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수(3) 기상 나팔
常綠樹
[소개]
경성농업 졸업 이후 '공동경작회'를 만들어 농촌운동을 일으킨 장질 심재영과 수원에서 활동하다가 죽은 최용신 등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여 씌어진 소설이다. 작품에는 심재영이 박동혁으로 최용신이 채영신으로 바뀌어 있다. 당시 우리 사회 지식인들에게 유행하던 브나로드 운동을 모티브로,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사랑을 내용으로 한 소설이다. 청석골을 다듬어지고 가꾸어진 성취된 사회로 만들려는 지향적 욕구와 식민지 치하라는 존재적 현실 사이의 갈등과 그 비극적인 현실을 그린 농민소설이다.
[작가 소개]
심 훈(沈熏, 1901-1936) : 본명 심대섭(沈大燮), 호는 금강생, 금호어초(琴湖漁樵), 백랑(白浪), 해풍(海風) 등. 1901년 서울에서 출생, 경성제일고보 재학시 3·1 운동에 참가했으며 중국 항주 지강(之江)대학 극문학부 중퇴.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을 역임했다. 1926년 동아일보에 <탈춤>을 발표했으며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현상 공모에서 <상록수>가 당선됐다. 일제하 검열 때문에 발표하지 못하고 해방 이후 유고시집으로 나온 <그 날이 오면>이 있다. 단편 <황공의 최후> 외에 조선일보에 연재하다가 검열로 인해 중단된 미완성 <동방의 애인> <불사조> 등이 있다.
(3) 기상 나팔
비는 또다시 이틀 동안을 질금질금 오다가, 씻은 듯 부신 듯이 개이고 날이 번쩍 들었다. 보리 해갈이나 바라던 것이 장마 때처럼 원둑이 넘치도록 흐뭇하게 와서, 초목이란 초목, 생물이란 생물이 온통 죽음에서 소생한 듯 청신한 공기가 천지에 가득 찼다.
이른 아침 물 속에서 닦여 나온 듯이 선명한 태양이, 바다 저편에 봉긋이 솟아오를 때, 동리 한복판의 두 아름이나 되는 은행나무가 선 언덕 위에서 나팔 소리가 들린다.
도또 도또 미또 도또
쏠도 도미도 -
밈미 밈미 쏠미 쏠미
도미 쏠쏠 도 -
새된 기상 나팔 소리는 황금빛 햇살이 퍼지듯이 비 뒤의 티끌 하나 없는 공기를 찢으며, 온 동리의 구석구석에 퍼진다. 배추빛 노동복을 입은 청년들이 여기 저기서 납작한 초가집을 튀어나오더니 언덕 위로 치닫는다.
나팔 소리가 난 지 오 분쯤 되어 그들의 운동장인 잔디밭에는 중년, 청년, 소년 할 것 없이 한 오십여 명이나 되는 조기회원(早起會員)들이 그득히 모여 섰다.
학교에서 군사 교련을 받을 때에 곡호수였던 동혁은 힘차게 불던 나팔을 놓고 앞으로 나섰다.
“차렷!”
“우로…나라닛!”
우렁찬 호령 소리에 따라 회원들은 이 열로 벌려선다.
“하나, 둘, 셋, 넷!”
“둘, 둘, 셋, 넷!”
정말 체조(丁抹體操)가 시작되는 것이다
.
동혁이가 서울서 강습을 해 가지고 시작한 뒤에 이 체조를 금년까지 줄곧 계속해 왔다. 바지 저고리를 퉁퉁히 입은 낫살이나 먹은 사람과, 나팔 소리에 어깻바람이 나서 모여든 아이들은 다 각각 제멋대로 팔다리를 놀려서 보기에 어색하고 우습기도 하다. 그러나 호랑이라도 두드려 잡음직한 한창 기운의 청년들이 동시에 목청껏 내지르는 고함은 조금 허풍을 친다면 앞산이라도 물러 앉을 듯이 기운차다.
십 오 분 동안에 체조를 마치고 동녁 하늘을 향해서 산천의 정기를 다 마셔 들일 듯이 심호흡을 한 뒤에 청년들은 동그랗게 원(圓)을 그리고 서로 손을 잡고 둘러섰다.
이번에는 건배가 한가운데 가 우뚝 나서며,
“자, 애향가(愛鄕歌)를 부릅시다!”
