘친 질문이었다. 김 대비는 마땅하지 못한 듯이 잠시 며느님을 보다가 대답하였다.
“종사를 받들 분이 오시기까지 내가 맡아 두는 것이오.”
“그러면 인손이를 부르시옵니까?”
김 대비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인손이는 덕흥대원군의 봉사손, 상감은 영묘의 직손, 인손이가 무슨 관계가 있겠소?”
조 대비가 여기서 커다란 음모의 움직임을 직각하였다. 아직껏 승통자로 내정되었던 인손이며, 대왕대비도 응낙을 했던 일이어늘, 여기 별안간 그 일이 번복이 된 것이었다. 조 대비는 온갖 예의와 절차를 잊었다. 그리고 조급히 물었다.
“흥녕군이오니까? 흥인군이오니까? 흥선군이오니까?”
갑자기 머리에 떠오른 영묘의 직손 가운데서 시재 생각나는 몇 사람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러나 김 대비는 머리를 여전히 가로 저었다.
“그러면 누구오니까?”
“강화 전계군(全溪君)의 셋째아들―전하께는 칠촌숙이 되는 분이오.”
“인손인 어떻게 되옵니까?”
“인손이는 인손이지, 덕흥대원군의 봉사손이 아니오?”
이것은 왕위 찬탈의 크나큰 음모였다. 상감이 아직 계신데 상감의 뜻도 알아보지 않고 아무리 대왕대비기로서니 너무도 남월된 일이었다.
조 대비는 여기서 이 일을 아드님되는 상감께 호소하고 싶기가 끝이 없었다. 그러나 임종의 상감께 이런 귀찮은 세상사를 호소하려 마음을 어지럽게 하기는 어머니로서 도저히 못 할 일이었다.
동기며 원인이며 경로가 분명한 이 음모를 조 대비는 눈을 감고 복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보를 받들고 유유히 돌아가는 시어머님의 등에 던진 조 대비의 눈에는 원망이 사무쳐 있었다. 사랑하는 아드님의 마지막 안정을 위하여 모든 일을 꾹 참을 뿐이었다.
감 대비며 김씨 일문의 의견대로 강화 도령이 헌종 승하한 뒤에 신왕으로 영립되었다. 조 대비는 이 마음에 맞지 않는 신왕을 묵묵히 맞아 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월은 끊임없이 흘렀다. 십수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러는 사이에 대왕대비 김씨도 정사년(丁巳年) 팔월에 드디어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로부터 이 년 후에 조씨는 대왕대비가 되었다.
김 대비 없는 지금의 조 대비는 이 종실의 최고권위자였다. 종실의 동향에 있어서는 조 대비께의 자문이 없이는 행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은인(隱忍) 십 년, 이제 온갖 굴레를 벗은 조 대비는 비로소 그 세력을 펴려고 책동치 않을 수가 없었다. 권력은 가졌지만 아직 세력은 못 가진 조대비는, 세력 방면으로의 활동을 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때문 김씨 일문의 세력이 너무도 강대하였다. 대왕대비 김씨는 하세하였다 하되, 그의 동생 김좌근이며, 현 왕비 김씨의 아버지 김문근이며, 숙부 김수근이며, 오빠 김병필, 그 밖에 김 무슨 근 무슨 근 하는 근자 항렬이며, 병 무엇 병 무엇의 병자 항렬의 세력은 너무도 커서, 조 대비의 권력으로도 당할 염도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도 김문에서는 큰 근심의 재료요, 조대비께는 희망점 되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신왕도 후사가 없는 점이었다.
신왕이 왕자를 탄생하면 그것은 별문제였다. 그러나 만약 종친 가운데서 동궁을 간택한다 하면, 조 대비의 승낙이 없이는 못 하는 일이다. 여기 김문의 약점이 있고 조 대비의 장점이 있다.
김문에서는 왕자 탄생을 축원하고 또 축원하였다. 그러나 김씨의 운이 진한 탓이든지, 몇 번 왕자가 탄생은 되었지만 모두 조서하였다. 김문에서 이를 걱정하여 김문의 뜻에 맞는 종친 공자로서 동궁을 책립하자는 의논도 몇 번 났었지만, 이 문제에는 권한을 잡은 조 대비가 거부하였다.
