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경성농업 졸업 이후 '공동경작회'를 만들어 농촌운동을 일으킨 장질 심재영과 수원에서 활동하다가 죽은 최용신 등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여 씌어진 소설이다. 작품에는 심재영이 박동혁으로 최용신이 채영신으로 바뀌어 있다. 당시 우리 사회 지식인들에게 유행하던 브나로드 운동을 모티브로,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사랑을 내용으로 한 소설이다. 청석골을 다듬어지고 가꾸어진 성취된 사회로 만들려는 지향적 욕구와 식민지 치하라는 존재적 현실 사이의 갈등과 그 비극적인 현실을 그린 농민소설이다.
[작가 소개]
심 훈(沈熏, 1901-1936) : 본명 심대섭(沈大燮), 호는 금강생, 금호어초(琴湖漁樵), 백랑(白浪), 해풍(海風) 등. 1901년 서울에서 출생, 경성제일고보 재학시 3·1 운동에 참가했으며 중국 항주 지강(之江)대학 극문학부 중퇴.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을 역임했다. 1926년 동아일보에 <탈춤>을 발표했으며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현상 공모에서 <상록수>가 당선됐다. 일제하 검열 때문에 발표하지 못하고 해방 이후 유고시집으로 나온 <그 날이 오면>이 있다. 단편 <황공의 최후> 외에 조선일보에 연재하다가 검열로 인해 중단된 미완성 <동방의 애인> <불사조> 등이 있다.
(4) 가슴 속의 비밀
영신이도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고목이 된 대추나무가 얼크러진 큰 마을 편을 바라본다. 옥색저고리를 입은 호리호리한 사나이가 안경을 번쩍거리며 기다란 살포를 지팡이 삼아 짚고, 언덕길을 어슬렁거리고 내려온다.
“살포는 감농이래두 할 줄 아는 사람이 물꼬나 보러 댕기는데 쓰는 건데요. 저 사람은 일년감이 열린 걸 보구 '거 감자 탐스럽게 열렸군' 하던 출신이, 살포를 건성 휘두르며 댕겨서 건살포라구 별명을 지었어요.”
입바른 소리 잘하는 동화의 대답이다.
“저 사람이 누군데요?”
영신은 새신랑처럼 옥색저고리를 입은 인물에게 호기심을 일으키며 물었다.
“형님한테 들으셨겠지요? 저 강도사집의 둘째 아들 기만(基萬)이에요. 동경 가서 어느 대학엘 댕기다가 무슨 공부를 그렇게 지독하게 했는지 신경 쇠약이 걸려 나왔다나요.”
“네, 그래요? 그럼 이 근처선 제일 공부를 많이 한 청년이로군요?”
“그런 셈이지요. 헌데 자제가 아주 노새에요.”
“아아니 노새가 뭐에요?”
하고 영신이가 재쳐 묻는 말에 동화는 무심결에 그런 말을 입밖에 내놓고는 말대답을 얼른 못하고 픽픽 웃기만 한다. 노새는 말과 당나귀 사이에 난 트기인 것은 알고 있으나 그 물건이 명색만 달랐지 생식은 못하는 동물이라는 것까지는 영신이가 모르고 있었다. 이 동리 청년들끼리 엇먹는 수작으로, 허울만 좋지 그저 아무짝에도 소용이 닿지 않는 인물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영신은 어렴폿이 기만이란 사람을 놀리는 말이거니 하고 더 묻지를 않았다.
기만이는 언덕에 살포를 꽂고 왼팔은 하느르르한 회색바지를 입은 허리춤에 찌르고 서서, 여러 사람이 일하는 것을 내려다보고 섰다. 무슨 풍경화나 감상하는 듯한 자세를 짓고 선 것이 몹시 아니꼬와 보여서 그것만 보아도 비위가 뒤집히는 듯,
“병이 났음네 허구 영계만 실컷 과 먹구 나니까 게트름이 나는 게지. 저 작자가 어슬렁거리구 댕기는 꼴은 뒀다가 봐두 눈꼴이 틀리더라.”
하고 동화는 저 혼자 투덜거린다. 곁에서 말둑을 박고 있던 형은,
“아서라, 오다가다 들을라. 귀먹은 욕두 그만큼 먹였으면 고만이지, 그렇게 원수 치부를 할 게야 뭐 있니. 제 딴엔 우리한테 하느라구 하는걸.”
하고 아우의 험구를 틀어막는다. 이번에는 건배가 영신의 곁으로 와서 바지에 흙탕물이 튀어서 말라붙은 것을 비벼 털면서 기만이가 앉은 언덕 위를 흘끔 쳐다보더니,
“그래두 저 사람은 돈밖에 모르는 저의 아버지나 형한테 대면, 없는 사람들을 꽤 동정하는 셈이에요. 이 논 닷 마지기를 우리한테 도지루 얻어주려구, 담배씨루 뒤웅박을 파려고 드는 제 형하구 쌈을 다 했으니까요. 겉탈인지 몰라두, 우리가 하는 일을 여간 찬성을 하지 않아요. 이따금 우릴 청해서 그 집엘 가는 날이면 이밥에 고기 반찬에 한턱 잘 먹여서 소복을 단단히 하고 나오는데, 저 동화하군 아주 옹추거든요.
술만 먹으면 '요새 세상에 양반이 무슨 곤장을 맞을 양반이냐!'구 들이대기를 일쑤하는데 그뿐이면 좋게요, 실컷 얻어먹구 나선 들어보라는 듯이 하는 소리가 '제에길, 요까짓 걸루 어름어름 우리 비위를 맞출려구, 몇 해를 두고서 저희가 우리를 빨아먹은 게 얼만데… 그걸 다 토해 놓으려면 아직 신날두 안 꼬았다'하구 건주정을 한바탕씩 하니 누가 듣기 좋다나요. 저 사람도 동화라면 딱 질색이언만 그럴수록 극성맞게 쫓아다니며 성화를 바쳐서 아주 학질을 떼지요, 여간한 심술패기라야지…”
“그렇게 혈기 있는 청년두 있어야 해요. 급할 때면 그런 사람이 앞잡이 노릇을 하니깐요.”
하고 영신은 동화가 멀찌감치 서 있는 것을 보고 칭찬 비슷이 하고는,
“그런데 여긴 지금두 양반 상놈이 있나요?”
하고 묻는데, 어느 틈에 기만이가 언덕을 내려와서 영신이가 앉은 맞은편 논둑에 가 버티고 섰다. 여학생이 동혁이를 찾아왔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구경을 하려고 나왔는지도 모른다. 기만이 가 가까이 오자 동혁의 형제는 못 본 체하고 돌아섰는데, 일하던 사람 중의 반수 이상은 그 앞으로 가서 허리를 굽히고,
“구경 나오셨시유?”
하고 손길을 마주 비빈다. 그들은 강도사집의 작인들이나 아니면 돈을 얻어 쓴 사람의 자질들인 것이다.
기만이는 바지춤에 손을 찌른 채 여러 사람이 인사를 하는대로,
“응, 응.”
하고 코대답을 할뿐이다. 논 귀퉁이에다가 살포를 꽂고 우두커니 섰다가 석돌이란 회원을 손짓을 해서 부른다. 영신의 편으로 눈짓을 하며, 수근거리는 것이 '저게 동혁이를 찾아온 여자냐'고 묻는 눈치다. 석돌이는 말대답하기가 거북한 듯이 고개만 끄덕여 보이다가 일자리로 돌아간다.
영신이는 기만이가 맞은편에서 안경 너머로 똑바로 건너다보고 섰는 것이 면구스러워서,
“난 저리루 거닐다 오겠어요.”
하고 일어선다.
“나 하던 일은 다 했는데, 혼자 다니시다 길이나 잊어버리시게요?”
하고 건배가 뒤를 대선다.
동혁은 책임상 일이 다 끝나기 전에는 일어서기가 어려운 모양인데, 영신이 혼자 돌아다니게 내버려두기도 안됐고 하던 이야기도 남아서, 건배는 입이 궁금하였던 것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기만이 등뒤로 돌아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논과 밭이 눈앞에 질펀히 깔렸는데 여기저기서 두레로 물을 푸는 소리와 소 모는 소리가 들린다. 한 서너 군데서나 못자리를 만드느라고 흰옷 입은 농군들이 손을 부지런히 놀리는 것이 보인다.
영신은 바위 틈에 홀로 피었다가 이우는 진달래 잎새를 어루만져 주다가,
“참, 아까 양반 얘길 하다가 중도무이를 했죠.”
하고 먼저 말을 꺼내더니,
“그런데 저 기만이란 사람의 아버지, 무슨 도산가 하는 이는 뭘하는 사람이야요?”
하며 잔디 위에 손수건을 깔고 앉는다.
남들이 다 벗고 들어서서 일을 하는데, 저 혼자 외톨로 돌아다니며 구경하듯 하기가 미안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료하기도해서 이 말 저 말 묻는 것이다.
“합방 전 해꺼정 금부(禁府)의 도사(都事)라는 벼슬을 다녔다나요.”
“금부라뇨?”
“지금으로 치면 경무국쯤 되겠는데, 도사란건 경부 같은 거래요. 아뭏든 그 늙은이는 여태 노루 꼬리만한 상투를 달고 체수는 조그만히, 빠주한 노랑수염을 쓰다듬으며 도사리구 앉아서, 에헴에헴 헛기침을 하면서 위엄을 부리는 게 여불 없는 염소지요. 한데 체격은 고 모양이래두 목구멍 하나는 크거던요.
한참 망해 들어가는 판에 부자들이나 장사치를 사뭇 도둑놈으로 몰아서 옭아다가는 주리를 틀구 기와 꿇림을 시켜서, 박박 긁어모아 이 고장에 전장(田庄)을 장만해 가지구 내려왔대요. 내려와서 심심하다구 돈놀이를 하구 장리 벼를 놔서, 이 근동에서 강도사의 돈을 안 얻어 쓴 사람이 하나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멀쩡한 고리가시(고리대금업자)로군요.”
“고리가시구말구요. 그 취리하는 법이나 장리 벼를 놔먹는 수단이 알구 보면 기막히지요. 그런데 근자엔 '이젠 이 세상에 더 두구 볼 게 없다'구 매일 술로만 장복하다가, 간이 뚱뚱 부었다나요. 그래서 살림두 기천(基千)이란 큰아들한테 내맡기구선 꼼짝 못하구 누웠대요.”
“그래 저 오입장이 같은 사람이, 그 늙은이의 둘째 아들이군요?”
“저 기만이라는 인물만은 그래두 해외바람을 쏘여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걸 짐작은 하는지 제 딴엔 우리가 하는 일을 찬성두 하고 추렴두 몇 곱절이나 내는데…”
“그런 사람을 잘 이용하면 좋지 않아요? 가끔 기부금이나 뜯어 오구요…청석골 근처에두 대학이니 전문학교니 졸업을 하구 와서, 저 건살포 모양으로 번들번들 놀면서, 장거리로 술추렴이나 다니는 사람이 서넛이나 돼요. 우리가 하는 일을 헤살이나 놀지 말았으면 할 뿐이지, 그 따위 고등 유민들한테 기대하는 건 없지만요. 논밭 팔아가며 공부한 청년들이 다 그 뻔새로 건공중에 떠돌아다니는 걸 보면 여간 한심하지가 않아요.”
하는데, 기만이가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방향으로 그 백납같이 흰 얼굴을 들고 어슬렁거리고 올라온다. 아마 영신이와 인사를 청하려고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스운 일이 많지요. 저 사람이 첨엔 자꾸만 우리 회엘 들겠다구 하니까, 동혁의 말이 '어느 시기까지는 누구나 다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구 찬성을 해서 입회를 시켰더니, 얼마 동안은 '나두 상일을 해 보겠다'구 제딴엔 열심으로 따라댕겼는데…”
“그래서…”
“저의 부형은 양반의 체면을 더럽히는 미친 자식이라구 야단을 치다 못해, 아주 내버려두게까지 됐었어요. 장에서 사온 괭이를 번쩍거리며 그루를 가는데 덤벼들어서 하룻동안 덥적거리더니 이튿날은 고만 몸살이 나서 한 댓새나 된통으로 앓았대요. 저의 집에선 이거 생자식 잡겠다구 자동차를 '가시끼리'해서 읍내의 공의를 다 불러오구 한참 야단법석을 했에요.”
“참 정말 혼이 났군요.”
“그뿐이면 좋게요. 저의 집 앞 채마전에서 한 반나절만 꿈지럭거리면, 그날 밤엔 행랑계집들을 불러다가 '다리를 주물러라' '허리를 밟아라' 하구 죽는 시늉을 한대요. 그나 그뿐인가요, '나도 농군들이 단꿀 빨듯하는 걸 먹어야 한다'구 머슴들이 두레를 놀던 이월 초하룻날은, 지푸라기를 꽂아두 안 넘어가는 그 텁텁한 수수막걸리를 두 사발이나 들이키군 그만 배탈이 나서 한 사날동안이나 설사를…”
하는데 영신은 웃음을 참다 못해서,
“고만요, 고마안.”
하고 허리를 잡으며 손을 내젓는다. 건배의 수다에는 또다시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동혁은, 기만이가 올라가는 것을 보자 앞질러 두 사람이 앉은 데로 올라왔다.
“자, 그만 우리집으로 내려갑시다.”
하는데, 기만이는 살포자루를 내두르며 뒤미처 올라왔다.
기만은 세 사람이 내려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동혁이더러 소개를 해 달래서 영신이와 인사를 했다. 이는 영신이가 초면이었지만 M대학 정경과(政經科)의 졸업 논문을 쓰다가, 신경쇠약에 걸려서 나왔다는 것과 별안간 궁벽한 이 시골서 지내려니 갑갑해서 죽겠다는 것과, 그러나 이러한 동지들이 있어서 함께 일을 하니까 여간 의미 깊은 생활이 아니라고, 일본말 조선말 반죽으로 건배의 다음 결은 갈 만큼 씩둑꺽둑 늘어놓는다.
영신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그러세요? 네 그러시구 말구요.”
하고 말대꾸를 해준다. 동지라는 말만 해도 귀에 거친데, 함께 일까지 한다는 데는 우습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 응달에서만 지내서 하얀 살결과 안경 속에서 사람을 깔보는 듯한 조그만 눈동자며, 삶아 놓은 게발같이 가냘픈 손가락을 보니 어쩐지 말대답을 하기도 싫었다. 더구나 옥색 명주저고리를 입은 것과 회색 부사견 바지를, 또 구두가 덮이도록 사북을 처뜨려 입은 것이 바로 보기 싫을 만큼이나 눈꼴이 틀렸다.
기만은 안보는 체하면서도 영신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심심하신데 우리집으로 놀러 가시지요.”
하면서 동혁을 돌아다보고,
“우리 동지끼리 저녁이나 같이 먹으면서 좋은 얘기나 듣고 싶은데…”
하고 양해를 구한다. 그는 영신이가 먼 데 찾아온 귀한 손님이라고 대접을 하려는 것보다도, 몸이 비비 틀리도록 심심한 판에 동리에 처음으로 떠들어 온 신여성을 불러다 놓고 하루 저녁 소견이나 하고 싶은 눈치다.
제가 거처하는 작은 사랑채를 말끔 중창을 하고 유리를 붙이고 실내를 동경(東京)같은 데의 찻집을 본 따서, 모던으로 꾸며 놓은 것과, 또는 새로 사온 유성기를 틀면서 '이 시골구석에도 이만큼 문화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듯, 또 한편으로는 몇 해를 두고 이혼을 못해서 죽느니 사느니 하던 본처를 월전에 쫓아보내서 영신이 같은 여자를 저의 집으로 한번 끌고 들어가 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혁이가 얼른 말대답을 아니하는 것을 보고, 영신은,
“오늘 저녁은 저 동혁씨 댁으로 가기로 먼저 약속을 했습니다.”
하고 두말 못하게 똑 잡아떼었다. 기만은 자존심을 상한 듯,
“그럼 여러 날 계실 테니까, 일간 다시 한번 청하지요.”
하고 머리를 까딱해 보이더니 무색해서 내려간다.
“난 우리 집에까지 따라 내려올 줄 알았더니…제가 하릴없는 생각만 하구, 줄줄 따라 댕기는 덴 학질이야.”
하고 동혁은 앞을 섰다. 건배는 휘적거리고 동혁의 뒤를 따라 오다 말고 멋적은 듯이,
“여보게 약국의 감초두 빠질 차롄가?”
하고 일부러 돌아서는 체를 한다.
“압따, 이 사람 화젓가락 웃마디 꼬듯 하지 말구, 어서 사발농사나 지러 오게 그려.”
하고 동혁은 건배를 돌아다보고 손짓을 한다.
세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은행나무 아래로 내려갔다.
“어쩌면 인사를 하자마자 대뜸 저의 집으로 가재요?”
“그러니깐 자제가 노새지요.”
동혁도 영신을 돌아다보며 웃다가,
“그 사람은 문제가 없에요. 잘 구슬러주기만 하면 고만이니까. 하지만 기천이라는 그 형 때문에 큰 걱정이예요. 우리 일엔 덮어놓구서 반대니까요. 반대만 하면 좋겠는데, 머리악을 쓰고 훼방을 놀아서 마구 대들어 싸울 수두 없구, 큰 두통거린걸요.”
하고는 쩍하고 입맛을 다신다. 영신이가,
“형은 뭘 하는 사람인데요?”
하니까, 입이 궁금하던 건배가 다가서며,
“대대로 곱사등이라구, 그 자두 고리대금을 하지 뭘해 먹겠에요. 여러 해 면서기를 댕기다가, 요샌 명정거리나 장만을 하려는지 면협의원을 선거하는데 출마를 했다나요. 저의 아버지버덤두 더 옹졸맞게 생겨먹은 게, 얼리지 않는 양복을 빼지르고 자전거를 타구서 유권자를 찾아 댕기는 화상이란 참 장관이지요.”
“그런데 무슨 까닭으루 청년들이 하는 일을 반대하는 건가요.”
하고 영신이가 묻는데, 어느덧 동혁의 집앞까지 당도하였다. 동혁의 어머니는 싸리문 밖으로 내달으며,
“어서 오우.”
하고 여러 해 봐 오던 사람처럼, 영신을 반가이 맞아들인다. 그는 치마를 갈아입고 새 버선까지 꺼내 신었다.
동혁은 저의 집의 가난한 살림살이를 영신에게 보여 주기가 싫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어머니나 아버지나, 동네 사람들이 자기네 짐작대로 영신을 저의 색시 감으로 알고 놀리기까지 하는 것이 싫어서, 저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기를 꺼렸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얘야, 좀 가까이 보자꾸나. 먼 광으루만 보구 어디 알 수 있니? 색시 감을 서넛째나 퇴짜를 놓더니만, 연분이 따로 있는 줄이야 누가 알았겠니? 의뭉스레 굴지 말구, 저녁엔 꼭 데리구 오너라.”
하고 아들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며느리 감을 데리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사실 정분이, 차순이, 필례 할 것 없이 동네의 색시들은 동혁이를 믿고 있는데, 당자가 아직 장가를 안 들겠다고 쇠고집을 세워서 다른 데로 혼인을 한 뒤에, 벌써 아들딸들을 낳고 사는 중이다.
근동에서도 여러 군데서 통혼이 들어왔건만, 아무리 사윗감을 탐을 내어도 '글쎄 갓 서른까진 장가를 안 든다니까…암만 해 보구려' 하고 막무가내로 말을 안 들어 왔다. 어제 저녁에는 동화도 형과 겸상을 해서 밥을 폭폭 퍼넣다가,
“성님, 사람이 썩 무던해 뵈는데…쇠뿔두 단결에 빼랬다우, 그 덕에 나두 장가나 들어봅시다.”
하고 뒤퉁그러진 소리를 해서, 형은,
“너두 날 놀리는 셈이냐? 그렇게 급한데 누가 너 먼점 장가를 들지 말라든.”
하고 씁쓸히 웃었다.
한편으로 영신이도 동혁의 생활이 보고 싶었다. 오래 두고 머리 속에 그려보던 것과 같은가 또는 얼마나 틀릴까 - 하고 적지 아니 궁금히 여기다가 동혁이가 거처하는 방으로 들어가서 둘러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구차한 살림이요, 더구나 홀아비라 번쩍거리는 세간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전문학교까지 다니던 사람이 거처하는 방으로는 너무나 검소하다. 흙바닥에다가 그냥 기직대기를 깔았는데, 눈에 새뜻하게 띠는 거라고는 하나도 없다.
웃목에 놓인 책상에는 학교에 다닐 때 쓰던 노오트 몇 권이 꽂혔고, 신문 잡지가 흐트러졌을 뿐이요, 아랫목에는 발길로 걷어차서 두르르 말아놓은 듯한 이불 한 채가 동그마니 놓였다. 참 한가지 잊어버린 것이 있다. 그것은 마분지로 도배를 한, 벽에 붙은 사기 등잔인데, 그것도 오늘 지나다니며 들여다본 다른 농가의 것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다.
무엇을 장하게 차리는 것도 아니나, 눈 어둔 어머니는 부엌 속에서 데그럭거리며 어둡도록 꾸물거린다. 조금 있자, 건배의 아낙이 달걀 한 꾸러미를 행주치마로 감추어 가지고 노인의 응원을 하러 왔다.
“그 색시 복성스럽게 생겼읍죠? 조금두 신식여자 티가 없구, 아주 서글서글헌게 속 터진 사내 같어서.”
하더니,
“이제야 부엌일을 면하시나 봅니다.”
하고 밥을 푸는 동혁의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번에두 김치국부텀 마시는 셈인지 누가 아나, 내 뱃속으로 낳았어두 당최 그놈의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있어야지. 내가 무슨 팔자에 살아 생전 그런 며느리를 얻어 보겠나.”
하고 마누라는 한숨을 내쉰다. 박 첨지와 동화는 자리를 내어 주느라고 마을을 갔는데 웃간에서 저녁을 기다리는 동안, 세 사람은 농촌문제를 토론하고, 요새 한참 떠들고 있는 자력갱생(自力更生) 운동을 비판하는데, 건배의 아낙이 밥상을 들고 들어온다.
“참 정말 미안하군요. 이렇게 여기꺼정 출장을 하셔서…”
하고 영신이가 일어나며 상을 받아 들었다. 동혁의 어머니가 문밖까지 따라와 눈을 찌긋하고 영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숫제 찬 없는 밥을 대접하신답시구… 온, 시골구석이라 뭐 있어야지. 늙은 사람이 한 거라구 숭을랑 보지 말구 많이 자슈.”