하고 뽕나무 막대기를 지휘봉 대신으로 내젓기 시작한다.
이 노래는 동혁이와 건배의 합작으로 청년들의 정신을 통일시키고 활기를 돋우기 위해서 아침마다 체조가 끝나면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곡조는 너무나 애상적이라고 템포를 빠르게 해서 짧고 쾌활하게 부른다.
건배의 두 팔이 올라갔다가 허공을 힘있게 가르자 청년들은 정중한 태도로 애향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1. **만(灣)과 **산(山)이
마르고 닳도록
정들고 아름다운
우리 한곡(漢谷) 만세!
(후렴) 비바람이 험궂고
물결은 사나와도
피와 땀을 흘려가며
우리 고향 지키세!
2. 우리들은 가난하고
힘은 아직 약하나
송백(松栢)같이 청청하고
바위처럼 버티네!
첫 절과 같이 후렴까지 부른 뒤에,
“자 - 삼 절!”
하고 건배는 더한층 힘차게 팔을 내젓는다.
3. 한 줌 흙도 움켜쥐고
놓치지 말아라
이 목숨이 끊지도록
북돋우며 나가세!
날마다 한 번씩 부르는 노래언만, 이 노래를 지은 사람이나 받아서 합창을 하는 청년들은 아침마다 새로운 흥분을 느낀다.
얼굴에 혈조(血潮)를 띠우고 목에 힘줄을 세우며 부르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묵묵히 서 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은행나무에 몸을 반쯤 가리고 서서 이 노래를 듣다가 감격에 흐느끼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영신이었다.
조기회가 파하기 전에 동혁은,
“자, 아침 뒤에 우리 공동답 못자리를 만드세. 한 사람도 빠지면 안되네.”
하고 여러 회원에게 일렀다. 건배와 동화는 몇몇 회원과 함께 영신이가 홀로 서 있는 언덕 위로 올라갔다. 회원들은,
“일찍 일어나셨군요?”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춥지나 않으셨에요?”
하고 번차례로 인사를 한다. 영신은 머리만 숙여 답례를 하고 그 말에는 얼른 대답을 못한다. 아침 볕을 눈이 부시도록 온몸에 받으며, 눈물 흔적을 보이지 않으려고 바다 저편을 바라다보고 섰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금 뒤에야,
“나팔 소릴 듣구 뛰어 올라왔어요.”
하고 같이 운동을 하고나서 혈색 좋은 여러 사람의 얼굴을 둘러본다.
“미상불 그 노래 잘 지었지요? 답답한 때 한바탕 부르구 나면 속이 후련하거든요.”
건배의 넓적한 얼굴이 싱글싱글한다.
“저 사람은 구렝이 제몸 추듯 그저 제자랑을 못해서…그만 게 무슨 자랑인가?”
하고 동혁은 핀잔을 준다. 건배는,
“그럼 다른 건 몰라두, 청석골의 애향가 같은 노래를 부르는 조기회야 있겠나?”
하고 미소를 띠운 영신의 얼굴을 슬쩍 흘겨본다.
“우린 아침마다 기도회가 있어요. 찬송가두 부르구요. 촌 여자들이 제각기 작곡을 해 가며 부르는 찬미야말루 들을 만하죠.”
하고 영신은 앞을 서서, 언덕을 내려오는데 건배가 동혁의 옆구리를 꾹 찌르며 무어라 귓속말을 하더니,
“채 선생 조반은 우리 집에 가서 잡수십시다.”
하고는 앞장을 서서 휘적휘적 내려간다. 영신은 처음에는 사양을 하다가,
“고맙습니다.”
하고 동혁이와 나란히 서서, 풀밭의 아침 이슬을 밟으며 내려온다. 형의 뒤를 따르던 동화는 다른 동지들을 어깨로 떠밀며,
“여보게 우리들은 빠질 차례일세.”
하고는 저의 집편 쪽으로 불평스러이 발꿈치를 홱 돌린다. 건배는 영신을 돌아다보며,
“우리 집 여편넨요, 보통학교 하나는 명색 졸업이라구 해서, 아주 맹무니는 아니지요. 농촌 운동이 어떤 거라구 일러 주면 말귀는 어둡지 않아서 곧잘 알아 듣거든요. 허지만 새끼를 셋이나 연거푸 쏟아 놓더니 이젠 쭈그렁 바가지가 다 됐어요.”