십수 년 전 조 대비의 사랑하는 아드님 헌종 말년과 흡사한 이즈음이었다. 그 때의 대왕대비 김씨에게 눌려서 마음에 맞는 '인손'이를 맞지 못하고, 마음에 없는 '강화 도령'을 묵묵히 맞아들인 조 대비는, 지금 '강화 도령'의 대에 있어서는 종실 봉사자를 지정할 절대 권리자였다. 그 때 김씨 일문에게 받은 쓰디쓴 잔은 지금 또 한 조 대비에게서 김씨 일문에게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왕자가 없고 몸이 약한 현 상감의 앞에서 김씨 일문은 이 난문제를 해결하려고 갈팡질팡할 동안 조 대비는 정관하고 있었다.
“인손이의 것은 인손이에게로…”
십수 년 전에 헌종에게서 당연히 인손이에게로 갔어야 할 어보가, 지금은 뚱딴지 강화 도령에게로 가 있다. 그러나 필경은 인손이에게로 돌아올 운명을 가지고 있다. 김문 때문에 빼앗겼던 어보는, 지금 바야흐로 새 주인을 물색하고 있다. 새 주인을 지정할 권리를 잡은 조 대비는, 그 어보를 원 주인 인손이에게로 돌리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김문들의 갈팡질팡하는 꼴을 보면서 조 대비는 속으로 늘 미소하고 있던 것이었다. 건강이 좋지 못하고 후사가 없는 '강화 도령'의 뒤에는, 인손이가 당연히 어보의 소유자가 될 것이며 행사자가 될 것으로 조 대비는 단단히 작정하고, 김문의 득세를 여름 날 꽃과 같이 바라보던 것이었다.
그 인손이가 홀연히 모라는 명목 아래 사약이 되었다. 어보의 장래 소유자를 지정할 권리가 있는 유일인인 조 대비에게 '장래의 어보의 소유자'로 내정이 되어 있던 인손이―자라서 이하전이가 의외에도 역모에 몰려서 죽음의 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
분노라 할지 불쾌라 할지 분간하기 힘든 괴로운 감정 때문에, 조 대비의 얼굴은 잔득 찌푸린 채 펴지지 않았다.
아까 내관에게 향하여 상감께 뵙겠다고 말하였지만, 그것은 이하전이가 아직 죽지를 않은 줄 알고, 즉 아직 사약까지는 하지 않은 줄 알고, 대사를 저지르기 전에 '종실의 어른'이라는 당신의 권병으로서 그것을 삭여 버리려고 하였던 것이었다. 이미 하전이에게 사약을 하였음을 안 이상에는, 나가서 뵈옵는다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처치할 수 없는 울분―김문의 방자함이 오늘날 여기서 이하전이를 죽였다. 그것이 어명에 의지한 처단인지라, 아무리 종실의 어른인 조 대비라 할지라도, 그 김문의 방자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다만 거기 대한 끝 없는 울분만 연하여 마음 속에서 일어날 따름이었다.
이미 절기는 여름―창문을 열어젖힌 그리고는 밭을 통하여 손님(女官房의 下女)들이 무엇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양이 보였다. 조 대비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어렴풋이 그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문득 여관 하나이 승전빛(承傳色─임금의 말을 전하는 내시)을 인도하여 가지고 왔다.
“상감마마께옵서 듭실까 여쭈어 왔습니다.”
툇마루에 꿇어 엎드린 내시는 이렇게 아뢰었다.
대비는 눈을 돌려서 발을 통하여 끓어 엎드려 있는 내시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없었다. 잠시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드디어 대비가 입을 열었다.
“도정은 벌써 사약을 하였다지?”
“하왔사온 줄로 아뢰옵니다.”
“운명하였다더냐?”
“그런 줄로 들었사옵니다.”
죽었다―여관의 말이 아니라 내시의 말로 이미 죽었다 하는 이상에는 죽은 것이 분명하다. 무론 죽었을 것이다. 사약을 한 이상에는 죽지 않았다면 도리어 그것이 기적일 것이다.
