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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2)_일적천금(一滴千金)

常綠樹


[소개]
경성농업 졸업 이후 '공동경작회'를 만들어 농촌운동을 일으킨 장질 심재영과 수원에서 활동하다가 죽은 최용신 등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여 씌어진 소설이다. 작품에는 심재영이 박동혁으로 최용신이 채영신으로 바뀌어 있다. 당시 우리 사회 지식인들에게 유행하던 브나로드 운동을 모티브로,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사랑을 내용으로 한 소설이다. 청석골을 다듬어지고 가꾸어진 성취된 사회로 만들려는 지향적 욕구와 식민지 치하라는 존재적 현실 사이의 갈등과 그 비극적인 현실을 그린 농민소설이다.


[작가 소개]
심 훈(沈熏, 1901-1936) : 본명 심대섭(沈大燮), 호는 금강생, 금호어초(琴湖漁樵), 백랑(白浪), 해풍(海風) 등. 1901년 서울에서 출생, 경성제일고보 재학시 3·1 운동에 참가했으며 중국 항주 지강(之江)대학 극문학부 중퇴.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을 역임했다. 1926년 동아일보에 <탈춤>을 발표했으며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현상 공모에서 <상록수>가 당선됐다. 일제하 검열 때문에 발표하지 못하고 해방 이후 유고시집으로 나온 <그 날이 오면>이 있다. 단편 <황공의 최후> 외에 조선일보에 연재하다가 검열로 인해 중단된 미완성 <동방의 애인> <불사조> 등이 있다.

 

 

(1) 쌍두취행진곡(雙頭鷲行進曲)

 

(2) 일적천금(一滴千金)

 

(3) 기상 나팔

 

(4) 가슴 속의 비밀

 

(5) 그리운 명절(名節)

 

(6) 이별(離別)

 

 

 

 


 


날이 가물어서 동리마다 소동이 대단하다.



정월 대보름날은 하루종일 진눈깨비가 휘뿌려서 송아지 한 마리를 태우는 윷놀이판에 헤살을 놀았었고, 모처럼 풍물을 차리고 나선 두레꾼들을 찬비맞은 족제비 꼴을 만들더니, 그 뒤로 석 달째 접어든 오늘까지 비 한 방울 구경을 못하였다.

“허어 이 날, 사람을 잡으려구 이렇게 가무는 게여.”

바싹 마른 흙이 먼지처럼 피어올라, 풀석풀석 나는 보리밭에 북을 주던 박첨지는 기신 없이 괭이질을 하던 손을 쉬고 허리를 펴며 혼잣말로 탄식을 한다.

그는 검버섯이 돋은 이마에 주름살을 잡으며 머리 위를 우러러본다. 그러나 가을날처럼 새파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찾아낼 수가 없다. 바닷가의 메마른 농촌에 바람만 진종일 씽씽 불어서 콧구멍이 막히고 목의 침이 말라드는 것 같다.

“이런 제에기, 보리싹이 연골에 말라 배틀어지니 올 여름엔 냉수만 마시구 산담메.”

늙은이는 다시 한번 말과 한숨을 뒤섞어 내뿜고는 이제야 겨우 강아지풀 잎사귀 만하게 꼬리를 흔드는 보리 싹을 짚신발로 걷어찬다. 그러다가, 화풀이로 쌈지를 긁어 희연 부스러기 한대를 피워물고 뻐끔뻐끔 빨다가 괭이자루에 탁탁 털어버린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섰다가, 그래도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멍에같이 굽은 허리를 주먹으로 두어 번 두드린 뒤에 손바닥에다 침을 튀튀 뱉더니 다시 괭이를 잡는다.

“참 정말 큰일났구료. 참죽에 순이 나는걸 보니깐 못자리 할 때두 지났는데 비 한 방울이나 구경을 해야 하지 않소.”

곁두리 때가 훨씬 지나도록 바닷가에서 갯줄 나물을 캐어 가지고 들어온 마누라가 영감의 등 뒤에서 반 남아 기운 광주리를 던지고, 기운 없이 밭 두덕에 가 주저앉으며 하는 말이다. 앞니가 몽땅 함몰을 해서, 동리 계집애들은 그를 합죽 할머니라고 놀린다.

“그러게 말이요. 이대루 가물다간 기미년처럼 기우제를 지낸다구 떠들겠는 걸.”

박 첨지는 마누라를 흘깃 돌아다보고 중얼중얼 군소리하듯 한다.

