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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綠樹

[소개]
경성농업 졸업 이후 '공동경작회'를 만들어 농촌운동을 일으킨 장질 심재영과 수원에서 활동하다가 죽은 최용신 등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여 씌어진 소설이다. 작품에는 심재영이 박동혁으로 최용신이 채영신으로 바뀌어 있다. 당시 우리 사회 지식인들에게 유행하던 브나로드 운동을 모티브로,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사랑을 내용으로 한 소설이다. 청석골을 다듬어지고 가꾸어진 성취된 사회로 만들려는 지향적 욕구와 식민지 치하라는 존재적 현실 사이의 갈등과 그 비극적인 현실을 그린 농민소설이다.

[작가 소개]

심 훈(沈熏, 1901-1936) : 본명 심대섭(沈大燮), 호는 금강생, 금호어초(琴湖漁樵), 백랑(白浪), 해풍(海風) 등. 1901년 서울에서 출생, 경성제일고보 재학시 3·1 운동에 참가했으며 중국 항주 지강(之江)대학 극문학부 중퇴.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을 역임했다. 1926년 동아일보에 <탈춤>을 발표했으며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현상 공모에서 <상록수>가 당선됐다. 일제하 검열 때문에 발표하지 못하고 해방 이후 유고시집으로 나온 <그 날이 오면>이 있다. 단편 <황공의 최후> 외에 조선일보에 연재하다가 검열로 인해 중단된 미완성 <동방의 애인> <불사조> 등이 있다.

 

[목차]

(1) 쌍두취행진곡(雙頭鷲行進曲)

 

(2) 일적천금(一滴千金)

 

(3) 기상 나팔

 

(4) 가슴 속의 비밀

 

(5) 그리운 명절(名節)

 

(6) 이별(離別)

 

 

  

 


 

쌍두취행진곡(雙頭鷲行進曲)

 

가을 학기가 되자, ○○일보사에서 주최하는 학생계몽 운동(學生啓蒙運動)에 참가하였던 대원들이 돌아왔다. 오늘 저녁은 각처에서 모여든 대원들을 위로하는 다과회가 그 신문사 누상에서 열린 것이다.

 

오륙백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에는 전 조선의 방방곡곡으로 흩어져서 한여름 동안 땀을 흘려가며 활동한 남녀 대원들로 빈틈없이 들어찼다.

 

폭양에 그을은 그들의 시꺼먼 얼굴! 큰 박덩이 만큼씩 전등이 드문드문하게 달린 천장에서 내리비치는 불빛이 휘황할수록, 흰 벽을 등지고 앉은 그네들의 얼굴은 더한층 검어 보인다.

 

만호 장안의 별처럼 깔린 등불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도록 사방의 유리창을 활짝 열어 젖혔건만 건장한 청년들의 코와 몸에서 풍기는 훈김이 우거진 콩밭 속에를 들어간 것만큼이나 후끈후끈 끼친다.

 

정각이 되자, P학당의 취주악대(吹奏樂隊)는 코오넷, 트럼본 같은 번쩍거리는 악기를 들고 연단 앞 줄에 가 벌여 선다. 지휘자가 손을 내젓는 대로 힘차게 연주하는 것은 유명한 독일 사람의 작곡인 쌍두취행진곡(雙頭鷲行進曲)이다. 그 활발하고 장쾌한 멜로디는 여러 사람의 심장까지 울리면서 장내의 공기를 진동시킨다.

 

악대의 연주가 끝난 다음에 사회자인 이 신문사의 편집국장이 안경을 번득이며 점잖은 걸음걸이로 단 위에 나타났다.

 

“에 - 아직 개학을 아니한 학교도 있어서 미처 올라오지 못한 대원이 많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처럼 성황을 이루어서 장소가 매우 협착한 까닭에 여러분끼리 서로 간친하는 기회를 드리려는 다과회가 무슨 강연회처럼 되었습니다.”

 

하고 일장의 인사를 베푼 뒤에 으흠으흠 하고 헛기침을 해서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금년에는 여러 가지로 지장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작년보다도 거의 곱절이나 되는 놀라울 만한 성적을 보게 됐습니다. 이것은 오직 동족을 사랑하는 여러분의 열성과, 문맹을 한 사람이라도 더 물리치려는 헌신적 노력의 결과인 것이 물론입니다. 그러므로 주최자측으로선 수고를 감사할 뿐 아니라, 우리 계몽 운동의 장래를 위해서 경축하기를 마지 않는 바입니다.”

 

처음에는 늦게 들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수성수성하던 장내가 이제는 기침소리 하나 없이 조용해졌다.

 

사회자는 말을 이어,

 

“긴 말씀은 하지 않겠으나, 차나 마셔 가면서 간담적으로 피차의 의견도 교환하고, 그 동안에 분투한 체험담도 들려 주셔서, 앞으로 이 운동을 계속하는 데 크게 참고가 되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라는 부탁을 한 후 단에서 내렸다.

 

대원들 중에서 제일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어느 전문학교의 교복을 입은 학생이 나가 간단한 답사를 하고 돌아왔다.

 

문간에서 회장을 정돈시키던 이 신문사의 뱃지를 붙인 사원이 눈짓을 하니까, L여학교 가사과의 학생들은, 굉장한 연회나 차리는 듯이 일제히 에이프런을 두르고 돌아다니며 자기네의 손으로 만든 과자와 차를 주욱 돌린다.

 

대원들은 찻잔을 받아들고 앉아서 무릎 위에 올려놓은 과자 접시를 들여다보면서 '애개, 요걸루 어디 간에 기별이나 가겠나' 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신다.

 

장내는 사기그릇이 부딪쳐 대그락거리는 소리와 잡담을 하는 소리로 웅성웅성하는데 맨 앞줄 한구석에서 하와이안 기타아를 뜯는 소리가 모기소리처럼 애응애응 하고 들리기 시작한다.

 

남양의 달밤을 상상케 하는 애련하고도 청아한 선율! 회장은 다시 조용해졌다. C전문의 명물인 익살꾼으로 키타아의 명수인 S군이 자청을 해서 한 곡조를 타는 것이다.

 

S군은 한참 타다가, 저 혼자 신이 나서 악기를 들고 일어나 엉덩춤을 춘다. 메기같이 넓적한 입을 실룩거리며 토인의 노래를 흉내내는데, 그 목소리는 체수에 어울리지 않게, 염소가 우는 소리와 흡사하게 떨려 나와서, 여러 사람의 웃음보가 터졌다. 어떤 중학생은 웃음을 억지로 참다가, 입에 물고 있던 과자를 앞줄에 앉은 사람의 뒤통수에다가 확 내뿜었다. 한 구석에 몰려 앉은 여학생들은 손수건을 입에 대고 허리를 잡는다.

 

“재청요 - ”

 

“앙콜 - 앙콜 - ”

 

하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일어나며 회장 안은 벌통 속처럼 와글와글 한다. S군은 저더러 잘 한다는 줄만 알고, 두 번 세 번 껑충거리고 나와서 익살을 깨뜨리는 바람에, 점잔을 빼던 사회자도 간신히 웃음을 참고 앉았다. 그는 미소를 띄우고 일어서며,

 

“여러분 고만 조용합시다.”

 

하고 손을 들었다.

 

“지금부터 여러분의 체험담을 듣겠습니다. 한 사람도 빼어 놓지 않고 고향에서 활동하던 이야기를 골고루 듣구는 싶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는 관계로 유감천만이나, 사회자가 몇 분을 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고 양복 주머니에서 각 지방으로부터 온 통신과 이미 신문에 발표된 대원들의 보고서를 한 뭉텅이나 꺼내 놓고 뒤적거리더니,

 

“금년에 활동한 계몽대원 중에 뛰어나게 좋은 성적을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글을 깨쳐 준 아동의 수효로는 우리 신문사에서 이 운동을 개시한 이래 최고 기록을 지은 분을 소개하겠소이다.”

 

하고는 다시 안경 너머로 서류를 들여다보다가 얼굴을 들고 선생이 출석을 부르듯이,

 

“○○고등농림의 박동혁(朴東赫)군!”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장내는 테를 메인 듯이 긴장해졌건만, 제 이름을 못 들었는지 얼핏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박동혁군 왔소?”

 

사회자는 더한층 목소리를 높이고는 사면을 살핀다. 만장의 학생들은 '박동혁이가 어떻게 생긴 사람이야?' 하는 듯이 서로 돌아다보며 이름을 불리운 고등학생을 찾는다.

 

“여기 있습니다.”

 

맨 뒷줄에서 굵다란 목소리가 청처짐하게 들렸다. 여러 사람의 고개는 일제히 목소리가 난 데로 돌려졌다.

 

“그리로 나가랍니까?”

 

엉거주춤하고 묻는 말이다.

 

“이리 나오시오.”

 

사회자는 연단에서 비켜서며 손짓을 한다.