“뵙고 아뢸 사연이 있더니, 몸도 좀 편하지 않고 그래서 그만두겠다.”
대비는 내어던져 버렸다.
그러나 내관이 절하고 나가려 할 때에 대비는 다시 말을 걸었다.
“상감 지금 동온돌(임금의 침실)에 곕시냐?”
“네…”
“아침 수라(점심)는 진어하셨느냐?”
“초조반만 진어하셨습니다.”
“누구 입시한 대신이 있느냐?”
“영은부원군(왕비의 친정 아버지)께서 입시하왔사옵니다.”
여기서 대비는 결심하였다. 김문의 수령의 한 사람이 또 무얼 하러 들어왔나? 무슨 음모인지는 모르나 좌우간 대비 몸소 상감께 나아가서 부원군으로 하여금 물러가게 하리라. 이리하여 조 대비는 일단 중지하기로 작정하였던 일을 다시 하기로 하였다.
“중희당서 뵙고 은밀히 아뢸 긴한 일이니, 대신은 물러가고 잠깐 중희당으로 듭시라고 나가서 여쭈어라.”
“황공하옵니다.”
절하고 나가는 내시를 보면서 대비는 최씨에게 명하여 의대를 가져오라 하였다.
“대왕대비마마께옵서 임어하오십니다.”
왕이 중희당에서 기다릴 때에 대비의 임어―
강화의 한 초동으로서 그 이십 년 전쟁을 보낸 상감은 전생의 초라하였음을 감추기 위하여 가장 편복(便服)일 때도 익선관(翼蟬冠)에 강사포 이하를 작용하는 일이 없었다. 조금만 큰 일에도 반드시 면류관이나 통천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었다. 이 때도 상감은 익선관에 곤룡포를 착용하고 있었다.
상감은 대비의 거동에 황황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절하고 아랫간의 자리를 내었다.
대비는 가볍게 허리를 굽히며 상감이 비낀 자리에 내려가 앉았다.
“상감마마!”
내관들까지 모두 물리친 뒤에 이렇게 말하는 대비의 말투에는 다분의 위엄이 있었다.
“아까 듣자오매 도정 이하전에게 사약하라시는 처분이 계셨다니 사실이오니까?”
상감은 낭패한 듯이 마리(머리)를 두르며 두어 번 방안을 살다. 본시 빈한한 가운데서 자라고 왕자의 덕과 왕자의 품위를 배우지 못한 상감은, 종실의 웃어른이나 나이 많은 재상의 말에 대하여는 늘 낭패한 듯이 이런 태도를 취한다. 상감의 말씀이 있기 전에 대비가 겹쳐 나갔다.
“역모로 치죄하셨다는 승전빛(承傳色)의 말인데 허전은 아니겠지요?”
“네. 제가―신이 사약을―이 하준―하전이가―저…”
낭패하는 왕의 말은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비는 이 알아 듣지 못할 말을 귀찮은 듯이 듣고 있다가 한 마디―
“참 잘 허시우!”
한 뒤에는 머리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왕은 끝 없이 낭패하였다. 마치 어른의 꾸중을 들은 어린애와 같이 족장(足掌)을 연하여 움직이며,
“소자가 신이―영의정이―역모―사약…그…”
알아 듣지 못할 말을 또 하였다.
그러나 상감의 구중에서는 '영의정'이라는 한 마디가 나왔다. 소위 역모 사건 제조에는 영의정 김좌근이 한몫 끼었을 것은 대비도 이미 짐작한 바 있지만, 상감의 구중에서 분명히 나온 이상에는, 이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이 사건의 배후에는 김씨 일문이 있고, 또 그 배후에는 장래의 승통자(承統者)라 하는 거대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대비는 경멸하는 듯한 눈자위로 용안을 보았다. 대비의 입술이 문득 떨렸다. 하마터면 불경한 말이 나올 뻔한 것을 대비는 겨우 삼켰다.