하고 슬그머니 여편네 칭찬을 한다.
“저 사람은 마누라 자랑을 못하면 몸살이 나는 거야.”
동혁이가 또 놀리니까, 건배는,
“흥, 자네 같은 엿장수(늙은 총각이라는 뜻)가 뭘 안다구 말 참견인가?”
하고 영신을 돌아다보면서.
“저 사람 혼인 국수를 얻어 먹으려다가, 허기가 져서 죽겠에요.”
하고 나서, 동혁에게 눈 하나를 찌긋해 보인다. 동혁은,
“에이 이 사람!”
하고 호령이나 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건배를 노려본다. 건배는 납작한 토담집 앞까지 와서,
“이게 명색 우리 집인데요, 나같은 김 부귀(키 크기로 유명한 사람) 사촌쯤 되는 사람은 이마 받이 하기가 똑 알맞지요. 하지만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어도 낙이 다 게 있구, 게 있거든.”
하더니, 미리부터 허리를 구부리며 집 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두 사람은 아침 짓는 연기가 서리어 오르는 굴뚝 곁에서 서성거리며,
“저 사람도 겉으로는 저렇게 버티지만 생활이 말씀 아녀요. 교원 노릇을 하다가 쫓겨난 뒤에, 화가 난다구 만주(灣洲)로 시베리아로 돌아댕기며 바람을 잡느라고 논마지기나 좋이 하던 걸 말끔 팔어 없앴는데 냉수를 먹구 이를 쑤시면서두 궁한 소린 당최 안 하거든요.”
“산전수전 다 겪어서 속이 탁 터진 게지요. 아무튼 미안한데요.”
하는데, 젖먹이를 들쳐업은 건배의 아내가 행주치마에 손을 문지르며 나오더니,
“어서 들어오세요. 이 누추한 집엘 귀한 손님이 어떻게 들어오시나.”
하고 친정붙이나 되는 것처럼 영신을 반가이 맞아들인다. 고생살이에 찌들은 그의 얼굴에는 잣다란 주름살이 수없이 잡혔고 검불을 뒤집어쓰고 불을 때다가 나와서 머리는 부스스하게 일어섰는데, 남편만 못지 않게 너름새가 좋다.
“온 천만의 말씀을 다 하세요. 이렇게 불시에 와 뵙게 돼서 여간 미안하지 않은데요.”
하고 영신이가 막 싸리문 안으로 들어서는데 별안간 건배가 미쳐난 사람처럼 작대기를 휘두르며 뛰어 나온다.
건배가 놓여 나간 닭을 잡으려고 작대기를 들고 논틀 밭틀로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광경은 혼자 보기 아까왔다. 그는 닭을 잡아 가지고 헐레벌떡거리며 들어오더니,
“이거, 우리 아버지 제사 때 잡으려는 씨암탉인데 우리가 청석골 가면, 송아지 한 마리는 잡으셔야 합니다. 이게 미끼니까.”
하고, 생색을 내고 나서 푸덕거리는 대로 흰 털을 풍기는 닭의 모가지를 바짝 비틀어 부엌 바닥에다 던지고는 손을 탁탁 털며 방으로 들어온다.
수란을 뜨고 닭고기를 볶고 하여서 세 사람은 아침을 맛있게 먹었다. 사실 영신은 상일까지도 힘에 부치도록 했거니와, 돈 한푼이라도 적게 쓰려고 지나치게 악의악식을 하고 지냈다. 그래서 한창 나이에 영양이 대단히 부족되어 건강을 상한 것이었다.
영신은 밥상으로 달려드는 두 어린 것에게 닭의 다리를 하나씩 물려 주고는,
“오늘이 내 생일인가 봐요.”
하고 잠시 고향의 어머니 생각을 하였다.
“고만 이리 들어오세요. 어서요.”
하고 영신은 건배의 아내를 자꾸만 끌어들이려고 하건만 그는 동혁이가 스스러운지,
“부엌 시중을 할 사람이 있어야죠.”
하는 핑계로 들어오지 않는다. 영신은 말머리를 돌려,
“그런데 공동답은 어떻게 하시는 거야요?”
하고 묻는다. 그 말에 선전부장이 잠자코 있을 리 없다.
“이일 저일 할 것 없이 이 박군이 다 발설을 해서 실행해 오는 거지만, 저 너머 큰 마을 강도사네집 논 닷마지기를 억지루 떼를 써서 도지루 얻었에요. 그래 우리 농우회원 열 두 사람이 합력을 해서 작년버텀 짓는 게야요.”
