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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방정환(方定煥, 1899-1931) : 호 소파(小波). 서울 출생.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고 보성전문(普成專門)을 마친 후 일본 도요(東洋)대학 철학과를 수학했다. 최초의 아동문화운동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고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신청년> <신여성> <학생> 등의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동화대회, 소년문제 강연회, 아동예술 강습회, 소년지도자대회 등을 주재, 계몽운동과 아동문화운동에 앞장섰다. 창작동화와 번역·번안 동화와 수필과 평론을 통해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을 하였다. 1940년 <소파전집(小波全集)>을 간행하고, 광복 후 조선아동문화협회에서 <소파 동화독본> 5권을 펴냈다. 새싹회에서는 '소파상(小波賞)'을 제정하여 해마다 수여하고 있다.

 

[작품 소개]

첫 부분에서 서술형 구조가 아닌 구술형(narrative) 구조를 이용한 것이 특이하다. 하지만 이런 구조가 특별히 이야기 전개나 형식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솝우화에서 따온 것이 명백한 소재이지만 나름대로 우리나라 현실에 존재하는 은진미륵 이야기로 대입한 것에서 작가가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정서와 삶의 조건을 신중하게 고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다리던 설이 와서 기뻤습니까? 여러분! 과세(過歲)나 잘들 하셨습니까? 이번 새해는 쥐의 해니까 이번에는 특별 히 쥐에 관계 있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니 조용하게 앉아서 들으셔요.

 

저 충청도 은진(恩津)이라는 시골에 은진미륵이라는 굉장히 큰 미륵님이 있습니다. 온몸을 큰 바위로 깎아 만든 것인데, 키가 육십 척 칠 촌이나 되어서 하늘을 찌를 듯이 높다랗게 우뚝 서 있습니다.

 

그 은진미륵님 있는 근처 땅 속에, 땅두더지 내외가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데, 딸의 얼굴이 어떻게나 예쁘고 얌전하게 생겼는지, 이 넓은 세상에 내 딸보다 더 잘생긴 얼굴 이 또 있을까 싶어서,

 

‘이렇게 천하 일등으로 잘생긴 딸을 가졌으니, 사위를 얻되 역시 이 세상 천지 중에 제일 높고 제일 웃자리 가는 것을 고르고 골라서 혼인을 시키리라.’

 

하고 늘 그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 저 친구 아무나 만나는 대로 붙잡고는 이 세상에서 제일 첫째가게 잘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모두,

 

“그야, 이 세상에 저 파란 하느님이 제일이지요. 하느님보다 더 높고 잘난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래서 땅두더지 영감은 보통이를 짊어지고 지팡이를 짚어가며 하느님께로 갔습니다. 먼저 딸 잘생긴 자랑을 하고 나서,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제일 높으신 어른이시니 제 딸과 혼인하시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러나 파란 두루마기를 입으신 하느님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아니 아니, 이 세상에는 나보다도 더 잘난 것이 있다네. 해님께로 찾아가게. 해님이야말로 이 세상을 자기 뜻대로 환히 밝은 낮도 되게 하고 캄캄한 밤도 되게 하니 그보다 더 잘난 것이 어디 있겠나?”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딴은 해님이 이 세상에서 제일이겠으므로, 두더지 영감은 하느님께 하직하고 다시 지팡이를 짚고 해님께로 찾아가서 딸 잘생긴 자랑을 한 다음 딸과 혼인하는 것이 어떠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해님이 하는 말이,

 

"말을 들으니 고맙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잘난 것이 있다네. 내가 아무리 세상을 밝히려고 해도 구름이 와서 내 앞을 가리면 내 힘으로는 도저히 당할 수가 없으니, 구름은 확실히 나보다 잘난 것이 아니겠나. 구름에게로 가서 혼인을 청하는 것이 좋을걸세.”

 

 


 

 

하였습니다. 딴은 그럴 듯싶습니다. 해님이 아무리 잘났더라도구름을 만나기만 하면 아주 숨어버리고 마는 것을 보아도 구름이 더 잘난 것이 확실한데,구름하고 혼인을 하자니 구름은 원래 정처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것이라, 그 귀여운 딸을 주기에 섭섭하기는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것을 골라 사위 삼으려는 마음이 간절한 그는 그 길로 구름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때 구름은 성난 얼굴로 우르릉우르릉 하고 천둥소리를 지르면서 비를 자꾸 뿌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두더지 영감이 야단이나 맞지 않을까 하고, 속으로 겁을 내면서 간신히 혼인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

 

“하느님보다 해님이 더 잘난 이인데, 당신은 해님보다도 또 더 잘난 양반이기 때문에 찾아왔으니 제 딸하고 혼인을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더니 구름은 비를 뿌리던 것을 멈추고, 두더지 쪽으로 돌아앉기에 두더지는 허락하는 줄 알 고 기뻐했습니다. 그랬더니 구름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야,그까짓 해쯤이야 내가 우습게 여기지만, 나보다도 더 잘난 놈이 있다네. 내가 이렇게 해를 숨겨 버리고 비를 많이 뿌려서 세상이 모두 비에 떠내려가게 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저 바람이란 놈만 만나면 그만 슬슬 쫓겨 나게 되네그려.