 

기골이 장대한 고농 학생이 뭇사람이 쏘는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뚜벅뚜벅 걸어 나오자 우뢰같은 박수소리가 강당이 떠나갈 듯이 일어났다.

 

박동혁이라고 불리운 학생은 연단에 올라서기를 사양하고 앞줄에 가 두 다리를 떡 버티고 섰다. 빗질도 아니한 듯한 올빽으로 넘긴 머리며 숱하게 난 눈썹 밑에 부리부리한 두 눈동자에는 여러 사람을 누르는 위엄이 떠돈다.

 


 

그는 박수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려 두툼한 입술을 열었다.

 

“여러분!”

 

청중이 숨소리를 죽이게 하는 저력 있는 목소리다.

 

“오늘 저녁에 항상 그리워하던 여러분 동지와 한 자리에 모여서 흉금을 터놓고 서로 얘기할 기회를 얻은 것을 무한히 기뻐합니다.”

 

목구멍에서 나오는 음성이 아니요, 땀에 절은 교복이 팽팽하게 켕기도록, 떡 벌어진 가슴 한복판을 울리며 나오는 바리톤(남자의 저음)이다. 청중은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지려나?' 하는 듯이 눈도 깜짝거리지 않으며 동혁의 얼굴을 바라 본다.

 

동혁은 장내를 다시 한 번 둘러 본 뒤에 천천히 입을 연다.

 

“그러나, 삼 년째 이 운동에 참가해서 적으나마 힘을 써 온 이 사람으로서 그 경험이나 감상을 다 말씀하려면 매우 장황하겠습니다. 더구나 오늘 저녁은 간단한 경과만 보고하기를 약속한 까닭에, 정작 이 가슴속에 첩첩이 쌓인 그 무엇을 여러분 앞에 시원스럽게 부르짖지 못하는 것을 크게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 못하는 말은 사사로운 좌석에서 얘기할 기회를 짓고, 또는 개인적으로도 긴밀한 연락을 취해서 서로 간담을 비춰 가며 토론도 하고 의견도 교환하기를 바랍니다.”

 

하고 잠시 말을 멈추더니, 수첩을 꺼내 들고 자기의 고향인 남조선의 서해변에 있는 한곡리(漢谷里)라는 궁벽한 마을의 형편을 숫자적으로 대강 보고를 한다.

 

호수(戶數)가 94호인데, 농업이 7할, 어업이 2할이요 토기업(土器業)이 1할이라는 것과 인구가 4백 60여 명에 그야말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문맹이 8할 이상이나 점령한 것을 3년 동안을 두고 여름과 겨울 방학에 중년 이하의 여자들과 육칠 세 이상의 아동들을 모아 놓고 한글을 깨쳐 주고 간단한 셈수를 가르쳐 준 것이 2백 47명에 달하는데, 그곳 보통학교 출신들의 조력이 많았다는 것을 말하자 박수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동혁은 천천히 수첩을 접어 넣으며 집안 식구와 이야기하는 듯한 말씨로,

 

“우리 고향은 워낙 원시부락(原始部落)과 같은 농어촌이 돼서, 무지한 부형들의 이해가 전연 없는데다가, 관변의 간섭도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어요. 그런 걸 별짓을 다 해 가면서 억지로 시작을 했었지요. 첫해에는 아이들을 잔뜩 모아는 놨어두 가르칠 장소가 없어서 큰 은행나무 밑에다 널판대기에 먹칠을 한 걸 칠판이라고 기대어 놓고, 공석이나 가마니를 깔고는 밤 깊도록 이슬을 맞아가면서 가르치기를 시작하였는데 마침 장마 때라 비가 자꾸만 와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움을 팠어요.

 

나흘 동안이나 장정 십여 명이 들러붙어서 한 대여섯 간 통이나 파고서 밀짚으로 이엉을 엮어서 덮고, 그 속에 들어가서 진땀을 흘리며 '가갸거겨'를 가르쳤어요. 그러다가 어느날 밤새도록 비가 퍼붓듯이 쏟아졌는데 그 이튿날 아침에 가 보니까 교실 속에 빗물이 웅덩이처럼 흥건하게 고였는데, 송판으로 엉성하게 만든 책상 걸상이 둥실둥실 떠다니드군요.”

 

그 말에 여기 저기서 픽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동혁이 자신도 남자다운 웃음을 띠우고,

 

“그 뿐인가요, 제철을 만난 맹꽁이란 놈들이 뛰어들어서 저희끼리나 글을 읽겠다고 '맹자왈', '공자왈' 해 가며 한 바탕 복습을 하는데…”

 

그때에 어느 실없는 군이 코를 싸쥐고,

 

“매앵 꽁 매앵 꽁”

 

하고 커다랗게 흉내를 내어서 여러 사람은 천장을 우러러 간간대소를 하였다. 여학생들은 킬킬거리고 웃어대다가 눈물을 다 질금질금 흘린다. 그러자,

 

“웃을 얘기가 아니요!”

 

“쉬 - 조용들 합시다.”

 

하고 꾸짖듯 하는 소리가 회장 한복판에서 들렸다. 동혁이도 검붉은 얼굴에 떠돌던 웃음을 지워버리고 한 걸음 다가서며,

 

“나 역시 이 자리를 웃음 바탕을 만들려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닙니다. 이보다 더 비참한 현실과 부딪쳐서 더한층 쓰라린 체험을 하신 분도 많을 줄 알면서도 다만 한 가지 예를 들었을 뿐입니다.”

 

하고 잠시 눈을 꽉 감고 침묵하더니 손을 번쩍 쳐들며,

 

“그러나 여러분! 끝으로 꼭 한 마디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하고 목청을 높여 힘차게 청중에게 소리친다. 대원들은 물론, 사회자까지도 다시금 긴장해서 엄숙해진 동혁의 얼굴만 주목한다.

 

“눈뜬 소경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필요합니다. 계몽 운동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사업 중의 하나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지식분자인 우리들이 이러한 기회에 전 조선의 농촌, 어촌, 산촌으로 방방곡곡에 파고 들어가서 그네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네들이 그 더 할 수 없이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 하는 문제를 머리를 싸매고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금부터 육칠십 년 전 노서아의 청년들이 부르짖던 브·나로드(민중 속으로라는 말)를 지금와서야 우리가 입내 내듯 하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슬프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남에게 뒤떨어진 것을 탄식만 할 것이 아니라, 높직이 앉아서 민중을 관찰하거나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태도를 당연히 버리고, 그네들이 즉 우리 조선 사람이 제 힘으로써 다시 살아나기 위한 그 기초공사를 해야하겠습니다. 오늘 저녁 이 자리에 모인 바로 여러분의 손으로 시작해야겠습니다. 물질로, 즉 경제적으로는 일조일석에 부활하기가 어렵겠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온갖 행동의 원동력이 되는 정신, 요샛말로 이데올로기를 통일하기 위해서 정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하고 말끝마다 힘을 주다가 잠시 무엇을 생각하더니,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를 못 살게 구는 적(敵)이, 고쳐 말씀하면 우리의 원수가 어디 있는 줄 아십니까?”

 

하고 나서, 그는 무슨 범인이나 찾는 듯한 눈초리로 청중을 돌아본 뒤에 손가락을 펴들어 저의 머리통을 가리키며,

 

“그 원수가 이 속에 들었습니다. '아이구 이제는 죽는구나' '너 나 할 것 없이 모조리 굶어 죽을 수밖에 없구나'하는 절망과 탄식! 이것 때문에 우리는 두 눈을 멀거니 뜬 채 피를 뽑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지레짐작 즉 선입관념이 골수에 박혀있는 까닭에 우리가 피만 식지 않은 송장노릇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야 천치바보가 아닌 담에야 우리의 현실을 낙관할 수야 없겠지요. 덮어놓고 '기운을 차려라', '벌떡 일어나 달음박질을 해라'하고 고함을 지르며 채찍질을 한대도 몇 십 년이나 앓던 중병환자가 벌떡 일어나지야 못하겠지요, 그렇지만…”

 

하고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며 혀끝으로 불을 뿜는 듯한 열변에 회장은 유리창이 깨어질 듯한 박수소리가 일어났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옳소 - ”

 

“그렇소 - ”

 

는 고함과 함께,

 

“그건 탈선이요.”

 

하고 반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 동혁은 금새 눈초리가 실쭉해지더니,

 

“어째서 탈선이란 말요?”

 

하고 눈을 커다랗게 부릅뜨며 목소리가 난 쪽을 노려보는 판에, 사회자는 동혁의 곁으로 가서 무어라고 귓속말을 한다.

 

“중지시킬 권리가 없소!”

 

“말해라, 말해!”

 

이번에는 발을 구르며 사회자를 공박하는 소리로 장내가 물끓듯한다. 동혁은 그 자리에 꿈쩍도 하지 않고 버티고 서서 매우 흥분된 어조로,

 

“지금은 시간의 자유까지도 없지만 내 의견과 틀리는 분은 이 회가 파한 뒤에 얼마든지 토론을 합시다.”

