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후, 민족운동이 침체에 빠지고 국내에서도 공산주의 사상이 풍미하던 시기에 농촌 계몽 운동과 인도주의를 뼈대로 쓴 작품이다. 1932년 4월에서 1933년 9월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으며 작자의 계몽사상이 가장 짙게 반영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광수의 계몽주의 문학은 이 작품으로 끝을 맺고 이후부터는 현실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범종교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작품 세계라 할 수 있는 <사랑> <무명> <세조대왕> <원효대사> 등 작품이 등장하게 된다. 지금 읽어보면 어딘지 신파조의 분위기가 강하지만 당시의 시대상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통찰력을 얻게 된다. 그리고, 당시 이광수를 비롯한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고민했던 숙제들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무게를 갖고 있다는 점을 실감하게 된다.
[작가 소개]
이광수(李光洙, 1892-1950) : 한국의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사상가.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계몽주의, 민족주의 문학가 및 사상가로 한국 근대 정신사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본관은 전주. 아명은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 등.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유랑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소년 시절에는 동학 활동을 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초기에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었으나 일제 말엽에는 친일 행각으로 논란을 빚었으며 이 때문에 해방 이후 반민특위 활동에 따른 은둔 생활을 해야 했다.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서울에서 인민군에 납치돼 그 해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랑> <흙> 등 장편소설이 많으며 작품에는 초기에는 계몽주의적 성향이 강했으나 차츰 불교와 톨스토이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살여울에 봄이 왔다. 달냇물이 기쁘게 부드럽게 흘러간다. 농촌의 봄은 물이 가지고 온다.
청명 때가 되면 밭들을 간다. 보삽에 뒤집히는 축축한 흙은 오는 가을의 기쁜 추수를 약속하는 것이다.
보잡이(밭을 가는 사람)는 등에 담뱃대를 비스듬히 꽂고, 길단 채찍을 들어 혹은 외나짝 소를, 혹은 마라짝 소를 가볍게 후려갈긴다. 소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흔들하면서 걸음을 맞추어서 간다. 그들은 사래 끝에 오면,
"마라 도치."
하는 보잡이의 돌라는 명령을 알아듣고 방향을 돌린다.
"외나."
"마라."
하는 구령을 소들은 장관의 명령을 잘 알아듣는 병정들과 같이 잘 알아듣는다. 송아지로서 처음 멍에를 메인 놈은 말을 잘 듣지 않다가 매를 맞지마는, 삼년 사년의 익숙한 소는 제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잘 안다. 그가 가는 밭에서 나는 낟알과 짚 중의 한 부분은 그가 겨우내 먹을 양식이 되는 것이다.
소는 농부의 가족이다. 그 동리 사람은 멀리서 바라보고도 저것이 누구의 집 소인 줄을 안다. 그 소의 결점도 알고 장처도 안다. 만일 어느 집 소가 다리를 전다든지 무슨 병이 났다고 하면 그것은 다만 소 임자 집에 큰 사건만 아니라, 온 동리에 관심사가 된다. 소 니마(소의 연)를 부르고 무꾸리를 하고 무르츠개(귀신을 한턱 먹여서 물리는 일)를 하여야 한다.
"이랴 이랴, 쯧쯧!"
하고 두르는 보잡이의 채찍에 봄볕이 감길 때에 땅에 기쁨이 있다.
소가 지나간 뒤에는 고랑 째는 사람이 따른다. 그는 한 손에 굵다란 지팡이를 들고 한 발로 밭 이랑의 마루터기를 째고 나간다. 그 뒤를 따라서 재놓이가 따른다. 그는 삼태기에 재를 담아 가지고 고랑 짼 홈에다가 재를 놓는다. 비스듬히 옆으로 서서 재 삼태기를 약간 흔들면서 걸어가면 용하게도 재가 검은 줄을 일러서 고르게 퍼진다.
만일 조밭이나 면화밭을 간다고 하면 자귀밟이가 있을 것이요, 보리밭이나 밀밭이라 하면 고랑 째는 것도 없고 자귀밟이도 없을 것이다.
자귀밟이는 제일 어린 숙련치 못한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는 고랑의 홈을 한 발을 한 발의 끝에 자주자주 옮겨놓아서 씨 떨어질 자리를 다지는 것이다. 그 뒤로 밭갈이에 가장 머리 되는 일이 한 겨리에 가장 익숙하고 어른 되는 사람의 손으로 거행되는 것이다. 그것은 씨 뿌리는 일이다.
적어도 삼십 년 이상 밭갈이의 경험을 쌓은, 그리고도 수완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종자놓이"라는 이 명예 있는 지위에 오를 수는 없는 것이다. 살여울 네 겨리 중에 숭이가 든 겨리의 종자놓이는 돌모룻집 영감님이라는 쉰댓 된 노인이다. 그는 일생에 부지런히 일하고 아끼고 하는 덕에 논마지기 밭 낟가리도 장만하고, 짚으로나마 깨끗하게 집도 거두고, 동네 사람들의 대접도 받는 노인이다.
그는 말이 없다. 벙어리와 같이 말이 없다. 그리고 쥐와 같이 부지런하다. 집에 가보면 언제나 무엇을 하고 있다. 그의 감화로 그집 아들, 딸, 며느리가 다 그렇게 말이 없고 부지런하다. 조용하게 일만 하는 집이었다.
돌모룻집 영감님은 옆구리에 종자 뒤웅을 차고 뒤웅에 손을 넣어서는 종자를 한줌 쥐어서 말없이 솔솔 뿌리며 간다.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 한편 어깨를 축 처뜨리고 언제까지든지 씨를 뿌리고 영원히 씨를 뿌리고 가려는 사람과 같이 긴 사래를 오락가락한다.
"시장하지 않으시우"?
하고 자귀밟이 하는 젊은 사람이 지나는 길에 물으면,
"어느새에."
하고 그는 씨를 뿌리며 간다.
돌모룻집 영감님이 노란 씨를 뿌리고 지나가면 그 뒤에는 이 동리에서 익살꾼으로 유명한 쌍동이아버지라는 노인이, 연해 우스운 말을 해서는 사람들을 웃기며 묻는 일을 한다. 그는 아직 머리에 상투가 있다. 상투라야 흔적뿐이지마는 머리 가으로 헙수룩하게 희끗희끗한 두어서너 치나 되는 머리카락들이 여러 가지 각도와 곡선을 그려서 흘러내리고 있다. 그는 아마 머리를 안 빗는 모양이었다.
이 노인을 쌍동이아버지라고 일컫지마는, 그 쌍동이는 언제 나서 언제 죽었는지 젊은 사람들 중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그 며느리가 꽤 오래 수절을 하다가 달아나버렸다는 전설 때문에, 그 쌍동이 중에 적어도 하나는 사내였고 또 장가를 들었던 것까지는 추측할 수가 있었다. 그는 지금도 아들도 딸도 없이, 그와는 반대로 생전 말 한마디 없는 마누라하고 단둘이 살고 있다. 살고 있다는 것보다도 죽기를 기다리고 있다.
"젊은 놈들이 어느새에 배가 고파? 우리는 젊었을 적에는 사흘쯤은 물만 먹고 하루 백 오십 리는 걸었다. 그리고도…."
이 모양으로 쌍동이아버지는 인제는 낮이 기울었으니 점심을 먹고 하자는 젊은 사람들을 책망하면서 두 발을 번갈아 호를 그려 씨를 묻고 간다. 젊은 사람들은 이 늙은이의 이러한 평범한 말에도 웃음을 느껴서 소리를 내어 웃는다.
"왜 하루에 천 오백 리는 못 걷고 백 오십 리만 걸었소"?
하고 한 젊은 사람이 빈정대면 쌍동이아버지는,
"해가 짧아서 못 걷지, 걷기가 싫어서 못 걷나."
하고 눈을 부릅뜨며 쌍동이아버지는 항의를 하였다. 그러면 젊은 사람들은 또 웃었다.
"이놈들, 웃으니께니 배가 고프지."
하고 쌍동이아버지는 중얼거렸다.
숭도 웃음을 삼키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외나 외나! 쯧쯧!"
하는 보잡이의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면 소들은 벌써 뽕나무 밑 마지막 이랑을 갈고 있었다. 늘어진 뽕나무 가지가 소에게 스치어, 우지끈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져 떨어진다.
씨 뿌리는 돌모룻집 영감님이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고 발에 묻은 흙을 털면서 밭둑으로 나설 때는 그로부터 오 분이나 뒤였다. 이 노인은 손에 들었던 씨를 다시 뒤웅에 넣는 것을 수치로 알았다. 이 밭에는 씨가 몇 되, 줌으로 몇 줌 드는 것까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맨 끝에 발을 툭툭 털고 밭에서 나서는 이가 쌍동이아버지였다. 이때에는 젊은 사람들은 벌써 담배를 한 대씩 피워물었다.
"누구 나 담배 한대 다우."
하고 쌍동이 아버지가 시꺼먼 손을 내밀었다.
"드리고는 싶지마는 전매국 사람이 볼까봐서 못 드리갔수다."
하고 한 젊은 사람이 반쯤 남은 희연 주머니를 흔들어 보였다.
"영감님은 입만 들고 댕기시우"?
하고 곁에 섰던 젊은 사람이 웃었다.
"에끼 이놈들."
하고 쌍동이아버지는 또 옛날은 제 집에 담배를 심었던 것과 온 동네에서 제 집 담배가 고작이던 것을 자랑하였다. 이것은 담배를 얻어먹을 때마다 쌍동이 아버지가 하는 말이었다.
"호랑이 담배 먹을 적에 말이오"?
하고 희연 가진 젊은 사람이 저 먹던 담뱃대와 희연을 쌍동이아버지에게 준다.
쌍동이아버지는 아직도 뜨거운 대통을 후후 불어 식혀가지고 담배 한 대를 담아서 땅에 떨어진 담뱃불에 붙인다. 그 껍질만 남은 뺨이 씰룩씰룩한다.
봄의 황혼은 유난히도 짧고 또 어둡다. 해가 시루봉 위에 반쯤 허리를 걸친 때부터 벌써 땅은 어두워진다. 마치 촉촉한 봄 흙에서 어두움이 솟아오르는 듯하였다.
산 그늘에 지껄지껄하는 소리를 듣고야 비로소 희끄므레하게 겨리꾼들이 돌아오는 것이 보일 지경이었다.
집들의 굴뚝에서 나던 밥 잦히는 연한 자줏빛 연기조차 인제는 다 스러지고, 주인을 기다리는 밥그릇들은 이빠진 소반 위에서 김을 뿜고 있었다.
"아버지 오나 봐라!"
하는 소리가 부엌에서 나올 때에 어느새부터 맨발이 된 아이들은 강아지들 모양으로 사립문에서 뛰어나왔다. 그래서 아버지를 붙들고 매달리고 끌고 들어왔다.
"허리 아프다."
하고 매달리는 어린것들을 뿌리치기는 하면서도 머쓱해 물러선 어린것의 손을 잡았다.
"다 갈았소"?
"좀 남았어, 넘은집 소가 다리를 절어서."
하고 남편은 만주 조밥을 맛나는 듯이 잔뜩 입으로 몰아넣는다.
어떻게들도 달게 먹는지, 만주 조밥과 쓴 된장을 어른이나 아이나 도무지 아무 소리도 없이 서로 얼굴도 아니 보이는 어두운 방안에서 그들은 꿀같이 달게 먹는다. 전 같으면 만주 조 한 말에 쌀 두 말을 주기로 하고 꾸어 먹지 아니하면 아니되었지마는, 금년에는 허숭이가 만든 조합이 고마와서 만주 조 한 말에 벼 한 말 주기로 하고 농량은 꾸어 먹을 수가 있었다.
씹는 소리도 날 것이 없었다. 씹을 것이 있나. 풀 없는 조밥은 날아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밥 한 그릇을 다 먹는 동안이 모두 오 분이나 될까. 밥으로 곯은 배를 숭늉으로 채우고 나면 가장은 아랫목에 잠깐 기대어 앉아서 부엌에서 아내의 설겆이하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을 한다. 이것이 농부의 유일한 인생의 시간이다.
아이들은 어느덧 이구석 저구석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그들은 하루 종일 뛰놀고 배고파서 지쳤다가 배만 불룩하면 쓰러져 잠이 들고 만다.
벌써 빈대가 나오기 시작한다. 목덜미와 허리가 뜨끔뜨끔하지마는 그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가장은 하루 종일 밭 갈기에, 또 일생 영양 불량과 과로로 등을 방바닥에 붙이기만 하면 천길 만길 몸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허리는 안 아프우"?
하고 눈에 뜨이게 늙고 쇠약해가는 남편을 근심하여 아내는 남편의 허리를 문질러주다가 그 역시 잠이 들어버리고 만다. 그러다가 누구든지 먼저 잠이 깨는 사람이 때 묻은 이불을 내려서 식구들을 덮어주고, 저는 발만을 한 귀퉁이 속에 집어넣고는 잠이 들어버린다.
가장이 눈을 뜰 때에는 부엌에서는 벌써 아내가 밥을 안치고 불 때는 소리가 들린다.잘 마르지도 아니한 수수그루, 조그루는 탁탁 요란한 소리만 내고 연기만 내고 도무지 화력이 없었다.
"오늘은 뉘 밭 가우"?
"허 변호사네 밭 갈 날이야."
"응, 그럼 점심은 잘 먹겠구먼."
"허 변호사네 집에 좀 가보라구. 물이라두 좀 길어주어야지. 다리 없는 여편네 혼자 있으니. 원, 한갑이어머니허구 순이허구는 오겠지마는."
이것이 이 집 내외가 아침밥을 먹으면서 주고받는 말이었다.
"나 밥."
"나 오줌."
하고 아이들이 일어났다.
남편은 발등만 덮는 흙 묻은 버선(이것은 목다리라고 부른다)을 신고 나가는 길에 닭장을 열어준다. 아직도 어둡다. 닭들은 끼륵끼륵 소리를 하며 뛰어나온다.
오늘은 숭이 집 밭을 가는 날이다.
숭이가 겨리를 따라 밭을 나간 뒤에 집에서는 정선이가 선희와 유순과 한갑 어머니를 데리고 겨리꾼들의 점심을 차리고 있었다.
정선은 아직 다리 잘린 자리가 굳지 아니하여 고무다리는 대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서 방에서 마루 출입이나 하였다. 오늘은 정선이도 마루에 나와 앉아서 북어도 뜯고, 상도 보살폈다. 정선이나 선희나 다 손은 낮지마는 눈은 높아서 여러 가지로 반찬을 만들어보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정선이가 손가락 하나를 베고, 선희는 두 군데나 베었다.
"아이구, 그 고운 손을."
하고 한갑 어머니는 그들을 애처롭게 여겼다.
"어떻게 한갑 어머니는 그렇게 무를 잘 썰으셔."
하고 한갑 어머니가 곤쟁이 지지미에 넣을 무우를 썰고 앉았는 것을 보고 칭찬하였다. 기실은 한갑 어머니는 그렇게 잔 채를 잘 치는 정도는 아니었다. 원체 시골서도 너무 잘다고 할 정도의 잔 채는 칠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마는 한갑 어머니의 뼈만 남은 시꺼먼 손가락 끝이 칼날의 바로 앞을 서서 옴질옴질 뒤로 물러가면서, 거의 연속음이라 할 만한 싹둑싹둑 하는 소리를 내며 무우채를 치는 양은 정선과 선희의 눈에는 신기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인내시우, 내 좀 해보게."
하고 선희는 한갑 어머니의 도마를 끌어당기었다.
"또 손 벨라구, 그 고운 손을."
하고 주름잡힌 웃음으로 찌그리며 도마를 내어주었다.
선희는 손가락 끝을 옴질옴질 뒤로 물리면서 무우를 썰었다. 생각과는 달라서 무우가 고르게 썰어지지 아니할 뿐더러 몇번 칼을 움직이지 아니하여서 칼든 팔목이 자갯바람이 날 듯이 아팠다.
"어느새에 팔이 아파"?
하고 정선은 이 일에 대해서는 선배인 태도를 보였다.
"내가 팔이 아프다니"?
하고 선희는 아픈 팔을 참고 승벽으로 무우를 썰기를 계속하였다. 칼이 마음대로 베고 싶은 곳이 베어지지를 아니하였다.
"아차!"
하고 할 때에는 선희의 장손가락 끝에서 빨간 피가 흘렀다. 식칼이 새로 사온 일본 칼인데다가, 숭이가 손수 숫돌에 갈아서 날이 섰던 까닭이었다. 선희의 왼쪽 장손가락 끝이 손톱 아울러 베어진 것이었다.
"이그, 저를 어째"?
하고 한갑 어머니가 싸맬 것을 찾을 때에 정선은,
"에그머니!"
하고 일어나려 하였으나 한 다리가 없음을 깨닫고,
"순아, 순아."
하고 부엌에서 불을 때고 있는 순을 불렀다.
순은 한 손으로 머리에 앉은 재를 떨고 한 손에 연기 나는 부지깽이를 든 채로 부엌에서 나왔다. 정선이가 부르는 소리가 너무 황황하였던 까닭이다.
"방에 들어가 약장에서 가제하고 탈지면하고 또 붕대하고 또 옥도정기하고 내 와."
하는 정선의 명령에 유순은 부지깽이 끝을 땅바닥에 쓱쓱 비벼서 불을 꺼서 부엌에 던지고 통통 뛰어서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건넌방에 질서한 책장과 유리창 달린 약장이 있었다. 이 약장에는 의사 아니고도 쓸 수 있는 약품, 응급 구호품이 들어 있었다. 유순은 다 제 손으로 벌여놓은 것이라 어디 무엇이 있는지를 다 알 뿐더러, 이 속에 있는 약의 용도도 다 알았다. 이를테면, 숭은 원장이요, 순은 간호부였던 것이었다.
순은 정선이가 가져오라는 것을 다 가져다가 정선의 앞에 놓았다.
"자, 손가락 인내."
하고 정선이가 손을 내어민다.
선희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가락을 정선에게로 내어 댄다.
정선은 핀세트로 탈지면을 집어서 옥도정기를 발라서 상한 데를 씻고 가제를 감고 솜을 대고 그리고는 붕대를 감아서 제법 간호부가 할 일을 하였다.
"내가 무어랬어, 팔이 아프거든 쉬라고."
하고 정선은 선희를 책망하였다.
"아야 아퍼, 으스."
하고 선희는 싸맨 손가락을 한 손으로 가만히 쥐어 가슴에 대었다.
해가 높았다. 따뜻하기가 여름날 같았다. 동네에서 달내강을 끼고 한 마장이나 올라가 있는 숭의 밭에서는 소와 사람이 다 땀을 흘릴 지경이었다. 재 놓는 봇돌이라는 젊은 친구는 온통 웃통을 벗어붙이고 재를 놓았다.
"웬 날이 갑자기 더워지누."
하고 말없는 돌모룻집 영감님이 종자 놓던 손으로 이마의 땀을 씻으며 중얼거렸다.
"다 더울 때가 되니까 더워지고, 물 오를 때가 되니까 물이 오르지."
하고 뒤를 따르는 쌍동아버지가 대꾸를 하고는 제 말이 잘되었다는 찬성의 표정이나 보려는 듯이 둘러보았다. 젊은 사람들은 짐짓 못 들은 체를 한다.
"배고플 때가 되니께 배가 고프구."
하고 자귀밟이 중에 어느 젊은 사람이 쌍동아버지 어조로 흉내를 낸다.
모두 "하하하하" 웃는다.
"엑 이놈! 어른 흉내 내면 불알이 떨어지는 법이야, 고얀놈들 같으니."
하고 씨 묻던 발을 탕 구르며 쌍동아버지가 그에게 호령을 한다.
"하하하" 하고 또 웃는다.
모두들 헛헛증이 났다.
숭의 집이면 서울 솜씨로 반찬이 맛나리라고 다들 예기하고 있었다. 그들 생각에 서울사람이 먹는 음식은 도저히 시골음식에 댈 바가 아니라고 믿는다.
강가로 점심을 인 여인네 일행이 오는 것이 보일 때에는, 밭 갈던 사람들의 피와 신경은 온통 혓바닥으로 모이는 것같이 입에 침이 돌고 출출한 생각이 못 견디게 더 났다. 소들까지도 침을 더 흘리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이고 들고 한 여인네들이 점점 가까와지는 것을 힐끗힐끗 바라보며, 저것은 유순이, 저것은 죽었다고 신문에 났다던 산월이라는 선희, 하고 꼽았다. 한갑이어머니는 꼽을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왜 그런고 하면 한갑의 어머니는 그들 자신의 어머니와 같이 낯익은 존재였다.
순이는 밥과 국물 없는 반찬을 담은 광주리를 이고, 한갑 어머니는 국동이를 이고, 선희는 숭늉동이를 이고, 유월이는 막걸리동이를 였다. 유순이나 한갑 어머니는 한 손으로 머리에 인 것을 붙들고도 몸을 자유롭게 놀리지마는, 선희와 유월이는 두 손으로 꽉 붙들고도 몸을 자유로 움직이지 못하였다.
밭머리 잔디 난 곳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선희의 머리에서는 숭늉이 흘렀고 유월의 머리에서는 막걸리가 흘렀다. 숭은 자귀를 밟다 말고 뛰어나와서 여인네들의 인 것을 받아 내려주었다. 다른 젊은 사람들은 그것을 부러워하였다.
숭은 선희가 농가 여자의 의복을 입고 이 지방 부인네와 같이 수건을 폭 눌러 쓴 것을 바라보고 빙긋 웃었다. 선희도 웃었다. 유월이가 곁으로 와서 선희의 손을 잡아 쳐들면서 숭에게,
"이것 보셔요. 이렇게 무우를 썰으시다가 손가락을 베시었답니다. 손톱 아울러 베시었답니다."
하고 싸맨 선희의 손가락을 보인다.
"글쎄, 그 고운 손으로 내가 써는 것을 썰다가 그렇게 되었다누. 에그 가엾어라."
하고 한갑 어머니가 혀끝을 찬다.
"약 바르시었소"?
하는 숭의 말에,
"네. 약 발랐어요. 그러해야 배우지요."
하고 선희도 웃는다.
"학교에서야 그런 유즈풀 아트를 배우실 수 있어요"?
하고 숭은 만족한 듯이 다시 밭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이 나와서 밥을 먹는 동안에 선희와 유월은 정성으로 국과 반찬과 숭늉을 서브하였다. 사람들은 내외하는 예를 잘 차려서 도무지 선희를 거들떠보지도 아니하였으나, 그런 아름다운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은 그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다.
같은 무우국, 같은 곤쟁이 지지미도 보통보다는 맛이 더한 듯하였다. 불과 칠팔 인밖에 안되는 식구지마는 한 광주리 밥과 한 동이 국, 한 동이 막걸리, 한 동이 숭늉을 다 먹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숭이 내놓는 불로연 한 통을 맛나게 피워 물었다.
천지는 더욱 빛이 넘치었다. 달내의 물은 더욱 유쾌하게 흐르는 것 같았다. 소는 콩과 조짚을 섞은 죽을 맛나게 먹으며 입을 우물거렸다.
"어 잘 먹었는걸."
"참, 맛난데."
하고 사람들은 선희가 들어라 하고 모두 칭찬들을 하였다. 정말 맛난 모양이었다.
여인네들은 비인 그릇을 담아서 이고 집 길로 향하였다. 오는 길에도 한갑 어머니와 순이는 길가에 있는 달래와 무릇과 메(마)를 캐었다. 선희의 눈에는 그것이 다 신기하였다. 달래 장아찌라는 것은 본 일이 있지마는 달래 잎사귀와 그것이 땅에 묻혀 있는 양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선희가 얼른 알아보는 것은 냉이였다. 그러나 냉이에 대가 서고 노란 꽃이 핀다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하물며 무릇이란 것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이, 먹는 풀이 많기도 하이!"
하고 선희는 놀랐다.
"그럼. 단오 전 풀은 독이 없어서 못 먹는 풀이 없다는 말이 있지."
하고 한갑 어머니가 설명하였다.
"풀만 먹고도 사오"?
하고 선희가 물었다.
"풀만 먹고야 살겠나마는, 요새야 풀 절반 좁쌀 절반으로 죽을 끓여 먹는 사람도 많지. 그거나 어디 저마다 있나. 방아머리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나물 캐러들 갔다가 허기가 져서 쓰러졌는데, 사람이 가보니께니 입에다가 풀을 한입 물었드래, 먹고 살겠다고. 그렇게 먹고 살기가 어렵다네."
하고 한갑 어머니는 곁에 있는 쑥을 캐어서 흙을 털어 귀중한 물건이나 되는 듯이 그릇에 담으며,
"서울서는 아무리 가난해도 풀 먹고 사는 사람은 없지"?
하고 선희를 쳐다본다.
"그러믄요. 서울서는 풀 먹고 사는 사람은 없답니다. 서울서는 개나 고양이도 쌀밥에 고기 반찬을 먹는 집이 많답니다."
하고 선희는 멀리 서울을 생각하였다. 벌써 떠난 지가 다섯 달이나 넘는 서울을, 번화한 서울, 향락의 서울을. 그 서울과 이 농촌과 무슨 관계가 있는고? 쌀 열리는 나무가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서울사람의 입에는 쌀밥이 들어가는데, 쌀을 심는 농민의 입에는 쌀밥이 안 들어가는 것이 이상도 하였다.
"에그머니, 하나님 무서워라, 원 쯧쯧. 어쩌면 사람도 못 먹는 밥을 개 짐승을 준담. 그래도 벼락이 안 떨어지나."
하고 한갑 어머니는 눈을 크게 뜨고 믿기지 아니하는 것처럼 선희를 보았다.
"사뭇 밥을 쓰레기통에 내다 버린답니다. 그러면 거지애들이 와서 주워가지요."
하고 유월이가 말참견을 한다.
"아이구 아까워라. 없는 사람을 주지, 밥풀 한 알갱이도 하늘이 안다는데."
하고 한갑 어머니는 더욱 놀란다. 그는 일생 쌀밥을 만나본 일도 별로 없지마는 일찍 밥풀 한 알갱이를 뜨물에 버린 일도 없었다. 반드시 집어먹었다.
"밥풀 내버리면 죄 된다."
고 한갑 어머니는 그 어머니 또 그 어머니에게 전해들은 것이었다.
가며가며 네 사람이 뜯은 나물이 한끼 반찬은 넉넉히 되었다. 선희는 땅의 고마움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다들 잘 자시었소"?
하고 마루에 혼자 앉았던 정선은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반가운 듯이 웃으며 물었다. 저는 다리가 없어서 나서 다니지 못하는 것이 슬펐다.
"그럼. 다들 어떻게 잘 먹었는지."
하고 한갑 어머니가 동이를 내려놓으며 대답하였다.
"이거 봐요. 그 국을 다 먹고 술도 다 먹고 밥도 다 먹고 반찬도 핥았다니."
하고 한갑 어머니는 만족한 듯이,
"어디 그렇게 만난 것들을 먹어들 보았나."
한다.
"참 잘들 자셔요."
하고 선희는 정선이와 단 둘이만 있으면 농부들이 먹는 양을 흉이라도 보고 싶었다.
"아이그, 어쩌면."
하고 순이와 유월이가 들어다 보여주는 비인 그릇들을 보며 정선은 만족한 듯이 웃었다.
농촌의 봄은 이렇게 일이 많으면서도 화평하였다. 그러나 정선의 마음은 결코 매양 화평하지는 아니하였다.
살여울에 오기는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 눈이 무릎 위에까지 올라오던 날이었다. 동네 앞까지는 자동차로 와서 거기서 집까지는 숭이가 정선을 업고 들어왔다. 동네 사람들이 백발치듯한 속에 남편의 등에 업혀서 오는 정선은 한없이 부끄러웠다. 왜 죽지를 아니하고 이 망신을 하는고 하고 자기를 살려낸 하느님을 원망하였다.
집에 온 후에 지금까지 숭은 정선을 마치 늙은 아버지가 어린 딸을 소중히 여기는 모양으로 소중히 여겼다. 대소변 시중도 숭이가 집에 있는 동안 결코 남의 손을 빌지 아니하였다. 대소변 그릇은 반드시 숭이가 손수 버리고 부시었다. 그만큼 숭은 정선을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정선의 마음은 더욱 괴로왔다. 정선의 지나간 죄된 생활이 양심을 찌르는 것도 있고, 제 몸이 병신이라는 것이 남편에게 대하여 미안한 것도 있지마는 다만 그것뿐이 아니었다. 정선은 태중이었다. 이 뱃속에 든 아이가 나는 날이 정선에게는 사형 선고를 받는 날인 것같이 생각혔다.
기차에 치이고 다리를 잘라도 뱃속에 든 생명의 씨는 떨어지지를 아니하고 자라고 있었다. 정선은 이 아이가 남편을 닮기를 바라고 빌었다. 그러나 그 아이가 남편을 닮을 리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 아이가 남편을 닮을 리는 없었다. 그 아이는 꼭 김갑진을 닮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 정선은 앞이 캄캄해짐을 깨달았다.
만일 정선이가 다리가 성하다면 벌써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달아나면 그가 어디로 가나? 생각하면 죽음의 나라밖에는 갈 곳이 없었다.
입덧이 나도 입덧 난다는 말도 못하였다. 입맛이 없고 상기가 되고 간혹 구역이 나더라도 그것을 다만 오래 자리에 누워 있기 때문에 소화불량이 된 것으로 알리려고 할 뿐이었다.
그렇지마는 오 개월이 넘으면서부터 배가 불렀다. 나와 다니지 아니하기 때문에 남의 눈에는 잘 뜨이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남편의 눈에는 아니 뜨일 리가 없었다. 남편이 모르고 그러는 것인지, 알고 그러는 것인지 모르거니와 남편은 도무지 아무러한 말도 없었다. 도리어 그에게 남편이,
"이년, 이 뱃속에 있는 것이 어떤 놈의 아이냐"?
하고 야단을 해주었으면 견디기가 쉬울 것 같았다.
뱃속에 어린애가 꼬물꼬물 놀 때에 정선은 어머니의 본능으로 어떤 기쁨을 깨닫지마는 다음 순간에는 그것이 무서움으로 변하였다. 아이는 어미 생각도 모르고 펄떡펄떡 놀았다.
"김갑진이 닮아서 이렇게 까부나."
하는 생각을 아니하지 못하는 신세를 정선은 슬퍼하였다.
만일 어머니가 살아계시다면 이런 설화라도 하련마는 하고 정선은 슬퍼하였다.
게다가 정선에게 불안을 주는 것은 선희와 순의 존재였다. 정선이가 살여울 온 지 한달 동안은 선희나 순이나 다 정선의 집에 있었으나 숭이 정선의 심경을 동정하고 그럼인지 숭은 한갑의 집을 수리하고 한갑 어머니, 선희, 순을 그 집에 거처하게 하고 땅이 풀리고 밭갈이나 끝이 나면 유치원 겸 선희의 주택을 짓기로 계획하였다.
이처럼 선희와 순을 딴 집에 있게 한 것을 정선은 대단히 고맙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뱃속에 아이가 자라는 대로 선희와 순은 남편에게 대하여 무서운 적인 것같이 정선이에게 생각혔다.
"아아, 나는 어찌하면 좋은가."
하고 정선은 혼자서 울 때가 많았다.
정선은 고무다리를 쓰는 연습을 하였다. 아무도 없는 데서 하는 것이 예였다. 남편이 붙들어주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유월이가 보는 데서도 이 고무다리를 대기가 싫었다. 이 고무다리를 대고 일생을 살아가지 아니치 못할 것을 생각하면 하늘과 땅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숭이 정선을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극진하였다.
날 따뜻한 어느 일요일 아침에 숭은 정선에게 고무다리를 대어주고 마쓰바즈에라고 일본말로 부르는 겨드랑에 끼는 지팡이를 숭이가 들고 한 손으로 정선을 부액하여 가지고 강가로 산보를 나갔다. 유월이도 데리지 아니하고.
이날은 온 동네가 하루 쉬는 날이다. 사람도 쉬고 소도 쉬는 한달에 두 번 있는 날이다. 농부들도 이날만은 늦잠도 자고 집에서 오래 못 만나던 자녀들도 만나는 날이다. 다른 날은 아이들이 눈을 뜨기 전에 나가고 아이들이 잠든 뒤에 들어오는 것이 상례일 뿐더러 설사 눈뜬 뒤에 나가고 잠들기 전에 들어온다 하더라도 불이 없는 방안에서는 서로 음성은 들어도 용모는 보기가 어려웠다. 한 집에 보름 만에 한번 낯을 대하는 기쁨이 이날에 있는 것이었다.
숭은 이날은 면회 일체를 사절하고 정선이와 단 둘이만 있는 날로 정해놓았다. 그래서 오늘은 정선에게 밭 구경과 야채 구경도 시킬 겸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다리가 아프지 않소"?
하고 숭은 언덕을 다 내려와서 아내에게 물었다.
"아프지는 않은데, 좀 내둘려."
하고 정선은 한 팔을 남편의 어깨에 걸치고 몸을 쉬면서 말하였다.
"방속에만 있다가 나오니까 그렇지. 힘들거든 도로 들어갈까"?
하고 숭은 팔로 정선의 허리를 껴안아서 아무쪼록 몸의 무게가 아픈 다리로 가지 아니하도록 애를 썼다.
그러나 그 손끝이 정선의 배에 닿을 때에 배가 부르다 하는 것을 숭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정선도 통통하게 부른 제 배에 숭의 손이 닿을 때에 부지불식간에 몸을 비켰다. 그리고 낯을 붉히며,
"내 배가 부르지"?
하고 웃었다. 쓰기가 쑥물과도 같은 웃음이었다.
숭은 얼른 허리에서 손을 떼고,
"좀더 걸어갑시다."
하고 정선을 끌었다.
정선은 고개를 숙여 강물을 들여다보면서 남편이 끄는 대로 발을 옮겼다. 고무다리가 도무지 제 다리 같지를 아니하여 말을 잘 듣지 아니하였다.