한다. 영신은 일어서며,
“온 천만의 말씀을 다 하십니다. 들어오세요.”
하고 공손히 예를 한다.
“괜찮소, 어서 자슈.”
하고 여전히 '허우'를 하니까, 영신은,
“말씀 낮춰 하세요.”
하고 정말 색시처럼 조심스러이 앉았다. 건배의 아낙은 남편을 보고,
“그런데 두 분이 얘기두 조용히 못하게시리, 뭣하러 줄줄 따라 댕기는 거요? 집에 가서 어린애나 봐 주지 않구.”
하니까,
“흥, 얻어먹으러 다니는 사람이 자리를 가려서야 되나.”
하고 건배는 소매를 걷으며 젓가락을 집는다.
영신은 매우 유쾌한 그날 그날을 보냈다.
날마다 동혁이가 부는 나팔소리가 들리기 전부터, 은행나무 밑으로 올라가서 조기회에 참례를 하였다.
“안직 힘드는 운동은 하지 말구 편히 쉬시지요.”
하고 동혁이가 말려도, 남에게 조금이라도 지는 것을 대기하는 영신은, 맨 뒷줄에 서서 끝까지 체조를 하고, 또는 여러 사람과 함께 애향가를 불렀다.
“얘, 동혁이한테 온 여학생이 체조를 다 한다더라.”
하는 소문이 퍼지자, 이삼일 동안에 조기회원이 부쩍 늘었다. 늙은이 여편네들 할 것 없이 모여들어서 무슨 구경이나 난 것처럼 운동장인 잔디밭이 빽빽하도록 들어차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그네들은 운동군이 아니요, 구경군인 것은 물론이다.
“허, 이거 장꾼버덤 엿장수가 많다더니, 웬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드나.”
하면서도 건배는 여러 사람이 모인 김에,
“여러분, 조기회에 참가를 합시요. 아침 일찌기 일어나 운동을 한바탕 하면 정신이 깨끗해지구, 첫째 소화가 잘 됩니다.”
하고 구세군처럼 선전을 하다가,
“우린 밥이 너무 잘 내려서 걱정이라네.”
“체증이나 나거던 옴세.”
하고 빈정거리는 사람이 있어서, 건배는 아무 말 못하고 뒤통수만 긁었다.
영신은 농우회원들끼리만 모이는 일요회에도 방청을 하였다.
처음에는 뒷줄에 가 앉아서 남들이 하는 이야기만 들었으나 나중에는 건배의 동의와 만장의 찬성으로 밤늦도록 이야기할 언권을 얻어서 청석골에서 저 한 몸으로 분투하는 이야기며, 남의 강제나 또는 일종의 유행으로 하는 소위 농촌 운동과, 우리가 스스로 깨닫고 자발적으로 해야만 할 농촌 운동을 구별해 가면서, 그 성질을 밝히고 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남녀를 물론하고 뜻이 같은 사람끼리 단결할 필요와 언제나 서로 연락을 취하자는 부탁을 하였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자세히 기록하지 않으나, 영신의 말은 억양이 심해서 유창하지는 못해도 조리가 닿고 열이 있어서 농우회원들은 물론, 동혁이도 '그동안 고생도 많이 하구, 수양도 어지간히 했구나,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두 많은걸' 하고 속으로 혀를 빼물 정도였다.
건배의 아낙도 문 밖에서 동리 여편네들과 엿듣고는 매우 감동이 되어,
“여자두 저만큼이나 났어야 사내들한테 코큰 소리를 해 보지.”
하고 자기가 보통학교 졸업밖에 하지 못하고 시집이라고 와서 살림과 어린것들에게 얽매여, 늙어만 가는 것을 분하고 절통히 여겼다.
온 지 나흘 되는 날, 저녁에 영신은 건배의 아낙을 앞장세우고 동네에 말귀 알아들을 만한 여인네들을 그 집 마당에 모아 놓고 또 한번 일장 연설을 하였다.
“내가 이 한곡리에 와서, 며칠이라도 지내게 된 걸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이 동네에도 부인들끼리의 회를 하나 모아드리고 가겠습니다.”
하고 그런 모임을 조직할 필요를 역설하였다.
부인회를 모은대야, 그네들은 극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는 터이요, 남자들처럼 금주 단연을 하거나 도박 같은 것은 금할 필요도 없고 살림살이를 이 이상 더 조리 차려 해서 저축을 할 여지도 없지만, 당분간은 여자들의 글눈을 띠워주는 강습회 일만 하더라도 남자들의 힘을 빌지 말고 여자들끼리 자치를 해서, 지금부터 하루에 쌀 한 숟가락 보리 한 줌씩을 모아서라도 농한기에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그 경비를 써 나갈 것을 힘있게 말하였다.
마당 가득히 모인 여인네들은, 손 하나 들 줄은 모르면서도 모두 찬성한다는 뜻을 표하였다. 그래서 영신은 회(會)같은 것을 조직하는데 훈련을 받아 온 터이라, 건배의 아내를 회장 격으로 추천해서 '한곡리 부인근로회(漢谷里婦人勤勞會)'라는 단체 하나를 조직하였다.
그리고는 앞으로 유지해 나갈 방법까지 세워서, 건배의 아내에게 소상 분명히 일러 준 후, 그와 앞으로는 형님 동생을 하자고 해서 의형제까지 맺고 굳은 악수까지 하였다.
그러는 동안 한 가지 몹시 거북한 것은 식사를 할 때는 물론, 농우회 석상에서나, 마당과 한길에서까지 회원들과 동네 여자들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수군거리며 뒤를 쫓아다니면서까지 동혁이와 영신의 행동과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두 사람은 털끝만큼도 이상한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처음 대하는 손님과 다름없이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그 뒤로 기만이는 영신을 청하려고 몇 번이나 동혁의 집으로 행랑아범을 보내고 머슴을 시켜 청좌하는 편지까지 보내곤 하였다. 동혁은,
“그분이 왜 우리 집에 있는 줄 아나?”
해서 돌려보내기도 하고, 전달해달라는 편지는 받아두고도, 영신에게 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영신이가 그런 편지를 직접 받았더라도, 몸이 불편하다고 핑계를 하든지 해서, 이른바 초대회에 까닭 없는 주빈 노릇하기를 거절하였으리라.
동리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일이나, 무슨 집회 같은 데는 자발적으로 출석을 하였지만 기만이의 심심풀이를 해 주거나, 그런 사람이 자랑하는 생활을 보기 위해서, 더구나 홀로 지낸다는 남자를 찾아가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사업을 위해서는 소 갈데 말 갈 데 없이 다니나, 이러한 경우에는 처녀로서의 처신을 가지고,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기만이는 매우 분개하였다.
“제가 얼마나 도도한 계집이길래, 내가 여러 번 청하는데 안 온단 말이냐!”
하고 하인을 세워 놓고 몰아대다가,
“동혁이버텀 못생긴 자제지. 저한테 온 여자를 내가 어쩔 줄 아나? 어디 얼마나 버티나 보자.”
하고 벼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하루는 낮이 훨씬 겨워서 기만이는 자회색 봄 양복을 말쑥하게 거들고 도금으로 장식을 한 단장을 휘두르며, 바닷가 영신이가 유숙하는 집으로 찾아갔다. 영신은 잡지를 보고 누웠다가 몸을 일으키며,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하고 달갑지 않게 맞았다.
“하두 여러 번 청해두 안 오시길래, 몸이 편치 않으신가 하구 지나는 길에 들렀습니다.”
하며 꾸며대는 말에, 영신은 '지나는 길이라니 바다 속에 볼 일이 있었나'하고 속으로 웃었다.
이러한 궁벽한 촌에서 빳빳한 칼라에 자주빛 넥타이를 매끈하게 매고 나온 것이, 옥색 저고리에 부사견 바지를 입었던 것만큼이나 눈허리가 시었다. 방으로 들어오라고만 하면, 마냥 늑장을 부리고 앉을 것 같아서 멀리 신작로편 쪽을 바라다보고 앉았다가, 양복장이 서넛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저게 뭘하러 쏘다니는 사람들인가요?”
하고 한 마디를 물었다. 기만이는 문지방에 가 걸터앉으며 안경 속에서 실눈을 짓고, 맨 앞에 곡마단의 원숭이처럼 허리를 발딱 제치고 자전거를 저어가는 사람을 가리키더니,
“저게 우리 아니끼(형)예요. 저 아니끼 때문에 원, 창피해서.”
하고 기만이는 고개를 돌리며, 소태나 먹은 듯이 입맛을 다신다. 영신은 건배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
“형제분이 뜻이 맞지 않으시는 게로군요?”
하고 아우의 편을 드는 체하니까, 기만이는 삐죤을 꺼내 피워물며,
“아니끼는 당최 이마빼기에 송곳을 꽂아두 진물 한 방울 안 나올 에고이스트(利己主義者)야요. 돈푼 긁어모으는 것밖에는 아무 취미도 모르는 인간인데, 게다가 면협 의원인가 하는 게 큰 벼슬이나 되는 줄 알구 뽐내는 화상이야 요란하지요. 이래저래 나하군 매사에 충돌이니까요. 오늘 아침에두 대판으로 싸웠는걸요.”
한다.
“왜요?”
“어 엊저녁엔 공직자 부스러기들을 대접한다구 주막의 갈보까지 불러다가, 밤새두룩 술상을 벌여 놓구 뚱땅거려서, 잠두 못 자게 굴길래 그래서 한바탕 야단을 쳤지요.”
하고 백판 아무 상관도 없는, 더구나 초면의 여자를 대해서 제 형을 개 꾸짖듯 한다. 영신은 담배 연기를 피하느라고 외면을 하면서 '참 정말 별 쑥스런 자제를 다 보겠군' 하면서도, 하는 소리를 들어보느라고,
“그래두 그만큼 유력하신 분이니까, 동네 일을 열성 있게 보시겠지요.”
하고 넘겨짚었다. 기만은 핥아 놓은 것처럼 지꾸를 바른 머리를 홰홰 내저으며,
“말씀 마세요. 박동혁이 김건배 할 것 없이 이 동네의 젊은 사람들은 아주 원수 치부를 하는 걸요.”
“왜요? 퍽 건실한 분들인데요.”
“그 속이야 뻔하지만… 그까짓 게 무슨 얘깃거리나 되나요?”
하고 기만은 일본말로,
“도니가꾸 안나 진부쓰가 무라니 오루까라 난니모 데끼꼬 아리마셍요.”
'아뭏든 저따위 인물이 동네에 있으니까 무슨 일이구 될 턱이 없지요'하고 결론을 짓더니, 조츰조츰 영신의 앞으로 다가앉으며 말머리를 돌리려고 든다.
영신은 어이가 없어 '대체 당신은 얼마나 낫소?' 하고 입 밖까지 나오는 말을 마른 침으로 꼴깍 삼키고 솜털하나 없이 면도질을 한 기만의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때 마침 건배의 아낙이 꽃게를 서너 마리나 들고 새로 조직된 부인근로회의 회원들을 대여섯 사람이나 데리고 왔다. 영신은 구원병이나 만난 듯이 그네들을 반기는데 기만은,
“그럼 내일 저녁에래두 놀러와 줍시요. 꼭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어물어물하다가 멋적게 꽁무니를 빼었다.
일주일 동안이나 동혁이와 건배 내외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숙식을 부드러이 지내서 영신은 건강이 매우 회복되었다. 처음부터 어느 한 귀퉁이에 병이 깊이 들었던 것이 아니요, 영양 부족과 과로한 탓으로 전신이 매우 쇠약해졌던 터이라, 불과 며칠 동안에 눈에 보이는 듯이 피부가 윤택해지고 혈색이 좋아졌다.
영신이 자신도 동지들의 자별한 성의에 눈물이 날만큼이나 고마와서, 아침저녁으로 한곡리 청년들의 건강과 그네들의 사업을 위해서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처음에는 고작해야 사나흘만 견습도 할 겸 쉬어 가자던 것이 '하루만 더, 이틀만 더'하고 간곡히 붙잡는 통에 자별한 호의를 매몰스러이 뿌리치고 일어서기가 어려웠다. 그 중에도 건배의 아낙은,
“아우님, 우리가 한번 작별하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데.”
하고 눈물을 흘려가며 붙잡아서, 차마 떼치고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신은 하루라도 더 남의 신세를 지며 저 혼자만 편하게 지내는 것이, 무슨 죄나 짓는 것처럼 청석골 사람들에게 미안하였다.
영신이가 청석골로 내려가, 자리를 잡은 뒤에 야학의 교장겸 소사의 일까지 겹쳐하고 어린애들에게는 보모요, 부녀자들에게는 지도자가 될 뿐 아니라, 교회의 관계로 전도부인 노릇도 하고, 간단한 병이면 의사노릇까지 하여 왔다.
그렇게 몸 하나를 열에 쪼개내도 감당을 못할 만큼이나 바쁘게 지내던 사람이, 여러 날 나와 있으니 모든 사세가 하루라도 더 머무르기가 어려웠다. 그 중에도 눈에 암암한 것은 저녁마다 손목과 치마꼬리에 매어달리던 어린이들이요, 귀에 쟁쟁한 것은,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부르던 아이들의 목소리다.
엄동설한에도 홑고쟁이를 입고 다니던 계집아이들 - 그러면서도 으슥한 구석으로 선생을 무작정 끌고 가서, 황률이나 대추같은 것을 슬그머니 손에 쥐어 주고는 부끄러워서 꼬리가 빠질 듯이 달아나던 그 정든 아이들 - .
한번은 이런 일까지 있었다.
어느 눈 내리던 날 밤, 야학을 파하고 사숙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아버지도 어머니도 잃어버리고 일가집에 붙어서 사는 금분이란 계집애가 숨이 턱에 닿아서 쫓아오더니, 선생님의 자켓 주머니에다가 꽁꽁 언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넌지시 넣어 주고 달아났다.
“아서라, 이런 것 가져오지 말구우 네나 먹어라. 응.”
하면서도 영신은 어린애의 정을 물리칠 수가 없어서 '왜콩이나 밤톨이거니'하고 만져 보지도 않고 가서 자켓을 벗어 거는데 방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지는 것을 보니, 껍질을 말끔 깐 도토리였다.
영신은 떫어서 먹지도 못하는 그 도토리를 접시에 소복히 담아 책상머리에 놓고 들여다보고 손바닥에 굴려 보고 하다가 콧마루가 시큰해지더니 눈물이 뜨끈하게 솟던 생각이 났다. 그런 생각을 하면 금시 그 아이들이 보고 싶어, 당장 날아라도 가서 안아 주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거짓말은커녕, 실없는 소리도 잘하지 않는 동혁이까지,
“발동선이 고장이 나서 못 댕긴다는데, 저 바다를 건너뛸 재주가 있거던 가보시지요.”
하고 붙잡는 바람에 그 말을 곧이듣고 한 이틀을 더 묵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신은 누구에게도 발표하지 못할 고민을 가슴속에 감추고 왔었다. 사실은 그 고민을 해결짓기 위해서 동혁이와 의논을 할 양으로 일부러 온 것이었다.
정양을 하려는 것도, 동혁이가 실지로 일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십이 훨씬 넘은 처녀로서, 저 혼자로는 해결을 지을 수 없는 일생에 중대한 문제와 부딪쳤기 때문이다. 여간한 남자보다도 용단성이 있는 영신이언만 동혁이와 단둘이 만나서 가슴속의 비밀을 조용히 고백할 기회도 없었거니와, 동혁의 얼굴만 마주 대해도 그 말을 끄집어내려든 용기가 자라 모가지처럼 옴츠러들곤 하였다.
영신이가 떠나기로 작정한 전날 밤은, 달이 유난히 밝았다. 열 나흗날 달이, 어지간히 기운 것을 보니 자정도 가까운 듯. 다른 사람들은 초저녁에 다 와서 작별을 하고 갔고, 건배의 아낙은 영신이가 친정에나 왔다가 가는 것처럼, 수수엿을 다 고아 가지고 와서 눈물로 작별을 하고 갔건만, 동혁이만은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점심 때 집에 볼 일이 있다고 잠깐 다녀는 갔으나, 동화의 말을 들으면 집에는 종일 들어오지를 않았다고 한다. 영신은 '한 마디래두 꼭 하구 가야만 할 말이 있는데' 하고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눈을 까맣게 기다리다가 '내일 아침에야 일찌감치 오겠지'하고 누웠었다.
서창을 물들이는 달빛은, 이런 걱정 저런 근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영신을 문 밖으로 꾀어 내었다. 그는 바스켓 속에 감추고 왔던 조그만 손풍금을 꺼냈다. 그것은 - 여고보를 우등 첫째로 졸업한 기념으로 미스 빌링스란 서양 여자가 선사한 것이다.
영신이가 이곳에 온 뒤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거닐던 바닷가 백사장에는, 하아얀 모래가 유리가루처럼 반짝이는데, 그 모래를 밟으면 바삭바삭 소리가 난다. 옷 속으로 스며드는 밤기운이 조금 선선하기는 하나 바람 한 점 일지를 않는다.
영신은 외로운 그림자를 이끌며 가만가만히 손풍금을 뜯으면서 그 모래 위를 거닐려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노래가 저절로 입을 새어 나왔다. 그 노래는 드리고의 「세레나아데(小夜曲)」였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찬송가나 동요 같은 노래 이외에 애틋한 사랑을 읊은 노래라든가, 조금이라도 유흥 기분이 떠도는 유행창가는 귀에 익도록 들으면서도 입밖에 내기는 삼가 왔었다. 그러던 것이 오늘 저녁은 즉흥적으로 드리고나 슈베르트 같은 작곡가의 애련한 영탄적(詠嘆的)인 노래가 줄달아 불러졌다.
처음에는 입 속으로만 군소리하듯 불러보던 것이 차츰차츰 그 소리가 높아져서 무섭도록 고요한 깊은 밤 해변의 적막을 깨뜨리다가는 가느다랗게 뽑아올리고 뽑아내리는 피아니시모에 영신은 '내가 성악가나 될 걸 그랬어' 하리만큼 제 목소리가 오늘 저녁만은 은실같이 곱고 꾀꼬리 소리만큼 청아한 듯이 제 귀에 들렸다.
머리를 들면 황금 가루 같은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머리를 숙이면 그 달빛을 실은 물결이 천 조각 만 조각으로 부서지며, 눈과 영혼을 함께 황홀케 한다.
다시금 머리를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풀솜 같은 구름 속으로 숨박꼭질을 하는 달 속에는 쓸쓸한 방구석에 홀로 누워 외딸을 그리는 어머니의 눈물에 젖은 얼굴이 비치는 것 같고, 기다란 한숨과 함께 머리를 떨어뜨리면 닦아 놓은 거울 같은 바다 위에 꿈에도 잊히지 못하는 고향 산천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영신은 백사장에 펄썩 주저앉으며 눈을 꽉 감았다. 이번에는 무형한 그 무엇이 젖가슴으로 치밀어 오른다.
'아이, 내가 왜 이럴까?' 하고 제 마음을 의심도 해 보았다. 이제까지 참고 눌러 왔던 청춘의 오뇌에 온몸이 사로잡히자 영신의 떨리는 입술에서 터져나오는 한 마디는 '하나님, 제가 그이를 사랑해도 좋습니까?' 하는 독백(獨白)이었다. 영신은 다시 부르짖듯이 신앙의 대상자에게 호소한다.
'하나님, 일과 사랑과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택해 주시옵소서. 저의 족속의 불행을 건지기 위해서 이 한 몸을 바치겠다고 당신께 맹세한 저로서는, 지금 두 가지 길을 함께 밟을 수가 없는 처지에 부딪쳤습니다. 오오, 그러나 하나님, 저는 그 두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를 버릴 수도 없습니다'
영신은 모래 위에 폭 엎드러졌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뜨거운 눈물에 번지는 모래를 으스러지라고 한 움큼 움켜쥐고서….
어디서 무엇에 놀라서 날아가는지 물새 한 마리가 젖을 보채는 어린애처럼 삐액삐액하고 울면서 머리 위를 지나간다.
영신은 고독과 적막이 서리를 끼얹는 듯해서 진저리를 치고는 발딱 일어나면서, 치맛자락의 모래를 활활 털었다. 그 외롭고 적적한 생각을 잠시라도 헤쳐 버리려고 곁에 동댕이를 쳤던 손풍금을 다시 집어들고 감흥에 맡겨 열 손가락을 놀리며 저도 모를 곡조를 한바탕 뜯었다.
누가 곁에 있어서 그 음보(音譜)를 그대로 오선지에 기록하였다면, 혹시 「항가리인의 광상곡(狂想曲)」같은 작품이 이루어졌을는지도 모르리라. 그는 풍금 타던 손을 쉬고 다시금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그때였다.
바로 영신의 등 뒤의 솟은 바위 위에서 시꺼먼 그림자가 괴물과 같이 나타나더니,
“저…그 곡조 한 번만 더 타 주세요!”
하는 굵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깜짝야!”
영신은 두 손을 짝 벌리고, 오금에 용수철이나 달린 듯이 발딱 일어섰다. 전신에서 소름이 쭉 끼쳤다. 달빛을 정면으로 받아 시꺼먼 그림자의 정체가 드러나자,
“난 누구라구요. 어쩌면 그렇게 사람을 놀래세요?”
영신은 반가움과 원망스러움에 반죽이 된 표정으로 동혁을 살짝 흘겨본다.
동혁은 빙긋 웃으며 저벅저벅 걸어서 영신의 앞에 와 선다.
“놀라긴 내가 정말 놀랬어요. 이 밤중에 어디로 가셨나 허구, 빈 방 속에서 한참이나 기다렸었는데…”
“풍금 소릴 들으시구 여기 있는 줄 아셨군요?”
“네, 독창회에 방해가 될까 봐 저 바위 그늘에서 입장권도 안 사고 근청을 했지요.”
그 말에, 대낮 같으면 영신의 얼굴이 석류처럼 빨개진 것을 볼 수 있었으리라. 잠시 이성(理性)을 잃었던 모든 동작과, 미쳐 날듯이 목청껏 부른 노래를 동혁이가 지척에서 보고 들은 생각을 하고 열적고 부끄러워 영신이가 얼굴을 붉힌 것뿐이 아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안타까이 하나님을 부르며 '일과 사랑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택해 줍소서!' 하고 빌던 그 상대자가 뜻밖에 유령과 같이 눈앞에 나타난 데는 형용키 어려운 신비를 느꼈다. 신비스럽다느니보다도 폭풍우처럼 뒤설레던 감정이 짓눌리고 머리가 저절로 수그러질이만큼 엄숙한 기분이 온몸을 지배하는 것이다.