 

하고 누구든지 덤벼라! 하는 기세를 보이더니,

 

“나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우리 민중에게 우선 희망의 정신과 용기를 길러 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우리 계몽운동 대원의 가장 큰 사명으로 믿습니다. 동시에 여러분도 이 신조를 다같이 지키기를 충심으로 바랍니다.”

 

동혁은 성량(聲量)껏 부르짖고는 교복 소매로 이마의 땀을 씻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사회자는 아까보다도 더 정중한 태도를 짓고 동혁이가 섰던 자리로 가서, 장내가 정숙해지기를 기다려,

 

“박동혁군의 말은 개념적이나마 누구나 존중해야 할 좋은 의견으로 압니다.”

 

하고는,

 

“그러나, 현재의 정세로 보아서 어느 시기까지는 계몽 운동과 사상 운동을 절대로 혼동해서는 아니됩니다. 계몽 운동은 계몽 운동에 그칠 따름이지 부질없이 혼동해 가지고 공연한 데까지 피해를 끼칠 까닭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하고 단단히 주의를 시킨다. 그때에 한 구석에서,

 

“에그 추워 - ”

 

하고 일부러 어깨와 목소리를 떠는 학생이 있었다.

 

동혁의 뒤를 이어 서너 사람이나 판에 박은 듯한 경과 보고가 지루하게 있은 후, 사회자는,

 

“이번에는 금년에 처음으로 참가한 여자 대원 중에서 제일 좋은 성적을 나타낸 ○○여자 신학교에서 재학 중인 채영신(蔡永信)양의 감상담이 있겠습니다.”

 

하고 회장 오른편에 여자들이 모여 앉은 데를 바라다본다. 남학생들은 그 편으로 머리를 돌리며 손뼉을 친다. 채 영신이라고 불리운 여자는 한참만에 얼굴이 딸기빛이 되어 가지고 일어서더니,

 

“전 아무 말도 하기 싫습니다!”

 

하고 머리를 내저으며 야무지게 한 마디를 하고는 펄썩 앉아 버린다. 사회자는 영문을 몰라서 눈이 둥그래졌다.

 

뜻밖에 미리 약속까지 하였던 여자가 말하기를 딱 거절하는 데는, 사회자와 청중이 함께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를 말합시다.”

 

“그대신 독창이래두 시키세.”

 

상대자가 여자인 까닭에 더욱 호기심을 가진 남학생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음악회에서 억지로 끌어내어 재청이나 시키는 것처럼, 짓궂게 박수를 하며 야단들이다.

 

“간단하게나마 말씀해 주시지요.”

 

사회자는 좀 무색한 듯이 채 영신이가 앉은 편으로 몇 걸음 다가오며 어서 일어나기를 권한다.

 

그래도 영신은 꼼짝도 아니하고 앉았다가 곁에서 동지들이 옆구리를 찌르고 등을 떠다밀어서, 마지못해 일어났다.

 

서울 여자들은 잠자리 날개처럼 속살이 하얗게 내비치는 깨끼 적삼에 무늬가 혼란한 조세트나, 근래에 유행하는 수박색 코로나프레프 같은 박래품으로 치마를 정강마루까지 추켜 입고 다닐 때연만 그는 언뜻 보기에도 수수한 굵다란 광당포 적삼에 검정 해동치마를 입었고, 화장품과는 인연이 없는 듯 시골서 물동이를 이고 다니는 과년한 처녀를 붙들어다 세워 놓은 것 같다.

 

그러나 얼굴에 두드러진 특징은 없어도 청중을 둘러보는 두 눈동자는 인텔리(지식계급) 여성다운 이지(理智)가 샛별처럼 빛난다. 그는 사회자를 쏘아보며,

 

“첫째, 이런 자리에서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지는 모르지만, 남이 다 말을 하고 난 맨 끄트머리에 언권을 주는 것이 몹시 불쾌합니다.”

 

샛되고 결곡한 목소리다.

 

“흥, 엔간한걸.”

 

“여간내기가 아닌데.”

 

남학생들은 혀를 내두르며 수군거린다. 제자리에 돌아와 이제껏 흥분을 가라앉히느라고 눈을 딱감고 있던 동혁이도, 얼굴을 쳐들고 채영신의 편을 주목한다.

 

두 사람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영신은 말을 이어,

 

“둘째는 제 속에 있는 말씀을 솔직하게 쏟아 놓고는 싶어두요, 사회하시는 분이 또 무어라고 제재를 하실 테니깐, 구차스레 그런 속박을 받아가면서까지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줄 압니다.”

 

하고 다시 앉아 버린다. 이번에는 여자석에서 손뼉치는 소리가 생철지붕에 소낙비 쏟아지듯한다.

 

사회자는 그만 무안에 취해서 얼굴을 붉히며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아까 박동혁군이 말할 때는, 시간이 없다고 주의를 시킨 것이지, 말의 내용을 간섭한 것은 아닙니다.”

 

하고 뿌옇게 발뺌을 한다. 그러자 동혁이가 벌떡 일어나 나치스식으로 팔을 들며,

 

“사회!”

 

하고 회장이 찌렁찌렁하도록 부른다.

 

“밤을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기회에 우리는 충분히 의견을 교환하고 싶습니다. 우선 지도 원리를 통일해 놓고 나서 깃발을 드는 것이 일의 순서가 아니겠읍니까.”

 

하고 톡톡히 항의를 한다. 사회자는 시계를 꺼내 보고 사교적 웃음을 띠우며,

 

“채영신씨, 그럼 내년에는 맨 먼첨 언권을 드릴 테니 그렇게 고집하지 마시고 말씀하시지요.”

 

하고는 장내의 공기를 완화시키려고 슬쩍 농친다.

 

영신은 다시 망설이다가, 이번에는 대접상으로 간신히 일어났다.

 

“저는 금년에야 참가를 했으니까, 이렇다고 보고를 할만한 재료가 없고요, 고생을 좀 했다고 자랑할 것도 못될 줄 압니다. 그저 앞으로 이 운동을 꾸준하게 해 나갈 결심이 굳을 뿐이니까요.”

 

하고는 그 영채가 도는 눈을 사방으로 돌리더니,

 

“그렇지만, 저 역시 여러분께 우리 계몽대의 운동이 글자를 가르치는 데만 그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민족의 거의 전부라고 할만한 절대 다수인 농민들의 갈 길을 열어 주기 위해서 우선 그네들에게 희망의 정신을 넣어 주자는…”

 

하다가 상막해서 잠시 이름을 생각해 보더니,

 

“…박동혁씨의 의견은 저도 전적 동감입니다!”

 

하고 남학생 편으로 고개를 돌린다.

 

“여러분은 학교를 졸업하면 양복을 갈아 붙이고 의자를 타고 앉아서, 월급이나 타먹으려는 공상부터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 남녀가 총동원을 해서 머리를 동쳐매고 민중속으로 뛰어들어서 우리의 농촌, 어촌, 산촌을 붙들지 않으면, 그네들을 위해서 한 몸을 희생에 바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거듭나지 못합니다!”

 

그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북받쳐 오르는 흥분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고 고만 쓰러지듯이 앉아 버린다. 장내는 엄숙한 기분에 잠겼다. 말썽을 부리던 남학생들도 머리를 수그리고 있다. 그네들의 머리 속에도 감격의 물결이 출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매우 긴장된 중에 K보육학교 학생들의 코러스로 간친회는 파하였다. 동혁은 여러 학생들 틈에 섞여서 서대문행 전차를 탔다. 전차가 마악 떠나려는데, 놓치면 큰일이나 날듯이 뛰어오르는 한 여학생이 있다. 그는 동혁에게 생후 처음으로 깊은 인상을 준 채 영신이었다.

 

영신은 승객들에게 밀려서 동혁이가 걸터앉은 데까지 와서는 손잡이를 붙들고 섰다. 두 사람은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검붉은 얼굴을 서로 무릎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대하게 되었다.

 

그들은 저도 모르는 겨를에 서로 목례를 주고받았다. 비록 오늘 저녁 공석에서 처음 대면을 하였건만, 여러 해 사귀어 온 지기와 같이 피차에 반가왔던 것이다.

 

동혁은 앉아 있기가 미안해서,

 

“이리 앉으시지요.”

 

하고 일어서며 자리를 내준다. 영신은 머리를 숙이며,

 

“고맙습니다. 전 섰는 게 시원해 좋아요.”

 

하고 사양하면서 도리어 반 걸음쯤 물러선다.

 

동혁은 아직도 애티가 남아 있어, 귀염성스러운 영신의 입모습을 보았다. 그 입모습을 스치고 지나가는 미소를 보았다.

 

“창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더 시원한데요.”

 

동혁은 엉거주춤하고 자꾸만 앉기를 권한다.

 

“어서 앉아 계세요. 전 괜찮아요.”