이 상감―대비의 뜻에 거슬려서 인손이를 눌러 버리고 강화도에서 모셔 온 상감께 대하여, 대비는 좋은 감정을 품지 못하였다. 더구나 너무나 어질기 때문에, 김씨 일문의 농락 아래서 행동하는 상감인지라, 야심과 용감과 권세에 대한 동경심이 만만한 대비에게는 답답하기까지 하였다.
“참 잘 하셨소!”
다시 한 번 뇌일 때는, 대비의 마음에는 이번의 일에 대한 분풀이를 반드시 하겠다는 단단한 결심까지 되었다. 김문이 김문의 세력을 이용하여 행동하는 이상에는, 대비는 넷서 한 대비로서의 권병으로서 행할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할 밖에는 도리가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대비는 몹시 나무려운 눈자위를 용안에 부은 채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벌써 초로(初老)―아니, 중로에 든 대비는, 밤에 쉽게 잠을 들지를 못하였다. 더구나 그 날은 이하전의 사건 때문에 마음이 매우 불쾌하여 잠을 들 수가 없었다.
밤에 자리에 들어서 불 켠 것을 싫어하는 대비는, 촛불을 멀리 대청에 내다 놓게 하여, 겨우 방 안의 어두운 기나 없게 하고 촌의(內衣)뿐으로 자리에 들어서, 두 사람의 시녀를 불러서 다리를 두드리게 하고 있었다. 너무 아프게 두드린다, 너무 가볍게 두드린다, 말이 많았다. 김씨 일문에 대한 노염을 시녀에게 부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가운데서 김씨 일문의 외람된 행동에 대한 대책을 대비는 강구하고 있었다. 한 따님 밖에는 소생이 없는 상감인지라, 반드시 대비 당신의 권한 아래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는 지금의 현상에 대하여, 대비는 종친 중의 많은 공자들을 머리에 그려 보았다. 이하전이 이미 죽은 지금에 있어서는 다른 새로운 승통자를 내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지라, 새로운 승통자의 인선(人選)에 대비는 골몰하였다.
적어도 새로운 승통자는 대비 당신과 가까운 사람, 대비 당신의 심복인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김씨 일문에서 부수한다든가 동화할 인물이면 안 될 것이다. 대비 당신과 짜 가지고 장래 김씨 일문을 누를 만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김씨 일문에게 대한 대비의 노염을 장래 충분히 풀기 위하여는, '그 사람'도 김씨 일문에서 원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야 될 것이다.
그러면 누구?
김문을 미워하는 사람―그리고 대비 당신과 짤 수 있는 사람―또한 그 위에 장래에도 김문과 타협이 안 되고 끝까지 김문과 싸울 사람―이러한 사람이 종친 가운데 있나?
머리로서 종친의 몇 사람을 점검하여 내려가던 대비는 흥선에 이르러서 딱 멈추었다. 흥선군은 대비 당신의 육촌 시동생―말하자면 멀지 않은 종친이다. 흥선은 김문에게 멸시를 받는 인물인지라, 또한 그만큼 김문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사람이다. 흥선은 비록 몸은 종친이라 하나, 투전과 술로 소일을 하는 허튼방이라 지벌을 자랑하는 명문 거족인 김씨 일문을 흥선의 절제를 좀체 받지 않을 터이며, 장래에도 김씨 일문과 흥선은 웬만해서는 타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
흥선은 대비 당신의 조카 조성하와 매우 가까이 지내는 모양이매, 장래 흥선이 권세를 잡는 날이 이른다 하면, 대비 당신을 괄시하지 못할지며 조성하를 괄시하지 못하겠으니, 오늘날의 김씨 일문의 세도는 그 때는 조시 일문으로 당연히 돌아올 것이다. 종친 가운데서 이하전에 대신할 사람을 골라 내자면 당연히 손가락은 흥선군 이하응의 위에 멎어야 할 것이다. 만약 장래 흥선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오늘날 그렇듯 흥선을 멸시하던 김가들의 꼴도 또한 보기에 통쾌할 것이다.
'종실의 어른'이라는 당신의 권병으로서, 흥선의 아들을 끌어 올려 김씨 일문의 위에 내려씌우면 과연 통쾌한 일이다. 지금 한 없이 뽐내던 김문이 주정방이 흥선의 앞에 그 허리를 굽히는 꼴은 근래에 다시 없는 통쾌한 일일 것이다.