“그럼 추수하는 건 어떻게 하나요?”
“도지 닷섬만 그 집에 치르구선 그 나머지는 우리가 농사를 잘 지어서 열 섬이 나든 닷섬이 나든 적립을 했다가, 다른 돈하구 보태서 우리의 회관을 꼭 지을 작정인데…”
“참 좋은 계획이로군요. 우리 청석골두 강습소 겸 공회당처럼 쓸 회관을 시급히 지어야 할 텐데 당최 예산이 서질 않아요. 지금 임시로 빌려 쓰는 예배당은 워낙 협착한데다가 주일날하구 삼일날 저녁은 쓰지 못하니까, 여간 불편하지가 않아서 이번에 좀 쉬었다가 가선 억지루라도 집 한 채를 얽어 볼 작정이에요.”
동혁은 구수한 보리밥 숭늉을 훌훌 마시고 앉았다가,
“회관을 짓는 게 그다지 시급할 것 같지 않지만 회원들이 무시로 모여서 신문 잡지나 돌려 보며 무슨 일이든지 서루 의논해 하려면, 아무래도 집합할 장소가 필요하겠어요. 야학만 해두 사철 한데서 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고는 눈을 아래로 깔고 무엇인지 생각하더니,
“하지만 공동답을 짓거나 또는 이용조합을 만들어, 씨앗이나 일용품을 싸게 사다가 쓰거나, 하다못해 이발 조합같은 것을 만들고 우리가 술 담배를 끊고 그 절약한 돈을 저축하는 것은 반드시 회관 하나를 짓기 위한 게 아니지요.”
“그럼 일테면 어느 비상시기(非常時期)에 한몫 쓰실려는 건가요?”
“아니요. 우린 언제나 비상시를 당하고 있는 게니까, 우선 조그만 일이래두 여러 사람이 한 몸 한 뜻이 돼서 직접 벗어부치구 나서서 일을 하는데, 정신적으로 통일을 얻고, 또는 육체적으로 단련을 받으려는 데 있어요. 무엇버덤두 우리한텐 단결력이 부족하니까요.
제각기 뿔뿔이 헤어져 눈앞에 뵈는 조그만 이익을 위해서 다투는 것버덤은 그렇게 팔다리를 따로따로 놀리질 말구서 너 나 할 것 없이 한 몸뚱이로 딴딴히 뭉쳐서 그 뭉친 덩어리가 큼직하게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위력이 있다는 것과 모든 일에 능률이 올라가는 것과 또는 땀을 흘리면서두 유쾌하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실지로 체험을 해서 그 이치를 자연히 터득하도록 훈련을 시키는 데에 있죠.
조기회만 해두 그렇지요. 지금 동리 늙은이 축에선 밥 지랄을 한다구 여간 반대가 아닌데, 실상 진종일 그 괴로운 일을 하고도, 먹을 것이 없어서 쩔쩔매는 우리들한테는 영양분이 필요할지언정, 정말 체조같은 운동이 필요하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아침마다 떨어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비비면서 은행나무 밑으로 치닫는 것은 일이 있으나 없으나 하루 한 번씩 깨끗한 정신으로 한 장소에 모이자는 거지요. 그 모인다는 것, 한 사람의 호령 아래에 여러 사람의 몸이 똑같이 움직이고 한맘 한뜻으로 애향가를 부르는 데서 우리가 살아 있다는 의식을 찾고, 용기를 회복하려는 거예요.”
동혁은 고개만 끄덕이며 듣는 영신의 얼굴에서 '나도 동감이야요'하는 표정을 보며 말 구절마다 힘을 들인다. 건배는 물론, 영신이도 매우 긴장한 태도로 무엇보다도 단결이 필요하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식전에 느낀 감상을 이야기하는데 동화가 와서 문밖에서 헛기침을 칵칵 하더니,
“형님 회원들이 벌써 와서 기다리구 있수.”
하고 나오기를 재촉한다.
한 백 평쯤 되는 못자리는 논둑이 찰찰 넘치도록 물이 잡혔다. 가벼운 아침 바람에 주름이 잡히는 잔물결을 헤치며 칠룡이는 쟁기를 꼬느고 소를 몰아 갈기를 시작한다. 못자리 논은 적어도 한 열흘 전에 갈아 두어야 벼끝도 썩고 땅도 골라지는데 가뭄 때문에 이제야 갈게 된 것이다.