“앉으십시다.”
동혁은 바위 아래 모래밭을 가리키고 저 먼저 앉으며 두 무릎을 끌어안고는 바다 저편을 바라 본다. 아득한 수평선을 따라 일렬로 쭈욱 깔린 것은 달빛을 새우는 듯한 새우잡이 중선의 등불들이다. 아까까지 영신은 그 불을 얕은 하늘의 별들이 반짝이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이리 와 앉으시라니까요.”
눈을 내리감고 발끝으로 모래를 허비적거리며, 서 있는 영신을 돌아다보고, 동혁은 명령하듯 한다.
“네…”
영신은 들릴 듯 말 듯하게 대답을 하고 동혁의 곁에가 치맛자락을 휩싸쥐고 앉는다. 오늘밤만은 동혁의 어떠한 요구에든지 순종하려는 듯이…”
“차차 바람이 이는데 춥지 않으세요?”
“아아뇨.”
바닷가의 밤은 점점 깊어만 가는데, 해금내를 머금은 바람이 솔솔 불어오기 시작해서 이슬에 촉촉히 젖은 몸이 감기나 들지 않을까 하고 동혁은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온 몸의 피를 끓이며 노래를 목청껏 부르던 영신은 도리어 홧홧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인제 오셨어요? 오늘밤엔 못 만날 줄만 알았는데…”
“한 이십 리나 되는데, 누굴 좀 만나 보려구 찾아갔다가 오는 길이에요.”
“그럼 여태 저녁두 안 잡수셨게요?”
“주막거리서 요기를 해서 시장하진 않아요.”
“무슨 급한 일이 생겼어요?”
“급하다면 급하지요…”
하고 동혁은 더 자세한 대답을 피하느라고,
“참 달도 밝군요!”
하고 딴전을 부리며 서녘 하늘을 쳐다본다.
볕에 그을어 이글이글하게 타는 듯하던 얼굴과 그 건강한 몸뚱이를 기울어 가는 창백한 달빛이 씻어내린다. 파르스름한 액체와 같은 달빛이…
영신은 다시 무슨 생각에 잠겨, 동혁의 커다란 그림자가 저의 눈앞에 가로 비친 것을 들여다보고 잠자코 있다. 조금 전까지도 외로움과 쓸쓸함을 못 견디어 바람 받이에 외따로 선 나무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던 영신은 동혁이가 와서 제 곁에 턱 앉은 것이 큰 바위 속에다가 뿌리를 박은 것만큼이나 신변이 든든한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애상적이던 기분은 구름과 같이 흩어지고 안개처럼 스러졌다. 다만 동혁의 윤곽만이 점점 뚜렷하게 커져서 제 몸이 그 그늘 속으로 차츰차츰 기어들어가는 것같은 환각을 느낄 따름이었다.
한참만에 동혁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 오실 때 편지에 꼭 친히 만나서 의논할 말씀이 있다고 그러셨지요? 그걸 지금 말씀해 주시지요. 하룻밤쯤 새우는 게 우리한텐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내일은 기어이 떠나신다니 또 만날 기회가 졸연치 않을 것 같은데, 꼭 해 주실 말씀이면 지금 하시지요.”
영신의 머리는 수그러만 드는데, 동혁의 눈은 점점 탐조등처럼 빛난다.
“왜 말씀을 못하세요? 무슨 말인지 시원스럽게 해 버리시지요.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영신은 그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제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럼 동혁씨가 하고 싶으신 말씀부텀 먼저 해 주세요.”
“아아니, 내가 먼첨 물었으니까 영신씨버텀 대답을 하실 의무가 있지 않겠어요?”
“그래도 먼첨 해 주세요. 권리니 의무니 하고 빡빡하게 구실것 없이…”
영신의 목소리에는 소녀와 같은 응석조차 약간 섞였다.
“그건 안될 까닭이 있에요. 언권을 먼저 드리지 않으면 분개하시는 성미를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 말 한 마디에 이태 전 △△일보사 주최의 간친회 석상에서 처음 보았을 때의 인상과, 악박골서 밤을 새우던 때의 정경이 바로 어제런듯 주마등과 같이 두 사람의 눈앞을 달렸다.
그것은 두 사람의 평생을 두고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무한히 정다운 추억이었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은 불시에 몸과 마음이 더한층 가까와지는 것이 느껴졌다. 동혁은 더 우기지 않았다. 남자의 자존심으로서가 아니라, 그런 말을 강제로 시키기가 가엾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럼 이번만은 내가 지지요.”
하고 동혁은, 한참이나 뜸을 들이더니,
“어째서 그런지 몰라두, 내가 영신씨한테 하고 싶은 말이나 영신씨가 나한테 꼭 하고 싶다고 별르면서도 얼핏 입밖에 내지를 못하는 말은 그 내용이 비슷한 것 같은데…영신씨 생각은 어떠세요?”
“…”
“아아니, 말대답이나 시원스럽게 해 주셔야지요.”
하고 동혁은 달려들기라도 할 형세를 보인다. 영신은 간신히 알아들을 만한 목소리로,
“저 역시도 한평생에 제일 중요한… 우리의 운명이 좌우되는 그런…”
하고는 말을 잇지 못하고 떠듬떠듬 토막을 친다.
아무리 고집이 세고, 무슨 일에나 앞장을 서고 누구에게나 지지 않으려는 성벽이 대단한 영신이언만, 오늘 저녁 이 자리에서만은 꽃을 부끄리는 처녀의 속탈을 벗지 못한다.
“아마 연애나 결혼 문제루 퍽 고민을 하시는 중이시지요?”
동혁이가 불쑥 내미는 말이 정통으로 들어가 맞히니까,
“…”
무언 중에서 영신의 온몸의 신경은 불에나 닿은 것처럼 옴찔하고 자지러들었다.
“나도 그런 문제로 적지 아니 괴롭게 지내는 중이에요. 늙으신 부모의 성화가 매일 같아서 그것도 어렵지만, 사실은 나 자신이 몹시 외로울 때가 있어요. 억지로 일을 해서 잊어버리려고는 애를 써도 나만큼 건강한 남자가, 언제까지나 독신으로 지낸다는건 암만 생각해두 부자연한 것 같아서…”
하고 발꿈치로 조약돌을 비벼서 으깨며 말을 멈추고는, 영신을 흘깃 곁눈으로 흘려본다. 영신은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다가 글씨를 썼다 지웠다 한다.
“영신씨!”
동혁은 새삼스러이 저력 있는 목소리로, 숨쉬는 소리가 서로 들릴 만큼이나 가까이 앉은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네?”
영신은 하얀 이마를 들었다.
“멀고도 가까운 게 뭘까요?”
끝도 밑도 없는 수수께끼와 같은 말에 영신의 눈은 동그래졌다.
무어라고 대답을 하면 좋을지 몰라서 눈을 깜박깜박하더니,
“글쎄요…사람과 사람의 사일까요?”
하고 동혁의 표정을 살핀다.
“알 듯하고도 모르는 건요?”
“아마…남자의 맘일 걸요.”
그 말 한 마디는 서슴지 않는다.
“아니, 난 여자의 맘인 줄 아는데요.”
동혁의 커다란 눈동자는 영신의 가슴속을 뚫고 들여다보는 듯하다.
달은 등뒤의 산마루를 타고 넘으려 하고 바람은 영신의 옷깃을 가벼이 날리는데 어느덧 밀물은 두 사람의 눈 앞까지 밀려 들어와 날름날름 모래 바닥을 핥는다.
“……”
“……”
굴 껍데기로 하얗게 더께가 앉은 바위에 찰싹찰싹 부딪치는 파도소리뿐…온 누리는 아담과 이브가 사랑을 속삭이던 태고적의 삼림 속같은 적막에 잠겨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형체 없는 영혼만은 무언중에도 가만히 교체한다. 똑같은 고민과 오뇌로 다리를 놓고서…
영신은 앉아서 꿈을 꾸는 사람처럼 머리를 떨어뜨리고 있다가,
“제 속을 들여다 보시는 것 같아서…”
간신히 한 마디를 꺼내고는 말 끝을 맺지 못하더니,
“제 사정은 대강 아시는 터이지만, 얼마전에 어머니가 청석골까지 다녀가셨어요. 제발 고만 시집을 가라고 이틀밤이나 꼬박이 새워가며 빌다시피 하시는 걸 끝끝내 시원한 대답을 못해 드렸어요.”
“그래서요?”
“그랬더니, 나중엔 '네가 이 홀어미 하나를 영영 내버릴 테냐' 고 자꾸만 우시는 데는 참 정말 뼈를 깎아내는 것 같아서…”
영신은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참느라고 이를 악문다.
“그렇게 언짢어하실 게 뭐 있어요? 얼른 결혼만 하시면 문제는 다 해결이 될걸요.”
하고 동혁은 일부러 비위를 긁어 주면서도, 그 다음 말이 궁금해서 영신의 곁으로 다가앉는다. 영신은 남자를 원망스러이 흘깃 쳐다보고는 다시금 주저주저하다가 버쩍 용기를 내어,
“저… 보통학교에 댕길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혼인을 정해 주신 남자가 있었어요.”
이 말을 듣자 동혁의 눈은 금방 화등잔만해졌다.
이제까지 사사로운 이야기는 일부러 해 오지를 않던 터이나 영신에게 약혼한 남자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아, 약혼한 사람이 있어요?”
제 아무리 침착한 동혁이라도 저도 모르는 겨를에 이 말 한 마디가 입 밖을 튀어나오는 것을 틀어막을 겨를이 없었다. 그와 반대로 영신의 태도는 매우 침착해진다.
“어려서부터 한 동네에 자라나서 저도 그이를 잘 알아요. 김 정근(金正根)이라고 시방 황해도 어느 금융조합에 취직을 했는데 사람은 퍽 얌전해요.”
하는데 그 사이에 제가 너무 당황해 하는 눈치를 보인 것을 뉘우친 동혁은, 영신의 말을 자아내는 수단으로 얼핏 말끝을 채뜨려,
“그만하면 조건이 다 구비됐군요.”
하고는 시침을 딱 갈기고 외면을 한다. 영신은 대들어서 동혁의 넓적다리를 꼬집기라도 하려는 자세를 보이다가,
“글쎄 그렇게 사람을 놀리지만 마시고 들어보세요. 대강만 얘기를 할께요.”
하고는 다시 바다 저편의 고기잡이 등불을 바라보다가,
“그런데 그이는 내가 자기하고 꼭 결혼을 할 줄만 믿구 있거든요. 지난 겨울엔 일부러 휴가를 맡아가지고 찾아왔는데, 이 말 저 말 해 가며 속을 떠 보니까 농촌 운동같은 데는 털끝만큼도 이해가 없구요, 그런 덴 취미까지도 없어요.”
“그래도 어떠한 생활의 목표는 있겠지요.”
“그저 월급이나 절약을 해서, 한 달에 얼마씩, 또박 또박 저금을 했다가, 그걸로 결혼 비용을 쓰자는 것…”
그 말에 동혁은,
“아무렴 그래야지요. 현대는 금전 만능시대(金錢萬能時代)니까요. 거 일찌감치 지각이 난 청년이로군.”
하고 시골 늙은이처럼 매우 탄복을 한다.
남은 진심으로 하는 말에, 한편에서는 자꾸만 이죽거리며 쓸까스르기만 하니까 영신은 빨끈하고 정말 성미가 났다.
“아아니 그렇게 조롱만 하시는 법이 어디 있어요? 난 인전 암말도 안 할 테야요.”
하고 톡 쏘아붙인다. 그러나 그 말쯤에 노염을 탈 동혁이가 아니다.
“아아니, 이건 결혼 얼른 못하는 화풀이를 내게다 하시는 셈이에요?”
하고 더한층 핀둥핀둥해진다.
동혁은 조바심이 날 만큼이나, 영신과 약혼한 남자와의 사이가 어떠한가 하는 것이 궁금하였다. 아무리 저에게다 가림새없이 모든 것을 터놓고 말하는 터이지만, 남녀간의 관계에 들어서는 자연 은휘하는 일이 있을 것이 의심스럽고,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남자에게 질투를 느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죄인이나 붙잡아다 앉혀놓고 심문을 하는 것처럼 빡빡하게 물어 보면 실토를 하지 않을 듯도 해서, 일부러 농담을 하듯하며 능청스러이 상대자의 속을 떠보는 것이다.
그러다가 영신이가 정말 입을 다물어 버려서 형세가 불리하니까,
“그건 다 웃음의 말이구요… 남의 일 같지가 않으니 말이지, 그럼 그 사람은 장차 무슨 일을 하고 싶다는 거예요?”
하고 점잖게 묻는다. 그래도 영신은 성적한 색시처럼 눈을 꼭 내리감고는 입을 열려고 들지를 않는다.
“허어, 이거 정말 화가 나셨군요. 그러지 말고 어서 말씀하세요. 달이 저렇게 기울어 가는데…”
하고 동혁은 얼더듬으려고 든다.
“금융조합에서 한평생 늙을 작정이야 아니겠죠.”
영신은 그제야 조금 풀린다.
“암, 그야 그럴 테지요.”
“돈이 좀 모이면 장변이래두 놔서 늘여가지구 잡화상을 하나 내고서 생활 안정을 얻자는 게 그이의 고작 가는 이상(理想)이야요. 돈벌이를 하는 것밖에 우리로선 할 노릇이 없다는 게 이를테면 그이의 사상이고요.”
“그만하면 짐작하겠에요. 요컨대 어머니께선 그런 착실한 사람을 데릴사위처럼 얻어서 늙으신 몸을 의탁하고, 인젠 딸의 재미를 좀 보시겠다는 게지요?”
“그런 눈치야요.”
동혁은 무엇을 궁리할 때면 의례히 하는 버릇으로, 두 눈을 꿈벅꿈벅하고 있다가, 신중한 어조로
“그럼 워낙, 주의나 이상은 맞지 않더래두 그 사람한테 혹시 애정을 느껴보신 적은 있기가 쉬울 듯한데…”
하고 가장 중요한 대문을 묻는다. 그 말에 영신은 뻗었던 두 다리를 오그리고 치마를 도사리며,
“어려서버텀 봐 오던 사람이니까, 딱 마주치면 무조건하고 반갑긴 해요.”
하고 잠시 침묵하다가,
“그렇지만, 난 누구한테나 입때까지…저어 동혁 씨를 만나기 전까지두…”
하고는 저고리 고름을 손가락에다 돌돌 감았다 폈다 한다. 동혁이도 자리를 고쳐앉더니 영신의 얼굴을 면구스럽도록 똑바로 들여다보며,
“영신씨는 어머니를 위해서, 사랑이 없는 남자에게 한평생을 희생해 바칠 그런 봉건적인 여자는 아니겠지요?”
하니까,
“그런 말씀은 물어 보실 필요도 없겠죠.”
하고 영신은 자존심을 상한 듯이 자신 있는 대답을 한다.
“그럼 앞으로 어떡하실 작정이세요?”
“그이는 단념하겠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미련은 남겠단 말씀인가요?”
“아아뇨.”
“그러믄요?”
“……”
동혁은 영신이가 경솔히 대답하지 못하는 심중을 약빨리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욱하지 않았다.
“그럼 내 태도를 보신 뒤에, 좌우간 결단을 하시겠단 말씀이지요?”
동혁이도 자신 있게 다져 묻는다. 그 말에 영신의 입에서는 분명히
“네!”
하고 한 마디가 서슴지 않고 떨어졌다.
동혁은 불시에 그 무엇이 마음속에 뿌듯하도록 꽉 차는 것을 느꼈다. 그 만족감은 물에 불어오르는 해면(海綿)처럼 또는 한정 없이 부풀어오르는 고무 풍선처럼 당장 터질 듯 터질 듯하다.
동혁은 벌떡 일어섰다. 팔짱을 꽉 끼고 달빛에 뛰노는 바다를 바라보고 섰노라니, 그 바다의 물결은 커다란 용광로 속에서 무쇠가 녹은 물이 부글부글 끓는 것같아 보인다. 바다 위가 아니라 바로 저의 가슴 한복판에서 용솟음치는 정열을 눈앞에 보는 듯하였다.
한 십분 동안이나 동혁은 머리를 폭 수그리고 영신의 눈앞에서 조약돌만 탁탁 걷어차면서 왔다 갔다 하였다. 그러다가 사기 단추와 같이 손집는 데가 반짝거리는 손풍금을 집어들더니,
“아까 그 곡조 한 번만 더 타 주세요.”
하고 영신의 치마 앞에다 떨어뜨린다.
영신은 마지못해서 풍금을 받아들면서도,
“얘기를 하다 말고 이건 뭐에요!”
하고 뒤설레는 마음을 진정하느라고 몸 둘 곳을 몰라하는 동혁을 쳐다본다.
“글쎄 특청이니 두 말씀 말구 타 주세요.”
이번에는 반쯤 명령하듯 한다. 영신은 그만 청을 거역하기가 어려워서 풍금 손잡이에 손가락을 끼면서,
“아까 그건요, 되나 안되나 함부루 타 본 건데 나두 무슨 곡존지 잊어버렸어요.”
하고 고개를 외로 꼬더니,
“왜 우리가 다 아는 훌륭한 곡조가 있지 않아요. 난 어딜 가서든지 동혁씨와 한곡리 생각이 나면 이 곡조를 탈 테야요.”
말이 끝나자, 영신은 찬찬히 팔을 폈다 오므렸다 한다. 곡조는 시작만 들어도 애향가다. 그러나 조기회 때에 부르는 것과는 딴판으로 느릿느릿하게 타는 그 멜로디는 가늘게 떨며 그쳤다 이었다 하는 것이 무엇을 호소하는 듯이 몹시 애련하다. 이 밤만 밝으면 기약없는 길을 또다시 떠나는 그 애달픈 이별의 정을 조그만 악기 속에 가득히 담았다 흩었다 하기 때문인 듯…
허공에 얼굴을 쳐들고 두 눈을 딱 감고 섰던 동혁은 듣다 못해서,
“그만 집어칩시다!”
하고 외친다. 그래도 얼른 그치지를 않으니까, 와락 달려들어 손풍금을 빼앗더니 백사장에다 동댕이를 친다. 영신은 어쩐 영문인지를 몰라서 어리둥절하고 입을 조금 벌린 채로 동혁의 눈치만 살핀다.
동혁은 술이 몹시 취한 사람처럼 앞을 가누지 못하더니 그 유착한 몸이 폭 엎어지자, 영신의 소담한 손등은 남자의 뜨거운 입김과 축축한 입술을 느꼈다.
영신은 온몸을 달팽이처럼 오므라뜨리고는 눈을 사르르 내려감고 있다가,
“참 이 바닷가엔 해당화가 없을까요?”
하고 딴전을 부리며 살그머니 손을 빼어 내려고 든다. 그러나 그 손끝과 목소리는 함께 떨려 나왔다.
동혁은 두 팔로 영신의 어깨와 허리를 버쩍 끌어안으며,
“해당화는 지금 이 가슴속에서 새빨갛게 피지 않았에요?”
하더니, 불시의 포옹에 벅차서 말도 못하고 숨만 가쁘게 쉬느라고 들먹들먹하는 영신의 젖가슴에, 한아름이나 되는 얼굴을 폭 파묻었다.…
영신은 생후 처음으로 경험하는 남자의 뜨거운 입술과 소름이 오싹오싹 끼치도록 근지러운 육체의 감촉에 아찔하게 도취되는 순간 잠시 제 정신을 잃었다.
동혁은 숨결이 차츰차츰 가빠 오고, 두근두근하는 심장의 고동까지 입술이 닿은 손등과 그의 얼굴에 짓눌린 가슴을 통해서 자릿자릿하게 전신에 전파된다.
영신은 조심스러이 손 하나를 빼어 목사가 세례를 주는 것처럼 부스스하게 일어선 동혁의 머리 위에 얹으며,
“고만 일어나세요. 네?”
하고 달래듯이 가만히 흔들더니,
“나두요, 동혁씨의 고민을 말씀하지 않어두 잘 알고 있어요. 동혁씨가 내 맘을 이해해 주시는 것처럼 - 그러기에 이태 동안이나 그다지 그리워하던 당신께 제 사정을 하소연하려고 일부러 온 거야요. 이 세상에 다만 한 분인 동지한테 제 장래를 의논하려고요…”
동혁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지독하게 마취를 당했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게슴츠레해진 눈으로 눈물에 어리운 영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나는 영신씨를 언제까지나 동지로만 사귈 수가 없에요.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에요!”
하고는 또다시 그 돌공이같은 팔로 영신의 허리를 끊어져라고 껴안는다. 영신은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아서 손에 힘을 주어,
“이러지 마세요. 이렇게 흥분하시면 못써요. 우리 냉정하게시리 얘기를 하십시다.”
하면서 허리에 휘감긴 동혁의 팔을 슬그머니 풀었다. 그리고는,
“어쩌면 저 역시도 동지로 교제하는 것만으론 만족할 수가 없는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그 문제를 백 번 천 번이나 생각해 봤는데…”
“어떻게요?”
동혁은 머리를 숙인 채 매우 조급히 묻는다. 영신은 조금 떨어져 앉아서 잠시 머리 속을 정돈시킨 뒤에 입을 연다.
“연애를 하는 데 소모되는 정력이나 결혼 생활을 하느라구 또는 개인의 향락을 위해서 허비되는 시간을 온통 우리 사업에다 바치고 싶어요. 난 내 몸 하나를 농촌 사업이나 계몽 운동에 아주 희생하려고 하나님께 맹세까지 한 몸이니깐요.”
“그러니까 그렇게 굳은 결심을 하고, 실지로 일을 해 나가는 사람끼리 한 몸뚱이로 뭉쳐서 힘을 합하면 곱절이나 되는 효과를 얻지 않겠에요? 백지장두 마주들면 낫다는데 - 영신씨를 만난 뒤버텀 나는 줄창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요. 어느 기회에 나를 따라와 주실 줄을 나 혼자 믿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구요.”
“왜 낸들 그만 생각이야 못해 봤겠어요? 그렇지만 우리의 교제가 이버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필경은 결혼문제가 닥쳐오겠죠?”
“그럼 언제꺼정 독신생활을 하실 작정이신가요?”
영신은 그 말대답을 주저하고, 손풍금을 집어들고 어루만지며,
“이걸 나한테 선사한 미스 빌링스란 서양 부인은 미개한 남의 나라에 와서 별별 고생을 다 해 가면서 우매한 백성을 깨우쳐 줄 양으로 오십이 넘두룩 독신 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런 여자의 생활이야 말루 거룩하지 않아요, 깨끗하지 않아요?”