정선은 뱃속에 아이가 펄떡펄떡 움직임을 느꼈다.
"여기가 작년에 우리 둘이 앉았던 데요. 자 여기 좀 앉을까."
하고 숭은 저고리를 벗어서 풀 위에 깔았다. 마른 풀 잎사귀 사이로 파릇파릇한 새 잎사귀들이 뾰족뾰족 나오고 개미들도 나와 돌아다녔다. 물속에는 천어들이 꼬리를 치며 오락가락하였다. 강 건너편에는 다른 동네 사람들이 실은 소 바리도 몰고 가고 더 멀리서는 밭 가느라고 "외나 외나!"하고 보잡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 철로길에는 길다란 짐차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숭이와 정선은 말없이 앉아서 강물을 들여다보았다.
기쁨에 찬 봄의 강물은 소리없이 흘렀다. 청춘이 흐르는 것이다. 인생이 흐르는 것이다.
살구꽃 한 송이가 떠내려온다. 잔 고기들이 먹을 것인 줄 알고 모여들어서 꽃을 물어 끌다가는 놓아버린다. 꽃은 물에 사는 모든 생명에게 봄 소식을 전하는 체전부 모양으로 고기들이 붙들면 붙들리고 놓으면 떠내려간다. 숭과 정선의 눈은 그 꽃송이를 따라서 흘러 내려갔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만은 꽃송이를 따라서 한가하게 흐르지를 못하였다.
정선의 뱃속에서는 운명의 어린아이가 펄떡거렸다.
"내가 왜 살아났어"?
하고 정선은 남편을 돌아보았다.
"왜 또 그런 소리를 하오"?
하고 숭은 정선의 눈물 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난 죽고만 싶어요. 내가 살면 무얼하오. 앞에 닥치는 것이 불행만이지. 당신에게는 귀찮은 짐만 되고. 지금이라도 죽고만 싶어."
하고 정선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왜 그러오? 여기서 이렇게 재미있게 살지. 봄이 오면 봄 재미, 여름이 오면 여름 재미. 그리고 당신 몸이나 추서면 무엇이든지 당신 하고 싶은 것이나 하구려. 아이들을 가르치든지, 부인네들을 가르치든지, 또 음악을 하든지, 글을 쓰든지 무엇이든지 당신 하고 싶은 것을 하구려. 그러느라면 또 재미가 붙지 않소? 그리고 또 중요한 일이 있지, 당신 할일이."
하고 숭은 아내의 마음을 눅이려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무슨 일"?
하고 정선은 코를 풀면서 물었다.
"나를 사랑해주고 도와주는 것이지."
하고 숭은 정선의 낯에 덮인 머리카락을 올려주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오"?
하고 정선은 느껴 울었다.
"왜"?
"내가 당신을 사랑할 권리가 있어요"?
"그럼. 당신밖에 나를 사랑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 없지, 이 하늘 아래는."
"내가 이렇게 다리 하나 없는 병신이라도."
"다리 하나 없는 것이 무슨 상관이요? 다리가 하나 없으니까 당신이 나만을 사랑할 수 있지 않소? 원래 당신은 너무 미인이거든. 이제 다리 하나가 없으니까 당신이 완전히 내 것이 되지 않았소? 그러니까 나는 만족이오."
정선은 더욱 울었다. 숭의 말은 정선에게 위안을 주느니보다는 도리어 고통을 주었다. 왜? 정선이가 숭에게 대하여 미안한 것은 다리 하나 없는 것보다도 세상에 대하여 숭을 망신시킨 것이었다. 그보다도 뱃속에 있는 갑진의 씨였다. 그보다도 남편 아닌 사내의 씨를 배에 담게 한 제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것까지는 남편 앞에 자백할 수가 없었다. 남편이 안다 하더라도, 아니 남편이 미리 알고 있을 줄을 알기 때문에 더욱 자백할 수가 없었다. 남편의 앞에서 그 말을 자백하고 나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었다. 다시 어떻게 그 얼굴을 들어 남편을 보이랴.
정선은 정조에 대하여 일시 퍽 너그러운 생각을 품었던 일이 있다. 그것이 아마 시대사조라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다리를 자르고 여러 달 동안을 가만히 누워서 안으로 스스로 살펴보면 볼수록 제가 한 일은 죄였다.
남편을 둔 아내가 다른 사내를 가까이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양심이 허락하지를 아니하였다. 게다가 뱃속에 그 죄의 증거가 들어 날이 갈수록 달이 갈수록 자라는 것은 마치 정선의 죄를 벌하는 하나님의 뜻인 것 같았다. 하나님이란 것이 없다 하더라도 자연의 법칙인 듯하였다.
뱃속에 든 아이는 나올 날이 있을 것이다. 그 아이가 나오는 날은 정선의 파멸이 오는 날이 아니냐.
정선은 아무리 하여서라도 이 아이의 문제를 미리 꺼내어서 남편의 참뜻을 알려고 오래 두고 벼르던 입을 여러번 열려 하였다. 그러나 번번이 늘 못하였다. 오늘은 어떻게 하든지 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고 정선은 생각하였다.
"여보시우!"
하고 정선은 고개를 들었다.
"왜"?
하고 숭도 무슨 생각에서 돌아왔다.
"내 뱃속에 있는 아이가 당신 아이가 아니오!"
하고 힘있게 말하였다. 그리고 숭의 입에서 나올 말을 차마 들을 수 없다는 듯이 두 손으로 귀를 꽉 막고 숭의 무릎에 이마 비비고 울었다.
숭은 죽은 듯이 한참이나 말도 없고 몸도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아마도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벌써 다 아는 일이다. 숭은 다만 아내의 배에 든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 줄을 알 뿐더러 그것이 누구의 아이인 것을 증거 세우기 위하여 서울 있는 동안에 아내와의 동침을 피하였다. 그러하건마는 정선의 입에서 이 말을 들을 때에는 벼락을 맞은 듯한 생각이 없지 아니하였다. 무릎 위에 엎드린 정선이가 제 아내인 것 같지 아니하고 무슨 지극히 더러운 물건인 것 같았다.
"내가 정말 정선을 아내로 사랑하나"?
이러한 의문까지도 일어났다. 숭은 정선에게 대한 제 감정을 한번 더 분석해 보고 재인식해보았다.
"사랑인가"?
하고 스스로 물으면 숭의 양심은 서슴지 않고 "그렇다"라는 대답을 잘 해주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정선은 희생자다. 불쌍한 인생이다. 육체로는 병신이요, 사회적으로는 버려진 사람이다. 그뿐더러 그의 성격이나 가정의 교육이나 학교의 교육이 그를 굳센 한 개성을 만들기에는 합당치 아니하였다. 그는 혼자 제 운명을 개척해갈 힘을 가지지 못하였다. 정선을 끝까지 보호해갈 사람은 숭뿐이었다. 만일 숭이 정선을 버린다면 정선은 그야말로 죽음의 길밖에 취할 길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숭은 생각한다. 수색서 벌써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마는 숭도 사람이요, 젊은 사람이었다. 그의 마음은 늘 괴로왔다. 다만, 그 괴로운 감정을 굳센 뜻의 힘으로 눌러온 것이다.
그러다가 정선의 입으로 배에 든 아이가 숭의 씨가 아니라는 말을 들은 숭은 거의 감정과 뜻의 혼란을 일으킬 만큼 괴로왔다.
숭은 눈을 감았다. 넘치는 봄빛을 보았다. 흐르는 강물을 보았다. 그리고 무릎 위에서 몸에 경련을 일으켜 우는 정선을 보았다.
숭은 정선을 껴안았다. 힘껏 껴안고 정선의 입을 맞추었다.
"여보, 내가 당신을 수색에서 다시 아내로 삼았소. 두번째 혼인을 하였소. 당신의 배에 든 아이는 나와 혼인하기 전에 든 아이요. 그리고 하느님이 내게로 보낸 아이요. 나는 그 아이를 내 자식으로 일생에 길러주고 사랑해줄 의무를 하느님께서 받았소. 여보, 이로부터는 우리 둘이 서로 충실한 부부가 됩시다. 지나간 기억은 모두 저 강물에 띄워 보냅시다. 자 일어나오, 남들이 보면 우습게 알겠소. 우리 일어나서 좀더 산보합시다. 자, 자."
하고 정선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정선의 근육은 아주 힘이 빠진 것 같았다. 정선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았다. 다만 한없이 눈물만 흐를 뿐이었다. 전신이 모두 눈물로 녹아나오는 것 같다.
정선의 배에 든 아이는 놀기를 그쳤다. 어머니의 슬픔을 아는 듯하였다.
하늘에서는 종다리의 울음이 들려왔다.
"조리조리 조리오, 조리조리 조르륵."
하는 종다리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저 종다리 듣소"?
하고 숭은 정선을 안아 일으키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목발과 숭의 저고리가 땅에 산란하게 놓여 있었다.
살여울 동네에 밭갈이가 끝난 뒤에는 여러 가지 큰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 큰일은 다 살여울이 건전하게 자라기에 필요한 큰일이었다.
첫째 큰일은 유치원을 짓는 것이었다. 그 경비는 선희가 자담하였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유치원의 뜻이 철저하지 못하였다. 아이들을 모아서 가르친다니 서당인가 하고 생각하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선희가 제 돈 가지고 동네 사람 위하여 집을 짓는다는 데는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유치원 자리는 동네와 숭의 집 사이에서 강변으로 향한 경사지였다. 이 땅도 선희가 제 돈을 내고 유 산장에게서 샀다. 이 유 산장이라는 이는 동네의 부자로 도무지 숭의 사업에 흥미를 아니 가질 뿐더러 도리어 동네 사람들을 버려 준다고 하여 내심으로 불평을 품은 노인이었다. 동네에 협동조합이 생김으로부터 장리와 장변을 놓아먹지 못하는 것이 그의 불평의 원인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작년까지도 산장영감 집에 가서 백배 천배하고 양식이나 돈을 꾸어오려고 하였으나 지금은 그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연 산장 집에서 그들 발이 멀어졌다. 그리고 노상에서 만나더라도 예전같이 굽신굽신하지는 아니하였다. 이것이 다 유 산장에게는 큰 불평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마는 그러한 이유로 도무지 값 가지 아니하는 땅, 밭도 안되고 논도 안되는 산판을 좋은 값에 유치원 자리로 팔지 아니하도록 그렇게 고집하지도 못하였다. 그 고집보다도 이욕이 큰 것이었다.
이 터는 숭의 집보다도 좀더 위치가 높아서 강물은 물론이요 벌판과 기차 다니는 것이 잘 바라보였다.
유치원은 네 간 방이 둘과, 그 부속 건물로 선희가 거처할 두 간 방 하나와 부엌과 변소와 욕실이었다. 그리고 백 평쯤 되는 마당과 잔디판을 만들 경사지가 삼백 평 가량이나 있었다.
건축은 약 삼주일 만에 필역이 되었다. 지붕을 양철로 이어 볕이 비치면 먼 데서도 번쩍번쩍하는 것이 보였다.
동네 사람들은 이 집이 대단히 좋다고 칭찬하였다.
선희는 숭에게 청하여 유치원의 낙성 연회를 베풀기로 하였다. 동네에 아이 있는 집에서 남자 한 사람 부인 한 사람씩과 만 네 살 이상으로 보통학교에 못 가는 남녀 아동을 전부 초대하였다. 그리고 인절미와 갈비국과 나박김치로 모인 사람들을 대접하였다.
청한 사람들 중에는 아니 온 사람도 있었다. 유 산장은 물론 그중의 하나다. 그밖에도 노름꾼으로 유명한 잇자라는 별명을 가진 이며, 나리라는 별명을 듣는 면소와 주재소에 잘 다니는 사람도 물론 오지 아니하였다.
잇자라는 사람은 속에 맺힌 것은 없으나 무슨 일이든지 남이 하는 일이면 험구하기를 좋아하고 투전 화투에는 닷새 엿새 연일 밤을 새우고 십리 백리 어디든지 따라갈 성의를 가지면서 쓸데 있는 일은 도무지 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이도 안 닦고 세수도 별로 아니한다. 홀아비가 되어도 장가도 들려고 아니하고 아들 삼 형제의 등에 얹혀서 먹고 사는 위인이다.
그러나 잇자에게는 쓸데도 없는 대신에 별로 득도 없다. 하지만 나리는 그와 달라서 말도 잘하고 얼굴도 깨끗하고, 인사도 밝고, 좀 아니꼽지마는 이런 동네에서는 드물게 보는 신사 타이프의 인물이다. 그는 중절모를 쓰고 물은 날았을망정 양복도 한 벌 가진 위인이다. 이 때문에 그는 주사 또는 나리라는 존칭을 받는다.
그렇지마는 이 나리는 그의 쉬임없이 반짝거리는 눈이 보이는 모양으로 도무지 재주가 많고 얕은 꾀가 많은 사람이어서 농사도 아니하고 재산도 없건마는 어떻게 어디서 누구를 속이는지 여편네에게 인조견 옷가지라도 입히는 귀족적 생활을 하고 있다. 이 군이 숭의 찬성자가 안될 것은 물론이다. 아마 잇자가 숭과 선희의 험구를 쉴새없이 탕탕 하는 모양으로 나리는 속으로 쉴새없이 무슨 흉계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유치원 개원일에는 아이들이 열 두엇 왔다. 아침 아홉시라고 시간을 정하였으나 아홉시라는 것을 알 시계도 아이들의 집에는 없으려니와 또 시간을 지키자는 생각도 아이들의 어버이의 머리에는 없었다. 그래서 출석하는 시간을 일정하기는 어려웠다. 그 시간은 아이들이 밥을 다 먹고 난 때일 수밖에 없었다.
첫날에는 선희는 목욕탕에 물을 끓여놓고 아이들 목욕을 시켰다. 그 몸의 때! 그것은 작년 여름 물장난할 때에 묻힌 때를 계속한 때였다. 사내들은 대개는 머리를 깎아서 그렇지도 않지마는 계집애들의 머리에는 한두 애를 빼고는 머리에 이가 끓었다. 귓머리를 들면 서캐가 하얗게 붙어 있었다.
선희는 처음 몇애는 전신과 머리에 비누질을 하여서 깨끗이 씻었으나 무릎, 팔꿈치 같은 데 붙은 때는 거의 각질로 변하여 무엇으로 긁어버리기 전에는 쉽게 씻어지지를 아니하였다. 게다가 아이들은 물에서 철벅거리고 장난하기는 좋아하지마는 때를 씻기는 싫어하였고 더구나 머리를 씻길 때에는 싫다고 떼를 쓸 뿐더러 비눗물이 눈에 들어가기나 하면 으아 하고 울고 발버둥을 쳤다. 그래서 선희는 남은 아이들을 대강 씻기어 목욕을 싫어하는 생각이 나지 않기를 주의하였다.
그렇게 씻는 것도 열 두엇 아이를 씻고 나니 선희는 전신이 땀에 뜨고 팔목에 자갯바람이 일 지경이었다.
선희는 마지막 애를 옷을 입히고 나서 굴젓같이 된 목욕물을 보았다. 수도가 없기 때문에 마지막 아이들을 더러운 물에 씻긴 것이 애처로왔다.
아이들은 목욕으로 얼굴이 빨갛게 되어 가지고 뒤에 온 다른 아이들보고,
"우리는 목깡했단다 야."
하고 자랑들을 하였다.
선희는 악기가 없는 것을 걱정하여 정선과 의논하고 정선의 피아노를 가져오기로 하였다.
그리고 학교에 다닐 때에 보육과에서 하는 것을 본 대로 아이들에게 노래도 가르치고 장단도 가르쳤다. 선희는 있는 정성과 있는 힘을 다하여 아이들을 가르치기에 힘을 썼다.
선희는 아이들을 날마다 접하는 동안에 교육방침을 하나씩 하나씩 발견하였다. 그 교육방침은 아이들의 결점을 기초로 하는 것이었다.
선희가 발견한 살여울 아이들의 결점은 이런 것이었다.
1.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구별하는 생각이 부족한 것
2. 시간 관념, 기타 질서의 관념이 없는 것
3. 어른의 말에 복종하는 관념이 부족한 것, 즉 권위를 두려워하는 생각이 부족한 것
4. 단체생활의 훈련이 전혀 없어 아이들이 심히 개인적 이기적인 것
5. 대개로 보아서 재주가 없고
6. 몸의 발육이 좋지 못한 것
등이었다.
선희는 이러한 결점을 제 힘으로 교정해보겠다는 생각을 내었다.
열흘이 못하여 모이는 아이가 이십 명이나 되었다. 아이들이 이렇게 느는 까닭은 아이들끼리 서로 선전하는 것도 있지마는 선희가 아이들에게 콩죽 점심을 준다는 것과 집에서 말썽만 부리던 아이녀석들을 집어치우는 것이었다.
날마다 이를 닦고 세수를 하는 것이라든지, 코를 주먹으로 씻지 아니하는 것이라든지, 행렬을 지어 단체행동을 하는 것이라든지, 싸움이 준 것이라든지, 선희는 제 노력과 효과가 하나씩 하나씩 나타나는 것이 기뻤다. 몸이 곤하지마는 선희는 비로소 쓸데 있는 일을 한다는 재미를 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바쁘고 피곤한 것으로 가끔 일어나는 청춘의 괴로움을 잊는 것도 기뻤다.
그러나 선희의 이 봉사의 생활에도 항상 기쁨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커다란 집에 혼자 밤에 있느라면 가슴속에는 청춘의 괴로움이 일어났다. 특별히 숭에게 대한 애모의 정은 누르면 누를수록 더욱 불길이 일어나는 듯하였다.
선희는 숭을 대하면 정신이 꿈속에 드는 듯하였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것은 선희가 일생에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선희는 일기에 이러한 글을 적었다.
"임 찾아 가는 길에는
땀이 흐르네.
등과 이마에 야속히도
땀이 흐르네.
임과 마주 앉으면
고개 숙이고
이마의 땀만 씻었네.
말은 못하고 못나게도
아아 땀만 씻었네.
땀만 씻다가
<갑니다> 하고 일어나 왔네."
또 이런 것도 썼다-
"그대 뵈옵고 무슨 말
하던고?
한 말 없습니다.
<갑니다> 하고 어엿이 나오다가
되돌아서서,
한 말씀만 더 할까 하다
못하였습니다.
두 번이나 세 번이나,
그러나 못하였습니다."
또 이런 것도 있었다-
"임은 바다 저 편에 섰네,
건너가지 못할 바다.
임은 하늘 저 위에 있네,
오르지 못할 하늘!
아아 안 볼 임을 뵈었어라,
아아 내 임이여."
또 선희는 혼자 등불 밑에 앉아서 숭을 생각하면서 영문으로 이러한 편지도 썼다.
"사랑하는 어떤 이여!
아이들이 다 돌아가고 나 혼자 있느라면 그 <어떤 이>가 내 가슴속에 걸어들어옵니다. 들어와서는 내 가슴을 꽉 채웁니다. 마치 그이가 문 밖에 서서 창틈으로 엿보시다가 내가 혼자 있는 틈을 타서 들어오시는 것 같습니다.
어디를 가나 그 어떤 이는 나를 따르십니다. 나는 그 어떤 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실컷 다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될 줄을 나는 잘 압니다. 나는 그 어떤 이의 발에 엎드려 실컷 입을 맞추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 뒤에서 어떤 소리가 "안된다!" 하고 나를 막습니다.
때때로 이러한 뜨거운 욕심이 일어납니다. 그 어떤 이를 내 품에 꽉 안고 아무도 내 그이를 안든지 그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든지 도무지 간섭하지 못할 자유의 세계로 달아나고 싶다고. 아아 실로 내 가슴속에 싸고 싸둔 말씀을 그이에게 한번 토설만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오오 그것은 안됩니다!"
이것은 영문 본문을 번역한 것이다.
이것을 보더라도 선희가 어떻게 숭을 사랑하는지를 알 것이다. 그러나 선희는 비록 차중에서 취한 김에, 또 기생인 것을 빙자하고 한번 숭에게 매달려 입을 맞춘 일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은 그러한 말이나 뜻을 내어서는 안된다고 굳게 맹세하였다.
이 까닭에 선희는 이웃에 있으면서도 일이 있기 전에는 숭의 집을 찾지 아니하였고, 찾더라도 숭이 집에 있을 때를 피하였다. 그러면서도 숭이 집에 있기를 바라는 선희의 정은 애처로왔다. 숭이 찾아와주기를 바라는 정은 간절하였다. 이 모순된 감정은 선희를 볶았다.
여름도 거의 다 지나간 팔월 어느날, 이날은 말복의 마지막 더위라고 할 만한 무더운 날이었다. 낮에는 여러번 우뢰, 번개를 함께 한 소나기가 지나갔건만 밤이 되어서는 도로 무더웠다.
유치원 아이들도 다 돌아간 뒤에는 이 외따른 유치원에는 사람 기척도 없었다.
선희는 저녁을 먹어치우고는 불도 켜놓지 않고 혼자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이 곡조, 저 곡조 생각나는 대로 쳤다. 쳐야 들어줄 사람도 없는 곡조를.
사람을 두라는 것도 아니 두고 선희는 하면 철저하게 한다고 하여 밥 짓는 것, 빨래하는 것, 방 치고, 마당 치는 것, 아울러 다 제 손으로 하였다. 그리고 잘 때에만 젊은 여자 혼자 자는 것이 도리어 의심거리가 될까 하여 유월이를 불러다가 같이 잤다.
선희는 피아노를 치는 것도 지쳐서 부채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비에 불은 달냇물이 소리를 내며 흘러내려가는 것이 들렸다. 달내의 바리톤 사이로 맹꽁이 테너와 먼 산의 두견조의 애끊는 알토도 들려오고 모기와 풀벌레들의 각가지 소프라노도 들려왔다.
음산한 바람결이 한번 휘돌면 굵은 빗방울이 콩알 모양으로 뚝뚝 떨어졌다. 하늘에는 구름이 뭉게뭉게 날아 달아났다. 땅 위에는 비록 바람이 많지 아니하더라도 하늘로 올라가면 센 모양이었다. 그뿐더러 검은 구름층이 간혹 터질 때면 밑의 구름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흘러들어가는데 그 위층 구름은 북으로 북으로 흘러가고 또 잠깐만 지나면 구름의 방향이 바뀌었다.
하늘은 마치 뜻을 정치 못한 애인의 마음인 듯하였다. 게다가 이따금 어슴푸레한 달빛이 흐르는 것은 선희의 마음을 한없이 어지럽게 하였다.
갑자기 천지가 회명하여지고는 멀리 남섬에서 줄번개가 일어 마음심자 초를 한없이 그리며 동으로부터 서로 성급하게 달아난다. 그것은 하늘의 네온사인이요, 번개의 사랑의 암호와 같았다. 이 우뢰 소리도 아니 들리는 <소리없는 번개>는 선희의 마음을 더욱 괴롭게 산란하게 하였다.
마치 하늘과 땅의 이 모든 소리와 빛과 움직임은 무슨 큰 괴로운 뜻을 표현하려는 큰 사람의 번민과 같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뜻이 통하지 못하여 구름의 방향과 속력을 고치고 번개의 획과 길이를 고치는 것 같았다. 그대로 뜻이 통하지 못하매 혹은 번개도 침묵해 버리고 혹은 굵은 빗방울도 뿌렸다. 그것은 애타는 큰 사람의 눈물인가.
선희는 이러한 속에 혼자 서서 슬퍼하였다.
선희의 숭에게 대한 애모는 갈수록 더욱 깊어갔다. 가슴에 감추고 나타내지 아니하는 것이 더욱 괴로왔다.
"못 볼 임을 보았네."
하는 것이 선희의 괴로움의 전체였다. 이 사랑은 죽이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영원히 죽이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선희는 북으로 숭의 집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반쯤 등성이에 가리었으나 건넌방에서 불이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 건넌방에서는 숭이가 책을 보거나 사업설계를 하거나 협동조합 기타 공중, 공동사업의 문부를 꾸미거나 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가슴속에 선희의 그림자가 있을까? 선희는 이렇게 생각해본다. 돌과 같이 굳고 얼음과 같이 찬 듯한 숭의 가슴속에 선희의 그림자가 있을 것 같지 아니하였다.
"아아 못 볼 임을 뵈었네."
하고 선희는 몸을 돌이켜 숭의 집 아닌 방향을 돌아보았다. 구름은 여전히 방향을 잃고 흐르고 남섬 번개는 애타는 네온사인으로, 알아주는 이 없는 암호를 그렸다가는 지워버리고 그렸다가는 지워버렸다.
"아아 애타는 번개여!
끝없는 괴로움의 암호여
알아줄 이도 없는 암호를,
썼다는 지우고 썼다는 지우네.
아아 임 그리는 내 마음과도 같아라."
이렇게 중얼거려보아도 시원치 아니하였다.
선희는 금시에라도 숭에게로 달려가서 그 가슴에 매어달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 끝이야 어찌되든지 하고 싶은 말 다 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선희는 그의 습관대로, You should not do that.(못한다!) 하는 종아리채로 마음의 종아리에서 피가 흐르도록 후려갈겼다. 선희는 살여울 온 뒤로 몇번이나 이 종아리의 상처로 전신의 피가 다 흘러내려도 돋는 사랑의 싹은 끊어버릴 길이 없었다.
"가는 정을 어찌하리. 돋는 사랑을 죽이는 것으로 일생의 길을 삼자."
하고 선희는 걸음을 빨리 걸으며 혼란한 구름의 길과 썼다가 지워버리는 번개의 암호를 바라보았다.
유월이가 왜 안 올까?
선희는 제가 그렇게 많은 남자의 희롱을 받으면서 이렇게 순진한 생각을 남긴 것을 스스로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여자의 사랑은 아무 남자에게나 가는 것이 아니요, 반드시 어떤 특별한 남자에게만 가는 것인가 하였다. 다른 남자들을 대할 때에는 늘 냉정할 수가 있었다. 혹 얼마쯤 마음이 끌리는 남자가 그동안에도 없지는 아니하였지만 언제나 누르면 눌러지고 참으면 참아졌다.
그러나 숭을 대할 때에는 마음과 몸을 온통 흔들어놓는 것만 같아서 마치 배를 탄 사람이 배와 함께 아니 흔들릴 수 없는 모양으로 도저히 스스로 제 몸과 마음의 안정은 줄 길이 없었다.
"내 사랑은 임을 위해 있었네.
임을 못 본 제 없는 듯하더니
임을 뵈오매 전신을 태우네.
그것이 마치
봄이 오매 아니 피지 못하는 꽃과도 같아라."
하는 것과 같았다.
"그렇다 하면 조물의 악희로다.
하필 못 사랑할 임을 사랑하게 지은고"?
이러한 것과도 같았다.
이때에 유월이가 뛰어왔다.
"선생님 어서 오시라구요."
하고 유월이 씨근거렸다.
"왜? 왜 누가 날 오래"?
하고 선희는 괴로운 꿈에서 깨었다.
"우리 댁 선생님이요. 아주머니께서 배가 아프시다고."
하고 유월은 영감마님이니 마님이니 하는 말을 버린 것이 한껏 기쁘면서도 한껏 어색하여 함을 아직 버리지 못한다. 더구나 어려서부터 상전으로 섬기는 정선을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마치 큰 죄나 범하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가 배가 아프시다고"?
"네에. 아까 저녁 잡수실 때부터 좀 이상하다고 하시더니 지금은 아주 대단하셔요."
하고 유월-지금 이름은 을란-은 말을 하면서도 염려되는 듯이 연해 집을 바라보았다.
선희는 문들을 닫고 우산을 들고 또 약이랑 주사약이랑 든 가방을 들고 아주 의사 모양으로 을란을 따라 숭의 집으로 갔다.
이러한 급한 일이 있어서 가는 길이건만 숭의 집이 가까울수록 가슴이 울렁거렸다. 을란을 따라왔던 강아지가 앞에서 돌아와가지고는 콩콩 짖었다. 숭은 마루 끝에 나서서 어두운 마당을 내려보았다. 등으로 불빛을 받고 선 숭의 모양은 선희가 보기에 마치 동상과 같았다.
"정선이가 배가 아파요"?
하고 선희는 침착하기를 힘쓰면서 묻고 숭의 힘 있는 팔을 스치며 마루에 올라섰다.
"대단히 아픈 모양인데요."
하고 숭은 선희를 앞세우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선희 왔어"?
하고 모기장 속에 누운 정선이가 선희를 보고 반갑게 말한다.
"응, 배가 아퍼"?
하고 선희는 모기장 곁에 꿇어앉는 자세로 정선을 들여다보았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하고 정선은 미처 선희의 말에 대답도 하기 전에 진통이 왔다. 정선은 낯을 찌푸리고 안간힘을 썼다. 그것이 일분도 못 계속하건마는 정선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돋았다.
"아이고, 아퍼. 이를 어째!"
하고 진통이 지나간 뒤에 정선은 슬픈 듯이 선희의 손을 잡았다.
"기쁨을 낳는 아픔이 아니냐. 참어. 그것이 어머니 의무 아냐"?
하고 선희는 위로하였다. 그러나 말끝에 곧 후회하였다.
정선은 과연 기쁨을 낳는 것일까? 저주를 낳는 것이 아닐까 하였다. 그런 생각을 하니 정선이가 불쌍하였다.
정선의 진통은 밤이 깊어갈수록 차차 도수가 잦고 아픔도 더하였다. 정선은 모기장을 다 잡아당기어 걷어버리고 이불을 차내버리고 몸이 나오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 더욱 괴로와하는 소리를 질렀다. 그가 잠이 들어도 드러내지 아니하던 끊어진 다리를 막 내어놓고 몸을 비틀었다.
선희는 이러한 광경을 처음 보았다.
"의사를 불러오지요."
하고 선희는 숭에게 말하였다.
"의사? 싫어 싫어."
하고 정선은 몸부림을 하였다. 그는 끊어진 다리를 보이기도 원치 아니할 뿐더러 자랑할 수 없는 아이를 낳으면서 의사요, 조산부요, 할 염치도 없었다.
"의사 부르면 난 죽어요!"
하고 정선은 야단을 하였다.
또 진통이 왔다. 정선은 선희의 손을 꽉 붙들고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 선희도 덩달아서 손과 전신에 힘을 주었다. 정선의 진통이 지나가고 이마와 전신에 땀이 흐를 때에는 선희의 이마와 전신에서도 땀이 흘렀다.
"선희!"
하고 진통이 지나간 틈에 정선은 선희의 손을 끌어다가 제 가슴 위에 놓으며 정답게 말하였다.
"난 죽어."
하고 정선은 울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다 하네. 어느 어머니나 아이 낳을 때에는 다 그렇지. 그러길래 낳는 아픔이라고 안해? 인제 한두 시간만 지나면 아이가 나올걸. 아이만 나오면 씻은 듯 부신 듯이라는데."
하고 선희는 위로를 하였다.
이러한 때에 숭이가 들어오면 정선은,
"당신은 건넌방에 가서 주무셔요."
하고 손을 홰홰 내저어서 나가라는 뜻을 표하였다.
그러면 숭은 말없이 돌아서 나갔다. 숭은 정선의 속을 아는 것이다. 남편의 자식 아닌 자식을 낳느라고 아파하는 아내의 마음을 숭은 알아주었다. 숭도 제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숭은 건넌방에 가서 드러누워도 보았다. 그러나 안방에서 아이구구 하는 소리가 들릴 때에는 기계적으로 벌떡 일어나서는 안방을 들여다보았다. 아내가 끊어진 다리를 버둥거리며 애를 쓰는 양을 볼 때에는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을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막혔다.
"들어오지 말어요."
하는 아내의 울음 섞인 애원을 듣고는 숭은 견디지 못하는 듯이 마당으로 뛰어 내려갔다.
밖에는 번개가 번쩍거리고 굵다란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음산한 바람이 구름을 날리고 있었다. 천지가 모두 무슨 아픔을 못 견디어 하는 것 같았다.
밤은 깊어갔다. 우뢰소리가 들리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정선의 진통은 더욱 심하여지는 모양이었다. 정선은 선희의 두 손을 끊어져라 하고 비틀었다. 그리고 죽여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진통이 지나간 뒤에는 정신을 잃은 듯이 눈을 감고 졸았다. 선희는 이것이 책에서 본 자간이라는 무서운 병이 아닌가 하여,
"정선이, 정선이."
하고 정선을 흔들어 깨웠다.
"인생에 가장 큰 아픔이다."
하는 생각을 선희는 하고 앉았다.
정선의 생명이 어찌 될는고, 그 생명이 아픔 때문에 너무 켕겨서 금시에 끊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선희, 용서해주어, 응."
하고 어떤 한굽이 진통 끝에 정선은 선희의 손을 제 가슴 위에 얹고 말하였다.
"용서가 무슨 용서야? 무어 잘못한 것 있던가."
하고 선희는 정선의 이마의 땀을 씻었다.
정선은 선희에게 무슨 할말이 있는 듯하다가는 아픈 것이 아주 끝나버리면 말을 끊었다.
또 한번 된 진통이 지나간 뒤에 정선은 기운없이 눈을 뜨며,
"선희, 날 용서해요. 내가 지금까지 선희를 미워했어. 겉으로는 드러내지 아니했지마는 속으로는 미워했어. 선희가…"
하고 정선은 선희를 안아다가 선희의 귀에다가 입을 대고는,
"선희가 허를 사랑하는 것이 미워서. 나는 선희 속을 알아요. 아니깐 미웠어.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선희밖에 이 세상에는 내 뜻을 말할 데가 없구려. 하늘에나 땅에나 나무에도 돌에도 붙일 곳이 없는 나 아니오? 내가 죽더라도 선희가 내 눈을 감기고 염도 해주어, 응? 나는 다른 사람의 손이 내 몸에 닿는 것이 싫어. 손이 닳는 것은커녕 눈이 내 몸을 보는 것도 싫어. 선희만은 내 더러운 몸과 마음을 다 알고 만져주우, 응."
하고 정선은 또 눈물을 흘렸다.