이리하여 김씨 일문에 대한 노염과 증오 때문에, 거리의 주정방이 흥선은 조 대비의 점검(點檢)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너무도 그 인격이 종친답지 못한 점을 조 대비는 김문 복수에 이용하고자 한 것이었다.
수일 후였다.
“제절사연(諸節事緣) 압고저 대령하왔습니다.”
왕에게서 대비에게 대한 아침 문안―아침 문안이라 하나, 대궐 안의 아침 문안은 거의 오정에 가까운 때였다. 발 밖에서 곡배(曲拜)를 드리는 승전빛에게 대비는 가볍게 대답하였다. 대비를 뵙기를 몹시 거북히 여기는 왕은, 열흘에 엿새 평균 승전빛으로 하여금 대리로 문안을 드리게 하였다. 문안을 드리고 내관이 바야흐로 물러 나가려 할 때에 대비가 내관을 불렀다.
“승후방(承候房)에 나가서 승후관 조성하가 들어왔나 알아보아라. 그리고 들어왔거든 내가 부른다고 전하여라.”
“네!”
뒷걸음을 쳐서 물러가는 승전빛을 대비는 조소(嘲笑)에 가까운 미소를 띈 눈으로 바라보았다.
일찍이 홀몸이 된 이래 삼십 년 간을 온갖 불만과 불평을 마음 속으로만 삭여 버리고 지낼 동안, 그의 속에 생장한 성격은 공상과 복수심이었다. 조성하를 부른 것은 성하에게서 흥선에 대한 사연을 좀더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너 이즈음도 흥선군을 만나느냐?”
성하가 들어와서 문안을 드리고 바로 앉기가 무섭게 조 대비가 물은 말이 이것이었다. 승후방에 있다가 대비의 부름으로 갑자기 들어온 성하는, 대비의 첫 질문이 뜻도 않았던 바이므로 눈을 둥그렇게 하고 쳐다보았다.
“잠깐 만나기는 하옵니다마는…”
왜 그 말씀을 새삼스럽게 물으시냐는 뜻이었다. 대비의 질문은 한 걸음 뛰었다.
“흥선군에게 아들이 몇이나 있느냐?”
“직자가 두 분이 있는가 하옵니다.”
“작은도령의 연치는 어떻게 되느냐?”
“금년 열 살이올씨다.”
“열 살이라…”
대비는 잠시 생각하였다.
“아직 총각이지?”
“김병문의 딸과 정혼은 했단 말이 있읍지만 아직 성례는 안 했습니다.”
“김…”
여기에도 김문이 있다. 대비는 한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 성례한다는 말은 못 들었느냐?”
“못 들었습니다. 김문에서는 정혼은 해 놓고도 흥선군께 불만을 느끼고, 흥선군도 역시 너무 승한 사돈을 좀 불안히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흥!”
“그것은 왜 물으십니까?”
“아니, 별 일은 아니로다.”
별 일이 아니라 하나 또한 심상히 지나가는 질문은 아닐 것이다. 부러 대비가 자기를 불러서 첫 번으로 물은 것이 흥선의 일이며, 더욱 흥선의 아들에 관한 질문인지라 아무리 대비가 별 일이 아니라 하되 아닐 수가 없을 것이다. 혹은 흥선 댁 도령과 맞잡히는 얌전한 규수가 있어서 그 혼사 때문에 묻는 것이나 아닌가, 이렇게 밖에는 해석할 수가 없는 성하는, 얼굴을 조금 들고 대비를 쳐다보았다.
“부르신 일은 그 일 때문이오니까?”
“응, 그 일도 있고 또…”
“또?”
“…”
“또―무슨 일이오니까?”
“또―무얼 그다지 신통한 일은 아니지만―며칠 보이지도 않고 하기에 잠깐 불러 보려고…”
대비는 이만큼 하여 속여 버렸다. 대비로 보더라도 섣불리 당신의 마음을 조카에게 보였다가, 일이 그릇되는 날이면 그 화가 조카에게까지 미칠 종류의 서이므로 내심을 말하기가 힘들었다. 대비는 모시는 나인에게 향하여 손가락질하여 담배를 붙여 오라고 명하고, 또 다탕(茶湯)과 생과를 들여오라고 명하였다.