 

“그럼 나도 서겠습니다.”

 

동혁이가 반쯤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다른 승객이 냉큼 뚱뚱한 궁둥이를 들이밀었다. 동혁은 '어지간히 고집이 세구나' 하면서도, 영신이가 저를 연약한 여자라고 자리를 사양하는 그런 대우가 받기 싫어서 굳이 앉지 않는 줄은 몰랐으리라.

 

차 속이 붐벼서 두 사람은 손잡이 하나를 나누어 쥐고 옷이 스치도록 나란히 섰건만,

 

“되려 미안합니다.”

 

“천만에요.”

 

하고 한 마디씩 주고 받은 다음에는 말이 없었다.

 


 

운전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밤바람은 여간 시원하지가 않다. 영신은 앞 머리카락이 자꾸만 이마를 간지려서, 물동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손등으로 뿌리듯 한다. 한 발자국쯤 앞에 선 동혁의 안반 같은 잔등이에서는 교복에 절은 땀 냄새가 영신의 코에까지 맡힌다.

 

그러나, 한여름 동안 머리도 감지 않은 촌 여편네들과 세수도 변변히 하지 않은 아이들 틈에 끼어 지내서, 시크므레한 땀 냄새가 코에 밴 영신은 동혁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가 고개를 돌리도록 불쾌하지는 않았다. 전차가 '감영' 앞에 와 정거를 하자, 영신은 앞을 비비고 나서며,

 

“전 여기서 내립니다.”

 

하고 공손히 예를 한다.

 

동혁은 목을 늘이고 창 밖을 내다보더니,

 

“나도 여기서 내려야겠는데요.”

 

하고 영신의 뒤를 따라 내렸다. 안전 지대에서 두 사람은 즉시 헤어지지를 못하고 서성서성하다가,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동혁이가 물었다.

 

“학교 기숙사로 가서 잘 텐데, 문 닫을 시간이 지나서 걱정이야요. 여간 규칙이 엄해야죠. 시간이 급해서 사감한텐 말도 못하고 나왔는데.”

 

“그럼 쫓겨나셨군요. 물론 객지시지요?”

 

“네!”

 

두 사람은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아현리(阿峴里) 쪽으로 나란히 서서 걷는다.

 

“그럼 어떻게 하나요? 나는 이 근처서 통학하는 친구 집이 있어서 그리로 자러 가는 길이지만…”

 

“전 서울 사는 동지라곤 친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하고 영신은 다시 돌아서며,

 

“아뭏든 기숙사로 가보겠어요.”

 

하고 잘 가라는 듯이 인사를 한다. 동혁은 우연히 같은 전차를 탔으나, 여기까지 같이 왔다가 혼자 보내기가 안돼서,

 

“그럼 내 보호병정 노릇을 해 드리지요.”

 

하고 영신이가 사양하는 것을 금화산 밑에 있는 여신학교 기숙사 앞까지, 멀찌감치 걸어서 따라 올라갔다.

 

기숙사는 불을 끈 지도 오래인 모양인데, 대문을 잡아 흔들고 초인종을 연거푸 누르고 하여도 감감소식이다.

 

“이를 어쩌나. 이젠 숙직실로 전화를 걸어 보는 수밖에 없는데 전화나 어디 빌릴 데가 있어야죠.”

 

하며 영신은 발을 구르면서 어쩔 줄을 모른다.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앞서거니 뒤서거니 언덕길을 더듬으며 감영 네거리로 내려왔다.

 

깊은 밤 후미진 구석으로 여학생의 뒤를 따라 다니는 것부터 부질없는 노릇인데, 더구나 아는 사람의 눈에 띄든지 해서 재미없는 소문이 퍼지는 날이면 영신에게 미안할 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혁은 밤중에 길거리로 헤매게 된 젊은 여자를 내버려두고, 저 혼자만 휘적휘적 친구의 집으로 자러 갈 수는 없었다.

 

영신이도 건장한 남자가 뒤를 따라 주는 것이 정말 보호병정이나 데리고 다니는 것처럼 든든히 여기는 눈치를 살피고 동혁은,

 

“아뭏든 전화나 걸어 보시지요.”

 

하고 길가 포목전의 닫힌 빈지를 두드려서 간신히 전화를 빌려 주었다.

 

영신은 학교의 전화번호를 불렀다. 마지못해서 문은 열어 주고서도 귀찮은 듯이 눈살을 찌푸리고 돈을 세고 앉은 주인을 곁눈으로 보면서 두 번 세 번 걸어도 귓바퀴에서 이잉이잉 소리만 들릴 뿐 나와 주는 사람이 없다.

 

“도오시데모 오이데니 나리마센까라 마다 네가이마스.”

 

'암만해도 안 나오니 다시 걸어 주시오'

 

하고 교환수의 맵살스러운 목소리를 듣고야 영신은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길거리로 나왔다.

 

“이젠 여관으로 가실 수밖에 없군요.”

 

동혁이도 입맛을 다셨다. 영신은,

 

“저 때문에 너무 걱정을 끼쳐서 미안합니다.”

 

하고는 구둣부리로 길바닥을 후비듯하다가 고개를 외로 꼬고 무엇을 생각하더니,

 

“이젠 백선생님 집으로 갈까 봐요.”

 

한다.

 

“백선생이라니요?”

 

“왜 여자기독교연합회 총무로 있는 백현경씨를 모르세요?”

 

“이름은 익숙히 들었지만… 그이 집이 이 근천가요?”

 

영신은 전등불이 드문드문 보이는 송월동(松月洞) 쪽을 가리키며,

 

“네, 바로 저 언덕 밑이야요. 그 선생님이 농촌 문제를 강연하느라고 우리 학교에도 오시는데, 저를 여간 사랑해 주시지 않으셔요. 요새 새로 설립한 농민 수양소로 실습도 하러 같이 다녔는데, 사정을 하면 하룻밤쯤이야 재워 주시겠지요.”

 

그 말을 듣고 동혁은 매우 안심한 듯이,

 

“그럼, 진작 그리로 가시질 않고…”

 

하고는 그만 헤어지려는 것을,

 

“이왕 여기꺼정 와 주셨으니, 그 집까지만 바래다 주세요, 네?”

 

하고 영신이가 간청하다시피 해서, 동혁은 '아무려나' 하고 다시 뒤를 따랐다.

 

동혁이도, 조선 사회에서 누구나 모르는 사람이 없이 유명한 백현경이란 여자를 간접으로나마 알고 있었다. 말썽 많던 그의 과거로부터 최근에 세계 일주를 하고 돌아와서, 또다시 개인 문제로 크나큰 이야깃거리를 제공하였고, 한편으로는 농촌 사업을 한다고 강연도 다니고 저술도 하여서 '무슨 주의를 가지고 어떠한 방법으로써 조선의 농촌 운동을 지도하려나?'하는 점이 고등농림의 상급생인 동혁의 주의를 끌어왔었다.

 

그의 사사로운 생활에는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않으나, 그가 신문이나 잡지에 내는 논문이나 감상담 같은 것은 빼어 놓지 않고 읽어 오는 중이었다. '과연 어떠한 인물일까?' 동혁은 적지 않은 호기심을 가지고, 여자 중에는 호걸이라고 여간 숭배를 하지 않는 영신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백씨의 집까지 당도하였다.

 

그러나 동혁은 밤중에 여기까지 여자의 뒤를 따라온 것이 새삼스러이 멋적은 것 같고 또는 백씨까지도 초면에 저를 어떻게 볼는지 몰라서, 모자를 훌떡 벗으며,

 

“자, 난 그만 실례합니다. 기회 있으면 또 만나뵙지요.”

 

하고는 발꿈치를 홱 돌린다.

 

“왜, 그렇게 가셔요? 잠깐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소개를 잘할 테니, 문간에서라도 백선생을 만나 보고 가시죠, 네? 여간 환영하지 않으실 걸.”

 

좁다란 골목 안을 환하게 밝히는 외등 밑에서 영신은 길목을 막아서면서 조르듯한다.

 

“아니요. 다음 날이나 만나게 해 주세요.”

 

하고 한 마디를 남기고, 동혁은 구두징 소리를 뚜벅뚜벅 내며 골목 밖으로 나가 버린다. 영신은 어찌하는 수없이,

 

“그럼 안녕히 가세요.”

 

하고 큰길로 사라지는 동혁의 기다란 그림자를 서운히 바라다보다가 돌아섰다. 대문을 흔들면서,

 

“백선생님! 백선생님!”

 

하고 커다랗게 불렀다. 모기장을 바른 행랑방 들창이 열리더니, 자다가 일어난 어멈이 얼굴을 반쯤 내밀며,

 

“한강으로 선유 나갑셔서 여태 안 들어오셨는뎁쇼.”

 

한다. 영신은 고만 울상이 되었다.