“이 - 러, 이놈의 소.”
“어디어, 쩌쩌쩌쩌”
연골에 상일이 몸에 박힌 칠룡이는 여자 손님이 논둑에 앉아서 내려다보는 바람에 연방 혀를 차가면서 소 모는 소리를 멋지게 내뽑는다. 개량 보습이 논바닥을 무찌르고 나가는 대로 물과 함께 시꺼멓게 건 흙이 솟아올랐다가는 한 쪽으로 착착 엎친다.
“다른 일은 거의 다 흉내를 내겠는데, 아직 논 가는 건 서툴러서 저 사람들한데 흉을 잡히는 걸요. 학교서 실습이라구 할 때 어디 쟁기질이야 해 봤어야지요.”
동혁은 논둑 위에서 치맛자락을 날리는 영신의 곁으로 오며 말을 건넨다.
'선전부장'이 논을 다 갈기 전에는 아직 할 일이 별로 없는데도 넓적다리까지 걷어붙이고 공연히 흙탕물을 텀벙거리며 돌아다닌다. 흰 저고리에 검정 바지를 입었는데, 아랫도리가 껑충한 것이 물고기를 찍으러 다니는 황새와 흡사하다. 영신은 그 꼴을 보고는 웃다가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남 하는 일이 보기엔 쉬운 것 같지만, 제가 실지루 해 보니까 사뭇 다르더군요. 청석골은 부인 친목계(婦人親睦契)가 있는데요. 여편네들이 모두 나와서 벗어부치구 일을 하길래 남한테 지긴 싫어서 하루종일 목화밭을 매지 않았겠어요. 아 그랬더니만 아 이튿날은 허리가 빳빳허구 오금이 떨어지질 않아서 꼼짝두 못했어요.”
하면서 남들은 다 꿈지럭거리는데, 저 혼자 구경을 하고 섰는 것이 매우 미안쩍게 여기는 눈치다.
“그러길래 힘드는 일을 하는데두, 저 사람네와 똑같이 할 수 있도록 단련을 받아야만 하겠어요. 책상물림들이 상일에 잔뼈가 굵은 사람들처럼 그 세찬 일을 진종일 하구두, 배겨낼 만큼 되려면 첨엔 코피를 폭폭 쏟아야지요.”
“그럼요. 그게 좀 어려운 노릇이야요? 서양선 소나 말이 하는 일을 우린 사람이 하니까요. 그럴수록 소위 우리같은 지도분자버텀 나서서 직접 일을 해야만 그게 모범이 돼서 남들이 따라오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잠시두 쉴 새가 없을 수밖에요.”
하는데 눈앞에서 소머리를 돌리던 칠룡이가 종아리에 커다란 거머리를 잡아 떼더니,
“이 경칠놈 벌써부텀 붙어 댕기나?”
하고 논두덕에다 힘껏 메어 붙인다. 굶다란 지렁이가 기어올라가는 듯 힘줄이 불뚝불뚝 솟은 종아리에서는 검붉은 피가 줄줄이 흘러내린다.
영신은 씻지도 않고 내버려 두는 그 피를 바라보다가, 서울 백 선생이 말쑥한 양장에 비단 양말을 신고, 학교 실습장으로 나돌아다니던 것을 연상하였다. 파리라도 낙성을 할 듯이 매끈하던 그 종아리와 거머리에 빨려 논물을 시뻘겋게 물들이는 칠룡의 종아리 -
“그렇구 말구요. 지도자라구 무슨 감독이나 십장처럼 힘든 일은 남에게 시키구서 뻔뻔스레 놀구 먹으려는 건 아니니까요. 남녀의 구별꺼정두 없이 다 함께 덤벼들어서 일을 해야지요.”
영신은, 그제야 그전에 백씨의 집에서 들은 동혁의 말을 되풀이하듯 하였다. 그러나 오늘 이 경우에 있어서는 저 역시 피를 흘려가며 일을 하는 사람들을 편히 앉아 바라다보는 처지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불안한 것뿐 아니라, 일종의 수치를 느끼며 일어섰다 앉았다 한다.