“그 사람네와 우리와는 환경이 다르구 처지도 다르지만, 영신씨가 그런 사람의 본을 떠서 독신 생활을 해 보겠다는 건 우리의 현실이 허락지 않는 아름다운 공상에 지나지 못할 줄 알아요.”
“그러니까 남몰래 살이 내리도록 고민을 하는 게 아니겠어요? 이렇게도 못하고 저렇게도 할 수가 없으니깐…”
“그런 경우엔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지 말고, 양단간 결단을 내야만 하지요.”
“그만한 결단성이 없는 건 아니야요. 그렇지만 난 청석골을 떠날 수가 없어요. 나를 낳아 준 고향보다도 더 정이 들었구요. 나 하나를 무슨 천사처럼이나 알아주는 그 고장 사람들을, 그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요!”
“저엉 그러시다면 당분간 내가 청석골 천사한테 데릴사위로 들어갈까요? 나 역시 이 한곡리에다가 뼈를 파묻으려는 사람이지만…”
하고 시꺼먼 눈을 끔쩍끔쩍한다. 영신은,
“호호호, 그건 참 정말 공상인데요.”
하고 동혁의 무릎을 아프지 않게 치며 별 하늘을 우러러 명랑히 웃는다.
“……”
“……”
동혁이도 덩달아 웃는 체하다가, 속으로는 갑갑해 못견디겠다는 듯이 벌떡 일어선다. 한참 동안이나 신부리로 바위를 툭툭 걷어차기도 하고, 돌멩이를 집어 팔매도 치면서도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비장한 결심을 한 듯이 다시 돌아와 영신이 앞에 바싹 다가앉으며, 손가락 셋을 펴들더니,
“자, 앞으로 삼 년만 더!”
하고 부르짖으며 영신의 턱 밑을 치받치듯 한다.
“인제 삼개년 계획만 더 세우고 노력하면 피차에 일터가 단단히 잡히겠지요. 후진들한테 일을 맡겨도 안심이 될만큼 기초가 든든히 선 뒤에 우리는 결혼을 하십시다. 그리고는 될 수 있는대로 좀더 공부를 하면서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하십시다.”
하더니 잠시 뜸을 들이다가,
“영신씨! 그때까지 기다려 주실 테지요, 네? 꼭 기다려 주실테지요?”
하고 영신의 두 손을 꼭 잡고 으스러지도록 힘을 준다.
“삼 년 아니라 삼십 년이래두…이 목숨이 끊…”
하는데 별안간 영신의 입술은 말 끝을 맺을 자유를 잃었다. 지새려는 봄 밤, 잠 깊이든 바다의 얼굴을 휩쓰는 쌀쌀한 바람이 쏴 - 하고 또 쏴 - 하고 타는 듯한 두 사람의 가슴에 벅차게 안긴다.
'나의 경애하는 동혁씨!'
영신이가 한곡리를 떠난 지 사흘만에 온 편지의 서두에는 전에 단골로 쓰던 '존경' 두 자의 높을 존(尊)자가 떨어지고, 그 대신으로 사랑 애(愛)자가 또렷이 달렸다.
'무한한 감사와 가슴 벅찬 감격을 한아름 안고 무사히 저의 일터로 돌아왔습니다. 그 감사와 감격은 무덤 속으로 들어간 뒤까지라도 영원히 영원히 잊지 못하겠습니다.
떠날 때에 바쁘신 중에도 여러분이 먼 길을 전송해 주시고, 배표까지 사주신 것만 해도 염치없는데, 꼭 배 안에서 뜯어 보라구 쥐어 주신 봉투 속에 십 원짜리 지전 한 장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몇 번이나 다시 돌려보내려고 하였으나 한창 어려운 고비를 넘는 농촌에서 십 원이란 큰 돈을 변통하기가 얼마나 어려우셨을 것을 알고 또는 제가 떠나기 전날 밤에 이 돈을 남에게 취하려고 몇 십리 밖까지 가셨다가 늦게야 돌아오셨던 것이 이제야 짐작되어서, 차마 도로 부치지를 못하였습니다.
몸 보할 약이라도 한 제 지어 먹으라고 간곡히 부탁은 하셨지만, 백 원 천 원 보다도 더 많은 이 돈을 저 한 몸의 영양을 위해서는 쓸 수 없습니다. 그대로 꼭 저금해 두었다가 가을에 지으려는 학원 마당 앞에 종을 사서 달겠습니다. 아침 저녁 저의 손으로 치는 그 종소리는 저의 가슴뿐 아니라, 이곳 주민들의 어두운 귀와, 혼몽히 든 잠을 깨워주고 이 청석골의 산천초목까지도 울리겠지요.
나의 경애하는 동혁씨!
자동차가 닿은 정류장에는 부인 친목계의 회원들과 내 손으로 가르치는 어린이들이 수십 명이나 마중을 나와서 손과 치마꼬리에 매어달리며 어찌나 반가와서 날뛰는지 눈물이 자꾸 쏟아지는 것을 간신히 참았어요.
더구나 계집아이들은 거의 십 리나 되는 산길을 날마다 두 번씩이나 나와서 자동차 오기를 까맣게 기다리다가 '우리 선생님 아주 도망갔다'고 홀짝홀짝 울면서 돌아가기를 사흘 동안이나 하였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어느 누가 그다지도 안타까이 저를 기다려 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 변변치 못한 채 영신이를 그다지도 따뜻이 품어 줄 고장이 이 세계의 어느 구석에 있겠습니까?
나의 경애하는 동혁씨!
이번 길에 저는 고향 하나를 더 얻었어요. 한곡리는 저의 제 삼의 고향이 되고 말았어요. 저와 한평생 고락을 같이 하기로 굳게굳게 맹세해 주신 당신이 계시고 씩씩한 조선의 일군들이 있고, 친형과 같이 친절히 굴어주는 건배 씨의 부인과 동네의 아낙네들이 살고 있는 곳이 어째서 저의 고향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새로 얻어서 첫 정이 든 고향을 꿈에라도 잊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가슴에 피를 끓이던 그 애향가의 합창을…
나의 가장 경애하는 동혁씨!
저는 행복합니다. 인제는 외롭지도 않습니다.
큰덕미 나루터의 커다란 바윗덩이와 같이 변함이 없으실 당신의 사랑을 얻고, 우리의 발길이 뻗치는 곳마다, 넷째 다섯째 고향이 생길 터이니, 당신의 곁에 앉았을 때만큼이나 제 마음이 든든합니다. 저의 가슴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몸의 책임이 더한층 무거워진 것을 깨닫습니다.
청석골의 문화적 개척사업을 나 혼자 도맡은 것만 하여도 이미 허리가 휘도록 짐이 무거운데 우리의 사랑을 완성할 때까지 불과 삼 년 동안에 그 기초를 완전히 닦아 놓자면 그 앞길이 창창한 것 같습니다. 양식 떨어진 사람이 보릿고개를 넘기는 것만큼이나 까마아득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들은 가난하고 힘은 아직 약하나, 송백처럼 청청하고 바위처럼 버티네'하고 애향가(愛鄕歌)의 둘째 절을 부르겠어요!
나에게 다만 한 분이신 동혁씨!
그러면 부디부디 건강히 일 많이 하여 주십시오. 그동안 밀린 일이 많고 야학 시간이 되기도 전에 아이들이 몰려와서 오늘은 더 길게 쓰지 못하니 이 편지보다 몇 곱절 긴 답장을 주십시오. 다른 회원들에게 안부 전해 주시고 건배 씨 내외분에게도 틈나는 대로 따로이 쓰겠습니다.
△월 ◇◇일
당신께도 하나뿐인 채영신 올림'
영신은 어머니에게와 아버지가 혼인을 정해 준 남자에게도 편지를 썼다.
앞으로 몇 해 동안 결혼문제 같은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겠고 또는 이 뒤에라도 당신과는 이상이 맞지 않고, 주의가 틀려서 억지로 결혼을 한대도 결단코 행복스러운 생활을 할 수가 없겠으니 이 편지를 보고는 아주 단념해 주기를 바란다는 최후의 통첩을 띄웠다.
동혁이와 삼십 년 동안이라도 기다리겠다는 언약을 한 이상 연애니 결혼이니 하는 번거로운 문제로 새삼스러이 머리를 썩힐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그대로 질질 끌고 나가는 것은 여러 해를 두고 저를 유념해 온 상대자에게 대해서 매우 미안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한 일주일 뒤에야 어머니에게서는,
'진정으로 네 생각이 그렇다면 인력으로 못할 노릇이나, 딸자식 하나로 해서 이 어미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줄이나 알아다오'
하는 대서편지가 왔고, 금융조합에 다니는 남자에게서는,
'얼마나 이상이 높고 주의가 맞는 남자와 결혼을 해서 이 세상 복록을 골고루 누리며 사나 두구보자. 아무튼 조만간 직접 만나서 최후의 담판을 할 테니 그런 줄 알라'
는 저주 비슷한 회답이 왔다. 그 사람이야 다시 오건 말건, 영신은 남이 억지로 짊어지워 준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것만큼이나 마음이 거뜬하였다.
'자 인젠 일이다! 일을 하는 것밖에 없다! 앞으로 삼 년이란 세월을 지루하지 않게 보내기 위해서라도 힘껏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 하고 그 몸을 스스로 채찍질하였다.
일주일 동안 한곡리에서 받은 자극도 컸거니와 동혁이와 약혼을 한 것으로 말미암아 여간 큰 충동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그래서 청석골로 돌아온 뒤에도 며칠 동안은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고, 그때까지도 흥분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그러나 그 반면으로 건강은 아주 회복이 되어서 먼동이 훤하게 틀 때에 일어나 기도회에 참례를 하고 낮에는 학원을 지을 기부금을 모집하러 몇 십리 밖까지 다니거나, 그렇지 않으면 부인 친목계의 계원들과 같이 발을 벗고 들어서서 원두밭을 매고 풀을 뽑고 하다가 저녁을 먹고 나면 그 자리에 쓰러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예배당으로 가야 한다.
가서는 서너 시간이나 아이들과 아귀다툼을 해가면서 글을 가르치고 나오면, 다리가 굳어 오르는 것 같고 고개를 꼲을 힘까지 빠져서 길가에 잔디밭만 보아도 턱 누워 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하숙하는 집까지 와서는 자리도 펼 사이가 없이 곯아떨어진다.
그렇건만 아침에 벌떡 일어나서 냉수에 세수를 하고 나면 새로운 용기가 솟는다. 아침마다 제 시간이 되면 동혁이가 부는 나팔 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오는 것 같아서, 좀 누웠을래야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까지 놀 새가 없는 농번기가 닥쳐왔건만 강습소의 아이들은 나날이 늘어 오리 밖 십리 밖에서까지 밥을 싸 가지고 다니고 기부금이 단 돈 몇 원씩이라도 늘어가는 것과, 친목계의 계원들도 지도하는 대로 한 몸뚱이가 되어 한 사람도 마을을 다니거나 버정거리는 사람이 없이 닭을 기르고 누에를 치고 또는 베를 짠다.
영신은 그러한 재미에 극도로 피곤하건만, 몸이 괴로운 줄을 모르고 하루 이틀을 보냈다. 사업이 날로 늘어가고 모든 성적이 뜻밖으로 좋아질수록, 끼니때를 잊을 적도 있고 심지어는 며칠씩 머리도 빚지 못하기가 예사였다.
그러나 틈이 빠끔하게 나기만 하면 동혁의 환영(幻影)에게 정신을 사로잡히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바닷가의 기울어 가는 달밤… 모래 위에 그 육중한 몸뚱이를 몸부림치며 사랑을 고백하던 동혁이… 온 몸뚱이가 액체로 녹을 듯이 힘차게 끌어안던 두 팔의 힘… 숨이 턱턱 막히던 불같은 키스…
영신은 그 장면이 머리 속에 떠오르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고 얼굴이 화끈화끈 달았다. 그날 밤 그 하늘에 떴던 달이나 별들 밖에는 그 장면을 본 사람이 없으니 아무도 두 사람의 마음속의 비밀을 알 리 없건만 그대도 동혁의 생각이 불현듯이 나서 멀리 남녘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고 섰을 때에는 곁에 있는 사람이 제 속을 뚫고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머리가 저절로 수그러들기도 여러 번 하였다.
동혁에게서는 꼭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가 왔다.
사연은 간단한데 여전히 보고 싶다든지 그립다든지 하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다만 영신의 건강을 축수하는 것과, 새로 계획하는 일이나 방금 실지로 해나가는 일이 어떻다는 것만은 문체도 보지 않고 굵다란 글씨로 적어 보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영신은 그 편지를 틈틈이 꺼내 보는 것, 오직 그것만이 큰 위안거리였다.
그 동안 영신의 수입이라고는 경성연합회에서 백현경의 손을 거쳐 생활비 겸 사업을 보조하는 의미로 다달이 삼십 원씩 보내주는 것밖에 없었다.
원재 어머니라는 젊어서 홀로 된 교인의 집 건넌방에 들어서 밥값 팔 원만 내면 방세는 따로 내지 않았다. 옷이라고는 그곳 여자들과 똑같은 보병 것을 입고 겨울이면 학생 시대에 입던 헌 털 자켓 하나가 유일한 방한구인데 구두도 안 신고 고무신을 끌고 다니니, 통신비 신문 잡지 대금 해서 십여 원만 가지면 저 한 몸은 빠듯이 먹고 지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머지 이십 원도 못되는 돈으로 이태 전부터 강습소와 그밖에 모든 경비를 써 온 것이다. 월사금을 한 푼이라도 받기는커녕 그 중에도 어려운 아이들의 교과서와 연필 공책까지도 당해 주고, 심지어 넝마가 다 된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면 장에 가서 옷감까지 끊어다가 소문 안 나게 해 입힌 것이 한두 벌이 아니었다.
더구나 아이들이 장난을 하다가 다치거나 배탈이 나든지 하면 으레 '선생님'을 부르며 달려오고 나중에는 동네 사람들까지 영신을 무슨 고명한 의사로 아는지,
“채 선생님, 제 둘째 새끼가 복학을 앓는뎁쇼, 신효한 약이 없습니까?”
하고 찾아와서 손길을 마주 비비는 사람에,
“아이구, 우리 딸년이 관격이 돼서 자반 뒤집기를 하는데, 제발 적선에 어떻게 좀 살려줍쇼.”
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얼굴도 모르는 여편네에, 낫으로 손가락을 베인 머슴에, 도끼로 발등을 찍힌 나무꾼 할 것 없이 급하면 채 선생을 찾아온다.
영신은 '이건 내가 성이 채가니까 옛날 채 동지가 여자로 태어난 줄 아우?' 하고 어이가 없어서 웃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네들을 하나도 그대로 돌려보낼 수가 없어서 내복약도 주고 겉으로 치료도 해 주었다. 그러나 그 시간과 비용도 적지 않다. 붕대, 소독약, 옥도정기, 금계랍, 요도포름 할 것 없이 근자에는 한 달에 약품 값만 거의 십 원씩이나 들었다. 그래도 오히려 모자라는데, 그네들은 채 선생이 병만 잘 고칠 줄 아는 것 뿐 아니라, 화수분이나 가진 것처럼 돈도 뒷구멍으로 적지 아니 버는 줄 아는 모양이다.
보통 사람은 불러다 볼 생각도 못하는 공의가 그나마 사십 리 밖 읍내에 겨우 한 사람이 있고, 장거리에 의생이 두어 사람 있다고는 하나, 옛날처럼 교군이나 보내야 온다니, 이 근처 백성들은 무료로 치료를 해 주는 채 선생을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영신의 방이 어떤 때는 진찰실이 되고 벽장 속은 양약국의 약장 같았다. 나날이 명망이 높아가는 채 의사(?)는 병을 고쳐주는 데까지 재미가 나서 빚을 얻어가면서도 급한 때 쓰는 약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아메바 성 이질로 죽어가던 사람이 에메틴 주사 한 대로 뒤가 막히고, 가슴앓이로 펄펄 뛰던 사람이 판토폰 한 대에 진정이 되는 것은 여간 신기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자연히 통속적인 의학과 임상(臨床)에 관한 서책도 보게 되고 실지로 의사의 경험도 쌓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이 동리에 특파하신 사도(使徒)다!' 하는 자존심과 자랑까지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수술을 해야 할 환자를 몇 십리 밖에서 업고 오고, 심지어 보기에도 더럽고 지겨운 화류병 환자까지 와서 치료를 해 달라고 엎드려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데는 진땀이 났다. 그네들이 거절을 당하고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볼 때. '왜 내가 정작 의술을 배우지 못했던가' 하고 탄식을 할 때도 많았고 동시에 '의료 기관 하나 만들어 놓지를 않고, 세금을 받어다간 뭣에다 쓰는 거야. 의사란 놈들이 있대두 그저 돈에만 눈들이 번하지' 하고 몹시 분개하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영신은 이따금 재판장 노릇까지도 하게 된다. 아이들끼리 재그락거리는 싸움은 달래고 타이르고 하면 평정이 되지만 어른들의 싸움, 그 중에도 내외 싸움까지 판결을 내려 달라는 데는 기가 탁 막힐 노릇이었다.
어느 비오던 날은 딱정떼로 유명한 억쇠 어머니가 집에서 양주가 머리가 터지도록 싸우다가 영감장이의 멱살을 추켜쥐고, 영감장이는 마누라의 머리채를 꺼두르며, 씨근벌떡거리고 와서는,
“아이고 사람 죽겠네, 채 선생님. 이 경칠 놈의 영감을 어떡허면 튀전을 못하게 맨듭니까? 술 못 먹게 하는 약은 없습니까?”
하면, 영감장이는 만경이 된 눈을 휘번덕거리며,
“아이구 이 육실할 년, 버르쟁이를 좀 가르쳐줍쇼.”
하고 비가 줄줄 쏟아지는 진흙 마당에서 서로 껴안고 딩굴며 한바탕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버럭버럭 대드는 바람에, 영신은 어쩔 줄을 모르고 구경만 하다가 고만 뒷문으로 빠져서 예배당으로 뺑소니를 친 때도 있었다.
한편으로 글을 배우러 오는 아이들은 거의 날마다 늘었다. 양철 지붕에 송판으로 엉성하게 지은 조그만 예배당은 수리를 못해서 벽이 떨어지고 비만 오면 천정이 새는데, 선머슴 아이들이 뛰고 구르고 하여서 마루창까지 서너 군데나 빠졌다. 그것을 볼 때마다 늙은 장로는,
“흥, 경비는 날 곳이 없는데 너희들이 예배당을 아주 헐어내는구나. 강습이구 뭐구 인젠 넌덜머리가 난다.”
하고 허옇게 센 머리를 내둘렀다.
더구나 새로 글을 깨친 아이들이 어느 틈에 분필과 연필로 예배당 안팎에다가 게발개발 글씨도 쓰고 지저분하게 환도 친다.
'신통이 개자식이라' '갓난이는 오줌을 쌌다더라' 하고 제 동무의 욕을 쓰기도 하고, 심지어 십자가를 새긴 강당 정면에다가 나쁜 그림까지 몰래 그려 놓기도 하여서, 그런 낙서를 볼 때마다 장로와 전도사는 상을 찌푸린다.
영신은 여간 미안하지가 않아서 하루도 몇 번씩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입이 닳도록 타일렀다. 그러나 속으로는 제가 피땀을 흘리며 가르친 아이들이, 하나 둘씩 글눈을 떠가는 것이 여간 대견치 않았다. 비록 나쁜 그림을 그리고 욕을 쓸망정 그것이 여간 신통하지가 않아서,
“장로님, 저희두 따로 집을 짓구 나갈 테니 올 가을꺼정만 참아줍시요.”
하고 몇 번이나 용서를 빌었다. 그러면 변덕스러운 장로는 대머리를 어루만지며,
“원, 채 선생, 별 말씀을 다 하는구료. 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겠지요. 그게 좀 거룩한 사업이요.”
하고 얼더듬는다. 그럴수록 영신은 삭월세집에 들어 있는 것만큼이나 불안스러워서 하루바삐 집을 짓고 나가려고 안해 보는 궁리가 없었다.
그러나 원체 가난한 동리인 데다가, 그나마 돈이 한창 마른 때라, 기부금은 적어 놓은 액수의 십분의 일도 걷히지를 않고, 친목계원들이 춘잠(春蠶)을 쳐서 한 장치에 열 서너 말씩이나 땄건만, 고치금이 사뭇 떨어져서 예산한 금액까지 되려면 어림도 없다. 닭도 집집마다 개량식으로 쳤지만 모이를 사서 먹인 것과 레그혼같은 서양 종자의 어미 닭 값을 따지고 보면 계란 값과 비겨 떨어진다.
그러니 줄잡아도 오륙 백 원이나 들여야 할 학원을 지을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영신이가 하도 집을 짓지 못해서 성화를 하니까 다른 회원들은,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우. 우리 선생님두 성미가 퍽 급하셔.”
하고 위로하듯 하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수록 아이들은 한꺼번에 대여섯 명, 어떤 때는 여나무 명씩 부쩍부쩍 는다. 고등학교가 시오리 밖이나 되는 곳에 있고 간이(簡易)학교라고 새로 생긴 것도 장터까지 가서야 있으니, 배움에 목마른 아이들은 등잔불로 날아드는 나비처럼 청석골로만 모여들 수밖에 없는 형세다. 요새 들어온 아이들까지 합하면 거의 일백 삼십여 명이나 된다.
그러나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한 아이도 더 수용할 수 없다고 오는 아이를 쫓을 수는 없다.
영신은,
'아무나 오게, 아무나 오게.' 하는 찬송가 구절을 입속으로 부르며 '오냐, 예배당이 터지도록 모여 오너라. 여름만 되면 나무그늘도 좋고, 달밤이면 등불도 일없다.' 하고 들어오는 대로 받아서 그곳 보통학교를 졸업한 젊은 사람의 응원을 얻어, 남자와 여자와 초급과 상급으로 반을 나누어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영신을 숭배하고 일을 도와주는 순진한 청년이 서너 명이나 되지만 그 중에도 주인집의 외아들인 원재는, 영신의 말이라면 절대로 복종을 하는 심복이었다. 같은 집에 살기도 하지만 상급학교에는 가지 못하는 처지라 틈틈이 영신에게서 중등 학과를 배우는 진실한 청년이다.