"글쎄, 왜 그런 소리를 해"?
하고 선희는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억지로 누르면서,
"정선이! 내가 살여울 있는 것이 정선이한테 고통이 되거든 내 여기서 떠나께. 내가 정선이한테 고통을 주었다면 내가 잘못했수. 나는 정선이 말마따나 나무에도 돌에도 붙일 데가 없는 사람이니깐 정선이 집을 믿고 여기 와 사는 게지. 내 떠나주께."
하고 선희도 눈물을 씻었다.
또 정선에게 진통이 왔다. 이번 진통은 거의 삼분이나 계속되는 것 같았다. 밖에서는 우뢰와 빗소리가 요란히 들렸다. 시계는 새로 세시.
"선희."
하고 정선이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서,
"저 가방 속에는 무슨 약이 있소"?
하고 물었다.
"피투이트린이라는 주사약하고, 애기 눈에 넣을 초산은 물하고, 몸이랑 입이랑 씻길 기름하구, 그런 게야."
하고 선희는 가방을 열고 약들을 내어 보였다.
"나 그 주사해주어."
하고 정선은 팔을 내밀었다.
"안돼. 좀 기다려보고."
"아이구, 이거 못 살겠어."
"좀더 참어."
"어떻게 참어"?
"새벽이 되면 낳을걸."
"아이구, 나는 못 참어. 나를 어떻게 죽여주어, 응. 못 참겠으니 죽여주어요. 또 나 같은 년이 살면 무얼 해"?
"글쎄 왜 그런 소릴 해, 좀 참지 않고? 마음을 굳세게 먹어야 된대."
"아이구, 아퍼. 아이구, 허리 끊어져. 내가 무슨 죄로 이럴까."
"죄가 무슨 죄야. 아담 이브의 죄면 죄지."
"어린애가 나오기로 그것을 누가 길러. 내가 죽으면 누가 길러"?
"원 별소리가 다 많군. 정선이가 죽거든 허 선생이 안 길러"?
"아냐, 아냐. 내가 죽으면 어린애도 안고 갈 테야. 지옥으로 가든지 유황불 구덩이로 가든지, 어린애는 안고 갈 테야."
하고 정선은 깜빡 정신을 잃어버린다.
"정선이, 정선이!"
하고 선희가 정선을 흔들어도 대답이 없다.
"정선이, 정선이"부르는 소리에 숭이가 뛰어 건너왔다. 선희는 정선의 말을 생각하여 홑이불로 정선의 몸을 가리어주었다.
"암만해도 의사를 불러와야 할 것 같습니다."
하고 선희가 숭에게 자리를 비키면서 말한다.
"의사를 제가 싫다니까 부르기도 어렵구만요. 또 부른대야 산부인과 전문하는 이는 물론 없구."
하고 숭은 민망한 듯이 이마에 손을 대며 정선을 들여다본다.
정선은 마치 장난꾼 아이가 몸이 곤해서 세상 모르고 자는 모양으로 사지를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입으로 침을 흘리며 코를 골고 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마침내 정선에게서 모든 절제력을 빼앗아버린 것이었다.
"산모가 이렇게 자는 것이 좋지 않다는데."
하고 선희는 정선의 맥을 짚어본다. 선희가 보기에는 맥이 약한 것만 같았다.
"그래두 의사가 와야지 어떻게 해요? 어찌 될지 압니까. 겁이 납니다."
하고 선희는 애원하는 듯이 숭의 낯을 바라보았다.
"아냐, 싫어. 의사 싫어."
하고 정선은 잠꼬대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의사가 와야 얼른 아이를 낳지."
하고 선희는 떼쓰는 딸을 책망하는 모양으로 짜증을 내는 듯이 말하였다.
"싫어. 나 죽는 거 보기 싫거든 다들 가요. 어머니가 저기 오셨는데…같이 가자고. 나 옷 입고 어린애 데리고 같이 가자고. 어머니 나하고 같이 가요. 어머니 계신 데 같이 가요."
하고 정선은, 반은 정신이 있는 듯, 반은 없는 듯 중얼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 말끝에 또 진통이 돌아와서 정선은 낯을 찡그리고 몸을 비틀고 눈을 떴다. 숭과 선희는 몸에 소름이 끼침을 깨달았다. 더구나 어린애를 데리고 간다는 말이 숭에게 비상한 쇼크를 주었다.
"여보."
하고 정선은 숭의 손을 찾았다. 숭은 얼른 정선에게 제 손을 주었다.
"나를 용서해주셔요."
하고 정선은 숭의 손을 쥐고 떨었다.
숭은 말이 없었다. 정선은,
"나를 용서해주셔요. 나를 불쌍한 사람으로 알아주셔요. 당신 같은 좋은 남편을 잘 섬기지 못하고 용서 못할 죄를 지은 아내를 용서해주셔요. 나는 차마 이 뱃속에 있는 아이를 낳아가지고 당신 앞에서 살 면목이 없어요. 나는 내 죄의 결과를 뱃속에 넣은 채로 나는 가요. 정선아, 내가 네 죄를 다 용서한다, 마음놓고 죽어라, 그래 주셔요."
하고 소리를 내어 느껴가며 울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오? 나는 당신을 용서한 지가 오래요. 그런 생각 말고 상심도 말고 마음을 편안하게 먹고…."
하고 숭의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정선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아냐요, 아냐요. 날 용서 아니하셔요! 날 불쌍히는 여기시겠지. 당신이 맘이 착하시니깐 불쌍한 계집애라고는 생각하시겠지. 그렇지마는 용서는 아니하셔요. 나를 참으로 사랑하지는 아니하셔요. 당신이 의지가 굳으시니깐 일생이라도 나를 사랑하시는 모양으로 꾸며가실 줄은 믿어요. 그렇지만 나를 정말 용서하고 사랑하실 수는 없어요."
하고 고개를 베개에 비볐다.
정선은 스스로 제 잘못과 또 제가 이제는 하나도 취할 것이 없는 여자인 것을 깨달았을 뿐더러 지금까지 기생년이라고 속으로 천대하던 선희가 도리어 살여울 온 뒤에는 존경할 만한 여자가 되고 사업가가 된 것을 생각하면은 일종의 시기가 생기는 동시에 제 몸의 가엾음이 더욱 눈 띄어지는 것이었다.
숭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정선의 말은 숭의 마음을 꿰뚫어본 말이어서 그 말을 부인할 아무 재료가 없는 것이었다. 가만히 제 속에 물어보아도 정선을 불쌍히 여겨서 그의 일생을 힘있는 데까지 위로해주겠다는 생각은 있으나, 참으로 사랑의 정이 가지는 아니하였다.
가게 하려고 힘을 쓰면서 일생을 살아가자는 것이 숭의 속이었다. 그리고 할일이 많으니 사랑이라든지 정이라든지를 잊어버리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숭의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이루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이 폭풍우를 알밴 하늘 한구석의 구름장이 아닌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진통은 정선의 의식과 말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곁에서 보기에 정선의 마음에는 슬픔과 무서움과 절망과 혼란한 감정이 끓는 것 같았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사람에게 이렇게 비참한 고통은 있을 수가 있을까 할이만큼 정선은 고통하였다. 정선의 얼굴의 표정, 몸의 움직임, 이 모든것이 다 마치 고통이란 것을 표현하는 참혹한 무용인 것 같았다.
정선은 선희의 손을 잡고,
"선희, 나는 이 세상에서 용서해 줄 것이 있다면 다 용서해 줄테야. 누가 내게 어떠한 잘못이 있더라도, 나를 죽이려 한 사람이 있더라도 다 용서해 줄 테야. 그 대신 내가 지은 죄를 누가 다 용서해 주마 하는 이가 있으면 좋겠어. 아버지한테도 죄를 지은 년이요, 남편한테도 죄를 지은 년이요, 또 동무들한테도 죄를 지은 년이요, 뱃속에 있는 생명한테도 죄를 지은 년이 아니요, 내가?
그런데 내가 세상에 와서 스물 세 해 동안 한 일이 무엇이오? 세상 위해서 한 일이 무엇이오? 여러 사람들한테 폐만 끼치고 신세만 졌지, 한 일이 무엇이오? 내가 인제 하느님께 용서해 줍시사고 빈다고 용서해 주실 리 만무하지 않어? 아이구구, 아이구, 또 아퍼. 언제나 이 아픔이 그치나"?
하고 또 정선에게는 진통이 일어난다.
"선생님. 정선이를 다 용서한다고 해주셔요."
하고 선희는 정선이가 진통 끝에 의식을 잃고 조는 동안을 타서 숭에게 말하였다.
"쟤가 퍽 괴로와하는 모양입니다. 인제 정신이 들거든 다 용서하고 전같이 사랑해 주마고 말씀해 주셔요. 그러다가 죽어버린다면 그런 한이 있습니까. 그리고 또 무사히 아기를 낳고 일어나거든 선생님은 정선을 극진하게 사랑해 주세요. 선생님은 그만하신 너그러운 인격을 가지신 줄 믿습니다. 정선이가 불쌍하지 않습니까, 네"?
하고 눈물을 흘리고 느껴 울었다.
숭도 복받쳐오르는 울음을 삼키고 눈을 꽉 감아 눈에 괸 눈물을 막아 버리려 하였다. 그 눈물은 방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용서하지요. 사랑하지요."
하고 숭은 정선의 머리맡에 놓인 물그릇에서 물을 숟가락으로 떠서 정선의 입에 넣었다. 정선은 무의식적으로 물을 받아 삼켰다. 정선의 입술은 열병 앓는 사람 모양으로 탔다.
"날 용서하셔요."
하고 다시 정신을 차린 정선은 숭의 손에 매달렸다.
숭은 정선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 대고,
"정선이, 다 용서했소. 남편의 사랑은 무한이오. 한참만 더 참으면 고통이 없어질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닭이 울었다.
폭풍우도 어느덧 그쳤다.
처마 끝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새벽의 고요함을 깨뜨릴 뿐이었다.
"고맙습니다. 나는 인제는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당신밖에 나를 사랑해 줄 사람도 없고 용서해 줄 사람도 없으니 날 용서해 주셔요. 그리고 불쌍히 여겨 주셔요. 내가 죽거든 나를 당신이 늘 돌아볼 수 있는 곳에 묻어 주셔요. 그리고 조그마한 돌비에다 "허숭의 처 정선의 무덤"이라고 새겨 주셔요. 그리구, 그리구…선희하고 혼인해 주셔요."
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 눈물은 지금까지 흐르던 고통의 눈물, 원한의 눈물은 아니었다. 그 눈물은 감사의 눈물, 만족의 눈물, 사랑의 눈물이었다.
선희는 정선의 말에 눈이 아뜩아뜩해짐을 깨달았다.
숭도 말이 없었다.
해가 솟았다. 그 구름 그 폭풍우는 어디로 갔는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첫 가을날의 빛을 보였다. 숭의 집에서는
"으앙 으앙."
하는 어린애 소리가 들렸다. 정선은 딸을 낳은 것이었다.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어 또 한 해가 지났다.
살구꽃도 다 지고 사월 파일도 지난 어느 날, 살여울 앞에는 자동차 한 대가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면서 와 닿았다.
그 자동차에서는 아주 시크하게 양복으로 차린 청년 하나가 회색 소프트 모자를 영국식으로 앞을 숙여 쓰고 팔에는 푸른빛 나는 스프링을 들고 물소뿔로 손잡이를 한 단장을 들고 대모테 안경을 썼다. 그리고 입에는 궐련을 피워 물었다.
운전수가 트렁크와 손가방을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기타인 듯한 것을 내려놓고는 자동차 문을 닫고 차 세를 받으려고 청년의 앞에 서서 기다린다.
"도오시딴다이 잇따이? 뎀뽀오모 웃데아루노니(어찌 된 셈이야, 대관절, 전보도 놓았는데)."
하고 청년은 매우 불쾌한 듯이 동네를 바라보며 일본말로 중얼댄다. 탁음과 액센트가 그리 잘하는 일본말은 아니다.
"가겠습니다, 찻세 주세요."
하고 젊은 운전수는 참다 못하여 청구한다.
"이꾸라(얼마)"?
하고 청년은 여전히 일본말이다.
"사원 팔십 전입니다."
하고 운전수는 조선말로 대답한다.
"용엔 하찌짓센? 다까이쟈나이까(사원 팔십 전? 비싸)"?
하고 청년은 더욱 불쾌한 듯이 소리를 지른다.
"그렇게 작정을 하시고 타시지 않으셨어요"?
하고 운전수의 어성도 좀 높아진다.
"난다이 곤나 보로지도오샤가(이게 다 무에야, 이런 거지 같은 자동차를 가지고)."
하고 청년은 단장으로 자동차의 옆구리를 한번 찌르고,
"도오껄오나라 세이제이 고짓센다요(동경 같으면 잘해야 오십 전야)."
하고 눈을 부릅뜬다.
"동경은 동경이요 조선은 조선이지요. 값을 정해놓고는 다 타고 와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요"?
하고 운전수의 말도 점점 불공하게 된다.
"난다? 난다또? 모오이찌도 잇데 미이(무엇이 어째? 또 한번 그런 소리를 해 봐)."
하고 청년이 운전수의 어깨를 떠민다.
"사람을 때릴 테요"?
하고 운전수도 대들며,
"여기서 이럴 것 없으니 저 주재소로 갑시다."
하고 운전수는 청년의 팔을 꽉 붙든다.
청년은 두어 걸음 끌려가더니,
"이 팔 놓아!"
하고 팔을 뿌리치고는 기운없이 바지 주머니를 뒤져 지갑에도 넣지 아니한 지전 뭉텅이를 꺼내어 오원박이 한 장을 골라서 바닥에 내어던지며,
"돗데 이께, 빠가야로오(가져가거라! 망할 자식)."
하고 입에 물었던 궐련을 침과 아울러 손도 대지 아니하고 퉤 뱉어버린다.
운전수는 말없이 돈을 집어넣고 운전대에 올라앉아서 차를 돌려놓고는 고개를 내밀고,
"이건 왜 이 모양이야. 돈도 몇 푼 없는 것이 되지 못하게시리. 국으로 짚세기나 삼고 있어. 네 에미 애비는 무명 것도 없어서 못 입는데 되지못하게 하이칼라나 하면 되는 줄 아니"?
하고 차를 스타트해 가지고 슬근슬근 달아나며 욕설을 퍼붓는다. 받을 돈 받아 놓고 차 떠내 놓고 분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이러는 동안에 동네 아이들이 자동차 구경 겸 하이칼라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산장네 정근이야."
하고 아이들은 수군거렸다.
정근은 이 동네 부자라는 유 산장의 아들로 동경 가서 공부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이들 중에는 정근이라는 청년을 보고 반가운 빛을 보이는 애는 드물었다. 그들은 부모가 유 산장을 원망하는 소리를 너무 많이 들은 까닭이었다. 또 그들은 산장네 정근이가 일본 가서 공부한다고 돈만 없이한다고 산장이 화를 낸다는 말을 들었다. 산장네가 작년부터는 협동조합 때문에 장리도 잘 아니 되고 빚을 줄 곳도 줄어서 논을 두 자리나 팔아서 정근의 학비를 주었다는 소리를 부모들이 고소한 듯이 말하는 말을 들은 것도 기억한다. 그래서 그들은,
"잘도 차렸네. 하이칼라다."
이러한 흥미밖에는 정근에게 대해서는 가지지 아니하였다.
"이거 좀 들고 가!"
하고 정근은 아이들 중에 큰 애를 단장 끝으로 가리키며 부르짖었다. 가리킴 받지 아니한 아이들은 저희도 그 대접을 받을까 두려워 뒤로 물러서고 가리킴을 받은 아이는 마치 기계적인 것같이 그 명령에 복종하였다.
큰 아이들이 정근의 짐을 들고 앞설 때에야 도망하려던 아이들이 다시 뒤를 따라섰다.
정근은 다시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단장을 두르면서 살여울 동네로 향하였다.
그때에 마침 어떤 사람 하나가 지게를 지고 나오다가 정근을 보고 반가운 빛을 보이며 아이들이 들고 꼬부랑깽하는 것을 받아 제 지게에 짊어졌다.
"지금 차에서 내리는 길인가"?
하고 지게를 진 사람은 정근에게 물었다.
"내가 오는 줄을 알고도 아무도 안 나온단 말이오? 다들 죽었단 말이오"?
하고 정근은 화를 내었다.
"어디 자네가 오는 줄 알았나. 형님도 아무 말씀이 없으시니."
하고 이 가난한 아저씨는 먼 촌 조카의 짐을 지고 일어선다.
"내가 집으로 전보를 했는데 동네에서들 몰라"?
하고 아저씨에게 대한 조카의 어성은 매우 불공하였다. 이렇게 큰 소리가 나는 것도 까닭이 없지는 아니하였다.
삼년 전으로 말하면 제가 평양만 가서 공부를 하다가 방학에 돌아오더라도 전보 한 장만 치면 온 동네가 끓어 나왔던 것이다. 그러하던 것이 삼년을 지낸 오늘에 이렇게 한 사람도 아니 온다는 것은 창상지변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아저씨는 말없이 짐을 지고 길을 걸었다.
아이들 중에 먼저 뛰어 들어가서 보고한 사람이 있어서 산장네 집 식구들이 마주 나왔다. 산장네 머슴 사는 미력이라는 사람이 달음박질쳐서 앞서 나와서 보통학교 아이 모양으로 정근을 보고 허리를 굽혔다.
"이 자식, 인제 나와."
하고 정근은 인사하는 미력의 등을 단장으로 후려갈겼다.
미력은 영문도 모르고 아프단 말도 못하고 아저씨의 짐을 받아 졌다. 지게를 지니 매맞은 등이 몹시 아팠다.
정근은 반가와하는 가족들을 보고 모자도 벗지 아니하였다.
"아버지 안 계시우."
하고 집에 들어온 정근이는 병든 어머니를 보고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아버지가 사랑에 계신 게지. 나가 뵈려므나."
하고 어머니도 낯을 찡그렸다.
"내가 오늘 온다고 전보를 놓았는데 그래 아무도 안 나온단 말이오"?
하고 정근은, 아버지는 찾으려고도 아니하고 문지방에 걸터앉으며 소리를 질렀다.
"전보가 왔는지 무엇이 왔는지 아니"?
하고 어머니는,
"요새 아버지가 무슨 말씀은 하신다든? 안에는 진지 잡수러도 안 들어오신단다. 이놈의 세상이 망할 놈의 세상이 되었다고. 동네 놈들이나 일가 놈들이나 도무지 발길도 아니한다고. 그 허숭이 녀석이 이 동네에 들어와서부터는 협동조합인가 무엇인가 만들어 가지고 모두들 장리를 내어 먹나 돈을 얻어 쓰나. 그런 뒤부터는 우리 집에는 그림자도 얼씬 않는단다. 그 연놈들의 뼈가 뉘 집 덕으로 굵었다구. 말 말아, 그래서 아버지는 홧병이 나셔서 도무지 집안사람보고도 말이 없으시단다."
하고 말을 하였다.
정근이가 안방 문지방에 걸터앉아 있을 적에 부엌 앞에는 정근의 아내가 어느새에 새 옷을 입고 너덧 살 먹은 아이 녀석 하나를 머리를 만져 주면서 들릴락말락한 조그만 소리로,
"가서 아버지! 그러고 불러."
하고 훈수를 하여 준다.
아이 녀석은 흙과 때 묻은 손가락을 빨고 커다란 눈으로 정근을 힐끗힐끗 보면서 싫다고 몸을 흔든다. 그래도 아내는 자식을 통하여 남편의 자기에게 대한 주목을 끌어볼 양으로,
"어서 가 그래!"
하고 아이녀석의 옆구리를 찌르며,
"너의 아버지야. 가서 아버지, 하고 좀 매달려!"
하고 소곤거린다.
아내는 정근이보다 더 늙었다. 그리고 무슨 속병이나 있는지 혈색이 좋지 못하다.
청춘에 남편이 그리워서 그러하기도 하겠지마는 이 집 가풍이 여자는 찬밥과 된장밖에 못 얻어먹고 병이 들어도 의원 하나 보이지 않는 까닭도 있을 것이다. 시어머니가 병이 들어도 약 한 첩을 얻어먹기가 어렵거든 하물며 며느리야.
"장손아, 가서 아버지, 그래."
하고 아내는 아이 녀석을 잡아 흔든다.
장손이는 마지못해 두어 걸음 아비를 향하고 나가다가 아버지의 무정한 시선이 제 위로 밀려서 다른 데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그만 용기를 잃고 어미 치맛자락으로 돌아와 버린다.
"숭이 녀석이 와서 우리 험구를 해요"?
하고 정근은 어머니의 말에 분개한 어조로,
"그 녀석이 무엇이기에. 제 계집 남한테 빼앗기고-참 숭이 여편네가 서방질하다가 들켜서 차에 치여 죽으려다가 살아나지 않었어요. 그 녀석이 고개를 들고 다녀요? 변호사 노릇도 못해먹고 쫓겨난 녀석이"?
하고 침을 뱉는다.
"숭이 여편네가 서방질 했니"?
하고, 어머니는 무슨 신기한 소식이나 들은 것같이 아들의 곁으로 다가앉는다.
"그럼요. 모두 신문에 나구 야단들인데 어머니는 꿈만 꾸시네."
하고 정근은 비로소 찌푸린 상판대기를 펴고 재미나는 듯이,
"그럼요. 게다가 산월이라는 기생하고 죽자사자 해서 왜 산월이가 기생 고만두고 여기 와서 유치원 한다지요. 우리 아이들도 가우"?
"아니, 안가. 우리 아이들은 안 간다. 아버지가 숭이 녀석이라면 불공대천지수로 아시는데, 아이들 보내실라든? 오 그년이 기생년이야. 뭐 대학교 졸업한 처녀라던데."
"대학교가 다 무엇이오? 전문학교는 졸업했지요. 그리고 기생질하던 년인데 서울서는 누구나 다 안답니다. 흥, 미친 녀석, 기생 첩 데리고 와서 유치원 시키구 아주 겉으로는 점잖은 체하면서-왜 신문 보니깐두로 초시네 순이도 숭이 녀석이 버려 주었다던데."
하고 정근은 더욱 분개한다.
"오오, 그래"?
하고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렇겠지. 말만한 계집애를 반년이나 한집에 두고 있었으니 성할 리가 있나. 그저 그렇게 실컷 버려놓고는 한갑이헌테 시집을 보냈구나."
"순이가 한갑이헌테 시집갔수"?
하고 정근은 놀란다.
"그럼. 한갑이가 지지난 달엔가 감옥소에서 나와서 유치원에서 혼례식을 했단다."
"흥."
하고 정근은,
"그렇지, 첩을 둘씩 둘 수야 있나. 한갑이 녀석도 미친 자식이지. 그래 헌 계집을 얻어가지고 좋아하는구먼."
하고 자못 유쾌한 모양이다.
이때에 장손이는 어미의 말에 못 견디어,
"아버지."
하고 뛰어와서 어머니가 시킨 대로 무릎에 와 매달린다.
"저리 가."
하고 정근은 매달리는 아들 장손을 버러지나 떼어 버리는 듯이 밀쳐버린다.
장손이는 "으앙" 하고 울면서 비틀거리고 제 어미한테로 달려가서 개한테 물리기나 한 것같이 악을 쓰고 운다.
"거 왜 그러느냐."
하고 어머니는 화를 내며,
"어린 것이 애비라고 반가와서 매달리는 것을 그럴 법이 어디 있니? 그게 무슨 짓이냐. 너는 자식 귀한 줄도 모르니? 너도 너의 아버지 모양으로 자식에게 그렇게 무정하단 말이냐, 원. 유가네 집은 종자가 다 그런가 보구나."
하고 꾸짖는다.
"자식이 그까짓 게 무슨 자식이오? 내 자식이 그래요? 저렇게 괭이새끼같이 눈깔만 크고, 더럽고."
하고 벌떡 일어난다.
"그럼 이 애가 뉘 아들이오? 원 못 들을 소리를 다 듣눈."
하고 칼로 찔러도 말 한마디 못할 듯하던 아내가 한마디 단단히 쏜다.
"흥, 꼴에 무에라고 주둥이를 놀려? 흥, 눌은밥도 못 얻어먹고 쫓겨나고 싶은가 보군. 내가 이번에는 용서하지 아니할걸."
하고 정근이가 뽐낸다.
"옳지. 일본 가서 남 무엇인가 하는 계집년허구 배가 맞아서 잘 놀았다더구먼. 그 망할 년이 어디 서방이 없어서 남의 처자 있는 사내를 따라당긴담. 그년이 남의 서방헌테 정이 들었으면 둘째 첩으로나 세째 첩으로나 살 게지 왜 이혼은 허래.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나는 이 집에 와서 죽두룩 일해 주구 아들 낳아 바친 죄밖에 없어. 날 누가 내어쫓아. 어디 내어쫓아 보아!"
하고 아내는 여자에게 용기를 주는 질투의 힘으로 남편에게 대든다.
"이년 무엇이 어쩌구 어째"?
하고 정근은 아내의 앞으로 대들며,
"이년 또 한번 그따위 주둥이를 놀려 보아라. 당장에 때려 죽이고 말 테니."
하고 단장을 둘러멘다.
장손이가 엄마를 부엌으로 끌어들이며 발버둥을 치고 운다.
"때려 죽여 보아! 때려 죽여 보아! 어디 때려 죽여 보아! 내가 무엇을 잘못했어? 어디 말 좀 해보아! 내가 부모께 불공을 했어? 행실이 부정했어, 내가 무엇을 잘못했어? 응, 왜 말을 못해? 내가 이 집에 시집 올 때에는 친정에서 논 한 섬지기 밭 이틀갈이 가지고 왔어! 서울 갑네 일본 갑네 하구 공부는 뉘 돈으로 했는데. 오 인제는 남가년한테 반해서 나를 내쫓을 테야. 옳지! 아들까지 낳아 바쳤는데 무슨 죄루 날 내쫓을 테야"?
"엄마 엄마"하고 울고 치맛자락을 끌고 부엌으로 들어가려는 장손의 뺨을 손바닥으로 딱 후려 갈기면서,
"이놈의 자식, 왜 우니, 왜 울어"?
하고 두 번째 때리려는 것을 피하여 장손은 부엌 속으로 달아났으나 그래도 뒷문으로 빠져나가지는 않고,
"엄마, 엄마."
하고 벌벌 떨며 운다.
어머니는 듣다못해 뛰어 나오며,
"아서라, 아이어멈. 그렇게 말하는 법이 아니다. 어디 남편보고 그렇게 말하는 법이 있느냐. 우리는 젊어서 남편이 아무런 말을 하더라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어린 것은 왜 때리느냐. 아서라 그래서는 못 쓴다."
하고 며느리를 책망하고, 다음에는 아들을 향하여,
"오래간만에 집에 돌아오면 처자를 반갑게 대하는 게지 그래서 쓰느냐. 열 첩 못 얻는 사내 없다고 사내가 젊어서는 오입도 하고 첩도 얻지. 그렇지마는 귓머리 풀고 만난 처권을 버리는 법은 없어! 일본 있으면서 밤낮 편지루 이혼이니 무엇이니 하고 듣기 싫은 소리만 하니 애 어멈인들 맘이 좋겠느냐. 어서 그러지 말고 처가 속의 맘을 풀어 주어라. 그 원 왜들 그러느냐."
하고 어머니의 지혜를 보인다.
"아니 이년이 글쎄 언필칭 남가년, 남가년 하니 그런 말법이 어디 있어요. 남인숙으로 말하면 아주 깨끗하고 얌전한 여성입니다. 첩이라니, 그가 누구의 첩으로 갈 여성이 아냐요. 또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구. 내가 그 여성을 조금 존경은 하지요. 그런데 저년이 언필칭…."
"글쎄 왜들 이리 떠들어"?
하고 유 산장이 상투바람으로 사랑 뒷창으로 고개를 쑥 내밀며,
"이놈아, 공부합네 하고 돌아다니다가 집에라고 돌아오는 길로 애비도 안 보고 집안에 분란만 일으켜? 그래 일본까지 가서 배워 온 것이 그따위란 말이냐. 집안 망할 자식 다 있다."
하고는 문을 닫아 버린다.
날뛰던 정근도 애비 말에는 항거를 못하고 화가 나는 듯이,
"내가 무엇하러 이놈의 데를 왔어"?
하고 대문 밖으로 홱 나가 버리고 만다.
그는 어디로 가려나?
정근이가 살여울에 나타난 것은 살여울의 평화를 깨뜨리는 데 많은 힘이 되었다.
정근은 살여울에 온 뒤로, 선희가 본래 산월이라는 기생인 것과 정선이가 서방질하다가 다리가 부러졌다는 것과 숭과 선희가 서로 좋아한다는 것을 힘써 선전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숭과 선희를 신임하던 까닭에, 또는 정근을 신임하지 아니하는 까닭에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아니하였으나, 열번 찍어서 아니 넘어가는 나무도 없거니와 사람에게 대한 신임도 의리도 백지장과 같이 엷어졌다.
"아 기생년에게 자식을 맡겨"?
이러한 소리가 나오게 되고, 어제까지 유치원에 다니던 아이들 중에는,
"기생이란다. 야, 기생이란다."
하고 선희가 듣는 곳에서 놀리며 까치걸음을 하는 아이도 있게 되었다.
더구나 숭이가 선희를 첩으로 두었다는 말과 유순을 버려 주었다는 말이 신문에 났다는 말을 정근에게서 들은 사람들은 숭을 도무지 가까이하지 못할 고이한 놈으로 여기게까지 되었다.
숭과 선희에게 대한 이러한 소문은 숭이가 경영하는 모든 사업에 지장을 일으키게 되었다. 첫째로 한 주일에 한번씩 모여서 동네 일을 의논하던 동회에 점점 출석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매주일 모일 때마다 가져오기로 한 쌀 저축과 짚신, 새끼 저축의 의무도 행하지 아니하는 이가 늘어가고, 동네 사람의 집에 언제나 다투어 환영함을 받던 숭을 환영하지 아니하는 가정이 점점 늘어갔다.
그러나 숭에게 가장 크게 고통을 주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맹한갑이의 태도가 점점 소원해 가다가 마침내 숭에게 대하여 적의를 품는 태도까지도 보이게 된 것이었다.
정근이가 맹한갑을 허숭 배척의 두목으로 손에 넣으려 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다시 그놈의 집엘 갈 테야"?
하고, 하루는 한갑은 숭의 집에 다녀온 아내 순을 보고 참을 수 없이 불쾌한 듯이 호령을 하였다.
순은 남편의 이 태도에 놀랐다. 그래서 눈을 크게 뜨고 남편을 바라보았다. 순의 생각에는 이 말이 무슨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것같이 들린 까닭이었다.
"왜 그러우"?
하고 순은 제 귀를 의심하는 듯이 물었다.
"왜 그러긴 무얼 왜 그래"?
하고 한갑은 더욱 불쾌한 빛을 보이며,
"내가 다 알어. 왜 걸핏하면 숭이놈의 집으로 가는지 내가 다 알어. 내가 모르는 줄 알구. 다시 그놈의 집에 발길을 해보아. 당장에 물고를 낼 테니."
하고 그는 감옥에서 여러 죄수한테 듣던 말투를 본받았다. 그리고 서방질하는 계집을 때려 죽이고 징역을 지던 사람을 연상하였다.
"그게 웬 소리요"?
하고 순은 울고 싶었다.
"우리가 뉘 덕으로 살길래 허 선생께 그런 말을 하시오"?
"내가 다 알어. 다시는 그놈의 집에 가지 말라거든 가지 말어."
하고 한갑은 몇 걸음 밖으로 나가더니 돌따서서 순의 곁으로 오며,
"그 뱃속에 있는 애가 뉘 애야? 바로 말을 해!"
하고, 그가 경찰서와 검사정에서 보던 관인들의 눈과 표정을 보였다.
"아니, 그건 다 무슨 소리요"?
하고 순은 앞이 아뜩아뜩함을 깨달았다.
"무엇이 무슨 소리야? 네 뱃속에 든 아기가 어느 놈의 아이냔 말이야."
하고 한갑은 땅바닥에 침을 퇴하고 뱉었다.
한갑은 타오르는 분노와 질투에 전신을 떨었다.
순에게는 한갑의 말은 실로 청천벽력이었다. 남편의 정신이 온전한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네가 어디 있었어"?
하고 한갑은 재차 물었다.
순은 어색하여 대답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내가 다 알어."
한갑은 성낸 얼굴에다가 빈정거리는 웃음을 띠고,
"내가 들으니까 나 감옥에 있는 동안에 네가 숭이허구 함께 살았다더라. 병 구완합네 하고 한 방에서 자구. 흥 그리구는 인제는 모르는 체야. 옳지, 응, 숭이놈이 실컷 데리고 살다가 산월이년이 오니께루 내게다가 물려주어? 죽일 놈 같으니. 내가 그놈의 다리 몽둥이를 안 분지를 줄 알구. 흥, 밴밴한 계집애는 모조리 주워 먹는 놈이 아주 겉으로 점잖은 체허구. 내가 왜 이렇게 오래 감옥에 있었는지 아니? 그놈이 나를 변호합네 하고 되려 잡아넣어서 그랬어. 내가 다 알어, 흥, 모르는 줄 알구. 아이구, 분해라."
하고 이를 오드득 갈았다.
이로부터 한갑의 태도는 돌변하였다. 그는 일도 아니하고 술만 먹으러 돌아다녔다. 그리고 집에 오면 순이를 볶았다.
순은 몇 번 간절한 말로 변명도 하였으나 변명을 하면 할수록 한갑의 의혹은 더욱 깊어지는 것 같아서 순은 다만 잠자코 참을 뿐이었다.
순의 생각에는 저를 위한 고통보다도 숭이 저를 위하여 사업에 방해를 받고 또 마음에 고통을 받는 것이 괴로왔다. 순은 어찌하면 숭의 누명을 벗겨 드릴 수가 있을까 하고 그것이 도리어 가장 큰 염려가 되었다.