갈아 놓은 논바닥을 다시 써레로 썰고 여러 회원들이 덤벼들어서 잡아 놓은 물을 바가지로 혹은 두레질을 해서 퍼내느라니, 거의 점심 때가 되었다. 회원들은 우스운 소리를 해가며 자못 유쾌한 듯이 일을 하는데 그네들의 이마에는 구슬같은 땀이 숭숭 내배었다.
동혁은 화가래 장치를 꼬느고, 건배는 키에 어울리지 않는 조그만 고무래를 들고, 못자리 판을 고르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줄을 띄워서 한 판씩 두 판씩 갈라 나간다. 나머지 회원들은 바소쿠리 지게에 거름을 지고 낑낑거리고 와서 펴는데 퇴비 같은 거친 거름은 누르고 재같은 몽근 거름은 손으로 내저어 골고루 편다. 그리고 나서 다시 죽가래로 쪼옥 고르게 번대질을 치는데, 건배의 아내가 점심을 이고 도랑을 건너오는 것이 보였다.
내리쪼이는 오월의 태양 아래에 숭늉을 담아 든 오지병이 눈이 부시도록 번쩍거린다.
시계도 없는데 점심때를 어떻게 그렇게 일제히 맞추는지 건배의 아낙의 뒤를 따라 회원들의 사내동생이며 누이동생들이 밥보자기를 들고, 혹은 함지박을 이고, 한 군데서 모였다 나온 것처럼 죽 열을 지어 언덕을 넘고 논둑을 건너온다.
“이를 어쩌나, 저고리가 다 젖었군요.”
영신은 건배의 아낙이 이고 나온 묵직한 함지박을 받아 내려놓는다. 보자기를 열고 보니, 아침에 먹다 남긴 것인지 미역을 넣고 끓인 닭국에는 노란 기름이 동동 떴다. 건배의 밥은 보리반섞임인데, 새로 닦은 주발에 고슬고슬하게 피어 담은 영신의 밥은 외씨같은 이밥이다.
“찬은 없지만, 들밥이 맛있겠길래 가지구 나왔어요.”
하고 밥보자기로 어깨에 흐른 국 국물을 닦는다. 영신은 건배의 아낙을 붙잡고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건만 그는 어린애를 볼 사람이 없다고 되짚어 돌아갔다.
“속이 궁해 죽겠는데, 우리 밥은 웬일이여?
동화의 거센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렸다.
“참 두 분 점심은 왜 그저 안 가져올까요?”
영신이가 돌아다보며 물으니까, 동화는,
“가져 올 사람이 있어야죠.”
한다. 그러자,
“얘, 저기 어머니가 오신다.”
하고 동혁이가 손을 들어 멀리 축 동편 쪽을 가리킨다.
동화는 마주 가서 어머니의 머리에서 함지박을 받아들고 뛰어왔다. 동혁의 어머니는,
“고만둬라, 고만둬. 내가 가지구 가마니깐…”
하고 아들 형제의 밥 함지를 손수 들고 가겠다고 고집을 하다가, 숭늉 병을 들고 작은 아들의 뒤를 따라온다. 이런 계제에 아들을 찾아온 여학생을 먼 발치로라도 보고 싶었던 것이다.
회원들은 웅덩이로 가서, 흙과 거름을 주무르던 손을 씻고, 논두렁에 가 둘러앉아서 점심을 먹는다. 그들의 점심은 쌀을 양념처럼 둔 보리밥이나 조가 반넘어 섞인 덩어리를 짠지쪽과 고추장만으로 먹는다. 그 중에서는 돌나물 김치에 마른 새우를 넣고, 지짐이처럼 끓인 동혁이 형제의 반찬이 상찬이다.
“여보게들 우리 합병을 하세.”
새가 똥을 깔기고 간 것처럼 얼굴에 온통 흙이 튄 것도 모르는 건배가 함지박을 들고 동혁에게로 간다.
“참 그러십시다요. 나 혼자 맛난 걸 먹으니까, 넘어가질 않는 걸요.”
하고 영신은 밥을 따라 동혁이 형제의 곁으로 간다.
동혁은 커다란 숟가락으로 보리밥을 모를 지어서 폭폭 떠 넣었다가,
“왜 일 안하구 편하게 지내는 사람이라야만 기름진 걸 먹는 그 쉬운 이치 속을 모르세요?”
하고 껄껄껄 웃는다. 영신은 저를 빗대어 놓고 하는 말이 아닌 줄 알면서도 얼굴을 살짝 붉혔다.