가뜩이나 후락한 예배당 안은 콩나물을 기르는 것처럼 아이들도 빽빽하다. 선생이 비비고 드나들 틈이 없을 만큼 꼭꼭 찼다. 아랫반에서,
“'가'자에 기역 하면 '각'하고”
“'나'자에 니은 하면 '난'하고”
하면서 다리도 못 뻗고 들어앉은 아이들은, 고개를 반짝 들고 칠판을 쳐다보면서 제비 주둥이같은 입을 일제히 벌렸다 오무렸다 한다. 그러면 윗반에서는 '농민독본'을 펴놓고,
잠자는 자 잠을 깨고
눈먼 자 눈을 떠라
부지런히 일을 하여
살 길을 닦아 보세
하며 목청이 찢어져라고 선생의 입내를 낸다. 그 소리를 가까이 들으면 귀가 따갑도록 시끄럽지만 멀리 축동 밖에서 들을 때,
'아아, 너희들이 인제야 눈을 떠 가는구나!' 하며 영신은 어깨춤이 저절로 났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저녁 때였다. 영신의 신변을 노상 주목하고 다니던 순사가 나와서 다짜고짜,
“주임이 당신을 보자는데, 내일 아침까지 주재소로 출두를 하시오.”
하고 한 마디를 이르고는 말대답을 들을 사이도 없이 자전거를 되집어 타고 가버렸다.
'무슨 일로 호출을 할까? 강습소 기부금은 오백 원까지 모집을 해도 좋다고 허가를 해주지 않았는가'
영신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웬만한 일 같으면 출장 나온 순사에게 통지만 해도 그만일 텐데, 일부러 몇십 리 밖에서 호출까지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 붙은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영신이가 처음 내려오던 해부터 이 일 저 일에 줄곧 간섭을 받아왔었지만, 강습소 일이나 부인 친목계며 그밖에 하는 일을 잘 양해를 시켜오던 터이라, 더욱 의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별별 생각이 다 나서 영신은 그날밤 잠을 잘 자지 못하고, 이튿날 새벽밥을 지어 달래서 먹고는 길을 떠났다. 이십 리는 평탄한 신작로지만 나머지는 가파른 고개를 넘느라고 발이 부르트고 속옷이 땀에 젖었다.
…영신과 주재소 주임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나 그 밖의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호출한 요령만 따서 말하면,
“첫째는 예배당이 좁고 후락해서 위험하니 아동을 팔십 명 이외에는 한 사람도 더 받지 말라는 것과, 둘째는 기부금을 내라고 돌아다니며, 너무 강제 비슷이 청하면 법률에 저촉이 된다.”
는 것을 단단히 주의시키는 것이었다. 영신은 여러 가지로 변명도 하고 오는 아이들을 안 받을 수가 없다고 사정사정 하였으나,
'상부의 명령이니까 말을 듣지 안하면 강습소를 폐쇄시키겠다.'고 얼러매어서 영신은 하는 수 없이 입술을 깨물고 주재소 밖을 나왔다.
그는 아픈 다리를 간신히 끌고 돌아와서 저녁도 안 먹고 그날 밤을 꼬박이 새우다시피 하였다.
'참자! 이보다 더한 것도 참아 왔는데, 이만한 일이야 참지 못하랴' 하면서도 좀더 시원하게 들이대지를 못하고 온 것이 종시 분하였다. 그러나 혈기를 참지 못하고 떠들었다가는 제한 받은 수효의 아이들마저 가르치지 못하게 될 것을 생각하고 꿀꺽 참았던 것이다. 아무튼 어길 수 없는 명령이매, 내일부터 일백 삼십여 명 중에서 팔십 명만 남기고 오십 명을 쫓아내야 한다.
'난 못하겠다! 차라리 예배당 문에 못질을 하는 한이 있더래도 내 손으로 차마 그 노릇은 못하겠다!' 하고 영신은 부르짖으며 방바닥에 가 쓰러져 버렸다. 한참 동안이나 엎치락뒤치락 하며 홀로 고민을 하였다.
그는 불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그러나 이제까지 갖은 고생과 온갖 곤욕을 당해오면서 공들여 쌓은 탑을 그 밑동부터 제 손으로 허물어뜨릴 수는 없다. 청석골 와서 몇 가지 시작한 사업 중에 가장 의미깊고 성적이 좋은 한글 강습을 중도에서 손을 뗄 수는 도저히 없다.
'어떡하면 나머지 오십 명을 돌려보낼꼬? 이제까지 두 말 없이 가르쳐 오다가 별안간 무슨 핑계로 가르칠 수가 없다고 한단 말인가?'
거짓말을 하기는 죽어라고 싫건만 무어라고 꾸며대지 않을 수 없는 형세다. 아무리 곰곰 생각해 보아도 묘책이 나서지 않아서 그는 하룻밤을 하얗게 밝혔다.
창밖에 새벽별이 차차 빛을 잃어갈 때, 영신은 세수를 하고 나와서 예배당으로 올라갔다. 땅 위의 모든 것이 아직도 단꿈에서 깨지 않아 천지는 함께 괴괴하다. 영신은 이슬이 축축히 내린 예배당 층계에 엎드려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주여, 당신의 뜻으로 이 곳에 모여든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양들이 오늘은 그 삼분의 일이나 목자를 잃게 되었습니다. 다시 어둠 속에서 헤매일 수밖에 없이 되었습니다.
주여, 그 가엾은 무리가 낙심하지 말게 하여 주시고 하나도 버리지 마시고 다시금 새로운 광명을 받을 기회를 내려주시옵소서. 오오 주여, 저의 가슴은 지금 매어질듯 합니다!”
영신은 햇발이 등 뒤를 비추며 떠오를 때까지, 그대로 엎드린 채 소리 없이 흐느껴 울었다.
월사금 육십 전을 못 내고 몇 달씩 밀려오다가 보통 학교에서 쫓겨난 아이들이, 그날도 두 명이나 식전에 책보를 들고 그 학교의 모자표를 붙인 채 왔다.
“얘들아, 참 정말 안됐지만, 인전 앉을 데가 없어서 받을 수가 없으니, 가을부터 오너라. 얼마 있으면 새집을 커다랗게 지을텐데 그때 꼭 불러주마 응.”
하고 영신은 그 아이들의 이름을 적고는 등을 어루만져 주며 간신히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다른 아이들이 오기 전에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잠 한숨 자지를 못해서 머리가 무겁고 눈이 빡빡한데 교실 한복판에 가서 한참 동안이나 실신한 사람처럼 우두커니 섰자니 어찔어찔하고 현기증이 나서 이마를 짚고 있다가 다리를 허청 떼어놓으며 칠판 앞으로 갔다.
그는 분필을 집어 가지고 교단 앞에서 삼분의 일 가량 되는 데까지 와서는, 동편쪽 끝에서부터 서편쪽 창 밑까지 한일자로 금을 쭉 그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예배당 문을 반쪽만 열었다. 아이들은 여느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이 재잘거리며 앞을 다투어 우르르 몰려 들어 온다.
영신은 잠자코 맨 먼저 온 아이부터 하나씩 둘씩 차례 차례로 분필로 그어 놓은 금 안으로 앉혔다. 어느덧 금 안에는 제한 받은 팔십 명이 찼다.
“나중에 온 아이들은 이 금 밖으로 나가 앉아요. 떠들지들 말구.”
선생의 명령에 늦게 온 아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오늘은 왜 이럴까'하는 표정으로 선생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며, 금밖에 가서 쭈그리고 앉는다.
아이들에게 제비를 뽑힐 수도 없고 하급생이라고 마구 몰아내는 것은 공평하지가 못할 듯해서, 영신은 생각다 못해 나중에 오는 아이들을 돌려보내려는 것이다. 나중에 왔다고 해도 시간으로 보면 불과 십분 내외의 차이 밖에 나지 않지만 그렇게 하는 도리 이외에 아무 상책이 없었던 것이다.
영신은 아이들을 다 들여앉힌 뒤에, 원재와 다른 청년들에게 그제야 그 사정을 귀뜸해 주었다. 그런 소문이 미리 나면 일이 더 복잡해질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듣는 청년들의 얼굴빛은 금새 흑빛으로 변하였다.
“암말두 말구 나 하라는대루만 장내를 잘 정돈해 줘요. 자세한 얘긴 이따가 할께.”
청년들은 영신을 제대로 신임하는 터이라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침통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영신은 찬찬히 교단 위에 올라섰다. 그 얼굴빛은 현기증이 나서 금방 쓰러지려는 사람처럼 해쓱해졌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시려고 저러나'하고 저희들깐에도 보통 때와는 그 기색이 다른 것을 살피고는, 기침 하나 안하고 영신을 쳐다본다.
영신은 입술만 떨며 얼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섰다. 사제간의 정을 한칼로 베어내는 것 같은 마루바닥에 그어 놓은 금을 내려다보고 그 금밖에 오십여 명 아동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무슨 무서운 선고나 내리기를 기다리는 듯한, 그 천진한 얼굴들을 바라볼 때, 영신은 눈두덩이 뜨끈해지며, 목이 막혀서 말을 꺼낼 수가 없다. 한참만에야 그는 용기를 내었다. 그러다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여러 학생들 조용히 들어요. 오늘은 선생님이 차마 하기 어려운 섭섭한 말을 할 텐데…”
하고 나서 다시 주저주저하다가,
“저… 금 밖에 앉은 아이들은 오늘부터 공부를… 시킬 수가 없게 됐어요!”
하였다. 청천의 벽력은 무심한 어린이들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깜박깜박하고 선생을 쳐다보던 수 없는 눈들은 모두가 동그래졌다.
“왜요? 선생님, 왜 글을 안 가르쳐 주신대유?”
그 중에 머리가 좀 굵은 아이가 발딱 일어나며 질문을 한다.
영신은 순순히 타이르듯이 집이 좁아서 팔십 명밖에는 더 가르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과, 올 가을에 새집을 지으면 꼭 잊어버리지 않고, 한 사람도 빼어 놓지 않고 불러 주마고 빌다시피 하였다.
“그럼 입때꺼정은 이 좁은 데서 어떻게 가르쳐 주셨시유?”
이번엔 제법 목소리가 패인 남학생의 질문이 들어왔다. 영신은 화살이나 맞은 듯이 가슴 한 복판이 뜨끔하였다. 말대답을 못하고 머리가 핑 내둘려서 이마를 짚고 섰는데 금 밖에 앉았던 아이들은 하나 둘, 앉은 채 엉금엉금 기어서, 혹은 살금살금 뭉치면서 금 안으로 밀려 들어오다가,
“선생님! 선생님!”
하고 연거푸 부르더니 와르르 교단 위까지 뛰어오른다.
영신은 오십여 명이나 되는 아이들에게 에워싸였다.
“선생님!”
“선생님!”
“전 벌써 왔에요.”
“뒷간에 갔다가 쪼끔 늦게 왔는데요.”
“선생님, 난 막동이버덤두 먼첨 온 걸, 저 차순이두 봤어요.”
“선생님, 내일버텀 일찍 오께요. 선생님버덤 일찍 오께요.”
“선생님, 저 좀 보세요. 절 좀 보세요! 인전 아침두 안 먹구오께 가라구 그러지 마세요. 네! 네!”
아이들은 엎드러지며 고꾸라지며 앞을 다투어 교단 위로 올라와서, 등을 밀려 넘어지는 아이에 발등을 밟히고 우는 아이에 가뜩이나 머리가 휭한 영신은 정신이 아찔아찔해서 강도상 모서리를 잡고 간신히 서 있다. 제 몸뚱이로 버티고 선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포위를 당해서 쓰러지려는 몸이 억지로 떠받들려 있는 것이다.
“선생님!”
“선생님!”
아이들의 안타까운 부르짖음은 귀가 따갑도록 그치지 않는다. 그래도 영신은 눈을 내리감고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 뿐…
“내려들 가!”
“어서 내려들 가거라!”
“말 안 들으면 모두 내쫓을 테다.”
하면서 영신을 도와주는 청년들이 아이들을 끌어내리고 교편을 들고 얼러메건만, 그래도 아이들은 울며불며 영신의 몸에 가 찰거미처럼 달라붙어서 죽기 기쓰고 떨어지지를 않는다.
영신의 저고리는 수세미가 되고, 치맛주름까지 주루루 뜯어졌다. 어떤 계집애는 다리에다 깍지를 끼고 엎드려서 꼼짝을 못하게 한다.
영신은 뜯어진 치맛폭을 휩싸쥐고 그제야,
“놔라, 놔! 얘들아, 저리들 좀 가 있어. 온 숨이 막혀서 죽겠구나!”
하고 몸을 뒤틀며 손과 팔에 매어달린 아이들을 가만히 뿌리쳤다. 아이들은 한번 떨어졌다가도 혹시나 제가 빠질까 하고 다시 극성스레 달라붙는다. 이 광경을 본 교회의 직원들이 들어와서 강제로 금밖에 앉았던 아이들을 예배당 밖으로 내몰았다. 사내아이 계집아이 할 것 없이 어머니의 젖을 억지로 떨어진 것처럼 눈이 빨개지도록 홀짝홀짝 울면서 또는 흑흑 흐느끼면서 쫓겨 나갔다.
장로는 대머리를 번득이며 쫓아 나가서 예배당 바깥문을 걸고 빗장까지 질렀다. 아이들이 소동을 해서 시끄러워 골치도 아프거니와, 경찰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가는 교회의 책임자인 자기의 발등에 불똥이 튈까 보아 적지 아니 겁이 났던 것이다.
아이들의 등뒤에서 이 정경을 바라보던 영신은 깨물었던 눈물이 주루루 흘러내렸다. 영신은 그 눈물을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돌아섰다. 한참이나 진정을 하고나서는, 저희들깐에도 동무들을 내쫓고 공부를 하게 된 것이 미안 쩍은 듯이 머리를 떨어 뜨리고 앉은 나머지 여든 명을 정돈시켜 놓고 차마 내키지 않는 걸음 걸이로 칠판 앞으로 갔다.
그는 새로운 과정을 가르칠 경황이 없어서,
“오늘은 우리 복습이나 하지.”
하고 교과서로 쓰는 농민독본을 펴 들었다. 아이들은 글자 모으는 법을 배운 것을 독본에 있는 대로,
“누구든지 학교로 오너라.”
“배우고야 무슨 일이든지 한다.”
하고 풀이 죽은 목소리로 외기를 시작한다.
영신은 그 생기 없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듣기 싫은데,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이가 빠진 듯이 띄엄띄엄 벌려 앉은 교실 한 귀퉁이가 훤한 것을 보지 않으려고 유리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창밖을 내다보던 영신은 다시금 콧마루가 시큰해졌다. 예배당을 두른 야트막한 담에는 쫓겨나간 아이들이 머리만 내밀고 쭈욱 매달려서 담 안을 넘겨다보고 있지 않은가. 고목이 된 뽕나무 가지에 닥지닥지 열린 것은 틀림없는 사람의 열매다. 그 중에도 키가 작은 계집애들은 나무에도 기어오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가 주저앉아서 홀짝거리고 울기만 한다.
영신은 창문을 말끔히 열어 제쳤다. 그리고 청년들과 함께 칠판을 떼어 담밖에서도 볼 수 있는 창 앞턱에다가 버티어 놓고 아래와 같이 커다랗게 썼다.
“누구든지 학교로 오너라.”
“배우고야 무슨 일이든지 한다.”
나무에 오르고 담장에 매어달린 아이들은 일제히 입을 열어 목구멍이 찢어져라고 그 독본의 구절을 바라다보고 읽는다. 바락바락 지르는 그 소리는 글을 외는 것이 아니라 어찌 들으면 누구에게 발악을 하는 것같다.
그러한 상태로 얼마동안을 지냈다. 그래도 쫓겨나간 아이들은 날마다 제시간에 와서 담을 넘겨다보며 땅바닥에 엎드려 손가락이나 막대기로 글씨를 익히며 흩어질 줄 모른다. 주학과 야학으로 가르고는 싶으나 저녁에는 부인 야학이 있어서 번 차례로 가르칠 수도 없었다.
'집을 지어야겠다. 무슨 짓을 해서든지 하루바삐 학원을 짓고 나가야겠다!' 영신의 결심은 나날이 굳어갔다. 그러나 그 결심만으로는 일이 되지 못하였다. 그는 원재와 교회 일을 보는 청년들에게 임시로 강습하는 일을 맡기고는 청석학원 기성회 회원 방명부(靑石學院期成會會員芳名簿)를 꾸며 가지고 다시 돈을 청하러 나섰다. 짚신에 사내처럼 감발을 하고는 오늘은 이 동리, 내일은 저 동리로 산을 넘고, 논길을 헤매며 단 십 전 이십 전씩이라도 기부금을 모으러 다녔다.
폭폭 찌는 삼복 중에 인가도 없는 심산궁곡으로 헐떡거리며 돌아다니자면 목이 타는 듯이 조갈이 나는 때도 많았다. 논 귀퉁이 웅덩이에 흥건히 고인 물을 손으로 떠서 마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긴긴 해에 점심을 굶어 시장기를 이기지 못하고 더운 김이 후끈후끈 끼치는 풀밭에 행려병자(行旅病者)와 같이 쓰러져서 정신을 잃은 때도 있었다. 촌가로 찾아 들어가면 보리밥 한술이야 얻어먹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언만 굶으면 굶었지 비렁뱅이처럼,
“밥 한 술 줍쇼.”
하기까지는,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는 저녁까지 굶고 눈이 하가마가 되어서 캄캄한 밤에 하늘의 별만 대중해서 방향을 잡고 오는 날도 건성 드뭇하였다.
집에까지 죽기 기쓰고 기어 들어와 턱 눕는 것을 보면 원재 어머니는,
“아이고 채 선생님, 이러다간 큰 병이 나시겠구료. 사람이 성하구야 학원 집이구 뭣이구 짓지, 온 가엾어라. 아주 초죽음이 되셨구료.”
하고는 영신의 다리 팔을 주물러 주고 더위를 먹었다고 영신환을 얻어다 먹이고 하였다.
그렇건만 기부금을 적은 명부를 펴보면 하루에 사십 전 오십 전 끽해야 이삼 원밖에는 적히지를 않았다. 원재 어머니는 이태 동안이나 영신이와 한집에서 살고 밥을 해주는 동안에 글을 깨치고 쉬운 한문자까지도 알아보게 된 것이다. 그는 영신의 감화를 받아 교회의 권사 노릇까지 하게 되었고, 영신이가 와서 발기한 부인 친목계의 서기겸 회계까지 보게 되었다. 그래서 영신과 정도 들었거니와 그를 천사와 같이 숭앙하고 친절을 다하는 터이다.
청석골 강습소가 폐쇄를 당할 뻔하였다는 것과 기부금을 모집하러 다닌다는 소식을 영신의 편지로 안 동혁은,
'건강을 해치도록 너무 무리하게는 일을 하지 마십시다. 우리는 오늘만 살고 말 몸이 아니기 때문이외다. 그저 칡덩굴처럼 줄기차게 뻗어 나가고 황소처럼 꾸준하게만 우리의 처녀지(處女地)를 갈며 나가면 끝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몇 번이나 간곡히 건강을 주의하라는 편지가 왔다. 그러나 그러한 편지는 도리어 달리는 말에게 채찍질을 하는 듯 영신으로 하여금 한층 더 용기를 돋우게 하고 분발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생각다 못해서 기부금을 십 원이고 이십 원이고 적어 놓고 이 핑계 저 핑계로 내지 않는, 근처 동리의 밥술이나 먹는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찾아다녔다. 그 중에도 번번이 따고 면회를 하지 않는 한 낭청이란 부자집에는 '어디 누가 못 견디나 보자'하고 극성맞게 쫓아가서는 기어이 젊은 주인을 만나 보고 급한 사정을 하였다. 그러나,
“여보 이건 빚졸리기버덤 더 어렵구려. 글쎄 지금은 돈이 없다는데 바득바득 내라니, 그래 소 팔구 논 팔아서 기부금을 내란 말요? 온 우리집 자식들이 한 놈이나 강습손가 하는 델 댕기기나 하나!”
하고 배를 내민다. 영신은 참다 못해서 속으로 '에에끼 제 배때기 밖에 모르는 놈 같으니 그래도 술담배 사먹는 돈은 있겠지' 하고 사랑마당에다가 침을 탁 배앝고 돌아선 때도 있었다. 이래저래 영신은 근처 동리의 소위 재산가 계급에서는 인심을 몹시 잃었다.
“어디서 떠 들어온 계집이 그 뻔세야. 기부금에 병풍 상성을 해서 쏘댕기니 온, 나중엔 별 꼴을 다 보겠군.”
하고 귀먹은 욕을 먹었다 그와 동시에 주재소에서는 주의를 시켰는데도 또 기부금을 강청한다고 다시 말썽을 부리게 되었다.
청석골서 한 십리쯤 되는 흑석리(黑石里)라는 동리에 그 근처에서 제일 가는 부명을 듣는 그 한 낭청 집에서는 주인 영감의 환갑 잔치가 열렸다. 한 낭청은 한곡리의 강도사집보다 몇 곱절이나 큰 부자로(천 석도 넘겨 하리라는 소문이 난 지도 여러 해나 되었다) 근처 동리를 호령하는 지주다.
“큰 소를 한 마리나 잡아 엎었다더라.”
“읍내에서 기생하고 광대를 불러다가 소리를 시키고 줄을 걸린다더라…”
인근 각처에 소문이 굉장히 퍼졌다. 청석골서도 그 집의 논을 하는 작인들은 물론, 갓을 빌려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늙은 축들이 십여 명이나 떼를 지어 구경을 갔다. 여편네들도 풀을 세게 먹여서 버석거리는 치마를 뻣질러 입고 그뒤를 따랐다. 소를 통으로 잡아엎고 기생 광대까지 놀린다는 것은, 이 궁벽한 시골서 구경거리에도 주린 그네들에게 있어서 몇십 년에 한 번 만날지 말지 한 좋은 기회다.
“떵기덩 떵더꿍”
“닐리리 닐리리 쿵다쿵”
한 낭청 집 넓다란 사랑마당 큰 느티나무 밑에는 차일을 치고 마당 양 귀퉁이에는 작수를 받치고 팔뚝같은 굵은 참밧줄을 팽팽히 켕겨 놓았는데 갓을 삐딱하게 쓴 늙은 풍악잡이들이 북, 장구, 피리, 젓대, 깡깡이 같은 제구를 갖추어 풍악을 잡히기 시작한다. 주인영감이 큰 상을 받은 것이다.