“너구리 굴 보구 피물돈버텀 내쓴다구 동혁이 월급 탈 때만 바라구서 조합 돈꺼정 써 놨으니, 참 정말 입맛이 소태 갔구려.”

영감의 말을 한숨으로 회답하던 마누라는,


“그래두 동혁이가 어떡하든지 우리 양주 배야 곯리겠수?”

“명색이라두 학교 졸업이나 했으면 모를까, 지금 와서 전들 무슨 뾰죽한 수가 있나베. 양식이라구 이젠 묵은 보리 여나뭇 말이 달랑달랑하는데…”

“아뭏든 그 자식이 우리 집 기둥인데 조석 때마다 동리 일만 한다구 몰아세질랑 마슈. 그렇게 성화를 한다구 말을 들을 듯싶우? 제가 하구 싶어서 하는 노릇을. 목이 말러두 주막에 가서 탁배기 한 잔 입에 대지 않는 자식을 가지구서…”

“글쎄, 오늘두 여태 안 들어오는 걸 좀 보우. 아비가 올버텀은 일이 힘에 부쳐서 당최 꿈지럭거리질 못하는 줄 뻔히 알면서 나댕기기만 하니 말이지.”

“그래두 제딴엔 동네에 유조한 일을 한답시구, 밥두 제때에 못 먹구 돌아댕기는 게 난 가엾어 못보겠습디다.”

“아무튼 그놈의 농우횐가 강습횐가 하는 것버텀 없애버려야 해. 동혁이 초사에 동리 젊은 녀석들은 한 놈이나 집에 붙어 있어야지. 밤낮 몰려 댕기며 역적모의하듯 쑥덕공론만 하니, 밥이 생기나 옷이 생기나.”

박 첨지는 혀를 끌끌 차며 젊은 사람들을 꾸짖고 마누라는 아들의 두둔을 하느라고 어느덧 땅거미 지는 줄을 모른다.

맷방석만한 시뻘건 해는 맞은편 잿배기를 타고 넘는다.

“저 해를 좀 보슈. 가물지 않겠나.”

한 쪽을 찌긋한 마누라의 눈에는 흉년이 들 조짐이 보이는 듯하다. 그는 유심히 서녘 하늘을 바라다보다가,

“아, 저어기 동혁이가 오는구료!”


하고 아들의 그림자를 몇 해 만에야 발견한 듯 가벼이 부르짖으며 무릎을 짚고 일어선다.

박 첨지 양주의 눈이 부시도록 넘어가는 석양을 등뒤에 받으면서 잿배기를 넘어오는 동혁의 윤곽은 점점 뚜렷이 나타났다. 회색 저고리 바지에 검정 조끼를 입고 삽을 둘러멘 동혁이는 역광선에 원체 건강한 체격이 더한층 걸대가 커 보인다.

아들이 가까이 오자,

“점심두 안 들어와 먹구 여태 어디서 뭣들을 했니?”

하고 묻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아까 꾸짖던 때와는 딴판으로 부드럽다.

“공동답(共同畓) 못자릴 하려구 물을 푸는데 쌈들이 나서 입때꺼정 뜯어 말리구 왔에요.”

“넌 집의 못자린 할 생각두 않구, 공동답에만 매달리면 어떡하잔 말이냐?”


아버지의 나무라는 말에 동혁은,

“차차 하지요. 물 푸는 게 서투르니까, 어떻게 힘이 드는지…두렁 밑을 파는데두 논바닥이 바싹 말라서 세상 가래를 받아야지요.”

하고 집으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발을 씻고 제 방으로 들어가더니, 기직자리 위에 가 턱 눕는다. 누웠다느니보다도 진종일 지친 팔다리를 쭈욱 뻗고 지쳐 늘어진 것이다. 산울 밖에서 걸귀가 꿀꿀 거리는 소리가 들리건만, 꼼짝도 할 수가 없어서 누워 있노라니,

“저녁 먹어라.”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함께 된장찌개 냄새가 허기가 지도록 시장하던 동혁의 코에 맡혔다. 장물을 찔끔 친 갯줄 나물과 짠지쪽이 반찬이다.

 


 


“동화는 그저 안 들어왔에요? 들어오건 같이 먹지요.”

동혁은 벌떡 일어나며 아우를 찾는다.