하루는 한갑이 밤이 깊은 뒤에 술이 취해서 들어왔다. 그는 정근이와 함께 장에 가서 술을 잔뜩 먹고 돌아온 길이었다.
"이년, 이 화냥년! 또 숭이놈의 집에 서방질 갔니"?
하고 외치며 비틀비틀하고 문고리를 찾았다.
순이는 얼른 일어나 문고리를 벗겼다. 한갑의 몸에서는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개 같은 년! 이 화냥년!"
하고 한갑은 한 발을 방에 들여놓으면서 한 손으로 아내의 머리채를 감아쥐어서 앞으로 끌어당기었다. 무심코 섰던 순은 문지방에서 어깨와 머리를 부딪고 남편의 가슴을 향하고 쓰러졌다.
한갑은 몸을 비키면서 순의 머리채를 홱 끌어당기어 순은 다섯 달 된 배를 안고 토당(툇마루 있을 땅)에 픽하고 엎드러졌다.
"이 개 같은 년! 이 화냥년!"
하고 한갑의 발은 수없이 엎어진 아내의 등과 어깨와 볼기짝 위에 떨어졌다.
순은 아프단 말도 못하고 다만 픽픽픽할 뿐이었다.
"이년 죽어라! 뒤어져라!"
하고 한갑은 술기운을 빌어 기고만장하여 호통을 쳤다.
밤마다 있는 술주정이라 또 하는구나 하고 누워 있던 한갑 어머니는 그 어릿한 귀에도 무슨 심상치 아니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문을 열치며,
"이게 웬일이냐. 글쎄, 이놈아. 밤마다 술을 먹고 와서는 지랄을 하니. 돈은 어디서 나서 이렇게 날마다 술을 처먹는단 말이냐."
하고 어스름한 속에 허연 무엇이 엎어진 것을 보고 한갑이 어머니는 깜짝 놀라서 웃통은 벗은 채, 고쟁이 바람으로 뛰어나오며 이게 무어냐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한갑 어머니는 더듬더듬 순이가 엎어져 있는 데까지 걸어오더니 순이가 쓰러진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아 이놈아, 글쎄 이게 웬일이냐. 홀몸도 아닌 사람을."
하고 허리를 굽혀 순의 팔을 잡아 일으키려다가 팔에 기운이 없는 것을 보고 더욱 놀라 순의 머리를 만지며,
"아이고, 이 애가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구나. 아가, 아가."
하고 불러도 순은 대답이 없었다.
"그깟년 내버려 두우. 죽어라, 죽어."
하고 한갑은 발길을 들어 순의 옆구리를 한번 더 지르고 비틀비틀하며 밖으로 나가 버린다.
"아가, 아가."
하고 한갑 어머니는 순을 안아 일으키려다가 기운이 없어서 못하고 방에 들어가서 석유 등잔에 불을 켜 들고는 다시 나온다.
순의 머리 밑에는 피가 뻘겋게 빛났다. 그리고 순의 몸은 느껴 우는 사람 모양으로 들먹거렸다.
"이를 어쩌나"?
하고 한갑 어머니는,
"한갑아, 한갑아!"
하고 소리껏 두어번 불러보았으나 대답이 없었다.
"아이고, 이를 어쩌나. 그 망할 녀석이 제 애비 성미를 받아서 그러는구나. 요새에는 웬 술을 그리 처먹고, 아가 아가. 일어나 방에 들어가 누워라. 내가 기운이 없어서 너를 안아들일 수가 없구나. 원 이 일을 어쩌나. 동태나 안되었나. 아이구 이를 어쩌나. 이 애 치마에도 피가 배었구나. 아이구머니나, 하혈을 하는구나. 아이구, 이를 어쩐단 말이냐. 그 몹쓸 놈이 어디를 어떻게 때렸길래. 아이구, 이거 큰일났구나. 아가, 아가!"
한갑 어머니는 혼자 쩔쩔매고 갈팡질팡 하더니 등잔불을 안방에 들여다놓고 옷을 주워 입고 어디로 나가 버린다.
동네에서는 개들이 쿵쿵 짖었다.
한갑 어머니는 달음질하듯 숭의 집으로 달려갔다. 급한 일에는 숭의 집에밖에 갈 곳이 없는 것이었다.
숭의 집에서는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갑 어머니는 잠깐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 떠드는 소리는 분명히 한갑의 소리였다.
"저놈이 또 저기 가서 지랄을 하는구나."
하고 한갑 어머니는 더욱 걸음을 빨리 걸었다.
한갑은 숭의 집 마당에서 숭의 멱살을 잡고 숭을 때리고 있었다. 숭은 다만 한갑의 발길과 주먹을 막을 수 있는 대로 막을 뿐이요, 마주 때리지는 아니하는 모양이었다.
"이놈. 이놈, 죽일 놈. 이놈, 네가 나를 감옥에 잡아넣구, 내 계집을 버려 주구. 어 이놈. 나허구 죽자."
이러한 소리를 뇌까리고 또 뇌까리며 숭에게 대들었다. 숭이가 힘이 세어 한갑이 마음대로 잘 때려지지 아니하는데 더욱 화를 내어서 돌아가지 아니하는 혀로 욕설만 퍼부었다.
"이놈아, 글쎄 이 배은망덕하는 놈아. 아무러기로 네 놈이야 허 변호사에게 이리할 수가 있단 말이냐."
하고 한갑 어머니는 한갑의 어깨에 매어달려 발을 동동 구르며,
"너 감옥소에 가 있는 동안 내가 누구 덕에 살었니. 허 변호사가 나를 친어미보다 더 위해 주었는데, 이놈아, 글쎄 어미를 보기로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자 가자."
하고 한갑을 잡아 끌며,
"허 변호사도 잠깐 와 주게. 이 녀석이 며느리를 때려서 하혈이 몹시 되는 모양인데 어떻게 하면 좋은가. 피를 흘리구 쓰러진 것을 혼자 두구 왔는데. 이 술취한 녀석의 말에 노하지 말구 좀 와주게."
하고 한갑을 끌고 어둠속에 사라졌다.
한갑은 기운이 지쳤는지 어머니가 끄는 대로 끌려간다.
"이 애야. 너 그 정근이 녀석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나 보다마는, 그 녀석의 말을 어떻게 믿니? 그 녀석 난봉 녀석 아니냐. 허 변호사가 이 동네에 들어온 뒤로 유 산장네 장리 벼가 시세가 없어서 그집 식구들은 허 변호사를 잡아먹으려 드는데 네가 정근의 말을 믿고 허 변호사와 네 처를 의심하다니 말이 되니?
네 처로 말하면 내가 꼭 한방에 데리고 있었는데 무슨 의심이 있니. 의심이 있으면 내가 먼저 알지, 네나 정근이가 안단 말이냐. 또 허 변호사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정근이 녀석이 돌아온 뒤로 동네 인심이 변한 모양이더라마는 다들 잘못이지, 잘못이야. 허 변호사나 유치원 선생이나 다 제 돈 갖다가 동네 위해 좋은 일 하는데 그 은혜를 몰라보고 이러니저러니 말이 되나.
내가 그렇게 타일러두 도무지 듣지를 아니하고 그 난봉 녀석의 말을 믿구서, 글쎄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처가 저렇게 하혈을 하니 뱃속에 아이가 성할 수 있나. 아이, 이년의 팔자야. 죽기 전에 손주새끼라두 한번 안아볼까 했더니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왜 죽지를 않구 살아서 이 꼴을 보는지. 네 아버지가 젊어서 술을 먹구 사람을 때려서 그 사람이 그 빌미로 죽은 일이 있느니라. 네 아버지가 마음이 착하지마는 울뚝하는 성미가 있구 술이 취하면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성미가 있더니 너두 그 성미를 닮었구나. 그래두 네 아버지는 친구를 그렇게 죽인 뒤로는 도무지 술을 입에두 아니 대구 말두 아니하구 그리셨단다."
이렇게 집까지 가는 동안에, 한갑 어머니는 아들을 향하여 여러 가지 말을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이구 저거, 어린애가 떨어졌으면 어떻게 해"?
하고 혼자 한탄을 하였다. 한갑 어머니에게 이제 남은 소원은 <손주새끼>를 안아보는 것이었다.
한갑 어머니 눈앞에는 꼬물꼬물 하는 손주가 보이던 것이었다. 그에게는 며느리가 죽는 것보다는 손주가 떨어지는 것이 더 중한 일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순은 아직도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한갑은 어머니의 말에는 대답도 아니하고 비틀거리고 따라왔다.
한갑은 머리가 아프고 몸이 노곤한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정신은 아무리 분명히 차리려 하여도 마치 깨어진 질그릇 조각을 모아서 제대로 만들려는 것 모양으로 모여지지를 아니하였다. 그의 고개는 꼬박꼬박 앞으로 수그러만 지고 눈은 감겼다. 다리가 이리 놓이고 저리 놓이고 하였다.
읍내 갈보 집에서 정근에게 실컷 술을 얻어먹고 또 잠깐 자기까지 하고 나온 것이었다. 숭이가 죽일 놈이라는 것, 숭이가 전에는 물론이어니와 지금도 때때로 숭과 순이가 밀회한다는 것, 순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 줄 아느냐, 하는 것 등의 선전을 받고 이 십리나 넘는 길을 달음박질로 온 그였다. 단순한 생각을 가진 한갑은 정근의 그럴 듯한 선전에 그만 더 참을 수가 없이 되어 감옥에서 아내 죽인 죄수에게 듣던 이야기 그대로 실행을 해본 것이었다.
그러나 술이 주던 기운이 없어지매 한갑은 그만 폭 누그러졌다. 그는 무슨 큰 일을 저지른 듯도 싶고 또 당연히 할 일을 다 못한 듯도 싶었다. 가끔 고개를 번쩍 들고 무엇이라고 중얼대나 곧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어머니가 하는 말도 어떤 말은 귀에 들어오고 어떤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아니하였다.
한갑은 토당에 쓰러진 아내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번쩍 들며,
"이년 죽어라. 이 개같은 년 같으니."
하고 한번 뽐내고는 어머니한테 끌려서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숭은 선희를 데리고 응급 치료 제구를 들고 한갑의 집으로 왔다. 숭은 한갑의 신이 문 밖에 놓인 것을 보았다. 선희는 무엇을 무서워하는 사람 모양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숭은 전후를 돌아볼 새가 없었다. 순의 곁에 쭈그리고 앉아서 순의 팔목을 들어 맥을 보았다. 처음에는 맥이 끊어진 것 같았으나 서투른 사람이 하는 모양으로 이리저리 옮겨 쥐어 보아 희미하게나마 맥이 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희는 숭의 눈만 바라보고 있다가 숭이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을 보아서 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선 방으로 들여 뉘어야겠습니다."
하고 숭은 순의 피 흐르는 이마를 만지며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어머니는 덜덜 떨며 숭과 선희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숭의 말에 비로소 마음을 놓은 듯이,
"그럼 아랫간에 들여 뉘이지."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자기가 깔았던 요를 바로잡아 깔고 베개를 바로 놓고,
"자, 이리루 들어오지. 원 괜찮을까."
하고 문에서 내다보고 있다. 그 주름잡힌 검은 얼굴, 그 쥐어뜯다가 남겨 놓은 듯한 희뜩희뜩한 머리카락, 그 피곤한 듯한 찌그러진 눈. 불빛에 비취인 한갑 어머니의 모양은 산 사람 같지는 아니하였다. 일생에 근심과 가난에서 잠시도 떠나보지 못하고 부대끼운 그에게는 절망하거나 슬퍼할 기운도 없는 것 같았다. 그처럼 무표정이었다.
숭은 한 팔을 순의 목 밑에 넣고 한 팔을 무릎 마디 밑에 넣어서 순을 가만히 안아 쳐들었다. 그렇게도 제 품에 안기고 싶어하던 가엾은 순을 이렇게 불행하게 된 때에 안아주는 것이 슬펐다.
방문을 들어가 뉘이려 할 때에 순은 가만히 눈을 떴다. 저를 안은 것이 숭인 것을 보고 잠깐 놀라는 표정을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자리에 뉘이고 나서 일어설 때에는 숭의 팔과 가슴에는 순의 피가 빨갛게 묻었다.
"저는 시집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냥 선생님 댁에 있게 해 주셔요."
하고 지난 가을, 숭이가 순더러 한갑이와 혼인하기를 권할 때에 참으로 하기 어려운 듯이 말하던 것을 숭은 기억한다. 그러나 숭이가 재삼 권하는 말에는,
"그러면 무엇이나 선생님 하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다 저를 위하셔서 하시는 말씀이니깐."
하고 낯색이 변하고 울먹울먹하던 것을 숭은 기억한다.
순은 한갑에게 시집가고 싶어 간 것은 아니었다. 숭이가 한갑과 혼인하라니까 한 것이었다. 순의 생각에 자기의 숭에게 대한 사랑은 영원히 달할 수 없는 공상이었다. 그리고 제 처지에 일생을 혼자 살아간다는 것도 가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숭에게 대한 끊을 수 없는 애모의 정을 안은 채 한갑에게로 시집을 간 것이었다. 숭도 이것을 모름이 아니었다.
이마가 터져서 피가 흐르고 머리채가 끄들려서 흐트러지고 하체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누워 있는 순을 바라볼 때에 허숭은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북받쳐 오름을 깨달았다.
"아아 불쌍한, 귀여운 계집애"
하는 한탄이 아니 나올 수가 없었다.
숭과 선희는 의사와 간호부 모양으로 이마 터진 데를 씻고 싸매고, 그리고는 선희에게 맡기고 숭은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였다. 초저녁에 떠돌던 구름도 사라지고 말았다. 끝없이 넓은 곳, 끝없이 오랜 덧에, 나고 괴로와하고 죽고하는 인생이 심히 가엾었다. 숭은 망연하게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선희가 순의 출혈을 막는 일을 제 힘껏 지식껏 다하고 밖으로 나와서 숭을 찾았다.
"의사를 불러야겠어요."
하고 선희는 하늘을 바라보고 섰는 숭의 곁에 와 서며 이마에 땀을 씻었다.
"피가 많이 나요"?
하고 숭은 꿈에서 깬 듯이 물었다.
"대단해요."
하고 선희는 한숨을 지었다.
"내가 가서 의사를 데려오지요. 그럼 여기 계세요. 계셔서 보아 주셔요.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고 숭은 읍을 향하고 걷기를 시작하였다.
선희는 숭의 모양이 어둠속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또 한번 한숨을 쉬고 숭이가 바라보던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영원한 찬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선희는 책에서 본 대로 순에게 소금을 먹이며 간호하고 있었다. 옆방에서는 한갑이가 드렁드렁 코를 골고 있었다. 가끔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중얼대고 있었다.
한갑 어머니는 정신없이 한편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아이구, 이를 어쩌나"?
"좀 어떠냐"?
이러한 말을 할 기운도 없는 것 같았다. 마치 아무러한 생각도 없이 쉴새 없는 근심과 슬픔에 신경이 모두 무디어진 것 같다고 선희는 생각하였다.
"어머니."
하고 순이가 눈을 뜨고 불렀다.
"왜"?
하고 한갑 어머니는 무릎으로 걸어 며느리 곁으로 왔다.
"어머니, 저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하고 순은 눈물을 흘렸다.
"그럼, 네가 무슨 죄가 있니. 그녀석이 죽일 놈이 되어서 정근 이놈의 말을 듣고 그러지."
하고 한갑 어머니는 힘있게 대답하였다.
"어머니만 그렇게 알아주시면 저는 죽어도 한이 없어요."
하고 순은 느껴 울었다. 순은 이제야 의식을 완전히 회복하여 전후사를 헤아린 모양이었다.
"죽기는 왜? 네가 죽으면 이 에미는 어떡하게. 안 죽는다, 응."
하고 한갑 어머니는 있는 웅변을 다하여 죽어가는 며느리를 위로하는 셈이었다. 순은 다시 말이 없었다.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만이 희미한 불빛에 번쩍거렸다.
선희는 순이가 다 말하지 못하는 한없는 생각과 슬픔이 알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가슴이 아팠다.
"허 선생님!"
하고 얼마 있다가 순은 다시 눈을 뜨고 불렀다.
"허 선생 읍내에 가셨수."
하고 선희는 순의 얼굴에 입을 가까이 대고 앓는 동생에게 대답하는 모양으로 대답하였다.
"왜"?
순은 다시 물었다.
"의사 부르러."
하고 선희는 손바닥으로 순의 눈물을 씻었다.
"이 밤중에"?
"……"
"난 살구 싶지 않어요."
하고 순은 선희의 손을 잡았다.
"왜 그런 소리를 허우"?
하고 선희는 순의 손을 잡았다.
"나 죽기 전에 허 선생님이 돌아오실까."
하고 또 한번 순의 눈에서 새 눈물이 흘렀다.
"곧 오실걸. 오실 때에는 자동차로 오실걸."
하며 선희는 순의 맥을 만져보았다. 맥은 알아볼 수 없으리만큼 약하고 입술은 점점 희어갔다.
순은 다시 눈을 뜨며,
"선생님."
하고 선희를 부른다.
"왜 그러우. 마음을 편안히 가지지. 그렇게 여러 생각을 마시오."
하고 선희는 순의 어깨를 만진다.
"자꾸 정신이 희미해가요. 이 정신이 남아 있는 동안에 할 말을 다 해두고 싶은데, 자꾸 정신이 흐릿해 가는걸."
하고 순은 말을 계속하기가 힘이 들어한다.
"왜 그런 말을 하우? 피가 좀 빠지면 빈혈이 되어서 그렇지만 출혈만 그치면 곧 회복된다우. 피란 얼른 생기는 것이어든. 아무 염려 말어요."
"내가 이 아이를 낳지 아니하면 무엇으로 이 누명을 벗어요? 아이를 꼭 낳아야만 누명을 벗겠는데. 죽더라도 아이를 낳아 놓고 죽어야겠는데. 뱃속의 어린애는 벌써 죽었는걸. 선생님, 이 누명을 어떻게 씻습니까. 내 누명도 누명이지마는 친부모보다도 오빠보다도 더 은혜가 많으신 선생님의- 허 선생님의 명예를 어떻게 합니까? 아무 죄도 없이."
하고 또 눈물을 흘린다.
"나 물!"
하고 옆방에서 한갑의 소리가 들린다.
"나 물 주어. 어디 갔어"?
하고 소리를 지른다.
한갑은 한 시간쯤 자고 나서 옆에 아내가 누운 줄만 알고 있는 모양이다.
"이놈아, 정신이 들었느냐."
하고 한갑 어머니는 다 찌그러진 장지를 열어 젖히며,
"이놈아, 글쎄 아무리 술을 처먹었기로 이게 무슨 짓이냐. 눈깔이 있거든 이 모양을 좀 보아라. 좀 보아!"
하고 아들의 다리를 쥐어뜯는다.
"왜? 왜? 왜"?
하고 한갑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며 벌떡 일어나 앉아 아랫목을 내려다본다.
이마를 싸매고 드러누운 아내의 모양을 보고는 한갑은 희미하게 남은 기억을 주워모아 보았다.
문을 열어 주는 아내의 머리채를 끌어 힘껏 둘러치던 생각이 나고, 읍내에서 정근이가 순이와 숭이와의 관계를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 말하던 것이 생각나고, 순이를 죽이고 숭이를 죽인다고 이 십리길을 허둥지둥 나오던 일이 생각난다. 그리고 숭의 집으로 뛰어 올라갔던 일도 생각나나 자세한 생각은 나지 아니하고, 읍내에서 정근에게 끌려 어떤 통통한 창기와 희롱하던 생각이 났다.
그러나 모든것이 안개속에 있었다.
천지가 모두 뿌옇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려 하여도 도무지 분명히 보이지 아니하는 모양으로 아무리 분명히 생각하려 하여도 도무지 분명히 생각혀지지 아니하였다.
"어떻게 됐소"?
하고 한갑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묻는다.
"어떻게 된 게 무에냐. 저기 보아라. 저렇게 모두 이마가 터지고 하혈이 되구-아이가 떨어지면 어떻게 한단 말이냐. 이 망할 자식아."
하고 한갑 어머니는 울며 아들의 어깨를 때린다.
그리고도 아들이 물 달라던 말을 생각하고 부엌으로 내려가서 사발에 물 한 그릇을 떠 가지고 온다.
한갑은 벌꺽벌꺽 그 물을 다 들이키고 도로 자리에 쓰러지더니 다시 일어나 앉으며,
"그깟놈의 아이 떨어지면 대수요? 죽어라, 죽어!"
하고 한번 뽐내고는 또 쓰러진다. 한갑의 머리에는 희미하게 질투가 북받쳐 오른 것도 있거니와 취한 생각에 제가 한 행동을 옳게 생각해보자는, 또 남아의 위신을 보전하자는 허영심이 솟아난 것이었다.
한갑의 술 취한 꼴, 말하는 모양을 보고 순은 남편에게 대하여 누를 수 없는 반감을 느꼈다. 순이가 한갑에게 시집을 온 것은 사랑이 있어서 한 일이 아니었다. 순은 숭에게 대한 사랑은 첫사랑인 동시에 마지막 사랑으로 일생을 안고 가려고 결심하였었다. 순은 두 번 사랑한다는 것을 믿지 아니하였다. 그의 속에 흐르는 조선의 피는 한 여자의 두 사랑을 굳세게 부인하였다.
그는 자기가 타고난 사랑을 숭에게 다 바쳐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순이가 한갑에게 시집을 온 것은 숭을 위함이었다.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순이가 제 사랑을 희생하는 것으로 숭을 불명예에서 구원해 내지 못한 것을 생각할 때에 오직 후회가 날 뿐이었다.
그러나 순은 한마디도 남편에게 대한 불평을 입 밖에 내려고는 아니하였다. 끝까지 숭에게 대한 자기의 희생을 완성하려고 굳게 결심하였다.
한갑은 또 코를 골았다. 그는 알콜의 힘과 피곤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었다.
닭이 울고 동편이 환하였다.
숭이가 의사를 데리고 왔을 적에는 순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배가 아프다고 가끔 깨어나서 고통을 하였으나 마침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의사는 태아가 벌써 죽었다는 것을 선언하고 출혈이 과하여서 태모의 생명도 위험하다 하여 고개를 흔들었다.
의사가 와서 진찰을 할 때에야 한갑이가 정신이 들어서 일어났다.
머리는 도끼로 패는 듯이 아팠고 눈은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눈 앞에 놓인 아내의 반쯤 죽은 참혹한 모양을 볼 때에 받는 마음의 아픔에 비겨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수술을 할 수밖에 없으나 수술을 한대도 태모의 생명을 꼭 건지리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한번 해보는 게지요."
하고 의사는 마음에 없는 빛을 보였다.
"어린애를 살릴 수는 없습니까"?
하고 한갑 어머니는 의사가 일본말 섞어서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몸을 벌벌 떨며 의사에게 물었다.
의사는 힐끗 한갑 어머니를 보기만 하고는 대답이 없었다.
"어떻게 할까"?
하고 숭은 한갑에게 물었다.
"아무렇게든지 사람을 살려야지."
하고 한갑은 씨근씨근하며 힘없이 대답하였다.
"그러면 수술을 해도 좋은가. 태아는 벌써 죽었다니까."
하고 숭은 엄숙한 눈으로 한갑을 노려보았다.
한갑은 고개를 숙여 숭의 눈을 피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을 살려야지."
하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타태수술은 부모나 호주의 승낙이 없으면 안하는 것이니까."
하고 의사는 한갑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만 살려주셔요."
하고 한갑은 애원하는 어조로 말하였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있었다.
"그럼 승낙하시오"?
하고, 의사는 수술비는 허숭이가 담당할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안심하고 재차 물었다.
"그럼 살려야지요. 사람이 살아야지요."
하고 한갑은,
"수술을 하면 꼭 살아요"?
하고 의사를 쳐다보았다.
"어린애를 살려주시오."
하고 한갑 어머니가 두 손바닥을 마주대고 빌었다.
"어린애는 벌써 죽었어요. 태모의 생명도 꼭 살아나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어요. 피가 많이 쏟아져서 심장이 대단히 약해졌으니까. 원 이 심장이 배겨날까."
하고 의사는 아무쪼록 옷이 더러운 방바닥에 닿지 아니하게 하려는 자세로 환자의 두 팔목을 잡는다.
"이거 원 맥이 약해서."
하고 의사는 간호부를 시켜 주사 준비를 시킨다.
순의 흰 팔을 걷어 올리고 의사는 무색 투명한 약으로 주사를 놓았다. 그리고 팔목을 붙들고 맥이 살아나오기를 기다리며 눈을 벌리고 회중전등으로 비치어보기도 하였다.
한갑만을 입회시키기로 하고 숭은 선희와 한갑 어머니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한갑 어머니는 들어가 본다고 몇번이나 숭의 팔을 뿌리쳤으나 숭은,
"안 가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하고 굳이 말렸다.
"아이고, 이 늙은 년이 죽더라도 손주 새끼만 살려 주우. 그게 죽으면 내가 어떻게 사나. 우우."
하고, 한갑 어머니의 감정은 마치 얼어붙었던 것이 녹아 터지는 모양으로 소리를 치며 울기 시작하였다.
"영감!"
하고 의사가 문을 열고 방에서 나오며 숭을 부른다.
"네? 어찌 되었어요"?
하고 숭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의사는 숭의 곁으로 가까이 와 서며, 일본말로,
"도저히 지금 수술을 할 수는 없습니다. 워낙 피를 많이 잃어서 심장이 약해졌으니까. 수술을 하더라도 수혈을 하거나 하기 전에는 안되겠고, 수혈을 한다 하더라도 여기는 기구가 없고, 또 도저히 혼자서는 할 수가 없으니까."
하고 담배를 꺼내어 피운다.
"그럼, 어찌하면 좋아요"?
하고 숭은 초조하였다.
"글쎄요. 원 출혈하는 환자를 읍으로 데리고 가기도 어렵고, 고마리마시다나(야단났는데요)."
"그러면 도와드릴 의사를 한 분 더 청할까요. 내가 곧 갔다가 오지요."
"헌데, 대단히 중태란 말씀이야요. 수술을 한대도 원 자신이 없습니다그려."
"그야 힘껏 해보셔서 안되는 거야 어찌합니까. 그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아야지요."
의사는 제가 눈에 들었던 순이가, 제 첩으로 달래다가 망신만 당하는 원인이 되었던 순이가 이 지경을 당하여 제 손에 생명을 맡기게 된 것이 마음에 고소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꼭 살려낼 자신이 없는 제 솜씨가 미약한 것이 부끄럽기도 하였다.
마침내 의사가 한갑이를 데리고 읍내로 들어가 수술 제구와 다른 의사를 데리고 오기로 하고 숭과 선희가 그 동안에 환자 곁에 있어서 삼십 분에 한번씩 강심제 주사를 하며 경계하기로 하였다.
의사가 젊은 의사를 데리고 수술 제구를 가지고 돌아온 것은 세 시간쯤 뒤였다. 그는 급한 환자들을 대강 보고 작년에 의전을 졸업하고 새로 개업한 의사를 데리고 왔다.
첫째로 할 일은 수혈이었다. 혈형을 검사한 결과 순의 피에 맞는 것은 숭의 피뿐이었다.
"내 피를 넣어도 좋은가"?
하고 숭은 한갑에게 물었다.
"면목 없네. 어찌해서든지 살려만 주게. 자네 은혜는 백골난망일세."
하고 한갑은 숭을 바라보았다.
숭은 한갑의 말에는 대답을 아니하고 의사가 명하는 대로 누워서 왼편 팔의 피를 뽑혔다.
순은 수혈 받을 팔을 소독할 때에 눈을 떴다. 낯선 사람들이 많이 둘러선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선희는,
"피를 넣수. 허 선생님 피를 빼어서 넣수. 이 피를 넣으면 나을 테니 안심하우."
하고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순은 눈을 굴려서 숭을 찾았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서투른 의사는 젊은 여자의 정맥을 찾아내기에도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마침내 절개를 하고야 정맥을 찾아서 침을 꽂을 수가 있었다. 숭의 피는 그 구멍으로 순의 혈관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피가 흘러 들어가는 것을 숨도 아니 쉬고 보고 있었다. 수혈이 끝나는 동안에는 벌써 숭의 피는 순의 심장을 거쳐서 몇십 번이나 순의 전신을 돌았을 것이다.
수혈이 끝난 지 십 분이나 지나서 순의 두 뺨에는 불그레한 빛이 돌았다. 그리고 팔목을 잡고 앉았는 선희의 손가락에는 맥이 차차 힘있게 뛰는 것이 눈에 분명히 감각되었다.
"맥이 살아납니다."
하고 선희가 물러앉을 때에 의사는 선희의 몸에 손을 스치며 쭈그리고 앉아서 순의 맥을 본다.
"상당히 긴장이 있군."
하고 일본말로 중얼거리고,
"시작할까."
하고 젊은 의사를 돌아본다.
젊은 의사는 대답이 없다.
"고맛다나(곤란한데)."
하고 맥을 보던 의사가 일어나며 눈을 감고 무엇을 생각한다. 아무리 하여도 해본 경험 없는 부인과 수술을 할 생각이 나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손군, 해보게."
하고 젊은 의사를 보고 말했다.
"손군"이라는 의사는 학교에 다닐 때에 부인과 수술을 견습하던 것이 기억되나, 실습기에는 내과와 외과를 보았을 뿐이요, 산부인과는 구경도 못하였던 것을 후회하였다.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아니하나 하겠다고 할 용기가 잘 나지 아니하였다.
"선생께서 하시지요. 저는 도와드리지요."
하고 젊은 의사는 선배에게 사양하였다.
숭은 이 두 의사가 도무지 신임이 되지 아니하였다. 자신 없는 수술을 해달라고 할 생각이 없었다.
선배되는 의사는 환자의 배를 한번 만져보았다. 그리고 태아의 위치를 결정하는 모양으로 이리저리 쓸어 보았다. 그러나 별로 무엇을 아는 것 같지 아니하였다.
의사는 또 마치 태아의 신음을 들으려는 것같이 귀를 환자의 배에 대었다. 이 귀를 대어보고 저 귀를 대어보았다. 선희가 보기에도 지금은 의사가 이런 일을 할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시뀨우하레쯔까나(애기집이 터졌나)"?
이런 소리로 중얼거려보았다.
"이렇게 출혈이 되다가도 감쪽같이 낫는 수도 있건마는."
하고 태아는 벌써 죽었다던 자기의 진단을 스스로 부정하면서 또 한번 귀를 환자의 배에 대어보았다. 그리고는 뱃속의 모양을 만져보아서 알려는 것같이 두루 만져보았다.
그리고는 환자의 배를 덮고 환자의 눈을 회중전등으로 한번 비치어 보고, 환자의 두 팔목을 잡고 맥을 보고, 그리고는 환자의 손톱과 발톱을 보고, 환자의 다리를 쓸어 보고, 그리고는 니쿨곽에 넣은 알콜면으로 손을 씻고 그리고는 뒤로 물러앉아서,
"도우모 먀꾸가 아야시이네(암만 해도 맥이 염련걸)."
하고 또 눈을 감는다.
순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이 입을 우물우물하였다.
선희는 얼른 미음을 숟가락에 떠서 순의 입에 넣었다. 그러나 순은 벌써 삼키는 힘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순의 이마와 가슴에는 구슬땀이 흘렀다. 선희는 수건으로 고이고이 그것을 씻었으나 씻은 뒤로 또 솟았다.
젊은 의사는 혼자 무엇을 알아본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순의 몸은 한번 경련을 일으키더니 눈을 번쩍 떴다.
"여보, 이봐."
하고 선희는 즉각적으로 무슨 무서운 연상을 가지고 순을 흔들며 불렀다.
"수술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맥을 만져보고 난 의사는 선언하였다.
"고칠 수 없어요"?
하고 한갑 어머니는 소리를 내어 울었다.
"수혈을 한번 더 하면 어떨까요"?
하고 숭이가 물었다.
"그렇게 하루에 두 번 할 수는 없습니다. 원체 쇠약하였으니까 암만해도 자신이 없습니다."
하고 간호부를 시켜 내어놓았던 기구를 주워 넣게 하였다.
"여보, 여보!"
하고 지금까지 말없이 섰던 한갑은 아내의 곁에 앉으며 아내를 흔들었다.
대답이 없었다.
"여보, 여보. 말 한 마디만 하오!"
하고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내가 당신을 죽였구려. 내가 두 목숨을 죽였구려. 여보! 한번만 눈을 떠서 내 말을 들어요!"
하고 옆에서 말리는 것도 듣지 아니하고 순을 잡아 흔드니 순은 눈도 뜨지 아니하고 대답도 없었다.
"여보, 순이!"
하고 선희도 순의 이마에 돋은 땀을 씻으며 불렀다.
순은 눈을 뜨려고 애쓰는 듯이 반쯤 눈을 떴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움직였다. 숭은 한갑의 등 뒤에 서서 순을 내려다보며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빨아들였다. 마음 같아서는 임종에 한번 안아 주고라도 싶었다. 그러나 절대로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순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한 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순을 죽이는 것이 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숭의 가슴을 찔렀다.
"그렇다, 내다. 그렇게 나를 따르는 순을 내가 아내를 삼았더면 이러한 비극은 없었을 것이 아닌가. 왜 나는 순을 버리고 정선과 혼인을 하였던가. 순에게 대한 사랑과 의리만 지켰더면 정선의 다리가 끊어지는 비극도 아니 일어났을 것이 아니었던가. 이 모든 비극은 다 나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에 숭은 모골이 송연함을 깨달았다.
의사는 최후로 강심제 하나를 주사하고 슬몃슬몃 가버리고 말았다. 밖에서 간호부를 시켜 "일금 오십원야(一金五拾圓也)"의 청구서를 숭에게 돌려보내고 가버렸다.
그 청구서를 받고 숭은 명상에서 깨어났다.
"여보, 여보!"
하고 한갑은 울며 아내를 흔들었다.
"아이구, 이를 어찌하나."