“너, 이 도정 사사(賜死)에 관해서 상세히 알면 아는껏 어디 말해 봐라.”
이윽고 대비에게서 이런 말이 나왔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성하의 가슴은 뜨끔하였다. 어떻게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으되 대비에게서 처음에는 흥선 댁 도령에 관한 질문을 듣고, 그 다음에는 이하전 사사에 관한 질문을 듣게 된 성하는, 그 두 가지의 사건을 결합하여 가지고 한 가지의 결론을 얻었다.
― 대비가 자기를 부른 것은 두 가지의 일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하나는 이하전 역모 사건이라는 기괴한 사건의 윤곽을 알아보려는 것이요, 또 하나는 흥선에게 적당한 도령이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사건이 합하여 낳은 한 가지의 결론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즉 흥선댁 도령에게 대하여 대비는 호기심을 일으킨 것이었다.
성하는 대비의 영에 의지하여 자기가 아는껏 소위 이하전 역모 사건의 전말을 대비에게 아뢰었다. 아뢸 동안 성하의 마음은 이상히도 긴장되었다. 만약 지금 자기의 추측으로서 옳다 할진대, 여기에는 커다란 사건이 하나 빚어져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지금 빚어지는 이 '떡'이 장래 익을 때에는 어떤 모양을 하고 나타날지 그것은 예측도 할 길이 없다. 그러나 온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사건 하나가 지금 이 평범한 자리에서 빚어져 나아가는 것을 성하는 직각하였다.
이하전에게 대한 대비의 촉망을 짐작하고, 지금 그 하전을 잃은 대비의 분노를 생각할 때에, 그 자리에서 나오는 한 사람의 왕족의 이야기는 결코 평범히 간주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성하는 직각하였다.
성하는 눈을 조금 들어서 대비를 쳐다보았다. 무엇이 몹시 불안한 듯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성하의 말을 듣고 있는 이 노파―이 노파의 얼굴이 이 때같이 무섭고 크게 보인 일이 성하에게 없었다.
얼굴에 주름살이 잡히기 시작하고, 머리에도 간간 흰털이 보이기 시작하는 전형적인 한 개의 노파에 지나지 못하되, 이 노파의 마음 하나로서 장래 삼천리 강토를 지배할 지존을 작정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노파는 입으로는 그 때 말도 하지 않으나, 이하전 사건에 대한 분노 때문에 즉시로 다른 새로운 이하전을 마음으로 작정하였다가 유사시에 덜컥 내놓아서, 지금 권문인 김씨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려는 복안인 듯싶다.
그리고 그런 필요상 흥선 댁 도령의 일을 캐어 묻는다하면,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 댁에서 연을 올리는지 혹은 돈치기라도 하고 있는지 하는 그 소년은, 장래 놀라운 자리에 올라갈 소년이다.
“그래! 그래?”
감탄사인지 질문인지 분간하기 힘든 이런 말을 간간 끼우면서 성하의 말을 듣고 있는 이 노파의 마음은 지금 어떻게 움직이나? 알 길 없는 이 일을 짐작이라도 하여 보려고 성하는 슬금슬금 대비의 얼굴을 쳐다보고 하였다.
이하전의 사건에 대하여 성하가 자기의 아는 것을 다 말한 뒤에도, 대비는 특별히 당신의 의견이라든가 감상이라든가를 말하지 않았다. 입맛이 쓴 듯이 몇 번 혀를 챌 뿐이었다. 그런 뒤에 남에게는 거의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로,
“백두산이 무너지나―동해수 메어지나”
중얼거렸다. 그런 뒤에 성하에게 향하여,
“하전이란 놈은 과시 고약한 놈이로군. 제가 역모를 하다니! 당랑(螳螂)이 수레를 버티는 셈이지. 죽어 싸니라, 죽어 싸!”
하고는 억함을 참을 수가 없는 듯이 양 어깨를 떨었다.