“누가 아니. 수동이네 주막에서 대낮버텀 술을 처먹는다더니 여태 게 있는 게지. 뭐구뭐구 그 애가 맘을 못 잡아서 큰일났다. 글쎄, 요샌 매일 장취로구나. 형두 형세가 부쳐서 하다만 공부를, 뭘 가지구 하겠다구 하고한날 성화를 바치니 온 살이 내릴 노릇이지. 큰말 강도사네 작은 아들이 대학 가 졸업하구 와설라문 꺼떡대는 걸 보군, 버쩍 더 거염을 내니 어쩌면 좋으냐. 뱁새가 황새를 따르려다간 다리가 찢어지는 줄 모르구, 덮어놓구 날뛰는구나.”

“아닌게 아니라, 큰 걱정이에요. 암만 사정하듯 타일러두, 점점 외 먹기만 하는걸. 성미가 여간내기라야 손아귀에 넣어 보지요.”

하는데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고 동화가,

“아아니, 이 집에선 바 밥들을 호 혼자 먹나?”

하고 혀끝을 굴리지 못하고, 비틀걸음을 치면서 들어온다. 눈동자까지 게게 풀린 것이 막걸리 사발이나 좋이 들이킨 모양이다. 평소에는 성이 난 사람처럼 뚜웅하니 남하고 수작하기도 싫어하면서, 술만 들어가면 불평이 쏟아진다. 근자에는 안하무인으로 술 주정까지 함부로 해서, 아버지조차,

“저 자식은 하우불이야.”

하고 그만 치지도외를 한다.

동화는 썩은 연시 냄새 같은 술 냄새를 후후 하고 내뿜으며 방으로 뛰어들더니,

“아 그래, 형님은 공부는 혼자 하고, 밥꺼정 혼자 먹는거유?”

하고 지게미가 낀 눈을 부라리며 생트집을 잡는다. 싹 깍은 머리가 자라서 불밤송이처럼 일어났는데, 형만 못지 않게 건강한 몸집은 올해 스물 두 살이라면 누구나 곧이를 안 들을 만하게 우람스럽다.

“어서 밥이나 먹어라. 얘긴 술이 깨건 하구…”

아우의 성미를 건드렸다가는 마구 뚫린 창구멍으로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몰라서 형은 점잖이 타이른다.

“아아니, 내가 술이 취 취한 줄 아우? 술도 안 먹는 형님은 도무지 대체 하는 게 뭐유? 밤낮 그 잘나빠진 공동답이나 주물르구 콧물 흐르는 아이들을 외놓구서 언문 뒷다리나 가르치면 제일의 강산이란 말이요? 나 하나 공부도 못하게 말끔 팔아 없애구서 큰 소리가 무슨 큰 소리유? 어디 할 말이 있건 해보.”


하면서 사뭇 형의 턱 밑에다 삿대질을 하더니 이빨을 부드득부드득 갈다가,

“아이구…”

하고 주먹으로 앙가슴을 친다. 그러다가는,

“제길할 두 번 못 올 청춘을 이 시골 구석에서 썩혀야 옳단 말이냐?”

하고 벽이 무너져라고 걷어차며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더니 그만 넉장거리로 자빠져 버린다.


동혁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앉아서 아우의 폭백을 받았다. 금새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기 시작하는 동화의 머리를 들고 목침을 베어 주고는 뱃속이 몹시 괴로운 듯 눈살을 잔뜩 찌푸린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려니까, 속도 상하고 식곤증이 나서 팔베개를 하고 그 곁에 누웠는데,

“편지 받우… 박동혁이 있소?”


하는 소리가 싸리문 밖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동혁은 벌떡 일어나 고무신짝을 끌며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편지는 영신에게서 온 것이었다.

동혁이가 학교를 그만두고 내려올 때에 정거장에서 굳은 악수로 작별을 한 뒤에 올봄까지 오고간 편지가 조그만 손가방으로 하나는 가득 찼으리라.

그후 한 사람은 고향인 한곡리로, 한 사람은 기독교 청년회 연합회 농촌 사업부의 특파원격으로, 경기 땅이지만 모든 문화시설과는 완전히 격리된 청석골이란 두메 구석으로 내려가서 일터를 잡은 뒤에는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한가히 찾아다닐 시간과 여비까지도 없었거니와 피차에 사업의 기초가 어느 정도까지 잡히기 전에는 만나지 말자는 언약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 삼 전 짜리 우표가 두 장 혹은 석 장씩 붙은 편지가 일 주일에 한 번, 열흘에 한 번씩은 걸르지 않고 내왕을 하였다.