 

자네도 보지 않았나? 구름이 암만 많이 쌓여 있어도 바람이란 놈이 오기만 하면 그만 슬슬 몰려서 산산이 흩어져 버리고 마는 것을. 바람이 나보다 몇 갑절 더 나으니 바람에게로 가게. 바람은 반드시 혼인할걸세.”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두더지 영감 생각에도 그럴 듯 싶어서, 저기서 바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바람이 와서 구름을 다 쫓은 후에 혼인 이야기를 건네었습니다. 거만스럽고 사나운 줄 알았던 바람은 그리 거만하거나 사납지도 않고 부끄러운 듯이 수줍어하는 얼굴로,

 

“예, 사위를 삼으시겠다는 말씀은 대단히 고맙습니다만, 저보다도 더 잘난 것이 있어 걱정입니다. 제가 힘껏 불면 구름도 쫓겨 달아나고, 배도 파선이 되고, 나무도 부러져 달아나고, 안 쫓겨가는 놈이 없는데, 그중에 충청도에 있는 은진미륵님만은 영 꼼짝도 하는 법이 없습니다.

 

암만 내가 몹시 불어도 눈 하나 깜짝거리지 않지요. 나중에는 골이 나서 재채기질이나 하게 하려고 그 콧구멍 속으로 바람을 몹시 불어넣어도, 그래도 까딱 않고 웃는 얼굴 그대로 있습니다. 에 참, 어떻게 그렇게 장사인지 무서워요. 암만해도 그 미륵님이 없어지기 전에는 제가 세상에서 제일이란 말은 못 하겠습니다.”

 

고 하였습니다. 딴은 그 말을 들으니 바람보다도 자기 시골에 서 있는 미륵님이 더 잘나기는 하였는데, 이제 두더지 영감은 고단하여서 몸이 지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허덕허덕 지광이를 짚고 자기 시골로 돌아와서, 미륵님께로 간신히 갔습니다.

 

가서는 가진 말재주를 다하여 미륵님께 찾아온 말씀을 하고 제발 자기 딸과 혼인을 하여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자 그 큰 미륵님은 큰 눈을 딱 뜨고, 그 넓은 입을 딱 다물고 점잖게 듣고 있더니, 두더지 영감의 말이 간신히 끝난 후에야 천천히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으응, 자네 말이 그럴 듯하네. 나는 키도 크고 무서운 것도 없이 지내네. 해가 뜨거나 말거나, 어듭거나 밝거나, 춥거나 덥거나 걱정해 본 일이 없고, 또 구름이 항상 내 머리 옆을 지나다니지만, 그놈이 비를 뿌리건 천둥소리를 지르건 조금도 두렵거나 겁나는 일이 없었고, 또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와도, 콧구멍에 아무리 찬바람을 불어넣 어도 까딱한 일이 없으니, 내가 참말 이 세상에 제일은 제일일 걸세.”

 

하는 말을 듣고 두더지 영감은 그만 좋아서,

 

“예, 제일이고 말고요. 그러니 제 딸하고 혼인해 주시겠지요, 예? 혼인하시지요.”

 

하고 승낙하기를 독촉하였습니다. 미륵님은 천천히 또 말하기를,

 

“으응, 그런데 내게도 꼭 한 가지 무서운 놈이 있다네.”

 

하므로 두더지 영감은 눈을 부릅뜨고 바싹 다가앉으면서,

 

“무서운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어요?”

 

하고 조급히 물었습니다. 미륵님은 역시 천천히,

 

“그 꼭 한 가지 무서운 놈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 발 밑에 구멍을 파고 살고 있는 두더지 한 마리라네. 그놈이 호미 같은 발로 흙을 자꾸 후벼파고 있으니 어찌 겁이 나지 않겠나? 해도 무섭지 않고 구름도 바람도 무서워하지 않는 내가 그 두더지에게는 어떻게 당할 재주가 없으니 어쩐단 말인가. 

 

그놈이 그렇게 내 발 밑에 구멍을 자꾸 파 면, 나중에는 세상에 제일이라던 내 몸이 그냥 쓰러져 버리고 말 터이니, 그렇게 무섭고 한심스러운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아아, 참말이지 이 넓은 세상에 두더지처럼 무섭고 두더지보다 더 잘난 놈은 없는 줄 아네.”

 

하고 탄식하는 것을 보고 두더지 영감은,

 

‘이 세상에 제일 무섭고 제일 잘난 것은 역시 우리 두더지밖에 없구나!’

 

생각하고 곧 그 은진미륵님 밑에 산다는두더지를 찾아가 보니, 아주 젊디젊은 잘생긴 사내 두더지였습니다.

 

그래서 혼인 이야기도 손쉽게 이루어져서, 곧 좋은 날을 가려 혼인 잔치를 크게 차리고, 그 잘생긴 딸을 젊은 두더지에게로 시집 보냈습니다.

 

잔치도 즐겁고 재미있게 무사히 치르고, 이 젊고 잘생긴 두더지 신랑·색시는 복이 많아서 오래도록 오래도록 땅속에서 잘 살았답니다.

<어린이>1924년 1월호