덧문을 추녀끝에 추켜 단 큰사랑 대청에는 군수의 대리로 나온 서무주임 이하 면장, 주재소 주임, 금융조합 이사, 보통학교 교장 같은 양복장이 귀빈들은 물론, 일가친척이 각처서 구름같이 모여들어서 툇마루 끝까지 그득히 앉았다. 교자상이 몫몫이 나와서, 주전자를 든 아이들은 손님사이를 간신히 비비고 다닌다.
읍내서 자동차로 사랑놀음에 불려 온 기생들은 (기생이라야 요리 집으로 팔려 온 작부지만) 인조견 남치마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풍악에 맞추어,
만수산 만수봉에 만년 장수 있사온데
그 물로 빚은 술을 만년배에 가득 부어
이삼 배 잡수시오면 만수무강하오리다
하고 권주가를 부른다.
주인의 오른편에서 노랑수염을 꼬아 올리고 앉았던 면장은,
“사, 긴상 드시지요. 사, 이께다상…”
하고 커다란 은잔을 들어 주인과 주재소 수석에게 권한다. 10여 년이나 면장 노릇을 하면서도 한 획자로 긋고 두 획 내다 그은 것이 'サ'자인 줄도 모르건만 긴상 복상은 곧잘 부를 줄 안다. 달리 부를 수가 있는 자리에도 '상'자를 붙이는 것이 고작 가는 존대가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난홍이라고 부르는 기생은 잔대를 들고 노란 치잣물 같은 약주가 찰찰 넘치는 잔을 들어 손들이 권하는 대로 주인 영감에게 받들어 올린다. 한 낭청은 반백이 된 수염을 좌우로 쓰다듬어 올리고 그 술이 정말 불로 장생의 신약이나 되는 듯이 높이 들어 쭉 들어 마시곤 한다.
깍짓동처럼 뚱뚱해서 두 볼의 군살이 혹처럼 너덜너덜하는 한 낭청에게 버드나무 회초리 같은 계집들이 착착 부닐면서 아양을 떠는 것도 한 구경거리다.
이윽고 풍류 소리와 함께, 헌화하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일어난다. 술 주전자를 들고 혹은 진 안주 마른안주를 나르는 사내 하인과 계집 하인이 안 중문으로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하는 동안에 주객이 함께 술이 취하였다.
아침부터 안대청 자녀들이 헌수하는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 나온 한 낭청은 사방 삼십 센티미터나 됨직한 얼굴이 당호박처럼 시뻘겋게 익었다. 그 얼굴에다가 조그만 감투를 동그마니 올려놓은 것이 족두리를 쓴 것 같아서, 기생들은 아까부터 저희끼리 눈짓을 해 가며 낄낄대고 웃었다.
주인과 늙은 손들은 무릎 장단을 치며 시조를 부르다가 서로 수염을 꺼두르며 희롱을 하기 시작하고, 체면을 차리고 도사리고 앉았던 면장도, 분을 박같이 뒤집어 쓴 기생들의 뺨을 손등으로 어루만지며 음탕한 소리까지 하게 되었다.
“여봐라, 큰애 어디 갔느냐?”
한 낭청은 위엄 있게 불렀다. 뒤 처져 온 손님들의 주안상을 분별하던 큰아들이 올라와 두 손길을 마주 잡았다.
“여민동락(與民同藥)이라니, 저 손들두 얼른 내다 먹여라. 취투룩 먹여. 오늘 내 집에 술이야 떨어지겠느냐.”
하고는 뜰 아래에 쭈그리고 앉고, 혹은 멀찌감치 돌아서서 담배를 태우는 늙은 작인들을 턱으로 가리키며 분부를 내렸다.
머슴들은 바깥 마당에다가 멍석을 쭈욱 폈다. 막걸리가 동이로 나오는데, 안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르건만 그네들의 안주는 콩나물에 북어와 두부를 썰어 넣고 멀겋게 끓인 지짐이와 시루떡 부스러기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매방앗간에, 지난밤부터 진을 치고 있던 장타령군들이 수십 명이나 와르르 달려들어 아귀다툼을 해가며 음식을 집어들고 달아났다.
삼현육각이 잦은가락으로 영산회상(靈山會上)을 아뢰고, 광대가 막 줄을 타고 올라설 때였다. 구경군이 물결치듯 하는데, 거의 오륙십 명이나 됨직한,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여선생의 인솔로 큰대문 안으로 들어온다.
그 여선생은 영신이었다. 학원을 지으려는 데만 열중한 그는, 그 전날도 기부금을 거두려고 삼십리 밖 장거리까지 갔다가 날이 저물어서, 그곳 교인의 집에서 묵고, 아침에 떠나서 오는 길에 서너집이나 들르느라고 점심때도 겨워서 흑석리 동구 앞까지 당도하였다.
청석골서 아직도 담을 넘겨다보며 글을 배우고, 땅바닥에 글씨를 익히고 하던 아이들은 점심들을 먹으러 가는 길에 채 선생이 오는 것을 신작로에서 먼 발치로 보고는,
“얘, 저기 우리 선생님 오신다.”
한 아이가 외치자, 여러 아이들은,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부르며 앞을 다투어 달려왔다. 여기 저기로 흩어져 가는 동무들까지 소리쳐 불러서 어느 틈에 삼사 십 명이나 영신을 둘러쌌다. 비록 하룻동안이라도 떠나 있다가 타동에서 만나니까 피차에 몇 달만에 얼굴을 대하는 것만큼이나 반가왔다. 영신이가,
“너희들은 먼저 가거라. 난 저 기와집엘 댕겨갈테니…”
하고 떼치려니까, 아이들은,
“나두 가유.”
“선생님, 우리두 갈 테유.”
하고 뒤를 따른다. 영신은 그 집에 오늘 잔치가 벌어진 줄을 까맣게 몰랐건만, 어른들에게 말을 들은 아이들은 선생님이 한 부자집 잔치에 청좌를 받고 가는 줄만 여기고 속셈으로는 음식을 얻어먹으려고 기를 쓰고 나서는 것이다.
한 낭청은 체면에 못 이겨서, 또는 취중에 자기 손으로 기부금을 오십 원이나 적었다. 그런지가 벌써 돌이 돌아오건만, 요리조리 핑계를 하고 오늘날까지 한 푼도 내지를 않아서, 요전번처럼 영신에게 창피까지 당하였었다.
오십 원짜리가 가장 큰 머리라, 영신은 그 돈으로 우선 재목이라도 잡아 보려고 십여 차나 그 집 문지방을 닳린 것인데, 근자에 와서는, 부자가 다 안으로 피하고 만나 주지도 않을 뿐더러, 도의원(道議員) 후보자로 군내에 세력이 당당한 한 낭청의 맏아들은 채 영신이가 기부금을 강청해서 주민들의 비난하는 소리가 높다고 경찰서에 가서 귀를 불었기 때문에, 영신이가 주재소에까지 불려가서 설유를 톡톡히 받았었고, 강습하는 아동이 제한 당한 것만 하더라도 그 여파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럴수록 영신은 '어디 누가 견디나 보자'하고 단단히 별러 오던 터인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한 낭청의 환갑날 또다시 찾아가게 된 것이다. 그 집에 잔치가 있어서, 동네 어른들도 많이 갔다는 말을 비로소 아이들에게 들은 영신은 '옳다꾸나 마침 잘됐다. 오늘이야 설마 안 만나진 못하겠지' 하고 아이들이 따라오는 것을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여차직하면 만인 좌중에 그 돼지 같은 영감장이 고작을 들었다 놓으리라' 하고는 일종의 시위운동도 될 듯해서 조무라기는 쫓아 보내고 머리 굵은 아이들을 이십 명 가량만 추렸다. 그러나 큰 구경이나 빼어 놓고 가는 줄 알고,
“나두, 나두.”
하고 계집아이들까지 중간에서 행렬에 달라붙고 하여서 그럭저럭 오륙십 명이나 따라오게 된 것이다. 영신은,
“그 집에서 음식을 주더래두, 너희들은 받아 먹거나 싸 갖고 가선 안된다.”
하고 단단히 단속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한 낭청 집의 솟을대문이 바라다 보이는 큰 마당터까지 와서는 '칩칩하게 음식이나 얻어먹으러, 애들까지 데리고 오는 줄이나 알지 않을까? 아뭏든 그 집의 경사날인데, 우르르 몰려가는 건 체면상 좀 재미 적은걸' 하고 두 번 세 번 돌아설까 하고 망설였다.
'가뜩이나 나를 못 믿겠다는데, 아주 상스런 여자나 흑작질군으로 치부를 하면 어떡하나' 하고 뒤를 사리려고 하다가, '계획적으로 하는 일이 아닌 담에야 내친걸음에 여기까지 왔다가 돌아서는 것도 비겁하다' 하고 용기를 돋아가지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집안은 온통 잔치 기분에 들떠서 소란스럽기 이를 데 없다.
광대는 꽃 부채를 펴들고 몸을 꼲으면서 줄을 타고 앉았다 일어섰다 용춤을 추다가 아래서 어릿 광대가,
“여봐라, 말 들어라.”
하고 먹이면, 줄 위의 광대는,
“오오냐, 말만 던져라.”
하면서 재담을 주고 받는다.
높은 산에 눈 날리듯
얕은 산에 재 날리듯
억수장마 비 퍼붓듯
대천바다 조수 밀듯
하고 이 댁에 돈과 곡식이 쏟아지고 밀려들라고 덕담을 늘어놓으면, 기생들은 대청 위에서,
얼시구 좋다 절시구
지화자 좋다 저리시구
하고 팔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장아장 주인의 앞으로 대섰다 물러섰다 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판에 영신의 일행은 사랑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의 빈객들은,
“이거 별안간 웬 아이들야?”
하고 서로 술 취한 얼굴을 돌아다보는데 줄 위에 오른 광대는 아이들이 발바닥 밑으로 우르르 달려드는 사품에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발을 헛딛고 떨어질 뻔하였다.
영신이도 잠시 어리둥절해서 당상 당하를 둘러보다가, 여러 사람의 눈총을 한 몸에 받으면서 댓돌 아래로 다가섰다. 몹시 불쾌한 낯빛으로 '저 딱정떼가 또 뭘하러 왔을까' 하고 영신의 행동을 말없이 보고 섰던 도의원 후보자(道議員候補者)는 여러 사람 앞이라 주인의 체모를 차리느라고 영신의 앞으로 와서 형식적으로 머리를 숙여 보이며,
“아, 사이상이 어떻게 오셨읍니까? 온 하두 정신이 숭숭해서 미처 청첩두 못했는데…”
하고 작은 사랑 편으로 올라가라고 손바닥을 펴대며 인도를 한다. 영신은 될 수 있는 대로 공손히 예를 하고는,
“네 고맙습니다. 올라가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고 마주 굽실거리다가 큰 마루 위로 향해서 늙은 주인도 들으라는 듯이,
“우리는 불청객이올씨다. 그렇지만 오늘 같은 경사스러운 날에, 멀지 않은 동네에 살면서 주인영감께 축하의 말씀 한 마디도 안 드릴 수가 없어서 오는 길에 아이들까지 이렇게 따라왔습니다.”
하고 만취가 된 한 낭청을 똑바로 쳐다본다. 늙은 주인은 정신이 몽롱한 중에도 영신을 알아본 듯 게게풀린 눈자위로 마당 그득히 들어선 아이들을 내려다보더니,
“허어, 귀한 손님들이로군. 조것들꺼정 내 환갑날을 어떻게 알았던고?”
하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매우 만족한 웃음을 웃고는,
“큰애 게 있느냐?”
하고 위엄 있게 큰아들을 불러 세우더니 아이들을 먹일 음식상을 차려 내오라고 명령한다.
“아니올씨다. 우리는 음식을 먹으려고 오질 않았습니다.”
하고 영신은 손을 내저었다. 젊은 주인은 어쩐지 형세가 불온해서 속으로는 적지 아니 켕기건만,
“모처럼 이렇게 오셨는데, 도무지 차린 게 변변치 않아서…”
하고 어름어름하다가 돌아서며 '저 숱한 애들을 뭘 다 노나먹인담' 하고 군소리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마루 위의 손들이 파흥이 된 것을 불쾌히 여기는 눈치를 채고, 한 낭청은 기둥을 붙들고 일어서며,
“아아니, 광대놈들은 뭘하는 셈이냐!”
하고 역정을 낸다. 풍악소리는 다시 일어나고 광대는 비실거리며 줄을 걷는다. 마당 가장자리에 쭈욱 둘러앉은 아이들은 광대가 줄을 타고 달리다가 뒷걸음을 쳤다가 하는 것을 정신없이 쳐다본다. 그중에도 계집애들은 간이 콩알만해지는 듯,
“에그머니! 저러다 떨어지면 어쩌나.”
하고 아슬아슬해서 손에 땀을 쥔다. 영신이도 광대가 줄을 타는 것을 처음 보아서 그편을 쳐다보고 섰는데, 이 집의 머슴들은 장타령군과 머슴애들이 먹던 그릇을 말끔 몰아 가지고 들어갔다.
조금 뒤에는 그 사발 대접을 부시지도 않고, 고명도 없는 밀국수에 장국 국물을 찔끔찔끔 처가지고 나와서는 그나마 두세 명에 한 그릇씩 안긴다. 그것을 본 영신은 크나큰 모욕을 느끼고 금시 눈에서 불이 나는 듯 두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여보! 우린 그런 음식 안 먹소!”
하고 꾸짖듯 하고는 머슴들의 앞을 딱 가로막아 섰다.
어떤 아이는 일러 준 말을 잊어버리고 국수 그릇에 손을 내밀다가 옴찔하고 선생의 눈치를 살핀다.
“아, 왜 이러시나요? 준비한 건 없지만, 온 주인 된 사람이 무안하군요.”
젊은 주인은 영신의 기색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얼더듬는다. 그 태도는 기부금을 못 내겠다고 버티던 때와는 딴판이다.
한편에서는 배불리 얻어먹은 장타령군의 두목인 듯한 부대조각을 두른 자가 안중문으로 들이대고 헛침을 튀 튀 뱉더니,
“얼씨구 들어왔네, 품 품 바바바.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두 않구 또 왔소… 냉수동이나 마셨느냐, 시원시원 잘두 한다. 뜨물동이나 들이켰나 걸직걸직 잘두 한다.”
하고 곤댓짓을 하니까, 머리를 충충 땋아 늘인 총각녀석이 뒤를 대어,
“에 - 하늘 천자를 들구 봐, 자시에 생천하니 호호탕탕 하늘천(天), 축시에 생지하니 만물창생 따아 지(地)).”
하고 천자(千字) 뒷풀이를 청승맞게 한다.
광대는 줄에서 뛰어내려 땅재주를 훌떡훌떡 넘다가,
“사부댁 존전에 그저 처분만 바랍니다.”
하고 댓돌 위로 홍선을 펴 들고 기생들에게 눈짓을 슬쩍 한다. 기생들은 그 눈치를 약빨리 채고,
“아이고 영가암, 몇장 처분해 줍쇼그려어.”
하고 화롯가에 붙인 촛가락처럼 이리 곤드라지고 저리 곤드라지는 양복장이들의 옆구리를 찌른다. 그것을 본 한 낭청은,
“옛다, 그래라. 이런 때 돈을 못쓰면 저승에 가 쓰겠느냐.”
하고 새빨간 염낭을 끄르더니, 지전 한 장을 집히는 대로 꺼내서 광대의 얼굴에다 끼얹듯이 내던진다. 가랑잎처럼 휘둘다가 댓돌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언뜻 보기에도 일 원짜리는 아니다. 어릿광대는 지전을 집어 들고 주인에게 수없이 합장을 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그 수 없는 사람의 때가 묻은 지전을 입에다 물고 배운 재주는 다 부리는데, 대청 위에서는 기생들이 손들과 어우러져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다보고 섰던 영신의 눈은 점점 이상한 광채가 돌기 시작한다. 한 낭청은 첩에게 부축이 되어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다가, 아이들이 그저 마당가에 쪼그리고 앉은 것을 보고 혀꼬부라진 소리로,
“재, 재들은 왜 여태 저 저러구 앉었느냐!”
하고 화경이 된 것 같은 두 눈의 흰자위를 굴리며 영신을 내려다 본다. 영신은 마당 한복판으로 썩 나섰다.
“우리들이 댁에 뭘 얻어먹으러 온 줄 아십니까?”
그 목소리는 송곳 끝 같다.
“그 그럼 뭐 뭘 하러 왔노?”
“돈을 하도 흔하게 쓰신다길래 여기 손수 적어주신 기부금을 받으러 왔습니다!”
영신은 주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기부금 명부를 싼 책보를 끄른다. 낭청은,
“기부금? 아 그래 쇠털 같은 날에, 하 하필 오늘 같은 날 성군작당(成群作黨)을 하구 와서 내란말야? 기 기부금에 거 걸신이 들렸군.”
하고 사뭇 호령을 하고는 돌아서려고 든다. 영신은 뚱뚱보의 앞을 떡 가로막아 서며,
“안됩니다. 오늘은 만나 뵌 김에 천하없는 일이 있어두 받아 가지고야 갈 텝니다.”
하고 야무지게 목소리를 높인다. 손들과 구경군들이며 기생 광대 할 것 없이 어안이 벙벙해서 여선생을 주목한다. 영신은 마당 가득 찬 여러 사람을 향해서,
“여러분, 이런 공평치 못한 일이 세상에 있습니까? 어느 누구는 자기 환갑이라고 이렇게 질탕히 노는데, 배우는 데까지 굶주리는 이 어린이들은 비바람을 가릴 집 한 간이 없어서 그나마 길바닥으로 쫓겨났습니다. 원숭이 새끼처럼 담이나 나뭇가지에 매달려서 글 배우는 입내를 내고요, 조 가느다란 손가락의 손톱이 닳도록 땅바닥에다 글씨를 씁니다!”
하고 얼굴이 새빨개지며 목구멍에 피를 끓이는 듯한 어조로,
“여러분, 이 아이들이 도대체 누구의 자손입니까? 눈에 눈물이 있고 가죽 속에 붉은 피가 도는 사람이면, 그 술이 차마 목구멍으로 넘어갑니까? 기생이나 광대를 불러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놀아도, 이 가슴이 - 양심이 아프지 않습니까?”
하고 부르짖으며 저의 앙가슴을 주먹으로 친다.
손들은 도가 넘도록 취했던 술이 당장에 깬 듯, 서로 얼굴만 쳐다보는데 한 낭청은 어느 틈에 안으로 피해 들어가고, 젊은 주인은 영신의 앞을 막아서며,
“사이상(채 선생), 온 이거 어느 새 망령이시구려. 오늘 같은 날 참으시지요. 일이 잘못됐으니 그저 참아주세요. 그 돈은 저녁 안으로 꼭 보내드리리다.”
하고 말씨가 명주고름 같아지며 머리를 수없이 숙여 보인다.
영신은 흥분을 가라앉히느라고 숨만 가쁘게 쉬고 섰는데 처음부터 누마루 한 구석에 앉아서 영신의 행동을 노리고 내려다보던 주재소 수석의 눈은 점점 날카롭게 빛났다.
…그날 저녁부터 일주일 동안이나 영신은 경찰서 유치장 마루방에서 새우잠을 잤다. 본서까지 끌려가서 구류를 당하던 경과며 그 까닭은 오직 독자의 상상에 맡길 뿐이다.
동혁은 청석골이 가 보고 싶었다. 날이 가고 달이 바뀔수록 사랑하는 사람과 그가 활동하는 모양이 보고 싶었다. 날마다 이 일 저 일에 얽매여서, 잠자는 시간 밖에는 공상할 틈조차 없기는 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문득문득 영신의 생각이 나면, 손을 쉬고 발을 멈추고 넋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는 습관이 부지중에 생겼다.
'그가 꿈결같이 다녀간 지가 언제이던가' 하면, 적어도 사 오년은 된 성싶었다. 편지만은 끊임없이 내왕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웬일인지 열흘이 훨씬 넘도록 영신의 소식이 끊어져서 여간 궁금히 지내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일전에야 기다란 편지가 왔는데 한 낭청이란 부자 집에 기부금을 걷으러 가서 창피를 당하고 분풀이를 실컷 하다가, 일주일 동안이나 고초를 겪었다는 것과 앞으로는 기부금 명부에 이름을 적은 사람에게도 자발적으로 주기 전에는 독촉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예배당 문까지 닫으라고 딱딱 을러메는 것을, 간신히 양해를 얻기는 했으나 무슨 수단을 써서든지 청석학원 하나는 기어이 짓고야 말겠다고 새로운 결심을 보인 사연이었다.
그러면서도 한번 구경이라도 와 달라는 말은 비치지도 안 한다. 반드시 청좌를 해야만 갈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나 와 달랄까 하고 동혁은 편지마다 은근히 기다렸다. 그러나 오는 편지마다 판에 박은 듯한 사업 보고요, 고생하는 이야기뿐이다.
동혁은 그런 편지를 받을 적마다,
'나도 어지간히 버티는 패지만, 나보다도 한 술 더 뜨는 걸' 하고 편지를 동댕이치는 때도 있었다.
가기만 하면야 반가이 맞아 줄 것은 물론이나 사실 내왕 노자도 어렵고 벼르고 별러서 간댔자 급한 볼 일 없이 며칠 동안이나 버정거리다가 오기는 싱겁고 멋적은 일일 것 같았다.
첫째 남자 친구를 찾아가는 것과 달라서 하룻밤이나마 묵을 데도 만만치 않을 듯하고, 둘이 함께 얼려다니고 마주 붙어 앉아 이야기라도 하면, 노처녀인 영신이가 제가 당한 것보다도 곱절이나 부질없는 놀리움을 받을 것도 상상되었다. 그래서 '좋은 기회가 올 때까지 꾹 참자' 하고 피차에 일하는 것밖에 다른 생각은 아주 책장을 덮어두자고 몇 번이나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러나 늙은 총각의 가슴속에 한 번 호되게 붙어 당긴 사랑의 불길은, 의식적으로 참고 억지로 누른다고 쉽사리 꺼질 리가 없었다. 시뻘건 정열이 휘발유를 끼얹은 듯이 확 하고 붙어 당길 때는 머리끝까지 까맣게 그슬릴 것만 같다. 그럴 때면,
“일이다. 일! 그저 들구 일만 하는 것이, 그와 완전히 결합될 시기를 지루하게 기다리는 동안의 최면제도 되고 강심제도 된다.”