하고 한갑 어머니는 못 만난 손자 생각을 하고 울었다.
선희는 순의 입에다가 물을 떠 넣었다. 그러나 물도 그저 흘러 나오고 말았다.
강심제 주사의 힘인지 순은 눈을 떴다. 그러나 눈알이 돌지는 아니하였다. 한갑은 순의 눈에 저를 비치려고 순의 눈 앞에 제 눈을 가져다 대고,
"내요, 내야. 알어? 내야."
소리를 질렀다.
순은 얼굴 근육을 빙그레 웃는 모양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그것이 웃는 것인지 경련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한갑 어머니, 선희, 그리고 숭, 이 모양으로 차례차례 순의 눈 앞에 가까이 얼굴을 대었다. 순은 또 웃는 것 모양으로 얼굴의 근육을 움직이고 나서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목에 가래 끓는 소리가 그르렁그르렁하였다.
순의 감았던 눈이 다시 반쯤 떴다.
사람들은 순의 숨이 들어갈 때에는 또 나오기를 고대하였다. 그 동안이 퍽 오랜 것 같았다.
언젠지 모르게 순의 숨은 들어가고 다시 나오지 아니하였다.
순의 반쯤 뜬 눈은 멀리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보, 여보!"
하고 한갑은 미친 듯이 순을 흔들었다. 그러나 순의 무표정한 얼굴은 근육도 씰룩거리지 아니하였다.
사람들은 얼마 동안 말이 없었다.
한갑은 한없이 울었다.
숭은 한갑의 팔을 붙들며,
"여보게, 부인은 돌아가셨네. 자네가 부인을 오해한 죄를 부인의 얼굴을 가리기 전에 한번 말하게. 자네 부인은 한 점 티도 없는 이일세. 사람이 죽어서 혼이 있다고 하면 아직도 부인의 혼은 자네 곁에 있어서, 자네가 잘못 알았다, 용서한다는 한 마디를 기다리고 있을 것일세."
하였다.
"숭이, 면목 없네. 내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다더니 나도 사람을 죽였네. 내 아버지는 남이나 죽였지마는 나는 제 아내와 자식을 죽였네그려. 내가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살아 있겠나. 내가 무슨 면목으로 아내의 혼을 대하여 용서하네 마네 하는 말을 하겠나. 곰곰 생각하니 자네에게 지은 죄도 한이 없네. 이 어리석은 놈이 그 죽일 놈의 말을 믿고…아흐."
하고 머리를 흔들며 주먹을 불끈 쥐고 몸을 부르르 떤다. 한갑에게는 열정이 있는 동시에 순한 듯한 그 성격 중에는 어느 한 구석에 야수성이 있었다. 그의 빛이 검고 피부가 거칠고 눈이 약간 하삼백인 것이 그의 무서운 성격을 보였다.
한갑은 몇 번이나 주먹을 쥐고 떨더니 죽은 아내의 가슴에 제 낯을 대고,
"내가 잘못했소. 죽을 죄로 잘못했소. 나를 용서해 달라고는 아니하오. 용서 못할 놈을 어떻게 용서하겠소. 당신의 가슴에 아픈 원한이 맺혔거든 그것을 풀어 주시오. 그리고 기쁘게 천국으로 가시오."
하고 소리를 내어 울었다.
선희도 울고 숭도 울었다. 한갑 어머니는 정신 잃은 사람 모양으로 가만히 있었다. 그의 희미한 눈 앞에는 꼬물꼬물하는 손자의 모양이 눈에 뜨였다.
동네에는 한갑이가 순이를 발길로 차서 죽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이 퍼지자 유씨네 청년들은 분개하여 가만둘 수 없다는 의논이 높았다.
초혼 부른 적삼이 아직 한갑이의 집 지붕에 남아 있을 때에 유씨집 청년 사오 명이 모두 울분한 빛을 띠고 한갑의 집으로 몰려왔다.
"한갑이!"
하고 그 중에 갑 청년이 앞장을 서서 불렀다.
한갑이가 나왔다.
"우리 누이가 죽었다지"?
하고 갑 청년은 한갑을 노려보았다.
한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말짱하던 사람이 어째 죽었나"?
하고 갑 청년은 잼처 힐문하였다.
"헐 말 없네."
하고 한갑은 고개를 숙였다.
"헐 말 없어"?
하고 을 청년이 갑 청년의 등 뒤에서 뛰어 나왔다.
"내가 발길로 차 죽였으니 헐 말이 없지 아니한가."
하고 한갑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한갑의 얼굴에는 결심과 비장의 빛이 보였다.
"이놈아, 사람을 죽이고 너는 살 줄 아니"?
하고 병 청년이 대들며 한갑의 뺨을 갈겼다.
한갑은 때리는 대로 맞고 있었다.
"이 자식 기애가 누군 줄 아니? 유가네 딸이다. 애초에 너 같은 상놈한테 시집갈 아이가 아니야. 숭이놈 때문에 너 같은 놈한테 시집간 것만 해도 분하거든. 옳지, 이놈 발길로 차 죽여"?
하고 정 청년이 대들어서 한갑의 머리와 뺨을 함부로 때렸다.
그래도 한갑은 잠잠하였다.
"가만 있어!"
하고 갑 청년이 다른 청년들을 막으며,
"그래 무슨 죄가 있어서 내 누이를 죽였나. 만일 내 누이가 죽을 죄가 있다면 말이지, 우리가 도리어 면목이 없겠지마는, 그래, 내 누이가 음행을 했단 말인가, 불효를 했단 말인가. 어디 말 좀 해보아!"
하고 힐책하였다.
"자네 누이는 아무 죄도 없네. 모두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일세. 내가 미친놈이 되어서 남의 말을 듣고 죽을 죄를 지었지. 그러니까 자네들이 나를 때리든지, 경찰서로 끌어가든지 마음대로 하게. 다 달게 받겠네마는 내가 자네 누이를 위해서 원수 갚을 일이 있으니 하루만 참아 주게."
하고 입으로 흘러들어오는 코피를 퉤퉤 뱉어 버렸다.
유씨네 청년들은 한갑의 태연한 태도에 기운이 꺾였다.
그러할 즈음에 다른 한패의 청년들이 모여왔다. 그들도 다 유씨네 청년들이었다.
"그래, 이놈을 가만 두어"?
하고 새로 온 청년들 중에 한 사람이 한갑이 앞으로 대들었다.
"이놈아, 사람을 죽이고 성할 줄 알어"?
하고 그 청년은 한갑의 멱살을 잡아당기었다.
"그놈을 때려라!"
하는 소리가 났다.
한갑의 멱살을 잡은 청년은 한갑의 따귀를 두어 번 갈기니 한갑은 참지 못하여 그 청년의 덜미를 짚고 발길로 옆구리를 냅다 질러 마당에 거꾸러뜨렸다.
"이놈들 덤비어라! 이 개같은 놈들 같으니. 그래, 순이가 집이 없고 먹을 것이 없기로 너희놈들이 아랑곳 했니? 이 도야지 새끼같은 놈들 같으니. 내 어머니가 먹을 것이 없기로 한 놈이나 아랑곳했니? 이 죽일 놈들 같으니. 이놈들, 너희 입으로 네 누이니, 아주머니니 하는 순이가 허숭이허구 어쩌구어쩌구 했지. 이놈들아, 너희들이 그 주둥이루 안 그랬어? 그리구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이 똥을 먹일 놈들 같으니."
하고 입에 피거품을 물었다.
"이놈 봐라. 때려라!"
하고 유가네 청년들이 고함을 지르고 한갑에게로 들이덤비었다.
한갑은 혼자서 이리 치고 저리 차고 5~6명이나 때려뉘었다. 그러나 어젯밤 술에 곯았고, 낮이 기울도록 밥도 아니 먹은 한갑은 기운이 진하였다. 한갑은 땅에 엎드려서 모진 매를 맞았다.
한갑의 어머니가 나와서 울고 소리를 질러,
"사람 살리오! 사람 살리오!"
하고 외쳤으나 구경꾼만 모여들 뿐이었다.
이때에 집에 다니러 갔던 숭이가 한갑의 집을 향하고 왔다. 숭은 등성이에서 멀리 바라보고 섰는 정근을 등뒤로 보았다. 그는 한갑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고 선 것이었다. 어찌하였던지 숭의 세력의 몰락은 자기의 세력의 증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정근은 이 동네에 온 후로 숭을 찾은 적이 없었다. 혹 길에서 만나게 되더라도 외면하고 다른 데로 피해버린 것이었다.
숭은 정근을 볼 때에 울분한 생각이 폭발하였다. 이 모든 비극은 정근이가 만들어 낸 것을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이 분하였다.
"여보게, 정근이!"
하고 숭은 정신없이 섰는 정근을 불렀다. 정근은 깜짝 놀라 돌아보며 숭을 발견하였다. 정근은 무의식 중에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다가 용기를 수습하여 우뚝 선다.
"자네는 비극을 만들어 놓고 구경을 하고 섰나? 사람을 죽여 놓구 구경을 하고 섰나"?
하고 숭은 한 걸음 정근에게로 가까이 가며 정근을 노려보았다.
"그것은 누가 할 말이야"?
하고 정근은 되살았다. 그의 동그란 눈에는 독기가 품어 있었다.
"비극을 만들기는 누가 만들고, 사람을 죽이기는 누가 죽였는데. 대관절 이 평화롭던 살여울의 평화를 교란해 놓기는 누가 하였는데"?
하고 정근은 도리어 숭에게 대들었다.
"그건 무슨 말인가"?
하고 숭은 정근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갔다.
"생각해보게 그려. 자네가 나보다 더 낫게 알 것이 아닌가. 이 모든 비극의 작자인 자네가 그것을 모르고 되려 날더러 물어"?
하고 정근은 냉소하고 동네를 향하고 걸어 내려갔다.
숭은 정근이가 내려가는 뒷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정근의 흉중에는 지금 무슨 궤휼과 음모가 있는고 하고 숭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살여울 동네를 위해서 세운 모든 계획은 다 수포로 돌아간 것을 깨달았다.
숭은 성난 소리,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한갑의 집을 이윽히 바라보다가 돌아서서 집으로 왔다.
집에는 정선과 선희가 마주앉아 있었다. 숭은 잠깐 안방을 들여다보고는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오늘 안으로 무슨 더욱 큰 일이 생겨오는 것 같아서 도무지 마음이 가라앉지를 아니하였다.
숭은 손으로 이마를 괴고 책상에 기대어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살여울을 떠나지 아니하면 안된다"
하고 마음속으로 혼자 말하였다.
"떠나면 어디로 가나"?
하고 혼자 물었다.
"떠나면 살여울서 시작한 사업은 누가 하나"?
하고 또 혼자 물었다.
숭은 작은갑이를 생각하였다.
작은갑이는 조합의 서기 일을 보는 청년이었다. 그는 돌모룻집 영감님의 아들이다. 그 아버지와 같이 말이 없고, 침착하고 그리고 동네 일을 제 일과 같이 정성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좀 수완이 부족하지마는 지키는 힘과 믿음으로 동네에서 첫째였다. 한갑은 수완이 있었으나 제어하기 어려운 열정과 야수성이 있었다. 작은갑이는 그것이 없었다.
"을란아!"
하고 숭은 을란이(유월이)를 불렀다.
"너 줄아웃집 작은갑씨 오시라구, 얼른 좀 오시라구. 만일 안 계시거든 어디 가셨는지 물어보아서 일터에까지 가서라도 얼른 좀 오시라구. 급한 일이라구 그래라."
하고 일렀다.
"네에."
하고 을란은, 아직도 변하지 아니한 순 서울 말씨로 대답하고 머리꼬리를 흔들며 나갔다.
"을란이는 어찌하누"?
하고 숭은 을란의 모양을 보며 생각하였다.
"선희는 어찌하누"?
하고 숭은 이어서 생각하였다.
숭은 제게 관련된 사람이 모두 불행한 사람인 것을 생각하고, 저 자신도 불행한 사람인 것을 생각하고 한숨을 쉬었다.
"작은갑씨는 왜 불르우"?
하는 소리에 숭이 놀래어 돌아보니 정선이가 등뒤에 있었다. 그도 남편의 심상지 아니한 태도와 말에 염려가 되어서 안방으로부터 건너온 것이었다. 숭은 깊은 근심에 아내가 오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아니, 조합에 대해서 좀 할 말이 있어서…."
하고 숭은 고무다리를 치고 겨우 몸의 평형을 안보하고 섰는 아내의 가엾은 모양을 보고 위로하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우리 서울로 가."
하고 정선은 숭의 곁에 앉는다.
숭은 앉기 힘들어하는 정선을 안아 앉히었다.
"서울로"?
숭은 아내의 말에 반문하였다.
"그럼 서울로 가요. 아무리 애를 써도 일도 안되고, 동네 사람들이 고마운 줄도 모르는 걸 무엇하러 여기서 고생을 하우? 서울로 갑시다. 가서 다른 일에 그만큼 애를 쓰면 무슨 일은 성공 못하겠수"?
하고 정선은 애원하였다.
"우리가 동네 사람들한테 고맙다는 말을 들으러 여기 온 것은 아니니까. 아니하면 안될 일이니까 하는 게지…. 그런데 여보, 나도 이곳을 떠나기는 떠날 텐데…."
"정말? 그래요, 응! 이깐놈의 데를 떠나요. 오늘 밤차로라두."
"글쎄, 떠나긴 떠날 텐데 말요. 어디를 갈 마음이 있는고 하니 살여울보다 더 흉악한 데를 갈 마음이 있단 말이오."
"살여울보다 더 흉악한 데"?
하고 정선은 눈을 크게 뜬다.
"살여울 사람들은 아직도 배가 불러. 배가 부르니까 아직 덜 깨달았단 말요. 나는 저 평강을 가고 싶소. 왜 경원선을 타고 가느라면 평강, 복계를 지나서 검불랑, 세포가 있지 않소? 그 무인지경 말요. 거기 지금 소야 농장이라는 일본 사람의 큰 농장이 있는데, 거기 농민들이 많이 모여들어서 개간을 한다니 우리도 그리로 갑시다.
가서 우리도 황무지를 한 조각 얻어 가지고 개간을 해봅시다. 그리고 그 불쌍한 농민들에게 우리가 무슨 일을 해 줄 수가 있겠나 알아봅시다. 거기는 아직도 정말, 배가 고픈 줄도 모르는 살여울보다도 할일이 많을 것 같지 않소? 이 살여울은 너무도 경치가 좋고 토지가 비옥하고 배들이 불러. 좀더 부자들한테 빨려서 배가 고파야 정신들을 차릴 모양이오.
또 우리집도, 우리 생활도 너무 고등이구. 우리 이번에는 조선에 제일 가난한 동포가 사는 집에서 제일 가난한 동포가 먹는 밥을 먹어봅시다. 그리고 제일 가난한 동포가 어떻게 하면 넉넉하게 먹고 살아갈 수 있을까 실험해봅시다. 그래서 만일 그 실험이 성공한다면, 그야말로 조선을 구원하는 큰 발명이 아니겠소? 우리 그리합시다.
응, 여기서 벌여 놓았던 것은 다 작은갑군에게 맡기고 우리는 알몸뚱이만 가지고 검불랑으로 갑시다. 검불랑 가는 동포들은 다 알몸뚱이로만 가는 모양이니, 우리도 그이들과 꼭 같은 모양으로 갑시다. 우리에게는 너무도 돈이 많으니깐 가난한 이들이 도무지 믿어 주지를 않는단 말요."
"그럼, 한푼도 없이 가요? 여기 있는 건 다 남 주구"?
하고 정선은 더욱 놀랐다.
"응, 여기 있는 것은 조합 출자금으로 해서 가난한 농민들의 농자 대부의 밑천을 삼고 우리는 몸만 가보잔 말요. 어디 굶어 죽나, 안 죽나 보게."
하고 숭은 자기의 말이 정선에게 대해서 너무나 가혹한 것을 좀 완화해볼 양으로 웃어 보였다.
"난 못해. 그렇게 한푼도 없이는 난 못해."
하고 정선의 놀람과 타격은 숭의 웃음만으로 풀어지기에는 너무도 크고 강하였다.
"그렇게 어떻게 산단 말요? 난 죽으면 죽어도 그것은 못하겠소."
하고 정선은 놀람과 의혹의 혼돈속에서 단단한 결론을 얻어서 힘 있게 숭의 제안을 부인하였다.
숭은 더 말하는 것이 쓸데없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둘이 다 한참이나 잠잠히 있을 때에 을란이가 작은갑이를 데리고 왔다. 작은갑이는 논일을 하다가 오는 모양이어서 물에 젖은 괭이를 메고, 옷은 말할 것도 없고, 콧등과 이마에까지 흙이 튀었다. 잠방이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리고 맨발에 젖은 짚신을 신었다.
"거, 원, 무슨 일들이람!"
하고 괭이를 내려놓고 정선에게 공손히 인사를 한다.
"나 부르셨소"?
하고 작은갑은 마루에 올라섰다. 나이는 서너 살밖에 아니 틀리지마는, 작은갑은 숭에게 대해서 "허 선생"이라고 부르고 또 경어를 쓴다. 그는 동네 청년 중에 가장 숭의 사업과 인격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이리 들어오시오."
하고 숭은 일어나 작은갑을 맞았다.
"발이 젖어서…모판을 좀 돌보느라고."
하고 작은갑은 발바닥을 마룻바닥에 문질렀다.
"그냥 들어오셔요."
하고 정선은 작은갑이가 미안히 여기는 것을 늦추려 하였다.
안방에서 어린애가 무엇에 놀란 것처럼 으아으아하고 울었다.
"애기 우우."
하고 선희는 정선을 부르면서 어린애를 안고 둥개둥개를 하며 방 안을 돌아다녔다. 선희는 그윽히 어머니의 본능이 움직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자기는 어머니가 되어볼 날이 있을까 하고 망망한 전도를 생각하였다.
정선은 절뚝절뚝하는 양을 남에게 보이기가 싫어서 기는 모양으로 건넌방에서 나왔다.
"오, 왜"?
하고 정선은 어린애의 눈앞에 손바닥을 짝짝 두드렸다. 난 지 열 달이나 바라보는 어린애는 울음을 그치고 엄마를 향하여 두 손을 내밀었다.
"곧잘 엎디어서 놀더니 불현듯 엄마 생각이 나나 보아. 눈물이 글썽글썽하더니만 장난감을 동댕이를 치고 우는구려."
하고 선희는 어린애의 볼기짝을 한번 가볍게 때리며 웃는다.
"오, 젖 머, 젖 머."
하고 정선은 어린애에게 젖꼭지를 물리고 무릎을 흔들흔들하면서,
"이리 좀 앉어요."
하고 선희에게 앉을 자리를 가리키며,
"글쎄, 허 선생이 검불랑인가 세포인가를 가서 살자는구려. 에구, 이제 시골 구석은 지긋지긋한데 또 이만도 못한 시골을 가자니 어떡해? 선희가 허 선생한테 말 좀 해서 서울로 가도록 해 주어요. 도저히 벽창호니 어떻게 할 수가 있어야지."
"검불랑"?
하고 선희는 약간 의외임을 느끼면서 되묻는다.
"응. 왜 그 검불랑이라고 안 있수? 저 삼방 가는 데 말야. 그 무인지경 안 있수. 거기를 가 살자는구려. 난 못가. 가고 싶거든 혼자 가라지, 난 죽어도 싫어!"
하고 정선은 분개한 어조로 말을 맺는다.
"아무 데고 허 선생이 가신다면 따라가야지 어쩌우? 허 선생이 옳지 아니한 일을 하신다면 반항도 할 만하지마는, 옳은 일을 하신다는 데는 어디까지든지 도와드려야지."
하고 선희는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
"남편이 아내를 불행하게 할 권리가 어디 있소?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라도 아내가 싫다면 말아야지. 왜 아내는 부물인가"?
하고 정선의 어조는 더욱 분개한 빛을 띤다.
선희는 더 말할 계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슬며시 일어나서 집으로 갔다.
쓸쓸한 집에는 아무도 선희를 맞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젊은 사람에게 이러한 쓸쓸함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선희는 마루끝에 걸터앉아서 달내강과 달냇벌을 바라보면서 울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이 동네의 어린애들과 숭의 사업에 일생을 의탁하리라던 생각도 이제는 다 수포에 돌아간 것 같았다.
"아아, 나는 어디로 가나"?
하고 선희는 고개를 폭 수그려 버렸다.
"작은갑군, 나는 살여울을 떠나게 되겠소."
하고 숭은 침통한 어조로 말하였다.
"떠나지 않고 배기려고 해보았지마는 암만 해도 안될 모양이오. 내가 떠난 뒤에는 조합이나 유치원이나 만사를 다 작은갑군이 맡아 하시오."
"가시다니, 선생이 가시면 되우"?
하고 작은갑은 정면으로 숭의 의사에 반대하였다.
"나도 떠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오. 나는 살여울에 뼈를 묻으려고 했지마는 그렇게 안되는구려."
"안될 건 무어요? 그까진 정근이 놈은 내쫓아버리지요. 그놈을 두었다가는 동네도 망하구 말걸. 한갑이두 그놈이 충동여서 그러지요. 내가 다 아는걸. 그런 놈은 단단히 곯려 주어야 해요."
하고 작은갑은 당장에 정근이를 때려 죽일 듯이 분개한다.
"정근이 하나만 같으면야 참기도 하지마는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를 배척하는 모양이니까-."
하고 숭은 추연한 빛을 보인다.
"동네 늙은이들요"?
"젊은이들도 안 그렇소"?
"젊은이들 중에도 정근이 놈의 술잔이나 얻어먹고 못되게 구는 놈도 있지마는 그게 몇 놈 되나요. 적으나 철이 있는 사람이야 다 허 선생이 떠나신다면 동네가 안될 줄 알지요. 요새-그것도 정근이 놈의 수단이겠지-유 산장 영감이 생일날일세, 제사날일세 하고 동네 늙은이들을 청해서는 개를 잡아 먹이고, 술을 먹이고 그러지요.
못난 늙은이들이 거기 모두 솔깃해서 그러지마는 그것 몇 날 가나요? 어디 그 욕심장이 고림보 영감이 전에야 동네 사람 술 한잔 먹였나? 남의 동네 사람들을 청해 먹일지언정 없지, 없어요. 그러던 것이 요새 와서는 아주 인심을 사보려고. 흥, 그러면 되나요"?
하고 본시 말이 없던 작은갑은 갑자기 웅변이 되었다. 숭도 놀랐다. 평소에 그 밝게 관찰하는 것 같지도 않던 작은갑도 속에는 육조를 배포하였고나 하여, 그것이 더욱 작은갑에게 모든 일을 맡기는 것을 안심되게 하였다.
그러나 숭은 미리 뭉쳐 놓았던 회계 문부와 모든 서류를 작은갑에게 내어주며,
"살여울 동네에서 나를 다시 부르면 어느 때에나 오리다. 그렇지만 지금은 내가 떠나지 아니할 수가 없으니 모든 일은 다 형이 맡아 하시오. 그리구 이 집은 형이 쓰시오."
하고 숭은 "형"이란 말을 새로 썼다. 그것으로써 숭이가 작은갑을 존경함을 표시하려 함이었다.
이 때에 한 순사라는 얼굴 검은 순사가 나타났다.
"허숭씨 있소"?
하고 허숭을 보면서 한 순사가 물었다.
"네."
하고 허숭이가 일어났다.
"한 순사 오셨어요"?
하고 작은갑이도 일어섰다.
"어서 옷 입고 나오시오."
하고 한 순사는 작은갑의 인사는 받지도 아니하고 숭에게 명령하였다.
"무슨 일이야요"?
하고 숭은 물었다.
"무슨 일인지 가보면 알지."
하고 한 순사의 말은 거칠었다.
숭은 대님만 치고 농모를 쓰고 안방을 들여다보며,
"주재소에서 오래서 나는 가오. 작은갑씨한테 물어서 하시오."
하고 마당에 내려섰다.
정선은 안았던 젖먹이를 내려놓고 마루에 따라 나와서
"무슨 일이야요"?
하고 한 순사를 보고 물었다.
"죄가 있으니까 잡아가지."
하고 한 순사는 정선이가 보는 앞에서 숭에게 포승을 걸었다.
숭이 포승을 지고 끌려가는 길가에는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바라보고 있었다. 숭은 선희가 한 마장쯤 앞서서 붙들려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주재소 거의 다 미쳐서 숭은 주재소 쪽으로부터 오는 정근을 만났다. 정근은 숭을 보고 유쾌한 듯이 웃고 잘 가라는 듯 손을 들었다. 숭은 이것이 다 정근의 조화인 것을 깨달았다. 정근은 동네에 온 뒤로 동네 젊은이를 데리고 술 먹는 것, 남의 집 아내와 딸 엿보는 것, 그리고는 주재소에 다니는 것, 이 세 가지를 일삼는다는 것은 숭이도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유치장을 가지지 못한 주재소의 사무실 안에는 선희, 한갑, 또 한갑을 때린 패 중에서 두 사람이 모두 포승을 진 채로 앉아 있었다. 숭도 그 새에 끼었다.
"무얼 내다보아"?
"왜 꿈지럭거려"?
"가만 있어!"
"안돼!"
하는 지키는 순사들의 책망하는 소리가 났다.
숭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렇게 있기를 한 반 시간쯤 한 뒤에 맨 먼저 소장실로 불려 들어간 것이 한갑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고개도 꼼짝 못하고 눈으로만 힐끗힐끗 좌우를 돌아보고 덜덜 떨고 있었다.
한 이십 분쯤 되어서 한갑이가 흥분한 낯으로 순사에게 끌려서 제자리에 돌아오고, 다음에는 한갑이를 때린 청년 둘이 한꺼번에 불려 들어갔다. 그리고 방에는 숭과 선희와 한갑만이 남았다. 한갑은 숭을 향하여 미안한 듯이 눈짓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도 이십 분쯤 지나서 나오고 다음에는 선희가 불렸다.
선희는 순사에게 끌려 소장실에 들어갔다. 선희는 여자라는 특별 대우로 포승은 치지 아니하였다. 소장실에는 테이블 하나와 교의 둘이 있었다.
수염 깎은 자리가 시퍼렇고 머리가 눈썹 바로 위에까지 내려덮인 소장은 선희를 보고 교의에 앉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는,
"고꾸고가 와까루까(일본말을 할 줄 아나)"?
하고 물었다.
"너는 기생이라지"?
하고도 물었다.
"너는 허숭의 정부라지"?
하고도 물었다.
선희는 "네", "아니오"하고 간단하게 대답하였다.
"왜 살여울을 왔느냐"?
하고 물었다.
"유치원 하려고 왔소."
하고 선희는 대답하였다.
"유치원은 왜 해!"
하고 소장은 또 물었다.
"내 정성껏 아이들을 가르쳐보려고 하오."
하고 선희는 대답하였다.
"조선 독립을 위해서 유치원을 하고, 야학을 하는 것이 아니야"?
하고 소장은 소리를 높였다.
선희는 대답을 아니하였다.
"그렇지? 허숭이가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너도 거기 공명해서 제 돈을 가지고 와서 유치원을 하고 야학을 하는 것이지"?
하고 소장은 한번 더 을렀다.
"조선 사람이 하도 못사니까 좀 잘 살게 해보려고 힘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오? 유치원 하고 야학 하는 것이 무엇이 죄요"?
하고 선희는 날카로운 소리로 들이댔다.
"나마이끼나 고도 유우나(건방진 소리 말아)!"
하고 소장은 테이블을 쳤다.
선희의 대답이 소장의 심중을 해한 것이었다.
선희는 소장이 자기에게 대하여 조롱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심히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흥분된 어조로,
"대관절 무슨 죄로 나를 잡아왔소. 나는 어린아이들과, 글 모르는 부녀들을 가르친 죄밖에는 아무 것도없소."
하고 선희는 찢어지는 소리를 질렀다.
선희는 저 스스로도 놀라리만큼 큰소리를 내었다.
이것이 소장의 심정을 더욱 좋지 못하게 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년! 예가 어딘 줄 알구"?
하고 곁에 섰던 순사가 선희의 뺨을 한번 갈겼다.
"이년을 묶어라!"
하고, 소장은 분개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사는 포승을 내어서 선희를 묶었다. 그리고 신문하던 조서 끝에,
"피의자(선희를 가르킴)는 성질이 흉악하고, 언동이 오만하고 교격하여 신문하는 경찰관을 향하여 폭언을 토하고…."
하는 구절을 써넣었다.
선희는 낯에 핏기가 하나도 없이 순사에게 끌려서 자리에 돌아왔다.
"어디라고 그런 버르장머리를 해"?
하고 끌고 온 순사는 한번 선희를 노려보았다.
"오, 경관이란 건 무죄한 사람을 때리라는 것이냐"?
하고 선희는 대들었다.
"건방진 년. 이년, 어디 경을 좀 단단히 쳐보아라."
하고 주먹으로 한번 선희를 때릴 듯이 으르고,
"허숭이!"
하고 굵단 소리로 부르며, 숭의 팔목과 허리를 비끄러맨 포승을 심술궂게 잡아챈다.
숭은 순사에게 끌려 소장실에 들어갔다. 소장은 선희에게 대해서 발한 분한 마음이 아직도 가라앉지 아니하여서 담배를 뻑뻑 빨고 있었다.
소장은 채 아니 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더니 주소 성명 등을 묻는 것도 다 집어치우고, 앉으란 말도 없이 다짜고짜로,
"너는 어째서 사람을 죽이게 했어"?
하고 흥분된 어조로 물었다.
"나는 사람을 죽이게 한 일이 없소."
하고 숭은 냉정하게 대답하였다.
"없다"?
하고 소장은 반문하였다.
"없소!"
하고 숭은 여전히 냉정하였다.
"그러면 모깡꼬(맹한갑)의 아내 유순이가 왜 죽었단 말이냐"?
하고 소장은 어성을 높였다.
"유순이가 죽은 것과 나와는 아무 관계도 있을 수 없소."
"있을 수 없어"?
"없소."
"모깡꼬는 네가 죽이라고 해서 죽였다는데."
"그런 몰상식한 일이 있을 리도 없고, 맹한갑이가 그런 말을 했을 리도 없소."
소장은 화두를 돌려,
"유순은 네 정부지"?
하고 숭을 노려보았다.
"그런 무례한 말을 해서는 아니되오."
하고 숭은 어성을 높여서,
"유순은 내가 중매를 해서 맹한갑과 혼인하게 된 남의 정당한 아내요."
하고 말끝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내가 다 안다. 네가 유순을 데려다 두고 거진 일 년 동안이나 정부로 희롱하다가 유순이가 잉태를 하게 되니까, 그것을 감추느라고 한갑에게 시집을 보내고, 그리고 유순이가 아이를 낳는 날이면 네 죄상이 발각될 터이니까 한갑이가 너를 믿는 것을 기화로 여겨서,
맹한갑더러는 유순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맹한갑의 아이가 아니라, 유순의 행실이 부정해서 든 아이라고 말을 해서 맹한갑으로 하여금 유순을 죽여버려서 네 죄상을 감추어버리게 한 것이지? 벌써 맹한갑이가 자백을 했고, 모든 증인들이 다 말을 했는데, 그런데도 모른다고 잡아떼어"?
하고 소장은 주먹으로 책상을 쳤다.
소장의 말에 숭은 기가 막히지 아니할 수 없었다. 소장의 말은 곧, 정근이가 하던 말과 같은 것을 깨달았다. 아침에 정근을 만났던 것과, 또 바로 아까 주재소 앞에서 정근을 만났던 것을 합해서 생각하면 대개가 추측이 되었다.
그렇지마는 도덕적으로 생각할 때에 소장의 말은 절절이 옳았다. 유순을 죽이게 한 것은 간접적으로 분명히 자기다.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이 숭이라고 부르짖은 정근의 말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늘이 정근의 입을 빌어서 자기의 양심에 주는 책망인 듯하였다.
"잘 생각해보아! 너는 고등교육도 받고 고등문관 시험까지 파스한 신사가 아니냐. 한 일을 사내답게 했다고 해야지. 사내답게!"
하고 소장은 숭이가 무엇을 깊이 생각하고 있는 눈치를 보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자백을 시키려고 하였다. 소장의 말은 부드러웠다.
"내게도 죄는 있소. 그렇지마는 그것은 내 양심의 도덕상 죄이지 법률상 책임을 질 죄는 아니오."
하고 숭은 대답하였다.
"요시, 요시(잘 했다는 뜻)!"
하고 소장은 숭의 말을 받아서 적더니,
"그러면 전부를 다 말해보게그려!"
하고 소장은 유쾌한 빛을 보였다.
"어서 말하지. 바로 다 말하면 본서에 보고할 때에도 좋도록 할 수가 있으니까. 자현했다고 해도 좋으니까."
하고 소장은 숭에게 자백을 재촉하였다.
숭이가 유순이나 한갑에게 대하여 깊이 느끼는 도덕적 책임은 그의 법률적 이론을 둔하게 만들었다.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제가 책임 없는것을 말해 버리면 그만이 아닌가? 유순과 간통한 사실도 없고, 한갑을 교사한 사실도 없다는 것을 밝혀 말하면 그만이 아닌가.
그렇지마는 숭의 마음은 그것을 허락할 수가 없었다. 순을 죽인 책임을 한갑에게만 지우는 것이 숭으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한갑과 공범이 되어서 한갑이가 받는 형벌을 같이 받는 것이 정당한 듯하였다.
이러한 생각에 숭은 한참이나 잠자코 있었다.
"어서 말해!"
하고 소장은 어성을 높여서,
"한갑을 교사해서 유순을 죽이게 한 것이 분명하지"?
하고 조건을 들어서 묻기 시작한다.
"나는 한갑이더러 유순을 죽이라고 한 일은 없소."
하고 숭은 대답하였다.
"바로 지금 했다고 말을 하고는 삼분도 못 지나서 그것을 부인해!"
하고 소장은 성을 내었다.
"없으니까 없다고 하는 것이오."