그로부터 며칠, 용무가 바쁘기 때문에 흥선 댁도 찾아보지 못하고 대비께도 들어가 뵙지 못한 성하는, 삼사일 뒤에 대비께 불리어서 들어갔다. 들어가자 대비는 다른 말이 없이 흥선군을 잠시 모셔 오라는 분부였다. 그리고 그 이유로서는 너무도 갑갑하니, 흥선 같은 좀 색다른 인물이 들어와서 한참 떠들고 가면 좀 나을 것 같아서 당부하는 것이라는 구실을 들었다.
성하는 대비의 분부를 듣고 즉시로 가마를 몰아서 흥선 댁으로 찾아가 보았다. 그러나 낮에 집안에 들어 박혀 있을 흥선이 아니었다. 청지기의 말을 듣자면 서촌관속(西村官屬)들과 같이 아침에 나갔다는 말이었다. 관속 누구냐고 물으매 안필주(安弼周)와 하정일(河靖一)이라 한다.
후일 흥선이 변하여 대원군이 된 뒤에 대원군의 심복이 되어 활동한 소위 천하장안(千河張安)의 네 사람 가운데 '하'와 '안'과 동반하여 나간 것이었다.
당시의 오입장이를 대표하는 이 관속들과 외출을 한 이상에는, 이 장안 어느 구석에 가 박혀 있는지를 짐작도 할 길이 없었다. 혹은 기생방에 가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벌로 놀이를 나갔는지도 알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 가서 투전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성하는 잠시 대문 밖으로 나와서 머리를 기울이고 있다가, 다시 몸을 가마에 실으면서 교군군에게 기생 계월이의 집을 일렀다.
계월이의 집에도 흥선은 없었다. 아까 잠깐 들렀다가 곧 수군거리며 나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계월이의 짐작으로는 어디 투전을 하러 가는 모양이라는 것이었다.
― 이제는 어디서 찾나?
성하 짐작하건대, 오늘 대비가 흥선을 부르는 것은 심상한 일이 아니다. 대비는 심상히 갑갑하여 부른다 하지만, 아무리 갑갑하기로서니 흥선군을 부른다 하는 것은 너무도 기상천외의 일이다. 무슨 다른 곡절이 필시 있을 것이다.
그 곡절에 대하여 또한 짐작이 없지 않은 성하는, 어디서든 반드시 흥선을 붙들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놓쳤다가는 혹은 커다란 일이 틀려 나갈지도 모르며, 그 때문에 장래 또한 어떻게 운명의 변동이 생길지도 모르겠으므로, 성하는 어떤 일이 있든 흥선을 꼭 붙들리라 결심하였다.
계월이의 집에서 나온 성하는 교군을 몰아 가지고 흥선의 갈 만한 곳은 모두 찾아다녔다.
흥선이 지근지근 찾아 다니는 권문 거족들의 댁에도 미심결로 가 보았다.
흥선이 즐겨 다니는 술집도 모두 찾아가 보았다.
그 밖에도 짐작이 가는 집은 모두 찾아 보았다.
그러나 흥선은 찾아 낼 수가 없다.
어디서 투전이라도 하느라고 박혀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성하가 대비의 분부를 받고 대궐을 나온 것은 오정이 조금 지나서였다. 그 성하가 그 날 자정이 지나도록 장안 구석구석을 찾아 돌아다녔으나 흥선은 찾을 길이 없었다.
여기서 성하는 이젠 집으로 돌아갈까 하였다. 그러나 오입장이 혹은 투전군이 왕래하는 것은 자정 이후에서 아침 밝기까지인지라, 투전군 흥선을 찾기 위하여는 이 시간을 빼어 놓을 수가 없으므로, 연하여 흥선댁까지 가서 흥선의 귀댁 여부를 알아보고는 또 다시 교군을 몰아서 거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하였다.
“제기랄!”
마지막에는 역하여 이런 말까지 그의 입에서 나왔지만 성하 짐작에 적지 않은 일을, 일시에 역함으로 모피할 수가 없어서, 밤을 새워서 이튿날 아침 해가 동녘 하늘에서 오르기까지 쉬지 않고 찾아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