닭국 한 그릇을 들고 서로 권하느라고 이리 밀어 놓고 저리 밀어 놓고 하니까, 아까부터 넘실거리고 있던 동화가,
“그럼 이리 내슈. 먹는 죄는 없다우.”
하고 뚝배기를 집어 들고 돌아앉아 훌훌 마시더니 건더기까지 두메 한 쪽으로 건져 먹는다. 형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뭏든 비위는 좋다.”
하고 아우의 턱밑의 어기적거리는 근육을 곁눈으로 본다. 영신은,
“퍽 쾌활하시군요.”
하고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건배는 동화를 물끄러미 보다가,
“참말 우리들의 먹는 거란 말씀이 아니지요. 그래두 오늘은 일을 한다구 반찬이 좀 나은 셈인데요. 이제 보릿고개를 넘길려면 굴뚝에서 연기가 못나는 집이 건성 드뭇해요. 높은 고개는 올라갈수록 숨이 가쁜 것처럼 이 앞으로 몇 달 동안이 한창 어려운 고비니까요.”
하고 여러 사람의 밥 먹는 것을 돌아보면서,
“우리 동리 사람들이 지내는 걸 보면 기막히지요. 몇십 리 밖에 나가서 품팔이를 하면 삯메기루 한대두 고작해서 삼십 오 전이나 사십 전을 받는데 어둑어둑할 때꺼정 일을 하려면 허기가 지니까, 막걸리라두 한 사발 마셔야 견디지 않겠어요? 그러니 나머지 돈을 가지구는 수다 식구가 입에 풀칠두 하기가 어렵거든요. 나무장사들두 하는데 남의 멧갓의 솔가지 한 개비래두 꺾다가 산림 간수한테 들키는 날이면, 불려가서 경치구 벌금을 무니까, 그나마 근년엔 못해 먹어요.”
하는데, 동혁이가,
“여보게 궁상은 고만 떨게. 온, 밥이 체하겠네 그려.”
하고 숟가락을 놓더니,
“하지만, 우리 농민들의 육체는 비타민 A가 어떠니 B가 어떠니 하는 현대의 영양학설(營養學說)은 당최 적용되지 않는데, 그래두 곧잘 살거든요.”
하고 입 속으로 몰래 양치질을 하는 영신을 쳐다본다. 영신은 눈을 깜박이더니,
“그렇구 말구요, 칡뿌리를 캐거나 나무껍질을 벗겨 먹구두 사는 수가 용하지요.”
한다. 건배는 그 말을 받아,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그게 다른 게 아니라, 기적이거든.”
하고 하늘을 우러러,
“헛허허”
하고 허청 웃음을 웃는다.
점심 뒤에 회원들은 잡담을 하며 잠시 쉬었다.
“이런 때 담배나 한 대 피웠으면 좋겠지만 이 박군이 단연회(斷煙會)를 만든 뒤엔 식후의 제일미두 못 먹게 됐어요. 나버텀 생각은 간절한데, 낫살이나 먹은 게 도둑담배야 피울 수가 있어야지요.”
“선전부장의 설명이 또 나온다.”
“술두 다들 끊으셨다죠?”
영신의 묻는 말에 동화는 슬금슬금 꽁무니를 뺀다.
“술두 일금이에요. 내 의견 같애선 막걸리 같은 곡기 있는 술은 요기두 되구, 취하지 않을 만큼 흥분두 돼서 일도 훨씬 붓건만 젊은 기운이라 입에만 대면 어디 적당하게들 먹어야지요. 신작로가에 술집이 둘이나 되구, 못된 계집들이 들어와서 젊은 사람의 풍기두 나뻐지길래 회원들은 당최 입에두 대지 않기루 했어요. 하지만, 혼인이나 환갑 같은 때는 더러 밀주들을 해 먹는 모양입디다.”
하는데, 동혁이가 뒤를 대어,
“내 아우 하나가 말을 안 듣구 술만 먹으면 심술을 부려서, 여러 회원들한테 아주 면목이 없어요.”
하고는, 제 발이 저려서 피해 가는 아우의 등뒤에다 대고 눈살을 찌푸린다. 동혁은 말을 이어,
“회원들에게 조사를 시켜서 일년의 지출액을 뽑아보니까, 백 호두 못되는 이 동리에 술값이 거진 구백 원이나 되구요, 담배 값이 오 백 원이나 되니, 참말 엄청나지 않아요? 그래서 동회(洞會)를 할 때 자세한 숫자까지 들어서 이러다간 굶어 죽는다구 한바탕 격동을 시켰더니 늙은이만 빼놓군 거진 다 술을 끊겠다구 손을 들더군요.