하고 숭은 새로운 결심으로 대답하였다.
"그러면 아까 네가 죄가 있다고 한 것은 무엇이냐? 거짓말을 하면 용서 아니할걸!"
하고 소장은 물었다.
"유순이라는 여자는 지극히 마음이 아름답고 곧은 여자여서 내가 믿기에는 결코 실행한 일이 없소. 한갑은 어떤 사람의 참소를 듣고 그 아내, 유순의 배에 있는 아이를 다른 사람의 아이로 잘못 생각하고, 취중에 아마 때린 모양이오.
그러나 나는 맹한갑이가 그 아내를 때릴 때에는 목격하지도 못하였고, 또 맹한갑의 입으로나 유순의 입으로나 그때 정황은 들은 일이 없소. 내가 맹한갑의 집에 간 것은 맹한갑의 어머니가 와서 큰일이 났다고, 태모가 출혈을 하니 와 달라고 하는 말을 듣고 간 것이오. 그러니까, 내가 이 사건에 대해서 관계한 것은 탈지면, 붕대, 응급치료, 약품 등속을 가지고 뛰어간 것과, 읍내에 들어가서 의사를 불러온 것밖에는 없소."
하고 숭은 사건 관계를 설명하였다.
"대관절, 너는 왜 이 곳에 와 사느냐"?
하고 소장은 화제를 돌린다.
"애써 고학을 해서 변호사까지 되어 가지고, 무슨 까닭에 이 시골구석에 와서 묻혔느냐 말이야"?
"살여울은 내 고향이니까, 고향을 위해서 좀 도움이 될까 하고 와 있소."
하고 숭은 흥미 없는 대답을 하였다.
"어떻게 돕는단 말인가"?
"글 모르는 사람은 글도 가르쳐주고, 조합을 만들어서 생산, 판매, 소비도 합리화를 시키고, 위생 사상도 보급을 시키고, 생활 개선도 하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지금보다 좀 낫게 살도록 해 보자는 것이오."
"무슨 다른 목적이 있는 것 아닌가? 지금 그런 일은 당국에서 다 하고 있는 일인데, 네가 그 일을 한다는 것은 당국이 하는 일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당국에 반항하자는 것이 아닌가"?
숭은 대답이 없었다.
"필시 그런 게지? 총독 치하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거기 반항하자는 게지? 내가 들으니까 네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조선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모든 인권을 다 남에게 빼앗기고, 물건도 남의 물건만 사 쓰고, 그래서 점점 조선 사람이 가난하게 되니, 조선 사람들이 자각을 해서 조선 사람끼리 모든것을 다 해 가도록 해야 된다고, 그러기 위해서 조합도 만들고, 유치원도 설치하고, 야학도 열고, 단결도 해야 된다고 그랬다지"?
하고 소장은 엄연한 태도로 숭을 노려보았다.
"내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런 말을 한 일은 없소."
하고 숭은 부인하였다.
"그러면 그런 생각은 가졌나"?
"그런 생각은 가졌소.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런 말을 했기로 그것이 죄를 구성하리라고는 믿지 않소."
하고 숭도 법적 어조로 답변을 하였다.
"요오시, 와깟다(오냐, 알았다)!"
하고 소장은 숭의 말을 적었다.
"소화 년 월 일 협동조합 총회에서 네가 이렇게 해야만 우리 조선 사람이 살아난다고, 이렇게 하려면, 조합을 만들고, 조선 사람끼리 잘 살아야 된다는, 공동목적으로 단결하지 아니하면 다 죽는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지"?
"그런 의미의 말을 한 것은 사실이오."
"오냐."
하고 소장은 또 적었다.
"너는 법률을 안다면서 그러한 언동이 죄가 되는 줄을 몰라"?
하고 소장은 철필 대가리로 테이블전을 한번 두드렸다.
"조선 사람들이 저희끼리 힘써서 잘 산다는 것이 무슨 죄가 될 것 있소"?
하고 숭은 소장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필경은 총독 정치에 반항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
하고, 소장은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잘못 생각하신 것이오. 농민들이 야학을 세우고 조합을 만들고 하는 것은 순전히 문화적, 경제적 활동이지, 거기 아무 정치적 의도가 포함된 것은 아니라고 믿소. 또 촌 농민들에게 무슨 정치적 의도가 있을 바가 아니오.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더 잘 살아보겠다고 하는 농민의 노력을 죄로 여긴다면, 그야말로 농민으로 하여금 반항할 길밖에 없게 하는 것이오."
"건방진 소리 말아. 할말이 있거든 본서나 검사국에 가서 해!"
하고 소리를 지르고 소장은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너는 본래 건방진 놈이다. 계집을 둘씩 셋씩 끌고 다니며 아니꼽게 농민을 위해 일을 한다고, 네 일이나 해!"
하고 궐련을 꺼내어 성냥을 득 그어서 피운다.
숭은 사십 분 동안이나 심문을 받고, 누르라는 곳에 지장을 누르고 자리에 돌아나왔다. 그 때에 정근이가 의기양양하게 와서 소장실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허숭, 백선희, 맹한갑 등 다섯 명은, 무너미 주재소를 다 저녁때에 떠나서 읍내 본서까지 압송이 되었다. 그들이 무너미를 떠날 때에는 다수의 동민들이 길가에 나와서 전송하였으나 그것이 섭섭하게 여기는 전송인지 또는 단순한 구경인지도 표시되지 아니하였다. 오직 돌모룻집 작은갑이가 비창한 낯으로 얼마를 더 따라오다가 숭이에게,
"가사는 다 믿소. 장례도 믿소."
하는 부탁을 받고 울며 돌아섰다.
한갑과 숭을 다 잃어버린 한갑 어머니는 정신없이 울고만 있었다. 동네에서는 늙은이들이 가끔 들여다 볼 뿐이요, 젊은 축들은 그림자도 얼씬하지 아니하였다.
이튿날, 읍에서 경찰서장이 검사의 자격으로 공의를 데리고 와서 시체를 선희의 유치원에 운반하여다가 해부하고 현장을 검사하고 돌아갔다. 공의는 서장을 향하여 귓속으로, 순이가 죽은 원인은 자궁파열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숭의 집, 선희의 집의 가택수색을 하고 조합문서와 편지 몇 장을 압수해 가지고 갔다.
유가들은 또 한번 모여서 떠들었으나 아무도 장례를 위하여 나서는 이는 없었다.
"서방질하다가 뒈진 년을 장례는 무슨 장례냐"?
하고 비웃는 자도 있었다.
돌모룻집 부자와, 쌍동이 아버지와, 기타 한갑이 친구, 숭을 존경하는 사람 등 몇 사람이 모여서 순의 다 찢긴 시체를 싸서, 밀짚거적에 묶어서 공동묘지에 갖다가 묻었다. 이 날은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왔다.
한갑 어머니와 정선이가 평지가 끝나는 곳까지 따라갔다. 정선은 그 초라한 순의 장례, 맞들리어 홑이불을 덮고 들려가는 순의 시체가 점점 멀어가는 것을 보고 길가에 서서 혼자 울었다. 불쌍한 순을 더욱 불쌍하게 만든 것이 정선이 자신인 것만 같아서 가슴이 아팠다.
"참말 얌전하던 여자, 착하고도 맺혔던 여자, 사랑에 실패한 한을 영원히 품고 가는구나!"
하고 정선은 눈물을 씻으며 자탄하였다.
숭과 선희가 잡혀간 뒤에 유치원은 패쇄를 당하였다. 유치원에 다니던 아이들은 모여서 놀 곳을 잃고 산으로, 들로 흩어져 다니며 장난을 하였다. 어디서든지 유치원 집을 바라보던 아이들은,
"저기서 송장 쨌단다. 골에서 의사가 와서 송장 쨌단다."
"거기, 머리 푼 구신(귀신) 난다드라, 야!"
하고는 소리를 지르고 달아났다.
이 동네에는 흉가가 둘이 생긴 것이었다. 하나는 한갑이의 집이요, 또 하나는 선희의 집, 곧 유치원이었다.
정선이도 유치원을 바라보면, 더구나 새벽이나 황혼에 바라보면 그리 유쾌한 생각은 나지 아니하였다. 마음에 좀 꺼림한 것을 작은갑에게 부탁하여, 유치원에 두었던 피아노와 선희의 세간을 집으로 옮겨오게 하였다. 피아노는 마루에 놓고 선희의 짐은 건넌방에 들여 쌓았다.
남편이 잡혀간 지도 일 주일이 넘었다.
"나는 검사국으로 넘어가오. 살여울에 있기가 어렵거든 서울로 올라가시오. 집 일은 모두 작은갑군에게 물어서 하시오"
하는 엽서가 숭으로부터 왔다.
어느 날, 어느 시에 떠나는 줄만 알면 정거장이라도 가고 싶었으나, 작은갑의 보고에 의하여 한갑을 때린 사람들은 놓여나오고 그 사람들의 말을 듣건대 숭과 선희와 한갑은 어제 아침차로 으로 갔다고 한다.
"서울을 가? 내가 왜 서울을 가."
하고 정선은 엄지손가락을 씹으며 울었다. 정선은 일생에 처음 독립한 판단을 아니하면 아니될 경우를 당하였다. 제 배의 키를 제 손으로 잡지 아니하면 아니될 경우를 당하였다.
정선은 을란을 불렀다.
을란은 정선이가 슬퍼하는 양을 보고 더욱 마음이 비감하여,
"선생님 어떻게 되셨어요"?
하고 물었다.
"검사국으로 가셨단다."
"그럼, 언제나 돌아오셔요"?
"알 수 있니? 그런데 너 어찌하련? 너 나허구 있으련? 서울로 가련? 어려워할 것 없이 네 마음대로 해라."
"전, 선생님 계시는 데 있어요."
하고 을란은 대답하였다. 을란은 근래에 와서는 정선에 대한 반감이 줄고 동정하는 마음이 생겼다. 선생님이라는 것은 정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여기 있으면 농사를 지어야 된다. 선생님이 하시던 농사를 우리 둘이 지어야 한다. 김도 매고, 거두기도 하고-그것을 네가 할 테냐"?
"허지, 그럼 못해요? 그렇지 않아도 금년부텀은 해보려고 했는데."
하고 을란은 밭과 논에 나가서 다리와 팔을 올려 걷고 김을 매는 것을 상상하였다. 그것은 을란에게는 심히 유쾌한 생각이었다.
"뙤약볕에 논밭에 김을 매는 것이 그렇게 수월한 일이 아니다."
"알아요. 그래두 전 해요! 혼자 서울은 안 가요. 언제까지든지 살여울 살 테야요."
하고 을란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씻는다.
"고맙다. 그러자, 응. 우리 둘이 여기서 선생님 돌아오실 때까지 농사 지어 먹고 살자, 응."
하고 정선도 새로운 눈물을 흘렸다.
"나도 다리만 성하면야, 남 하는 것 못할라구. 그렇지만 밭 김이야 못매겠니. 그것도 못하면 집에서 밥이야 짓겠지, 소나 먹이고."
하고 정선은 결심의 표로 입을 꼭 다물었다.
"을란아, 넌 소 먹이는 것 구경했지"?
하고 정선은 제가 소를 먹일 것을 생각하고 물었다.
"그럼요. 강가로 슬슬 끌고 다니며 풀을 뜯기고, 배가 부를 만하면 물을 먹이고 그러면 되지요, 별것 있나요, 머"?
"꼴을 누가 비나"?
하고, 정선은 남편이 꼴망태에 먹음직스러운 꼴을 베어서 메고 석양에 소를 끌고 돌아오던 것을 생각하였다.
"제가 꼴을 베면 남들이 웃을까"?
하고 을란이가 웃었다.
"커다란 계집애가 꼴을 베는 게 다 무어냐. 아이를 하나 얻어 둘까."
하고 정선도 웃었다.
이때에 작은갑이가 또 씨근거리고 달려왔다.
"한갑 어머니가 물에 빠져서 돌아가셨어요!"
하고 작은갑은 주먹으로 이마에 땀을 씻었다.
"네에"?
하고 정선은 펄쩍 뛰었다.
"어디서요? 언제"?
"아침에 가 보니까요, 안 계시단 말야요. 그래 어디를 가셨나 하고 찾아보아도 없거든요. 거 이상하다 하고 아까 댁에 왔다가 가는 길에, 암만해도 이상하길래 강가로 찾아가 보았더니 아, 그래, 여울에 무엇이 허연 것이 있길래 가 보니까 한갑 어머니겠지요. 그래서 들어가서 끌어내다 놓고 지금 주재소에 가서 말하고 오는 길입니다."
"아이 저를 어찌해."
하고 정선은 양미간을 찡그렸다.
"그래 시체는 어떡허셨어요"?
하고 정선은 일어나서 문설주에 몸을 기대고 아래 여울 쪽을 바라본다. 거기는 거뭇거뭇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아마 순사들이 나온 모양이었다.
"시체는 주재소에서 묻으라고 해야 묻지요. 그러나 저러나 돈이 없어서 걱정입니다. 어떻게 묶어다가 묻기는 해야 할 텐데."
하고 작은갑은 입맛을 쩍 다신다.
정선이가 십원 한 장을 작은갑에게 주어서 작은갑이가 널 하나를 사고, 유 산장네 집에서 베를 한 필 사서, 또 돌모룻집 영감과 쌍동 아버지가 염을 해서 한갑 어머니를 공동묘지에 갖다 묻었다. 그리고는, 동네에서는 한갑의 집을 흉가라고 해서 헐어버리자고 하였으나, 소유권자인 한갑의 말을 듣기 전에는 그리할 수 없다고 해서 내버려 두었다. 사람들은 낮에도 한갑의 집 앞을 지나가기를 꺼려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로 돌아다녔다.
작은갑은 형무소 맹한갑의 이름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지냈다는 말만 하고 어떤 모양으로 죽었다는 것은 말하지 아니하였다. 한갑이네 집에서 먹이던 개는 처치할 길이 없어서 정선이가 맡아서 기르기로 하였다. 두 귀가 넓적하고 잘 생긴 개였다. 다만 잘 얻어먹지를 못해서 뼈마디가 불툭불툭 내밀고 털도 곱지를 못하였다.
한갑이네 개는 곧 정선과 을란이에게 정이 들었다. 그러나 본래 숭이 집에서 자라던 바둑이라는 개한테는 눌려 지냈다. 한갑이네 개는 본래 이름이 없어서 섭섭이라고 을란이가 이름을 지었다. 주인집이 다 불쌍하게 되어서 섭섭하다는 뜻이었다.
숭의 집은 다시 안정이 되었다. 정선은 다시 울지 아니하였다. 모든 일은 혼자의 판단과 의지력으로 해보려고 결심하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논이나 밭을 어떻게 할 일, 소를 어떻게 먹일 일을 생각하였다. 아침마다 한번씩 들러주는 작은갑에게 혹은 문의하고 혹은 부탁하여 일을 처결하였다. 처음에는 스스로 제 판단과 제 의지력을 의심하였으나 하루 이틀, 한번 두번 경험함으로 점점 파겁(破怯)이 되어서 자신이 생기게 되었다.
마치 과부된 사람이 곧잘 사내답게 집안 처리를 하는 것과 같았다. 게다가 정선이가 받은 전문교육은 이렇게 독립된 생활을 하게 된 때에 큰 힘을 주었다. 정선은 한 달이 다 못해서 가사를 주재하는 데 거리낌이 없이 되었다.
정선은 아침에 일어나면 을란을 일터로 보내고 을란이가 길어다 준 물로 손수 밥을 지었다. 절뚝절뚝하는 다리로 부엌으로 들락날락하는 정선의 행주치마 모양이 보였다.
정선은 방을 치기와 빨래하기도 배웠다. 소를 강변으로 끌고 다니며 풀을 뜯기기도 하고, 썩 좋은 꼴판을 발견할 때에는 이튿날 낫을 들고 나와서 베기도 하였다.
정선의 분결같은 손은 피부가 점점 굳어지고 정선의 흰 낯은 꺼멓게 볕에 그을렀다. 그 모양으로 정선의 정신도 굳어지고 기운차게 되었다.
노동과 피곤은 정선의 입맛을 돋우어서 오래 두고 먹던 소화약의 필요를 없이 하였다. 그리고 베개에 머리를 붙이기만 하면 잠이 들었다.
정선은 새로운 인생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제 마음대로 아무에게도 의지함이 없이 사는 인생이요, 노동과 피곤에서 오는 세월 가는 줄 모르는 인생이었다.
정선의 집 마당에는 빨래가 하얗게 널린다. 그것은 정선이가 빤 것이다. 정선은 풀질을 배우고 밟는 것을 배우고 다리는 것을 배웠다. 적삼 등에 땀이 흐르는 것쯤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선은 화장 제구를 집어치웠다. 볕에 그을러 검은 얼굴에 분을 바를 필요도 없었다. 머리 모양을 낼 필요도 없었다. 그저 든든하게, 그저 검소하게, 정선은 이러한 중에서 새로운 미를 발견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곧 서울로 쫓겨가려니 하던 정선이가 아주 시골 여편네가 다 되어버려서 농사를 짓고, 진일, 궂은 일을 다 몸소 하는 것을 보고는 놀랬다. 그리고 살여울 부인들은 분도 안 바르고 비단옷도 아니 입고 제 손으로 아침 저녁을 짓고 제 손으로 빨래를 하는 정선에게서 자기네와 꼭 같은 여성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정선의 집에 놀러 와서 마음놓고 이야기를 하였다. 그들은 비로소 정선이가 결코 나쁜 년, 교만한 년, 아니꼬운 년이 아니요, 도리어 마음이 아름답고 인사성 있고 지식 많은 "사람"이요, "여편네"인 것을 발견하여 사랑하고 존경하는 생각을 발견하였다.
살여울 부인네들은, 처음에는 정선을 구경하러 오고 다음에는 사귀러 왔으나 마침내는 정선에게 무엇을 배우고 청하고 의지하러 오게 되었다.
"살여울 모룻집 아이어멈은 참 양반다운 사람이야."
하고 늙은 부인네들이 칭찬하고 먹을 것이 있으면 싸다 주게 되었다.
허숭이가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농민을 선동하여 협동조합과 야학회를 조직하였다는 죄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오년, 백선희가 공범으로 삼년, 작은갑이가 삼년, 맹한갑이가 상해치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오년의 징역 언도를 받고 일년 삼 개월의 예심을 치른 후이었다. 네 사람은 일제히 공소권을 포기하고 복역하였다.
피고인 일동은 판결을 받은 날 재판장의 허락으로 약 오 분간 법정에서 공소할 여부 기타를 의논도 하고 이야기도 할 기회를 허락하였다.
그 자리에서 한갑은 숭을 향하여,
"용서해 주게, 내가 지금이야 형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았네. 내가 칠년 후에 옥에서 나가는 날이면 내가 남은 목숨을 형에게 바치려네."
하고 숭의 손을 잡으려 하였으나 간수에게 금지를 당하였다.
숭은 말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였다.
"공소하시려오"?
하고 숭은 선희에게 물었다.
"저는 선생님 하시는 대로 해요."
하고 선희는 초췌한 숭을 보았다.
"나는 공소권을 포기하겠소이다."
"저도 공소 안해요."
하고 선희는 재판장을 바라보았다.
"나도 안해요."
하고 작은갑이는 도로 고개를 숙인다.
"한갑군 자네는"?
하고 숭이가 물었다.
"우리는 죽든지 살든지 형의 뒤를 따를 사람일세."
하고 한갑은 숭의 앞에 허리를 굽혔다.
이리하여 판결은 확정되고 피고들은 간수에게 끌려서 법정을 나섰다. 방청석에 있던 정선은 남편이 웃어보이는 양을 보고 목을 놓아 울었다. 같이 방청석에 갔던 한민교 선생이 정선을 붙들고 법정 밖으로 나왔다. 한 선생의 눈에도 눈물이 있었다.
정선과 한 선생은 숭에게 최후의 면회를 허락받았다.
한 선생은 정선을 데리고 아침 아홉시에 형무소에 갔다. 높은 벽돌담, 시커먼 철문, 조그마한 창으로 내다보는 무장한 간수의 무서운 눈, 그 앞에 면회하러 온 친족들, 늙은이, 젊은 여편네, 어린애를 안은 촌 부인네, 양복 입은 사람, 이러한 칠팔 인이 문 앞에 모여 있었다.
대서소에서 쓴 면회 청원과 차입 청원을 조그마한 창으로 들여밀고 제 차례가 돌아와 불러들이기를 기다리고 서성서성하고 있었다.
큰 철문 말고 작은 철문이 삐걱 열리고 무장한 간수의 전신이 나타나며,
"-."
하고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저마다 제가 불린 듯하여 한두 걸음 문을 향하고 일제히 걸어 들어가다가, 정말 불린 사람만이 들어가는 것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는 슬몃슬몃 뒤로 물러서서 또 왔다갔다하기를 시작한다. 그 동안 자건거를 타고 온 출입 상인들과 인력거를 타고 온 변호사들이 들어간다.
이리하기를 한 시간이나 한 뒤에 간수가 나타나며,
"한민교. 윤정선."
하고 부른다.
한 선생은 정선을 앞세우고 나무패 하나씩을 받아 들고 철문 속으로 들어갔다.
문에 들어서서 황토물 들인 옷을 입은 죄수들이 무슨 짐들을 가지고 개미떼 모양으로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면서 마당을 건너 문을 열고 들어가면 형무소의 서무과다. 모두들 부채를 부치며 사무를 보고 있고, 면회 청원을 맡은 간수가 앞에 놓인 수없는 청원 중에서 한 장씩을 골라 뽑아 가지고는,
"무슨 일로 만나"?
"면회한 지가 아직 두 달이 못되었는데 또 면회를 해"?
이 모양으로 약간 귀찮은 듯이, 아무쪼록은 허하지 아니하려는 의사를 보이고, 면회하러 온 이는 멀리서 왔다는 둥, 꼭 만나야 할 채권 채무 관계가 있다는 둥 하여 아무쪼록 면회를 하려고 애걸을 한다.
한 선생과 정선은 여기서 기다린 지도 약 한 시간, 벽에 걸린 시계가 열한시를 가리킬 때에야 겨우 차례가 돌아왔다.
간수는 정선이가 가지고 온 재판장의 소개장을 내어 보이자,
"재판이 끝난 뒤에 재판장의 소개가 무슨 상관이오"?
하고 벽두에 트집을 잡았다.
"윤정선은 허숭의 호적상 아낸가"?
하고 간수는 정선을 바라보았다. 정선은 이 시골 형무소의 면회인 중에서는 보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정선의 이 아름다움과 그리고는 갖추어 있는 모양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네."
하고 정선은 일종의 모욕을 느끼면서도 순순하게 대답하였다.
"한민교는 무슨 일로 만나"?
하고 간수는 한 선생을 보았다.
"나는 허숭씨와는 친구요. 허숭씨가 복역 중에는 그집 살림을 돌볼 사람이 나밖에 없고, 또 백선희로 말하면 내가 가르친 학생인데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복역 중에 그의 재산 정리도 내가 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형편이외다. 그 까닭에 내가 서울서 위해 내려왔소이다."
하고 한 선생은 간수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친족도 아니면서 만나자면 되나"?
하고 간수는 화를 내었으나 필경은 두 사람에게 다 면회를 허하였다.
"저 지하실에 내려가 기다려-."
하고 간수는 다른 청원서를 집었다.
한 선생과 정선은 다시 물품을 들이고 내어주고 하는 데 가서 차입했던 의복 기타 물품을 받아낼 수속을 하고 면회인들이 기다리는 지하실을 찾아 내려갔다.
유월의 지하실은 찌는 듯이 더웠다. 사람들은 제 차례를 기다리고 모두 말없이 앉아 있었다. 저마다 제가 찾아온 죄수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쭈그러진 노파는 간수가 번뜻 보일 때마다,
"나으리, 나으리, 우리 아들 좀 만나게 해주시우. 삼백 리길을 늙은 것이 걸어 왔수다."
하고 부처님 앞에서 하는 모양으로 합장하고 절을 하였다.
간수는 본 체 만 체하고 면회 차례 된 사람을 데리고 들어갔다.
"자제는 무슨 죄로 와 있소"?
하고 어떤 양복 입은 청년이 묻는다.
"우리 아들이오? 우리 아들 좀 메뇌(면회)하게 해주세요."
하고 노파는 그 청년에게도 절을 한다.
이 노파는 귀가 절벽이었다. 여러 사람들은 심심파적으로 노파의 귀에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도 보고 손으로 시늉도 해보았으나, 뜻은 통하지 아니하고 다만 아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같은 소리를 할 뿐이었다.
이윽고 간수가 나와서 그 노파를 보고,
"안돼, 가!"
하고 일변 고개를 흔들고, 일변 손으로 가라는 뜻을 표하였다.
노파는 또 몇번 합장배례를 하였으나 간수에게 몰려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노파의 아들은 소작쟁의에 들었다가 농터를 떼운 한으로 지주의 집에 불을 놓은 청년이었다.
마침내 정선의 차례가 왔다.
"윤정선. 한민교."
하고 두 사람은 함께 불렸다. 정선과 한 선생은 각각 간수가 지시하는 창 앞에 가 섰다.
이삼 분이나 지났을까 한 때에 정선의 앞에 있는 창이 덜컥하고 위로 올라가고 거기는 숭의 얼굴이 나타났다.
"왔소"?
하고 숭은 반가운 웃음을 띠었다.
"몸은 괜찮으시우"?
하고 정선은 울렁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누르면서 첫 말을 내었다.
정선은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려 하는 것을 간수가 주의하던 말을 듣고 억지로 참았다.
"나는 괜찮아요. 선(善)이 잘 노우"?
하고 숭은 아내에게 묻는다. 선이란 정선이가 낳은 어린애의 이름이다. 호적에는 물론 숭의 맏딸로 되어 있다.
"네."
하고 정선은 울음 섞어 대답하였다.
"어떻게 하려오. 서울로 올라가시려오? 편할 대로 하시오."
하고 숭은 정선의 말문을 열려고 애를 쓴다.
"난 서울 안가요. 살여울서 농사짓고 있을 테야요. 작년에도 나허구 을란이허구 둘이서 농사를 지어서 벼 스무 섬하구, 조 열 섬, 콩 두 섬 했답니다. 금년에두 농사를 벌여 놓았는데 모도 절반이나 나구…. 난 밥을 짓고 소 먹이지요. 내 손을 좀 보아요."
하고 꺼멓게 걸고 거친 손을 가지런히 숭의 눈앞에 내어 보인다.
"정말!"
하고 숭은 고개를 앞으로 숙여서 정선의 손을 보았다. 조그마한 손이 커질 리는 없지마는 피부는 많이 거칠었다.
"그럼, 이제는 나도 농사를 많이 배웠어요. 소만에 목화 심고 망종에 모내고…."
하고 정선도 웃었다.
"오라잇. 그러면 내가 나가도록 살여울을 지키시오!"
하고 숭은 더욱 유쾌하게,
"그래, 손수 지은 쌀로 손수 지은 밥맛이 어떻소? 서울서 먹던 밥맛과"?
하고 숭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주 맛나요. 당신만 집에 같이 계시면 얼마나 더 맛날까. 호박잎 된장찌개가 아주 훌륭하게 맛나. 김매다 말고 밭머리에서 먹는 밥도 먹어보았지요. 아주 맛나. 소화불량도 다 없어졌어요. 난 이제 아무 걱정도 없어요."
하고 정선은 정말 아무 걱정도 없는 모양을 보인다.
"구웃! 동네엔 별일 없소"?
하는 숭의 말에는 대답도 아니하고,
"왜 공소를 안한다고 그러시우? 공소를 해보시지. 무슨 까닭으로 오년이나 징역을 사시우"?
하고 정선의 얼굴에서는 잠시 있던 유쾌한 빛이 다 사라지고 만다.
"공소할 필요가 없으니까 안하는 게지."
"그러기로 오년씩이나."
"할 수 없지요. 오년 동안에 공부나 잘하지, 아직 젊었으니까. 아무 걱정 말고 농사나 잘 배우시오. 서울 기별했소"?
"기별은 안했지마는 신문을 보기로 모르셨을라구. 아시면 무얼하우. 이제는 아버지도 우리를 잊으시고 우리도 아버지를 잊어버린걸."
"정근이 그저 동네에 있소"?
"있지요. 식산조합이라고 해가지고는 집이랑, 땅이랑 저당을 잡고는 삼푼 변 사푼 변에 돈을 꾸어 주고, 동네 사람들은 그 돈을 가지고 잔치하고 술 먹고 야단이랍니다. 그리고 저당할 것 없는 사람은 장리라는가 하는 것을 주는데, 이른 여름에 벼 한 섬을 주면 가을에 가서 벼 두 섬을 받는다구요. 작년에도 장리벼를 못 물어서 그것을 금년까지 지고 넘어온 사람이 여럿이랍니다."
정선의 이 설명을 듣고 숭은 다만 고개를 끄덕끄덕할 뿐이었다.
"간단히, 가사에 관한 것만 말해."
하고 간수가 주의를 하였다.
"그럼, 우리 협동조합 재산은 다 어찌하였소"?
하고 숭이가 묻는다.
"협동조합은 못하리라고 경찰에서 금해서, 출자했던 것은 모두 나누어 가졌지요. 주재소에서 와서 입회를 하고 모두 나누었답니다. 그리고 유치원도 문을 닫고. 유치원은 나 혼자라도 하려면 하겠는데 동네 사람들의 인심이 변해서-그래도 근래에는 동네 부인들이 우리집에 놀러도 오고 의논하러도 와요. 다들 못살게 된다고, 술들만 먹고, 빚들만 지고-하고 예전 생각이 나나 보아요."
숭은 가만히 살여울을 생각하고 살여울의 앞날과 조선 농촌의 앞날을 생각하였다.
삼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살여울의 농민들은 이 동네 생긴 이래로 처음 당하는 견딜 수 없는 곤경을 당하였다. 집간, 논마지기, 밭낟갈이는 대부분 유정근이가 경영하는 식산조합의 채무 때문에 혹은 벌써 경매를 당하고, 혹은 가차압을 당하고, 혹은 지불 명령을 당하고 잃게 되었다.
빚을 얻어 쓰기가 쉬운 것과, 옛날의 신용대부 대신에 신식인 저당권 설정이라는 채권 채무의 형식은 가난한 농민들을 완전히 옭아 넣고 말았다. 숭이가 경영하던 협동조합이 농량과 병 치료비와 농구 사는 값밖에는 일체로 대부하지 아니하던 것을 야속히 여기던 살여울 농민들은 잔치 비용이거나 노름 밑천이거나를 물론하고 저당만 하면 꾸어 주는 유정근의 식산조합을 환영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가엾은 농민들은 그것이 자기네의 자살 행위인 줄을 몰랐던 것이었다.
"도장만 찍으면 돈이 생긴다."
고 살여울 농민들이 생각하게 된 지 이태가 다 못하여 이제는 농량조차도 얻을 수가 없고, 오직 추수할 곡식을 저당으로 한 장리 벼만을 얻을 수가 있게 되었다.
정근의 아버지 되는 유 산장은 아들의 수완에 절절 탄복하였다. 그래서 금년 봄부터는 모든 재산권을 전부 아들 정근에게 맡겼다.
유 산장네 재산은 숭이가 감옥에 들어간 동안에 삼배가 늘었다고도 하고 사 배가 늘었다고도 한다. 아무리 줄잡아도 갑절 이상이라는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정근은 숭의 집에서 좀더 올라간 곳에 별장이라고 일컫는 집을 짓고, 서울에 가서 고등보통학교까지 마치었다는 여학생을 첩으로 데려다가 금년 봄부터 살림을 차렸다. 도회의원에 선거될 모양으로 출마하였으나 돈만 몇천 원 없애고 낙선되고 만 것만이, 이 집의 유일한 실패였다.
그러나 불원간 면장이 될 것은 사실이라고 전하였고, 다음번에는 반드시 도회의원이 된다고도 하고, 또 동경 어떤 유력한 사람의 추천으로 불원간 군수가 되리란 말조차 있었다. 어찌되든지 유 산장집 운수는 끝없이 왕성하는 것 같이만 보였다.
그러나 이 동네에서 개벽 이래로 있어본 일 없는 차압이니, 경매니 하는 것을 당하게 되어 몇 푼어치 아니 되는 세간에 이상한 종잇조각이 붙고, 오늘까지 내 소유이던 것이 남의 손으로 끌려감을 당할 때에 받는 살여울 농민들의 가슴의 쓰라림은 비길 데가 없이 심각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하여 가는 정근에게 그 따위 민간의 불평은 한 센티멘탈리즘에 불과하였다. 혹시 불평하는 말을 하는 소작인이나 채무자가 있다고 하면 정근은 서슴지 않고,
"그것은 게으른 자의 핑계다. 약자의 비명이다. 내가 그대네에게 돈을 꾸어 준 것은 급한 때에 그대들을 도와 준 것이다. 남의 도움을 받았거든 감사한 줄을 알아라."
이 모양으로 대답할 것이다. 정근은 법률을 배우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무슨 일이든지 법률에 걸리지 않기를 힘쓴다. 정근은 이 세상에 법률밖에 무서운 무엇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한다. 그는 사람보다 몇 갑절이나 법률을 무서워한다. 무서워하는지라 그는 요리조리 법률을 피할 길을 찾는 것이다. 그의 정신의 전체는 "법의 그물을 피하여 돈을 모으는 것"에만 쓰였다.
그러나 정근에게도 한 걱정이 생겼다. 그것은 작은갑이의 만기 출옥이다.
정근이가 작은갑이가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작은갑이가 돌아오면 자기의 횡포에 한 꺼림이 생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가 비록 보통학교밖에는 더 배운 것이 없고, 또 사람도 그렇게 잘난 편이 아니지마는 작은갑에게는 옳은 것을 위해서는 겁을 내지 아니하는 무서운 성질이 있었다. 그것은 힘으로 누르기도 어렵고 돈으로 사기도 어려운 성질이었다.