그 편지의 내용이란, 젊은 남녀 간에 흔히 있는 달콤한 사랑을 속삭인 것이 아니라, 순전히 사업 보고요, 의견 교환이요, 또는 실제 운동의 고심담이었다. 서로 눈을 감고 앉았어도 한곡리와 청석골의 형편과 무슨 일을 어떻게 해 나가는 것이며, 심지어 틈틈이 무슨 책을 읽고 어떠한 느낌을 받았다는 등, 머리 속까지 환하게 들여다보이도록 적어 보냈고 적혀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피차에 사사로운 생활이나 신변에 관한 일은 단 한 줄도 비치지 않았다. 그러던 터에 오늘은 편지를 뜯어보고 동혁은 적지 아니 놀랐다.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건만 그 동안 과로한 탓인지 몸이 매우 쇠약해졌어요. 또 참다가는 큰 병이 날 것만 같은데요. 단 며칠동안이나마 쉬고는 싶고요. 잠시 쉬는 동안이라도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동혁씨가 계신 한곡리로 가서 얼마 동안 바닷바람이나 쏘이다가 올까 합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고 당신이 착수하신 사업을 직접 보고 '결단코 시찰은 아니지만…' 많이 배워 가지고 오려고 합니다.

꼭 친히 뵙고 의논할 일도 있고요, 겸사겸사 가고 싶은데 과히 방해나 되지 않으실는지요. 가면은 이 편지를 받으시는 다음 다음날(화요일) 아침 그곳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동혁은 흐릿한 등잔 밑에서 눈을 꿈벅꿈벅하며 몇 번이나 편지를 내려읽고 치읽고 하였다.

'그다지 튼튼하던 사람이 얼마나 고생을 했길래 큰 병이 날 것 같다구 했을까? 대관절 꼭 친히 만나서 의논하겠다는 일이란 무엇일까? 오는 거야 반갑지만, 도대체 무엇을 보여 주나? 무슨 일을 했다고 그 동안의 보고를 한단 말인가?'

이러한 의문과 걱정이 쥐가 쥐꼬리를 물듯이 줄달아 일어난다. 더구나, '정양을 하러 오는 사람이, 당장 거처할 데가 없으니 어떻거나?' 하는 것이 당면한 큰 문제다. 동혁은 가슴이 설레면서도 갑갑증이 나는데, 동화의 코고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마당으로 나왔다.

감나무 가지에 낫(鎌) 같은 초생달이 걸린 것을 쳐다보면서 이런 생각 저런 궁리를 하다가 '참 벌써 회원이 다들 모였겠네' 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 전번 일요일에 모였을 때의 회록과 오늘 저녁에 여러 사람에게 들려 줄 이야기를 초잡아 놓은 공책을 꺼내 가지고 나와서 작은 마을 건배 네 집 편으로 걸었다.

아직 여럿이 모일 장소가 없어서 김건배(金建培)라는 동지의 집 머슴방을 빌려서 야학당 겸 농우회(農友會)의 회관으로 쓰는 중이다.

이번 일요일에는 입에 침들이 말라서 가물어서 큰일이 났다는 걱정들만 하다가, 진종일 고역에 너무 지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회원이 태반이나 되었다. 그래서 동혁은,

“내일두 비가 오건 안 오건, 우리 샘물을 길어다 퍼붓더래두 공동답에만은 못자리를 내두룩 하세.”

하고 일찌감치 헤어지게 되었다.

 




집께까지 다 와서 축동 앞 다박솔 밑에 가 주먹으로 턱을 고이고 앉아서 한참 동안이나 으스름한 달빛을 우러러보다가 '달무리를 하니 이제는 비가 좀 오려나?' 하고 일어섰다.

제 그림자를 길다랗게 끌며 집으로 돌아오자니, 간담회 석상에서 처음 만났던 때와 악박골서 둘이 함께 밝히던 정열과 감격에 끓어 넘치던 그날 밤의 모든 정경이 바로 어제런 듯 머리 속에 떠오른다. 그는 영신이가 보고 싶었다. 불현듯이 보고 싶었다. 이틀 동안을 기다리기가 한 이태나 되는 듯이…

“이게 무슨 소리야!”

밤중에 동혁은 별안간 이불을 걷어차며 일어났다.

몸이 실실이 풀리는 듯 피곤해서, 턱 쓰러지기만 하면 금방 잠이 들 것 같건만 영신을 만날 생각과 시골은 도회지와 달라, 남의 일에도 말썽이 많은데 미혼 처녀가 늙은 총각을 찾아오면, 근처 청년의 지도자로 신망을 한 몸에 모으고, 모든 일에 몸소 모범이 되어야 할 처지에 있는 저로서, 일동 일정에 주목을 받을 터이니, 그것도 적지 아니 거북한 노릇이다.