하고 식전부터 오밤중까지도 동네일과 집안 일로 몸을 얽어매었다. 돈 있는 집 자식들이 몸뚱이가 아편장이처럼 비비틀리도록 무료한 세월을, 술과 계집 속에 파묻혀서 보내려고 드는 것처럼…
그래도 억제하기 어려운 청춘의 본능이 피곤한 육체를 괴롭게 굴 때에는,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랫도리까지 발가벗고 냉수를 끼얹고는, 엇 둘 엇 둘 하고 체조를 한바탕 하고 들어와서, 이불을 폭 뒤집어쓰고 눈을 딱 감으면 한결 잠이 쉽게 들었다.
한편으로 그가 영신을 될 수 있는 대로 호의로써 이해하려는 것도 물론이다. 그만한 나이에 다른 여자들 같으면 몸치장이나 하기에 눈이 벌겋고, 돈 있고 소위 사회에 명망이 있는 결혼을 못하면, 첩이라도 되어서 문화생활을 할 공상과, 그렇지 않더라도 도회지에서 땀 안 흘리는 조촐한 직업도 많건만, 유독 '채영신'에게는 다만 한 가지 허영심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못 속이지' 하고 동혁이가 자신 있게 맥을 짚어 본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청석학원을 온전히 저 한 사람의 힘으로 번듯하게 지어 놓고, 교장 겸 고스까이(小使) 노릇까지 하더라도, 내가 이만한 사업을 하고 있노라' 하고 백현경이나 다른 농촌 운동자들에게 보여주고, 애인인 저에게도 자랑하고 싶은 그 허영심만이 충만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하였다. 그러니까 자기의 사업이 기초는 어느 정도까지 잡혔더라도, 외형으로 눈에 번쩍 띄우는 것을 만들어서 보여주기 전에는 저를 청석골로 부르지 않으려는 그 여자다운 심리가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다.
한곡리의 안산인 소대갈산 마루터기에, 음력 칠월의 초생달은 명색만 떴다가 구름 속으로 잠겼는데, 동리 한복판인 은행나무가 선 언덕 위에는 난데없는 화광이 여기저기 일어난다.
농우회의 열두 회원들은 단체로 일을 할 때면 입는 푸른 노동복 저고리를 입고,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이고 모여 섰다. 동혁이 형제와 건배는 기다란 장대에 솜방망이를 단 것을 석유를 찍어 가며 넓은 마당을 밝히고 섰는데, 바람결을 따라 석유 그을음 냄새가 근처인가에까지 훅훅 끼친다.
“자, 시작하세!”
동혁의 명령이 한 마디 떨어지자, 회원들은 굵다란 동아줄을 벌려 잡았다.
에헤 에헤라, 지경요 -
열 두 사람의 목소리가, 목구멍 하나를 통해서 나오는 듯, 우렁차게 동네 한복판을 울리자, 커다란 지경돌이 반 길이나 솟았다가 쿵 하고 떨어지면 잔디를 벗겨 놓은 땅바닥이 움폭움폭하게 패어들어간다. 여러 해 별러오던 농우회의 회관을 지으려고 오늘저녁에 그 지경을 닦는 것이다.
회원들의 마음은 여간 긴장되지 않았다.
자자손손이 대를 물려가며 살려는 만년 주택을 짓기 시작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생각으로 자기네들이 웅거할 회관을 지으려는 것이다.
달구질 소리가 들리자, 야학을 다니는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든다. 아직도 이 시골에는 누구나 집을 지으면 터 닦는 날과 새를 올리는 날은 품삯을 받지 않고 대동이 풀려서 일을 보아주는 습관이 있어서, 회원들 외에 어른들과 아이들이 벌써 수십 명이나 들러붙었다.
에헤라, 지경요 -
에에 헤에라, 지경요 -
고요한 바닷가의 저녁 공기를 헤치는 달구질 소리는 점점 더 커지는데, 큰마을 편에서 징, 장구, 꽹과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가까이 들려온다. 여러 사람들은 잠시 팔을 쉬고 그편을 바라본다.
레인코우트(우장옷)의 허리띠를 졸라맨 기만이가 저의 집 머슴군이며 작인들을 말끔 풀어서 술까지 취토록 먹인 뒤에, 두레를 떡 벌어지게 차려가지고 오는 것이다.
높이 든 깃발은 선들바람에 펄펄 날리는데,
깽무깽, 깽깽, 깽무깽무 깨갱깽
상쇠잡이가 앞장을 서고,
떵떵 떵더꿍 떵기떵기 떵더꿍
장구잡이는 뒤를 따른다. 징소리는 점잖이 ·응·응 하고 이슬이 흠씬 내린 잔디밭과 들판으로 퍼지다가 사라지는 그 여운이 웅숭깊다.
마중을 나간 솜방망이 불빛에, 컴컴한 공중으로 우뚝 솟아 너울거리며 다가오는 것은, 2등 3등까지 무등을 선 머리 땋은 아이들이 고깔을 쓰고 장삼자락을 펼치면서 나비처럼 춤을 추는 것이었다. 터를 닦는 마당까지 올라오더니, 풍물소리는 잦은 가락으로 볶아치기 시작한다.
조금 있자, 풍물소리를 듣고 성벽이 난 작은 마을과 구엉 마을에서도, 낮에 두레로 논을 매던 야학의 학부형들이 채비를 차려 가지고 와서는 큰 마을 두레와 어울렸다.
그럭저럭 언덕 아래는 머슴 설날이라는 이월 초하루나 추석날 저녁보다도 더 풍성풍성해졌다. 각처 두레가 다 모여들어 한데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징, 꽹과리를 깨어져라고 두들겨대는데, 장구잡이도 신명이 나서 장구채를 이 손 저 손 바꾸어치며 으쓱으쓱 어깨춤을 춘다. 거북이라는 총각녀석이 어둠침침한 소나무 밑에 가 쭈그리고 앉아서, 청승스러이 꺾어넘기는 날라리(胡笛) 소리는 밤바람을 타고 바다 건너까지도 들릴 듯.
자비꾼들은 수구를 들고 장단을 맞추어 가며, 패랭이 위의 긴 상모를 돌리느라고 보는 사람까지 현기증이 나도록 곤댓짓을 한다.
얼씨구 좋다 어리시구.
나중에는 구경꾼까지도 어깻바람이 나서 개구리처럼 들뛰면서 마른 흙이 뽀얗게 일도록 한바탕 북새를 논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섰던 동혁은,
“야아, 오늘밤엔 우리도 산 것 같구나!”
하고 부르짖으며 징을 빼앗아 들고, 꽝꽝 치면서 자비꾼 속으로 뛰어들었다. 키장다리 건배도 깃대를 꼲아들고 섰다가, 그 황새 다리로 껑충껑충 춤을 추며 돌아다닌다. 다른 회원들도 어느 틈에 두렛꾼 속으로 하나 둘씩 섞여 들어갔다.
아들이 동네 일만 한다고 눈살을 찌푸리던 동혁의 아버지 박 첨지도, 늙은 축들과 술이 거나하게 취해 가지고 와서는,
“아아니, 내가 옛날버텀 맡아논 좌상님인데 어떤 놈들이 날 빼놓구 논단 말이냐.”
하고 난장이 쇰직하게 키가 작은 석돌이 아버지의 수염을 꺼두르며,
“여보게 꽁배, 어서 따라오게.”
하면서 군중을 헤치고 들어선다. 그는 석돌이 아버지와 술을 먹다가 풍물소리를 듣고,
“내 자식놈이 둘 씩이나 덤벼들어서 짓는 집인데 아비 된 도리에 안 가 볼 수가 있나?”
하고 기운이 나서 올라온 것이다.
박첨지는 언덕 위에 올라서서 팔을 걷고 곰방대를 내두르며 목청을 뽑아 달구질 소리를 먹인다.
산지조종 백두산(山之祖宗 白頭山)
'산지조종은 백두산이요'
하고 내뽑으면, 달구질꾼들은 그 소리를 받아,
에에 헤에라, 지경요 -
하며 동시에 지경돌을 번쩍 들었다 놓는다.
수지조종 한강수(水之祖宗 漢江水)
'수지조종은 한강수라'
에에 헤에라, 지경요 -
땅을 다지는 동네 사람들은 목이 쉬어 가는 줄도 모르는데, 그 날 저녁 동혁은 젊은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싱싱하고 씩씩한 아버지의 목소리를 생후 처음으로 들었다.
한 달 하고도 보름이나 지났다. 그 동안 한곡리 한복판에는 커다란 새 집 한 채가 우뚝하게 솟았다. 커다랗다고 해야 두 간 겹으로 폭이 열 간 쯤 되는 창고 비슷한 엉성한 집이지만, 이 집 한 채를 짓기에 회원들은 칠월 염천에 하루도 쉬지 않고 불개미와 같이 일을 하였다.
논에는 아시 두 번 호미질과 만물까지 하였고, 이제는 피사리만 하면 힘드는 일은 거의 끝이 난다. 그 동안에 한 달 반쯤은 농군들이 추수를 할 때까지 숨을 돌리는 농한기다. 그 틈을 이용해서 농우회관을 지은 것이다.
엉부렁하게나마 거의 이십 평이나 되는 집을 얽어 놓는데, 그 건축비가 불과 몇 십원 밖에 들지 않았다면 누구나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회원들끼리 거의 삼 년 동안이나 농사를 지어 모은 것과, 술 담배를 끊은 대신으로 다달이 얼마씩 저금을 한 것과, 또는 돼지를 치고 이용조합(利用組合)에서 남은 것을 저리(低利)로 놓은 것을 걷어 모으면, 거의 오백 원이나 된다.
이발부의 수입은 모았다가 동리서 공동으로 쓸 솜틀을 칠십여 원이나 주고 샀고, 포패조합(捕貝組合)을 만들어서(회원은 다 여자인데, 앞 바다 건너 안섬에다가 이년 작정을 하고 굴을 번식시킨 뒤에, 조합원끼리 따먹고 장에 갖다가 파는 권리를 가지는 것) 불가불 소용이 한참 되는, 조그만 나룻배를 사십 원 가량 들여서 지은 것밖에는 한 푼도 쓰지 않은 채 있었다.
그들 중에서 이 회관을 짓는 데는 오십 원도 다 들이지를 않았던 것이다.
첫째, 대지가 민유지라 땅값이 안 들었고, 재목은 단단해서 썩지도 않는 밤나무, 참나무, 아카시아나무 같은 것을, 회원들의 집 앞이나 멧갓에서 베어 왔고, 수장목은 오동나무와 미류나무를 썼는데, '영치기 영치기' 하고 회원들끼리 목도질까지 해서, 운반을 해 오니 돈이 들 리 없었다.
터를 닦고 주춧돌을 박는 것부터 자귀질 톱질이며, 네 올가미를 짜서 일으켜 세우고, 새를 올리고 욋가지를 얽고, 토역을 하는 것까지 전부 회원들의 손으로 하였다. 이엉을 엮을 짚도 농우회에서 연전부터 유념해 두었었는데, 여러 사람이 입의 혀같이 봉죽을 들었거니와, 회원 중에 석돌이는 원체 지위(목수)의 아들인데다가 눈썰미가 있어서 수장은 물론, 문짝까지 제 손으로 짜서 달았다.
품삯이라고는 한 푼도 안 들었지만, 다만 화방 밑에 콘크리트를 하는 데 쓰는 양회와 못이나 문고리며 배목같은 철물만은 할 수 없이 돈을 주고 사다가 썼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손을 빌지 않고 거의 두 달 동안이나 열 두 사람의 회원들이 땀을 흘린 기념탑이 우뚝하게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서투른 목수와 토역장이들이 얽어 놓은 집이라 장마를 치르고 나니까, 지붕이 새고 벽이 허물어져서 곱일을 하느라고 동혁이도 몇 번이나 코피를 쏟았다. 그랬건만 다 지어 놓고 보니 겉눈에 번듯하게 띄지는 않아도 거의 이 백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수용할 수가 있게 되었고, 엉부렁하게나마 헛간으로 쓸 모채까지 세웠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면 사무실, 도서실까지 오밀조밀하게 꾸며 놓았다.
도서실에는 기만이가 사서 기부한 농업 강의록과 농촌운동에 관한 서책이 오륙십 권이나 되고, 동혁이가 보는 일간 신문과 회원들이 돌려보는 서울시보, 농민순보 같은 정기간행물이며, 각종 잡지까지 대여섯 가지나 구비되어서 회원들은 조그만 틈이라도 타면 언제든지 모여 와서 새로운 지식을 얻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형편을 짐작할 수 있도록 차려 놓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오락부를 새로 두었다.
“사철 일만 하는 우리의 생활은 너무나 빡빡하고 멋이 없다. 좀더 감정을 윤택하게 하고 모두 함께 즐기는 기회도 지어서, 활기를 돋우려면 적어도 한 가지 통일된 음악이 필요하다.”
는 견지에서 건배가 주장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빌면 콩나물대가리(보표(譜表)라는 뜻) 하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무슨 관현악대를 조직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 농촌에 재래로 있던 징, 꽹과리, 장구, 소고, 호적 같은 악기를 장만한 것이다.
“그런 건 천천히 장만해두 좋지 않은가. 날마다 뚱땅거리고 두들기면, 공청을 지어 놓구 놀려구만 드는 줄로 오해들을 하면 재미 적으이…”
하고 동혁이가 반대를 하면,
“온 별소릴 다 하네. 자넨 구데기 무서워서 장도 못 담그겠네.”
하고 건배는 기만이를 구슬러서 새로운 풍물 한 벌을 사들인 것이다. 그래서 회원들끼리만 자비꾼이 되어서, 노는 방식을 개량하고 두레를 노는 것까지도 통제를 하게 되었다.
“자, 우리 인제 낙성연을 해야지.”
“추렴이래두 내서 내일 하루만 실컷 놀아 보는게 어떤가?”
“암 좋구말구. 이새 저새 해두 먹새가 제일이라네.”
“우리가 두 달 동안이나 집의 일을 내버려 두구설랑 그 뙤약볕에서 죽두룩 일을 했는데, 하루쯤 논다구 누가 시빌하겠나.”
“여보게 우리끼리만 암만 공론을 하면 소용이 있나? 우리 대장한테 하루만 술을 트자구 졸라보세. 건깡깽이루야 신명이 나야지.”
“애당초에 그런 말은 비치치두 말게. 일전엔 동화가 또 몰래 주막에 갔다가, 형님한테 단단히 혼이 났다네.”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다 못해서 오지그릇처럼 빤들빤들해진 회원들이 회관 한 모퉁이에 모여 앉아서 새로 사온 풍물을 두드려 보다가 낙성연을 할 음모를 한다.
저녁 때였다. 찌는 듯하던 더위가 한 걸음 물러서고 축동 앞 미류나무에 쓰르라미 소리가 제법 서늘하게 들린다. 회원들은 서퇴도 할 겸 하나 둘씩 은행나무 아래로 내려가서 새 벽한 흙이 채 마르지도 않은 집을 쳐다보고 앉았다. 그 집을 바라다보는 그들의 기쁨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이나 컸다.
'힘만 모으면 무슨 일이든지 되는구나! 땀만 흘리면 그 값이 저렇게 나타나고야 만다!'
그네들은 회관 집 한 채를 짓는데 단결의 힘이 얼마나 크다는 것과, 또는 노력만 하면 그 결과가 작으나 크나 유형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비로소 체험한 것이다. 동시에 움집 속에서, 또는 남의 집 머슴 사랑에서 구차히 모이던 때를 생각하니 실로 무량한 감개가 끓어올랐다.
'저게 내 손으로 지은 집이거니' 하면 무한한 애착심도 느껴졌다. 그 집을 바라다보고 앉았으려면, 끌 구멍을 파다가 손가락을 다쳤거나, 사닥다리에서 떨어져서 허리를 삐고는 동침을 맞느라고 혼이 났거나, 중방과 도리를 잘못 끼다가 석돌이 녀석한테 핀잔을 맞았거나…
이러한 추억만 해도 여간 정다운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자네 저 기둥감을 베다가 영감님한테 몽둥이 찜질을 당했지.”
“그건 약괄세. 이걸 좀 보게그려. 여태 이 지경이니.”
하고 회원들 중에 제일 다부지고 땅딸보로 유명한 정득이가 헝겊으로 칭칭 감은 발을 끌러 보인다. 그것은 저의 집 산울 안에 선 참죽나무를 밤중에 몰래 베다가 저의 아버지가 '도둑야' 소리를 지르며 시퍼런 낫을 들고 쫓아나오는 바람에, 어찌나 급해맞았던지 담을 뛰어넘다가 탱자나무 가시에 발을 찔렸었다. 누렇게 곪긴 것을 그대로 끌고 다니며 일을 해서 그저 아물지를 못한 것이다.
사실 그네들이 부모나 동네 어른들의 반대 속에서 초가집 한 채를 짓기는 대궐 역사만큼이나 거창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쉬이, 대장 올라오신다.”
하고 정득이가 구렁이 지나가는 소리를 낸다. 동혁이는 건배와 기만의 가운데에 서서 올라온다. 기만이는 여전히 건살포를 짚었는데, 오늘은 헬메트(박통같은 모자)를 썼다.
“거기들 모여 앉아서 자네들 역적 모의하나?”
건배도 넓적한 얼굴이 눈의 흰자위와 이빨만 남기고는 흑인종의 사촌은 될 만큼이나 그을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끼리 무슨 비밀한 공론을 했는데요…”
하고 석돌이가 세 사람의 눈치를 번갈아 본다.
“무슨 공론?”
동혁은 농립을 벗어던지며 은행나무 뿌리에 가 걸터앉는다. 응달에서만 지낸 기만의 얼굴과 비교해 볼 때, 동혁의 얼굴도 더한층 그을은 것 같다. 손바닥이 부르터서 밤콩만큼씩한 못이 박혔고 손톱은 뭉툭하게 닳았다.
“저어…”
하고는 석돌이가 뒤통수만 긁적거리니까,
“왜 목들이 컬컬한 게지.”
동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러잖어두…”
하고 이번에는 칠용이가 응원을 한다. 건배는 기만의 눈치를 보면서,
“아닌게 아니라, 이기만씨가 낙성연을 한번 굉장히 차리고 놀자는데…”
하는 말이 끝나기 전에 동혁은 손을 들어 건배의 입을 막는다.
“안되네. 낸들 벽창호가 아닌 담에야 그만한 생각이 없겠나? 하지만 말썽이 많은 판에 동네가 부산하게 떠들고 놀면, 되려 오해를 받기 쉬우이. 지금도 면장이 나와서 나를 보자고 한대서 큰 마을로 갔다 오는 길일세.”
하고 반대를 하였다.
“왜 무슨 말썽이 생겼수?”
나중에 올라온 동화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묻는다.
“차차 알지.”
형은 자리가 거북한 듯이 대답하기를 꺼린다.
“우리 회와 상관이 되는 일이면 회원들두 다 알아야 할 게 아니유? 면장이 우리 일에 무슨 참견이라우?”
“글쎄 뒀다 알어.”
동혁은 기만의 등 뒤에다 눈짓을 해 보인다. 청년들의 일이라면 한사코 반대를 하는 기만의 형인 기천이가, 면장이 나온 김에 무어라고 음해를 한 것이거니 하고 동화와 다른 회원도 짐작은 하는 눈치다.
그러나 기만이는 형과 달라 이편을 들고 농우회의 일이라면 금전으로까지 후원을 많이 해 오는 터이지만, 아우가 듣는데 형의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또는 경우에 따라서는 초록은 동색이라고 저의 집에 이해관계가 되는 일이라면 형에게 무어라고 연통을 할는지도 몰라서 항상 경계를 하고 있는 터이다.
동혁은 기천의 집에 다녀오는 길에 건배와 기만이를 만나서 같이 오기는 했어도 그들에게도 그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 건배는 탕탕 대포를 잘 놓는 대신에 말이 헤퍼서 비밀을 지킬 만한 일은 들려주기를 삼가지 않을 수 없었다. 회원들은 '무슨 일이 단단히 생겼나 보다'하고 불안을 느끼면서도 더 재우쳐 묻지를 않고, 낙성하는 날 술 한두 잔도 못 먹게 하는 동혁이가 원망스러운 듯이 쳐다보다가 애매한 북과 장구를 두드린다.
기만이도 그 눈치를 챘건만 이런 경우에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은, 도리어 여러 사람에게 오해를 살 듯도 해서,
“그런데 센세이(선생)가 또 뭐래?”
하고 들이대고 묻는다. 그래도 동혁은,
“그까짓 건 알아 뭘하오. 우린 우리가 할 일이나 눈 딱 감고 하면 고만이니까…”
하고 역시 자세한 말대답하기를 피한다. 기만이는 자리가 거북하니까 꽁무니에다가 손을 찌르고 간다는 말도 없이 슬금슬금 언덕 아래로 내려간다. 제가 하는 일을 반대하고 양반을 못 알아보는 발칙한 놈들과 얼러다니고 돈을 쓰고 한다고, 눈에 띄기만 하면 얼굴에 핏대를 올리며 야단을 치는 저의 형이, 면사무소나 주재소까지 가서 무어라고 쏘개질을 하고 온 것만은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농우회관을 짓게 된 뒤부터 가뜩이나 시기심이 많은 기천이가, 두 눈에 쌍심지가 돋아서 그 태도가 부쩍 악화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동혁이가 입을 꽉 다물어 버리니까, 다른 회원들도 어떠한 예감을 느끼면서도 말이 없다.
건배는 무슨 일인지,
“저기 좀 다녀옴세.”
하고는 기만의 뒤를 따라서 내려갔다. 조그만 일에도 궁금증이 나면 안절부절을 못하는 성미라, 동혁이가 말을 하지 않으니까 혹시 기만이에게 들을 이야기나 있나 하고 그 속을 떠보려고 따라가는 눈치였다.
동혁은 한참이나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서 창호지로 새로 바른 들창이, 석양에 눈이 부시도록 반사하는 회관을 쳐다보면서,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다가 회원들을 돌아다보며,
“우리, 낙성식도 못해서 피차에 섭섭한데, 그 대신 뭐 기념될 일이나 하나 해 볼까?”
하고 벌떡 일어선다.
“무슨 일요?”
하는 회원들의 얼굴에서는 '간신히 오늘 하루나 쉬려는데, 또 무슨 일을 하자누' 하는 표정을 역력히 읽을 수 있다.
“그저 괭이하고 삽하구만 들구서 나를 따라들 오게나.”