이를테면 작은갑은 좀 둔하면서도 강직한 벽창호였다. 정근은 작은갑과 어렸을 때의 동무로서 이 성질을 잘 알았다. 숭이가 작은갑에게서 본 것도 이 성질이었다. 정근은 작은갑의 이 성질이 싫고 무시무시하였다. 게다가 그는 감옥에서 삼년이나 닦여나지 아니하였나. 그는 검사정에서나 공판정에서,
"나는 모르오. 허숭이가 하라는 대로만 하였소."
한다든지,
"조선이 잘되고 어쩌고 하는 그런 것은 모르오, 돈이 생긴다니까 하였소."
하기만 하였던들 그는 백방(白放)이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우직한 작은갑은 어디까지든지 허숭과 동지인 것을 주장하였다. 검사와 예심판사의 유도함도 듣지 아니하였고, 공판정에서도 그대로 뻗대었다.
이것은 온 동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미친놈"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러나 정근은 이러한 작은갑을 다만 미친놈이라고만 웃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정근이가 작은갑이를 싫어하는 데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작은갑의 아내에 관한 것이었다.
작은갑의 아내는 작은갑이가 옥에 들어갈 때에 겨우 열여섯 살이었다. 열두 살에 민며느리로 와서 열다섯 살에 머리를 얹고(혼인한다는 말) 내외 생활을 한 지 일년 만에 옥에 들어간 것이었다.
작은갑이가 옥에 들어갈 때에는 면회하러 온 아버지(돌모룻집 영감님)에게 제 아내를 날마다 숭의 집에 보내어 그집 일을 도와 주게 하라고 부탁하여서 한 이태 동안은 그리하였다.
그러다가 정근이가 여학생 첩을 얻어서 따로 집을 잡은 뒤에는 여러 가지로 꼬여서 작은갑의 처를 한 달에 이원씩 월급을 주기로 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학생 첩의 시중을 들게 했다. 밥도 짓고, 물도 긷고, 세수물도 놓고, 빨래도 하고 그리고 자리도 깔고, 걷고, 어멈 비슷, 몸종 비슷한 일을 하였다. 월말이면 월급 외에 인조견 치마채, 저고리감도 주었다.
정근이가 작은갑의 처를 이렇게 불러다가 쓰는 것은 결코 그의 서비스만을 위함이 아님은 물론이었다. 열여덟, 열아홉 살의 통통한 그 육체에 마음을 두었음은 물론이었다. 동네에는 한 달이 못하여 소문이 났다. 학생 첩과 정근과의 사이에 싸움이 나면 그것은 작은갑의 처 때문이라고들 다 추측하였다. 아마 그럴 것이다.
"아가, 너 학생 첩네 가지 말아, 가더라도 해지기 전에 돌아와."
이 모양으로 시아버지의 말을 듣는 일도 작은갑의 처에게는 있었다.
"한 달에 스무 냥이 얼마야요."
하고 며느리는 뾰로통하였다.
아들과는 딴판으로 사람이 좋기만 한 돌모룻집 영감님은 그 이상 더 말할 수가 없었다. 이 촌에서 인조견 옷을 걸치고 낯에 분기운을 보이고 다니는 며느리의 꼴은 시아버지 눈에 아니 거슬릴 수 없는 풍경이지마는 명절이 되어도 며느리 옷 한 가지도 못해 주는 시아비로는 그 이상 더 책망할 수도 없었다. 오직 월말이면 지전 두 장을 꽁꽁 뭉쳐다가 시아버지 앞에 내어놓는 것만 눈물겹게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러한 때에 돌아온다는 작은갑이다. 돌모룻집 영감님은 며느리가 지어 놓은 작은갑의 옷 한 벌을 가지고 며느리가 번 돈으로 차비를 해 가지고 형무소까지 아들 마중을 갔던 것이었다.
작은갑이가 살여울에 돌아온다는 날(그날은 곧 선희도 돌아오는 날이다) 동네 청년 육칠 명은 저녁차에 두 사람을 맞으러 일을 쉬고 정거장까지 나아갔다. 정선이도 고무다리를 끌며 을란을 데리고 우물곁까지 나와서 기다렸다.
이 우물은 정선과 을란은 모르지마는, 이제는 벌써 오륙 년 전에 유순이가 바가지로 이슬 맺힌 거미줄을 걷고, 식전 물을 길으면서 숭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데다. 순의 무덤이 바로 이 우물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는 것도 이상한 인연이었다.
유순의 무덤은 벌써 새 무덤의 빛을 잃었다. 다른 낡은 무덤과 같이 풀로 덮이었다. 정선은 명년 추석에 을란을 보내어서 이 돌아볼 사람 없는 유순의 무덤과 한갑 어머니의 무덤을 돌아보게 하였다. 예수교 학교에서 자라난 정선이라 음식을 벌여 놓는 것은 아니지마는 풀이나 뜯어 주고 꽃포기나 심어 주었다.
정선은 우물가에 서서 순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을란도 따라서 바라보았다.
"여기 오신 지가 몇 해야요"?
하고 을란은 감개를 못이기는 듯이 물었다.
"벌써 오년째다. 우리가 농사를 네 번이나 짓지 아니했니"?
하고 정선은 서울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부모 생각도 나고, 집 생각도 났다. 떠난 지 사오 년이 되어도 소식도 없는 집! 그러나 그것은 그리운 것이었다.
그리고는 정선의 머리는 속으로 돌려졌다. 거기는 남편이 흙물 묻은 옷을 입고 있다. 사오 차 면회도 하였고, 이따금 편지도 오지마는 앞으로 아직도 이태를 남긴 남편의 돌아올 기회가 막연하였다.
해는 뉘엿뉘엿 넘어간다. 지평선 위에는 구름 봉우리들이 여러 가지 모양과 여러 가지 색채로 변하였다. 논김을 매는 사람들이 석양 비낀 볕에 마치 신기루 모양으로 커다랗게 떠오르는 것이 바라보였다.
"으어허 허으허."
하는 소리밖에는 말뜻도 알아볼 수 없는 메나리 소리가 들려 왔다. 배고프고 피곤한 것을 이기려는 젊은 농부들의 억지로 짜내는 소리였다. 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장돌림의 당나귀 방울 소리가 들리고, 맥고자 밑에 손수건을 늘인 장꾼들이 새로 산 듯싶은 부채를 부치며 지껄이고 가는 것이 보이었다.
이윽고 작은갑이와 선희 일행이 무너미 고개를 넘는 것이 보였다. 뒤에 따라오는 것은 정선이가 돌모룻집 영감님 편에 부친 제 옷(예전 서울서 입던 옷)을 입고 제 파라솔을 받은 선희였다.
"저기 오시네."
하고 을란도 반가와서 따라갔다. 머리를 치렁치렁 땋아 늘인 커다란 계집애다. 정선도 절뚝절뚝하며 몇 걸음을 더 걸어 갔다.
청년들은 자기네 힘으로나 빼어 오는 것같이 작은갑과 선희를 옹위해 가지고 의기양양하게 떠들고, 웃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또 떠들고 웃었다.
"아이 정선이!"
하고 선희는 정선이가 절뚝거리고 오는 것을 보고 빠른 걸음으로 뛰어와서 파라솔을 풀밭에 내던지고 정선을 껴안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안고 울었다.
작은갑이가 정선에게 인사를 할 때에 정선은 일변 눈물을 씻으면서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목이 메어서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작은갑이와 젊은 사람들은 세 여자에게 자유로 울 기회를 주려는 듯이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정선과 선희는 언제까지나 서로 안고 울었다. 곁에 을란이도 앞치맛자락으로 낯을 가리우고 머리꼬리를 물결 지으면서 울었다.
선희는 한참이나 정선을 안고 울다가 정선에게서 물러나 정선의 화장 아니한 볕에 그을은 얼굴, 목지지미 치마에 굵은 모시 적삼을 걸친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미친 듯한 열정으로 정선의 목을 안고 수없이 그 입을 맞추었다.
"정선이가 더 이뻐졌구나."
하고 선희는 다시 정선에게서 물러서며 히스테리칼하게 웃었다.
"허 선생 면회하고 왔다. 안녕하시더라. 난 꼭 삼년 만에 뵈었는데 몸이 좀 부대하신 것 같으시어, 정선이 보거든 잘 있으니 염려 말라고 그러라고. 나는 집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꼭 한모양이라고 말하라고, 학교에 있을 때보다 공부가 많이 된다고.
서양 유학하는 셈치고 있다고 그러라고, 이태가 더 있어야 졸업이라고, 졸업하고 가거든 새 지식을 가지고 일할 터이니 그동안에 정선이는 건강과 용기를 기르고 있으라고. 광명한 앞길을 바라보고 아예 어두운, 슬픈 생각을 말라고. 그리고 또 무에라고 하셨드라-오, 옳지 친정에 한번 다녀오라고. 정선이 친정 아버지께서 감옥으로 편지를 하더라고. 필적이 떨리신 것을 보니까 퍽 노쇠하신 모양이니 얼른 가 뵈이라고."
"안 가."
하고 정선은 서울 쪽을 바라보며 눈을 끔적끔적하고 어린애 모양으로 고개를 도리도리하여 보인다.
선희는 말을 이어,
"그리구, 그리구."
하고 잊어버린 말을 생각하다가,
"오 참."
하고 을란의 손을 잡으며 선희는,
"을란이가 이제는 나이가 많았으니 적당한 신랑을 구해서 시집을 보내라고. 서울로 보내든지 살여울서 혼처를 구하든지, 정선이가 을란이 어머니가 되어서 잘 골라서 시집을 보내라고."
"안 가요. 전 집에 있을 테야요."
하고 을란은 고개를 숙이고 정선의 치마꼬리를 만진다.
정선은 을란의 어깨에 올라앉은 귀뚜라미를 집어 던지며 말없이 한숨을 쉰다.
"오 그리구 또, 저, 아이구 무슨 말씀을 또 하시더라."
하고 선희는 말을 잊어버린다.
세 여자가 울고 이야기하는 동안에 날은 아주 저물어 남빛 어두움이 달냇벌을 덮었다.
"을란아, 밥."
하고 정선이 놀렸다.
"아이구마."
하고 을란이가 집을 향하고 달려간다.
정선과 선희도 집을 향하고 걷기를 시작한다.
몇 걸음을 가다가 정선이가 우뚝 서며,
"선희, 순이 무덤이 저기라우."
하고 선희에게 시루봉 기슭을 가리켰다.
선희는 깜짝 놀라는 빛으로 정선이가 가리키는 데를 본다.
그러나 어두움은 완전히 유순의 무덤을 가리어버리고 말았다.
"한갑 어머니 무덤두 저기구."
하고 정선은 또한번 그 곳을 가리켰다.
선희는 두 무덤이 있다는 쪽을 향하여 이윽히 묵상하였다.
시루봉의 원추형인 윤곽이 마치 한 큰 무덤인 것과 같이 남은 빛에 하늘에 우뚝 솟아 있었다.
그 봉우리, 그 위에는 새로 눈 뜨는 별 하나가 반짝거렸다.
"불쌍한 순이 누운 곳이 저기라네.
무덤은 아니 보이고,
저녁 하늘에 별 하나만 깜박인다"
선희는 이러한 생각을 하고 그것으로 시를 만들어 유순의 무덤에 새겨 세울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선희와 정선은 동네 사람들을 피하여 동네를 돌아서 집으로 향하였다.
작은갑이가 집에 돌아온 길로 보고 싶은 이는 물론 그의 아내였다. 혼인이라고 해서 석 달도 다 못되어서 떠난 해, 그 때에는 아직 열 여섯 살밖에 되지 아니하였지마는, 지금은 열 아홉 살이 되어 성숙한 부녀가 되었을 아내는 작은갑이가 가장 그리운 사람일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보구 싶어!"
하고 옥중에서 소리를 지르다가 간수한테 야단을 당한 일까지 있었다.
작은갑은 전보다 퇴락한 집을 보았다. 다 썩어 문드러진 바자울, 바잣문, 여러 해 영을 잇지 못해서 여기저기 홈이 파진 것 등, 작은갑의 가슴을 아프게 하지 아니한 것이 없지마는 가장 섭섭한 것은 아내가 눈에 안 보이는 것이었다. 혹시나 죽었나 하는 무서움까지 있었다. 모두 엉성하게 뼈만 남은 동생들이 반가와하는 것도 시들하였다.
작은갑은 수줍은 마음에 아내가 어디 갔는가를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어디 앓지나 않었니"?
"아이구, 겨울에 손발이 언다던데."
"글쎄,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 고생이냐."
이러한 말을 해주는 어머니와 일가, 동네 어른들의 말에는 작은갑이는,
"예."
"무얼요."
이러한 마음 없는 대답을 하고 밖에서 발자국 소리만 나면 아내인가 하고 마당을 내다보았다. 동넷집 아이들이 모여들고, 늦도록 홰에 아니 오른 닭들이 끼룩거리고 들어오고, 동넷집 개까지 모여들어도 아내의 빛은 안 보였다.
"어따, 시장하겠다. 어디 먹을 게 있나."
하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손수 밥상을 들고 들어와서 작은갑이 앞에 놓는다.
"어디 갔어요"?
하고 작은갑이는 참다못하여 어머니를 향하고 묻는다.
"누구? 응, 네 처"?
하고 어머니는,
"어디 일 갔어. 인제 오겠지."
하고 갑자기 시들한 어조로 변한다.
"죽지는 않았군. 어디로 가지도 않았군."
하고 작은갑이는 저으기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아무렇기로 남편이 삼년이나 옥에 있다가 돌아온다는데 무슨 일을 갔길래 이렇게 늦도록 아니 돌아오는가 하고 불안한 생각이 없지 아니하였다.
돌모룻집 영감님은 반은 죽고 반만 산 사람 모양으로 아무 말도 없고 표정도 없이 밥만 먹고 있었다.
저녁상을 물려도 아내는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지붕 낮은 방은 벌써 어둡다. 그래도 아내는 안 돌아왔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뒷설겆이를 하고 있고 아버지는, 돌모룻집 영감님은 토당(툇마루가 있는 곳)에 쭈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작은갑은 화를 내며 마당에서 왔다갔다하다가 부엌을 들여다보며,
"어디 갔소? 이렇게 어둡도록 안 오니"?
하고 수줍은 것 다 제쳐놓고 물었다.
"퍽도 안달을 한다. 산 사람이 오지 않을라구. 그렇게 계집이 보고 싶거든 가 보려무나."
하고 어머니는 솥에다 숭늉 바가지를 내동댕이를 치며 어성을 높였다.
"마중 가 보렴."
하고 아버지가 작은갑에게 말을 건다.
"어디 갔어요? 날마다 이렇게 늦어요"?
하고 작은갑은 아내를 오래 떠난 남편이 가지는 일종 본능적인 의심을 느꼈다.
"가(그 애라는 뜻)레 그래두 돈을 벌어서 우리 집에서도 돈을 만져본단다. 저 홰나뭇집 정근이 학생 첩네 집에 가서 일해 주고 먹고 한 달에 이원이야. 요새 그만한 벌이는 있나."
하고 돌모룻집 영감님은 며느리의 하는 일을 변호하였다.
"뭐요"?
하고 작은갑은 눈이 뒤집힘을 깨달았다.
"아, 굶어 죽기어든 그 원수놈의 집에 가서 종 노릇을 해주어요"?
"그래두 한 달에 먹구 스무 냥이 어딘데. 스무 닢을 어디서"?
하고 돌모룻집 영감은 끙끙하고 앉았다.
작은갑은 간다온다 말 없이 휙 집에서 나왔다.
작은갑은 정근의 학생 첩의 집이라는 데를 향하여 빨리 걸었다. 그 동안에도 작은갑은 동네 길들이 더러워진 것을 보았다. 가운데 불룩하던 길이 인제는 가운데가 우묵하게 패였다. 집들도 모두 윤을 잃었다. 숭이가 애써 이루어 놓았던 동네의 문명을 정근이가 모조리 깨뜨려버린 것이었다.
작은갑은 황혼 속에 귀신같이 서 있는 한갑이네 집을 보고 우뚝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 집에서 일어난 모든 비극을 생각하였다. 그것이 모두 다 정근의 소위인 것을 생각하고 이를 갈았다.
작은갑은 한갑의 집을 지나서 보리밭과 삼밭 사이로 등성이를 올랐다. 거기 심었던 낙엽송이 모두 말라 죽은 것을 보았다.
마루터기에 올라서려 할 때에 작은갑은 눈앞에 희끗한 무엇을 보았다. 작은갑은 우뚝 섰다. 그 희끗한 것은 두 사람이었다.
작은갑은 길가 풀숲에 납작 엎드렸다. 그래 가지고는 사냥하는 사람 모양으로 가만가만히 기어올라갔다.
두 사람이 안고 섰는 양이 황혼빛에 희미하게, 그러나 윤곽만은 분명하게 하늘을 배경으로 나 떴다. 두 사람은 서로 껴안고 수없이 입을 맞추고 희롱하는 것이 보였다. 작은갑의 사지의 근육은 굳었다. 호흡도 굳었다.
"아이, 고만 놓으셔요."
하는 것은 분명히 작은갑의 아내의 음성이었다.
"내일도 오지"?
하는 것은 정근의 음성이었다.
"그럼요."
"작은갑이가 못 가게 하면 어찌할 테야"?
"아이 놓세요. 누가 보는 것 같애."
하고 여자는 몸을 빼어내려고 애를 썼다.
"흥, 오늘 밤에는 작은갑허구 오래간만에 정답게 잘 터이지."
하고 정근은 여자를 땅에 앉히려는 태도를 보였다.
"아이, 작은갑이가 보면 어떡허우"?
하고 여자는 애원하였다.
"그까짓놈 보면 대순가. 내가 주재소에 말 한마디만 하면 그놈 또 징역을 갈걸. 그놈 징역만 가면 우리 같이 살아, 응."
하고 정근은 여자를 번쩍 안아 들어서 땅에 내려놓는다.
"이놈아!"
하고 작은갑은 뛰어 나섰다.
정근은 서너 걸음 달아나다가 작은갑에게 붙들렸다. 작은갑은 정근의 멱살을 잡아서 끌고 아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아내는 땅에 엎어진 채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리우고 떨고 있었다.
"이놈아!"
하고 작은갑은 한 주먹을 높이 들었다.
"난 잘못한 것 없네."
하고 정근은 한 팔을 들어 작은갑의 주먹을 가리었다.
"내가 다 보았다. 저기 숨어서 내가 다 보았다."
하고 작은갑은 주먹으로 정근의 따귀를 서너 번 연거푸 갈겼다.
"아니, 아이구, 아이구."
하고 정근은 작은갑의 주먹을 피하며,
"아니야, 자네가 잘못 보았네, 가만 아이구 내 말을, 아이구 한마디만 듣게 아이구, 글쎄 아이구."
"이놈아. 네가 주둥이가 열 개가 있기로 무슨 할 말이 있어. 옳지 인제 내가 네놈을 죽이고야 말 터이다."
하고 작은갑은 정근을 땅에 자빠뜨려 놓고 타올라 앉았다.
작은갑과 정근이가 격투를 하는 동안에 작은갑의 처는 둘 중에 한 사람은 죽을 것을 두려워하여서 집으로 달려내려가 시아버님(돌모룻집 영감님)을 보고,
"아버님, 저 큰일났습니다. 둘이 큰 싸움이 났습니다."
하고 고하였다.
돌모룻집 영감님은 그 말에 벌써 누가 누구와 무슨 일로 싸우는지를 알았다. 그리고 영감님은 지팡이를 끌고 두 사람이 싸운다는 곳으로 올라갔다.
이리하여 가까스로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 정근은 제 집으로 들어가고 작은갑은 아버지에게 끌려서 집으로 내려왔다. 영감님은 또 앞에 무슨 불길한 일이나 생기지 아니할까 하여 속으로 겁이 나고 "어서 죽어 버려야지" 하는 자탄을 발하였다. 영감님은 자기가 못났기 때문에 재산을 못 만들어서 아들과 며느리에게도 큰소리 못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집에 돌아와 보니 작은갑도 목과 낯에 시퍼렇게 피진 곳이 여러 곳이요, 코피가 흘러 적삼 앞자락이 벌겋게 물이 들었다.
이날 밤에 작은갑의 아내는 남편이 자기를 어떻게 하려나 하고 겁을 집어먹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애초에는 남편이 자기를 건드리면,
"왜 이래"?
하고 뿌리쳐서 핀잔을 주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으나, 정근을 때려눕히고 막 때리는 양을 보고는 겁이 나서 감히 남편에게 반항할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작은갑은 밤이 새도록 곁에 아내라는 여자가 있는 것을 잊어버린 듯하였다. 작은갑의 아내는 도리어 자존심을 상하는 불쾌감을 느꼈다.
아침에 일찌감치 작은갑은 부시시 일어나서 정근의 집을 찾아갔다. 어깨와 옆구리와 아픈 데가 많다.
마당에 화초도 심고, 서양 종자 사냥개도 놓고, 말도 매고 상당히 부르조아식으로 꾸민 정근의 "학생 첩의 집" 문 밖에 선 작은갑은 짖고 대드는 개를 발을 굴러 위협하면서,
"정근이! 정근이."
하고 무거운 어조로 두어 번 불렀다.
"누구셔요"?
하고 건넌방 문을 방싯 열고 내다보는 것이 "여학생 첩"인 모양이었다.
작은갑은 그 여자의 말은 들은 체 만 체하고,
"정근이! 낼세, 작은갑이야. 한 마디 할 말이 있어서 왔네."
하고 신을 벗고 마루끝에 올라선다. 이 집은 서울집 본으로 지었다.
학생 첩이라는 여자는 작은갑이라는 말에 혼비백산하였다. 마치 지옥에서 온 사자나 보는 것같이 몸서리를 쳤다.
작은갑은 들어오란 말도 없는 주인의 방에 들어섰다. 일본식 모기장이 앞을 탁 가리웠다. 작은갑은 모기장을 한 손으로 움켜쥐어 득 잡아당기어 걷어버리고 정근이가 누운 곁에 풀썩 앉으며,
"정근이!"
하고 한번 더 크게 불렀다.
정근은 비로소 잠이 깬 것처럼 찌그러진 눈을 떠서 작은갑을 바라보았다. 정근은 도장과 돈 있는 곳을 한번 생각하고, 만져보고,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정근이, 내가 온 것은 다름이 아니야. 자네 한 사람 때문에 허 변호사라든지, 백선희씨라든지, 또 내라든지 아무 죄없이 징역을 지게 되고, 그뿐 아니라, 자네 한 사람 때문에 모처럼 살아가려든 이 동네가 다 망하게 되었으니까 내가 곰곰이 생각하니까 자네를 죽여버리는 것이 이 동네를 살리는 일이 될 것 같아. 그래서 자네를 내가 마저 죽여버리려고 왔네."
"사람 살리우!"
하고 정근은 소리를 치며 일어났다. 그러다가 작은갑의 눈을 보고는 문득 태도가 변하여 작은갑의 앞에 절하는 모양으로 엎드리며,
"살려 주우. 내가 다 죽을 죄로 잘못했으니 살려 주우. 우리가 앞뒷집에서 자라난 정리를 생각해서 목숨만 살려 주우. 여보, 여보. 이리 와서 인사드리우. 우리 어려서부터 친구가 오셨소. 여보 애희, 이리 오우. 차라도 만들고, 우선 이리 와서 인사부터 하구."
하고 정근은 반쯤 정신 나간 사람 모양으로 허둥댄다. 아홉시가 지나면 주재소장이 들르기로 되었지마는 인제 여섯시도 다 안되었으니 아침 아홉시까지는 무사히 지내도록 온갖 수단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낸들 사람을 죽이고 싶겠나, 그렇지마는-."
하고 말하려는 작은갑을 가로막으며,
"그야 자네가 분하게 생각할 줄도 알아, 그렇지만 그건 오해야. 자네 입옥 후에 자네 아버지가 무얼 좀 도와 달라고 그러시니까, 그때 마침 이 집을 지었고 해서 참, 자네 부인더러 우리 집 일을 좀 보살펴 달라고 그랬지. 그게 벌써 삼년이 아닌가.
그 동안에 매 삭에 먹고 이원이라고 정했지마는 돈일세, 옷감일세, 또 양식일세 하고 자네 집에 간 것이 해마다 백원어치는 될걸. 허지만 다 아는 처지니까 그래, 그래 나도 잘못한 게야 있지-. 그저 모두 잊구 오해를 풀어 주게, 응. 그럼 자네가 분할 테지. 그럼 오해될 것도 없지. 응, 그저 다 오해야."
작은갑은 정근의 말뜻을 짐작하느라고 정근의 눈과 입과 손을 눈도 깜짝하지 아니하고 바라보다가,
"응, 나는 내 아내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닐세. 젊은 며느리를 자네와 같은 색마의 집에 보내는 우리 아버지가 그르지. 또 내 아내가 절개가 곧으면야 누가 무에라기로 까딱 있겠나. 그러니까 나는 내 아내 문제를 문제로 삼지 않네. 누가 옳은지 그른지 오지자웅을 알 수 있나. 다만 내가 그 여자의 서방이니까 자네를 죽인 칼로는 그 계집마저 죽일 수밖에 없지. 분통이 터져서 못 견디겠으니까.
그렇지마는 내가 자네를 죽이려는 것은 이 동네를 위해서야. 자네가 삼년만 더 살아 있다가는 이 동네가 쑥밭이 되고 말 것이요, 삼년이 되기 전에 자네와 자네 집 식구는 이 동네 사람들의 성난 손에 타 죽거나 맞아 죽거나 찔려 죽거나 할 터이니, 그리되면 살여울 동네는 왼통 쑥밭이 되고 마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말야, 나허구 자네허구 죽어버리면 이 동네는 산단 말일세. 자네도 죽기는 싫겠지. 나도 죽기는 싫으이.그렇지만 나는 꼭 자네를 죽이고야 말테니 그리 알게."
하고 한 손에 들었던 수건뭉치를 탁 털어서 날이 네 치나 되는 일본식 식칼을 내어든다.
"이 사람, 제발 살려 주게. 이 사람, 작은갑이, 제발 살려 주게. 무어든지 자네가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 살려만 주게. 여보 이리 좀 와요."
하고 정근이가 미닫이를 열어젖히려는 것을 작은갑이가 정근의 팔을 꽉 붙들어서 제자리에 앉힌다.
정근은 제 몸의 어느 구석에 칼날이 들어가는 줄만 알고는,
"아고고."
하고 눈을 희번덕거린다. 그리다가 작은갑의 손에 들린 칼에 피가 흐르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서야 숨을 헐떡거린다.
여학생 첩이 덜덜 떨고 엿듣고 있다가 쏜살같이 대문 밖으로 뛰어나간다. 주재소로 가려는 것이다.
"오 주재소에 보냈구나, 그렇지만 순사가 오기 전에 너는 벌써 죽었을걸."
하고 작은갑은 칼을 들고 정근에게 대들었다.
정근은,
"여보, 가지마오! 이리 오오."
하고 학생 첩을 불렀다. 그리고는 더 말도 못하고 작은갑의 앞에 합장하고 빌었다.
여학생 첩은 남편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돌아 들어왔다. 들어와서 작은갑의 앞에 엎드려서 빌었다. 말은 못하고 그저 수없이 절을 하였다.
"이놈, 너는 법률밖에는 무서운 것이 없는 줄 아니? 세상에는 법률보다 더 무서운 것도 있다."
하고 작은갑은 을렀다.
"응 알았네, 알았어. 내 자네 하라는 대로 함세. 저 종이하고 내 만년필 하고 가져와. 자 불러요, 내 쓸 테니. 무에라고든지 자네가 쓰라는 대로 쓸 테니. 자 그 칼은 좀 놓아요. 내가 이거 손이 떨려서 어디…."
하고 정근은 종이를 앞에 놓고 붓을 든다.
작은갑은 잠깐 주저하더니,
"그래 써라. 허숭과 협동조합을 모함한 것은 전연 무근한 것을 네가 지어낸 것이지? 내 말을 받아 써!"
정근이가 떨리는 손으로 받아 쓴다.
"인제 내가 물은 말에 네 대답을 써라. 털끝만치도 속이면 안돼!"
하고 작은갑은 칼을 흔든다.
"그렇소."
하고 정근이가 답을 쓴다.
"왜 무근한 소리를 했어"?
"협동조합이 생기기 때문에 영업에 방해가 되고, 허숭씨가 동민의 존경을 받는 것이 미워서 그랬소."
하고 정근은 똑바로 쓴다.
"허숭을 감옥에 보낸 뒤에 고리대금과 부정 수단으로 모은 돈이 얼마나 되나"?
하고 작은갑이가 묻는다.
"한 오륙만 원 되오."
"그만만 되어"?
"아니, 실상 그밖에 안되네. 게서 더 될 게 있나"?
하고 정근은 입으로 대답한다.
"지금 동민에게 지운 채권은 얼마나 되고."
"일만 한 팔천 원 되오."
"그 나머지는 다 청산하고"?
"그렇소. 더러는 부동산을 사는 형식을 취하고, 더러는 강제 집행을 하여서 다 청산을 하였네."
"고대로 써!"
정근은 그 말을 쓴다.
"그러면, 이 자리에서 그 일만 팔천 원 채권은 포기하고 그 동안에 모은 육만 원에서 절반 삼만 원은 동네 교육 기금으로, 또 절반 삼만 원은 협동조합 기금으로 내어놓는다는 표를 쓰게."
"이 사람, 그렇게 다 내놓으면 나는 무얼 쓰고 사나"?
"자네는 본래 재산도 있고, 또 협동조합을 하거든 거기 일 보고 월급 받지."
정근은 작은갑이가 시키는 대로 삼만 원은 동네의 교육 자금으로, 삼만 원은 식산 자금으로 살여울 동네에 기부한다는 표를 쓰고, 연 월 일 씨명을 쓰고 도장을 찍고, 증인으로는 학생 첩이 도장을 찍고, 또 작은갑이가 도장을 찍었다.
작은갑이는 이러한 일이 어떻게 하면 법률상 효과가 생기는지를 잘 몰랐다. 다만 도장 한번 찍은 것이 오늘날 법률에는 면하지 못할 책임을 지는 것을 여러번 보아 왔었다.
정근은, 자기가 비록 이렇게 증서를 쓰고 도장을 찍는다 하더라도 나중에 협박으로 된 것이라는 한 마디면 이 일이 뒤집혀질 것을 잘 안다.
작은갑은 정근이가 쓴 표를 받아서 집어 넣고 칼을 수건에 싸서 조끼 주머니에 집어넣고 나서 정근의 손을 잡으면서, 친구다운 태도로,
"여보게, 자네가 정말 이 표대로만 하면야 이 동네에서 자네네 부자 생사당 짓고, 동상 해 세우지 않겠나. 그리 되면 자네 집도 잘 살고 동네도 잘 살지 않겠나. 꼭 이 약속대로 하여주게."
하고 손을 잡아 흔들었다.
정근은 작은갑의 태도에 놀랐다. 첫째로 작은 갑이가 칼을 들고 저를 죽이러 온 것은 아내에게 대한 분풀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아내와 정근과의 간통을 이유로 돈이나 달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대해서 정근은 논이나 여남은 마지기 주기로 결심까지 하였었다.
그러나 작은갑은 이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비치지 아니하였다. 그의 요구는 자초지종으로 순전히 동네를 위한 것이었다. 살여울 동네를 위한 것이었다. 정근에게는 이런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의외의 일이었다. 자기 같으면 이런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돈 몇천 원 떼어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삼만 원으로 조합 기금을 삼고, 삼만 원으로 교육 기관을 세우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조건은 아닌 것 같았다. 정말 그렇게 해 보고 싶은 생각도 났다.
"그럼 자네는 무고죄로 나를 고발하지 않겠나"?
하고 정근은 작은갑에게 다짐했다.
"자네가 지금 약속한 일만 한다면야 고발이라니 말이 되나. 내가 자네 집 심부름을 해주어도 싫지 않지."
"또 내가 자네 부인과-아무 일도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혹시 오해로라도 말야-그런 일을 문제로 만들지 않겠나"?
"자네가 지금 약속한 일만 한다면야 절대로 그런 일은 없지."
"고마우이. 그럼 내 약속대로 함세. 나도 사람 아닌가. 나도 오늘 자네 정성에 감격했네. 저를 잊고 동네를 생각하는 그 의사적 풍도에 감격했네."
하고 정근은 겨우 떨던 몸이 진정되고 또 파랗던 입술에 핏기가 돌며 손을 내어밀어 작은갑의 손을 청하였다. 작은갑은 쾌하게 손을 내밀어서 정근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자네가 만일 약속대로 아니하는 날이면 이것은 언제나 자네를 위해서 내가 가지고 있네. 오늘 동네를 모아서 동네에 이 일을 발표하세. 좋은 일이란 마음 난 때에 해버려야 하는 것이야. 그럼, 내 가서 일들 다 나가기 전에 동네 사람들을 유치원 집에 잠깐 모아 놓겠네. 자네가 모이란다고, 자네 심부름으로."
하고 작은갑은 일어나서 정근의 집에서 나왔다. 정근은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작은갑은 동네 집집에 다니며 정근의 뜻을 대강 말하고 모두 유치원으로 모이라고 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반신반의로 어리둥절하였다. 천하에 돈밖에 모르는 정근이가 무슨 흉계를 피우는 것인가 하면서도 유치원으로 모였다.
한 시간이 다 못해 작은갑은 다시 정근의 집으로 왔다. 정근은 바로 밥술을 놓고 있었다.
"다들 모였네. 모두 칭송이 자자하이."
"좀 앉게."
하고 정근은 어쩔 줄 모르는 듯이 작은갑을 바라보았다.
"앉을 새 있나? 어서 가세."
하고 작은갑은 선 채로 정근을 재촉하였다.
정근은 두루마기를 떼어 입고, 모자를 쓰고 작은갑을 따라나섰다.