생각이 옥신각신하다가 잠이 어렴폿하게 들었건만 강제로 마취를 당한 듯도 하고 꺼져가는 등잔불처럼 의식이 꿈벅꿈벅하는 판인데, 뜻밖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저 저녁도 안 먹고 자는 동화의 거치른 숨소리에 섞여, 누에가 뽕잎을 써는 것처럼 부시럭부시럭 하는 소리가 간간이 머리맡에서 들렸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릴까?'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들창 앞으로 다가앉으며 창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이번에는,

“뚜, 뚜, 후두둑 후두둑”

개초를 그저 못해서 뒤꼍 헛간에 묶어서 세워 놓은 짚단과 수수깡 사이에서, 잊어버릴 만큼이나 오랫동안 듣지 못하던 소리가 점점 크게 점점 똑똑하게 잦은 가락으로 들린다.

바람이 일어 청솔가지로 둘러싼 산울을 우수수우수수 흔들다가 덧문 창호지에 굵은 모래를 끼얹는 듯이 휘뿌리는 것은 틀림없는 빗소리가 아닌가.

“오오, 빗소리!”

동혁은 덧문을 밀쳤다. 습기를 축축히 머금은 밤바람이 방안으로 휘몰아들자, 자던 얼굴에 방울방울 부딪치는 찬 빗방울의 감촉! 동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얘 동화야, 비가 온다. 비가 와!”

형은 반가운 김에 아우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동화는,

“응?”

하고 깜짝 놀라 일어나서, 두 주먹으로 눈등을 비비더니,

“아, 정말 비가 오우?”

하고 바깥을 내다본다. 시꺼먼 구름이 잔뜩 끼어, 별 하나 찾을 수 없는 하늘을 쳐다보다가,

“제엔장, 이제야 온담.”

하고 볼멘 소리를 하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나 아까 주정했수?”

하고 형의 얼굴을 바로 쳐다 보지를 못한다.

형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서 더 자거라. 이담버텀 챙기면 고만이지… 다 형의 잘못이다.”

하고 문을 닫는다. 그러다가 아우가 엎드리며 머리맡을 더듬으니까, 얼핏 자리끼 사발을 집어서 입에 대어 준다. 동화는 한창 조갈이 심하게 나던 판이라, 목을 늘이고 숭늉 한 사발을 벌떡벌떡 들이키고는 다시 쓰러진다.

비가 제법 장마 때처럼 주룩주룩 쏟아지기 시작한다. 동혁은 일종의 신비감을 느끼어 노래라도 한마디 부르고 싶었다. 십 년만에 만나는 친구의 음성인들 이 빗소리보다 더 반가우랴.

흉년이 들겠다고 벌써부터 쌀금 보릿금이 오르고, 초목의 새싹이 지지리 타들어 가도록 온갖 생물이 목말라 하던 대지 위에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와 그 비를 휘몰고 들어오는 선들바람의 교향악 그것은 오직 하늘의 처분만 바라고 사는 농민의 귀에라야 각별히 반갑게 들리는 소리다.


안방에서는 늙은 양주도 잠이 깨었는지 이야기하는 소리가 두런두런한다.

동혁은 창 밖으로 팔을 내밀고 천금을 주고도 그 한 방울 살 수 없는 생명수를 손바닥에 받아 본다. 자리옷을 활활 벗어버리고 뛰어 나가서, 그 비에 온 몸을 고루 적시다가 땅 위에 디굴디굴 구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동혁은 아우가 감기가 들까 보아 다시 문을 닫았다. 바람은 파도 소리처럼 쏴아 쏴아하고 머리맡에서 뒤설렌다. 논배미마다 단물이 흥건히 고이고, 보리밭 원두밭이 시꺼매지도록 빗물이 흠씬 배어들어 갈 것을 상상하면서도 '이 우중에 영신이가 어떻게 오나. 내일까지만 실컷 오고 말았으면…' 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이튿날도 비는 끊임없이 왔다. 동혁은 도롱이를 쓰고 살포를 짚고 나가서, 논의 물꼬를 보고 들어왔다. 점심 뒤에는 신문지를 말끔 몰아가지고 집에서 한 삼마장이나 되는 바닷가로 나왔다.

해변에서 새우를 잡아 말리고, 준치나 숭어를 잡는 철이 되면, 막살이를 나오는 술장수에게 빌려주는 오막살이 방 한 간을 빌렸다.