하고 동혁은 회관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이을 때에 쓰던 사닥다리를 둘러메더니, 산등성이를 넘는다. 회원들은 멋도 모르고 동혁의 뒤를 따랐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매미, 쓰르라미 소리도 점점 엷어질 무렵에는 회관 앞 마당이 턱 어울리도록 두 길 세 길이나 되는 나무가 섰다. 전나무, 향나무, 사철나무 같은 겨울에도 잎사귀가 떨어지지 않는 교목(喬木)만 골라서 '봄이나 가을에 심어야 잘 산다'고 고집을 하는 회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다가 옮겨 심은 것이다. 그것은 동혁이가 근처를 돌아다니며 미리 보아 두었다가, 나무 주인에게 파다 심을 교섭까지 해 두었던 싱싱한 나무들이었다.
새로운 회관에 들게 되는 날 아침에 동혁이가 부는 나팔 소리는 더한층 새되고 씩씩하였다. 조기 회원들이,
“엇둘! 엇둘”
하고 체조를 하는 소리도, 애향가의 합창도, 전날보다 곱절이나 우렁찬 것 같았다.
새 집을 구경도 할 겸, 새로 닦아 놓은 운동장에서 체조를 하는 바람에, 그동안 게으름을 부리던 조기회원들도 전부 다 오고, 타동에서 온 구경꾼도 오륙십 명이나 되어서, 운동장이 빽빽하게 찼다.
오늘은 영신이가 조직해 주고 간 부인근로회의 회원들도, 십여 명이나 건배의 아내를 따라서 참례를 하였다. 아무에게도 낙성식을 한다고 광고를 한 것도 아니요, 건배는 무슨 일이든지 크게 버르집고 뒤떠들려고만 든다고, 동혁이와 의견 충돌까지 되었지만 오늘 아침만은 누구나 은연 중에 농우회관에 낙성식을 거행하는 기분으로 모인 것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은 평소와 같이 조기회가 끝난 뒤에도 헤어지기가 섭섭한 듯이 어정버정하며 동혁을 바라본다. 그 눈치를 챈 건배는,
“여보게, 회원도 더 모집해야 할 텐데, 여러 사람이 모인 김에 연설 한 마디 하게그려.”
하고 동혁의 옆구리를 찌른다.
“그건 선전부장이 할 일이지, 왜 나더러 하라나?”
하고 동혁이가 사양을 하니까, 건배는 그 말을 못들은 체하고 회관 정문 앞에 나서더니,
“여러분,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지금 이 회관을 짓자고 맨 먼저 발설을 했고, 우리들을 헌신적으로 지도해 주는 박동혁군이 여러분께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고 공포를 하고 나서는 '인젠 말을 하든지 말든지 나는 모른다' 는 듯이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선다. 운동장에서는 박수소리가 일어났다. 동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너 어디 두고 보자'는 듯이 건배의 뒤통수를 흘겨보고는 회원들의 앞으로 나섰다.
엄숙한 태도로 여러 사람들의 긴장된 얼굴을 둘러보다가,
“준비 없는 말씀을 드리게 됐습니다.”
하고 한 마디 하고 나서, 등뒤의 회관을 가리키며,
“이만한 집 한 채를 얽어 놓은 것이 결코 자랑할 거리는 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이 집을 지으려고 여러 해를 두고 별러 오다가, 오늘에야 낙성을 하게 된 것을 여러분도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다만 한 가지 자랑하고 싶은 것은, 이 집은 연재가락 하나 짚 한 단까지도 회원들이 가져온 것이요, 목수나 미장이 한 사람 대지 않고, 우리가 이 염천에 웃통을 벗어부치고 불개미처럼, 참 정말 불개미처럼 두 달 동안이나 일을 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만한 집 한 채나마 우리 한곡리 한복판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집은 농우회원 열 두 사람의 집이 아니요, 여러분이 유익하게 이용하시기 위해서 지어 놓은 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한곡리의 공청, 즉 공회당으로 써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잠깐 눈을 내리감았다가, 얼굴을 들고 소리를 높여,
“여러분! 여러분은 이 말 한마디만 머리 속에 깊이 새겨두십시오. '여러 사람들이 한맘 한뜻으로 그 힘을 한 곳에 모으기만 하면, 어떠한 일이든지 이루어질 수가 있다'는 것을 - 우리는 여름내 땀을 흘린 그 값으로 이 신념 하나를 얻었습니다. 처음으로 귀중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보다 더 많은 사람이 똑같은 목적으로 모여서, 꾸준히 힘을 써 나간다면, 이보다 더 어려운 일도 성공할 수가 있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여러분과 함께 믿고자 하는 바입니다.”
하고 부르짖고는 숨을 돌린 뒤에 목소리를 떨어뜨려,
“우리는 일을 크게 버르집고 겉으로 떠들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낙성식같은 것도 하지를 않습니다마는 그대신 우리 동리 여러분께 좋은 음악을 들려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집터를 닦는 달구질 소리, 마치질, 자귀질 하는 소리가 온 동리에 울리지 않았습니까? 저 소대갈산까지 찌렁찌렁 울리지 않았습니까?
그 소리가 무엇보다 훌륭한 음악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을 무너버리고 깨뜨려 버리는 파괴의 소리가 아니라, 새로 짓고 일으켜 세우는 건설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소리가 어찌나 반갑고 기쁜지, 조금도 괴로운 줄을 모르고 일을 했습니다.”
동혁은 그 말에 매우 감격해 하는 여러 사람의 얼굴을 둘러보다가,
“여러분, 이 집이 터지도록 우리의 장래의 일꾼들을 보내주십시오! 아침저녁으로 글 배우는 소리가 그칠 때가 없도록 해 주십시오! 이 집이 꽉 차면 우리는 이 집보다 더 큰 집, 또 그보다도 더 굉장히 큰 집을 짓겠습니다.”
그 말에 회원들은 손바닥이 뜨겁도록 박수를 한다.
그때에 건배는 여러 사람의 앞으로 썩 나서면서,
“한곡리 만세!”
하고 두 팔을 번쩍 쳐든다.
“만세!”
여러 사람이 고함지르듯 하는 만세 소리에 새로 심은 사철나무에 앉았던 참새들이 깜짝 놀라 푸르르 날아갔다.
하루는 동혁이가 회관에서 주학을 마치고 나오는데(새 집으로 옮겨온 후 아이들이 부쩍 늘어서 주학까지 하게 되었다) 석돌이가 문밖에 기다리고 섰다가,
“저 강도사 댁 작은 사랑 나으리가, 저녁 때 잠깐 만나자고 하시는데요.”
한다.
“왜?”
동혁은 불쾌히 대답을 하였다. 석돌이는 눈썰미가 있고 영리한 대신에, 얕은 꾀가 많아서 항상 경계를 하는 회원이다. 더구나 강도사집 전답에 수다 식구가 목을 매어단 사람이어서 이 집에 심부름을 다니는 것은 물론, 박쥐 구실이나 하지 않는지가 의문이었다. 강도사집 살림살이의 실권을 쥔 맏아들인 기천이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처지에 있는 까닭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글쎄 왜 오라는 거야?”
동혁은 거듭 물었다.
“알 수 있어요? 조용히 꼭 좀 만나자고 일러 달라고 헙시니까요.”
“누가 왔든가?”
“아니요, 혼자 계시든걸요.”
“음, 알았네.”
동혁은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고 집으로 내려갔다.
기천이는 면협의원이요, 금융조합 감사요, 또 얼마 전에는 학교 비평의원이 된 관계로 면장이 나와서 한곡리도 진흥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 회장이 되도록 운동을 해보라고 권고를 하고 갔었다.
기천은 명예스러운 직함 하나를 더 얻게 된 것은 기쁘나, 군청이나 면소에서 시키는 대로 무슨 일이든지 하는 체 해야만 저의 면목이 서겠는데, 제가 수족같이 부릴 만한 청년들은 말끔 동혁의 감화를 받고, 그의 지도 밑에서 한 몸뚱이와 같이 움직이고 있으니 저는 개밥에 도토리 모양으로 따로 베져 났다.
저의 집의 논을 하고 돈을 쓴 낫살 먹은 작인들 같으면, 마구 내려누르고 우격다짐을 해도 그저 '잡어 잡수'하고 꿈쩍도 못하지만, 나이 젊고 혈기 있는 그 자질들은 까실까실해서 당초에 말을 들어먹지 않는다.
워낙 기천이가 대를 물려가면서 고리대금과 장리 벼로, 동리 백성의 고혈을 빨아서 치부를 하였고 - 주독으로 간이 부어서 누운 강도사는 지금도 제 버릇을 놓지 못한다. 당장 망나니의 칼에 목을 베이려고 업혀 가는 도둑놈이 포도군사의 은동곳을 이빨로 뽑더라는 격으로, 여전히 크게는 못해도 박물장수나 어리장수에게 몇 원씩 내주고 오푼변으로 갉아 모아서는 기직자리 밑에다가 깔고 눕는 것이 마지막 남은 취미다.
몇 해 전까지도 아들만 못지 않게 호색을 해서 주막의 갈보, 행랑계집 할 것 없이 잔돈푼으로 낚아들여서는, 대낮에 사랑 덧문을 닫기가 일쑤더니 운신을 못할 병이 든 뒤에야 그 버릇만은 놓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 저 혼자 사람의 뼈다귀인 것처럼 양반 자세가 대단해서 적실인심을 한 터이라, 새로운 시대에 눈을 뜨기 시작한 청년들은 기천이만 눈에 띠면, 무슨 누린내가 나는 짐승처럼 얼굴을 돌리고 슬금슬금 피한다.
그 중에도 성미가 부푼 동화는 '조놈의 발딱 제치고 다니는 대가리는 여불없이 약오른 독사 뱀 같더라' 하고 먼발치로 눈에 띠기만 해도 외면을 해 버린다.
그 아우는 노새라고 놀리기는 하면서도 '그래도 기만이는 강가의 중시조지'하고 간신히 사람 대우를 하지만… '또 무슨 얌치 빠진 소리를 하려누' 하고 동혁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기천이를 보러 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동화가 자꾸만 묻고 건배까지,
“왜 혼자만 꿍꿍이 셈을 치나?”
하고 궁금히 여기는 일은 다른 것이 아니다. 면장이 왔던 날 기천이는 술상을 차려놓고 동혁이를 청하였다. 그날 면장 앞이라 그런지, 평소처럼 점잖을 빼고 사람을 깔보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이 박 군이야말로 참 대표적으로 건실한 우리 동지입니다. 이번 그 회관 집만 하더래두 이 사람 혼자 지은 거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하고 새삼스러이 동혁을 소개하였다. 소개가 아니라, 이러한 모범 청년이 제 수하에서 일을 한다는 태도다. 동혁은 동지라는 말을 기만의 입에서 들을 때보다도 더 구역이 나서, 입에도 대지 않은 술잔을 폭삭 엎어놓았었다. 그래도 기천이가 연방 동지를 찾으면서 하는 말을 종합해 보면,
'면장께서 바쁘신데도 일부러 나오신 건 다름이 아니라 우리동네도 진흥회를 실시해야 되겠는데, 내야 어디 그런 일을 아는 사람인가? 허니 자네들이 힘을 좀 빌려줘야겠네. 자네야 중요한 역원이 돼줄 줄 믿지만 다른 젊은 사람들도 다 함께 회원이 돼서 일을 해 보두룩 하세' 하고 애가 말라서 간청을 하는 것이었다.
동혁은 생각해 볼 여지도 없이,
“난 할 수 없에요. 우리 농우회 일만 해도 힘에 벅찬데 한 몸으로 두 가지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쇠다.”
하고 딱 잡아떼고 일어섰다.
동혁이가 이번에는 버티고 가지를 않으니까, 기천이는 호출장처럼 명함을 들려 집으로까지 머슴을 보냈다.
“작은사랑 나으리께서 꼭 좀 건너오래유. 안 오면 이리로 오시겠다구 그러세유.”
하고 머슴애는 어서 일어나기를 재촉한다. 기천이는 면협의원이 되던 날 아침에, 행랑사람과 머슴들을 불러 세우고,
“오늘부터는 서방님이라구 그러지 말구, 나으리라구 불러라.”
하고 일장의 훈시를 하였던 것이다.
동혁은 중문간 문지방에 걸터앉아서 입맛을 다시다가,
“저녁 먹구 건너간다구, 가서 그러게.”
해서 머슴을 보냈다. 가고 싶은 생각은 손톱 끝만큼도 없지만, 집으로까지 찾아온다는 것이 싫어서 가마고 한 것이다.
저녁 뒤에 그는 말 대답할 것을 생각하면서 큰 마을로 발길을 옮겼다. 대문간에 들어서는데 작은 사랑 툇마루에서,
“아 그래, 제깐 녀석이 명색이 뭐길래 내가 부른다는데 냉큼 오질 못한다더냐?”
하고 그 되바라진 목소리로 머슴애를 꾸짖는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동혁은 '나 여기 대령했소'하는 듯이 바로 지척에서 으흠으흠하고 기침을 하고,
“저녁 잡수셨에요?”
하며 들어섰다. 기천은 도둑질이나 하다가 들킨 것처럼 움찔해서 반사운동으로 발딱 일어서기까지 하며,
“아, 자네 오나?”
하고 반색을 한다. 그 푼푼치 못하게 생긴 얼굴을 횟배를 앓는 사람처럼 잔뜩 찌푸리고 있다가, 뜻밖에 동혁이와 마주치는 순간, 금시 반가운 낯으로 표변하는 표정 근육의 민첩한 움직임은, 여간한 배우로는 흉내를 못 낼 것 같다.
“아 이 사람아, 난 여태 저녁두 안 먹구 기다렸네.”
하는 것도 허물없는 친구를 대하는 태도다.
“그럼 시장하시겠군요.”
하고 동혁은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라는 듯이, 툇마루 끝에 가 걸터앉았다. 방으로 들어가자는 것을,
“회관을 지은 뒤에 처음 총회가 있어서 곧 가봐야겠어요.”
하고 한사코 들어가지를 않았다. 방으로 들어만 가면 으례껀으로 술상이 나오고 술을 억지로 권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 예서라도 한 잔 해야겠네. 술을 입에두 안 댄다니 파계(破戒)를 시키군 싶지만, 워낙 자넨 고집이 센 사람이 돼 놔서.”
하고 준비해 놓았던 술상을 내왔다.
술이란 저의 집에서 사철 떨어뜨리지 않고 밀주를 해먹는, 보기만 해도 고리타분한 막걸리 웃국이요, 안주라고는 언제 보아도 낙지 대가리 말린 것에 마늘장아찌뿐이다. 칠팔 년이나 면서기를 다니는 동안에 연회석 같은 데서는 남이 태우다가 꺼버린 궐련 꼬투리를 주워 피우면서도 단풍 한 갑 안 사 먹던 위인으로는 근래 교제가 부쩍 늘어서 면이나 주재소에서 양복장이가 나오면 으례 술까지 내는 것이다.
“하아 이거, 내가 사람을 앉혀 놓구서 인호상이자작(引壺觴而自酌)을 하니 어디 맛이 있나.”
하고 '고문진보' 뒷다리나 읽어 본 티를 내지 못해서 애를 쓴다. 그러나 '숙습(熟習)이 난당(難當)'이라고 써야 할 자리에 '수습이 난방이로군' 하는 따위가 예사여서, 정말 글방에서 종아리깨나 맞아본 사람의 코웃음을 받는 때가 많다.
기천은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서 술기운을 빌려는 것이다.
사실 동혁의 앞에서는 무슨 말이고 함부로 꺼내기가 어려웠다. 농우회에도 다른 회원들 같으면, 그 반수가 저의 논의 소작인이니까 여차직하면 '논 내놔라' 한 마디만 비치면은 설설 기는 터이니 문제가 되지를 않고, 건배만 하더라도, 키 크고 싱겁지 않은 사람 없다고, 원체 허풍선이가 돼서 술 몇 잔에 속을 뽑히는데, 농사터는 한 마지기도 없이 엉터리로 사는 사람이니까 돈을 미끼로 물려서 낚아 볼 자신도 있다.
그러나 유독 동혁이만은 그야말로 눈의 가시다. 천생으로 사람이 묵중해서 당최 뱃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는데, 근처에 없는 고등 교육까지 받아서, 마주앉으면 제가 도리어 인품에 눌리는 것 같다.
기천은 다리를 도사리고 앉아서 고무신의 때가 고약처럼 묻은 버선바닥을 쓰다듬던 손으로, 술잔을 들고 쭈욱 들이키고는, 족제비털 같은 노랑수염을 배비작거려서 꼬아 올리더니,
“좀 하기 어려운 말일쎄…”
하고 반쯤 외면을 한 동혁의 눈치를 곁눈으로 훑어본다.
“말씀하시지요.”
동혁은 '또 무슨 말을 꺼내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하면서도 들으나마나 하다는 듯이 어둑어둑 해가는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앉았다.
기천이는 실눈을 뜨고 손톱여물을 썰더니,
“자네 그 회관 짓기에 얼마나 들었나?”
하고 다가앉는다.
“돈이요? 돈이야 얼마 안 들었지요.”
기천은 다리를 도사리고 고쳐 앉으며 용기를 내어,
“이런 말을 자네가 어떻게 들을는지 모르겠네만 진흥회가 생기면 회관이 시급히 소용이 되겠는데 당장 지을 수는 없구… 거기가 동네 한복판이 돼서 자리가 좋아. 그러니 여보게, 거 어떻게 재목 값이든지 품삯꺼정 넉넉히 따져서 내게루 넘길 수가 없겠나. 자네들은 한번 지어 봐서 수단이 났으니까, 딴 데다가 다시 지으면 고만일 테니…자네 의향이 어떤가?”
하고 얼굴을 반짝 쳐든다. 너무나 얌치빠진 소리에, 동혁은 어이가 없어 '얼굴 가죽이 간지럽지 않느냐'는 듯이 기천을 뻔히 쳐다보다가,
“왜 돈 만원이나 내노실 텝니까?”
하고 껄껄껄 웃었다. 기천은,
“아아니, 이 사람 웃음의 말이 아닐쎄.”
하고 금시 정색을 한다.
“글쎄 웃음의 말씀이 아니니까, 웃을 수밖에 없군요.”
동혁은 별이 반짝이기 시작한 하늘을 우러러 다시 한번 허청 웃음을 웃었다.
“허어 이 사람 그래도 웃네그려. 그 집을 이문을 붙여서 팔라는 데 실없이 웃을 게 뭐 있나?”
기천은 동혁이가 저를 놀리는 것 같아서 눈살을 찌푸린다.
“글쎄 생각을 좀 해 보세요. 그 집은 돈 아니라, 금 덩어리를 가지고도 팔거나 사지를 못합니다. 돈만 가지면 무슨 일이든지 맘대로 될 줄 아시는 모양이지만 억만원을 주고도 남의 정신만은 사지 못할 걸요. 그 회관은 팔려면 단돈 백 원어치도 못 되는진 모르지만, 우리 열 두 사람이 흘린 땀으로 터를 닦았구요, 지붕은 정신으로 쌓아 논 기념탑이니까요. 우리 손으로 부숴 버린다면 모르지만,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 집엔 손가락 하나 대지를 못합니다!”
“아아니, 글쎄 그런 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혹시나 하고 한 말일세.”
“혹시라니요? 한 단체가 공동으로 합력을 해서 지어논 집을, 나 한 개인이 팔아먹을 생각을 혹시나 하고 있을 것 같아서 그런 가당치 않은 말씀을 꺼내셨나요?”
이 한 마디에 기천은 그 빳빳하던 모가지가 자라목처럼 옴츠러들지 않을 수 없었다.
“…”
기천은 눈만 깜작깜작하고 담배를 붙여 물었다 부벼 껐다 하며 손으로 안간힘만 쓰고 앉았다.
'돈으로도 굴레를 씌울 수 없는 이 젊은 녀석을 어떡하면 꼼짝 못하게 옭아 넣을까' 하고 벼르고 있는 것이다. 한곡리서 대(代)를 물려가며 왕 노릇을 해 오던 터에 역시 대를 물려가며 '소인 소인'하고 저의 집 전장을 해먹던 상놈인 박가의 자식 하나 때문에, 위신이 떨어지고 돈놀이 해먹는 세력까지 은연중에 꺾이는 생각을 하면 이가 뽀드득뽀드득 갈렸다.
그러나 자는 호랑이 코침 주기로 동혁이를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열 두 회원이 이해 관계를 떠나서 벌떼처럼 일어날 듯한 데는 겁이 더럭 났다. 더구나 한번 심술만 불끈하고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동화가 무슨 짓을 할는지 그것도 무서웠다. 동화에게는 두어 번이나 여러 사람들 앞에서 모양 사나운 꼴을 당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근자에 와서 눈이 제자리에 박히고 귀가 바로 뚫린 사람이면 한곡리에서는 박동혁이가 중심이 되어 동리 일을 하고 인망과 인심이 농우회원에게로 쏠린 줄로 인정을 하는 데는 눈에서 쌍심지가 돋으리만큼 시기심이 났다. 그래서 어떠한 수단이든지 써서,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을 헤살을 놓을 계책을 생각하느라고 밤이면 잠을 못 자는 것이다.
그러다가 장차 발기될 진흥회의 역원이 되어 달라고 간청을 해도 말을 안 들으니까, 그 회관을 몇백 원이라도 주고 매수를 할 꾀를 낸 것이었다.
동혁은 갑갑한 듯이,
“그만 가 봐야겠에요.”
뻣뻣하게 한 마디를 하고 일어선다. 기천은 놓치면 큰 일이나 날 듯이 동혁의 손을 잡고 매달리듯 하며,
“여보게 동혁이, 낫살이나 먹은 사람이라구 너무 빼돌리질 말게. 나두 동네 일이 하구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닌가?”
하고 사뭇 애원을 한다. 동혁은 잡힌 손이 냉혈동물의 몸에나 닿은 듯이 선뜩해서 슬며시 뿌리쳤다. 기천은 또다시 실눈을 뜨고 무엇을 생각해 보더니,
“그럼, 자네들 회에 나같은 사람도 회원이 될 자격이 있나?”
하고 마지막으로 타협안을 제출한다.
“만 삼십 세 이하의 남자로 회원 반수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입회를 허락한다는 농우회의 규약이 있으니까요.”
동혁의 대답은 매우 냉정하다.
“그럼, 사십이 넘은 나같은 인생은 죽어 버려야 마땅하겠네 그려?”
기천은 간교한 웃음을 짓는다.
“아, 그래서야 어떡하게요? 그렇게 유력하신 분이 돌아가시면 우리 동네의 큰 손실일걸요.”
하고 동혁은 씽긋 웃으며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