 


 

그 이튿날 학교로 내려간 뒤에, 동혁은 며칠 동안 마음의 안정을 잃고 지냈다. 개학초가 되어서 기숙사 안이 뒤숭숭한 탓도 있지만, 영신의 첫인상이 앉으나 서나 눈앞에 떠돌아서 공연히 들썽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상학 시간에는 노오트 위에 펜을 달리다가도, 손을 멈추고 칠판 위에 환등처럼 나타나는 영신의 환영을 멀거니 바라보기도 하고, 운동장에 나가서는 축구부의 선수로, 골키퍼 노릇을 하여 왔는데 상대편에서 몰고 들어와서 힘없이 질러 넣는 공도 어름어름하다가 발길이 헛나가서 막아내지 못하기를 여러 번이나 거듭하였다. 마침 서울법전(法專)과 시합을 하려고 맹렬히 연습을 하는 판이라, 축구부 감독으로부터,

 

“여보게 박군, 요새 며칠은 왜 얼빠진 사람 같은가? 이러다간 우승기를 빼앗기고 말겠네.”

 

하는 주의까지 받았다. 그럴수록 동혁은 '내가 정말 왜 이럴까?' 하고 평소에 자제심이 굳센 것을 믿어오던 제 자신을 의심하리만큼 침착해지지 않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 수수한 차림 차림… 조금도 어설픈 구석이 없는 그 체격… 그리고 혈색 좋은 얼굴에 샛별같이 빛나던 눈동자…또 그리고 언권을 먼저 주지 않았다고 말하기를 딱 거절하던 그 맺고 끊는 듯하던 태도… 그나 그뿐인가? 남학생들에게 정면으로 일장의 훈계를 하던 정열적이면서도 결곡한 목소리!

 

그 어느 한 가지가 머리 속에 사진 찍혀지지 않은 것이 없고, 말 한 마디조차 귀밖으로 사라진 것이 없다.

 

'처음 보는 여자다. 외모가 예쁜 여자는 길거리에서도 더러 본 일이 있지만, 채 영신이처럼 의지가 굳어 보이는 여자는 처음이다. 무엇이든지 한번 결심하면 기어이 제 손으로 해내고야 말 것같은 여자다'

 

이런 생각을 하느라고 필기를 하지 못하고, 헛발길질만 자꾸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박동혁씨의 의견과 전적 동감입니다'

 

하던 한 마디를 입 속으로 외우고 또 외우고 하다가는,

 

'오냐, 나는 비로소 한 사람의 동지를 얻었다! 내 사상의 친구를 찾았다!'

 

하고 부르짖으며 저 혼자 감격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고학을 하여 온 늙은 총각으로 이성과 접촉할 기회도 없었지만, 틈틈이 여러 가지 모양의 여성을 머리 속에 그려 보고 장래를 공상해 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간담회 석상에서 채 영신이란 여자를 한번 보고 밤거리를 몇십 분 동안 같이 걸어 본 뒤에는 눈앞에서 아른거리던 그 숱한 여자들의 그림자가 한꺼번에 화다닥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대신으로 굵다란 말뚝처럼 동혁의 머리 속에 꽉 들어와 박힌 것은 '채 영신' 하나뿐이다.

 

'그날 무사히 들어가 잤나? 학교서 말이나 듣지 않았나?'

 

몹시 궁금은 하였건만, 규칙이 까다로운 여학교로 편지는 할 수 없었다. 그만한 용기야 못낼 것이 아니지만, 받는 사람의 처지가 곤란할 것을 생각하고 또다시 만날 기회만 고대하면서 한 일주일을 지냈다. 그러다가, 하루는 천만뜻밖에 영신에게서 편지가 왔다. 글씨는 남필 같으나 피봉 뒤에는,

 

'○○여자 신학교 기숙사에서 채영신 올림'

 

이라고 버젓이 씌어 있는 것을 보니, 동혁의 가슴은 울렁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밤은 여간 실례를 하지 않았습니다. 미안한 말씀은 형용하기 어렵사오며, 충분히 의견을 교환하고 좋은 말씀을 듣지 못한 것도 여간 유감이 되지 않습니다. 그날 밤 백선생도 늦게야 한강에서 들어오셔서 같이 자면서 간접으로나마 동혁씨를 소개하였더니 좋은 동지라고 꼭 한번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토요일 저녁마다 농촌 운동에 뜻을 둔 청년 남녀들이 모여서 토론도 하고 간담도 하는 모임이 백 선생 댁에서 열리는데 돌아오는 토요일에 올라오셔서 참석하시면 백 선생은 물론이고요, 여러 회원들이 여간 환영을 하지 않겠습니다. 꼭 올라와 주실 줄 믿사오나 엽서로라도 미리 회답을 하여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동혁은 두 번 세 번 읽으며 편지를 손에서 놓을 줄 몰랐다.

 

영신은 그날 밤 그가 숭배하는 백씨에게 백 퍼센트로 동혁을 소개하였다. 어쩌면 동혁이가 영신에게 대한 것보다 그 이상으로 '박동혁'이란 인물의 첫인상이 깊었는지도 모른다.

 

그 구리빛같은 얼굴…황소처럼 건장한 체격…거기다가 조금도 꾸밀 줄은 모르면서도 혀끝으로 불길을 뿜어내는 듯한 열변…그리고 비록 처음 만났으나마 어두운 길거리로 제 뒤를 따라다니며 보호해 주면서도, 조그마치도 비굴하거나 지나친 친절을 보이지 않던 그 점잖은 몸가짐…

 

영신이가 입에 침이 말라서 동혁의 외모와 행동을 그려내니까, 백씨는,

 

“오우 그래? 온 저런. 매우 좋은 청년이로군.”

 

하고 서양 여자처럼 연방 감탄사를 늘어 놓았다.

 

그는 팔베개를 하고 자리 위에 비스듬히 누워 곁눈길로 흘끔흘끔 영신의 눈치를 살피더니,

 

“아아니, 영신이가 대번에 그 남자한테 홀딱 반한 게 아냐?”

 

하고 거침없이 한 마디를 하고 사내처럼 껄껄껄 웃는다.

 

영신의 얼굴은 금새 주황물을 끼얹은 것처럼 빨개졌다. 머리를 폭 수그린 채,

 

“아이 선생님도…”

 

하고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능갈친 백씨는 나이찬 처녀의 마음 속을 뚫고 들여다보는 듯이,

 

“그렇지? 별안간 앙가슴 한복판에 화살이 콱 들어와 박힌 것 같지? 난 못 속이지, 난 못 속여.”

 

하고 사뭇 놀려댄다. 영신은 그렇지 않다는 표시를 하느라고 억지로 얼굴을 쳐들며,

 

“제가 그렇게 경솔한 여잔 줄 아세요?”

 

하고 가벼이 뒤받듯하였다. 그러면서도 고개는 다시금 부끄러움에 눌려, 익은 곡식의 이삭처럼 저절로 수그러진다. 백씨는 한참이나 쌍꺼풀이 진 커다란 눈을 꿈벅꿈벅하며 무엇을 생각하다가, 손등으로 하품을 누르면서,

 

“그렇지만, 지금 와서 맘에 맞는 남자가 나타났더라도…”

 

하고는 주저주저하더니,

 

“벌써 약혼해 논 사람은 어떻게 하려누?”

 

하고 혼잣말 하듯 하며 돌아 누워버렸다.

 

…영신은 사흘 뒤에 동혁의 답장을 받았다. 제 모양과 같이 뭉툭한 철필 끝으로 꾹꾹 눌러 쓴 글발은 굵다란 획마다 전기가 통해서 꿈틀거리는 듯 피봉을 뜯는 영신의 손은 가늘게 떨렸다.

 

'주신 글월은 반가이 받았습니다. 그날 저녁에 실례한 것은 이 사람이었소이다. 남자끼리였으면 하룻밤쯤 새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영신 씨의 사정을 보느라고 충분히 이야기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나 같은 사람을 그러한 의미 깊은 모임에 청하여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오는 토요일에는 교우회의 책임 맡은 것이 있어서 올라가지 못하니 미안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토요일에는 경성운동장에서 '법전'과 축구시합이 있어서 올라가게 되는데, 시합이 끝나면 시간이 늦더라도 백 선생 댁으로 가겠으니, 그때 반가이 뵙겠습니다.'

 

하는 사연이었다.

 

영신은 그 편지를 백씨에게까지 가지고 가서 보이고 침상 머리의 일력을 하루에 몇 번씩 쳐다보면서 그 다음 토요일이 달음박질로 돌아오기만 고대하였다.

 

시합하는 날, 동혁은 연습할 때와는 딴판으로 컨디션이 매우 좋았다. 신문사 같은 데서 후원을 하는 것도 아니요, 아직도 늦더위가 대단해서 그런지 넓은 운동장에 구경꾼은 반쯤밖에 안 찼다. 중학교끼리 대항을 하는 야구와도 달라서 응원도 매우 조용하게 진행이 되었다.