아들은 젓잡이를 하러 나가고, 늙은 마누라와 며느리만 집을 지키고 있어서 대낮에도 노 젖는 소리와 간간이 뱃노래 소리밖에는 들리는 것이 없어 여간 조용하지가 않다.

동혁은 주인 마누라에게 풀을 쑤어 달래서 신문지로 흙방을 바르고 기직을 구해다가 방바닥에 깔고 하느라고 비에 젖은 하루해를 보냈다.

“어떤 손님이 오시길래 이렇게 손수 방치장을 하우? 그만하면 신방두 꾸미겠네.”

하고 주인 마누라는 안질이 나서 진무른 눈을 꿈적이며 두 번 세 번 묻는다. 동혁은,

“오는 사람을 보면 알걸, 뭐 그렇게 궁금하우.”

하고는 손님이 묵고 있는 동안, 밥까지 지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집에는 거처할 방도 없거니와, 거의 하루 한번은 입버릇처럼 장가를 들라고 성화를 하는 부모가 어떻게 알는지도 몰라서 일테면 사처를 잡은 것이다.

저녁 뒤에 동혁은, 가장 무관하게 지내고도 영신을 오래 소개해온 건배와 정득이, 갑산이, 칠룡이 같은 농우회원을 찾아다니며 채영신이가 내일 아침에 온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동혁은 단독으로 영신을 맞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건배는,

“흥, 이제야 자네가 몽달귀신을 면하나 보이, 앞으로 다섯 해 안에는 결혼을 안 한다구 장담을 하더니, 하는 수 있나, 지남철 기운에 끌려오는 걸.”

하고 연방 동혁을 놀려댄다. 동혁은 변색을 하며,

“여보게 그게 무슨 가당치 않은 소린가. 아예 그런 말은 입 밖에두 내지 말게. 동지와 애인을 구별 못하는 낸 줄 아나?”

하고 건배의 험구를 틀어막았다.

이튿날은 이슬 같은 보슬비로 변하였다. 앞 논과 뒷개울에는 개구리가 제철을 만난 듯이 운다. 밤새도록 울고도 그칠 줄을 몰라서, 대합조개 껍질을 마구 비비는 듯이 와글와글하는 소리가 시끄러울 지경이다.

이른 아침 동혁은 찢어진 지우산을 숙여 쓰고 큰 덕미로 갔다. 쇠대갈산 등성이 위에 올라 머리를 드니, 구름과 안개가 싸인 바다가 눈앞에 훤하게 터진다. 무엇에 짓눌렸던 가슴이 두 쪽에 쩍 뻐개지는 것 같은 통쾌감과 함께, 동혁은 앞으로 안기는 시원한 바람을 폐량껏 들이 마셨다가 후우하고 토해 내고는 휘파람을 불며 불며 나루께로 내려갔다.

 


 


큰덕미라는 곳은, 하루 한 번 똑딱이(석유 발동선)가 와 닿는 그 조그만 포구로, 주막 몇 집과 미류나무만 엉성하게 선 나루터다. 고무신 운두가 넘도록 발이 진흙에 폭폭 빠져, 동혁은 신바닥을 모래에다 비비며, 비에 젖은 바윗돌 위에 털퍼덕 주저앉아서 물참이 되기만 기다리는데,

“여보게 동혁이……”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렸다.

동혁은 소리나는 편을 돌아다보며,

“건밴가? 어서 오게…”

하고 손짓을 하였다. 가마솥 뚜껑 만한 농립을 쓰고, 육척 장신에 밀짚 도롱이를 껑충하게 두르고서 휘적휘적 오는 걸음걸이만 보아도 틈림 없는 건배였다. 그 뒤에는 정득이, 갑산이, 칠룡이, 석돌이 또 동화까지 누구누구 할 것 없이 농우회의 회원들이 유지로 만든 우장을 하고 그것도 없는 사람은 포대 쪽을 두르고 칠팔 명이나 주렁주렁 따라온다. 그네들이 가까이 오자,

“자네들 미안하이그려.”

하고 무심코 동혁은 한 말이언만,

“자네가 우리더러 미안하달 게 뭐 있나? 그야말루 진날 개사위 꼴을 하구 나왔어두 자네 장가드는데 배행 나온 셈만 치면 좋지 않은가?”

건배는 동혁의 말을 얼른 채뜨려 가지고, 이번에는 빗대어 놓고 놀려댄다.

“앗다 이 사람 또 그런 소릴…”

하고 동혁은 눈을 슬쩍 흘기면서도 어쩐지 건배의 놀리는 말이 그다지 듣기 싫지는 않았다.