하더니 웬걸 작심삼일은커녕, 그날 저녁두 못 참구 주막으로 간 사람들이 있었어요. 담배두 끊는다구 곰방대를 꺾어버린 게 수십 개나 되더니만, 차츰차츰 또들 태우길 시작하는데, 담뱃대가 없으니까 궐련을 사먹으니 안팎으로 손해지요. 우리 회원들만은 꼭 맹세를 지켜왔지만…”
“그게 참말 큰 문젯거리야요. 하지만 여자들하구 일을 하면 술 담배를 모르니까, 그거 한 가진 좋더군요.”
하는데,
“자, 그만들 일어나 봅시다.”
하고 건배가 벌떡 일어선다.
“오늘 해 전으로 씨나락꺼정 다 뿌리나요?”
영신이도 일이나 하려고 들어가는 사람처럼 일어섰다. 건배는,
“아아뇨, 이제 죽가래루 판판하게스리 번대를 친 뒤에 새내끼를 다시 띄워 놓구서 하루낮을 뒀다가, 수확이 많다는 은방주(銀防主)든지 요새 새루 장려하는 팔단(八段)같은 걸 뿌리지요. 그러구 나설랑은 한 치쯤 자란 뒤에 물을 빼구서 못자리를 고른 뒤에 또 일주일쯤 뒀다가 다시 물을 넣지 않겠에요. 그래야 뿌리가 붙거든요.
그 뒤엔 가끔 물꼬를 봐서 혀 빼문 걸 뽑아 버리구선, 거진 치 닷분쯤 자란 뒤엔 한번 김을 매주는데, 여기선 그걸 도사리를 잡는다구 하지요? 그런 뒤에 유산(硫酸) 암모니아 같은 속효비료(速效肥料)를 주면 무럭무럭 자랄 게 아니에요? 논바닥이 시꺼멓게 되는 걸 봐서 그때야 모를 내는데, 그 후에두 또 몇 차례 김을 매주면 한가위엔 싯누렇게 익어서 이삭이 축축 늘어진단 말이지요. 아 그러면 낫을 시퍼렇게 갈어 가지구 덤벼들어 척척 후려서 묶어 세우군…”
하고, 신이야 넋이야 배우처럼 형용까지 해 가며 주워 섬기는데, 동혁은 듣다 못해서,
“여보게 웬놈의 수다를 그렇게 늘어놓나? 저 사람은 입두 아프지 않은 게여.”
하고 핀잔을 주듯 하고는 논으로 들어선다. 건배는 들은 체 만 체 하고,
“아 그러구설랑 개상을 놓구 바심을 한 뒤엔 방아를 찧어서 외씨 같은 하얀 쌀밥을 지어 놓구 통배추 김치에…”
하고 마른 침을 꿀떡 삼키는데, 영신은 항복이나 하는 듯이 손을 들고,
“고만요 고만, 그만하면 다 알겠어요. 어쩌면 그렇게 입담이 좋으세요?”
하고 호호호 웃으며 건배의 입을 막듯하였다. 그래도 건배는,
“두구 보세요. 양석두 바라 보지 못하던 논에서, 한 마지기에 석 섬 추수는 무난히 허구 말 테니, 그만이나 해야 우리들이 땀을 흘린 티가 나거든요.”
가만히 그대로 내버려두면 얼마든지 더 지껄일 형세다.
“더군다나 농사는 이력이 있어야겠어요. 우린 아주 손방이지만…”
영신이가 대접상으로 한 마디를 해 주니까 건배는,
"아무렴 그렇구 말구요. 이력이 제일이지요.”
하면서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이더니, 황새다리를 성큼성큼 떼어놓으며 논으로 들어간다.
어느덧 곁두리 때가 되었다. 열 두 회원들은 손이 맞아 거쩐거쩐 일을 해서, 오늘 일은 거의 끝이 나게 되었는데, 먼저 나와서 발을 닦던 동화가 큰 마을 편을 바라보더니,
“에에키, 건살포 나오시는군.”
하고 입을 삐쭉해 보인다. 여러 사람들의 눈은 그리로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