 

전반전까지는 골키퍼인 동혁이가, 적군이 몰고 들어와서 쏜살같이 들이지르는 볼을 서너 번이나 번갯불처럼 집어던지고 그 큰 몸뚱이를 방패삼아서 막아내고 한 덕으로 승부가 없다가, 후반에 가서는 선수 중에 두 사람이나 부상자가 생긴데 기운이 꺾여서 고농이 세 골이나 졌다.

 

그러나, 최후까지 딱 버티고 서서 문을 지키다가 볼을 막아 내치는 동혁의 믿음성 있고 민활한 동작에는 박수를 보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동혁은 풀이 죽은 다른 선수들과 섞여서 운동장으로 나왔다. 나오다가, 정문 곁에 비켜서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두 여자를 발견하였다.

 

“구경 오셨어요?”

 

동혁은 발을 멈추며, 뜻밖인 영신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 곁에 초록색 양장을 하고 서서 저를 주목하는 나이가 한 사십이나 되어 보이는 여자를 보자, '백현경이로구나' 하고 즉각적으로 깨달았다. 영신은 가벼이 답례를 한 뒤에,

 

“중간에 왔지만, 참 썩 잘 막아내시더군요.”

 

하고 흙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땀으로 뒤발을 한 동혁의 몸과 얼굴을 훑어보면서,

 

“백 선생님하고 인사하시죠.”

 

하고 양장 부인을 소개한다. 백씨는 동혁이가 모자를 벗을 사이도 없이 다가서며,

 

“오우, 미스터 박!”

 

하고 손을 내민다.

 


 

동혁은 같이 나오던 선수들이 흘끔흘끔 돌아다보고, 무어라고 수군거리며 전차길로 건너가는 것을 보면서 흙투성이가 된 운동복 바지에다, 얼른 손바닥을 문지르고 백씨의 악수를 받았다.

 

“박동혁이올시다. 백 선생의 선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하고 체수에 걸맞지 않게 수줍어한다. 백씨가,

 

“아, 이 미스 채가 자꾸만 구경을 가자구 졸라싸서…”

 

하고 돌아다보니까, 영신은,

 

“아이, 선생님도… 제가 언제 졸랐어요?”

 

하고 백선생의 말끝을 문지르며 살짝 흘겨본다.

 

“아뭏든 아주 파인플레이를 보여 주셔서 여간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하는 백씨의 칭찬에,

 

“천만에요, 두 분이 오실 줄 알았더면 꼭 이길 걸 그랬습니다.”

 

하고 동혁은 허연 이를 드러내며 운동 선수다운 쾌활한 웃음을 웃어 보인다. 그때에 먼저 전차를 탄 선수들이 승강대에서,

 

“여보게 동혁이…”

 

하고 소리를 지르며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한다. 동혁은,

 

“가네, 가!”

 

하고 손을 들어 보이자, 영신이가 다가서며,

 

“이따가 꼭 오시죠? 시간은 일곱 시야요.”

 

하고 재빨리 묻는다. 동혁은,

 

“네, 가겠습니다.”

 

한 마디를 던지듯하고, 백씨에게는 인사도 할 사이가 없이 전차 길로 달려가더니, 속력을 놓기 시작한 전차를 홱 집어탔다. 전차가 지나간 뒤에는 두 줄기 선로만 영신의 눈이 부시도록 석양을 반사하였다.

 

동혁은 약속한 시간에 거의 일 분도 어김없이 백씨의 집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목욕을 하고 교복으로 갈아입고 와서, 중문간까지 나갔던 이 집의 주인은 그를 얼른 알아보지 못하다가,

 

“어서 들어오세요. 난 누구시라구요. 시간을 썩 잘 지켜 주시는군요.” 하고 팔뚝 시계를 보고 너스레를 놓으며, 동혁을 반가이 맞아들인다.

 

“댁이 훌륭한데요.”

 

하고 동혁은 두리번거리며 집안을 둘러본다.

 

삼천 원이나 들여서 새로 지었다는 집은 네 귀가 반짝 들렸는데, 서까래까지 비둘기장처럼 파란 페인트칠을 하였고, 분합마루 유리창에는 장미꽃 무늬가 혼란한 휘장을 늘여 쳤다. 마당은 그다지 넓지 못하나 각색 화초가 어우러져 피었는데, 그 중에도 이름과 같이 청초한 옥잠화 두어 분은 황혼에 그윽한 향기를 풍긴다.

 

먼저 온 회원들은 응접실로 쓰는 대청에 모여서 혹은 피아노를 눌러 보고, 혹은 백씨가 구미 각국으로 시찰과 강연을 하러 다닐 때 박은 사진첩을 꺼내 놓고 둘러앉았다.

 

그가 여류 웅변가요, 음악도 잘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 집에 피아노까지 있을 줄은 몰랐고, 독신으로 지내는 여자가 이러한 문화주택을 짓고 지낼 줄은 더구나 상상 밖이었다.

 

그는 대청으로 올라가서, 주인의 소개로 칠팔 명이나 되는 젊은 여자들과 인사를 하였다. 여자들은 입 속으로만 제 이름을 대서 하나도 기억은 할 수 없다. 남자 회원은 아직 한 사람도 안온 모양인데 웬일인지 안내역인 영신은 그림자도 나타내지를 않는다.

 

'그저 안 왔을 리는 없는데…' 동혁은 매우 궁금하기는 하나, 이 구석 저 구석 기웃거리며 찾을 수도 없고, 채영신이는 왜 보이지를 않느냐고 누구더러 물어보기도 무엇해서, 한 구석 의자에 걸터앉아서 분통같이 꾸며 놓은 마루방 치장만 둘러보았다.

 

백씨가 조선옷으로 갈아 입고 나오는데, 반쯤 열린 침실이 언뜻 눈에 띠었다. 유리같은 양장판 아랫목에는 새빨간 비단 보료를 깔아 놓았고, 그 머리맡의 자개 탁자는 초록빛의 삿갓을 씌운 전등이 지금 막 들어와서 으스름달처럼 내리비친다.

 

여자의, 더구나 독신으로 지내는 여자의 침실을 들여다보는 것이 실례인 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주인이 제가 앉은 바로 맞은 쪽의 미닫이를 열고 드나들기 때문에 자연 눈에 띠는 데야 일부러 고개를 돌릴 까닭도 없었다.

 

동혁은 그와 똑같이 으리으리하게 치장을 해 놓은 방이 그 웃간에도 또한 이간쯤이나 엇비슷이 들여다보이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왜들 얘기도 안하고 있어요? 자, 이것들이나 들으면서 우리 저녁을 먹읍시다.”

 

하고 귀중품인 듯 빨간 딱지가 붙은 유성기판을 들고 나오는데, 그 등뒤를 보니까 웃목에 반간통이나 되는 체경이 달려 있다. 동혁은 속으로 '오오라, 체경에 비쳐서 또 다른 방이 있는 것 같은 걸 몰랐구나, 기생방이면 저만큼이나 차려 놨을까' 하면서도, 은근히 영신이를 기다리느라고 고개를 대문편으로 돌리곤 한다. 그러자,

 

“아 이건 별식을 한다고 저녁을 굶길 작정야?”

 

하고 백씨가 분합 끝으로 나서며 외치니까,

 

“네, 다 됐어요.”

 

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부엌 속에서 나더니, 뒤미처 에이프런을 두른 영신이가 양식 접시를 포개 들고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나온다. 동혁이가 온 줄은 벌써 알았지만 음식을 만들다 말고 내달아 번잡스러이 인사를 하기가 싫어서 이제야 나온 것이다. 동혁은 영신과 눈이 마주쳐 '오, 부엌 속에 있었구나' 하면서 말 대신 웃음을 띠우고, 머리만 숙여 보인다.

 

유성기를 틀어 오케스트라(交響樂)를 반주 삼으며, 여러 사람은 영신이가 만든 라이스카레와 오믈렛 같은 양식을 먹으면서 이야기판이 벌어졌다.

 

이야기판이 벌어졌대도, 영신은 이 집의 식모와 함께 시중을 드느라고 부엌으로 들락날락하고, 농민수양소(農民修養所) 여자부에서 초대를 받아 온 시골학생들은 처음으로 먹는 양식을 잘못 먹다가 흉이나 잡힐까 보아 포오크를 들고 남의 눈치들만 보는데, 백씨 혼자서 떠들어댄다.

 

동혁과 영신을 번갈아 보면서, 그 동안에 몇십 번이나 곱삶았을듯한 정말(덴마크)의 시찰담으로부터 구미 각국의 여성들의 활동하는 상황 같은 것을 풍을 쳐가며 청산유수로 늘어놓았다.

 

청년회의 농촌지도부(農村指導部) 간사로 있는 얼굴이 노란 김씨라는 사람이 늦게야 참석을 해서 인사를 하였을 뿐이요, 남자는 단 두 사람이라, 동혁은 잠자코 제 차례에 오는 음식만 퍼넣듯하고 앉았다.