바람결에 통통통통하는 소리가, 바위에 철썩철썩 부딪치는 파도소리에 섞여 차츰차츰 가까이 들려 왔다.

조금 있자,

“뛰윗!”

새되인 기적 소리는 동혁의 가슴속까지 찌르르 하도록 울렸다.

이윽고 파아란 페인트칠을 한 똑딱이가, 선체를 들까불며 들어온다. 갑판 위에서 손수건을 흔드는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가 보인다. 동혁은 손을 높직이 들며 허공을 저었다.

조그만 거루는 선객과 짐을 받아 싣고 선창으로 들어와 닿았다. 동혁은 반가운 웃음을 얼굴 가득히 담고, 영신의 손을 잡아 뭍으로 끌어올렸다.

“이번 비, 참 잘 왔죠?”

한 마디가 첫번에 하는 영신의 인사였다.

“잘 오구 말구요. 그래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을 하셨소?”

 

하며 동혁은 영신의 얼굴빛을 살핀다. 상상하던 것보다는 나아도 어글어글하던 눈이 전보다 더 커다래 보이는 것은, 그 복성스럽던 얼굴의 살이 그만큼 빠진 탓일듯, 그러나 반가운 김에 상기가 되어 그런지 혈색은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을 보고 우선 안심을 하였다.

“그거 내 들어다 드릴까요?”

“아아니, 괜찮어요.”

“글쎄 이리 주세요.”

“이 속엔 비밀 주머니가 들어서 안돼요.”

바스켓 하나를 가지고, 네가 들리 내가 들리 승강이다.

'고집이 여전하군'하면서 동혁은, 우산을 받쳐 주며 나란히 서서 주막 앞까지 와서

“참 인사들 하시지요. 편지루 아셨겠지만, 같이 일하는 동지들인데…”

하고는,

“이 키 큰 친구는 건배 군이구요.”

하고 건배를 위시하여 인사를 시킨다.

“감사합니다. 비오는데 이렇게 나와 주셔서…”

영신은 활발히 손을 내밀고, 서양 여자처럼 차례차례 악수를 한다. 여러 청년들은 입 속으로 간신히 제 이름을 대면서 계집애처럼 얼굴들을 붉혔다. 피차에 악수를 교환한 것이 아니라, 얼떨김에 생후 처음으로 젊은 여자에게 악수를 당한 셈이었다. 두 사람이 앞장을 서고, 여러 청년은 그 뒤를 따라온다.

“허어 이거, 정말 우리가 별배 노릇을 하는군.”

“여보게 말 말게. 손을 어떻게 쥐구 잡어 흔드는지 하마터면 아얏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네.”

하고 뒷공론을 하는 소리가 동혁의 귀에까지 들려서, 픽하고 혼자 웃었다.

신작로로 나오자, 잠시 뜨음하던 빗발이 다시 뿌리기 시작한다. 자갈도 깔지 않은 길바닥은 된풀을 이겨놓은 것처럼 발을 옮겨놓을 수가 없도록 끈적끈적하다. 영신은 미끄럼을 탈까 보아 길바닥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진데 용하게들 나오셨군요.”

하고 길가의 아카시아 나무를 붙들고 신바닥에 붙어 달린 진흙을 문지르고는 언덕의 잔디를 이리저리 골라 딛는다.

어젯밤 비만 해도

보리에는 무던하다.

그만 갤 것이지

어이 이리 궂이 오노.

봄비는 차지다는데

질어 어이 왔는가.

비맞은 나뭇가지

새 움이 뾰죽뾰죽

잔디 속잎이

파릇파릇 윤이 난다.

자네도 이 비를 맞아서

정이 치〔寸〕나 자랐네.

이런 때 이런 경우에 동혁이가 시(詩)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더라면 '비맞고 찾아온 벗에게'라는, 조운(曹雲)의 시조 두 장을 가만히 입 속으로 읊었으리라.

영신은 바라던 대로 바닷가 한가한 집에서 편안히 쉴 수가 있었다. 동혁이가 신문지로나마 도배를 말끔히 하고 자리까지 새 것을 깔아놓고 저를 기다려 준 데는 무어라고 말이 나오지 않을 만큼 고마왔다.

더구나 농우회원들은 비를 맞으며, 갯고랑으로 나가서 낙지를 캐어오는 사람에, 손 그물을 쳐서 새우를 잡아오는 사람에, 대접이 융숭하다. 그것도 못하는 사람은 이제야 고추 잎만한 시금치를 솎아 가지고 와서 몰래 주인 마누라를 주고 간다.