유치원 마당에는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모두들 영양불량으로 얼굴에는 핏기가 없고 다리들도 가늘었다. 사흘을 더 살 수가 없을 것같이 참혹하였다. 모인 사람 중에는 아침을 굶은 사람도 있었다. 만일 오늘도 정근이가 좁쌀 창고를 열지 아니하면 자기네끼리 모여서 창고를 깨뜨리고 꺼내 먹자는 의논까지도 있었다. 눈앞에 먹을 것을 두고도 굶어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들 들어가십시다."
하고 작은갑은 사람들을 방으로 들이몰았다. 사람들은 정근을 흘끗흘끗 바라보며 방으로 들어갔다.
사년만에 처음으로 모이는 모임이다. 숭이가 이 동네에 있을 때에는 가끔 동네 일을 의논하느라고 모였으나 숭이가 잡혀간 뒤로는 한번도 모여본 일이 없었다.
유치원은 벽이 떨어지고 비가 새고 먼지가 겹겹이 앉았건마는 아무도 돌아보는 이가 없었다. 마당에는 풀이 무성하였다. 선희는 어제 감옥에서 돌아오는 길로 이 모양을 보고 울었다.
작은갑은 사람들이 다 자리에 정돈하기를 기다려서 사회자석에서 일어섰다. 그 곁에는 주재소에서 감시하러 온 경관이 둘이나 정모를 쓴 채로 앉아 있었다.
"오늘은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하고 작은갑은 입을 열었다. 동네 아이들도 무슨 구경이나 났는가 하고 기웃기웃 들여다보았다. 머리들이 자라고 때가 끼고 모두 귀신같이 되어버린 아이들이다. 숭이와 선희가 있을 때에는 아이들은 이렇지 아니하였다.
"유정근 선생이…."
하고 작은갑이는 뒤에 앉은 정근을 바라보며,
"우리 살여울 동네를 위하여 돈 육만 원을 내어놓으시기로 하셨습니다. 삼만 원은 교육 자금으로, 삼만 원은 협동조합 자금으로, 육만 원을 내어 놓으시기로 하였습니다. 오늘 아침에 이 사람을 부르셔서 이렇게 자필로 증서를 쓰셨습니다."
하고 정근이가 손수 쓴 증서를 낭독하고 그것을 여러 사람에게 보인 뒤에,
"그뿐 아니라 우리 살여울 동네 사람에게 지운 빚 일만 육천 원을 모두 탕감해 주시기로 하고, 여기 이렇게 표지를 다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은 회가 끝난 뒤에 각각 나오셔서 우리 유정근 선생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찾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유정근 선생이 그 동안에 우리 동네에서 원망을 받으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우리는 그 불쾌한 묵은 기억을 다 달냇물에 띄어 내려보내고 오늘부터 새로이 우리 은인이요, 우리 동네에 은인인, 유정근 선생을 새로 맞게 되었습니다."
"유정근 선생은."
하고 다른 종이 조각을 꺼내며,
"우리 지도자 허숭 선생에게 미안한 일을 하셨다는 것과 또 백선희 선생과 맹한갑군에게도 미안한 일을 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에 이 모든것을 잊어버리지 아니 하면 아니 됩니다. 우리는 기쁘게 이 불쾌한 모든 기억을 잊어버립시다. 허숭 선생이 앞으로 이태 동안 더 옥중의 고초를 보시더라도 유정근 선생이 이런 고마우신 크신 일을 하셨다는 말을 들으면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서 유정근 선생에 고맙다는 뜻을 표합시다."
하고 손을 드니 모인 사람들이 다 일제히 일어난다.
"원,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나."
하고 눈물을 흘리는 노인도 있었다.
"다들 앉으십시오."
하고 작은갑은 정근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며 인사말을 하라는 뜻을 표한다.
정근은 일어나 읍하고,
"나는 그 동안 지은 죄가 많습니다. 첫째로 옳은 사람들을 모함했고, 그 밖에도 지은 죄가 많습니다. 나는 작은갑군 때문에 눈을 떴습니다. 작은갑군에게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건마는 작은갑군은 나를 용서하셨습니다. 작은갑군은 내게는 재생지은을 주신 이입니다.
동네 여러 어른들께도 지은 죄가 태산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내가 철이 안 나서 그러한 것입니다. 이제로부터서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우리 살여울 동네를 위해서 힘쓰고자 합니다.우리 살여울 동네가 조선에 제일 넉넉하고 살기 좋고 문명한 동네가 되도록 있는 힘을 다하려고 합니다."
하고 정근은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삼키느라고 잠깐 말을 끊었다.
정근은 눈물을 삼키고 나서,
"저는 이제 여러분 앞에 자백합니다. 첫째로 유순은 애매하였습니다. 허숭군이 미워서 허숭군을 잡느라고 내가 한갑에게 없는 소리를 하였습니다. 유순을 죽인 것은 이놈입니다."
하고 제 가슴을 가리키며,
"그리고 허숭군이나 한갑이나 백선희씨나 여기 계신 작은갑씨나 다 애매합니다. 나는 처음 일본서 돌아와서 허숭이가 동네에서 채를 잡은 것을 보고 불쾌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집이 허숭이 때문에 못 살게 된다고 생각하고 허숭씨를 미워했습니다. 옳은 사람을 모함한 나는 소인입니다. 죄인입니다. 열번 죽어도 아깝지 아니한 죄인입니다.
만일 허숭씨나 한갑씨가 경찰에서나 검사국에서나 예심정에서나 공판에서나 내 말을 하였다 하면 그이들은 다 무사하고 나는 무고죄로 몰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허숭씨는 일절 그러한 말을 입 밖에도 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몹쓸 놈은 그것을 다행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내게도 양심은 있어서 자나깨나 괴로왔습니다. 순이가 밤마다 꿈에 나를 원망했습니다. 순이는 내 열촌 누이가 아닙니까.
나는 이제 모든 죄를 자백합니다. 나는 작은갑씨에게도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가 무슨 죄인 것은 말하지 아니하겠습니다마는 죽어도 마땅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작은갑씨는 나를 용서하셨습니다. 나는 내 모든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나는 이제 잡혀가서 징역을 져도 좋습니다. 그것이 도리어 맘에 편하겠습니다. 나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맘 편할 날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죄만 지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모든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여러 어른께서 나를 때리시든지 죽이시든지 마음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백번 죽어도 아깝지 아니합니다. 만일 목숨이 남으면 나는 살여울 동네를 위해서 허숭군이 하던 일을 따라 가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죄 많은 놈이라 무슨 낯을 들고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하고 정근은 울음에 소리가 막힌다.
임석한 경관들은 서로 돌아보며 눈을 꿈적거린다. 청중들도 모두 복잡한 감정에 잠겨 있었다.
정근은 눈물을 씻으며,
"지금 작은갑씨가 말씀한 것은 다 내 뜻입니다."
하고 더 말할 수가 없이 감정이 혼란하여 밖으로 나가버린다.
방에서는,
"유정근이 만세."
하고 외치는 소리가 세 번 들렸다.
극도로 흥분한 정근은 거의 본정신을 잃은 듯하였다. 그는 주재소에 자현한다고, 자현해서 허숭의 죄를 없이한다고 주장하였다. 작은갑은 굳이 만류하여 숭의 집으로 끌고 왔다.
정근은 정선과 선희를 보고,
"용서하세요, 용서하세요."
하고 일본 무사 모양으로 마루에 엎드렸다.
작은갑은 정선과 선희에게 대하여 정근이가 심기일전한 전말을 대강 말하였다. 그리고 동네를 위하여 돈 육만 원을 내어놓고 일만 육천여 원의 채권을 포기하였단 말을 하였다.
정근은 눈물 섞어 숭과 순이의 관계는 자기가 다 지어냈다는 것과, 숭과 선희와의 관계에 대한 악선전도 다 자기가 지어낸 것이라는 것과, 숭이가 자기의 죄를 다 알면서도 법정에서 한 마디도 발설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자기는 경찰에 자현하여 숭과 선희와 한갑이와 순이와 작은갑이의 애매한 것을 밝혀야 한다는 것을 말하였다.
정선과 선희는 정근의 손을 잡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위로하였다. 정근은 미친 듯이 흥분하여 스스로 억제할 바를 몰랐다.
정근은 이러한 큰 결심을 한 이튿날 형무소에 허숭을 면회하였다. 허숭은 더운 감방에서 그물을 뜨고 앉았다가 유정근이라는 사람이 면회를 청한다 하여 일변 놀라고, 일변 의아하면서 간수에게 끌려 나갔다.
정근은 숭의 얼굴이 나타나는 맡에,
"도무지 면목이 없네. 오늘 나는 자네에게 사죄를 하고 앞으로 해 나갈 일을 의논하러 왔네."
하고 단도직입으로 온 뜻을 말하였다.
숭은 대답할 바를 몰라서 다만 물끄러미 정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모든 죄를 다 깨달았네. 그리고 동네 사람들한테 자백을 했네. 인제 자네하구 한갑이한테만 자백하면 마지막일세."
하고 그 동안 모은 돈 육만 원을 사업 기금과 교육 기금으로 살여울을 위하여 내어놓기로 하였다는 말과, 남은 채권 일만 육천여 원을 탕감했단 말을 하고,
"이런 것으로 내 죄가 탕감되리라고는 믿지 않네. 나는 검사국에 자현해서 자네가 무죄한 것을 변명할 결심도 가지고 있네마는 그렇게 한다고 꼭 자네가 무죄가 될는지가 의문이야. 그래서 똑바로 말이지, 나는 세상에 있어서 자네가 나올 때까지 자네가 하던 일을 해보려고 하네. 나는 그것이 자네 뜻인 줄 아네, 안 그런가"?
숭은 아직도 대답할 바를 찾지 못한다. 도무지 이것은 믿기지 아니하는 일이다. 정근이가 무슨 생각으로 자기를 놀려먹는 것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네가 내 말을 안 믿으리. 그렇지마는 나는 자네를 미워하고 적으로 알아서 없애버리려고 하다가 필경은 자네의 인격에 감복한 것일세. 나는 새 사람이 되려네. 자네를 따르는 충실한 제자가 되려네. 나를 믿어 주게."
하고 정근은 두 손을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경찰에서나 법정에서나 자네가 나만 끌어 넣으면 죄는 내가 지고, 자네는 무사하였을 것을 나는 아네. 그렇지만 자네는 나를 끌어 넣지 아니하고 애매한 죄를 달게 지지 않었나. 나도 사람일세. 사람의 맘이 있는지라 삼사 년이 지난 오늘날에라도 제 죄를 깨달은 것이 아닌가. 이 사람, 나를 믿어 주게, 이처럼 말을 하여도 나를 못 믿나"?
하고 정근은 또 한번 합장하고 고개를 숙인다.
"정근군, 고마우이. 나는 인제 자네를 믿네. 기쁘이. 살여울 하나만 잘 살게 되면야 나는 옥에서 죽어도 한이 없네."
하고 숭은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인다.
"어서 할 말만 해!"
하고 간수가 재촉을 한다.
"네, 할 말만 하지요."
하고 정근은,
"그러면 내가 이 육만 원 돈을 가지고 어떻게 일을 할 것을 일러 주게, 무엇이든지 자네가 하라는 대로 하려네."
숭은 이윽히 생각하다가,
"서울 가서 한민교 선생을 찾아보고 그 어른을 살여울로 모셔 오고, 그래서 그 어른이 하라는 대로만 하게. 자네 한 선생 알지"?
"응, 말은 들었지. 뵈온 일은 없어."
"한 선생이 가장 조선을 잘 아시네. 조선에 무엇이 없는지 무엇이 있어야 할지를 가장 잘 아시는 이가 그 어른이니, 그 어른께 만사를 의논하게."
하고 숭은 선생을 생각하였다.
"그 어른이 살여울에 오시겠나"?
"오시겠지."
"그럼, 내가 이 길로 서울로 올라가겠네. 가서 자네 말을 하고 한 선생을 만나겠네."
하고 잠시 더할 말을 생각하다가,
"자네 부인, 따님, 다 무고하시니 염려 말게."
하고는 간수의 재촉으로 숭의 얼굴은 가리어졌다.
정근은 처음 경험하는 감동을 가지고 물러나왔다.
다방골 현 의사는 일찍 저녁을 먹고 등교의에 누워서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다. 현 의사는 사오 년 전보다는 뚱뚱해졌다. 그러나 남자도 모르고 아이도 아니 낳아 본 그는 중년 여성의 태가 있는 중에도 처녀와 같은 데가 어딘지 모르게 있었다.
현 의사는 옛날 모양으로 탁자 위에 즐겨 하는 울릉차 고뿌를 놓은 채로 요새에 와서 맛을 붙인 웨스트민스터를 피우고 있었다.
"길아, 누가 오셨나보다."
하고 현 의사는 고개를 들었다.
소리에 응하여 뛰어나오는 사람은 십 육칠 세나 되어 보이는 흰 양복 입은 미소년이었다. 계집애는 낫살만 먹으면 서방 얻어가는 것이 밉다고 하여 사내아이를 두는 것이 요새 현 의사다. 길이란 이 사내아이의 이름이다. 현 의사는 이 아이를 고르는 것을 마치 미술품을 고르는 것 모양으로 살빛을 보고 골격을 보고 손발을 보고, 눈, 코, 입을 보고 음성을 보고 별의별 것을 다 보아서 고른 것이다.
"네"?
하고 길이가 현 의사의 곁에 오는 것을 현 의사는 담뱃내를 길의 낯에 푸하고 뿜으며,
"귀먹었니? 대문에서 누가 찾지 않어"?
하고 길의 볼기짝을 때린다.
"오, 또 이 박사가 왔군."
하고 길은 댄스하는 보조로 걸어 나간다.
과연 이 박사였다.
"굿 이브닝 닥터."
하고 이 박사는 단장을 팔에 걸고 파나마를 벗어 번쩍 높이 든다.
"글쎄, 왜 순례 같은 여자를 버려"?
하고 현 의사는 누운 채로,
"어때? 인제야 이건영이가 심순례 신들은 매겠소? 흥, 앙아리 보살이 내렸지. 백주에 그런 여자를 마대. 그리구는 그게 뭐야. 이 계집애 저 계집애, 나중에는 남의 유부녀 궁둥이까지 따라다니니 흥. 어때"?
하고 피에드네(서양식 아옹)를 해보인다.
"닥터, 이건 너무하지 않으시우"?
하고 이 박사는 싱글싱글 웃는다.
이 박사도 그 동안에 몸이 나고 얼굴에는 마치 술꾼이나 건달에게서 보는 뻔질뻔질한 빛이 돈다. 오륙 년 전의 얌전하던 빛, 점잖던 빛은 다 없어졌다.
이 박사는 신발 신은 채로 한 발을 마루에 올려놓고 탁자 위의 웨스트민스터갑을 집으며,
"글쎄, 여자는 여자답게 가늣한 궐련을 먹는 게지, 웨스트민스터가 다 무에야."
하고 한 개를 꺼내어 입에 문다.
"흥, 무슨 상관야. 오늘도 어디서 한잔 자셨구려"?
하고 현 의사는 담뱃불을 이 박사에게 준다.
"인생에 실패한 나 같은 사람이 술이 아니면 무엇으로 사오? 당신이나 내나 다 인생에 패군지장이어든."
하고 맛나는 듯이 담배를 깊이 들이빤다.
"당신이나 패군지장이지 내가 왜 패군지장이오? 나는 당신네 같은 패군지장을 구경하고 사는 사람이라나."
"길아!"
하고 이 박사는 길의 손을 잡아 끌며,
"나는 네가 부럽고나."
하고 싱글싱글 웃는다.
"왜요"?
하고 길은 무슨 장단을 맞추어 몸을 우쭐거린다.
"너는 이런 주인아씨 같으신 미인 곁에 밤낮 있으니까 부럽지 아니하냐, 하하하하."
하고 길의 어깨를 툭 치고는 현 의사를 향하여,
"자 나서우!"
하고 재촉한다.
"어디를"?
"음악회."
"심순례 독주회"?
"슈어. 이렇게 표 두 장 사가지고 왔습니다."
하고 표를 내보인다.
"그래, 순례 음악회에를 갈 테야"?
하고 현 의사는 기가 막힌 듯이 웃으면서 몸을 반쯤 일으킨다.
"왜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유학을 하고 돌아와서 영광스러운 독주회를 한다는데 내가 안 가고 누가 가요"?
하고 이 박사는 뽐낸다.
"사랑하는 사람? 흥? 이 박사야 치마만 두른 사람이면 다 사랑하지? 비짜루에 치마를 둘러도 사랑할걸? 흥, 그 싸구려 사랑. 대관절 이 박사가 미국서 돌아온 후로 모두 몇 여자나 사랑하셨소? 몇 여자나 버려 주고, 몇 여자에게서나 핀둥이를 맞았소"?
"이거 왜 이러시우"?
하고 이 박사는 약간 무안한 빛을 보인다.
"이거 왜 이러시우가 아니요. 인제는 사람 구실을 좀 해보란 말이요. 그러다가 인제 텍사스에서까지 쫓겨나지 말구. 오, 참 거기 타이피스트를 또 사랑한답디다그려. 괜히 그러지 말고 다 늙어 죽기 전에 다만 며칠만이라두 사람 구실을 좀 해보아요. 세상에 왔다가 한번도 사람 구실을 못해 보고 간데서야 섭섭하지 않소"?
하고 현 의사는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볼 일 다 보았다는 듯이 또 드러눕는다.
이 박사는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다. 이 박사의 마음에도 괴로움이 생긴 것이었다. 인제는 교회도 떠나버렸다. 점잖은 친구들도 다 자기를 받지 아니하게 되었다. 여자들은 다 자기를 피하게 되었다. 잡지들이 자기를 놀려먹던 기사조차 인제는 써 주지 아니하게 되었다. 생각하면 적막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교회에를 다닌댔자 어느 천년에 신용을 회복할 것 같지도 아니하고, 무슨 사회적 활동을 하려 하여도 인제는 거들떠보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면 돈은 벌어지느냐 하면 그러할 밑천도 재주도 없었다. 텍사스에서 돈 백원이나 받는대야 그걸로는 저축이 될 성도 싶지도 아니하였다. 게다가 인제는 나이도 사십이 가까와 오지 아니하는가. 세상에서 버려진 몸은 생각할수록 적막하였다.
현 의사는 만날 적마다 이 박사를 놀려먹고 공박하였다. 그러나 현 의사밖에는 그렇게라도 자기를 아랑곳해 주는 이도 없었다. 가끔 현 의사에게 아픈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래도 적막해지면 이 박사의 발은 현 의사의 집으로 향하였다. 처음에는 현 의사를 제 것을 만들어 보려고 따라다녔으나 벌써 그 야심을 버린 지는 오래다. 이 박사가 보기에 현 의사는 하늘에 핀 꽃이었다. 그래도 현 의사를 아니 따를 수는 없었다.
현 의사도 귀찮게 생각은 하면서도 이 박사를 영접하였다. 영접한다는 것보다도 오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올 때마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희롱하는 모양으로 희롱하였다. 아무러한 말을 하여도 성도 안 내는 것이 좋은 장난감이었다. 유시호 불쌍하게 생각하는 때도 있었다.
그러한 때에는 한번 악수를 하여 주었다. 이 박사는 현 의사의 손을 한번 잡으면 울 것같이 감격하였다. 현 의사가 빙그레 웃으면서 손을 내어 주면 이 박사는 여왕의 손을 잡으려는 신하 모양으로 허리를 굽히고 그 손을 잡았다. 어떤 때에 그 손등에 키스를 하다가 뺨을 얻어맞은 일도 있었다.
"저것은 무엇에 소용이 될꾸"
하고 가끔 현 의사는 이 박사를 보고 생각하였다.
"Good for nothing(무용지물이라는 뜻)"
하고 입 밖에 내어 말한 일도 있었다.
이 박사 자신도 무용지물인 것을 의식하는 모양이었다.
"영어나 좀 가르쳐 보구려."
이렇게 현 의사는 이 박사의 소용처를 찾아도 보았다.
"허허허허."
하고 이 박사는 웃을 뿐이었다.
공회당은 상당히 만원이었다. 순례의 모교의 서양 사람 선생들도 보이고, 그의 동창인 아름다운 여자들도 떼를 지어서 순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순례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딸의 영광을 보려고 맨 앞줄에 와서 가슴을 두근거리고 앉아 있었다. 순례의 어머니는 아직 젊지마는 그 아버지는 벌써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에 주름이 잡혔다. 사년이나 만리 타국에 떠나 있던 딸이 돌아온 지가 한 달이 넘었지마는 아직도 밤에 문득 잠을 깨어서는 딸이 멀리 미국에 있는 것만 같았다.
이 박사와 현 의사도 보였다.
시계의 바늘이 여덟시를 가리키고도 이삼 분 더 지난 때에 주최자인 조선 음악회를 대표하여 이전의 A교수가 작은 몸에 연미복을 입고 단상에 나타났다. 일동은 박수를 하였다.
A교수는 이렇게 심순례를 소개하였다.
"이 사람은 우리 조선에 새 천재 한 분을 소개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압니다."
하고 심순례의 약력과 그가 어떻게 아름다운 인격을 가지고 또 어떻게 큰 재주를 가지면서도 힘써 공부하였는가를 열 있는 말로 설명한 뒤에, A교수는 한층 소리에 힘을 주어서,
"그러나 이상에 말씀한 모든 아름다운 것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을 심순례씨가 가졌습니다. 그것은 조선적인 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의 성격이 조선 사람의-조선 여성의 가장 아름다운 것을 구비하였거니와, 이것은 심순례씨의 예술에서 가장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 연주할 곡조 중에 <아아 그 나라>라는 것과 <사랑하는 이의 슬픔>은 심순례씨 자신의 작곡이라 말할 것도 없지마는 서양 사람이 지은 곡조를 치더라도 그의 손에서는 조선의 소리가 울려나옵니다. 한 말씀으로 치면 심순례씨는 서양 악기인 피아노의 건반에서 순전한 조선의 소리를 내는 예술가입니다. 심순례씨야말로 진실로 조선의 딸이요, 조선의 예술가라고 할 것입니다."
하고 심순례를 불러내었다.
집이 떠나갈 듯한 박장 소리에 낯을 붉히고 나서는 심순례는 오년 전보다 약간 몸이 야위어서 호리호리하였다. 모시 적삼에 모시 치마를 입고 그리 굽 높지 아니한 까만 구두를 신었다. 어느 모로 보든지 미국에 다녀온 현대 여성같지는 아니하고, A교수가 소개한 바와 같이 조선의 딸다운 얌전과 겸손과 수줍음이 있었다.
순례는 은사 되는 A교수의 열렬한 청중의 박수갈채에 잠깐 지나쳐 흥분함을 깨달았다. 눈이 아뜩아뜩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순례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마치 기도하는 사람 모양으로 일이 분 동안 고개를 숙이고 앉았었다.
다음 순간에 순례의 손은 들렸다. 열 손가락이 하얀 건반 위로 날았다. 방안은 고요하였다. 마치 아무것도 없고 순례가 치는 소리만이 유일한 존재인 것 같다.
한 곡조가 끝날 때마다 박수가 일어났다.
순례가 뒷방에 들어오면 순례를 딸이라고 하는 홀 부인은 순례를 껴안고 눈물을 흘리고, 순례를 사랑하는 동창들도 순례를 안고 기뻐하였다.
<아아 그 나라>가 연주될 때에는 청중은 거의 숨이 막힌 듯하였다. 그 곡조가 끝나도 청중은 박장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하였다. 그러다가 순례가 무대로부터 사라진 뒤에야 끝없이 박수를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순례는 울려오는 박수 소리를 들으면서도 마음에 누를 수 없는 슬픔이 있었다. 거의 기절할 것같이 기운이 빠짐을 깨달았다. 동창들은 부채를 부쳐주고 땀을 씻어 주었다. 그러나 순례의 가슴에는 명상할 수 없는 고적과 슬픔이 있었다.
한 선생이 들어와서 순례의 손을 잡고 칭찬의 말을 할 때에 순례는 더 참을 수 없어 소리를 내어서 울었다.
마지막은 <사랑하는 이의 슬픔>이다. 이것은 순례가 이 박사에게 버림을 받았을 때에 지은 것을 미국에서 몇군데 수정한 것이다. 순례는 이 곡조를 아니하려 하였으나 홀 부인이 굳이 권하기 때문에 프로그램에 넣은 것이었다.
순례는 마지막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곡조는 끝났다. 아아 어떻게 애틋한 선율이냐. 청중은 일제히 한숨을 쉬었다.
순례가 피아노에서 일어서려 할 때에 청중에서 꽃다발을 들고 무대에 뛰어올라 순례 앞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그것은 이 박사였다.
이 박사는 꽃다발을 순례의 앞에 내어밀었다. 순례는 무심히 꽃을 받아들고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다음 순간에 순례는 꽃다발을 무대 위에 내어던지고는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비틀비틀 쓰러지려 하였다.
쓰러지려는 순례는 A교수의 팔에 안기어 뒷방으로 옮김이 되었다. 청중이 일어섰다. 그 중에서,
"저놈 끌어내려라. 저 색마 이건영이놈을 끌어내려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영이가 무대 위에서 갈팡질팡할 때에 무대 밑으로서 어떤 노인이 뛰어 올라와 이건영의 멱살을 붙들고 따귀를 수없이 갈겼다. 그 노인은 순례의 아버지였다.
"이놈, 오늘 내 손에 죽어라."
하고 노인은 소리를 질렀다.
몇 사람이 뛰어나와서 노인을 안고 이건영을 붙들어 내렸다. 임석 경관이 나서서 청중에게는 해산을 명하고 노인과 이건영을 붙들었다.
순례는 현 의사의 손에 치료를 받았다. 십 분 후에는 회장은 고요하게 되고 뒷방에만 순례의 어머니와 홀 부인과 현 의사와 한 선생과 사랑하는 친구 몇사람이 말없이 순례가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렸다.
"그놈이, 그놈이 어쩌면 또 나선단 말이냐. 그 마귀놈이, 그 죽일 놈이."
하고 순례의 어머니도 울었다.
이십 분이나 지나서 순례는 정신을 차렸다. 현 의사가 안동하여 자동차를 타고 순례는 집으로 돌아왔다.
순례는 아무 일도 아니 생긴 것처럼 한잠을 잤다. 그리고 잠이 깬 때에는 대청의 시계가 두시를 치고 창에는 달이 환하게 비치었다.
순례는 일어나 안방에 들리지 않게 가만히 창을 열었다. 하늘에는 여기저기 구름 조각이 떠 있으나 여름 달이 휘영청 밝았다.
순례는 문지방에 몸을 기대어 멀거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안방에서는 아버지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순례가 정신없이 잠든 동안에 아버지는 경찰서에서 나온 것이다.
"그 놈이 내 딸 속인 놈이오. 그놈이 여러 계집애를 버려 준 놈이요. 그놈이 세상에 나와 돌아다니면 내 딸이 언제 또 그 변을 당할는지 모르고, 또 남의 딸을 얼마나 더 버려 줄는지 모르니 그놈을 꼭 잡아다가 가두고 내놓지를 말아 주시오."
하고 순례의 아버지는 경관에게 순박한 말을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는 사람을 때리지 말라는 말을 듣고 놓여 나왔다. 나와서는 딸이 편안히 잠들어 자는 것을 들여다보고 내외가 늦도록 이야기를 하다가 막 잠이 든 것이었다.
"그놈을 죽여버리고 마는 것을."
하고 아버지는 잠꼬대로 중얼거렸다.
순례에게 준 이건영의 타격은 순례에게보다도 순례의 아버지에게 더 아픈 영향을 주었다. 딸을 사랑하는 그는 이 사건 때문에 십 년은 더 늙은 듯하였다. 시체 사람들 모양으로 입 밖에 내어서 말은 아니하지마는 가끔 비분한 생각이 치밀어서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리해서 이 슬픔은 순례의 아버지의 성격을 침울하게 만들어 버렸다.
순례는 달을 바라보았다. 어려서부터, 보통학교, 고등학교 시절부터 바라보던 달이요, 이건영과 약혼한 뒤에 그 속에 건영의 얼굴을 그리며 바라보던 달이었다. 어디서나 달을 보면 순례는 건영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것은 순례가 이 박사와 단둘이 외출하기를 허락받은 첫날 밤에 남산공원에서 달을 가리키고 산을 가리켜 서로 사랑이 변하지 말기를 맹약한 까닭이었다. 그때에 이 박사는 순례의 귀에 입을 대고 영어로,
"저 달이 빛나는 동안, 저 하늘이 있는 동안!"하고 세번 맹세를 주었다.
그때에 순례는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것이 지금 와서 생각하면 심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순례는 미국에 있는 동안이나 미국을 떠나서 조선에 올 때에도 이건영에게 대한 생각을 떼어버리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달을 떼어버릴 수가 없는 것과 같이 그 생각을 떼어버리기가 어려웠다. 반드시 그리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건영의 인격에 대하여 침을 뱉고 싶게 불쾌한 생각을 가지지마는, 그래도 이모저모로 잊히지를 아니하였다. 그의 미운 모양이 순례를 더 괴롭게 하였다.
"내가 왜 이렇게 약해"
하고 순례는 머리를 흔들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이튿날, 한 선생이 순례의 집을 찾아왔다.
한 선생은 순례의 부모를 향하여 어젯밤에 생긴 일을 위로하고 순례를 향하여,
"너 여행 좀 안해 보련? 지금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돈 많고 문명했다는 미국에 가 있었으니 이번에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문명 못한 조선 시골 구경을 좀 해보지."
하였다.
어젯밤에 일어난 일로 순례에 관한 소문은 반드시 높을 것이었다. 새학기부터 모교에서 교편을 들기로 대개 내정을 하였지마는, 어젯밤 사건이 그 일에 어떠한 방향 전환을 줄는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순례도 좀 서울을 떠나고 싶고 순례의 부모도 딸이 잠시 어디 소풍을 하는 것이 좋을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래서 한 선생을 따라 살여울에 가보기로 곧 작정이 되었다.
서울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순례의 가슴이 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살여울 가면 정선이도 있고, 선희도 있지. 너 알지"?
하고 한 선생은 순례를 기쁘게 하려고 애를 썼다.
"그럼요."
하고, 순례도 오래 못 만난 정선과 선희를 만날 것을 기뻐하였다.
"그래라. 선생님 따라가서 구경이나 잘 해라. 선생님 말 일리지 말구."
하고 순례 어머니는 어린애 타이르듯 딸에게 말하였다.
밤 열시 이십분 경성역을 떠나는 북행에는 한민교를 전송하는 사오십 명 남녀가 있었다. 그 전송객 중에는 한은 선생도 있고, 홀 부인도 있고, 정서분도 있고, 현 의사도 있었다.
한 선생은 안동포로 지은 쯔메에리 양복에, 인제는 전 조선에서 몇 개 안 남은 총모자를 썼다.
한 선생은 평생에 소원이던 농촌 경영, 농촌 진흥운동의 기회를 잡은 것이 기뻤다. 그는 전송 나온 사람들에게 유정근을 일일이 소개하였다.
"이 이가 유정근씨요. 전재산을 내어놓아서 농촌 운동을 하시는 이인데, 조선에 이런 독지자가 열 분만 나기를 바라오."
하고 유쾌하게 웃었다.
한 은 선생의 손을 잡고는, 한 선생은 유정근을 소개한 뒤에,
"유정근씨 말씀을 들으니까 정선이가 광당포 치마 적삼을 입고 아주 농부가 다 되었답니다."
하였다.
따르르하고 차 떠날 때가 되었다는 신호가 나자 사람들은 한 선생과 마지막 악수를 교환하였다. 맨 나중 한 선생이 차에 오르려 할 때에 어떤 농군모 쓰고 고의적삼만 입은 청년 하나가 나와서,
"선생님."
하고 한 선생을 불렀다.
한 선생은 발을 멈추고 그 청년을 바라보았다.
"갑진이올시다."
하고 농모를 벗었다.
"어, 갑진군인가."
하고 한 선생은 놀라며 갑진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그리고 갑진의 차림차림을 훑어보았다.
"어서 오릅시오. 저도 신촌까지 모시고 가겠습니다."
하고 한 선생의 뒤를 따랐다.
전송하던 사람들도 갑진이라고 하는 말에 한번 놀라고 그 초췌한 행색에 두 번 놀랐다.
차는 떠났다. 한 선생은 삼등차의 승강대에 서서 고개를 숙여 일일이 전송하는 인사에 대답하였다.
순례는 한 선생의 어깨 뒤에 숨어서 아무쪼록 사람의 눈을 피했다.
"이리 와 앉게."
하고 한 선생은 갑진에게 자리를 권하며,
"그런데 대관절 그 동안 어디 가 있었나. 이삼 년 동안 도무지 소식을 못 들었네그려."
하고 갑진의 볕에 그을은 초췌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씀하지요. 저는 그 동안 검불랑 가 농사했습니다."
"검불랑"?
하고 한 선생은 더욱 놀란다.
"네, 평강 검불랑 말씀야요. 허숭 군의 예심 결정서를 보고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검불랑으로 갔습니다. 가서 만 이년 간 농부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이번 소비조합 물건을 사러 서울을 왔던 길인데, 선생님이 살여울로 가신다기에 잠깐이라도 만나뵐 양으로 퍽 주저하다가 나왔습니다."
하고 갑진은 유쾌하게 웃는다.
"어째 내 집엘 안 왔나"?
하고 한 선생은 갑진의 수목 고의 입은 무릎을 친다.
"아직 찾아뵈올 때가 못되니깐요. 아직 사람이 다 안되었으니깐요. 사람이 될 만하거든 찾아뵈오려고 했지요, 하하. 도무지 꿈 같습니다, 선생님."
하고 웃는다. 그 소리내어 웃는 모양만이 갑진의 옛 모습이었다. 차가 신촌에 서려 할 때에 갑진은 한 선생과 악수하며,
"선생님. 제일 선생님 말씀을 안 듣던 저도 필경 선생님을 따르노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명년쯤 한번 검불랑도 와 주십시오."
하고 뛰어내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