 

영신이가 모박아서 두둑이 담아 준 라이스카레 한 접시를 게눈 감추듯 하고는 점직하니 앉았는 동혁을 보고 백씨는,

 

“여봐 영신이, 이 미스터 박은 한 세 그릇 자셔야 할 걸.”

 

하고 더 가져오라고 눈짓을 한다. 영신은 저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 듯이 카레 건더기를 담은 것을 남비째 들고 들어와서,

 

“첫 번 솜씨가 돼서 맛은 없지만, 남기시면 안돼요.”

 

하고 귓속말하듯 한다. 동혁은,

 

“허, 이건 나를 밥통으로 아시는군요.”

 

하며 이 집에 와서 처음으로 영신이와 말을 주고 받았다.

 

식사가 끝난 뒤에는 차가 나오고 실과가 나왔다.

 

백씨는 잠시도 입을 다물 사이가 없이 '우리의 살 길은 오직 농촌을 붙드는 데 있다'는 것과 '여러분들과 같은 일꾼들의 어깨로 조선의 운명을 짊어져야 한다'는 등 열변을 토한다.

 

여러 사람들이 매우 감동이 된 듯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보고, 백씨는,

 

“미스터 박, 그동안 많이 활동을 하셨다니 그 얘기를 좀 들려주시지요. 많은 참고가 될 줄 믿습니다.”

 

하고 농촌 운동에 관한 감상을 묻는다. 동혁은,

 

“나는 여러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왔으니까요…”

 

하고 사양을 하여도, 무슨 말이든지 해달라고 굳이 조르다시피 하니까, 동혁은 못이기는 체하고 찻잔을 입에서 떼며, 뒤통수를 긁적긁적하더니,

 

“그럼 한 마디 하지만, 들으시기가 좀 거북하실는지도 모를 껄요.”

 

하고 뒤를 다진다.

 

“온 천만에, 좋은 말은 귀에 거슬리는 법이라는데요.”

 

사교에 능란한 백씨라, 낯을 조금 붉히는 듯하면서도 그만한 대답쯤은 예사로 한다. 동혁은 실내의 장식과 여러 사람의 얼굴을 다시 한번 둘러 본 뒤에,

 

“나는 뒷구멍으로 남의 흉을 본다든지 당자가 듣지 않는데 뒷공론을 하는 걸 싫어하는 성미예요.”

 

하고 화두를 꺼내더니 목소리를 떨어뜨려,

 

“이런 모임이 고적하게 지내는 백 선생을 가끔 위로해 드리는 사교적 회합이라면 모르지만 농촌을 지도할 분자들이 장래에 할 일을 의논하려는 모임 같지는 않은 감상이 들었어요.”

 

하고 눈도 깜짝거리지 않고 쳐다보는 영신을 향해서 말하듯이,

 

“나는 이런 정경을 눈앞에 그려보고 있었는데…들판의 정자라고 할 수 있는 원두막에서 우리들이 모였다고 칩시다. 몇 사람은 밭으로 내려가서 단내가 물큰하고, 코를 찌르는 참외나, 한아름이나 되는 수박을 둥둥 두드려 보고는 꼭지를 비틀어서 이빨이 저리도록 찬 샘물에다가 흠씬 담가 두거든요. 그랬다가 해가 설핏할 때 그놈을 꺼내설랑 쩍 뻐개 놓고는 삥 둘러앉아서 어적어적 먹어가며 얘기를 했으면, 아마 오늘 저녁의 백 선생이 하신 말씀이 턱 어울릴 겝니다.”

 

하고 의미 깊게 듣는 듯이 고개만 끄덕여 보이는 주인을 흘낏 본다. 영신은,

 

“아이, 말만 들어도 침이 괴네.”

 

하고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듣는 어린애처럼 다가앉는다. 동혁은 물끄러미 영신을 보다가, 말을 계속한다.

 


 

“석양판에 선들바람이 베옷 속으로 스며들 적에, 버드나무의 매미 쓰르라미 소리가, 피아노나 유성기 소리보다 더 정답고 깨끗한 풍악소리로 들려야 하겠는데… 어째 오늘 저녁엔 서양으로 유람이나 온 것 같은 걸요.”

 

하고 시침을 딱 갈기고 한 마디 비꼬아 던지는 바람에, 백씨는 그만 자존심을 상한 듯 동혁과는 외면을 한 채,

 

“그야 도회지에서 살게 되니까 외국 사람하고 교제관계도 있어서 자연 남 보매는 문화생활을 하는 것 같겠지요. 그렇다고 내가 그런 시골 취미를 모르는 줄 아시면 그건 큰 오핸걸요.”

 

하고 변명 비슷이 한다. 동혁은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던 것처럼,

 

“취미요? 시골 경치에 취미를 붙인다는 것과 농민들과 똑같은 생활을 해 가면서 우리의 감각까지 그네들과 같아진다는 것과는 딴판이 아닐는지요? 값비싼 향수나 장미꽃의 향기를 맡아 오던 후각(嗅覺)이, 거름구덩이 속에서 두엄 썩는 냄새가 밥 잦히는 냄새처럼 구수하게 맡아지게까지 돼야만, 비로소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생길 줄 알아요. 농촌 운동자라는 간판을 내걸은 사람의 말과 생활이, 이다지 동떨어져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나서, 동혁은 제가 한 말이 좀 과격한 듯해서,

 

“반드시 백 선생더러만 들으시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지만 농촌 운동일수록 무엇보다 실천이 제일일 줄 알아요. 피리를 부는 사람 따로 있고, 춤을 추는 사람이 따로 있던 시대는 벌써 지났으니까요. 우리는 피리를 불면서 동시에 춤을 추어야 합니다. 요령을 말씀하면, 우리는 남의 등뒤에 숨어서 명령하는 상관이 되지 말고 앞장을 서서 제가 내린 명령에 누구보다 먼저 복종을 하는 병정이 돼야만 우리의 운동이 성공하겠단 말씀입니다.”

 

이 말을 하기에 동혁은 이마에 땀을 다 흘렸다. 그 동안 백씨는 몇 번이나 얼굴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하다가, 무슨 생각에 잠긴 모양인데, 영신은 눈을 내리감고 앉았으나 동혁이가 말 구절마다 힘을 들일 때는 무엇에 꾹꾹 찔리는 것처럼 어깨와 젖가슴이 움직이는 것을 동혁은 정면으로 보았다.

 

백씨가 자기의 변명을 기다랗게 늘어놓으려는 기세를 살피고, 동혁은 기둥에 걸린 뻐꾸기 시계를 쳐다보더니,

 

“기차 시간이 돼서, 고만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일어선다. 백씨는 형식적으로

 

“왜 어느 새…”

 

하고 붙잡는 체하는데, 영신이도 시계를 쳐다보더니,

 

“참 저도 가야겠어요.”

 

하고 따라 일어선다.

 

두 사람은 큰 길로 나왔다. 상기가 되었던 뺨을 스치는 밤바람이 여간 시원하지가 않다.

 

“우리 산보나 할까요?”

 

“기차 시간이 되지 않았어요?”

 

“오늘 못 가면 내일 첫차로 가지요. 하룻밤쯤 새우는 건 문제 아니지요. 영신씨가 또 쫓겨나실까봐서…”

 

“전 괜찮아요. 쫓겨나면 고만이죠.”

 

영신은 동혁이가 또 그대로 뿌리치고 갈까 보아 도리어 겁이 났던 판이라 '어디로 갈까'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그럼 목도 마른데 악박골로 가서 약물이나 마실까요?”

 

하고 독립문 쪽을 향해서 앞장을 선다.

 

“참, 악박골이 영천이라고도 하는 덴가요?”

 

“여태 한 번도 못 가 보셨어요?”

 

“온, 시골뜨기가 돼서…”

 

“누군 시골 사람이 아닌가요. 우리 고장은 옛날에 서울 양반들이 귀양살이나 하러 오던 동해변의 조그만 어촌인데요. 동혁씨의 고향은 저번에 소개를 해 주셔서 잘 알았지만, 거기도 어지간히 궁벽한 데더군요.”

 

두 사람은 천천히 걸어가면서, 서로 자기네 고향의 풍경과 주민들의 생활하는 형편을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버스는 그친 지도 오랜 듯, 큰길 양옆의 가게는 빈지를 닫기 시작한다. 독립문을 지나 서대문 감옥 앞 넓은 마당까지 오니까 전등불이 건성드뭇해지고, 오고 가는 사람도 드물어서 어두운 골목속으로 드나드는 흰 옷자락만 희뜩희뜩 보일 뿐.

 

떠오른지 얼마 안되는 하얀 달은 회색빛 구름속에 숨었다가는 흐릿한 얼굴 반쪽을 내밀고, 감옥의 높은 담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악박골 물터 위의 조그만 요리집에서는 장구소리와 함께 노래가락이 흘러나온다. 건달패와 논다니들이 어우러져서 약물이 아닌 누룩 국물을 마시고 그 심부름을 하는 모양이다.