“경치두 좋지만, 우리 청석골버덤 인심두 여간 후하지 않군요.”

하고 영신은 너무 미안해서 몸둘 곳을 몰라 한다. 회원들은 선생으로 숭앙하는 동혁이와 가장 뜻이 맞는 동지요, 또는 공부도 많이 했지만, 농촌 사업을 헌신적으로 하는 여자라니까 (실상 그네들은 십여 리 밖에 있는 보통학교 여훈도 밖에는 신여성과 대해 본 경험이 없다)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 무슨 까닭이 있는 줄로 짐작을 하는 눈치면서도 자기네 힘껏은 대접을 하는 것이다.

그 중에도 어느 사립학교 교원으로 있을 때 ** 사건에 앞잡이 노릇을 하다가, 이태 동안이나 콩밥을 먹고 나온 경력이 있는 건배는, 남의 일이라면 발을 벗고 나선다. 주선성이 있어서 한 동리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농우회의 선전부장 격으로 진 일 마른 일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며 활동을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는 동혁이 보다도 몇 해나 먼저 야학을 개설한 선각자로 동혁이와는 어려서 싸움도 많이 하였지만, 뜻이 맞는 막역한 동지였다.

그는 무슨 여왕이나 모셔다 놓은 것처럼 수선을 부리며 돌아다닌다. 그 멋없이 큰 키를 바람에 불리는 바지랑대처럼 내젓고 돌아다니며 광고를 하여서, 여학생이 동혁을 찾아왔다는 소문이 하루 동안에 동네에 파다하게 돌았다.

“그게 누구냐 응? 그 여학생이 누구야? 어디 나두 좀 보자꾸나.”

며느리를 못 보아 상성이 난 어머니는, 꼬부랑거리고 아들의 뒤를 쫓아다니며, 성화를 받친다. 박첨지도 마누라를 염탐꾼처럼 놓아서 며느리감을 보고 오라고 넌지시 이르기까지 하건만 동혁은,

“글쎄 얼토당토않은 말씀은 입 밖에두 내지 마세요. 신병이 있어서 잠깐 휴양두 할겸 우리들이 일하는 걸 보러 온 여자이니까요.”

하고 골까지 내었다. 그런 때는 동화가 형의 편을 들어서 제가 무슨 속중이나 아는 듯이 그렇지 않다는 변명을 해준다.

이래저래 동혁은 오던 날 하루는 여러 회원들과 얼려다니며 영신을 대접하고, 일부러 단 둘이 앉을 기회는 피하였다. 한편으로는 몸도 쇠약해진 데다가 밤배를 타고 우중에 시달려 온 사람을 붙잡고 길게 이야기를 하기도 안되어서, 마음을 턱 놓고 쉬도록 하고 싶었던 것이다. 저녁 뒤에 건배는,

“이 사람, 그이가 귀양살이를 왔단 말인가? 혼자 적적해 할테니, 우리 가서 청석골서 활동하는 얘기나 듣구 오세.”

하고는 회원들을 끌고 가서 저 혼자 한바탕 떠들다가 돌아왔다.

영신은 그동안 동혁이가 내려와서 한 일과 계속해서 하는 일이며, 동네 형편까지도 '선전부장'인 건배의 입을 통해서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영신은 '저이가 원체 묵중하겐 생겼지만, 내가 누굴 찾아왔다고, 저렇게 뚜웅하니 앉았다가, 다른 사람보다도 앞을 서서 갈까' 하고 동혁의 태도가 섭섭할 지경이었다. 비는 그치고 바닷가의 밤은 깊어갔다. 영신은 공연히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서, 잠을 청하느라고 조그만 등잔 밑에서 공부 삼아 볼까 하고 가지고 온 잡지의 농촌문제 특집호를 뒤적거리고 누웠다. 모래사장을 찰싹찰싹 가벼이 두드리는 파도소리를 베개삼고서…

그때에 창밖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만 주무시지요. 고단하실 텐데…”

하는 것은 틀림없는 동혁의 목소리였다. 그는 집으로 가다가 다시 돌아나와서 홀로 해변을 거닐며 영신의 신변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네 자겠어요, 난 벌써 가셨다구요.”

하고 영신이가 반가이 일어나 문을 열려니까,

“문고리를 꼭 걸구 주무세요.”

한 마디를 남긴 뒤에, 동혁의 그림자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3. 기상 나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