 

동혁은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돈 십 전을 주고, 약물 한 주전자와 억지로 떠맡기는 말라빠진 굴비 한 마리를 샀다.

 

“온, 샘물을 다 사먹는담.”

 

하고 한 바가지를 철철 넘치도록 따라서 영신에게 권한다.

 

“주전자 꼴하고 약이 되기는커녕 배탈이 나겠어요.”

 

하면서도, 한창 조갈이 심하던 판이라, 둘이 번 차례로 한 사발씩이나 벌떡벌떡 마셨다. 물이야 정하나마나 폭양에 운동을 한데다가 한여름 동안 더위에 들볶이던 오장은 탄산수를 마신 것처럼 쏴아하고 씻겨 내려가는 것 같은데, 골 안으로 스며드는 밤 기운에 속적삼에 배었던 땀이 식어서 선뜩선뜩 할 만큼이나 서퇴가 되었다.

 

두 사람은 으슥한 언덕 밑 바위 아래에 손수건을 깔고 앉았다. 등뒤 송림 속에서 누군지 청승맞게 단소를 부는 소리가 들린다. 영신은 한참이나 말없이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감옥 속에 갇힌 사람이 자다 말고 저 소릴 들으면 퍽 처량하겠어요.”

 

하고 얼굴을 든다. 구름을 벗어난 창백한 달빛은 고향 생각에 잠겼던 그의 얼굴을 씻어 내린다.

 

“참,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군요.”

 

동혁이도 약간 애상적인 감정에서 눈을 번쩍 뜨며 혼잣말 하듯 한다.

 

“왜요?”

 

영신의 눈은 동그래졌다.

 

“몇주일 전까지는 백판 이름도 모르던 우리가 이렇게 한 자리에 앉아서, 약물터의 달을 똑같이 쳐다볼 줄이야 꿈이나 꾸었겠어요?”

 

“참요, 이것도 하나님의 뜻인가 봐요.”

 

“참, 영신 씨는 크리스찬이시지요?”

 

“전 어려서부터 믿어 왔어요. 왜 동혁 씨는 요새 유행하는 마르크스주의자세요?”

 

“글쎄요. 그건 차차 두구 보시면 알겠지요. 아뭏든 신념을 굳게 하기 위해서나 봉사의 정신을 갖기 위해서는 신앙 생활을 하는 것도 좋겠지요. 그렇지만, 자본주의에 아첨을 하는 그따위 타락한 종교는 믿고 싶지 않아요.”

 

하다가 영신이가 무어라고 질문을 할 기세를 보이니까,

 

“종교 문제 같은 건 우리 뒀다가 토론하십시다. 그보다 더 중요한 얘기가 있으니까요.”

 

하고 동혁은 손을 들어 미리 영신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그리고는 눈을 딱 감고 한창이나 이슬에 젖은 숲 속의 벌레소리를 듣고 있더니,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하고 웅숭깊은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간담회 석상에서 영신씨가 하신 말씀을 듣고 감복을 했지만, 내가 농촌의 태생이면서도 여러 해 나와 있다가, 직접 농촌 속으로 들어가 보니까, 참말 그네들의 사는 형편이 말씀이 아니예요. 신문이나 잡지에서 떠드는 것보다 몇 곱절 비참하거든요.”

 

하고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가 마른 침을 삼키더니 오래 전부터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난 자진해서 학교를 퇴학하고 싶어요.”

 

하고는 다시금 잠긴다. 숲 속에서 반득이는 반딪불을 들여다보며 동혁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영신은, 얼굴을 번쩍 들며,

 

“왜요? 일 년 반만 더 다니시면 졸업을 하실 텐데요?”

 

하고 놀라운 듯 눈을 크게 뜬다.

 

“고만 둘 수밖에 없어요. 중학교 때엔 억지를 쓰고 별별 짓을 다 해 가면서 고학을 했지만, 나 하나 공부를 시키려고, 아버지는 올 봄까지 대대로 내려오던 집 앞 논까지 거의 다 팔으셨에요. 졸업만 하면 큰 수나 날 줄 알고, 계량할 것도 안 남기신 모양인데, 내가 졸업이라고 한댔자 바로 취직도 하기 어렵지만, 무슨 기수(技手)라는 명색이 붙는대야 월급이라곤 고작 사오십 원밖에 안될 테니 그걸 가지고 객지에서 물 밥 사 먹어가며, 양복 해 입고 소위 교제비까지 써 가면서 수다한 식구를 먹여 살릴 수가 있겠어요? 되려 빚만 자꾸 지게 되지요?

 

그러니까 나머지 땅마지기나 밭날갈이를 깡그리 팔아 없애고서, 거산을 하게 되기 전에 하루바삐 집으로 돌아가서 넘어진 기둥을 버티고 다시 일으켜 세울 도리를 차려야겠어요. 까딱하면 굶어죽게 될 형편이니까요.”

 

“…”

 

영신은 동혁의 사정도 딱하거니와 그만 못지 않게 말이 아닌 저의 집의 형편을 생각하느라고 말 대답도 안하고 있다가, 한참만에야 한숨을 섞어,

 

“제 사정은 백 선생밖에는 아무한테도 말한 적이 없어요. 홀로 되신 우리 어머니는 육십 노인이 딸 하나 공부를 시키느라고 입때 생선 광주리를 이고 댕기세요. 올 여름엔 더위를 잡숫고 길바닥에 쓰러지신 걸, 동네 사람들이 업어다가 눕혀 드렸어요. 그렇건만 약 한 첩 변변히…”

 

그는 그만 목이 메었다가, 간신히 입술을 떨며,

 

“정신을 잃으신 동안에 어느 몹쓸 놈이 푼푼이 모아 넣으신 돈주머니를 끌러 가서, 그게 원통해 밤새도록 우시는데…”

 

하고, 영신은 가슴속으로부터 치밀어오르는 울음을 참느라고 잇자국이 나도록 손가락을 깨문다.

 

동혁은 몹시 우울해졌다.

 

가슴이 턱 막힌 듯이 갑갑해서 더운 입김을 후하고 내뿜는다. 숲 속의 벌레소리도, 바위 틈으로 졸졸졸 흘러내리는 샘물 소리도 두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 동혁은 '내가 공연히 그런 소리를 끄집어냈구나'하고 바로 정수리 위에서 황금빛으로 반짝이며 내려다보는 유난히 큰 별을 원망스러이 쳐다보다가 영신의 앞으로 다가앉으며,

 

“자, 우린 그런 생각은 고만하십시다. 어쨌든 우리는 명색 전문학교까지 다녀 보니까, 여간 행복된 사람들이 아니지요.”

 

하고 목소리 부드러이 영신을 위로한다.

 

“참말 공부니 뭐니 다 집어치고, 시골로 내려가야겠어요.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서울 와서 나 혼자 편안히 지내는 게 어머니께나 동리 사람들한테까지 큰 죄를 짓는 것 같아요. 첨엔 멋도 모르고서, 무슨 성공을 하고야 내려간다고 하나님께 맹세까지 하고 올라왔지만요…더군다나 아까 백 선생댁에서 하신 말씀을 듣고, 이제까지 지내온 걸 여간 뉘우치지 않았어요.”

 

그 말을 듣자, 동혁은 벌떡 일어섰다. 양복바지에다가 두 손을 찌르고 거의 궐연 한 개를 태울 동안이나 왔다갔다 하며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영신의 앞으로 다가서며,

 

“영신씨!”

 

하고 힘차게 부른다.

 

“우리들이 이렇게 만나서, 한 십 년이나 사귄 동지처럼 가슴을 터놓고 하룻밤을 새운 기념을 우리 영원히 남기십시다.”

 

하고 중대한 동의를 한다.

 

“어떻게요?”

 

영신의 눈은 별빛에 새파랗게 빛난다. 동혁은 버썩 대들어 그 소댕같은 손으로 서슴치 않고 여자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며,

 

“우리 시골로 내려갑시다! 이번 기회에 공부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서, 우리의 고향을 지키러 내려갑시다! 한 가정을 붙든다느니보다도 다 쓰러져 가는 우리의 고향을 붙들기 위한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 자 용기를 냅시다! 그네들을 위해서 일을 하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선구자로서의 기쁨과 자랑만은 남겠지요.”

 

영신이가 무엇에 아찔하게 취한 듯이 눈을 내리감고 있는 것은 불시에 두 방망이질을 하는 심장의 고동을 진정하려 함이다. 그는 마주 일어서서 영신에게 으스러지도록 잡힌 손에 힘을 주며,

 

“고맙습니다! 당신 같으신 동지를 얻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영신은 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어느덧 인왕산 너머로 기울어 가는 달빛 아래서 두 남녀의 마주 쏘아보는 네 줄기 시선은 비상한 결심에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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